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8)

외전* Raven

그날따라, 레이븐은 시빌의 무식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레이븐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청구서를 바라보았다. 청구서는 바레아에서 요구한 약과 버섯 세 바구니를 납입하면서 적어준 수령 확인증이었다.

문제는 산장에서 버섯과 약을 가져간 것이 바레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수령 증명서에도 바레아가 아니라 바테아라고 적혀 있었다.

“바레아랑 생긴 게 비슷하잖아. 내가 무슨 수로 알아보겠어?”

시빌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레이븐은 대꾸도 않으며 수령증을 증오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약이야 여분이 있고 버섯도 캐면 된다지만 충격적이군요. 이런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다는 거잖습니까?”

레이븐은 신경질적으로 수령 증명서 끝을 꾸깃거렸다.

“세상에나. 아무리 평화스럽다지만 파르티잔까지 들어와 숲지기에게 사기 치다니! 약이랑 버섯이 얼마나 된다고!”

시빌은 답지 않게 오그라들었다. 레이븐이 저렇게 화를 내며 분노하고 날뛰는 모습은 시빌이 삼 일 정도 내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감 딸 시기를 다 놓쳤을 때뿐이었다. 나무 아래 다 떨어져 있는 홍시들의 모습에 레이븐은 말도 못할 분통을 터뜨렸었다.

“몇백 살이나 되면서! 아직까지 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무식해요! 무식하단 말입니닷!”

계속해서 외쳐대는 무식하다는 말에 시빌도 발끈해서 외쳤다.

“으윽. 누가 배우려고 안 해봤는 줄 알앗?!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머리도 안 나쁜 사람이 배우지 못했다는 건 노력이 부족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레이븐은 매우 음산한 표정을 선언했다.

“안 되겠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특훈입니다.”

“무슨! 해도 안 돼!”

“앞으로 또 몇백 년을 더 살지 몇천 년을 더 살지 알 수 없는데 문맹으로 지내고 싶으십니까? 전 싫습니다! 부끄럽단 말입니다! 누가 물어본다고 좀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오래 함께하셨습니까?’ ‘예. 천 년쯤 됐습니다.’ ‘그런데 같이 사시는 분이 문맹이시네요?’ ‘네에.’ ‘좀 가르쳐주지 그러셨어요. 천 년이나 같이 사셨다면서요.’ 으왁!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립니다.”

대체 누가 물어본다는 건가.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시빌은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물건을 꺼내줘서 사기당한 것도 사실이고 문맹이라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모르는데 계속해서 문맹……. 시빌이 생각해도 그건 좀 싫은 이야기였다. 그는 한 풀 기가 꺾인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배울 수 있다면야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배울 수 있습니다. 내일 당장 바레아로 가서 준비물을 사오죠.”

레이븐은 그답지 않게 의욕 가득한 얼굴로 말하며 시빌을 기력으로 눌렀다.

다음 날 아침 바레아로 향한 두 사람은 잡화점부터 들렀다. 오랜만의 도시이니 간 김에 필요한 물건들을 죄다 사자며 레이븐은 커다란 가방을 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종이와 펜, 잉크 한 세트였다. 시빌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 물건들을 건드리려고도 않았다. 그는 두려운 얼굴로 신나서 쇼핑하는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잡화점 안에서 반짝거리는 온갖 물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에 그는 멀찍이 도망가고픈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힐끗 카운터를 보자 잡화점의 주인장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이 시빌에게 애도의 눈빛을 힐끔 던졌다.

“차라도 들겠소, 청년? 레이븐 씨는 반나절은 걸릴걸.”

“반나절?!”

경악하는 시빌에게 주인장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더 걸릴 수도 있고.”

시빌은 완전히 석화되어 주인장과 함께 차를 홀짝거렸다. 다행히 레이븐의 쇼핑은 3시간 만에 끝났다. 배낭 하나를 가득 채우는 레이븐의 모습을 시빌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들었다 놨다 했던 물건들의 수를 생각하면 참으로 간소한 구입이었다.

“왜 더 구경하지 않고?”

빈정거림을 담아 묻자 레이븐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들를 곳이 많으니까요.”

설마 들르는 곳마다 3시간인가 싶어 시빌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레이븐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대장간과 식료품점을 들렀다. 숫돌과 못, 사포 따위를 구입해서는 시빌에게 들게 하더니 밀가루와 건포도, 기름과 술 따위를 또 한 가방 구입했다.

이건 자신의 힘을 믿고 저러는 거겠지. 시빌은 물건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동그랗게 부푼 가방을 등에 지며 생각했다. 사실 전쟁광만 아니면 레비쥬만큼 부려 먹기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제 서점만 가면 됩니다.”

레이븐은 시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레아의 상가를 누볐다. 시빌은 한숨 쉬었다. 예전에 들렀을 땐 바레아가 이렇게 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동부의 대도시로 향하는 관문이 될 수 있는 도시였다. 파르티잔으로 향하는 레비쥬의 잦은 행렬만 아니었으면 경비대의 무장에 사용할 돈을 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예전보다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엄청나게 많아졌지요. 20년 전이랑 비교하면 두 배는 더 커졌을 걸요. 게다가.”

레이븐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뱀파스를 판매해서 돈 좀 만진 모양이더군요. 소문 퍼지기 전에 심마니들에게서 헐값으로 싹 다 긁어 가지곤 중부에 판매한 모양이던데.”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언에서 다 샀지. 그렇군. 이게 다 내 돈으로 만든 거란 말이지.”

레이븐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실은 저도 돈 좀 만졌지요. 헐값으로 사들일 때 안 팔고 놔뒀거든요.”

그때의 기쁨이 생각나는지 레이븐의 얼굴이 음흉하게 빛났다. 시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까마귀를 향해 물었다.

“돈 하니 생각났다. 너 이 자식. 대관식 끝나고 에메랄드 뽑아간 게 너냐? 꽤 이것저것 없어졌던데.”

“납치당해서 북부까지 끌려갔는데 여비라도 좀 챙겨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도 아프고 마음도 안 좋고 게다가 그땐 허리까지 안 좋았는데 세상에나. 지금 보석 몇 개 가져갔다고 절 추궁하시는 겁니까?”

시빌은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안 따지게 생겼어, 지금? 당장 대관식 다음 날 왕관 중앙이 텅 비어있는 걸 보고 얼마나 황당했는데! 빈손으로 떠나는 줄 알고 걱정돼서 여비까지 챙겨줬는데 그 쪼그만 보따리가 다 패물이었단 말이지?”

“아. 저기 서점이네요.”

“야 임마! 말 돌릴래?”

레이븐은 빠른 걸음으로 서점을 향해 날아갔다. 시빌은 갑자기 확 열이 올라 레이븐을 쫓았다. 당장 대관식 다음 날부터 쓸 수 없게 된 왕관의 중앙은 2년이 지나서야 다시 채워졌다. 남부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구입했는데 커팅에만 근 일 년 반이 걸렸던 것이다.

레이븐이 도망쳐 들어간 서점은 무척 작았다.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도시도 아니었으니 서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서점 주인은 카디넬이 들어오는 것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가게들과는 좀 다르군.”

시빌이 레이븐의 귀에 슬쩍 속삭였다. 레이븐이 책장 사이로 들어가며 피식 웃었다.

“새로 생긴 가게거든요. 서부에서 왔다던데요. 그쪽에는 카디넬이 별로 없으니까, 뭐 흔한 반응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모든 것을 거대하게 불리는 괴물이었다. 돈도 사람도 커지고 가게나 도시도 커진다.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지고 예술과 학문도 그 덩치를 부풀렸다. 문화생활 같은 것은 대륙에서도 북부에서나 할 수 있는 사치 생활이었다. 그런 것이 이 동쪽 구석에까지 들어와 책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팔려나가는 것이다.

시빌은 새삼스레 서점 가득한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의 업적에 대해 피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높이 올라버렸기 때문에 낮은 곳의 둔덕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앗. 원예 책이네요. 남부식물대도감이라니. 앗! 저건 연금술사 길드에서 나온 거네요.”

“내게 글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산다더니?”

“교재도 사야죠. 하지만 이 삽화 정말 멋지네요.”

“마음에 들면 사지그래. 여기서 읽지 말고.”

“하지만 가격이 좀. 크흠.”

“……너 그때 집어간 패물이 얼마어친데 책값 운운하는 거냐.”

“보석을 왜 팝니까? 옆에 두고 감상해야지.”

시빌은 말을 말자는 기분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

시빌은 서점 한쪽의 책장에 기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보다 들떠버린 레이븐의 모습으로 짐작건대, 이 서점에서 긴 시간을 머물러야 할 듯했다.

‘붙임성 좋은 잡화점 주인장에게 차나 얻어 마시러 갈까.’

시빌이 슬쩍 꼬리를 말고 도망치려던 때였다. 레이븐이 킬킬거리며 딱 보기에도 얇은 책을 한 권 들고 왔다.

“뭐 맘에 드는 거라도 발견했어?”

“이걸 교재로 쓰면 어떨까 해서요. 봐요. 이렇게.”

레이븐이 책을 슬쩍 펴서는 안쪽을 보여주었다. 커다란 삽화가 커다란 글씨와 함께 그려진 어린이용 동화책이었다.

“황새랑 여우가 있네? 동물 우화 중에서 저 둘이 동시에 나오는 건 호리병에 부리 처넣고 접시 핥아먹는 이야기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맞나?”

“……맞습니다. 흠. 다른 걸로 하죠.”

“옛 이야기류는 거의 다 아니까 포기해.”

레이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른 책을 가지러 갔다. 책장을 두 칸 정도 뒤지는가 싶던 레이븐은 곧 화색을 띠며 시빌에게 달려왔다.

“이건 어떻습니까? 소년들을 위한 모험 소설인데….”

“그건 내용 아는 책이야. 리딩보이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읽더군. 성안의 남자애란 남자애들은 다 몰려들어서 경청하는 통에 정신없었다.”

“그, 그럼 이건?”

레이븐이 들고 있던 다른 책을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장정에 작가를 나타내는 문양이 찍혀 있었다.

“에난의 작품은 나오자마자 읽는다.”

“그럼 이건?”

평범한 가죽 장정의 책을 가리키자 시빌이 물었다.

“뭔지 모르겠군. 제목이 뭔데?”

“보타리 부인의 사랑이요.”

“읽었어.”

“헉!”

“왜?”

레이븐에 공포에 질린 얼굴로 시빌을 쳐다보았다. 어쩜 저렇게 잔인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있나 싶은 표정이었다.

“엄청 야하던데! 이걸 다른 사람에게 읽혔단 말입니까?!”

“책 내용보다는 리딩보이들 괴롭히는 재미로 읽혔지.”

시빌은 야비한 표정으로 책을 쳐다보았다.

“교재 그걸로 하자. 갑자기 학구열이 불타오른다.”

레이븐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책을 책장에 탁 꽂아 넣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었다. 이십여 권의 책이 그런 식으로 퇴짜맞자 레이븐은 완전히 시무룩해졌다.

“이럴 수가. 문명인이라니. 문맹인데 문명인이라니.”

레이븐은 통탄했다. 문맹이라 책에 대해선 전혀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보다 더 많은 책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빌은 몸을 떠는 레이븐을 보더니 조금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글을 배우는 데 꼭 모르는 내용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대충 골라.”

“모르시는 말씀. 당신은 머리가 좋아서 아는 책 들이대면 술술 외울 인간입니다. 그래선 안 되죠.”

레이븐은 눈에 불을 켜며 시빌이 모르는 책을 찾아 헤맸다. 그리하여 5시간의 분투 끝에 결정된 책은 ‘시빌 마이언 전기’였다. 책의 주인공인 시빌이 듣도 보도 못한 책인 동시에 그가 진저리를 치며 거부한 유일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븐은 책의 중간을 아무렇게나 넘겨 읽으며 킬킬거렸다.

장을 보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둘은 바레아에 하루 묵기로 했다. 까마귀의 산장은 제법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발이 느린 이들은 이틀도 걸렸다.

녹색 외투를 걸친 카디넬이 여관으로 들어서자 홀에 앉아 술을 마시던 자들이 조용해졌다. 동부에서 카디넬은 존경받는 자들이었고 녹색 외투는 바레아에 사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다 들어본 적이 있는 특징이었다. 레이븐은 슬쩍 목례한 뒤 카운터로 다가갔다.

“저게 그거래. 같이 사는 놈.”

레이븐의 뒤에 얌전히 서서 짐을 들고 있던 시빌은 낮게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힐끔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은 대놓고 시빌의 모습을 구경하며 수군거렸다. 꼬리인지 뭔지 하는 사냥꾼에게 말한 것이 벌써 소문난 듯했다.

“확실히 숲지기가 혹할만하네.”

“금발로 낚은 건가?”

“금발이겠지.”

“생긴 것도 잘생겼네. 하지만 역시 금발이…….”

시빌은 침묵했다. 얼마나 반짝거리는 걸 밝히고 돌아다녔기에 사람들이 다 아는 걸까 싶었다. 하긴. 잡화점에서 세 시간 만에 나가는 것에 주인장이 기겁했었다. 어째서 더 있지 않느냐고, 맘에 드는 물건이 그렇게 없냐고 되묻는 것에 레이븐은 제법 거만하게 우쭐댔던 것이다. 오늘은 볼 일이 많아서 대충 둘러봐야 한다고.

‘대충 같은 소리 하네.’

“여기 욕실도 있다네요. 짐 좀 놓고 식사합시다. 배고프네요.”

점심도 안 먹고 열 시간이 넘는 쇼핑을 했으니 배가 고프지 않은 게 이상했다. 시빌은 대꾸할 기운도 없어 객실에 짐을 풀고 내려갔다. 그새 테이블을 차지한 레이븐은 이것저것 음식을 시키고 있었다. 시빌은 한숨 쉬며 옆자리에 앉았다.

“술 먼저 갖다 주쇼.”

숲에는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있었지만 곡물을 사용해 빚어야 하는 술이나 설탕 같은 조미료는 도시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시빌은 자신 앞으로 나온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 좋다. 바레아랑 좀 더 가까우면 좋을 텐데. 조용한 건 좋지만 술은 좀 아쉬워.”

“내려온 김에 좀 사서 들고 가죠?”

시빌은 바로 고개 저었다.

“들고 갈 손이 없어. 배낭도 다 찼고, 맥주 한 통이면 크기가 제법 될 텐데. ……증류주나 좀 사 갈까.”

“이제 곧 겨울이니 증류주가 좋겠네요. 추울 때 술 한잔 마시면 몸도 따뜻해지고, 가끔 조난자가 발생하면 먹여야 할 필요도 있고.”

마침 음식이 나와 둘은 말없이 식사했다. 다른 사람이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은 둘 다 간만이었다. 나름 데이트 같은 기분도 나서 시빌은 만족스레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우걱우걱 음식을 먹어치우는 모습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시빌 눈엔 귀엽기만 했다.

하지만 귀엽게 본 게 시빌뿐만은 아닌 듯했다.

커다란 몸짓의 사냥꾼 하나가 둘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완전히 부글거리다 못해 폭발한 얼굴로 다가온 남자는 넘어지는 척 냅다 시빌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런 썅!”

“뭐야? 이 병신 새끼는.”

인간이 휘두르는 팔에 맞을 턱이 없는 시빌이 여유 있게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냥꾼은 씩씩거리며 외쳤다.

“기생오라비 새끼! 우리 숲지기한테서 떨어져!”

“…….”

“생긴 것만 번쩍거리면 다야? 꺼져!!”

“쟤가 왜 ‘너네’ 숲지기냐? ‘내’ 숲지기지. 죽을래?”

“이 씨발 새끼가!”

일전 짧은 꼬리가 말한 동료가 이놈인 듯했다. 시빌은 의자 등받이를 들고 후려치는 사냥꾼의 모습에 흥이 올랐다. 시빌은 레비쥬였고, 폭력을 행사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었고, 또 사냥꾼들의 마을을 뒤집어엎지 않겠다고 레이븐과 약속했는데 당사자가 눈앞에 나타나 그를 향해 의자를 후려치는 것이다.

시빌은 레이븐이 말릴세라 재빨리 그에게 달려들었다.

“죽이면 안 됩니다!”

시빌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귀를 후볐다. 상대방은 아무래도 자신을 죽이려는 것 같은데, 뭐 저렇게 외치는 것도 자신의 실력을 믿는 레이븐의 여유겠거니 했다. 하지만 신나서 싸우려던 시빌은 레이븐이 덧붙인 한 마디에 똥 씹은 얼굴이 됐다.

“여기 바레아입니다! 피도 흘리면 안 돼요.”

“……. 이런 썅!”

바레아에서 피 흘리는 자 패배의 저주가 있으리라아~. 시빌은 킬킬거리는 레이븐의 목소리에 미친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하고야 말았다.

“능력도 없이 미인을 차지한 기생오라비라고 온 동네에 소문나겠어.”

시빌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때릴 수 없어서 사냥꾼의 공격을 피하기만 해야 했다. 완전히 약이 오른 남자를 막은 것은 사이에 끼어든 레이븐이었다. 버럭 화를 내며 소리치는 레이븐의 모습에 사냥꾼은 혼난 개마냥 낑낑대더니 사과하며 도망쳤다.

“대체 뭐야 그 새끼는.”

“긴 꼬리요.”

“혹시 중간 꼬리도 있어?”

“없습니다. 긴 꼬리는 짧은 꼬리 형이에요.”

“못 본 사이 벌레가 너무 꼬였어.”

“겨울에 다쳐있는 걸 치료해준 적이 한 번 있거든요.”

“이상한 거 자꾸 줍지 마.”

시빌이 불쾌한 듯 말하자 레이븐이 낄낄 웃었다.

“제가 주운 것 중 가장 이상한 건 당신입니다. 목과 몸을 따로 주웠는데 그게 붙어서 하나가 될 줄이야.”

“무서웠어?”

“예?”

“머리랑 몸이 붙어서 무서웠냐고.”

레이븐은 피식 웃었다.

“머리와 몸이 떨어져 있었을 때의 무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당신은 어땠습니까?”

“어떻다니?”

“목이 떨어졌을 때요. 무서웠나요?”

시빌은 뭐 이런 무신경한 질문이 있나 싶어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도 자신이 한 질문이 겸연쩍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옆에 놓은 책을 집어 들었다.

“여기 그렇게 쓰여 있거든요. 두려움 따윈 없었다. 고통과 후회가 가슴 속에 차오를 뿐이었다. 아! 이 배신감이라니! 나의 믿음을 그는 차가운 배신의 칼날로 갚은 것이다. 아멜리타 발루아, 내 직접 너의 목을 치고 말리라!”

시빌은 레이븐이 들고 있는 책을 확 뺏어 들었다.

“대체 작가가 누구야?!!”

“글쎄요? 직접 읽어보시죠.”

레이븐은 어깨를 푸드득 떨며 야비하게 웃었다. 분노와 민망함에 머릿속이 새까매진 시빌이 고함쳤다.

“살면서 이렇게 열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잘도 날 이렇게까지 부끄럽게 하다니. 이 자식. 반드시 죽인다!”

“아. 뭐 읽을 수 있으면 읽어서 누군지 찾아가 보시라니까요? 전 안 말립니다. 크크크큭.”

시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는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밉살스럽기는 이 까마귀도 마찬가지였다. 시빌은 얄미운 레이븐의 몸 위로 올라타 그 입을 막았다.

“하자.”

레이븐의 눈가가 빨갛게 젖어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야해서 시빌은 이를 콱 악물었다. 이러니 멋모르는 애들이 꼬여 들지.

“방음이 썩 좋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하자는 거야.”

애송이들이 듣고 나가떨어질 수 있도록. 시빌은 부드럽게 웃으며 레이븐을 달래 옷을 벗겼다. 하루 종일 산을 걸어오느라 땀에 젖은 몸에선 짙은 체향이 났다.

시빌은 레이븐의 유두를 진득하니 핥고 빨았다. 순식간에 젖어든 레이븐이 젖은 소리를 냈다.

“아. 하으. 앗.”

“입 안에서 콱 씹어먹었으면 좋겠어.”

시빌은 이빨로 살짝 잘근거렸다. 레이븐이 허리를 뒤로 확 휘며 시빌의 등을 긁었다. 시빌은 유두를 집요하게 찝쩍거리며 손으로는 레이븐의 허벅지를 매만졌다. 잔뜩 달아오른 레이븐이 시빌의 몸을 감아왔다.

“야한 소리 내 봐.”

“으. 으읏. 무슨.”

“까악 까악 하고 내 봐.”

시빌은 레이븐의 성기를 커다랗고 뜨거운 손으로 움켜쥐었다. 유두를 입에 문 채 성기를 자극하자 레이븐이 자지러졌다.

“아앗! 학! 앗! 시빌!”

“성기도 핥아줄까? 젖꼭지처럼 빨갛게 부풀어 오를 거야.”

“아. 좋아. 앗!”

시빌은 딱딱해진 레이븐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부드럽게 빨리는 감각에 레이븐은 허우적거리며 시빌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잡아 당겨지는 감촉조차 조르는 듯 느껴져 시빌은 성기를 입에 문 채 키득 웃었다.

“자, 잠깐. 웃지 마요! 갈 거 같….”

레이븐의 외침에 시빌은 더욱 세게 성기를 빨아들였다. 비린 정액을 꿀꺽 삼키고는 눈을 치뜨자 절정을 맞아 흐릿해진 레이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젠 내 차례네?”

“으으.”

시빌은 레이븐의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기분 좋게 풀어졌던 레이븐의 몸이 흠칫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프게는 안 할 테니까.”

소리를 들려주는 게 목적인지라 시빌은 공들여 손가락으로 레이븐의 몸을 풀었다. 한 번 식었던 몸이 다시 뜨거워지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느끼는 곳만을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휘젓자 레이븐이 울먹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 적당히 하지 안…. 아! 하악!”

“손가락만으로 한번 보내줄 테니까.”

시빌은 발갛게 달아오른 레이븐의 귀를 혀로 핥았다. 소스라치며 몸을 떨며 도망가도 집요하게 쫓아가 귓불을 핥고 씹었다. 귓구멍에 혀를 넣는 것은 레이븐이 가장 심하게 느끼는 포인트 중 하나였다. 시빌은 레이븐이 계속해서 교성을 내뱉도록 느긋하게 애무했다.

“아! 제발 그만! 아앗!”

“누군가 문밖에서 훔쳐 듣고 있을 거야. 목소리 굉장히 야한걸. 소리 더 내봐.”

시빌은 레이븐의 애널로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불쌍한 까마귀는 계속되는 자극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커다란 것이 푹푹 찔러주는 것도 아니라 완전히 애가 닳아서는 시빌에게 엉겨 붙었다. 손가락으로 레이븐이 느끼는 곳만을 느긋하게 문지르며 시빌은 커다랗게 부푼 자신의 성기를 레이븐의 것에 대고 문질렀다.

“시빌, 시빌! 아앗! 아! 좀 더.”

“좀 더 뭐?”

딱 절정에 다다르기 전 시빌은 손가락을 빼냈다. 레이븐이 울먹이며 시빌의 머리칼을 잡아 뽑았다.

“큭!”

“심술 그만 부리고. 넣, 넣어줘요.”

시빌은 빨갛게 잘 익은 레이븐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땀에 젖은 채 다리를 벌리고 누운 모습이 절경이었다. 시빌은 레이븐의 몸속으로 느릿하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읏! 크으…. 흡!”

레이븐은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시트를 쥐어뜯었다. 천천히 들어오는 성기에 몸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질척거리면서 달라붙어 와. 내 물건을 빨고 있어.”

“아흑!”

“기분 좋지? 제길. 어떻게 해주길 원해?”

“아! 차라리 빨리.”

“조여 봐. 그럼 빨리 해 줄게.”

레이븐은 몸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시빌의 성기를 조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서 조여도 멈추지 않고 몸속을 움직이는 살덩이에 레이븐은 흐느끼며 배에 힘을 주었다. 힘을 주면 줄수록 내벽이 시빌의 성기에 달라붙어 그 모양이나 움직임이 확연히 느껴졌다.

“큭! 좋아. 잘하는데?”

“아. 제발.”

레이븐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시빌은 그를 쉽게 보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괴로워. 가게 해 줘.”

“안 돼. 아직.”

“시, 심술부리지 말고. 흐읏!”

시빌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 레이븐의 허리를 잡고 빠르게 밀어붙였다.

“크윽! 악! 앗! 하앗!”

절로 허벅지에 힘이 팽팽하게 들어갔다. 레이븐은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손등으로 막았다. 몸 전체가 덜덜 떨려왔다. 레이븐은 물에 빠진 사람마냥 시빌의 몸에 매달렸다.

“아. 하악! 처, 천천! 악! 천천히. 크흣.”

“보…채지 마. 큭!”

시빌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레이븐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땀에 젖어 미끌거리는 짙은 색의 피부를 손바닥으로 매만지고는 레이븐이 스스로 잡아 떨어지지 않게 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성기를 한참이나 느릿하게 조이다가 갑자기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레이븐의 내벽은 어떻게든 시빌의 성기를 잡기 위해 안달하며 달라붙었다. 시빌은 물론 잡혀주지 않고 제멋대로 달라붙는 살들을 밀치며 비벼댔다.

“가, 갈 거 같…….”

시빌이 몸을 뒤로 휘며 허우적 다리를 놓쳤다. 절정에 닿아 잔뜩 젖혀진 목을 혀로 핥으며 시빌은 레이븐의 다리를 잡아 어깨 위에 걸쳤다. 그리고 더 빠르게 움직이자 절정에서 내려오지 못한 레이븐이 결국 비명을 내질렀다.

몸 안에 잔뜩 부어진 정액이 엉덩이의 골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레이븐은 뱃속이 완전히 젖어버린 느낌에 어쩔 줄을 모르며 덜덜 떨었다. 시빌은 벌어진 레이븐의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흐윽. 흑. 흑.”

레이븐은 시빌의 키스를 따라 혀를 움직이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리며 헐떡거렸다.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듯 눈을 감는 모습에 시빌은 헐떡거리는 레이븐의 몸을 품에 안았다.

몸이 끈적거렸지만 씻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시빌은 정사의 잔재가 사라질 때까지 레이븐을 껴안은 뒤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내일…….”

“응?”

“내일 어떻게 산에 오르죠?”

피곤한 나머지 레이븐의 목소리는 거의 잠꼬대처럼 들렸다. 시빌은 레이븐의 젖은 뺨에 입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업고라도 오르지 뭐.”

“짐도 많은데.”

“두 번 움직이면 돼.”

“아. ……그럼 안심.”

시빌은 잠든 레이븐의 얼굴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마치 시빌의 머리카락을 레이븐이 바라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잘 자.”

시빌은 레이븐의 숨소리가 고르게 될 때까지 옆을 지켰다.

레이븐이 잠들었다는 확신이 서자 시빌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방문을 열고 여관의 복도로 나가자 시커먼 그림자가 바로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시빌에게 덤벼들었던 긴 꼬리였다. 시빌은 벽에 기대어 선 채 승자의 여유로운 태도로 물었다.

“뭔가 용무라도?”

“…….”

긴 꼬리는 완전히 혼이 나가 있었다. 시빌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멍하니 벽만 바라보는 것이 옆에 누가 서 있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벌레 한 마리 퇴치.’

시빌은 콧김을 한 번 뿜어주고는 문을 다시 닫았다. 다음에 짧은 꼬리를 다시 만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의 근황이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레이븐은 시빌이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것이 나무라는 글자입니다. 이 부분이 ‘나’, 이 부분이 ‘무’.”

레이븐은 펜을 들고 글자를 반으로 갈라 나누었다. 힐끔 시빌의 얼굴을 보자 그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는데.”

놀랍게도 시빌은 기본적인 철자법을 알고 있었다. 38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알곤어를 순서대로 읽고 쓰는 시빌의 모습을 레이븐은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건요?”

레이븐이 ‘다무’라고 써서 시빌에게 보여주자 그는 정신없이 ‘나무’라고 쓰인 글자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모르겠는데. 여기 이렇게 짝대기가 하나 더 있어서.”

“이건 다무라고 읽습니다. ‘ㄴ’이랑 ‘ㄷ’이 다른 건 아시죠?”

“알아. 하지만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생긴 게 완전히 다른걸.”

레이븐은 머리가 아파 왔다. 시빌은 글자를 문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한 덩이의 그림으로 인식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이 뭉쳐 있는 모양이나 지푸라기 한 뭉치가 모여 있는 모습의 법칙성을 인간이 이해하고 분석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문자를 한 덩이의 혼란스러운 무언가로만 인식했다.

직선이 매우 많고, 점도 매우 많고, 곡선도 매우 많은 잉크의 휘갈김. 레이븐은 천천히 잉크병을 닫았다. 시빌은 머리가 좋았지만 모든 단어나 문자의 모양을 외우는 건 불가능했다. 마법이 아니고서는…….

잉크병을 닫고 펜을 치우는 레이븐의 행동에 시빌이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꾀병 같은 게 아니라고.”

“압니다. 괜찮아요. 이해했습니다.”

레이븐은 잠시 고민했다. 마법이 아니고서는 시빌이 글자를 읽고 쓰도록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죠. 하루에 단어 하나씩을 외우는 겁니다. 천 년이 지나서도 글자를 모르는 건 창피하니까요. 하지만 하루에 하나씩만 외워도 천 년이면 40만 개가 넘는 단어를 외울 수 있을 겁니다.”

시빌이 매우 미심쩍은 어조로 되물었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레이븐은 옆으로 치워놓았던 책을 시빌에게 보여주었다.

“하루에 이 책을 조금씩 읽어드릴 테니 듣다가 외우고 싶은 단어가 있으면 말하십시오. 하루에 하나씩. 천천히 해나가는 겁니다.”

“하루에 하나인가.”

레이븐은 시빌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을 발견하고 살짝 놀랐다. 쑥스러운 걸까?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런 것 같았다. 레이븐은 모른 척 눈을 돌리며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책 아니면 안 돼? 꼭 그걸 내 앞에서 들으란 듯 읽어야겠어?”

책을 펴자마자 날아오는 시빌의 잔소리에 레이븐은 씨익 이를 쪼갰다.

“자신의 일생과 연관 있는 단어부터 외워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핑계도 좋아. 단순히 날 놀려먹으려는 거잖아?”

“당연하죠.”

레이븐은 매우매우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고 시빌은 처연한 한숨을 푹 내쉬며 귀를 막았다.

“안 들려 안 들려.”

“시빌 마이언은 룬강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룬강의 강둑에 앉아 낚시하는 어부들을 바라….”

“뭐? 시작부터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시작부터 방해받은 레이븐은 시빌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시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레이븐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계속 읽어봐. 얼른.”

“크흠. 어부들을 바라보며 자랐다. 그는 서자였고 자신의 비천한 운명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시빌은 폭소를 터뜨리며 탁자 위에 엎어졌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룬강에서 낚시해서 먹고 사는 어부도 없고 서, 서자! 푸하하하.”

“완전히 지어낸 건가 보군요. 그래도 룬강인 건 용케 맞혔습니다, 이 작가?”

“내 깃발의 강이 룬강이라서 끼워 맞춘 게 아닐까? 그나저나 나도 모르던 출생의 비밀이, 프흡!”

웃느라 일어나지도 못하는 시빌을 무시하며 레이븐은 계속 책을 읽었다. 책 속에서, 룬강 유역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서자 시빌은 영주 가문의 레이디에게 반해 실연과 좌절을 겪었다. 사랑의 아픔을 견디고 여행을 하기로 결정한 시빌은 전 세계를 유람하며 실력을 쌓았다.

“전기가 아니라 소설 같은데.”

“그런가 봐요. 이름만 우연히 닮은 건가 싶네요.”

전기가 아니라 완전히 코미디였다. 시빌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며 계속해서 바닥을 굴렀고 레이븐은 소설 읽는 기분으로 계속 소리 내어 읽었다.

“오오옷! 아멜리타가 등장했습니다!”

“드디어!”

“우와. 우와아!”

“왜 그래? 얼른 읽어봐.”

“굉장해! 아멜리타 묘사한 게 실제랑 똑같아요!”

기대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로 나오거나 여장 남자로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두 사람은 다소 김이 빠진 상태로 나머지 분량을 읽어나갔다. 초상화도 남아 있어서인지 아멜리타에 대한 묘사는 대개 정확했다.

“아. 서점에서 읽었던 부분이네요. 크크큭.”

레이븐은 조금 기대하며 뒷장을 넘겼다. 시빌을 구해준 건 자신이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그녀는?”

레이븐은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일어나려는 시빌을 잡아 누르더니 말했다. ‘당신은 더 쉬어야 해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목소리엔 거역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핫!”

그 이후는 공포와 경악과 혼돈의 소용돌이였다. 아멜리타가 아니라 레이븐이야말로 어두운 피부의 카디넬 미녀가 되어 있었고 시빌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자신의 영지로 데려갔다.

레이븐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조금 싱거워하고 있던 시빌조차 마시던 차를 삼키지 못하며 헐떡이고 있었다. 레이븐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왕이 되니 이런 날조 책도 나오고. 좋으십니까?”

“아무래도 작가 얼굴 좀 봐야겠다.”

시빌은 어깨를 떨며 웃었다.

“너무 웃어서 기운이 없네요. 목도 아프고.”

“그럼 그만 읽어. 어차피 날이야 많잖아. 이제 곧 겨울이고.”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읽을 생각이었는데 너무 웃겨서 계속 읽어버렸네요. 그나저나, 외울 단어는 정하셨습니까?”

“레이븐.”

“네?”

“레이븐. 네 이름을 외우고 싶어.”

레이븐은 멈칫하며 시빌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답지 않게 진중한 빛이 얼굴에 떠올라있었다.

“레이븐, 네 이름을 외운 다음엔……. 글쎄. 밀가루나 감자 같은 단어라도 외울까?”

레이븐은 부드럽게 웃었다.

“버섯이랑 바레아가 좋겠네요. 눈을 감으십시오. 좀 따가울 겁니다.”

시빌은 아무런 의심이나 주저도 없이 눈을 감았다. 첫 번째로 외우는 글자가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에 레이븐은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 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 좋고 행복했다.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레이븐은 손을 들어 시빌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RAVEN-

“하루에 하나씩.”

그렇게 시간과 함께 단어를 쌓아 올려 언젠가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기를. 그런 기원을 담아 레이븐은 시빌의 뇌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2016년. 벌목사업 중 파르티잔에서 발굴된 한 권의 책이 많은 이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타인이 쓴 나의 자서전에 항의하며.’ 그러한 머리말로 시작하는 녹색 장정의 책은 최초의 왕이라 불리는 시빌 마이언의 일생을 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과는 매우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특히 시빌의 출생과 레이븐에 대한 묘사가 남달라 연구대상이 되었다.

“왕 본인이 쓴 것처럼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가 문맹이라는 건 유명한 사실이지요. 아마 위서일 겁니다.”

왕국이 안정되자마자 사라진 시빌 마이언은 그 실종의 이유가 비밀에 싸여 있어 역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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