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더니 방 안이었다.
밖에서 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자꾸 필름이 뚝뚝 끊겼다.
수일은 불편한 무대복을 벗고 회색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보고 세수를 했다. 얼굴이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너무 늙어 보여, 수일은 거울을 향해 억지로 웃었다. 추했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마시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다시 누웠다.
수일은 두산의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어디서 잤을까?
저처럼 기댈 곳도 갈 곳도 없는 남자가 아니니, 어디든 여기보다 나은 곳에서 잤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동생들을 위해 고기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자가 준 돈이 어디 있었더라?
그런 돈은 얼른 써 버리고 싶었다. 이왕이면 동생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
수일은 돈 봉투와 집 열쇠가 든 바지를 나이트 대기실에 놓고 온 것이 떠올라, 택시비를 챙겨 들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날이 화창했다.
한산한 골목을 돌아 돌아, 수일은 큰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라디오에선 짧은 장마를 걱정하는 뉴스가 나왔다. 비도 너무 적게 와 잘하면 최악의 가뭄이 될지도 모른다며 농민들의 한숨을 전했다.
택시 기사가 혀를 차며 뭐라 말을 걸었지만, 수일은 딴생각을 하느라 전혀 듣지를 못했다.
“젊은 새끼가 어데 어른 말을 무시하고. 에이, 퉤.”
택시비를 계산하고 나오는데, 기사가 다 들리게 불평을 했다.
수일은 얼굴을 붉히고 서둘러 나이트로 향했다. 당연히 문이 다 잠겨 있었다.
안에서 나올 때야 자기가 열고 나왔지만, 대낮에 밖에서 들어가 본 적이 없어 그 생각을 전혀 못 했다.
괜히 택시비만 날렸다.
수일은 한숨을 쉬고 거리를 싸돌아다녔다.
큰 소리로 사이렌이 울렸다.
무슨 일인지 몰라 수일은 두리번거렸다. 민방위 훈련은 2시에 하는데, 지금은 10시였다.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일은 배가 고팠다. 서둘러 식당으로 들어가 된장찌개를 시켰다.
“맞았는교?”
밥을 내오며, 식당 아저씨가 물었다.
“네.”
“여 근처서 일하는가베. 조폭 새끼들 깍 찼다. 조심하이소. 요샌 쳐다만 바도 뚜까패삔다 안카나.”
삐쩍 말라 볼품없는 수일을 처음 보는 아저씨가 걱정해 주었다.
TV에선 6.25 특집 방송을 했다. 아까 들었던 사이렌 소리도 6.25 때문에 울린 모양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나와 연설을 하고, 연설이 끝나자 구슬픈 관악이 연주되었다.
검은 양복과 한복을 입은 남녀들이 손수건을 눈에 대고 눈물을 훔쳤다.
“하이고, 빨개이 새끼들. 저것들 때메 죽은 사람들이 을마고? 우리나라에 있는 빨개이 새끼들은 다 찾아서 직이삐야 된다.”
식당 아저씨는 수일에게 밥을 내오며 분노했다.
수일은 밥을 받자마자, 입천장이 데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한 공기를 다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다. 밥 한 공기를 더 시켜 남은 된장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는데도 수일은 배가 고팠다.
슈퍼로 가서 두산이 늘 칭찬하던 멜론 맛 아이스크림과 땅콩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여전히 낯선 길거리를 배회하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과자를 먹었다.
붕대를 감은 발이 너무 불편해 전봇대를 짚고 서서 붕대를 풀어 버렸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나이트 주위를 배회하던 수일은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계속 과자와 빵을 사서 먹었다. 오렌지 주스 한 캔도 사서 마셨다.
발이 아파 집으로 돌아가려니 택시비가 없었다.
수일은 남은 동전으로 삼락 형님의 삐삐에 음성을 남겼다.
“형님, 저 수일인데요, 여기 나이트 앞인데 잠깐 나와 주시겠어요? 나이트 열쇠 있으면 그것도 가지고 와 주시구요. 아침부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삼락 형님은 지금 해운대에 있겠지만,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는 수일은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돈이 없는데 자꾸 배가 고팠다.
수일은 나이트 계단에 앉았다가, 너무 배가 고파 일단 슈퍼로 향했다. 뭘 먹고 있으면 삼락 형님이 올 테고, 그때 돈을 내면 될 거란 생각을 했다.
수일은 슈퍼에 들어가 빵 봉지를 뜯었다. 세 개째 먹고 있으니 주인이 수일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돈 있습니까?”
“네?”
“돈 있냐꼬예?”
“조금 있으면 일행이 와요. 그때 드릴게요.”
“머 이런 기 다 있노? 돈이 없으면 처묵지를 말아야지. 빨리 돈 내나라.”
주인은 수일의 몸을 마구 뒤져 주머니에서 70원을 꺼냈다.
“이 씨발 놈의 새끼가. 니 여 꼼짝말고 있어라. 내가 니 콩밥 먹이줄 테이까.”
수일은 주인의 말에 안절부절못하고 뒷걸음질 쳤지만, 목 뒤를 잡힌 채 질질 가게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주인은 수일의 옷자락을 꽉 쥐고 경찰에 신고했다.
“저 도둑 아니에요. 곧 일행이 올 건데….”
수일이 아무리 말해도 주인아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제복을 입은 경찰이 와서 수일을 근처 파출소로 데려갔다.
“신분증 주이소.”
“지금 없어요.”
“신분증 없습니까?”
“네. 집에 있어요.”
“집이 어딥니까?”
수일은 갑자기 물으니 주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숙소에라도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도무지 번호가 생각나질 않았다.
신분증도 없지, 집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지. 서울 말씨에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입에는 빵조각을 묻히고 있는 수일을 경찰이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수군수군 저들끼리 뭐라 말을 했다. 수일이 서울에서 탈출한 정신 이상자라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이름하고, 주민번호 불러 보이소.”
수일은 간신히 주민 등록 번호를 기억해 내고 불러 주었다.
“가명 아이고 진짜 윤수일 맞습니까?”
“네. 본명이 윤수일이에요.”
“이래 보이 쫌 닮았네. 직업은?”
“밤무대 가수요.”
“여 무대 뜁니까?”
“네. 근처 오성관 나이트에서 가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볼펜으로 수일의 이름 옆에 주민 등록 번호를 적었다. 그 옆에 가수라고 써 놓고 동그라미를 쳤다.
삼락 형님이 얼른 삐삐 음성을 들어야 할 텐데.
마음이 급했다.
수일은 하는 수 없이 경찰에게 삼락 형님의 삐삐 번호를 알려 주었다.
“최삼락 씨라고, 제 지인입니다. 연락해 보시면 조만간 절 데리러 와 주실 거예요.”
수일이 적어 준 번호를 들고, 제복 하나가 음성을 남겼다.
“근데 아저씨요, 돈이 없으면 먹지를 말아야지. 왜 남의 집 물건에 손을 댑니까?”
“죄송합니다.”
수일은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배가 고파서.”
“밤무대 가수라카면서 거서 돈 안 줍니까? 사지 멀쩡해가 도둑질을 하믄 우짭니까? 내참 답답네 답답아.”
수일을 훈계하던 경찰은 정말 답답한 표정을 하고 수일을 보았다.
수일은 목까지 벌게져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죄송합니다, 했다.
파출소에서 삼락 형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이 지긋한 경찰 하나가 커피를 타서 한 잔 건넸다.
수일은 두 손으로 커피를 받아 홀짝거렸다.
“어데서 왔는교?”
“서울이요.”
“오성관 박 사장이랑 내 잘 아는 사인데. 거서 일하는 거 맞습니까?”
“네.”
“근데 여서 와 이라고 있노. 박 사장이 월급 안 주나?”
“그게 아니라, 돈이 있었는데….”
수일은 달리 뭐라 변명해야 할지 몰랐다.
평일 낮이라 파출소는 한가했다.
수일을 신고한 슈퍼 주인은 가게 봐 줄 사람이 올 때 다시 오겠다고 하고 나갔고, 젊은 제복 둘은 남자 하나가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갔다.
파출소 안에는 사장의 친구라는 나이 지긋한 경찰 하나와 중년의 제복 경찰, 그리고 수일 이렇게 셋만 남았다.
‘딸랑’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사님들, 수고 많으십니다.”
두산이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양손에는 오렌지 주스 한 상자와 박카스 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윤수일 씨 보호자 되는 사람입니다.”
“어. 두사이 니가 여기 웬일이고?”
사장 친구라는 경찰은 두산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아재요, 오랜만입니다. 사람 찾으러 왔습니다.”
“쟈?”
쟈, 라고 하며 수일을 가리켰다.
“예. 이것부터 받으이소.”
“얼굴 좋아짔네. 연애하나?”
“예.”
“예쁘나?”
“예.”
두산은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말에 대답했다.
수일은 두산이 왜 여기 와 있나 몰랐다.
삼락 형님이 연락을 해 줬나?
두산을 보자, 너무 창피했다. 빵을 훔쳐 먹어 잡혀 온 것도 부끄러웠다. 도무지 두산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무슨 정신에 그랬는지 몰랐지만, 수일은 파출소 문을 박차고 나와 뛰었다.
무작정 달렸다.
그저 멀리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에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퍽 소리를 내며 얼굴이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수일은 아픈 줄도 모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피가 흘러서 옷을 다 버리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은데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공중으로 몸이 들렸다.
언제 쫓아왔는지 두산이 수일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수일은 두산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짐승처럼 괴성을 질러 가며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힘이 다 빠져 포기했다.
수일의 몸이 축 처지자, 두산은 수일을 들고 파출소로 돌아갔다. 잠깐 사이에 피를 줄줄 흘리며 수일이 들어오자 사장 친구가 달려 나왔다.
안타까운지 혀를 차며 화장지를 주었다.
“그새 다칬나. 우짜노? 입이 다 주 터지삤네.”
입에서도 코에서도 피가 흘렀다.
두산은 그 큰 손으로 수일의 머리를 잡고 코피가 멎도록 지혈을 했다. 콧구멍에 화장지를 둘둘 말아 넣어 주고, 침을 뱉은 화장지로 피를 닦았다.
그리고 경찰 하나가 수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는 동안, 두산은 슈퍼 주인에게 돈을 배상했다.
“사장님, 저 양반이 돈이 없는 기 아이고, 내가 온다꼬 먼저 묵고 있으라 켔거든예. 근데 차가 막히가꼬 어데 올 수가 있어야지. 모쪼록 화 푸시고, 얼마 안 되지만 장사 못 하신 거 이걸로 좀 보태십시오.”
두산이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밀자, 사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수일이 먹은 빵이라고 해 봐야 2천 원어치도 안 됐으니 완전히 땡잡은 거였다.
“뭘 이렇게나 마이 주시고. 솔찍한 말로 행색이 거렁뱅이는 아이다 싶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안 그렇습니까. 우찌될지 모른께나 신고부터 했습니다.”
“당연하지예. 내라도 신고 했다. 우쨌든 죄송합니다.”
두산의 거듭된 사과와 수표 한 장에 슈퍼 사장은 웃는 얼굴로 파출소를 나갔다.
수일은 몸으로 막고 선 경찰을 올려다보며, 피에 젖은 화장지를 입술에 꾹 누르고 있었다.
“이제 가봐도 되지예?”
“그라모. 가 바라. 근데 저 양반 진짜 가수 맞나?”
“예. 서울에서 특별히 모셔왔다 아입니까.”
두산의 말에 사장 친구는 고개를 갸웃했다.
“머 니가 그라믄 그란갑지. 난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예.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두산은 90도로 인사를 하고 수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 미친개이 저거. 확마 때릴수도 없고 돌아삐겠네.”
수일에게 대놓고 욕은 못 하고, 두산은 혼자 화를 참으며 구시렁댔다.
시멘트 바닥에 코랑 입을 다 갈린 수일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수일은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고 멍한 눈을 했다.
“혹시, 나이트 열쇠 있어요? 옷을 두고 와서 찾으러 왔는데….”
두산을 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두산은 수일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 없이 나이트로 향했다. 쇠줄로 된 고리를 풀어 문을 열고 수일을 안에 들여보냈다.
수일은 대기실로 가 옷을 집었다. 바지 안에 손을 넣어 보니 남자에게 받은 돈 봉투가 없었다.
동생들 고기 사 주려고 했는데, 어디 흘렸나?
수일은 혹시 몰라 혼자 나이트 주차장에서부터 봉투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수일의 뒤를 따라다니던 두산이 물었다.
“니 머하노?”
“봉투 찾아요. 나 때린 새끼한테서 받은 돈 봉투요. 분명 바지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오다가 흘렸나 봐요.”
수일이 어두운 주차장 바닥을 더듬거리며 돈 봉투를 찾자, 두산은 화를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서서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수일을 내려다보았다.
“어떡하지? 20만 원이나 들었는데.”
피로 얼룩져 엉망인 연회색의 추리닝을 입고, 수일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어두운 주차장을 돌아다녔다.
“니가 흘린 거 내가 주섰다. 집에 있으니까 가자.”
“아….”
수일은 바보같이 아, 하고 안심했다.
“고마워요.”
“거 서 있지 말고 이리 온나.”
돈 봉투를 찾았다는 데도 수일은 가만 서 있었다. 그러다 슬슬 뒷걸음질 쳤다. 도망가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눈치 빠른 두산은 수일이 도망갈 조짐을 보이자 냅다 뛰었다.
수일은 몇 발자국도 못 가 두산에게 잡혔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니 와이라는데?”
“택시비만 줘요. 나 혼자 집에 갈 테니까.”
“가자. 니 지금 제정신 아이다.”
“혼자 가게 해 줘요.”
수일은 두산에게 잡힌 팔을 빼려 안간힘을 쓰며 애원했다.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대하고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두산은 욕을 뱉으며 수일을 어깨에 들쳐 멨다.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수일은 반항도 못 하고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두산에게 얹혀 갔다.
두산은 수일을 봉고에 태우더니 보조석 문 잠금장치를 빼 버렸다. 수일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바보도 아니고,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까.
수일은 속으로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맸다.
두산은 차를 몰고 병원부터 갔다. 수일의 상처 난 얼굴과 입술을 치료하고, 발바닥에도 다시 붕대를 감았다. 항생제 주사도 맞았다.
약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수일은 두산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계속 곁눈질만 하며 눈치를 살폈다.
빵을 훔쳐 먹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삼락 형님은 왜 직접 오지 않고, 하필 두산을 불러서 자기를 이렇게 창피하게 만드는지 몰랐다.
차에 타기 전에 두산이 소염제와 항생제라며 약을 주었다. 수일은 의심 없이 약을 먹었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