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8)

외전* 옛날이야기

보통 옛날이야기란 건 겨울밤에 하는 것이 걸맞다. 밖에서 할 일도 별로 없는 데다가 놀기에도 너무 추워서 집 안에 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정말로 할 일 없는 여름날이었다. 너무 더워서 일 할 수 없고 놀 수도 없는, 그런 후덥지근한 날씨 덕에 시빌과 레이븐은 복날 개처럼 늘어져 있었다.

“산속이 이런데 아래쪽은 얼마나 더 더울지. 생각만으로도 죽을 것 같네요.”

“생각하지 마. 그런 생각을 왜 해? 으윽.”

나무그늘 아래 누워있던 두 사람은 말도 없이 일어나 계곡으로 기어갔다. 습도만 높고 더위는 어중간해서 땀도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흘러나오는 짜증 속에 계곡 속으로 몸을 던졌다.

물에 들어가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물살에 흘러가는 빨래마냥 몸을 둥둥 띄었다.

“해 떨어질 때까지 여기에 있자.”

대답은 없었지만 그 침묵이 긍정임을 시빌은 알 수 있었다. 산짐승들도 더웠는지 계곡 주위에 나타나 얼쩡거렸다. 숲 속의 느릿느릿하고 지친 소리들을 자장가 삼아 시빌은 눈을 감았다. 찰랑거리며 피부를 건드리는 물살이 기분 좋았다.

“시빌. 자요?”

“으음. …반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뭔데?”

“어떻게 레비쥬가 된 거죠?”

“어떻게…… 라고는 해도.”

시빌은 잠들려던 것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던 시빌은 문득 자신이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자란 마을은 금기가 많은 곳이었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 너무 많았지. 난 그때 어린애였고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건 다 하는 재미로 살았거든.”

“룬강이라고 했던가요?”

“응. 정확히는 상류야. 발루아가 다 죽여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어.”

“당신이 죽인 게 아니고요?”

“난 마을 사람 중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 사실 레비쥬로 각성한 이들이 자신의 핏줄을 그렇게 증오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어.”

시빌은 과거를 회상했다.

“어느 날, 친구들도 없이 혼자 금기 중 한 곳에 들어갔는데 거기 이상한 것이 있었지. 커다란 거인의 시체였어. 아직도 기억나. 가슴엔 큰 상처가 있고 그 외엔 자는 것처럼 말끔했지.”

시빌의 말을 들은 레이븐이 숨을 죽였다.

“시체였는데 동굴에 그냥 누워있는 게 안쓰럽더라고. 난 묻어주려고 다가갔지. 그런데 가까이 가자 갑자기 눈을 뜨고는 내 팔을 잡더군.”

시빌은 팔을 들어 올려 손목 부분을 가리켰다.

“여길 잡혔지. 잡히자마자 별 이상한 게 다 보이는데 온통 전쟁이며 폭력이며 피, 승리의 영광에 관한 것들.”

시빌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뿌리쳤어.”

레이븐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시빌 또한 뒷말을 이을 수가 없어 멍하니 수면에 몸을 맡겼다.

“그때 레비쥬가 된 것 같아. 난 내 팔을 잡고 있는 거인의 손을 뿌리쳤지만 이미 힘은 넘어왔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렇군요. 당신은 이미 유물을 가지고 있었던 거군요.”

“그건 무슨 소리야?”

레이븐은 시빌에게 다가가 물속에서 몸을 기댔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거인이 전쟁신의 시체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의지를 신에게 먹힐 뻔했다가 살아난 거예요. 북쪽 탑의 마법사는 당신처럼 뿌리치지 못한 것이고.”

그리고 레이븐은 새가 쪼듯 시빌의 입술에 키스했다. 시빌은 기분 좋게 그 키스를 받아들였다. 유물이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유물은 당연히 파르티잔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레비쥬로서의 본능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럼 파르티잔에 있는 건 뭐지? 유물이 룬강 상류에 있었다지만 자꾸 파르티잔에 가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단 말야.”

“……그건 아마 절 잡으라는 본능이었을 겁니다.”

레이븐은 키득 웃었다. 그리고는 시빌이 비밀을 말해 주었으니 자신도 말해 주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아주 옛날이야기였다.

인간에게 죽음의 비밀을 말해 주고 신에게 마법의 비밀을 알려준 까마귀는 무덤에 외로이 앉아 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까마귀들이 시체를 먹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죽은 이의 비밀 또한 갖기 때문이었다.

까마귀는 자신의 보물들을 발로 툭툭 굴려보았다. 그에게는 원래 인간의 것이었던 빛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반짝거리고 예뻐서 외로운 까마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무덤에는 죽은 이뿐이 오지 않고 죽은 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까마귀는 까악까악 혼자 짖어 보았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마법의 비밀을 까마귀에게서 알아간 마법의 신은 전쟁을 일으켰다. 언제나 위에 서길 원하던 오만한 신은 자신이 지닌 마법의 힘을 이용해 신들의 왕이 되려고 했다.

인간을 꼬여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됐지만 신들 스스로가 벌이는 죽음의 축제에 영생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신들이 목숨을 잃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대지의 여신은 거대한 벌판이 되고, 철의 신은 땅속의 보석이 되었다. 여행의 신은 길이 되고 바다의 신은 거품이 되었다. 많은 신들이 죽음을 맞이해 본연의 모습으로 화하는 것을 까마귀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땅에서는 인간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빛을 잃은 인간들은 이제 그 누구의 사랑과 보살핌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신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마법을 쓰고 있었다. 마법은 자연의 법칙을 어그러뜨려 아무리 땅을 갈아도 곡식이 나지 않고 과실이 맺히지 않게 했다.

그러던 중 빛을 잃은 인간이 까마귀를 찾아왔다.

그는 너무나 하찮게 변해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들만을 모아 만들어졌던 그는, 이제 정말로 하찮게만 보였다.

까마귀는 그를 무시했다.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죽음의 비밀을 신에게 말한 사람이었다. 인간은 무덤가에 쭈그려 앉아 까마귀를 힐끔거리더니 일어나 까마귀에게 사과했다.

“비밀을 말한 건 미안해. 잘못했어.”

그 순간 까마귀는 마음이 풀어졌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까마귀에게 사과한 적이 없는 것이다. 까마귀는 조금 우쭐한 마음이 되어 부리를 열었다.

“괜찮아. 그 대가도 네가 질 테니까.”

사실 인간은 벌써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굶주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한동안 말없이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빛을 모두 까마귀에게 줘버려서 더는 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이 일을 들어주면 내 몸을 네게 줄게.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렴.”

까마귀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왠지 이 인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인간은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까마귀를 향해 말했다.

“너는 죽음을 잘 알고 있으니,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하게 하렴.”

까마귀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죽음을 피해 가는 것들엔 많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아니라 누구라고 할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신들. 신들 외엔 없었다.

시빌은 떫은 표정으로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뭐야. 아무리 봐도 까마귀가 제일 나쁜 놈 아냐? 모든 일의 원흉이잖아. 반짝이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온갖 비밀을 다 누설했으니.”

레이븐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물론 까마귀에게도 시련이 닥쳤지요. 마법의 비밀을 알려준 까마귀에게 유감 있는 자들이 찾아왔거든요.”

처음 까마귀를 찾아온 자는 신이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검을 들고 푸른 갑주를 걸친 거인은 무덤이 다 뒤집히도록 엄청난 발소리를 내며 까마귀를 찾아왔다.

“너냐? 입 싼 새 새끼가?”

까마귀는 이게 대체 무슨 행패인가 싶어 전쟁신을 바라보았다. 전쟁신은 완전히 열이 뻗친 모습으로 까마귀가 앉은 비석을 향해 검을 던졌다.

돌이 튀고 까마귀는 깍깍거리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이 충격적인 난동에 까마귀는 놀라 하늘을 빙빙 돌기만 했다.

전쟁신은 죽음을 몰고 다니는지라 죽음의 추종자인 까마귀와는 썩 사이가 괜찮았다. 앉을 곳이 없어 몸이 커다란 전쟁신의 몸에 앉으면, 그는 쓰다듬거나 먹이를 주거나 하지는 않지만 귀찮아하면서도 자신의 몸에 앉은 까마귀들을 쫓아내진 않았던 것이다.

“까깍! 깍-깍-깍-깍-까악-!!”

“뭘 잘했다고 까악이야! 이리 안 내려와! 죽여버릴 테다!”

까마귀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전쟁신은 완전히 맛이 가서 푸른 연기를 뭉게뭉게 내고 있었다.

“이 개념 없고 입 싼 새 새끼야. 잡히면 죽을 줄 알아!!”

목소리가 쩌렁쩌렁 귀에 울렸다. 까마귀는 정말 무서웠다.

멀리멀리 날아 도망쳐도 전쟁신의 시선이 계속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까마귀는 부루퉁해졌다. 그도 죽음의 비밀을 이용해 죽지 않게 되었으면서 자신에게 이러는 건 불공평한 것 같았다.

가지 위에 앉아 서럽게 우는 까마귀를 찾아온 것은 죽음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말한 까마귀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아무리 까마귀가 규칙에 의해 대가를 받고 말한 것이라 해도 그녀는 화를 풀지 않을 듯했다.

여신은 주름진 손가락을 들어 까마귀의 검은 깃을 쓰다듬었다.

“너는 나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사도이지만 이번 일은 용서하기가 힘들다.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란다.”

까마귀는 노란 눈으로 여신을 바라보았다. 여신은 대가가 무엇인지 아무런 말도 없이 까마귀를 두고 사라졌다.

“이렇게 까마귀도 대가를 치른 겁니다. 전쟁신은 그 후로도 계속 까마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어요. 그러니까 레비쥬들이 파르티잔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유물 때문이 아니라 절 매우 혼내주기 위해서인 거지요.”

시빌은 자신에게 달라붙어 가슴에 머리를 기댄 레이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부드럽게 깜빡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널 죽이고 싶지는 않던걸.”

“그야 전 까마귀가 아니니까요. 비슷하지만 다르답니다.”

레이븐은 키득 웃어댔고 그 떨림이 그대로 시빌에게 전해졌다.

“카디넬은 성인이 될 때 자신을 수호해줄 짐승을 고르게 됩니다. 그 짐승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되고, 그 짐승의 영혼이 그자의 영혼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전설 속의 까마귀가 저는 아닙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같은 영혼이라 할 수도 있는 거지요.”

“까마귀면 좋았을 텐데.”

시빌은 레이븐의 미끈한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까마귀면 예쁜 녹색 알을 낳아줄 수 있을 테니까.”

“흐음. 그러게요.”

예쁜 까마귀는 시빌의 몸에 기댄 채 노곤하니 잠들었다. 시빌 그 자신도 잠이 몰려와 둘은 해가 질 때까지 쭉 잤다.

꿈속에서 시빌은 까마귀를 쫓아가는 꿈을 꾸었다. 무덤가에서 새를 잡겠다며 날뛰는 시빌을 하늘 높이 날아오른 까마귀가 비웃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열이 받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까마귀의 보물 상자를 발로 뻥 찼다.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아아. 아름답구나.’

상자에서 튀어나온 것은 인간의 아름다움이었다. 가장 하찮은 것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전쟁의 신이었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문명과 생명을 파괴하는 자였지만 이 아름다움은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허리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반짝이고 말랑거리는 것이 잠시 그의 손에서 춤추더니 허공으로 떠올라 묘지를 가로질렀다. 따라가자 그것은 까마귀가 먹다 남긴 인간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어두운 피부에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인간 중에 이런 외모를 지닌 것은 까마귀와 거래한 자밖에 없었으므로 시빌은 쉽게 그를 알아보았다.

카디넬이었다.

시빌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레이븐을 꼭 끌어안았다. 뭔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반쯤 뜯어 먹힌 시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런 개꿈이었다. 시빌은 식은땀이 다 났다. 자신의 취향이 좋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체가 뭔가 싶었다.

‘아. 뿌리치길 정말 잘했다.’

어렸을 때 보았던 그 거인의 취향이 이리도 나쁠 줄이야. 십 년 감수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시빌은 품에 안긴 레이븐을 슬슬 흔들어 깨웠다. 해가 지자 물이 차가웠다. 까마귀는 추운 줄도 모르고 곯아떨어져서는 시빌에게 신경질을 냈다.

시빌은 한숨을 내쉬며 레이븐을 안아 올렸다. 숲의 모든 것이 그런 둘의 모습에 신경질을 냈다. 네가 뭔데 우리 숲지기를 그렇게 안고 가냐는 듯 웅웅 불만을 토해냈다.

“감기 걸리게 둘 순 없잖아? 우리 예쁜 까마귀.”

시빌은 잠든 레이븐의 뺨에 쪽 입을 부볐다. 거센 항의가 빗발쳤지만 시빌은 모른 척 무시하며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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