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어두웠다.
수일은 눈을 껌뻑거리다 벽시계를 봤다.
8시 23분.
나이트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가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마음은 급한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수일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도저히 설 수는 없어서, 기어서 방문을 열고 기어서 거실로 나갔다.
거실엔 두산이 떡하니 버티고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어데 가노?”
“화장실이요.”
수일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 방문을 닫았다.
두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자기한테 화가 나서 숙소를 나간 줄로만 알았다.
방문이 열렸다.
“화장실 간다메?”
“안 가도 돼요.”
“밥 물래?”
“네.”
“기다리 바라.”
두산은 이러면서 수일을 일으켜 안고 부엌으로 데리고 나갔다. 식탁에 앉힌 다음, 닭죽을 끓여 내왔다.
수일이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으려 하자 두산이 손을 잡았다.
“뜨겁다. 천천히 무라.”
“괜찮아요.”
수일은 그 뜨거운 것을 바로 입에 넣었지만, 아무 고통도 느낄 수가 없었다.
두산이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내가 하께.”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두산은 이렇게 말하고 대신 죽을 퍼서 후후 불었다. 식었다 싶으면 수일의 입에 넣어 주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간 걸까?
수일은 두산을 보며 잠깐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한 번도 수일을 떠난 사람이 돌아온 적은 없었다.
“야경 보러 갈래?”
“안 돼요.”
“와?”
“노래 불러야죠.”
수일의 말에 두산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의자가 뒤로 넘어질 정도로 거칠게 일어나더니, 어디서 손거울을 가져다 수일에게 내밀었다.
수일은 거울 속에 있는 남자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화장으로 어떻게든 가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수일은 밥을 먹다 말고, 다리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두 번 갈아입을 힘이 없어 바로 무대복을 꺼내 입었다.
방문 턱에 기대고 수일을 가만 보는 두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수일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두산이 막아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윤수일.”
아까부터 내내 반말이었다.
거슬렸다.
“너 왜 자꾸 반말해?”
“억울하면 니도 해라.”
실실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두산을 수일이 노려보았다.
“그 얼굴로 어데 갈라꼬?”
“나이트 간다고 몇 번을 말해?”
“내랑 야경 보러 가자.”
“너 연애한다며? 그 여자랑 가.”
수일은 파출소에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두산이 피식 웃었다.
“내가 여자랑 연애한다꼬 누가 그라대?”
“파출소에서 니가 그랬잖아.”
“그 정신에 그 소린 들었는가베.”
수일이 방을 막고 있는 두산을 밀었다. 뭘 어떻게 해도 힘으론 두산을 당할 수 없었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수일은 주먹으로 두산의 가슴을 치다, 어지러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산이 수일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굵고 투박한 손가락을 들어 수일의 볼을 툭 쳤다.
그 바람에 눈물이 떨어졌다.
“와 안 우나 했다.”
두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러면서 수일의 눈물을 닦아 주고, 예전처럼 쪽 입을 맞추었다.
“내가 억수로 잘몬했다.”
수일은 흐느껴 울었다.
“내가 잘하께. 울지마라.”
두산은 수일을 꼭 안고 등을 토닥였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더 잘할 테니까 울지 마라.”
수일에게 다 자기 잘못이라고 말해 준 사람은 두산이 처음이었다.
누굴 만나도, 그게 애인이든 친구든 선배든 동생이든 간에 일이 틀어지면 다 수일의 탓이라고 했다. 수일을 원망하고 등을 돌렸다. 살면서 그 말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는지 몰랐다.
그랬는데 두산은 자기 잘못이라고 해 주었다.
수일은 그 말이 고마워 통곡하듯 울었다.
울음을 겨우 멈춘 수일은 옷을 갈아입고,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두산을 따라나섰다.
***
번화한 남포동 거리를 두산과 손을 잡고 걸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금요일이라 글치.”
“금요일? 목요일 아니고?”
“목요일은 어제고. 니 서른 시간 넘게 잤다.”
수일은 그렇게 오래 잠을 잔 건 처음이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약 맥있다.”
“무슨 약?”
“수면제.”
수일은 장난인 줄 알고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두산이 주는 약을 먹고 기절하듯 잠이 든 게 기억이 났다.
“왜 그랬어?”
“와 그라긴. 니 좀 쉬라꼬. 몇 번 깼는데, 내가 약 맥이서 도로 재았다 아이가.”
두산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수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두산이 웃었다.
두산은 다친 발 때문에 느리게 걷는 수일을 보며 뒤로 걸었다.
능글능글 잘도 웃었다. 시멘트에 갈리기까지 한, 더 엉망이려야 엉망일 수 없는 얼굴을 보면서 뭐가 좋다고 웃었다.
남포동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영화를 보러 나온 중년의 커플들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수일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며, 밖이 어두워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용두산 공원으로 가는 길에 두산은 수일에게 아이스크림콘을 사 주고, 자기도 하나 사서 들었다. 수일은 딸기 맛과 초콜릿 맛을 반반 섞었고, 두산은 바닐라로만 했다.
“한입만 도.”
“자기 꺼 먹어.”
“니 내한테 자기라 켔나?”
“아니, 그게 아니구.”
“분명히 들었는데.”
수일은 두산을 흘겨보며 못 말려, 했다. 두산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용두산 공원 계단 입구에 들어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숫자도 많고 가팔랐다.
“업히라.”
“여기를 업고 가겠다고?”
“어. 업히라.”
“너 미쳤구나?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같이 죽는 기지 머.”
두산과 실랑이를 하고 있자니, 연인들이 하나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빨리 업히라.”
수일은 마지못해 두산의 등에 업혔다. 수일은 두산의 목을 꼭 껴안았다.
다 큰 남자 둘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업혀 가니 다들 돌아보았다. 수일은 창피해 두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힘들진 않은지 고개를 내밀어 두산의 옆얼굴을 살폈다.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흘렀다. 수일은 손을 뻗어 두산의 땀을 닦았다.
두산의 광대가 올라갔다.
“안 힘들어?”
“힘들어 죽겠다. 말 시키 마라.”
“그르게 왜 여길 오자고 해서.”
“방구석에 있으면 머하노? 아이고, 나 죽는다.”
두산의 엄살에 수일이 웃었다.
힘이 들 만도 한데, 어찌나 안정감 있게 수일을 업고 가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수일은 두산의 커다란 등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여를 어데라꼬 사람을 업고 오노? 대단타. 총각 안 무겁나?”
뒤따라 올라오던 중년의 커플이 말을 걸었다.
“예. 야가 키만 컸지 삐쩍 골아가 한 개도 안 무겁습니다.”
“얼라도 아이고, 다 큰 남자를 우째 그래 업고 가노?”
“발을 다치가꼬예. 놀러가십니까?”
“데이트.”
“이야, 믓찌다. 단디 놀다 가이소.”
“그래. 총각들도 단디 놀다 가라.”
두산은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등에 업혀 그 얘길 듣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하고 웃음이 났다.
“와 웃노?”
“총각. 내 안 무겁나?”
“따라할라믄 제대로 하든가? 그기 머꼬?”
수일이 사투리를 흉내 내자, 두산이 헛웃음을 웃었다.
“왜? 똑같은데?”
“지랄. 힘들다. 말 시키지 마라.”
“내가 삐쩍 골아서 하나도 안 무겁다며?”
“얼라도 업으믄 무겁다. 말 시키지 마라.”
마지막 계단을 올라 두산은 숨을 헉헉댔다.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수일은 입고 온 긴 소매를 당겨, 두산의 땀을 닦아 주었다.
남산타워에 비하면 소박한 부산 타워를 수일이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도 사진사들이 나와 있었다. 사진사는 나이대가 다양했지만, 주로 초로의 남자들이었다. 다들 자기가 찍은 사진 패널을 설치해 두고, 기념사진을 찍어 준다고 홍보하고 있었다.
두산은 수일의 손을 잡고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재요, 우리 사진 하나 찍어주이소.”
수일이 두산을 말렸다.
“이 얼굴로 사진 찍기 싫어.”
“머 어떻노? 담에는 낮에 찍으러 오면 되지.”
“그래두.”
“화해한 기념으로 찍는 기다.”
화해한 기념이란 말에 수일은 피식 웃었다.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양 이렇게 말하는 게 괜히 좋아서 수일은 군말 않고 사진을 찍었다. ‘용두산 공원’이라 적힌 바위 옆에 서서 부산 야경을 배경으로 찍었다.
두산이 수일의 어깨를 안았고, 수일은 두산의 허리를 안았다.
번쩍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두산은 사진사에게 돈을 내고 집 주소를 적어 주었다. 숙소 전화번호와 삐삐 번호도 남겼다.
그리고 수일의 손을 잡고 부산 타워로 향했다.
표를 사서 줄을 섰다.
관광객들도 제법 많아, 전국 팔도 사투리가 들렸다.
수일은 두산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고개를 숙였다. 전망대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실내가 밝아, 수일의 얼굴이 훤히 다 드러났다.
모자라도 쓰고 올걸.
수일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영 마음에 걸렸는지, 두산은 큰 손을 들어 수일의 얼굴에 방패막이를 만들었다.
그게 더 시선을 끈다는 걸 모르나 보았다.
“하지 마.”
“와?”
“니가 그러고 있으니까 더 쳐다보잖아.”
“머라카노? 안 들린다.”
수일이 작은 소리로 말하자, 두산이 못 들은 척하며 계속 손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겨우 차례가 되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타워에 올랐다.
좁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소박한 화려함이 있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대형 선박에 달린 조명 때문에 바다에 불빛이 반사되어 물결쳤다. 아름다웠다.
수일이 넋 놓고 바라보자, 두산이 옆에서 좋나? 물었다.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도 좋다. 여가 이래 좋은 줄 첨 알았네.”
좋은 걸 보니 허기가 졌다.
저녁을 먹다 말고, 울다가 나와 기운이 없었다.
“나 배고파.”
“가자. 내도 배고프다. 밀면 묵을래?”
“응.”
“밀면이 먼지는 아나?”
“나도 먹어 본 적 있거든?”
“알았거든.”
이번엔 두산이 수일의 말투를 흉내 냈다.
“니 반말하이까 영 가시나 같다.”
“그런 게 어딨어.”
“여 있지. 살랑살랑 한기, 억수로 간지럽네.”
“너 진짜 버릇없어.”
“이제 알았나. 나 버릇떼이 없는 거.”
“말이라도 못 하면.”
아까 그 가파른 계단 말고 다른 길도 있는지, 이번엔 돌아 내려갔다.
이 편한 길을 내버려 두고 왜 계단으로 왔을까?
용두산 공원 관광 안내서에 아까 그 계단 개수가 194개라고 적혀 있었다. 두산은 수일을 업고 194개나 되는 계단을 올랐다.
수일은 또다시 뒤로 걸으며 자기를 보는 두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윤수일이.”
“왜?”
“앞으로 도망치지 마라.”
수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망치다 걸리면 다리몽댕이를 뿔라삐끼다.”
제 다리를 부러트린다는 협박이 그리 좋을 줄 몰랐다. 수일은 두산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다리 부러트리면 니가 나 먹여 살려야 되는데 그럴 자신 있어?”
“자신 있지. 지금도 자신 있다.”
“좋겠다. 자신감 넘쳐서.”
“농담 아인데.”
이렇게 말하고 두산이 등을 돌렸다.
“니 혼자 두면 걱정이 돼서 내가 나가 살도 몬 한다.”
들릴 듯 말 듯, 이렇게 중얼거리고 두산은 밀면집으로 들어섰다.
여느 때처럼 들어가자마자 큰 목소리로 주문부터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려던 두산은 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는 수일을 보고 다시 나왔다.
“와 안 들어오노?”
수일은 부부와 어린아이들이 앉은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들어 온나.”
“애들이 보면 놀래. 내 얼굴.”
“먼 상관이고?”
“그래도. 다른 데 가자.”
“벌써 시킸다.”
“포장해, 그럼.”
“와 진짜. 쑨 지멋대로고. 내니까 받아 주는 기다. 내니까.”
두산은 입을 실룩거리며 시킨 음식들을 다 포장해 나왔다.
“니 진짜 내한테 잘해라. 나 같은 남자 없다.”
고작 밀면 하나 포장했다고 두산이 큰소리를 쳤다. 수일은 그게 웃기고 또 고마워, 두산의 팔짱을 꼈다.
“고마워요.”
두산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하자 두산이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천천히 걸었다.
수일은 피곤해 눈을 비비면서도, 두산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아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늦게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일의 시선이 호떡집에 머물자 두산이 멈췄다.
“호떡 물래?”
“응.”
그렇게 호떡을 사서 각자 하나씩 입에 물고 또 걸음을 옮겼다.
“맛있제?”
“응. 달아.”
“호떡 궁물에 딘다. 조심해라.”
“너나 조심해. 잠깐만. 벌써 흘렸어.”
수일은 호떡집에서 들고 온 티슈로 두산의 옷에 묻은 호떡 시럽을 닦았다.
“뭘 이렇게 많이 흘려?”
“개안타. 까만색인데 머 어떻노?”
“그래도. 끈적거리잖아.”
수일이 잔소리를 하며, 꼼꼼하게 시럽을 닦아 내는 걸 두산은 가만 내려다보았다.
“숙소 들어가지 말고 호텔 잡으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일은 두산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산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천천히 가.”
“천천히 가고 이따.”
“나 다리 아파.”
“업힐래? 업히라.”
수일이 자신을 못 따라오자, 두산은 수일에게 달려와 바로 업었다. 수일은 포장한 음식 봉지를 잡고 두산의 목을 안았다.
두산이 달리기 시작했다.
***
두산은 차를 몰고 해운대로 향했다.
조선 비치 호텔 주차장에 봉고를 세우고 로비로 가려는 걸 수일이 잡았다.
“여기 비싼 데 아냐?”
“어.”
“다른 데 가.”
“올 만하니까 오지. 기다리라.”
수일은 두산이 무리하는 거로 생각했다.
자기를 위해 이런 고급 호텔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싸구려 여관방도 괜찮았다. 그 정도도 자신에겐 과분하다고 수일은 생각했다.
손에 포장해 온 밀면 봉지를 들고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수일에게 두산이 카드 키를 흔들었다. 두산이 웃고 있는데도, 수일은 괜한 돈을 쓰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두산은 수일의 손에 든 봉지를 제 손으로 옮겨 들고 수일의 어깨를 안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잘 차려입은 호텔 투숙객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수일은 행색이 초라한 자기 때문인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이지 마라. 예쁘다.”
들으라는 듯, 두산이 큰 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내는 몬 생기면 쳐다도 안 본다.”
“너 진짜 이상해.”
“남 말하네.”
두산은 이렇게 말하며 수일의 머리를 살살 쥐어박았다.
8층에서 내려 베이지색 카펫을 따라 제일 끝방으로 향했다.
수일은 긴장이 돼서 죽을 것 같았다.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아프기까지 했다. 이런 수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산은 슬쩍 옆을 돌아보며 웃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통유리에 검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해변을 따라 산책하는 가족들, 폭죽놀이를 하며 웃고 떠드는 젊은 남녀들이 보였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높이건만 다들 행복해 보였다.
수일의 뒤에 선 두산의 모습이 유리에 거울처럼 비쳤다. 수일이 돌아보자, 두산이 씨익 웃었다.
“밥부터 무까?”
“응.”
두산이 응접실 테이블에 포장해 온 음식들을 꺼내는 동안, 수일은 호텔 내부를 둘러보았다. 침실 문을 열었더니 커다란 침대 옆과 헤드 쪽에도 통유리가 있었다. 거기서는 검은 바다가 보였다.
침대에 누우면 두 사람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리라.
수일은 그 생각에 얼굴을 붉히고, 커튼을 쳐 두었다
“밥 묵자.”
바로 옆인데도 두산은 큰 소리로 수일을 불렀다. 수일은 침실 문을 열어 두고 응접실로 가 앉았다.
“너 이런데 와 봤어?”
이렇게 비싼 호텔은 처음인 수일은 방이며 욕실을 둘러보느라 정신없는데, 두산은 제집 거실에 앉은 양 시큰둥했다.
“와?”
“그냥.”
“애인이랑 온 거는 첨이다. 밥이나 무라.”
지가 대답하고도 쑥스러운지 두산은 배가 와 이리 고프노, 하며 말을 돌렸다.
수일은 두산이 말하는 애인이 자기라곤 생각도 못 하고,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두산은 수일에게 나무젓가락을 쥐여 주고, 등을 굽혀 면을 후루룩 먹었다. 평소라면 두산보다 먼저 젓가락을 들었을 수일은 긴장해서 그런지 입맛이 없었다. 테이블에 놓인 초콜릿 접시를 곁눈질하다 마지못해 만두를 집었다.
“면이 예술이다. 우째 한 개도 안 뿔었지?”
수일은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 만두 하나 먹었는데 그것도 목에 걸려 컥컥댔다.
“에헤이, 천천히 묵지.”
두산은 당장 일어나 수일의 곁에서 등을 쳐 주었다. 제 딴에는 살살 친다고 했겠지만, 두산의 손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수일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목에 단단히 걸린 모양이었다.
수일은 음식을 뱉지도 못하고 가슴을 쳤다. 무슨 생각인지 두산이 갑자기 입을 맞췄다. 어, 하는데 입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그 혀가 입 안을 싹 훑으며 수일이 씹다 만 만두를 가져갔다.
“이제 됐제?”
“…….”
“사이다 주까?”
“아니. 괜찮아.”
괜찮다는 수일의 말에 두산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면이 예술인 밀면을 먹었다.
수일은 두산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안 더러워? 내가 씹던 건데.”
“니가 씹던 거니까 내가 묵읐지. 더러울 끼 머가 있노.”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두산은 수일을 쳐다보지도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비위도 좋아.”
“이제 알았나? 막말로 니 똥오줌도 묵을 수 있다.”
“밥 먹는데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입술을 실룩거리며 흘겨보자, 두산이 구시렁댔다.
“좋다 케도 지랄이다.”
수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초콜릿 접시와 함께 있던 엽서를 읽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호텔의 감사 엽서였다.
“와? 속이 안 좋나?”
“응.”
“와 그라지? 아까 남포동에선 잘만 묵었는데.”
눈치도 빠른 게 이럴 때만 꼭 눈치 없이 굴었다. 수일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두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만두를 집어 먹었다.
“이거 먹어도 돼?”
“무라. 무라꼬 주는 긴데.”
수일은 랩을 벗겨 초콜릿 하나를 집었다. 사실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아서 무슨 맛인지는 몰랐다. 조금 쓴 것도 같고, 단 것도 같고 애매했다.
두산도 먹는 걸 멈추고 테이블에 펼쳐진 음식들을 대충 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워 수일은 눈으로 봉지를 쫓았다.
“내 목욕물 받으께. 쪼매만 기다리라.”
음식을 버리고, 테이블까지 닦은 두산은 욕실로 향했다.
목욕물 소리에 수일은 침을 꼴깍 삼켰다. 괜히 맛도 모르는 초콜릿을 하나 더 씹으며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온 신경이 그 소리에 집중되었다.
한참을 욕실에 있던 두산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옷을 벗었다.
“목욕하자.”
“…어.”
수일은 옷을 벗으려다 말고 백사장이 훤히 보이는 통창 커튼부터 닫았다. 두산이 다가와 뒤에서 손을 뻗었다. 수일의 셔츠 단추를 풀면서 두툼한 귓불을 입술로 쪽, 하고 빨았다. 몸에 열이 올랐다.
두산은 알몸이 된 수일을 안아 들고 욕조에 내려놓았다. 다친 발이 물에 닿지 않게 하려고 한쪽 발을 욕조 밖으로 빼냈다. 자세가 너무 민망해 수일은 눈을 감았다.
“니는 우째 성한 데가 없노?”
퉁명스럽게 말을 뱉으며, 두산은 욕조 안으로 들어와 수일의 다리 사이에 몸을 끼웠다. 그리고 수일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제야 자세가 조금 편해진 수일은 두산의 목을 안았다.
물에 닿아 미끈거리는 살의 감촉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온도 개안나?”
“응.”
두산은 그 크고 투박한 손으로 물속에서 수일의 맨살을 만졌다. 그 감촉에 수일은 몸을 움츠렸다. 두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손은 아랫배로 왔다가 다시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수일은 자꾸 몸이 떨려 부끄러웠다.
두산은 얼굴을 맞대고 수일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단지 쳐다만 보는데도 수일은 긴장으로 숨을 헐떡였다.
수일만 긴장한 모양인지 두산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괜히 얄미워 두산을 꼬집었다. 뭐가 좋다고 씩 웃더니, 상처 나지 않은 입꼬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좌우 입꼬리를 따라 쪽쪽 소리를 내며 짧게 입맞춤을 하던 두산은 뱀 같은 눈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데 할 끼 없어서 입술을 갈아삤노. 키스도 몬 하그로.”
“그냥 해.”
수일은 왜 두산이 키스를 안 하나 싶었다. 하고 싶어 죽겠는데.
속으로 투덜대며, 두산의 두툼한 아랫입술에 시선을 멈췄다.
“됐다. 내가 변태도 아이고. 입이 다 까진 아한테 우째 키스를 하노?”
“그럼, 내가 하지 뭐.”
이렇게 말하고, 수일은 두산의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아아, 니 또 깨무나?”
수일에게 아랫입술이 물리고도 연신 두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술이 닿지 않도록 수일이 혀를 길게 빼자 두산도 같이 혀를 뺐다. 둘은 장난처럼 혀를 섞고 물고, 키득거리다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언제 이를 닦았는지 두산의 혀에서 치약 맛이 났다. 수일은 그게 좋아 속으로 웃다가, 제 입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산이 입술을 거칠게 비벼 오자 머리가 하얘졌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빨라져 이대로 터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젖은 소리를 내며, 한참을 서로의 혀와 입술을 탐하던 두 사람은 입술을 맞대고 웃었다.
“개안나?”
“응.”
“까칠한 기 빼빠 우에7) 뽀뽀하는 거 같다.”
수일은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정말 까칠했다. 두산이 굵은 손가락으로 수일의 입술을 쓱 쓸더니 맞제? 했다. 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입을 맞췄다.
두산은 진득하게 수일의 입을 제 입 안에 가둬 물었다. 몇 번 빨아 당기다 혀를 세워 수일의 입술을 열었다. 살살 입 안 점막을 달래다 혀를 건드렸다. 수일이 두산의 혀를 물라치면 쏙 도망갔다가, 다시 살살 혀를 건드리며 안달하게 했다.
“하아….”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며 수일은 두산의 입술을 물었다. 도망가는 혀를 얼른 잡아 쪽 빨았다.
수일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욕조의 물이 살을 스쳤다.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듯 물이 닿을 때마다 흠칫거리며 수일은 두산의 등에 손톱을 박았다.
흥분한 건 수일만이 아니었다. 두산도 못 참겠는지, 수일을 번쩍 들어 욕조 위에 올리고 그대로 수일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로 비비고 여린 살들을 혀로 핥았다.
자극에 수일이 몸을 비틀었고, 그 바람에 뒤로 넘어갈 뻔했다. 두산이 급히 수일의 허리를 잡았다.
“식겁이야!”
“내가 더 놀랬거든?”
“개안나? 씨발, 욕조가 머 이렇노?”
두산은 수일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욕조를 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리 삐끗 안 했나?”
“응. 괜찮아.”
“안 되겠다. 일단, 목욕부터 하자.”
수일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두산은 비누로 거품을 내 수일의 몸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손바닥이 닿자마자 수일은 다시 몸을 비틀었다.
“쫌 가만있어라.”
“가, 간지러워서 그래.”
말을 하고 내려다보니, 그새 발기한 성기가 위로 솟아 있었다. 수일은 너무 창피해 급히 손으로 가렸다.
“와? 먼데?”
놀리듯 묻는 두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수일은 목까지 벌게져 눈도 못 마주치고 제 몸을 닦고 있는 두산의 손을 쳐 냈다. 곧장 일어나 욕조 밖에 섰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델 나가노?”
두산이 수일을 잡았지만, 비누에 미끄러져 몸이 쏙 빠져나갔다.
수일은 수건으로 비누 거품과 물을 닦아 내고 총총 뛰어서 침실로 달려갔다.
“고마 온나. 진짜 니 이랄 끼가?”
두산도 욕조에서 나와 수일의 뒤를 쫓았다.
수일은 침대로 쏙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으로 두산이 머리를 집어넣었다. 물기도 닦지 않은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수일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그래 좋았나?”
“…응.”
“그라믄 더 있다 가지. 와 가삤노?”
“…….”
“내도 섰는데, 머 어때서.”
두산은 수일을 살살 달래다 이불을 들쳤다. 침대로 올라와 젖은 몸으로 수일을 안고 키스했다.
“그만 자까?”
“응… 근데 너, 할 줄 알아?”
“이제 알아바야지.”
너무도 뻔뻔한 두산의 말에 수일은 짧게 웃었다.
“어디서?”
“기다리 바라. 내 저나 쫌 하고.”
두산은 엎드린 채로 침대 곁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어디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두사인데요, 거 핸수 형님 있습니까? 예. 좀 바까주이소.”
“어디다 전화하는 거니?”
“가만있어 바라. 여보세요. 행님. 나 두사이. 머 한 개 물어볼라꼬.”
두산은 섹스에 관한 한 수일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전화까지 넣는 걸 보니 정말 남자와는 처음인 모양이었다.
수일은 별것도 아닌 일에 가슴이 설렜다. 숫총각도 아니고 경험이라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면서, 두산에게는 첫 남자가 될 거란 생각에 뭉클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간신히 참고 커다란 두산의 등을 가만 바라보았다.
두산은 등을 구부리고 앉아 메모지에 현수라는 남자가 불러 주는 절차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간장을 하고. 약국 문 닫았을 낀데? 거 있다고? 알았다. 그다음에, 어, 어, 오일. 기름 말이가? 젤은 안대나? 알았다. 어. 근데 행님, 그기에 내끼 들어는 가나? 어. 처음이다. 니 처음 맞제?”
갑자기 수일을 돌아보며 처음이냐 묻는 말에 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살살 달래가, 어, 어, 그라고 너어삐면 되나? 천천히. 어 천천히 넣고 천천히 빼고. 알았다. 천천히. 근데 행님.”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두산은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어차피 바로 옆이라 다 들리는데 뭐 하러 그러나 몰랐다. 수일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두산의 통화를 가만히 들었다.
“근데 이거 내만 좋은 거 아이가? 내랑 하는 아는 어데로 느끼노? 어. 어. 아! 진짜가? 어. 내 행님만 믿는다.”
그러더니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어. 행님아, 고맙다. 내가 바로 가께. 약이랑 쫌 준비해도. 오야. 난중에 밥 사께.”
수일은 몸을 일으켜 두산이 적어 둔 메모지를 뺏어 들었다. 사투리로 대충 휘갈겨 쓴 메모를 보고 수일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라.”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나한테 자자고 한 거야?”
“내가 이랄 줄 알았나? 다 니 때문이다.”
“내가 뭐.”
“머기는.”
답지 않게 얼굴이 벌게진 두산은 침실을 나가더니 옷을 입고 들어왔다. 이불을 목까지 올리고 앉아 있던 수일에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퍼뜩 갔다 오께. 자지 말고 기다리라.”
“응.”
“술도 쫌 사오까? 마이 아프다카던데.”
“응.”
“자지 마라.”
“알았어. 빨리 갔다 오기나 해.”
두산은 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수일에게 키스를 했다. 수일의 몸을 뒤로 밀어 넘어트린 뒤 입술을 더듬고 혀를 넣었다. 급하게 제 혀를 따라오는 수일의 혀를 낚아채 삼키고 빨았다.
수일은 두산의 목을 꼭 껴안았다.
입술을 떼고 가려는 두산을 보내기 싫어 수일은 입을 맞추고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혼자 있기 싫었다. 두산과 함께 있고 싶었다.
“가지 마. 그냥 하자.”
입술을 맞대고 애원하듯 속삭였다.
수일의 말에 두산은 서둘러 옷을 벗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와, 그 뜨거운 몸으로 수일을 꼭 껴안았다. 너무 꽉 껴안아 숨이 막힐 정도였다.
서로의 발기한 성기를 맞대고 급하게 입술을 찾았다. 이 시간이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사람들처럼 두 눈을 마주 보고,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