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8)

대관식 (2)

시빌은 아멜리타의 목을 흔들며 성안을 걸어갔다. 밖에서 들려오던 폭음과 고함은 까마귀들이 날아오를 때 모두 다 없어져 지금은 조용하게 식어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열기도, 분노도, 다 끝난 뒤 돌아보자면 허망함을 한 자락 달고 오는 법이었다. 영지민들은 레비쥬들을 죽이고 그 추종자들을 쫓아낸 방금의 일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성문 앞에 뭉쳐 있던 사람들은 누군가 이끌어주길 바라며 망연히 서 있었다. 그들은 어쨌거나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성문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대포는 아직 군중 쪽을 겨누고 있었고 마법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졌다. 레비쥬는 적이기에 죽였지만 마법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 열두 개의 무기를 준비한 게 마법사의 명령이라면 그는 세 명의 레비쥬 중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성문이 열리고 나타난 남자의 모습을 처음에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북부 전체의 자랑거리였던 황금빛의 머리칼이 아니라 칙칙한 갈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 들린 마법사의 머리는 모두가 알아보았다. 그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지닌 자는 로겐에 단 한 명이었고 은화마다 그 얼굴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목이 잘린 마법사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의 남자.

“시발 영주님이다!”

환희에 차서 외친 사람은 그 즉시 영지민 전체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이 상황에 시발이 뭐냐 시발이? 영지민은 즉시 큰 소란과 환호를 터뜨려 앞서 터져 나온 쌍욕을 지웠다. 시빌은 기대하지도 않은 열렬한 환호에 천금 같은 인내를 쥐어짜 미소 지었다.

“내가 이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는 몰랐군.”

“믿을 수 없는 사태다. 이곳 사람들은 눈이 허리에 달렸답니까? 이딴 밴댕이 소갈머리에 금발도 아닌 걸 좋다고 환호하다니!”

“……머리카락 안 줬다고 이러기냐.”

“전 그렇게 쪼잔한 사람이 아닙니다!”

시빌은 이를 바득 갈며 레이븐을 향해 웃었다. 아멜리타의 목이 바닥을 구를 때까지도 황홀한 시선으로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레이븐은 시빌이 끝내 아멜리타의 머리채를 잘라 주지 않자 완전히 삐져버렸다.

“이 날짐승 새끼가.”

“날짐승이 뭐라구요?”

레이븐은 야비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휙 가리켰다.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백색의 도시 로겐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빌은 주변을 온통 채우며 앉아 있는 까마귀들의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지만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저것들 언제 없어지나?”

“배고파지면 갈 겁니다.”

시빌은 주변에 있을 과수원들이 살짝 걱정되었지만 고개만 끄덕였다. 날아오는 모양새가 메뚜기떼마냥 흉악하더니 하는 짓도 흉악할 모양새였다.

“어쩔 수 없지. 도움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작게 한숨 쉰 뒤 시빌은 군중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들은 돌아온 영주의 모습에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 자신도 시빌을 향해 기쁨의 환성을 올릴 줄은 몰랐다는 투였다. 사람들은 물론 레비쥬답지 않은 그들의 영주를 사랑했지만 그것을 이토록이나 크게 실감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시빌 님!”

“영주님. 영주님이다!”

시빌은 손을 들어 화답했다. 환성은 더욱 커졌고 멈출 줄을 몰랐다. 적당히 인사하고 들어가려던 시빌은 생각보다 더욱 열렬한 반응에 조금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감동했다. 사람들이 간신히 진정하자 시빌은 아멜리타의 목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배신이 있었다!”

시빌의 한 마디에 광장은 완벽하게 조용해졌다. 성채 가득한 까마귀조차 미동하지 않는 가운데 시빌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아멜리타 발루아를 이런 식으로 처단하게 되어 나 또한 가슴 아프다. 하지만 그는 변절자였고 로겐을 지배하고자 나의 죽음을 획책했다! 보라! 그의 야심에 도시가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를!”

시빌은 평소에도 말빨이 아주 좋았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사람들을 휘두르자 그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순식간에 아멜리타는 천하에 상종 못 할 악역으로 전락했고 시빌 그 자신은 도시를 구원한 영웅이 되었다.

레이븐은 조금 질린 기색으로 시빌의 연설을 들었다. 그리고 눈으로는 아멜리타의 머리칼을 찬찬히 감상했다. 장터에서 스치듯 한 번 보았을 때도 정말 예쁘고 반짝거리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밤에 보았을 때도 그러했는데 대낮의 햇빛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 절로 손끝이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효수할 것 같으니 기회를 봐서…….’

까마귀들을 시켜 빼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븐은 조심스레 성안으로 물러났다. 성안에선 병력을 장악한 엘린도와 왼쪽 상처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둑 길드장이 가져다준 서류들에서 추려낸 배신자들의 투옥이 신속히 이뤄지고 있었다.

“우리 마법사님. 왜 옆에 있지 않고 이런 데 있어?”

레이븐은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아네모네에게 미소 지었다.

“제가 그의 곁에 계속 있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나올 겁니다. 시빌이 소개라도 했다간 분위기가 식겠지요.”

아네모네는 이해가 간다는 듯 끄덕였다.

“예쁘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멜리타는 정말 예뻤지. 그런 사람의 후임이 카디넬이라고 하면 확실히 좋지 않은 반응일 거야.”

“어차피 저는 떠날 사람이니까요. 당신들과는 달리 전 협박당해서 끌려온 겁니다. 모든 일이 끝났으니, 이 사태가 정리되면 바로 돌아갈 겁니다.”

“돌아가다니?”

“파르티잔으로요. 숲을 너무 오래 방치했어요. 아직 큰 문제는 없다고 까마귀들에게 전해 들었지만 걱정되네요.”

아네모네는 매우 이상한 얘기라도 들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조금 주저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하지만 넌 시빌을 좋아하잖아? 시빌도 널 좋아하고 있고.”

“그래도 전 숲지기고 숲을 버릴 순 없습니다.”

레이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밖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 연설을 끝마친 시빌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레이븐은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맞았다.

“순식간에 성을 장악했군요.”

“어리석은 이에게서 자기 물건을 되찾는 건 힘든 일이 아니니까. 다른 이들은?”

아네모네가 자세를 바르게 하며 대답했다.

“잔당들을 잡으러 움직이는 중입니다.”

“좋아. 잘 움직이고 있군.”

시빌은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축이었던 아멜리타가 사라진 이상 그에게 반대하던 세력들은 힘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그라면 그들 모두 그냥 놔둔 뒤 가시방석 위에 앉혀 부려먹었겠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시빌은 조심스레 까마귀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그에겐 약점이 있었다. 까마귀 수천 마리를 부리는 재주 좋은 숲지기라 해도 인간들의 암투는 그 음험함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잔당들을 살려두면 그들은 분명 레이븐의 정체를 파고들 것이다. 당장 시빌이 떠올릴 수 있는 중상모략만 해도 다섯 가지는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그럴싸한 것은 ‘영주의 눈을 홀려 아멜리타를 죽이라고 사주한 카디넬 남창.’ 이었다.

“집안 정리를 잘해야 허튼소리가 안 나오는 법이지.”

생각만 해도 혈압이 솟구쳤다. 시빌은 끌려가는 잔당들이 벌써 그런 소리를 하기라도 한 양 매섭게 노려보았다.

“시빌 님? 좀 무서운 표정이십니다?”

“잠시 딴생각 좀 하느라.”

시빌은 달래듯 레이븐의 머리칼을 살짝 움켜잡은 뒤 입술에 키스했다. 급박한 하루였다.

“한 달 뒤 대관식을 치를 거다.”

“대관식….”

시빌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하지만 유물을 찾았다는 건 거짓말이잖습니까?”

“사람들이 알 게 뭐야.”

“하, 하지만.”

레이븐은 시빌의 뻔뻔함에 새삼 놀랐다. 왕이라는 것은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대륙을 통일하거나 유물을 찾아내거나, 그 둘 중 하나의 업적을 이뤄야만 가질 수 있는 최후의 트로피인 것이다.

자신이 왕이라고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건 쉬웠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보았자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힘 있는 자들이라면 알고 있었다. 유물을 찾았다고 해보았자 증거를 대라며, 혹은 그 유물을 빼앗기 위해 주변의 공격을 받을 뿐이라 왕을 사칭하는 건 썩 좋은 일이 못 됐다.

“난 뱀파스를 세상에 노출시켰어. 딱히 레비쥬나 마법사가 없어도 그 무기가 있다면 인간들도 자신의 땅을 지키거나 넓힐 수 있지. 비밀이 한 번이라도 빛 속에 노출되면 그건 비밀이 아니라 소문이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요? 그 무기는 당신 것이지 않습니까.”

“나는 정당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단지 무력으로 이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이 땅을 지배하는 거라고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돼.”

레이븐은 레비쥬들의 지배욕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시빌은 좀 이상한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레비쥬였다. 자신이 쥔 땅이나 권력을 내놓으려 할 리 없었고 욕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왕을 사칭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손에 닿지 않을 고귀한 무엇까지도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시빌의 모습이 그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군요. 그럼 전 언제쯤 떠날 수 있겠습니까?”

“뭐?”

“원하던 복수도 하셨고 영지도 되찾으셨으니 전 이만 돌아가도 되지 않나요? 아. 아무래도 대관식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까요? 한 달 정도는 더 있어도 괜찮습니다.”

시빌의 안색을 살피려던 레이븐은 깜짝 놀랐다. 시빌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차게 굳어 있었다.

“어. 저기…. 왜 그런 표정을.”

“아무것도 아니야.”

시빌은 작게 혀를 차고는 곧 가식적으로 웃으며 레이븐을 품에 안았다. 레이븐은 시빌의 인위적인 미소며 부드러운 태도에 소름이 쫙 돋아 올랐다.

“참. 피곤하지 않아? 쉴 곳을 준비하도록 하지.”

“아, 아직 날이 훤한데.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요? 일도 많이 남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아. 괜찮다니까? 내가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과민반응이야.”

시빌은 생크림마냥 부드럽게 웃으며 레이븐의 등을 밀었다. 그 갑작스러운 연애 행태에 열심히 잔당들을 잡아들이고 증거를 끌어모으던 이들의 눈초리가 어두워졌다.

“괜찮다니까? 삼 년이나 쉬었으니 부하들도 일 좀 해야지.”

그리고 시빌은 목소리를 키워 모두가 듣도록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엉망으로 처리해놓은 일들을 내가 보기 전에 수습할 기회 정돈 줘야 하지 않겠어?”

그러자 고깝던 사람들의 시선이 격렬한 동의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시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까마귀를 나포했고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일터로 달려갔다.

* * *

로겐은 급속도로 정비되었다.

무능하다고 평한 시빌의 말처럼 아멜리타는 거의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았다. 자신을 따른 이들에게 요직을 주긴 했으나 법이나 제도 등 영지 전체에 영향이 갈만한 일은 조금도 바꾸지 않았고 사람 역시 바꾸지 않았다.

3년간 영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아멜리타는 북부를 좋게 바꾸지 않는 대신 나쁘게 바꾸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멜리타는 천성적으로 오만한 마법사였고, 인간들의 일에 무관심했던 탓에 행정적인 일들은 거의 관리들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영주 위의 자리를 손에 넣은 날 저녁. 시빌은 그 관리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새로 서약받았다.

어차피 이처럼 큰 영지는 인간 영주가 다스릴 수 없었다. 마법사가 시빌의 실종을 공표하자마자 몰려든 레비쥬의 수는 무려 열두 명. 한 도시에서 벌이는 그 살인귀들의 난장판을 몸으로 겪은 인간들은 시빌의 귀환을 기뻐해 마지않았다.

성격도 나쁘고 무슨 생각을 하는 알 수 없는 영주였지만 어쨌거나 시빌은 북부가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200년이나 버틸 수 있게 한 레비쥬였다. 그것은 레비쥬로서는 전설적이라 할 만한 인내였지만 인간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빌의 말처럼,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북부를 지배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활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지속되었기에 인간들은 자신의 터전이 다른 이들의 손에 부서질 수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이제 알게 되었고 영주 또한 돌아왔다.

모든 인간이 충성을 맹세했고, 시빌은 그 자리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공표했다.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뜻은 아니나 자신은 유물을 얻었고, 자신의 지위에 승복하지 못하는 그 누구의 도전이라도 받아들이겠노라 뜻을 밝혔다.

유물을 얻었다는 시빌의 말에 가신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열두 문의 대포였다. 세 명의 레비쥬를 순식간에 끝장낼 정도로 강대한 무기였다. 유물이란 그 무기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했다.

시빌은 유물의 정체를 함구했다. 서 엘린도를 함구시킨 뒤 다른 이들이 멋대로 상상하게끔 방치했다. 인간들은 제멋대로 떠들었고 덕분에 그날 달이 뜰 때쯤, 야금 공장에서 제작된 대포는 번개를 내뿜는 신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 * *

“어째서 레이븐 님을 공표하지 않으신 겁니까?”

새로운 서약식이 끝나자마자 들이닥친 엘린도의 질문에 시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 주점에서부터 그대가 순진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이나 꼴통일 줄이야.”

“…그 빈정거림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긴 합니다만.”

“변태이기까지? 이 왕국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스럽군.”

“영주님. 제 말에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빌은 한숨 쉬며 왼쪽 상처를 향해 턱짓했다. 서약식에서 자작의 작위를 받은 왼쪽 상처는 제법 그럴싸한 귀족의 옷을 차려입은 채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유물 따윈 없다는 거요. 레이븐은 그냥 숲지기야. 파르티잔에 있는 걸 강제로 끌고 온 거지.”

엘린도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냐는 듯 자신을 향한 얼굴에 대고 시빌은 어깨만 으쓱 치켜올렸다.

“저에게 공갈을 치신 겁니까?!”

“공갈이라니 듣기 나쁘군. 어쨌거나 모두 잘 풀리지 않았나?”

엘린도는 어이가 없어 시빌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장신의 남자가 완전히 열 받아 씩씩거리자 제법 험악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시빌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가 정말로 유물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밝히는 건 어리석은 일 아닌가? 누군가 레이븐을 유혹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해치려 들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약점을 노출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지.”

“아니요. 일부러 그자를 노출한 뒤 꼬이는 벌레들을 잡는 게 당신의 방식이지요. 변하셨습니다. 영주님.”

시빌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 방 맞았군.”

긍정하는 시빌을 엘린도가 귀신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았다.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실종된 3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빌을 변하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임엔 분명했다.

“이쯤 되면 무섭군요.”

대체 무엇이 레비쥬를 변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엘린도는 아연해졌다. 그가 종자였을 때부터 기사단장에 오를 때까지 시빌은 한결같은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도 한 번 정해진 성격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데 수백 년을 사는 레비쥬가 이제 와서 그 성격을 바꾸었다고?

“내가 더 헛소리하기 전에 나가보도록.”

“내일 뵙겠습니다.”

엘린도는 정중하게 인사한 뒤 시빌의 집무실에서 사라졌다. 기사단장의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시빌은 피곤해진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의 기억 속에는 최근의 삼 년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엘린도는 그가 변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시빌은 정말이지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그가 레이븐과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기억해낼 수 있다면 그의 마음 또한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왼쪽 상처.”

“네.”

“어떻게 해야 레이븐을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왼쪽 상처는 곤란한 듯 뺨의 상처를 긁었다. 그는 깡패 짓을 하고 다녔고 제대로 된 연애 같은 건 해보지도 못했다. 그가 다뤄본 여자라고 해봤자 납치당한 계집애들이나 창녀, 도둑 같은 것들뿐인 것이다.

“가둬놓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쇠사슬로 묶거나 괴롭혀서 길들이면, 나중엔 아프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되거든요.”

“너한테 물어본 내가 병신이다.”

시빌은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그 녀석을 고문하고 납치한 뒤 강간한 파렴치한이었다. 자신은 기억나지 않는 삼 년 동안의 인연 때문에 어찌저찌 화간처럼 되긴 했지만 처음에 레이븐은 자신에게 안기는 걸 무척이나 거부했었다.

시빌의 주변으로 음울한 기색이 퍼져 나가자 왼쪽 상처가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녀석 반짝이는 물건들을 굉장히 좋아하잖습니까.”

그 제안은 굉장히 그럴싸했기 때문에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법 괜찮군. 도움이 됐다.”

시빌은 재빨리 선물 목록을 구상했다. 따지고 보면 뇌물이며 먹을 걸로 레이븐을 홀리는 건 시빌의 특기가 아니던가. 시빌은 음습하게 미소 지었다. 여행 중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시빌은 레이븐을 잘 꼬셔냈었다. 하물며 이곳은 자신의 영역. 파르티잔에서 깍깍거리며 살던 산지기 한 명쯤 감탄시킬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해도 좋았다. 시빌 그 자신이 영주관에 보물 쌓아두길 즐기는 데다 오래된 통치 덕에 쌓인 세공품만도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여기에 둥지 틀게 만들어야지.”

“선물들을 들고 튈 경우도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만.”

“들고 튄다는 건 들 수 있을 때 하는 말이지. 내가 그렇게 녹록해 보이나?”

왼쪽 상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단 하루 만에 자신의 것을 되찾은 남자였다. 만일 레이븐이 도망친다 하더라도 다시 잡혀 오는 데는 몇 시간 걸리지도 않을 터였다.

* * *

레이븐은 호화찬란한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문제가 있었다. 레이븐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샹들리에의 반짝임에 혼이 팔려 한 시간을 더 누워 뒹굴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방이었다. 천장부터 창문의 유리까지 온통 색색깔로 반짝거려서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정신을 놓고 멍해졌다.

레이븐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허리에선 아무런 통증도 올라오지 않았다. 언제나 좀 거친 편이었던 시빌이 전날 밤엔 어찌나 부드럽던지 마지막엔 레이븐이 애가 타서 매달릴 정도였다. 그래. 준비를 잘하고 관계하면 이렇게 아프지 않단 말이지. 그런 걸 지금까지 제멋대로 휘둘렀겠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침대 위에 앉아 있자니 모양 좋고 단단한 손가락이 레이븐의 머리채를 살짝 잡아당겼다.

“윽!”

“좀 더 자지 않고?”

“더 잘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몇 시입니까?”

“오후 2시.”

“컥.”

시빌은 당황하는 까마귀의 허리를 감아 침대 위로 다시 눕혔다. 아무리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해도 체력은 계속해서 소모되었다. 레이븐은 좀 고된 느낌을 받으며 시빌을 밀어냈다.

“그만하십시오. 힘듭니다.”

레이븐이 정색하며 밀어내자 시빌은 순순히 떨어지면서도 무척이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런 점이 바로 이상했다. 시빌이라는 작자는 자기가 하고 싶을 땐 레이븐이 아무리 싫어하는 짓이라도 능글맞게 저질렀다. 호숫가라던가 마차라던가 테이블 위같이 장소도 가리지 않고 레이븐을 덮쳐오던 작자가 요새는 싫은 티만 내도 순순히 포기하며 떨어져 나갔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왠지 불편해져 레이븐은 시빌을 힐끔거렸다. 오후 두시라면 시빌은 벌써 오전 일정을 끝마치고도 점심까지 해치웠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레이븐이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차려진 2인분의 식사를 시빌은 태연하게 같이 들었다.

“오늘은 구경시켜주고 싶은 곳이 있어.”

식사가 끝나갈 무렵 시빌이 말했다. 레이븐은 그 말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키 힘들었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이삼일이 멀다 하고 시빌이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이다.

대개 시빌과 함께 가는 곳은 반짝거리거나, 번뜩거리거나, 휘황찬란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들어간 레이븐은 한동안 폐인처럼 입을 벌리곤 바닥으로 침을 쏟아내야 했다. 그중에서도 거울로 만들어진 방은 어찌나 맘에 들던지 파르티잔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작은 산장 안에도 비슷한 걸 하나 만들고 싶었다.

“오, 오늘은 또 뭔데요?”

“별건 아니고 예전에 에메랄드 원석을 하나 사뒀었는데 어제 세공이 끝났다더군. 오늘 가지고 온다는데 함께 봤으면 해서.”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고 싶습니다!”

“그럼 다 먹고 준비하자고.”

시빌은 상큼하게 웃으며 레이븐의 뺨에 붙은 야채 줄기를 떼어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시녀들이 다가와 고운 옷들을 레이븐에게 입혀주었다. 결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얇은 실로 짜인 천들이 은은한 광택으로 빛나고 있었다.

작은 단추 하나만 해도 작은 보석이거나 상아, 진주 따위로 만들어져 있었다. 옷을 걸치면서 레이븐은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평생을 숲지기로 살아온 레이븐은 이런 천이나 보석들을 이름으로만 들어왔지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보석으로 온몸을 둘러주겠다고 했잖아?”

시빌은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오팔이 박힌 목걸이를 레이븐의 목에 걸어주었다. 오팔 또한 커다랗고 아름다웠다. 시빌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숲 속이라고는 해도 조개껍데기라든가 소라는 제법 접할 기회가 있었다. 조개 중엔 약재로 쓰이는 것도 있고 민물의 우렁이들이 벗어놓은 껍데기들 중에도 제법 아름다운 것들이 있어 종종 모았던 것이다. 이 오팔을 보고 있자면 그 조개들이 생각났다.

‘이건 도망칠 때 가지고 가야지.’

레이븐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선물 받은 물건이니 가져가도 절도가 아닌 것이다. 레이븐은 헤실거리며 풀어지려는 얼굴을 재빨리 다잡았다.

시빌이 불러들인 세공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내려놓았다. 흑단에 자개로 장식을 하고 안에는 벨벳을 댄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는 놀랄 정도로 커다란 에메랄드가 들어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물건이 깨지지 않고 여기까지 세공되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레이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보석만 바라보았다. 시빌은 그런 레이븐의 반응에 지극히 만족했다.

“마음에 드는군. 그 에메랄드를 왕관의 중앙에 쓰기로 하지.”

세공사는 황송한 듯 허리 숙였다.

“왕관이요?”

“대관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 준비해야지. 영주관을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지만 보석을 좀 더 넣어 바꿔보기로 했어. 왜?”

“아뇨. 아무것도. 금발에 저런 보석을 박은 왕관이라니 눈에 독이겠구나 싶어서.”

레이븐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때까진 염색이 빠지겠죠? 그렇죠?”

“대관식 때까지는 힘들겠지만 어차피 같이 사는데 급할 건 없잖아. 안 그래?”

레이븐은 곤란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모든 게 네 거야. 행복하게 해줄게.”

레이븐은 주저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도 들었다. 이곳엔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 잔뜩 있었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착한 시빌도 있었다. 숲 같은 건 모른 척하고 좋아하는 이와 사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잖은가.

“봄에 까마귀가 알을 낳았어요. 지금쯤 새끼들이 태어나서 날아다니는 연습을 하고 있을 텐데.”

사실 알은 매년 낳았고 자신이 보러 가면 까마귀는 귀찮아하며 경계하기 일쑤였지만 그런 말은 쏙 뺐다. 그 외에도 그가 있든 없든 잘 자라는 새싹들이라든지 벌레들의 세력다툼에 대한 썰을 풀어 놓으려던 레이븐은 이상할 정도로 굳어버린 시빌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시빌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돌처럼 굳어서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커다랗게 뜨인 두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숨도 쉴 수 없다는 듯 긴장돼서는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경직된 시빌의 모습에 레이븐은 그가 무언가를 떠올렸나 싶어 같이 긴장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면 시빌과 그 까마귀는 자신이 질투할 정도로 거의 붙어 다니지 않았던가.

“왜 그러시나요? 뭐, 뭔가 기억나는 거라도?”

시빌은 매우 주저하며 말을 고르더니 겨우 입술을 뗐다.

“네 새끼는 아니지?”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지체 없이 돌아가야겠다고 레이븐은 결심했다.

* * *

“시빌이라고 부르지 마. 시발이라고 불러.”

아네모네는 도둑 길드 마스터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시발 놈이었다. 7미터가 넘어가도록 틈새 하나 없는 매끈한 벽을 타오르며 아네모네는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지만 대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대낮에 당당히 들어가서 해도 되는 일이잖아! “

“목소리 낮춰. 그놈은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엿 먹이는 게 취미라서 그래.”

“취미라는 건 방 안에 처박혀서 혼자 하는 게 취미지. 도둑들 시켜다가 담장 타게 하는 게 무슨 취미야?”

“쉿! …갔다. 계속해.”

아네모네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매끈한 벽에 흡착판을 박아 넣었다. 지금 그녀가 타오르고 있는 것은 연금술사 길드의 외벽이었다. 대포라고 불리는 그 파괴적인 무기를 선보였던 시빌은 영주 위를 되찾자마자 북부의 뱀파스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판매하지 않는 것은 몰수까지 해가면서 창고를 채운 시빌은 연금술사들에 대한 감시로 눈을 돌렸다. 자신들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그들은 시빌에 대한 암살까지 획책했다.

연금 길드는 분열되어 있었다. 새로운 무기의 탄생에 달가워하지 않는 자들부터 일거리가 늘어난 것에 반가워하는 자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엔 시빌의 암살을 계획한 자들도 있어 많은 이들의 기대와 호평을 받았다.

“그냥 콱 죽여버리게 놔두면 안 되나?”

“그것도 괜찮긴 한데 받아야 할 돈이 좀 있어서 죽으면 곤란해.”

도둑 길드장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웬만한 벽은 20초 정도면 다 타고 넘었다. 하지만 연금 길드의 벽은 웬만한 벽이 아니었고 온갖 도료와 장치가 되어 있었다. 벌써 한 시간 째 그는 아네모네와 분투 중이었다.

남부 출신인 아네모네와 북부 길드의 장인 엘렉페가 만나자 전 대륙의 욕이 튀어나와 장대한 사전을 만들었다. 욕의 끝은 언제나 시발로 끝났다. 그것이 온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좆뺑이 같은 호모새끼가 서류를 다 걸레로 만들어놓곤 나보고 처리하라는 거야. 말이 돼? 씨발.”

“불쌍한 레이븐. 어쩌다 그런 놈에게 잡혀서. 하긴 잡힌 나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지. 시발. 여기 왜 이리 추워 씨팔.”

“얼마 안 남았다. 마지막 저건 그냥 뛰어넘을까?”

“그러자. 하나, 둘!”

한 시간에 걸친 등산 끝에 아네모네와 엘렉페는 연금 길드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다행히 짐승 같은 것은 키우지 않는지 조용한 정원만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엘렉페는 아네모네와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소리도 없이 왼쪽의 건물로 향한 엘렉페가 단검을 빼 들었고 아네모네는 연장을 꺼내 잠긴 문을 열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길드장의 침실까지 들어간 두 명의 도둑들은 방과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네모네는 글을 몰랐기에 잠든 연금 길드장의 옆에 앉아 망을 보았다. 원하던 물건을 찾는 데엔 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들어오는 데엔 1시간이 걸렸지만 나가는 데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살던 먹고사는 일은 고되다는 데 동의하며 쓸쓸히 어두운 밤에 녹아들었다.

왼쪽 상처는 천천히 살가죽을 발라냈다. 산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에 죄수가 비명을 내질렀다. 왼쪽 상처는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피부를 벗겨낸 살점에 소금을 쳤다. 커다란 지하 고문실이 징징 울렸다. 왼쪽 상처는 한숨을 내쉬며 귀를 막았다. 죄수의 성량이 너무 좋으면 귀가 아파서 힘들었다.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 좋았다.

“뭘 원하는 거야! 아는 건 다 말하겠어! 제발 그만! 그마안!”

“별로 알고 싶은 건 없는데.”

정말이었다. 무언가 특정한 정보를 알아내라는 명령은 어디서도 받지 않았다. 시빌은 그저 네 역할을 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지껄여 봐. 관심 갈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왼쪽 상처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줄줄이 듣게 되었다. 어떻게든 고통을 멈추고 싶었던 죄수가 입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왼쪽 상처는 팔짱을 낀 채 죄수의 발악을 흘려들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왼쪽 상처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죄수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왼쪽 상처는 간수를 시켜 인두를 달구게 했다.

“자네는 살아서 이 방을 나갈 거야. 사실 내가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공포거든.”

왼쪽 상처는 고기 타는 냄새에 콧등을 찌푸렸다.

인간을 죽이거나 고문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계속 패거나 지켜보는 건 상당한 노동이었다. 의자라도 하나 편한 것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죄수의 나머지 껍질을 벗겼다.

“네가 괴물 같은 몰골로 이 방을 살아 나가는 게 내 목적이거든. 내가 앞으로 할 일엔 쓰레기 같은 것들의 존경심이 필요한데 이 동네는 처음이라 아무도 날 모른단 말야.”

왼쪽 상처는 죄수의 얼굴을 피 묻은 손으로 툭툭 쳤다.

“울지 마. 그러게 왜 배신을 했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흐으……. 제발. 제발…. 자비를 베푸십시오. 제발.”

“넌 레비쥬를 배신한 거라고. 대체 무슨 자비를 찾아?”

왼쪽 상처는 죄수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물렸다.

레이븐은 할 일이 없어 방 안을 뒹굴었다. 심심했다. 북부에 올 때까지 함께한 왼쪽 상처도 아네모네도 많이 바쁜 것인지 요샌 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관식은 보고 가겠다고 시빌에게 약속했지만 아무 일도 없이 지내는 건 무료했다. 레이븐은 창문가에 앉아 까악거리는 까마귀에게 굴러갔다. 아멜리타가 불러낸 시체를 처치하기 위해 날라왔던 까마귀들은 이제 많이 떠나 몇 남지 않았다.

“무위도식이 이렇게 좋은 일이었다니.”

“까아악?”

“놀고먹으니 너무 좋다. 이 맛에 새들이 인간에게 사육되는 거구나.”

“깍!”

“알았어. 잊고 있지 않아.”

레이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겐의 성안에 깊은 어둠이 하나 똬리를 틀고 있었다. 여행 중 만났던 시체의 병사들과 죽은 지 오래된 레비쥬들을 되살린 그 어둠은 무엇을 노리는지 계속 시빌의 주변을 돌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에게 날아와 부리를 부벼대는 까마귀를 슬슬 쓰다듬었다. 천 마리가 넘는 까마귀들이 어둠을 찾아내기 위해 도시를 모두 뒤졌지만 결국엔 실패하고 돌아갔다. 초조함이 일었다.

그자가 시빌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 불안했다. 가능하다면 그가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잡아내고 싶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그가 알고 있을까?”

까마귀는 퍼드득 날개를 쳤다. 영리한 눈동자가 잠시 데굴거리더니 모르겠다는 듯 기울어졌다. 레이븐은 우울한 눈으로 자신의 붕대 감긴 손을 쳐다보았다.

손의 상처는 이제 다 나아있었다. 아직은 말을 잘 듣지 않아 물건을 떨어뜨릴 때도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깨끗하고 정상으로 보였다.

“에르- 쿰. 바하르다-야. 보스- 놀디라.”

레이븐은 주문을 외우며 허공을 휘저었다. 곧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로겐의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죽음을 부르는 주문이었다. 죽음의 눈길을 피해 도망친 자들을 찾아내어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안겨주는 힘들이 레이븐의 손짓을 따라 무덤마다 파고들었다.

“되살려진 시체는 없어.”

까마귀는 이상하다고 대답했다. 레이븐도 동의하며 새파란 하늘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자는 어둠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어둠이었다. 밝고 아름다운 자들을 질투하고 그 빛을 빼앗고자 하는 족속들 중에 그보다 더 저질인 것도 없었다.

레이븐은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일들을 처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파르티잔에서 살아가던 그가 이곳까지 오게 된 건 밀린 일을 처리하라는 계시처럼 여겨졌다.

“일단은 그냥 지켜보기로 하자. 응. 그것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이곳에 있을 거야. 어쩔 수 없지.”

레이븐은 우울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피 흘리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하긴 그가 유독 네 앞에서 많이 다치긴 했지.’

“내가 아무리 죽음을 추종하는 까마귀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건 싫어.”

‘우리도 죽는 건 싫어. 우리도 살아 있거든.’

“까아악-!”

‘널 이해해.’

레이븐은 새의 부드러운 위로를 받아들였다.

* * *

대관식은 어느덧 2주밖에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성안의 모두가 바쁘고 떠들썩했다. 자신의 땅으로 돌아온 영주를 위해 많은 이들이 선물을 보냈다. 먼 곳에 있는 레비쥬나 마법사부터 시작해 인간 영주가문의 사절이나 손님들로 로겐은 완전히 북적거렸다.

대관식은 돈이 되었다. 성에서 구입한 많은 물건들 덕에 도시로 돈이 풀렸다. 대관식을 보기 위해 밀려든 각 영지의 손님들은 모두가 귀빈이었기에 여비를 아끼지 않고 뿌렸다. 열두 명의 레비쥬에 의해 보이지 않게 고사되어가던 도시는 생기있는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한 달의 짧은 일정임에도 소식이 닿은 땅의, 올 수 있는 여건의 인간들은 모두 로겐으로 몰려오는 듯했다. 방문객으로 도시는 소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레비쥬들에 의해 단련된 경비대는 업무가 감소했다고 느꼈다. 아무리 큰 사건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인간이 친 사고는 인간이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란의 와중에서 레이븐은 한 마리의 쥐새끼마냥 선물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좋은 옷을 입혀놓아도, 결국에는 걸치고 마는 녹색의 외투가 호화스러운 상자들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잔칫상의 음식마다 돌아다니는 파리처럼 레이븐은 이 상자 저 상자를 풀어헤치며 돌아다녔다. 대륙 곳곳에서 흘러온 물건들은 각각의 특색을 품고 있었고 레이븐은 그 모든 것이 신기해서 떠날 줄을 몰랐다.

처음엔 그런 레이븐의 관심을 기꺼워하던 시빌도 레이븐이 선물들만 구경하고 그를 거들떠보지 않자 뾰록 삐져버린 얼굴을 했다. 대관식 후엔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준비할 일이 워낙 많아 레이븐을 옆에 끼지 못하자 시빌은 매우 흉폭한 얼굴로 돌아다녔다.

연금술사 길드장이 연금된 건 그때였다. 매우 흉흉한 얼굴로 기사들을 이끌고 나간 시빌은 감히 그의 암살을 획책한 길드장의 다리를 똑 소리 나게 부러뜨렸다.

레비쥬가 영주인 영지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만 사람들은 시빌이 직접 폭력을 휘두르는 걸 처음 보았다. 전쟁에서의 잔학성과 간교함으로 이름 높은 시빌이었으나 그 전쟁이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게 백 년도 전인 탓이었다. 냉막한 얼굴로 늙은 길드장의 무릎 꿇은 다리를 부러뜨린 시빌은 찬 기운을 펄펄 날리며 그의 유폐를 명했다.

길드장을 유폐한 시빌은 연금 길드를 장악했다. 뱀파스를 가공하는 데에 동원된 연금술사들은 모두가 영지에 소속되어 좋은 대우를 보장받았다. 시빌은 대포를 수백 개 더 주조하도록 명했다. 그것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였다. 북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주가 벌이는 일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지켜보았다.

왕국이라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그러한 허세는 위에 속한 자들뿐만 아니라 땅을 가는 농부에게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 경작한 땅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있었다. 북부 사람들은 대개 시빌의 결정을 환영했다.

사람들 중에서는 시빌이 행방불명된 동안 미쳐버린 것이 아니냐며 우려하는 이도 있었다. 확실히 그는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그의 마법사가 그를 배신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다음 마법사는 대체 언제 맞아들이시려나? 다음 은화를 찍을 때까지는 결정해주셔야 아멜리타의 얼굴을 다시 쓰지 않을 텐데 말이야.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 * *

왕관을 쓴 시빌의 옆모습이 금화에 찍혀 나왔다. 앞면에는 시빌의 초상이, 뒷면에는 나룻배와 강이 주조된 왕국 첫 번째의 금화였다. 시빌은 꼼꼼한 눈길로 금화의 앞뒤를 살폈다. 순도는 예전보다 조금 높았다. 이전에 사용하던 화폐들은 수거되는 즉시 녹여 다시 주조할 예정이었다.

시빌은 만족스러울 때까지 금화를 살펴본 뒤 이번엔 은화를 집어 들었다. 은화엔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주조되어 있었다. 역시나 뒷면엔 나룻배와 강물이 똑같은 모양으로 박혀 있었다.

시빌은 금화를 볼 때와는 달리 완전히 풀어진 얼굴이 되어 은화 속의 까마귀를 쓰다듬었다. 레이븐의 얼굴은 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만지고 소유하는 건 자신 혼자만으로 족했다. 다른 이의 주머니에서 레이븐의 얼굴이 들어간 은화가 오가는 건 생각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다.

새로운 화폐를 보고자 모였던 신하들은 드물게 온화한 표정을 띤 시빌을 놀란 눈으로 힐끔거렸다. 생전 진실된 감정을 보이지 않던 시빌의 풀어진 얼굴에 신하들은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랐다.

“마음에 드는군.”

시빌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오자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요즘 계속 날카로운 기색을 숨기지 않던 시빌이었다. 그런 그가 잠시나마 부드러운 기색을 내뿜자 봄이라도 온 것마냥 사람들의 마음이 들떴다.

“그럼 난 자리를 비울 테니 나머지 일은 알아서 처리하도록.”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신하들은 뒤늦게야 시빌의 말뜻을 알아듣고 멍한 표정이 됐다. 시종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새 화폐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럼 이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는 그야말로 보지 않아도 뻔했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회의장에 버려진 신하들은 시빌이 나간 문짝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으시니 한결 낫군요.”

“그 카디넬이 새로운 마법사인 겁니까? 아니면 그냥 애인인 겁니까?”

“물어볼 정도로 간 큰 사람이 이 성에 있다면 얼굴 한번 보고 싶구려.”

갑작스러운 대관식 준비로 몇 주간 아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인간들은 불쌍하게 회의실의 탁자에 모여앉아 수군수군 뒷담화 했다.

돌아오자마자 이런 대형사건을 벌인 이유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꼴을 삼 년이나 못 봐서 심보가 도진 것이다. 그 카디넬이 예쁘긴 예쁜데 하는 짓이 왜 이리 궁색 맞으냐. 풀어헤친 선물 다시 포장하느라 힘들어 죽겠다. 시발…, 영주는 저렇게 한 번 사라졌다 돌아오면 표정이 좋아 보이더라. 나도 마누라 보고 싶다. 시발. 애들 얼굴 보고 싶다. 시발. 시발 나도.

“씨발. 때려치우던 해야지.”

“딴 동네는 다 전쟁 중이래. 우리 갈 데도 없어.”

“…좆 같네.”

“으응.”

“…….”

“일이나 합시다.”

신하들은 불행 속에 파묻혀 화폐의 교환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서 대륙 전체가 평화로워지기를 그들은 진심으로 바랐다. 이 과로로 가득한 현실이 정말 싫었다.

* * *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주 없이 마법사의 지배를 받던 로겐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시빌의 것이 되었다. 삼 년이란 시간은 마치 있지도 않았다는 듯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레이븐은 기묘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영주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시녀의 알림에 레이븐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녀의 말 한마디에서도 레이븐은 괴리감을 느꼈다. 이곳 북부의 사람들이 영주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시빌을 지칭했다.

그가 살았던 파르티잔에서는 영주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언제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말했다. 하나의 통치권 아래 두 개의 도시가 있기 힘들었고 레비쥬가 차지한 도시에선 언제나 유민들이 흘러나왔다. 북부는 일곱 개의 도시를 지니고 있었다. 황량한 들판과 높은 산이 있기는 해도 대지의 면적만으로 따지면 전 대륙의 5분지 1에 해당했다.

본디 왕이란 전 대륙을 통일해야 가질 수 있는 지위라지만 이처럼 다른 이와 차이 나는 영지의 주인을 그냥 영주라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왕국이라.’

레이븐은 천천히 그 단어를 곱씹었다. 지금은 영주님이지만 대관식을 치르고 나면 전하가 된다. 그 호칭을 갖고자 하는 시빌의 저의를 레이븐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븐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빌은 신이 죽은 것을 알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신의 죽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 레이븐은 알 수 없었다.

“무얼 생각하고 있었어?”

레이븐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시빌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어떻게 해야 신의 죽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군.”

시빌은 피식 웃으며 레이븐의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으익! 무슨 짓입니까!”

“눈살 찌푸려지는 생각은 그만하고 이것 좀 봐봐.”

“눈살 찌푸려진다니! 사람이 애써 고민하고 있는 걸…. 어. 이게 뭡니까?”

시빌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두 주먹을 내밀었다. 그는 보란 듯이 레이븐의 눈앞에서 오른손을 펴 보였다. 왕관을 쓴 시빌의 옆모습이 반짝거리며 드러났다.

“흐엑!”

“새로 주조한 금화다. 어떤가?”

“지금 자기 얼굴 자랑하러 오신 겁니까? 나르시스트군요.”

레이븐은 팩! 하고 외치고는 금화에 찰싹 달라붙었다. 시빌의 손바닥 양쪽을 부여잡은 채 금화와 시빌의 얼굴을 정신없이 번갈아 봤다.

“참 잘 만들어졌네요. 너무 똑같아서 저주 인형 대신 써도 될 것 같습니다요.”

“수요가 참으로 많아지겠군. 금화의 가치가 오른다는 건 기뻐할 일이지.”

시빌은 뻔뻔스레 대답한 뒤 이번에는 왼쪽 주먹을 레이븐 앞에 내밀었다.

“이건 또 뭔가요?”

시빌은 말없이 주먹을 폈다.

드러난 은빛의 문양에 레이븐은 말이 막힌 듯 은화만 바라보았다.

“이건…….”

“까마귀다.”

“어째서 이런 걸?”

“네 얼굴은 나만 보고 싶었으니까.”

시빌은 레이븐의 기쁜 반응을 기대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레이븐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까지 덜덜 떨었다.

“레이븐?”

시빌은 레이븐의 어깨를 잡아끌어 안으려 했다. 좋지 않은 안색을 보자마자 걱정이 치밀어 어떻게든 안심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븐은 다가온 시빌의 손을 격렬하게 뿌리쳤다.

“전 당신의 마법사가 아닙니다!”

생각도 못 한 말에 시빌은 당황했다. 레이븐은 왜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빌의 모습에 분통을 터뜨렸다.

“당신은 제가 인간이라는 생각은 하는 겁니까?! 전 늙습니다! 그리고 당신 옆에 서 있을 마법사를 보며 질투하겠죠. 왜 절 놓아주려 하지 않는 겁니까?!”

시빌은 레이븐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새로운 마법사라니?”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선 필요한 것 아닌가요? 마법사 없이 레비쥬만이 다스리는 땅은 곧 침략의 대상이 되니까, 당신도 아멜리타를 옆에 둔 것 아니었습니까?”

시빌은 차가워진 머리로 말했다.

“그랬지. 하지만 이젠 필요 없어.”

“필요 없다뇨?”

“레비쥬나 마법사. 신의 파편 같은 것들. 이젠 다 필요 없어. 난 인간의 왕국을 만들 것이다.”

“인간의 왕국?”

“레비쥬와 마법사 같은 한두 명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은 세계 말이다. 힘을 모으면 그 어떤 괴물도 인간들만으로 상대해 물리칠 수 있는 그런 세계.”

시빌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금화와 은화를 움켜쥐었다.

“그러니 마법사는 필요 없어. 아멜리타가 날 배신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왕위를 생각했다. 어느 정도의 땅을 차지한 뒤 그 땅을 평화롭게 지키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던 거야.”

시빌은 고개 숙여 레이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신들이 죽었다면 그들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지금껏 그 결심을 미뤄온 내가 병신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마법사는 필요 없어. 전쟁의 신과 마법의 신이 떨군 파편인지 뭔지 죄다 죽어버리라지.”

따뜻한 숨이 레이븐의 귓가를 울렸다.

“난 이 땅을 내 것으로 정복했어. 인간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뒤 첫 번째 살인을 했다.”

룬강의 부드러운 물결을 뒤로 한 채 걸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빌은 그 하나만을 위해 움직여왔다. 평화로운 마을이 짓밟히지 않게 하는 것. 그런 비참한 소문이 길가에서 들리지 않게 하는 것.

“책임을 져야 해.”

지배에 대한 책임은 무거워서 가끔은 피로하기도 했다. 그 또한 레비쥬여서 전쟁의 유혹을 견디긴 힘이 들었다. 발루아를 죽인 뒤 벌인 전쟁들이 가장 위험했다. 하마터면 빠져나가지 못할 뻔 한 쾌락 속에서 그를 구해낸 건 불타오르는 마을의 전경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건 고통이었다.

“나는 레비쥬야. 하지만 이제 마법사는 필요 없어. 그러니 내 곁에 있어 주지 않겠나.”

시빌은 레이븐 앞에 무릎 꿇었다. 그가 부러뜨렸던 손을 맞잡는 대신 그의 앞에 두 손을 벌려 보였다. 반짝이는 금화와 은화는 한 쌍처럼 보였다. 레이븐은 그제야 이것이 구혼의 표시임을 깨달았다.

은화에 까마귀를 새긴 것은 다른 이들의 눈을 레이븐으로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망신스러운 일이군요. 대륙 첫 번째 왕의 반려가 카디넬 숲지기라는 건.”

“레이븐!”

“게다가 부끄럽기까지 하고요. 이제 돈을 쓸 때마다 이 일이 생각날 테니. 나 원 남사스러워서.”

그렇게 쪼는 듯 말하는 레이븐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그는 시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금화와 은화를 감싸 쥐었다.

그 행동은 허락처럼 느껴졌다. 시빌은 한껏 기쁜 얼굴로 레이븐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잔인한 말이 떨어진 것은.

“저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당신이 땅을 책임지듯이 전 파르티잔의 숲을 책임져야 합니다.”

레이븐의 목소리는 쉬어서 갈라져 있었다.

순간 시빌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왼쪽 상처의 충고였다. 쇠사슬로 묶어 가둬두면 된다던 말이 괴물처럼 마음속에 달라붙었다.

“제발. 레이븐.”

“똑같이 묻죠. 저와 함께하기 위해 이 땅을 버리고 파르티잔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시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원하던 세계의 도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살인광들과 오만한 마법사들에게 이 땅을 넘길 순 없었다.

파르티잔으로 간다고?

“아니.”

짧은 대답과 함께 시빌은 굳은 몸짓으로 뒤돌아섰다. 이를 악물어 턱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목과 척추가 하나가 된 양 뻣뻣하게 삐걱거렸다. 그는 레이븐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상처 입은 자존심과 날뛰는 욕망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힘없는 숲지기 따위 네 맘대로 하라고 이를 세웠다. 시빌은 느릿하고 긴 호흡을 내뱉었다.

그는 벌써 한 번 레이븐을 고문하고 학대했다. 두 번 할 수는 없었다. 시빌은 그 누구의 증오도 두렵지 않았지만 레이븐의 증오만큼은 무서웠고 그 공포의 깊이만큼 그의 웃음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시빌은 처연히 자신의 처지를 인정했다.

실연당한 것이다.

* * *

레이븐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멀어지는 시빌의 발소리를 들었다. 바닥에는 시빌이 떨어뜨린 금화와 은화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구르고 있었다. 힘없이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레이븐은 금화가 그의 발에 걸려 멈추자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금화 속의 시빌은 위엄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똑같네.”

레이븐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다시는 저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렇게까지 거절당했으니 시빌도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겠지.

“기껏 주조했는데 또 바뀌겠네.”

레이븐은 피식 웃었다. 은화 속의 까마귀는 가구 밑으로 굴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저 은화처럼 퇴장해 다시는 빛 속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검게 녹스는 거야.’

레이븐은 바닥에 주저앉아 손안의 금화를 매만졌다. 은과는 달리 금은 녹슬지 않는다. 변함없이 약속된 빛을 발하고 모든 값어치의 기준이 됐다. 마치 자신과 시빌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 같아 레이븐은 속이 쓰렸다. 시빌은 지저분하던 자신을 닦아 반짝거리게 만든 것이다.

“사랑합니다.”

눈가가 확 뜨거워졌다. 자신은 영원히 시빌을 잊지 못하겠지만 시빌은 벌써 한 번 잊었고, 두 번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갈 시빌의 옆은 자주 바뀌게 되겠지. 레이븐은 이번에 숲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시빌의 옆에 선 이가 누구인지 듣는 것도 싫었고, 그 대상이 마법사일 수 있다는 것도 싫었다. 벌써부터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시빌이 자신을 버리고 진실한 사랑을 찾을 거라 생각하자 죽고 싶은 심정밖에 들지 않았다.

-툭! 투툭!!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땅만 파는 레이븐을 위로하기 위해 까마귀 한 마리가 창문을 부리로 쳤다. 레이븐은 비실비실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커다란 갈까마귀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레이븐의 어깨에 앉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까마귀는 레이븐의 눈물 어린 뺨을 부리로 슬슬 부벼 위로했다. 레이븐은 고개만 주억거리며 침대 위에 앉았다.

그때 새로운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갈까마귀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까마귀가 레이븐의 무릎에 앉아 꿱 울었다.

위로해주려는 건가 생각하며 까마귀의 윗부리를 쓰다듬어주려던 레이븐은 순간 안색이 확 변했다. 눈물이 그치고 정신이 바짝 났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작은 까마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러냐.”

작은 까마귀는 죽음을 부르는 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물 속에 숨어 지하수를 통해 돌아다니던 마법사가 어젯밤 모습을 드러냈다고 까마귀는 말했다.

발루아를 먹을 때 모습을 드러냈던 수천 마리의 까마귀들 때문에 그는 죽음을 피해 로겐을 떠났었다. 그러다가 어제 오후에 다시 돌아온 그는 그제야 시빌의 대관식에 대해 듣고 말 그대로 격분한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왕이 될 수 있다며 소리쳤다고 했다.

“그렇군. 마법의 신이로군.”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탐욕이 가장 강해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마법의 신이었다. 신들의 왕이 되고자 전쟁을 일으키고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왕이라는 직위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신들이 죽어 그 수가 적게 남았을 때도 그는 자신의 야욕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응. 그는 죽었어. 마법의 신은 전쟁의 신과 동귀어진을 했지.”

하지만 신들의 파편은 지상에 떨어져 마법사와 레비쥬를 만들어냈다. 신의 힘에 노출되어 오염된 인간들은 본래 신들이 품었던 성품이나 야망 또한 물려받아 괴물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마법의 신이 떨군 파편 중 가장 큰 것을 먹고 화신으로 변한 듯했다. 레이븐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큰 조각이란 신의 시체를 뜻했다.

“사람 형태의 고기를 먹는 게 새들만은 아닌 게지.”

까마귀들은 동의했다. 그리고 레이븐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마법사는 분명 시빌을 노리고 있었다. 대관식에서 공격할 예정이라면 공개적인 살인을 획책하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모두의 눈앞에서 시빌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를 생각이군. 시빌의 피를 발판 삼아서.”

레이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얌전히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퍼득거리며 항의했다. 레이븐은 미안하다고 손짓하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이 사실을 어서 시빌에게 알려야 했다. 대관식에서 북쪽 탑의 마법사가 당신을 죽이러 올 테니 꼭 자신을 동행해야 한다고.

순간 레이븐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방금 전에 시빌을 손에서 떠나보냈다. 그런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에게 달려가 자신을 믿으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레이븐은 그제야 자신이 시빌의 금화를 계속해서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돌려주러 왔다는 명목으로 다시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어떨까? 조악하지만 어떻게든 말문은 틀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그의 격렬한 분노에 부딪치거나.

레이븐은 방으로 돌아가 가구 밑으로 들어간 은화도 끄집어냈다. 나무 위에 앉은 까마귀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며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이븐은 물이라도 먹은 듯 무거운 발을 끌어 억지로 시빌의 거처로 갔다.

미움받더라도 시빌이 죽는 건 싫었다. 북쪽 탑의 마법사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시빌은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레이븐은 벽을 짚어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레비쥬가 잘 죽지 않는다는 건 헛소리였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시빌의 목이 떨어진 것을 보았다. 아멜리타 앞에서도 칼에 찔려 큰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그때의 아찔함을 생각하자 간신히 시빌의 방문을 두드릴 용기가 났다.

“들어와.”

목소리는 건조했다. 레이븐은 잔뜩 처진 어깨로 시빌의 방에 들어섰다. 시빌은 창가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레이븐은 저도 모르게 손안의 주화들을 만지작거렸다.

“금화랑 은화를 놓고 가셔서 가지고 왔습니다. 시작품인 것 같은데 없으면 안 되잖아요.”

“…….”

“에, 또. 그리고….”

“은화는 그대로 찍어낼 거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 이만 나가.”

“……저기.”

“나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명백한 거부에 레이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잔뜩 겁먹어 도망치려는 자신의 본능을 레이븐은 억지로 억지로 잡아 세웠다.

“죽, 죽은 자들을 살려낸 마법사 일로 할 얘기가 있어 왔습니다.”

“…….”

“그자가 당신의 대관식 때 공격하려 한다는 얘기를 까마귀들이 알려줬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대관식에 참가해서.”

“네 도움은 받지 않아.”

시빌은 레이븐의 말을 잘랐다. 그는 레이븐을 보지 않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지. 그대는, 되도록 빨리 이곳에서 떠나라.”

“참관하게 해주십시오.”

“네 숲으로 돌아가라고 했어!!”

레이븐은 혀를 씹을 뻔했다.

뒤돌아선 시빌은 그야말로 절절하게 분노해 있었다. 몸에서 연기라도 피어오르는 듯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레이븐은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 도망쳤다. 잡힌 것은 한순간이었다.

“윽!”

거의 반사적으로 도망치는 레이븐을 잡아챈 시빌은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 덜덜 떨며 시빌을 향했다.

“내 대관식에 왜 너 따위 숲지기가 필요하지? 까마귀를 좀 잘 다룰 뿐인 광대가 지금 날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건가!”

“시, 시빌.”

“난 간신히 참고 있었단 말이다.”

시빌은 고개 숙여 레이븐의 목을 물었다. 진득한 압박과 함께 치열이 그대로 남아 부어올랐다. 레이븐은 정말로 무서워져 시빌의 어깨를 잡고 밀었다. 그 필사적인 반항에 시빌은 쉰 소리로 웃었다.

“자극하지 마.”

“다, 당신이 화내는 것도 당연하지만 잠시 제 말을 좀. 크악!!”

시빌은 듣기 싫다는 듯 레이븐의 멱살을 잡아 벽에 두어 번 박았다. 강한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레이븐이 비틀거리자 시빌은 그 즉시 그의 바지를 벗겼다. 균형도 제대로 못 잡고 비틀거리는 다리를 잡아 벌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레이븐은 갑작스레 밀어닥친 충격에 숨을 컥 토해냈다.

“어윽. 으앗! 악!”

“빌어먹을. 대관식에 참가하고 싶어? 그럼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 큭. 반항하지 마.”

시빌은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제대로 서 있지도 않아 물컹하던 시빌의 성기는 레이븐의 내벽 안에서 점점 단단해졌다. 레이븐은 고통에 얕은 숨을 내뱉으며 시빌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시빌은 빠르게 첫 번째 사정을 했다. 레이븐은 몸속에 퍼지는 뜨끈한 기운에 다리를 움츠렸다. 고통과 시빌의 분노에 휩쓸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레이븐은 덜덜 떨며 시빌의 입맞춤을 받았다.

“난 보내주려고 했어.”

시빌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레이븐은 조심스레 시빌의 목을 껴안았다. 거친 섹스는 싫었고 격앙된 시빌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를 살리고 싶었다. 레이븐은 시빌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대관식에 참관시켜주겠다는 약속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시빌은 기대도 않은 말을 듣고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견딜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지.”

시빌은 킬킬거리며 정신 나간 듯 웃었다.

레이븐은 허리를 크게 휘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레이븐은 거의 기침에 가까움 숨을 내뱉으며 시트 위로 무너졌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시빌이 허리를 다시 추켜올렸다. 절정의 잔재가 사라지기도 전에 치고 들어오는 쾌락에 레이븐은 비명을 내질렀다.

시빌의 커다란 손이 레이븐의 배를 받쳐 들어 올렸다.

“크흐윽!”

“하! ……기분 좋아.”

레이븐은 멋대로 제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시빌의 흉기에 허벅지를 덜덜 떨었다. 과도하게 들이부어진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나와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소리를 냈다.

시빌은 레이븐의 내벽이 사나울 정도로 꿈틀거리는 것에 음란한 말을 내뱉으며 그의 성기를 잡아 훑었다. 앞뒤에서 가해지는 자극에 레이븐이 거의 발작적으로 땅을 긁었다.

“갈 것 같아?”

“헉! 흐억! 시, 시빌!”

“혼자 가면 안 되지. 벌써 몇 번째야? 응?”

시빌은 달뜬 숨을 내뱉으며 레이븐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자세가 바뀌어 시빌 위에 앉게 된 레이븐은 허벅지를 꽉 조이며 숨을 뱉었다. 몸속에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움직이라는 시빌의 명령에 레이븐은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커다란 성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쿡쿡 쑤셔와 배가 아팠다. 레이븐은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계속해서 움직였다. 움직임이 느려질 때마다 시빌이 레이븐의 목을 졸랐다. 이미 몇 번의 졸림으로 시뻘건 손자국이 목에 남아 있었다.

레이븐의 호흡을 통제하며 시빌은 빠르게 그의 몸을 범했다. 하도 오랫동안 안은 탓에 레이븐의 조임은 이제 그냥 그랬다. 사정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시빌은 불만스레 혀를 차며 굵은 손가락 하나를 레이븐의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었다.

“크흡! 컥!”

갑자기 더해진 질량감과 희박해지는 산소에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시빌이 쥐고 있던 레이븐의 목을 놓아주자 레이븐은 쇳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었다. 차마 다물지 못한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레이븐은 헐떡이며 어떻게든 아래쪽을 조이려 애썼다.

“제대로 안 하면 손가락 하나 더 넣는다?”

“하! 아흑! 잠시만, 잠시만!”

레이븐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잘 조여지지 않았다. 시빌이 손가락을 슬쩍 움직일 때마다 버티지 못하고 내벽이 확 풀어졌다. 레이븐은 안간힘을 쓰며 허리를 움직였다.

“안 되겠네. 완전히 헛돌잖아?”

웃음기가 묻어 있는 시빌의 목소리에 레이븐은 겁먹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잘할 테니까. 제발. 악!”

시빌은 레이븐의 몸에서 자신의 성기와 손가락을 쑥 뽑아냈다. 레이븐은 자신의 머리채를 틀어쥐는 커다란 손에 헐떡거렸다. 시빌은 침대 옆을 되는대로 뒤적거리더니 곧 굵은 진주 목걸이를 꺼냈다.

“예쁘지 않아? 넌 보석을 좋아하지. 안 그래?”

레이븐은 멍하니 시빌이 손에서 흔들리는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분명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시빌이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빌이 계속 대답을 기다렸기에 레이븐은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큭큭. 그래. 넌 이런 걸 좋아하지.”

시빌은 잔인하게 웃으며 알알이 얽힌 진주를 레이븐의 젖은 허벅지에 쓸었다. 레이븐은 불길한 기분에 몸을 파득 떨었다. 차가운 보석이 몸에 감겨들자 그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

“줄게.”

시빌은 레이븐의 귓불을 지긋이 핥아 올렸다. 진주 목걸이를 두 줄로 겹쳐 쥐고는 레이븐의 몸속으로 밀어 넣자 짧은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굳었다.

“차, 차갑! 악! 앗!”

오돌토돌한 진주들이 몸속을 휘저으며 비벼대자 레이븐은 자신도 모르게 질질 사정했다. 그 모습에 시빌은 킥킥 웃으며 레이븐의 입을 벌렸다.

레비쥬인 시빌을 하루 종일 상대하느라 레이븐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시빌은 그의 입 안을 혀로 훑었다. 덜덜 떨리는 혓바닥을 혀로 핥고 입천장을 혀끝으로 슬쩍슬쩍 건드렸다. 레이븐은 얌전히 시빌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키스는 길고도 감미로웠다. 거친 섹스보다 훨씬 기분 좋았다.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계속해서 레이븐의 입술을 핥고 빨았다. 그는 자신의 키스에 레이븐이 안도하는 것을 느꼈다. 무서움에 커진 눈이 편안하게 내리깔리고 떨리던 몸도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시빌은 자기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며 레이븐을 괴롭히던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미안.”

시빌은 레이븐을 꼭 끌어안았다. 하루 내내 시빌에게 시달렸던 레이븐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것이 위로의 손짓이라는 것에 시빌은 무너지듯 레이븐의 어깨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미안. 정말 미안.”

레이븐은 시빌을 사랑하고 있었다. 시빌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저질러버린 자신의 이기적인 짓거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시빌은 레이븐을 꼭 껴안은 채 흐느꼈다. 그리고 그런 시빌의 등을 레이븐은 계속해서 토닥여주었다.

“괜찮습니다.”

그는 정말로 괜찮았다. 자신에게 안겨 울고 있는 이 커다란 폭군이 어떤 식으로 감정을 분출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시빌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런 일을 레이븐에게 저질렀고 레이븐은 그것을 다 용서해 주지 않았었던가.

숲에서의 시빌과 로겐에서의 시빌은 아무리 달라 보여도 결국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기묘하게 실감하며 레이븐은 시빌의 머리에 입 맞추었다. 자신이 이 남자를 미워하게 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터였다.

* * *

대관식은 로겐의 윈터 홀에서 거행되었다.

백색의 도시라는 로겐의 별칭에 걸맞게 윈터 홀은 흰 대리석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본래 영지의 큰 행사나 공식적인 일정들을 위해 만들어진 윈터 홀은 그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본래 윈터 홀의 벽에는 나룻배와 강물이 새겨진 시빌의 깃발들이 걸려 있었다. 지금도 깃발은 걸려 있었으나 그 무늬가 조금 달랐다. 나룻배의 활짝 펴진 삼각의 돛에 금색의 왕관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깃발은 홀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 걸려 있었다. 각지의 하객들은 그 규모와 단일성에 위축되었고 삼엄한 도시의 경비에 깜짝 놀랐다. 질서의 정연함과 자긍심으로 빛나는 사람들의 얼굴은 보는 이를 부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허약해지고 혼돈에 휩싸였을 북부와 마법사를 잃은 레비쥬를 염탐하러 온 간자들은 곧 침략의 마음을 접었다. 대관식이 한 달 전에 결정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행동력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마다 종이 울렸다. 윈터 홀은 아침부터 하객과 증인들로 북적거렸고 대관식을 거행하는 정오가 다가오자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해졌다. 암살의 위험도 있었으나 북부 사람들은 별걱정 없이 시빌의 등장을 기다렸다. 끊임없는 노동으로 혹사당한 시빌의 가신들은 이제 그가 죽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관식은 12시에 거행되었다.

긴 뿔 나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시빌은 흰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의 갖은 노력 끝에 머리카락은 찬란한 금발로 돌아와 있었고 거대한 철검이 위협하듯 그의 허리에 달려있었다.

시빌은 거침없이 윈터 홀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영주좌가 놓여있던 곳엔 이제 왕좌가 놓여있었다. 새하얀 윈터 홀에서 오로지 그 왕좌만이 검은 돌로 제작되어 눈에 띄었다. 검은색의 왕좌에는 그 어떤 장식도 없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시빌이 의자에 앉자 보물과 인장을 관리하는 인장상서가 떨리는 손으로 왕관을 내밀었다. 황금과 에메랄드, 진주와 호박이 장식된 그 왕관을 시빌은 두 손으로 집어 들어 스스로 머리에 얹었다. 구경하던 이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왕위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지금 나오시오! 말로 설득하거나 검으로 설득할지니. 패자는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못하리라!”

시빌의 그 말은 협박이었고, 그러는 앞에 감히 나설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윈터 홀을 감싼 침묵 속에서 시빌은 똑같은 말을 두 번 외쳤고, 마지막 세 번째를 외치려던 때였다.

“그대가 왕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 그대는 나를 침묵시켜야 할 것이다.”

시빌은 앞에 나선 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돌보다도 검고 기이하게 뒤틀린 남자가 시빌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아니, 기실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분노와 난폭함이 뒤섞인 폭력의 찌끄레기 같은 것이었다. 그자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홀 중앙에 서서는 뒤틀린 눈동자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넌 뭐냐?”

“북쪽 탑의 마법사다.”

“마법사?”

시빌은 차갑게 웃었다.

마법사치고도 남자의 몰골은 이상한 것이었다. 둔탁하고도 치명적인 광택이 손톱과 관자놀이를 따라 흘렀고 벌레 떼 같은 안개들이 온몸을 휘감은 채 흔들렸다. 남자의 팔다리는 너무나 가늘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좁은 구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친 것마냥 기묘하게 꺾여 있었고 압도적인 존재감과 그림자 같은 희미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무지 인간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제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그 본질은 버릴 수 없어서 포유류 특유의 기척이 있었는데 지금 눈앞의 존재엔 그게 없었다.

“북쪽 탑의 마법사는 마법의 왕이라던데. 그자가 너냐?”

“그렇다. 그리고 난 너와는 달리 진짜 왕이지.”

시빌은 삐딱하게 웃었다.

“진짜 왕이라?”

“그래! 난 마법의 신이 떨군 유물을 먹고 왕이 된 자다. 네 방자한 영지가 커지는 걸 지금껏 묵과했으나 감히 칭왕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윈터 홀에 가득한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의 말에 웅성거렸다. 북쪽 탑의 마법사란 가장 강대한 마법사의 별칭이었다. 계절이 없는 산에 살면서 마법의 마지막 비의를 추구하는 최강의 마법사. 그 마법사가 사는 곳이 탑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북쪽 탑의 마법사, 혹은 극지의 마법사라 불렀다.

그런 존재가 지금 여기 나타나 시빌을 가짜라 말하고 있었다.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고 시빌은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빌은 살짝 지겹기까지 한 눈초리로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대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 죽음의 비밀을 알고 마법의 비밀도 알아서 장난을 친다는 이야기.”

마법사는 흥미롭다는 듯 이빨을 드러냈다.

“무덤을 헤집어서는 땅속에서 잠자는 이들을 깨우고, 그들에게 산자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 죽은 레비쥬를 되살리려 드는 방자한 자의 이야기를 말이다!”

시빌의 목소리가 천둥같이 홀을 울렸다. 땅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 기세는 말 그대로 신의 분노 같아서 참관 중인 사람들 중 기가 약한 일부가 주저앉았다.

“제법 기세가 대단하구나. 하지만 일개 레비쥬인 네가 내게 뭘 할 수 있지?”

마법사는 윈터 홀의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카디넬을 믿고 그러는 건가? 숲지기야. 너희들은 날 죽이겠다며 언제나 달려들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법사의 비웃음을 들은 레이븐은 천천히 구석에서 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그림자에서 벗어나자 올이 굵은 녹색 외투며 구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낡고 후져서 입지 말라고 구박했던 옷인데, 지금 그 옷은 기묘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당신으로선 대관식을 보아 넘기기 힘들었겠죠. 이해합니다.”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권력욕에 미쳐있으니까요. 신들 사이에 전쟁신을 일으켜 모두를 죽게 만들고서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미치광이니까요.”

마법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꺾여 있는 팔을 휘두르며 광소와도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세계의 모든 것이 나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우선은 저 방자한 레비쥬부터 죽여 나의 수하로 만든 뒤 너의 시체를 씹어 먹어주마.”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 네가 보고 있는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난 극지의 마법사다. 마법의 신이 바로 나다!”

레이븐은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마법사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힘을 일으켜 카디넬에게 덤벼들었다.

사람들은 눈보라 치는 벌판을 보게 되었다. 아무런 생물도 살려두지 않는 메마른 눈보라가 레이븐을 묻고자 덤벼들었다. 레이븐은 낮은 관목이 되어 몸을 눕혔다. 여린 식물은 결코 부러지는 일 없이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았다.

하늘의 눈보라는 불이 되었다. 레이븐은 한 마리의 매가 되어 날아올랐다. 불은 거친 바람이 되었다. 매는 민들레 꽃씨가 되어 기류를 탔다. 마법사는 강물이 되어 꽃씨를 집어삼켰다. 레이븐은 물고기가 되어 강물을 헤엄쳤다.

사람들은 로겐의 윈터 홀이 계곡이 되고, 불타는 숲이 되고, 발 둘 곳 하나 없는 허공이 되는 것에 비명을 내질렀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있는 자들은 홀 밖으로 도망쳤고 불쌍한 몇몇 이들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마법사는 마법사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레이븐 또한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불타는 증오로 가득 찬 마법사와는 달리 레이븐의 검은 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제법 하는구나. 하지만 장난은 이제 끝이다. 많은 숲지기들이 내 손에 죽었고 너 또한 죽을 것이다. 그들의 살점은 참으로 맛이 있더군. 너 또한 먹어주겠다.”

진흙이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새의 몸짓 같았다.

“먹는 것은 저입니다.”

뿔처럼 흉측한 손가락을 치켜들던 마법사는 의외의 말에 멈추어 섰다. 레이븐은 한 손을 들어 마법사를 가리켰다.

“당신은 로겐을 덮은 까마귀 떼를 보지 않았습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겁니까?”

“까마귀? 불타는 바람 한 번에 통구이가 될 까마귀들이 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지? 난 죽음이 온 것인가 해서 숨었지만 그녀는 결코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지. 까마귀는 죽은 이들을 먹어치우지만 날 건드릴 수는 없다.”

마법사는 웃었다.

“이래 봬도 이 몸은 살아있다오.”

“그것참 난감한 일이로군요.”

레이븐은 그답지 않게 빈정거리며 외투의 한쪽을 들어 올렸다. 얽혀있는 구슬들이 은은한 빛과 함께 깜빡거렸다. 레이븐은 그것들을 잠시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입을 벌려 길게 울었다.

“까악-!”

마법사는 자신을 덮쳐오는 죽음을 보았다.

그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살해당한 남자의 죽음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남자의 시체를 까마귀가 뜯어 먹었다.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며 까마귀를 쫓아내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여자의 죽음이었다. 허우적거리며 뭍으로 가려던 여자의 발목을 거센 급류의 회오리가 잡아챘다. 물이 기도를 막는다. 역류한 피가 차가운 강물로 번지고 살점은 퉁퉁 부어오른다. 그 시체를 까마귀가 물어뜯었다.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며 까마귀를 쫓아내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지 못했다. 매정한 어머니는 그 시체를 밖에 버렸다. 까마귀가 그 시체를 뜯어 먹었다.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며 까마귀를 쫓아내었다.

마법사는 자신에게 향하는 죽음들을 계속해서 뿌리쳤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지금껏 그를 공격하는 숲지기들은 본연의 모습으로 화해 달려들었다. 표범이나 사자. 들개 같은 것으로.

‘저건 대체 뭐지?’

마법사는 실눈을 뜬 채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분명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까마귀 소리를 냈다. 그래서 까마귀로 변하겠거니 했다. 이런 죽음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불길 한방에 타오를 지저분한 새를 기대한 것이다.

“그래. 보통내기는 아니로구나. 그것은 인정하마.”

마법사는 계속해서 다가오는 죽음의 환상을 거부하며 힘을 일으켰다. 그는 되살아난 마법의 신이었고 패배란 있을 수 없었다. 죽기에는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었다.

“토해내거라! 네가 먹은 모든 죽음을 토해내거라!”

마법사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명령했다. 그 외침에 레이븐은 처음으로 고통스러워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핫! 캬하하핫!”

녹색 외투에 붙어 있는 별 같던 구슬들이 하나둘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이븐은 괴로운 듯 입을 벌린 채 붉은 피를 토해내었다. 단정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날카로운 비명이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마법사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레이븐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모아온 죽음들을 모조리 토해낸 까마귀는 무력한 한 마리의 검은 새에 불과했다. 입맛을 다시며 그 내장을 파먹기 위해 손톱을 꺼내 들던 마법사는 문득 레이븐이 토한 것을 보게 되었다.

“……. 이건?”

그것은 둥글고 영롱한 빛의 물건이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그 물건을 마법사는 본 적이 있었다.

“신의 한쪽 눈알입니다.”

눈알을 토해낸 레이븐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는 피 묻은 입가를 닦고는 정말로 우습다는 듯이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마법사를 레이븐은 키득거리며 비웃었다.

“당신은 저 혼자만을 상대하는 게 아닐 텐데요.”

마법사는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흉곽을 뚫고 나온 검날을 보게 되었다. 마법사의 검은색 피부가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마법사의 얼굴은 흡사 부서지듯 갈라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삐걱삐걱 뒤로 돌렸다. 녹색의 관을 쓴 레비쥬의 왕이 검을 든 채 거기 있었다.

레이븐은 바닥을 구르는 눈알을 집어 들었다. 영롱한 신의 눈알을 빛에 비추어 그 광택과 반짝임을 음미했다.

“아. 제발 먹지 마라. 제발.”

레이븐은 시빌의 애원에 킥킥 쉰 목소리로 웃었다.

시빌은 레이븐이 까마귀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방은 울창한 녹림이었고 거대한 까마귀의 새까만 깃은 숲의 녹음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것은 환상인가 현실인가? 그도 아니면 꿈인 것인가? 거대한 녹색 까마귀는 단단하고 굽은 부리를 열어 짧게 짖었다.

까악---!!!!

인간이 빛을 잃은 뒤 한 명의 신이 까마귀를 찾아왔다. 인간을 꾀어낸 바로 그 신이었다. 그는 별처럼 아름다운 반짝임과 총명함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무덤가에 앉아 까마귀를 향해 물었다.

“넌 인간에게 죽음의 비밀을 알려주었지. 나에게도 비밀을 알려줄 수 있을까?”

신의 반짝이는 모습이 맘에 들었던 까마귀는 무엇을 원하냐며 기분 좋게 물었다. 신은 까마귀의 날개 깃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넌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지? 난 마법의 비밀을 알고 싶어.”

까마귀는 음흉한 목소리로 깍깍 짖었다.

“그건 보통 대가로는 안 돼. 내게 무얼 줄 거야?”

신은 반짝이는 자신의 머리채를 주겠다고 했다. 까마귀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 눈동자가 좋겠어. 아름다운 데다 맛있어 보이거든.”

신은 자신의 한쪽 눈을 내어주었다. 까마귀는 신의 눈동자를 한입에 삼킨 뒤 마법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비밀을 들은 신은 지체 없이 무덤을 떠났다. 까마귀는 남겨졌다.

신이 떠나고 많은 낮과 밤이 흘렀다. 어느 날 빛을 잃은 인간이 까마귀를 찾아왔다. 그는 무덤가에 쭈그려 앉아 까마귀를 향해 우울하게 말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졌어.”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으므로 까마귀는 그를 무시했다. 인간은 주저하며 까마귀를 향해 다시 말했다.

“곡식이 자라질 않아. 열매도 맺히지 않고 꽃도 피지 않아. 모두가 굶주리고 있어.”

그건 마법의 신 때문이었다. 자연의 법칙을 비틀어 제 편한 데로 바꾼 마법의 신은 그 힘을 남용하고 있었다. 영원한 봄이나 영원한 여름 같은 것들이 그를 따라다녔고 그것은 기아와 혼란을 부르고 있었다.

까마귀는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밀을 알려준 건 자신이지만 그 책임은 힘을 사용한 자가 지는 것이다. 인간은 까마귀가 아무런 말도 않자 힘없이 일어나 다시 말했다.

“비밀을 말한 건 미안해. 잘못했어.”

“괜찮아. 그 대가도 네가 질 테니까.”

신이 마법의 힘을 얻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인간이 비밀을 알려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물끄러미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살 박인 자신의 손과 발을 쳐다보더니 다시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이 일을 들어주면 내 몸을 네게 줄게.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렴.”

마침 까마귀는 배가 고팠으므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빛을 잃은 인간은 가장 하찮은 것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까마귀를 향해 말했다.

“너는 죽음을 잘 알고 있으니,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하게 하렴.”

까마귀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눈알을 삼킨 까마귀는 부서지는 마법사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법사는 죽었다. 눈앞의 적만을 바라보다가 생각지 못한 가시에 찔려 죽은 것이다. 시빌은 마법사의 몸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냉막한 눈동자엔 감정이 없고 뽑혀 나온 검의 궤적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는 휘둘러진 검날 뒤로 따라와 자신의 느림을 한탄했다. 한 번, 두 번, 베어진 마법사의 몸은 즉시 썩은 악취를 풍기며 무너져 내렸다.

시빌은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레이븐을 힐난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렸는데 왜 눈알을 처먹었냐는, 그 짜증스러운 시선에 레이븐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아직 밖에 있습니다. 나가서 대관식을 끝마쳐야죠.”

그리고 레이븐은 바닥에 주저앉아 떨어뜨린 구슬들을 주워 모았다. 영롱하게 빛나던 구슬들은 이제 광택을 잃고 싸구려 유리처럼 윈터 홀의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죽음이었으나 이제는 그 힘을 잃어버린 평범한 돌멩이였다.

시빌은 레이븐과 마법사의 시체를 뒤로 한 채 홀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홀의 문을 열자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이고 있던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시빌은 외쳤다.

“마법사는 죽었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사람들과 시빌 사이에 흘렀다. 시빌은 이 침묵을 깰 수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왕위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지금 나오시오. 말로 설득하거나 검으로 설득할지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시빌은 다시 왕좌로 다가가 천천히 앉았다. 사람들은 꿈을 꾼 듯한 기분 속에서 그제야 빠져나왔고 그들이 빠져나온 윈터 홀, 그 음영 진 그림자 속에서 녹색 외투의 카디넬이 무릎 꿇는 것을 바라보았다.

“왕이여.”

레이븐은 시빌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목소리엔 공경이 담겨있었고 무한한 축복과 애정이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수무강하소서.”

축사가 귀를 울려 시빌은 고개를 끄덕여 회답했다.

가슴이 사무쳤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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