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팬레터
전기 전문작가 에르난은 요즘 들어 심각한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었다. 발단은 한 달 전이었다. 일거리가 없어 인쇄소를 전전하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데 멋진 까마귀 떼와 마주친 것이다.
멋지다는 건 그냥 해 본 말이 아니었다. 무덤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갈까마귀들이 몇십 마리나 모여 있었다. 까마귀가 뒤덮은 지붕은 너무 불길해 보여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 무너질 것 같은 집은 에르난의 집이었다. 까마귀가 앉지 않아도 허물어질 판국이라 그는 가슴 가득 걱정을 진 채 현관문을 열었다.
편지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바람이 휭휭 들어오는 현관의 아래쪽 문틈 사이에 한 장의 편지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근거리며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전기 작가이기 때문에 팬레터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학자나 지식인들의 항의 서신이라면 많이 받아보았고 답장을 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문틈의 편지도 당연히 항의 서신이나, 청구서나, 인쇄소의 거절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근거리며 펴본 편지에는 단 네 마디만 적혀 있었다.
-너 전기 죽인다 기다려-
에르난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떨어뜨렸다.
정말로 무서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친구들의 장난일 거라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그렇잖은가? 자신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 죽은 이의 전기를 쓰는 전기 작가였고, 그런 자신에게 원망을 가질 사람이래 봤자…….
“유, 유족이라던가?”
에르난은 울적한 기분으로 집 안에 들어갔다.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까마귀들이 노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니 쳐다보고 있었다. 노란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 그를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그 날 밤 에르난은 벽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서는 덜덜 떨며 잠에 들었다. 까마귀들은 떠날 생각을 않고 완전히 둥지를 튼 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까악 거렸다.
다음 날도 에르난은 문틈 아래쪽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에는
-너 죽인다 전기 거짓말 기다려 날조 사기꾼 없앤다 때린다 팬다 잡놈-
이 적혀 있었다.
편지는 하루에 한 단어씩 그 내용이 늘어났다.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닌 것을 보면 정말 제정신이 아닌 자가 쓴 것 같아서 공포감이 고조되었다. 대체 누구에게 원한을 진 것일까. 뭘 잘못했는지만 알려주면 고칠 수 있을 텐데 그는 욕만 해댔다.
“뭐야. 또 그 편지야?”
“예. 오늘로 벌써 30장 째네요.”
에르난은 지친 얼굴로 바에 얼굴을 기댔다. 단골손님인 다기르가 걱정스레 말했다.
“누가 갖다 놓는 건지 기다려보기라도 하지?”
“일해야죠. 하루 쉬면 생활이 곤란한걸요.”
에르난은 피로에 찌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그가 쓴 전기라는 것도 여기저기서 들은 풍문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쓴 책들은 거의 팔리지를 않았다.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역시 전기 작가 일은 그만둬야 할까요. 잘 팔리지도 않고 협박이나 당하고.”
우울하게 고개를 기울인 에르난의 모습에 다기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래. 그만두고 나한테 와. 우리 극장에선 언제나 대본을 모집 중이네.”
에르난은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본이라니. 다른 세계의 일이네요. 전 창작에는 재능이 없어서……. 언제나 주워 모은 이야기를 하나로 엮을 뿐이고.”
“뭐 그것도 훌륭한 재능이라고 생각하지만.”
“위로는 감사합니다.”
극장주의 수작을 받아넘기며 에르난은 빈 컵을 슥슥 닦았다.
아침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술집에서 일했다. 집으로 돌아와선 협박 편지를 읽고 진행 중인 전기의 자료를 재구성했다. 현재 진행 중인 전기는 아멜리타 발루아의 전기였다. 북부 마지막 마법사라니 타이틀은 꽤 괜찮은 것 같았고 그 외모도 월등했기 때문에 완성만 되면 제법 팔릴 것 같았다.
“흠. 아멜리타 발루아는……. 에 또, 달빛 같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렸다. 시빌은 전 영주를 배신한 마법사의 제의를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좋아. 이렇게 하자.”
오래 사용해서 두껍게 나오는 펜이 종이 위에 글씨를 적어 나갔다. 연금술 길드가 마이언 왕국에 부속되면서, 값비싼 양피지 대신 종이가 시중에 많이 유통되었다. 에르난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이런 값싼 종이가 유통되기 때문이었다. 아니. 값싸다기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꿈을 꾸다 잠이 들었다. 레비쥬와 마법사가 동맹을 맺고 인간이 아무런 의미도 없던 시대의 꿈을…….
그 다음 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꽤 긴 단어들로 이루어진 협박문이었다.
-남의 전기 사실 것처럼 쓰다 마라 죽여버린다 이 자식-
에르난은 기괴한 표정이 되어 편지를 쳐다보았다.
“남의 전기 사실인 것처럼 쓰지 마라 죽여버린다 이 자식. 아 이제 해석할 수 있는 내가 싫다.”
게다가 왠지 욕은 점점 매끄러워져 그냥 읽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적어도 욕설을 적는 것에서만큼은 편지 쓰는 이도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인 것처럼 쓰지 말라니. 난 최대한 들은 대로 쓰는 것뿐인데.”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문의 편지들을 들춰보았다. 편지들은 모두 그의 책상 옆에 모여 있었다. 글자가 몇 개 적혀 있지도 않은 종이인지라 훌륭한 이면지로 쓸 수 있었다.
“이 또한 고마운 일.”
그는 험악한 협박 편지 뒷면에 아멜리타의 전기를 써내려갔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옆 영지의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인간 영주 가문의 막내딸인 그녀의 이름은 에……. 발키르라는 이름이었다. 외모는 흠.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흰 피부는 하늘의 구름 같아서 손으로 만지면 무너질 듯했으나…….”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전기를 써내려갔다. 아멜리타 발루아가 시빌을 배신한 것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다른 이와 사랑에 빠졌다는 설을 가장 좋아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지요. 그 어떤 배덕도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합니다. 나의 주인인 영주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째서 당신은 인간인 건가?”
에르난은 열중해서 아멜리타의 사랑을 써내려갔다. 이야기를 적어갈수록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 같아 기분 좋았다. 그는 일하는 내내 아멜리타와 소녀의 사랑을 생각했고 돌아오자마자 그것들을 글로 썼다.
-그녀 이름 에일린 좋다-
문틈의 편지는 점점 그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독자가 그의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자신의 글을 아는 것일까? 에르난은 책상에 앉아 의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문득 까마귀의 까악 소리가 지붕에서 들려왔다. 노란 눈동자가 지붕 사이의 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귀가 읽고 있는 건가.”
에르난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허허 웃었다. 그는 잠시 주저한 뒤 소녀의 이름을 에일린으로 바꾸었다. 그가 지어준 이름보다 에일린이란 이름이 더 괜찮은 것 같았다. 이름을 바꾸자 그녀에 대한 이야기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를 사랑하는 인간 기사가 있는 겁니다! 그녀도 기사를 사랑하고요. 그걸 보며 아멜리타는 질투에 휩싸이지만 시빌에게 매인 몸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그는 맥주를 잔에 가득 담으며 이야기했다. 듣고 있던 다기르가 멍한 얼굴로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잖아?”
“예?”
“아멜리타는 마이언 왕을 모살하려 했지만 그 이후 바로 레비쥬들을 불러들였어.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냐?”
“어. 그건 그렇지만.”
“넌 전기 작가잖아. 그럼 사실대로 써야지. 분명 일전에 썼던 책도 사실과 다르다고 출판 거절당하지 않았어?”
에르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면 계속 그랬다. 실제로 있는 인물의 과거를 쫓다 보면 자꾸 그의 희망이나 상상이 들어가고는 했다. 그는 시무룩해져서는 다기르가 먹이는 술을 계속 받아 마셨다.
“네 재능은 전기에 어울리지 않아. 나한테 오라니까?”
“절 꼬시려고 그냥 하는 말씀이잖아요.”
“아니래도. 자자. 더 마셔.”
“아니긴 뭐가 아니엡… 열. 아. 어지럽.”
에르난은 입술을 핥아오는 다기르를 뿌리치지 않았다. 술로 머리는 흐리멍텅한 데다 오랜 금욕으로 사람의 살이 그리웠다. 에르난은 다기르에게 반쯤 매달려 바의 2층으로 올라갔다.
어둡고 냄새나는 방 안에서 에르난은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였다. 타인의 것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생경한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어 반항했지만 취한 몸으론 제대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동의한 거잖아. 나만 나쁜 사람 만들지 말라고.”
에르난은 비명을 삼키며 다기르의 목에 매달렸다.
거의 충동적으로 다기르와 밤을 지새운 에르난은 다음 날 아침 푸르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넋을 놓았다. 자기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져서 눈물을 한 번 훔치고는 여기저기 널린 옷을 주워 입었다.
“이제 글은 더 이상 쓰지 말아야지”
-까악!
“그래그래. 안 쓴다구.”
에르난은 깍깍거리는 까마귀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허리는 아프고 사람들은 죄다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 쉬며 허름한 집의 문을 열었다.
“아. 편지.”
현관 밑엔 여느 때처럼 편지가 놓여 있었다. 답장을 보낼 수 있다면 이제 글을 쓰지 않을 거라고 전할 수 있을 텐데. 에르난은 씁쓸한 기분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전기 최악 이야기 좋다 이름만 바꾼다-
이건 위로인 걸까. 에르난은 협박문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마냥 웃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에르난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약간의 복수심을 담아 영주의 이름을 다기르로 바꾸고 마법사의 이름은 에르난으로 바꾸었다. 그는 익명의 협박 편지를 뒤집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왕의 앞을 막아섰다. 포악한 다기르 왕은 자신을 막아선 마법사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마법사는 말했다. 아니지. 이게 아니군.”
그는 서술을 빼고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술집에서 본 배우들의 모습이며 연극을 떠올리자 바람을 단 듯이 펜이 나갔다.
“빌어먹을 다기르! 그만두라고 했는데!”
그는 화를 내며 왕의 최후를 아주 비참하게 끝맺었다. 완결의 마침표를 찍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도 쉬고 미친 것처럼 3일. 그는 완성된 대본을 들고 까마귀가 우는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멀리 극장의 둥근 벽이 보였다. 그는 다기르가 자신의 대본을 거절하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자기 이름이 있으니 궁금해서라도 읽지 않겠는가?
“이런 게 서점에 있더군요.”
레이븐은 글씨를 연습하는 시빌 옆에 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하얀 종이 위에 아는 단어들을 적으며 고군분투하던 시빌은 왠지 익숙한 작가의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이건?”
“에르난 씨의 신작이랄까. 당신이 속 터져서 한 충고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대본이요.”
“호오.”
시빌은 책을 들어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가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대본이었다.
“읽어주겠어?”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렸다. 아름다운 단어들로 이루어진 좋은 대본이었다. 시빌은 자신이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받쳤다. 되도 않는 아멜리타의 전기보단 이게 훨씬 나았다. 아멜리타의 인생 따위, 결국에는 시체를 되살려 싸우게 만드는 귀신 이야기가 아닌가?
“진로를 참 잘 바꾼 것 같아. 웃음뿐이던 전기문과는 달리 감동이 넘쳐나는군.”
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시빌은 펜을 들어 빈 종이에 글씨를 써 나갔다.
-만족. 즐거움. 재밌는 이야기. 감사.-
이 편지 뒤에도 작품을 쓸까? 시빌은 그답지 않게 조금 두근거리는 기분이 되어 접은 편지를 까마귀에게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