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7화 (7/18)

대관식 (1)

아멜리타는 로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금술사인 아버지와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연금술사인 아버지 밑에서 공부를 한 아멜리타는 그의 아버지가 왜 당연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그에게 가르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에겐 재능이 있었다. 자신의 영혼 속에 마법의 조각이 있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머지않은 시기에 자신의 아버지를 뛰어넘으리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는 24세에 비의를 터득했다. 참으로 어린 나이의 성취였다. 그는 들떴고, 오만함이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힘은 무궁했으며 세상을 지배하는 데에 레비쥬 따윈 필요하지 않을 듯했다.

아멜리타가 마흔이 되던 해, 그는 한 여인을 만났다. 푸른 머리카락이 창공과 같은 여인이었고 또한 레비쥬였다.

그녀는 참으로 당당하고 강했다. 검을 든 손은 피에 물들어 있었으나 뭐 어떠랴 생각되었다. 인간은 무가치했다. 그는 영원을 바라보는 자였고 인간은 필멸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마법사가 되었다. 그녀는 레비쥬였지만 아멜리타는 그녀의 정체에 상관없이 사랑에 빠져버렸다.

앞뒤를 분간치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정복욕에 차 있으며, 피와 파괴에 대한 욕구에 불타오르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일린 발루아였다.

첫사랑이었다. 그녀와 관계를 갖고, 그녀를 위해 싸우고, 그녀를 위해 로겐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왕국을 만들었다. 이상적인 레비쥬와 마법사로서 그 둘은 완벽해 보였다. 그것을 감히 행복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가 안정되고, 이제 감히 주변이 침략 못 할 강한 힘을 지니게 되자 그녀는 변모했다.

대개 레비쥬와 마법사는 서로만을 탐하며 정사의 기쁨을 나누지만 발루아는 인간과 즐기길 좋아했다. 연약한 살덩어리를 몸속에 품고, 잘생긴 남자들이 서로를 질투하며 싸우는 걸 즐겼다.

그녀는 언제나 생기 넘쳤으나 한편으론 무료해 보였다. 강대한 영토를 지닌 레비쥬들은 대개 그러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전쟁을 원하지만, 지닌 것이 너무 커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레비쥬들은 다른 곳으로 정신을 돌려 그 광포함을 달랬다. 발루아의 경우엔 그 방법이 정사와 인간 사냥이었다.

인간의 귀족과 기사들이 그녀의 침실을 데웠다. 처음엔 고통스러웠던 아멜리타도 결국엔 포기하고 그녀의 방탕한 생활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향락에 빠져들어 비어버린 통치의 자리는 그가 메워야만 했다. 마법을 위해 사용하던 두뇌를 치세에 사용하고, 오만한 태도로 그녀의 바람기에 상처받는 자신을 감추었다.

정사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아멜리타는 주변을 소소하게 침략하여 피의 갈증을 풀었다. 북부의 강대한 영주에게 맞설만한 상대는 이미 주변에 없었고, 때문에 그녀의 그런 출정은 일방적인 인간사냥이 되게 마련이었다. 원성은 높았으나 그녀를 벌할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치외법권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레비쥬가 하는 일을 막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무력뿐이었고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육과 질퍽한 정사의 날들이 단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변할 조짐도 없이 세월은 그저 빠르게 흘러가서 하얗던 성벽도 바래고 사람도 늙어 세대가 바뀌었다.

아멜리타가 120살이 되던 해, 한 남자가 로겐에 찾아왔다. 완력이 좋고 영리한 인상의 젊은이였다. 그저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에 온 시골 촌놈이었으나 그자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마구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종자가 되더니만 곧 기사 서임을 받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말도 못할 출세인데 땅을 하사받는가 싶더니 관료들마저 휘어잡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생김새가 무척이나 보기 좋았기에 영주인 발루아는 그와의 잠자리를 즐겼고, 함께 사냥했으며, 권력을 부여했다.

로겐에 있어서 그는 새로운 바람이었다. 레비쥬와 마법사가 지배하는 땅은 다스리는 자가 죽지 않기에 그 분위기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을 손에 쥔 마구간지기 출신의 남자가 움직이자 봄의 잎새 같은 활기가 땅을 덮었다.

남자에겐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공포로 이루어진 통치에 익숙하던 인간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건 예견된 순번이었다. 처음엔 발루아가 부여한 권력이 그를 강하게 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에게 모여든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어지간해선 인간에게 질투하지 않는 아멜리타조차 그 천한 마구간지기 출신의 남자를 신경 쓰게 될 무렵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인간사냥을 준비하던 발루아가 어째선지 출발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더욱 이상한 것은 공기를 가득 채운 급박한 소음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영지 안에 가득했다. 경악에 찬 비명과 웅성거림이 구부러진 골목마다 들려왔다.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달려가는 소리. 개 짖는 소리와 말의 투레질이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멜리타는 텅 빈 복도를 달렸다. 처음엔 걷고 있었으나 곧 달리게 되었다. 필멸의 삶을 벗고 레비쥬와 함께 하는 마법사가 된 뒤론 거의 처음이라 해도 좋을 일이었다. 시야는 흔들렸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성안엔 소음이 가득했으나 어째선지 그가 지나가는 길엔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병장에 들어섰을 때 아멜리타가 본 건 발루아의 머리였다. 댕겅 잘려나가 공마냥 흙바닥에 놓여있는 익숙한 얼굴이 그의 몸을 굳게 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그제서야 사람이 보였다. 오는 길 내내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연병장에 가득했다.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고, 차가운 눈길로 아멜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멜리타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려 했다. 레비쥬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를 시선으로 누볐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아멜리타 발루아.”

마구간지기의 목소리였다. 아멜리타는 검을 뽑아 든 한 남자를 그제야 발견하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남자가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든 검에서는 붉은 피가 한 방울 긴 선이 되어 흐르고 있었고 그 검 끝에는 목이 없는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

여자였다. 레비쥬로만, 인간의 탈을 쓴 괴물로만 여겨지던 발루아였지만 지금은 그저 불쌍한 여자의 시체로만 느껴졌다. 힘을 잃고 늘어진 팔은 가늘었고 둥글게 부푼 가슴은 따뜻해 보였다. 바닥에 누운 몸 어디에서도 전쟁을 즐기는 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얼굴은, 얼굴은 없었다.

“…아.”

비명을, 통곡을, 고통스러운 무언가를 토하려던 참이었다.

“편을 정할 시간이다. 마법사.”

이번에도 역시, 마구간지기의 목소리였다.

대체 왜 저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가 싶어 아멜리타는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인간의 것이 아닌 잔인성과, 힘과, 공포를 목도했다. 이제는 식어버린 발루아의 손아귀에 있었던 그 모든 것이 남자에게 있었다.

유리를 투과하여 들어오는 빛은 남자의 후광이 되어 그 얼굴을 역광 속에 감추었다. 적절한 모습이었다. 인간의 얼굴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황금을 뽑아 걸친 듯한 금발이 왕관처럼 빛나고 있었고, 침묵과 그림자가 그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아멜리타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 촌뜨기가 괴물처럼 보일 리 없었으니까.

아멜리타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쟁 내내 익숙히 맡아오던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레비쥬의 피 냄새도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아멜리타는 약간 쇼크 받았다.

인간인가? 그녀는 인간이었던 건가?

고민하는 마법사의 어깨 위로 괴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답해라 마법사.”

해가 방향을 바꿔 남자의 얼굴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마구간지기였지만 마구간지기가 아니었다. 인간성을 바람에 날려버린 무표정한 살인마의 얼굴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비쥬가 묻고 있었다. 어떻게든 대답해야만 했다. 그런데 질문이 무엇이었더라?

“……무엇을?”

“편을 정할 시간이라고 했다. 그대는 나의 마법사로 남겠는가? 아니면 여기서 죽겠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아멜리타는 죽음을 선택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발루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한 것이지, 그녀가 레비쥬라서 함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절을 외치고자 고개를 쳐들었던 아멜리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다물었다.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아멜리타는 힘을 일으켜 시빌이 과거의 환상을 보도록 했다. 인간성을 잃고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터전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도록 했다. 그 어떤 레비쥬도 이 공격을 맞고서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레비쥬들이 각성하는 기억의 근간에는 언제나 당사자를 미치게 하는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아멜리타는 잔인한 기대를 품은 채 시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잘생긴 머리통이 비명을 지르며 일그러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하지만 시빌의 얼굴에서 아멜리타가 보게 된 것은 고통이 아니라 흐릿한 미소와 환희였다.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행위를,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을 죽였을 게 분명한 기억을, 친구를 죽이고 이웃을 죽이고 그 시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을 게 분명한 기억을……. 그는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멜리타는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발루아의 시체 옆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발루아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목도했던 수많은 레비쥬들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남자인가?

아멜리타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배와 권력을 향한 욕망이었다. 추악한 뱀의 또아리 같은 것이 그를 사정없이 사로잡았다. 마법에 들어선 자들이 레비쥬를 만났을 때 느끼곤 한다는, 그 파멸적인 충동이 지금 자신의 속에서 일어났음을 아멜리타는 깨달았다.

시빌이 과거에서 헤어나와 눈을 떴을 때, 아멜리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승낙의 몸짓이었고 괴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아멜리타에게 입을 맞췄다.

키스는 차가워서 고깃덩어리가 입 안을 헤집는 것 같았다. 가슴 속이 쿵쾅거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땅을 짚은 손에 발루아의 시체가 잡혀 왔다. 다행이었다. 머리가 없는 그녀는 이 배신을 바라볼 수 없으니.

백 년에 걸친 시간도, 첫눈에 반했던 사랑도 이 이기적인 힘의 표출 앞에 져버리고 말았다. 괜찮았다. 어차피 꽃도 시들지 않는가. 인간은 변한다. 각성의 기억을 바라보며 웃는 남자도 있다. 살기 위한 배신이 책망받을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아멜리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끌려가 남자에게 범해졌다.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을 생각할 여지조차 없었다. 귀신에게 홀린 듯이 레비쥬의 힘에 끌려 심취하고 만 것이다. 이 자라면 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륙을 통일하고 다른 모든 레비쥬와 마법사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파멸적인 기대가 제정신을 잃게 했다. 일그러진 것이다.

자신이 발루아를 배반했음을 아멜리타는 구겨진 침상 위에서 잊었다. 변명들을 찾아 열심히 일그러진 마음 위에 덮어 씌었다. 목숨을 담보로 협박당해서가 아니라, 그녀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레비쥬에게 홀려서 그녀의 차가운 주검을 외면한 것을 아멜리타는 그렇게 잊어갔다. 하지만 자신의 배신은 잊었으되 그녀의 죽음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멜리타의 마음은 복수로 새까맣게 굳어 있었다.

아멜리타는 본래 발루아의 것이었던 익숙한 영주의 침상 위에 누워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던 가녀린 여인의 몸. 바닥을 적신 붉은 피며 비린내. 발루아와 함께했던 전쟁들을 아멜리타는 계속해서 생각하려 노력했다. 추억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자면 슬픔과 증오가 밀려왔다.

그 괴물 같은 남자가 없을 때 아멜리타는 복수를 다짐하며 과거를 곱씹었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괴물이 다시 그를 찾으면, 아멜리타는 힘에 대한 희열과 욕심에 패배해 복수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로겐의 영주가 바뀌자 곧이어 전쟁이 벌어졌다. 어리석은 레비쥬들이 땅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해오자 아멜리타는 그제야 침상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괴물의 손을 잡고 살육 속에 몸을 맡겼다. 아내를 살해한 괴물이 가져오는 압도적인 승리는 아멜리타의 정신을 취하게 만들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영부영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전쟁이 끝나자 아멜리타는 더 이상 발루아의 얼굴도, 잘린 목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괴물의 마법사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이제 경계의 눈초리가 아니라 영주의 마법사를 대하는 태도로 그를 대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사람들 역시 죽어서 어느샌가 발루아를 기억하는 인간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장막 뒤로 밀어 넣은 채 아멜리타는 조용히 살아갔다. 복수를 꿈꾸는 일도 없어졌다. 다만 남자에게 안기는 일만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영주와의 잠자리는 의무였으므로 참았지만 그때마다 발루아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200년이 흘러 무더운 여름이었다.

아멜리타는 가느다란 그믐 아래 석상처럼 굳어 섰다.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그의 방 안에 서 있었다. 이백 년 만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먼지 쌓인 거울을 물에 담근 것처럼 순식간에 과거가 그 빛을 드러냈다.

“발루아?”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깊이 잠겨 있었다. 환상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녀의 형체가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아멜리타는 놀랐고, 그다음엔 공포를 느꼈다. 죽은 자가 찾아왔다면 그 이유는 원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목이 잘려 죽은 레비쥬였다. 자신은 그녀의 시체를 외면한 채 원수에게 몸을 맡긴 마법사이고…….

“속죄하고 싶으냐?”

아멜리타는 소스라쳤다. 창백하게 서 있는 발루아의 어깨를 검은 손가락이 쥐고 있었다. 마치 새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단단하게 벼려진 새까만 손가락이 웃는 것마냥 달그락거렸다.

“너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은 거짓이었는가?”

“누구냐!”

“난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자다.”

아멜리타는 발루아의 뒤에 늘어진 어둠을 노려보았다. 마치 촛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마냥 검은 것이 춤을 추며 흔들거렸다. 아멜리타는 역함을 느꼈다. 작은 구멍으로 밀려 나오느라 한없이 구겨진 악의 결정체가 몸을 피고 있었다.

어둠은 발루아의 어깨를 그러쥐었던 손가락을 벌려 길게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았느냐? 그 남자는 네 눈앞에서 이 여자를 죽이고 널 능욕했지. 그런데 넌 수치스럽게도 그 남자에게 굴복했다. 기꺼이 다릴 벌리고 땅을 다스리는 일들을 하고 이 여자를 잊었다.”

아멜리타는 대답 없이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는 마법사였고 이러한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이거나 그에 준하는 계통의 힘들이 미끼를 던질 때에 가장 해선 안 되는 것이 바로 대답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두드림에 대답을 하면 그 즉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아멜리타는 조용히 어둠과 그 어둠 앞에 놓인 발루아를 쳐다보았다. 발루아는 생기 없는 뺨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눈빛은 침침했고 어디를 보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환상이라면 너무 조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피비린내가 났다. 발루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목을 부여잡았다.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검은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고 그것은 그녀를 죽일 것만 같았다.

“아일린!!”

저도 모르게 아멜리타는 발루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은 뜨거웠다. 그러나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빛나는 두 눈은 수면마냥 떨리고 입술에선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어둠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아멜리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보지 못한 발루아의 죽음이 이러했다는 것을.

“멈춰. 안 돼! 아일린. 안 돼! 아일린! 아일린!”

마법임을 알아도, 흉계임을 알아도, 거짓임을 알아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200년 전에 잃은 자신의 아내를 아멜리타는 끌어안았다.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나왔다. 슬퍼할 여지도 없이 딱딱하게 굳혀 놓았던 것이, 한여름 아래 흩어진 얼음마냥 녹아내렸다. 죽음을 슬퍼하는 인간의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열하는 아멜리타의 어깨 위에 검은 손이 얹어졌다.

“살리고 싶으냐?”

아멜리타는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일이 마법임을 알아도, 흉계임을 알아도, 거짓임을 알아도 그녀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만은 진실이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덫인들 어떠하랴 싶었다. 하지만.

아멜리타는 로겐의 골목을 걸으며 이를 갈았다. 그 새까만 마법사가 한 말이 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살아있다고 했다. 그 남자가, 파르티잔 숲에서 목을 쳐 죽여버린 남자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했다. 절로 두려워지는 이야기였다.

“시빌이 살아있다고?”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그 남자를 아멜리타는 잘 알았다. 그는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 대신 지독할 정도로 영리하고 끔찍했다. 그가 복수를 결심한다면 그 대상이 된 자는 자진이라도 하는 게 나을 테지만.

300년 가까이 로겐을 지배한 마법사는 시빌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에게 복수하기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성에는 레비쥬가 세 명이나 와 있었고 그들 중 약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북부와 로겐을 원하는 그들에게 시빌의 목을 요구하면 기꺼운 마음으로 움직일 터였다.

로겐에 들어온 레비쥬들 모두가 자신의 편이었다. 이제 와서 시빌이 돌아온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성안으로 잠입해 자신의 목을 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엔 몰려드는 레비쥬들에게 그 또한 목을 내놔야 하겠지.

그 정도로 복수에 눈이 멀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비쥬들을 각개격파하고자 은밀히 움직일 수는 있을 것이기에 아멜리타는 잇새로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꼴이 되겠지만 일단은 레비쥬들을 불러 시빌의 귀환을 알려야 했다.

굽이굽이 늘어선 골목과 담장들이 끌어안듯 아멜리타의 모습을 감추었다. 그 새하얀 성벽들이며 돌계단을 스치듯 걷던 아멜리타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밤이 깊음에도 축제의 등불이 멀리 보이고 환성과 음악 소리가 났다.

‘쇠퇴했어.’

아멜리타는 축제의 떠들썩함에 속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는 상인들이나 주민들의 얼굴 속에 숨은 쇠락의 흔적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시빌이 자리를 비운 지 겨우 삼 년인데도 북부는 놀라울 정도로 약해졌다. 관세가 높아지고 습격당하는 농지가 많아져 물가는 오르고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오랫동안 입은 옷이 닳아 해지는 것처럼 여기저기 난 구멍으로 번영이 새어 나갔다.

이것이 다 영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레비쥬가 없는 영지는 짓밟히고 쇠약해져 결국은 멸망하거나 작은 흔적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마법사인 자신이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에 이 땅은 다른 이의 것이 되었으리라.

‘안 될 일이지.’

이 땅은 발루아와 함께 정복한 곳이었다. 시빌은 그 힘과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초반을 제외하면 거의 영지를 넓히지 않았다. 자신은 그가 대륙을 지배하길 기대하며 굴복했는데 시빌은 그 기대를 조금도 채워주지 않았다. 그는 다스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정비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인간들을 윤택하게 하는 일에만 힘을 쏟았다. 어째서? 늑대가 병아리를 애지중지 품는 꼴이 아닌가 말이다.

아멜리타는 멈춰있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입술 끝이 작게 위로 구부러졌다. 어둠은 시빌이 살아 돌아왔다고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다시 죽여 효수하면 될 터였다. 그 잘린 머리를 창대 끝에 걸어서는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간 로겐을 감상하게 해 줘야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불안한 기분은 들지만 어쨌거나 자신에겐 레비쥬가 네 명이나 있지 않은가.

* * *

엘린도는 조용히 야금공방으로 들어섰다. 쇠 두드리는 소리며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공방도 축제 다음 날의 여파는 이길 수 없는지 고요하게 식어 있었다. 식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끝을 찌르는 쇠 냄새에 이마를 찌푸리며 엘린도는 마스터가 자고 있을 안채로 향했다.

갈대를 얽어 만든 발 한 장으로 나뉜 작은 방 안에서 야금 장인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예상했던 광경이기에 엘린도는 들고 있던 검집으로 사정없이 벽을 두들겼다.

“제길. 누구얏!”

“기사단장 엘린도다. 일어났으면 냉큼 정신 차리게.”

“기사단장님? 아니 왜 이런 아침부터.”

야금 장인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으며 몸을 일으켰다.

“물건을 찾으러 왔네.”

“맙소사. 새벽까지 축제였습니다! 오후쯤 종자를 시켜 보내실 것이지 이 시간에 직접 오시다니요?”

“영주께서 여기 맡겨놓은 물건이 있는 걸로 아는데. 좀 찾아줬으면 좋겠군.”

장인은 두꺼운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영주라니요? 시빌 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급한 일이니 지금 당장 좀 움직여줬으면 좋겠군.”

“그분께서 맡겨놓으신 일이야 한두 개가 아닙니다. 성에서 나오는 일은 저희 공방에서 거의 다 맡아 하잖습니까. 기사님들의 갑옷이나 검 같은 물건이야 무기공방에서 만듭니다마는.”

“원통형의 쇠로 된 항아리 같은 것이라고 하던데. 모르겠나?”

“원통형의 항아리라구요?”

장인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누가 쇠로 항아리를 만듭니까?”

“잘 생각해 봐!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그 작자가 시킨 일 중에 이상하지 않은 게 얼마나 있었다고 그래? 3년 지났다고 그새 잊어버린 건가?”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야금 장인은 열 받은 게 분명한 기사단장의 모습에 목을 움츠렸다. 그의 말마따나 이 성의 영주였던 시빌은 좀 이상한 일도 많이 시키곤 하던 작자였다.

“주문서가 있다면 좋을 텐데요. 혹 가져오셨습니까?”

“그런 건 없어. 듣기로는 시발 그놈이 직접 이곳에서 주문했었다던데.”

“영주께서 직접이요?”

장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이어 공방의 구석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잔뜩 쌓여있는 잡동사니들을 쏟아내듯 밀어내자 시커멓고 기다란 항아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아닌가 싶군요.”

엘린도는 장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야금 장인이 뒤집어놓은 곳엔 화살이며 공구들이 가득 꽂혀있는, 말 그대로 길고 두꺼우며 거대한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맞는 것 같군.”

엘린도는 현기증이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빌이 쇠로 된 조금 긴 항아리가 있으니 찾아오라고 했을 때 그는 그 항아리가 자신의 팔뚝 정도 되는 크기일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야금 장인이 가리킨 곳에 놓인 물건은 얼추 보기에도 1미터를 넘기는 육중한 물건이었다.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만 이 물건들은 제가 견습으로 이곳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여기 있던 겁니다.”

“기억해두지. 이런 게 몇 개나 되나?”

“세어봐야 알겠습니다만 최소 열 개 정도는 될 겁니다. 어디로 옮겨야 합니까?”

“마차에 나눠 실어놓으면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야금 장인은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먼지 쌓인 공방이 지진이라도 난 듯 뒤집어졌다. 곳곳에서 항아리가 발굴되었다. 창고 밑바닥에서 먼지가 쌓인 채 누워있는 건 예사였다. 근사한 난초가 자라고 있던 항아리는 그 속에서 흙을 파내는 데만도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역시 빌어먹을 시발 놈이다. 엘린도는 돌아온 영주를 욕하며 구슬땀을 닦아냈다. 언제 주문한 건지도 모를 물건을 마치 어제 맡긴 양 찾아오라는 것도 기막혔지만 그 물건의 꼬라지란 게 생전 처음 보는 몰골이었다. 대체 이런 물건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이른 아침 조용히 일을 끝마치려던 엘린도는 결국 마차 네 대와 열 마리의 말을 동원하는 난리를 벌이고서야 항아리들을 모두 옮길 수 있었다. 식사는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달이 뜨는 걸 보고서야 이뤄낸 쾌거였다.

“그래서, 이게 대체 뭡니까?”

시빌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검은 항아리의 표면을 매만지고 있었다. 엘린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한참을 항아리만 바라보던 시빌은 레이븐이 소맷자락을 당기고서야 겨우 일어나 엘린도를 바라보았다.

“강력한 무기지.”

시빌의 목소리가 진지했기에 엘린도는 다시 무쇠로 된 항아리들을 바라보았다. 딱히 붙일 이름이 없어 항아리라고는 하고 있었지만 그 말엔 사실 무리가 좀 있었다. 시빌이 강력한 무기라 지칭한 물건은 폭이 좁고 길었다. 항아리 특유의 볼록함은 있었지만 한쪽이 막힌 긴 무쇠 파이프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가 태어났던 마을은 금기가 매우 많은 편이었거든. 어느 동굴에 가지 마라, 어느 물줄기의 물은 마셔선 안 된다. 대개 그런 것들은 너무나 오래돼서 누구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것들이 태반이지만 말이야.”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꺼내는 시빌의 모습에 사람들은 긴장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성채의 무기고였다. 기사단장을 앞세워 일꾼인 척 마차를 몰고 들어선 시빌의 부하들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 들어섰다는 초조함을 상쇄하는 것은 시빌의 여유로운 태도였다. 마치 자신의 방 안을 거니는 듯 익숙한 태도에는 한 점의 거리낌도 없었고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한 번은 약초 저장고에 불이 난 적이 있어. 냄새가 말도 못 할 정도였지. 그런데 물건을 사기 위해 마을에 들렀던 연금술사 하나가 저장고 안으로 미친 듯 뛰어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시빌은 새하얀 종이 다발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걸 들고나오더군.”

“저게 뭔데요?”

“뱀파스.”

“그건 복통약인데요.”

아는 이름이 나오자 레이븐이 끼어들었다.

“뱀파스를 알아?”

“예에 뭐. 이래 봬도 숲…, 마법사니까요.”

숲지기라고 말하려던 레이븐은 엘린도의 눈치를 보며 화들짝 말을 바꿨다.

“하지만 복통약으로는 다른 약초가 더 효능이 좋은 데다 재배하기도 힘들어서 잘 쓰이는 식물은 아닌데…….”

“그래. 복통약으로는 말이지.”

시빌은 한 번 유쾌하게 웃고는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여기엔 마법사들이 모르는 효능이 있어. 마법사와 레비쥬를 막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연금술사들만의 비밀로 간직되어오고 있었지. 나도 알게 된 건 우연이야.”

왼쪽 상처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뱀파스 꾸러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법사와 레비쥬를 막아? 풀 쪼가리가요?”

“뭔가 마법이라도 부리는 겁니까? 마법사와 레비쥬의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거라면.”

엘린도가 흥분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으며 외쳤다.

“아멜리타 님께 청혼하러 온 세 명의 레비쥬도 쉽게 저지할 수 있을 겁니다. 시빌 님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세 명이나 되니까요. 혼자서 상대하시긴 힘들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아무리 나라도 세 명이나 되는 레비쥬를 막을 순 없어. 혼자 다니는 신출내기라면 모를까 군대까지 지닌 것들은 흉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시빌은 다시금 검은 무쇠 파이프를 쓰다듬었다.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입 끝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은 조금 고민하는 듯도 보여서 레이븐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저 남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언제나 확신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시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니야. 이제 슬슬 그럴 때가 되었지.”

“무슨 말이죠?”

시빌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레비쥬와 마법사의 시대가 종말을 맞을 시기 말이야.”

그 말이 레비쥬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시빌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은 뱀파스를 향해 있었다. 검술에 단련된 굳은 손가락들이 꾸러미를 움켜쥐었다.

“이걸 진흙에 섞은 뒤 이 항아리들의 밑바닥에 채우면 일은 반쯤 끝난 거야. 함께하기로 한 자들의 숫자가 어떻게 되나?”

엘린도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제 휘하의 200명은 모두 돌아섰습니다. 물론 녀석들은 영주께서 살아 돌아오신 건 모르고 그냥 제가 지지하는 레비쥬를 함께 지지하겠다고 했을 뿐입니다만.”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더 나아. 개중엔 분명 날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녀석들도 있을 테니까.”

엘린도는 부정하지 않았다. 시빌은 좋은 영주였지만 다른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가 사라질 당시 기뻐한 이들은 기사들 중에도 제법 있었고 그자들은 모두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망가지는 도시의 모습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기사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성채 내부의 군사력은 모두 장악했다고 봐도 되겠군. 내가 사라진 지 3년이나 흘렀으면서 이 정도밖에 사람들을 장악하지 못했다니 아멜리타에게 실망스러울 따름이야.”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분은 마법사니까요. 인간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영주께서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저도 당연히 그분을 섬기고 있었을 테고. 새로운 레비쥬를 맞아들이고자 준비하고 있었겠지요.”

“그대가 태어날 때부터 이 땅은 마법사와 레비쥬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니, 그대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대도 어쩔 수 없지.”

시빌은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그래. 난 이 땅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배해왔어.”

후회 어린 시빌의 목소리에 아네모네가 끼어들었다.

“덕분에 평화로웠지 않습니까? 그건 좋은 일이 아닌지요. 지금 도둑들은 제 물을 만난 듯 신나서 날뛰고들 있어요. 레비쥬가 많은 건 무섭지만 치안이 무너진 건 행복하다는 투로 한 몫 챙겨서 떠날 생각들을 하고 있더군요.”

“평화는 인간을 약하게 만들지. 도둑들조차 약하게 만들어.”

시빌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어쨌거나, 마법사는 그대들도 알다시피 연금술사들 중에서 나온다. 보통 연금술사들 중에서 재능 있는 자들, 즉 비의를 깨우친 자들이 마법사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럼 어떤 이가 되는 겁니까?”

“보통 연금술사의 도제가 되면 정식으로 길드원이 될 때까지 한동안 수련을 하지. 그러다가 어느 정도 수준이 올랐을 때에 특별한 돌을 먹게 되는데 이 돌이 운명을 결정짓는다. 보통은 아무런 반응도 없지만 어떤 이들에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든.”

시빌은 돌멩이를 삼키는 시늉을 했다.

“그런 자들이 마법사가 된다. 돌을 삼켰을 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마법사가 될 수 없어. 대신 연금술의 모든 비의를, 진짜 비의를 전수받는 거야. 나름대로 마법사들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연금 길드의 제어책이랄까.”

시빌은 뱀파스 꾸러미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돌을 삼키고 반응이 일어나면 열이 오르고 살갗이 벗겨진다.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몸이 변하는 과정인데 그 와중에 미쳐버리는 자들도 많고 자살하는 이도 꽤 있다더군. 이 약은 미쳐버린 마법사들을 처치하기 위한 약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뱀파스 꾸러미로 향했다. 왼쪽 상처의 얼굴이 불만스레 일그러졌다.

“그럼 저것은 마법사를 처치하기 위한 물건인 겁니까? 레비쥬가 아니라?”

“마법사를 처치하기 위한 약이라고 해서 레비쥬를 죽이지 못한단 법은 없지.”

시빌은 꽁꽁 묶인 약 꾸러미 중 하나를 풀어헤쳤다. 메마른 소리와 함께 새까만 가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쇳가루를 갈아 놓은 듯한 생김새였다.

“레비쥬들이 아멜리타의 초대를 받고 성으로 올 때 이 물건들을 사용할 거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레이븐이 기겁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마법사는요? 설마 제가 상대해야 하는 겁니까?!”

까마귀가 마법사라는 건 사기협잡의 산물임을 알고 있는 아네모네가 짓궂게 웃었다.

“마법사는 마법사가 상대해야죠. 그럼 누가 상대합니까?”

엘린도도 놀란 얼굴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레비쥬는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 유물께선 아멜리타 님만 전력으로 상대해 주십시오.”

레이븐은 지극히 떫은 표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웃었다.

“물론, 예. 제가 상대하겠지만요. …시빌? 잠깐 나랑 얘기 좀.”

“기대할게, 레이븐.”

시빌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머리카락을 어둡게 염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게 빛나 보이는 그 미소에 레이븐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레이븐의 새까만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그는 약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설명을 요하는 레이븐의 눈길에 시빌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힘은 레비쥬에게만 쓸모가 있어. 물론 환영을 썩 잘 다루기는 하지만 미리 알고 있다면 별문제가 안 돼.”

“레비쥬에게만 쓸모가 있다?”

“레비쥬가 각성할 때의 일을 다시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자의 힘이다. 대부분의 레비쥬는 인간이었을 때와 각성 때의 기억을 잊은 채 살아가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다는 정도로만 말 해두지.”

“그럼 당신은 위험한 것 아닙니까?”

레이븐의 목소리엔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 기억이 레비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좋지 않은 것이니 무기가 되는 거겠죠?”

“날 걱정해 주는 건가? 이거 기쁜걸.”

시빌은 능글맞게 웃으며 레이븐의 갈색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친밀한 태도에 옆에서 보고 있던 엘린도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랐다.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이십니다?”

“내 마법사인걸. 당연한 것 아닌가.”

“아멜리타 님과 계실 때완 썩 다른 모습이셔서 말입니다. 이런…. 크흠.”

엘린도는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연인 같은 모습을 영주님께서 보이실 줄은 말 그대로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나도 몰랐네.”

시빌은 솔직히 시인하며 자신의 손안에 잡혀있는 레이븐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매끄러운 피부가 손아귀에 감겨와 기분이 좋아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심 우울했고 조금은 비장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괴이한 식습관만 고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괴이한 식습관이요?”

“그런 게 있네.”

눈알 먹기를 거리껴 하지 않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시빌은 엘린도를 외면했다. 카디넬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을 유물이란 말 한마디로 억누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레이븐의 이름 그대로인 습성들을 알아채면 대놓고 꺼려하며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내 마법사의 습성을 자네가 알 바는 아니고…. 그대의 수하들은 레비쥬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한 자들인가?”

“당신께서 키우신 기사이지 않습니까. 저보다는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기사단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뒷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작은 불빛만을 켜놓은 무기고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누구냐.”

“다마쉬입니다. 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들어오도록.”

엘린도의 허락이 떨어지자 젊은 기사가 무기고 안으로 들어섰다. 시빌이 살아 돌아온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사들 중 하나인 다마쉬는 공손한 태도로 경례했다.

“마법사가 초대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일시는 내일 오후 3시경. 홀에서 접견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일행들은 시선을 재빠르게 교환했다. 예상보다 훨씬 이른 움직임이었다.

* * *

초대장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하늘색 머리칼의 바쉬엘라였다.

그녀는 엷은 미소와 함께 그 초대장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 주위엔 많은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기쁘면 자신들도 기쁘다는 듯 환희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 머무는 것도 슬슬 지루하던 참이다. 하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어. 난 내일 북부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만했지만 고혹적이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돌려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대들의 노고 잊지 않겠다.”

초대받은 것은 모두 세 명으로 누가 북부의 주인이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바쉬엘라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원했던 것 모두를 가져왔다. 그녀는 이번에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쉬엘라는 중부지대의 귀족가에서 태어났다.

곡창지대에서는 살짝 벗어났지만 풍요로운 영지였다. 레비쥬는 있었으나 그들의 땅에선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계속된 레비쥬의 학살과 지배 속에서도 인간은 땅을 일구며 작물을 키워냈다. 그것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소임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오래된 인간 영주 가문에서 바쉬엘라는 태어났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이웃 영지 후계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하늘색 머리카락은 창공에 비견되었고 녹색의 눈동자는 숲의 한 조각 같았다. 우아하고 교양 있는 바쉬엘라. 사람들은 흠모의 정을 담아 그렇게 불렀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는 자신이 자란 영지를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최고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시골이었고, 주변의 남자들은 따분했다. 촌놈들. 아무도 없을 때 그녀는 경멸을 담아 중얼거렸다.

“로겐에서 만든 목걸이가 갖고 싶어요.”

청혼을 하기 위해 온 이웃의 영주에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가장 커다랗고 안정된 영지. 그곳의 영주가 레비쥬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감히 그를 노려보았을 것이나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란 것을 잘 알았다.

그녀의 앞엔 세 명의 구혼자가 앉아 있었다. 바쉬엘라는 자신의 나이가 헐값으로 취급될 때까지 처녀로 남길 원하지 않았다. 바쉬엘라는 노처녀들을 늙은 암탉에 비유하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웃 영주들의 수준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늙은 암탉이 될 생각은 없었다.

바쉬엘라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하여 남자들은 로겐으로 향했다. 강대한 레비쥬가 통치하는 북부의 수도는 문화의 중심지였고 목걸이와 같은 세공품 또한 일류였다. 대개의 레비쥬가 무기와 전쟁에만 힘을 쏟는 데 비해 북부의 레비쥬는 제법 괴짜였던 것이다.

세 명의 구혼자들은 로겐에서 아름다운 물건들을 사들였다. 첫 번째 구혼자는 목걸이만을 사 갔고, 두 번째 남자는 목걸이와 반지를 사 갔다. 바쉬엘라는 세 번째 구혼자와 결혼했다. 그는 장신구 일체뿐만 아니라 그에 어울리는 드레스도 구비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혼을 한 바쉬엘라는 남편이 로겐에서 사 온 물건들을 특별한 날마다 몸에 둘렀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그녀의 자태에 숨을 멈췄고 바쉬엘라는 그 시선들을 즐기며 남편을 손끝으로 부렸다.

그 날도 평소와 같이 로겐의 물건들을 꺼내 입으려던 참이었다. 겨울 축제가 곧 시작될 무렵이었고 그녀는 곧 남편과 팔짱 낀 채 성을 나서야 했다.

‘촌놈들에게 나처럼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은 과분해.’

거울에 자신의 자태를 비춰보며 바쉬엘라는 진주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쌀알 같은 진주들이 금구슬과 함께 정교하게 얽힌 값비싼 목걸이였다. 그것을 흡족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쓰다듬던 바쉬엘라는 곧이어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걸이를 집어 들어 그 진주를 혀로 핥았다. 이빨로 우걱우걱 진주 알을 씹어 삼켰다. 너무나 배가 고팠다. 사라질 것 같지 않은 허기에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축제의 한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것은 인간의 시체였다. 그녀에게 목걸이를 사준 남편의 손을 잡은 채 그녀는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웃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도살당한 영지민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레비쥬가 된 것을 깨달았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런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니? 남편은 죽었고 영지는 자신의 것이다. 근처에 다른 레비쥬는 없다. 초조해할 이유도 없고 그냥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을 향해 웃으며 걸어갔다. 그들은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맘에 들었다. 조금만 더 경탄이 서려 있었으면 했지만 저 정도면 괜찮았다. 아주 괜찮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먹어. 아니면 죽든가.”

바쉬엘라는 쥐고 있던 남편의 시체를 기사들의 앞으로 내던졌다. 그녀를 지극히도 사랑하던 영주의 얼굴은 춤추는 동안 피가 빠져 허옇고 딱딱했다. 바쉬엘라는 키득거리며 기사들이 그들의 주인이었던 자를 씹어 삼키는 것을 보았다. 먹지 않는 자들은 죽였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가 그녀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모두를 죽였다.

기뻤다. 단숨에 두 개의 영지가 그녀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대장을 두 번째로 받은 것은 치커리였다.

로겐의 하수도에서 짐승처럼 잠자고 있던 그는 초대장을 가지고 가던 시종을 밟아 뭉갠 뒤 더듬더듬 글을 읽었다. 해가 반쯤 넘어간 하수도는 어두웠고 그는 글을 잘 읽지 못했다. 그는 귓가를 벅벅 긁었다.

치커리는 북부의 한 마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소작농이었던 아버지가 일구던 땅을 그대로 물려받아 경작했다. 일은 힘들었고 가난은 심해지기만 했다. 북부의 기후는 험난했다. 변덕스러운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일주일은 고생해야 쓰러진 작물들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그가 사는 곳에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곳은 레비쥬의 영지였다. 강 하나를 기점으로 기후와 바람이 온순해져서 가장 작은 땅을 지닌 농부도 배를 곯지 않았다.

여자들은 모두 강 건너로 시집가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누이들도 모두 떠나자 그는 허름한 집에 혼자 남게 되었고 아무도 그를 보살펴주지 않았다. 척박한 땅과 빈집만이 함께 하는 고독 속에서 그는 나이 들었다.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에게 선물을 하나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먹고 사는 것도 빠듯했지만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갈색 털이 복슬복슬한 예쁜 강아지였다. 치커리는 나무 조각을 깎아 이름표도 만들어 달아주었다. 항상 붙어 다녔고 겨울엔 따스한 체온 덕에 위로받았다.

그 일은 밭을 갈던 중 일어났다. 입이 늘어났기에 조금이라도 수확을 늘려보고자 치커리는 농지 한쪽의 수풀을 베어내고는 땅을 다듬고 있었다. 커다란 돌멩이를 골라 솎아내던 중에 무언가 쇳소리가 삽 끝에 걸려 들려온 것이다.

치커리는 의문 속에 땅을 파 보았다. 누군가가 숨겨 놓은 보물일 지도 몰랐다. 부러진 농기구의 날이거나 그릇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쇠붙이라면 재산이 됐다.

땅속에서 나온 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뿔피리였다. 묻어 있던 흙을 털어내자 지극히 정교한 무늬가 빛을 발했다. 치커리는 기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가치 있는 보물임이 분명했고 좋은 값에 팔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웃으며 굽은 몸을 일으켰다.

온갖 꿈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어도 올겨울엔 배부르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고, 일을 해줄 여자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아니라 밥을 해주고 빨래를 도와줄 여자 정도라면 그렇게 큰돈이 들지도 않으리라. 어쩌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신전에 기부한 뒤 여생을 편하게 사는 것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이 뿔피리의 값어치가 얼마나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개가 다가오지 않았다. 치커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갈색 멍멍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개는 무서운 것이라도 본 양 땅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이리와 멍멍아! 이리와! 아주 좋은 걸 캐냈단다. 너도 포식하는 거야! 고기를 먹을 수 있어! 그래, 고기도 사 줄 수 있단다!”

치커리는 손짓했지만 개는 더욱 두려운 듯 뒷걸음질 치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치커리는 욕설을 내뱉으며 개를 쫓았다.

“이리 와! 이 배은망덕한 놈! 이리 오렴!”

치커리는 개를 쫓아 달렸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지쳤고 곧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이 행운의 순간에 왜 저 개새끼가 떠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쳐 어깨가 처진 채 집으로 돌아갔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을 골라 뿔피리의 표면을 문질렀다. 엉겨 붙어 있던 흙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잔인한 학살의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치커리는 두려워졌다. 농부의 손에 있기에는 너무 큰 보물이었고 그 문양은 불길해서 저주에라도 걸릴 것만 같았다.

‘땅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을 내가 괜히 깨운 건 아닐까?’

날이 밝는 대로 치커리는 신전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밤중에 이런 물건을 들고 움직이긴 싫었다. 그는 흙을 닦아낸 청동 뿔피리를 조심스레 옷가지에 싸서는 탁자 위에 놓았다.

고된 농사일과 달리기로 지친 몸은 빠르게 잠들었다.

치커리는 새벽에 다시 눈을 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개가 돌아온 것일까? 빗장은 내려져 있지만 개구멍은 열려 있었다. 들어오려면 쉽게 들어올 수 있을 텐데 왜 밖에서 짖고 있을까?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독한 허기에 무릎을 비틀거렸다. 치커리는 배를 감싸며 몸을 한껏 웅크렸다. 뭐라도 먹어야 했다. 뭐라도. 삶은 감자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탁자를 지나쳐 부엌으로 가려던 치커리의 눈에 뜨인 것은 청동의 뿔피리였다.

그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이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인간이 쇳덩이를 씹어 먹을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구멍을 가르며 위장으로 떨어지는 것은 분명 뿔피리의 잔해였다. 치커리는 게걸스레 청동 뿔피리를 씹어 삼키고서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개 짖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계속 짖고 있는지도 몰랐으나 그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죽어버린 개의 잔해였다.

그는 자신의 허름한 오두막에 앉아 고민했다. 강 건너로 시집간 누이들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그곳은 레비쥬의 땅이었다. 친족을 무분별하게 죽여 근처에 새로운 레비쥬가 생긴 것을 알아채게 할 수는 없었다. 지독한 추격이 시작될 것이고 갓 태어난 자신은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그는 달이 뜨지 않은 밤 강물을 타 넘었다. 새벽에 문을 두드렸음에도 그의 누이는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다. 동생이 온 것에 기뻐하며 그녀는 화로에 불을 지폈다. 공기가 따스해지는 것을 느끼며 치커리는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남편은 잠들어 있었고 누이의 품 안엔 한 살 된 늦둥이 조카가 안겨 있었다. 그녀가 아이를 얻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난산이었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던 고통이며 생명을 건 위험한 출산.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결혼생활. 하지만 아이의 붉은 뺨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환해서 그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었던 것이다. 치커리 그 자신도 마치 자기 자식이 태어난 양 기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아이의 목을 졸라 죽이는 데엔 아무런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쾌감이 몸을 뒤흔들었다. 그는 아이의 시체를 누이의 품에 안겨주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목이 꺾여 죽은 누이는 흰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커리는 남편을 살려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죽는 것보다 살아남은 게 더 괴로울 테니. 그리고 한 명 살려두면 레비쥬의 짓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누이의 집에 들어왔던 것처럼 조용히 뒤돌아 나갔다. 순식간에 강까지 달려가 해가 뜨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지주의 집이 보였다. 치커리는 자신의 첫 자금을 저곳에서 조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사관들이 치커리의 집을 찾은 것은 오후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강을 건너서는 그들의 영지가 아니므로 지주가 수사관의 옆에 서 있었다. 치커리는 한껏 태연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미안하네. 간밤에 그대의 누이가 죽었어. 조카도.”

치커리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핏줄이 이어진 식구들이 모두 죽었다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사력을 다해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잘되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대뜸 검을 꺼내 들더니 이렇게 물어왔던 것이다.

“그대는 인간인가 레비쥬인가?”

치커리는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 인간이라고 말하려 했다. 여기서 이들을 죽이는 건 간단했지만 수사관은 레비쥬가 다스리는 땅에서 온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온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쉽게 정체를 들통 낼 수는 없었다.

“맙소사. 자네 웃고 있잖아!”

“말해! 그대는 인간인가 레비쥬인가?”

“나는 레비쥬다!”

치커리는 소리 높여 외쳤다. 억누르려 노력했던 만큼 목소리는 멀리 퍼졌고 곧 포효가 되어 마을 위를 뒤덮었다. 치커리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자를 살려두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치커리는 수사관의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지주의 뒤를 쫓아 다리를 잡아 뽑았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로 뒤덮였다. 이상을 알아챈 마을 사람들이 도망쳤고 그는 사람들의 뒤를 쫓았지만 말을 탄 자들은 놓치고 말았다.

치커리는 도망쳤다. 주변에 새로운 레비쥬가 각성한 것을 깨달은 로겐의 영주가 무서운 기세로 그를 추격했다. 개 짖는 소리가 났다. 그가 어디로 도망치든 그를 쫓는 개들의 울부짖음이 뒤따라왔다.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았다.

세 번째로 초대장을 받은 것은 보이드였다.

성 밖에 진지를 친 그는 가장 안쪽의 천막에 앉아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강대한 영주가 근처에 있었던 탓에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살아가던 그는 요즘 들어 기분 좋게 웃는 일이 많았다.

보이드는 북쪽의 설원에서 태어났다. 흔히들 로겐이 있는 곳을 북부라고 불렀지만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커다란 산과 눈 덮인 계곡들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그는 사냥꾼이었고 그의 아버지도 사냥꾼이었다. 아마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사냥꾼일 거라고 보이드는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물건을 들이거나 땅에서 파내지 않았다. 그 일이 일어났던 날, 그는 잘 벼려진 창을 든 채 굽이진 협곡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 외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지독한 허기가 일었지만 보이드는 자신이 반나절 이상 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경탄 어린 시선으로 하늘을 나는 매를 보았고 긴 휘파람을 불어 그 매의 소리를 따라 해보았다. 그뿐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사냥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 어떤 포악한 맹수도 힘을 합쳐 사냥했던 마을 사람들이었으나 레비쥬만은 어쩌지 못했다. 그 레비쥬 또한 사냥꾼이기 때문이었다. 보이드는 세 명을 살려 수족으로 삼았다.

훌륭한 사냥꾼들을 데리고 그는 근처의 마을들을 차근차근 점령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질려 그를 따랐다. 사냥꾼들은 좋은 병사로 쓸 수 있었으므로 보이드도 그들을 죽이기보단 수하로 거둬들였다.

보이드가 멋진 산채를 짓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커다란 흰 모피로 바닥을 장식하고 자신을 상징하는 깃발도 만들었다. 깃발은 중요했다. 자신의 깃발이 하늘에 펄럭이는 걸 보고 있자면 대륙 전체를 가지고픈 욕망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는 남쪽으로 진군했다. 레비쥬의 영지와 마주치지 않았기에 거침없이 영토를 넓혀가던 그는 곧 발루아와 맞닿았다. 그 미친 여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덤벼왔다. 전쟁이 벌어졌고 지독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보이드는 산악지방에 걸친 자신의 영지가 쇠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영지는 과도한 세금과 징집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롭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은 길어질수록 건성이 되어갔고 어느 날 눈이 녹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보이드는 입맛이 썼다. 그가 남쪽의 전쟁에 집중한 사이 동쪽의 많은 영지를 새로 생긴 레비쥬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를 갈며 새로운 애송이를 잡고자 덤볐지만 놈은 제법 단단하게 방어해왔다. 그는 동쪽의 애송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쳐버리기엔 시기를 너무 놓친 데다 남쪽에도 적이 있어 군대를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보이드는 이를 갈았다. 양쪽으로 적이 있어 이제 어느 쪽으로도 영토를 넓힐 수 없게 된 것이다. 산맥과 레비쥬에 둘러싸여 그는 고립되었다.

발루아의 계집년이 죽었다는 소식은 고립된 지 70년이 막 지날 때쯤 들려왔다. 보이드는 말 그대로 화색이 되었다. 남쪽의 비옥하고도 거대한 땅덩어리가 통째로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이다.

하지만 보이드는 신중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레비쥬가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아직 마법사를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뭔가 모자란다고 느꼈던 것이다.

발루아가 죽었다는 소식 뒤에 날아온 급보는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마법사가 새로운 레비쥬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전쟁에서 부딪쳤기에 아멜리타의 힘을 잘 알았고 발루아의 힘도 잘 알았다. 그 여자를 죽이고 마법사를 손에 넣었다면 쉽게 대적할 만한 상대는 아닐 게 분명했다.

보이드는 구경꾼이 되어 새로운 북부의 주인이 벌이는 전쟁들을 감상했다. 신중함은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땅을 욕심내어 달려든 레비쥬와 마법사들이 그 목을 떨군 채 이슬처럼 사라졌다.

보이드는 조용히 몸을 사렸다. 북부의 영지는 이제 영지라기보단 왕국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커졌고 그 땅의 주인이 자신을 치워버리지 않는 것은 단지 귀찮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리 좋은 짐승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떠올렸다. 발자국을 숨기고 흔적을 어지럽혀서 쫓는 이를 골탕 먹이는 건 커다란 짐승의 방법이었다. 호랑이굴 옆에서 살아가야 하는 토끼는 자신이 너무 작아서 사냥하기에는 하찮은 존재라고 맹수가 느끼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라졌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자신이 토끼가 아니라, 좀 더 커다란 맹수 과의 짐승이라면?

보이드는 시빌이 사라진 로겐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오랜 기다림이 드디어 결실을 보려 했다. 건방진 계집도 강하고 저 약삭빠른 시빌도 강했지만 결국에 살아남아 이 하얀 성을 포위한 것은 자신의 군대와 깃발인 것이다.

그는 북부를 사냥할 마음에 한껏 들떴다.

세 명의 레비쥬는 한 자리에서 마주쳤다.

이 인류를 초월한 괴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전쟁이 아니고선 거의 없는 일이었다. 볼만한 일이었으나 구경꾼은 없었다. 창문의 작게 열린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던 아이들의 눈동자도 곧 부모에게 이끌려 사라지기 일쑤였다.

화창한 날이었지만 부드러운 햇살보다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날이었다. 안개도 없는 아주 깨끗하고 건조한 날씨였다. 역사의 중요한 장면이 터지기에는 좀 장엄함이 부족하다 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그 날은 천둥 같은 날로만 남았다.

로겐은 구불거리는 성벽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도시였지만 성으로 통하는 도로만큼은 일직선으로 곧게 나 있었다. 그 도로를 세 명의 레비쥬는 각자의 부하들을 거느리거나 홀로 검을 쥔 채 가로질렀다. 여유로운 태도를 가장하고 있었으나 모두들 상대를 처치해버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아멜리타가 무슨 제안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그의 초대에 응한 것이 한 명뿐이라면 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레비쥬들은 그것이 곧 열릴 것이라 생각했다.

바쉬엘라는 눈앞에 펼쳐질 최고의 지위와 환호를 상상하며 닫힌 성문을 바라보았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북부의 수도를 자신이 갖게 된다니 희열이 밀려왔다.

치커리는 이제 어디서도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행복했다. 계속해서 그를 쫓던 레비쥬는 3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지금 이 땅과 마법사를 남겼다. 본능이 쇳소리로 계속해서 짖어댔다. 이 모든 것을 가져야만 한다고.

보이드는 어깨를 폈다. 그는 거대하게 보이고 싶었다. 저 성안에서 기다리는 것은 그와 싸웠던 마법사였다. 그자에게 소심한 겁쟁이로 보이기보단 웅크린 채 이빨을 갈던 맹수로 보이고 싶었다.

* * *

그 세 명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전쟁의 길을 걸어온 자들이었으나 그날만큼은 같은 풍경에 노출되었다. 검고, 둥글고, 거대하면서도 기묘하게 긴 단지들이 성문 앞에 놓여있는 것에 그들은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정중한 초대를 받고 와서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시꺼먼 정체불명의 것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면 누구나 이상한 기분에 빠질 것이다. 더군다나 성문은 아직도 닫혀 있었고 무장한 기사들의 낯빛은 싸늘하여 도무지 다음 영주를 맞이하는 모습으론 볼 수가 없었다.

분통을 터뜨리려던 보이드는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꾹 눌러 참았다. 이것이 마법사의 시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옛날이야기 중엔 세 명의 형제를 시험하는 얘기가 많았다. 이 일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을 거라 어떻게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한 건 보이드만이 아니었다. 바쉬엘라는 언짢은 기색을 부드러운 미소로 감추며 기다란 항아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이런 곳에서 촌스러운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아하고 세련된 태도로 마법사를 매료시키는 일만이 그녀에게 어울리는 미래였다.

저 미지의 물건에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담대하게 행동해야지. 우선은 쓰다듬고 살펴본 뒤, 무엇이냐고 정중하게 물어보는 거야.

단지들에 다가갔던 바쉬엘라는 그것이 곧 쇠로 만들어진 물건임을 깨달았다. 쇠로 된 단지는 두껍고 차가웠다. 귀중한 광물로 이러한 물건을 만든 것은 일종의 사치라고 해도 좋았고 바쉬엘라는 웃으며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했다. 검고 둥근 입구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그 순간 강철의 포탄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가스의 압력으로 분출된 검은 죽음은 레비쥬의 머리통을 산산이 부수고는 하늘에 그 잔혹한 궤적을 뿌렸다. 한동안 그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천둥이 맑은 하늘을 강타했을 때, 레비쥬와 그 추종자들은 절망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열두 문의 대포가 침략자들을 향해 발포되었다.

* * *

이곳은 그의 집이었기에 시빌은 말 그대로 제집 걷듯 회랑을 가로질렀다. 3년의 세월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선 겨우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기억이 사라지면 감정 또한 사라지는 것일까?

홀로 들어가 아멜리타를 마주치기에 앞서, 시빌은 정말로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신감이나 분노나 복수에 대한 쾌감 그 무엇도 그의 마음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 어리석은 여자를 사랑한 마법사에게 동정이 들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도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빌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래도 이백 년 가까이 살붙이며 살아온 상대인데 죽이러 가는 길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팔짱까지 끼고서는 한참을 고민하던 시빌은 결국 한숨을 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적어도 화는 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아니라니 실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화도 동등한 상대여야 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 장식품밖에 못 되는 마법사가 제 주제도 모르고 움직거려 로겐을 공개 입찰에 내놓은 것을 보고 있자면……. 아. 이제야 좀 화가 나는군. 시빌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짧게 웃었다.

기사들이 점령한 성안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실종되었던 그들의 주인이 돌아오자 시종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복종했다. 시빌은 그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 성을 지배하던 자였고 그런 사람에게 불복하는 것은 시종들에게 있어 자신의 혀를 씹는 것보다 더 불유쾌한 일이었다.

엘린도를 필두로 한 기사들의 난입에 성의 경비병들 또한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셨던 것은 시빌이었고 그가 없는 지금 경비들이 따라야 할 건 서 엘린도였다. 마법사는 기사단장을 막으라거나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사단장이 자신들의 수하를 끌고 성안 어디든 가지 못 할 것이 없다는 게 경비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 생각은 뒤집어쓴 망토를 걷어 올린 시빌의 등장에 싹 사라졌지만.

시빌은 검을 뽑아 든 채 홀 안으로 들어섰다.

괴물에 대한 인간의 학살은 도덕의 여지가 없어 더욱 잔인하고 역겨웠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숭고하다 해야 옳지 않을까. 억압에 대한 최초의 반격이란 천 년 동안 흐르지 않던 구름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았다.

이유 없이 폭력을 당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폭력을 가하는 법이다. 시빌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움직일 필요도 없이 성문 앞은 정리되었다. 발사된 대포에 뭉개진 레비쥬의 몸뚱이가 재생하기도 전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하나가 아니라 둘, 둘이 아니라 셋. 열린 것은 성문이 아니라 영지민들이 살고 있는 집과 가게의 문들이었다.

폭연의 희뿌연 매캐함 속으로 걸어 나온 인간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인간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레비쥬를 쳐 죽였다. 도살하기 위해 키운 가축을 죽일 때도 하지 않을 손속으로 바쉬엘라의 고운 얼굴이며 치커리의 거친 손등을 깨부쉈다. 혼란의 와중에서 용케 몸을 피한 것은 보이드 한 명뿐이었다. 자신이 데려온 군대의 철갑과 창 속에 숨어 그는 쏜살같이 로겐을 빠져나갔다.

이러한 짓거리를 마법사가 벌였는지 다른 누가 벌였는지 보이드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맹수가 이를 드러내면 냄새가 나는 법이라 꼭 보겠다고 덤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핏물 섞인 침을 땅에 내뱉으며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군대를 모조리 불러들였다.

“도망친다. 짐이고 뭐고 다 버리고 벗어나는 데만 주력해!”

“혼란스러울 때 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난리인데요.”

보이드는 수하의 의견에 분통을 터뜨렸다.

“미친 새끼! 아까 그 이상한 폭음에 레비쥬 둘이 가루가 됐어! 군대 전체를 들이밀어서 거대 미트볼이라도 만들자는 거야?!!”

일갈한 뒤 보이드는 전력으로 도망쳤다.

“개 같은 땅! 여기에만 얽히면 재수가 없어, 씨발!”

시빌의 오랜 측근들이 들었다면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꾸짖을 일이었다.

레이븐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길게 치솟은 망루의 횃대에 앉아 소란스러운 전쟁들을 내려다봤다. 까마귀의 노란 눈동자는 매의 밝은 눈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 날개가 속한 하늘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죽음을 목도하며 거친 울부짖음을 내었다. 이것은 아직 작은 죽음이라고 내지르는 것에 레이븐은 미소 지어 화답했다.

“알아. 그리고 저기 배신자가 있다.”

수백의 새들은 일시에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퍼덕임도 없는 하늘의 그 침묵은 아멜리타의 홀에 깃든 침묵과 닮아 있었다.

굉음이 성을 울리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한 대지의 떨림에 아멜리타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레비쥬들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 성문을 열라고 명령한 것이 벌써 한 시간 전이었다. 반원의 원탁에 준비한 다과들은 손님을 기다리며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고 아멜리타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홀 안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시종들은 어디로 갔지? 기사들은?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시중을 들고 있던 인간들이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성안. 멀리서 들려오는 쇳소리. 아멜리타는 치밀어 오르는 기시감에 아찔해졌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비명이 터질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발루아가 죽을 때 로겐이 이러했었다. 어떻게 그 날의 침묵을 잊을 수 있을까.

“그가 돌아왔어…….”

“아아. 돌아왔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낯익은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따스하던 홀 안이 냉막하고 서늘한 무덤처럼 변화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목이 떨어지기 전 발루아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아. 그래. 물어보면 되겠구나. 그녀에게 물어보면 돼. 죽기 전의 심정이 어땠느냐고.

“흐흐. 으흐흐흐흐흐! 크크큭!!”

아멜리타는 고개 들어 홀 안으로 들어서는 레비쥬를 바라보았다. 황홀한 금발 대신 어둡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그림자에 덮여 마치 죽음을 뒤집어쓴 듯 번들거렸다. 복수하기 위해 지옥의 검은 진흙 속에서 기어 나온 것이었다. 아내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모습 그대로 목을 잘라 죽였는데 흠집 없이 기어 나온 저 몰골을 봐라. 악귀나 악마도 받아들이는 죽음이, 삼키지 못하겠다며 토해낸 저 모습이라니!

“죽음이다! 죽여버리겠어!! 다시 저자를 삼켜라! 그리고 다시는 토해내지 마!!”

아멜리타는 힘을 일으켰다. 한 번 실패한 적이 있는 공격이었으나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얀 연기가 물보라처럼 일어나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시빌은 홀 안의 그림자가 장대한 산과 계곡의 그림자로 바뀌는 것에 혀를 찼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자신의 고향이었다.

* * *

시빌은 룬강 상류의 산간마을에서 태어났다.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씨족 마을에서 그는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가 있었지만 거의 온 마을이 힘을 합쳐 아이들을 죄다 키워내고 있었다. 옆집 아저씨는 아저씨가 아니라 삼촌이었고, 누나는 이모였다가 심술을 부릴 때만 아주머니로 변했다.

시빌은 형들과 함께 산 원숭이마냥 숲 속을 뛰어놀았다. 분지에 있어 따뜻한 룬강의 상류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넝쿨이며 무성한 잎의 나무들이 많았고 그것들은 바위와 동굴의 표면을 감싸 근사한 비밀장소를 만들어주었다.

마을은 계절마다 약초를 채집하고 과일과 작물을 심어 생계를 유지했다. 무성한 숲은 삶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사람들은 공경을 담아 돌이며 물을 향해 깊은 감사를 드렸다.

금기가 많은 마을이었다. 상류의 끝에 있는 웅덩이엔 들어가선 안 된다. 바람이 동쪽으로 불 땐 재채기를 해선 안 된다. 보통의 시골 마을보다도 접근해선 안 되는 계곡과 동굴의 숫자가 특히나 많았다. 주름살 자글자글한 할망구들은 이상한 냄새의 약초를 피우며 밤마다 아이들을 겁주곤 했다. 말을 듣지 않고 금기를 지키지 않으면 무서운 마귀가 머리끝부터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말을 듣던가?

시빌은 곧잘 가지 말라는 동굴로 아이들과 함께 놀러 가고는 했다. 시빌 마이언이 그의 이름이었다. 마이언은 부모의 성이 아니라 마을의 이름이었다. 그 마을의 아이들은 모두가 마이언이었고 적자도 서자도 없이 평등하게 자라났다.

시빌이라는 이름은 일곱 번이나 아들을 낳고 지친 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이제 이 시골엔 더 이상 남자가 필요 없으니 도시로나 가라는 뜻이었다. 그 이름 때문일까. 소년은 지독히도 영리하고 겁을 몰랐다. 어차피 자신은 떠날 것이라면서 금기란 금기는 온통 헤집고 다닌 것이다.

금기 중에는 지킬 만한 것도 있었고, 허무맹랑한 것도 있었다.

“영리해. 너무 영리해. 그래 마치 옛날 사람 같구나.”

한 번은 쭈그렁탱이 할멈이 시빌을 향해 말했다. 할멈이 옛날이라고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까마득한 때인지 시빌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할멈은 반쯤 빠진 이빨을 보이며 웃더니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온, 그녀도 이야기의 끝을 모르는 옛날얘기를 해 주었다.

아직 신들이 하늘의 성좌에 간섭을 하고 까마귀에게서 마법을 훔쳐오기 전, 대지를 딛고 선 채 하늘을 보던 한 인간이 있었다. 어깨에 얹은 새들이 세계의 모든 비밀을 속삭여주어 그자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왕이었는데, 땅의 티끌과 불의 재, 햇살에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장 하찮다고 알려진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였다.

“가장 비천한 것이 어쩔 땐 가장 아름다운 법이란다.”

그때는 모든 것이 죽던 때였다. 신들도 죽고 하늘에 떠오르던 해와 달도 죽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생각했다. 저자는 죽지 않는 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인간은 죽잖아요?”

할멈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신들 중 하나가 인간에게 물었단다. 넌 모든 것을 알고 있다지?”

인간은 겸손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는 만큼 알지요.”

“그렇다면 죽음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는가? 만약 안다면 우리 모두 그를 피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썩 괜찮게 들렸기 때문에 왕은 새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새들이 말했다.

“우리들도 몰라요. 아마 까마귀는 알고 있을 거예요.”

인간은 까마귀를 찾아갔다. 까마귀는 시체가 묻힌 언덕에 앉아 검은 털을 다듬고 있었다.

“새들이 그러는데 넌 죽음이 어디서 오는지 안다며?”

까마귀는 깍 하고 우짖었다.

“그래. 난 알아.”

“그렇다면 내게 알려주지 않을래?”

“알려주면 넌 무얼 줄 거지?”

인간은 당황했다. 지금껏 그에게 대가를 요구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뭐든지.”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지만 까마귀는 끽끽 웃었다. 대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인간에게 죽음이 어디서 오는지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이 비밀은 너 혼자 알고 있어야 돼. 안 그러면 그녀가 무척 화를 낼 거야.”

그는 까마귀에게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인간이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까마귀가 대가로 모두 가져가 버린 것이다. 새들도 어깨 위로 날아오지 않았다. 인간은 쓸쓸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인간을 기다리고 있던 신은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어떻게 된 거니? 새들이 떠났구나.”

“까마귀가 가져갔어요.”

“그럼 죽음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고 있고?”

그리고 인간은 신에게 비밀을 말해 주었다. 대답을 듣자 신은 곧바로 그에게서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인간을 찾지 않았다.

할멈은 이야기를 끝내더니 시빌의 뺨을 아프도록 꼬집었다.

“넌 마치 까마귀와 만나기 전의 인간 같구나. 옛날 인간.”

나이가 들어도 시빌은 무서운 것을 모르고 쏘다녔다. 마을이 제약하는 거의 모든 금기에 발을 들인 그에겐 이제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룬강의 수원이 있는 곳엔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거창한 문에 밧줄까지 걸려 있어 들어갈 수 없게 만든 동굴이었다.

사람들은 그 동굴에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쪽을 쳐다보려고도 안 했다. 어지간한 시빌이라도 겁이 날 정도로 그 동굴은 철저한 외면 속에 지켜지고 있었다.

어느 환한 여름날에 시빌은 낚시를 할 것처럼 도구들을 챙겨서는 길을 나섰다. 친구나 형들 그 누구도 그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가 어디 갈지 알고 무서웠던 것이다. 시빌은 마을이 안 보일 정도까지 나오자마자 강의 상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숲은 생명으로 가득 차서 터질 것만 같았고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나도 여름의 햇살이 지켜줄 것만 같았다.

시빌은 금기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간단한 문을 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쾌쾌한 먼지가 흘러나왔고 문 열리는 소리는 두려울 정도로 컸다. 시빌은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울 거라고 생각했던 동굴은 의외로 밝았고, 또 얕았다. 호리병 모양의 방 같은 것이 하나 있을 뿐 커다란 구렁이의 시체나 뼈 같은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대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거기 있었다.

굉장히 커다란 인간의 시체였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듯한 모습이었다. 시빌은 거의 압도되어 죽어있는 거인에게 다가갔다.

깨어진 갑옷이며 보관을 머리에 쓴 남자의 가슴엔 큰 상처가 나 있었다.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고 그 눈꺼풀 위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시빌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거인 옆에 주저앉았다. 처음의 놀람이 가라앉자마자 든 생각은 묻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굉장히 커다란 몸이기 때문에 땅을 파는 것도 힘들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동굴에 시체를 놔둔 건지도 모르겠지만 묻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빌의 작은 손이 거인의 몸에 닿았을 때였다.

바위처럼 감겨 있던 눈이 뜨이고 늘어져 있던 커다란 손이 시빌의 팔목을 붙잡았다. 살짝 고개를 틀어 시빌을 바라보는 거인의 눈이 무채색으로 빛났다. 죽은 이의 폐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숨소리 같은 것이 거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빌은 온갖 환상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의 쾌감. 적을 쳐부술 때의 도취.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말과 전차의 웅대한 바퀴 소리. 그는 깃발을 든 채 위대한 영웅이 되어 전선을 지휘하고 있었고 언제나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 지었다. 성마다 휘날리는 깃발은 그의 깃발이었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를 유혹하고자 부드럽게 다가온다.

시빌 또한 평범한 남자애였다. 멋진 기사나 영웅이 되어 적을 물리치는 놀이를 질리지도 않고 했었다. 놀이일 뿐이지만 그 놀이에서 이겼을 때의 우월감 또한 잘 알았다.

‘그렇게 될 수 있어. 나처럼 커다란 거인이 되어 신의 힘을 휘두르는 거다. 넌 왕이 될 수도 있단다.’

시빌은 숨을 삼켰다. 손목을 붙잡은 거인의 손은 정말이지 커다랬다. 묻어주겠다고 생각해서 이런 행운이 온 걸까? 선의에 대한 보답으로?

또 다른 환상이 덮쳤다. 이번엔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얗게 드러난 뼈로 꽉 찬 언덕이 있었고 검을 든 남자가 웃고 있었다. 몸이 얼어붙었다. 불타오는 지붕과 비명과 폭력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 쾌락 또한 네 것이 될 수 있다고. 넌 전쟁의 신이 될 수 있다고.

거인의 손아귀는 이제 시빌의 팔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바위에 달라붙은 조개의 몸부림처럼 소년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시빌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힘이 그를 괴물로 만들리란 걸 시빌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허기도 느껴졌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동굴이 웃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새로운 몸을 찾았다며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은 전쟁의 껍데기가 되어 마을을 불태우리라.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어머니를 죽이고 함께 놀며 뛰어다닌 형제들을 죽이게 되리라. 그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라고 시빌은 생각했다.

그러던 한순간. 시빌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거인의 손을 뿌리칠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은 죽은 시체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시빌 그 자신이 원하면 그 무엇도 그의 몸을 빼앗을 수 없었고 그가 전쟁을 벌이도록 할 수도 없었다.

여름이었다. 찬란한 태양의 빛이 얕은 동굴 안으로 들어와 그의 발치를 비추고 있었다. 이처럼 밝은 낮에 무엇을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시빌은 벌레를 떨쳐버리듯 거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오진 않을까. 거부당한 거인이 일어나 덤벼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할 틈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거인의 손은 힘없이 땅에 떨어지더니 바삭 먼지가 되어 부서졌다. 마지막으로 모아 두었던 힘이 사라졌다는 듯이 거인의 시체는 어중간하게 굳은 진흙처럼 바스러졌다.

시빌은 동굴에서 뛰쳐나갔다. 덮쳐왔던 환상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아냐! 아냐! 난 하지 않아! 난 안 해!”

눈물이 뺨을 적셨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으며 시빌은 계속 달렸다. 어디로 도망쳐도 거인이 쫓아올 것만 같았다. 금기를 깼다고 마을에서 쫓겨날 것 같았다. 그렇게 밤이 될 때까지 달리고서야 시빌은 자신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인간이 어떻게 전력으로 반나절을 달릴 수 있는가? 예전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시빌은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물에 별빛도 달빛도 번져 뿌옇게 반짝거렸다. 이대로 어딘가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도망치는 게 좋지 않을까, 우울한 마음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멀리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목소리의 울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매고 있었다. 늦도록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 사람들의 목소리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디선가 다친 것이 아닐까, 떨어지기라도 한 건 아닐까 염려하고 있었다.

순간 모든 걱정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시빌은 자신을 부르는 마을 사람들에게 헐레벌떡 달려갔다. 곧이어 아이를 혼내는 목소리와 안도한 형제들의 목소리가 밤을 울렸다. 그날 밤 아이는 호되게 꾸중 들은 뒤 부모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고민한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자신이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그게 무에 대순가 싶었다.

그 이후로도 시빌은 아이들과 함께 난리 피우고, 꾸중 듣고, 일을 도우며 잘 자랐다. 다만 마을의 금기를 어기는 일은 없어졌고 우울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기는 일 또한 늘었다.

열여섯이 되었을 때 시빌은 룬강의 뱃사공이 되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루터가 있는 룬강의 하류는 마을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충분히 큰 도시였던 것이다. 자식이 없는 뱃사공의 제자로 들어간 시빌은 금세 노 젓는 법을 익힌 뒤 일을 물려받았다.

강가의 움막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일이었다. 마을에 있었을 땐 티 나지 않았던 시빌의 외모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주목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시빌은 두터운 두건을 눌러쓴 채 살았다. 그렇게 몇십 년이 흘렀다. 그는 늙지 않았고 성장도 멈춰버렸다. 더 늦기 전에 룬강을 떠나 의심을 피하려 했으나, 몇 번 떠날 시기를 놓치자 백 년이 후딱 지났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강 위에 놓고 갔다. 대부분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고 레비쥬와 마법사를 욕하는 이야기였다. 괴물이라고 그들을 부를 때마다 시빌은 노를 잡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단단하고 젊은 손가락들은 하루 종일 노를 저어도 끄떡없었다.

룬강 근처의 사람들은 시빌이 인간이 아닌 것을 눈치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진 않았다. 그는 마을의 오래된 이정표로써 강가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영원히 그렇게 살 수도 있었다.

그날도 손님 한 명이 레비쥬의 이야기를 강 위에 풀어놓았다. 북부에 자리 잡은 한 여자 레비쥬가 저항하지 못하는 마을 하나를 학살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마을은 분지여서 과일이 잘 자라는 곳이었는데 이젠 폐허가 됐다고 했다.

“왜 죽였답니까?”

“이유 따위가 있겠소? 그냥 사냥이 하고 싶었던 거지.”

그날 저녁 룬강은 뱃사공을 잃었다.

빈 배를 뒤에 남긴 채 시빌은 길을 걸었다. 땅을 걷는 것보다는 물 위에서 흔들리며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잡았던 거인을 떠올렸고 레비쥬에 관해 생각했다.

레비쥬는 전쟁의 화신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레비쥬는 언제나 인간이 변해 만들어졌다. 그들도 유혹을 겪었을까? 그 잔혹한 광경들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고 전쟁의 도구로 몸과 영혼을 넘기는 데 동의했다면 그들은 정말로 괴물이었고 누군가 그들을 막아야만 했다.

그래. 더 강한 누군가가. 그들을 억누르고 지배해야만 했다.

시빌은 그 이름이 의미하던 바처럼 도시로 갔다. 도시의 성문에서 의례적으로 행하는 경비의 질문에 시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인간이오.”

* * *

시빌은 꿈에서 깨어났다. 아멜리타는 홀에서 도망쳐 보이지 않았고 과거에의 깊은 향수가 눈가에서 어른거렸다. 시빌은 픽 하고 웃으며 홀을 둘러보았다. 발루아를 죽일 때는 속이 다 시원했다. 자신이 지닌 힘에 책임을 지지 않고 그저 방종하려고만 하는 레비쥬들을 시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따르는 것들도 다 똑같은 연놈들이고 죽일 연놈들이지. 육시랄. 사랑 같은 소리 하네 병신 새끼가.”

시빌은 이를 갈며 복도로 나왔다. 마법사와 영주의 싸움에 인간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처치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어디로 도망쳤는지 정도는 자신에게 알려야 할 것 아닌가.

“아멜리타는 후원 쪽으로 도망치고 있답니다.”

시빌은 복도 반대편에 선 레이븐의 등장에 석상처럼 멈춰 섰다. 시빌이 준 가짜 마스터의 목걸이를 걸치고 선 레이븐은 기사단장을 꼬리에 단 채 조금 한심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에. 물론 제가 먼저 가서 막을 생각도 하긴 했습니다만 복수는 직접 하고 싶으실 것 같아서 쫓지 않았습니다.”

“…아니. 별로 누가 죽여도 상관없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요? 저 혼자 쫓아갔다가 죽…,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별문제는 없을 거라고 보지만. 그래. 후원이라고? 서 엘린도. 그대는 잔당들을 처리하도록!”

“네! 영주님!.”

시빌은 레이븐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에 즉시 발걸음을 돌렸다. 뛰어가는 그의 뒤로 레이븐의 가벼운 발소리가 따라왔다. 시빌은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썩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입가를 살짝 긁었다. 존재만으로도 불쾌한 자가 있다면 대신 존재만으로도 행복한 자가 있다. 그 괴리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굳이 찾아다닌 적도 없다는 게 문제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빌은 달리기가 길어지자 거칠어지는 레이븐의 숨소리에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저 숨소리는 침대 위에서 들을 때가 제일 섹시한데…….

“뭔가 천벌 받을 생각을 하고 있는 뒤통수입니다?”

“쫓아가기 귀찮은데 놔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히익!”

“역시 그건 안 되겠다. 후원 어디지?”

까마귀가 퍼덕이며 날아오는 소리가 잠시 나더니 레이븐이 소리쳤다.

“별채 안이요! 2층입니다!”

레이븐의 대답에 시빌은 긴장했다. 성 밖으로 나가 도망가야 할 작자가 꽉 막힌 별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진 것이다.

“별채엔 개구멍도 없는데 이상하군.”

어쨌거나 시빌은 별채 안으로 뛰어들었다.

별채 안은 갑작스러운 전쟁에 놀란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드디어 레비쥬끼리 부딪치기라도 한 거냐며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시빌의 등장에 대경하여 말을 잃었다.

“아멜리타는 어디로 갔나?”

겁먹은 하녀 하나가 벌벌 떠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시빌은 그 즉시 달려갔고 레이븐은 재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뒤에는 혼이 빠진 얼굴로 주저앉는 시종들만 남았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런 예감 속에 시빌의 등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등은 곧았고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 복수가 끝나면 자신은 다시 숲으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 그 전에 그 작자는 좀 처리해야겠지만.’

레이븐은 눈살을 찌푸렸다. 별채 안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인간들은 맡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아까부터 먹을 수도 없을 정도로 썩어버린 시체 냄새가 났다. 죽음이 거둬가고 대지가 품은 것을 억지로 되살려 낸 역한 냄새였다.

레이븐은 잠시 발길을 늦춘 새 시빌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무슨 놈의 별채가 이리도 큰가. 레이븐은 투덜거리며 2층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멜리타가 도망친 방은 2층의 가장 북쪽에 있는 방이었다. 방 안에 아멜리타가 있다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어하지 못한 안개와 마법의 힘이 문틈으로 빠져나와 복도를 희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시빌은 검 자루로 문을 쿵쿵 두드렸다.

“나와라. 너의 마법은 깨졌고 세 명의 레비쥬는 모두 발이 묶였다. 널 구해줄 수 있는 건 이제 없어.”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문틈에서 흘러나왔다.

“셋이 아니야. 넷이다!”

시빌은 눈살을 찌푸렸다. 레비쥬가 한 명 더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만일 레비쥬가 한 명 더 로겐에 있었다면 서 엘린도는 몰라도 엘렉페는 알았을 것이다.

아멜리타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레비쥬가 한 명 더 있는 것인가? 시빌은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혼자건 둘이건, 모두 죽여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시빌은 발로 방문을 차 날려버렸다. 방 안에선 최후의 발악 같은 냄새가 났다. 방 안은 안개로 가득했고 온갖 곳의 풍경이 떠올라 흔들리고 있었다. 시빌은 환상을 무시하며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아멜리타는 반쯤 일그러진 얼굴로 창가에 서 있었다.

시빌은 말문을 잃었다. 아멜리타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달려들 것을 예상하고 쫓긴 했으나,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그의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 중에 마주쳤던 죽은 레비쥬의 허깨비가 아멜리타의 옆에 서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시빌이 아주 잘 아는 여자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에 아름답고 가냘픈 몸매. 시빌은 이를 빠득 갈았다.

발루아가 아멜리타의 옆에 서 있었다.

“이제 넌 필요 없어! 밖의 저 세 얼간이들도 필요 없어! 그녀와 내가 이 북부를 통치할 거다. 너 따위, 마법사도 없는 너 따위는!”

“마법사라면 나도 있어.”

시빌은 지독히도 차가워진 머리로 아멜리타에게 대꾸했다.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지독히도 날카로웠다.

“하! 저 밖의 소란이 그자의 짓이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널 구하러 오는 사이 레비쥬들이 다시 진입할 테고 그사이 난 널 죽일 테니까! 뒤따라올 네 마법사도 죽여주지. 곱게 갈아서 네 시체 위에 뿌려주겠다!”

아멜리타의 외침에 시빌은 날카롭게 웃었다. 뾰족한 바늘 끝으로 가슴을 긁어대는 양 불쾌감의 정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저 가증스러운 새끼가 자신의 마법사를 갈아버리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근래 드물게 살의가 치솟았다.

시체로 인형 놀이를 하던 것이 아멜리타의 짓이었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오는 동안 마주친 이쉬카와 나이젤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약했었다. 시체로 이루어진 병사들은 제법 쓸 만했지만 겉보기뿐이었고, 로겐 안엔 거대한 납골당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병사를 불러낸 것 같지도 않았다.

시빌은 짜증스레 되살아난 발루아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나이젤에 비하면 상태가 좋았다. 나이젤은 살도 피부도 없는 뼈다귀 괴물이었고, 발루아는 그래도 어제 죽은 시체 정도론 보였으니까.

‘차라리 뼈다귀인 쪽이 좋았을 텐데.’

시빌은 검을 휘둘렀다. 그는 저 여자의 낯짝이 무척 싫었다.

“두 번 죽이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두지.”

발루아를 가르기 위해 뻗어 나간 검은 격한 저항에 부딪쳐 멈추었다. 시빌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제법 사람같이 보이는 발루아가 검을 뽑아 들어 시빌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이 씨발년이.”

내뱉은 욕설이 끝나기도 전에 시빌은 발루아의 검을 밀어내며 몸을 비틀었다. 꿈틀거리는 불꽃의 뱀들이 그가 있던 자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200년 만의 콤비라기엔 참으로 잘 맞는 손발이었다.

불꽃을 피하면 검이 날아오고 마법사를 공격하면 발루아가 막아섰다. 그 둘은 마치 하나의 뇌를 공유한 양 부드럽게 움직였다. 환상이 아멜리타의 주특기였지만 불꽃을 이용한 공격도 약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카락 한쪽이 살짝 그을려 구부러지자 시빌은 욕설을 내뱉었다.

‘검은색으로 염색한 것도 못마땅해하는 까마귀인데 타기라도 했다간 완전 망하는 거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딴 생각이라니 자기 자신이 한심해 미칠 것만 같았다. 시빌은 이를 악물었다. 크게 다치더라도 둘 중의 하나를 먼저 죽여야 했다. 레비쥬와 마법사의 협공을 혼자서 상대하자니 너무 까다로웠다.

시빌이 팔 하나쯤 태울 각오로 나서려던 때였다.

“아. 찾았다 시체. 어라?”

“멍청이! 피해!!”

레이븐을 본 아멜리타가 중얼거렸다.

“……마법사?”

시뻘건 불길이 레이븐을 향해 달려들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시빌은 적을 뒤에 남긴 채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불길이 내뿜는 광폭한 빛 속에서 레이븐의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시빌이 구해서 걸어준 가짜 마스터의 목걸이였다. 유물이라고 속여서 인간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장난감이 아멜리타의 눈을 흐려 공격하게 만든 것이다. 시빌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유물이라는 이름으로 위험 속에 자신을 내던진 것을 아느냐는 레이븐의 질문에 뭐라고 답했었던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겠노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않았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공기 속에 휘날리는 마법의 잔영이며 등을 찔러 들어오는 발루아의 검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시빌은 차가운 검이 자신의 몸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위해 벼려진 강철은 아무런 주저도 감정도 없이 제 의무를 다했다.

시빌이 레이븐을 안은 채 바닥으로 넘어지는 데엔 일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거의 공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힘으로 밀쳐진 레이븐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커흑! 빌어먹을.”

“시빌?”

레이븐은 피거품을 토하는 시빌의 모습에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붉은 피가 무서울 정도로 바닥에 흘러나왔다. 레비쥬가 이 정도 상처로 죽지 않는다는 것은 레이븐도 알고 있었지만 시야를 가득 차지하며 흘러내리는 핏자국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괜찮아. 금세 아문다.”

시빌의 목소리엔 짜증이 어려 있었다. 그는 상처 입는 것이 아주 지긋지긋했다. 고통이나 육체적인 고통도 그랬지만 언제 아팠냐는 듯 아물어버리는 몸이 아주 못마땅했다.

“마법사라고? 하! 아하핫! 프하하하핫!”

손바닥으로 상처를 눌러 지혈하던 시빌은 욕설을 집어삼켰다. 레이븐의 목에 걸린 것이 가짜라는 걸 알아챈 아멜리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있다는 마법사가 저 쥐새끼였나? 맙소사. 하다못해 짐승이 아니라 인간을 데려왔어야지!”

시빌의 몸에서 피를 보고는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아멜리타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야유했다.

“더러운 카디넬을 데리고 와선 마법사라고? 취향 참 좋아지셨군. 마법의 힘이 조금도 느껴지질 않는데 마스터의 목걸이라니.”

더럽다는 말에 시빌은 발끈해서 아멜리타를 노려보았다. 아름답고 오만한 마법사는 시빌을 조롱하면서도 그의 상처에서 주의를 떼지 않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군. 잘나신 시빌 마이언. 네가 누군가를 감싸는 꼴을 볼 거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그러는 나도 네가 시간할 줄은 몰랐지. 죽은 년이랑 붙어먹으니 좋은가? 왜 골로 간 것들이 다시 기어 나오는 거야?!”

시빌의 분통 섞인 외침에 그의 상처를 보고 있던 레이븐이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 그 이유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시빌과 아멜리타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레이븐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법을 부릴 줄 알고, 죽음의 비밀을 아는 자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를 조종하는 건 그의 특기죠.”

차가운 어조로 말을 잇던 레이븐은 문득 자신에게 쏠린 시선이 부끄러운지 목을 잔뜩 움츠렸다.

“그나저나 정말 반짝이시네요.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뭐?”

“그, 그 머리카락 말입니다. 하아-. 저렇게 멋진 머리카락은 살면서 본 적이 없…. 우게웨에엑!”

시빌은 레이븐의 볼을 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이 까마귀 새끼가……. 사람이 지금 죽네 사네 하는 판에!”

시빌은 짜증스레 몸을 일으켰다. 폼 잡으며 성안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 감정 없던 아멜리타가 지금은 철천지원수로 보였다. 안 그래도 요새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븐의 눈이 냉랭하던 참이었다. 후딱 일 끝내고 염색된 걸 빼려고 했는데 다른 이를 황홀한 듯 바라보다니. 그것도 그 상대가 아멜리타라니.

“그나저나 정말 아쉽군요. 당신같이 아름다운 이가 잘못된 거래를 하다니.”

레이븐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시빌은 놀랐다. 그는 레이븐의 목소리가 이토록 차갑게 울리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종이 치는 것처럼 맑고 차가운 울림이었다.

“시빌.”

“응?”

“돕겠습니다.”

산지기가 도울 일이 아니니 냉큼 도망이나 가라고 시빌은 외치려 했다. 하지만 레이븐의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온 어마어마한 퍼덕임은 그를 질겁게 했다. 레이븐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반쯤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제법 화났거든요.”

수천은 될 듯했다. 구름처럼 하늘을 메운 까마귀가 선회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악마가 강림한 하늘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 검은 잔영에 시빌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껏 비웃던 아멜리타도 까마귀들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그는 삼백 년 가까이 살아온 마법사였고 어떠한 공격에도 맞서왔으나 지금의 이 사태는 그의 인지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거짓말.”

이 도시에 까마귀가 이렇게나 많았던가?

까마귀는 한 무리가 아니었다. 가장 날개가 큰 큰부리까마귀는 서쪽의 하늘에서 호선을 그리며 늘어졌고 가장 수가 많은 떼까마귀는 날카롭게 울어대며 남쪽을 점령했다. 갈색빛이 도는 물까마귀들도 질세라 빈 공간을 메우며 퍼덕거렸다. 그 외에도 갈까마귀, 잣까마귀 등이 어우러져 대지에 장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레이븐은 반쯤 취한 듯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렴.”

까마귀들은 유성처럼 날아와 창문을 깨고 달려들었다. 아멜리타는 고함과 함께 불과 안개를 일으켰지만 새들을 퇴치하기는커녕 날갯짓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까마귀들의 목표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깨진 창문으로 들어온 까마귀들은 벌집에 달라붙은 벌들마냥 발루아의 몸에 달라붙어 살점을 뜯어 먹었다. 시빌은 까마귀들의 식사가 된 발루아를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뜯긴 피부에선 진물이 흘러나오고 눈구멍은 텅 비어 시꺼메졌다. 까마귀의 부리가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무너지는 발루아의 살점에선 하수구 이상의 악취가 났다.

아멜리타는 까마귀에 둘러싸여 연인이 먹히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것은 생각조차 못 한 고통이었다. 그녀가 처음 죽었을 때는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뒤늦게야 잘린 목만 본 것이다.

아멜리타는 그녀의 이름을 외치려다가 입만 벌린 채 허우적댔다. 가장 슬픈 것은 그녀가 까마귀들에게 온몸을 뜯기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죽음의 단말마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식사를 위해 준비된 고깃덩이마냥 새들의 배를 채우며 사라져 갔다.

‘…미안. 미안 아일린.’

아멜리타는 방 안에 멍하니 섰다. 두 눈은 생기를 잃고 깊게 침잠하여 현실과 괴리되었다. ‘또다시’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들지 않을까 생각했던 시빌은 그런 아멜리타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레이븐이 심각한 분위기를 모르고 푼수마냥 끼어들어 주책 부렸다.

“참. 저 머리카락 잘라서 저 주시면 안 될까요? 탐납니다만.”

시빌은 대꾸도 않고 아멜리타의 목을 쳐 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