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레이븐 컬렉션
인간들은 세계를 가열차게 변화시켰다.
도시의 성곽은 무너지고 포화로 이루어진 전쟁이 땅을 할퀴었다. 나무는 꺾여 부러지고 짐승들은 집을 잃어 쓸쓸히 수를 줄였다. 그러나 파르티잔의 장대한 숲은 신화의 뿌리를 거두지 않은 채 그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숲지기의 산장에도 세월은 스며들었다. 산장을 구성하던 나무가 썩기 시작하자 숲지기와 그 연인은 도시에서 벽돌을 사 오기로 맘을 먹었다. 붉은색에 광택이 조금 나는 벽돌이 선택되었다. 다른 벽돌보다 무겁기도 더 무거웠지만 숲지기의 튼튼한 연인은 어렵잖게 벽돌을 지고 산에 올랐다.
붉은 벽돌집은 견고하게 지어졌고, 숲지기의 애정 넘치는 관리를 받아 언제나 깨끗하게 유지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숲지기의 집이 또다시 변화를 맞이한 것은 놀랍게도…….
“텔레비전?”
레이븐은 동그래진 눈으로 전자제품 상점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옛날 잡화점이었던 가게는 어느 날 라디오란 것을 들이더니 점차 그 물건을 바꿔 전자제품 상점이 되어버렸다.
칼로 다린 듯한 와이셔츠에 체크무늬 조끼를 걸친 상점 주인이 레이븐을 졸졸 따라다니며 물건에 대해 설명했다.
“이건 최신식인 컬러텔레비전입니다. 종래의 흑백텔레비전과는 달리 색이 있는 화면을 내보내지요. 가격은 좀 있습니다만,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귀댁의 격을 높여 드릴 물건이라 자신합니다.”
까마귀는 입을 벌리고 텔레비전이란 것을 쳐다보았다. 화면이 오색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끊임없이 변하는 색상들은 반짝이는 것에 약한 까마귀의 혼을 사로잡았다.
열성적으로 세일즈를 하며 달라붙는 판매원의 태도에 레이븐은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반짝이는 상자라니?! 세상 어떤 보물이 이렇게 빛날 수 있을까? 갖고 싶었다. 집에 놓아두면 계속 저렇게 반짝거리는 빛을 내뿜을 것이다. 반짝거리는 집. 반짝거리는 거실. 반짝거리는 티비의 빛이 반사된 시빌의 반짝거리는 금발……. 좋았다. 아주 좋았다.
“110볼트와 220볼트 모두 사용 가능한 실용적인 상품입니다.”
“……110볼트?”
“요즘 새집은 220볼트로 지어지지만, 연식이 좀 있는 집은 거의 110볼트니까요. 여기, 뒷쪽의 이 나사를 돌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레이븐은 텔레비전의 뒤쪽을 보여주는 판매원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레이븐의 반짝이는 보금자리는 튼튼하고 쾌적했지만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산속 깊은 곳의 위치하고 있어 이십 년 전 가스등을 설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집엔 전기 안 들어오는데.”
간이라도 빼줄 듯하던 판매원이 표정이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그가 장사하는 곳이 보통 지역이었다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에 농담 말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나 파르티잔의 산맥 구석구석엔 사람이 사는지 귀신이 사는지도 모를 마을들이 여럿 있었다. 물론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마을들이었다.
“댁이 산맥 깊이 있는가 봅니다.”
“그렇게 깊지는 않아요. 걸어서 이틀 정도 거리니까.”
이틀이라는 말에 상점 주인의 눈은 이제 완전히 아련해졌다.
“그렇게 깊이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면 전기 사업이 확장돼도 선이 들어가기 힘들겠는데요.”
“그렇습니까?”
“뭐, 그렇지요. 저기 남쪽의 섬 같은 경우에도 선이 안 들어가거든요. 전기가 필요한 섬에선 자체적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 씁니다.”
물건 팔기를 포기한 상점 주인은 남쪽 해안가에 살던 때의 경험을 되살려 잡담을 늘어놓았다.
“다행히 티비나 라디오 전파 같은 건 산골에서도 잡히니까요. 수신감도가 안 좋기는 해도 커다란 안테나 하나 붙여주면 어디서든 원하는 프로를 볼 수 있답니다.”
전파니 수신감도니 안테나니 모르는 단어가 잔뜩 나왔지만 레이븐은 반짝거리는 상자에 대한 열망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섬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자신의 산장에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세 험한 계곡으로 벽돌을 짊어 옮겨 집을 지은 역사의 증인이 레이븐과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럼 발전기랑 안테나는 어디서 사죠?”
“예? 뭐 전파상이나 철물점 같은 곳에서 취급하지요.”
“전파상. 철물점.”
레이븐은 소매에서 수첩을 꺼내 전자제품 상점 주인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 저돌적이기까지 한 태도에 상점 주인은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오래 살아가는 만큼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아.”
까마귀의 푸념에 시빌은 밤 껍질을 까던 손을 멈췄다. 뭔가 최신의 물건, 특히나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 레이븐이 주로 내뱉는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다.’였다.
“가장 최근에 그 말을 들었을 땐 도시에서 가스등을 보고 난 뒤였지.”
집 안에 가스관을 설치하고, 커다란 가스통을 매달 짊어지고 올라오는 건 시빌의 일이었다. 저 밉살스러운 까마귀가 한 일이라곤, 더 크고 화려한 등을 골라 집안 곳곳을 현란하게 만든 것뿐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반짝이는 주방 천장의 샹들리에를 잠시 쳐다본 뒤 시빌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난 가끔씩 보수적인 남자가 되고 싶더라.”
“그런 패배자 같은 소릴!”
레이븐은 버럭 성을 내며 밤칼을 높이 들었다.
“괴물이나 체스나 낱말 맞히기 따위의 게임에서 패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시대에만은 지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니. 난 그냥 저축이라는 걸 조금 하고 싶을 뿐이랄까.”
얼추 생필품 이름은 모두 읽고 쓸 줄 알게 된 시빌이 가계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도시가 발달할수록 산속에서 사는 두 사람의 재정은 얄팍해졌다. 그러나 시빌은 헛기침을 한번 한 뒤 무조건 반대하려던 생각을 고쳐먹었다.
강압적인 전쟁의 시대에서 벗어난 인간들의 문물은 정말이지 놀랄 정도로 빨리 변했다. 레이븐의 말은 단순히 새 물건을 사기 위한 개소리인 듯했으나, 시대에 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만은 어느 정도 진실도 담겨 있었다.
“그래, 이번엔 대체 어디서 뭘 보고 온 건데?”
누그러진 시빌의 태도에 레이븐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었다.
“잡화점이 전자제품 상가로 바뀌어서 구경하고 왔는데 말이지, TV라는 게 참 좋아 보이더라구. 최신 정보가 전파라는 걸 타고 바로 나오는데 무려 극장에서나 보던 움직이는 그림들이 계속 나오지 뭐야!”
그냥 듣기에도 매우 비싸 보이는 설명에 시빌은 불안한 눈초리로 레이븐을 향해 물었다.
“그게 얼마?”
“40만 텔런. 그런데…….”
“그런데?”
레이븐이 시빌의 눈치를 잔뜩 보며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전기라는 걸 써서 움직인다더라고.”
“…….”
“그래서 전기공사라는 곳에 전화를 해 봤는데, 우리가 사는 곳은 산이라서 설치가 안 되고, 그래서…….”
레이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가발전용 동력 엔진이라는 걸 알아봤는데, 그게 또 가격이 제법.”
시빌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얼만데?”
“500만 텔런.”
시빌은 손에 쥔 밤을 껍질째 우그러뜨렸다. 500만이면 거의 1년 수입에 육박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놓은 돈이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기본적으로 산속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의 수입은 많다고 하기 힘든 것이었다. 시빌은 기가 막혀 외쳤다.
“500만이라고?!”
“무, 물론 집에 전기설비를 하려면 돈이 더 들지만.”
“더 든다고?!!”
시빌은 두 눈을 도끼날마냥 시퍼렇게 뜬 채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그 기세가 참으로 험악하기 그지없어 레이븐은 여름날 푸성귀마냥 축 늘어지고 말았다. 시빌은 고압적인 태도로 팔짱을 꼈다.
“내가 그걸 사야 하는 이유 세 가지만 대 보시지?! 반짝거린다는 이유 빼고 말이야!!”
그리고 시빌은 곧바로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사야 할 이유가 참으로 많았던 것이다.
“숲에 있으면 놀 거리도 없어서 읽던 책 재탕하거나 매일 나무 조각만 깎아대서 톱밥 날리지, 책값 만만찮지, 신문도 매일 배달 안 되어서 마을에 내려갔을 때 한꺼번에 들고 올라와야 하지, 그런데 TV에선 뉴스라고 새 소식을 전해주는 프로가 매일 방송된다고 하니 바깥일을 알기에도 수월하고, 또 신문은 모르는 글자가 많으니 내가 읽어줘야 하는데 TV에선 소리가 나오니까 그럴 필요도 없고. 또…….”
레이븐은 전자제품 상가 주인이 세일즈를 위해 쏟아내던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시빌은 터져 나오는 이유 앞에 버틸 도리가 없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실 오락거리가 계속 나온다는 말엔 솔직히 시빌도 두 귀가 쫑긋거렸다. 파르티잔의 깊은 산맥 속에 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500년이 넘게 흘렀다. 놀 만한 건 모두 시도한 지 오래라 요즘엔 정말이지 무료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감정을 넣어서 책을 읽어주던 레이븐은 이제 배우를 해도 좋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었고, 바레아에서 주민 연극이라도 할 때면 언제나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1인극이 좋은 것도 한두 번인 법이었다.
“그래? 그렇게 좋아?”
시빌은 실하게 반짝거리는 밤톨들을 매만지며 레이븐을 향해 물었다. 레이븐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너무 기쁘게는 보이지 않게 조심하며 장광설을 더욱 늘어놓았다. 레이븐이 아주 작정을 하고 덤비는 데 시빌이 버티려면 아직도 500년은 더 함께 살아야 할 듯했다.
두 사람의 오두막에 TV가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였다.
바보상자라는 이름이 허투루 붙은 게 아니로구나. 시빌과 레이븐은 반짝이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산속의 일과라는 것이 해가 지면 손을 놔야 하는 게 태반인지라 나흘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훌륭한 TV 중독자가 되었다. 군것질이 급속도로 늘어나며 두 사람의 체중 또한 함께 늘었다.
“역시 웬만한 배우보다 내가 더 잘 생긴 것 같아.”
자뻑하는 시빌을 향해 레이븐은 부끄럽게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키가 참 큰 것 같네.”
“흐음.”
“다들 잘 먹고 자라서 그런가.”
시빌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평균 신장에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작다는 말은 듣지 않는 키였으나 그렇다고 크다는 말도 요새는 듣지 못한 탓이었다. 뭔가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이러다 난쟁이 똥자루로 불리게 될지도 몰라.”
레이븐의 중얼거림에 시빌이 이를 꽉 악물었다.
“그땐 하산해서 전쟁을 일으켜주지.”
“평균 신장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니. 마왕이라고 불러주기에도 부끄러운 이유…….”
“적당히 커지는 게 좋을 것이다, 인류여!!”
두 주먹을 움켜쥐며 외치는 시빌의 모습에 레이븐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납치당한 공주가 마왕보다 키가 클지도 몰라.”
세월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법이라던가. 시빌은 서글픈 기분이 되어 천장만 노려보았다. 그런 시빌의 모습에 레이븐이 위로랍시고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금발만은 자기가 최고일 테니까.”
“…참으로 큰 위로가 되는군.”
착잡한 표정의 시빌을 향해 레이븐이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키면 도와줄게.”
자신을 버리고 숲으로 휙 떠나버렸던 레이븐이, 이제는 전쟁을 도와준다고 속삭였다는 사실에 시빌은 가슴 속의 무언가가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감격해야 하나? 시빌은 복잡한 기분이 되어 까마귀의 부리에 입을 맞췄다. 마침 TV에서도 키스신이 나오고 있었기에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빌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몇백 년간 지속된 이 같은 사랑이 배신과 오욕으로 범벅되어, 파국의 새 아침을 불러올 줄은.
발단은 일요일 저녁 일어났다.
그 날은 드물게도 시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레이븐이 상처 입은 부엉이를 날려주기 위해 하룻밤 밖에서 지새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빌도 함께 가려 했으나 동물들은 아직도 그를 꺼렸다.
레비쥬라는 근본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하고 시빌은 생각했다. 가끔은 피가 그리워졌다. 잔혹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시빌은 입을 다물고, 어두운 그늘과 찬란하게 빛나는 낙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영광과 부귀와 권력, 그 모든 것을 가져보았기에 포기한 뒤에도 미련을 지울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었다.
“할 일이 없군.”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시빌은 헛기침을 하며 TV를 켰다. 정확히 말해서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부서질 기미가 있는 울타리도 고쳐야 했고, 말려놓은 가죽도 뒤집어 놓아야 했다. 장마 때문에 미뤄놓은 빨래도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됐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하기엔 밤이란 시간이 적절치 않다고 시빌은 생각했다.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므로, 그 소중한 개인 시간을 일거리로 날리는 건 좀 아까운 일이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옥수수를 들고 시빌은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연속극에 빠져들었다. 부엉이를 손에 들고 나가던 레이븐 또한 이 연속극의 팬이었는데, 나가던 레이븐의 표정이 어찌나 처량하던지 자신이 텔레비전을 잘 보고 줄거리를 얘기해주지 않으면 안 될 듯했다.
“저런 나쁜 놈!”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던 시빌은 남자의 순정을 버리고 다이아에 넘어가는 여주인공의 모습에 분통을 터뜨리며 옥수수알을 튀겼다. 반짝거리는 돌에 홀라당 넘어가는 꼴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가슴 한구석이 억울해지며 울화가 치솟았다.
“저따위 돌이 다 뭐라고! 아무리 예뻐도 시간이 지나면 구식 커팅이니 뭐니 하며 값어치도 떨어지는 것을!”
옥수숫대를 반으로 꺾으며 시빌은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금이 최고 아닌가 금이! 보석을 팔고 금을 사놨으면 지금쯤 파르티잔 산맥을 다 샀겠다! 이노무 까마귀!!”
시빌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 남자가 되다니. 자신의 인생도 이제 막장이로구나. 시빌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흥분한 관객에게 배우가 찔려 죽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 하는 멍청이라 비웃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끊임없이 욕을 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되는 일일 연속극의 마수에서 허우적거리던 시빌은 옥수수를 두 개나 더 작살내고서야 채널을 바꿀 수 있었다.
돌린 채널에선 다큐멘터리가 하고 있었다. 평소 스포츠 중계가 나올 시간이었으므로 시빌은 매우 의아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마이언 건국 기념일 특별방송이라는 시답잖은 로고가 붙어 있었다. 자신이 만든 나라였으나 응원하는 구단의 경기를 잡아먹은 방송인 탓에 시빌은 매우 성질을 냈다.
“뭐야. 오늘이 건국 기념일이야?”
마이언의 초대국왕은 텔레비전을 향해 반문했다.
건국 기념일이라면 어느 날을 말하는 거지? 아일린을 죽인 날을 말하는 건가? 시빌은 눈살을 험악하게 구겼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두 해도 아니고 수십 년도 아니다. 5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보니 기억나는 게 정말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당사자도 기억 안 나는 건국일을 이 인간들이 대체 왜 챙겨 기념하고 있단 말인가?
‘기념할 만한 날이었나.’
머리통은 깨져서 바닥은 피투성이지, 마법사는 얼이 빠져 멍하니 서 있었고. 무엇보다 여긴 마이언도 아니었다.
시빌은 신경질을 냈다. 생각해보니 기가 막혔다. 시빌과 레이븐이 살고 있는 파르티잔은 4개국에 걸친 거대한 산맥이었지만 인접한 국가 중에 마이언은 없었다. 굳이 그 둘이 있는 곳을 국가로 구분하자면 바레아가 속한 비텔른이 가장 가깝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은 비텔른과 마이언이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으므로 그 기념으로 방송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드라마와 스포츠만 챙겨보는 시빌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시빌 왕의 재위기는 3년간의 실종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전기가 일반적인 레비쥬의 지배기라면, 후기는 레비쥬의 지배를 파괴하는 일탈기였죠. 300년간 지속된 전기에 비해 20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 발자취는 깊게 남아 지금도 그를 우러러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레비쥬에 비해 시빌 왕이 성군으로, 진정한 신으로 우러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빌은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예전에 로겐에서 승천하는 자신의 동상을 봤을 때와 같은 오글거림과 민망함이 자살 충동으로 화해 그의 뒷덜미를 후려쳤다. 시빌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은 자비 없이 시빌을 추켜세우며 볼썽사나운 찬사들을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시빌 왕의 미스터리 중에는 마법사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전기의 아멜리타 발루아가 평화를 이뤄낸 반면 후기의 마법사는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합니다. 대개 은화에는 마법사의 두상을 새기는데, 특이하게도 마이언의 후기 은화에는 인간이 아니라 까마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많은 이들이 파르티잔의 유물을 시빌 왕이 얻었다고 말합니다.」
“…마법사가 없기는 했지.”
간신히 몸의 마비가 풀린 시빌이 대추차를 따르며 추임새를 넣었다. 생강이 들어가 향긋하고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화면은 이제 바뀌어 시빌 후기 시대의 행정과 야사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있었다. 시빌은 유자차에 젖어 얼룩진 서류의 모습에 마시던 대추차가 목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컥!! 콜록!”
「시빌 대왕이 문맹이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대한 재미난 증거를 이 서류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뭐? 아냐! 이젠 문맹이 아니라고! 조금 서투를 뿐이지 문맹은 아니…!”
「시빌 왕의 서명이 시빌이 아니라 시발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그것인데요, 가혹한 업무와 관료생활에 지친 신하들은 그들의 왕을 시빌이 아니라 시발이라고 적곤 했습니다.」
시빌은 뇌가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관료들은 대담하게도 왕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서류에도 시발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분출하기 힘든 울화가 글로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지요. 레비쥬의 위세가 살아있던 시대에, 레비쥬인 그들의 왕이 내리는 명을 거역하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스운 것은 시빌 왕 본인도 자신의 이름을 시발로 적고는 했다는 것입니다.」
“아냐. 저건 내 남부식 서…….”
「관료 전체가 작당하여 시빌 왕에게 틀린 철자법을 가르쳐 준 것으로 추측됩니다. 시빌 왕의 전기와 후기 통틀어 관료들의 집단 사살이나 파직이 없었던 것을 보아 그러한 모의는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하늘이 무너지는 게 이런 기분일까. 화면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불행히도 레이븐과 함께 검토하며 야한 짓을 했던 서류였고, 그때 레이븐은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시빌에게 말해 주었었다. 저 잘못된 글자로 짚어주는 자신의 이름도 똑똑히 시빌이라고 읽어 주었고.
5백 년 만에 알아챈 배신의 증거는 너무나 확고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멜리타에게 머리통이 날아갔을 때 느꼈던 배신감이 지금과 비슷할까 싶었다. 시빌은 바닥을 구르는 대추차를 발로 꾹 즈려밟았다.
「레비쥬임에도, 그는 레비쥬의 시대를 끝낸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정기와 사상을 물려받아 현재 마이언의 국민들도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빌은 황폐해진 얼굴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았다. 지상 최강의 얼간이가 자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레이븐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음침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초상이라도 치른 듯한 분위기가 산장 가득 깔려 있었다. 심상찮은 공기에 새도 울음을 멈추고 나무 또한 흔들림을 멈춰 사방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까---악!”
레이븐의 집 문턱에 앉은 까마귀가 긴 울음으로 경고를 보냈다. 이 숲에서 시빌과 친한 동물이 있다면 까마귀가 유일했는데, 지금 그 까마귀의 경고 속엔 레이븐을 향한 비난과 불안이 담겨 있었다.
“설마. 설마 그사이 레비쥬가?”
인간의 시대가 되었다지만 레비쥬는 끊임없이 각성하여 이 세상에 나타났다. 대부분이 인간의 손에 죽었지만 그중에는 유물을 찾겠답시고 파르티잔까지 들어오는 자도 있었다. 어린 레비쥬들이기에 그간 큰 위협은 없었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안 돼. 시빌! 시빌!!”
레이븐은 어두컴컴한 산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드러난 모습에 그야말로 말을 잃고 말았다. 시빌이 검을 뽑아 든 채 부서진 텔레비전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여주인공이 드디어 남주를 찼구나!’
레이븐의 머릿속을 후려친 생각은 우습게도 드라마에 대한 것이었다. 레이븐은 쩔쩔매며 시빌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시빌. 화가 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꿎은 TV를 부술 것까진…….”
“넌 알고 있었겠지?”
“응? 아. 짐작은 하고 있었지. 시빌, 저기 좀 진정하고.”
고개 숙인 시빌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시빌은 칼칼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끔찍한 사실을 알아버려서. 제대로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
드라마에 심취한 것치곤 너무 심각한 것 아닌가. 레이븐은 걱정을 숨기지 못하며 시빌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사실? 무슨……. 시빌, 괜찮아?”
“왜? 시발이라고 다들 쓰던데, 부를 때도 그렇게 부르지 않고?”
불쌍한 까마귀는 박제처럼 굳어버렸다.
“그, 그, 그걸 어떻게!”
평생을 숨기고 갈 비밀이 폭로되자 레이븐은 황망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눈꺼풀 하나 깜빡이지 못하는 레이븐을 향해 시빌이 텅 빈 듯한 목소리로 잘게 웃었다.
“난 정말 까맣게 몰랐지 뭐야. 날 존경과 두려움으로 바라보던 신하들이 뒤로는 시발이라고 쓰며 날 조롱했다는 사실을. 심지어는 내 면전에서까지 나를 조롱했다는 것을!”
“아니, 그건 조롱이라기보다는.”
뒷담을 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받은 관료의 최후발악 같은 것이었지만. 시빌의 눈은 이미 맛이 가 있었다.
“족칠 인간들은 다 죽어버렸고, 살아있는 건 너뿐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치미는 허무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 내가 지금 이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 봐.”
“이러다니. 시빌?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왜? 걱정돼?”
시빌은 음울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부서진 TV와 손에 들린 검에 시선이 빼앗겨 미처 보지 못한 것이 빛 속에 드러났다. 레이븐이 애지중지 모아놓은 보석 컬렉션이 시빌의 다른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다.
붉은 벨벳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안엔 레이븐이 수백 년간 모아온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보석들의 값어치는 천차만별이었다. 번개가 모래밭을 후려쳐 생겨난 유리 장식이나 동굴 깊은 곳에서 캐낸 석영과 수정, 겹겹이 층을 지어 빛나는 거대한 오팔 등이 자연석이라 저렴한 반면, 시빌이 왕위에 있었을 당시 선물한 목걸이와 보석들은 가치를 매기기 힘든 국보급의 유물이었다.
“걱정하지 마, 레이븐. 부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돈이 얼만데 이걸 부수겠어. 대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게.
시빌은 지금껏 레이븐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미소 지었다.
3주 뒤, 마이언의 국립박물관에 익명의 화물이 도착했다. 레이븐 컬렉션이라 불리는 엄청난 양의 보석 컬렉션이 그것이었는데, 마이언 초기의 생활양식과 세공수준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였다.
레이븐 컬렉션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전시 때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것으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조직적인 새들의 탈취 행각에 호송인단은 언제나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새로 산 텔레비전에서 전시회 소식이 나올 때마다 시름시름 앓던 레이븐이 컬렉션 탈취를 위해 파르티잔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삼 년 뒤였다. 쥐알 같은 인내심이라 할 수 있겠으나 시빌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범행을 예고하는 편지를 박물관에 발송했다. 분노가 풀리기엔 지금껏 해온 남부식 서명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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