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시의 왕
벌을 받는 것이다. 파르티잔의 숲지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레이븐은 북부의 성문을 바라보았다. 은색 파도에 검은 배가 떠 있는, 북부의 깃발이 성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백 년간 북부를 대표한 그 깃발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것은 시빌 마이언의 깃발이기도 하기에 일행들은 기이함을 느꼈다. 일행들의 의문을 알아챈 듯 시빌이 설명했다.
“새로운 영주가 들어서기 전까진 깃발을 그대로 걸어 둔다. 아멜리타가 아직 새 남편을 맞진 않은 듯하네. 우리에겐 좋은 소식이야.”
새 남편이라는 말에 레이븐은 시빌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위험한 미소가 입가에 올라 있었다. 그는 앞만 바라보며 달리는 사람 같았다. 뒤처지는 자는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무엇도 그를 방해하진 못하리라.
일행은 바로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벽 주변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길게 늘어선 줄이 길어 성문이 닫히기 전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성문 주위엔 출입하는 자들을 노린 시장이며 도시로 들어가지 못하는 난민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제법 웅성거렸다.
“성문 밖인데도 제법 도시 티가 나는군요.”
“내가 공들여 만든 도시니까.”
북부의 수도는 로겐이라 불렸다. 시빌이 손에 넣기 전부터 중부대로와 북부대로를 잇는 교차점으로 번영하던 곳으로,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500년 이상 주인을 바꾸며 영화를 구가한 북부의 대도시는 낡은 가운데 새것이 있고, 유행 가운데 전통이 있고, 성벽이 장미꽃잎처럼 겹겹이 세워져 있어 사람들을 길 잃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붐비는 곳은 가난한 자들의 집과 마차가 기대어져 세워진 마지막 성벽이었다.
“꽃받침이라고 하지.”
도시를 바라보는 시빌의 얼굴이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과연 자랑할 만한 장관이었다. 높게 솟은 성벽도 성벽이었지만 도시 밖에 모여 있는 사람의 수만도 보통이 아니었다. 외벽 바깥에 펼쳐진, 거의 도시의 면적만큼이나 넓은 땅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름대로 거리며 길이 생겨나 안내판도 꽂혀 있었고, 대장간이나 여관 같은, 번듯한 집들도 눈에 띄었다.
“중부의 전쟁 때문에 늘어난 난민들인가 보네. 3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 규모는 아니었거든.”
시빌은 우울한 기색도 없이 말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황금 같은 금발이 후드 속에 가리어졌다.
북부에 들어선 이후로, 시빌은 내내 두터운 망토를 머리 위에 눌러 썼다.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하던 일행들도 여관에 들르는 순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북부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당연히 북부의 것이다. 그리고 북부의 화폐엔 시빌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여관의 셈을 치르고 거스름을 받은 아네모네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뚫어져라 동전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동전에 반응해 다가온 레이븐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그래요?”
“이거….”
동전에 새겨진 것은 시빌의 옆모습이었다. 새삼 그의 지위가 떠올라 일행들은 시빌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대단한 인물과 함께하고 있다는 고양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다가 뒤통수를 확 후려치는, 그리고 후려친 뒤에도 헤실 웃음을 머금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시빌의 술수에 여행 내내 당한 일행들은 동지애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저 성질머리를 어찌 견뎌냈을꼬.’
‘그러고 보니 200년이나 북부를 통치한 절대 군주.’
‘불쌍해요. 200년이면 대를 이어 당했다는 거?’
‘최악이다.’
세 사람은 살짝 질린 시선을 서로 나누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루를 묵기 위해 마차를 맡기고 들어온 여관은 2층으로 지어진 꽤 넓은 건물이었다. 난로가 있는 홀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따로 방을 잡아 들어가자 주인이 살갑게 다가와 시중을 들었다. 시빌은 모포와 수건, 따뜻한 물을 주문한 뒤 방의 침대에 앉아 느긋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마차에서 자는 것도 괜찮지만, 그럼 물을 쓰기가 힘드니까.”
“물어보지 않았는데 말입죠.”
“쌀쌀맞긴.”
시빌은 침대 위에서 한 바퀴를 구르더니 일어나 레이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침대에선 처음이지 우리?”
“……해가 중천입니다만. 하긴 그런 걸 따지는 분은 아니셨죠.”
시빌은 진득한 손길로 레이븐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더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저녁에 느긋하게 즐길까.”
레이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곤해서 자고 싶습니다만.”
시빌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관 주인이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지고 방으로 올라왔다. 시빌은 셈을 치른 뒤 문을 걸어 잠갔다. 달칵, 하고 쇠가 부딪치는 소리에 레이븐이 쭈뼛거리며 시빌의 눈치를 봤다.
“겁먹지 마. 안 건드려.”
시빌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힐끔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레이븐은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반짝거리는 금발을 그새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레이븐. 도망가지 마라.”
“?”
시빌은 조금 떫은 표정으로 말하더니 가방에서 작은 병과 빗을 꺼냈다. 병은 어두운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레이븐은 그 병이 여관에 묵기 전, 어딘가를 다녀온 아네모네가 시빌에게 건네준 병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건?”
“염색약이다.”
시빌은 병뚜껑을 열어 찬란한 금발에 어두운 액체를 쏟아부었다. 황홀한 금색이 칙칙한 갈색으로 가라앉는 것에 레이븐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대체 무슨 짓!!!”
“시끄러워! 사람 올라오겠어!”
“맙소사! 무슨 짓!”
“북부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얼굴인데 그냥 들어갈 순 없잖아? 변장해야지.”
레이븐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많지만 입을 여는 순간 터져 나올 것이 두렵다는 표정으로 레이븐은 시빌을 노려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레이븐은 결국 억눌린 목소리로 시빌에게 선언했다.
“침대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시길. 대체 뭣 때문에 안겨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너무하잖아. 그렇게까지.”
시빌은 넉살 좋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랑 섹스하는 것 같아서 자극적이지 않겠어?”
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더 이상의 대꾸는 없었기에 시빌은 빗으로 머리를 슥슥 빗어 약이 골고루 묻게 했다. 아네모네에게 부탁해 가져온 약이니 도둑 길드 쪽에는 염색한 사람 하나가 들어간다는 정보가 새었겠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염색 등으로 신분을 숨기는 건 흔히 하는 일이었다. 머리가 충분히 염색되자 약을 물에 풀어낸 뒤 시빌은 레이븐의 거울을 빼앗아 얼굴을 비춰보았다.
“흐음. 역시 난 잘 생겼단 말이지. 어때, 레이븐?”
“……최악.”
시빌이 울컥해선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까마귀 습성이라지만 살을 맞대는 상대가 계속해서 부정적이자 심술이 났다.
“너 요새 겁이 없다?”
일부러 험악하게 노려보았지만 레이븐은 피식거리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죽이실 겁니까?”
담대한 도발을 하며 키득 웃는 레이븐의 모습을 시빌은 조용히 노려보기만 했다. 모가지를 잡고 짤짤 흔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잔뜩이었으나 그랬다간 다시 둥지 틀고 처박힌 레이븐의 모습을 보게 될 터였다.
“이걸 정말 팰 수도 없고.”
레이븐은 이를 가는 시빌의 모습이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시빌은 자신의 팔자를 저주하며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은 당분간 안전할 터였으나 이목구비와 눈동자 색은 바꿀 수가 없었다.
“뭐 괜찮겠지. 내가 죽었다고들 생각할 테니.”
시빌은 거울을 레이븐에게 휙 던져 돌려주었다.
레이븐은 거울을 문질러 닦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시빌의 머리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길 계속하는 꼬라지가 염색한 시빌의 머리카락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급기야 레이븐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침대 위에 엎어져 몸을 웅크렸다.
“삶의 낙이 사라졌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보물들 들고 오는 건데.”
시빌은 이제 화낼 가치도 없다는 듯 레이븐을 흘겨보며 물었다.
“두고 온 보물이 뭔데?”
“…거울 조각이나 보석. 예쁜 돌멩이. 반짝이는 것들.”
레이븐은 그리움에 젖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다 챙겨 올 걸 그랬지 뭡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두고 오긴 했는데.”
레이븐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서, 설마 도둑이 들진 않겠죠? 평생을 모은 보물인데!”
“……그딴 산장에 들 리가 있겠냐.”
시빌은 머리가 아파 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레이븐은 침대 위에서 건성으로 몸을 돌돌 말더니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그런데 성문은 어떻게 통과하실 생각이십니까?”
“성문으로 안 들어가. 이렇게 오래된 도시다. 몰래 들어갈 방법쯤 얼마든지 있어.”
레이븐은 기가 차서 말했다.
“전직 영주로서 그런 말은 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개구멍이 있든 없든 누가 감히 내게 덤비겠어? 게다가 개구멍을 남겨놓은 건 내가 쓰기 위해 놔둔 거니까 부끄러울 게 없지.”
시빌의 자신감에 레이븐은 기가 막히면서도 차마 반론을 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나이는 최소 200세. 레비쥬의 평균 수명에 비교하면 놀라우리만치 굉장한 장수였다.
레비쥬의 수명은 의외로 짧았다. 레비쥬는 기본적으로 늙지 않지만 그 젊음을 투쟁에 모두 쏟아붓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레비쥬가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선 행운이 필요했다.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것이 레비쥬지만, 애초에 레비쥬의 천적은 인간이 아니라 레비쥬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레비쥬가 된다 해도 근처에 강대한 다른 레비쥬가 있다면 금세 추격당해 목숨을 잃는다. 제대로 된 현실감각도 없고, 일행이나 본거지도 없는 레비쥬의 대부분이 이렇게 목숨을 잃는다.
터전을 마련하고 수하에 불량배들을 끌어모아 오합지졸이나마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근처에 자리 잡은 레비쥬가 없을 때에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이미 잘 정비되어 있는 영지에 쳐들어가 영주가를 몰살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 또한 제법 선호되었으나 수많은 군인과 기사를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레비쥬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영지는 그런 식으로 가질 수 없었다.
인간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킨 뒤에는 근처를 침략하여 점점 영지를 넓혀간다. 그와 같은 세력의 확대는 다른 레비쥬의 영지에 맞닿기 직전까지 별 저항도 없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른 레비쥬의 영지와 그 경계가 맞닿는 순간, 그제야 제대로 된 전쟁이랄 것이 발발한다.
그다음은 레비쥬의 기량에 달렸다.
사람 다루는 법, 돈과 물자의 유통, 법의 정비, 군대의 운용……. 영주로서의 자질 그 모든 것이 도마 위에 오른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북부의 영주 자리에 오른 겁니까?”
레이븐의 질문에 시빌이 의뭉스레 웃었다.
“난 자리 잡은 레비쥬의 영지를 통째로 먹어치웠지. 덕분에 바로 전쟁이었지만. 뭐 그쪽 생각엔 내가 새로 레비쥬가 된 거라고 생각해서 우습게 본 것이었지만 말야.”
시빌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사실 난 그때에 이미 100년 이상 살았으니 애송이들관 경우가 달랐지.”
야욕도 정복욕도 드러내지 않고 지식과 경험을 쌓는다. 그리고 단번에 폭발하여 대륙을 지배한다. 레이븐은 매우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체를 숨기고 잠복? 레비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시빌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는 검게 물든 물을 하수구에 쏟아 버렸다. 물 흐르는 소리가 레이븐의 상념을 깼다. 시빌은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븐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더니 목덜미로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침대에 이런 식으로 누워 있으면 정말로 마음이 동해.”
레이븐은 시빌을 힐끔 쳐다보더니 대꾸했다.
“저는 전혀 동하지 않는군요. 그 염색약 다 빠지려면 한 달도 더 걸릴 텐데 차라리 가발을 쓰지 그러셨습니까.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시빌은 입맛을 다시며 레이븐의 목덜미를 계속 지분거렸다.
“있기야 하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레이븐에게서 떨어졌다. 그 할 일을 위해 아네모네와 왼쪽 상처에게 일을 시켜 내보냈다. 난민촌이 생각보다 거대해진 탓에 시빌이 시킨 일들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발품 꽤나 팔아야 할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레이븐을 안는 건 간단했지만, 이제는 좀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방탕한 자에게는 그 누구도 존경심을 품지 않는 것이다.
“기왕 돌아온 거 청소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시빌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꺼내어 갈았다.
여관의 좁은 방 한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삭막한 태도로 문을 바라보았다. 레이븐은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달이 뜰 무렵 돌아왔다.
* * *
시빌이 두 사람에게 시켜 가져오도록 한 것은 정보였다.
시빌과 아네모네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모아 온 정보를 풀어놓았다. 먼저 시작한 것은 왼쪽 상처였다. 용병 길드에 들러 정보를 긁어온 그가 토해낸 것은 레비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재 유력한 레비쥬는 세 명입니다. 그중 가장 세력이 큰 것은 보이드라 불리는 자로 더 북쪽의 산간 지대에 영토를 지닌 영주라더군요. 200여 기에 달하는 군대가 로겐 북쪽에 위치해 있고, 마법사를 얻는 즉시 진입해 들어오기로 되어 있다나 봅니다.”
“보이드란 이름은 기억에 있는데. 조용히 살기에 내버려 뒀더니 이빨을 드러냈단 말이지.”
“현재 용병 길드의 용병들은 거의 그쪽으로 붙는 추세입니다. 마법사를 얻는 데 실패해도 이미 지닌 영지가 있는 자이니 도망쳐 자리 잡을 수 있다고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빌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본거지가 있으니 두드려 맞을 거란 생각도 하는 게 좋을 텐데.”
“북부의 사정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 같진 않더군요.”
시빌은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바쉬엘라라는 계집이 하나 있습니다. 하늘색 머리카락을 지닌 레비쥬라고 하는데, 창공의 장미라나. 뭐 그런 우스운 이름을 갖고 있더군요.”
“처음 듣는 이름이군.”
“중부의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였다는데, 중부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고 이리로 온 것 같습니다. 그쪽도 오십여 기의 기사를 거느리고 있고 세력이 적은 편이 아니지만 마법사를 얻는 데에 실패해서 중부로 돌아가게 되면 어차피 다른 레비쥬들과 전쟁이다. 개죽음당할 필요 있냐… 라고는 다들 말합니다만.”
뒷말을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시빌이 피식 웃었다.
“북부의 인간 기사들은 아마 그 계집을 따르겠지. 기사도라는 미명 아래 별짓들을 다 하던데 난 도저히…….”
시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에는 치커리라고 부르는 놈이 있는데 무력이 대단하다더군요.”
“레비쥬인데 무력이 굉장한 건 당연한 거 아냐?”
아네모네의 참견에 왼쪽 상처가 코웃음을 쳤다.
“넌 로빈 죽는 걸 보고서도 그런 말이……. 아니 뭐. 원래 레비쥬가 열둘 정도 들끓고 있었다는데, 그중 넷을 이 자식이 죽였다나 봐요.”
“나머지 레비쥬들은?”
“바쉬엘라와 보이드의 패거리가 각각 두 명씩. 나머지 하나는 이곳의 마법사가 직접 처치했다는 것 같습니다.”
“아멜리타가?”
시빌의 입에서 너무나 자연스레 나온 마법사의 이름에 왼쪽 상처가 힐끔 레이븐의 눈치를 봤다. 침대 위에 동그랗게 누워 있던 레이븐은 눈썹만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강간을 시도했다고.”
“푸하하하!”
시빌은 폭소를 터뜨렸다. 의자 위에 앉은 채 허리만 꺾어 한참 웃더니 곧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것참. 하하! 나도 못 해본 일을 잘도 시도하셨군. 일이 벌어졌을 때 참 볼만했겠어.”
“레비쥬가 마법사를 얻기 위해 흔히 하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렇기는 하지. 그렇기는 한데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달까. 왜 하필 아멜리타에게.”
왼쪽 상처는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그 레비쥬는 효수되었다더군요. 무슨 짓을 당했는지 비명을 그치지 않으며 목이 떨어질 때까지 울부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레비쥬의 습격은 없어지고 점잖게 구애하는 자들만 남게 되었다더군요.”
그 말을 들은 시빌이 비릿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멜리타는 환상을 다루는 데 능하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것 같군. 그래 다른 건?”
“세 명의 레비쥬 모두 도시 안에 묵고 있습니다. 성안으로 들어오는 건 아멜리타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간택에 대해서 말해봐.”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더군요. 셋 중에 살아남은 자를 선택하지 않겠냐는 게 사람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왼쪽 상처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얼굴의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당신 얘기도 종종 나오더군요. 당신이 살아 있었다면 중부의 레비쥬들이 감히 전쟁을 벌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응. 밟아줬겠지. 옆에서 시끄러운 건 질색이거든. 난민도 난민이지만, 중부가 통일되어 강력한 영지가 옆에 생기면 뭐랄까. 귀찮아져.”
말을 끝낸 시빌은 흘끗 아네모네를 바라보았다. 아네모네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둑 길드가 꽤 크더군요. 마스터는 말씀하신대로 길로딘이란 자였습니다. 뜨내기들이 많아서 경계가 단단하더군요.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마스터가 아직 길로딘이라니 일이 쉬워지겠군. 내가 말했던 통로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럼 새벽에 성안으로 잠입하겠다. 일찍 잠을 자 두도록 해. 참. 왼쪽 상처. 그리고 아네모네.”
시빌은 문밖으로 나가려는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갑자기 불린 이름에 멈춰선 두 사람을 향해 시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지 않고 돌아온 이유가 뭐지?”
시빌의 물음에 두 사람 모두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네모네는 물어보는 요지를 모르겠다는 듯 멍했고, 왼쪽 상처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딜 가란 말인가.”
“어딜 갈 수 있는데?”
동시에 터져 나온 말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색함이 퍼져나가기도 전에 시빌이 다시 물었다.
“여기는 도시고 인간을 숨기는 곳이지. 어디든 갈 수 있어.”
이번엔 아네모네가 먼저 말했다.
“당신은 도둑 길드 마스터의 이름을 알고 있었어. 분명 영향력을 행사할 자신도 갖고 있겠지. 군인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도둑들의 눈을 피할 순 없어. 난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도둑들까지 등질 순 없어. 그리고 다른 레비쥬들이 당신보다 강할 거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걸.”
“그렇군.”
시빌은 고개를 끄덕인 뒤 왼쪽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는 짜증스럽다는 듯 눈썹 사이를 긁으며 말했다.
“당신이 내게 부귀를 약속하지 않았나. 뭐하러 도망쳐?”
“그렇군.”
시빌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고개 돌려 레이븐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다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날 배신하지 않았으니 정식으로 관계를 정리하도록 하지. 두 사람 다 내 앞에 무릎 꿇어라.”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둘 다 어색한 태도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한 차례 재촉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천천히 무릎 꿇었다. 의도를 알 수 없어 불안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시빌은 검을 뽑았다. 새파란 냉기가 방 안을 채우는 듯했다. 무릎을 꿇은 상태임에도, 움찔 몸을 뒤틀며 달아나려는 본능을 두 사람은 겨우 누르며 시빌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시빌은 차가운 표정으로 검을 들어 왼쪽 상처의 어깨 위에 얹었다.
“네 충성을 대가로 너에게 작위를 하사하겠다. 네가 날 주군으로 모신다면 나는 그 대가로 벨리셔스의 2개 주를 너에게 주어 다스리도록 하겠다. 다만 너 자신은 내 곁에서 봉사해야만 한다. 스카 경.
목이 메인 목소리가 왼쪽 상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이는 대개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그 기쁨을 실제로 느끼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고는 한다. 왼쪽 상처는 자신의 어깨 위에 실린 검의 무게에 탄성을 내뱉었다.
“기사? 기사라고? 내가?”
“아니. 너는 북부의 검이 아니다. 방패도 아니야. 너는 그냥 내 개다.”
왼쪽 상처의 얼굴이 곤혹으로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향해 시빌은 싸늘하게 일침했다.
“너는 주인의 총애를 받는 사냥개가 될 것이다. 그 대가로 내 옆자리에 앉고, 흘린 음식을 먹고, 짖고, 물어뜯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줄 것은 그런 자리다.”
그리고 검을 거두어 이번에는 아네모네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너는 나의 매가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얼굴이 살짝 떨렸다.
“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의 사냥감을 채어 오고, 소식을 전하고, 다시 소식을 물어오는 매가 될 것이다. 그 충성의 대가로 로겐의 장원과 광산 세 개의 지분을 주지. 서 아네모네.”
아네모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시빌은 검을 거두어 다시 자신의 검집에 넣었다. 두 명의 기사 아닌 기사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시빌만 바라보았다.
“일어나도 좋아. 돌아가 쉬도록 해라.”
“그러…, 알았…….”
아네모네가 더듬거리자 시빌이 냉정한 어조로 말을 잡아 주었다.
“존대를 하고 존칭을 붙여라. 아직은 시빌 님으로 괜찮지만, 조만간 예절도 배워야 하겠지.”
“알겠…습니다. 시빌, 님?”
시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익숙해지도록.”
아네모네는 조금 상기 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그 뒤를 따라 왼쪽 상처가 허둥지둥 따라 나갔다. 뭔가 말을 해보고 싶지만 쉽지 않은 듯, 닫힌 문 너머로 말투에 대한 투덜거림이 들려 왔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방 안은 저녁의 그림자와 침묵에 둘러싸였다. 시빌은 검을 풀러 베개맡에 놓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두 사람을 서임하는 내내 조용히 있던 레이븐이 신경 쓰여 쳐다보자 그는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시빌은 그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가 카디넬이라 어두운 피부색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연인도 가족도 있어서 닮은꼴의 아이를 보며 웃고 있을 수도 있었다.
숲지기라는 것은 부유한 직업이었다. 숲을 가꾸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숲지기들은 겨울철 땔감도 넉넉했고 산짐승이며 열매들을 가장 먼저 딸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배 곪는 일이 없었다. 시체를 찾아주고 받는 사례비 또한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레이븐. 자?”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레이븐이 눈을 뜨고 시빌을 쳐다보았다. 잠기 하나 없이 또렷한 눈동자는 새까만 색이었다. 그 빛깔에 일순 압도되어 시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멜리타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 아…. 아멜리타? 그냥 마법사지 뭐.”
얼버무리려던 시빌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븐의 반들거리는 눈동자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환상과 안개를 주로 다루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어 그 세계에 사람이 갇히도록 만드는 게 특기야.”
“그럼 그 비명 지르다 죽은 레비쥬는…….”
“자신이 과거에 한 짓을 맨정신으로 보게 된 거겠지.”
시빌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레비쥬로 깨어나자마자 한 짓들.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가족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던 그때로 돌아가 자신의 행동을 맨정신으로 보게 된 거야. 비명을 그칠 수도,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도 없었을걸?”
“그것이 타격이 됩니까?”
“어?”
“친인을 죽이고 불태운 것이 레비쥬의 정신에 타격이 됩니까?”
시빌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응.”
레비쥬의 정신이 비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때는 각성 직후와 전쟁 때뿐이었다. 특히나 각성 직후는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본능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 행위는 너무나 잔혹하고, 제정신이라면 레비쥬도 하지 않을 짓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레비쥬는 각성 초기에 저지른 일들을 서서히 잊어버리지. 자신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을 말살한 것처럼, 자신이 한 행동들을 잊어버리게 돼. 아멜리타는 레비쥬를 각성 직후로 돌려보내 그 속에 가둬버리길 즐긴다.”
시빌은 어둠 속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을 한 채 말을 이었다.
“레비쥬의 사고방식도 인간과 다르지 않아서 사랑하고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즐거워하니 말이다. 인간인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해도 결국은 인간인 거다. 자식을 사랑하던 남자가 레비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거든. 다만 본능에 휘둘려 죽이고 후회할 여지도 없이 잊어버릴 뿐.”
“그걸 당신은 어떻게 아는 겁니까?”
시빌은 자조가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당해봤으니까. 아멜리타는 내게 복속되길 원하지 않았다. 다만 힘에 굴복하여 나의 마법사가 된 거지.”
시빌은 몸을 틀어 팔 한쪽으로 턱을 괴었다. 그는 레이븐의 무표정한 얼굴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하지?”
“그냥 궁금했습니다. 당신과 200년이나 되는 세월을 함께 해 온 마법사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가 싶어서.”
“그는 마음이 약해. 인간에게 모질지 못하지. 나는 그게 맘에 들어서 그를 살려두기로 했다. 뭐, 착한 사람이야 그자는.”
그리고 시빌은 날카로운 콧소리를 냈다. 그것이 비웃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레이븐이 의아해져 그를 쳐다보았다.
“확인을 해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그 마음 약한 작자가 내 뒤통수를 쳤단 말이지.”
“짚이시는 거라도?”
“하나 있기는 한데. 설마일까 싶은 마음이 더 크군.”
시빌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계속된 침묵에 잠이 든 것인가 싶어 레이븐도 다시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깊고도 축축한 동굴 같은 목소리가 메마르게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면, 그 원한이 얼마나 갈까?”
레이븐은 말을 잃었다. 잠시 정신이 아득해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목에서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던 시빌의 모습과 감기지 않고 자신을 주시하던 푸른 눈이 떠올랐다.
“……. 아마 평생을 가겠지요.”
“그런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런 일에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겁니다.”
레이븐은 시빌에게서 돌아누웠다. 만일 시빌이 레비쥬가 아니었다면, 그가 레비쥬라지만 다시 살아날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면……. 수많은 가정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결국 나온 답은 하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어떤 위험한 짓이라도 할 겁니다. 소생이든 복수든.”
“그런가. 그러고 보니 오던 길의 그 자식도 자신의 레비쥬를 되살렸었지. 껍데기라도 좋은 건가 싶었다만, 그래. 미쳐있었던 건가.”
레이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빌도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새벽까지는 짧은 잠만이 남아 있었다.
* * *
아직 해도 떠오르기 전이었다. 짙은 남빛이 산 위로 올라오기도 전에 일행은 조용히 여관을 나섰다. 셈은 선금으로 모두 치렀고 마차는 일주일을 맡겨두기로 했다. 최소한의 짐과 돈만을 꾸린 채 시빌과 그의 기사들은 로겐의 성벽으로 다가갔다.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로겐의 외성 가운데 유일하게 비어 있는 곳이 있었다. 북서쪽 넓은 땅에 서 있는 것이라곤 유일하게 비석뿐인 묘지가 바로 그곳이었다. 검은 철창이 묘지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시빌은 익숙한 태도로 다가가 한쪽 철창을 밀었다. 원래부터 열리도록 만들어진 철창이 안쪽으로 삐걱이며 밀려났다.
어두웠지만 등불도 없이 넓은 묘지의 한쪽을 헤치고 걷자니 묘지기의 숙소와 납골당이 그들을 맞이했다. 묘지기는 순찰을 나간 것인지 지팡이도 등불도 보이지 않았다.
시빌은 주저 없이 납골당으로 다가갔다. 새하얀 대리석의 납골당을 지나치자 허름한 지하 납골당의 입구가 나타났다. 시빌은 입구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뱀의 아가리 같은 어둠이 차가운 독기를 지상으로 쏘아냈다. 화장 후 안장하는 곳이라 썩은 내는 없었으나 여름임에도 살이 에이는 추위가 문밖까지 느껴졌다.
이미 한 번 들어가 본 경험이 있는 아네모네가 앞장을 섰다. 손바닥만 한 램프를 짐에서 꺼내더니 망토로 사방을 가리고 불을 붙였다. 그녀는 벽을 기어가는 지네처럼 소리 없이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왼쪽 상처였다.
“무덤이라니 재수 없게.”
짧은 투덜거림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아네모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시빌은 자신의 앞에 레이븐이 가도록 했다. 일행들이 모두 납골당 안으로 들어가자 시빌은 맨 뒤에서 문을 닫았다.
빛 한 줄기 없는 어둠이 그들을 감싸자 그제야 아네모네가 망토를 벗겨 램프를 꺼냈다. 이미 불을 붙여둔 램프가 희미한 빛을 발했다.
“따라와요.”
-따라와요. 따라와요- 따라와요오--
목소리가 차가운 지하의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일행들은 몸을 움츠렸다.
더위가 한차례 꺾이기는 했다지만 아직 여름이었기에 일행들의 옷차림은 간소했다. 모두가 소름 돋은 팔을 쓰다듬는 가운데 녹색 외투를 뒤집어쓴 레이븐만이 여유롭게 아네모네의 뒤를 쫓았다.
벽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반엔 한 치의 틈도 없이 병이며 상자가 들어차 있었다. 묻힐 땅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자들의 유골이었다. 그 유골함의 위며 납골당의 바닥을 쥐나 벌레가 기어 다녔다. 어디선가 역한 누린내가 났다. 아네모네는 소매로 코를 막으며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흔들리는 램프의 빛에 드리워진 그늘들이 유골함 위에 미소며 우는 듯한 표정들을 만들어냈다. 바람 한 점 없건만. 아네모네가 든 램프의 불빛은 끊임없이 흔들거렸다. 산자의 방문에 새하얀 유령들이 눈을 흘기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지하로 내려갈수록 음산하고 괴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왼쪽 상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네모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으스스하네. 여길 여자 혼자 내려갔다 왔다고?”
“난 도굴꾼은 아니지만, 천 년 넘은 무덤 가라앉히고서도 멀쩡한 새끼들 많이 봤거든. 그런 놈들도 안 죽는데 내가 해코지당할 것 같진 않더라.”
“난 벽에서 내가 찌른 놈이 튀어나올 것 같아.”
직업적인 차이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며 레이븐은 짐짓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영주님의 일행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마음 놓고 지나가라고 하네요.”
“…….”
“…….”
“…….”
“……. 농담이었습니다만.”
“아. 그래.”
일행들은 다시 말없이 납골당을 걸어 내려갔다. 그림자에는 익숙해져도 먼지며 냄새는 고역이었다. 일행들 모두가 코를 막고 움직이는 가운데 레이븐만이 희희낙락이었다. 더러운 까마귀 근성이라고 모두가 그를 욕했다. 레이븐은 키들거리며 웃어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네모네는 몇 번이고 방향을 꺾으며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를 내려가자 좁은 계단이 앞에 나타났다. 아네모네는 조심스레 벽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전날 그녀가 한 번 왕복했기 때문에 소복이 쌓여 있던 먼지는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한 통로의 상태를 시빌은 눈여겨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게 분명했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명확했다. 시빌은 마음속으로만 웃으며 일행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간 지 십여 분 만에 막힌 일행들은 어두운 하수구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턴 내가 앞장서지.”
시빌은 성큼 앞으로 나서 수로를 따라 걸었다. 지저분한 오물이 흘러내리는 파이프며 구멍을 피해 익숙한 태도로 움직인 시빌은 곧 지상과 이어진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밖은 아직 새벽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붉게 물들고 깨어난 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나온 곳은 큰길에서 몇 번을 꺾어 들어간 작은 골목의 끝이었다. 시빌은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썼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담장을 손끝으로 훑으며 빠르게 걸어갔다.
그의 도시였다. 200년간 공들여 가꾼 도시의 성벽이 그의 손끝에 만져졌다. 분명 기억만을 따지자면 계절 하나가 지나기도 전에 돌아온 것인데 미칠 듯한 그리움이 치솟았다. 그 격한 그리움에는 시빌도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손이며 망토를 스치는 낡은 돌의 감촉이며 발밑에서 삐걱이는 바닥의 흔들림이 그를 미치도록 기쁘게 했다. 자식이 없는 레비쥬에게 그와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영지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이처럼 가꾸었다. 주변에서 탐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발톱을 갈고, 안쪽으로는 평화와 번영을 들이부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도시를 전쟁과 정복욕에 미친 것들이 가로채려 한다고 했다. 갑자기 배신의 맛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아멜리타 발루아.’
그의 마법사가 자신을 배신하고 이리떼를 끌어들였으니 그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골목 어귀에서 잠시 몸을 숨긴 일행은 성문이 열릴 시간이 지나자 여관의 문을 두드렸다. 밤새 검문을 기다린 지친 손님을 가장하여 방을 잡고 올라가자, 그제야 깨어나는 도시의 기척이 창밖에서 들려왔다.
“할 일을 분담하겠다.”
일행들은 기대와 불안이 어린 표정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시빌은 전에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로 각자를 한 번씩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우선…….”
* * *
여관 주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 들이닥친 손님들은 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그 얼굴을 홀에 들이밀었다.
‘쯧. 돈 안 되는 놈들이네.’
아침 점심을 모두 거르고 저녁에야 나타난 손님들의 모습에 여관 주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려온 두 명 중 한 명이 도박을 시작하자 표정을 바꾸었다. 도박은 돈이 됐다. 여관 주인은 딜러에게 확실히 뜯어내라는 눈짓을 했다.
거칠게 생긴 남자의 모습에 딜러는 조금 걱정하는 듯했으나 계속 잃어도 별말이 없자 느긋한 손놀림을 되찾았다. 남자는 투덜대면서도 판이 작아서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둥 불평을 해댔다.
왼쪽 상처는 계속 돈을 잃었다. 그리고 그사이 아네모네는 여관을 조용히 빠져나가 골목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중앙 공원이었다. 시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엔 나무가 제법 많았고 동상이며 벤치도 많이 있었다.
이렇게 잘 꾸며놓은 도시는 본 적이 없어 아네모네는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상은 거의가 신상으로 이제는 세상에 없는 신들의 상징도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아네모네는 그 중 대지모신의 신상 발치로 다가갔다. 인자하게 땅을 굽어보는 여신의 발치에는 작은 새들과 작물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아네모네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오후의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여신이 있는 부근은 울창한 나무로 뒤덮여 작은 사각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그녀는 알아채고 재빨리 새의 목을 잡아 돌렸다.
돌이 갈리는 소리가 나고, 신상 아랫단 쪽에서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숙여 단상의 문을 열고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작다고는 하나 갓 태어난 어린아이 정도는 누일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상자였다. 결이 아름다운 목재에 강의 물결과 배가 양각되어 있어 그 상자의 가치만으로도 신세를 고칠 수 있을 듯했다.
아네모네는 잠시 갈등하며 그 상자의 뚜껑을 손에 쥐었다. 시빌은 열어봐도 좋다고 했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상자를 조심스레 열자 휘황찬란한 금빛이 그녀의 얼굴로 쏘아졌다. 그녀는 기겁해 뚜껑을 덮었다.
그녀는 다시 주변을 둘러본 뒤 메고 온 가방에 상자를 담았다. 새의 목을 돌려 여신상 밑의 단상을 다시 잠그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내내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후우.”
방 안에 들어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시빌 앞에 상자를 꺼내 놓았다. 시빌은 말없이 뚜껑을 열어 보더니 빼곡히 들어찬 금화 중 한 닢을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왼쪽 상처는?”
“아직 아래층에서 도박하고 있습니다.”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지.”
아네모네는 경쾌한 손놀림으로 상자 안에 든 금화를 한 개 집어 들었다. 엄지손톱만 한 섬세한 금화가 찰랑거리며 손안에 쏙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황홀한 시선으로 금화들을 바라보더니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점과 도박장을 겸하는 여관의 소음을 뚫고 움직이며 아네모네는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들에게 싱긋 미소 지었다.
왼쪽 상처는 도박판의 테이블 한쪽에 앉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먼지 한 점 없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며 짜증 내는 모습에 아네모네는 뒤에서 다가가 목에 팔을 감으며 매달렸다.
“다 잃었네?”
“오늘따라 운이 안 따라. 좀만 더 하면 풀릴 것 같은데.”
퉁명스레 말하며 왼쪽 상처는 목에 감은 아네모네의 왼쪽 팔을 쓰다듬었다. 아네모네는 딜러 왼쪽으로 나 있는 작은 거울을 체크하며 왼쪽 상처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이제 그만 일해야지?”
아네모네는 왼쪽 상처의 오른쪽 팔을 검지 끝으로 툭툭 세 번 쳤다. 그 신호에 왼쪽 상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시게? 왜 더 안 하고?”
왼쪽 상처는 픽 콧바람을 내며 테이블에 둘러앉은 일당들을 쳐다보았다. 딜러는 완전히 긴장이 풀어져 있었고 그 옆에 앉은 일당들도 그를 봉으로 아는 눈치였다.
이 정도만 많이 참았다고 왼쪽 상처는 생각했다. 그는 재빠르게 오른쪽으로 달려 경비병 중 한 명의 턱을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른 두 명의 경비가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들었지만 그는 여유롭게 주먹을 피하며 몸을 굴렸다.
“씨발, 참느라 혼났네!”
왼쪽 상처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얌전하던 손님의 변모에 경비들이 팔을 걷어붙이며 달려들자 왼쪽 상처는 둔중한 나무의자를 들어 휘둘렀다. 머리가 깨져나가고 피를 흘리며 한 명이 쓰러지자 피를 본 자들이 흥분해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왼쪽 상처는 날카롭게 웃으며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단도였지만 시퍼런 살기를 뿌리는 광채에 아직 서 있는 두 명의 경비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람 꽤나 찔러 본 자의 살기와 자세에 섣불리 덤벼들 수가 없었다.
“이 자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죽어 나가려고 작정을 했구나.”
“글쎄? 여기가 어딘데?”
그에 대한 대답은 경비가 아니라 다른 쪽에서 나왔다. 차가운 목소리가 소란스럽던 여관 안의 소음을 완벽히 잠재웠다.
“쥐들의 둥지지. 그쯤에서 그만하지그래? 내 집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가죽이 벗겨지고 싶으냐?”
왼쪽 상처는 히죽 웃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얇은 입술이 그가 기다리던 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잠시 고민했다. 기왕 호랑이를 등에 업었으니, 그에 마땅한 개 꼴로 짖어야겠다 마음먹었다.
“누구 가죽?”
짜증이 남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여관은 그가 묵는 곳이었다. 뜨내기들이 가끔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조금 논다 싶은 것들은 알아서 기는 장소인 것이다.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려고 말하려는 찰나, 그의 옆에서 달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엘렉페?”
검은 머리의 여자였다. 손에 작은 단검을 든 그 여자는 조용히 그 검날을 흔들어 그의 시선을 끌었다.
“뭐냐 넌.”
아네모네는 단검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손을 펴 보였다. 손바닥 사이에 들어있는 금화가 음산한 빛을 뿌렸다.
“이 분이 당신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만.”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개소리야?”
“이곳에 묵고 계십니다. 잠깐만 시간 내 주시죠.”
그는 어이가 없어 한참이나 아네모네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의 말은 무서운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허!”
엘렉페는 기가 차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손님인 척 앉아 있던 그의 부하들 죄다 무기를 손에 든 채 반쯤 일어서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레비쥬가 아닌 한 여기서 살아나갈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배짱인가 싶어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만나보기나 하지. 안내해.”
일어서서 따라오려는 부하들을 손짓으로 막으며 엘렉페는 아네모네의 뒤를 따랐다. 하고자 했던 일이 관철되자 왼쪽 상처는 두 손을 들고 순순히 무기를 빼앗겼다.
2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사방은 쥐 죽은 양 조용했다. 시끄럽던 아래층도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손님들은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네모네는 시빌의 문 앞에 서서는 맞춰두었던 암호에 따라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냥 열고 들어섰다.
어둡지 않은 방 안에는 두 개의 침대가 양옆으로 있고, 그 사이에 작고 둥근 탁자가 의자와 함께 놓여 있었다. 엘렉페는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싶어 코웃음 치며 방 안을 쳐다보았다. 방 안엔 갈색 머리의 남자 한 명과 카디넬이 하나 녹색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뭐야 이건.’
엘렉페는 카디넬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심상찮은 분위기가 풍겼고, 그늘진 방 안에 서 있는 그 압도적인 미모가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디넬에게 정신이 팔려 다른 한 남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것은.
“엘렉페. 오랜만이야.”
엘렉페는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 *
시빌은 아네모네가 방에서 나가자 상자 안의 금화들 사이에 놓인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열었다. 여러 가지 상징물이 얽힌 마스터의 목걸이가 주머니에서 탁자 위로 떨구어졌다. 그것을 레이븐의 검은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것입니까?”
“그래.”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 그럴싸하게 생기긴 했네요.”
시빌은 레이븐의 목에서 약제사의 목걸이를 풀어낸 뒤 마법사의 목걸이를 대신 걸어주었다. 녹색 외투 위에 늘어진 금속성의 목걸이가 기묘하게 잘 어울렸다. 시빌은 감탄하며 레이븐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든지 속겠는걸.”
“마법사가 보면 가짜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겁니다.”
“괜찮아. 우리가 만날 건 마법사가 아니니까.”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익숙지 않은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이 거대한 사기극에서 레이븐이 맡은 역할은 시빌의 새 마법사였다. 일반인이 마법사를 사칭하는 건 당연히 범죄였고, 들키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영주라고 해도 누군가를 자신의 마법사라 칭하는 건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레비쥬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지만 시빌은 느긋한 태도로 레이븐의 모습만 감상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시빌의 모습에선 만용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세 명이나 되는 레비쥬를 상대해야 하는데도 긴장이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이븐.”
“네?”
“너는 내 포로잖아?”
목걸이를 맘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에는 반하여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레이븐은 갑작스러운 시빌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그렇죠.”
“내게 충성을 맹세할 생각은 없나?”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시빌의 눈동자는 미약한 열락에 들떠 있었다. 문득 아네모네와 왼쪽 상처를 부하로 삼으며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쳐다보던 시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는가 싶어 레이븐은 애매한 표정으로 시빌의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제 숲을 지켜야 합니다. 당신에게 복종을 맹세할 수는 없습니다.”
거절의 말이었지만 시빌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에게 제의한 것보다 더한 부귀와 영화를 너에게 줄 수 있어. 난 네가 매우 마음에 들고 넌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니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 않겠어?”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하늘을 태양이나 별을 자신의 둥지로 가져오려 하는 까마귀는 없습니다. 수면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도 강에 몸을 던지는 까마귀가 없는 것처럼요.”
시빌은 레이븐의 말을 빠르게 곱씹은 뒤 이를 갈았다.
“뭐야. 나랑 있으면 죽기라도 해? 무슨 비유가 그래?”
“지금도 이런 일을 시키시잖습니까. 마법사를 사칭하라뇨.”
시빌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짜증이 치밀었다. 레이븐의 말 중에 틀린 말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따라줬으면 하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렇게까지 몸을 섞었는데도 못 알아주나 싶어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아. 난 널 아주 좋아한다고.”
“아. 예. 뭐 그러시겠죠.”
건성으로 대꾸하는 레이븐의 태도에 시빌은 울컥해선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가는 몸이 비틀거리며 품 안에 안겨왔다. 시빌은 자신의 팔에 안긴 레이븐의 몸을 힘주어 꼬옥 끌어안았다.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기분이 밀려왔다. 시빌은 레이븐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작 비벼댔다.
“널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렇습니까. 전 편안하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만.”
“으음.”
시빌은 못 들은 척 레이븐의 외투를 파고들어 쇄골을 입술로 부볐다. 레이븐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넘어갔겠지만 말입니다.”
“으음?”
“그것도 염색하기 전의 얘기죠. 이 푸석한 갈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무런 감동도 일질 않네요. 떨어져 주시기 바랍니다.”
“……. 너 말야.”
“게다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세 명입니다.”
시빌은 날카로운 눈으로 방문을 노려보았다. 암호로 정한 노크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린 뒤 천천히 문이 열렸다. 품에서 벗어나는 레이븐의 모습을 기척으로 쫓으며 시빌은 자세를 바르게 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선 건 밑으로 내려간 두 명의 일행과 처음 보는 한 명의 남자였다. 갈색의 머리칼을 지닌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방 안을 슥 훑어보았다.
“엘렉페. 오랜만이야.”
엘렉페라 불린 남자는 번개라도 맞은 양 몸이 굳어 시빌을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지는 것에 시빌은 먹이를 앞에 둔 고양이마냥 미소를 지어 보였다.
“3년 만이지?”
“……, 로, 로드 마이언?!”
시빌은 탁자에 턱을 괸 채 도둑 길드의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여유가 있던 엘렉페의 얼굴이 순식간에 탈색되었다.
“살아 있었습니까.”
“누군가가 실수한 덕에 말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일인데. 내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들 하던가?”
엘렉페는 당황한 표정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땀이 흐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더니,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빙빙 돌았다.
“맙소사. 당신이 유물을 찾으러 갔다가 행방불명 됐다는 말 외엔 아무것도 나온 게 없습니다. 다들 그런가 보다 했지요.”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시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판단은?”
“첫 일 년 동안은 뭔가 계획하고 계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레비쥬들이 꼬일 때까지 나타나질 않으셨으니까요. 정말 돌아가셨나 보다 했죠.”
“실망인걸. 날 그렇게 못 믿나?”
“중부 쪽에 전쟁 난 걸 보고 있자면 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게 된달까요. 영원한 건 없달까, 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잠시.”
엘렉페는 양해를 구하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아직도 조용한 아래층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아는 손님이다! 신경들 꺼도 돼!”
긴장으로 차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다시금 술을 들이켜며 노래하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났다. 엘렉페는 다시 한 번 땀을 훔치며 시빌을 바라보았다. 눈을 몇 번이나 비비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했다.
“의뢰를 하려고 왔다.”
엘렉페가 정신을 차린 것은 시빌이 이와 같은 말을 했을 때였다. 당황하며 혼란스러워하던 눈빛이 차갑게 굳고, 감정을 알아볼 수 없게 낯가죽이 뻔뻔해졌다.
“무얼 원하십니까?”
“나룻배 기사단의 업무일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없었던 때의 귀족회의 동향도. 회의록을 통째로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무리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시빌은 탁자 위의 상자를 엘렉페 쪽으로 쓱 밀었다. 뚜껑이 반쯤 열려 있었기에 엘렉페는 눈짓으로만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돈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하는 걸로 보이나?”
시빌은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무시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누군가가 거래를 걸어오는 것에도 익숙지 않았다.
“나는 날 배신한 자들을 편히 살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것을 노린 자들도. 너, 지금 어디에 붙어 있어?”
날카로운 시빌의 목소리에 엘렉페가 딴 곳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
“내가 지금 나가서 레비쥬들을 죄다 죽이고 와야 너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거냐?”
엘렉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빌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내가 그들과 처지가 같다고 생각하는군? 아멜리타가 날 찾기 위해 수색조를 보내지 않은 건 확실하고, 그렇다면 난 마법사 없는 레비쥬란 말이지?”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습니다만.”
시빌은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넌 내 뒤에 서 있는 저 남자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이곳에 하루 종일 묵어도 못 알아채고, 마법사도 못 알아채고, 눈알이 썩었어?”
안 그래도 북부에선 보기 힘든 카디넬의 모습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엘렉페는 말없이 서 있는 레이븐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글쎄요. 마스터의 목걸이는 하고 있지만, 저자가 정말 마법사라는 법은 없지요.”
“그럼 뭔데?”
“사칭이라던가, 뭐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죠. 아무래도 당신이란 사람이 하는 일이니 말입니다.”
시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자의 말이었다. 일행들은 엘렉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원래 이런 놈이었구만.’
이러한 불온한 눈빛의 교류 속에서 엘렉페는 대놓고 시빌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좋은 영주라는 데에 반론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정치적인 일에 도둑 길드가 뛰어들어선…….”
“당신의 아내는 벌룬 늪에 잠겨 있다.”
방 안의 시선이 모두 레이븐을 향했다. 레이븐은 시빌의 오른편에 서서는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딸도 그곳에 있어. 죽었지. 언젠가, 십이 년 전?”
창밖에서 까마귀 짖는 소리가 났다. 레이븐은 마치 새가 바라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들은 살아 있다고?”
엘렉페의 얼굴은 가련할 정도로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는 독이라도 들이마신 양손 끝을 덜덜 떨며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알렘이 살아 있다고? 어디에?”
“일지를 가져다주면 알려주도록 하지.”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레이븐의 무뚝뚝한 말에 엘렉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참으로 다채롭게 변하는 남자의 얼굴에 시빌은 조금 가엾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엘렉페는 표정이 다채로운 남자가 아니었다.
“내게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몰라! 넌 대체 뭐야!”
레이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엘렉페는 씩씩대며 다시 방 안을 서성였다. 그가 가족을 만든 것은 21년 전, 17살의 애송이였을 때였다. 천성적인 도둑놈이었기에 길드의 일을 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라이벌과 경쟁하던 그는 12년 전 길드장이 되는 과정에서 식구들을 모두 잃었다. 그가 일을 하던 사이 납치를 당한 것이다. 일을 저지른 놈은 죽여 하수구에 버렸지만, 납치당한 식구들은 그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엘렉페는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가 가족을 잃은 것은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가 가족들의 존재 차체를 비밀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법사라 주장하며 아내와 딸의 시체를 논하는 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엘렉페는 굴복했다.
“장부는 일주일 안에 가져다 드리지요. 거짓이라면 아무리 영주님이라도 무사할 수 없을 겁니다.”
“기대하지.”
장부를 기대한다는 것인지 보복을 기대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말하며 시빌은 아네모네에게 턱으로 신호했다.
“그녀를 데려가. 앞으로 나와의 연락은 그녀가 맡을 것이다.”
엘렉페는 냉정한 눈으로 아네모네를 훑어보았다. 신발에선 소리가 나지 않았고 손끝은 단단한 데다 야무져서 그 솜씨를 쉬이 가늠할 수 있었다. 잠시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엘렉페는 한 이름을 떠올리고 말했다.
“아네모네라는 도둑이 남쪽 도시에서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당신과 매우 닮은 것 같군.”
“우연이지만 놀랍군요. 제 이름이 바로 그것이니까.”
“남자에게 미쳐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저는 감정적인 좀도둑이라서요. 무례를 저지른 남자는 참아내기가 힘듭니다.”
아네모네는 손끝에서 단검을 돌리며 싱긋 웃었다.
* * *
정확히 일주일 뒤, 아네모네는 엘렉페가 건네준 일지를 가지고 왔다. 문서로 가득 찬 상자를 몇 개나 방으로 옮기며 아네모네는 불평을 토로했다.
“엘렉이 힘들다고 한 이유를 알겠네요. 설마하니 십 년어치를 가지고 올 줄은 몰랐는데요.”
“음모와 배후를 알아채려면 일이 벌어지기 전의 사건도 알아야 하니까.”
시빌은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내심 암담한 기분으로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일행 중에 글을 아는 자는 레이븐 한 명뿐이었고, 그로선 아무리 큰 비밀이 서류에 써 있어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자연스레 레이븐의 눈치를 힐끔 보자 그는 겁먹은 표정으로 서류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레이븐? 거기서 뭐 해?”
“뭔가 흉악한 물건들이 파렴치하게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아. 그쪽으로는 차마 시선도 돌리지 못 하겠…….”
“어서 이리 와 레이븐. 해치지 않아.”
“거짓말!”
“이건 그냥 선량한 종이뭉치일 뿐이라니깐?”
시빌은 완전히 경계 모드로 들어선 레이븐을 향해 한껏 달콤한 미소를 지었지만 레이븐은 코웃음만 쳤다. 금발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을 깔보는 듯한 레이븐의 시선에 괜히 염색했다는 생각을 하며 시빌은 이를 갈았다.
“좋은 말 할 때 와라.”
“싫습니다요, 싫어요.”
그러자 시빌은 말없이 상자를 들어서는 레이븐의 앞에 툭툭 쌓았다. 허를 찔린 듯 괴로워하는 레이븐의 모습에 기묘한 통쾌함을 느끼며 시빌은 싱긋 웃었다.
“우리 서로 협력하여 재빨리 끝내자고.”
시빌은 벌레 씹은 표정을 한 레이븐의 뺨을 툭툭 친 뒤 서류의 산 가까이로 의자를 끌어왔다. 그리고는 가장 위에 놓인 서류를 들어 레이븐의 앞에 들이댔다.
“읏. 이걸 어쩌라구요?”
“소리 내서 읽어줘.”
레이븐이 기가 막힌 얼굴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그냥 읽는 것도 아니고 읽어줘야 하는 겁니까?”
“안 그러면 내가 내용을 어떻게 알겠어?”
레이븐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서류의 산을 바라보았다. 시빌은 장난스레 자신의 무릎 위를 툭툭 쳤다.
“앉으라고. 오래 걸릴 텐데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어. 아직도 있었어?”
아네모네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시빌을 향해 빠르게 목례한 뒤 뒤돌았다.
“그럼 이만.”
그녀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그녀가 모시는 자가 변태인 건 상관없었다. 레비쥬가 남색을 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데다가, 애초에 시빌의 마법사는 남자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저 연인들의 행태가 매우 눈꼴시었다. 슬슬 날이 추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빌이 영주 자리를 되찾으면 근사한 여우 목도리를 사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레이븐은 시빌의 무릎에 앉지는 않았다. 대신 탁자 쪽으로 자리를 옮겨 나란히 앉아 서류를 뒤적거렸다.
손을 다친 레이븐이기에 시빌이 서류를 계속 넘겨줘야만 했다. 아무리 시빌이라도 숫자는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필요하다 싶은 날짜를 찾아 레이븐에게 읽도록 시켰다.
기사단에서는 일 년 단위로 커다란 일정을 짜고, 또다시 계절로 나누어 작은 일정을 짰다. 시빌은 10년 전의 큰 일정부터 차근히 파고 들어가며 레이븐의 나직한 목소리를 즐겼다.
잠이 올 것 같았다. 까마귀의 목소리란 본디 듣기 좋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을 깨우고, 불안을 일으키고, 불쾌함을 주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나직이 읊조리는 레이븐의 목소리는 협곡의 골짜기를 흐르는 거대한 바람 같았다. 거대하고 날카로우나 그 속에 있으면 귀가 먹먹하여 잘 들리지 않는 것이다.
탁자 하나에 나란히 앉은 시빌과 레이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머리가 맞닿았다. 서류를 넘기기 위해 레이븐 쪽으로 달라붙은 시빌의 움직임이 레이븐의 몸에 그대로 느껴졌다. 반쯤은 시빌에게 안긴 모습이 되어서 레이븐은 천천히 서류를 읽어주었다.
“11월 5일. 오전 6시. 연무장을 청소. 아침의 일정은 전날과 같고……. 특별한 사건들은 눈에 띄지 않는군요.”
어느새 기사단의 평범한 일정은 외워버린 레이븐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길게 소리 내어 읽었다. 서류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고 보고서를 훑어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7년의 일정을 훑어 내렸을 때였다.
아네모네가 서류를 넘겨준 날은 이미 지나서 새벽도 끝난 시간이었다.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햇살을 등으로 느끼며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때였다.
“아멜리타가 영주를 호위할 근위대의 숫자를 변경하다. 한 명이 그의 명으로 제외되고 19명으로 재편성.”
시빌은 서류를 넘기던 자세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시빌?”
“내 호위로 따라온 건 스무 명이었는데. 한 명이 비는군.”
“전부 읽어볼까요?”
“그렇게 하지. 그런데 그전에 잠시…….”
레이븐이 말하는 것을 막은 시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영문을 몰라 조용히 문을 바라보며 기다리자니 곧 주전자와 컵을 든 시빌이 돌아왔다.
“목이 쉰 것 같아서.”
레이븐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에 머쓱하니 뺨을 긁었다.
“어. 감사합니다.”
“여기 꿀차는 맛있어. 뭘 넣은 건지 모르겠는데 성에서 해먹으려고 해도 가르쳐주질 않는다니깐.”
레이븐은 어색한 표정으로 작은 잔에 따라지는 따뜻한 차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김이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올라왔다. 왠지 익숙한 향에 레이븐은 조심스레 입을 대었다.
달콤한 차가 지나친 혹사로 갈라진 목을 적셨다. 레이븐은 가볍게 기침하며 입 안에 퍼지는 차의 향을 음미했다. 모과에 달콤한 꿀을 섞어 만든 차였다. 동부에서는 제법 흔하게 마시는 음료였지만 이런 북부에서 마실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모과차입니다. 향이 참 좋네요.”
“모과? 그게 뭐야?”
“맛은 없지만 향이 좋아서 집안에 놔두면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과일입니다. 감기에 좋기 때문에 동부에선 겨울에 많이들 마시는 음료죠.”
레이븐은 조금 발그레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북부에서 마실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시빌은 턱을 괸 채 차를 마시는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목이 아픈 듯 자꾸 매만지는 손이 눈에 거슬렸다.
“그 손은.”
“네?”
“그 손은 언제 다 나아?”
레이븐은 목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목이 대어지고 붕대에 칭칭 감긴 손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라 무슨 무생물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을 때가 지났습니다만.”
레이븐은 시빌을 노려보며 조금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분이 괴롭혀서 말입니다. 하긴 애초에 부러뜨린 것도 그분이었죠.”
시빌은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 되어 떨떠름하니 대꾸했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부러뜨린 것이 말입니까? 아니면 그 후에 괴롭힌 것이 말입니까?”
“윽!”
레이븐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차를 홀짝거렸다.
“거기에 지적 노동까지 강요당하다니. 골수를 빨아 먹히는 기분이군요.”
농담조의 말이었지만 시빌은 잔뜩 켕기는 표정으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아함을 느꼈다. 그를 끌고 북부까지 오는 내내 깨닫지 못했던 것이 그 순간 깨달아졌다. 레이븐이 말은 저렇게 해도 그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심지어 그의 몸을 안을 때도 강간당하는 자의 트라우마 섞인 몸짓 보다는 보채는 애인에게 져 주는 자의 몸짓을 표현한다는 것을 말이다.
“레이븐.”
정말로 목이 아픈 듯 시선만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시빌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너 나 좋아하지?”
레이븐은 마시던 차를 격렬히 뿜어버린 뒤 매우 기괴한 표정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내게 안기는 거 싫어하지 않잖아?”
“저도 남자입니다. 쾌락에 약할 뿐이지 딱히 당신이 좋은 건……!”
레이븐은 덮쳐 오는 입술에 말문이 막혀 눈을 크게 떴다. 가느스름하게 감긴 푸른 눈이 정신을 멍하게 했다. 입 속을 가득 메우고 유린하는 혀의 움직임에 숨이 막혀 시빌에게 매달리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시빌의 무릎 위에 걸터앉은 레이븐은 숨을 헐떡이며 쾌락에 풀린 눈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침이 길게 늘어져 둘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것을 손끝으로 끊어낸 시빌은 잠시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다 숨을 고르는 레이븐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불길이 터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로겐에 들어오고부터 계속 금욕하던 시빌은 거친 손길로 레이븐의 외투를 벗겨 냈다. 시빌은 뜨끈하니 열이 오른 레이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다면 쾌락을 줄게.”
“흐읏!”
레이븐은 순식간에 옷이 벗겨져서는 아래에서 치고 들어오는 시빌의 성기에 몸이 뚫렸다. 자신의 무게가 더해져 생각하지도 못하던 곳까지 깊게 시빌의 성기가 들어왔다. 레이븐은 숨쉬기가 힘들어 욱욱거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런 레이븐의 둔부를 시빌이 손바닥으로 쳤다. 성기가 들어와 있는 데다가 외부의 자극까지 더해지자 레이븐은 거의 기절할 듯 자지러지며 다리를 추켜올렸다.
“여기까지는 들어온 것 같아.”
시빌은 레이븐의 아랫배를 꾹꾹 눌렀다. 레이븐은 계속해서 욱욱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안 그래도 한계까지 열린 내벽을 겉에서 누르자 미칠 듯이 자극이 왔다. 아랫도리가 성기로 가득 차서 찢어질 것만 같았다.
“무, 무리야. 이런 건 무리. 제발 그만.”
“움직인다.”
“아! 아앗! 히이익!”
엉덩이를 쥐어짤 듯 움켜쥔 시빌은 레이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린 뒤 다시 놓았다. 찐득하니 성기에 달라붙어서는 딸려나가는 내벽의 뻑뻑함에 레이븐이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시빌은 추삽질을 몇 번 해보고는 안 되겠다 싶어 레이븐의 몸에서 성기를 주륵 빼냈다. 귀두가 입구에 걸려 부딪치자 레이븐이 긴장으로 숨을 확 들이쉬었다.
“뻑뻑해.”
“뻔뻔해! 하지 맛!”
시빌은 붉게 달아올라 화내는 레이븐의 목에 키스하며 상체를 테이블 위로 밀어 눕혔다.
“향이 좋아.”
레이븐은 시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만 땡그랗게 떴다.
“뭐?”
“향이 좋다고 이거.”
레이븐은 시빌이 손에 든 것을 보고 창백해졌다. 뜨뜻한 모과차를 손에 든 시빌이 충격으로 굳어버린 레이븐의 가슴으로 고갤 숙였다.
“쏟는다?”
“……무! 미쳤!”
레이븐은 뜨거움에 비명 지르며 소리를 빽 내질렀다. 하지만 불에 덴 까마귀마냥 화들짝 놀라 퍼덕이는 팔을 잡아 누르며 시빌은 씨익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시빌의 혀가 흘러내린 모과차를 핥아 올리는 것을 레이븐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쳐다보았다. 할짝거리며 가슴에서 날씬한 배까지 혀를 미끄러뜨린 시빌은 얼굴이 시뻘게진 레이븐을 올려다보며 남은 차를 하체에 부었다.
“달아.”
“머, 먹을 것으로 대체 무슨 짓을…. 아흣!”
시빌은 레이븐의 하체를 입에 담고 쭈욱 빨아들였다. 탁자 위에서 단번에 일어나 도망치려는 레이븐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눌러 고정하며 위협적으로 성기를 살짝 이로 긁었다.
“하악! 앗!”
쾌감에 몸부림치는 레이븐의 몸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처음 당하는 일에 성감이 고조되어 버둥대는 것이 너무 좋았다. 다급한 듯 손바닥으로 레이븐의 머리카락 쪽을 짚어 밀어내려는 것이 되려 시빌을 자극했다. 그는 레이븐의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한 번 성기를 집어넣었던 곳이라 손가락 정도는 무리 없이 들어갔다.
시빌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침과 흘러내려 고인 모과차를 손가락에 발라 레이븐의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앞뒤에서 향해지는 자극에 높은 교성이 터져 나오자 시빌도 점점 여유가 없어졌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잔뜩 젖은 내벽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자극을 견디지 못한 레이븐이 맥없이 사정하며 시빌의 성기를 잔뜩 조였다.
“큭!”
“흐윽! 흣! 흐으….”
시빌은 짐승같이 낮게 으르렁대며 간신히 사정을 참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신하게 앉아 서류를 읽던 몸이 잔뜩 젖어들어 흐트러진 것에 뭐라 말도 못 할 기분이 되었다. 시빌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젖어든 레이븐의 눈가를 혀로 핥았다. 자신의 성기를 몸에 품은 채 쾌감의 잔재에 떨리는 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빌어먹을. 도저히 못 참겠다.”
이미 참는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시빌은 그렇게 말하며 레이븐의 다리를 잡아 어깨 위에 올렸다. 퍽퍽 소리가 나도록 박자 정액으로 뿌옇게 흐려진 배가 잔뜩 조여들며 잘게 경련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근사한 모과 향이 퍼졌다.
“씨발. 존나 달콤하고 뜨거워.”
“윽! 크흑! 흣! 아, 안 돼!”
단단하고 탄탄하게 닫혀 있다가 시빌의 딱딱한 성기에 유린당해 벌어진 레이븐의 내벽은 빠져나가는 시빌의 성기에 끈끈할 정도로 달라붙었다. 이미 쾌감의 끝을 본 레이븐은 시빌의 성기가 자신의 몸을 가르는 것이 싫었지만 물기에 젖은 내벽은 매끈하게 변하여 저항할 힘을 잃고 있었다. 시빌은 점점 빠르게 추삽질하며 레이븐의 내벽이 반응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혹사했다.
레이븐이 느끼는 곳을 집중적으로 찌르자 힘들어하며 시빌의 정욕을 받아내던 레이븐의 허리가 뒤로 확 휘며 퍼득거렸다. 시빌은 오르가즘으로 굽어든 레이븐의 발가락을 잡아 발바닥에 입 맞추었다. 한계까지 벌려져서는 정액을 질질 흘리던 레이븐은 시빌이 사정하고 나서야 해방되어 지친 몸을 늘어뜨렸다.
시빌은 레이븐의 몸을 들어 침대로 옮겨주었다. 축 늘어진 피부를 닦아주고 안쪽에 쏟아 넣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빼주었다. 시뻘건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침대 시트에 파묻히는 것을 살살 쓰다듬으며 입 맞춰주자 잠시 자는 듯하던 레이븐의 눈이 다시 뜨였다.
“피곤해?”
레이븐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졸려?”
레이븐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시빌은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엎드려 누웠다. 그 표정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레이븐은 지독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며 끌어안고 말았다.
시빌은 두 팔로 레이븐은 놓칠세라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그 품속에서 레이븐은 기묘한 기시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의 어떠한 가을에도 그러했듯이, 시빌의 품은 너무나 따뜻한 행복의 냄새가 났다.
“5월 4일. 영주가 유물을 찾기 위해 출발했다. 따라가는 인원은 20명. 명단은 아래와 같다. 루빈츠, 맥, 그렌, 돌리스, 웬디, 파돌프, 룩센, 그루취, 발렌호르스, 윌본델, 골른…….”
시빌은 서류를 읽는 레이븐의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겼다. 윌본델은 아멜리타의 호위기사였다.
“파르티잔 산맥에서 로드 시빌 마이어 실종. 뒤졌으나 그 흔적을 찾지 못하고 귀환. 돌아온 인원은 19명으로 사상자, 부상자 없음. 1명 실종.”
그때 들었던 목소리는 매우 귀에 익은 것이었다. 아멜리타는 큰 소리를 내는 일이 드물어 확신할 수 없었지만, 200년 전 그 날에도 그는 분명 큰 소리로 외쳤었다.
-아일린---!!!!!
그의 레비쥬를 죽였을 때 그는 그렇게 소리 질렀다. 레비쥬를 잃게 된 마법사의 절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6월 27일. 우논 강에서 서 윌본델의 시신을 발견. 여름이라 부패 시기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영주의 호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판단.”
윌본델은 시빌 본인이 그의 마법사에게 붙여 놓은 기사였다. 감시의 일도 겸하고 있었다. 아멜리타의 힘 중엔 환상을 이용하는 것도 있었다. 다만 그 환상에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려면 그 인간이 죽어 있어야만 했다.
“유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빌은 아멜리타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위대를 추려달라는 시빌의 말에 자신의 호위기사를 죽이고, 그의 모습을 빌려 시빌의 죽음을 계획한 것이다.
유물을 찾으러 가도록 가장 강하게 부추긴 것도 실은 그였다. 이처럼 강대한 영토, 굳건한 반석을 지닌 시빌에게 더 이상의 힘은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힘을 얻으라 부추겼다.
“7월 2일. 북부의 영주인 시빌 마이언의 죽음을 정식으로 공표하고 아멜리타 발루아의 이름으로 대리청정을 시작. 자신의 몸과 영지를 지참금으로 구혼을 받기로 한다. 그 다음 날 중부 전쟁 발발. 가장 강력한 레비쥬 중 하나였던 오델이 원인 모를 괴질로 사망.”
레비쥬도 병에 걸렸다. 그것은 직접적인 창상보다 더욱 강력하게 몸을 갉아먹고는 했다. 오랜 시간 권좌를 지킨 레비쥬가 죽었을 때 그것은 대개 독살이었다. 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쉬이 아물면서도, 내부의 공격엔 약한 것이 레비쥬의 몸이었다.
“11월 9일. 중부의 영주 중 하나인 바쉬엘라가 부하들을 데리고 입성. 이로써 열두 명의 레비쥬가 로겐에 있게 되었다.”
아네모네가 서류를 가져오기 전 일주일 동안 둘러본 로겐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중부의 전쟁에서 벗어난 행운도 이제 곧 끝나리라는 암담함이 사람들의 웃는 얼굴 뒤에 숨어 있었다.
전쟁을 꺼리는 레비쥬는 없다. 있었다면 오직 전 영주인 시빌 마이언뿐임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곧 피에 미친 레비쥬가 지배하는 북부가 중부에 전쟁을 선포하리라 모두들 생각했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어떤 레비쥬라도 적이 있다면 전쟁을 끝내지 않는다. 그 미친 지배욕의 끝은 자신을 파멸시킬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아직 살아있는 세 명의 레비쥬 중 한 명이 북부의 영주가 되면, 그는 오랫동안 쌓인 북부의 부와, 강력한 마법사를 데리고 검을 뽑아 들 것이다.
“남부에서 올라온 레비쥬 룩센이 사망. 이로써 로겐에 남은 레비쥬는 세 명이 됨. 치안이 어지러워 경비대의 수를 늘림.”
“사람들은 내가 돌아오는 것을 원할까?”
시빌은 침대에 누워 나직이 중얼거렸다. 레이븐은 느릿하게 읽던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전쟁이 싫어.”
“이상한 레비쥬군요.”
“내가 레비쥬일까?”
시빌은 음울하게 웃었다.
“나는 나를 인간이라고 칭할 수 있지. 레비쥬는 그게 안 되는데 나는 돼.”
“이상하긴 합니다.”
“아멜리타가 내게 과거의 환상을 보여줬을 때 나는 별 타격을 입지 않았어.”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에 레이븐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리 나쁜 기억이 아니었거든.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소중하고 반짝거리는 기억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학살한 것이 말입니까?”
“학살하지 않았어.”
시빌은 몸을 뒤집어 레이븐을 밑에 깔았다. 검은 눈동자가 준엄한 빛을 띤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가슴 한쪽이 진득하니 울렸다.
“아멜리타가 나를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이제 분명해. 하지만 의문이 있군. 왜 200년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이제야 시도한 걸까?”
“글쎄요. 인간이란 작은 것을 계기로 폭발하는 것이니까요. 마법사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시빌은 잘 모르겠다는 듯 신음을 흘리며 레이븐의 뺨에 입 맞췄다. 정사의 여운에 잠긴 몸은 반항 없이 다시 열렸다. 시빌은 늘씬한 허벅지를 잡아 벌리며 허리를 박아 넣었다. 잘 참아왔던 욕망은 봇물이 터지듯 가열차게 흘러나왔다. 레이븐은 신음을 참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아…, 흣!”
“멈추지 말고 읽어 줘.”
시빌은 레이븐의 몸을 돌려 뒤에서부터 찍어 눌렀다. 팔꿈치를 세워 간신히 버티는 레이븐의 눈 아래 서류를 펴주었다.
“읽어 줘.”
“아! 아아앗!!”
“어서.”
레이븐은 잔뜩 풀어진 애널을 유린하는 시빌의 성기에 괴로워하며 그가 가리키는 문서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내용이 성추행에 대한 보고서였다. 기가 막혀 시빌을 흘겨보기 위해 고개 돌리자 그가 진득하니 안쪽을 찌르고 비벼댔다.
“왜 하필! 윽!!”
“왜, 무슨 문서인데 그래? 말해 주지 않으면 난 모른다고.”
시빌은 레이븐의 몸과 이어진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손끝으로 구멍을 벌려댔다. 레이븐이 헐떡이며 비명을 쏟아냈다. 시빌은 레이븐의 귀를 진득하니 핥고 구멍에 혀를 넣어가며 희롱했다. 눈물이라도 떨굴 듯 움츠러든 레이븐이 신음과 비명을 섞어가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12월…, 윽! 16일, 기사가 종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발…! 생. 앗!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동계 훈련을 아앗! 핫! 실시! 앗!!”
시빌은 바들바들 떠는 레이븐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뒤 드러난 뒷목에 이를 세웠다. 끈끈하니 달라붙으며 자극하는 시빌의 입술에 레이븐이 자지러지며 아래쪽을 힘껏 조였다.
“윽! 기사는 앗! 종자에게 자신의 으…! 서, 성기를 빨도록 수차례 지시했고! 으아앗!!”
“큭!”
“하! 아앗!”
시빌은 간신히 사정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천천히 레이븐의 몸을 들락날락했다. 느끼는 곳을 살살 피해가며 빙글빙글 문지르자 레이븐이 숨도 못 쉬며 헐떡거렸다.
“그것 말고 더 있지 않아? 인상적이어서 자주 읽어보게 시켰던 서류야.”
“익! 변태 같으니!”
레이븐은 몸속을 가득 채우는 흉기의 움직임에 벌벌 떨며 서류 위로 얼굴을 묻었다. 침이 흘러 종이가 잔뜩 젖어들자 시빌이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레이븐은 강제로 트인 숨에 입을 크게 벌리며 허리를 잘게 떨었다. 예민해진 몸이 금세 절정에 다다라 정액을 맥없이 떨어뜨렸다.
시빌은 키득키득 웃으며 레이븐의 밑에 있던 서류를 들어 보여주었다. 레이븐이 쏟아낸 정액이 잔뜩 묻어 흐르는 종이가 지나칠 정도로 음란하게 젖어 있었다.
“읽어 줘. 어서.”
“시, 싫!”
레이븐이 거부하자 시빌은 허리를 잡고 귀두까지 성기를 빼낸 뒤 거세게 다시 박았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박아대는 시빌의 추삽질에 레이븐이 비명을 터뜨렸다.
“제발 그만! 앗! 빠, 빨랏! 조그, 조금만 느리게! 앗!”
시빌은 아무 말도 없이 거칠게 움직였다.
“읽을, 읽을 테니까!!”
레이븐이 굴복하고 나서야 시빌은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내벽을 비벼댔다. 느끼는 곳을 정확히 스치며 지나가는 성기의 움직임에 시빌은 자신의 정액이 떨어진 서류를 울부짖듯 소리 내어 읽어야 했다.
한참을 여유 있게 희롱하며 레이븐의 몸을 달궈 올리던 시빌은 레이븐이 서류를 읽다 말고 그 위에 얼굴을 묻으며 엎어지자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거세게 움직였다. 종이들이 구겨지고 밀리는 가운데 레이븐은 침을 질질 흘리며 경련하는 허벅지를 바둥거렸다.
잔뜩 괴롭혀져 풀어지고 부푼 레이븐의 애널은 시빌의 움직임에 따라 벌름거리며 질척거렸다. 거의 저항도 없이 쑥쑥 박히고 빠져나가는 시빌의 성기를 막기는커녕 반기며 열리는 자신의 몸이 레이븐은 믿기질 않아 울었다.
이미 절정을 맞았는데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쾌감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어떻게든 막고 싶은데 그의 엉덩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성기는 두껍고 단단하기만 했고, 아랫배를 꾸욱 누르며 박기 쉽도록 들어 올린 시빌의 손도 굳건하기만 했다. 하체만 허공에 뜬 채 레이븐은 물에 빠진 사람마냥 팔다리를 허우적 찼다.
“아! 아!! 아아앗!!”
“크흑!”
꿀럭거리며 터져 나온 정액이 레이븐의 내부를 뜨겁게 적셨다. 시빌은 그 자신도 절정에 다다라 몸을 부르르 떨며 레이븐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성기와 함께 하얀 정액이 후두둑 밀려 나와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진득하니 쓸어 올린 시빌은 레이븐의 벌어진 입에 갖다 대고 말했다.
“핥아.”
레이븐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 멍하니 혀를 내밀어 핥았다. 시빌의 숨이 다시 거칠어졌다.
시빌은 서류 위에 지쳐 널브러진 레이븐의 몸에 입을 맞추며 땀과 정액에 젖은 서류들을 침대 밑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다 읽고 난 서류들을 엘렉페에게 다시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레이븐이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매우 궁금해하며 그 다리를 다시 잡아 벌렸다.
* * *
레이븐은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리고 거대한 둥지를 틀어 시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레이븐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이불과 서류와 울렁거리는 불쾌감으로 자신을 꽁꽁 싸맸다.
“레이븐. 그렇게까지 삐질 건 없잖아? 응?”
빈정거림이라던가, 꺼지라던가, 하다못해 까마귀 소리라도 해주길 기다렸지만 레이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빌은 완전히 곤란해져서 동그랗게 또아리 틀고 누운 레이븐을 건드려 보았다.
“악!”
물렸다.
시빌은 침통한 표정으로 잇자국 난 손을 쓰다듬었다. 서류를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저 상태였다. 이젠 위협도 통하지 않아서 뇌물로 꼬시거나 비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만 해도 완벽한 우위에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건가 싶어 시빌은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야? 적당히 좀 하라고!”
시빌의 고함에 레이븐은 꼼질거리더니 더욱 둥지를 커다랗게 만들었다. 머리카락만 내놓고 이불 속에 숨어버린 레이븐의 모습에 시빌은 길고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다음부턴 안 그런다니까?”
절절매는 시빌의 모습에 방금 전부터 한심하단 표정을 짓고 있던 아네모네가 한마디 거들었다.
“일 안 하실 겁니까?”
“지금 일이 문제야?!”
날카로운 시빌의 대꾸에 아네모네가 아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참을 허공만 바라보며 눈알을 굴리던 그녀는 간신히 평온을 되찾아 구슬리듯 말했다.
“야시장에 볼거리가 아주 많다던데 같이 가시죠. 골목마다 등을 달아서 반짝거리게 만든대요.”
머리 꽁지만 튀어나와 있던 레이븐의 귀가 툭 둥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기색을 미묘하게 알아챈 시빌이 목소리를 키워 대꾸했다.
“그렇게 반짝거린대?”
“도시 전체가 빛나는 것 같을 거라고 엘렉페가 말하던데요. 한 달에 한 번 있는 시장이지만 겨울엔 하지 않으니까 오늘 못 보면 다시 보기 힘들 거라고도 하더라구요.”
“호오.”
레이븐은 이제 시커먼 두 눈도 꺼내어 힐끔거리고 있었다. 시빌은 냉큼 레이븐을 향해 물었다.
“너도 같이 갈래, 레이븐?”
“……으음.”
“수확 마지막 철인 사과를 통째로 설탕 조림해서 만든 사탕이라는 게 나온다고 하던데.”
“아. 그거 맛있지.”
절절히 떡밥을 뿌리며 둥지 쪽을 바라보자 어느새 레이븐은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시빌이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레이븐은 결국 촌사람에 숲지기인지라 도시의 명물에 약했다.
“…같이 갈래? 꼭 구경시켜주고 싶은데. 부탁이니까?”
“음. 어쩔 수 없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시빌은 잽싸게 레이븐을 둥지에서 꺼내 업었다. 한심해 하는 아네모네의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어쨌거나 빚을 졌다고 감사의 눈짓을 하며 시빌은 방을 나섰다. 뒤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녹색 외투는 눈에 띄기에 시빌은 어두운 회색의 후드를 레이븐에게 입혀주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땋아서 반들거리는 공단으로 메어주자 그제야 레이븐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시빌은 아직 쀼루퉁한 레이븐을 달래며 옆에 끼고 나섰다.
밖은 벌써 밤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야시장은 원래도 붐볐지만, 가을의 마지막 시장이기에 더욱 붐볐다. 시빌은 레이븐이 인파에 떠밀리지 않도록 어깨를 꼬옥 감쌌다. 여관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화가 뭉쳐 있던 레이븐의 표정은 엄청난 시장의 인파를 보자 멍청하게 풀어져 시빌을 기쁘게 했다.
시빌은 레이븐에게 사과 사탕을 사 들린 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가 야시장에 나온 것은 레이븐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3년이 지났다지만 도시의 커다란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상점이 바뀌고 건물이 약간 바뀐 정도였다. 시빌은 익숙한 길을 걸어 아네모네가 전해준 가게로 향했다.
대로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는 그 가게는 창녀를 끼고 장사하는 술집이었다. 가게에 여자를 두는 것은 아니고 손님이 불러야만 데려다주는 곳이었기에 시빌은 잠시 고민한 뒤 레이븐을 데리고 들어갔다.
후드를 깊게 씌워 피부가 보이지 않도록 한 뒤 그늘진 자리에 앉히고 술을 시켜주었다. 손은 붕대로 감겨 있었기에 까마귀는 시선을 끌지 않은 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일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꿈쩍도 하지 마. 알았지?”
아직도 조금은 삐져 있던 까마귀가 고개만 끄덕거렸다. 시빌은 끄덕이는 회색 후드 꼭지를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장대한 기골의 남자가 혼자 앉아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시빌은 취객을 가장하여 비틀비틀 그의 옆으로 갔다.
남자가 앉아 있는 곳은 모닥불 근처의 상석이었다. 그는 옆에 주저앉는 시빌의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술만 마셨다. 고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술이 좋아 마시는 듯 여러 종류의 술병이 그의 옆에 널려 있었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시빌은 술을 마시려는 그의 팔을 잡아 멈췄다.
킁 하고 비웃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의 팔목에 힘줄이 돋았다. 가느다란 시빌의 팔정도는 무시하고 마시겠다는 태도였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그의 팔을 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현실에 그는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씨발. 이건 뭐야. 내가 벌써 취했나?”
“주군의 얼굴도 못 알아보는 것 보면 취한 것 같기도 한데.”
“확실히 취했군.”
“서 엘린도. 아멜리타 발루아가 그의 레비쥬를 배반했는데, 그에 대해 아는 바라도?”
술이 확 깬다는 말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할법한 이야기였다. 실제로도 술이 확 깨버린 북부 발루아의 기사단장 서 엘린도는 유령을 본 듯한 표정으로 시빌을 휙 돌아보았다. 시빌은 웃었다. 바로 일주일 전 엘렉페가 보여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함지르려는 엘린도의 입을 틀어막았다.
“웁! 워어업?!”
“조용히.”
시빌은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하며 입을 덮은 손을 떼었다. 손가락으로 일어날 것을 명령하자 남자는 조용히 일어나 시빌을 따라 움직였다. 시빌은 레이븐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남자를 안내했다. 레이븐은 술잔만 기울일 뿐 남자에겐 시선만 힐끗 주었다.
“오랜만이다, 엘린도.”
입을 떼기가 무섭게,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석상처럼 시빌을 바라보았다. 기적을 본 자의 얼굴 같기도 하고, 징그러운 벌레를 본 자의 얼굴 같기도 했다. 엘린도는 오래된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살아계셨습니까.”
“귀족원의 회의록을 훑었다. 수색을 하지 않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한 자들 중에 그대의 이름이 있었지. 때문에 네게 모습을 보인 것이다.”
엘린도는 여전히 창백하지만, 감격에 젖은 눈초리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이토록 유린되는 발루아를 보며 나서지 않은 영주님이 아니니까요.”
“그대의 충정을 기억하겠다. 서 엘린도.”
시빌은 충직한 기사에게 술잔을 들어 건네주었다. 엘린도는 감격에 찬 손길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며 미워하던 영주의 말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지 못했다. 엘린도는 이를 악물며 시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주군은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는 짓지 않았지만 언제나 싸늘한, 비웃음과도 같은 무서운 웃음을 입에 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차가운 얼굴로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범죄자처럼 후드를 눌러쓴 채 술집의 어두운 공간에 앉아 그와 얘기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비참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져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대체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회복을 위해 요양하고 있었다. 아멜리타가 아주 제대로 내 머리를 날렸어.”
“정말로 마법사가 당신을 배신한 겁니까?”
엘린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시빌은 차갑고도 날카로운 미소를 흘렸다.
“날 호위하던 자들의 명단엔 아멜리타의 호위기사인 윌본델이 속해 있었다. 하지만 20명의 기사들 중에 윌본델이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지.”
“윌본델이 없었습니까?”
엘린도는 놀람을 숨기지 않으며 반문했다.
“그는 당신을 보호하지 못한 죄책감에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아니. 아마 그는 내가 로겐을 떠나기도 전에 살해됐을 것이다. 아멜리타는 죽은 자의 모습만 훔칠 수 있지.”
시빌은 자신이 예측한 바를 엘린도에게 말해주었다.
“호위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멜리타 또한 로겐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여름 감기에 걸렸다는 핑계였지만 날 호위하던 자들이 로겐으로 돌아오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어. 그는 날 죽이기 위해 파르티잔까지 따라온 거다.”
“하지만 대체 왜요? 마법사가 자신의 레비쥬를 해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오래된 은원이라고 해두지. 아멜리타가 나를 죽이고자 한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내가 너에게 그의 배신을 알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너에게 들을 것이 있어서다.”
엘린도는 진지한 표정으로 시빌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시빌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아직도 나를 섬기는가?”
엘린도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금 도주하길 원할 정도로.”
“도주?”
“세 명의 레비쥬가 당신을 노리고 있고, 당신의 마법사 또한 당신을 배신했는데 로겐에 계속 있다간 목숨을 잃을 겁니다. 도망쳐서 군대를 당신의 깃발 아래 모으십시오.”
시빌은 웃음을 터뜨렸다. 모래가 떨어질 듯 메마른 웃음이었다. 한참을 키들거리던 시빌은 곧 아가리를 벌린 짐승 같은 표정으로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내가 그렇게나 약해 보이나.”
“레비쥬란 마법사와 함께해야지만 그 힘을 제한 없이 발휘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강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선 마법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우리들에게 항상 말해온 건 당신입니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여기 왔을까? 내겐 마법사가 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시빌을 바라보던 엘린도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술을 들이켜던 레이븐은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술집의 흐린 불빛으로도 레이븐의 피부색을 알 수 있었다. 그림자를 두껍게 드리운 후드 아래로 카디넬의 피부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엘린도는 벌레 씹은 표정을 하며 시빌을 다시 노려보았다.
“설마 이 자입니까?”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린도의 눈동자가 분노로 확 타올랐다.
“카디넬이 아닙니까!”
엘린도는 전형적인 북부의 남자였다. 북부에도 동부 못지않게 산이 많았지만 그 대부분은 인간은 살 수 없는 날카로운 험지였다. 산에 신세 지지 않기에 카디넬의 도움 또한 필요 없는 북부인들은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어두운 피부의 족속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시빌은 날카로운 말로 터져 나오려는 엘린도의 장광설을 막았다.
“배신자보다는 카디넬이 낫다. 아니면 날 버리고 아멜리타에게 붙겠나?”
엘린도는 말문을 잃은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시빌 마이언이란 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시빌은 정이 없어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만한 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부하들을 도구로 부리는 데에도 냉혹한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아멜리타는 유순하고 부드러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삼 년 전이었다면 이와 같은 질문에 엘린도도 깊은 고민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엘린도는 엉망이 된 치안과 지난 삼 년간의 악몽 같은 시간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열두 명의 레비쥬를 아멜리타는 통제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던 상관 없다는 듯이 방관만 했다. 레비쥬가 인간을 죽여도, 도시를 부숴도, 저들끼리 싸워 피를 뿌릴 때에도 곤란하다는 듯 외면만 한 것이다.
그는 로겐이란 도시를 사랑했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었으며 길 하나, 건물 하나, 나무 하나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추억이 묻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내 마법사가 카디넬이라 해도?”
“……따르겠습니다.”
이 대답은 조금 침통하게 흘러나왔다. 나름 진심이 담겨 있는 대답이리라. 시빌은 좋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덮었다.
“좋아. 그렇다면 그대를 믿겠다. 이틀 안에 로겐의 기사들을 모조리 윈터 홀로 소집해라.”
시빌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는 월요일 아침, 윈터 홀에서 대관식을 치르겠다.”
엘린도는 물론이거니와 레이븐까지 기겁하여 시빌을 쳐다보았다.
왕이 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인간이 밟고 사는 모든 땅을 정복하여 적이 없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유물을 얻어 신성을 획득하는 방법이었다.
대륙은 통일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유물의 획득이었다.
“그, 그럼 유물, 유물을?!!”
“그래. 이 자다.”
엘린도는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레이븐은 물 맞은 새마냥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며 항의했다.
“까아아아악?!!!”
“죽음을 부르는 자다. 전신의 유물다운 능력이 아니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배웅이고 뭐고 진즉 도망갔어야 했다고 레이븐은 처음으로 후회했다. 두발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다. 반짝인다고 다 줍는 게 아니었다. 시빌은 온몸으로 부정하는 레이븐을 무시하며 엘린도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항의하려던 레이븐은 입을 딱 다물었다.
시끄러운 술집의 한 귀퉁이를 울리는 시빌의 목소리엔 부정하기 힘든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그 방법은 모르겠지만, 시빌은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왕이 될 작정이었다.
* * *
도시란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보석이 대지의 힘이라면 도시는 문명의 힘이라 할 만한 공간이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길과 팔이 부딪치도록 많은 사람들.
레이븐은 인간이 나무처럼 많고 숲처럼 빼곡한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숲을 걷는 것처럼, 익숙한 눈길로 도시를 바라보며 거침없이 나아가는 시빌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디에 앉을 만한 돌이 있고, 어디에 피해야 할 가시가 있는지 아는 나이 많은 맹수처럼 도시란 이름의 숲을 걸어가고 있었다. 단단한 팔이 레이븐의 어깨를 감싸며 끌어안았다. 그 팔이 없었다면 순식간에 인파에 밀려 어딘가로 쓸려갔으리라 레이븐은 생각했다.
하늘엔 노란 전등이 매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붉고, 푸른 등도 저마다의 빛을 품은 채 밤하늘의 별을 가리고 있었다. 시골에선 귀한 천이며 종이들이 쓰레기가 되어 사람들의 발치에 굴러다녔다.
누구에게 말해도 거짓말이라 하겠지. 레이븐은 마치 꿈을 보는 양 벽돌로 지어 올린 건물이며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북부엔 석회석이 많아 흰빛으로 도시를 치장하고 있었다. 세월에 바래 누렇게 된 부분이며, 붉은 벽돌로 지어 올린 건물들이 겹겹이 세워진 성벽들 사이를 메워 멀리서 보면 한 송이의 백장미를 연상시켰다.
지나가던 상인에게 치여 비틀거리자 시빌이 레이븐을 품 안에 끌어들여서는 꼬옥 안았다. 가슴을 압박하는 힘에 눈살을 찌푸리자 시빌이 부드러운 손길로 후드 위에 입 맞췄다. 성적인 의도는 담겨 있지 않은 담백한 스킨십을 레이븐은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하늘은 밝고 땅은 소란스러워 마치 흐르는 강 속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소음에 귀가 먹먹해졌고 후드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팔이 따뜻해 의지가 됐다. 레이븐은 조심스레 고개 들어 시빌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쓸쓸한 눈으로 레이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빌. 아까의 그 말에 대해선…….”
“어디서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데, 누군가가 내게 그랬다. 신들이 모두 죽어버렸다고.”
그것은 레이븐이 기억을 잃은 시빌에게 한 이야기였다. 레이븐은 커다랗게 뜬 검은 눈으로 시빌의 눈치를 봤다. 그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인간의 왕이라는 것은 인간을 대표하여 신들과 통할 수 있는 자를 뜻하는 것이었다지. 그러나 신이 죽고 없다면, 그 왕이라는 것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신들이 죽었다는 말부터가 너무나 위험해서 레이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자의 일에 바쁜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그 둘의 일엔 신경 쓰지 않았다. 시빌은 주변을 훑어보는 레이븐의 모습에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리 카디넬이라도 그런 얘기는 두려운가?”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진실이란 함부로 입 밖에 내어선 안 되는 법입니다.”
“신이 죽은 것이 진실이라면 널리 알리는 게 너희들에겐 좋지 않아? 신들에게 저주받은 카디넬이라고 했지. 저주한 당사자가 죽었다면…….”
“인간들은 희망을 잃게 되겠죠. 선과 악에 대한 분별도 잃고, 징벌에 대한 두려움도 잃고, 자신들이 이 세계의 신인 양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시빌은 놀란 눈으로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도저히 숲지기의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차라리 현자나 은둔자의 말 같았다. 레이븐의 검은 눈은 지혜와 영민함으로 반짝였고 그의 입술은 가장 영롱한 별들이 흘리는 비밀의 잔영 같았다.
레이븐은 손가락을 들어 시빌의 입술에 댔다.
“그래서 왕이 되겠다고 하신 겁니까? 황금의 관을 머리에 인 왕이란 이름의 괴수가 되어, 온 대륙을 피로 물들이실 겁니까?”
“그 누구도 감히 내게 덤비지 못해. 발루아는 견고하다.”
“유물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빼앗거나, 그도 아니면 죽이자고 생각할 자들이 널렸습니다. 저를 위험으로 던지셨군요. 알고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빌은 웃었다. 아름다웠지만 그린 듯이 감정 없는 웃음이었다.
“넌 위험하지 않아. 난 널 지킬 것이고, 널 해치고자 하는 자들은 감히 네가 다가가지도 못할 것이다.”
“두고 보도록 하죠.”
레이븐은 시빌의 입술선을 따라 손가락을 이동시켰다. 시빌이 어금니를 악다무는 것이 겉으로도 눈에 보였다. 수염이 까실하니 난 금색의 턱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으며 레이븐은 유혹하듯 말했다.
“왕은 되지 마세요.”
목소리는 낮고, 가냘프고, 잔뜩 쉬어 있었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메마른 겨울의 나뭇잎이 부벼지는 소리가 이와 같을까 싶어 시빌은 레이븐의 뒷목을 부드럽게 받쳐 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했다.
사람들은 그 둘의 주변을 빠르게 지나가며 부딪쳤고 하늘의 등롱은 고개를 기울여 연인들의 키스를 훔쳐보았다. 입맞춤은 영원할 것만 같았고 그 어떤 사탕이나 과자보다 달콤하며 부드러웠다. 그렇게 비밀과 거짓으로 가득 찬 두 개의 혀가 얽혀 서로를 능멸하는 모습은 뱀이 또아리를 트는 듯 사악하고 순결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소망을 혀에 품은 채 기도하듯 입맞춤했다.
* * *
레이븐은 사탕을 파는 노점 앞에서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서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에서 키스했단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낮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지나가던 까마귀에게 들키기라도 했다면 하루 종일 깍깍거리는 놀림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참을 키스하던 시빌은 물을 빼고 오겠다며 노점 앞에 레이븐을 놓은 뒤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앞섶이 잔뜩 부풀어 있었지만 그 아랫도리를 해결하는 데에 레이븐을 끌어들이지 않은 건 현명한 결정이었다. 레이븐은 아직도 조금 삐져 있었던 것이다.
시빌이 손에 쥐여준 사과 사탕을 혀로 핥으며 레이븐은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구경했다. 온갖 지역의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며 오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색의 의복이며 장신구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레이븐은 문득 손에 든 사탕의 커다랗고 빨간 광채를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역시 파르티잔으로 떠날 때에는 시빌의 금고에서 몇 가지라도 집어 가야겠다고 레이븐은 결심했다. 고생도 많이 했고, 약도 만들지 못했으니 올해는 손님에게 팔 것이 없어 완전히 공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환각 버섯도 모조리 사용해버렸지.’
레이븐은 시뻘겋게 익어서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역시 주머니 하나 정도는 가득 채워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고개 숙인 레이븐의 눈앞을 황홀한 은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븐은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 들어 은색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시빌의 금발이 영롱한 태양이었다면 그자의 머리카락은 밤하늘의 은하수였다. 황금보다는 은을 닮았고, 은보다는 달빛을 닮은 머리카락이 남자의 어깨를 가득 덮은 채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이븐은 손에 든 사탕조차 잊은 채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 또한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넘치듯 후드에서 흘러나온 머리카락만이 그자의 아름다움을 대변하고 있었다.
남자는 노점 앞에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고 있었다. 황홀한 플래티넘 블론드가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듯 흔들렸다. 레이븐은 감탄의 한숨을 내쉬며 그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래 기다렸어?”
레이븐은 골목에서 돌아온 시빌을 냉랭한 표정으로 슥 한 번 훑어보았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레이븐을 한눈에 반하게 만든 금발이 사라지자 인간 자체가 전보다 좀 초라하게 느껴졌다.
“외모는 중요한 거야.”
자문자답하며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빌도 레이븐이 더러워지면 구박하고 냉대하지 않는가. 금발이 사라진 시빌을 매우 꼴 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 정도는 매우 가벼운 일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시빌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레이븐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백금발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야시장의 길 끝은 발루아 성의 중심으로 향해 있었다.
* * *
아멜리타 발루아는 인파로 붐비는 길을 조심스레 걸어갔다. 야시장에 나오는 건 삼 년 만의 일이었다. 성 밖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활기에 차있어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시빌은 가끔씩 그의 손을 잡아서는 성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는 문득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시빌이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뒤틀렸다. 언제나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위협하던 남자는 이제 죽었는데도, 그 얼굴을 떠올리면 여전히 괴로웠다.
아멜리타는 이를 갈며 고급스러운 찻집에 들어갔다. 자리마다 빽빽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과를 나누며 떠들고 있었다. 그는 2층으로 향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찻집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사방을 꾸며놓고 있었다. 얼굴을 아는 이가 있을까 싶어 그는 후드를 아래쪽으로 잡아당겼다.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은 오늘 새벽이었다. 푸른 나비가 그 날개에 메시지를 품고는 그의 방에 날아들었다. 아멜리타는 등불을 들어 그 날개를 비추었다. 푸른색의 나비 날개에 정교한 필체로 적힌 글씨는 삼 년 전 그를 방문한 남자의 필체와 똑같았다.
아멜리타는 예약되어있는 방에 들어가 우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아멜리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은 이미 셈을 끝내었고 더 이상은 나눌 얘기도 없었다.
아멜리타는 초조한 손놀림으로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의 목걸이에는 안개와 환상이 들어있는 병이며 여러 가지 금속과 기름, 뼛조각과 청동 등이 달려 있었다.
“생각하지 마. 너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아멜리타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듯 새까만 남자가 그를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아멜리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동부의 성에 레비쥬가 나타났다.”
남자의 말에 아멜리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레비쥬는 대륙 곳곳에서 각성했고 문제를 일으켰다. 죽어 나가는 숫자만큼 어디선가 생겨났다. 잡초 같다고 생각하며 남자의 말을 여상히 들을 때였다.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레비쥬였다고 한다. 시체들의 군대로 무장한 이쉬카를 순식간에 죽였다더군.”
아멜리타는 잠깐 숨을 멈췄다. 이쉬카는 나이젤의 마법사였다. 패배한 뒤 레비쥬의 시체를 들고 어디론가 도망쳤다는 것이 그에 대해 들은 마지막 이야기였다.
“……그래서요? 금발에 푸른 눈은 흔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시빌이라고 밝혔다.”
빠드득 이가는 소리가 났다. 아멜리타는 잔뜩 움켜쥔 주먹으로 눈앞의 벽을 후려갈겼다.
“그는 죽었습니다!”
“죽지 않았다. 애초에 시신을 불태우지 않은 네 잘못이야.”
“목이 몸에서 떨어졌단 말이야!!!”
아멜리타는 제정신을 잃고 소리쳤다. 격렬한 움직임에 후드가 벗겨지고 아름다운 얼굴이 빛 아래 드러났다. 새하얀 얼굴은 북부인의 전형이었다.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분노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말에서 떨어져 구르는 머리통을 내 눈으로 봤어! 아무리 레비쥬라지만 목을 잘랐는데 살아나는 경우는 없어!!”
“그는 로겐에 들어와 있다. 아멜리타.”
“그는 죽었어--!!!”
검은 그림자는 잇몸을 드러내며 아름다운 아멜리타를 조롱했다. 시꺼먼 몸이 움직이는 대로 그의 그림자도 춤을 추었다.
“나는 너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거야.”
아멜리타는 거친 숨에 헐떡이며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할퀴었다. 백금발의 머리칼에 붉은 피가 번져 무시무시한 형상이 됐다. 완전히 미쳐버린 얼굴로 아멜리타는 괴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즐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기괴한 각도로 손을 뻗어 아멜리타의 턱을 잡아챘다.
“그가 지닌 레비쥬는 아주 크다고 말했잖아. 내가 말했잖아. 그치? 확실히 말했잖아? 목을 자른 뒤 그 머리는 반드시 태워 없애야 한다고.”
“레비쥬라면 얼마든지 죽여 봤어. 누구든 목을 자르면 죽어! 그 상태에서 살아난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잖아?!”
남자는 새까만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나는 마법사인데 왜 너와 다를까? 아멜리타. 아멜리타. 내가 너와 다른 건 내가 지닌 마법의 조각이 지극히도 크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말했잖아. 머리가 나쁘진 않은데 왜 이해를 못 할까.”
아멜리타의 얼굴은 이제 창백해졌다.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만큼이나 새하얘진 얼굴을 검은 남자는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가엾은 아멜리타. 이제 곧 마누라와 만나겠구나?”
아멜리타는 남자에게 발작적으로 덤벼들어 멱살 잡았다. 남자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옷깃은 기름처럼 매끄러웠다. 그 지독한 한기는 마치 불처럼 아멜리타의 손을 태웠다.
아멜리타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었다. 노골적으로 비웃는 웃음소리가 사방의 벽을 타고 흘렀다. 그는 분노에 몸부림치며 손등을 쥐어뜯었다. 깊게 파이는 상처가 그의 정신만큼이나 위태로웠다.
남자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마냥 히죽거리며 아멜리타의 뺨을 찔렀다. 완전히 미쳐버린 마법사의 정신이 손끝에 닿을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근사하게 망가졌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법사도 없이 로겐에 기어들어 온 시빌은 죽을 것이고, 이 아름다운 도시는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나는 이곳을 발판 삼아 세상의 왕이 될 것이다.”
음산하게 말하며 그는 빛으로 가득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별보다 밝은 대지의 별이 그의 발아래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