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8)

외전* 영주님의 이름

객관적으로 볼 때는 좋은 영주였다. 적절한 세율에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 200년이나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면 침략을 계획할 법도 한데 그는 언제나 평화를 지향했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는 가장 믿을만한 화폐로서 대륙에 통용되었다. 순도가 떨어지지도, 올라가지도 않아 다른 이들의 기준이 되는 순도 99%의 금화.

잘 생기기도 참 잘 생겼고, 적당히 잘라 하나로 묶은 금발은 그의 얼굴이 주조된 금화의 색과 다르지 않아 왕관처럼 빛을 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북부 모든 영지민들의 자랑이었으며 타국에 있어서는 공포의 제왕이자 본받아야 할 레비쥬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은 그들의 상사를 시발 마이언이라고 불렀다. 술이라도 들어가면 발음이 거세어져 ㅅ이 ㅆ으로 발음되었다.

심지어는 공문서에도 그렇게 썼다. 그들의 상사는 문맹이었기에 시발 마이언이라고 적힌 서류가 올라가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행정과 사법과 입법이 모두 합심하여 그 모욕적인 오타를 모른 척했다.

시빌에게 부려 먹히는 자들에게 있어 영주라는 그는 정말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존재였다. 그는 절대로 화내지 않았다. 언제나 싱글거리는 탓에 처음 그를 접하는 사람들은 방심하고 만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실수를 고하면, 역시나 싱글거리는 얼굴을 구기지 않으며 “그래? 별수 없지.” 라고 대답하는 영주였기에 내심 안심하고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쯤 되어 좌천령이 떨어지거나 감봉통지가 내려온다.

이때 영주가 했던 “별수 없지.” 라는 말이, “그래? 믿고 맡겼는데 그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별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고 넌 책임이나 져라.” 라는 뜻이었다는 걸 수하들은 그제야 알아채게 되는 것이다.

발루아에는 리딩보이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읽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었다. 정확한 발음과 오랫동안 말을 해도 멀쩡한 목청이 이 직업의 조건이었다. 물론 글을 알아야 했다.

이자들은 상당한 액수의 봉급을 받으며 궁 안에서 생활했는데, 시빌을 따라 움직이며 그가 건네주는 서류를 읽는 것이 일이었다. 낭창한 목소리로 작성된 서류를 읽어내리는 것은 20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발루아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 리딩보이들 조차도 시발은 시빌로 읽고 오묘한 미소를 서로 간에 교환했다. 그들 사이에서도 영주의 평판은 좋지 않았는데, 24권짜리 백과사전을 읽도록 시키는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터였다.

이토록 성내의 모든 고용인이 그를 욕설로 불렀지만, 막상 시빌 앞에 서면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날카로운 식견을 지닌 자의 앞에 선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의 별명 따윈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고 문맹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저 자신이 실수하지 않았기만을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휴가를 요청해도, 급여 인상을 요구해도, 찌푸려지지 않는 영주의 얼굴에서 가부를 알아내는 건 극도로 힘들었다. 부하들은 의중을 몰라 스트레스 속에 잠겨 들었고 열심히 일하는 일벌레 부하들을 보며 영주는 희희낙락 사냥이나 다녔다. 당연히 얄미울 수밖에 없다.

한 번은 재무차관이 작정을 하고 횡령한 적이 있었다. 막대한 양의 금화를 빼돌려 상단에 투자했는데 어느 날 상단의 주인이 사색이 되어 방문을 요구한다. 가 보면 검을 찬 시빌이 소파 위에 나른하니 기대어 재무차관을 향해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 상단이 내 건데 말이지……. 투자자 명단을 보다가 좀 의아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재무차관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 모든 투자는 사비였다고 무릎 꿇고 주장하는 수밖에 없으며, 횡령한 돈은 어떻게든 다시 채워놓아야만 했다. 대체 영주가 언제 상단을 만들었는지 아는 이는 당연히 없었다.

머리는 또 얼마나 좋은지 서류 한 줄 못 읽으면서도, 남이 읽어주는 서류는 다 외웠다. 숫자는 그래도 읽을 수 있었는데, 일 년 치 회계 보고서를 내도 힘들지 않게 금세 일을 해치웠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데 왜 아직도 글을 못 읽는 것인지 그것이 의문일 정도로 이상한 자식이었다. 200장짜리 투시도를 보고 이상한 점은 알아채면서도 투시도라는 글자를 삼시도로 적어놓은 건 못 알아챘다.

이런 일이 거의 매번 일어난다. 부패는 없어서 좋다고 해야 할지, 부패를 저지르면 영주의 개인 주머니가 늘어나서 무섭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될 무렵, 그 일은 일어났다.

그 날은 하수 처리 방안에 대한 긴 회의가 끝나던 날이었다. 그와는 친숙하지 않은 깃펜을 들어 사인을 그리려던 찰나, 시빌은 서류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다른 이가 적어 넣은 자신의 이름에는 점이 하나 더 찍혀 있어 자신이 그린 그림과는 조금 달랐다. 시빌은 보기 드물게 안절부절못한 기분이 되었다.

'내가 잘못 그리고 있었나.'

어째선지 아무리 노력해도 글을 읽을 수가 없어서, 시빌은 자신의 이름을 철자 그대로 그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아야 영지란 게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시빌은 짜증스레 점이 하나 더 찍힌 자신의 이름을 노려보았다.

-시발 마이언-

이라고 서류에 적혀 있었지만 시빌은 읽을 수 없었으므로 그 뜻 또한 몰랐다.

“이거 이름이 좀 이상하게 쓰인 것 같은데.”

눈치를 보며 슬쩍 운을 띄우자 서기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남부식 서명입니다. 요새 남부 문학이 유행이라서 그쪽 필체가 유행이거든요.”

“그래?”

시빌은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글에 대해 모르지만 지역에 따라 말이 조금씩 다르듯 글자도 다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예전에 중부의 사신단에 속해 있던 시인이 북부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곡조는 같았지만 그 가사나 발음이 미묘하게 달랐던 것이다.

시빌은 누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면전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곤 믿지 않았다. 서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빌은 미소 지으며 그 밑에 이름을 그렸다.

“그럼 나도 남부식으로 한번 해 볼까.”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시발 마이언이라고 적어 넣은 시빌은 화사하게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좌중은 모두 말을 잃은 채 기묘하게 경직된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말이 없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거대한 석상이 가득한 유적이었다.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서기관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아 챙기는 가운데 사람들은 회피하고 싶었던, 그러나 진실임이 분명한 사실 하나를 마음 절절히 깨달아야만 했다.

‘저놈 정말로 꼴통이구나.’

‘진짜 문맹인 거야?’

서기관의 용맹한 행동에 고무된 기사단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시빌에게 내밀었다. 시빌의 이름이 이른바 남부식으로 서명된 월례보고서였다. 별다른 특정한 일정이 없었기에 시빌은 리딩보이에게 서류를 읽히지 않고 직접 받아들었다.

시빌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갈 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역시나 남부식으로 서명을 했다. 평소대로 이름을 그린 뒤, 주의해서 점 하나만 더 찍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불행히도 시빌은 손을 삐끗해서 한 획을 더 긋고 말았다.

-시밸 마이언.-

수하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쾌감과 동시에 굉장한 슬픔과 서글픔이 그들의 마음 한구석을 흘렀다.

“아, 조금 실수했네. 어때? 계속 남부식으로 쓸까?”

천진난만한 시빌의 질문에 각료들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집어졌다. 저 작자의 성격상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면 이 방 안의 모든 이가 리딩보이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장님이 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히스테릭하게 흘러 파멸을 향해 달려갔다.

좋다. 끝내주는데? 그렇게 하자!

“안 됩니다. 북부의 주인이 남부식으로 서명하는 건 타국에 위신이 서지 않지요.”

“그래?”

“그렇습니다.”

시빌은 맹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외교대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좌중을 노려보았다. 그 험악한 시선에 다들 입을 꾹꾹 다물었다.

아무리 북부 내에선 서류의 영주 이름을 시발이라 쓰더라도 타국에 보내는 문서엔 제대로 이름을 적고 있었다. 아무리 얄미운 놈이라도 그들의 상관이자 북부의 대표인 것이다.

발루아의 외교부는 전쟁을 즐기지 않는 그들의 주인을 닮아 온화한 말과 미소로 풀어나가길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는데, 타국의 사신들이 시빌의 문맹을 걸고넘어질 때가 바로 그것이었다.

처음으로 그런 겁대가리 없는 짓을 한 건 남부의 밀피안이었다.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 감히 그들의 영주를 무식한 늙은이라 부르며 서류의 철자를 뒤바꾸어 제출했는데, 그때 발루아 외교부의 분노는 무시무시했다.

당장에 관세를 인상하고 금지품목을 신설하여 경제적인 압박을 밀피안에 가했다. 시빌은 상큼한 미소로 그것들 모두를 승인했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건 그의 역린이었던 것이다.

“군대를 보낼까?”

역시나 상큼한 표정으로 묻는 영주를 향해 외교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 듭니다.”

발루아에서 밀피안을 침략하려면 중간에 가로놓인 다른 영지들도 깨부숴야만 했다. 졸지에 불똥이 튈 뻔한 주변국들은 밀피안을 구박했고, 결국 다음 밀피안의 사신은 유서에 가까운 애원과 참회를 발루아에 보내야 했다.

밉살스러운 시빌에 대하여, 북부의 공식적인 견해는 간단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까도 내가 까’인 것이다.

그러한 기묘한 보호 속에서 시빌은 집안사람들에게만 욕먹으며 영주짓을 영위했다. 100년이 좀 넘어갈 때엔 남부 문학의 유행이 너무 오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문맹이었으므로 문학의 유행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외우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서명을 그리고, 마음이 내킬 때면 남부식의 서명을 하며 시빌은 부하들의 작은 쾌감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72년의 어느 날.

레이븐은 아네모네가 건네준 서류들을 훑어보며 시커멓게 썩은 눈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부하들이 서류마다 죄다 시발시발 써놓은 걸 그는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힐끔거리며 아네모네 옆에 선 엘렉페를 바라보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무엇을 말하지 말라는 건지는 딱히 티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도둑 길드에서도 영주 이름을 그냥 시발로 적는군.

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거냐 넌.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라지만 대단하다 싶어 시빌을 바라보자 그가 산들바람처럼 미소 지었다. 아무런 악의도 담겨 있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그래. 그렇게 살아왔던 거구나 넌.

레이븐은 서류를 탁탁 접어 정리했다. 이 사실을 시빌이 알게 되면 다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아마 아멜리타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 거대한 암운이 북부를 뒤덮을 것이다. 레이븐은 살생을 막자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넌 그냥 역사에 기록될 시발로 남아라.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명예를 내던지며 레이븐은 공모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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