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주인님
시빌은 일어나자마자 어딘가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땔감은 넉넉했고 밭도 다 갈아 놓았다. 비에 젖은 묘목에 버팀목도 대주었고 봄꽃을 따서 술도 빚어놓았는데, 무언가 빠뜨린 기분이 일어나면서부터 가시질 않는 것이다.
“대체 뭘 빼먹은 거지.”
시빌은 눈살을 찌푸리며 옷을 주워 입었다. 레이븐은 아직 푹 자고 있었다. 그는 레이븐이 누워있는, 겨우 내내 만든 커다란 침대를 흡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다음엔 오래된 탁자를 새로 만들어볼 예정이었다. 낡은 가구들을 둘이 사용하기에 좋은 크기로 바꾸고, 여유가 된다면 집도 조금 크게 만들고 싶었다.
시빌은 엄습하는 두근거림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집이나 가구 때문에 이렇게 초조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아.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시빌은 망연한 눈을 밖으로 향했다. 할 일이 없으니 놀아야 했다. 논다. 뭐 하고 노나. 레이븐은 요즘 내내 작업실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봄이 되면 감기 환자들도 늘어나고 꾸준히 거래해온 남부 창관에서도 올 텐데 만들어둔 약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시빌은 우울한 표정으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예전에 환각버섯으로 만든 최음제를 죄다 레이븐에게 사용했던 탓에 시빌은 작업실에 출입 불가 판정을 받았다. 덕분에 평소에 쓰는 약들은 죄다 작업실의 선반에서 쫓겨나 부엌에 놓여 있었고, 오고 가는 사냥꾼이나 심마니들을 위한 약도 그 옆에 자리 잡았다.
“……. 뭔가 할 일을 찾지 않으면.”
시빌은 괴로워하다가 잘 자는 레이븐을 흔들어 깨웠다. 밤새 시달린 레이븐이 나른한 눈을 슬쩍 흘겼다.
“뭡니까아.”
“뭐 할 일 없어?”
“…할 일이요?”
레이븐은 이게 미쳤나 하는 눈으로 잠시 시빌을 흘겨보더니 눈알을 굴렸다.
“으음. 봄나물. 쑥이랑 냉이….”
시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숲은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그것은 20년 전의 기억이었다. 숲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고 더는 그에게 친절하지도 않았다. 나무 위에서 늘어져 자고 있던 새들은 시빌만 보면 똥을 뿌리며 날아갔고 나무는 묵은 가지를 떨어뜨렸다.
시빌은 온갖 심술에 아랑곳하지 않고 숲을 가로질렀다. 이젠 심술에도 익숙해져서 챙이 큰 모자를 쓴다든가 옷을 가릴 망토 등을 상비하고 다녔다.
“냉이, 냉이, 쑥, 쑥.”
그는 산비탈에 주저앉아 봄나물을 뜯었다. 바구니가 뜯어낸 봄나물로 가득 차는 데엔 몇 시간 걸리지도 않았다. 시빌은 가볍고 부피 큰 쑥과 냉이를 산처럼 쌓아서는 산장으로 돌아갔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시빌은 밥을 먹는 대신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나물을 말렸다. 음식으로 먹을 것은 조금만 있어도 되었다. 대부분은 약재로 들어가기에 시빌은 레이븐이 가르쳐준 대로 조심스레 풀을 다뤘다.
“시빌.”
“응?”
“식사하세요.”
“응.”
시빌은 레이븐이 부르자 지체 없이 들어가 밥을 먹었다. 아직 보리가 나지 않아 묵은 감이 있는 빵과 잘 말린 사과를 먹어치웠다. 레이븐은 아침부터 일어나 일을 하는 시빌을 기특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좀 더 드시겠습니까?”
“응. 주인님.”
레이븐은 얼어붙었다. 침묵이 오래되자 이상함을 느낀 시빌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바, 방금 뭐라고.”
“내가 뭐라고 했는데?”
레이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은 시빌의 태도에 잠시 고민했다.
“레이븐?”
“주, 주인님이라고……. 방금 저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셨어요.”
시빌은 어처구니가 없어 빵을 든 채 얼어붙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정말로 걱정되네요. 갑자기 일을 못 해 안달인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절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봄이라도 타는 건가요? 해괴하군요. 열은 없습니까?”
시빌은 식은땀을 흘렸다. 예전에 그가 시빌을 주인님이라고 부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때의 일이 도질 건 뭔가?
“정말 어디 아픈가.”
시빌은 눈살을 찌푸렸다. 잔병치레를 하는 레비쥬라는 건 좀 이상했지만 아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사실이었다.
“확실히 심장이 좀 빨리 뛰는 것 같기도.”
레이븐의 눈이 걱정으로 커졌다.
“심장이요?”
레이븐이 탁자 위로 몸을 기울여 시빌의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시빌은 갑작스레 가까워진 레이븐의 얼굴에 숨을 훅 들이쉬었다. 시선을 떨어뜨리자 벌어진 목깃이 바로 들여다보였다.
“저기, 레이븐. 잠깐만.”
“네?”
“좀 떨어져 줘.”
시빌은 레이븐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쳤다. 레이븐은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얼굴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시빌?”
“밥상머리에서 덮치고 싶진 않…. 악! 밟았겠다. 이놈의 까마귀!”
“걱정했더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당신이 걸린 병은 그냥 머슴병입니다. 머슴병! 나가서 일이나 하십시오!!!”
시빌은 휙 하고 토라져서는 작업실로 향하는 레이븐을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을 노예니 뭐니 하며 부려 먹은 건 레이븐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일을 안 하면 불안해지는 병에 걸렸다면 그건 순전히 레이븐 책임이었다.
“썅. 근데 또 왜 초조해지는 거야.”
시빌은 짜증스레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미뤄두었던 탁자 제작을 오늘 끝마쳐야 할 것 같았다.
남부 창관의 주인은 그달 말에야 산장을 찾아왔다.
많이 늙었지만 여전히 정정한 걸음걸이로 산장의 문을 두드린 그는 레이븐이 아니라 시빌이 그를 맞이하자 놀란 눈초리였다.
“어라. 숲지기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책 사러 바레아에 갔는데. 엇갈렸나 보군.”
“예에. 근데 당신은……. 예전에 본 적이 있었던가요?”
시빌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주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시빌의 금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그렇구만. 옛날에 있던 그 청년이군?! 어째 하나도 안 변했네! 그 금발은 잊을 수가 없지.”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쉽게 납득하는군.”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을 보게 되는 법이라서요. 하핫!”
남자는 음흉하게 웃더니 손바닥을 비볐다.
“그럼 숲지기가 오시길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 나한테 맡기고 갔다.”
시빌은 서랍장 옆에 놓인 나무상자를 가지고 왔다. 해열제나 마취제, 여러 가지 미약과 응급약들이 가득 차있는 상자 속을 창관의 주인은 조심스레 헤아렸다.
“맞군요. 한두 해 거래한 것도 아니니 뚜껑은 열어보지 않겠습니다. 금액은 예전처럼 지불하면 됩니까?”
“금액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없었어. 예전처럼 주면 될 것 같군.”
남자는 만족한 듯 웃으며 들고 온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보따리를 펴보자 잘 재단된 옷 몇 벌과 여러 종류의 천이 두루마리 채로 들어 있었다.”
“오는 길에 겨울용 천을 싸게 팔고 있는 가게가 있어서 조금 더 사 왔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물건은 필요 없으십니까?”
남자는 또 다른 보따리를 천천히 풀어헤쳤다. 가죽으로 만든 연장통 같은 것에 가득한 물건들을 시빌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이곳에서 이 보따리를 풀게 될 줄은 몰랐는데 크흠!”
“뭐냐 이건. 모조 성기?”
“원래 가게에서 쓸려고 산 물건인데 필요하시다면 특별히 한두 개 드리도록 하죠.”
“흐음.”
시빌은 눈을 가늘게 뜨고 풀어놓은 보따리 위의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작은 돌기가 달린 것부터 휘어진 것, 관절이 나뉘어 있어 흔들리는 것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흘끔 밖을 쳐다보았다. 레이븐은 오늘 아침에 떠났으니 돌아오려면 내일은 되어야 했다.
“이건 뭐지?”
“수갑입니다. 두 손을 묶어놓을 때 쓰는 거지요.”
“이건?”
“재갈인데 소리는 나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은 겁니다.”
시빌은 재빨리 마음에 드는 물건을 몇 개 챙겨 들었다. 잠자리를 위한 도구의 세계가 이토록이나 방대하고 넓은 줄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냥 가져가긴 뭐하니 이거라도 주지.”
시빌은 예전 왼쪽 상처에게서 뜯어낸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시빌의 얼굴이 잔뜩 새겨진 금화들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한 닢이면 되나?”
빛나는 금화 한 장이 날아오자 남자는 기겁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헉! 마이언 금화!”
“모자라나?”
“그럴 리가요! 이거 하나면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애들을 일주일은 안을 수 있겠는데. 언제 생각 있으시면 저희 집으로 오시지요. 잘 모시겠습니다.”
시빌은 손을 들어 사양했다.
“아니. 난 레이븐만 있으면 돼.”
“그렇습니까? 예쁜 사랑 하십시오. 그런데 이거 참.”
남부의 창관 주인은 허허 난감한 듯 웃으며 시빌의 눈치를 보았다.
“굉장히 닮으셨네요.”
금화를 든 남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눈썰미가 좋아 20년 전에 보았던 사람까지도 기억하는 작자였다. 금화 속의 인물과 시빌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못 알아볼 리 없는 것이다. 남자의 머릿속에 왕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시빌은 그런 남자를 보며 날카롭게 웃었다.
“내가 자네 가게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면 그 금화를 사용하지도 않았겠지. 내 뜻 알겠나?”
발설하면 가게로 찾아가서 험한 짓을 하겠다는 위협에 남자가 번개처럼 굽신거렸다.
“자세히 보니 별로 안 닮은 것 같습니다. 인물이 더 훤칠하시네요.”
“그렇지? 내가 좀 더 잘 생겼어. 실물이 낫다고나 할까.”
“…….”
시빌은 본인이 말해놓고서도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하며 그를 외면했다.
“조심히 돌아가시게.”
“예에. 레이븐 씨에겐 안부 전해주십시오. 내년 봄에 또 뵙자고요.”
시빌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의 정신은 구입한 물건들로 잔뜩 쏠려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간 창관 주인이 늑대에라도 쫓기는 양 정신없이 산을 따라 내려가든 말든, 시빌은 레이븐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짐을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레이븐은 배낭을 하나만 채워서 산장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빨리 온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남부 창관에서 왔다 갔었어. 받은 물건은 탁자 위에 놔뒀고.”
그 말에 레이븐은 탁자 위의 꾸러미로 다가갔다. 천과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던 레이븐은 곧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법 좋네요.”
“다행이군. 그쪽도 꽤 신경 쓴 것 같더라고.”
갑자기 레이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시빌을 쳐다보았다. 그 눈초리에 찔리는 게 매우 많은 시빌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왜?”
“아뇨. 당신이 누군가를 그렇게 칭찬하는 성격이 아닌데 매우 이상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왜 이래? 나도 칭찬 정돈 잘한다고.”
레이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 물었다.
“200년간 북부의 영주로 있으면서 누굴 칭찬한 적이 몇 번이나 되죠?”
시빌이 정색했다.
“일을 잘해야 칭찬을 하지.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 월급도둑들을 뭐하러 칭찬해?”
“네. 바로 그겁니다.”
레이븐은 시빌의 옛 부하들을 애도했다. 저런 걸 윗사람으로 모시다니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한숨을 폭 내쉬며 배낭 속의 물건을 꺼내자 시빌이 돕기 위해 다가왔다.
“뭘 사 왔어?”
“기름이랑 술이요. 사둔 게 거의 다 떨어져서 없더라고요.”
“무거웠겠네? 그런 건 나랑 갈 때 사지.”
“책이 더 무겁더라고요. 하지만 당신은 서점에 간다고 하면 따라 나오려고도 않고.”
“그야 심심하니까 그렇지.”
잡화점 주인은 붙임성이 좋았고 대장간에선 그냥 물건을 구경하면 되었지만 서점에선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놔두면 잠이라도 잘 텐데 레이븐은 계속해서 그에게 책을 들이대며 아는 내용인지 묻는 것이다.
“난 뭘 읽어줘도 상관없는데. 대충 골라서 사 오래도 말을 안 들어.”
“책이 한두 푼도 아니고요. 기왕 읽는 것 재미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 빨간 책을 사와. 어차피 잠자리에서 읽는 책인데…. 윽!”
레이븐이 발끈하며 외쳤다.
“안 그래도 요새 허리가 안 좋은데 그런 천벌 받을 말을!”
“야한 책을 안 보면 성적인 단어들은 어떻게 외워?”
“알게 뭡니까?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시빌은 매정하게 돌아서는 레이븐의 뒤통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지금은 레이븐이 뭔 짓을 해도 다 귀엽게 보였다. 한껏 울려줄 생각에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설 것 같았던 것이다. 시빌은 레이븐에게 다가가 슬슬 달랬다.
“지쳤을 테니 쉬고 있어. 저녁은 내가 내올게.”
편하지만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레이븐이 잠시 고민했다. 시빌의 음식 솜씨는 아직도 그 무미건조함이 여전했다.
“그럼 부탁할게요. 오랜만에 짐을 들었더니 팔이 땡기네요.”
편함이 이겼다. 레이븐은 방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눕혔고 시빌은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레이븐이 한 음식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빌은 감자 스튜를 끓인 뒤 적당한 빵을 한 덩이 찾아 얹었다.
“다됐어. 먹어.”
레이븐은 자신이 만들었던 스튜가 남아 있는 것에 안심하는 듯했다. 빠르게 스튜와 빵을 해치우는 레이븐의 모습을 시빌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어. 저기 뭔가 이상.”
“왜? 상한 것 같아?”
“아뇨. 그건 아닌데.”
열이 오르는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는 레이븐을 시빌은 기꺼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곧 난처하게 일그러진 레이븐이 시빌을 노려보았다.
“설마 여기…. 뭔가 탔어요?”
“응.”
간단히 긍정하는 시빌을 레이븐이 험악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한껏 달아오른 몸 덕분에 붉게 물든 눈가는 매섭다기보다는 색스럽기만 했다.
“밥은 다 먹었지?”
“이. 이 야비한. 20년 만에 나타나서 하는 짓이라는 게 죄다 야한 짓뿐이고. 익!”
“섭섭하게 그런 말을 하다니. 상처받았어.”
레이븐은 이를 가는 레이븐의 목을 슬쩍 쓰다듬었다. 붉게 달아오른 까마귀가 숨을 멈추며 파드득 떨었다.
“실은 몇 가지 물건을 선물 받았는데 네가 제정신으론 응할 것 같지 않더라고.”
“무슨, 대체 무슨 물건을 누구에게…….”
손님이라고 온 사람이란 남부의 창관 주인밖에 없었다. 시빌은 레이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하, 하지 마.”
“응. 안 할게.”
시빌은 간단히 대답하며 탁자 위의 그릇들을 치웠다. 달그락거리며 한참을 시간 끈 뒤 돌아가자 레이븐이 탁자 위에 머리를 묻고 헐떡이는 것이 보였다.
시빌은 고개 숙여 레이븐의 뒷목을 혀로 핥아 올렸다. 레이븐이 파들거렸다.
“탁자 위에서 한 번 할까?”
레이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시빌은 짐승처럼 웃으며 레이븐을 일으켜 세웠다. 예민해진 몸은 어딜 만져도 움찔거렸다. 시빌은 레이븐의 바지만 벗겨 탁자 위에 눕혔다.
“간다.”
“아!”
시빌은 레이븐이 사 온 기름을 레이븐의 둔덕 사이로 흘렸다. 매끈거리며 번지는 기름 덕에 하체가 순식간에 질척거렸다. 시빌은 레이븐의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흔들었다.
“하, 아!!”
“레이븐. 레이븐.”
“으, 응.”
“눈 가릴게.”
시빌은 자신을 촉촉하게 바라보는 레이븐의 눈가에 입 맞추었다.
검은 안대로 눈을 덮자 갑자기 차단된 시야에 불안한 듯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빌은 어깨며 목덜미에 계속해서 키스하며 잔뜩 부푼 성기를 레이븐의 엉덩이 사이에 대고 문질렀다. 미끈거리며 애널과 성기 근처를 쿡쿡 찌르고 문지르는 뜨거운 성기의 움직임에 레이븐이 급박한 숨을 흘렸다.
“힘들어. ……시빌. 힘들어.”
시빌은 뒤척이는 레이븐의 팔을 뒤로 돌려 단단히 하나로 묶어 잡았다. 테이블과 시빌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레이븐은 가쁜 숨만 내쉬었다.
잘 익은 까마귀는 언제 봐도 먹음직스러웠다. 시빌은 레이븐의 몸속으로 귀두를 스윽 밀어 넣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성기를 들이밀자 레이븐이 가는 신음을 내뱉었다. 구속당한 팔이 벗어나려고 움직이는 것을 놓지 않고 꽉 붙들자. 다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아 시빌! 팔 좀 풀어줘. 앗! 앗! 아앗!”
시빌은 웃으며 느긋하게 레이븐의 몸을 갈랐다. 기름과 손가락에 잘 풀어진 애널은 힘들지 않게 시빌의 물건을 받아들였다. 시빌은 말없이 몇 번 빠르게 추삽질했다.
“악! 아! 흐으……. 흑!”
퍽퍽 소리가 나며 기름이 질척거렸다. 시빌은 빠르게도 절정에 도달하는 레이븐의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배출되지 못하는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오자 시빌은 그제서야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시빌! 시빌이지? …아! 아파!”
시빌은 대답 대신 레이븐의 머리채를 콱 잡아당겼다.
눈은 보이지 않고 대답 대신 머리가 잡아당겨지자 레이븐의 얼굴이 불안으로 젖어들었다. 이성으로는 이 산중에 있는 것이 시빌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없자 감각만 확 달아올랐다.
“학! 아앗! 앗!”
시빌은 레이븐의 안쪽을 거칠게 범했다. 레이븐의 엉치뼈가 탁자에 부딪혀 발갛게 달아올랐다. 성기를 뿌리까지 집어넣은 채 뱃속 깊숙이 정액을 싸 주자 레이븐이 푸들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땀에 젖은 뒷목을 잘근 씹으며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자 레이븐이 그제야 절정에 도달하며 몸속의 시빌을 잔뜩 조였다. 시빌은 정액을 쏟아내자마자 조여오는 레이븐의 내부에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게도 난잡한 몸이었다. 이렇게 야한 몸을 만든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자 한풀 꺾였던 성기가 다시 빳빳하게 곤두섰다.
시빌은 레이븐을 일으켜 침대로 데려갔다. 레이븐은 정액이며 기름을 허벅지로 잔뜩 흘리며 비틀거렸다.
“시빌? 시빌 맞지? 이상해.”
시빌은 달래듯 레이븐의 뺨을 쓰다듬었다. 목소리는 내줄 생각이 없었다. 성기를 주물럭거리고 유두를 꼬집자 날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레이븐의 성기는 벌써 반쯤 다시 서 있었다. 약 때문이었다. 아마도 다시 닫혀버린 레이븐의 내부는 더 난리를 치고 있을 터였다.
침대에 반듯하게 눕힌 뒤 레이븐의 손을 기둥에 묶었다. 계속해서 구속되는 몸에 항의가 터져 나왔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미끈거리는 가랑이에 성기를 쑤셔 넣자 기다렸다는 듯 내벽이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시빌은 천천히 움직이며 레이븐이 자신의 성기를 힘줄까지 느끼도록 해줬다.
“아! ……앗! 흑! …크흑!”
느린 속도에 레이븐이 자지러지며 허리를 움직였다. 어떻게든 자신의 물건을 삼키기 위해 움직이는 레이븐의 엉덩이를 시빌은 쫙 소리가 나도록 크게 후려쳤다. 늘씬한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손가락 하나를 성기와 함께 밀어 넣자 악! 소리를 내며 레이븐이 발버둥 쳤다.
손가락으로 벌어진 레이븐의 애널에서 정액이 기름과 섞여 희뿌옇게 흘러나왔다. 손끝으로 찍어 레이븐의 입가에 묻혀주자 묻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얼굴을 피했다. 갑자기 레이븐의 입 안에 싸고 싶어졌다. 시빌은 레이븐의 몸속에서 성기를 빼내고는 구입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무수하게 많은 돌기가 나 있는 고무 성기였다. 남부에서 고무가 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을 보자 다른 물건들도 더 보고 싶어졌다.
레이븐은 잔뜩 달아오른 아래가 갑자기 비자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고 무서웠다. 평소라면 시빌의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정신을 놓았을 텐데 그게 안 되니 답답하고 괴로웠다. 게다가 시빌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도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손이 묶인 것도 기분 나빴다. 여러모로 맘에 들지 않아 시빌에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뭐, 뭐야 이거! 앗! 하지 마, 하지 맛!”
차가운 무언가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딱딱하진 않았지만 시빌의 것보다는 더 탄탄하고 오돌토돌한 것이 내벽을 긁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악! 그, 이상! 싫어! 싫어엇!! 웁!!”
너무너무 기분 나빴다. 그리고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아래쪽이 벌름거리는 게 느껴져 민망하고 죽고 싶었다. 미끈거리는 기름과 정액 덕에 아무런 저항도 않고 들어온 물건은 레이븐을 미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작은 돌기들 하나하나가 레이븐의 몸을 각자 범하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휘는 레이븐의 다리를 시빌이 잡아 벌렸다. 고무 성기로 천천히 안쪽을 부비며 빙빙 돌리자 레이븐은 완전히 자지러졌다.
레이븐은 헐떡거리며 묶인 팔을 팽팽히 앞으로 당겼다. 고무 성기가 몸속을 오가며 내벽을 긁어대는 바람에 벌써 몇 번이고 사정했다. 정말로 싫은데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몸속으로 들어와 느끼는 곳을 여유롭게 부벼대자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자신이 정말 음란해서 구제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무생물에 박히면서 쾌감을 느끼고, 더 해달라는 듯이 내벽이 꿈틀대는 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굉장해. 더 해달라고 구멍이 움찔거려. 이런 흉측한 물건을 잘도 물고 있군. 볼래? 보여줄까?”
레이븐은 휙휙 고개 저었다. 하지만 시빌은 레이븐의 눈에서 안대를 떼어냈다. 뒷머리를 잡아 고개를 들어 올리자 흉측한 검은색 모조 성기가 아래쪽에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빼줘. 싫어. 지, 징그럽.”
“유두가 꼿꼿하게 서 있어. 기분 좋은 거지?”
“싫다고 했잖아!”
“알았어. 그럼 안 할게.”
물론 거짓말이었다. 시빌은 고무 성기를 흔들어 레이븐이 느끼는 곳을 찌르고 비벼댔다. 섬세한 돌기가 예민한 곳을 찌르자 허벅지며 아랫배가 바르르 떨렸다.
레이븐의 입에서 점점 가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약 기운이 아직 반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아래쪽엔 모조 성기가 박혀 있고 두 손은 묶여있는 것이다. 시빌은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븐의 원망스러운 시선을 흡족한 기분으로 되받아쳤다.
“시, 시빌…….”
몽롱하게 풀어진 눈이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빌은 소리 없이 웃으며 레이븐의 입에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 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가 시빌의 물건을 할짝거렸다. 시빌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레이븐의 목까지 성기를 들이밀었다. 쿨럭하며 뱉어내려는 움직임이 귀두 끝에서 느껴졌다. 시빌은 레이븐의 목구멍을 막고 풀어주기를 반복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 싼다.”
“읍. 으웁! 쿨럭! 컥!”
시빌은 레이븐의 목구멍에 대고 바로 정액을 쏟아냈다. 안간힘을 다해 삼키는 것을 비웃듯 레이븐의 입줄기를 타고 느릿하니 흰 액체가 흘러내렸다. 시빌은 침과 정액으로 젖어버린 레이븐의 턱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해줄까?”
“바, 박아줘….”
“이런 머슴에게 박히길 원하시는 건가요, 주인님?”
비아냥거리는 시빌의 목소리에 레이븐이 힘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시빌은 낮게 웃었다.
“그럼 다리 좀 더 벌려봐 주인님. 그래. 그렇게.”
시빌은 모조 성기를 확 잡아 빼고는 자지러지며 바들거리는 레이븐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침대 머리에서 풀어낸 손을 다시 허리 뒤로 묶자 레이븐이 풀어달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하면 풀어주지. 자. 움직여봐 주인님.”
“그렇게 부르지 마….”
울먹이면서도 레이븐은 천천히 몸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빌의 흉기 같은 성기가 레이븐의 몸속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자극만을 원하고 있던 레이븐의 아랫도리가 점점 빠르게 움직이더니 금세 정액을 시빌의 배 위에 토해냈다.
“아흣.”
시빌은 배를 한껏 웅크리며 사정 후의 쾌감에 젖어든 레이븐의 허리를 꽉 잡았다.
“움직인다.”
레이븐은 낮게 가라앉아 갈라진 시빌의 목소리에 겁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몸속에서 단단하게 부푼 시빌의 성기는 먼저 가버린 레이븐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내벽 깊은 곳까지 푹푹 찔렀다.
“앗! 핫! 악! 천천히! 제발!”
레이븐은 단번에 다시 절정으로 치달았다. 턱이며 허리가 한계까지 뒤로 젖혀져서는 바르작댔다. 구속된 팔 때문에 무언가를 잡을 수도, 쥐어뜯을 수도 없는 레이븐의 몸은 시빌이 잡고 흔드는 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못 버티…. 못 버티겠어! 아아!”
쾌감이 지나쳐 고통으로 느껴졌다. 껴안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아래쪽만 박히자니 자위 기구라도 된 것 같았다.
“싸달라고 해.”
“으, 윽! 으흑.”
“어서. 말해야 착한 주인님이지. 응? 끝내고 싶지?”
레이븐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너무 깊게 파고든 성기 때문에 아랫배가 꽉 차서 숨쉬기도 힘들었다. 기름도 말랐고 안쪽은 뻑뻑했다. 그런데도 거칠게 뱃속을 때리는 성기의 움직임에 쾌감을 느끼는 몸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싸줘. 싸, 싸주세요.”
시빌은 레이븐을 아래쪽으로 꽉 눌러 잡아당긴 뒤 정액을 몇 번이고 쏟아냈다. 절정에 도달한 레이븐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시빌의 가슴에 안겨왔다. 시빌은 레이븐이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키스하며 두 손을 풀어주었다.
“하아. 학. 어때. 좋았지?”
“…….”
레이븐은 땀에 흠뻑 젖어서는 뱀마냥 시빌의 위에서 몸을 틀었다. 완전히 맛이 가 있는 얼굴이었다. 몸속을 떠도는 절정이 도저히 사라지질 않는지 몇 번이고 몸을 떨며 웅크리던 레이븐은 한참 후에야 완전히 식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 어. 화났어?”
레이븐은 머리에 열이 치밀어 올랐다.
“나갓! 이 변태야! 나가!!”
“네에 네에 주인님.”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도망치는 시빌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븐은 시뻘게진 얼굴로 고무 성기를 집어 던졌다. 통통거리며 바닥을 튀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한결 더 우울하고 열이 받았다.
남부의 창관 주인은 매년 자신이랑 거래하면서 어떻게 저런 흉측한 물건을 팔 수 있는지…. 배신감이 느껴졌다. 저게 대체 누구 몸속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가? 시빌?
“이젠 미약을 아예 만들질 말아야지. 없으면 안 당할 걸 계속 이렇게 당하니…….”
시빌이라는 이름의 머슴이 하나 늘었기 때문에 산장의 생활은 매우 윤택해진 편이었다.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몸에 감았다. 밖으로 도망친 시빌이 새들에게 새똥 맞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레이븐은 피식 웃었다. 아주 고소하단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년 봄엔 자신이 산장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븐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