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은 평소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언뜻 새벽 3시가 넘은 듯했다. 찬물에 샤워했는지 늘 뜨겁던 두산의 몸이 서늘했다. 수일은 한기를 느끼면서도 두산의 품에 파고들었다. 두산이 뭐라고 말을 했으나 잠결이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꿈에서 수일은 내내 쫓겨 다녔다. 처음엔 빚쟁이들이, 그다음엔 오성관 박 사장이 등장해 험한 욕을 퍼부었다. 사장을 피해 들어간 호텔 방에는 문신이 가득했던 그 남자가 수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일에게 침을 뱉고 뺨을 때렸다.
쓰러진 수일을 젊은 강재욱이 내려다보며 발로 툭툭 건드렸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젊은 강재욱이 사라지고 지금의 강재욱이 나타났다. 수일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하는데 입에서 전화벨 소리를 뱉어 냈다. 기괴했다.
힘겹게 눈을 뜨자 전화가 울리는 중이었다. 수일은 땀에 젖어 비몽사몽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풀썩 주저앉았다. 전화는 끊길 줄 몰랐고 수일은 기어가서 겨우 받았다.
“…여보, 흠, 세요.”
- 여보세요. 저, 죄송한데, 거기 윤수일 씨 계십니까?
서울 말씨였다.
“전데요?”
- 형? 나야, 상엽이.
상엽의 목소리에 잠기운이 달아났다. 수일은 작게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웬일이야, 잘 지냈어?”
- 어. 나야 잘 지냈지. 형은 지낼 만해?
“응. 좋아.”
- 그때 형이 알려 준 번호로 전화했더니 여기로 하라고 그러더라구.
“그랬구나.”
수일은 잠긴 목이 신경 쓰여 목청을 가다듬었다.
“참, 너 직장은 구했니?”
- 어. 다행히. 지난주부터 출근했는데 사장도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구. 아직까진 좋아.
“정말 잘됐다.”
몇 달 전, 상엽은 작은 싸움에 휘말렸는데 하필 상대가 경찰 간부 아들이었다. 재수가 지지리도 없었다. 한 달 넘게 경찰서를 들락날락했고, 경찰이 업소로 들이닥치기도 했다. 당연히 일하던 나이트에서 잘리고 서너 군데를 전전하다 노가다를 뛰었다. 육체를 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특히 유흥 물을 먹은 상엽은 노가다에 진저리를 쳤다.
- 근데 형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냐, 자다 일어나서 그래.”
- 난 또. 밥은 잘 챙겨 먹지?
“그럼. 참, 상엽아, 언제 부산에 놀러 오지 않을래?”
그전까진 이런 생각을 전혀 못 했었는데, 상엽을 초대하고 싶어졌다. 제 사정이 나름 좋아진 탓도 있지만, 다시 없을 기회 같았다.
- 그래도 돼?
“당연하지. 여기 바다 엄청 예뻐. 회도 맛있구. 내가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와. 숙소도 알아봐 줄게.”
- 이야, 형 돈 많은 사모님 물었나 부네.
수일은 그냥 웃었다. 수일의 인생에서 여윳돈이 생겼던 날은 월급날이 아니라 돈 많은 사모님이나 사장님을 만났을 때뿐이었다. 그들이 쥐여 준 팁으로 신세 진 사람에게 술을 사거나 밥을 샀지만, 수일에겐 그런 일도 최근에는 자주 있지 않았다.
- 형, 실은 말야….
상엽이 말을 끌었다. 안부나 물으려고 비싼 통화비를 물어 가며 전화를 한 건 아닐 터였다. 공중전화인지 동전 넣는 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괜히 목이 탔다.
- 그게, 최근에 형에 관해서 묻고 다니는 남자가 있는데, 아무리 봐도 흥신소 사람 같애. 형, 혹시 거기서 빚이라도 졌어?
묻는 목소리에 근심이 가득했다. 흥신소 사람이라.
“빚은 무슨. 빚이라면 지긋지긋하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이제 빚은 안 져.”
- 그지? 암튼, 몸조심해. 부산 조폭들 말도 못 하게 험하잖아. 괜히 이상한 사람한테 걸려서 고생하지 말구.
이상한 사람이란 말에 바로 두산이 떠올라 수일은 소리 없이 웃었다.
“조심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 그래, 형. 이번엔 느낌이 좀 그렇네. 참, 그리구, 여기 가수 자린 아닌데 잘하면 일자리 구할 수 있을 것 같애. 좀만 기다려 봐.
“정말? 고마워, 상엽아.”
안 그래도 어제부터 수일은 두산과 함께 서울로 갈 생각에 붕 떠 있었다. 두산이 자리 잡을 때까지는 수일이 돈을 벌 생각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밤무대 일이 제일 편한 수일은 상엽이 자리를 알아봐 준다니 기특하고 고마웠다.
“나 서울 가기 전에 꼭 놀러 와.”
- 알았어. 사장한테 부탁해서 휴가 한번 내 볼게. 형이랑 바다 보면서 술 한잔하고 싶다.
“나두.”
전화를 끊어야 하건만 또 동전 넣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상엽은 비싼 통화료를 침묵으로 허비했다.
이럴 애가 아닌데.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수일은 점점 불안해졌다.
- 형, 혹시 말야, 있잖아 그 왜, 그때 일… 갑자기 생각나고 뭐 그러는 거 있어?
“응? 그때 일이라니?”
- 아… 아냐 아냐. 딴 사람하고 헷갈렸다. 요새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형, 나 그만 끊어야겠다. 휴가 잡고 다시 전화할게.
“어? 어 그래. 들어가. 몸 조심하구.”
상엽은 말을 하려다 말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일이라니. 무슨 소린지 수일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상엽의 말대로 수일을 다른 사람과 헷갈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흥신소 사람은 왜 자신을 묻고 다니는 걸까. 수일에게는 묻고 다닐 만한 것이 없었다. 영화 소재로도 쓰이지 못할 삼류, 아니 사류 인생. 그게 수일이었다.
수일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상엽의 전화가 반가웠지만, 평소답지 않은 그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딱지가 앉은 손이 너무 가려웠다. 긁지 않으려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상엽은 수일보다 한 살이 어렸다. 처음 만났을 때 수일이 스물, 상엽은 열아홉이었다. 가정 형편은 비슷하거나 수일보다 더 어려웠다. 수일이 빚에 허덕일 때 상엽도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서로 여유가 없어 만나도 데면데면했는데, 어느 순간 가까워졌다. 동병상련이었다.
가난과 빚에 발목이 잡힌 두 사람은 같은 나이트에서 일한 몇 년을 제외하곤 각자 사느라 바빴다. 그래서 1년에 겨우 두세 번만 만났다. 만나도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간단히 안부만 묻고 술만 마셨다.
그래도 상엽은 가족이 있었다. 보증을 잘못 선 데다 사기까지 당한 부모님이지만 상엽과 부모님은 서로 의지하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가난해도 가족이 있는 상엽이 수일은 부러웠다.
수일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 길 가다 죽어도 찾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수일은 술만 취하면 상엽에게 제 주검이라도 거두어 달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상엽이라면 자신의 시신을 거두어 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알고 지내기를 16년이었다. 애석하게도 두 사람 중 누구도 형편이 좋아지진 않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상엽이 목돈이 생긴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언제였더라. 그녀가 죽은 해였던가 그다음 해였던가. 왜 이리 기억이 안 나나 몰랐다. 어디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했었는데. 물론 당첨금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진 않았지만, 당시 상엽은 가족들과 길거리에 나앉기 일보 직전이어서 그 돈을 엄청 요긴하게 썼다.
수일은 왜 갑자기 그 일이 떠오르는지 몰랐다.
가끔 이런 식으로 조각난 기억이 돌아왔다. 젊은 강재욱의 모습처럼,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문제는 그 조각들의 빈틈을 메울 수가 없다는 거였다. 답답했다.
벅벅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주먹을 쥐고 있었건만, 그새 딱지 진 손을 얼마나 긁었던지 피가 진득했다. 수일은 놀라서 화장지로 피를 닦았다. 따가워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다 아문 상처를 건드려 손이 엉망이 되었다.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팬티 차림으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옷방으로 기어갔다. 서울에서 가져온 옷들을 두산이 어디에다 뒀는지 입을 것이 새것밖에 없었다. 수일은 고민하다 밤에 빨아 둔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들자 고통이 찾아들었다. 어젠 이 정도로 아프진 않았는데 온몸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진통제를 찾아 먹고 컵을 내려놓는데 식탁 위에 개발새발로 쓴 두산의 메모가 있었다.
일 있어서 먼저 나간다. 점심 시키 무라. 서방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