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81)

“행님, 일나이소.”

현철의 목소리에 수일은 눈을 떴다.

10시밖에 안 됐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행님, 준비 하셔야지예?”

“무슨 준비요?”

“사장님 어머이 팔순 잔치. 나이트 뺀드랑 은아 누님이랑 다 온다 아입니까. 행님도 퍼뜩 준비하이소.”

수일은 금시초문이었지만 일단 서둘러 세수를 하고 무대복을 준비했다. 남의 잔치에선 노래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다들 가는데 수일이라고 빠질 순 없었다.

12시부터 시작이라는 팔순 잔치에는 댄서들만 빼고 오성관 식구들이 모두 동원되는 모양이었다. 숙소 앞이 시끌벅적했다.

봉고 1대에 동생들 넷과 종업원들 셋이 타고, 빨간 프라이드에는 밴드를 포함 수일까지 네 명이 탔다. 수일은 마스터 옆 보조석에 앉았다. 밴드 중 유일하게 가정이 있는 베이시스트만 따로 오기로 했다.

“두사이는?”

“일이 있대요. 이번 주까진 바쁘다구 어제 안 들어왔어요.”

당연하다는 듯 두산의 안부를 묻는 마스터에게 수일이 또 당연한 듯 답했다.

“두사이 가는 오성관 소속도 아인데 참 뻔질나게 자러 온다.”

뒤에 앉은 키보드 웅이가 말했다.

“일 도와주러 온다 아이가.”

“하는 일이 없으이까 하는 말이지. 맨날 사장이랑 노닥거리고 가시나들하고 춤추고 놀다 가드마는.”

“내사 부럽다. 새 가시나들만 오면 다 글마 자지 빨아준다 카든데 무슨 복을 타고나야 그라긋노.”

마스터와 웅이 그리고 드럼 치는 재범이가 저들끼리 얘기를 주고받았다. 수일은 가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산이 오성관 소속이든 아니든, 어차피 오성관은 백사파가 관리하는 업장이라고 은아 씨에게 들어서 그러려니 했다.

어제는 현철이 수일을 집에 데려다주었는데, 나이트에 놀러 온 현철의 애인까지 숙소로 함께 왔었다. 거실에선 둘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들의 연애를 부러워하다 잠이 든 수일은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수일이 니는 여 을매나 있는다꼬?”

“3개월이요.”

“그라믄 9월 중순에 끝나나?”

“네.”

계약 얘기가 나오자 수일은 마음이 무거웠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얼른 다음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들릴 듯 말 듯 옅은 한숨을 쉬었다.

“서울 가지 말고 여 있으믄 안되나? 어차피 가수도 없어가 사장도 골 아픈 거 같든데.”

수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사장은 지금 계약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수일이 손님을 안 받는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사장한테 알랑방기 함 끼바라. 사장은 지한테 비비는 아들한텐 사죽을 몬 쓴다.”

“…네.”

“그냥 하는 소리가 아이고 진짜 시늉이라도 해보라꼬. 알긋제?”

“네.”

마스터는 수일의 앞날을 제 일인 양 걱정했다.

“하이고야, 수일이 니는 그 성격에 우째 이런 일을 하노? 참말로 용타.”

네, 네, 짧은 대답만 하는 수일이 답답한지 마스터가 혀를 찼다.

팔순 잔치가 열리는 건물은 흔한 5층짜리 웨딩홀 건물이었다.

사장은 행사용으로 쓰는 5층을 통째로 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부조금을 받는 곳이 있었다. 현철과 다른 동생 하나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스터를 포함 밴드 직원들이 거기로 가서 흰 돈 봉투를 내밀었다.

“일은 일대로 시키고 돈은 돈대로 처받고. 내사 다른 나이트 있으믄 당장 때리치아삐고 싶다.”

웅이가 욕을 하며 수일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제 모친 팔순 잔치에 공짜로 동원하면서 부조금도 받는 알뜰한 사장에게 하는 소리였다.

“형님, 저 3만 원만 빌려주세요. 돈 내는 줄 모르고 그냥 와서….”

수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마스터에게 돈을 빌렸다.

“수일이 니는 5마넌 내라. 니 이름 딱 쓰고. 그래야 사장이 좋아할 꺼 아이가.”

수일은 하는 수 없이 5만 원을 빌려 봉투에 윤수일이란 이름을 크게 적었다. 현철이 돈을 받고 방명록을 내밀었다.

“행님, 두사이도 온다꼬 어데 가지 말라캅니다.”

“네.”

정수를 포함한 나이트 종업원이 여기서도 같은 옷을 입고 서빙을 했다.

홀 정중앙에는 화려한 색깔로 장식된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위로 플래카드엔 ‘축 팔순. 김순자 할머니 만수무강 하이소’라고 적혔다.

사장은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노모 옆에 같이 한복을 입고서 연신 웃고 있었다.

수일은 사장과 노모에게 다가가 축하드립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하이고, 머시 이래 잘생깄노? 느그 집 아가?”

사장의 어머니는 수일을 보자마자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어 엄마. 우리 집 가수 아이가. 수일아, 인사해라. 우리 어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오야, 이래 잘생긴 남자한테 인사를 다 받고 내 무신 복이고? 아유 곱다 고와.”

주름진 손으로 수일의 손등을 쓰다듬고 잡은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님도 참 고우세요.”

하고 말해 주었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수일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장도 활짝 웃으며 수일의 등을 두드렸다.

“고맙데이. 저짝 방에 은아랑 삼락이도 와 이따. 거서 준비해라.”

“네.”

사람 셋이 들어가면 꽉 차는 조그만 방에 은아 씨와 삼락 형님이 벌써 무대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수일을 보자 다들 반가워했지만, 이른 시간부터 잔치에 차출된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돈이라도 주든가. 내 환갑잔치 잡힜는데 취소했다 아이가. 그기다 부주도 따로 받대.”

주말 낮에 회갑연을 도는 은아 씨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내는 해운대서 여 온다꼬 택시비 썼제, 부주도 했제. 해운대 사모가 가지 말라꼬 으찌나 애원해싸턴지. 씨발, 때리치우든가 해야지. 드르버서 몬 살겄다.”

사모와 잘되고 있는 모양인지 삼락 형님의 입에서 처음으로 때려치우겠단 소리가 나왔다.

두 사람과 달리, 수일은 사실 잔치에 와서 가슴이 뭉클했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내년에 팔순 잔치를 하실 나이였다.

변변치 못한 아버지 탓에 할머니는 회갑연도 못 받고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60살 생일날, 아버지는 중국집에 데려가 탕수육과 자장면을 사 주셨었다. 그것도 좋다고 할머니가 어찌나 행복해하던지, 수일은 그 모습이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

수일은 사장의 어머니를 돌아가신 할머니라 생각하고 열심히 노래를 부를 작정이었다. 혼자서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고 무대복을 입었다. 화장은 조금 옅게 했다. 아무래도 밤무대가 아니니 굳이 짙게 할 필욘 없었다.

준비를 다 마칠 때 즈음, 방문이 열리더니 두산이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수일을 보고 씨익 웃고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래 쫍은 데서 준비하나? 내는 몬 들어가겠네?”

“두사이 왔나?”

“머 쫌 드실랍니까? 수일이 행님도 머 쫌 갖다드리까예?”

갑자기 존대하더니 수일의 팔을 잡아당겼다. 수일은 두산에게 잡혀 문밖으로 나갔다.

“웬 존대?”

“아재하고 누님 앞에서 반말하면 니가 머가 되노? 그래서 그라지.”

수일은 피식 웃었다.

“머 쫌 문나?”

“온지 얼마 안 됐어.”

“떡이랑 쫌 가따주까?”

“응. 마실 것두.”

“알았다. 내 퍼뜩 갖다주께.”

이렇게 말하고 두산은 ‘퍼뜩’ 움직이는 대신 수일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미간을 구겼다.

“왜?”

“화장이 그기 머꼬?”

“별로야? 낮이라서 좀 연하게 했는데.”

수일은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가시나 같다 아이가. 루주도 발랐나?”

“응. 나만 바른 거 아니구 형님도 발랐어.”

“니하고 삼락이 아재하고 같나? 지아라.”

이렇게만 말한 두산은 등을 획 돌려 뷔페 음식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일은 입을 삐죽하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티슈로 립스틱을 지웠다.

“와?”

“좀 과한 거 같아서요.”

“그기 머시 과하노? 니는 느무 연하게 발라서 탈이다.”

진한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삼락 형님은 되레 좀 진하게 하라고 자기 립스틱을 던져 주었다. 수일은 손에 가만 들고만 있다 나중에 돌려주었다.

은아 씨는 평소처럼 화려하게 화장을 했다.

“여 오시는 할매 할배들이 내 미래의 고객 아이가. 예쁘게 보이야지.”

반짝이는 드레스에 짙은 화장을 하자 꼭 디너쇼 무대에 서는 가수 같았다. 예뻤다.

곧 두산이 막내 영수를 데리고 떡과 음료수를 갖다주었다.

“여 호텔 조리사도 와 있다. 아재하고 누님도 노래만 부르고 가지 말고, LA갈비도 꿉고 있으이까 꼭 먹고 가이소.”

그러면서 시선은 수일의 입술에 두고 있었다. 립스틱을 지웠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수일은 다 지워 놓고도 혹시나 해서 손등으로 입술을 몇 번 문질렀다. 두산이 입꼬리를 올렸다.

팔순 잔치가 시작됐는지 마이크에 사장의 음성이 들렸다.

은아 씨와 삼락 형님은 나가 볼 생각을 안 했지만, 수일은 슬쩍 문을 열고 나가 뒤에서 잔치를 지켜보았다.

30여 분을 사장을 포함 자식들과 며느리 손주들까지 모두 나와 노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불렀다. 수일은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저렇게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우리 할머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령 할머니가 살아 계셨어도 이런 화려한 잔치는 절대 못 해 드렸을 터였다. 수일도 아버지처럼 중국집에 데려가 탕수육에 자장면을 사 드렸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살아 계셨더라면 그걸 드시고도 환하게 웃으셨겠지만.

수일은 눈물을 훔치고 열심히 박수를 쳤다.

무대는 수일이 제일 먼저 시작했다. 저 뒤편에, 키도 덩치도 큰 두산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수일은 신나는 곡인 <황홀한 고백>과 <아파트> 두 곡을 부르고,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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