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81)

수일은 두산과 함께 VIP 전용 입구로 향했다.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 직원이라 그런지 대우가 남달랐다. 직접 문도 열어 주고, 깍듯하게 인사도 해 주었다. 수일의 옷이나 나이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산은 수일을 단단히 끌어안고 제 몸에 바짝 붙였다. 두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들려 가다시피 했다.

“두사이 왔나?”

“어. 행님들, 여 내가 말한 윤수일 행님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행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일이 조폭도 아닌데 어깨들이 90도로 인사했다. 수일은 멈칫거리다 두산을 밀어내고 저도 90도로 인사를 했다. 아무리 두산과 아는 사이라 해도 숙소 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서움이 있었다. 그러자 어깨들이 더 고개를 숙였고 수일도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하이고, 니 머하노? 가자.”

두산이 헛웃음을 웃으며 수일을 잡아끌었다. 수일은 끌려가면서도 그들에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나 길에서 만날 수도 있으니 잘 보여야지 싶었다. 두산은 옆구리에 수일을 바짝 끼고 다니면서 보이는 직원마다 수일과 인사시켰다. 야유회에서 봤던 동생들도 보였는데, 말도 한번 섞어 보지 못했으면서 아는 얼굴이라고 반가웠다.

밀레니엄 메인 홀로 들어선 수일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부가 어찌나 넓고 화려한지 지금 자기가 선 곳이 나이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각양각색의 미러볼과 레이저 불빛이 현란하게 번쩍였고, 오성관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음악 소리가 컸다. 멋진 댄서들이 간이 무대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아래로 역시나 화려하게 입은 젊은 남녀들이 머리를 흔들고 몸을 흔들었다.

바뀐 오성관의 소파와 테이블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여기인 모양이었다. 말발굽 모양의 붉고 검은 소파는 손님들로 빼곡했다. 수많은 종업원이 쉴 새 없이 테이블과 테이블을 오고 가며 말을 전달했고, 그들을 따라 여자들이나 남자들이 이동했다. 정신이 없었다.

혼이 쏙 빠진 수일을 두산이 어딘가로 데려갔다. 붐비는 댄스 홀을 지나자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나왔다. 거기에 정말로 방이 있었다. 문은 총 11개였고 전담 종업원들이 따로 있었다.

저 방 하나마다 하루 매출이 몇 백이라고 했다. 손님들은 수일의 몇 달 월급을 합한 금액을 하룻밤 술값으로 썼다. 룸살롱도 아닌 나이트에서 20, 30대의 어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돈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나이트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수일이 일하는 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 방 하나에 몇 백이라니. 수일은 못 올 곳에 온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다.

두산과 수일이 들어갈 방의 전담 종업원이 깍듯하게 인사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여는 윤수일이 행님. 내 말한 적 있제?”

두산은 그 종업원에게도 수일을 소개했다.

“행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나치게 겸손하고 정중한 인사에 수일이 또 허리를 숙이려 하자 두산이 막아섰다. 수일을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 귀청을 찢을 듯한 음악 소리가 그나마 줄어들었다. 수일은 먹먹한 양쪽 귀를 검지로 눌렀다 떼기를 반복했다. 두 사람을 따라 들어온 종업원이 재빨리 기본 세팅을 끝내고 나갔다.

“양주 마실래?”

“아냐. 맥주가 좋아.”

“그라믄 맥주 마시고 있으라. 내 일 좀 보고 오께. 30분도 안 걸린다.”

“응. 내 걱정은 말구 천천히 갔다 와.”

두산은 가려다 말고 수일에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그러다 인상을 썼다.

“니 아직도 몸이 차븐데. 와 이라지?”

“아닌데. 괜찮은데?”

나이트 안의 열기 때문인지 수일은 오히려 덥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안 되겠다. 일단 뎁히자.”

“뭘 뎁.”

두산은 자기 할 말만 끝내고 바로 수일의 입술을 물고, 혀로 힘차게 갈랐다. 핑계가 너무 어이없어 수일은 짧게 웃었다. 입 안을 혀로 마구 휘저으며 두산은 부지런히 옷을 벗었다. 일이나 하고 올 것이지 어느새 상의를 다 벗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수일은 고개를 비틀어 물린 혀를 빼냈다.

“일하고 와서 해.”

“먼저 하고.”

팬티를 내리자 커다란 자지가 스프링처럼 튕겨 나왔다. 살아 있는 것처럼 배꼽 위를 탄력 있게 왔다 갔다 했다. 밖에서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새삼 두산이 크다는 게 더 와 닿아 수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거기도 컸다.

수일이 홀린 듯 쳐다보자 두산은 싱글벙글 웃더니 테이블을 발로 밀어 치우고, 수일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수일의 앞에 떡하니 섰다.

“너 뭐 하니?”

“생각해 보니까 오늘은 니가 내 손님 아이가. 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주께. 말만 해라.”

이렇게 말하며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뒷짐까지 졌다. 수일은 인상을 쓰며 두산의 알몸을 훑었다. 발기된 자지가 액을 질질 흘리며 자꾸 왔다 갔다 해서 신경이 쓰였다.

“제발 옷 좀 입어.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구.”

“안 들어온다. 빨리 니 하고 싶은 거 말해라.”

“때려도 돼?”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물론 오랜만에 두산의 벗은 몸을 보니 좀 좋기는 했지만, 집도 아니고 호텔도 아닌 곳에서 남사스럽게 뭐 하는 짓인지 몰랐다. 언제 방문이 열릴지 몰라 수일은 조마조마했다. 혼자 여유 있는 두산은 능글맞게 웃었다.

“멀로 때릴래? 좆? 입? 엉댕이?”

“너는 애가, 어우,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아이믄 싸든가. 무릎 꿇으까? 내한테 오줌 싸도 되고. 에이 기분이다. 똥도 싸라.”

두산은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변태들이나 할 소리를 마구 뱉어 냈다. 술에 취해도 할까 말까 한 소리를 제정신으로 했다. 저런 말이 제정신에 나오는 걸 보니 두산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미쳐. 빨리 일루 오기나 해.”

수일은 얼굴이 벌게졌다. 소파에서 잽싸게 몸을 일으켜 두산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산이 못 이기는 척 따라왔다. 근육질의 벗은 몸을 끌어안고 수일이 먼저 키스했다. 손으로는 부드럽고 탄탄한 살들을 어루만졌다. 옷을 모두 입고 있는 수일은 알몸인 두산을 희롱하듯 만져 댔다. 두산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밴태.”

“돌아이.”

수일도 웃었다. 견갑골을 만지던 수일의 손을 끌어 두산은 제 성기로 가져갔다. 수일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것을 한 손으로 쥐고 흔들며 혀를 길게 내밀었다. 두산도 혀를 길게 뺐다. 혀끝으로 서로를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침이 떨어지려 하자 두산이 수일의 혀를 뿌리까지 물고 한 번에 빨아올렸다. 츄릅 소리와 함께 두산의 입 안으로 침이 딸려 갔다. 둘은 키득대며 또 혀끝으로 장난치다 침이 흐르면 둘 중 하나가 빨았다.

그러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꽉 맞췄다. 혀를 섞고 입 안을 음미하며 키스를 나눴다. 하아, 흐음, 신음을 흘렸다. 수일은 두산의 폭신하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실컷 물고 빨았고, 두산은 수일의 입술을 커다란 입 안에 통째로 넣고 쭙쭙 삼켰다.

“두산아, 너무 좋아.”

“내도 억수로 좋다.”

키스가 끝나고도 입술을 떼지 못했다. 맞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내쉬며 눈으론 서로를 좇았다.

“뭐 해주까?”

두산이 은밀하게 물었다. 수일은 손을 뻗어 두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앙상하고 긴 손가락을 크고 투박한 손이 잡아챘다. 그리고 제 입술에 갖다 댔다. 수일의 손바닥에 입맞춤하며 두산이 다시 물었다.

“뭐 해주까? 니 해달라는 거 다 해 주께.”

“…입으로 해 줘.”

“으이그. 그기 다가?”

한심하다는 듯 수일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 놓고 입꼬리는 왜 올리나 몰랐다. 커다란 손이 수일의 바지를 열고 팬티를 내렸다. 희멀건 살들이 붉은 등 아래에선 생기가 넘쳐 보였다.

부끄러움도 모르는지 두산은 알몸인 채로 수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두꺼운 몸에 힘없이 다리가 벌어지자 발목을 잡아 제 어깨에 하나씩 걸쳤다. 유연성이 없는 수일은 아아, 소리를 내며 눕다시피 소파에 쓰러졌다.

“에헤이. 할 기 천지빼까린데 몸이 그래까고 되겠나?”

“뭘 천지루 하니?”

“그라믄 만날 누버서 하끼가? 이래도 해 보고 저래도 해 바야지.”

두산이 혀를 차며 몸을 한껏 낮추었다. 그러자 자세가 금세 편해졌다. 수일은 팔을 짚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두산은 수일을 한번 쓱 보고 허벅지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젖은 소리를 내 가며 여린 살들을 맛있게도 빨았다. 수일은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을 떨고 허리를 튕겼다. 두산의 입술이 점점 음부에 가까워지자 수일의 입에선 앓는 절로 소리가 났다.

“흐응….”

손을 내밀어 두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산은 한 번씩 수일을 올려다보며 수일이 제대로 느끼는지, 기분이 좋은지 확인했다. 수일은 처음엔 문이 열릴까 봐 신경 쓰였지만, 두산이 성기를 입에 물자마자 머리가 하얘졌다. 눈앞이 까마득해지더니 수일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수일은 헉헉대기 시작했다.

이러려고 방이 있는 거구나, 속으로 생각하는 수일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손을 아무렇게나 휘저었다. 두산의 탄탄한 어깨가 만져지자 있는 힘을 다해 그러쥐었다. 발가락이 잔뜩 오므라들었다.

“흐읏… 아,아아! …두산아, 아… 아윽!!”

좀 천천히 할 것이지, 흡입하듯 빨아 대는 통에 수일은 얼마 가지 못해 사정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랫배가 달달 떨렸다. 두산은 몇 번 더 수일의 성기를 빨아 남은 정액을 모조리 삼켰다.

“하으… 하, 하아….”

수일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두산을 내려다보았다. 두산은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제 어깨에서 대롱대는 수일의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 몸을 세우고 가까이 다가와 입을 맞췄다. 다정한 눈을 하고 수일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보약 잘 챙기 묵자.”

이어 빨리 쌌다고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무드라곤 하나도 없었다. 수일은 두산의 입술을 꼬집고 발을 들어 두산의 상체를 밀어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벗은 상체에 발이 미끄러졌다. 그러자 두산이 수일의 발목을 낚아챘다.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마른 발목을 거머쥐고 제 상체에 문질렀다.

“더러워.”

“머가 더럽다카노. 한 개도 안 더럽다.”

두산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수일의 발을 만지고 마사지했다. 오늘은 수일이 두산의 손님이었다. 수일에게만 하는 특별한 서비스라며 발목을 입술로 가져갔다. 복숭아뼈를 혀로 핥았다. 사정해서 시든 자지가 다시 묵직해졌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수일이 화들짝 놀라 발을 빼내려 했지만, 두산은 느긋하게 수일의 발목에 입을 맞추었다.

“두사이 안에 있나?”

음악 소리에 묻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와?”

“강 이사님이 보자신다.”

“알았다.”

강 이사란 말에 두산은 인상을 구겼다. 씨발, 하는 소리도 잊지 않았다. 수일의 팬티와 바지를 입혀 주고, 두산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풀어 주지 못한 두산의 성기는 힘겨워 울고 있었다.

“빨아 줘?”

“아이다. 니가 입대면 여서 몬 나간다.”

“그르게, 볼일 보고 오라니까.”

수일은 괜히 미안해서 투덜대며, 들어가지도 않는 자지를 억지로 밀어 넣는 걸 지켜보았다.

“씨발, 머시 이래 안 들어가노?”

“아니, 그게 그런다고 들어가니? 일루 와 봐.”

수일의 말에 두산이 얌전히 다가와 섰다. 수일은 다시 바지를 내리고 두 손으로 성기를 잡았다. 혓바닥으로 귀두를 눌러 주면서 두 손으로 잡아 흔들었다. 쿠퍼액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수일은 입 안에 대가리를 넣고 손으로 부지런히 기둥을 쓸었다. 두산이 곧 숨을 몰아쉬었다.

커다란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들어갔다. 입 안을 꽉 채운 자지는 사정은커녕 더 커지기만 했다. 턱이 아려 올 때까지 빨다가 수일은 성기를 뱉어 내고 두 손으로 성기를 비비기 시작했다.

두산은 그런 수일의 턱을 들어 저를 올려다보게 했다. 열에 들뜬 두산의 눈이 번들거렸다. 숨을 헐떡이고 고통과 쾌감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수일의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니, 이래, 야한데, 허읍, 내가, 씨발, 우째야 쓰겠노?”

두산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입술을 혀로 핥다가 이를 악물었다.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일은 탁탁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성기를 아래위로 좌우로 흔들었다. 엄지로 귀두를 문질렀다. 두산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씨발! 내, 아흑, 니를, 가다삐든가, 해야지! 씨발!!!”

수일의 얼굴에 두산의 정액이 흩뿌려졌다. 수일이 입을 벌리자 두산이 제 손으로 직접 성기를 입 안에 넣었다. 제법 많은 양의 정액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수일은 빨면 다시 커질까 봐 정액만 삼키고 도로 뱉어 냈다.

“허으… 아흐… 하.”

근육질의 허벅지가 사정없이 움찔댔다. 수일은 쓰다듬고 싶었지만 참았다. 강재욱을 만나고 오면 제대로 펠라티오도 해 주고, 맘껏 쓰다듬어야지 했다. 조금씩 사그라드는 성기를 수일이 팬티 안에 직접 넣어 주었다. 바지 지퍼가 뻑뻑하게 겨우 잠겼다.

“너무 커도 불편하겠다.”

수일이 이렇게 중얼대자 두산이 웃었다.

“내 금방 갔다 오께.”

“응. 늦었어. 얼른 가기나 해.”

두산은 셔츠를 대충 팔에 끼우고 방을 나가려다 돌아와서 뽀뽀하고 또 나가려다 돌아와 키스했다. 한번 올라간 입매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늦었어. 얼른 가.”

“내 퍼뜩 오께. 술 마시고 있으라.”

겨우 두산을 내보내고 수일은 혼자 남았다. 수일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다른 날보다 길고 피곤했으나 두산 덕에 수일도 기분이 좋아졌다. 시원한 맥주를 한 병 따서 갈증을 해소했다. 조용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시끄럽지도 않은 적당한 소음이 좋았다. 박 사장처럼 널찍한 소파 헤드에 두 팔을 걸치고 다리를 꼬아 보다가 실실 웃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스무 살쯤 되는 앳된 종업원이 들어오더니 시키지도 않은 양주 두 병과 과일 안주를 내려놓았다.

“저기, 양주는 안 시켰는데요.”

“두사이 행님이 내가라꼬 했습니다.”

“아….”

“이거 물 탄 거 아이고예, 진짜베입니다. 그럼 즐거운 밤 되십시오.”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러 주었다. 나가면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어찌나 깍듯하게 인사하던지 수일도 소파에서 일어나 90도로 답했다.

혼자 앉아 가만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수일은 양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호스트바에선 여자 손님들과 토할 때까지 양주를 마시고도 매상을 올리기 위해 한 병을 더 시켜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맛도 모르고 그 독한 술을 하룻밤에 몇 병이나 비웠었다.

돈을 긁어모으면서도 돈 욕심이 많았던 여사장은 양주에 물을 타거나 싸구려 양주를 섞어 팔았다. 그 때문인지 숙취가 심해 다음 날이면 늘 고통스러웠다. 여사장이 제공한 숙소에서 합숙하던 동료들과 해장 음식을 줄줄이 꿰고 다녔고, 위장약을 밥 먹듯 먹었다. 젊었기에 망정이지 지금이었으면 급성 간 경화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두산이 몰고 온 그라나다 때문인지 아니면 양주 때문인지 수일은 호스트 시절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방이 불쾌해졌다. 이제 보니 제가 일했던 호스트바의 룸과도 비슷했다. 기분이 상한 수일은 맥주 세 병을 혼자 비웠다. 정말로 피곤한 하루였고, 사정까지 한 노곤한 몸이라 금방 술이 올랐다.

일부러 양주를 외면했지만, 제법 비싸 보이는 술병에 절로 시선이 갔다. 손에 들고 흔들어 보았다. 찰랑거리는 액체 소리에 픽 웃고는 양주를 까서 조그만 잔에 따랐다. 짙은 호박색의 액체가 금세 채워졌다.

수일은 잔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빙 돌리다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불이라도 삼키는 듯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몇 년 만에 마셔 보는 양주인지 몰랐다.

종업원의 말대로 물을 타지도 다른 양주를 섞지도 않은 진짜였다. 한 잔 두 잔 석 잔,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수일은 저도 모르게 자꾸 양주를 따라 마셨다. 매상을 올리려고 억지로 마시는 게 아니라 그랬는지 처음으로 양주가 맛있게 느껴졌다.

두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마셔야 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 독한 술 한 병을 모두 비운 상태였다.

온몸이 타는 듯했다. 덥고 숨이 턱턱 막혔다. 답답했다. 세수라도 해야겠다 싶어 밖으로 나갔는데, 도무지 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밀레니엄은 크고 복잡했다. 시끄럽고 어두웠다.

미로 같은 곳을 헤매다 겨우 찾았다 싶었는데, 하필 화장실 앞에서 그 남자를 보았다. 여사장의 기둥서방. 검은색 그라나다의 주인.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아니 있을 수 없는 남자가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는 까만 그림자 형태로 수일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역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일은 구역질을 참으며 뒷걸음질 쳤다. 고개를 마구 젓고 눈을 여러 번 깜빡여 보았지만, 그림자는 허상이 아니었다.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그림자는 더 가까워졌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일은 달렸다. 저 남자에게 잡히면 안 된다. 잡히면 최 군이 당한 것처럼 남자의 먹이가 된다. 그러니 절대 잡혀서는 안 되었다. 그림자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고, 수일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몇 번을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달리고 또 달렸다. 잡히면 안 되니까, 무조건 달려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 하아, 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아팠다. 자기가 어디 있는지 잠깐 잊었던 수일은 그제야 제가 길바닥에 넘어져 있는 걸 알았다. 다행히 손 닿을 곳에 화려한 밀레니엄 간판이 보였다. 분명 저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쩌다 여기 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왜 여기 누웠는지 수일은 알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비틀었다. 비에 젖은 바닥에 두산이 사 준 비싼 옷이 엉망이 되었다. 그게 속상한 수일은 내일부턴 자기가 산 싸구려 옷을 입어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압정에 박힌 것처럼 바닥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부슬부슬 비가 떨어지는 하늘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수일은 헤벌쭉 웃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럴 때마다 구멍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시커먼 것이 꼭 제 머릿속 같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깜깜하기만 한 머릿속. 눈을 감았다. 목이 타서 혀로 빗물을 받아먹으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다시 눈을 떴다.

“두산아.”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두산 같았다. 근데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아닌가 보았다. 눈이 흐려서 잘못 본 걸 수도 있었다. 수일은 눈에 힘을 주었다.

“두산아, 나 취했어.”

남자가 쭈그려 앉았다. 수일은 남자의 얼굴을 만지려 손을 들었지만, 힘이 없어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가 그 큰 손으로 오른 손목을 거머쥐었다. 손등에 붙여 두었던 반창고가 빗물에 너덜거렸다.

“하아, 씨발.”

“미안해, 두산아. 이게… 옷이… 니가 사 준 건데… 어떡하지?”

수일은 옷 걱정밖에 없었다. 두산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두산은 수일의 목 뒤에 팔을 끼워 넣고 수일을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그 큰 등에 수일을 업었다. 수일은 두산의 목을 꼭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두산아. 미안해.”

젖은 옷이 축축해서 한기가 들었다. 수일은 두산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뜨거운 몸에 젖은 몸을 바짝 갖다 댔다.

“니 자꾸 와이라노.”

두산이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미안해, 두산아. 옷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구….”

옷 얘기가 아닌 걸 알면서도 수일은 바보같이 옷만 신경 쓰였다. 아니 일부러 옷 핑계를 댔다. 그래야지 숨통이 트였다.

수일은 무서웠다.

갑자기 떠오르는 조각난 기억들이, 엉망진창인 제 머릿속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픈 걸까, 아니면 완전히 망가진 걸까. 이제 겨우 살 만해졌는데, 지금 망가지면 안 되는데. 무섭다가도 억울했다.

“미안해.”

왜 지금일까?

왜 하필 지금일까?

수일은 온 힘을 다해 두산에게 매달렸다.

***

목이 탔다. 수일은 눈도 뜨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등 아래로 팔이 들어와 수일의 몸을 세웠다. 입술에 유리가 닿았다. 입을 벌리자 물이 들어왔고, 수일은 거침없이 들이켰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살 것 같으니 다시 잠이 쏟아졌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수일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벌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눈을 반만 뜨고 눈곱을 떼 냈다. 몸도 아파 살펴보니 여기저기 멍이 들었다. 까진 무릎에는 빨간색 약이 발려 있었다.

밖에서 조심성 없이 쿵쿵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산인가 보았다. 알몸인 수일은 일단 이불을 돌돌 말고 옷방으로 가서 아무 옷이나 손에 집히는 대로 입었다. 주방으로 나가자 인기척에 두산이 돌아보았다.

“일 났나?”

“응.”

“밥 묵자.”

“응.”

맑은 콩나물국이었다. 냄비도 그릇도 하나 없는 집인데 저것들이 어디서 났는지 의아했다.

“니가 했어?”

“엄마가.”

“집에 다녀왔니?”

“어.”

“뭐 하러 그랬어….”

수일은 미안해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두산은 힐끔 수일을 쳐다보고 국을 내려놓았다. 하얀 자기 그릇은 윤기가 흘렀다. 일회용 수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움을 가졌다. 수일은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 앉아 플라스틱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 쥔 손엔 붕대가 깔끔하게 감겨 있었다. 두산이 밥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수일은 눈도 못 뜨고 국부터 입에 떠 넣었다. 살 것 같았다. 두 번째 국물을 떠먹고 콩나물을 씹던 수일은 두산의 시선에 숟가락질을 멈췄다.

“니는 씨발, 어데를 그래 기 나가노?”

“…….”

“내가 퍼뜩 온다 켔나 안 했나? 씨발, 오냐 오냐 해주이까 쉽나?”

수일은 묵묵히 콩나물을 씹어 삼켰다. 두산이 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괜한 오해를 샀다.

“미안. 안 그럴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리고 다시 국을 떠 넣었다. 국물이 개운하고 깔끔했다. 콩나물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아들 입에 들어가는 줄 알고 준비했을 두산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조금 죄송했다.

“머가 미안한데?”

“그냥, 다.”

하도 노려보는 통에 입 안만 바짝 타들어 갔다.

“밥 묵고 얘기하자. 국 식는다.”

화를 꾹꾹 눌러 담고 두산이 말했다. 수일은 두산을 곁눈질하며 국에 밥을 말았다. 쓰린 속에 밥이 들어가자 배가 요동쳤다. 뱃가죽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밥을 먹어야 눈도 뜨고 정신도 차리지. 입 안이 까끌까끌해서 지금 씹는 게 밥이 아니라 꼭 돌 같았다.

두산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밥 한 숟갈 뜨고 수일을 쏘아보고 또 한 숟갈 뜨고 인상을 썼다.

“그렇게 보지 마. 체할 것 같애.”

“양주 한 병을 지 혼자 다 처먹는 미친 새끼가 으데 있노?”

수일은 국그릇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박았다. 밥을 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두산의 입에서 연신 욕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으이그, 씨발, 저거를 확, 내 진짜, 확 마, 그 어떤 것도 문장이 되진 못했다. 두산은 그저 아무 단어나 내뱉으면서 화를 삭였다. 수일은 두산이 한마디 할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게 아무 말이나 뱉던 두산은 한숨과 함께,

“진지나 잡수세요.”

했다.

수일이 눈을 들어 두산을 보았다. 두산은 수일의 시선을 받으며 콩나물국에 밥을 척척 말았다. 무라, 했다. 수일은 그 말에 밥을 한가득 퍼서 입 안에 욱여넣었다. 콩나물이 입술 끝에 걸려 대롱거리자 두산이 손을 뻗어 직접 입에 넣어 주었다.

“천천히 무라.”

잊지 않고 이렇게 말해 주고, 수일의 볼에 붙은 밥풀은 떼서 제가 먹었다. 한번 닿은 손은 수일의 부은 눈가를 쓰다듬고 볼을 툭 건드렸다. 어째야 할지 모르는 수일은 그저 눈알만 굴렸다.

“하이고, 내가 미친개이지.”

미친 건 수일 같은데, 두산은 되레 자기를 미쳤다 말했다. 볼 것도 없는 수일의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보던 두산은 혼자 픽 웃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웃는 걸 보니 수일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삭아삭, 콩나물 씹는 소리만 주방을 가득 메웠다. 밥 먹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두산은 국이 식을까 봐 약하게 불을 올려 뒀는지 수일이 밥 한 그릇을 비우자마자 바로 뜨거운 국을 퍼 주었다.

“밥 더 주까?”

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앞에 있는 따뜻한 콩나물국을 보니 갑자기 울컥했다.

“두산아, 정말 미안해.”

진짜로 미안했다. 자기 일터에 데려가서 동료들에게 일일이 ‘행님’이라고 소개까지 했는데, 정작 수일은 미친 사람처럼 뛰쳐나가 젖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수일이 이럴진대 두산은 오죽 민망할까 싶었다.

“한 번만 더 해라. 상 엎어삔다.”

두산은 사나운 표정을 하고 낮게 으르렁댔다. 수일은 두산의 경고가 사과하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혼자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건지 헷갈렸다. 아마 둘 다겠지만, 일단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투박한 손이 다 먹은 그릇들을 함부로 다뤘다. 비싸 보이는데 싸구려 중국집 그릇처럼 싱크대로 던지다시피 했다.

“아니, 두산아, 그거 그렇게… 던지면….”

그릇이 깨질까 걱정된 수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중얼하며 주위를 맴돌았지만, 두산이 틈을 주지 않았다.

“저리 가라. 으데 오노?”

수일은 하는 수 없이 저리 가서 지 하고 싶은 대로 대충 설거지하는 두산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어머님이 아끼는 그릇일 수도 있는데, 저렇게 막 다뤄도 되나 걱정이 되었다. 거기다 퐁퐁 거품도 제대로 안 씻긴 걸 두어 번만 물을 칠하고는 개수대에 그릇들을 올렸다. 수일은 속으로 나중에 다시 씻어야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설거지를 다 마친 두산은 싱크대를 등지고 서서 수일과 마주 보았다. 수일은 식탁 의자를 움켜쥐고 안절부절못했다. 새벽의 일을 닦달해도 해 줄 말이 없었다. 기억이 안 났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두산이 믿어 줄까. 수일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삐삐가 울렸다.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세 번 삐삐는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연신 울려 댔다. 불안해진 수일은 두산의 표정을 살폈다. 바지춤에서 삐삐를 꺼내 액정을 보는 얼굴이 여유로워 보였다. 안심이 되었다.

“나 씻고 올게.”

두산이 음성을 확인하러 가는 사이 수일은 욕실로 향했다.

붕대 감은 손이 젖지 않도록 주의하며 꼼꼼히 몸을 씻고 이를 닦았다. 부은 눈에는 핏발이 섰고, 하룻밤 사이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가는 푹 꺼져 보였다. 이게 사람 얼굴인가 싶었다. 이런 몰골을 하고 정애 씨를 만날 생각을 하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일은 왼손을 허벅지에 문질러 열을 내고 눈가를 누르고 볼을 비볐다. 그러자 조금씩 혈색이 돌았다.

샤워를 끝내고 젖은 머리를 털며 나갔는데, 두산은 여전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흘끔 수일을 쳐다보고 다시 전화에 집중했다. 수일이 머리를 다 말리고 와서도 두산은 전화를 들고 있었다. 미간을 구겼다가 무표정했다가 가끔 코웃음을 쳤다.

“바람 쐬러 가자.”

전화를 끊고 두산이 말했다. 사무실에서 삐삐를 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옷 갈아입으라. 내도 씻고 오께.”

“응.”

옷을 갈아입고 수일은 세탁 바구니를 뒤졌다. 어제 입었던 옷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산이라면 벌써 세탁소에 맡겼겠지 싶었다. 수일은 혹여 세탁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술을 처먹고 저지른 일 때문에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다. 멍청한 제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비는 새벽보다 굵었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라디오를 들었다. 이번 주는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올 거라고 기상 예보관이 알렸다. 두산은 씻고 나와 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는지 잠시 후 멀끔하게 차려입고 거실로 걸어왔다.

“내일 <배트맨2> 개봉한다. 보러 가자.”

“아….”

전에 보다 만 재미없는 영화.

수일은 속으로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두산이 먼저 나갔고 수일은 주춤주춤 뒤를 따랐다. 어디를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비가 자동차 천장을 약하게 때렸다. 바람 쐬러 가자더니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옷도 많은데 왜 자꾸 이런 델 오는지 몰랐다. 투덜거릴 상황이 아니라서 수일은 잠자코 있었다.

두산은 수일의 의사는 묻지 않고 전보다 조금 저렴한 메이커를 돌아다니며 95 사이즈의 옷을 샀다. 수일에게 잘 어울리는 푸른색 계열과 미색 계열의 상의를 세 벌을 사고 청바지와 반바지를 색깔별로 두 벌씩 샀다. 그리고 아이보리색 면바지와 서울에서 가져왔던 것과 같은 남색 정장 바지도 하나 더 사 주었다.

수일은 두산이 사 주는 옷들이 어제 제가 장만한 것과 비슷해 말리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100으로 사 주면 좋겠는데 95를 사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저렴하다 해도 한 벌 가격이 까만 봉지 안에 든 옷 모두를 합친 가격보다 비쌌다.

백화점 안은 에어컨이 잘 돌아갔지만, 수일은 과음으로 머리가 아팠고 식은땀을 흘렸다. 손수건이라도 가져올걸. 수일은 손등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두산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스포츠웨어 전문점이었다. 거기서 두산은 제 수영복과 수일의 수영복을 샀다. 수일의 것은 무릎까지 떨어질 법한 촌스러운 트렁크 스타일로 골라 주더니, 제 것은 블랙의 삼각 빤스와 네온 색의 짧은 트렁크를 골랐다. 두산은 점원과 하하호호 웃으며 꼭 두 벌을 겹쳐 입어야 민망한 일을 방지할 수 있다는 말로 은근 자지 크기를 자랑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곧잘 얘기하는 두산이라 단골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수일은 저도 예쁜 걸 사고 싶다고 말도 못 하고, 경로당 어르신들도 안 입을 수영복 바지를 불퉁하게 바라보았다.

샌들까지 사고 나서야 쇼핑이 끝났다. 두산이 사 준 것 중에 샌들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발이 시원했고 푹신했다. 양말을 신은 채로 발을 넣으려다 두산이 화를 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양말을 벗었다. 흰색 샌들은 수일의 창백한 발과 잘 어울렸다. 수일과 같은 디자인의 검은색 샌들을 신은 두산은 수일의 발을 자꾸 쳐다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씨발, 미치겠네.”

혼잣말로 연신 미치겠네, 환장하겠네 하며 앞서 걸었다. 수일은 그사이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어 마음을 졸였다. 수영복 살 때를 제외하곤 표정 관리도 잘했던지라 두산이 새벽의 일에 아직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목이 탔다. 수일은 마른침을 삼키며 평소보다 빨리 걷는 두산을 허겁지겁 쫓았다. 모양새가 어미가 버리고 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두산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커피숍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저를 기다려 주지도, 어깨동무를 해 주지도 않는 두산이 야속했다.

커피숍 자리에 앉자마자 수일은 점원이 내온 물을 들이켰다. 두산은 수일의 의사는 묻지 않고 쌍화차 하나에 팥빙수를 시켰다. 중년의 여성들이 대부분인 커피숍에 젊은 남자는 수일과 두산이 유일했다. 두산은 수일의 앞에 쌍화차를 밀어 주고 저는 팥빙수를 먹었다.

“니는 찬 거 묵지 마라. 속 아픈데 찬 거 드가면 배탈 난다.”

이러면서 곱게 갈린 얼음에 팥을 듬뿍 얹어 입에 넣었다. 수일도 팥빙수가 먹고 싶었다. 두산의 입에 들어가는 팥을 보며 입맛만 다시다가, 쌍화차에 올려진 달걀노른자를 티스푼으로 떠먹었다.

두산은 테이블 밑으로 수일의 발을 자꾸 흘끔거렸다. 항상 손발톱을 짧게 깎아 청결에 신경을 쓰는 수일이건만 자꾸 발을 쳐다보자 혹여 때라도 꼈나 싶었다. 저도 같이 흘끔거리다 눈이 마주쳤다. 두산은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앞으로 혼자 술 마시지 마라.”

누군 혼자 마시고 싶어서 혼자 마시나. 마실 사람이 없으니 그러지. 대답 대신 속으로 구시렁댔다. 사실 두산과 마시고 싶었지만, 두산은 항상 바빴다.

“와 대답이 없노?”

“그럼 누구랑 마셔?”

기가 죽어 잔뜩 움츠리며 수일이 대꾸했다.

“내하고.”

“집에도 없으면서.”

“밀레니엄으로 온나. 거서 같이 마시자.”

“거길 내가 또 왜 가니? 그리고 양주 안 마신다 그랬는데 괜히 양주를 넣어 줘 가지구….”

수일은 겁도 없이 두산에게 투덜댔다. 양주를 물처럼 마신 건 자기면서 왜 두산에게 불평하는지 몰랐다.

“씨발, 내가 니 혼자 처먹으라고 넣었나? 둘이 마실라꼬 넣었지.”

두산의 목소리가 커졌다. 머리가 울렸다.

“…나 술 끊을 거야.”

진심이었다. 안 그래도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곤 하는데, 술 때문에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비에 젖은 길바닥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그 비참하고 무서운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뻥 치고 있네.”

“진짠데.”

“좆까지 말고.”

물론 두산은 수일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진짜야, 이렇게 말하고 수일은 몸을 구부려 쌍화차를 홀짝였다. 두산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백화점에서 나오기 전, 정애 씨에게 줄 꽃과 스팸 선물 세트를 두 개 샀다. 꽃을 살 때는 먹지도 못하는 걸 왜 사냐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두산은 얌전히 돈을 냈다.

정애 씨 집은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을 한참 올라가야 있었다. 골목 초입에 그라나다를 세우자 수일은 차 안에서 샌들을 벗었다. 다시 양말을 신고 낡은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남의 집에 방문하는데 맨발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두산의 시선이 수일의 운동화에 머물렀다.

“니 와 내가 사준 거 안 신노?”

“어?”

“나이키.”

“지금 것두 멀쩡한데 왜? 다 떨어지면 그때 신을 거야.”

낡긴 했어도 구멍 난 데도 없었다. 메이커는 아니지만 제법 튼튼했다. 수일의 말에 두산이 인상을 썼다.

“이건 버리지 마.”

수일이 선수를 쳤다. 서울에서 가져온 옷들도 어제 산 싸구려 옷들도 두산이 어디다 숨겼는지 보이질 않았다. 두산의 성격에 고이 모셔 두진 않았을 테고 버린 게 분명했다.

“내 맘이다.”

역시 버렸구나.

“멀쩡한데 왜 버리니?”

“두 번 말 안 한다. 내가 사준 거 신어라.”

낮고 단호한 말에 수일은 입을 닫았다. 낡았다고 다 버리면 수일도 진즉에 버려져야 옳았다. 수일이 쓰던 물건을 버리는 것이 서운했지만, 그래도 아직 저는 안 버려서 고마웠다.

“너두 갈아 신어. 맨발로 들어가면 실례야.”

생각이 많아지는 자신이 싫어 수일은 말을 돌렸다. 두산은 귀찮아했으나 이번에도 수일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수일은 정애 씨에게 줄 꽃다발을 들고 두산은 스팸 선물 세트를 들었다. 두산은 다른 손에 커다란 검은 우산을 들었다.

두산은 오늘 처음으로 수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품 안에 단단히 수일을 끌어안고 골목을 올랐다. 뜨거운 팔이 닿았다. 뜨거운 팔이 닿자마자 뺨에 입술이 닿았다.

우산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산은 커다란 입 안에 수일의 입을 가두고 쭙쭙 빨아올렸다. 오르막길이라 안 그래도 숨이 찼는데, 키스까지 받으니 수일은 꼴딱 숨이 넘어갔다. 입을 벌리면 혀가 들어왔고, 입을 다물면 입술을 물렸다.

수일의 입술 주위가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두산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빗방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오롯이 두산의 숨소리와 타액이 섞이는 젖은 소리만 귓가에 가득했다. 수일은 밭은 숨을 뱉어 내면서도 두산의 혀가 제 입 안을 희롱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두산은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키스하다 숨 막혀 죽지 않을까 싶을 즈음 두산이 입술을 뗐다. 수일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두산은 숨을 고르며 그런 수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번 두 번 세 번, 짧게 때론 길게 입을 맞췄다. 마주 보는 시선이 참으로 다정했다.

“귀에 꽃만 꽂으면 딱 그기네.”

두산이 손가락으로 수일의 귀를 툭 건드렸다.

“그거 뭐?”

“광녀이. 미친년 말이다.”

“너는 말을 해도 꼭.”

수일이 노려보자 두산이 웃었다.

“와? 니 하는 짓이 딱 미친년인데.”

좁은 골목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 무방비한 상태라 수일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두산이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추임새처럼 머시 이런 기 다 있노, 하더니 그 사람이 사라지자 또 입을 맞췄다.

“생긴 거 맨키로 쫌 아름답게 살자.”

수일의 눈을 진득하니 마주 보고 농담처럼 말했다. 실실 웃는 걸 보니 화가 다 풀린 모양이었다. 빨아서 붉어진 입가를 엄지로 쓰다듬은 두산은 붉은 기가 옅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입술을 물고 빨았다.

오르막이 길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숨이 차면 두산이 입을 맞추고 인공호흡을 하듯 제 숨을 불어 넣었다. 빗방울은 제법 예쁜 소리를 내며 우산 위에 떨어졌다.

겨우 다다른 정애 씨 집 근처에 현철이 마중 나와 있었다. 현철은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갖춰 입고 우산을 쓴 채로 사람이 오나 안 오나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수일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수일이 행님, 오신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하필 비가 이래 오노.”

“어차피 안에 있으 낀데 비가 먼 상관이고.”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두산이 먼저 선수를 쳤다. 말투도 어찌나 퉁명스러운지 수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하고 덧붙였다. 두산 덕에 잘 올라오긴 했지만 오르막이 가팔라 숨이 차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다시는 술에 입을 대나 봐라. 헉헉대며 금주를 다짐했다. 현철과 앞서 걷던 두산이 멈춰 서서 수일을 기다렸다.

“이야, 이래 보이 꽃보다 행님이 더 예쁘네.”

방금까지 미친년이라고 놀리던 두산이 실실 웃으며 싱거운 농담을 했다. 낯짝이 두꺼운 건 알았지만 민망한 말을 잘도 했다. 수일은 두산을 대신해서 얼굴을 붉히고, 혹시 현철이 들었는지 급히 살폈다. 다행히 현철은 벌써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파란색 대문을 지나자 좁은 마당이 나왔다. 담벼락을 따라 키 작은 꽃나무들이 몇 그루 있었다. 꽃은 없었지만 잎사귀가 비를 맞아 짙은 초록빛을 띠었다. 예쁜 원피스 차림에 하얀색 앞치마를 두른 정애 씨가 좁은 마루로 나와 두 사람을 맞았다. 수일이 꽃을 내밀자 정애 씨는 수줍게 웃었다.

“뭘 이런 걸 다….”

“행수님 줄 끼라고 이 행님이 난리를 칬다 아입니까.”

두산은 수일의 등을 정애 씨 쪽으로 밀었다.

“감사합니다. 억수로 예뻐예.”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애 씨는 꽃다발을 보고 정말로 기뻐했다.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볼에 전보다 윤기가 흘렀다.

집 안은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다. 손님이 온다고 청소는 했겠지만, 원래 살림을 단정히 하는 사람인 게 티가 났다. 정애 씨는 꽃 냄새를 맡다가 하던 음식을 마무리한다며 부엌으로 돌아갔고 현철은 얼음을 탄 오렌지 주스를 내왔다. 수일과 달리 두산은 건성으로 집을 쓱 둘러보고 말았다.

선풍기를 틀고 창을 열어 두어도 커다란 덩치 둘과 한방에 앉으니 금세 더워졌다.

“살림은 은제 차맀노?”

“매칠 안됐다. 정애 친정이 요 근처 아이가. 오다가다 집이 나왔다카길래 잘됐다 싶어서 드왔지.”

“행님도 급했네. 같이 사니 좋나?”

은근슬쩍 묻는 말에 현철이 얼굴을 붉혔다. 하여간, 나이도 제일 어린 두산이 제일 밝혔다.

“좋지, 그라믄.”

센 척 큰소리로 말을 받았지만, 현철은 벌써 목까지 벌게졌다. 가만두면 더한 소리도 할 것 같아서, 재밌다고 웃는 두산의 옆구리를 찔러 눈치를 주었다. 수일은 저를 돌아보며 ‘와?’ 하고 묻는 두산을 무시하고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현철의 가족도 5년 전까진 근방에서 살았다고 했다. 두 사람이 사귄 뒤로 다시 이 동네에 드나들기 시작한 현철은 밤에 일하고 새벽에 퇴근하는 직업 특성상 정애 씨의 안위를 걱정해서 늘 정애 씨 집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정애 씨 부모님은 얼른 현철이 그녀를 데리고 살았으면 싶었는지 직접 집까지 알아봐 주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정애 씨도 잔소리가 부쩍 는 부모님을 피해 따로 살게 되어 훨씬 좋아한다고 했다.

“결혼식은 은제 할라꼬?”

“말 마라. 우리 어머이한테 인사드리러 갔다가 난리가 났었다.”

현철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런 얘길 수일의 앞에서 해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와?”

“우리 어머이가 보통 성격이 아이다. 정애 보자마자 쌩난리를 칬다. 으데 넘의 남자랑 살다온 기 멀쩡한 총각을 꼬싰냐꼬 물벼락을 안 맞았나. 내는 우리 어머이랑 연 끊을 생각도 하고 있는데, 정애는 그래는 몬 살겠다카데. 설득하자꼬 그라는데 우짜겠노. 일단 정애 말대로 해 보고 안 되면 혼인신고 해뿔라꼬.”

현철은 동생들에겐 그렇게 무르더니, 정애 씨와의 일에선 의외로 강단 있게 굴었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물벼락까지 맞은 정애 씨는 얼마나 맘고생이 심할까 걱정이 되었다. 7년을 남의 남자와 산 게 무슨 흠이라고 그러는 걸까. 행복하게 살다 왔으면 또 몰라도.

이어 현철은 정애 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조곤조곤 얘기했다. 정애 씨 덕에 어디론가 새던 월급도 조금씩 모이고 있다고 자랑했고, 밥이며 빨래며 집안 살림이 흠잡을 데 하나 없다고 자랑했다. 예의도 바르고 말도 예쁘게 해서 동네 어른들이 좋아한다고도 자랑했다. 현철은 팔불출처럼 정애 씨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현철아, 내 쫌 도아도.”

정애 씨의 목소리에 현철은 벌떡 일어났다. 곧 안방에 상을 펴고 음식들을 하나씩 내왔다. 잡채와 불고기, 생선구이와 재첩국이었다. 재첩국 이름만 들었지 실물은 처음 본 수일은 숟가락으로 국을 한번 휘저었다. 부추가 잔뜩 들어간 탁한 국물 안에 조그만 조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조개 이름이 재첩이라고 했다. 예쁜 꽃잎이 박혀 있는 전도 내왔고, 재첩무침도 함께 나왔다.

집만큼이나 음식도 정갈했다. 정애 씨가 화병에 꽃을 담아서 안방 TV장 위에 올려 두고 현철의 옆에 앉았다. 정애 씨는 전보다 훨씬 얼굴이 밝았다. 말도 곧잘 했고, 잘 웃었다. 사랑의 힘이 이렇게 컸다.

수일은 골고루 잘 먹었다. 재첩국은 낯설었지만, 숙취로 고생하던 수일에겐 참으로 고마운 음식이었다. 재첩무침에 밥을 비비고, 거기에 생선 살을 올려 먹었다. 두산은 잘 먹는 수일을 보고 혼자 흐뭇해했다. 배 터지게 먹이고 상을 물리자마자 정애 씨가 참외와 커피를 내왔다.

셋이 있을 때는 그렇게 정애 씨 칭찬을 하던 현철은 정애 씨가 옆에 있자 무뚝뚝하게 굴었다. 정애 씨 칭찬을 할라치면 좋아서 입을 실룩거리면서도 아니라고 했다. 뭐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니라고 하면서 은근 구박을 했는데, 그러면 정애 씨도 현철을 구박했다. 둘이서 서로의 험담을 하길래 이러다 싸우는 건 아닌가 싶어 수일은 조마조마했다.

별 얘기를 안 했는데도 시간은 금방 흘렀다. 평소라면 여유가 있었겠지만, 특별한 손님 때문에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오라는 사장의 명령이 있었기에 수일도 현철도 마음이 급했다. 정애 씨의 배웅을 받고 나오는 동안 현철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수일만 대문 밖까지 나온 정애 씨가 마음 쓰여 돌아보고 인사를 해 주었다.

두산은 나이트에 수일을 데려다주면서도 몇 번을 돌아보고 다시 와 뽀뽀를 해 주는데, 현철은 참 무뚝뚝했다. 제가 정애 씨라면 엄청 서운할 것 같았다.

“행님, 내 11시에 데리러 오께. 일 있으면 삐삐치라.”

“응.”

“수일이 행님, 수고하이소.”

“네. 현철 씨도 수고하세요.”

현철이 있어서 뽀뽀는 하지 못했다. 두산은 수일의 볼을 툭 건드리더니 작게 ‘광녀이’ 했다. 수일이 미간을 구기자 혼자 낄낄댔다. 평소처럼 몇 번을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뒤로 걷다가 자빠질 뻔한 두산은 바닥에 대고 욕을 하고는 복도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기실에 사람은 없고 짐만 덩그러니 있었다. 수일은 제 짐을 놓고 서둘러 홀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홀에는 은아 씨를 포함 영희와 혜선이 모두 모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우리도 이제 왔다.”

삼락 형님이 신경 쓰지 말라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삼락 형님이 있어 수일은 기분이 더 좋았다.

“혜서이 니 인사 안 하나? 여는 윤수일 씨, 여는 본명은 김현숙이고 가명은 김혜선.”

은아 씨가 가만 서서 수일을 흘끔거리는 혜선의 등을 인사하라고 떠밀었다. 혜선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이힐을 신은 혜선의 눈높이가 수일과 비슷했다. 170은 족히 되나 보았다. 안 그래도 작고 마른 은아 씨는 오늘따라 더 작아 보였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웬만한 사내들보다 셌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수일이라고 합니다.”

수일의 인사에 뭐가 부끄러운지 혜선은 몸을 배배 꼬았다. 영희는 혜선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콧등을 찡그렸다. 화장으로 잘 가리긴 했지만, 영희의 멍은 어제보다 짙어 보였다. 수일이 인사하려 쳐다보아도 영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일을 무시했다.

“수일이 니는 얼굴이 와 그라노? 아프나?”

“아니에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은아 씨의 물음에 수일은 민망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으이그. 술이 웬수다 웬수야. 요새 쫌 얼굴에 기름이 돈다 싶드만은 수일이 니도 참 걱정이다.”

은아 씨가 누이처럼 수일의 등을 후려치며 잔소리를 했다. 아팠지만 기분이 좋았다. 저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수일은 웃기만 했다.

마스터가 손님 오는 날 부를 노래 제목이 적힌 종이를 나눠 주었다. 달랑 두 곡만 적혀 있어 의아해하자, 가수들은 흥만 돋우고 댄서들이 메인이라고 했다. 그 말에 수일은 바뀐 홀을 둘러보았다. 어제 들어온 간이 무대 위에 조명까지 설치된 걸 보니 밀레니엄이 떠올랐다. 물론 조명도 무대도 밀레니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싼 티 나 보였다.

수일의 리스트엔 최헌의 <오동잎>과 일본 노래가 적혀 있었다. 수일은 미군 부대에서 밤무대 생활을 시작했던 아버지 덕에 웬만한 팝송은 다 알았지만, 일본 노래는 잘 몰랐다.

4, 5년 전부터 나이트에서 일하던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일본 음악과 만화책이 인기를 끌었다. 그것만 파는 잡상인이 따로 나이트에 들를 정도였는데, 특히 일본 포르노나 야한 잡지가 인기여서 수일조차 그 사람을 통해 몇 개 사기도 했었다.

“형님, 이거 무슨 노래예요?”

“이거 모르나? 억수로 유명한 엔칸데.”

삼락 형님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들어 보긴 했는데 불러 본 적은 없어서요.”

“그래? 여 부산에서는 쪽바리들 노래 서너 곡은 부를 줄 알아야 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사업차 일본 사람들이 제법 들른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방문한다는 강재욱의 특별한 손님도 일본 사람과 재일교포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삼락 형님은 그 손님들에 대한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말이 사업가지 야쿠자도 있고. 백사파하고 손잡고 별거를 다 한다 카드라.”

야쿠자란 말에 은아 씨와 혜선의 인상이 굳었다. 영희도 긴장한 눈치였다. 손님 받을 일 없는 수일이 들어도 심장이 졸리는 단어였으니 오죽할까 싶었다. 삼락 형님만 신이 나서 포르노도 찍고 마약도 수입한다는 그 사업가들에 대해 읊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자자. 우리는 노래만 부르면 된다 노래만. 접대하는 가시나들 다 온다 안 카나. 근데, 수일이 니는 우짜끼고? 연습해서 부를 수 있겠나?”

“글쎄요. 가사를 외우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수일이 난감해하자 삼락 형님이 노래를 대신 부르기로 해 주었다.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한 은아 씨 옆에 마스터가 다가가 슬쩍 등을 토닥였다. 은아 씨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마음이 떠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수일은 혼자 속상해 시무룩해 있었으나, 생각해 보니 두산도 제가 술을 처먹고 나뒹굴어도 좋아해 줬다. 그걸 봐선 은아 씨도 두산과 다를 바 없지 싶기도 했다. 정이란 게 이래서 무서운 법이었다.

“이기 머꼬? <연안 부두>? 부산에서 와 연안 부두를 찾고 지랄이고?”

삼락 형님이 혀를 찼다.

“부산 싸나이 존심이 있지, 내 이거 몬 부른다.”

종이를 찢을 듯 펄럭였다. <연안 부두>와 부산 사나이의 자존심이 무슨 상관인지는 몰랐지만 수일이 나섰다.

“형님, 그거 제가 부를게요.”

“그래, 수일이 니가 불러라. 서울 하고 인천 하고 가깝다 아이가.”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가져가겠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재밌어서 혼자 웃었다. 혜선은 수일이 말을 할 때마다 흘끔거렸고,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딴청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수일은 얼굴이 왜 그러냐는 은아 씨의 말이 떠올라, 부지런히 손바닥으로 볼을 비비고 눈을 크게 뜨려 노력했다.

옹기종기 모여 리허설을 하면서 틀린 부분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었다. 혜선은 노래는 별로였지만 영희처럼 춤을 잘 췄다. 방미의 <나를 보러 와요>를 어찌나 격렬하게 부르던지 수일은 웃음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혜선은 서 있기만 해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영희도 얼굴에 든 멍과 상관없이 여전히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반면 삼락 형님은 그새 감을 잃어 삑사리도 많이 나고 제 톤을 찾지 못해 고생했다.

그래도 이렇게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니 꼭 장기 자랑을 연습하는 동기들 같았다. 정겨웠다. 딱딱하던 영희의 얼굴에도 언뜻언뜻 미소가 비쳤고, 혜선은 어느새 은아 씨의 팔짱을 끼며 언니, 언니 했다.

수일의 옆에 선 삼락 형님은 몇 년 전 지방에서 만났을 때 얘기를 꺼냈다. 유독 추웠던 그날, 여관방에서 시켜 먹었던 자장면이 참 맛있었다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 그게 뭐라고 수일은 소리 내어 웃었다.

특별한 손님을 위한 1차 리허설을 마친 뒤 내일은 회식이 있을 예정이라는 말을 끝으로 각자 흩어졌다. 수일은 10시 무대를 위한 리허설에 바로 들어가 세 곡 정도 부르고 내려왔다.

삼락 형님은 사모님을 만나러 갔고, 혜선과 영희는 사장이 와서 저녁을 먹인다며 데리고 나갔다고 했다. 은아 씨는 대기실에서 혼자 김밥 한 줄을 먹었다.

“니는 월급날이 은제고?”

“다음 주 목요일이요.”

“벌쌔로 그리 됐나? 니는 월급 깎는단 소리 없드나?”

“네?”

김밥 하나를 입에 넣은 은아 씨는 우물우물 씹었다. 월급을 깎다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음식을 삼킨 은아 씨가 한숨을 쉬었다.

“내도 받고 나서야 알았다. 원래 주기로 했던 것보다 오십만 원이 짝데. 가서 따짔드만은 마음에 안 들면 위약금 물고 나가라 카드라. 팁도 안 들어오는데 으데서 빵꾸 난 돈을 메꾸겠노?”

수일은 그제야 은아 씨가 왜 요 며칠 기분이 나빴는지 알 것 같았다. 일이십만 원도 아니고 오십만 원이나 깎다니 말이 안 됐다. 전속이라 다른 나이트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위약금이 월급의 세 배나 되었으니, 그걸 물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수일은 제 월급 180만 원이 130으로 준다고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났다. 지금이야 돈 쓸 일이 없지만, 두산과 함께 서울로 가면 당장 방부터 구해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안 그래도 종종 두산에게 돈을 좀 아껴 쓰자 말할까 싶었는데 제 돈도 아니라 함부로 얘길 꺼내기가 어려웠다.

서울에 가면 상엽에게 전화를 넣어야지. 낮엔 노가다를 뛰자. 수일은 써 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두산이 저를 보살펴 주니 서울에선 자기가 두산을 보살피고 싶었다. 두산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니는 두사이가 있으이까 아닐 수도 있고. 함 물어나 바라.”

“네.”

은아 씨는 마지막 김밥 덩어리를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수일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열 시로 공연 시간을 바꾼 뒤 두산은 수일의 무대를 보지 못했다. 오늘은 제법 노래를 잘했는데 들려주지 못해 아쉬웠다. 박수 소리는 작았지만, 그럼에도 수일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언제 왔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무대 뒤로 나오는데 두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일의 얼굴이 환해졌다.

“방금.”

“노래 못 들었지? 나 오늘 좀 잘했는데.”

“니야 맨날 잘하지. 이리 온나.”

두산은 씨익 웃어 주고 팔을 벌려 수일을 꼭 안았다. 겨우 서너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두산의 품이 몹시 그리웠다. 수일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두산은 수일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이마에도 입을 맞추었다. 수일이 올려다보자 이번엔 입술에 쪽 하고 입맞춤을 했다.

“다시 들어가 봐야 해?”

“와?”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가자.”

“응.”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낮보다는 빗줄기가 약했다. 수일은 창문을 조금만 열어 두고 차창에 기대는 대신 두산의 옆모습을 감상했다. 두산은 수일이 저를 보는 걸 알자 좋다고 웃었다.

“내가 쫌 잘생깄제?”

“뭐래.”

하여간, 애가 겸손을 몰랐다. 코만 잘생겼다고 해 주려다, 혹시 서운해할까 봐 수일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두산이라면 서운해하는 대신 따지고 들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와이셔츠 차림의 두산은 팔을 동동 걷어 올린 채 운전대를 잡았다. 근육질의 탄탄한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만지고 싶어진 수일은 손을 뻗어 슬쩍 쓸었다. 두산이 고개까지 돌려 가며 수일을 보았다.

“운전.”

수일의 말에 앞을 보긴 했지만, 다시 팔뚝을 쓰다듬자 두산이 옆을 흘끔 쳐다보았다.

“에헤이, 이 양반이 와 이라지?”

“왜? 만지면 좀 어때서?”

“운전 중이다 아이가.”

“운전해.”

“참말로.”

말을 하다 말고 두산은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팔뚝만 쓰다듬었을 뿐인데 무슨 놈의 자지가 저리 잘 서나 몰랐다.

“참말로.”

두산을 따라 하며 수일은 혀를 찼다.

건물 앞에서부터 두산은 키스를 퍼부었다. 넘어질 고비를 넘기고 집에 들어왔지만, 어찌나 힘주어 밀어붙이던지 수일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두산은 수일의 허리가 꺾일 정도로 몸을 숙이고 깊게 키스했다.

수일은 고개를 비틀어 두산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두산이 제게 하듯 쪽쪽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고 각지고 사내다운 턱선을 따라 짧게 쪽쪽쪽 입술 자국을 새겼다. 두산이 간지러운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나 하고 싶어.”

수일은 두산의 귓가에 속삭였다. 매번 두산이 먼저 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번은 수일이 먼저 말했다.

수일의 말에 두산이 달려들듯 입술을 덮쳤다. 마구잡이로 혀를 밀어 넣고 아랫도리를 비벼 댔다.

수일은 키스를 받다가 입술을 떼고 두산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두산의 입에서 아, 하고 신음이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근잘근 목덜미를 씹고 귀를 삼킨 다음 다시 입술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 맛에 정신을 차려 보니 두산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났다.

두산은 흥분에 겨워 피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고 혀를 얽었다. 둘은 침과 피가 섞인 타액을 쭙쭙 빨기 바빴다. 이가 부딪히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 두산이 커다란 손으로 수일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뜨거운 시선으로 수일을 바라보며 애달프게 수일을 불렀다. 바로 앞에 있는데 마치 안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손으로 수일의 얼굴 구석구석을 쓰다듬었다.

“왜 그래?”

수일은 웃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데 두산은 진지했다.

“수일아. 내 니밖에 읍따.”

이리 말하면서 수일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꾹 제 입술을 눌렀다. 수일도 진지해졌다.

“나두 너밖에 없어.”

“내 없이 어데 가지 마라.”

“응.”

다시 도장을 찍었다.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라.”

“응.”

수일이 대답할 때마다 두산은 입술에 도장을 찍었다. 수일보다 한참 어리면서도 늘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두산이 지금은 제 나이처럼 굴었다. 수일에게 너만 안겠다고 다짐했던 날처럼, 두산은 수일에게 제 옆에 있으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날처럼 두산은 그렇게 어려 보였다.

수일은 얼굴을 잡은 커다란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 달래듯 어루만졌다.

“두산아, 나 어디 안 가. 니가 가라고 할 때까지 꼭 붙어 있을게.”

“머라카노? 내가 가라케도 붙어 있으야지.”

“어떻게 그러니?”

“우째 그라긴? 고마 그라믄 된다. 내가 그런 소리 할 리도 없지만.”

두산은 자신만만했다. 절대 자신이 수일에게 가라고 할 리 없다고 장담을 했다.

수일은 두산이 가라 하면 가고 있으라 하면 있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가라는 데도 붙어 있을 자신은 없었다. 두산처럼 자신만만하면 좋으련만, 지금 수일에겐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 없어서 대신 두산에게 키스했다. 제가 물어서 너덜거리고 피가 나는 입술을 입 안에 머금고 빨았다. 두산은 인상을 쓰면서도 수일을 말리지 않았다. 입을 더 크게 벌려 수일이 원하는 만큼 키스하게 내버려 두었다. 물고 빨게 두었다.

수일은 짐승처럼 두산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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