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후일담 2
에메랄드를 가져오자 엘린도는 왼쪽 상처의 왕위를 인정했다. 순간 든 생각은 ‘보석하나 보고선 정말로 그런 걸 결정해도 돼?’ 라는 것이었다. 정말 생각 없는 작자가 아닌가? 만일 자신이 아니라 엘린도가 시빌을 찾아갔다면 그가 왕이 됐을 테지만 왼쪽 상처는 물론 그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권력의 중추를 손에 쥐는 기분은 정말 째졌다. 힘을 휘두르는 데에 두려움을 갖는 성격도 아니었으므로, 왼쪽 상처는 하고 싶은 것을 힘 있게 밀어붙였다. 사람들은 말을 참 잘 들었다. 시빌이 길을 잘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왕이라면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을 텐데.
왼쪽 상처는 치안에 관한 법률과 도시 확장 법에 사인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예전부터 짜증 나던 것들을 마음껏 고치고 나니 10년 묵은 체증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신나서 이런저런 음모를 꾸미고 바꿀 것들을 생각하던 사이 갑자기 음울한 기운이 가슴 속에 가득 찼다.
“아.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요새 잠시만 넋을 놓아도 머릿속이 한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찼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요근래 부쩍 이런 일이 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가. 왼쪽 상처는 뺨의 상처를 곤란한 듯 매만졌다.
볼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고,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랑 시시덕거리고 있으면 짜증이 났다. 심술을 부리고 싶어져서 괜히 일을 시키고 바쁘게 만드는 일이 잦았다.
아네모네가 한 마디로 평했다.
“사랑 아냐?”
“사랑? 헛!”
왼쪽 상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사랑이라면 시발 새끼가 왕위를 버리고 떡 치러 가게 만든 그거 말인가?”
“뭐, 그렇지.”
아네모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사랑에 관해선 살인과 관련된 젊은 시절의 썰이 있었다. 그녀는 먼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 한때야 한때. 지나면 왜 그랬나 싶고.”
“그래서 후회하나?”
아네모네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또다시 죽이겠지.”
“잘못이란 걸 알아도 하겠단 거군? 그러다가 로빈과 만나고 시빌과도 만났는데 말이야.”
“뭐야, 얘기가 그렇게 되나?”
왼쪽 상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돼. 그래서 말인데.”
왼쪽 상처는 아네모네 앞에 무릎 꿇었다.
“나와 결혼해주지 않겠어?”
아네모네는 그야말로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왼쪽 상처를 바라보았다. 왼쪽 상처가 억울한 듯 외쳤다.
“네가 그건 사랑이라며?”
“뭐야. 그 대상이 나였어?”
“지금 무릎 꿇고 있는 것 안 보여?”
“정신 나갔냐? 그딴 게 사랑일 리가 있겠어?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니?”
왼쪽 상처가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씨발. 되게 튕기네.”
“미친 새끼. 꺼져! 재수 옴 붙는다 정말!”
왼쪽 상처는 일어나서 꺼지는 대신 아네모네의 허리를 잡아당겨 키스했다.
“…결혼해 줘.”
아네모네는 가슴이 답답해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란 보름달이 사방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이런 날엔 도둑질도 못 하는 법이다. 그런데 왜 자꾸 자신의 마음을 훔치려 하는 것일까? 애초에 이 자식은 도둑도 아니고 깡패지 않은가.
“알았어. 해줄게.”
왼쪽 상처는 그답지 않게 환히 웃었다. 그 얼굴에 아네모네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원래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권력을 손에 쥐고 관록이 붙은 데다 수염이 근사하게 덥히니 왼쪽 뺨의 칼자국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어쩔 수 없나. 애도 있고.”
“그래. 애도 있고.”
두 사람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올해 8살이 되는 그 둘의 딸은 천사처럼 아름답고 똑똑한 소녀였다. 깡패와 도둑 사이에서 잘도 저런 게 나왔다며 서 엘린도가 감탄할 정도였다.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소한 손버릇은 모른 척해줄 테니까.”
“널 위해 밥을 차려줄 수는 없지만 바람은 피우지 않도록 노력할게.”
왼쪽 상처는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답지 않게 쑥스러운 얼굴로 아네모네에게 다시 한 번 키스했다. 아네모네도 소녀로 돌아간 듯 볼을 붉혔다.
부드러운 달빛 아래서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손을 잡았다. 둘이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면 딸이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