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8)

Epilogue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동굴 속에 내리쬐는 한 줄기 섬광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던 지하의 어둠 속에서, 감히 기대하지도 않았던 하늘의 천체를 마주칠 때 인간은 세계의 섭리를 마음속에 품는 것이다.

레이븐을 보낸 지 어느덧 20년도 넘게 흘러 있었다. 왕국은 거대해져 대륙을 거의 집어삼켰다. 레비쥬들의 영지는 이제 없고 인간의 관리가 다스리는 땅만 남았다. 시빌은 전쟁터의 폭음 대신 고요한 새벽의 안개를 보며 사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전쟁은 검이 아니라 대포로 이루어졌다. 교육받은 포수들과 머리 좋은 인간 한 명이면 홀로 레비쥬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다. 시빌이 왕위에 오른 뒤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은 이제 전신의 조각들을 겁내지 않았다. 각성한 레비쥬들은 이제 같은 레비쥬가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했고 시빌을 저주하며 사라져 갔다.

시빌이 차지한 땅은 이제 북부가 아니라 중앙이라 불렸다. 왕국의 이름은 마이언이었고 사람들은 시빌을 레비쥬라 생각지 않았다. 그는 레비쥬가 아니라 그냥 왕이었다. 마법사와 미인들의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는 고독한 인간의 왕.

시빌은 언제나 해가 떠오르는 동녘을 바라보았다.

삶은 무료했다. 시빌은 자신의 몸속에 있던 불꽃들 중 하나가 꺼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의 책임과 야심 때문에 놓쳐버린 사랑은 숲을 볼 때마다 떠올라 그를 괴롭게 했다. 몇 번이고 동쪽의 산맥으로 향하려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야 했다. 충동을 견디기 힘들 때마다 시빌은 은화를 꺼내 바라보았다. 언젠가 자신의 손 위를 덮었던 떨리는 손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겼다.

그날은 쌀쌀한 바람이 겨울을 예고하던 가을이었다. 점심을 간단히 들고 있던 시빌은 작은 포도알 같은 것을 씹다 말고 벼락이라도 맞은 양 몸을 떨었다.

추수를 끝낸 왕국 전역에서의 조공이 로겐에 도착한 날이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음식들이 식탁 위에 있었고 그중에는 검게 잘 익은 머루 또한 있었다. 시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루의 달고도 씁쓸한 맛이 입 안에 퍼지자마자 기억하고 만 것이다.

숲을 채우던 그 모든 밝음과 어두움. 머리칼을 날리던 바람. 손끝을 스치던 물결이나 발끝을 간질이던 흙 같은 것들이 터져 나온 화산마냥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찬란한 시간들. 죄짓고 웃고 함께했던 생활들이 여과 없이 시빌의 마음을 두들기고 유린했다.

시빌은 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

20년이 지나서야 떠오른 3년간의 기억에 그는 모든 것이 함몰하는 것을 느꼈다. 룬강을 떠나온 뒤 처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젖은 얼굴을 손안에 가둔 채 그를 간호하던 까마귀의 어두운 손끝을 떠올렸다.

그때, 어둠 너머에 어둠이 있었다.

죽어서 끝없는 암흑으로 떨어졌던 시빌을 끌어 올린 상냥한 어둠이었다.

외로워하던 어둠이었다.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준 어둠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슬퍼해 준 어둠이었다.

시빌은 낮은 흐느낌을 쏟아내었다. 기억을 잃고 헤매던 자신뿐만 아니라 기억을 되찾고 로겐으로 향한 자신 모두 찢어버리고 싶었다.

시빌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태양 아래 펼쳐진 백색의 도시가 그 성벽을 넓혀 황홀하게 피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왕국을 둘러본 뒤 다시 동쪽을 바라보았다. 장대한 산맥은 보이지 않고 차가운 허공만 하늘에 가득했다.

시빌은 의아해하는 시종들을 지나 방을 나섰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 숙이는 관리들과 기사들을 뒤로하며 시빌은 계속 걸었다. 왕궁을 빠져나가는 데엔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하늘엔 별이 가득했고 달은 거의 저물어 아침의 동이 트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밤과 낮의 경계에서 시빌은 마지막으로 로겐을 돌아보았다.

왕국은 이제 그가 없어도 되었다.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고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시빌의 빈자리는 채워질 터였다. 다스리는 이가 생길 것이고 그자는 인간일 것이다. 다시는 레비쥬가 권좌에 오르지 못하리란 걸 시빌은 알았다. 그리고 까마귀와 함께할 이가 자신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이 사기꾼 까마귀. 뭐가 만수무강이냐. 20년 지났다고 죽어있기만 해봐.”

시빌은 다시 동쪽을 향해 움직였다. 새벽의 태양에 타오르는 새하얀 들판 너머로, 장대한 산의 그림자가 보일 때까지 계속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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