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8)

외전* 후일담

마이언 왕국의 스카 공은 음산한 얼굴로 말했다.

“레이븐이랑 떡 치고 있을 게 뻔하지. 그 외에 뭐가 있겠냐.”

옳으신 말씀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침통한 얼굴로 왼쪽 상처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가서 끌고 와야 하나?”

“누가 끌고 올 수 있는데?”

신음이 흘렀다.

왕국은 바야흐로 혼란에 빠져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정말 말 그대로 갑자기 사라져버린 시빌은 쪽지 한 장 남기지 않아 사람들을 시험에 빠뜨렸던 것이다.

“납치고 암살이고 다 말이 안 되는 헛소리지. 얘들은 대체 그자가 레비쥬란 걸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요즘 젊은 것들은 레비쥬 무서운 줄을 몰라. 머리도 나쁜 살인귀들을 왜 겁내냐고 하는데, 걔 눈엔 시발 새끼가 머리가 나빠 보이나? 정신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왼쪽 상처는 엘렉페의 한탄에 동의했다. 아네모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12년 전 백작이 된 아네모네는 나이가 마흔을 넘었지만 아직도 멋진 검은 머리카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늙지 않는 레비쥬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계속 왕으로 살 줄 알았는데.”

“아니. 난 언젠가 이 꼴 날 줄 알았지. 그가 가는 게 아니라 직접 가서 끌고 오거나 사람 시켜 납치해올 줄 알았지만.”

세 사람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가 왕국이 된 지 어느덧 20년이었다. 왼쪽 상처는 시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음모를 꾸미고, 사람을 속였다. 그 공로로 받은 것은 작위와 땅과 부와 명예였지만 마음속은 아직도 시빌에게 얽매여 독립할 수가 없었다.

‘인육을 삼켰기 때문이다.’

왼쪽 상처는 아네모네와 엘렉페를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은 인간의 세계에 속해 보였다. 인육을 삼키고 레비쥬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개가 되기로 한 자신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잠시 놀러 나갔다고 해둡시다. 그리고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사람은 한 번 보내봐야 할 것 같은데…….”

아네모네가 손을 들었다.

“내가 갈까?”

“왠지 넌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한 뒤 그냥 돌아올 것 같아. 내가 가지.”

왼쪽 상처의 말에 엘렉페가 휘파람을 불었다. 왕의 미친개가 자리를 비우면 숨도 제대로 못 쉬던 건달패들이 좋다고 날뛸 게 뻔했다.

“내가 새로운 감옥 부지를 알아보러 떠난 거라고 소문내. 그럼 머리에 뇌가 없는 것들도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움직이겠지.”

“새로운 감옥에 첫 손님이 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굴라는 건가.”

“실제로 새 감옥이 있기도 하거든.”

왼쪽 상처는 메마르게 웃었고 엘렉페는 떫은 얼굴을 했다.

도둑 길드를 책임지고 있는 엘렉페와는 달리 왼쪽 상처는 양지의 사람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하는 더러운 일들이 그의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무장 치안국의 수장이었다.

“감옥이 모자라면 우리 애들 좀 풀어줘. 하필 데려가도 기능공들만 데려가서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냐.”

“걔들을 내가 잡았냐? 아래 말단 애들이 잡아서 처넣은 걸 어떻게 내가 풀어줘. 도둑질하다 걸린 놈이 병신이지. 여기 아네모네양을 보고 본받으라고 해.”

“씨발 엿 같네. 동부로는 언제 떠날 건가?”

“이틀 뒤.”

엘렉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 왼쪽 상처가 수도 로겐을 떠남과 동시에 새로운 감옥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닥치던 12월의 초순. 시빌과 레이븐은 그들의 산장으로 다가오는 말의 모습에 하던 일을 멈췄다. 갈색의 늘씬한 말 위에 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둘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왼쪽 상처 아니에요, 저 사람?”

시빌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도 찾아냈군.”

강추위와 눈으로 덜덜 떨며 말에서 내린 왼쪽 상처는 비틀거리며 산장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렸다.

“어쩌죠?”

불안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븐의 모습에 시빌은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문을 열었다. 추위와 강풍이 초라한 남자와 함께 산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꼴이 말이 아니군?”

“…누구 덕분에 말이죠.”

레이븐은 뜨거운 차를 우려 왼쪽 상처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하며 찻잔을 받아들던 왼쪽 상처는 레이븐의 얼굴을 보곤 얼어붙었다.

“뭐야 이거. 마법사였습니까? 레이븐 너 마법사였어?”

“좀 동안일 뿐입니다.”

왼쪽 상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놓고 비웃었다.

시빌은 왼쪽 상처가 몸을 녹일 때까지 기다린 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슨 일로 왔나? 참고로 난 안 돌아갈 거야.”

“레이븐을 끌고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왕국은 개판입니다.”

“당사자 옆에 있습니다만 끌고 가다뇨오.”

왼쪽 상처는 레이븐의 항의를 들은 체도 안 하며 말을 이었다.

“하다못해 후계자 언급이라던가, 말이라도 좀 남기고 가지 그러셨습니까?”

“난 마이언이 좀 쪼개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평화는 물론 좋은 거지만 커다란 덩치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분열돼서 제 갈 길 가는 쪽이 나아.”

왼쪽 상처는 이번에야말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시빌을 쳐다보았다. 망연하던 얼굴은 잠시 후 거센 분노로 바뀌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고생해 온 사람들이 있는데!”

“왜 화를 내? 개가 똥개훈련 시켰다고 주인에게 성내는 경우도 있나?”

왼쪽 상처는 시빌의 야유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말문을 잃은 듯 머뭇거리더니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개로 부리는 대신 지위와 힘을 주겠다고. 당신에게만 고개 숙이면 되는 여생을 주겠다고.”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시빌은 새삼 왼쪽 상처를 훑어보았다.

그는 이제 제법 늙어 있었다. 수염이나 머리칼에는 눈에 띄게 흰빛이 늘었고 얼굴의 주름살은 깊어졌다. 처음에 보았을 땐 건달에 깡패였던 그는 이제 제법 위엄 있는 표정으로 명령할 줄 알게 되었다.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변화였다. 아무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왼쪽 상처의 변화한 모습은 제법 훌륭했다.

“네가 왕위에 올라도 좋아.”

“개새끼가 왕좌에 앉는 법도 있답니까? 저보다는 차라리 서 엘린도가 낫겠습니다.”

왼쪽 상처는 시빌의 제안을 가열차게 비웃었다.

“그럼 엘린도를 올리던가. 네가 지원한다면 한결 쉽게 왕이 되겠군.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였다. 왼쪽 상처는 기운이 빠져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쫓아오면서도 별 기대가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나 쉽게 자신의 것을 손에서 놓아버릴 줄은 몰랐다. 왕국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가 썼던 힘과 노력과 전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쨌거나 레비쥬가 왕위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고 마법사가 득세하는 일도 없겠지. 왕국이 쪼개진다 해도…….”

“치안력이 너무 떨어지면 레비쥬가 외곽에서 권력을 잡는다 해도 처치하러 갈 수 없게 됩니다. 인간들끼리 싸우면서 레비쥬를 용병으로 쓰기라도 하면 전세가 크게 기울 테고 마법사의 힘은 좀 더 위험합니다.”

시빌은 왼쪽 상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꽤나 머리가 좋아졌군. 왼쪽 상처. 역시 네가 왕을 하는 게 좋겠다.”

왼쪽 상처는 비위가 상한다는 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렇게 싫어할 건 없잖아?”

“정말로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까?”

“응. 안 돌아가.”

“레이븐이 죽어도?”

옆에서 뜨거운 차를 우리던 레이븐이 힉겁하며 딸꾹질했다. 시빌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왼쪽 상처를 향해 다시 웃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제법 볼만한 일이 벌어질 거라 장담하지.”

무슨 일이 생길지 왼쪽 상처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뜨거운 차를 쉬지 않고 들이켰다. 속에서 열이 확확 올랐다. 돌아가서 왕이 사랑의 도피를 했으며 왕위에는 아무나 오르라고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돌아와 주십시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떠나도록.”

“이곳에 계시다는 걸 모두에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와 함께한 세월은 20년이지. 하지만 난 그 이전에 200년을 영주로서 일해왔어. 이제는 좀 쉬어도 괜찮지 않나?”

왼쪽 상처는 이 그럴싸한 말에 속지 않았다.

“쉴 땐 쉬더라도 끝마무리는 제대로 하고 쉬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없이 실종되니 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나돌잖습니까!”

“까마귀.”

“예?”

“에메랄드 내놔. 왕관에 박혀 있던 거.”

레이븐이 털을 확 세웠다.

“줬다가 뺏는 겁니까? 싫습니다! 못 줘요!”

“애초에 준 적도 없잖아! 내놔!”

“……에메랄드라면 설마 그.”

“그래. 왕관에 있던 거. 그 큰 거. 이 자식이 뽑아갔더라고.”

왼쪽 상처는 레이븐을 흰 눈으로 노려보았다. 까마귀가 뽑아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엘렉페만 괴롭혔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연히 도둑놈들 짓거리라고 생각했는데 레이븐이었다니.

까마귀가 투덜대며 작은 상자를 꺼내 올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며 바라보던 왼쪽 상처는 상자가 열리자마자 쌍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왼쪽 상처!”

레이븐은 왼쪽 상처를 경계하며 상자 위를 몸으로 덮었다.

“역시 주기 싫습니다.”

시빌은 냉정하게 까마귀를 들어 올려서는 방 안으로 쫓아냈다. 바둥대는 레이븐의 모습에 왼쪽 상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대체 저런 거에 반해서 왕국을 버리고 떠난 시빌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보석을 가지고 가라. 가서 내가 허락했다고 말해.”

왼쪽 상처는 우울한 눈으로 눈앞에 들이밀어 진 에메랄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허락 말입니까?”

“난 전신이 되어서 하늘로 갔다고 해버려. 그리고 그 증거로 이 왕관의 일부를 놓고 갔다고.”

시빌은 왼쪽 상처의 미쳤냐는 듯한 시선을 용서하기로 했다. 자신이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맛이 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쳤습니까?”

“의외로 먹혀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잘 좀 해봐!”

“이게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도와줄 테니 그렇게 해. 레이븐의 까마귀들을 보내서 그럴싸한 장면을 연출해줄 테니까. 서 엘린도든 너든 할 맘 있는 놈들을 왕으로 추대해.”

왼쪽 상처는 말문이 막히다 못해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그 일을 마지막으로 널 놓아주겠다.”

“놓아주다니?”

“너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소리다.”

왼쪽 상처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탁자에 고개를 처박았다. 지쳤다. 산은 왜 이렇게 깊고 높은가. 바람은 또 왜 이렇게 불어 닥치던가. 눈이 내릴 때엔 정말 거지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은 게 ‘자신은 전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니 왕은 되고 싶은 사람 아무나 해라.’라는 허락인 것이다. 왼쪽 상처는 문득 어라? 하는 기분이 되어 두 눈을 껌뻑였다.

‘썅. 내가 지금 왕이 된 건가?’

나이 쉰둘. 반백의 로맨티스트가 될락 말락 하는 시기의 깡패 출신 대공은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음.”

시빌이 제의한 사기극이 갑자기 격하게 꼴렸다. 자세를 단정히 하며 생각에 잠기는 왼쪽 상처의 모습에 시빌이 문뜩 생각났다는 듯 물어왔다.

“참 혹시 돈 좀 있나?”

“? 조금 있습니다만.”

“놓고 가.”

“…….”

“왜 그런 눈으로 봐? 다 내가 준 거잖아.”

왼쪽 상처는 지긋지긋한 기분이 들어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시빌은 냉큼 주머니를 받아가서는 내용물을 살폈다.

“그리고 에메랄드 박고 나서 남는 다이아는 이리로 보내.”

어처구니없어하는 왼쪽 상처를 향해 시빌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레이븐이 지랄한단 말야.”

조금 나으려던 머리가 다시금 아파 왔다. 왼쪽 상처는 세상이 떠나가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왕을 설득시키려다 삥만 뜯기고 돌아간 왼쪽 상처가 다이아몬드를 보내온 건 그로부터 반년 후였다.

마이언 왕국을 계승한 두 번째 왕의 이름은 스카 벨리셔스. 왕비의 이름은 아네모네였다. 다이아몬드를 보고는 신나서 편지를 읽어주는 레이븐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빌은 그야말로 도둑놈 같은 것들이라고 중얼거렸다.

“20년 동안 죽 쒀서 개를 준거지.”

“훌륭한 개입니다.”

뭣도 모르는 레이븐은 그저 보석만 바라보며 뒹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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