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2)
시빌은 레이븐에게 대놓고 찝쩍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매일 나가던 것을 그만두고 레이븐을 졸졸 쫓아다니며 일을 도왔다. 숲을 위해 레이븐이 하는 일은 방대했고 그 노동의 강도에 시빌은 살짝 질려버리고 말았다. 한가한 건 겨울 뿐인 듯했다.
레이븐은 여상한 태도로 메마른 잎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장마가 늦을 것 같아 큰일이야.”
확실히 계곡의 수위가 낮아져 있었다. 잎은 시들했고 짐승들의 털도 꼬질꼬질해져 초라해 보였다. 시빌은 문득 산불을 막기 위해 주문을 외던 레이븐을 떠올리고 물었다.
“비는 못 내리는 거야?”
“지금 그랬다간 진짜 장마가 왔을 때 홍수가 날 테니까 어쩔 수 없지.”
“못 한다는 소리는 안 하네?”
“으으음. 뭐.”
레이븐은 어물쩡 말을 흘리며 메마른 잎새 사이로 걸어갔다. 시빌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어서는 어깨 위에 팔을 올렸다. 레이븐은 묵직한 팔의 무게에 불안해하면서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계속 걸었다.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볼 수 있는 눈의 호사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헤실 풀어졌다. 그 표정에 시빌은 자신도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팔을 살짝 늘어뜨려 레이븐의 귓가며 턱선을 쓰다듬었다. 레이븐은 얼굴이 새빨개져 그 손을 피했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점점 부드럽고 농밀해졌지만, 시빌이 아무리 들이대도 레이븐이 거기에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레이븐은 두려웠던 것이다. 시빌이 자신을 사랑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는 시빌이 자신을 가지고 놀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으론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희락 따위 손에도 대지 않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도 했다. 환각을 부르는 숲의 버섯을 먹고 난 뒤, 그것을 잊을 수 없어 축축한 곳만 찾아다니던 짐승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나무의 밑동마다 코를 박으며 숲을 돌아다니던 그 짐승은 결국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다 죽고 말았다. 레이븐은 절대 그런 꼴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시빌은 레이븐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고, 짐을 들어주며 손등을 쓸어 올렸다. 산에 워낙 익숙한 탓에 레이븐이 넘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괜시리 험한 곳에선 부축한답시고 팔을 잡았다. 그럴 때마다 레이븐은 볼을 붉혔다. 시빌은 그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며 쇄골께를 훔쳐보며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희망 고문이 이런 거겠지.’
시빌은 한숨 쉬며 물에 잠긴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시원해져 레이븐이 호수를 찾는 빈도도 띄엄띄엄해졌다. 옷을 벗은 레이븐은 역시나 기막히게 아름다웠고, 저런 먼지 쌓인 녹색 누더기 대신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주고 싶었다.
‘분명 세쿼이아의 비단이 조공품으로 들어왔었는데. 거기에 아벤타의 에메랄드를 섞어 걸어주면 기가 막히겠어.’
“어라?”
시빌은 찰나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가 떠오르려다 말고 아침의 달마냥 희미해져 사라졌다.
* * *
날이 쌀쌀해져 나뭇잎의 색이 금색으로 바래기 시작할 때, 고대하던 비가 내렸다.
가을의 태풍은 거칠고 날카로웠다. 차가운 비가 병자들에게 죽음을 후려치고 숲을 서늘하게 물들였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떨며 레이븐은 걱정스레 숲을 바라보았다.
“불을 좀 땔까?”
“응. 부탁해.”
시빌은 젖지 않은 장작을 골라 불을 지폈다. 따뜻한 불기에 습기와 추위가 한꺼번에 누그러졌다. 시빌은 밖을 바라보는 레이븐의 어깨를 붙잡아 집 안쪽으로 이끌었다.
“기대하던 비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우박이 될 것 같아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와는 다른 무거운 소리가 지붕을 두들겼다. 부서지는가 싶을 정도로 무서운 기세에 시빌이 뜨악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큰 소음 사이로 천둥이 쳤다. 레이븐이 화들짝 몸을 떨며 움츠러드는 모습을 본 시빌은 기다렸다는 듯 품으로 가느다란 몸을 끌어당겼다. 달달 떨리는 몸이 귀여워서 빛도 소리도 난장판인 태풍 속에서 시빌은 바보같이 실실 웃었다.
떨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시빌은 고개를 숙여 레이븐의 정수리에 정중하게 입 맞추며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아 안았다. 미소 띤 얼굴로 겁먹은 레이븐을 달래며 떨리는 목덜미를 지분거리자 갑자기 집 안이 지나치게 더운 듯 느껴져 시빌은 난로를 노려보았다.
레이븐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 시빌은 마음껏 레이븐을 유린했다. 상의를 파고들어 온 따뜻한 손이 허리를 매만질 때까지는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레이븐이었지만, 그도 시빌의 혀가 귓불을 핥는 데에는 소스라쳐 정신 차렸다.
“뭐, 무, 무, 무슨!”
“응? 내가 뭘?”
시빌은 재빨리 손을 바로 해 레이븐을 껴안았다. 품에서 벗어나려는 레이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저기, 좀, 놔줬으면 좋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레이븐이 흔들리는 포인트는 죄다 파악한 지 오래인 시빌은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고 싶어.”
레이븐은 헉하고 숨을 멈췄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레이븐의 뺨을 감쌌다. 젖은 숨이 입가를 간지럽혔다. 시빌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레이븐의 뒷목을 잡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레이븐은 피부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숨을 헐떡이며 시빌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훑으며 입천장을 간질였다. 숨이 차올라 얼굴을 뒤로 빼자 시빌의 입술이 목덜미를 물어왔다. 두려움보다 유혹이 더욱 커져 굴복하려던 순간이었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우박이 가득 쌓인 지붕 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두 사람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옷차림의 두 사람 위로 우박과 재, 지붕 위에 쌓여 있던 먼지며 새똥 부스러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부서진 채 활활 타는 지붕을 쳐다보며, 시빌은 알고 있는 욕을 모조리 끌어모아 하늘에 내던졌다. 입 밖으로 나온 욕은 하나였지만.
“아. 씨발…….”
모든 것을 함축한 시빌의 욕설을 배경으로 레이븐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풀린 눈을 보니 자신이 말을 한다는 의식도 없는 듯했다.
“이런. 하늘도 우리의 사랑을 반대…….”
“씨발!!!!!”
시빌은 숲이 떠나가라 크게 외쳤다.
* * *
집 안으로 우박이 들이닥치는 지옥 같던 밤, 레이븐의 작업실로 도망친 시빌은 물에 적신 걸레마냥 축 처진 모습으로 빈 병들을 닦는 레이븐을 닭 쫓던 개마냥 바라봐야만 했다.
폭풍이 끝나자 시빌과 레이븐은 동시에 지친 모습으로 작업실에서 나와 난장판 그 자체인 집 안을 쳐다보았다.
“키스 좀 했다고 이 지경이라니.”
“……저주라도 받았어, 주인님?”
“……내가 죄인이지. 내가 죄인이야. 벌 받는 거야.”
우박이 녹아 집 안은 물바다요, 천장에선 하늘이 훤히 보였다. 불이 크게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레이븐은 말없이 물에 젖은 이불을 비틀어 짰고 시빌은 망치를 찾아 지붕으로 올라갔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일했다. 레이븐은 자기혐오로 넘실거리는 가슴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 고생을 해야만 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지붕을 수리하는 시빌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건 옳지 않아.’
레이븐은 이를 악물었다. 시빌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유리 구슬이나 보석 같이 주워 모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외모에 혹해 거짓으로 붙잡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자유라 말해 주고 도시나 사람 사는 곳으로 보내줘야만 했다. 그도 아니면 북부로 전갈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빌의 마법사는 그의 기억을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레이븐은 불쾌함에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을 스친 레비쥬와 마법사의 관계에 싫다는 생각만이 가득 피어올랐다.
레이븐은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손에서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어차피 그는 레비쥬였다. 자연과 척을 진, 인간으로선 살아갈 수 없는 존재.
그리고 그 거창한 존재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하늘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읊고 있는 욕은 분명 기억을 잃기 전에 알았던 것이리라.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과거를 의심할법한 욕의 퍼레이드에 시빌은 화풀이하듯 망치를 휘둘렀다. 맘에 들지 않았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 이제 방어가 더 강해질 터였다. 그 사실에 위장이 욱신욱신 아파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이 심해졌다.
단순한 성욕이라기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 이상했고, 어떻게든 안아야겠다는 고집이라기엔 안지 않아도 좋겠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이상했다.
레이븐의 뒤를 따라 걷는 것이 좋았고, 의미 없이 살을 맞대는 것이 좋았다. 수영하는 그를 훔쳐보는 것이 두근거렸다. 가끔 웃을 때, 그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는 자신이 좋았다.
‘사랑?’
시빌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붕에 뚫린 구멍을 쳐다보았다. 비실거리며 집 안을 정리하는 레이븐의 정수리가 아주 잘 보였다. 시빌은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겨우 삼켰다. 누군가가 가슴을 짓이기는 것마냥 고통스러웠다.
시빌은 그냥 깨달았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사랑이란 없다는 것을. 지금의 이것이 최초란 것을.
* * *
산장의 지붕이 제 모습을 되찾은 지도 어느덧 이 주가 흐른 뒤였다. 거의 일주일에 걸려 시빌이 이룬 공사는 가히 과업이라 할 만했다. 지붕의 들보를 새로 갈고, 통나무를 다듬어 각을 맞춘 뒤 지붕을 얹자 레이븐이 진흙을 틈새에 발라 메웠다. 시빌은 피뢰침을 세우라고 레이븐을 구박했고 굴뚝의 가장자리에는 이 나간 호미가 꽂히게 되었다.
사방엔 가을이 완연했다. 시빌도 레이븐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레이븐은 마침내 깔끔해진 침대 위에 앉아 슬슬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장을 고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키스 한 번에 집이 무너졌다. 두 번 했다간 산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멍청히 하며 레이븐은 작업실로 향했다.
캄프리, 바곳, 서던우드. 쑥. 샐비어. 벨라돈나……. 올해 수확한 것은 말리기 위해 매듭을 지어 벽에 걸고 다 마른 것들은 용법에 맞게 끓이거나 가루를 내어 정제했다.
레이븐은 끊임없이 약사발을 갈아댔다. 과일이나 열매들을 다 거둬들인 시빌은 작업실에 붙어 레이븐의 작업을 구경하다 지루해 잠드는 것이 일이 되었다. 먹을 수 있는 약재가 시빌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레이븐은 숨겨두었던 머루 한 소쿠리가 작살나는 모습을 가슴 아픈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는 것도 지겨운지 그날따라 또랑또랑 깨어 있던 시빌이 한창 작업 중인 환약 뭉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무슨 약을 만드는 거야?”
잘 말린 버섯을 빻아 가루로 만들던 레이븐은 시빌의 질문에 잠깐 손을 멈췄다. 그가 지금 만들고 있는 건 창관을 위한 마약이었다. 하필 이런 약을 만들 때 말을 거나 싶어 레이븐은 내심 혀를 차며 대답했다.
“어, 자양강장제랄까. 정기를 돋우는 약이야. 몸이 허한 사람이 먹으면 좋지.”
“흐음.”
납득하는 듯한 소리에 레이븐은 안도하며 조제를 계속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기운이 없는 남자나 여자에게 먹이면 바로 몸이 달아올라 정사를 쉽게 할 수 있게 되니까. 태연히 마약성의 뿌리를 약사발에 첨가하던 레이븐은 이어진 시빌의 말에 들고 있던 막자를 떨어뜨렸다.
“당신도 한 알 정도 먹으면 좋을 것 같은데.”
레이븐은 식겁한 표정으로 완성된 약 한 알을 손에 든 시빌을 쳐다보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마약을 굴리며 말했다.
“고기도 잘 챙겨 먹는데 대체 왜 뼈밖에 없는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 먹을 약만 만들지 말고 주인님도 좀 먹지그래?”
“…응. 나중에 먹을게.”
공포스러웠다. 진심으로 무서웠다. 레이븐은 저 약을 먹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리는 것 같았다.
창관을 운영하는 손님의 사용기에 의하면, 수녀 같은 여자도 창녀처럼 돌변해 남자를 갈구하게 된다고 했다. 중독성은 약했지만 효과가 매우 커서 단골들이 늘었다고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았던 기억이 났다.
식은땀을 훔치던 레이븐은 문득 자신의 입 안에서 기묘한 맛의 환약이 녹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해졌다. 시빌이 싱긋 웃으며 레이븐의 입가를 소매로 닦아주었다.
“뭘 나중에 먹어. 만들었을 때 하나 먹어두지.”
레이븐은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레이븐의 목은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입 안에서 녹은 약을 꿀꺽 삼켜 넘겨버렸다. 머리가 띵해졌다. 시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써? 표정이 무지 안 좋네.”
“나, 나가줘.”
“어?”
“나가줘. 지금부터 만들 약은 조금 위험하니까. 집중하고 싶어.”
레이븐은 시빌의 등을 밀어 작업실에서 내쫓다시피 몰아냈다. 문이 닫히자, 다리에서 확 힘이 빠졌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솟아 몸이 젖었다. 말하기 민망한 부위가 무서울 정도로 예민해져 간지러워지는 것에 레이븐은 입을 틀어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 중화제.’
레이븐은 바닥을 기어가다 말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제한 독약이 아니라 식물을 그대로 갈아 넣은 마약이었다. 중화제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레이븐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몸을 작게 말았다. 치밀어 오르는 갈증에 목구멍이 쩍 달라붙었다. 침을 삼켜보았지만 도리어 아프기만 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흐른 눈물이 옷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레이븐은 들뜬 숨을 삼키며 허벅지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레이븐. 아파?”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느새 작업실로 돌아온 시빌이 레이븐 앞에 서 있었다. 레이븐은 그 모습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는 잔혹한 군주의 미소를 띤 채 레이븐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븐의 모습은 상처 입고 막다른 곳에 몰린 짐승 같았다. 시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땀에 젖고 욕정에 달아올라 흐트러진 레이븐의 모습은 무서울 정도였다. 긴 검은 머리가 해초마냥 어두운 피부에 달라붙어 가슴까지 드리워졌고 녹색 외투의 넉넉한 품 사이로 보이는 속살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숲을 뒤지며 돌아다녔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시빌은 말린 버섯을 손끝으로 꾹 누르며 웃었다. 버섯을 먹고는 제대로 날지도 못하던 벌레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하지만 레이븐의 작업실에서 똑같은 줄무늬의 버섯을 발견했을 때, 레이븐이 그것을 사용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건 필연이었다.
시빌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앉았다. 덜덜 떨고 있는 턱을 잡아 올리자 레이븐이 소스라치며 몸을 뒤로 뺐다. 괴로운 듯 찌푸린 아미를 시빌은 입술로 쓸어주었다. 레이븐은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목덜미를 살짝 깨물자 제정신을 잃은 듯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시빌은 아무런 애처로움도 없이 바닥에 레이븐을 눕히고, 옷을 벗겼다. 땀에 젖은 피부가 공기 중에 드러나자 추위를 느낀 레이븐의 살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시빌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물끄러미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애매하게 더해진 자극에 불이 붙은 레이븐은 울먹이며 자신의 성기를 잡고 있었다.
“흐윽. 흐. 아아,”
“레이븐. 레이븐.”
시빌은 아이를 어르듯 레이븐의 이름을 부르며 성기를 잡은 손을 잡아뗐다. 대신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레이븐의 성기를 잡아 문지르자 레이븐의 허리가 안쪽으로 구부러졌다. 숨을 헐떡이며 레이븐은 시빌의 팔을 부여잡았다. 시빌은 절정에서 레이븐의 성기를 잡아 쥐고는 빳빳하게 선 유두를 핥았다.
“아!”
“기분 좋아?”
“놔줘. 놓…”
작게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놓으라는 소리 한 번만 더 해봐.”
시빌은 음산하게 경고하며 레이븐의 허벅지를 물고 빨았다. 어두운 피부에 울혈이 들어 벌겋게 잇자국이 남았다. 매끄러운 허벅지와 엉덩이를 매만지던 시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뒤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악!”
“조금만 참아. 조금만.”
시빌은 레이븐을 달래며 가벼운 키스를 얼굴에 쏟아부었다. 손끝으로 내벽을 문지르고 매만지자 레이븐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바닥을 찼다. 약의 기운 덕분에 빠르게 젖어드는 그곳에 시빌은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완전히 곧추선 레이븐의 물건이 사랑스러웠다. 시빌은 레이븐의 앞과 뒤를 희롱하며 순진한 숲지기의 신경을 열락으로 몰아갔다.
레이븐의 아랫도리를 파고든 손가락을 움직이자 어느 순간엔가 놀랄 정도로 격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시빌은 애원하는 레이븐을 무시하며 찾아낸 지점을 집요하게 찌르고 문질렀다.
“아! 아, 아앗!”
“좋아? 기분 좋은 거구나, 레이븐.”
“싫어. 그만, 그만둬. 시빌, 제발!”
시빌은 키득 웃으며 손가락을 뺐다. 갑자기 빠져나간 손가락에 안심한 것도 잠시, 레이븐은 뱃속을 간지럽게 파고드는 약의 감각에 몸을 덜덜 떨었다. 앞쪽을 잡았지만 이미 알아버린 뒤쪽의 쾌감에 완전히 갈 수 없었다. 레이븐은 울먹이며 바닥을 긁었다.
“가고 싶어?”
“아. 흣, 흐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도와주길 바라?”
레이븐은 흐릿한 눈동자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몸과는 달리 메마른 입술이 달뜬 숨을 내뱉으며 벌어졌다.
“도와줘.”
시빌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레이븐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몸을 가르며 느긋하게 파고드는 흉기의 거대함에 레이븐은 못 견디겠는 기분이 되어 바닥에 머리를 부볐다. 절로 헛구역질이 났다. 괴로워서 이를 악물자니 새하얀 손가락이 입술을 어루만지며 벌려왔다.
“뜨거워. 내 성기를 조이고 있어.”
“으으. 크흐윽.”
시빌은 고통스러워하는 레이븐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일그러진 눈매며 반쯤 벌어진 입을 매만지던 시빌은 만족의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악! 크윽!”
약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레이븐은 고통에 몸을 말았다. 한참을 자제하지 못하며 움직이던 시빌은 레이븐이 흐느끼며 팔을 잡아 오자 그제야 비린 한숨을 토해냈다.
“미안.”
“시빌. 그만둬. 시빌.”
시빌은 상냥하게 입 맞추며 천천히 성기를 넣었다 뺐다. 레이븐은 몸속에서 움직이는 성기의 움직임에 밭은 숨을 내뱉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성기의 모양이 그대로 느껴져서 시빌의 것을 품고 있다는 실감이 왔다. 레이븐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건 정말로 무서운 감각이었다. 타인의 신체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주도권을 빼앗고 자신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듯한 관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 으, 흣.”
“젖어 있어.”
여유를 되찾은 시빌은 천천히 레이븐의 내벽을 문지르며 느끼는 부분 근처를 맴돌았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몸속을 유린하는 성기에 레이븐은 덜덜 떨며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만든 약이지만, 이토록 지독할 줄은 몰랐다. 절정을 맞이하지 않으면 이 온몸을 죄이는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 줄까? 내가 좋지, 레이븐? 내 성기에 박혀서 우는 게 좋지?”
“시빌, 제발.”
“날 사랑한다고 인정해. 그럼 네가 원하는 걸 줄게.”
레이븐은 헐떡이다가 말가니 시빌을 올려다보았다. 정복욕에 취한 거대한 짐승이 이빨을 드러낸 채 그를 찍어 누르는 것 같았다. 물어 뜯긴다. 숲지기인 그는 짐승에게 위협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 공포를 지금 알게 되었다.
“……사랑해.”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봐.”
“사랑해, 시빌.”
쾌락과 고통이 교차하는 지옥 속에서, 레이븐은 이 순간 극도의 평온을 느끼며 말했다. 잠자리의 애원을 가장하여 진실된 마음을 고백하는 자신이 서글프게 여겨졌다. 레이븐은 얼굴을 가린 팔을 들어 시빌의 목을 감았다.
“사랑해.”
목소리는 나직했고 눈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시빌은 이성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빌어먹을!”
시빌은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느끼는 곳을 마구잡이로 찔러대며 목덜미에 이를 세우자 정신이 나간 레이븐의 교성이 귀를 울렸다. 선뜩한 기분이었다. 분명 안는 것은 자신인데도, 내장을 쥐어뜯기는 기분이었다.
“아! 아! 아앗!”
“크흑!”
시빌의 몸짓에 밀려 올라간 레이븐의 머리가 작업실의 벽에 부딪쳤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못 견디겠다는 듯 벽을 짚고 긁어 내렸다. 시빌은 성기를 조여 오는 레이븐의 내벽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경련과도 같은 흔들림이 두 사람의 몸을 거치고, 진득하면서도 뜨거운 것이 레이븐의 뱃속을 가득 채웠다.
시빌은 거친 숨을 내쉬며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약과 섹스의 쾌락에 완전히 풀려버린 눈동자가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레이븐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확신하며 시빌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성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게 당신뿐이니까……. 그래서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시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어리석어. 나무를 처음 접하는 자라도, 눈앞에 있는 것이 나무인지 돌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거잖아?”
절정의 잔재로 바들거리는 허벅지를 잡아 어깨 위로 걸쳤다. 다시금 일어서는 성기를 천천히 움직이자 마약과 쾌락에 젖은 몸이 저항 없이 달아올라 움찔거렸다.
“흐읏! 윽. 하악!”
잘게 떨리는 어깨에 시빌은 입을 맞췄다. 체온은 뜨거웠고 땀에 젖은 피부는 미끌거렸다. 쾌락에 움찔거리는 몸에 하체를 있는 힘껏 처넣으며 시빌은 레이븐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이 비겁한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 * *
시빌은 정신을 잃은 레이븐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식은땀을 흘린 채 지친 고개를 떨군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시빌은 침대에 레이븐을 눕힌 뒤 잠시 주저했다. 몸속에 쏟아부은 정액을 빼내 주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빌은 조심스레 레이븐의 몸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잔뜩 풀어진 애널이 뜨겁고 축축했다. 손가락으로 내벽을 긁어 정액을 빼내자니 다시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시빌은 자제력을 시험받는 듯한 기분에 이를 꽉 악물었다.
레이븐의 몸속에서 정액을 빼낸 뒤 물을 끓여 닦아내자 레이븐이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물기에 젖어 반들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괜찮아?”
“……어.”
시빌은 땀에 젖은 몸을 모두 닦아 주었다. 자상한 시빌의 태도에 레이븐은 어색한 듯 고개를 시트에 묻었다. 시빌은 달콤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레이븐의 몸을 씻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이마에 키스하며, 시빌은 레이븐이 잠들 때까지 옆에서 그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나 작은 새끼가 둥지에 누워있는 듯했다.
시빌은 레이븐이 깊게 잠들자 아련한 시선으로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지만 지울 수 없는 불안 또한 읽어낼 수 있었다.
밤이 늦어 부엉이 소리가 났다. 시빌은 몸을 일으켜 등잔의 불을 껐다. 새까만 어둠이 산장을 가득 채웠고 화로의 작은 불씨만이 타닥거리며 빨갛게 타올랐다.
시빌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마음에 둔 이에게 약을 먹이고 강제로 범했다. 숲의 어둠은 그의 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워있는 이 침상에서, 자신이 만들어 올린 지붕 아래에서 어둠은 그를 용서하리라.
어둠 속에 누운 레이븐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 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창을 타고 들어온 별빛이 레이븐의 피부를 쓰다듬어 짙은 대지로 보이게 했고, 검은 머리카락을 반짝여 깊은 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랬다. 레이븐의 검은 머리카락은 깊은 물결을 연상시켰다.
시빌은 꿈처럼 떠오르는 광경을 조용히 주시했다. 강물. 끝도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강물이 이와 같았다. 별만이 노래하는 밤의 어둠 속에서 과거의 레이븐은 작은 배를 저어갔었다. 가끔 강물 위로 달이 어리면 자신이 젓는 배와 사랑을 나누는 듯도 보였다.
낮이 되면 강물은 반대로 태양에서 흘러나온 양 빛나고 배는 검고 초라하여 볼품없이 파도를 탔다. 그것은 작은 배였다. 그러나 그는 그 배의 주인이었고 강을 건너도록 인간을 나르는 자였다.
“나는 뱃사공이었나 봐.”
시빌은 잠든 레이븐의 귀에 속삭였다. 그는 노예였지만 어렴풋이 떠오른 그 과거의 강물을 레이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두운 밤, 작은 배 위에서 사랑을 나누면 영원한 무언가를 획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두가 허상 같은 희망이지만.
레이븐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시빌은 날이 밝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만든 지붕의 그늘을 뚫고 들어온 잔인한 햇살이 레이븐의 눈꺼풀 위로 아른거렸다.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는 레이븐의 얼굴을 눈에 모두 담으며, 시빌은 아침 인사를 했다.
“일어났어?”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불편한 몸에 멈칫거리는 것이 보였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볼 수가 없어서, 시빌은 일어나려는 레이븐의 몸을 다시 눕혔다.
“시빌?”
“한 번만 더.”
레이븐은 허리에 와 닿는 시빌의 성기에 화들짝 몸을 퍼덕였다. 곤란한 듯 일그러지는 레이븐의 얼굴에 키스를 하며 시빌은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밤새 시달려 풀어진 몸에 성기를 박아 넣고 흔들자 레이븐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매달려 왔다. 고통은 없지만 처음 겪은 정사에 지쳐 힘든 듯 레이븐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바르작댔다. 완력은 없지만, 산 생활로 체력이 높은 것이 다행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이러한 행위를 탓하는 듯 느껴져 레이븐은 귀를 손으로 덮었다. 몸속으로 흐르는 피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려와 그 빠른 혈류의 흐름에 레이븐은 놀랐다. 시빌뿐만 아니라 레이븐 또한 흥분해 있음을 그의 피가 알려주고 있었다.
“아. 흑. 흐읏! 앗!”
시빌은 끈적하게 딸려오는 레이븐의 외벽에 완전히 흥분하여 허리짓을 빨리했다. 전날 체크해둔 지점을 귀두 끝으로 문지르자 지친 몸으로도 바르르 떨며 목을 뒤로 꺾었다.
“읏! …흐! 처, 천천히! 앗!!”
쾌감이 계속해서 밀려와 레이븐은 울듯이 소리 질렀다. 그 교성에 고취된 시빌이 더 거칠게 허리를 박아 넣었다. 뒤로 밀려나는 레이븐의 골반을 두 손으로 잡고 두꺼운 성기로 마음껏 문지르자 눈물을 투둑 떨어뜨리며 시트를 잡아 뜯었다. 한껏 벌려져서는 허공을 차는 레이븐의 발을 잡아 발가락 사이를 핥으며 살짝살짝 깨물었다. 레이븐은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하는 짓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시빌은 고개를 숙여 레이븐에게 키스했다. 레이븐의 입술은 쾌락에 젖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빌은 허리를 세워 천천히 움직였다. 안 그래도 절정에 도달해 떨리던 몸이 다시금 더해지는 쾌락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비틀어졌다. 시빌은 자신의 성기를 품은 엉덩이의 굴곡 사이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벌름거리는 구멍 사이로 정액이 뿌옇게 흘러나왔다.
“좋아. 레이븐. 좋아.”
“아, 흣! 흐윽! 윽!”
“갈 것 같아. 조금만 더…!”
“아아아아앗!”
절정에 더해진 또 다른 절정에 레이븐은 뒤로 허리를 휘며 고개를 한계까지 젖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간질거리는 온몸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하얗게 변한 시야 속에 허우적댔다.
왈칵 쏟아진 뜨끈한 정액이 내벽을 가득 채우는 감각에 레이븐은 흐느끼며 계속 울었다. 시빌은 그저 기분 좋아 땀에 젖은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따뜻한 물로 닦아 주려는 것을 레이븐이 거절해서 시빌은 그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커다란 모포를 준비해서는 까무룩 지친 몸을 감싸 호수로 갔다.
하늘은 맑았고 가을치고는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레이븐은 시빌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호수로 들어갔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피부를 스치는 것에, 레이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땀이며 정액 같은 것들을 순식간에 씻어낸다. 레이븐은 조금 주저하다가, 손가락을 뒤로 넣어 남은 정액을 물속으로 빼내었다.
시빌은 호숫가에 앉아 멍하니 레이븐을 보고 있었다.
그가 만든 울혈들과 손자국이 어두운 피부 위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갑작스레 차가운 물에 들어간 터라 피부엔 소름이 돋아 있었고, 물살에 하염없이 떠다니던 버드나무 잎이 한 장 달라붙어 있었다. 레이븐은 지쳐 보였지만, 그 지친 이유를 생각하자 시빌은 극도로 행복해져 가슴 속이 간지러웠다.
이것은 정상적인 행복이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전날 저지른 그의 죄가 엄연히 시빌의 피부에 남아 있는데, 이토록 행복하다는 건 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날 때도 되지 않았는데 금이 간 알에서 새가 태어난 것과 같은 비이상적인 기적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기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빌은 옷을 벗었다. 조심스레 머리카락이며 얼굴을 씻던 레이븐이 시빌의 옷 벗는 모습을 보더니 살짝 경계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너무나 즐거웠다. 시빌은 한껏 웃으며 레이븐에게로 헤엄쳐 갔다.
레이븐은 두 팔을 벌려 시빌을 맞아주었다. 시빌은 여름 내내 레이븐을 훔쳐보며 했던 욕망들을 그대로 현실에 투영했다. 물기에 젖은 피부를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고, 물보라를 얼굴에 뿌려 장난쳤다. 레이븐은 완전히 지쳐서는, 그래도 웃으며 시빌을 받아주었다.
“구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보따리도 아니고 몸까지 내놓으라고……. 이래서 두발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우울한 듯 중얼거리는 레이븐의 입술에 입 맞추며 시빌은 유쾌하게 말을 받았다.
“그래서 싫은가? 주인님?”
“…싫지는 않지만.”
레이븐은 ‘괴롭지.’하고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씻고 나왔다. 붉게 물든 사방의 숲이 주위를 빼앗을 만도 하건만, 두 사람은 서로만을 바라보며 천천히 숲을 걸었다.
식사를 하고 기운을 조금 차린 레이븐은 시빌을 작업실 밖으로 쫓아낸 뒤 하던 일을 마저 끝냈다. 시빌에게 안긴 바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충 물수건을 문질러 전날 밤의 흔적들을 닦아낸 뒤 레이븐은 손님을 위해 만든 약들을 처음으로 자신에게 썼다. 직접 약을 사용한 결과 몇 가지 성분이 고약에 더 추가되었고, 내년에 창관의 포주는 한층 더 좋아진 성능의 약을 받아보게 될 터였다.
두 사람 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늦어졌다. 밤은 길었고 하루 종일 몸이 나른해 멍하니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시빌은 짐승들을 사냥해 훈제하는 시간 외엔 계속 레이븐에게 달라붙어 물고 빨았다. 목덜미의 멍울이 가시지 않고, 허리께의 손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
겨울도 끝나가고 까마귀의 도움이 없어도 숲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될 무렵이었다. 시빌의 도움으로 살이 찐 까마귀는 녹색에 갈색 반점이 점점이 박힌 예쁜 알들을 낳았다. 검은 깃 사이로 폭 파묻힌 그 알들이 있는 둥지를 시빌은 하루 종일 쳐다보았다.
“섭섭해? 둥지에서 나오질 않아서?”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빌의 손엔 까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육포가 들려 있었고, 알을 품고 있던 까마귀는 픽 코웃음 같은 부리짓을 하며 그런 시빌을 무시하고 있었다.
“알까지 낳은 까마귀에게 구애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냥! 이건, 그냥 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거야!”
시빌은 들고 있던 육포를 우걱우걱 씹었고 레이븐은 키득거리며 까마귀 둥지와 시빌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의 일이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시빌이 까마귀 둥지 아래에 진을 치고 앉아 있자 슬슬 부아가 끓어올랐다.
알을 품은 까마귀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건 수컷 까마귀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채신없는 짓거리에 열이 받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가끔 식구보다 취미나 애완동물에 열중하는 남자가 있다더니 딱 그 짝이 아닌가.
저녁때가 되어 시빌이 식탁에 앉자 레이븐은 띠껍단 표정으로 시빌을 노려보았다. 분위기의 심상치 않음에 시빌이 움찔 눈치를 보며 수저로 스튜를 떴다. 차려놓은 음식을 다 먹을 때가 되자 아니나 다를까 레이븐이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왜? 새벽까지 앉아 있다가 오지?”
시빌은 말문이 막혀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무표정하게 화내는 것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그게…, 어.”
“까마귀가 그렇게 좋아? 그럼 잡아다가 깃 끝을 자른 뒤 키워. 옛날 어느 왕국에선 탑에 까마귀를 키워 죄수들을 겁준다더라. 그러고 보니 둘이 숲을 하루 종일 같이 싸돌아다녔었지. 혹시 시빌 네 알 아니야?”
“컥.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대체 왜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거야.”
레이븐은 침착한 어조로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시빌을 몰아붙였다. 시빌은 기가 막히면서도 대꾸할 빈틈이 없어 땀만 뻘뻘 흘렸다. 요새 매일을 둥지 아래 붙어 있단 자각은 있었지만 레이븐이 화가 났을 줄은 몰랐다. 그는 어버버 거리며 허둥이다 결국 일어나 레이븐을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이젠 가지 않……, 아니 가끔만 갈게.”
시빌의 품에 안긴 레이븐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시빌은 재빨리 레이븐의 입에 키스하며 말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능청 부리며 레이븐의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좀 부러웠어. 아무리 안아도 넌 내 알을 낳아주지 않을 테니까. 왠지 까마귀의 둥지에 있는 알을 보니…….”
뒷말을 알 것 같아 레이븐은 오만 정이 떨어진 표정으로 질린 듯 시빌을 쳐다보았다.
“그만. 그만해 이 머저리야.”
“네 아이처럼 느껴져서.”
레이븐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시빌이 그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르게 상당히 얼간이 기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대체 뭔가, 그의 상상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네가 내 아이를 낳아주었으면 좋겠어.”
레이븐은 질린 얼굴로 옷을 파고드는 굵은 손을 잡아챘다.
“밥상머리에서 대체 무슨 짓이야!”
“낳아줘어.”
시빌은 능청스럽게 조르며 레이븐을 넘어뜨렸다. 나무로 만든 식기들이 덜그럭거리고 둥근 과일들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음날, 시빌은 피곤에 축 가라앉은 레이븐과 함께 까마귀의 둥지 아래로 갔다. 잘 익은 살코기를 나뭇가지의 뾰족한 부분에 꽂아주고는 외쳤다.
“새끼가 태어나면 다시 올게!”
“까악-!”
시빌의 말을 알아들은 까마귀가 둥지에서 일어나 작별인사를 했다. 소리 내서 인사하는 까마귀의 배웅에 시빌은 아쉬운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둥지 아래를 오가던 거대하고 말썽 가득인 짐승이 사라진다는 것에 까마귀는 안도하며 신나게 깍깍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레이븐은 시빌의 가슴에 나른한 몸을 기댄 채 피식 미소 지었다.
여름이 되자 모기에 괴로워하며 그물 같은 모기장을 드리웠다. 시빌은 모기장을 만드는 레이븐의 마술 같은 손놀림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호수로 가는 길에 돌과 나무를 대어 길을 만들고, 텃밭의 허브며 채소들을 함께 돌봤다. 날기 시작한 까마귀와 그 새끼들이 시빌의 머리칼을 황홀한 표정으로 공격해 사정없이 뽑아갔다.
가을이 되자 시빌은 보라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머루를 집어먹었다. 까마귀 새끼들의 등쌀에 가죽으로 만든 챙이 넓은 모자가 그의 필수품이 되어 있었다.
행복한 시간은 찰나처럼 지나갔다. 일 년이 하루인 양, 행복의 향기는 폭풍이 몰아쳐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간의 속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행복하게 산 적이 없는 사람은 조금의 행운에도 불안해하고, 그 파국적인 끝을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세상은 여지없이 불행의 철퇴를 후려친다. 마음이 그러한 것을 부르기 때문이다. 불행과 외로움, 미칠 것 같은 고독 속에서만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고, 레이븐은 그러한 자들 중 한 명이었다.
* * *
날씨가 추워지자 시빌은 난롯가로 침대를 옮겼다. 커다란 모포를 함께 뒤집어쓰고, 온기를 나누며 사랑을 속삭였다. 레이븐은 가끔 그 검은 눈에 죄책감을 담은 채 시빌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빠져 있는 시빌의 모습이, 사람을 속여 얻은 죄의 증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아?”
레이븐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시빌은 검은 머리카락을 쥐고 장난치다 말고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소중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흐음.”
시빌은 레이븐의 무릎 위에서 몸을 반 바퀴 굴렸다. 문득 그를 처음 안았던 아침이 떠올랐다.
“가끔 꿈을 꾸기는 해. 주변은 숲이 아니라 강이고, 나는 뱃사공이었어. 딱히 사람을 본 기억은 없는 걸 보면 식구가 없었던 게 아닐까.”
“뱃사공?”
“응. 작은 배를 젓고 있었어. 밤에 저어가는 걸 특히 좋아했는지 사방이 어두웠지만 기묘하게 아름다웠지.”
시빌은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레이븐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네 머리카락같이 검고 부드러운 물살이었어.”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지만 레이븐은 시빌이 꿈꾼 것들의 상징성에 말을 잃은 참이었다. 북부의 상징은 강과 나룻배였다. 북부에 커다란 강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대개의 레비쥬는 자신이 사용하는 검과 마법사의 힘을 합쳐 깃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룻배를 집어 던지진 않았을 텐데.’
어쨌거나 북부의 상징이 그대로 나온 시빌의 꿈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고민은 짧았다. 레이븐은 달라붙어 오는 시빌을 살짝 밀어 떨어뜨린 뒤 말했다.
“예전에 신들이 살아서 땅 위를 걷던 시대가 있어. 인간들과 사랑하고 왕국에 간섭하며 그 힘을 대지 위에 마구잡이로 퍼부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 죽는 자들이 생겨났다.”
“죽어? 신이?”
“응. 전쟁의 신과 마법의 신이 죽었지. 그들의 힘은 세상으로 흩어지고 신으로서의 의식은 소멸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던 거야.”
레이븐은 자신의 무릎에 드리워진 시빌의 금발을 살살 쓰다듬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길어진 머리칼이 손끝을 찬란하게 휘감았다.
“신은 죽었지만 전쟁이 사라진 것도, 마법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거든. 인간이 일으키는 전쟁과 마법들은 그대로 ‘관념’이라는 것이 되어 세상에 뭉쳤어. 세계를 떠돌던 관념은 구름처럼 뭉쳐 흐르다 그 몸이 무거워지면 비처럼 떨어졌다. 그러한 관념의 비를 맞은 인간은 신의 조각이라 할 만한 것이 되었지.”
레이븐은 잠시 숨을 삼킨 뒤 말을 이었다.
“그중 전신의 힘을 가진 자를 ‘레비쥬’라고 한다.”
힘을 지닌 말은 그것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현상을 왜곡시킨다.
레비쥬라는 단어는 시빌의 귀속으로 파고들어 정신을 진탕시켰다. 푸른 눈을 깜빡이는 시빌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그러한 변화를 레이븐은 서글프게 바라보았다.
“신의 힘을 지녔으니 쉽게 죽지도 않고,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능력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그들은 죽음의 바람이다. 조각을 품었기에 불안전한 그들은 완전을 꿈꾸며 다른 레비쥬를 죽이지만 결코 모두를 죽이지는 못하지. 그것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 마법의 관념에 후려쳐진 그들은 완전한 마법의 지배를 꿈꾸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관념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레비쥬와 마법사는 계속해서 생겨나니까. 그래서 마법사와 레비쥬는 동맹을 맺는다.”
시빌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간 레이븐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힘을 합쳐 다른 모든 레비쥬와 마법사를 죽이는 것이 그 동맹의 요지. 시빌. 당신은…….”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자신의 말을 자르는 시빌의 목소리에 레이븐은 몸을 스륵 일으켰다. 검고 긴 머리칼이 장막처럼 흘러내려 시빌의 얼굴을 가두었다. 시빌은 푸른 불꽃을 품은 듯한 눈으로 레이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의 힘에 흔들린 것이 거짓인 듯 굳건하게 번뜩이는 눈은 완전한 이성으로 무장되어 한 치의 빈틈도 없어 보였다.
“그냥 옛날이야기인가? 난 그런 얘긴 알고 싶지 않아. 차라리 숲지기의 얘기를 해줘.”
“시빌.”
“전쟁 같은 건 싫어. 이곳에서 떠나고 싶지도 않아. 내게 세상의 이야기를 하지 마.”
레이븐은 목이 졸린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노예라고 해서 미안해. 그대는 충분히 봉사했으니 이제 떠나도 돼.”
“떠나라고? 이곳을 떠나서 내게 뭘 하라고? 나는 숲에서 사는 법밖에 몰라. 맙소사, 레이븐!”
시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의 품에서 신음을 흘리던 레이븐이었다. 그는 분명 자신을 사랑하는데,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빌은 지독한 패배감에 휩싸였다.
눈물이 흘렀다.
“제발 그러지 마.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기억을 잃었고, 주변에 있는 것이 나 하나뿐이니까 그냥 욕정한 거야.”
레이븐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입 밖에 내어 말했다. 쓰디쓴 무언가가 심장을 조이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겪으면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그러는 당신은? 나 없이 살 수 있나?”
시빌은 폭발하듯 외치며 레이븐의 몸을 밀어 눕혔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나른하게 풀어진 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욕정보다는 살의가 일어나 시빌은 레이븐의 가는 목을 잡았다. 힘을 주어 목을 조르자, 담담한 검은 눈이 시빌을 향했다. 그 시선에 뺨이라도 얻어맞은 양 시빌은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나 주저앉았다.
“가지 않아. 절대로 가지 않아.”
시빌은 다짐하듯 말했다. 레이븐의 눈동자가 슬프게 가라앉는 것이 괴로웠다. 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도 그를 사랑하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는 기분이 되었다.
시빌은 발작적으로 일어나 레이븐의 작업실로 갔다. 잘 정리된 선반을 뒤져 처음 레이븐을 범할 때 사용했던 환약을 찾아냈다. 시빌의 손에 들린 것을 본 레이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시빌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레이븐의 턱을 붙잡아 벌렸다.
“미안.”
레이븐의 반항은 아무런 소용없이 무위로 돌아갔다. 시빌은 먼저 약을 입에 물어 반쯤 녹인 뒤 레이븐의 입에 물려주었다. 시빌은 싫어하는 몸을 힘으로 눌러 벌리고는 억지로 박아 넣었다. 목이 쉴 정도로 비명을 지르게 하고, 쾌감에 지배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범했다.
“벌이야.”
레이븐은 들뜬 정신 속에서 시빌의 목소리를 들었다. 침대 위는 완전히 눅눅해져 땀과 체액으로 끈적한 몸에 들러붙었다. 마약을 삼킨 탓에 주변 풍경이 일그러져 보였다. 구토가 치밀어 욱욱거리자니 차가운 손이 등을 쓸어주었다. 누가 쓸어주는지도 모르면서 레이븐은 숨을 들이쉬었다. 축축한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허벅지를 벌리며 굵은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으윽…! 큭!”
“음란해. 완전히 풀어져서 벌름거려.”
“하! 아! 흐읍! 흣!!”
몸속에 들어온 손가락 세 개가 성기의 움직임을 흉내 내 들어왔다 나가며 안쪽을 비벼댔다. 벌레가 뱃속을 기어 다니는 듯 저려와 레이븐은 흐느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느끼는 곳에 집요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시빌의 손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레이븐은 맥없이 사정하며 발갛게 물든 눈으로 시빌을 향해 애원했다.
“제발 그만. 이젠 더 못…….”
“더 뭘 못하는데?”
욕망에 잠겨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시빌은 레이븐의 귀를 물었다. 시빌의 손가락을 문 애널이 잔뜩 수축하며 빨아들이는 모습에 시빌은 신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빼냈다.
“들어간다.”
“으, 흐으…. 으아앗! 핫! 학!”
시빌은 거칠게 욕심을 채우며 움직였다. 아무리 안아도 질리지를 안았다. 약에 절어 제대로 사물을 인지하지 못하는 레이븐은 너무나 음란해서 색사를 위해 태어난 짐승 같았다.
갈색 피부를 핥고 둔덕을 잡아 벌린 뒤 정액을 잔뜩 들이부었다. 다리를 타고 흐르는 희뿌연 액체를 몸에 문지르고 다시 성기를 박아 넣는다. 레이븐의 목은 이제 완전히 쉬어 절정에 도달해도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냈다.
만족하지 못하는 몸처럼 시빌의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갔다. 약에 취한 레이븐은 그에게 말을 거는 일도 없고, 가지와 잎사귀를 돌보며 약을 만드는 일도 없이 그저 침대 위에 누워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 먼 곳에 시빌은 없었다.
토사물과 몸을 씻기고, 억지로 밥을 먹이고, 밤마다 안는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팔기 위해 만들어 둔 약은 점점 떨어져 바닥을 보였고 레이븐에게 약을 먹이는 간격은 점점 길어져 정신을 차리는 일이 잦아졌다.
시빌을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달 없는 밤 절벽 위를 걷는 듯한 공포와 암담함이었다. 좋아하는 인형을 망가뜨린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탓하며, 다시는 고쳐지지 않을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이의 슬픔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레이븐이 깨어나 그에게 던질 비난이 두려웠다.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러한 날카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시빌은 차가운 덩어리 같은 것을 가슴 속에 품은 채 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봄날이었다.
녹아내린 날씨에 바람조차 환희에 차 있는 아침이었다. 땅은 부드럽게 풀어져 새싹을 내보내고, 개울의 녹은 물이 얼음을 부수며 내달리고 있었다. 깨어난 거대한 숲은 바쁘게 움직이며 연녹빛으로 온몸을 단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빌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숲은 그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기운은 시빌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이븐이 산장에서 나가 도망쳤을 때보다 더한 예리함에 시빌은 웃음을 터뜨렸다.
“신경 쓰지 마! 저자는 내 거다!”
외침은 오만했지만, 숲은 자신의 힘을 직접 휘둘러 시빌을 벌하고자 하지 않았다. 대신 숲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길 잃게 하여 시빌에게 보냈다.
밤이었다.
군마와 갑주, 철로 된 무기를 지닌 자들이 산장의 불빛을 보고 찾아들었다. 눈빛은 경계로 팽팽하게 곤두서 날카로웠고 무기를 든 손아귀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산장이라니. 누가 살고 있는지 알아봐라.”
유물을 찾아 파르티잔에 들어온 레비쥬의 무리였다. 기세 당당하게 울타리를 밀고 들어온 그들은 밭을 짓밟으며 산장의 문을 두드렸다. 문은 힘없이 열렸다. 스르륵 열리는 문의 모습에 기사는 긴장한 시선으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산장 안에는 작은 램프가 켜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짙은 정사의 냄새가 풍겨와 기사는 콧등을 찌푸렸다. 산장 안으로 발을 디디자 바닥에 쌓인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어두운 숲 속에 세워진 인기척 없는, 그러나 불빛이 새어 나오는 산장의 존재에 긴장으로 마른 침을 삼킬 때였다. 인간의 형체를 한 어두운 그림자가 거실 너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달이 비쳐 들어와 남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금발에, 형형한 푸른 눈이 짐승의 눈마냥 번뜩이고 있었다. 그 형형한 눈동자에 기사가 칼을 움켜쥐었다.
“넌 뭐냐! 이 산장의 주인이냐?”
“……그러는 넌 뭐냐.”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게 쉬어 있어 너무나 오싹했다. 일행의 리더인 붉은 머리의 남자가 산장으로 들어와 시빌의 앞에 섰다. 두려움 없는 시선으로 시빌을 훑어본 레비쥬는 시빌의 손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넌 인간이냐 레비쥬냐?”
“…무슨 소리야 그게.”
시빌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레비쥬는 대뜸 시빌의 목을 향해 칼을 날렸다.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빌은 검의 가드를 잡았다. 혈관이 툭툭 튀어나오며 힘겨루기가 벌어지자 레비쥬 뒤에 선 기사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레비쥬다!”
“죽여!!”
들은 적 있는 그 단어에 불똥이 튀었다. 시빌은 분노에 차 쥐고 있던 검을 옆으로 비틀었다. 나무로 지어진 산장의 기둥에 깊숙이 검이 박히고 무기를 잃은 레비쥬와 시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뭉쳤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게 대체 뭐라고!”
레비쥬는 전신의 조각이고 서로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시빌은 손끝을 타고 흐르는 전류 같은 것에 몸을 맡겼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움직이는 몸에 모든 것을 맡겼다. 오랜 기간 전투에 단련을 몸은, 딱히 머리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효과적인 살육의 행사자였다.
내질러진 시빌의 손아귀에 레비쥬의 목이 잡혔다. 붉은 머리의 레비쥬는 능숙한 태도로 단단한 시빌의 팔을 풀어내며 또 다른 검을 뽑아 들었다.
레비쥬가 허리에 찬 검은 모두 세 개. 그는 그중 남은 두 개의 검을 동시에 뽑아 들며 시빌에게 덤벼들었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레비쥬와의 전투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의 당황은 크지 않았다.
레비쥬도 죽는다. 찌르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출혈이 많아지면 둔해지기도 했다. 때문에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레비쥬는 계속된 인간의 분노와 공세에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레비쥬가 레비쥬를 죽이는 것은, 완력의 차이가 없으니만큼 더 쉬웠다. 배를 내주더라도 목을 노려 베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붉은 머리의 레비쥬는 아직 마법사가 없었지만 이미 한 영지를 일군 영주로 부하도 여럿이었다. 레비쥬를 상대한 적도 많았다. 레비쥬로 보자면 청년기를 지나 중장년을 바라보는 관록인 것이다.
빠른 칼질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빌은 간발의 차로 검을 피하며 기둥 뒤로 돌아갔다. 기둥에 박혀 있는 검이 보였지만 익숙하지 않은 무기였다. 레비쥬가 든 두 개의 검을 흘끗 본 시빌은 기둥에 박힌 검을 뽑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잡음과 거의 동시에 날아온 레비쥬의 검이 시빌이 쥔 검의 날을 후려쳐 다시 기둥에 박히게 했다.
혼전이었다. 탁자며 식탁을 뒤집어엎어 공격을 막아내던 시빌은 레비쥬의 뒤에서 몰려드는 인간들의 숫자에 이를 갈았다. 이곳은 그와 레이븐의 집이었다. 검을 든 인간들이 허락도 없이 들어와 짓밟는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죽여 버리겠어.”
레비쥬도 인간들도 등골을 달리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형형한 푸른 눈이 자신을 향한다 싶은 순간이었다. 시빌은 창문을 뚫고 집 밖으로 몸을 날렸다.
“놓치지 마!”
“밖으로 나갔다! 잡아!!”
사람들과 레비쥬는 허겁지겁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집 밖에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숲의 침묵과 어둠이 놓여 있었다. 일렁이는 횃불 아래에 서서, 침략자들은 어둠 속에 귀 기울였다.
발걸음 소리는 산장의 우측에서 났다. 숨기려는 기색도 없는 발걸음 소리였다. 창문을 뚫고 도망쳤다고는 생각도 되지 않는 차분한 모습으로 나타난 시빌이 어둠 속에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시퍼런 송곳니가 언뜻 보이고, 웃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 그것이 눈에 보였다.
도끼가 손에 들려 있었다. 전투용이 아니라 장작을 패기 위해 사용하는 둔탁한 손도끼였다. 비웃음 섞인 웃음을 내뱉으려던 레비쥬는 순간 목이 턱 막히는 듯한 긴장을 느꼈다.
어둠은 마치 광휘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고 횃불의 빛을 받은 금발은 음산한 왕자에게 주어진 왕관 같았다. 산장을 둘러싼 낮은 울타리들이 죽음의 성채처럼 웃었고 숲은 그들을 지옥으로 안내한 인도자였다. 레비쥬는 검을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팔을 타고 흘렀다.
눈앞에 괴물이 서 있었다.
* * *
정신을 잃었을 때처럼 레이븐은 눈을 떴다. 삭막한 먼지가 산장에 가득했고 겨우내 쌓인 차가운 공기가 뺨을 얼렸다. 두꺼운 외투가 몸 위에 덮여 있었다. 레이븐은 제대로 옷을 꿰입은 뒤 맨발로 산장의 바닥에 섰다.
먼지 쌓인 나무 바닥은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레이븐은 자신의 체력이 떨어진 것을 느꼈지만 걷는 데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레이븐은 천천히 움직여 밖으로 향하는 문을 밀었다.
갑작스레 밀려든 빛에 눈이 부셨다.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레이븐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시야가 빛에 익숙해지자 한눈에 보기에도 초토화된 마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순히 잡초가 많이 자랐다던가, 관리가 안 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뽑히고 짓밟혀 진창이 되어 있었다. 허탈함에 말문이 막힌 채 고개를 돌리자 숲으로 통하는 마당의 길가에 익숙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레이븐을 환각에 처넣고,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꿈속에서 무던히도 그리며 바라던 남자의 모습이었다. 레이븐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봄의 햇살 한가운데 시빌이 앉아 있었다. 쌓아두었던 장작이 그의 주변에 널려 있었고, 파헤쳐진 풀잎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빌의 발치에는 갈퀴가 뒤집어진 채 놓여 있었다. 그 갈퀴 끝엔 피가 묻어 있었다.
레이븐은 시빌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목을 부여잡았다.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천천히 다가가자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비탄에 젖은 푸른 눈이 두려움을 가득 담은 채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시빌.’
그는 명백히 두려워하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감히 다가오지 못하며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기를 울리는 나직한 숨소리에 시빌이 흠칫 몸을 떨었다.
“시빌.”
“날 쫓아낼 거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레이븐은 말을 잃었다. 창백하게 질린 시빌이 폭풍처럼 애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였어. 이곳에 칼을 들고 나타나서. 그래서 죽였어. 당신도 중독시켰지. 화 많이 났어? 미안해. 미안해. 하지만.”
“시빌.”
시빌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울음에 목이 메인 소리가 났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한 모든 짓을 잊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좋을 텐데.”
“시빌-!!!”
레이븐은 절규했다.
파국은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찾아왔다.
시빌은 자신의 목을 뚫고 나온 검날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가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시빌은 눈을 돌려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고함을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오는 레이븐의 얼굴은 고통과 비탄으로 가득했다. 그런 심한 짓을 했는데도, 그는 자신의 모습에 울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에만 지을 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의 목을 찌른 것일까. 그런 것을 시빌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인간인지 레비쥬인지, 이 죽음이 패배인지 아닌지,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빌은 레이븐만을 바라보았다. 검날이 비틀려 목구멍을 휘저어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것이마지막이라면의미없는것은눈에담아두지않으리라생각했다.
* * *
침통한 목소리는 흡사 달의 비명이었다. 아침 햇살에 찢어지는 새벽의 하늘이었다. 산 채로 깃털을 뽑히는 새의 각혈이었다.
레이븐은 시빌에게 달려갔다.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삐걱거렸다. 땅은 흔들리는 듯했다. 공기는 무게를 가진 듯했고 시간은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천 년처럼 달려 레이븐은 시빌 앞에 무릎 꿇었다.
잘려 떨어진 목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새파란 눈동자의 동공이 열리고 하늘이 담긴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은 원망인가 사랑인가? 레이븐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비명 질렀다.
깊은 동굴이 내지르는 바람 소리가 자고 있던 새를 깨웠다. 그 새는 까마귀였다. 짙은 날개가 너무나도 검은 나머지 숲의 녹색 빛을 반사하는 그런 까마귀였다.
세상의 모든 마법을 알고 있으며, 그 비의를 신의 눈알 한쪽과 맞바꿔 전수한 검은 새가 날개를 폈다. 장대했으며,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죽음만을 추종하는 무자비한 새의 부리가 쩌-억 벌어져 길게 울었다.
레이븐은 잘린 시빌의 목을 끌어안은 채 칼을 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얼굴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나뭇가지에 할퀴어 상처가 어린 얼굴은 쫓기는 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시빌의 몸을 푹푹 찔렀다.
“죽어! 괴물!! 죽어버려!”
그의 눈엔 레이븐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의 정신은 아득한 암흑 속을 보고 있었고 다시는 나오지 못할 터였다. 앙심을 품은 숲이 파르티잔의 인간들을 모두 시빌에게 보내었고 그는 기꺼이 침입자를 도륙했다. 하나, 둘, 셋, 어쩌면 다섯, 여섯, 일곱.
‘아홉 무리였어.’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여 알려 주었다. 시빌에게 은혜를 입은 까마귀만이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적이었다.
레이븐은 슬픈 마음으로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녹색 외투의 끝자락이었다. 구슬이 엮인 녹색 외투는 레이븐의 손에 잡혀 별처럼 반짝였다.
그는 마스터의 목걸이를 걸지 않았다. 너무 많고, 무겁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그는 마법의 정수를 꿰매어 넣은 외투를 몸에 걸쳤다. 그편이 간단하고 눈을 끌지 않았다. 그제야 레이븐의 모습을 발견한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외쳤다.
“유물! 유물이냐 넌?!”
“어리석은 자. 가엾구나. 파르티잔엔 유물이 없다.”
“알아.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어디냐 유물은?! 너냐?! 너로구나!!”
“모두가 알 수 있는 곳에 중요한 것을 숨기는 자도 있던가.”
레이븐은 잔인하게 웃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숲이 그 몸에 품고 있던 모든 질병과 저주와 음습한 균들의 정수가 남자의 몸을 할퀴었다.
나무에 파고들어 잎을 검게 태우고, 수관을 썩게 하고, 뿌리를 말라비틀어지게 하는 것들이, 가장 오래된 나무보다 나이 많은 것들이…….
곤충의 내장을 파먹고, 알을 품는 대신 자신을 품어 나르도록 하고, 짐승에게 먹히는 자살을 택하게 하는 것들, 짐승을 미치게 하고, 상처를 통해 기어들어가 퍼지고, 세대를 거듭하여 자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개화하여 흩날리는 그 모든 것들이.
시들게 하고, 곤충을 병들게 하고, 짐승을 죽도록 하고, 물어 인간에게로 퍼져나가는 녹색의, 검은, 누렇고 투명한 것들이 숲에서 뛰쳐나와 인간에게 악의를 드러내었다.
단 한 번.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레이븐은 인간의 몸을 태우고 녹이며 이글거리는 숲의 독을 바라보았다. 함부로 힘을 휘두른 자신을 힐난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그저 허탈하게 하늘로 고개를 젖혔다.
태양은 언제나처럼 밝게 빛나고 있어 봄의 숲은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고개를 돌리면 들꽃이 흔들리는 담장이며 구애하는 새들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븐은 시빌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움이 그의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두 남자의 시체도 이 광대한 봄의 색채를 흐리지는 못했다.
‘이대로 묻으면 흙이 되리라.’
레이븐은 생각하면서도 시빌의 시체를 주워 모았다. 커다란 거적을 가져와 몸을 올리고, 옆구리에 머리도 올려 고정했다. 질질 끌어 집 안까지 옮긴 시체를 침대 위에 올려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상처를 잘 맞추어 맞닿도록 놓아주었다.
시빌에게 자장가를 속삭이며 창백한 뺨을 쓸어주었다. 눈을 감겨주고, 그제야 몸을 일으켜 어질러진 집 안을 정리했다.
부서진 가구를 집 밖으로 내놓고 먼지 쌓인 바닥을 걸레질했다. 정신을 잃은 사이 음식물을 섭취한 기억은 있었지만 주방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집 안까지 들어와 겁도 없이 남은 음식물을 쪼아 먹고 있던 참새가 푸드득 날아 도망쳤다.
레이븐은 하나하나 치워나갔다. 망가진 것은 고치고, 더러워진 것은 닦고, 낡은 것은 보강했다. 작업실의 바닥에 널려 있는 약병들은 조심스레 모아 땅에 묻었다.
집을 치우며 레이븐은 망가진 자신의 몸도 치료했다. 애초에 중독성이 없도록 만든 것이라 금단증상은 없었지만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고 몸도 쇠약해져 있었다.
시빌은 한 달을 깨어나지 못했다.
레이븐은 완전히 붙어버린 몸과 목의 상처를 조심스레 닦아냈다. 몸의 상처가 붙고 나서는 옷도 새로 갈아입혔다. 늦은 봄이었으므로 반팔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직 숨은 쉬지 않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는 상처가 위안이 됐다.
오월의 푸르름은 지독할 정도로 짙은 향기를 냈다. 그 속을 거닐면서 레이븐은 자신이 미쳐가는 것을 느꼈다. 집에 돌아가도 레이븐의 이름을 불러주던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숨을 쉬지도 않고, 눈을 뜨지도 않았다. 일어날 듯하면서도 누워있기만 하는 모습이 지독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시 깨어나기만 한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우내 레이븐을 고통스럽게 하던 것도 다 용서할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원망한 적도 없다는 것을 레이븐은 깨달았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대가로 그는 또다시 죽음을 맞았다.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다. 갈 곳이 있는 자를 속이고 붙잡아 둔 자신이 죄인이었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시빌을 잃은 것인가? 하나의 벌로 둘 다를 처벌한 것인가?’
레이븐은 멍하니 숲을 걸었다. 여기저기 인간이며 레비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폭력의 잔해가 시신마다 남아 있었다. 누가 행사한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한 살육도 눈에 띄었고 여럿이 전투한 흔적도 몇 개 있었다. 그러한 흔적을 찾아낼 때마다 레이븐의 정신은 어두운 곳으로 흘러 떠내려갔다.
하루는 평온하게 지내는가 하면 바로 다음 날 울부짖으며 땅을 긁었다. 괴로움에 몸을 쥐어뜯었다. 깨어날 것이라고 믿는 마음과, 검에 뚫려 죽어가던 시빌의 모습이 교차되어 레이븐의 모습은 점점 황폐해졌다.
그렇게 한 달이 또다시 흘러 녹색이 잔인한 여름의 초입. 시빌은 고열과 함께 깨어났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일어난 사람은 잔인한 눈을 지닌 북부의 왕이었다. 매서운 피가 그의 몸을 가득 채운 채 흐르고 있었다.
“왜. 놀라운가?”
놀라웠다. 그가 이토록 돌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래. 네놈의 정체부터 들어볼까? 넌 뭐냐? 카디넬.”
그가 카디넬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어 말할 때, 그 울림은 숲지기로 태어난 자들을 향한 시샘과 경의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빌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명백한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손가락이 부서지는 고통.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절망감.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없었다곤 말하지 못한다.
잔인한 남자.
‘그러나 너는 3년이란 시간을 나에게 줬다.’
최고로 영화로운 선물이었다. 그 대가가 부서진 여덟 손가락과 자신의 마음뿐이라면 참으로 약소한 것이 아니겠는가? 추억은 죽음이 목을 조르기 전까지 옆에서 함께 걸어갈 것이다.
“가라. 가서 그를 놓아주라고 말하렴.”
시빌은 까마귀의 부리에 대고 속삭였다. 숲지기의 피 냄새를 맡은 숲은 분노하며 시빌의 뒤를 쫓았으나 덤벼봐야 애꿎은 죽음만 뿌리게 될 것이다.
까마귀는 길게 울며 시빌을 쫓아 날아갔다.
레이븐은 먼지 쌓인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작업실로 들어갔다. 약값으로 받아놓았던 리넨을 길게 찢어 붕대를 만들었다. 다행히 상처를 위한 약들은 깨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피에 젖은 손바닥을 덜덜 떨며 약을 꺼낸 레이븐은 부목으로 사용할 나무를 고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깨끗한 물에 손을 씻고, 단단한 나뭇가지를 여러 개 주워 산장으로 돌아갔다.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부러진 손가락을 모두 치료하자 적막한 침묵만이 그의 곁에 내려앉았다.
아직 아픔은 추억이 되지 못해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공허함은 빈 자궁에 들어선 환상처럼 그의 미래를 짓누르고 있었다. 다시는 싹틔우지 못하는 나무. 불길에 익어버린 뿌리가 자신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빈집에 앉아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역광이 그의 모습을 어둠 속에 가리웠다. 새파란 눈동자가 노여움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씨발.”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눈동자가 뚫어져라 레이븐의 몸을 훑었다. 남자는 두통이 인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선 퉁명스레 말했다.
“너 날 속였겠다.”
레이븐은 멍하니 시빌을 바라보았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를 때 짓는 표정이라는 것을 레이븐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곤란한 듯 이를 갈며 산장 안을 이리저리 노려보았다. 진득한 짜증이 눈썹 위에 서린다 싶은 순간이었다.
그가 거칠게 다가왔다. 이어진 것은 협박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곤란함과 혼돈이었기에 레이븐은 동행을 결심했다.
북부까지 배웅을 하자. 그리하여 그의 마음속에 있는 혼란이 정리되도록 돕자. 삼 년 동안 자신이 묶어놓아서 생긴 일들이 무로 돌아가고, 그가 제 자리를 찾는 것을 도와 속죄를 끝마치도록 하자.
비틀거리며 산장 밖으로 끌려 나오자 못 보던 인간들이 세 명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출신이 비천해 보이는 그자들은 겁먹은 눈초리로 레이븐과 시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빌은 그자들을 향해 말했다.
“이 숲의 숲지기다. 우리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으니 잘 지내도록.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지?”
레이븐은 넘어진 몸을 일으키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이븐.”
그의 이름은 숲이 지어주었다.
찬란하고 울창한 숲, 생명이 피어오르는 숲, 새하얀 죽음 속에서도 태양을 위해 잎을 피우는 숲. 생명을 갈무리하여 키우고 저장하는 숲. 그 숲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레이븐’이라고.
‘이제 그 이름을 갖고 숲 밖으로 나가려 하니, 부디 돌아올 수 있기를.’
나무그늘이 없는 곳으로 나가는 것은 무지한 공포였으나 레이븐은 하늘의 별을 보며 위안했다. 단단한 땅의 감촉을 느끼며 숨 쉬었다. 세계는 이어져 있었으니 언제고 그가 원하면 그의 이름을 지어준 숲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까마귀는 시빌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