소설리스트

34화 (34/81)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억수라고 하긴 오바지만, 바람이 제법 불어 그렇게 느껴졌다. 잔잔했던 최근 날씨에 비하면 오늘은 바람다운 바람이 불었다.

새벽 5시, 비 오고 바람 부는 이른 새벽 최삼락은 정 여사가 일러 준 주소지 근처로 차를 몰았다. 하필 이 시각, 이 날씨에 보자고 하는 게 영 마뜩잖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 여사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를 부른 장본인에게서 크고 좋은 차도 선물받은 마당이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했다.

“여가 맞나?”

삼락은 정 여사가 말했던 커다란 정비소를 지나 두 번째 골목으로 진입했다. 주택가 골목 끝자락에 2층 양옥집이 보였다. 그 맞은편에 차를 세운 삼락은 콘솔 박스에서 트로트 메들리 카세트를 찾아 넣은 다음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신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니 꺼림칙함이 누그러졌다.

열다섯 무렵부터 악단을 쫓아다녔던 삼락은 고단하지만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자부했다. 감옥에 있던 그 몇 년을 제하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다. 젊을 적에 숱하게 들었던 아지매 등쳐 먹는 제비 새끼라는 욕도 더는 듣지 않을 나이가 된 것이다.

마흔둘, 이제 밤무대 모창 가수 넘진이 아닌 최 사장님이란 소리가 듣고 싶었다. 정 여사라면 삼락을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 주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한 사람이었다. 그 약속의 증표로 이렇게 비싼 차도 선물해 주었다.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본새가 나는 법이다. 삼락은 고급 자동차 시트에 기댄 제 모습에 취해 있었다.

빗소리와 트로트가 이렇게 잘 어울렸던가. 깜빡 졸았다 깼더니 차 안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테이프가 멈췄다는 말은 30분이 지났다는 말이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침 6시가 가까워졌다.

삼락은 몸을 틀어 차창 밖 골목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여기서 만나자던 정 여사의 차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삐삐가 울렸다. 번호를 보니 정 여사였다.

“여가 으데라꼬 삐삐를 치노? 내 참.”

기분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었다. 삼락은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정비소로 향했다. 정비소 바로 앞에서 공중전화 박스를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역시 기억력 하난 기똥찼다. 삼락은 커다란 검은 우산을 쓰고 공중전화로 뛰어 들어갔다. 물웅덩이를 밟았는지 발 한쪽이 흠뻑 젖었다.

“에이 씨팔, 이기 머꼬?”

욕을 뱉으며 동전을 넣었다. 정 여사의 집으로 전화해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시간에 다른 약속이 있을 리 만무한데, 왜 굳이 음성을 넣었는지 몰랐다.

음성 속의 정 여사는 억수로 미안한 투로 사과부터 했다. 지금은 일이 있어서 그쪽으로 못 가니 오전 10시쯤 오성관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고 얘기했다. 사과의 의미로 근사한 저녁을 사 주겠다며 삼락을 살살 달랬다.

정 여사는 삼락보다 다섯 살 연상인데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최 사장님 이따 봐요’ 어설픈 서울 말씨. 음성은 끝이 났다.

“하! 이 여편네. 오라 가라 아주 사람을 잡네 잡아.”

아무리 성격 좋은 삼락이라도 짜증이 날 만한 상황이었다. 삼락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발이 젖었기 때문인지 오한이 들었다. 짧게 어깨를 떨고 다시 오성관으로 차를 몰았다. 연신 하품이 났다. 호텔로 가자마자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다.

밖이 점점 더 밝아졌다. 이런 날씨에도 일하러 가겠다고 새벽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자, 제가 뭐라도 된 양 목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오너드라이버는 멋지구나, 삼락은 속으로 이리 생각하며 조금 전 일었던 짜증을 몰아냈다.

***

수일은 아침 일찍 수술대로 향했다. 8시간 전부터 금식을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어차피 미음 말곤 먹은 것도 없어서 금식이란 말이 무색했다. 자다 일어난 눈은 퉁퉁 부어 반도 뜨지를 못했다.

수술실로 향하는 동안 불현듯 눈이 안 보이면 두산이 자신을 싫어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 수일의 눈이 예쁘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 눈 하나가 시력을 잃고 시간이 흘러 뿌옇게 변하면 두산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버려지는 게 무서웠다. 다른 눈 하나로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두산이 저를 싫어하면 살기 싫어질 것 같았다. 두산이라면 수일이 싫어져도 책임감으로 억지로 데리고 살려나. 수일은 두산에게 짐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코 수술을 하러 가면서 수일은 눈 생각만 했다.

수술실 앞에서 두산은 수일의 손을 꼭 쥐었다.

“내 여 바로 앞에 있으께. 잘하고 온나.”

“으.”

두산이 침대를 잡고 안 놔주는 바람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간호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산을 올려다보았다.

“보호자님, 지금 드가야 됩니다.”

“내 바로 앞에 있으께. 먼 일 있으면 부르고.”

“으.”

두산은 전신 마취인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마취 상태에선 죽어도 모를 것 같았지만, 수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몇 번 침대를 흔들어 보았지만 두산을 떨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보다 못한 다른 간호사가 침대를 잡고 있던 두산의 손을 억지로 떼 냈다.

두산이 침대를 따라오면서 수일아! 내 여 있다, 하고 외쳤다. 코 수술인데 두산이 저렇게 호들갑을 떠니 괜히 민망했다.

숫자를 거꾸로 세라고 했다. 10, 9, 8, 7….

탁!

수술대의 모든 조명이 수일에게 집중되었다. 수일은 그 환한 조명이 꼭 무대 조명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죽으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수일은 그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옛 숙소 앞에서 사진 찍던 그때로 돌아갔다. 아침 8시도 안 된 시각, 한참 꿈나라에 있던 막내 영수는 잠이 그득한 눈을 하고 팬티 바람으로 기어 나와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수일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부산스럽게 머리를 정돈하고 손바닥을 비벼 열을 내서 얼굴을 만졌다.

‘그래 안 해도 예쁘다.’

두산이 말했다. 수일은 용기를 내 두산의 허리를 안았다.

‘하나, 둘, 김치.’

수일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고, 두산도 마찬가지였다. 행복했다. 두산을 올려다보는 순간, 온 세상이 검게 변했다. 두산과 영수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수일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행님, 수일이 행님. 거 서서 머하노?’

저를 부르는 두산의 소리에 수일은 두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에헤이, 어데로 가노? 퍼뜩 들어 온나.’

‘어, 두산아. 근데 나… 앞이….’

수일은 울먹거렸다. 앞이 안 보였다. 너무 새카매서 무서웠다. 두산이 손을 잡아 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현관문 닫히는 소리만 들렸다. 사위에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무서우리만치 조용한 침묵이었다.

손을 허우적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분명 이쯤에 현관이 있었는데. 현관 아니면 벽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텅 비었다. 절벽이 있대도 수일은 모를 터였다. 다리가 달달 떨렸고,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윤수일 씨. 정신이 좀 드십니까? 윤수일 씨. 눈 좀 떠보이소.”

겨우 뜬 눈 사이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수술을 담당한 의사였다. 이어 통증이 밀려왔다. 망치로 몇 대 얻어맞고 막 깬 것 같았다. 고통스러웠다. 짐승이 우는 소리가 이럴까. 수일의 상태와 상관없이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훤한 복도로 나갔다.

“수일아! 개안나?”

두산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났다. 수일은 너무 아파서 고개를 저었다. 두산은 간호사와 함께 수일의 침대를 밀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수일은 병실로 오자마자 진통제를 찾았다.

두산은 비몽사몽인 수일의 귀며 손등에 계속 뽀뽀를 했다. 수고했다, 잘 참았다, 칭찬했다. 코안을 솜으로 꽉 막아 놔서 입으로 숨을 쉬어야 했다. 안 그래도 바짝 마른 입술은 더 마를 것도 없이 갈라져 피까지 났다. 두산은 바세린을 덕지덕지 바르고 호호 불어 주었다. 전신 마취를 했다는 이유로 물은 또 몇 시간 뒤에나 마실 수 있었다.

장 수술을 했을 때처럼 수일은 정신이 들었다 잠들었다 했다. 그때마다 두산이 옆에 있었다. 수일의 손을 살짝 쥐고, 볼을 비비고 입을 맞췄다.

“의사 쌤이 코 억수로 잘됐다 카드라. 클레오파트라는 쨉도 안 되게 예쁘다 카는데 우짜지? 내가 그래 삐둘게 해달라꼬 부탁을 했그만은, 참말로 말을 안 듣네.”

실없는 농담을 했다. 수일은 이제 그만 아프고 싶었다. 맞아서 터지고 부러지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 그만하고 싶다고 되는 일이라면 그러고 싶었다. 남들처럼 감기나 앓았으면 했다.

두산은 아파서 운다고 생각하겠지만, 수일은 서러워서 울었다. 맞아서 뼈가 부러져도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 15년 가까이 살았을까. 이전의 자신이 가여워서 울었다.

커다란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이 가족들의 병간호를 받는데 수일은 문병 오는 사람 하나 없을 때도 있었다. 그 가족들이 수일을 가여워해서 먹을 걸 주고 도와주었다.

그럴 때마다 수일은 괜찮은 척 연기를 했다. 동정받는 게 자존심 상해서가 아니었다. 자기는 혼자니까 그런 친절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괜찮아요’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면 정말 괜찮았고 다친 게 별거 아닌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랬는데 이제 곁에 사람이 있었다. 비싸고 좋은 병실에 누워서 손짓만 해도 다 알아서 해 주고, 금이야 옥이야 보살펴 주는 이가 있었다. 수일은 이전의 제 처지를 서러워하다가 지금 이 순간이 기뻐서 울었다. 감정이 널을 뛸 동안,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수일의 귀에는 음악이 들렸다.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제 귀에 얇은 헤드폰이 씌워져 있는 걸 깨달았다.

헤드폰은 은색의 워크맨에 연결된 것이었다. 두산이 가져온 모양인지 안에 담긴 테이프는 전에 그라나다 안에서 듣던 그것 같았다. 사랑 노래만 가득한 테이프에선 서정적이거나 경쾌한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다.

실눈을 뜨고 침대를 돌아보았다. 두산은 수일의 발치에서 엎어져 자고 있었다. 이상하게 다리가 불편하더라니, 커다란 덩치가 침대 끄트머리에 팔을 걸치고 있어서 그랬나 보았다.

목이 말랐다. 수일은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두산의 손을 흔들었다. 화들짝, 커다란 덩치가 팔을 크게 움직이며 벌떡 일어났다.

“어! 어? 와?? 아프나??”

두산이 움직이는 바람에 침대가 들썩였다. 잔뜩 잠긴 목소리도 어찌나 큰지 헤드폰을 뚫고 들어왔다.

“무… 울.”

“어! 물! 잠깐만.”

두산은 커다란 손으로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았다. 수일도 시계를 보았다. 아까 간호사가 4시간 뒤에 물을 마시라던 말을 기억해 냈다.

“4시가안… 너머써?”

“어. 넘었다. 마시도 된다.”

두산은 침대 레버를 돌려 수일을 앉히고 컵에다 물을 따라 빨대를 꽂아 주었다. 수일은 컵 안에 든 물을 모두 빨아 마셨다. 물이 들어가자 잠이 좀 깨었다.

코 수술이 이렇게 아픈 줄 알았으면, 좀 조심할 걸 그랬다고 수일은 생각했다. 뭐 자기가 조심한다고 해서 때릴 사람이 코를 피해서 때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다음에 맞을 일이 또 생기면 그땐 꼭 두 손으로 얼굴을 막아야지 했다.

거즈에 물을 적셔 와서 수일의 눈가를 닦아 준 두산이 수일의 머리에서 헤드폰을 뺐다.

“이거… 조아.”

수일은 은색 기계를 손으로 가리켰다. 비싸서 사고 싶어도 사지 못했던 워크맨. 조금 저렴한 것도 있었지만, 수일에겐 그것도 사치품이었다.

“우리 행님이 일본 갈 때 내가 사오라 켔는데 이제야 받았다. 그때 봤제? 둘째 행님? 사달라꼬 한지가 은젠데 내참.”

사다 줘도 불만이었다. 워크맨에는 일본어로 된 스티커가 아직 붙어 있었다.

“새 거야?”

“어. 빡스 채로 갖고 온 기다. 그기 붙은 스티커 떼고 싶으면 떼도 된다. 니꺼니까 니 알아서 해라.”

‘빡스’라는 말을 할 때, 두산은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내 거?”

“어. 니꺼.”

두산은 선물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옷을 사 줄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원래부터 수일 것인 양 말을 하며, 네 맘대로 하라 했다. 수일은 손을 뻗어 은색의 워크맨을 만졌다. 반짝반짝 늘씬하게 잘빠진 것이 여간 예쁘지 않았다.

비쌀 텐데. 돈이 어디서 나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좋아서 웃음이 났다. 물론 웃으려 하는 순간 극심한 고통이 찾아들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두사나… 고마어.”

너무 작게 말해서 못 들었나 보았다. 두산은 대꾸도 없이 부산스레 쓰레기통에 버려진 박스를 착착 발로 밟아 납작하게 만들었다.

“두사나… 고마.”

“참, 미음 물래? 내 아까 받아놨는데.”

한 번 더 고맙다고 하려는 수일의 말을 끊고 두산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못 먹었다. 귀신같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으.”

수일은 직접 테이블을 올려 미음을 먹을 준비를 했다. 두산은 창틀에 놓아둔 미음 그릇에 빨대를 꽂았다.

“너느은?”

“내 벌쌔로 무찌.”

“머하구?”

“그냥 밥.”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빨대를 입에 대 주었다.

“내일부터는 죽도 무도 된다 케서, 내가 보약 챙기 왔다. 의사쌤한테 물어본께나 먹어도 된다카대?”

“무스… 은.”

“그거 있다 아이가? 우리 할배가 묵던 거랑 똑같은 보약.”

두산은 슬쩍 수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그거 생각이나 하다니. 하여간 얄밉기는. 눈을 흘기며 쭉쭉 미음을 빨아 먹었다. 두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실실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발목을 만져 댔다.

“가안지러.”

“마사지 해주는 기다. 피 잘 통하라꼬.”

그러면서 이번엔 발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꾹꾹 눌렀다. 정말 마사지를 배운 건지 좀 시원했다.

“더… 해.”

얄미움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나저나 이놈의 미음은 왜 이렇게 양이 적은가 몰랐다. 몇 번 빨아 먹지도 않았는데 다 없어졌다. 아쉬워서 빈 그릇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산은 미음 그릇을 치우고 테이블을 내린 뒤 본격적으로 발가락 마사지를 했다. 손만큼이나 앙상한 발은 뼈가 도드라졌다. 더럽지도 않은지 발가락 사이사이로 굵은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했다. 쫙쫙 찢어 주고 눌러 주니 개운했다. 수일은 침대에 상체를 기대고 마사지를 받았다. 실눈을 뜨고 두산이 제 발을 만지는 걸 보고 있었다.

“발에는 힘이 쫌 있나?”

“으.”

“을매나 있는지 함 보자. 이래이래 함 차바라.”

왜 해 보란지는 몰랐지만, 두산이 시키는 대로 발을 조금 들어 보았다. 배가 땅기고 아팠다.

“안 대… 배 아파.”

“그라지 말고, 살살 함 해바라.”

두산이 재촉했다. 왜 저렇게 안달하나 몰랐다.

“배 아파.”

“하이고, 답답네. 이래이래, 그기 안 되나?”

발을 쥐고 차는 시늉을 해 보이던 두산은 잡고 있던 수일의 발을 성의 없이 내려놓았다.

“아니 뭐 발도 하나 몬 들고. 제대로 차지도 몬 하고. 손에도 힘이 한 개도 없고.”

혼자 구시렁대며 이미 납작해져서 더 납작해질 것도 없는 박스를 쾅쾅 밟았다.

“내 빡스 버리고 오께.”

껌딱지처럼 바닥에 붙은 박스를 들어 올린 두산은 쓰레기통은 놔두고 박스만 버리러 병실을 나갔다. 혼자 된 수일은 헤드폰을 귀에 쓰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딸깍 경쾌한 소리가 듣기 좋았다.

두산은 20분 뒤에 땀범벅이 되어 나타났다.

“어디 가써써?”

“운동하러.”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참 실없었다. 힘이 남아돌면 저나 좀 나눠 줄 것이지, 두산은 뛰고 온 것도 모자라 병실 안에서 체조를 했다. 수일은 두산이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보이는 근사한 복근을 실눈으로 감상했다. 아프긴 해도 이 시간이 참으로 여유로워서,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조차 낭만적이었다.

한 시간 뒤면 안과에 가서 검사 결과를 들어야 했다. 일부러 그 사실을 외면하며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가 없었다. 불안은 늘 심장이 먼저 알아챘다.

그리고 귀신같이 두산이 알아챘다. 커다란 손이 수일의 손 아래로 들어왔다. 수일은 두툼한 손가락 하나를 그러쥐었다. 상처 난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눈은 수일을 향했다. 한 번도 수일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는 저 눈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개안타. 내가 있는데 먼 걱정이고?”

두산은 쪽쪽 입을 맞추고 제 볼에 수일의 손등을 갖다 댔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가 흘렀다.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마치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두산은 부드럽게 수일의 손등을 쓸고 달콤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대로 죽었으면.

수일은 아주 짧은 순간 저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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