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까마귀 은화
시빌은 레이븐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렸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 끝에 살짝 입 맞춘 뒤 귀밑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목이 긴 하얀 셔츠를 입고 단추를 끝까지 잠그자 간밤에 생긴 울혈들이 가려졌다. 익숙한 녹색의 코트를 걸치는 레이븐을 보면서 시빌은 그도 검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머리카락을 대충 슥슥 빗어 넘기자 레이븐이 다가와 어깨에 떨어진 금빛 머리칼들을 떼어주었다. 시빌은 버리기 아깝다는 듯 머리칼을 놓지 못하는 레이븐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들고 갈 가방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두 개의 케이스였다. 간단한 세면도구와 지도, 갈아입을 속옷과 옷이 몇 벌 들어 있었다. 레이븐은 잠시 고민하더니 책을 한 권 더 챙겼다.
“레이븐?”
“지금 가요.”
레이븐은 가방을 들고 산장 밖으로 나갔다. 봄의 상쾌한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븐이 나오자 시빌이 산장 문을 걸어 잠갔다. 두 사람이 둥지를 튼 산장은 처음 보다 거의 2배 가까이 커져서, 이젠 집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잘 정비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며 레이븐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숲이 걱정 말라며 나뭇잎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시빌에게 팔짱을 꼈다.
20년 만의 외출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게 느껴집니다.
누군가가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뚫어놓은 듯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요.
이 격류에 휩쓸린 세계는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 걸까요?
바레아는 더 이상 오가는 이들에게 레비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벌써 10년도 더 전부터 수문장은 신분증만 확인하고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그런 시대였다. 이제 어디서도 레비쥬로 인한 마을의 전소가 들려오지 않았고 마법사는 영지와 국가의 일을 하며 먹고 살았다.
파르티잔의 숲지기와 그 동거인을 알아본 바레아의 수문장은 친근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했다. 한 달에 두어 번 물건을 사러 내려오는 두 사람을 모르는 이는 도시에 없었다. 카디넬의 어두운 피부도 그랬지만 시빌의 화려한 외모는 세간의 관심이 되기 족했던 것이다.
“장 보러 오신 겁니까? 그런 것 치곤 근사하게 차려입으셨네요?”
“여행을 다녀오려고요.”
레이븐은 볼을 붉히면 덧붙였다.
“친구들도 만나고, 연극도 보고 올 거랍니다.”
“자리를 비우시다니 드문 일이네요.”
“필요한 약은 그저께 치료소로 다 보내놨으니까 한동안 괜찮을 겁니다. 제가 없으니까 숲을 다닐 땐 주의하라고 사람들에게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숲지기님. 그리고 마법사님.”
시빌은 살짝 목례했다.
늙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빌은 자신이 마법사라고 주변에 설명했다. 사람들은 그가 마법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어째선지 다들 믿었다. 바레아 영주로부터의 초빙을 거절하는 것은 시빌의 연례행사나 마찬가지였다. 시빌은 한숨을 내쉬며 레이븐의 귀에 속삭였다.
“그냥 레비쥬라고 할 걸 그랬나 봐.”
“이제 와선 아무도 안 믿을걸? 영지에 소속되기 싫어서 둘러대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실제로 레비쥬냐 인간이냐는 수문장의 질문에 당신은 계속해서 인간이라고 답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답한 게 벌써 10년 전인데…….”
“수문장이 은퇴한 거지 죽은 게 아니잖아.”
시빌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숲지기로서 바레아에 필요한 잡일들은 모두 해놓은 상태였다. 시빌과 레이븐은 여관으로 들어가 마차를 수배했다. 여관에는 여러 지방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외지인들은 동부의 시세에 관해 이야기하며 장사할 궁리로 정신이 없는 듯했다.
“많이 소란스럽죠? 요새 부쩍 외지인이 늘었답니다.”
“카디넬이 여관에 들어와도 놀라지 않는 모습이 더 놀라운데요.”
레이븐의 말에 여관주인이 허허 웃었다.
“동부에서 장사하는 치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놀란다면 오히려 외모에 놀라는 것이리라. 시빌은 내심 웃으며 레이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외지인들 중 몇 명이 턱을 떨어뜨린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마차는 어디까지 쓰실 겁니까?”
시빌이 상인들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며 대답했다.
“로겐까지 갈 겁니다. 그쪽에 친구들이 몇 명 있어서 죽기 전에 얼굴들 좀 보려고요.”
“로겐? 꽤 머네요. 마차 빌리는 값이 꽤 나올 텐데요. 차라리 역마차를 타시죠?”
처음 듣는 단어에 레이븐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역마차?”
“동부에서 정기적으로 로겐까지 가는 마차가 있습니다. 가다가 내려도 되고 끝까지 가도 되고. 요금은 거리에 비례해서 내면 되는데 대신 모르는 사람들 여럿과 함께 타야 하죠.”
레이븐과 시빌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돈은 충분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시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그럼 그게 낫겠네요. 어디서 타야 합니까?”
“다행히 내일 아침 이곳으로 들어오는 마차가 있습니다. 이 정기 마차를 바레아까지 오게 하려고 영주님이 힘 좀 쓰셨더랬죠. 참. 소지품 관리는 잘하셔야 합니다. 도둑들도 가끔 있으니까요.”
“고맙소, 주인장.”
시빌과 레이븐은 열쇠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새벽의 정류장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가족을 찾아가는 사람부터 일거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 장사를 위해 왔다가 이동하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빌과 레이븐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마차를 기다렸다. 월등한 미모의 카디넬과 금발의 미남은 어디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은 기다리며 흘끔흘끔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한 시간가량을 기다리자 마차가 왔다. 사람들은 땅에 내려놓았던 짐을 들어 올렸고 내리는 사람들은 마차 위에 올려놨던 짐을 내리느라 소란스러워졌다. 시빌과 레이븐은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12명까지도 탈 수 있는 커다란 마차에는 이전 역에서부터 타고 온 손님들도 세 명 앉아 있었다.
“어디까지 가쇼?”
“로겐이오. 두 명.”
“은화 1닢이오. 식사는 알아서 하셔야 하고.”
출발하기 전 마차 삯을 받는 마부에게 시빌이 은화를 넘겨주었다. 동부에서 사용하는 바레아 은화였다. 마부는 씨익 웃으며 은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과연. 바레아라 바레아 은화입니까? 이거 거스름돈 줘야겠는데.”
마부는 웃으며 시빌에게 동전을 세 닢 거슬러 주었다.
덜컹거리며 마차는 동부의 산간지방을 가로질렀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의 바깥 풍경을 레이븐은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 길을 마차로 지나간 적이 있었다. 아네모네와 왼쪽 상처, 그리고 왼쪽 상처의 부하였던 커팅 맷. 모두가 글을 읽지 못해서 길가의 표지판 앞에 굳어 서기도 했었다.
“무슨 생각 해?”
“옛날 생각. 벌써 40년도 전이구나 싶어서.”
레이븐은 시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시빌의 가슴 위로 늘어졌다.
로겐까지는 마차로도 삼 주나 걸렸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여행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중간에 내렸고, 또 그만큼 새로 마차에 올랐다. 사람들은 금세 친해졌다. 여행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카디넬이라서 설마 했는데 숲지기셨구먼.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로겐에 친구가 있어서요. 가는 김에 구경도 좀 하고.”
“로겐이라니 부럽네요. 저도 한 번쯤은 로겐에 가보고 싶어요.”
앞자리에 앉은 귀여운 아가씨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동경 가득한 표정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대륙 유일의 왕국이잖아요? 멋진 기사분들도 많고 아름다운 아가씨들도 많다던데. 기왕 일할 거라면 그런 곳이 좋았을걸…….”
“어디에 가시는데요?”
시빌이 묻자 아가씨는 들떠서 종알거렸다.
“전 오펠린까지 가요. 친척집이 그쪽에 있거든요. 시녀로 일 할 거예요.”
“뭐? 오펠린도 좋은 도시라구, 아가씨.”
담배 장사를 하는 남자가 오펠린을 두둔하자 아가씨가 새초롬하니 흘겨보았다.
“누가 나쁘댔나요? 그냥 로겐에 한번 가 보고 싶다는 거지.”
“뭐 로겐이야 멋진 도시지. 공주님도 아름답고.”
장사꾼의 말에 레이븐 옆에 앉은 청년이 갑자기 열기 띤 어조로 말했다.
“공주님을 보셨어요?”
“엉? 나 같은 장사꾼이 무슨 수로 공주님을 봐? 그냥 예쁘다고 소문도 자자한 데다가 노래도 있고, 거 초상화도 로겐에서 팔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
“전 또 보셨나 하고….”
“왜. 공주님이 보고 싶어?”
놀리는 게 다분한 장사꾼의 이죽거림에 청년이 볼을 붉혔다.
“예에. 뭐……. 제가 지켜드리고 싶어요. 공주님이잖아요?”
마차 안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갑자기 웃음거리가 된 청년은 화도 못 내고 뒷목만 벅벅 긁었다.
“그럼, 미래의 기사님이신가?”
“아뇨. 기사라고까진…….”
“남자가 그렇게 수줍으면 어떻게 해!”
사람들은 웃고 수다 떨며 여행길을 가득 채웠다.
귀여운 아가씨는 오펠린에서 내렸고 담배 파는 장사꾼은 하루를 더 가서 내렸다. 시빌과 레이븐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산속에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안정되어 있었다. 마음과 정신이 모두 평온했고 현재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레비쥬가 판치던 과거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엔 언제나 전쟁에 대한 공포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그림자는 영영 걷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레이븐은 시빌을 향해 지나가듯 말했다.
“다들 좋아 보이네.”
“그러게. 좋은 세상이야.”
시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덜컹거리는 마차의 움직임을 즐겼다.
중부대로에 이르자 마차는 잠시 검문을 위해 멈춰 섰다. 마이언에 들어섰다는 얘기에 레이븐은 크게 놀랐다. 그가 기억하는 북부는 발루아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그 영지도 북부에 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부인데 마이언이네?”
레이븐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시빌이 음산하게 웃었다.
“예전에 우리한테 시비 걸었던 레비쥬 생각나?”
“시비 건 레비쥬?”
“왜 네가 눈알 먹는 척해서 떨어뜨린 것들 있잖아. 대관식 치르고선 북쪽 산 정리하고 바로 쓸어버렸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 전쟁의 여파로 중부도 서쪽은 죄다 마이언입니다. 랄까.”
레이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화풀이했군 이 인간.’
그때 간단한 갑주를 걸친 병사 한 명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남자는 마이언의 기장을 한 팔에 끼고 있었다.
“신분증 좀 봅시다.”
레이븐은 바레아에서 발행한 신분증을 꺼내 주었다. 경비병은 인상착의와 생김새를 비교하고는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신분증을 검사하던 경비병은 마지막으로 시빌의 얼굴을 보고는 움찔 몸을 굳혔다.
“어. 신분증 좀.”
“여기 있습니다.”
시빌 또한 바레아에서 발행받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병사는 얼굴과 신분증을 번갈아 보더니 매우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시마이온 빌? 마법사시라고요?”
“예. 뭐 문제라도?”
“아뇨. 꼭 어디서 뵌 것 같은 얼굴이라서요.”
그럴 리가 없지. 경비병은 작게 중얼거리더니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저희 마이언은 모든 마법사를 환영합니다. 하지만 불법적인 마법이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마법을 시전할 경우 대포를 발포할 수 있음을 경고해드립니다.”
“불법적인 마법?”
“대규모의 환상이나 착란. 기후변화 등이 그에 준합니다. 그럼 편안한 여행되시기 바랍니다.”
경비병은 정중하게 인사한 뒤 마차에서 떠났다.
마법사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시빌을 향했다. 동경과 두려움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 시빌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어도 마법사를 향한 시선만큼은 예전보다 약해지긴 했어도 아예 사라지진 않은 듯했다.
“관리가 잘 되고 있네.”
시빌은 긍정했다.
“그래. 생각보다 더 잘 돌아가고 있군.”
“왼쪽 상처가 왕이라니 굉장히 이상한데,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한 기분이군.”
레이븐은 키득키득 웃었다.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야.”
시빌도 피식 웃었다.
“그래. 아무도 몰랐지. 난 죽 쒀서 개 줬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게 아니었나 보네.”
검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병사들은 순서대로 사람들을 검문했고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문소 반대편에선 우편마차와 행정마차가 줄을 기다리지 않고 진입해 따로 검문을 받고 있었다.
룬강의 물줄기와 검은색의 나룻배가 수놓인 깃발 아래에서 병사들의 얼굴은 모두 사무적이었고, 잔인한 빛이나 탐욕은 어려 있지 않았다. 따분해 하고는 있었지만 긍지를 갖고 있는 얼굴이었다.
시빌은 ‘맙소사.’ 하고 중얼거렸다. 레이븐의 말대로였다.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멈춰선 마차에 새로 탄 것은 제법 나이가 있는 도둑이었다. 다른 손님들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시빌은 그가 타자마자 도둑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손가락에는 각이 있는 구리 반지를 끼고 있었고 소리 나지 않는 부드러운 신발도 신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빠르게 마차 안을 훑어보더니 휘파람을 불며 마차 끝에 앉았다.
엘렉페는 죽었을까? 문뜩 그가 생각났다. 수소문하면 바로 근황을 알 수 있는 왼쪽 상처나 아네모네와는 달리 엘렉페는 뒷세계의 왕이었다. 로겐에 들어가면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시빌은 도둑을 주시했다.
마차 안에는 시빌과 레이븐 말고도 제법 차림이 좋아 보이는 중년 하나가 타고 있었다. 도둑은 만만찮아 보이는 시빌과 그 일행 대신 잠에 취해 졸고 있는 중년을 노린 듯했다.
“다들 어디까지 가십니까?”
도둑이 말문을 트자 깨어 있는 사람들이 각자 목적지를 말했다. 로겐까지 가는 사람이 여섯 명 있었고 중간에 내리는 사람이 두 명이었다. 도둑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도 로겐까지 간다고 했다.
“고모님이 술집을 하시거든요. 고모부가 안 계시니 아무래도 우습게 보여서 힘든가 보더라고요. 믿을만한 조카에게 도움을 청하신 거죠.”
사람들은 고모님이 참 든든하시겠다며 덕담을 했다. 다들 관심 없는 어조였지만 도둑은 신이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아직 가게 이름은 모르지만요. 아. 로겐에 가시는 분들 중에 시간 되시면 한 번 들러주십쇼. 나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 고모님이 딴 건 몰라도 파이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굽는데, 먹어보셨습니까? 북부 정통 파이! 산딸기가 아주 그냥! 하하하.”
그때 시빌에게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레이븐이 깨어났다. 레이븐은 장광설을 펼치는 도둑을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엘렉페에게 누나가 있어? 쟤 왜 저래?”
“뭐?”
“저거 그때 구해냈던 그 아들놈이잖아. 엘렉페가 안고 펑펑 울었던.”
레이븐은 허리를 일으켜 세워서는 도둑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 알렘? 오랜만이네. 아버지는 잘 계셔?”
도둑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레이븐을 손가락질하더니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마차 밖으로 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뛰어내렸어!”
“미친놈 아냐 저거!”
시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레이븐은 그가 구해준 어린아이가 왜 도망쳤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빌을 바라보았다.
“쟤 왜 저래?”
“몰라서 묻는 네가 난 정말로 자랑스럽다.”
작업 중인 도둑의 본명을 부르며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으니 그로선 기겁할 일이 아닌가. 게다가 녀석의 표정으로 보아 분명 레이븐을 기억해낸 모양새였다. 그게 아니라면 저토록 놀라며 마차에서 뛰어내릴 리가 없지 않은가.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시빌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끝으로 짚었다.
“어디 아픈가 보지. 냅둬.”
레이븐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시빌의 어깨에 기대 졸기 시작했다. 이 눈치 없는 까마귀를 어째야 할지. 시빌은 곤혹스러운 듯 흔들리는 마차의 천장만 노려보았다.
3주 하고도 하루를 더 달려 두 사람은 드디어 로겐에 도착했다. 마부에게 남은 삯을 치르며 두 사람은 장대한 로겐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엔 만개한 장미 같던 로겐은 이제 어떻게 봐도 꽃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다.
도시의 면적은 거의 두 배가 넘게 불어있었고 오가는 사람의 수는 네 배가 넘었다. 그 엄청난 발전엔 시빌마저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레이븐이 도시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40년 만에 보는 것이지만 엄청난데 이건.”
“20년 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시빌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개구멍 같은 건 다 막혔겠군. 엄청난 확장인데.”
“통행증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누굴 죽이러 가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지.”
시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븐과 함께 성문을 향했다.
대도시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수도의 통행을 마냥 막을 수는 없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국경을 넘을 때는 제법 삼엄하게 짐들을 검사하던 경비들도 수도에 들어설 때는 크게 사람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시빌과 레이븐은 한 번 멈춰 서지도 않고 로겐으로 들어갔다. 성문에서부터 저 멀리 보이는 성까지, 도시 전체가 시장통이었다. 지나치게 활기찬 사람들의 움직임에 레이븐은 시빌의 팔을 잡고 비틀거렸다.
“축제였을 때보다 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시빌도 이렇게 번화한 도시를 보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활기찬 번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참으로 난잡했다. 건물들은 관리되지 않아 무너지려는 것부터 호화찬란해서 감히 벽을 만지기 어려운 것까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로겐에 대해서라면 그 구조에 있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시빌이었지만 오랜만에 온 도시는 예전의 모습을 자락조차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가며 길을 헤매던 시빌은 결국 분통을 터뜨리며 길을 물어보게 되었다.
“거지 같구만! 도시 속에 웬 미로를 만들고 지랄이야?”
레이븐은 킬킬거리며 열 받은 시빌을 놀렸다.
“사실 쇠락하길 바랐던 것 아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영주란 자들은 모두 자신이 다스릴 때 땅이 가장 빛나길 바라는 법이잖는가? 자신이 이 땅을 버렸으니 쇠퇴하길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야.”
“뭐, 솔직히 말해서 좀 그런 맘도 있었지. 아예 조각나서 왕국이란 게 없어질 줄 알았다고 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왼쪽 상처의 아가리에 들이밀었는데 어떻게 뭘 하면 이렇게 되냐?”
시빌은 짜증 난다는 듯 성큼성큼 길을 걸었다. 사람에 묻혀 쓸려갈 것 같은 기분에 레이븐도 필사적으로 시빌 뒤를 따라붙었다. 본래는 여관에 짐을 푼 뒤 엘렉페를 찾아가거나 왕성으로 잠입할 생각이었지만 도시 꼴이 말이 아니라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공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
“좀 물어보지그래?”
“로겐에서? 내가 로겐에서 길을 물어보다니?!”
하지만 결국 또 물어보게 되었다. 시빌은 한층 풀이 꺾인 모습으로 그가 지배했던 도시를 가로질렀다.
지독한 인구 과밀에도 불구하고 공원은 아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들을 묘사한 석상과 나무 사이를 걸어가며 아직 그들이 기억하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데 즐거움을 느꼈다. 그 동상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시빌은 말 그대로 얼어붙었고 레이븐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공원의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동상은 하늘로 승천하는 시빌의 모습이었다. 그 장엄하고 근엄한 모습은 아름다움과 맞물려 볼만한 것이었으나 당사자로선 부끄러워 경기를 일으킬만한 악몽이었다.
“그냥 왼쪽 상처를 죽여버릴까 봐.”
“히끅! ……히끅!”
레이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왼쪽 상처는 그날따라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두근거림은 그의 인생을 통틀어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예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왼쪽 뺨에 상처가 생기던 날도, 아네모네에게 청혼하던 날도 아무런 예감 없이 평범하게 시작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그는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왕관의 무게는 해가 다르게 무거워졌다. 200년이나 북부를 다스렸으니 이제는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던 시빌의 말이 요즘 따라 마음에 와 닿았다.
“무슨 생각 해?”
어깨를 주무르며 아네모네가 왼쪽 상처의 안색을 살폈다. 왼쪽 상처는 익숙한 손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다 때려치우고 너랑 둘이 적적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아네모네가 부드럽게 웃었다. 왼쪽 상처는 고개를 힐끔 돌려 그의 아내를 쳐다보았다. 주름진 얼굴이었다. 새까맣던 머리카락도 이제는 희게 물들어 그 잔재를 딸아이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의 어깨를 주무르는 손도 주름져있었다.
“우리 공주님이 어서 결혼해야 할 텐데.”
왼쪽 상처가 농담처럼 말하자 아네모네가 주무르던 어깨를 탁 치며 비웃었다.
“딸애를 누구에게 줄 생각도 없으면서 빈 소리는 참 잘해.”
“눈에 차는 놈이 없을 뿐이지 일부러 아무에게도 안 주는 건 아냐.”
왼쪽 상처는 입에 배길 정도로 한 얘기를 또다시 했다. 아네모네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당신 눈에 차는 남자애가 어디 있겠어? 예라도 하나 들어 봐.”
왼쪽 상처는 오래된 상처를 슥슥 긁었다. 곤란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딸애를 줄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차는 남자라……. 일단 엘린도의 막내 아들놈은 아니었고 서부에서 온 그 촌놈도 아니었다. 콘티키는 썩 인정해줄 만한 놈이었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게벨 그놈은 생긴 게 시덥잖고…….
“그래. 시빌 정도 되는 남자라면 우리 딸 애를 줄 수 있지. 능력도 좋고 일편단심이잖아?”
아네모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왼쪽 상처를 쏘아보았다.
“시빌은 레비쥬잖아?”
“말은 바로 해야지. 전신이 되어 승천하신 분에게.”
아네모네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 동상을 만들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우울함을 느꼈는지 떠올려버린 것이다. 애인과 함께 살겠다고 도망친 작자를 신으로 포장하기 위해 수많은 우울증과 복통약이 소모되었다.
아네모네가 차가운 비웃음을 날릴 때였다.
“나한테 딸을 준다고?”
심장의 뿌리 끝까지 얼어붙었다. 왼쪽 상처는 이대로 자신이 하직하는구나 싶었다. 그도 아니라면 벌써 죽어 저승에 와있는지도 몰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동공이 열릴 것 같은, 한마디로 죽어버릴 것 같은 부부의 옆에서 벽이 열리고 시빌과 레이븐이 기어 나왔다. 그 모습을 왕과 왕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억!”
“꺅! 자기야!!”
심장을 부여잡는 왼쪽 상처의 모습에 아네모네가 그제야 비명을 내질렀다. 공원의 낯 뜨거운 동상에 대해 따지려던 시빌과 레이븐은 갑작스러운 상황전개에 멍하니 굳은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히스테릭한 아네모네의 목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죽지도 않는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면서 울며불며 고함치던 아네모네는 왼쪽 상처가 간신히 일어나 그녀를 다독이고 나서야 그 입을 다물었다.
실로 공포스러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왼쪽 상처는 자신의 옛 주인과 숲지기가 찾아온 것에 꾸벅 고개 숙였다.
“오랜만이오.”
“오랜만입니다.”
레이븐은 두 노부부를 향해 인사했다.
세월의 무상함이란.
그 살기 시퍼렇던 이도 늙어 꼬부라졌고 흑단 같던 머리채도 파뿌리가 되어버렸다. 주름진 손은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상대의 건강을 묻고 또 물었다. 레이븐은 여행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아마도 이것이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터였다.
“잘 지낸 것 같네요.”
“두 사람이 벽에서 튀어나오지만 않았어도 10년은 더 살았을 거요. 대체 무슨 일로 여기 나타난 겁니까?”
퉁명스러운 왼쪽 상처의 태도에 시빌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왜? 못 올 곳이라도 되나?”
“전신이 되어 승천한 레비쥬가 땅을 걸어 다니는 건 당연히 안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왼쪽 상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승천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어찌나 비웃던지. 웃긴 건 측근들만 비웃지 국민들 중에선 비웃는 이가 없었다는 거지만.”
“아. 그런 걸 인덕이라고 하지.”
방 안에 있던 세 명 모두 오만상을 찌푸리며 시빌을 외면했다. 시빌은 이것들이 매우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만들어놓은 왕국까지 넘겨줬는데 저런 불손한 태도라니. 자신이 뭐 어떻단 말인가?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부글거릴 때였다.
“아네모네.”
레이븐이 침중한 목소리로 아네모네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븐은 그야말로 비참한 자신을 용서하라는 듯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일단 밥 좀 주세요.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네요. 배고파아.”
시빌은 레이븐이 부끄럽다며 외면했고 아네모네는 뭐 이런 거지 깽깽이 같은 게 있냐며 물끄러미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배고파요오.”
“……애 좀 굶기지 말고 다니시지 이게 뭡니까?!”
아네모네가 성질 내며 시빌을 흘겨보았다.
두 사람은 별관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담쟁이 넝쿨이 아름다운 건물의 모습에 레이븐은 이 건물이 예전 아멜리타를 죽였던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제는 피 튀겼던 현장의 흔적도 지워지고 새들에 의해 깨졌던 유리도 말끔히 고쳐져, 마치 예전의 끔찍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아름답게만 보였다.
시빌과 레이븐은 친밀한 손님들만이 안내된다는 별관의 정원에 앉아 식사를 대접받았다. 부드러운 양고기와 여러 종류의 빵이 식사로 준비되어 나왔고, 네 사람은 조용히 배만 채우며 손을 재게 놀렸다. 후식으로는 시콤한 안델산 와인이 후식으로 나왔다. 시빌은 오랜만에 음미하는 고급 와인에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왼쪽 상처가 입을 연 것은 식후의 와인이 바닥을 보일 때쯤이었다.
“그래서. 정말 무슨 이유로 오신 겁니까?”
시빌은 자기 앞에 놓인 와인의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킨 뒤 조금 초조해 보이는 왼쪽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이 자리를 선물한 자가 다시 빼앗아 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다지만 이곳은 그의 땅이고 왕국이었다. 더욱이 왼쪽 상처는 시빌이 아멜리타로부터 자신의 것을 되찾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긴장하지 마. 그냥 얼굴이나 볼 겸 온 거다.”
왼쪽 상처는 시빌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레이븐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신이 말입니까?”
시빌은 피식 웃었다.
“그대에게 넘긴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조금은 신경 쓰였지.”
“흐으. 에메랄드를 받고 나서, 서 엘린도에게 왕위를 넘길까도 많이 생각해봤죠. 하지만 안 되겠더군요.”
왼쪽 상처는 쿨럭거리며 웃었다.
“40년 전, 우리가 함께 로겐에 도착했을 때 당신의 공갈에 넘어가던 엘린도의 모습이 도저히 잊히질 않아서 말이죠. 크큭! 그런 순진한 작자에게 왕 자리는 안 되겠단 생각뿐이 안 들더군요.”
“엘린도가 좀 멍청하기는 하지. 아직 살아있나?”
“늙은이가 명줄만 질겨서는 죽지도 않습니다.”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옆에서 와인을 홀짝거리던 아네모네가 끼어들었다.
“만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당신을 무척 증오하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돌아오면 대포로 쏴버리겠다고 한참을 으르렁거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잠시 웃었다. 와인이 다시 한 바퀴 돌고 살짝 취한 레이븐이 앞뒤로 몸을 살짝 흔들거렸다.
“그래서. 왕국의 모습은 마음에 드십니까?”
시빌은 담담하게 물어보는 왼쪽 상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파르티잔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게 되었다. 많은 것이 변화했더군. 특히 변화한 마이언의 모습 중에는 생각도 못 한 것들이 많이 있었어. 참 좋아 보였다. 하지만 의문도 들었지.”
지나칠 정도로 좋아 보였던 마이언의 모습을 떠올리며 시빌은 왼쪽 상처를 향해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지? 이 정도까지 나라를 끌고 가려면 힘이 들었을 것이다. 책임감 때문인가? 나라를 쪼개고 보물은 약탈한 뒤 네 하고 싶은 대로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책임감? 넌 커팅 맷을 죽였지. 자신에게 속한 것들에 헌신하는 타입이 아냐. 그렇다면 명예 때문인가? 왕이라는 간판이 좋아 보였나?”
왼쪽 상처는 허허 웃었다. 그는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을 들었다는 듯 옆에 앉은 아네모네를 바라보았다. 아네모네는 눈만으로 웃고 있었다. 그녀로서도 이 질문은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추켜세웠다.
왼쪽 상처는 시빌을 향해 대답했다. 왜 이런 것을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정말로 모르시는 겁니까? 전 그냥 이 왕국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 왕국은 물론 당신이 있기에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혼자 만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왼쪽 상처는 시빌의 변하지 않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젊은 레비쥬의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저 얼굴이 무척이나 두려웠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고 모든 행동 뒤엔 결과가 있었으며, 강철 같은 의지로 군대를 부렸으니까.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이 땅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다. 이 오만한 작자야. 너처럼 팽개쳐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시빌은 왼쪽 상처의 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빌 그 자신은 200년이란 시간을 바쳐 북부를 다스렸지만 왼쪽 상처는 일생을 바쳤음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레비쥬인 자신과는 달리 인간은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시빌은 왼쪽 상처에게 감사와 진심의 마음을 담아 말했다.
마이언의 공주님은 젊었을 적의 아네모네를 똑 닮아 있었다. 시빌과 레이븐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되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름은 마리엔입니다.”
“아버님? 이 분은 누구시지요?”
그녀는 왕인 그녀의 부친이 다른 이에게 존대하는 것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태어났을 땐 시빌이 마이언의 왕이었지만 어렸던 그녀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 아이가 마이언의 다음 여왕이 되는 건가?”
시빌은 소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성숙한 여자의 검은 색 눈동자가 시빌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아쳤다.
“좋은 시선인걸.”
반쯤 취한 레이븐이 즐거운 듯이 말했다. 레이븐의 말이 주정이긴 했지만 마리엔의 시선이 곧은 것은 시빌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가 부럽게 느껴졌다.
나이 서른이 넘어 얻은 유일한 자식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어리광을 받아주었기에 버릇없이 자랐을 법도 하건만 그녀는 매우 의젓했다.
“인사드려라, 마리엔. 마이언 선왕이시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서른이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그가 풍기고 있는 기운은 노장의 그것이었고 어디서도 허술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시빌의 얼굴에서 노쇠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나이에 걸맞은 주름살을 제외하면 그 어떤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감탄해서 말했다.
“이것이 레비쥬라는 것입니까?”
“마리엔!”
기겁한 아네모네의 외침을 시빌이 손을 들어 막았다.
“괜찮다.”
시빌은 공주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 이것이 레비쥬다. 늙지도 않고 잘 죽지도 않는 신이 만든 괴물이지. 홀로 왕국을 세울 수도 있고 왕국을 부술 수도 있는 자다. 말해 보아라. 훗날 내가 너에게 내 왕국을 요구한다면 넌 어떻게 할 것이냐?”
소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대포를 쏠 거예요. 왜 그런 것을 묻죠? 당연한 게 아닌가요.”
소녀의 대답에 레이븐은 낄낄거리며 웃었고 시빌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소녀의 부모를 바라보았다. 팔불출 부모들은 딸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래. 대포……. 잊지 않으마.”
“왕성에 들어올 땐 허락을 구하셔야 할 겁니다. 저는 무도한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선왕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니까요.”
발칙한 태도에 시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귀엽다 해주니 너무 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기색을 알아챈 마리엔 공주가 빠르게 덧붙여 그를 진정시켰다.
“노여워 마십시오, 왕이여.”
그녀는 자세를 바르게 한 뒤 그녀를 낳아준 부모와 왕국을 이룩한 시빌을 바라보았다.
“저는 여왕이 되도록 키워졌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막는 것이 제 의무이자 권리임을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스스로 왕좌를 버리고 떠난 자가 그 버린 왕국을 책임져야 할 자에게 큰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시빌은 오만하게 서 있는 공주를 한참이나 내려다본 뒤 짜증스러운 웃음과 함께 아네모네를 바라보았다. 어쩜 이렇게 똑같이 생겨 먹었냐는, 그 힐난 어린 시선에 아네모네가 우쭐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시빌은 말을 말자는 기분이 되어 공주의 이마에 키스했다.
“네게 승리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감사합니다.”
축복을 마친 시빌은 헤롱거리는 레이븐의 팔을 잡아 세웠다. 맛있다고 주는 대로 다 받아마시더니만 비틀대는 꼴이 참으로 한심했다. 일단 한숨 재워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공주가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참! 여쭤볼 게 있는데요!”
“무슨 일이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마리엔의 눈동자가 똑바로 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왕관의 다이아몬드는 언제 돌려주실 거예요? 전 녹색이 잘 안 어울려서 그러는데, 바꿀 수 없을까요?”
“…….”
시빌은 기가 막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 없는 표정으로 그가 보석을 돌려주리라 믿고 있는 눈치였다.
‘큰 착각이야 아가씨.’
시빌은 헤롱거리는 레이븐을 힐끔 바라본 뒤 심술궂은 표정으로 마리엔을 향해 말했다.
“왕국과 맞바꾼 보석인데 돌려줄 리 있겠냐. 그보다 내가 너라면 왕관의 에메랄드부터 걱정할 거다. 이 녀석은 상습범이거든.”
시빌은 조금 유쾌한 기분이 되어 어딘가로 달려가는 마리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이븐의 숙취가 가신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본래 술에 약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긴 여행으로 지친 몸에 술을 들이켠 게 문제였던 듯했다.
궁에 오래 있어 좋을 일이 없었기에 시빌과 레이븐은 곧 떠날 준비를 했다. 왼쪽 상처는 건강을 핑계로 정무를 미룬 뒤 별궁에 와 있었다. 깡패와 도둑. 재수 없이 레비쥬를 만나 인육을 먹어야 했던 냉혈한과 살인으로 쫓기던 여도둑은 40년 전과 똑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감회를 느꼈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두 인간은 너무 나이가 들었고 레비쥬와 숲지기는 이곳에 머물지 않을 테니까.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두 분 모두 행복하시길.”
“시빌 님이 괴롭히거든 언제든지 도망 와도 돼.”
아네모네의 제안에 레이븐이 눈을 빛냈다.
“호오. 그것참 감사한 말씀이군요.”
“난 안 숨겨주나? 나도 저 까마귀 때문에 매우 괴로울 때가 있어.”
“지하 감옥에 방이 좀 있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거기라도 제공하지요.”
시빌이 콧김을 내뿜으며 투덜거렸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머리 검은 두 사람이 아주 쌍으로 잘 노는구나 싶어 기분이 상했다.
들어왔을 때처럼 비밀통로를 이용해 나가려던 시빌은 통로로 레이븐을 먼저 들여보낸 뒤 문득 멈춰 뒤돌아섰다.
“참 왼쪽 상처.”
“네?”
“나 돈 좀 주라.”
왼쪽 상처는 한숨을 내쉬며 말도 하기 싫다는 듯 주머니를 꺼내 주었다.
성에서 나온 두 사람은 바로 파르티잔을 향하는 대신 로겐의 시내를 천천히 걸어갔다. 정오의 태양은 따스했고 담소를 나누기에도 좋은 날씨였다. 레이븐은 시빌의 팔에 팔짱을 낀 채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빌.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말이지.”
“응?’
“시빌 당신이 낙오자처럼 느껴졌어.”
시빌은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레이븐은 땋아 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천진난만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잖아? 왼쪽 상처는 왕이 됐고, 아네모네는 왕비가 됐고, 두 사람 모두 글도 배워서 이젠 읽고 쓸 줄 알더라고? 게다가 귀여운 딸까지 있고. 반면에 당신은 문맹이고 이젠 백수고 자식도 없는 데다가 옛날 부하나 삥 뜯는 신세잖아?”
“너, 너 말야……. 대체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아 한심해! 이런 사람이 내 연인이라니!”
“뭐 임마?!”
“전 정말 창피하답니다. 아네모네가 어찌나 부럽던지.”
시빌은 도발 당해 길길이 날뛰었다.
“네가 겁을 완전히 상실했구나? 이 자식!”
“왓! 괴롭히지 마앗! 아네모네가 숨겨준댔단 말야! 와하하핫!”
레이븐은 키득거리며 시내를 달리더니 커다란 건물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둥글게 지어진 커다란 건물이었다.
“저게 극장인가 봐!”
“말 돌리지 마라, 이 까마귀야.”
시빌은 극장 안으로 도망치려는 레이븐의 손목을 잡아 골목으로 끌고 갔다. 막다른 곳에 몰리자 레이븐은 조금 비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농담처럼 한 말이었는데 의외로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화났어? 헤헷. 농담이었는데 뭘 그런 걸로 이렇게 심각하게…….”
“화나지 않았어. 그냥 꼴렸을 뿐이다.”
“잉?”
레이븐은 기겁한 표정으로 시빌을 뒤로 밀쳤다. 시빌은 맛 좀 보라는 듯이 레이븐을 잡고 진득하게 키스했다.
“기, 길에서 무슨 짓을.”
“뭐 어때? 어차피 누가 보더라도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이고 다시는 오지 않을 도시잖아.”
“이익! 이 변태가!”
허리춤으로 파고드는 시빌의 손바닥에 정말로 화난 레이븐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솔직히 말해봐. 당신이 다스릴 때보다 왕국이 더 번성하고 있어서 분통 터지셨구만.”
시빌은 빠득 이를 갈며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눈치 없는 둔치 주제에 쓸데없는 데에만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래. 아주 분통 터진다. 까마귀 한 마리쯤 길에서 잡아먹을 정도로.”
시빌은 레이븐의 바지춤을 잡아당겼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내쉬며 혀로 핥았다.
“이렇게 사람 많은 야외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어. 숲은 너무 조용하잖아?”
“흐읏! 제정신이야? 하지 마. 정말 싫단 말이야.”
“조용히 하지 않으면 들켜.”
시빌은 야하게 웃으며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정오의 햇살이 시빌의 머리카락을 마치 황금의 왕관처럼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레이븐은 잠시 주저한 뒤 그 머리카락에 손을 묻었다. 햇볕에 따뜻해진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하니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흣! 으! 읍!!”
레이븐은 몸속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의 감촉에 이를 악물었다. 평소보다 더 메마르고 긴장한 탓에 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레이븐은 시빌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엉덩이 사이를 가르던 손가락이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레이븐의 성기를 잡아왔다.
“긴장 풀어. 한 번 적신다.”
“으, 꼭 넣어야겠어?”
“이 악물어.”
“윽!! 크흡!”
레이븐은 단번에 몸속으로 치고 들어온 성기에 숨을 헐떡거렸다. 절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막자 시빌이 뻑뻑한 내벽을 헤치며 막무가내로 움직였다.
“아파! 아! 읍!!”
고통이 너무 강해서 레이븐은 시빌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큰길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 골목에서 바지만 벗은 채 당하고 있자니 마치 강간 같았다. 누가 올까 봐 정신이 팔려 쾌락을 끌어내기 위한 집중도 하기 힘들었다.
레이븐은 시빌의 어깨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비명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흑! 흣! 흐윽! 큽!”
메마른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딸려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용케 피가 나지 않는다고 레이븐은 생각했다. 그만큼 많이 몸을 맞췄기 때문이겠지. 하고 열이 오른 머리로 생각했다.
느끼는 곳만을 쿡쿡 찌르는데도 쾌감보단 고통이 더 커서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다고 생각될 때였다. 내벽이 축축하고 뜨겁게 젖어들었다.
“하아. 하. 하악.”
“후우…. 한 번 더 간다.”
싫다고 하기도 전에 시빌의 성기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지나칠 정도로 처음부터 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고통에 눌려있던 것들이 이제야 확 터져 나오는 듯 아래쪽이 지잉지잉 울려댔다.
“아! 그, 그만! 악! 앗!”
“크읏! 굉장해. 아래쪽이 막 조여와. 기분 좋은 거지? 응?”
“몸이 이상해. 그만! 웁!”
레이븐은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아 시빌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계속해서 뱉어지는 뜨거운 숨에 얼굴이 젖고 아래쪽에선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땅을 보자 흔들리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 되어 레이븐은 울음을 터뜨렸다. 왜 갑자기 이런 곳에서 다리를 벌리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좀 놀렸을 뿐인데. 그냥 좀 놀렸을 뿐인데…….
‘으. 언제나 입이 문제야.’
레이븐은 절정에 달해 정액을 쏟아냈다. 바지는 벗고 있었지만 상체며 배가 다 젖어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서도 아랫도리는 시빌의 물건을 삼킨 채 조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있는 힘을 다해 내벽을 조이자 흥분한 시빌이 레이븐을 벽에 누른 채 빠르게 움직였다.
“으…. 아! 으윽!”
“큭!”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를 박아대자 레이븐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더 이상은 소리를 막을 생각도 못 하는 레이븐의 모습에 시빌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주었다.
갑작스레 공기의 흐름이 막히자 고조된 성감에 레이븐의 몸이 덜덜 떨렸다. 시빌은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레이븐의 몸속을 헤집으며 사정 봐주지 않고 움직였다. 내벽 전체가 성감이라도 된 양 성기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어쩔 줄을 모르며 헐떡거렸다.
시빌은 다시 천천히 움직여 레이븐을 괴롭혔다. 간지럽고 열이 올라 어쩔 줄 모르겠는 데다 누가 올지 모르는데 여유를 부리는 시빌의 느릿한 움직임에 레이븐은 미칠 것만 같았다.
빨리 해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입이 막혀 말할 수가 없었다. 레이븐은 물기 어린 눈동자로 원망스레 시빌을 바라보았다.
“빨리 해줘? 길거리에서 나한테 박히고 싶은 거야? 바로 옆에 사람들이 오가는데, 내 정액으로 배를 채우고 싶은 거지?”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빌은 낮은 목소리로 웃더니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흡! 으읍!”
“간다.”
뱃속을 가득 채우는 시빌의 정액에 레이븐은 몸을 뒤로 꺾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레이븐은 짧은 시간 기절했다.
정액에 젖어버린 옷을 말리며 레이븐은 우울한 표정으로 골목 한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정말이지 짐승에 변태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상식이 용납하질 않았다.
“다가오지 마. 이 변태.”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제발 기분 푸세요.”
“얼굴도 보기 싫어. 저리 가란 말이야!”
시빌은 들은 체도 않으며 레이븐의 옆에 앉았다. 날씨가 따뜻했기 때문에 정액은 빠르게 말랐지만 화가 난 까마귀는 쉽사리 기분을 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햇살은 찬란했고 자신은 금발이었다. 시빌은 애교 있게 웃으며 레이븐의 시야에 자신의 얼굴을 밀어 넣었다. 레이븐의 눈동자가 짜증스럽다는 듯 일그러지더니 점점 몽롱하게 풀어졌다.
“으윽! 이 밉살스러운 얼굴!”
“어서 연극 보러 가야지. 응?”
“저, 저리 갓! 변태랑은 아무 곳에도 안 가!”
레이븐은 반항했지만 시빌은 기어코 까마귀를 골목에서 끌고 나왔다. 연극은 하루 두 번 상영되고 있었다. 못 이기는 척 시빌과 함께 극장에 들어선 레이븐은 그 거대한 크기에 감탄을 내뱉었다. 공연시간이 가까워져 객석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게 또 신기했다. 레이븐은 어느새 화냈던 것도 잊고 두리번거렸다.
연극은 마법사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였다. 레비쥬에게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이웃 나라의 공주를 사랑하게 된 마법사가 자신의 레비쥬를 배신하고 자살하는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공주는 검은 머리인 것이, 왠지 마리엔 공주를 본 따 만들어진 인물 같았다.
“레비쥬와는 달리 마법사들은 이 세계에 받아들여진 것 같아.”
레이븐의 속삭임에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오만할 뿐이거든.”
마법사는 사력을 다해 레비쥬를 막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공주가 행복하기를 빌며 레비쥬와 얽혀버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사람들은 마법사의 고통에 공감하고 동조하며 울고 괴로워했다. 진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양, 거짓을 보지 못하고 감정을 발상해댔다.
마법사도 레비쥬도 죽어버린 빈 영지에 들어서며 공주는 자신을 사랑하는 기사와 사랑의 맹세를 나눴다. 왠지 모를 슬픔이 발밑에 깔려 있는 것을 느끼며…….
극이 끝나고 박수가 울리는 가운데 시빌은 낮은 목소리로 레이븐의 귀에 속삭였다.
“사실 이것은 마법사를 회유하기 위한 정치 선전물 중 하나다. 유용한 인력이 레비쥬와 엮이지 않고 국가에 충성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인걸.”
레이븐은 박수를 아끼지 않으며 시빌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이야기니까 아마 영원히 남을 거야. 몇 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겠지? 그런 정치공작 같은 건 필요 없어진 시대에도 말이야.”
시빌은 웃었다.
“응. 아마 그렇겠지.”
연극이 끝나자 두 사람은 역마차를 타기 위해 성문으로 걸어갔다. 어두워진 하늘에 떠오른 별들의 무리가 기다리는 이들의 머리 위를 밝혀주었다. 역에는 많은 이들이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장사꾼, 귀향객, 도둑, 군인. 그들은 모두 바닥에 짐을 내려놓은 채 달그락거리는 역마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븐은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떨리는 장송곡이 들려왔다. 까마귀가 길게 울어 레이븐에게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자는 당신이 아는 자이며 지금 그의 아들이 통곡하고 있다고.
“엘렉페가 죽었어.”
“…나이가 많았지. 까마귀들이 알려준 건가?”
“응. 병으로 죽었대. 그래서 엘렉페의 아들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결국 살아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대.”
레이븐은 우울한 표정으로 로겐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날 보고 그렇게 놀란 거야. 계속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아버지 이름을 말하니까 기겁한 거지. 어렸을 때 본 내 모습이랑 지금의 내 모습이 똑같으니까.”
“두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시빌은 말없이 레이븐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멀리서 역마차의 바퀴 소리가 났다. 파르티잔까지 두 사람의 마차 삯은 은화 한 닢. 시빌은 까마귀 은화를 꺼내 마부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이 로겐으로 외출을 하게 된 계기는 장례식이었다.
겨울철에 조난당한 사냥꾼의 시체가 계곡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봄에 녹아내리는 계곡의 기세를 보러 숲을 살피던 레이븐은 시빌의 도움을 받아 곧장 시체를 운구해 마을로 내려갔다.
죽은 사냥꾼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아직 토끼보다 큰 것은 사냥해본 적도 없는 애송이였다. 산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익히기 위해 덫을 깔러 산에 왔다가 이런 사고를 당한 것이다.
얼음 속에서 얼어붙은 탓에 앳된 얼굴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얼었다가 녹은 시체는 빨리 썩는다. 그것을 아는 레이븐은 장례를 서두르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웃이 죽은 아이의 부모며 형제를 달래는 동안 나이 많은 어른들이 소년의 시체를 닦았다. 부러진 곳을 맞추고, 찢어진 살은 꿰매어 보기 좋게 만든 다음 향기 좋은 기름을 발랐다.
수의를 입히자 손발이 모두 남아 헐렁했다. 그것이 더욱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이에겐 자식이 없었기에 장례식은 관 없이 진행되었다.
짧은 인생의 궤적이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룬 것이 없기에 축사는 짧았고 이룬 것이 없기에 눈물과 아쉬움은 컸다. 사람들은 밤이 끝날 때까지 작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시신의 옆을 지켰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소년은 묻혔다.
땅은 아직 단단했지만 파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이 묻히기 전에 그 입을 열어 저승으로 가는 여비를 넣어주었다. 한 닢의 반짝이는 은화가 소년의 혀 위에 놓였다. 까마귀가 새겨진 마이언의 은화였다.
“까마귀는 죽음의 추종자니 여신께 가는 길을 잘 안내해 주겠죠.”
레이븐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우울함 속에서 소년의 위로 덮이는 흙을 보고 있자니 커다란 손이 다가와 레이븐의 손을 잡았다. 레이븐은 조용히 시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빌은 흔들림 없는 눈길로 레이븐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다.
영원히 이렇게 살아가기를
변한다면 죽음이 오길
그리고 언젠가 한 무덤에 묻혀 썩어가기를……
태양 아래 피어오르는 꽃처럼 우린 웃었지
떨어지는 낙엽은 그 어떤 세계가 저무는 것인가 하며
불멸의 삶을 노래했었다.
땅이 무너지고 강이 사라지는 것을 오롯이 보고
물에 젖은 사막이 그 거대한 손아귀에서
모래를 놓치는 것을 보았네
그럼에도 우리는 변치 않으리라 말했지
우리는 하나의 무덤 속에서
서로에 대한 배신의 칼날을 품은 채 식어가리라
저 하늘을 가르는 달은 우리의 밤을 보고 있을 것이다.
차가운 심판자여 자비를
우리는 그대처럼 변하였다.
우리를 죽게 하지 마소서
변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만일 변한다면 죽게 되기를
그리고 한 무덤에 묻혀 썩어가기를……
7642년. 시빌 마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