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8)

3년 (1)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숲이었다. 찬란하고 울창한 숲, 생명이 피어오르는 숲, 새하얀 죽음 속에서도 태양을 위해 잎을 피우는 숲. 생명을 갈무리하여 키우고 저장하는 숲. 그 숲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레이븐’이라고.

여름의 폭풍이 노령의 떡갈나무 두 그루를 쓰러뜨렸다. 뿌리가 뒤집히고 시꺼먼 흙이 밖으로 노출되어 햇빛을 맞이했다. 두 나무 중 하나는 수령이 이백 년을 넘긴 고목이었다. 집을 잃은 산새며 곤충들의 난리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레이븐은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비에 젖은 숲 전체가 오랜만의 햇빛에 부르르 온몸을 떨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싹을 틔운 새싹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레이븐은 숲을 찬찬히 살피며 걸었다. 불어난 개울의 물소리가 청명하니 공기를 울리고 깃을 털며 노래하는 새들의 소리가 아름다웠다. 레이븐이 지나갈 때마다, 짐승들과 벌레들이 숲지기에게 안부를 건네며 숲의 피해를 고했다.

진창이 된 땅과 물에 젖어 미끄러운 낙엽 위를 걷는 것은 힘들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짙은 초목의 냄새가 기분 좋았다. 절로 허밍이 나와 흥얼거리고 있자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다.

오면서 전해 들은 대로 과연 커다란 나무가 뒤집혀 있었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었던지, 육중한 뿌리가 땅에서 다 튀어나와 흡사 나뭇가지인 양 보였다. 레이븐은 신음을 흘리며 챙겨 온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땅속에서 긴 시간 잠자던 씨앗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중에서 귀한 약초나 나무의 새싹만을 골라내어 추슬렀다.

나무뿌리가 뽑혀나간 구덩이는 깊었고, 잔뿌리들도 다 뽑혀나가며 땅이 들린 탓에 푸석하기도 했다. 바구니를 채우며 흥얼거리는 새에 무릎이며 소매가 새까맣게 변했지만 레이븐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북방에서만 자란다는 에델바이스의 꽃씨를 구한 것이다. 동부의 기후에선 절대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씨앗들도 깊은 땅속에선 종종 발견되고는 했다. 레이븐은 기쁜 마음으로 흥얼거리며 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은 그때였다. 나무가 쓰러진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절벽 너머에 시체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썩지는 않았지만, 장마 후의 습도가 열기로 데워지면 금세 부패하리란 걸 알 수 있었다.

레이븐은 잠시 고민한 뒤 절벽 아래로 통하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폭풍 끝의 숲 냄새가 너무 짙어 짐승인지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운 좋게 먹을 만한 짐승의 시체를 발견한다면, 썩기 전에 한 조각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매끄럽게 몸을 단장한 잎새들이 레이븐의 녹색 외투를 적시며 부대껴왔다. 연녹색의 외투는 그러한 인사가 겹칠 때마다 짙어져 절벽 아래에 닿았을 때엔 흠뻑 젖어 짙은 녹색이 되어 있었다. 레이븐은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하는 몸을 걱정하며 조심스레 절벽 아래로 향했다.

절벽 아래의 협곡은 물길이 잠깐 흘렀는지 고운 모래가 굽이굽이 뭉쳐 있었다. 레이븐은 그 위를 덮듯이 자라난 덩굴을 걷어내고 부드러운 진흙 속에 손을 묻었다. 벌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 따라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협곡의 바닥을 헤치자 모피의 일부분이 손에 잡혔다. 짐승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가늘고 부드러우며, 긴 모질에 놀라며 레이븐은 천천히 손에 잡힌 짐승을 끄집어냈다. 생각보다 작은 것에 놀라며 가뿐히 시체를 건져 올린 레이븐은 잠시 말을 잃고 그것을 쳐다보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황금빛의 실타래가 그의 어두운 손가락에 감겨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레이븐은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손에 든 머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목을 완전히 잘려 참수당한 머리는 마치 대리석으로 깎은 누군가의 두상 같았고, 소꿉장난을 치다가 진흙 속에서 고대 황제의 유물을 끄집어낸 기분이었다. 핏기가 없어 창백한 피부는 놀랍게도, 시체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븐은 덜덜 떨리는 얼굴에 달라붙은 진흙을 닦아냈다. 반쯤 뜨인, 놀랍도록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드러났다.

인간의 시체라면 자주 보았다. 레이븐이 사는 곳은 동부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맥 중 하나인 파르티잔이었고, 인간뿐만 아니라 레비쥬 또한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인간은 그 자신의 약함과 자연이, 레비쥬는 욕심과 또 다른 레비쥬가 그 생을 거두어갔다. 레이븐은 그러한 시신들을 숲에서 맞닥뜨릴 때마다 때로는 가족에게 전달해주고, 때로는 부패하여 숲의 일부가 되도록 놔두었던 것이다. 단언하건대, 이토록 아름다운 시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레이븐은 완전히 홀린 표정으로 머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진흙 속을 헤집자 인간의 옷자락과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잡아당겨 보았지만, 크기가 너무 커서 잘 나오지 않았다.

레이븐은 새싹을 수집하기 위해 가져왔던 작은 삽으로 진흙을 파냈다. 습기가 마르고 땅이 굳으면, 꺼내는 일은 정말 힘들어진다. 그는 필사적으로 진흙을 파헤쳐 몸뚱이를 꺼내었다. 숨이 턱까지 받치고, 협곡 주변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지만 레이븐은 기쁨을 느꼈다.

완전히 꺼낸 몸을 바로 누이고 진흙을 털고, 잘린 목에 머리를 맞춰 놓아주었다. 잘린 목을 제외한다면 완전한 형상을 갖춘 게 된 창백한 시신의 모습이 레이븐의 눈을 황홀하니 어지럽혔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는 결코 접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에 넋이 날아가고 말았다.

“예쁘다.”

이러한 아름다움도 결국엔 썩어 없어진다. 덧없는 생명의 진리 속에 레이븐은 서글픔을 느끼며 아름다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지만 목은 확실히 잘려 있으며 심장 또한 멈춰 있었다. 굳어서 흘러내리지 않는 피까지 확인한 뒤에야 레이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체는 발견한 그 자리에 놔두어 부패하든가 짐승들의 밥이 되도록 하고는 했다. 찾는 이가 있을 땐 장소를 알려주어 유품을 챙기게 했다. 레비쥬의 경우엔, 그 목을 전리품으로 챙겨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몸만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었고 찾는 이 또한 없는 게 보통이었다. 레이븐은 오랜 시간 몸에 익은 습관대로 아름다운 시체를 땅에 그대로 놔두었다.

진흙을 파내느라 시간은 이미 오후에 달해 있었다. 애써 채취한 잎들도 살짝 말라 있어 레이븐은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레이븐은 새싹들을 적당한 땅과 화분에 옮겨 심으며 내내 아름다운 금발을 떠올렸다. 그는 살면서 황금이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황금빛은 하늘에 어린 태양의 빛이었고, 그가 본 가장 찬란한 푸른빛은 맑은 가을날, 하늘을 비추는 호수의 수면이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찬란함을 한 명의 인간이 모두 가질 수 있을까? 말로만 듣고 동경하던 황금과 사파이어를, 한 명의 인간이 그저 존재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가?

레이븐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새싹들을 정리하고 장마로 눅눅해진 물건들을 한쪽으로 골라냈다. 날이 밝으면 밖에 내놓아 바싹 말리고 환기를 시켜야 했다. 집에 있는 물건들은 거의 다가 목재라서 습기에 약한 것이다.

그날 밤 레이븐은 금색 하늘과 푸른 호수의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레이븐은 옮겨 심은 새싹들을 살핀 뒤 습기 찬 물건과 이불들을 밖에 널었다. 하늘은 맑았고 비구름의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폭풍에 뒤집힌 두 번째 나무에 가 보기 위해 바구니를 챙겨 나온 레이븐은 자신도 모르게 절벽 아랫길로 눈을 향했다.

신경 쓰였다. 간밤에 짐승들이 시식했을까? 더운 날씨라고는 하지만 벌써 썩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시큼한 냄새가 슬슬 나겠지? 부풀어 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절벽은 동쪽에 있었고 뒤집힌 또 한 그루의 나무는 서쪽에 있었다. 비는 그쳤다지만 숲 속의 물기는 여전해서 신경 쓰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레이븐은 서쪽으로 조심스레 걸어가며 어제 본 시체 생각만 했다.

썩어 있거나 짐승이 배를 채웠더래도 그 금발은 여전할 것이고, 어쩌면 눈동자도 여전할지 몰랐다. 레이븐은 그 아름다운 금발과 눈동자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새싹은 빠르게 채집하지 않으면 금세 벌레들의 먹이가 되었다. 레이븐은 당장이라도 동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서쪽으로 향했다. 가재도구를 말리느라 시간을 많이 소모해서, 새싹들을 채집하고 나면 해 질 무렵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레이븐은 자신도 모르게 숲을 달렸다. 결코 서두르는 일이 없는 레이븐의 모습에 숲이 무슨 일이냐고 지나갈 때마다 물어왔다.

“잠깐, 봐야 할 것이 있어!”

레이븐은 큰 소리로 외치며 동쪽으로 뛰어갔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달음박질쳐 뛰어내리자 토끼 한 마리가 의뭉스레 그를 바라보다 수풀로 도망쳤다. 하룻밤 사이에 한층 두텁게 자라난 이끼와 수풀들이 협곡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 사이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그 시체는 전날 레이븐이 놓아둔 모양 그대로 절벽 아래 놓여 있었다. 레이븐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격에 젖어, 그 이름 모를 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연에서 찾아보기 힘든 금색의 머리칼은 전날 본 그대로였고, 게슴츠레 뜨인 푸른 눈은 하늘을 담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레이븐은 조심스레 다가가 그 옆에 꿇어앉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죽은 자에게 반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하지만 죽었기에 이렇게나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살아 있다면, 이처럼 고귀한 신분의 인간은 카디넬이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븐은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남자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기쁨과 똑같은 크기의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는 너무나 외롭게 살아온 것이다. 아무도 들르지 않는 숲지기의 산장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 홀로 고독을 견뎠다. 그는 태양을 그리는 씨앗마냥 인간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토록 반짝이는 인간의 형상이란 짓궂은 신의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품 안의 인형에게 바치는 어린아이의 애정과, 친인을 잃은 인간의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곧 썩어 문드러지겠지만, 그 전까지 내가 약간의 기쁨을 누린다 하여 죄가 되진 않겠지요?”

레이븐은 조용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내내 아름다운 금발과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레이븐은 시체를 보기 위해 매일매일 절벽 아래로 움직였다. 약간의 식사를 지참하고, 때로는 일거리를 가지고 가기도 했다. 날씨는 점점 더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의 시체는 썩지 않았다. 레이븐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마치 연인이라도 된 양 옆에 앉아 노래하고, 쓰다듬고, 먼지며 이슬을 훔쳐 주었다. 그러기를 일주일. 레이븐은 시체를 자신의 집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줄 알았던 남자의 머리가 몸에 단단히 달라붙고, 굳은 줄 알았던 피가 다시 흘러 땅을 적시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레이븐이 남자의 머리를 너무나 정확하게 몸에 붙여 놓았던 까닭에 그는 지금 지독한 죽음을 넘어 다시 소생하고 있었다.

레이븐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 * *

눈알에 떨어진 비가 눈물처럼 흘러나오고 차가운 이슬에 얼어붙은 손은 맞잡고 싶어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숨은 멈춘 지 오래. 콧등을 스치는 바람이 조롱처럼 느껴져서 악다구니를 써보려 해도, 혀끝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죽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암흑이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도 느낄 수 없었다. 하늘은, 천국도 지옥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듯했다. 차가운 비가 뺨을 후려치던 감각도 점점 느끼지 않게 되었고 태양의 따스하던 빛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 적막과 무감각의 정체 속에서 시빌은 고독을 느꼈다.

그것은 거대한 우주 속에 던져진 한 인간의 고독이었다. 어둠 속에 홀로 놓였을 때, 그 어둠의 크기가 크든 작든 동일하고 그 속에서 홀로 느끼는 감정 또한 동일하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어차피 어둡고, 어차피 혼자라면.’

관 속에 갇히거나 빛 없는 밤 속에 던져지거나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나 그 고독조차 점점 흐려지고, 생각하는 것이 느려지고.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기가 힘들어지자 남는 것은 암흑밖에 없었다.

시빌은 생각했다. 차라리 밝음을 모르던 때로 돌아간다면, 그리움도 고통도 없을 거라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머리는 열에 들떠 뜨거웠고 귀에서는 웅웅대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두운 방 안이었다. 나무로 된 벽과 천장이 빙빙 돌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눈을 감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떨어져 몸이 추웠다. 그때 따뜻하고 상냥한 손길이 이마를 쓸어주었다.

‘누구.’

입만 벌어질 뿐 보기 싫은 쇳소리만 흘러나왔다. 눈을 뜨자 손바닥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마시세요. 자고 일어나면 편해질 겁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진한 약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아 입을 열었다. 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는 족족 받아 삼켰다.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는 그런 그의 옆에 붙어 끈기 있게 시중을 들어주었다.

약인지 죽인지 모를 것을 받아먹으며 시빌은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왜 누워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지러움 속에 언뜻언뜻 훔쳐본 간병인은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였다. 머리도 눈도 피부도 어두운색을 지니고 있어서 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어둠은 지겨웠다. 왠지 그랬다. 하지만 그는 상냥한 어둠이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좋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소리 없이 다가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좋았다.

혼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어둠이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를 기껍게 들으며 시빌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 한 장의 어둠 너머에 상냥한 어둠이 앉아 있었다.

* * *

레이븐은 부상자를 옮길 때 사용하는 바퀴 달린 운구에 남자의 몸을 실었다. 바위와 푹 꺼진 땅에 몇 번이나 엎어질 뻔하며 간신히 집까지 남자의 몸을 옮겼다. 혼자서 낑낑대며 작업하느라 집 안의 침대에 눕혔을 땐 이미 하루가 다 가 있었다. 레이븐은 팔로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힘들어 숨을 가누는 와중에도 쭈뼛하니 돋은 소름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비쥬의 회복력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파르티잔 곳곳에 널린 레비쥬의 시체며 잔해들을 많이 봐 온 탓이었다. 큰 상처를 입고서도 목만 붙어 있으면 회복하곤 하는 것이 레비쥬였다. 다시 말해, 목이 떨어지면 아무리 레비쥬라도 죽었다. 아무리 전신의 기운을 받아 다시 태어난 자라고 해도 그 기본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레이븐은 불안한 시선으로 침대 위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금발은 여전히 매끄럽고 황홀한 빛을 품고 있었지만 그 눈은 이제 감겨 있었다. 너무나 무서워서 레이븐이 감긴 것이다. 마치 자는 것처럼, 남자는 누워 있었다. 하지만 아직 숨을 내쉬지는 않았다.

두 손을 움켜쥐며 제발 이 남자가 살아나지 않게 해 달라고, 아니 살아나게 해 달라고 몇 번이고 바꿔 염원했다.

다음 날, 남자가 숨을 쉬었다. 입을 벌리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쉰 남자는 곧 괴로워하며 기침을 했다. 코로 진흙이 흘러나왔다. 새파란 눈이 뜨이고 잠시 허공을 방황하며 흔들거렸다. 남자의 옆에 앉아 약초를 다듬고 있던 레이븐은 딱딱하게 굳어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악몽 같았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는 죽음을 추종하는 까마귀였다. 만일 누가 그의 앞에서 죽은 자를 되살린다면 바로 그 시체를 불태워 응징을 가할 터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있는 저 몸을 들어 집 밖으로 내팽개치고, 태워 없애야 할까? 레이븐은 고민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그가 인간이 아니라 레비쥬이기 때문이었다. 레비쥬의 전설적인 회복은 매우 유명했고, 어쩌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저러한 재생 또한 그들에겐 당연한 일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를 주저케 했다.

레이븐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남자의 얼굴과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시트에 떨어진 흙도 집 밖으로 털어내고 환자를 위해 푹신한 베개를 머리 아래 놓아 주었다. 죽은 자가 되돌아온다 해도 숨을 쉴 리는 없다. 그렇다면 자연이 허락하여 다시 숨을 쉬는 것이리라. 레이븐은 심란한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와의 대면이었다.

남자의 옷은 높은 신분의 기사들이 입을 법한 비단이었다. 레이븐은 세상 물정에 어두워 옷차림만으로 그의 신분을 짐작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히던 중 발견한 자질구레한 장신구며 서류가 그의 신분을 짐작게 했다.

시빌 마이언. 북부의 대영주. 실질적으로는 북동부의 왕이나 다름없는 남자였다. 그런 자가 소문도 없이 파르티잔까지 온 것은 아마도 유물 때문이리라. 남자의 신분을 알게 되자마자 떠오른 것은, 남자가 정신을 차리면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이었다.

썩지 않고, 짐승의 먹이가 되지도 않고, 살아가겠구나.

레이븐은 새삼 감동하여 잠든 남자의 뺨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아름다웠다.

남자는 혼란이 가득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곧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 그 사실에 깊이 안도하며 레이븐은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할 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바레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남자를 넘겨야 하나 고민했다. 숲 속에 살면서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의 어두운 피부가 새삼 맘에 걸렸다. 북부 사람들은 카디넬을 혐오하는 성향이 매우 강했다. 숲에 인접하여 사는 사람들도 그랬다. 남자도 깨어나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불쾌해하며 피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 아팠다.

빠른 속도로 회복할 것 같았던 남자는 의외로 일주일을 앓으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레이븐은 정성스레 남자를 간호했다. 어지러워하고, 가끔 구토를 하는 남자의 증세는 뇌진탕을 닮아 있었다.

“목이 잘린 것보단 뇌진탕인가.”

레이븐은 조금 어이 없어 하면서도 가끔 정신을 차리는 남자에게 약을 먹였다. 남자는 열기 오른 흐릿한 눈으로 레이븐을 바라보고는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괴로워하면서도 레이븐의 말을 잘 들었다. 그 눈동자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아서, 레이븐은 조금 두근거리며 기뻐했다.

처음으로 숨을 내쉰 지 일주일 만에 남자는 처음으로 목소릴 냈다.

“누구십니까?”

레이븐은 남자의 목소리보다는 그 존댓말에 더욱 놀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완전히 메마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여긴 어딥니까? 난, 난 대체 누구지?”

이번엔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에 놀라 레이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빌의 눈빛에 레이븐은 격한 충격을 느꼈다.

정말로 모든 기억을 잃었단 말인가? 정말로?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고, 돌아갈 곳도 잊고, 그 사명이나 본능마저 잃었단 말인가? 긴장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이 돌덩이를 삼키는 것 같았다.

레이븐은 혼란스러운 자신의 마음에 경고를 보냈다. 그는 레비쥬였고, 레비쥬란 자들은 교활하여 상대를 시험하길 좋아했다. 아마도 거짓일 것이다. 자신이 누군지 몰라서 한번 떠보는 것일 게다.

하지만 만일 그가 기억을 잃은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긴 파르티잔 산맥이고 난 이곳의 숲지기다.”

레이븐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려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은 시빌. 내 노예다. 내가 널 살렸으니까 넌 내 것이다.”

“노예?”

파란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레이븐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다시 말했다.

“그래. 내 노예다. 어서 낫도록 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니까.”

레이븐은 혼란에 찬 시빌의 이마에 약초를 감싼 수건을 올려주었다. 진한 약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빌은 뭔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압적인 말투와는 달리 부드럽고, 조금 떨리는 손길이 시빌의 이마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고통으로 현실과 꿈을 분간하기 힘들던 때 시빌을 보살펴주던 상냥한 남자의 손길이었다.

레이븐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빌의 고통 어린 시선에 그가 상처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군요. 주인님인 겁니까.”

목소리는 굳어 있었고 억눌린 울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예상 못 한 감정의 표현에 등줄기가 뻣뻣하니 굳었다. 시빌은 그 일렁이는 푸른 눈을 다시 감았다. 레이븐은 자신이 되돌릴 수 없는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레이븐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가 산장 앞마당에 주저앉았다.

“미쳤어. 미친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이람.”

레비쥬를 상대로 노예라니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애초에 목숨을 구해줬다고 노예로 삼는다니. 만일 그런 짓을 정말로 했다면 레이븐의 산장엔 노예가 열 명 넘게 있었을 것이다. 레이븐은 심란한 마음을 끌어안은 채 숲을 빙빙 돌았다. 거진 이주 가까이 두문불출하던 숲지기의 모습에 숲은 반가워했지만 레이븐은 답례할 정신도 없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시빌은 다행히도 자고 있었다.

레이븐은 어두운 방 안에 앉아 멍하니 시빌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생기를 띤 시빌의 얼굴은 정말 손에서 놓기 싫을 정도로 그의 취향이었다. 손에서 놓지 않아도 된다면, 놓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 났다. 미움받더라도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살려준 건 사실이니까.”

레이븐은 잠든 시빌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깊은 죄책감이 가슴을 두드렸지만, 어째선지 후회는 되지 않았다.

* * *

눈앞에 들이대진 시커먼 약사발을 쳐다보며 시빌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안 마셔도 될 것 같은데요. 머리도 안 아프고.”

“이것까지만 마셔. 마지막으로.”

레이븐의 말에 시빌은 눈살을 찌푸리며 약을 들이켰다. 쓰디쓴 액이 입 안을 가득 채우며 넘어가는 것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레이븐이 딸기 두 개를 그에게 주었다. 시빌은 말없이 딸기를 후딱 삼켰다.

시빌은 약그릇을 치우는 레이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앓던 내내 그가 자신을 간호했던 것이 얼핏얼핏 기억났다. 처음엔 그가 가족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피부색은 그와 달랐고, 어디 하나 비슷한 부분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당신의 노예라고요?”

레이븐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정성스레 간호해주던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말도 잘 나누지 않으려 했다.

“노예라.”

시빌은 일단 그 말에 납득했다. 그는 매우 심하게 앓고 있었고 레이븐이 그런 그를 간호해준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다면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다른 것을 지불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시빌이라는 이름도 레이븐이 알려준 것이었다. 그가 혼수상태를 헤맬 때 이름을 물어보자 가르쳐 준 것이라고 했다.

우울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노예라니 미래의 모든 것이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무수한 가능성들이 레이븐의 노예라는 한 마디에 뭉그러졌다. 그건 참담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종류의 기분이었다.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 되지 않는 무언가가 시빌의 발목을 붙잡았다. 무언가가 아니라고, 틀렸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하지만 기억이 없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시빌의 몸이 완전히 나아 움직일 수 있게 될 무렵, 숲은 어느덧 가을에 접어들었다. 붉고 노랗게 물든 나무들의 모습이 하루 종일 시선을 잡아 붙들어 맸다. 시빌은 레이븐과 함께 숲을 둘러보며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했다.

“겨울을 대비해서 장작을 모아야 해. 이 주 후부턴 과일들을 거둬야 하고. 할 일이 많아.”

레이븐의 설명에 시빌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차피 지금 들어봤자 기억하기 힘들 것 같았고 말하는 나무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레이븐은 시빌의 얼굴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을 이었다.

“나무는 베지 말고, 일단 떨어진 것들을 주워와 줘. 그리고 여기가 샘물.”

시빌은 레이븐이 시키는 대로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모았다. 물통도 한 통 길어 손에 쥐었다. 등의 지게에는 장작이 잔뜩 쌓이고, 손에선 물통이 찰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레이븐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아니, 힘이 세서.”

그 말에 시빌은 새삼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비리비리하게 생긴 것이 허약해 보였다. 후려 패고 도망치면 자신을 잡으려들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흐음.”

시빌은 장작과 물통을 든 채 건들건들 레이븐을 따라 걸었다. 숲지기가 옆에 있기 때문인지 작은 산새들이 겁도 없이 시빌의 짐 위에 앉아 짹짹거렸다. 레이븐은 시빌의 조금 앞쪽에 서서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로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흔들거렸다.

집 안은 언제나 어두웠기에 레이븐의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밝은 날 조용히 서 있는 레이븐의 모습은 시빌의 마음 한구석을 두들기고 지나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밤처럼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이었다. 피부의 색깔도 어두워 기름진 땅을 연상시켰다. 마치 밤의 한 조각이 태양 아래 떨어진 것 같았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일부 같았다. 구슬이 수도 없이 엮여 있는 녹색 외투라던가 그 안쪽에 차려입은 옷은 낡고 남루했지만, 그 안에 든 것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시빌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붉게 물든 숲의 정경과 어우러져, 그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인간의 세계가 아닌 듯 느껴졌다. 도망치는 것은 쉽지만, 그에게 해를 가하는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시빌은 레이븐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꾹꾹 밟으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가을엔 일이 많다고 했다. 그는 힘도 없어 보이니 은혜를 갚는 셈 치고 조금 봉사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시빌은 조용히 레이븐의 말을 따랐다. 일을 시키면 하고 쉬라면 쉬었다. 약을 주면 먹었고 불평도 감사도 없이 묵묵했다. 하지만 그 반발 없는 침묵은 레이븐을 두렵게 했다.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야 그에 대한 대비도 가능한 것이다. 폭설을 처음 본 자들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고 얼어 죽는다. 늑대에 대해 모르는 자는 물려 죽는다. 화려한 벌레엔 독이 있기에 새들이 피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레이븐은 시빌을 피했다.

레이븐은 약초를 말리기 위해 다발로 모아 묶으며 장작을 패는 시빌을 힐끔거렸다. 웃통을 벗어 던지고 장작을 패는 시빌의 상체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쌀쌀해진 가을 공기에 뜨거운 숨이 하얗게 번져 흩어졌다. 뚫어져라 시빌을 쳐다보던 레이븐은 고개를 아래로 휙 떨어뜨리곤 다시 일에 열중했다. 약초 다발은 삐뚤삐뚤 엮여 있었다. 집중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일을 잠시 하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그를 보고 있었다. 절벽 아래 놓여 있던 시신이 살아서 숨을 쉬고 움직이고, 또한 자신과 한집에 살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시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가고 행복해졌다.

딱. 딱. 장작 패는 소리가 산을 울렸다. 레비쥬의 경이적인 힘으로 겨우내 뗄 장작을 모조리 다 패버린 시빌은 약초를 말리는 레이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말린 약초를 한 다발 한 다발 정리하던 레이븐은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빌의 얼굴에 숨이 턱 막혀왔다.

“다 끝냈습니다.”

“어. 그, 그럼 쉬도록 해.”

시빌은 고개만 살짝 끄덕인 뒤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레이븐은 그 근육에 감탄했다. 자잘한 근육이 빼곡히 박혀 있는 상체는 맹수를 연상시켰다. 일로 다져진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다져졌다는 것이 실감 나는 모양새였다. 시빌이 사용하다가 장작 옆에 팽개쳐둔 도끼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아니, 시빌이 레이븐을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도끼가 아니라 발차기 한 번으로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레이븐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래도 시빌이 생명의 은인을 죽일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이븐은 살짝 조바심이 일어 손에 든 약초를 후딱 정리했다. 허둥지둥 돗자리에서 일어나 산장에 들어서자 사과를 손에 든 시빌이 레이븐을 멀뚱하니 바라보았다.

“빨리 끝났네요?”

“으응.”

레이븐은 어물쩡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의 마당과는 달리 산장에선 인간의 냄새가 풍겼다. 진한 약 냄새와 인간의 흔적은 레이븐이 오랜 시간 들여 산장에 새겨 넣은 것이었다.

레이븐은 약초 다발을 든 채 시빌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약을 조제하는 작업실로 들어가 천장에 약초를 건 뒤 힐끔 부엌을 보자 사과를 우적거리는 시빌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추한 집안에 저런 걸 두자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레이븐은 자신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아팠다.

“깨야 할 것 같은데.”

레이븐은 한숨을 푹푹 쉬며 애써 시빌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노예도 부려본 자가 부리는 법이다. 레이븐은 시빌에게 일을 시키긴커녕 눈치 보기 급급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시빌이 레이븐에게 물어오면 허둥지둥 할 일을 만드는 게 요즈음 그의 아침 일과였다.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쌓여갔다. 할 일을 알려주고 길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말을 나누지 않게 되었고, 이윽고 길을 알려주는 것도 작은 까마귀 한 마리가 대신하게 되어 말수가 더욱 줄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시빌은 익숙해졌다. 숲 속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산장 앞의 마당에 앉아 사색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노예라고는 해도 레이븐이 시빌을 막 부리는 것도 아니었고, 일이 있을 때는 거의 함께 일했기에 노동하는 시간도 엇비슷했다. 시빌은 숲에서 살아남는 법을 레이븐에게서 하나하나 터득해갔다. 가을의 잎이 물들어 짙어질수록 백지로 깨어난 시빌 또한 숲의 생활에 물든 것이다.

* * *

“이봐 주인님. 이건 뭐야?”

시빌의 물음에 레이븐이 약을 만들다 말고 돌아보았다. 과수들을 거의 다 채집하여 분류하던 와중이었다. 시빌은 바구니에 가득 담긴 머루를 보며 떫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산머루다.”

“약인가? 포도랑 비슷하게 생겨서 달 줄 알았는데 셔.”

“그 신맛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 먹다 보면 익숙해질걸?”

“으. 어떻게 되먹은 입맛이 이걸 맛있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시빌은 투덜대며 머루를 야멸치게 노려보았다. 레이븐은 그런 시빌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행복하게 했다. 한참을 웃고 난 뒤 시빌을 보자 그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레이븐을 보고 있었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입 주변을 만지자 시빌이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는 건 처음 봤어.”

그 말에 레이븐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루알을 하나 집어 들었다. 새콤한 향이 입에 침을 고이게 했다.

“많이 먹으면 손도 입도 새까맣게 물드니까 조금만 먹어. 껍데기는 염색할 때 쓸 거니까 버리지 말고.”

“염색?”

“예쁜 보라색으로 염색할 수 있어.”

레이븐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머루알을 입에 물었다. 피부가 어두웠기에 새하얀 이도 그 안쪽의 혀도 확 눈에 뜨였다.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시빌은 눈을 돌렸다.

“알았어. 껍질은 모아둘게. 근데 안 먹어도 되지?”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말한 시빌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머루를 먹어치웠다. 손도 입도 새까맣게 물들었고 옷도 군데군데 보랏빛으로 물들어 매일 빨아야 했다. 신맛에 완전히 익숙해지다 못해 열렬한 팬이 된 시빌 덕분에, 결국 레이븐은 작업에 필요한 머루들을 따로 빼놓아야만 했다.

거대한 산맥 깊숙한 곳에 있는 과수는 거두는 사람이 없어 독차와 다름없었다. 숲 속 어디를 가도 먹을 게 풍부했고 시빌은 과일들을 따는 즉시 반 정도는 먹어치웠다.

하늘도 맑고 당분간은 비도 안 내리겠다 싶은 어느 가을날, 레이븐은 밤을 주워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커다란 자루를 두 개 챙겨서는 시빌에게 하나 주었다.

“밤나무 근처엔 벌집이 많으니까 주의해야 해.”

그 말에 시빌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꿀은 안 따?”

“가을엔 따지 않아. 가을에 따면 겨울에 벌들이 굶어 죽게 되거든.”

밤나무는 산장에서도 한나절은 가야 하는 곳에 몰려 있었다. 멀기는 했지만 아직 날도 그렇게 춥지 않았고, 잘 아는 길이었기에 레이븐은 간편한 몸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파르티잔 산맥의 숲엔 인간을 위한 길이 거의 없었다. 거의가 짐승들이 만든 길이라 인간이 걸을라치면 허리와 가슴에 부딪치는 가지들의 저항을 이겨내야만 했다. 시빌은 작은 손도끼로 나뭇가지들을 쳐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길을 만드는 것도 익숙지 않아 자주 걸려 넘어졌지만 이젠 레이븐이 따로 지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했다.

밤나무 숲에는 해 질 무렵에야 도착했다. 레이븐은 밤나무 숲 외곽에 야영지를 만들었다. 붉고 노란 잎사귀들이 장막처럼 늘어진 곳이었다. 커다란 나무 사이의 좁다란 공터에 짐을 내려놓은 레이븐은 돌을 모아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떨어진 낙엽이 많아 불은 잘 붙었다.

오래된 숲에서는 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레이븐은 야영지를 둘러싼 이 두 나무를 잘 기억해두라고 시빌에게 말해 주었다. 커다란 두 나무 근처에는 제법 큰 돌들이 몇 개 놓여 있었고, 오랫동안 사용된 탓에 검게 타 있었다. 밤을 수확할 때면 언제나 이곳에서 묵는다고 레이븐은 설명했다.

“왜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야영하지 않아?”

“밤송이가 따가우니까. 걸어 들어갈 순 있어도 누울 자리는 만들기 힘들어. 자고 있는데 밤송이가 몸 위로 떨어지는 것도 큰일이고.”

그 말에 시빌은 자신의 신발을 쳐다보았다. 병마에서 벗어난 뒤 시빌은 레이븐이 건네준 옷들을 입었지만 신발만큼은 원래 그가 갖고 있던 것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레이븐이 신은 것보다 좋아 보이는 부드러운 가죽 부츠는 그의 발에 잘 맞았다.

자신은 꽤 부유하게 살았던 게 아닐까? 시빌은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어느 곳의 귀족이라던가 부유한 상인이 아닐까. 자신을 찾아 헤매는 가족이나 동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편으론 신분에 대해서 자신이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아는 것이 있고 모르는 것이 있다. 자신의 신분도 과거도 모르지만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그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았다. 그러한 기억의 잔상은 마치 자신이 원해서 어느 하나만을 골라 지운 것 같았다.

모닥불이 따뜻하게 타오르고 밤이 깊어지자 레이븐은 콩과 감자를 그릇에 넣고 구웠다. 금세 걸쭉한 스프가 만들어졌다. 시빌은 암염을 꺼내어 갈아 넣는 레이븐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늘고 매끄러운 손가락은 숲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손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두운 손가락은 언제나 절도 있게 움직였고 불필요한 움직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저녁을 마치고 나자 레이븐은 짐 속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고풍스럽게 조각된 아름다운 단도를 한 손에 들고 시빌로선 알 수 없는 말을 읊었다.

어디선가 커다란 까마귀가 날아와 길게 짖었다.

시빌은 멍한 표정으로 그런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녹색 외투를 입고 단도를 허공에 휘두르는 레이븐의 모습은 언뜻 광인처럼 보였으나 함부로 말을 걸 수 없는 위압감 또한 갖고 있었다.

“뭘 한 거야?”

레이븐이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자 시빌이 물었다. 레이븐은 단검을 모닥불 옆에 꽂아 세우며 답했다.

“어, 산불을 예방하고 짐승의 접근을 막는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외우면 불침번을 안 서도 되니까 내일 일 하기 편하지.”

“주문이라니. 주인님은 마법사야?”

“……숲지기야. 둘은 달라.”

레이븐은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시빌의 눈치를 봤다. 시빌의 얼굴에 혐오감이 없는 것을 확인한 레이븐은 용기를 내어 덧붙였다.

“카디넬이 신에게 저주받았다는 건 카디넬 중에 숲지기가 많기 때문이지. 신의 힘이 숲에 간섭하는 걸 막는 것이 숲지기의 일이거든. 사실은 숲뿐만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해야겠지만.”

“신의 힘은 좋은 것 아닌가? 그 간섭을 막다니?”

“신이 힘을 쓸 때 힘의 결과는 대개 자연에 어긋나는 방향을 가리키고는 하지. 허공에서 불길을 만든다든가 죽은 자를 살린다든가 하는 것처럼. 그런 건, 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야. 죽은 자는 응당 흙으로 돌아가야 하며 불길을 일으키는 데엔 탈 수 있는 물건과 공기가 필요하니까. 숲지기는 그런 힘이 숲에 가해지는 걸 막아서 숲이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

“하지만 자연도 신이 만든 거잖아?”

“아냐.”

레이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 뒤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자연은 시간이 만든 것이고,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 말에는 시빌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하. 신을 인간이 만들다니 그런 우스운 말이 어딨어? 내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냐.”

직접적인 반박에 레이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두 손을 꼭 잡고 꼼질거리던 레이븐은 시빌이 대답을 듣길 포기할 쯤이 되어서야 작게 말했다.

“인간이 만든 신에 대항하여 자연의 편에 선 자들이 숲지기다.”

작은 소리지만 크게 들리는 말이었다. 시빌은 야영지를 데우는 모닥불이 긍정을 표하며 일렁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주변을 메운 침묵에 위협을 느끼며 시빌은 레이븐의 속삭임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우리가 짐승의 족속이라 불리는 것이고 인간들에게 또한 배척받는 것이지.”

시빌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조금 마음이 놓여 레이븐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어기 북쪽의 숲에는 숲지기가 없어서 마법에 오염됐다지. 자라지 않는 숲과 언제나 눈이 내리는 산맥이 있다 들었어. 슬픈 일이다.”

“그게 왜 슬프지?”

“인간이 그 성장을 고정당해 아이도 낳지 못하고 늙어 성숙해지지도 못하게 된다면 그건 슬픈 일이 아닐까? 자연도 똑같아. 그 멈춘 숲은 분명 비통한 바람을 토해내고 있겠지. 들어주는 이 없는 울음소리만큼 슬픈 건 없어.”

그 말은 확실히 그럴싸하게 들렸다. 시빌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헤치며 물었다.

“나도 숲지기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왜? 카디넬이 아니라서?”

“아니.”

그 부정의 말에 시빌은 자신이 노예임을 떠올렸다. 노예라는 것은 가능성을 제한당한 존재인 것이다. 자유가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상처 입은 눈으로 레이븐을 바라봤지만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자신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럼 왜? 카디넬이 아니라도 숲지기가 될 수 있다면 나도 언젠간 숲지기가 될 수 있는 것 아냐?”

레이븐은 조용히 자리에 누워 모포를 뒤집어썼다. 그 거절과 침묵에 시빌의 가슴 속이 욱하고 끓어올랐다.

“내가 노예이기 때문인가?”

“……아냐.”

시빌은 레이븐이 말해 주길 기다렸지만 왜 숲지기가 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레이븐은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올빼미가 깊은 밤을 알리며 길게 울었고, 두 남자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 *

야영지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침을 먹는 것이다. 전날 먹은 것과 똑같은 식단으로 아침 식사를 한 뒤, 레이븐은 모닥불의 남은 불씨에 모래를 끼얹어 잠재웠다.

숲의 바닥엔 실하게 익은 밤송이들이 떨어져 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시빌은 레이븐이 하는 모습을 따라 반쯤 벌어진 밤송이들을 발로 밟아 껍질을 벗긴 뒤 알맹이만 주워 자루를 채웠다.

커다란 자루 두 개가 금세 가득 찼다. 무게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며 레이븐은 시빌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땀 한 방울 안 난 얼굴로 성인 남자 몸통만 한 자루를 지게에 내려놓고 있었다.

시빌을 믿고 가장 큰 자루를 가져왔는데,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레이븐 혼자 밤을 따러 오게 되면 한 자루도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겁고 멀어서 들고 산장으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한 밤으로 가득 찬 자루 두 개를 보고 있자니 흡족한 마음이 일었지만 시빌의 식성을 떠올린 레이븐은 곧 그 마음을 접었다. 분명 예년보다 더 빨리 동이 나리라.

“내가 들까?”

너무 정신을 놓고 시빌을 보고 있었는지 짐을 꾸리다 말고 시빌이 레이븐에게 물어왔다.

“어?”

“이리 줘.”

레이븐은 어깨가 훌쩍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어느새 시빌이 자루 두 개를 지게 위에 올려 묶고 있었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이렇게 힘쓰는 일은 노예가 할 일이잖아?”

레이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멍하니 시빌을 쳐다보았다.

산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산의 수려한 풍경이란 인간의 감정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법이다. 두 사람이 산장에 도착했을 무렵, 날카롭게 서 있던 가시는 뭉툭해지고 차갑던 침묵은 평소의 느슨한 여유로 바뀌었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레이븐은 어디선가 가죽을 꺼내어 시빌을 위한 외투를 만들어 주었다. 커다랗고 서툰 솜씨로 만들어진 그 옷은 그래도 보온만은 확실했다. 시빌은 레이븐이 만들어 준 외투를 입고 산속을 쏘다녔다. 길을 잃을 때도 있었으나 레이븐의 이름을 외치면 언제나 까마귀 한 마리가 길을 알려주었다. 시빌은 마음 놓고 파르티잔의 곳곳을 헤매었다.

산맥은 장대했다. 가을의 마지막 수확을 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동물들 사이에서 시빌은 어린아이마냥 뛰놀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는 것을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 숲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덤볐다. 거대한 나무가 휘청거리고, 몇몇 짐승들이 봉변을 당했지만 심각한 사고는 일으키지 않았다. 짐승길 뿐이었던 숲 속엔 인간의 길이 생겨났다. 손도끼를 들고 가지를 하나하나 쳐내지 않아도, 시빌이 빠르게 달려 나가기만 하면 금세 길이 생겼다. 갑작스러운 난봉꾼의 등장에 숲은 소란스러워졌다.

숲의 항의가 거세었기 때문에 레이븐은 없는 일을 만들다시피 하여 시빌에게 일을 시켰다. 그 혼자서는 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들이 무서운 속도로 완료되었고 레이븐은 다음 일을 찾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지만 과수들도 종류별로 다 거두고, 붉은 낙엽들이 떨어져 마른 가지들을 드러내자 레이븐은 더 이상 시킬 일이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우울하게 말하자마자 시빌은 기쁘게 산속으로 튀어나갔다. 그렇게 자신과 있는 것이 싫은가 싶어 레이븐은 우울하게 약을 고았고, 추위에 벌게져서 들어온 시빌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에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빌의 그러한 외출도 겨울이 되자 멈추었다. 너무 추웠던 것이다.

가을에 거두었던 밤들을 화로에 굽자 시빌은 산장에 처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산속의 기온은 평지보다 낮아서, 약간의 바람에도 살이 에였다. 레이븐은 집 안에 틀어박힌 시빌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훔쳐보며 따뜻하게 불을 때었다. 가을에 시빌이 잔뜩 해놓은 장작 덕에 연료는 모자라지 않았다.

집에 틀어박힌 지 삼 일이 지나자 시빌은 레이븐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레이븐은 자신이 아는 옛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지만 시빌은 좋은 청중이었고, 이야기를 거듭하는 사이 레이븐은 훌륭한 이야기꾼이 되었다.

1월이 되자 추위에 익숙해진 시빌은 다시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인간과 짐승 모두가 여유로운 가을과는 달리 겨울의 숲엔 굶주린 짐승들이 돌아다녔다. 레이븐은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시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레비쥬에게 위협을 가할 만한 짐승은 없었으니 되려 짐승들의 안위를 걱정해야만 했다.

시빌은 높은 나무에 올라 눈 내린 산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숲은 검고 하얗게 빛나는 흑백의 그림 같았다. 낮은 곳일수록 산은 메마른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높을 곳일수록 뾰족한 잎이나마 무성하게 나 있었다. 시빌은 산 중턱에 서 있는 거대한 떡갈나무의 굵은 가지에 반쯤 드러누웠다. 그 옆에선 까마귀가 깍깍거리며 겨우살이의 열매를 쪼아 먹었다.

공기가 매워서 숨을 깊게 들이쉴 수가 없었다. 밖에서 노는 건 그만두고 집에 들어가는 쪽이 그를 따라다니는 까마귀에게도 좋을 터인데, 도저히 발걸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산장 안에 있는 것은 답답하고 또 지루했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점점 커졌다. 그것은 집 밖의 하얀 눈보다는 화로의 뜨거운 불을 더 닮아 있었고 무언가를 태울 것 같아서 두려웠다.

레이븐은 화로에 불을 그냥 피워두는 법이 없었다. 음식을 하든가 약을 만들기 위한 단지를 올려놓아서 언제나 메케한 냄새가 났다. 올려놓을 것이 없을 땐 물 주전자라도 꼭 올려놓았다. 가을과 초겨울 내내 약을 만들던 레이븐은 근래 들어서야 여유가 나는지 뜨개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손이 춥다. 나올 때 보니 장갑을 뜨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다 완성됐을까? 벌떡 일어나 나무에서 뛰어 내리자 시빌의 움직임을 눈치챈 까마귀도 따라서 커다랗고 검은 날개를 폈다.

시빌은 주변도 살피지 않고 긴장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에게 숲을 다닐 때 주의하라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이븐이 그에게 한 충고라곤 생명은 소중하니 함부로 해쳐선 안 된다는, 숲을 염려한 말 한마디뿐이었다.

시빌은 갑작스레 충격을 받고 한참을 나뒹굴었다. 피가 배어 나오고 하얀 눈이 점점이 붉게 물들었다. 시빌의 배를 들이받은 멧돼지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는 듯하더니 다시 머리로 받아왔다. 시빌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멧돼지의 코를 잡았다. 강한 힘에 뒤로 떠밀려 나무 둥치에 등이 닿자 시빌은 바로 자세를 잡아 멧돼지를 후려쳤다. 놀랄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 허공을 가르는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시빌이 누워있던 바로 그 나무에 부딪친 멧돼지는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시빌은 놀라 헐떡거리며 그를 공격한 짐승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부러졌는지 제대로 서지 못하는 짐승의 모습에서 이상한 쾌감이 끓어올랐다. 자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빌은 짐승을 향해 걸어갔다.

멧돼지의 눈엔 험악하고 흉포한 기운이 가득했다. 일어서지 못하는 자신의 몸에 신경질 내며 버둥거리는 짐승의 모습을 시빌은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잠시나마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적이 그의 발아래 엎어져 있다는 사실에 기묘한 희열이 흘렀다. 뱃가죽이 뜨뜻하니 당겨오는 기분이었다.

시빌은 잠시 주저한 뒤, 고개를 돌려 산장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날아올랐던 까마귀가 다시 나무에 앉아 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빌은 그 시선을 도전적으로 마주 보며 멧돼지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짐승의 숨을 끊는 손길은 단호했고, 감히 명장의 손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매섭고 무거웠다.

시빌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목을 졸랐다고 생각했는데 손가락이 가죽을 뚫고 들어가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났다.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자 새하얀 설원에 번지는 핏자국이 무섭도록 선명했다. 시빌은 창백해진 얼굴로 죽은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흉흉하던 눈의 동공이 열려 겨울의 하늘을 담고 있었다.

“……, 아.”

-까악!

생명은 소중하니 함부로 해쳐선 안 된다고 했다.

시빌은 겁먹어 자신의 손과 죽은 멧돼지와 눈에 덮인 숲을 바라보았다.

시빌은 하얀 눈에 손을 씻었다. 손이 차가워져 새파랗게 될 때까지 눈에 비비자 어느덧 날아온 까마귀가 그의 팔과 손에 앉아 퍼득거렸다. 돌아가자고 부리로 소매를 물고 잡아당기는 까마귀의 행동에 시빌은 말없이 유령처럼 일어섰다.

산장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평소라면 삼십 분 만에도 왕복하는 거리였지만 도저히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았다. 마당에 들어서자 무언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시빌의 모습에 지친 까마귀가 문으로 날아가 큰 소리로 울었다. 문은 금세 열렸다.

“시빌?”

문을 열고 마중 나온 레이븐은 피투성이로 돌아온 시빌의 모습에 기겁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빌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야단맞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문밖에 서 있었다.

“하지만 멧돼지가 먼저 덤벼서. 그래서…….”

“멧돼지라니.”

“나무에서 뛰어내렸는데 멧돼지가 공격해서. 그냥 기절만 시키려고 했는데 피가…….”

시빌은 말없이 선 레이븐의 모습에 바닥으로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따뜻하고 어두운 빛의 두 손이었다. 레이븐은 시빌의 어깨를 잡아 집 안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화로 곁으로 이끌려 시빌은 언 몸을 녹였다. 레이븐은 말없이 피 묻은 외투를 받아들고 따뜻하게 끓인 꿀차를 시빌의 손에 쥐여주었다.

숨을 돌리고 난 뒤 레이븐은 시빌과 함께 멧돼지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살쾡이 한 마리가 부드러운 내장을 파먹고 있었다. 레이븐은 살쾡이가 배부르게 먹기를 기다려 남은 시체를 산장으로 옮겼다.

레이븐은 시빌에게 가죽 벗기는 법과 고기 보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짐승을 잡는 것은 나쁘지 않고, 또한 필요해서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도 말해 주었다. 시빌은 자신의 가슴 속에 일어났던 쾌감을 고백했다. 레이븐은 그 또한 정상이라고 말해 주었다.

“사냥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렵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니까 많은 이들이 즐거움을 느끼지. 나쁜 게 아냐.”

“레이븐도? 당신도 사냥에 즐거움을 느끼나?”

“……아니. 나는 줍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직접 잡는 일은 드물어.”

시빌은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레이븐은 위험의 징조를 느꼈다. 까마귀의 보고에는 가슴이 섬뜩해지는 전조가 묻어 있었다. 레비쥬는 레비쥬였다. 자신의 힘이 인간으로선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정체도 깨닫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 해도 레비쥬라는 것은 원래 잔혹하며 폭력적인 존재들이고 피와 파괴를 즐기는데 거리낌을 갖지 않는다.

레이븐은 두려웠다.

* * *

그 날 이후 시빌은 종종 사냥을 했다. 결코 과하게 잡아오는 일은 없었고 산장의 식단은 풍족해졌다. 레이븐은 요리가 되길 기다리며 뚫어져라 화로를 쳐다보는 시빌의 모습에 내심 혀를 찼다. 고기를 썰 때부터 뚫어져라 레이븐의 손만을 쳐다보는 시빌의 눈동자에선 한 줄기의 잡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애를 하나 키우는 기분이었다. 옷을 해 입히고 나면 밖에 나가서 더러워져 돌아오고 밥이나 간식에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쳤다. 어쩌다 힘쓰는 일을 시빌에게 시키면 노예 운운하며 팔자타령을 했지만 레이븐은 이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밥을 하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입을 옷을 깁고 수선하는 것도 모두 레이븐의 일이었다. 그렇게 레이븐이 일할 때 시빌이 하는 일이라곤 숲을 꼭대기부터 계곡까지 샅샅이 뒤집어엎는 일뿐이었다.

봄이 되고 잠들었던 생물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시빌은 나가는 것을 잠시 멈추고 앞마당의 밭을 갈았다. 레이븐은 깊게 갈려 뒤집어진 밭고랑을 감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어깨를 우쭐거리며 시빌은 뒷마당까지 갈아엎었다. 참으로 알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레이븐은 일부러 감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의기양양해진 시빌은 화전이라도 일굴 기세로 집 밖의 관목들을 쳐다보았다. 레이븐은 말렸다.

삼 일간의 밭 갈기가 모두 끝나고, 지친 몸으로 식사를 준비하며 레이븐은 깊은 만족을 느꼈다. 이제 산중의 생활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오가는 말이 많진 않았지만 서로를 향한 배려가 있고 외출한 뒤 돌아오면 인기척이 집에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레이븐은 식사하는 시빌을 기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실이 어른어른 촛불에 반짝이고 푸른 눈동자는 물기에 젖어 촉촉하게 깜빡거렸다. 레이븐은 작업실에 놔둔 그의 작은 보물 상자를 떠올렸다. 가치가 높지 않은 보석이며 돌멩이, 유리 조각들이 들어있는 그 상자를 다시 열어보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압도적인 빛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예전의 보물들은 잡동사니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레이븐은 시빌의 머리카락이며 상기된 뺨을 만지고 싶어 하는 자신의 손을 꾹 잡아 눌렀다. 움직이는 그를 보고 있으면, 진흙 속에서 그를 꺼냈던 때가 계속해서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참. 봄에는 사냥하면 안 돼. 짐승이 덤벼도 웬만하면 죽이지 말아줘.”

시빌이 눈으로 그 이유를 물어와 레이븐은 말을 이었다.

“봄에는 새끼를 낳으니까 함부로 짐승을 잡으면 어미를 잃은 새끼도 죽게 되거든. 그리고 건조하니까 불을 피울 땐 옮겨붙지 않도록 특히 주의해주고.”

“봄은 여러모로 귀찮네. 날씨가 따뜻해서 좋아했더니만.”

“밭도 훌륭하게 갈아줬으니 육포를 싸줄게. 밖에서 먹어.”

투덜대던 시빌은 레이븐이 건네준 육포 한 덩이에 화색을 띠었다. 애가 아니라 개인지도 모른다. 아주 아주 커다란 금빛의 개. 레이븐은 육포를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들뜬 표정을 짓는 시빌을 기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시빌은 친구가 없는 어린아이처럼 자연을 살피며 하루를 모두 보냈다. 봄비가 내리면 나무 아래에 숨고, 파릇한 새싹에 코를 묻었다. 겨우 내내 어디 숨어 있었나 궁금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생명이 잎에, 가지에, 아직 썩지 않은 낙엽의 뒤쪽에 가득 붙어 있었다. 시빌은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짐승들의 모습을 한 눈으로 흘겨보며 육포를 꺼내 씹었다. 어느새 따라온 까마귀가 옆에 앉아 재롱을 떨어댔다. 시빌은 무시했다. 까마귀가 살이 너무 쪘다고 레이븐에게 주의를 받은 것이다.

“깍깍깍깍까까까까깍---!!!”

“으아. 시끄러! 그만해!”

“까아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성량에 시빌의 머리가 찌잉 울렸다. 시빌은 졌다는 포즈로 육포 하나를 까마귀의 부리에 물려주었다. 온 산을 깨울 듯 뒤집어져 외쳐대던 까마귀의 소리가 단번에 조용해졌다.

“레이븐에게 이르면 안 된다?”

“깍~!”

까마귀는 푸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포를 씹어 배를 채운 시빌은 벌레들을 괴롭히고, 꽃을 따 꿀을 빨고, 새알을 서리하며 봄의 숲을 뛰어놀았다. 그러던 한순간 멍하니 멈춰 섰다. 그러자 초봄의 숲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 혼자가 되었다. 겨울에서 깨어난 숲의 모든 것이 바빠 보였다. 나무도, 벌레도, 새나 짐승들도 모두 바삐 움직이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시빌은 조금 시무룩한 발걸음으로 연녹빛의 숲을 걸었다.

산장으로 돌아가자 나물을 캐어 손질하던 레이븐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을 것까지 쥐여줬으니 해가 질 때까지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일찍…….”

“심심해. 다들 바빠서 정신이 없던걸. 혼자서 멍청이가 된 기분이야.”

부루퉁한 시빌의 표정에 레이븐은 피식 웃었지만 상황은 의외로 심각했다. 시빌은 창가의 침대에 걸터앉더니 차갑게 굳은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이 같던 체향이 불만 어린 맹수의 그것으로 바뀌는 것에 레이븐은 마른 침을 삼켰다. 새장 속의 매가 너른 창공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어, ……시빌?”

“난 이렇게 살다가 죽게 되는 걸까?”

레이븐은 시빌의 말에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그는 너무나 행복했는데, 지금처럼 사는 걸 불만으로 여기고 있는 시빌이 야속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한 번 죽은 자였다. 지금의 삶은 여분의 생이니 레이븐을 위해 온전히 써 주어도 괜찮을 텐데.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충격받았다.

“이렇게 사는 게 싫어?”

시빌은 힐끔 시선을 돌려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음울한 기색을 띤 레이븐의 표정에 가슴 한쪽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모른 척 오기를 부려 말했다.

“당연하잖아. 노예로 사는 걸 누가 좋아하겠어?”

“노, 노예라고는 해도…….”

“그럼 내가 떠나겠다면, 가도록 허락할 거야?”

레이븐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시빌은 비웃듯이 코웃음 치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것 봐. 허락하지 않을 거잖아?”

“그래. 허락하지 않아.”

레이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 되었건 시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누군가와 교류하며 살아가는 삶의 기쁨을 알아버린 이상 이제 와서 홀로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시빌이 없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소름 끼쳤고 절망이 마음속에 드리워졌다.

시빌은 풀썩 거친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웠다. 아직 밖은 밝았고 온갖 새의 지저귐과 벌레의 울음소리가 났다. 바람에 부딪치는 여린 새싹과 나뭇가지의 소리가 파도치듯 울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봄의 기운이 여과 없이 흘러들었다. 시빌은 짜증을 내며 창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모습에 레이븐은 어찌할 줄 몰라 작업실로 소리 없이 도망쳤다.

레이븐을 위로하듯 까마귀가 다가와 부리를 뺨에 비벼댔다. 레이븐은 우울해져 까마귀의 날개 깃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부리에서 육포 냄새가 났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무시해 주었다.

레이븐은 한숨을 쉬며 작업실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시빌이 떠나면 어쩌나 싶은 걱정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떠나겠다고 하면 자신은 분명 그것을 막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는 분명 날 미워하게 될 거야. 아니, 지금도 미워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더 미움받는 건 싫은데.”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자니 작업실의 문이 끼익 열렸다. 흠칫 놀라 쳐다보자 들어선 것은 부루퉁한 표정의 시빌이었다.

“뭐야. 배고파. 밥 줘. 왜 울어?”

레이븐을 달래고 있던 까마귀가 성질을 내며 시빌의 멋진 금발을 잡아 뜯었다.

“윽! 이 자식!!”

레이븐은 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고는 까마귀를 달래어 자신의 어깨 위에 앉혔다. 시빌이 분한 표정으로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너 이 자식! 애교 부릴 땐 언제고!”

“육포. 줬지?”

“……. 이르다니 이 자식.”

“부리에서 양념 냄새 나. 다시는 싸주나 봐라.”

“윽.”

레이븐은 휑하게 바람을 일으키며 부엌으로 향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녁을 뚝딱 차리며 눈치 보는 시빌을 훔쳐보았다. 심각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자꾸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레이븐은 고통스레 생동하는 봄의 숲을 바라보았다.

봄은 왔던 것이 거짓인 듯 빠르게 지나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되었다. 레이븐은 시빌에게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인간이 없는 곳의 물고기들은 경계하는 법도 없이 미끼를 덥석덥석 물었고 시빌의 광주리는 물고기로 가득해졌다. 레이븐은 그중 몇 마리는 훈제하고 몇 마리는 요리하여 시빌에게 내어주었다.

까마귀는 나날이 살찌고 통통해져 기름기 흐르는 날개를 갖게 되었다.

* * *

숲 깊숙한 곳에 있는 것치고는 매우 커다란 호수였다. 시빌은 호숫가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낚시찌를 힐끔거렸다. 오늘따라 물고기는 잡히지 않고 날씨는 찌는 듯 무더웠다. 시빌은 수영이라도 할까 고민하다가 비어 있는 광주리를 보고 포기했다. 물장구라도 쳤다간 물고기란 물고기는 죄다 도망갈 테고 앞으로 며칠간 이곳에서 낚시하긴 그른 일이 될 터였다.

시빌은 더위에 허덕거리며 상의를 벗고 돌 위에 몸을 누였다. 그늘에서 차갑게 달궈진 바위의 서늘함에 절로 잠이 와 눈을 감았다. 호수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이대로 잠들면 해가 지고 난 뒤 시원할 때쯤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쯤은 고기 안 먹어도 돼. 괜찮아, 괜찮아.’

자신에게 변명하며 시빌은 눈을 감았다. 잠은 득달같이 찾아왔고 가끔 더위에 잠을 설치면서도 시빌은 깨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뒤척거렸다. 눈을 뜬 것은 열기가 그 기세를 잃고 긴 오후를 시작할 때쯤이었다. 하늘은 낮과 밤의 중간쯤에 걸린 색으로 물들어 더위에 지친 자들의 기력을 되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잔잔한 파도 소리가 났다. 시빌은 몸을 완전히 일으키는 대신 한 바퀴 굴러 바위에 엎드린 자세로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짐승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호숫가에 있는 것은 레이븐이었다. 그도 더위를 타는구나. 신기한 마음이 일어 시빌은 조용히 레이븐을 훔쳐보았다.

보기만 해도 더운 녹색 외투를 레이븐은 한여름에도 벗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그의 몸에서 벗겨져 나뭇가지에 걸렸다. 호리호리한 가는 몸이 드러났다. 레이븐은 주저 없이 옷을 벗고는 호수에 뛰어들었다.

어두운 빛이라고만 생각했던 갈색의 건강한 피부가 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두 손에 물을 담아 머리 위에서 흩뿌리는 모습이 경건한 의식처럼 보였다. 실제로 의식일지도 몰랐다. 레이븐은 머리끝까지 호수에 잠겨 한참을 보이지 않더니 곧 튀어 오르듯 수면 위로 뛰쳐나왔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감긴 물방울들이 레이븐의 움직임에 따라 호수 위에 흩뿌려졌다. 숨이 찬 듯 헐떡이는 레이븐의 얼굴은 물의 차가움에 살짝 질려 있었다.

푸른 호수를 가르며 헤엄치는 레이븐의 몸에서 시빌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더위도 잊고, 호수에 드리운 낚싯대도 잊은 채 멍하니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가 싶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시빌은 천천히 낚싯대를 걷어 산장으로 달음질쳤다.

불조차 켜지 않고 어두운 산장 안에 앉아 있으려니 방금 본 광경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시빌은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안 돌아오는 거야!”

시빌은 괜히 신경질 내며 부엌의 의자에 앉았다. 광주리를 놓고 온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차피 훔쳐갈 사람 따위 없으니 내일 가서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시빌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레이븐이 늦으면 늦을수록 불쾌해졌다.

레이븐은 해가 넘어갈 즈음이 돼서야 산장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숲을 둘러본 것인지 시빌로선 정체를 알 수 없는 풀을 손에 들고 있었다.

“대체 왜 이제야 들어와?”

레이븐은 버럭 화를 내는 시빌을 영문을 몰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맹한 시선에 시빌은 울컥 화를 터뜨리며 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음 날부터 시빌은 호숫가에 진을 치고 살았다. 낚시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돌 위에 엎드려 자다가는 레이븐이 모습을 드러내면 뚫어져라 훔쳐보았다. 레이븐은 이틀에 한 번 정도 모습을 드러내더니, 날씨가 더 더워지자 거의 매일 호숫가에 나타났다.

시빌은 나무그늘에 숨어 조용히 레이븐을 훔쳐보다가 수영을 마친 레이븐이 옷을 다시 입을 때쯤 조용히 일어났다. 엄청난 속도로 숲 속을 달려서는 먼저 산장으로 돌아가 레이븐을 기다렸다. 레이븐은 시빌이 자신보다 먼저 돌아와 있는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그 날은 비가 올 듯 어두우면서도 한층 더운 날이었다. 날은 흐렸지만 땀이 줄줄 흘러 짜증이 극에 달했다. 나뭇잎도 늘어져 시들거렸고 짐승들도 움직이지 않고 혀를 빼문 채 엎어져 있었다.

시빌은 그 자신도 더워서 호수에 들어가 한차례 몸을 씻었다. 뜨거운 날씨에 대비되어 호수의 물이 기묘할 정도로 차게 느껴졌다. 시빌은 물 밖으로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하며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대었다. 시빌이 들어간 곳은 호수에서 한 차례 꺾어지는 하류인 데다 수풀이 우거져 있어 레이븐이 수영하는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시빌은 물속에 조용히 잠겨 레이븐을 기다렸다.

레이븐은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나타났다. 날이 더워 땀을 흘리며 천천히 옷을 벗어 던졌다. 준비운동도 없이 호수로 몸을 던지자 커다란 물보라 소리가 났다.

시빌은 물속에서 눈만 밖으로 내놓은 채 부드럽게 움직이는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갈색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뺨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새파란 물을 가르다 말고 몸을 일으키자 반듯한 등줄기를 따라 물이 쏟아져 내렸다. 시빌은 단단해진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물에 잠겨 움직이는 몸을 훔쳐보고 수면을 쓰다듬으며 파도를 일으키는 손가락에 자신을 대입시켰다.

더러운 시선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레이븐은 수영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는 수그러들고 뜨겁던 공기도 식어 쌀쌀해졌다. 레이븐은 추운 듯 팔을 쓰다듬었다. 그 팔에는 어느새 소름이 돋아 있었다.

“크윽!”

시빌은 낮은 소리를 삼키며 토정했다. 희뿌연 액체가 물에 섞여 사라지는 것을 시빌은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기운이 빠지고 멍해져서는 바로 옆의 큰 돌에 몸을 기댔다. 레이븐을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딘가 병이 생겨 이상해진 것만 같았다.

“뭐야, 이게.”

산장에서 깨어나서 노예라는 말을 들은 이래 최고로 기분 나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문제였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꺼먼 사내놈을 대상으로 욕정했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생각되었다. 이 숲 속에 인간이라곤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변명하며 시빌은 자신을 속였다.

언제나 그랬지만, 상대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문득 고개를 들면 레이븐이 자신을 쳐다보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인다든가,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면 조심스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매만진다는 것. 우연을 가장해 레이븐의 얼굴이나 목에 손을 대면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뭔가 부드러운 말을 건네면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이, 정말이지 행복한 미소를 띤다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레이븐. 당신 나 좋아해?”

시빌은 무자비하게 물었고 레이븐의 얼굴은 가엾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렸다.

“날 좋아하잖아? 아니야?”

“왜, 왜, 왜 그런 말을.”

불쌍하게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레이븐을 쳐다보며 시빌은 입맛을 다셨다. 기뻤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코끝을 스치자 어두운 레이븐의 피부가 한 꺼풀 벗겨 낸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시빌은 도망치려는 레이븐의 어깨를 꽉 잡아 붙들었다. 머릿속이 호수에서 수영하던 레이븐의 물에 젖은 피부로 가득 찼고 배 속이 뜨끈해졌다.

“날 좋아하잖아? 왜 도망치려고 하는 거야!”

“노, 놔! 누가 좋아한다는 거야?!”

“노예로서 주인의 욕망에 봉사하는 것도 일이라고.”

“그런 일 하지 않아도 돼!”

레이븐은 필사적으로 외치며 시빌의 손아귀에서 바둥거렸다. 애초에 레비쥬의 손아귀에 잡혀서 도망칠 수 있는 인간 따위 없었기에 시빌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레이븐을 침대 위에 눕혔다. 바둥거리던 레이븐은 위기를 느끼고 시빌의 뺨을 쫙 후려쳤다. 뺨이 시뻘겋게 부푼 시빌이 매서운 눈으로 겁에 질린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뭐야 너. 사람이 기껏.”

“손 떼라고 했어.”

레이븐의 목소리엔 깊은 분노가 어려 있었고 그 험악함에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 손을 뗐다. 레이븐은 몸을 덜덜 떨며 침대에서 일어나 시빌의 옆에서 멀어졌다. 레이븐은 시뻘건 얼굴로 뒷걸음질 치더니 버럭 외치며 산장을 뛰쳐나갔다.

“꼴도 보기 싫어!”

울음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에 시빌은 벌떡 일어나 도망치는 레이븐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이미 산장 밖으로 나가 숲에 뛰어든 레이븐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망치는 모습이 바로 앞에 보이는데도, 온갖 짐승이며 벌레가 달려들어 발을 묶고 눈을 찔렀다. 결국 나뭇가지에 발이 엉켜 넘어지며 시빌은 이를 갈았다. 장난이 아니었다.

“대체, 좋아한다면서 왜 도망치는 거야!”

레이븐은 거의 삼 일 넘게 그 지긋지긋한 녹색 옷의 실밥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빌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부엌에 남은 음식들을 씹어 먹었다. 산장 밖으로 세 발자국만 나서도 숲이 음산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숲지기는 숲지기였다. 식물의 살의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시빌은 산장 안에서 밖을 노려보았다. 레이븐이 돌아오면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닷새째 되는 날, 먼지 쌓인 녹색 외투를 뒤집어쓴 레이븐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있었어?”

“……응.”

“밥은…….”

“부엌에 있는 걸로 때웠어.”

“그래.”

레이븐은 어색한 듯 집 안으로 들어섰고 그제야 시빌은 레이븐의 뒤에 서 있던 남자를 알아챘다. 풍만한 몸집을 한 남자 하나가 땀을 닦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산속임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그 남자는 흥미로운 눈으로 시빌을 훑어보았다.

“호오. 이건 이건 매우 극상의.”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날카로운 레이븐의 응대에 남자가 얼른 시빌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빠른 걸음으로 레이븐의 뒤를 쫓았다. 시빌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바로 작업실을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시빌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처음 보는 그 남자는 산장의 구조를 잘 아는 듯 지체 없이 움직였다.

시빌은 작업실의 문이 잠기는 소리에 울컥한 심기를 숨기지 않으며 문을 걷어찼다. 레이븐 이외의 인간을 본 건 처음이었다. 평소 다른 인간을 만나면 물어볼 것도, 할 얘기도 많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도 않고 불쾌하기만 했다. 아무런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고, 저 살찐 목을 비틀어 돌려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저 잠긴 문을 열고 레이븐을 끌어낸 뒤 도망친 것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시빌은 팔짱을 낀 채 작업실 문 앞을 지키고 섰다. 목소리가 드문드문 흘러나왔지만 대개가 남자의 목소리였고 레이븐의 목소리는 거의 짧은 대답뿐이었다. 도자기 부딪치는 소리와 약사발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시빌은 가중되는 불쾌감 속에 꿈쩍도 않고 나무문을 노려보았다.

두어 시간은 족히 흐른 후에야 작업실에서 나오던 두 사람은 문 앞에 선 시빌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레이븐보다 먼저 나오던 남자는 시빌의 모습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븐을 돌아보았다.

“충견이군요? 어디서 이런 걸 구하셨는지.”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에서 다른 사람을 본 건 처음이어서 말이죠. 저런 얼굴이 취향이셨습니까? 우리 가게에 오시면 저 정도 수준의 아이를 얼마든지 공급해드릴 수 있는데.”

레이븐의 눈초리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그는 거친 손길로 그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었다.

“돌아가십시오.”

“이거 참. 오늘따라 더 쌀쌀맞으시군요.”

남자는 약병이 가득 든 나무상자를 조심스레 천으로 감싸 가방에 넣었다. 레이븐이 가을과 겨우내 만들던 약들이었다. 온갖 종류의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시빌은 자신을 놓고 한 남자의 농담에 완전히 불쾌해져 있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산장을 나서는 남자의 동작에선 과장스러운 도시의 분내가 났고, 청량한 숲의 기억만을 지닌 시빌은 지독한 기시감 속에 속이 울렁거렸다.

레이븐은 산장의 문밖으로 나가 길을 따라 사라지는 남자의 뒤를 전송했다. 언제나 시빌에게 붙어 다니던 까마귀가 남자의 앞쪽에서 길을 안내했다. 무거운 짐을 들어 빠르게 걸을 수 없는 남자가 까마귀를 달래고 어르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인기척이 사라지기 무섭게 시빌은 레이븐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시빌의 얼굴은 분노에 차 있었고 레이븐은 잔뜩 굳은 얼굴로 그런 시빌의 시선을 피했다. 당분간은 산장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십 년 넘게 거래해온 손님이 자신을 찾는 것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살찐 남자는 사창굴의 포주였다. 몸을 파는 이들이 몰려있는 가게는 병이나 흉터에 관한 약을 많이 소비하는 편이었고 거기에 더하여 마약의 소비도 컸다. 숲에선 여러 약초와 환각 성분이 있는 식물이 자랐고 레이븐은 그 모두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남자는 돈 대신 의복이나 식량 같은 것들을 대가로 지불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 약을 파는 것으로 숲 속에서의 생활을 인간적으로 유지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 남자는 누구야?”

가시가 돋아 있는 목소리에 레이븐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이 거래하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알려주면 경멸받을 것만 같았다. 레이븐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한껏 움츠린 채 시빌의 눈치를 봤다. 시빌은 대답을 듣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질문을 선회했다.

“저 사람 때문에 돌아온 거야?”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시빌은 눈동자 안쪽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의도치 않게 산장으로 돌아온 레이븐의 모습은 마치 길들이기 직전의 작은 새 같아서 조금만 건드려도 날아갈 것 같았다. 시빌은 조심조심, 날카로워지려는 자신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춰 내었다.

“다시는 그렇게 가지마. 외로웠다고.”

레이븐의 검은 눈이 힐끔 자신을 향하는 것에 맞춰 시빌은 애처로움을 연기했다. 눈을 어지럽히는 금발 사이로 우울한 듯 가라앉은 푸른 눈이 자신을 쳐다보자 레이븐은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 너무 당황해서.”

“나도 미안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테니까.”

시빌의 대답에 레이븐은 가슴 속이 날카로운 것으로 할퀴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자 우울하게 가라앉은 감정만이 느껴질 뿐 아쉬움이나 고통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싫다고 해서 안 할 정도의 일이라면 어차피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시빌의 말처럼, 노예로서 주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떠본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단순히 놀리기 위해서 건드려 본 것인지도 몰랐다.

레이븐은 나름대로 납득하며 우울함 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빌을 사랑하고 있었다. 건드리는 것이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싫지 않았다. 거부한 건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응.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줘.”

“그럴게.”

시빌은 속으로 이를 갈며 끄덕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손님이었어? 얼핏 가게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겨울에 만들던 약은 모두 저 사람을 위한 거였어?”

긴장이 풀린 레이븐은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의 가게에서 사용하는 약은 내가 다 만들거든. 감기약부터 상처에 쓰는 것까지.”

“그렇구나. 그 사람은 어쩌다 알게 됐는데?”

“길을 잃고 헤매는 걸 도와주다가.”

“가까운 곳에 도시가 있어?”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레이븐은 가슴 속이 섬뜩해져 시빌을 쳐다보았다. 차갑게 웃는 눈동자가 굳어 있었다.

“…아니. 여행하던 길이었다나 봐.”

레이븐의 대답에 시빌은 눈을 가느다랗게 접으며 웃었다.

“그런데 매해 이곳까지 와서 약을 사 간다고?”

“믿을 만한 약제사는 의외로 흔치 않거든.”

남자가 찾아오는 이유가 마약 때문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레이븐은 뒷말을 얼버무리며 시빌의 집요한 질문들을 뒤로 넘겼다. 피하려는 기색을 알아챈 시빌은 다시금 명랑하게 웃으며 레이븐에게 밥을 졸랐다.

산장을 떠난 동안 커다란 나무 그늘이며 작은 움막 등에서 잠을 청했던 레이븐은 다시금 느끼게 된 인기척에 안도하며 요리를 했다. 산장의 창고엔 여름의 과일이며 채소들이 잔뜩 있었고 훈제한 고기들도 많이 있었다. 풍성한 식탁을 차리면서, 레이븐은 시빌 앞에 앉아 행복 속에 빠져들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들 어떠리.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이었다. 오랜 외출 후 돌아온 집에 사람의 온기가 있고, 쓸쓸했다며 화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꿈 같았다.

레이븐은 엷은 미소를 띤 채 식사를 했다. 행복함에 도취되어, 시빌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집 나간 마누라가 돌아왔을 때, 남편은 따뜻한 밥을 먹으며 아내가 돌아온 것을 실감하는 법이다. 시빌은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음식을 씹어 삼키며 레이븐의 모습 또한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겨우내 사냥을 하면서 시빌이 터득한 것이 있다면, 도망칠 곳을 놔두고 사냥감을 몰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녹색 외투 사이로 드러난 가는 목덜미의 모습에 시빌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날카롭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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