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2권) (14/81)

눈을 돌리면 푸른 바다가 보이고, 그 옆을 보면 두산이 누워 있었다.

수일은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부셨지만, 저 반짝이는 바다를 보고 있는 게 너무 좋아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마른 몸을 안고 있는 두산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고 숨소리를 들었다.

그냥 잠만 자려고 이 비싼 델 온 건 아닐 텐데, 수일은 괜히 두산에게 미안했다.

새벽까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고군분투하다 잠이 든 두산의 얼굴은 어린 티가 많이 났다.

아무것도 없이 침으로만 될 것이 아니었다. 두산은 워낙 손도 크고 두꺼운지라 손가락만 넣어도 아팠다. 수일이 너무 긴장한 탓에 그 손가락도 들어가다 말았고, 게다가 구멍을 벌리는 행위가 그렇게 민망할지 몰랐던 수일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두산은 한참을 수일의 엉덩이를 핥고 애무하다 결국 넣어 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잔뜩 발기한 두산의 성기를 입으로라도 풀어 주고 싶었지만, 입 안도 헐어 수일만 펠라티오를 받았다.

어떻게 하는지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수일은 자책했다. 두산이 실망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수일은 모로 누워 두산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사나워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멋져 보였다. 손가락으로 짙은 눈썹을 훑자, 두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일은 손을 뗐다.

혹시라도 깰까 봐 이번엔 얼굴에 대지 않고 허공에서 두산의 얼굴을 따라 선을 그렸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을 따라 그리고, 얼굴에서 그나마 봐줄 만한 도톰하고 큰 입술을 따라 그렸다. 지금 보니 코가 참 잘생긴 것도 같았다.

각지고 투박한 턱선을 따라 그리다 수일은 손을 내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수일은 부드러운 시트와 이불을 만지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두산의 몸에도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목욕할 때 썼던 비누 냄새가 제 몸에서도, 두산의 몸에서도 났다. 이 호텔 투숙객이라면 모두 같은 비누를 쓰겠지만, 그래도 수일은 그게 뭐라고 코를 킁킁대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억에 새겨 두려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낀 수일은 두산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샤워 가운을 걸치고 응접실로 가 앉았다.

응접실에선 해운대 해변이 한눈에 보였다. 밤보다 훨씬 예뻤다. 모래사장이 보석처럼 반짝였고, 아침 바다를 산책하는 사람들은 더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했길래 저 사람들은 저렇게 행복한 걸까?

수일은 무릎을 안고 가만 바다를 내다보았다.

“와 벌써 일났노?”

알몸으로 응접실로 나온 두산은 수일에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잘 잤나?”

“응.”

“내한테는 와 안 물어보는데?”

두산의 말에 수일이 피식 웃었다.

“잘 잤어?”

“어. 억수로 잘 잤다.”

두산은 다시 수일에게 입을 맞췄다. 쪽쪽 두 번 입을 맞추고, 수일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잠이 안 오드나?”

“아냐. 많이 잤어.”

수일이 웃자 두산은 손가락으로 수일의 볼을 툭 하고 건드렸다.

“씻자.”

두산은 수일의 손을 잡아당겼다. 욕실로 들어가 수일의 몸에서 샤워 가운을 벗기고, 물을 틀어 온도를 맞췄다.

그리고 수일의 허리를 안아 들어 제 허리에 올렸다. 수일이 당황하자 능글맞게 웃으며 뽀뽀를 했다.

“그래 있으면 미끄러진다. 다리로 내 허리 감고. 옳지. 목도 안아라.”

수일은 두 다리로 두산의 두꺼운 허리를 꼭 끌어안고 목도 끌어안았다.

“안 무거워?”

“무겁지.”

이를 드러내며 웃는데 참 못생겼다. 수일은 두산에게 입을 맞췄다.

샤워기 물줄기가 두 사람의 몸을 타고 내렸다.

“이라믄 발바닥에 물이 안 닿을 꺼 아이가. 젖어도 그래 심하게 안 젖을 끼고.”

“샤워는 어떻게 하려구?”

“물이 알아서 씻기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두산은 수일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비볐다. 물줄기가 두 사람을 타고 흘러 몸이 젖어 갔다.

두산은 물줄기와 같은 방향으로 수일의 목덜미를 혀로 핥아 내리고, 어깨선을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간지러워.”

수일이 몸을 비틀어 웃었다. 두산이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수일은 물에 젖은 두산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제 입술로 물었다. 츄릅 빨아올리고, 쪽쪽 짧게 입맞춤을 했다.

입 안으로 두산의 혀가 들어와 부드럽게 수일의 상처 난 곳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입맞춤을 하자 두산의 발기한 것이 수일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수일은 미안했다. 어제도 자기 손으로 자위한 두산이었다.

“입으로 해 줄까?”

“됐다. 입도 안 성한 기. 낫거든 해도.”

“괜찮은데….”

수일이 눈치를 보자, 두산은 가만 수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니 어제 일때메 그라나?”

“…….”

“마음 쓰지 마라. 니도 내도 둘 다 처음 아이가. 이제 다 알아바쓰니까 담에 하면 된다.”

“그래두. 이렇게 비싼 델 와서 잠만 자다 가잖아.”

“잠만 자기는. 이래 샤워도 하고, 밥도 묵고 갈 낀데?”

장난스럽게 말하며 분위기를 맞춰 주는 두산에게 너무 미안했다.

수일은 눈물이 핑 돌았다.

“또또. 내 진짜 개안타.”

두산은 다정하게 키스를 해 주었다. 손으로 입술로 수일의 몸을 달래 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수일은 두산의 목을 꼭 껴안고, 안은 다리를 조였다.

그렇게 샤워를 끝내자 두산은 수일의 마르고 볼품없는 몸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수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엉덩이며 음부까지 손을 넣어 닦았다.

“우째 여 털도 예쁘게 났노?”

수일의 음모를 수건으로 닦으며 하는 두산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두산은 수일을 올려다보며 이번엔 수건 대신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눌렀다. 그러다 입술을 갖다 댔다.

“으응.”

수일은 입술의 감촉에 몸을 떨었다. 혀를 세워 음모를 살살 핥아 대던 두산은 바짝 선 제 것은 처리도 못 하면서 축 처져 있는 수일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수일이 두산의 어깨를 꽉 쥐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주저앉으려 하자 두산은 입을 뗐다.

두산은 수일을 안아 올리고 훤한 거실로 나갔다. 해변이 보이게 수일을 소파에 앉힌 다음,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수일의 것을 다시 물었다.

수일은 밝게 빛나는 바다를 보며 두산의 애무를 받았다. 저 바다가 더없이 음탕해 보였다.

목이 절로 뒤로 젖혀졌다. 제 것을 빨아올리는 젖은 소리가 그렇게 음란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몇 번 빨지도 않았는데 수일이 사정했고, 두산은 수일의 것을 문 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수일은 온몸이 벌게진 채 두산의 어깨를 꼬집었다.

펠라티오를 마친 두산이 고개를 들어 수일을 올려다보았다. 수일은 두산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두산은 요동치는 수일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고 마구 비벼 댔다.

“따가워.”

수일이 낑낑대며 바르작거리자, 두산이 고개를 들었다.

“수염도 깎았는데 따갑나?”

“응. 따가워.”

수일은 손을 뻗어 두산의 입 주위를 쓰다듬었다.

“만져 봐. 까칠하잖아.”

“어데?”

두산은 제 손을 올릴 생각도 않고, 수일의 손을 잡아 입 안에 넣었다. 쪽쪽 빨더니 맛있다, 했다.

수일이 웃었다.

“배고프다. 밥이나 무러 가자.”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산은 수일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자기도 옷을 입으려 옷장을 열었다.

“이거 니가 빨았나?”

“응.”

“은제?”

“너 잠들고 나서.”

수일은 두산이 잠든 뒤, 호떡 시럽이 묻은 두산의 검은 티셔츠를 빨았다. 비싼 폴로 티셔츠에 얼룩이 질까 비누로 열심히 비볐다. 젖은 옷을 옷걸이에 걸고 드라이기로 말리자 새것처럼 깨끗해졌다.

“머할라꼬? 세탁기 돌리면 되는데.”

“그래두.”

자기는 초라해도 두산은 멋져 보였으면 싶었다. 얼굴이 사납긴 해도, 체격이 좋아 검은색이 잘 받았다.

수일은 제가 빤 옷을 입은 두산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조식을 먹으려 로비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자, 잘 차려입은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았다. 그들 사이에서 수일이 제일 초라해 보였다.

낡은 셔츠가 마음에 걸려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에 상처 나고 멍도 든 데다 발도 성치 못해 절뚝거리며 두산의 뒤를 쫓아가자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봤다.

수일은 그만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음식 냄새를 맡자 배가 고팠다. 어제 아무것도 못 먹어 배에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어 그나마 창가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니는 여 앉아 있으라. 내가 갖다 주께.”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터가 따라 주는 물을 마시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창가에 앉은 중년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일은 괜히 민망해,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쓱 만지고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두산은 바삐 움직여 수일의 앞에 음식들을 가져다주었다.

수일은 눈앞의 음식을 보자 배고픔이 극에 달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두산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역국에 밥을 말았다. 김치를 척척 얹어 몇 숟갈 뜨자 살 것 같았다. 소불고기와 소시지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졌다.

두산이 음식을 갖다주다 말고 자리에 앉았다.

“천천히 무라.”

“너도 어서 먹어.”

수일은 입 안에 먹을 걸 가득 넣고 웅얼거렸다.

밥 대신 크루아상에 버터를 발라 커피와 함께 먹는 두산을 보고 수일이 웃었다.

“와 웃노?”

“나는 빵보다 밥이 좋은데.”

“맨날 묵는 기 밥인데 그래 좋나?”

“응.”

“빵도 맛있다. 함 무 바라.”

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먹는 미역국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론 생일날에도 미역국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수일은 가끔 제 생일이 언젠지도 잊고 지냈다.

수일이 지나치게 많이 먹자 두산이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수일의 앞에 있는 접시를 치웠다.

“와 이리 마이 묵노?”

“…배고파서.”

“니 몇 접시 문지는 아나?”

수일은 빈 접시가 몇 갠지 세어 보았다. 세 접시였다. 아까 먹은 건 이미 웨이터가 치워 정확히 몇 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탈난다. 내 디저트 갖고 올 테니까, 그거 묵고 가자.”

“저기, 나 미역국 한 번만 더 갖다주면 안 돼?”

수일의 부탁에 두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화를 참는 건지 한숨을 쉬는 건지 숨을 크게 내쉬더니 알았다, 했다. 알았다고 해 놓고 두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당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뒷모습을 보던 수일은 서둘러 따라 나갔다.

미역국이 뭐라고.

수일은 바보같이 미역국 한 그릇 더 달라고 말한 자신을 나무랐다.

아픈 발로 총총 뛰어 급히 뒤쫓았다. 하지만 두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방으로 올라갔나?

수일은 로비를 두리번거리다,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 시선에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자기를 버리고 가 버린 두산이 못내 서운했다.

수일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터벅터벅 호텔 밖으로 나갔다.

어디가 모자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하나 몰랐다.

두산이 기껏 저를 위해 이 비싼 호텔에 데려왔는데 정작 섹스도 못 했고, 그렇다고 빨아 주지도 못했다. 먹을 것 천지인 호텔 조식에서 미역국 한 그릇을 더 먹겠다고 해서 두산을 화나게 했다.

수일은 자기가 하는 게 다 이렇지, 하며 한숨을 쉬었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혼자 해운대 모래사장까지 걸어 내려갔다.

낡은 운동화를 벗고 양말을 벗었다. 맨발로 모래 위를 걸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드넓은 모래사장엔 가족, 연인,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수일은 어제 두산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게 떠올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마 형편없는 얼굴로 나왔겠지만, 그래도 두산과 찍었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두산을 떠올리자 수일은 또 시무룩해졌다.

어제 그냥 숙소로 가자고 할걸.

좀 잘해 준다고 분수도 모르고 호텔까지 따라온 게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마냥 우울한 수일과 달리,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수일은 전생에도 죄를 많이 지었나 보았다. 이번 생도 힘들기만 했고, 지금까지 잘한 일도 없어서 다음 생이 있어도 그리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해변을 산책하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아쉬워 입맛만 다시다, 갑자기 숙소로 어떻게 돌아갈지 걱정이 되었다.

일단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자.

집엔 돈이 있으니 내려서 돈을 줘야겠다 생각했다.

좀 더 걷다 가고 싶었지만 다친 발바닥에 모래가 들어갔는지 걸을 때마다 아팠다. 수일은 발을 절뚝거리며 대로변으로 올라갔다.

혼자 있는 사람은 노숙자로 보이는 남자와 수일, 단둘뿐이었다.

수일은 괜히 쓸쓸해 고개를 숙였다.

택시 기사는 오는 내내 수일에게 말을 걸었다.

수일은 딴생각을 하느라, 어떤 것은 대답하고 어떤 것을 흘려들었다. 지난번처럼 아예 못 들으면 욕을 먹을까, 택시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숙소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현관 앞에 현철이 나와 있었다.

수일이 택시에서 내리는 걸 보고, 어찌 알았는지 택시비를 기사에게 대신 내주었다.

“행님! 어데 갔다 이제 옵니까? 두사이가 찾아서 또 난리 났다 아이가.”

“…네.”

지가 먼저 갔으면서.

호들갑을 떠는 현철을 뒤로하고, 수일은 속으로 투덜대며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들이 수일에게 행님 오셨습니까, 하고 평소처럼 자기 할 일 하면서 인사를 했다. 수일은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잠깐 자리에 앉아 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방문이 열리더니 현철이 수일을 불렀다.

수일은 일어나기 귀찮아서 기어 나가 전화를 받았다.

- 니 어데 갔었노?

다짜고짜 두산이 물었다. 화를 참는 목소리에 수일은 기가 죽었다.

“해변에….”

- 내가 삐삐 확인하고 온다 했나 안 했나? 그 새를 몬 참고 기 나가삐믄 내가 우찌 찾노?

수일은 그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두산이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 수일을 화난 표정으로 본 것과 미역국을 갖다주겠다고 해 놓고 밖으로 나가 버려서 수일이 다급히 뒤쫓아갔던 일밖에 기억에 없었다.

두산이 갑자기 사라져 당황한 건 수일이었다.

“아니, 그게 니가 먼저 나가 버려서….”

수일은 말끝을 흐렸다.

- 기다리라 카믄 기다리야지. 얼라도 아이고. 말을 말자.

두산은 한숨을 쉬었다.

- 어디 다친 데는 없나?

“응.”

- 내 좀 늦을 끼니까 동생들이 차리주는 저녁 묵꼬, 나이트 나가 있으라. 혼자 있지 말고, 대기실이든 어디든 사람들하고 같이 있고. 알았나? 일 마치고 퍼뜩 데리러 가께.

“응.”

- 수일아.

“응?”

- 내 화낸 거 아이다.

두산의 말에 수일은 안도했다.

화를 낸 게 아니란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심히 다녀와요.”

동생들이 듣고 있어 조금 퉁명스럽게 말을 했는데도, 수화기 너머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난중에 보자.

전화가 끊겼다.

수일은 뭐가 뭔지 잘 몰랐다. 그래도 두산이 화가 난 것이 아니고, 듣지는 못했지만 나가기 전 자기에게 말을 하고 갔다는 소리에 안도했다.

오해한 거구나.

두산은 자기를 버리고 간 게 아니었다. 그것도 모르고 두산에게 버려진 제 처지가 딱해 울 뻔했다.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수일은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기어갔다.

이불을 깔고 누워 라디오를 켰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문뜩 기억이 되살아났다.

‘저기, 나 미역국 한 번만 더 갖다주면 안 돼?’

수일이 말했고, 두산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하고 두산이 일어나 미역국을 가져다주었다.

‘그래 마싰나?’

‘응.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봐.’

수일이 국물을 떠서 먹자 두산이 묘한 표정을 했다.

‘니 생일이 언제고? 민쯩하고 똑같나?’

‘아니. 많이 아파서 출생 신고를 늦게 했대. 혹시 죽을지 몰라서.’

‘그래서 은젠데?’

수일은 갑자기 제 생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을 해내려는데 필름이 끊겼다.

그리고 갑자기 두산이 식당 밖으로 사라졌고, 수일이 급히 두산의 뒤를 쫓은 기억만 남았다.

소고기 사건 이후로 기억이 잠깐씩 끊겼다. 아마 그 남자에게 맞은 후유증인가 보았다.

곧 괜찮아지겠지.

수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

“행님, 병원 가입시다.”

“네.”

두산을 대신해 현철이 수일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이번엔 다른 덩치가 오자 의사가 의심의 눈초리로 현철을 보았다.

“저 사람이 그랬습니까?”

의사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일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저 사람도 아인 거 맞지예?”

“네. 아니에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라고, 어제 그제는 와 안 왔습니까?”

“일이 좀 있어서요.”

의사는 수일의 방문을 모두 체크하고 있었다.

맞은 곳의 멍이 다 빠졌다며 웃던 의사는 발바닥에 모래가 들어간 수일을 나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째 이래 안 났노? 약은 잘 챙기 묵습니까?”

“네.”

“자꾸 걸어댕기지 말고, 물도 좀 피하고 그라이소.”

발을 소독하고 주사까지 맞은 다음 병원에서 나왔다.

“행님, 전에 써주신 연애편지 있다 아입니까.”

“아. 잘됐어요?”

잊고 있었다.

현철이 수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 행님 덕분에. 그 가시나가 억수로 조아하데예. 어제 데이트도 했습니다.”

데이트라는 말에 악센트를 더 강하게 줘서 현철은 말했다.

“동네 친구로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는데예, 그 가시나가 시집가삐는 바람에 제가 억수로 후회하고 있었다 아입니까. 다행히 이혼해가 집에 왔길래, 마지막이다 하고 고백한 기 잘됐습니다.”

집으로 가는 동안, 현철은 자기 연애사를 읊었다. 서른한 살의 현철은 첫사랑과 데이트를 한 게 그리도 좋은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두산처럼 현철도 숙소로 가기 전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한 개 사서 쥐여 주었다.

“행님, 두사이 글마가 좀 똘개이 같아도 행님 걱정 억수로 마이합니다.”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던 수일은 두산의 얘기에 현철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고예. 그라이까 갑자기 어데 사라지고 그라지 마이소. 내도 요새 행님이 안 보이믄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미안해요.”

“행님도 참. 아입니다. 미안하라꼬 한 소리가 아이고예, 어데 가고 싶으면 말씀하시라꼬예. 여 아들 깍 찼으니까 혼자 댕기지 마시고.”

“네.”

수일은 자기를 걱정해 주는 동생들이 있어 든든했다. 이게 다 두산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이런 관심이라도 수일은 감사했다.

집으로 돌아가 낮잠을 청했다.

어제 너무 긴장한 데다 오늘은 아침부터 해운대를 걸어서 피곤했다. 수일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동생들이 차려 주는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두산의 말대로 이들과 함께 나이트로 출근했다.

봉고에서 내리자마자 어찌 알았는지 사장이 찾는다고 정수가 알렸다. 수일은 무대복을 현철에게 맡기고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은 미스 리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었다. 미스 리는 수일이 들어오자 귀찮은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미스 리를 밖으로 내보낸 사장은 수일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니는 일은 안 하나?”

“죄송합니다.”

“노래를 부르러 왔으믄 노래를 불러야지. 맞나 아이가?”

“죄송합니다.”

수일은 두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노래도 안 부르제. 손님도 안 받제. 내가 니를 전속으로 데리고 있을 이유가 머꼬?”

사장은 혀를 끌끌 차며 수일을 아래위로 훑었다. 후루룩 커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수일은 혹시라도 잘릴까,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앞으론 절대 빠지는 일 없을 겁니다.”

“상전도 아이고. 에이 씨발. 수일이 니 말이다, 두사이 자지 빨아준다꼬 기어오르지 마라. 그거 순가이다. 어데를 비비야 내가 살아남을지, 잘 생각해보고 비비라. 알았나?”

“…네.”

“가 바라.”

수일은 90도로 인사를 하고 사장 방에서 나왔다. 주책맞게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화장실로 가 세수를 했다.

화장실에 못 보던 얼굴이 들어왔다.

나이트 유니폼에 지배인 성룡이란 명패를 달고 있었다. 새로 온 지배인인가 보았다. 전에 있던 지배인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남자는 수일을 흘끔 보더니 누고? 했다.

“윤수일이라고 합니다. 여기 가수로 있는.”

“아! 안녕하십니까. 여 새로 온 지배인 성룡 김대훈이라꼬 합니다. 반갑습니데이. 말씀 마이 들었습니다.”

고깝게 수일을 대하던 남자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레 새 지배인과 통성명하게 된 수일은 악수를 하고 억지로 웃으며 화장실을 나왔다.

남자가 말하는 ‘많이 들었다는’ 그 말씀이 뭔지 알 것 같아 수일은 한숨을 쉬었다.

대기실로 들어가자 화장을 하고 있던 은아 씨가 수일을 흘끔 쳐다봤다.

“요새 통 안 보이드만은 어데 아팠나? 얼굴은 또 와 그라노?”

“넘어져서요.”

“하이고, 니 그래 성한 데가 없어서 우짤라꼬 그라노? 지 몸은 지가 챙기야 된다.”

“네.”

오랜만에 듣는 은아 씨의 잔소리가 수일은 반가워 웃었다.

“사장한테 한 소리 들었나?”

“네.”

“조심해라. 요새 써커스단이야 머시야 계약하러 댕긴다꼬 난리도 아이다. 우리 같은 피래미들은 은제 짤릴지 모른다.”

“네.”

수일은 계약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화장품 가방을 들고 은아 씨 옆자리에 앉았다가 빈자리가 느껴져 수일은 대기실을 돌아보았다. 송이의 물건이 보이질 않았다.

“송이는요?”

“가? 그만두따.”

“네?”

“돈 짝따꼬 그만두따. 팁이 지 벌던 데보다 억수로 짝다 안 카나. 어데 돈 들어갈 데도 없다 카드만은 고새를 몬 참고.”

“아.”

“몸파는 기 머가 조타꼬 글루 기들어갔을꼬. 가시나가 어리서 생각이 짧다.”

은아 씨가 한숨을 쉬었다.

변변치 못한 자기를 걱정해 주던 송이는 근처 요정에서 일했었다고 했다. 공주 취급은 받아도 돈은 모으지 못했다더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송이의 자리를 메꾸겠지만, 그래도 없으니 서운했다.

오랜만에 스킨으로 얼굴을 닦고 로션까지 바르자 건조하던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입술이랑 코끝이 갈려 딱지가 앉았지만 그래도 멍이 빠지니 나름 볼만해졌다.

“요새 두사이랑 좋은가베?”

거울 속에서 은아 씨가 물었다. 수일은 대답 대신 얼굴을 붉혔다.

“가시나들이라믄 사죽을 못 쓰던 새끼가 우째 니랑 연애를 하나 말이다. 둘이 그래 속궁합이 잘 맞나?”

속궁합이란 단어를 말하며 음흉스레 웃었다.

“누님도 참. 왜 그러세요?”

수일이 당황하자, 그게 재밌는지 은아 씨가 까르르 웃었다.

“솔찍한 말로 니가 말주변이 있기를 하나, 그렇다고 애교를 부릴 줄 아나. 벙어리 맨키로 입 꼭 닫고 목석 맨키로 반응도 없는 니한테 글마가 미칬다꼬 그래 목을 매달겠나 말이다. 그거 밖에 답이 읍지. 안 글나?”

은아 씨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걸 아직 못 했는데도 말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는 수일에게 두산은 잘했다.

수일은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 피식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와? 생각만 해도 좋나?”

“아니, 그게 아니구….”

“하이고, 놀리는 맛이 있으야 놀리지. 저래 숫기도 없는 기 우찌 밤무대 가수가 됐나 모르겄다.”

은아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송이가 나가는 바람에 10시 타임은 밴드가 도맡아 하고, 은아 씨는 다시 두 번째로 순서를 옮겼다. 수일은 빠지는 게 일인데도 아직 11시 타임이었다.

무대 뒤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며 은아 씨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두산이 들어왔다.

“준비하나?”

“응.”

“병원은 갔다 왔고?”

“응.”

두산은 고개를 삐뚜름히 하고 수일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왜?”

“니 대가리에 머시 들었나 궁금해서.”

수일은 두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눈알만 굴렸다.

“이리 와 바라.”

“왜?”

“이리 온나.”

수일이 다가가자, 두산은 수일의 나비넥타이를 손봐 주었다. 그리고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수일에게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수일이 웃자 두산은 수일의 볼을 툭 하고 쳤다.

“웃지 마라.”

하더니, 또 입을 쪽, 하고 맞추었다.

“왜 그래?”

수일은 보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얼굴을 붉혔다.

“와 그라기는?”

“이제 곧 내 무대야.”

“안다. 홀에서 보고 있으께.”

수일은 대답 대신 두산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와?”

“예뻐서.”

“이기 미칫나.”

두산은 예쁘단 말에 인상을 구기며 죽을래? 하고 나가려다, 다시 돌아와 수일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엔 입맞춤이 아니라 키스였다.

입술과 입술을 맞물고 살살 달래듯, 수일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가며 두산은 그 두툼한 입술로 빨아올렸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이 떨어지자 수일은 아쉬웠다. 두산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 바람에 두산의 검은색 정장에 수일의 얼굴에 바른 파우더가 묻었다.

수일이 톡톡 손바닥으로 털어도 자국이 남았다.

“어쩌지? 세탁소 갖다 맡겨야겠다.”

“개안타. 보기만 조쿠마는.”

뭐가 보기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두산은 수일을 보고 실실 웃었다.

은아 씨의 무대가 끝났는지 박수 소리가 들렸다.

“홀에서 보고 있으께.”

“응.”

“내 보고 노래해라. 딴 새끼 보다 걸리면 그 새끼 직이삔다.”

수일이 웃었다.

“내가 쳐다봤는데 왜 그 새낄 죽이니?”

“니는 몬 직이니까 그 새끼를 직이야지.”

“웃겨.”

“내만 바라. 알았나?”

“얼른 나가기나 해.”

“와 대답을 안 하노?”

“알았어.”

수일은 두산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두산 덕에 침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았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땀범벅인 은아 씨에게 수건과 물병을 건네고 수일도 목청을 가다듬었다.

10분간의 휴식 후 마스터가 수일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모창 가수 윤수일이 진짜 가수 윤수일의 노래를 부를 시간이었다.

수일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무대 위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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