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 (2)
“멈춰.”
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가던 마차가 멈추자 시빌이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성문이 멀찍이 보이는 길의 한복판이었다. 농번기라지만 오가는 이가 이상할 정도로 드물어서 길에 있는 건 시빌과 일행이 탄 마차뿐이었다.
시빌은 터덜터덜 걸어 성문께로 다가갔다. 멀리서 보기에도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성 주변에 잔뜩 뿌려져 있었다. 시빌은 고개를 숙여 하얀 가루를 손끝에 묻혀 올렸다.
“소금?”
해안 지방도 아니고 내륙에 세워진 성에 소금이 뿌려져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소금은 필수품이었지만 값비싼 필수품이서 귀중하게 거래되었다. 땅바닥에 뿌려버릴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맷을 처치하고 나서는 완전히 충직해진 왼쪽 상처가 시빌의 옆으로 다가왔다.
“성 주변에 소금이 뿌려져 있군.”
“그게 소금입니까? 설마.”
“맞아, 소금.”
시빌은 손끝에 묻은 흰 결정을 혀로 핥았다. 짠맛이 났다.
“해자에도 부어놨는데요. 설마 저게 다 소금이라고요?”
왼쪽 상처의 말에 시빌이 놀라 해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대로 하얀 소금들이 해자의 바닥 가득 깔려 있었다. 대체 어떤 멍청한 놈이 해자에 소금을 붓는단 말인가?
그때 성문에서 한때의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인간들이 도시의 성문 앞을 막아선 채 그들을 향해 험하고,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을 내던졌다.
“이건 또 뭐야?”
성문 앞을 막고 있는 남자들의 손아귀엔 농기구가 들려 있었다. 낫이나 갈퀴 같은 것들은, 적어도 농사를 위해 그들의 손에 들려있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을 정도로 살기를 띠고 있었다.
시빌은 짜증이 났다.
시빌이 소금으로 그어진 선을 넘어 도시로 향할수록 사람들의 턱이 단단하게 악물렸다. 멀리서 보고 있던 아네모네가 마차에서 슬쩍 내려 무기를 거머쥐었다.
도시로 다가가던 시빌과 왼쪽 상처가 멈춰 서자 싸늘한 침묵과 긴장이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 흘렀다.
“무슨 일입니까?”
“죽은 자들을 놔둬!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천벌 받을 자식! 네 어미 애비를 죽어 어떻게 보려고! 네가 땅에 묻힐 수 있을 것 같냐!!”
“네 무덤에선 뱀이 집을 지을 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처음 만나는 이에겐 미소를 고수하며 좋은 사람 행세를 하던 시빌도 이번에는 어지간히 짜증 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실례지만 사람을 착각하신 듯한데.”
시빌이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말로 잘 풀어 설명하려던 때였다. 마을 쪽에서 말을 탄 기사 두 명이 사람들 사이로 달려 나왔다.
“비키시오! 위험하니 도시로 돌아가시오!”
“기사님!”
기사는 험악한 태도로 도시 사람들을 성문 안쪽으로 돌려보냈다. 형형한 눈빛이 시빌과 왼쪽 상처, 그리고 멀찍이 멈춰 있는 마차를 향했다.
“그대들의 신병을 구속하겠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하아?”
시빌은 고개를 삐뚜로 하며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살다 살다 이런 개소리는 간만이었다. 허리춤의 장검을 의식하며 기사들에게 다가가자 바로 검을 뽑으며 시빌을 겨누었다.
“멈춰라!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베겠다.”
“베 봐.”
시빌은 달렸고, 순간 기사의 몸이 구겨지듯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썅놈의 동부. 인간 새끼들 죄다 싸가지가 없어 돌겠네.”
기사의 발목을 잡아 바닥으로 내던진 시빌은 말을 뒤로 물리는 두 번째 기사에게 몸을 날렸다.
“왜 성에 들어갈 때마다 이 지랄이야?!!”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바닥에 떨어진 첫 번째 기사가 허우적거리며 갑주 걸친 몸을 일으켰다. 시빌은 검을 휘두르는 두 번째 기사의 팔목을 잡아 일어선 기사를 향해 던졌다. 강철의 갑옷들이 시끄럽게 부딪치는 소리가 윙윙 울렸다.
도시 안쪽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입에서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 마법사다!!!”
레비쥬도 아니고 마법사라니? 남아 있는 말도 집어 던져줄 생각을 하고 있던 시빌은 떨떠름함에 손을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은 시빌 뒤를 향해 있었다. 공포와 경악에 찬 시선은 시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예 보지도 못한 것처럼 마차 쪽을 향해 있었다. 대체 뭔가 하고 고개를 돌린 시빌은 시꺼먼 꼬라지를 한 채 녹색 외투를 휘날리는 레이븐의 모습을 목도하고 입을 딱 다물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고함에 당황한 레이븐이 주춤거리며 시빌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면면이 흉흉했다. 기르는 개도 더러워지면 씻길 터인데, 저걸 그냥 놔두면 안 되겠구나 하는 반성과 깨달음이 시빌의 마음을 스쳤다.
“누가 밖으로 나오래. 이 자식.”
“덥고 시끄럽고 저 빼곤 다들 나와 계시고…….”
“시끄러웟!”
드물게 흉폭해진 시빌은 차가운 눈으로 넘어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시선이 팔려 시빌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직접 봉변당한 기사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우린 지나가던 상인들인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신지?”
“요새 지나가는 상인은 갑주 걸친 기사를 맨손으로 집어 던지냐!”
“하하하. 뭐 그럴 수도 있는 걸 가지고.”
차가운 눈으로 입만 웃으며 말하는 시빌의 모습에 기사들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시빌은 아네모네가 까마귀를 마차 속으로 우겨 놓는 것을 힐끔 쳐다본 뒤 기사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두 낯짝이 시퍼렇게 질렸다. 고양이 앞의 쥐 꼴이었다.
* * *
“그래서 오가는 이들의 신병을 모두 구속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잘 알아보고 그러셨어야지요.”
시빌은 빙글거리며 성의 젊은 영주를 바라보았다. 밤새 시체들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잠들었던 알도렌은 갑작스러운 봉변에 눈 밑이 시꺼멨다.
“숙부의 군대가 길을 모두 막고 있었기에, 당연히 당신들도 숙부가 보낸 자들인 줄 안 겁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니 이상하군요.”
“글쎄요. 그렇게 흉악하게 구는 마법사라면 제 주인이라고 잘 챙겨 받들 것 같진 않군요.”
시빌은 영주가 떫은 표정으로 대접한 차를 한입에 훌쩍 마셨다.
기사들을 제압한 시빌은 뒤늦게 뛰어나온 영주와 몇 가지 오해를 해명한 뒤 그의 홀에 초대되었다. 레이븐은 마차에 들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십 분도 되지 않아 퍼져버린 소문 덕에 꽤나 흉흉한 기세가 마차를 감쌌다. 레이븐은 덜덜 떨며 몸을 웅크렸고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조금 귀찮은 눈치로 사람들의 험악한 시선을 마주 노려보았다.
초대받은 영주의 성에서 시빌과 일행들은 유령과 시체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들었고, 시빌은 마법사란 단어에 급속히 관심을 보이며 집중했다. 시체들을 조종해서 성을 공격한다니, 군량미도 안 드는 참으로 신선한 방법이었다. 그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잠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환상적이었다.
“물론, 소금에는 고통스러워하며 도망가지만 말입니다. 현재로썬 제발 비만 오지 말아 달라고 비는 실정이지요.”
순식간에 김이 샜다. 소금이라니? 시빌은 심드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금으로 그은 선을 넘어오지 못한다면, 무덤 위에 소금을 뿌리면 될 것 아닙니까?”
“해봤습니다. 밤이 되자 시체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더군요. 최악의 밤이었습니다. 심장 마비로 죽은 사람도 있는데, 죽자마자 일어서는 바람에 줄초상 날 뻔했지요.”
“심장 마비로?”
“아니요. 시체가 산 자를 물어뜯었거든요. 당장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사람들이 가서 소금을 쓸어냈습니다.”
그 말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레이븐이 슬쩍 눈앞의 과자를 집어 들어 끼적거렸다. 시빌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찻잔을 슬슬 문질렀다. 귀찮음과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저울질하던 그는 영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디 좋은 해결책 찾으시길 빕니다. 밤에 그런 것들이 몰려온다면 저희는 지금 당장 떠나야겠군요.”
“당신들을 보내줄 순 없습니다.”
알도렌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이 사태를 일으킨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이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기시오.”
알도렌이 가리키고 있는 자는 과자를 깔짝거리며 갉아먹던 레이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레이븐은 당황하며 과자를 툭 떨어뜨렸다.
“어, 좀비라면 남부 쪽 마법사인데 왜 절?”
레이븐의 뜬금없는 말에 시빌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도대체가 아는 게 있으면 제깍제깍 말하지 않고 이놈은!
“남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남쪽은 죽음과 관련 있는 마법과 비술이 많이 발달했으니까요. 어, 그렇다고들 새들이 말해 주었습니다.”
“새?”
레이븐이 새까만 눈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 눈빛이란, 잔잔한 물처럼 고요하고 깊은 동굴 속의 웅덩이만큼 검으며, 가장 거대한 소용돌이의 속삭임을 갖고 있는 듯했다. 시빌은 말을 잃었다. 그러나 레이븐이 커다랗게 떴던 눈을 가로 돌리며 수그리자 모든 것이 환상인 듯 흐려져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남쪽을 지나 파르티잔에 들른 철새들의 얘기입니다.”
“해결 방법도 얘기해 주던가?”
“아뇨. 하지만 대개 마법이란 마법사가 죽으면 끝나는 법입니다.”
레이븐의 대답에 시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를 불러내는 마법사라니. 레비쥬가 없으니 남아도는 것들이 별짓을 다 하는군.”
시빌은 콧방귀를 뀌었다.
동부에는 레비쥬의 수가 적었다. 그 이유는 파르티잔 때문이었다. 파르티잔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각성한 레비쥬들이 영지를 갖기도 전 유물을 찾는답시고 파르티잔에 가는 것이다.
불꽃으로 달려드는 부나방과 같았다. 그곳에서 레비쥬는 다른 레비쥬와 부딪쳐 싸우고, 목숨을 잃었다. 땅과 인간들은 대를 이어 권리를 승계한 인간들이 다스렸고 그 덕에 매우 평화로웠다. 공포로 다스려지는 다른 곳과는 달리 동부는 법으로 다스려져 정의가 있는 곳으로 불렸다.
정의라.
레비쥬가 없는 대신 마법사가 인간과 손을 잡고 난장을 치는 곳이 또한 동부가 아니던가. 시빌은 희게 웃으며 일어섰다.
“이 일을 저희가 처리해 드리면, 물론 보답을 하시겠지요?”
알도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어 주길 바라오. 당신의 용력이 높고 실력이 있어 기사 한둘 제압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알겠소만 상대는 마법사요. 그대가 내 숙부와 관련된 자가 아니라면 조용히 있다가 떠나도록 하시오. 무엇보다.”
알도렌은 헛기침을 하며 시빌의 일행들을 둘러 바라보았다.
“저런 자가 성안을 돌아다니면 큰일이 벌어질 테니. 제공한 방에서 나오지 않길 권고하오.”
시빌은 싸늘한 시선으로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하긴 나라도 너 같은 걸 보면 그냥 보내진 않겠다. 그 옷 좀 바꿔 입으면 안 되겠어?”
“이 옷을 여기까지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레이븐은 녹색 외투에 이리저리 꿰어있는 구슬들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맨질맨질 얼마나 열심히 닦았는지 싸구려 구슬들이 아주 휘황찬란했다. 아네모네가 진저리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일단 ‘저것’만 방에 놔두고 움직이지요. 그건 괜찮겠습니까?”
알도렌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만사가 다 귀찮다는 심정이 묻어나오는 태도였고, 뒤에 나올 말을 짐작게 할 만한 태도이기도 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당신들을 구금하는 건 불가능할 듯하니 말이오. 대신 저자는 우리가 감시하겠소.”
시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영주의 요구에 동의했다.
* * *
차가운 도시의 성벽 안에서 산야를 바라보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인간이 기르지 않는 동물은 특정한 때가 아니면 결코 그들의 터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겨울 소금을 핥기 위해 농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사슴을 사냥꾼이 쏘지 않는 것처럼, 시체를 먹기 위해 날아온 까마귀를 인간은 쏘지 않는다.
멀리서 썩어가는 고기 냄새가 났다. 냄새로 보아서는 사람이다. 그 어떤 짐승보다 더한 비린내가 났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는 눈치가 빨랐으므로, 도시에 들어서기 전부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레비쥬와 맞먹는 공포가 사방의 언덕을 기울여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그는 바다를 본 적이 없었으나 파도가 이처럼 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태양의 높이에 따라 밀려들었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이 공포는 분명 바다의 조류와 같으리라. 공포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가짜죽음이었다. 감히 죽음의 이름을 사칭하여 망령된 횡포를 부리는 사특한 것이 저-기, 높다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레이븐은 작은 창을 통해 구름 낀 그의 고향을 바라보았다. 사흘을 여행하여 움직였지만 장대한 산맥은 아직 그 그림자를 하늘에 비추고 있었다. 저 산맥이 보이지 않게 되는 때가 바로, 동부를 벗어나는 때이리라.
반짝인다기엔 너무나도 무섭고 거세어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태양이 산맥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먼 곳의 바다가 지금 밤과 어둠을 뱉어내면 그것은 깨어 있는 자들을 향해 빠르게 달려든다. 레이븐은 잠시 주저하며 자신의 부러진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주문에는 손짓이 따랐으므로 이처럼 불편할 때엔 보통 나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아-훔. 라투 바이야~“
레이븐은 주문을 외우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언덕 위의 마법사가 자신의 목소리에 기겁한 것이 보였다. 뼈를 덮은 가죽조차 없어 죽음의 신인 양 행세하던 그자는 진짜 죽음을 따라다니는 까마귀의 목소리에 무너지는 허리를 간신히 곧추세웠다. 그러나 까마귀는 추격을 멈췄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 숙였다.
“그런가. 저자도 마법사인가.”
레이븐은 나즉이 말하며 창문을 닫았다.
이제 밀려드는 것은 밤이 아니라 우울함이다. 손안에 한 번 쥐었던 반짝임이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과 고통이다. 태양을 다시 뱉어내는 새벽이나 느낄 법한 참담함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가랑비처럼 떨어져 소매를 적시는 슬픔 속에서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도 저도 다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가는 길을 고통 속에서 배웅하기로 한 것도 모두 그의 결정이 아닌가?
레이븐은 다시 창문을 열고 높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가까운 곳에서 배를 채운 채 쉬고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새까만 날개는 작열하는 태양에 익어 따뜻했다. 레이븐은 그 깃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나간 지 두 시간 만에 도시를 나갔던 시빌과 왼쪽 상처가 돌아왔다. 시빌은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왼쪽 상처도 그러했지만 그들이 꺼낸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다 죽어 있더군요.”
왼쪽 상처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도시는 세 개의 큰 길이 교차하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중 그들이 거쳐 온 북동쪽의 길을 제외한 남쪽과 서쪽의 길을 시빌과 왼쪽 상처가 각각 정찰 나간 것이다. 그리고 채 한 시간도 걷지 않아 시체의 산을 보게 되었다.
죽음의 병마가 즉사의 병을 뿌리고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주 조용하고 치밀하여, 누구도 놓치지 않는 거장의 솜씨가 공기에서 느껴졌다. 길을 막고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을 숙부란 자의 진지에선 주인 없는 깃발만이 까마귀를 부르는 표식이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독을 탄 것 같던데. 검상은 없었어.”
“제 쪽도 검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독인지도 모르겠던데요.”
두 남자의 말을 들은 아네모네가 귓가에 꽂은 꽃을 만지작거리며 끼어들었다.
“내부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더군요. 길드 쪽을 찔러봤는데 다들 겁을 집어먹고 있어요. 중간에서 수작 부리는 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네모네가 보고를 끝내자 당연한 수순으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레이븐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레이븐은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를 까마귀 한 마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서로 까악거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귀가 아파 오던 참이었다.
“재주도 좋다. 어디서 저걸 데려온 거야.”
“죽여도 됩니까?”
시끄러워서 귀가 아프다는 듯 왼쪽 상처가 칼을 뽑아 들었다. 시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까마귀를 쳐다보았다. 분명 한쪽은 사람이고 한쪽은 새인데 한 배, 아니 한 둥지에서 난 것처럼 분간이 잘 안 됐다. 참다못한 왼쪽 상처가 위협적으로 경고했다.
“머리 아프다. 그만 떠들어.”
“독은 아니라고 하네요.”
한참을 까악 거리던 레이븐은 왼쪽 상처의 위협을 우아하게 무시하며 말했다.
“독이 아니라 공포가 죽인 겁니다. 죽음을 사칭하는 마법사가 언덕 위에서 성을 노리고 있다는데요.”
“저 까마귀가 그걸 다 말해줬다고?”
“까마귀는 머리가 좋은 새입니다. 1765 더하기 239 같은 것도 계산하지요. 요새는 교육들을 못 받아서 인간들이 새대가리만도 못한 상황이 흔합니다만.”
“…….”
인간들이 계산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길었다. 길어지는 만큼 민망해졌다. 그때 까마귀가 까악하고 한 번 울었다.
“2004라는데요?”
“알아! 누가 그거 계산하고 있었는 줄 알아?!”
까마귀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키득거렸다. 상대하는 자체가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 시빌은 짜증스레 이를 갈았다.
“영주에게 알리실 겁니까?”
“그래.”
“왜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시빌은 왼쪽 상처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마법사를 하나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뭣보다 이건 옳지 않잖나.”
일행들의 시선이 모조리 시빌을 향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렇잖아? 안타깝잖아.”
자신을 향한 불온한 시선들에 시빌은 천진난만을 가장하며 웃어 보였다.
“왜 이래? 대륙의 영주들이 죄 레비쥬인데 그들이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통치가 되겠어? 레비쥬란 자들은 의외로 준법정신이 투철하다고.”
“당나귀가 살면서 친 모든 사기를 다 합쳐도 저 한마디를 못 따라갈 거야.”
아네모네가 평했다.
“까악!”
머리 똑똑한 까마귀가 동의했다. 기가 막힌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멍하니 방치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레이븐이 입을 열었다.
“영주에게 알리려면 빨리 가셔야겠는데요. 죽어 있는 군대가 모두 몇 명이라고 했죠?”
“400 정도 될걸. 깃발의 수가 제법 많던데, 용병단의 깃도 있었고.”
지방 영지 주제에 참 거하게도 질렀다고 생각할 때였다. 이어 나온 레이븐의 목소리에 방 안의 온도가 하염없이 낮아졌다.
“죽었으니 아마 오늘 밤 쳐들어올 텐데, 우린 그 전에 도망가나요?”
“……도망갈 것까지야 없지. 소금으로 경계가 쳐져 있으니.”
“아. 오늘 비 올 겁니다.”
레이븐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래 봬도 숲지기, 날씨 예측은 틀려본 적이 없습니다요.”
모두의 마음속에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음의 군대 400명이 오늘 밤에 온다는 겁니까, 지금?”
알도렌은 아연해져 방문객들을 바라보았다. 슬슬 일어나서 소금으로 이루어진 방책들을 정비하고, 험악해진 인심을 달래기 위해 나갈 채비를 하던 때였다. 지나가던 상인을 주장하던 한때의 깡패들은 그에게 기쁜 소식과 나쁜 소식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숙부의 군대가 죄다 죽어 있었다고요? 그럼 이제 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거군요.”
“시체들만 빼면.”
“그리고 오늘 밤엔 비가 오고?”
영주는 맑디맑은 여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마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그저 맑기만 했다.
“숲지기의 말로는 그렇다는데.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영주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무장을 한 남자 두 명과 조금 천박하지만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길을 걷다 돌 맞을 것 같이 생긴 레이븐이라 생긴 작자까지.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부랑아였고 그는 영지에 든 뜨내기들을 언제나 발로 차서 쫓아내고는 했다.
숙부의 군대가 작살났다는 말에 빠르게 전령을 내보냈던 알도렌은 돌아온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임을 고하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가 무얼 원하고 숙부를 배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저주받은 도시를 떠나 영지의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지는 넓었고 도시도 작지만 하나가 더 있었다. 죽은 자가 소리 지르는 땅에서 살고 싶어 할 이는 없으니, 미친 마법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줘버리고, 다른 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영주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것이 떨어진 건 그때였다.
-콰르릉!
하늘엔 구름도 없었다. 뜬금없이 쏟아지는 폭우에 도시민 모두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자를 메우고 있던, 성벽마다 칠해놓았던, 하얀 소금들이 빗줄기에 씻겨 땅으로 스며들었다. 알도렌은 욕설을 내뱉을 엄두도 내지 못하며 짙은 색으로 젖어 들어가는 땅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는 산맥의 그림자에 닿아 일렁이고 있었으며, 소금은 빠르게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알도렌은 집무실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성문을 닫아! 전투준비를 해라!!”
숙부의 군대는 공성 병기 또한 갖추고 있었다.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식구들 이름을 외워댈 정도의 지능이라면, 아무리 시체라 해도 무기 또한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이군.”
시빌은 흥이 나서 밝게 웃었다. 여정이 너무 길어지는 건 곤란했지만, 이런 작은 성 하나를 지키는 일쯤이야 취미생활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규모였다. 귀찮다고 생각하며 칼을 만지작거리는 왼쪽 상처와, 불안한 표정으로 숨을 곳을 살피는 아네모네의 모습이 시빌의 뒤로 보였다. 레이븐은 팔뚝에 앉은 까마귀의 깃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작게 속삭이기만 했다.
사람들이 뛰어다니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성벽 밑을 울렸다. 누구나가 이런 날이 오리란 걸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무기들엔 녹이 슬어 있지도 않았고 무뎌 있지도 않았다. 전쟁이 드문 동부치고는 양호하다 할 수 있었다. 시빌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전쟁은 좋아하지만 일단은 적당히 지켜보자고. 적당히.”
미소 짓는 그 얼굴에 붉은빛을 뿌리며, 태양이 저물었다.
* * *
어둠 속에서 둥둥 북이 울렸다.
시체의 몸에서 빠져나온 인의 푸른 불빛이 길 잃은 벌레마냥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비를 맞은 여름의 풀잎은 생생하게 일어서 그 날을 세우고 있다. 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홈통을 타고 미끄러져 떨어지는 소리에, 다른 모든 소리가 잠재워졌다.
멀리서 북 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생각처럼 멀리서 울리는 것이 아니라는 건 곧이어 올린 폭음 덕분이었다. 눈알도 없이 휑하니 뚫린 구멍으로 비에 젖은 밧줄을 움켜쥔 시체들이 문을 부수기 위해 달려들었다.
-쿵!
죽은 자들을 괴롭히던 소금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어 달려드는 이들의 발을 태웠다. 시체 타는 냄새와 비릿한 물 냄새가 뒤섞여 전쟁을 노래하는 가운데 성의 망루에서 쏘아낸 화살은 아무런 죽음도 더해주지 못했다.
그 누구도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는 전쟁이었다. 시체훼손죄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악의 범죄인 밤에, 인간들은 사랑하는 부모, 아내, 자식, 연인에게 돌을 던졌다. 어두워서 그들이 부순 것이 사랑하던 이의 잔재라는 걸 알 수 없었다. 시체들이 산 자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했지만 그 흉측한 목소리는 빗소리에 잠겨 알아듣기 힘들었다.
이토록 긴 밤이 있을 수 있을까.
지옥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 같다.
알도렌은 성벽에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아래를 굽어보았다. 횃불 하나 없는 적의 진지는 어둠 속에 꿈틀대는 또 다른 어둠이었다. 별도 달도 구름 속에 잠기어 외면하는 밤이었다.
누군가가 끓는 기름을 성문 위로 부어 내렸다. 불을 던지자, 빗물에 퍼지는 기름 위로 불도 함께 퍼져 번졌다. 다행히도 불은 듣는 듯했다. 불에 타 발버둥 치던 시체는 곧이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수많은 불들이 성 밖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비가 오고 있었고, 많은 수의 불과 기름이 빗속에 흩어지고 꺼져 적에게 닿지 못했다.
시빌은 그 모든 것을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죽음의 가치를 재는 상인과도 같았다.
실제로 처음에 그는 편들 자를 계산하고 있었다. 소금과 불에 약하지만 활과 검에 강한 군대. 비가 오는 날엔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고, 비가 개는 순간 재가 되어 사라지는 군대. 한순간 구미가 당겼지만 따져보면 참으로 쓸모없는 구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다. 안식은 죽은 자들만의 특권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깨워내어 부리는 건 옳지 않았다.
시빌은 성벽으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 올랐다. 빗물이 그의 어깨를 때리며 떨어졌다. 빗물 속에서도 가열차게 타오르는 횃불들이 물에 젖은 그의 뺨을 비췄다. 바닥은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미끄러웠다. 걸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시빌은 거침없이 걸어갔다.
시체들과 대치하며 싸우던 병사들은 지독한 한기에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이 그들 뒤에 서 있었다. 흐르는 비를 모두 맞고 서 있는 그의 몸 위로 체온에 흐트러진 엷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키가 크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그것은 균형이 잘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 잠겨, 횃불에 흔들리며, 눈빛만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젖은 옷이 달라붙어 몸매가 어렴풋이 드러나 조각 같은 인상을 풍겼다. 마치 신이 어둠을 틈타 인간 사이에 섞여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믿지 못할 정도로 으스스해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옷자락을 추슬렀다. 그들 앞에 놓인 죽음보다 더한 추위가 그들의 등을 지키고 서 있었다.
시빌은 궁수 한 명을 밀치고 망루에 가까이 가 붙었다. 그리고 아래를 굽어보았다.
사다리를 벽에 걸친 채 기어오르던 시체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벌레들이 들어있던 통을 발로 차면 소란스러워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주 조용해지기도 한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움직임을 멈춘 시체들의 모습은 천적의 등장에 굳어버린 짐승 같았다.
“이런 이런.”
시빌은 성벽으로 기어오른 시체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비명도 없이 추락한 시체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시빌은 비명을 내지르는 시체들을 파괴했다.
시빌이 동참을 명령하지 않았기에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목숨줄을 쥔 레비쥬가 검을 뽑아 휘두르는 모습을 처음으로 지켜보면서, 그들은 시빌이 검이 아니라 죽음을 쥐고 휘두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새와 속삭이던 레이븐도 멍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시빌을 바라보았다. 성벽을 따라 느긋하게 걸어가다가, 검을 들어 내지를 땐 그 잔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체라는 것은 급소가 없기에 사지를 산산조각 내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그의 검에 맞은 것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기에 눌려버린 것이리라. 시빌의 모습이 성벽을 돌아 사라지자 레이븐은 사나운 눈길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어둠 가득한 언덕 가운데에 마법이 서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시체들을 무시하며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시체로 이루어진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 사이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어쨌건 날이 밝는다는 것이다.
여명이 일렁이며 긴 그림자를 땅에 떨어뜨렸다. 전쟁통에도 닭이 시간에 맞춰 운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공포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끼며 사람들은 밝아오는 성 밖을 바라보았다. 성벽 주위로는 무덤을 파헤친 뒤 불을 지른 꼬락서니가 펼쳐져 있었다. 비틀거리며 사다리를 오르던 시체들은 날이 밝자 비명을 지르며 땅을 긁었다.
시체들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가 스러지진 않았다. 말을 타고 갑주를 걸친 시체들이 여전히 대지 위에 서서 성을 향해 창을 들이대고 있었다. 성에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언덕이었다. 그곳엔 불타는 옥좌가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처럼 불타는 것을 왜 못 봤을까 의심했으나 옥좌를 태우는 것은 불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그곳에 검은 수의를 걸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목에 걸친 마스터의 증표엔 해골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뼈들이 달려 있었고 마노와 청동, 흙을 담은 병이 그 사이사이를 채워 메꾸고 있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살아 있는 자이고 마법사이며 죽음에 정통한 자라는 걸 알 수 있는 장식이었다. 시빌은 아직 그치지 않은 빗속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떨어지는 비가 검날을 타고 흐르며 피와 오물을 씻어 내렸다. 비가 검날에 부딪쳐 퉁길 때마다 하프의 현을 두드리는 듯 청명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새벽은 조용했다. 공포에 질린 시선은 성 밖의 마법사뿐만 아니라 시빌에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들은 양을 지키는 늑대를 경계하는 시선으로 시빌에게서 한발 한발 물러서서는 그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뭉쳤다. 시빌은 개의치 않았다.
“너~!!!”
증오에 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빌은 희게 웃으며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고, 새하얀 머리카락이 넝쿨처럼 늘어뜨려진 마법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빌은 의외의 상황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안 뒈지고 살아 있었네?”
유쾌한 듯 응답하는 시빌의 목소리에 마법사가 분노에 차 손을 들었다. 시빌은 성 밖으로 뛰어내리고자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를 차분한 목소리가 뒤에서 잡았다.
“가실 건가요?”
시빌은 돌아보았다. 그곳엔 까마귀가 서 있었다.
비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것은.
“뭐?”
“저자를 원하십니까?”
“저자를? 왜?”
“마법사니까요.”
시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비에 젖은 레이븐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지독한 기시감이 일었다.
“레비쥬란 마법사를 원하도록 되어있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난 쟤 싫어.”
시빌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저 녀석 레비쥬를 쳐 죽였다고. 저놈 레비쥬는 내 머리를 부쉈고. 내가 좋다 그래도 쟤가 싫다 그럴걸? 저놈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려봐. 일단 죽이고 올게.”
“북쪽에서 기다리는 분이 있기 때문인가요?”
시빌은 멍하니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뒤통수를 후려쳐진 기분이었다.
“뭐?”
“아멜리타 발루아.”
레이븐이 어깨를 작게 수그리며 말했다.
“아름다운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름답지. 하지만.”
레이븐에게 손을 뻗어 끌어안으려던 시빌은 자신의 행동에 기겁했다. 시빌은 이를 악물었다. 전쟁으로 달궈진 몸은 차가운 비에도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거기에 물에 젖은 미인이 다가와 기대면 참을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미인?’
시빌은 자신의 생각에 놀라 흠칫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레이븐이었고, 지저분한 데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며 음침한 까마귀였다. 미인이라는 생각 자체가 참으로 뜬금없었다. 시빌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여튼 다녀올 테니까.”
시빌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성벽을 넘어 마법사를 향해 뛰어갔다. 달려가며 곰곰이 생각하던 시빌은 자신의 행동이 바람피우다가 걸린 남편 같은 꼬라지라는 걸 깨닫고 이를 딱 깨물었다. 이상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상황 자체가 너무나 익숙해서 몸에 맞는 옷을 걸친 것마냥 편안했다는 것이다.
“대체 뭘 한 거냐, 삼 년 동안의 나.”
죽음의 기사가 휘두르는 창을 잡아 꺾으며 시빌은 자기혐오로 들끓는 머리통을 해골 기사의 안면에 갖다 꽂았다.
* * *
이쉬카는 나이젤의 마법사였다.
나이젤은 시빌이 북쪽의 영지를 차지한 뒤 그 지위를 굳히려 할 때 도전해 온 동쪽의 맹주였다. 용맹했고 인망이 두터우며 그의 마법사 또한 실력이 좋아 누구나 그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 한 달이 흘렀을 때, 사람들은 나이젤이 간만의 전쟁이라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석 달이 지나자 장난이 좀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반년이 지났을 때, 사람들은 전황이 백중지세이며 그 승패를 알기 어렵단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은 자나 주무르는 음침한 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쉬카는 증오스러운 시선으로 시빌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서 답을 알 것 같아 시빌은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설마 나이젤을 살리려고 한 건 아니겠지?”
“살렸다!”
“저거 말이야?”
시빌은 검을 들어 이쉬카 옆에 선 칠흑의 기사를 가리켰다. 레비쥬가 살기를 품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긴장도 공포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시체로 만들어진 기사를 가리키며 시빌은 이쉬카를 조롱했다.
“저거랑 붙어먹는 거냐?”
이쉬카는 더 이상 분노를 참지 않았다. 절규 같은 고함이 울리자 검은 갑주를 걸친 기사가 시빌에게 달려들었다. 시빌은 조금 심심하다고 느꼈다. 좋은 마법사였는데, 차라리 마법으로 덤볐다면 까다로웠을 상대인데 아쉽게도 미쳐버린 모양이었다.
시빌은 기사의 창을 한 발 차이로 피하며 말의 고삐를 잡아 쥐었다. 말 또한 죽어 있는 것이었으나 시빌은 개의치 않고 몸을 날렸다. 갑주 사이의 틈을 찌르자 뼈가 끊어지는 둔탁한 손맛이 검을 타고 흘렀다.
검을 지렛대 삼아 머리와 투구를 한꺼번에 날려버린 시빌은 고개 돌려 이쉬카를 바라보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너지는 기사를 바라보는 얼굴이 그를 시체처럼 보이게 했다. 이렇게나 약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신음 같은 것을 내뱉으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시빌은 움직이지 않는 기사의 시체를 넘어 걸어갔다.
마법사와 레비쥬는 대개가 연인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마법사는 레비쥬를, 레비쥬는 마법사를 찾게 되었다. 처음엔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공생관계였다. 하지만 어떠한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면 그것이 곧 본능이 된다고 하던가. 마법사와 레비쥬는 그러한 관계였다. 필요에 의해 만나 영혼을 함께 묶는 사이.
마법사와 레비쥬는 같은 성별일 때도 있었고 다른 성별일 때도 있었다. 각자 인간을 탐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서로의 몸을 탐했다. 애틋한 애정 같은 것이 있기도 했지만 그저 몸뿐인 관계도 많았다. 하지만 진정한 쾌락은 마법사와 레비쥬가 몸을 섞을 때만이 왔으며, 몸이 가면 마음도 가는 법이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영토를 넓히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레비쥬가 없는 마법사란 참으로 덧없는 존재였다. 시체를 일으키며 맞서 싸우던 이쉬카는 반각도 채 되지 않아 목이 잘렸다. 목걸이를 돌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깨부수는 시빌의 모습은 그 익숙한 태도 때문에 보는 이를 소름 끼치게 했다.
“레비쥬.”
이쯤 되면 정체를 숨긴다는 게 불가능해져서, 영주는 시체들이 문을 두드릴 때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가랑비를 맞으며 시빌은 성을 향해 걸어갔다. 성문은 아직 굳게 닫힌 채였다. 재와 뼈가 바스라져 뒤섞인 땅은, 삭막했지만 묘하게도 비옥한 느낌을 주었다. 이대로 썩는다면 분명 기름진 땅이 되겠지만, 이 기이한 전장에서 밭을 일굴 농부가 있을까?
시빌은 성문 앞에 멈춰 정중히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기 위해 움직이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시빌은 너그럽게 기다렸다. 그러자 시빌이 싸우는 동안 조용히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일행 중 하나가 단검을 뽑아 들고 움직였다.
군인들 모두가 전투에 투입되어 영주에겐 아무런 호위병도 붙어있지 않았다. 새벽이라 길게 늘어진 그림자 사이로 달린 왼쪽 상처는 참으로 쉽게 알도렌을 제압했다. 왼쪽 상처는 영주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외쳤다.
“문 열어!”
성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병사들이 벌어진 사태에 놀라 다가왔다.
“다가오지 마!”
“영주님!”
“기껏 얻은 승리의 날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열어! 명령해라.”
“……레비쥬를 성에 들일 순 없소.”
알도렌은 폐가 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왼쪽 상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가 레비쥬라는 거야?”
“레비쥬가 아니면?”
“인간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상인이지.”
사기꾼 스킬이란 거 참 별거 아니로구나. 왼쪽 상처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단검을 영주의 목에 꾹꾹 눌러 위협했다.
“열어. 어차피 바레아도 아니니 초대하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어. 그가 화나서 성문을 부수고 들어오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마법사를 죽여 성을 구해준 은인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알도렌은 왼쪽 상처에게 잡혀 목이 젖혀진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을 열어라.”
영주의 말에 주저하던 병사들은 왼쪽 상처가 영주의 목에 칼을 휘둘러 위협하자 그제야 문으로 뛰어갔다. 육중한 성문은 간밤의 공격과 기름에 타 눌어붙은 시체 덕에 잘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걸려 성문이 다 올라가자 시빌이 태연한 걸음으로 성안에 들어섰다. 시빌은 왼쪽 상처가 제압 중인 영주의 앞까지 걸어갔다.
“놔 드려라.”
왼쪽 상처가 칼을 거두자 영주는 쿨럭거리며 재빨리 병사들 쪽으로 몸을 굴렸다. 시빌은 느긋하게 검집을 툭툭 두드리며 도시의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성벽에서 그의 활약을 본 자들은 공포 어린 시선으로, 성벽 안쪽으로 피신해 있었던 주민들은 그저 의문이 어린 표정으로 시빌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 마법사가 탐낼 만한 물건이 있단 얘긴데.”
목소리는 작아서 그 말을 들은 것은 시빌 곁에 있던 몇몇뿐이었다. 투석기에 공격당한 시가지는 많은 곳이 부서져 있었다. 시빌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시를 바라보더니 곧 몸을 돌려 영주를 향했다.
“필요한 게 몇 가지 있는데, 도와주실 거라 믿습니다.”
시빌에게 주시당한 영주는 석상처럼 굳어서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시빌은 마법사를 죽이고 그의 목걸이를 부순, 바로 그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통행증과 상인 조합증. 네 명분의 여행증명서. 구해주신다면 정말로 지나가는 상인이 되어 드리죠.”
알도렌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시빌이 말한 문서들을 가져와 서명했다. 그 모습을 아는 척 바라보던 시빌은 슬쩍 레이븐의 옆으로 가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레이븐은 한숨을 쉬며 영주가 넘긴 문서들을 받아 진위를 확인했다.
“맞습니다.”
“좋아.”
시빌은 잔뜩 가시 세운 병사들을 지나 끌고 왔던 마차에 올라탔다. 왼쪽 상처는 검을 뽑은 채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잡았고 아네모네와 레이븐이 시빌을 뒤따라 마차에 탔다.
마차는 도시를 나와 여유롭게 한참을 달리다가 멈춰 물에 젖은 까마귀를 토하듯이 내려놓았다. 레이븐은 한바탕 푸드득 몸을 떨어 물을 털어낸 뒤 다시 마차에 탔다. 그리고 다시금 밤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 * *
가랑비는 하루 만에 멈추었다. 장마가 시작되는가 싶어 겁에 질려 하늘을 바라보던 아네모네는 정수리가 뜨거울 정도로 쨍쨍한 해가 내리쬐자 모자를 썼다. 덜컹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던 마차는 반나절마다 마부를 바꾸었다. 왼쪽 상처는 못 미더운 기색으로 레이븐을 쳐다봤지만 의외로 그는 말을 아주 잘 다뤘다. 알아듣기 힘든 허밍과 속삭임만으로도 말들은 기운이 넘치고 피로가 달아난다는 듯 발걸음이 활기차졌다.
아네모네는 마차 안에서 나오지 않았고 시빌은 해가 기울 때쯤 마차 위로 올라가 드러누웠다. 길가의 잎사귀를 뜯어 문 채 바람을 만끽하는 그의 모습은 시골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일행들은 상인을 위장하기 위한 물품을 사기 위해 마을마다 들르며 약초와 염료들을 사들였다. 중부의 전쟁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약초의 가격이 매우 비쌌다.
“징발되는 거 아닐까 걱정되는데요.”
왼쪽 상처가 약초들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지만 시빌은 고개 저었다.
“함부로 징발을 하면 상인이 지나가지 않게 돼. 전쟁 중에 약초 같은 것의 공급이 끊기면 곤란한 건 우리가 아니지.”
시빌은 염료보다는 잘 말린 약초와 약품을 주로 구입했다. 위장을 위해서지만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숲지기라는 죄목으로 레이븐은 약초와 약품의 감별을 맡았다. 산맥에서 많이 떨어진 지역이었지만 카디넬에 대한 시선은 아직 양호했다. 그중에서도 산마니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감사하는 시선을 담아 레이븐을 대했다.
구입은 순조로웠고 시빌은 마차를 더 큰 것으로 구입했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과 살림을 실어 생활도 할 수 있도록 꾸며진 커다란 짐 마차였다. 다행히 말이 네 필이나 있어 끄는 데는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가구는 채우지 않고 밑바닥에 짚만 깔았다. 모자란 돈은 아네모네가 도시에서 훔친 돈으로 충당했다.
그렇게 순조로운 여행이 계속되어 중부대로가 나흘 남짓 남은 곳이었다.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마을에 들어선 일행들은 저녁을 먹기에 앞서 매서운 눈으로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냄새나.”
아네모네는 짧게 평했고 나머지 일행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두꺼운 외투를 입고 일주일, 그것도 한여름의 일주일을 씻지 않고 보낸 레이븐에게선 가히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다.
“썩은 양파. 쉰 맥주. 여기서 하루만 더 지나도 상한 생선이 되겠지. 식중독 걸릴 것 같으니 오늘은 씻어.”
격렬한 항의에 레이븐은 꽁기꽁기 동여맨 손을 들어 보였다. 손에 물을 묻힐 수 없으니 몸도 씻을 수 없다는, 며칠간의 대답을 재탕한 것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작정을 한 것이다.
“이 몸이 널 씻기기로 하셨다.”
레이븐은 희게 질린 얼굴로 왼쪽 상처를 쳐다보았다. 왼쪽 상처가 반쯤 썩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씨발 사내새끼 몸까지 씻어줘야 하나.”
“아, 안 씻겨 주셔도 되는데요.”
까마귀는 덜덜 떨며 대꾸했다.
도망치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레이븐은 고개를 한 바퀴 돌리기도 전에 커다란 손에 붙잡혀 욕실로 끌려갔다. 지상에서 반 층 정도 더 올라간 곳에 위치한 욕실은 하얀 타일로 장식되어 제법 고급스러웠다. 왼쪽 상처는 떫은 표정으로 레이븐의 녹색 외투를 잡았다.
“네놈 씻기려고 여관비를 엄청나게 지불했다고. 도망칠 생각은 말아.”
“호, 혼자서 씻을 테니 좀 놓아주시면 좋겠는데요!”
왼쪽 상처는 피식 코웃음 치며 레이븐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검을 풀러 놓았다.
“널 어떻게 믿어?”
“저도 남자에게 씻겨지는 거 별로 기분 좋지 않습니다.”
“이 옷은 어떻게 빨아야 하는 거야? 아네모네에게 주면 알아서 하려나?”
왼쪽 상처는 레이븐의 말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며 외투를 벽에 걸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외투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녹색의 천은 아주 두터운 실들로 엮여 있어 거칠었지만 직물 중간중간 얽혀 있는 보석들이 색색으로 빛나고 있어 제법…….
“차양 같네.”
문 앞에 저런 구슬 엮인 차양들을 드리운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남부와 유리가 많이 나는 해안의 문화를 따라한 것이라고들 했었는데.
“어딜 도망가.”
외투를 살펴보던 왼쪽 상처는 냄새를 풍기며 도망치는 레이븐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레이븐은 버둥거리며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녹색의 외투를 벗자 드러난 건 평범한 시골 사람의 옷이었다. 거친 목면으로 만들어 풀빛으로 염색한 옷은 누렇게 물이 들어 있었다. 왼쪽 상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의 옷고름을 풀었다. 반항하는 듯하던 레이븐은 포기한 것인지 얌전히 옷을 벗겨주는 대로 서 있었다.
상의를 벗긴 왼쪽 상처는 의외로 단단하고 가는 선에 흠칫 놀랐다. 카디넬의 어두운 갈색 피부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끈했다. 왼쪽 상처는 자신도 모르게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손은 어떻게 하지. 수건 같은 것으로 감싸면 되나?”
레이븐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문득, 그가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왼쪽 상처가 고갤 들었다. 욕실의 문간에 표정을 굳힌 시빌이 서 있었다.
“시빌 님?”
“내가 하지.”
왼쪽 상처는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아침까지만 해도 누가 레이븐을 씻길 것인가에 대해 모두가 격렬한 거부를 표시했던 것이다.
“물어볼 것도 있어서 그래. 나가.”
어딘가 짜증이 어려 있는 시빌의 목소리에 왼쪽 상처는 풀어놓았던 검을 다시 챙겨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기 전 힐끗 안쪽을 들여다보자 레이븐에게 다가가는 시빌의 금발이 보였다.
시빌은 차가운 눈으로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옷을 벗은 채 멀뚱하니 서 있는 모습이 매우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고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상태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왼쪽 상처가 레이븐을 끌고 욕실에 갈 때까지만 해도 유쾌했던 기분이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쾌해져 밑바닥으로 떨어져 부글거렸다. 불쾌함이 가득한 눈으로 욕실 쪽을 노려보고 있자니, 아네모네가 가 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와 보길 잘했지.’
시빌은 벽에 걸린 수건 두 장을 들고 레이븐에게 갔다.
“손.”
레이븐은 냉큼 손을 내밀었다. 마디마디 부러진 손가락마다 부목이 대여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덕분에 부풀어 오른 듯 두툼해진 손을 시빌은 수건으로 감쌌다.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꼼꼼히 싸고 손목 부근을 묶고 있자니 레이븐이 고개 숙여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하시네요.”
“전쟁을 많이 겪었으니까. 붕대는 아니지만 동여매는 거라면 그럭저럭.”
“레비쥬란 전신의 조각이라죠. 알고 있습니까?”
“…몰라. 그런 건.”
시빌은 말없이 레이븐의 손을 동여매었다. 고문하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막 깨어났을 당시 그가 진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란 가까이에 있는 이를 심문하는 것이고, 다시 그 상황에 처한다면 똑같이 할 터이지만, 그래도 지금에 와서 후회하는 맘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시빌은 레이븐의 바지 끈을 잡아 풀었다. 허리에 시빌의 손이 닿자 레이븐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난감한 표정으로 딴 곳을 봤다.
옷을 다 벗긴 시빌은 레이븐을 부축해 욕실로 밀어 넣었다. 두 손을 바깥에 내놓은 채로, 따뜻한 물에 폭 잠긴 레이븐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수면만 바라보았다.
시빌은 레이븐이 머리까지 물속에 잠겼다 나오도록 정수리를 꾹 눌렀다. 새까만 머리칼이 물 위로 부드럽게 퍼졌다. 시빌은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 비슷한 장면을 어디서 보았더라?
“에잇!”
시빌은 성질을 내며 물에 담근 레이븐을 밖으로 꺼내었다. 비누로 거품을 내어 온몸에 문질렀다. 생각보다 매끈한 피부가 손바닥에 감겼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레이븐을 북북 빨았다.
“꾸웨에엑!”
“에잇! 대체 얼마나 안 씻은 거야?”
시빌은 레이븐을 빨고 헹군 뒤 다시 빨았다. 세 번 정도를 반복하자 그제야 향긋한 비누 내가 레이븐의 몸에서 나게 되었다. 시빌은 한숨을 내쉬며 레이븐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씻기는 것도 익숙하시네요?”
“엉?”
시빌은 멋쩍은 듯 코를 긁었다.
“뭐, 시종 일을 하면 목욕 수발도 들게 되니까.”
“레비쥬인데 시종 일을 하셨다고요?”
“아아. 내가 북부를 가지기 전의 일이다.”
시빌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레이븐을 욕조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물의 온기로 발갛게 익은 피부가 잘 구워진 빵 같았다. 그리고 때가 지워진 얼굴은 놀랄 만큼 단정했다. 시빌은 레이븐의 귓가로 늘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부드럽게 풀린 몸이 말랑말랑했다.
“머리가 아파.”
“시빌?”
의아한 듯 시빌을 돌아보는 모습이 너무나 익숙했다. 레이븐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수건에 쌓인 손을 내밀어 시빌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시빌은 무서운 눈으로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레이븐은 그 시선에도 겁먹지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체 뭘?
레이븐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고 긴 머리칼이 몸을 가리며 달라붙어 있었다. 시빌은 커다란 수건을 가지고 와서는 물기를 짜내고 닦았다.
“여름이라서 금세 다시 더러워지겠지만.”
시빌은 레이븐의 몸을 꼼꼼히 닦아 내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씻기는 것 같았다. 레이븐은 부끄러움도 없이 시빌에게 몸을 내맡겼고, 시빌 또한 위화감 없이 그의 몸을 씻긴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이라는 의무감이 들었다. 손가락을 그가 비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시빌은 머리를 직격하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구부렸다. 자연히 레이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시빌은 따뜻한 피부에 이마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직 수건에 쌓여 있는 레이븐의 손이 시빌의 화려한 금발을 헤집었다.
“시빌?”
시빌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인간에게 발정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성욕이었고, 품 안에 들어와 있는 몸은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은 잃어버린 기억이 드리워진 실을 타고 표면으로 기어오르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추억일 수도 있고 경고일 수도 있었으나…….
“무슨 마법을 쓴 거냐, 너.”
“네?”
시빌은 험악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카디넬의 술수는 아는 바가 없다만, 삼 년 동안 내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시빌은 고개를 들어 레이븐의 얼굴을 봤고, 그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고통에 잠긴 것을 알게 되었다.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시빌은 레이븐의 목에 이를 세워 키스했다. 불긋하고도 커다란 반점이 보란 듯이 레이븐의 목에 남았다.
새하얀 타일 위에 레이븐의 검은 머리가 꽃잎처럼 펼쳐졌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던 몸은 다시 바닥에 고여 있던 물에 젖었다. 레이븐은 당황을 숨기지 않으며 시빌의 몸을 밀어냈다. 다친 손으로 남자의 체중을 밀어내는 것은 힘들고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레이븐은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시빌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원할 경우 이유 없이 그것을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갈색의 매끈한 피부에 입술을 묻고 가느다란 팔을 쥐어 바닥에 고정시켰다. 체온을 탐하고 그가 새겨 넣은 비누 향을 즐겼다. 혀를 내밀어 귓볼을 핥자 참지 못한 숨소리가 레이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너무나 자극적인 목소리여서, 시빌은 정신이 반쯤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벌리려던 때였다. 시빌은 거짓말처럼 싸늘한 모습으로 멈추었다.
욕정에 휘말린 시빌을 멈춘 것은 섬광처럼 떠오른 이쉬카 때문이었다. 마법사가 노릴 만한 것. 시체들이 공격한 도시. 그가 깨부순 마스터의 목걸이. 전쟁을 예고하는 준동.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힘이 필요할 이 시기에. 마법사도 아닌 자의 몸을 붙잡고…….’
아무리 거부하던 것이라 해도 이러한 시빌의 변화는 그 급작스러움만큼이나 레이븐을 상처입혔다. 레이븐은 헐떡이며 시빌의 팔 안에서 벗어나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석상마냥 굳어있는 시빌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혼이 빠진 인형처럼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시빌은 고개 들어 헝클어진 레이븐을 쳐다보았고, 순간 뺨이라도 맞은 양 얼굴이 시뻘게졌다.
“넌 마법사인가?”
레이븐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왜 너를 안고 싶지?”
시빌의 질문에 레이븐은 고개를 툭 떨어뜨린 채 손을 꼼질거렸다. 시빌이 묶어준 손목께의 매듭을 매만지며 레이븐은 대답했다.
“외모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말에 시빌은 멍해졌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손을 만지작거리는 레이븐의 모습은 자주 보던 것이었지만 물기 어리고 깨끗한 피부 덕에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레이븐이 눈치 보며 슬쩍 눈을 올려 떴다. 이 또한 자주 보던 모습이었지만, 갸름한 눈매 안에 들어찬 새까만 눈동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좌우의 균형이 완벽하게 잡혀 있는 계란형의 얼굴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단정한 이목구비만으로도 화려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구나. 시빌은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레이븐의 말에 수긍했다.
“미안하게 되었다.”
시빌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제력을 모아 말했다. 시빌의 품에서 도망쳐 욕실 벽에 기대어 있던 레이븐은 이제 상처받은 것이 명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레이븐을 씻기느라 시빌 또한 반쯤 젖어 있었다. 금발은 짙어져 황금의 정수를 보는 듯했고, 푸른 눈은 어두워져 밤의 호수 같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빌의 모습에 레이븐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레이븐은 마음속 가득한 고통을 달래며 옷을 입혀주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옷을 입힌 후 잠시 레이븐의 모습을 감상하는 듯하던 시빌은, 더 이상 한 공간에 있지 못하겠다는 듯 거친 태도로 욕실을 나가 사라졌다.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직 수건으로 싸여 있는 두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네모네는 고함을 내질렀고 왼쪽 상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식기를 놓쳤다. 레이븐이 녹색 외투를 팔에 걸친 채 식당으로 들어서자 여관 안이 환하게 밝아진 듯했다.
“진흙 속의 진주란 게 정말로 있었구나.”
“냄새만 지워져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왼쪽 상처는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레이븐은 새 옷이 어색해 자꾸 목과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새 옷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잘 생겼는데 왜 그러고 다닌 거야?”
“산속에서 혼자 사는걸요. 날이 더우면 호수에서 씻기도 합니다만 여러분을 만났을 땐 손이 다쳐 있어서…….”
아네모네는 레이븐의 말에 그의 손을 힐끔 보더니 물이 닿지 않도록 동여맨 수건을 풀어주었다. 레이븐은 어린아이처럼 얌전히 손을 맡겼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져서, 아네모네는 레이븐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레이븐이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말 잘 들으니까 이렇게 깨끗해지고 좋잖아? 자주 씻어야 착한 아이지.”
레이븐은 헉 소리를 냈다.
“저 나이 많습니다?!”
“후후. 많아 봤자 얼마나.”
“……많이 많습니다.”
레이븐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뒤 의자에 앉았다.
두 개의 손가락만으로도 인간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레이븐은 포크를 집어 들어 앞에 놓인 음식을 집어 먹었다. 고기와 호박이 섞여 푸짐한 스튜를 먹고 있자니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카디넬이라서 질색하던 여관 주인도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븐은 슬슬 귀찮음을 느꼈다. 안 그래도 어두운 피부색 덕에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외모까지 튀면 귀찮은 일이 생길 터였다.
“역시, 좀 더러운 쪽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러자 아네모네와 왼쪽 상처가 질색을 하며 도끼눈을 떴다.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원시 되는 카디넬이다. 더럽고 무섭다면 사람들이 먼저 피하지만 아름답다면 욕심을 내고 얕보며 손에 넣으려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시빌 님은?”
“씻겨 주시고는 나가셨는데요. 여기 계실 줄 알았는데.”
“안 왔어. 바로 밖에 나갔나.”
얼굴 보기가 싫은 건가? 레이븐은 들고 있던 포크로 그릇 바닥을 쿡쿡 찍었다. 요새는 만사가 다 우울했다. 아무래도 동부의 끝자락인 데다가 시빌의 영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전쟁 중이라지만 휘말리지만 않으면 북부까지는 2주 정도 걸렸다. 2주 후면 왼쪽 상처나 아네모네는 시빌의 곁에 남아 일할지도 모르지만, 레이븐 그 자신은 파르티잔 산맥의 산장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시빌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될 때까지 그를 보내려 하지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그의 의지는 레이븐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산장으로 돌아가 짐승과 나무를 벗 삼을 수 있다는 걸 레이븐은 알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하자.
레이븐은 갑자기 친절해진 아네모네가 뜯어준 빵을 집어 먹으며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 * *
시빌은 매우 불쾌한 상태로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중부대로로의 관문답게 도시는 제법 컸고 온갖 상인과 군수품이 오가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도시엔 희귀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 또한 있었고, 때문에 시빌은 연금술사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길을 잃을 것 같을 때마다 시빌은 좁은 골목의 바닥을 유심히 보았다. 아는 자들만이 찾아갈 수 있도록 특수한 염료로 그려진 기호가 갈림길마다 띄엄띄엄 있었다.
연금술사는 언제나 사람을 피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배척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존경받는 편이었으나 그들이 다루는 물질들의 위험함이 그들을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시빌은 연금술사들이 사람을 피하는 이유가 마법사가 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이윽고 도착한 연금상점 앞에서 시빌은 발을 멈췄다. 나무문 앞에 붉은색의 염료로 강력한 경고가 쓰여 있었다. 시빌은 문을 두드려 자신의 존재를 알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병으로 가득 찬 선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기는 매캐했고, 무언가 끓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 손님?”
시빌은 차가운 시선으로 연금술사를 바라보았다. 좁은 방에서만 살아온 것 같은 허리 굽은 모양새의 늙은이가 형형한 눈동자로 안쪽 방과 이어지는 문간에 서 있었다. 시빌은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죽 훑어보았다. 염료며 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석들이 대여섯 종류에다 기름이 든 병들이 목걸이 중앙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연금술사는 시빌의 시선을 알아채곤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손님이구만. 뭘 찾지?”
“뱀파스.”
연금술사의 낯짝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런 건 없어.”
“유황 정제품을 목에 걸고 뱀파스가 없다고 말하면 그걸 믿어야 하나?”
“나가게!”
“이봐. 연금술사 양반.”
시빌은 벽마다 들어찬 유리병 중 하나를 손끝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공짜로 사겠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살 만한 이유도 있지.”
연금술사는 말해보라는 듯이 코웃음 치며 팔짱을 꼈다. 시빌은 잠시 밖으로 향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워낙 골목 안쪽에 있는 가게라 밖엔 오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시빌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여야 할 마법사가 있거든.”
연금술사는 비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시빌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연금술사에게 다가갔다.
“나와 계약을 하고선 날 배반한 마법사다. 나는 그를 죽여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그대는 그것을 도와야 하지.”
“당신이 대체 뭔데?”
시빌은 품에서 금화를 하나 꺼내어 연금술사에게 내밀었다. 연금술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금화를 받아들었다. 겨우 이런 돈으로 매수하려는 거냐는 비웃음이 가득 어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화를 받아 바라보던 연금술사는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시빌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금화를 내려다보았다. 늙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시빌은 재촉하듯 연금술사를 향해 말했다.
“뱀파스. 다섯 다발.”
연금술사는 허둥지둥 안쪽 방으로 들어가 시빌이 요구한 것을 끄집어냈다. 시빌이 건넨 금화는 북부의 것이었고 200년간 북부를 다스렸던 그의 얼굴이 그대로 주조되어 있었다.
* * *
시빌은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다리 사이에는 연금술사에게 강탈하다시피 사온 뱀파스가 다섯 다발 놓여 있었다. 아마 지금쯤 속으로 꽤 울고 있을 것이다. 뱀파스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고, 다섯 다발이면 그의 창고를 거덜 낼 만한 양이었을 테니.
여름의 오후인지라 광장엔 사람이 많았다. 무더운 햇볕 때문에 일하던 사람들도 잠시 손을 놓고 분수의 물줄기를 보고 있었다. 시빌은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 날의 폭우를 떠올렸다.
-절벽이야!
-따라가서 죽여야 한다!
-목이 떨어졌습니다. 살아 있을 리…….
-그건 모르는 일이야!!!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던 부하들의 목소리. 말의 투레질 소리. 하늘을 가르는 번개. 벼락에 맞아 쓰러지는 육중한 나무의 소리. 천둥. 그리고…….
-위험합니다. 발루아 공!!!
자신의 마법사를 지칭하던 이름을 누군가가 불렀다. 북부에 앉아서 그 대신 영지를 통치하고 있어야 할 마법사가 그의 지척에 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 아멜리타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에게 파르티잔에 갈 것을 고했다. 이제 영지도 안정되었고 그 기반이 튼튼하니 유물을 손에 넣어 왕이 되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흐음.”
평소라면 코웃음 치며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그러나 많은 관료와 장군들이 한 입을 모아 그에게 속삭였다. ‘확고한 평화를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라고. 그러한 제안과 속삭임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마침 극지의 마법사도 조용했고 중앙도 안정되어 있어 시빌은 마음이 움직였다. 파르티잔에 잠시 다녀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로 유물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한 번 다녀오면 이 지긋지긋한 제안도 좀 수그러들리라. 믿을만한 마법사에게 영지를 맡기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셈 치자. 호위는 20여 명 정도로, 믿을 만한 이들을 추려 여행하며 의를 다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같이 갈 인원을 골라 뽑은 것은 아멜리타였다. 그는 온전히 자신의 편이었으므로 그 인선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은 지금의 상황에 있었다.
마법사이면서 가장 강력한 레비쥬 중의 하나인 자신을 버리고 굳이 애송이들에게 청혼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법사와 레비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고, 떨어지는 즉시 매우 약해져 다른 이들의 표적이 된다. 3년 전의 자신처럼. 지금의 아멜리타처럼.
시빌은 자신의 처지를 냉정히 생각하려 애썼다. 파르티잔 산맥의 산장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애썼다. 아멜리타 발루아는 너를 배신한 것이라고. 네가 그토록 믿었던 마법사는, 실은 속으로 너를 향한 칼을 갈고 있었노라고.
“우습군. 마법사 주제에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병신처럼 혼잣말을 내뱉으며 시빌은 뱀파스 꾸러미를 손끝으로 툭툭 쳤다.
사랑이란 무섭다. 그 무엇보다 무섭다. 이지도 감정도 모두 초월해버리기 때문이다. 복수를 낳는 것도 사랑이고, 증오와 고통, 집착을 낳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갑자기 레이븐이 보고 싶어졌다. 목덜미에 새겨 넣은 흔적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안고 싶었다. 그 대상이 까마귀라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어쨌거나 씻겨놓은 그는 아름다웠다. 북부까지의 유희로 그를 가져서 안 될 것이 뭐란 말인가?
매우 치졸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는 걸 시빌은 깨달았다. 그는 레이븐을 안으려다 말고 한 번 물러난 것이다. 물러난 이유는 레이븐이 시빌을 거절해서가 아니라 시빌 그 자신이 지금 색에 빠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자중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마법사와 계약 관계를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비쥬와 마법사가 계약을 맺기 위해선 동침을 해야 하므로 연인이 있는 레비쥬를 마법사는 원치 않았다. 그들 또한 사랑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시빌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마법사고 뭐고 간에 자신의 머리가 이토록 터질 것 같은데 무슨 상관이냔 생각이 들 때였다. 고개를 들어 광장을 보던 시빌의 눈에 레이븐과 아네모네의 모습이 들어왔다. 둘은 양손에 짐을 잔뜩 든 채 광장의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시빌은 멍한 표정으로 웃고 떠드는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그는 노점에서 파는 사탕이 반짝거리는 것이 예쁘다며 들여다보다 입에 넣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탕이 점점 작아지는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런 레이븐의 볼록해진 볼을 아네모네가 손가락으로 누르며 까르르 웃었다. 시빌의 이마로 혈관이 빠직 솟았다.
“이 잡것들이…….”
남은 배신과 사랑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데 지들은 좋다고 낄낄거리며 사탕이나 씹고 있다. 시빌은 부아가 치밀었다. 일어나 뱀파스를 손에 들고 터벅터벅 다가가자니 그의 모습을 알아챈 두 명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뭐 하는 중인가?”
“장을 보고 있었는데요.”
아네모네는 대답하며 손에 든 꾸러미 하나를 뒤로 슬쩍 감췄다. 힐끔 보았을 뿐인데도 쓸모없는 물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번쩍거리는 유리 거울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네모네.”
목소리가 절로 낮게 깔렸다. 아네모네는 찔리는 표정으로 시빌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너에게 돈을 맡긴 건 너에게 자제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자연재해 같은 거랄까.”
아네모네는 식은땀을 흘리며 레이븐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러자 레이븐이 사탕을 허겁지겁 입 안에서 꺼내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빌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물기 어린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시선으로 애원하는 것에 시빌은 골이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이 자식. 어디서 이딴 걸 배웠어.”
“아네모네 씨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배신자!”
“…너희 둘 다 좀 맞아야겠다.”
시빌은 양을 모는 개마냥 아네모네와 레이븐을 여관으로 몰아갔다. 여관에는 왼쪽 상처가 카드를 쥔 채 앉아 있었다. 그 앞엔 돈이 쌓여 있었고 좌절한 도박꾼이 반쯤 엎어져 있었다.
“적당히 하고 올라오도록.”
“예입.”
왼쪽 상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시빌은 레이븐이 밝은 표정으로 아네모네를 따라 뛰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잘 씻기고 먹여 놓았더니 여자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것이 매우 기분 나빴다. 그러고 보니 아네모네는 레이븐을 데리고 도주하려던 전적도 있었다.
시빌은 조금 다급한 발걸음으로 레이븐의 뒤를 따라갔다.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레이븐이 작은 거울을 든 채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기보다는 새하얀 빛을 담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손길이 어린아이마냥 행복해 보였다. 시빌은 천천히 걸어가 그의 옆에 앉았다. 레이븐이 깜짝 놀라 일어서려는 것을 막으며, 시빌은 그의 목덜미를 살짝 들추었다.
붉게 변색된 키스 마크가 눈을 찌를 듯이 파고든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레이븐은 거울을 가지고 놀던 손을 멈췄다. 벽으로 반사된 빛이 파르르 떨었다. 나비가 날아와 앉은 것처럼, 가벼운 쓰다듬이 레이븐의 귀를 스쳤다.
“아네모네와 친해진 것 같군.”
“예에. 머리카락이 길어서 가지고 놀기가 좋다고.”
시빌은 예쁘게 땋아진 레이븐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레이븐의 몸이 긴장으로 확 경직되었다.
“삼 년 동안의 난 어땠지?”
“……자신이 레비쥬라는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고 있었거든요. 평범한,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시빌은 믿기 힘들었다. 자기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 대체 몇 세기 전이었던가?
“그리고?”
“어.”
“그리고 난 너와 뭘 하면서 살았지? 말해봐. 삼 년이나 되는 시간이다. 어떠한 관계든 맺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레이븐은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했다.
“당신은 저를 위해 약초를 캐왔습니다. 높은 절벽 위에 피어있는 것이나 호수 깊은 곳에 고여 있는 것들을 가져와 주었습니다. 짐승을 잡아 오기도 했지요. 저는 당신이 가져온 것들을 말리고 정제해서 약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상인이 왔고, 저는 그것을 팔았지요.”
“그럼 그 상인은 나를 알아보겠군.”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레아의 상인은 아닙니다. 카디넬과 교류하는 상인들이 몇 명 있는데, 바레아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지라 먼 길을 돌아다닙니다.”
“너와 난 연인이었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시빌은 말없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진한 손끝이 울혈을 스치는 것을 레이븐은 차가운 태도로 밀어냈다. 시빌이 어깨를 잡아끌어 당기려는 것을 레이븐은 다친 손을 들어 막았다. 시빌이 부러뜨린 손이었다.
“그만둬주십시오.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제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저는 꿈같은 것을 꾸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질투하는 것만큼 개떡 같은 일은 세상에 그 수가 많지 않다. 시빌은 자신의 머릿속이 고양이가 가지고 논 털 뭉치마냥 엉망진창으로 엉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어서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부턴 중부대로다. 얼굴은 가리는 편이 좋을 거야. 카디넬이 그나마 인간 대접받는 것도 동부뿐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괜히 문제 만들지 마라.”
레이븐은 대답 없이 고개만 조용히 떨어뜨렸다. 시빌은 물러났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까지 물러날 수 있을지는 그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 * *
중부대로는 두 개의 산맥과 세 개의 평야를 지나는, 대륙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도로였다. 길과 여행의 신이 바다에서 나와 처음으로 디딘 땅이 바로 중부대로라고들 사람들은 말했다.
길 위를 오가는 곡식만도 연간 250만 톤. 대부분의 식량이 강을 통해 운반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이었다. 하지만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대륙의 양 극단을 잇는 중부대로는 쇠퇴하고 남부의 도시들이 번화하기 시작했다.
시빌은 일행들과 함께 인적 없는 중부대로를 달렸다. 마차에는 염료와 약초가 잔뜩 쌓여 있었고 네 마리의 말은 지치지도 않고 달렸다. 레이븐은 녹색 외투에 달린 후드를 턱까지 눌러 쓴 채 마차 가장 깊은 곳에 앉아 몸을 숨겼다.
오랫동안 고립되다시피 한 마을에서 가장 비싼 것은 식량이지만, 오랫동안 전쟁에 노출된 군대에서 가장 비싼 것은 약초였다. 시빌은 막대한 돈을 벌며 이동했다.
한여름이었지만 논과 밭은 방치되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고, 숲은 벌목되어 맨땅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과 자연 모두가 황폐했지만, 그래도 길에서 벗어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도망친 사람들의 작은 마을과 우거진 숲이 있었다. 그것은 돌 아래 숨은 벌레와 이끼 같아서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결코 주의를 끄는 법이 없었다.
대로를 따라 움직이던 일행들은 한여름의 땡볕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우거진 갓길로 방향을 틀었다. 녹음이 짙어지자 그에 따라 바람은 시원해지고 그늘 또한 짙어져서 일행들은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빨라도 살고 볼 일이지. 그 길로 계속 갔으면 일사병에 쓰러졌을 거야.”
아네모네는 마부석에 앉아 부채질했다. 바로 옆에 앉은 왼쪽 상처가 고삐를 치며 쏘아붙였다.
“떨어져. 덥다고!”
“내가 말 몰 테니 네가 들어가던가!”
아네모네는 성질 내며 마부석에 등을 기댔다. 날이 지남에 따라 레이븐은 다시 지저분해졌지만 다시 씻을 생각을 하질 않았다. 너무 깨끗한 것도 시선을 끈다는 말에는 동의했지만, 너무 더러운 것도 시선을 끌지 않는가? 아네모네는 왼쪽 상처에게 속삭였다.
“저 둘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말이라고 하냐. 동네 청년이 계집 보는 시선이더만.”
왼쪽 상처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시빌은 왼쪽 상처가 레이븐을 씻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씻기면 될 터인데 그 또한 하지 않았다. 손가락의 상처가 매우 심했기에, 스스로 씻게 하는 것은 논외였다.
“물 냄새 난다.”
한참 부채질하고 있던 아네모네가 중얼거렸다. 왼쪽 상처는 고개를 끄덕끄덕 마차의 흔들림에 맡기며 대꾸했다.
“아아. 근처 같은데.”
“멱 감고 싶어. 보면 안 된다?”
“누가 너 같은걸.”
“가서 밀어 넣으면 안 될까?”
왼쪽 상처는 삼 초 정도 고민했다. 아네모네의 말에서 주어가 누군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왼쪽 상처는 주저 없이 물 냄새가 나는 쪽으로 고삐를 당겼다. 그들이 구입한 지도가 정확하다면 이 근처에 있는 것은 작은 호수이거나 그 지류일 것이다. 일단 레이븐을 호수로 밀어 넣고 나면 시빌이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싶었다. 왼쪽 상처는 휘파람을 불었다. 어차피 날씨도 더웠고 그도 몸을 씻고 싶었다. 아네모네를 훔쳐보는 것은 덤이었다.
시빌은 잔뜩 골이 올라선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녹색 외투를 음침하게 뒤집어쓴 레이븐은 다시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녹색 옷을 어찌나 꼼꼼히 싸 입었는지 살이 한 조각도 밖으로 내보이질 않았다. 시빌은 불만스레 눈앞의 도롱이를 발로 툭 찼다. 녹색 도롱이는 퍼득 몸을 떤 뒤 시빌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뭔가 말이라도 좀 해봐.”
“…….”
“떠들어 보라고!”
-퍼득!
마차 구석에 처박힌 도롱이는 몸을 동그랗게 말며 웅얼거렸다.
“때 끼니까 바로 구박하고 파렴치해. 하여간 남자란 믿을 수가 없…….”
“이 자식이! 덮쳐버린다. 왤케 입이 살았어?”
시빌의 폭언에 도롱이가 동글동글 말렸다. 시빌은 이마에 혈관이 솟는 것을 느끼며 레이븐을 꾹꾹 찔렀다.
“야. 너 손가락 다 나으려면 얼마나 걸려?”
“한 달 정도요.”
“씨발. 그럼 대체 몇 번을 더 씻겨야 하는 거야?”
시빌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금발이 현란하게 흐트러지며 뒤엉켰다. 까마귀는 눈만 쓱 내밀어 그런 시빌을 바라보았다.
말 같은 것도 아니고 밀폐된 마차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레이븐의 청결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씻으라고 할 때마다 두 손을 들어 보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참다못한 왼쪽 상처가 씻겨보겠다고 나섰지만 시빌이 그것을 막았다. 그는 자신이 레이븐을 씻기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의 시행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시빌은 마차에 드러누워 얼굴을 팔로 덮었다. 시큰시큰한 냄새가 옆에서 났지만 이미 후각은 마비되었고, 간밤에 꾼 꿈이 하도 충격적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시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밤에 꾼 꿈은 이전에 꾼 꿈의 뒷 장면이었다. 호수에 반쯤 몸을 담근 남자의 얼굴은 레이븐이었고, 떨어지는 달빛 속에 그 홀로 고고했다. 검은 머리카락으로 떨어지는 물빛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애정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빛.
시빌은 몸을 일으켜 도롱이를 뒤흔들었다. 까마귀의 동그랗게 말린 몸이 덜컹거리며 반듯하게 풀렸다. 후드를 뒤로 넘겨 벗기자 아름다운 얼굴과 악취가 동시에 드러났다.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겨 먹은 눈동자가 게슴츠레 시빌을 노려보았다.
“짐승이랑 하는 건 수간이라던데요.”
시빌은 잠시 말을 잃었다
“네가 짐승이냐?”
“인간 취급을 받아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크흠.”
“꼴값 떤다.”
시빌은 머리가 아파져 레이븐을 다시 내려놓았다. 꿈속의 그 아름답던 자와 눈앞의 이 짐승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레이븐이 이렇게만 행동해 준다면 그 어떤 꿈을 꾸어도 애정이 식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시빌은 그렇게 되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마차는 연못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레이븐의 냄새에 질식하지 않았다면 시빌도 물 냄새를 맡고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도 행선지를 바꾸진 못했을 테지만.
마차가 멈춰선 곳에는 계곡 물이 고여 만들어진 작은 연못이 있었다. 깊고 차가운 물은 지하에서 바로 솟아 나온 것처럼 깨끗했다. 시빌은 망연한 표정으로 시시덕거리는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아네모네는 세 명의 남자들이 보든 말든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레이븐도 조심스레 발을 물에 담갔다. 왼쪽 상처는 하류 쪽으로 말을 몰고 가 씻겨 주었다. 시빌은 혈압이 솟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 나한텐 말도 없이 잘도 이리로 왔겠다.”
세 명의 인간들은 시빌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빌은 깊은 소외감을 느끼며 뛰노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개기는 걸까.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개기는 걸까아. 이맛살을 구기고 있자니 말을 다 씻긴 왼쪽 상처가 레이븐의 팔을 잡고 물에 밀어 넣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물보라가 나고, 레이븐은 손만 남긴 채 물 안에 푹 담가졌다. 입고 있던 옷이며 머리카락이 온통 물에 젖어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아네모네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질했고 시빌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황급히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가렸지만 나오는 욕은 막지 못했다.
“씨발 좆 됐네.”
갑작스레 물벼락을 맞은 레이븐은 놀라 숨만 헉헉 몰아쉬었다. 그를 물로 밀어버린 왼쪽 상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레이븐은 울상을 지으며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슥슥 치웠다. 두 개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움직이는 모습에 시빌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꿈을 꾸었을 때는 마법에 걸렸다 생각했고, 두 번째 꾸었을 땐 그것이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임을 알았다. 그는 세 번째 꿈을 꾸기 전에 생각한 바를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죽이거나. 혹은 사랑하거나.
시빌은 물로 들어가 레이븐을 낚아챘다.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 옷을 벗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네모네와 왼쪽 상처를 한 번 매섭게 노려봐준 뒤, 레이븐을 두 팔로 안아 올렸다.
몸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이 연못을 뒤흔든다.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아무 말도 없이 시빌과 레이븐의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레이븐은 당황한 표정으로 시빌을 쳐다보았다. 시빌은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연못을 나왔다.
“어. 시빌 님?”
연못을 나와서도 땅에 내려주지 않는 시빌의 행동에 레이븐은 조심스레 그의 팔을 밀쳐보았다. 시빌의 팔은 단단해서 나무뿌리나 바위를 만지는 것 같았다.
“버둥대지 마.”
용암이 터질 곳을 찾으며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빌은 레이븐을 든 채 계곡의 상류로 올라갔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얇고 섬세한 물결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름의 태양에 자라난 활엽수의 넓은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차가운 공기는 고여 있으나 바람은 없는, 그런 곳이었다. 시빌은 그곳에 레이븐을 내려놓았다.
시빌이 옷자락에 손을 대자 레이븐은 덜컥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저 여긴 왜.”
“조용히 해.”
시빌은 동부에서 그가 입혀주었던 옷을 다시 벗기기 시작했다. 젖은 천은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아 시빌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레이븐의 어깨를 밀어 땅에 눕히자 땅 위를 낮게 흐르던 물결들이 레이븐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 차가움에 레이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시빌은 사나운 표정으로 레이븐의 입술을 슬쩍 핥았다.
입술 안쪽은 부드러웠다. 시빌은 벌어진 입술로 깊게 파고들어 혀를 탐했다. 물속에 반쯤 묻혀, 입 안을 점령당한 레이븐은 팔을 들어 휘둘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강력한 구속이었다. 두 손목을 꽉 잡아 누른 시빌은 옷자락이 벌어져 드러난 가슴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뜨거운 숨이 쇄골 밑을 지분거리더니 젖은 옷이 가리고 있는 유두를 슬쩍 깨물었다. 레이븐은 가는 쇳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파드득 떨었다. 시빌은 집요하게 유두를 씹고 핥으며 레이븐의 울음을 자아냈다.
“하, 하지 말아. 하지 마십시오!”
“달아.”
시빌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들어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눈 속엔 번개가 치는 듯했고 맞닿은 피부는 용암처럼 뜨거워 델 것 같았다. 레이븐은 잠시 넋을 잃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눈동자란 이름의 별이 그를 원하며 손을 내밀어 오는 것에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절로 힘이 풀리는 레이븐의 몸을 시빌은 잔인하게 찍어 누르며 목덜미에 입을 묻었다. 혈관이 서 있는 매끈한 목덜미가 부드러웠다.
귓가까지 키스하며 올라온 시빌의 입술이 귓볼과 귓바퀴를 핥으며 진득하니 이빨을 세워 물어왔다. 물기 어린 음란한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며 핥아오는 것에 레이븐은 헐떡거리며 몸을 떨었다. 시빌은 레이븐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고 다른 부분을 탐하기 시작했다.
굵은 손가락이 젖은 옷의 위쪽을 탐하며 희롱하다 척추의 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커다란 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애무하며 쓸어 올리던 시빌은 레이븐의 반쯤 서 있는 페니스를 입에 물었다.
“시빌!!”
반쯤 넋을 잃고 있던 레이븐이 소스라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손이 물에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울부짖으며 시빌의 어깨를 밀었다. 시빌은 키득 웃으며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흐르는 계곡의 물과 함께 시빌의 굴곡진 손가락이 레이븐의 내부를 희롱하며 휘저었다.
“흐으, …앗!”
계곡의 물살이 주는 자극과 시빌이 앞뒤에서 주는 자극에 레이븐은 반쯤 정신을 놓고 울먹거렸다. 계곡의 물이 자꾸 얼굴을 덮어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들이쉬며 레이븐은 시빌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레이븐의 내부는 좁았다. 시빌은 긴장을 풀어주며 두 번째 손가락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끈한 다리가 퍼드득 떨리기에 기다렸다는 듯 남은 한 손으로 잡아 벌렸다. 조금 빡빡했지만, 세 번째 손가락도 집어넣고 휘젓자 레이븐이 악 소리를 내며 허리를 뒤로 휘었다.
시빌은 피스톤질 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앞을 빨아 레이븐을 절정으로 몰아갔다. 레이븐은 갑작스레 주어진 쾌락에 어찌할 바 모르며 몸부림쳤다.
“아. 하악! 앗!”
“큿!”
시빌은 입 안에 터진 정액을 꿀꺽 삼키며 레이븐을 올려다보았다. 멍해진 검은 눈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빌은 레이븐의 뒤통수를 잡아 입 맞췄다. 진한 비린내 나는 키스에 멍해졌던 동공이 파르르 떨리며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리고 레이븐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러지?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인데?”
시빌은 낮은 목소리로 추궁했다. 레이븐은 뜨거운 숨을 계속해서 내뱉으며 시빌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거의 노려보는 것처럼 보였다. 같잖아서, 시빌이 피식 비웃음을 지을 때였다. 갈색 피부에 오스스 돋아 있는 소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시빌은 자신이 정신을 놓았다고 한 생각이 얼마나 착각인지를 깨달았다.
“으, 으읏!”
시빌은 레이븐을 축축하게 젖은 이끼 위에 내려놓았다. 검은 눈동자는 겁에 질려 있었고 아물어가던 레이븐의 손가락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시빌은 꿈을 떠올렸다. 세 번째 꿈은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 그는 레이븐에게 명령했다.
“다리 벌려.”
레이븐은 겁먹은 눈동자를 크게 뜬 채 아무런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시빌은 피식 웃으며 레이븐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시빌의 단단한 무릎이 레이븐의 두 다리가 다시 만나는 것을 가로막았다. 잔뜩 부풀어 오른 성기를 레이븐의 엉덩이 사이에 밀어 넣으며 시빌은 잔인하게 속삭였다.
“왠지 네가 느끼는 부분을 다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레이븐은 몸속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살덩이에 숨이 턱 막혀왔다.
“아, 아파! 하지…, 마!”
“좁아. 큭.”
시빌은 찰지게 달라붙는 내벽을 헤치며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잔뜩 벌어진 다리를 옆구리에 낀 채 허리를 움직이자 레이븐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몸을 빼 도망쳤다. 시빌은 레이븐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조금 빠져나갔던 성기가 더욱 깊숙이 박히며 내벽을 문질렀다. 시빌은 레이븐의 뺨에 입 맞추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한계까지 젖혀진 레이븐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시빌은 레이븐의 피부를, 골격을,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지며 미칠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정복의 쾌감과도 비슷하고 넓은 땅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만족감과도 비슷했으나 그보다 더 크고 격렬했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자신의 성기를 레이븐의 내벽에 새겨 넣던 시빌은 곧 레이븐이 느끼는 지점을 찾아내고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추삽질을 빨리하며 레이븐이 느끼는 지점만을 찌르자 고통스러워하던 목소리가 날카로운 신음으로 변했다. 자의와는 상관없이 더해지는 쾌감에 레이븐은 허리를 덜덜 떨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시빌은 기쁘게 그 눈물을 핥아 마셨다.
“기분 좋아? 응?”
“아, 아!! 이상…!!”
“이상한 게 아니겠지.”
시빌은 레이븐의 다리를 어깨 위로 올려 걸쳤다. 몸이 젖혀지며 더욱 깊숙이 박혀드는 시빌의 성기에 레이븐은 숨을 컥 내쉬었다. 몸속에 지나치게 거대한 것이 들어온 탓에 숨이 턱턱 막혔다. 주름을 온통 밀치며 파고든 시빌의 성기는 느끼는 지점만을 집요하게 문지르고 찔러댔다.
레이븐은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며 시빌의 몸을 밀쳤다.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거부하면 할수록 시빌의 움직임은 거칠고 빨라졌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이끼가 레이븐의 등에 잔뜩 달라붙었다.
“하악! 앗!!”
“큭.”
시빌은 레이븐의 몸속에 잔뜩 사정하며 몸을 움츠렸다. 질척하고 진한 정액이 이음새를 타고 주륵 흘러나왔다. 시빌은 짐승 같은 숨을 내쉬었다. 겁에 질리고 하얗게 핏기가 가신 레이븐의 얼굴이 울먹이며 시빌을 바라보았다. 분명 한도까지 느꼈음에도 레이븐의 몸은 식은땀과 공포에 절어 굳어 있었다. 시빌은 분노가 울컥 솟는 것을 느끼며 땀과 정액으로 얼룩진 레이븐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시빌의 성기가 빠져나가는 대신 다시 움직이자 레이븐은 부당하게 비난당한 아이마냥 몸을 움츠리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으으. 읏!”
“……기분 좋아.”
“이, 이제 그만. 제발.”
시빌은 대답 없이 레이븐의 입술을 탐했다. 간신히 들이켜던 숨이 막히고 격렬한 키스와 농락이 퍼부어지자 레이븐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학!”
허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채 시빌은 레이븐의 몸을 탐했다. 지친 팔이 시빌의 팔을 긁다 떨어지고 애원하던 목소리가 쉬어 낮은 신음이 되었다. 시빌은 굶주린 늑대가 먹이를 물어뜯는 양 게걸스럽게 레이븐의 몸에 자신을 박아 넣었다. 그 지독한 만찬이 끝난 것은 달이 뜨고 난 후였다.
레이븐은 멍하니 눈을 떴다. 새벽이 나뭇잎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깨우고 있었다. 그 선량한 빛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 * *
아네모네는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막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왼쪽 상처는 그런 아네모네를 부축하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숲이 무성하다고는 해도 뚫려 있는 야외였다. 낮은 신음과 비명은 시빌과 레이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친 사람을 찍어 누르는 행위에, 기겁한 아네모네가 뛰어들어 말리려는 것을 왼쪽 상처가 붙잡아 말렸다. 단단한 팔에 몸이 들린 아네모네가 버럭 소리 지르려는 것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왼쪽 상처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만둬. 죽고 싶어?”
“ㅡ읍!!”
“우리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용서할지 모르나 그가 하는 걸 우리가 방해한다면 죽게 돼. 당나귀를 잊었어?”
아네모네가 얌전해지며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 왼쪽 상처는 품 안의 아네모네가 진정한 것을 깨닫고 천천히 팔을 풀었다.
“이건, 이건 좋지 않아.”
“알아.”
왼쪽 상처는 곤란한 표정으로 뺨의 상처를 긁었다. 시빌이 어떤 시선으로 레이븐을 바라보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낮에 일을 칠 줄은 몰랐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나뭇잎 구겨지는 소리며 물기 어린 목소리가 뜨문뜨문 들려왔다. 왼쪽 상처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아네모네를 끌어서는 마차로 돌아갔다.
“모른 척해.”
아네모네는 사나운 눈동자로 왼쪽 상처를 노려보았다. 왼쪽 상처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네가 저 레비쥬를 상대할 거야?”
아네모네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시빌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탈진한 레이븐을 안고 돌아왔다. 창백하게 늘어진 레이븐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한여름인데도 덜덜 떨었고, 외투며 모포로 몸을 잔뜩 감싼 채 몸을 웅크리고 잤다. 덧난 손가락을 붕대로 싸매는 모습에서는 아무런 생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키득거리던 웃음도 다신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빌은 그런 그를 밤마다 끌어내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소리들이 밤마다 울렸고, 가끔씩은 이동 중인 마차 안에서도 들려왔다. 왼쪽 상처는 레이븐에 비견될 정도로 질린 아네모네를 건성으로 위로하며 마차를 몰았다.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종속되는 것은 왼쪽 상처의 세계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지금 이 사건도 그에겐 아무런 감흥도 되지 않았다. 다만 마차를 하루 종일 그 혼자 몰아야 한다는 사실만이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발랄한 맛이 있던 아네모네는 시무룩해졌고, 시든 꽃의 향기는 그 또한 조금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장막 한 장 너머에서 일어나는 색사 따위야 이미 동네 양아치 시절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왼쪽 상처는 귀 끝을 스치는 신음을 무시하며 길 앞만 바라보았다.
“읍. 으웁.”
레이븐은 입 안을 가득 채우며 들어찬 시빌의 성기에 눈물이 잔뜩 맺혔다. 목구멍 끝을 쿡쿡 찌르다 못해 꽉 메워버린 채 문지르는 살덩이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침은 잔뜩 흘러내려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고 입 안은 해어져서 아팠다. 레이븐은 애원을 담아 젖은 눈으로 시빌을 쳐다보았다. 시빌은 눈을 가늘게 감은 채 뜨거운 숨을 훅 내쉬었다.
“좀 더 잘 빨아봐.”
“욱!”
레이븐은 토할 것 같이 웨엑 거리며 눈물을 투둑 쏟아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입 안의 성기도 덜컹거리며 숨을 막아왔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려고 하자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잡아왔다. 단단한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속을 헤집는 것에 레이븐은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욱! 읍! 우욱! 큭-!”
시빌은 레이븐의 뒤통수를 잡고는 욕심껏 앞뒤로 움직였다. 레이븐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며 시빌의 욕망을 받아냈다. 시빌은 레이븐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끝으로 음미했다. 밖에 두 명의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슬슬 절정으로 몸이 치닫자 그는 움직임을 딱 멈추고는 레이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어쩔까? 난 여기서 끝까지 해도 상관없는데.”
그 말에 잠시 얼어붙는 듯하던 레이븐은 목울대를 몇 번 움직이며 시빌의 성기를 삼켜왔다. 귀두 끝이 바짝 조여지는 느낌에 시빌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사정했다. 식도에 대고 바로 터진 정액에 레이븐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큭, 쿨럭! 이 ……저질.”
시빌은 레이븐의 턱을 잡아 올렸다. 땀과 정액에 젖은 갈색 피부가 미칠 듯이 섹시했다. 매끈한 뺨을 만지작거리다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헤집자 레이븐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
“저질이라니. 저질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시빌이 침에 젖은 손가락을 레이븐의 옷자락 사이로 밀어 넣었다. 레이븐이 질색을 하며 시빌의 손을 떨쳐냈다.
“……이런 건 강간입니다.”
시빌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머릿속에 오만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무슨 소리냐고 모른 척할까? 너도 즐겼지 않냐고 개소리 난장을 한 번 쳐볼까?
“알아. 안다고.”
시빌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본디 포로로 잡힌 자는 처참한 대우를 받기 마련이지. 내 행동을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이 외에 네가 무엇으로 내게 봉사할 수 있지? 넌 내 가신이 아니고 나 또한 널 가신으로 둘 생각이 없다.”
“제가 포로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레이븐은 얼굴에 묻은 침이며 정액을 슥슥 닦아 내렸다.
“그저, 사랑이 없는 정사는 고통스럽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시빌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비덕을 가리키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왜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 그는 순수한 의문이 일어 비감 어린 레이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째서 사랑이 아냐?”
“절 사랑하십니까?”
시빌은 레이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몸에 자신의 일부를 묻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았고 추후에도 계속 그와 자고 싶었다. 이 열정은 도저히 식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시빌은 애써 말을 돌렸다.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웠다.
“북부에 도착해서 내 지위를 되찾고 난 후에도, 너에 대한 처우를 나쁘게 하진 않겠다고 약속하겠다.”
레이븐은 들으란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첩입니까? 제 몸이 어지간히 맘에 드신 모양이군요. 마법사 되실 분께서 절 살려두기나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시빌은 욱해서 외쳤다.
“정부 하나쯤 두는 게 뭐 어떻다는 거야? 그게 왜 마법사가 화낼 일이지? 난 북부의 대영주고 그 정도도 감내하지 못하는 마법사는 필요 없어!”
“그럼 전 당신의 마법사가 될 수 없겠군요.”
시빌은 누군가가 뒤통수를 돌로 후려친 듯한 충격을 느꼈다. 레이븐은 차분한, 새 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 마법사야?”
“아닙니다.”
“근데 왜 그런 말을 해?!”
“심술입니다.”
레이븐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손에 감은 붕대를 풀었다. 새하얀 붕대가 줄줄이 바닥으로 풀려나가고, 부목과 약초, 고약들이 바닥으로 덩이지어 떨어졌다. 물이 잔뜩 묻은 것이 걱정이었지만 워낙 깔끔하게 부러졌던지라 손가락엔 물이 스며들만한 외상이 없었다. 오히려 시빌을 밀쳐내기 위해 움직였던 것이 해가 되어 손가락 몇 개가 덧나 있었다.
레이븐은 깨끗한 물로 손을 씻어낸 뒤 산장에서 가져온 고약과 약초를 으깨 손가락마다 붙였다. 그리고는 움직일 수 있는 두 개의 손가락으로 부목을 댄 뒤 입으로 붕대를 칭칭 감았다. 어찌나 움직이는 것이 능숙한지 여덟 손가락을 모두 치료하는 데에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시빌은 레이븐의 목덜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옷을 벗길 때 본 목걸이엔 나무뿌리와 열매, 약초 같은 것만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그건 마스터의 목걸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숲지기나 약초지기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위해 연금술사의 것을 흉내 내어 만든 가짜 목걸이였다.
연금술사란 사물의 본질을 얼마나 잘 추출하여 가지고 있느냐로 그 실력이 결정된다. 철이라던가 수은 같은 것들이 가장 기본적인 물품이며, 그가 지내는 곳의 산물에 따라 많은 수의 정제물이 연금술사의 목걸이에 걸리게 된다. 이를테면 돌에서 철을 추출하는 법을 터득한 자들은 철을 목걸이에 걸고, 순수한 석회를 추출해낸 자는 석회를 거는 식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란 연금술사들 중 비의를 터득한 자들이 얻는 칭호였다. 환상이나 안개, 혼란 같은 것들이 마법사의 주된 비의였다. 시빌은 아멜리타의 목걸이를 떠올려보았다. 여러 가지의 주된 금속들과 안개가 담긴 작은 구슬,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병 같은 것들이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안개와 환상, 죽은 자의 영혼을 잘 다뤘다.
마법사 없이도 영토를 유지할 수 있을까? 시빌은 바로 고개 저었다. 불가능했다. 육체적으로는 정점에 올라있는 레비쥬라도 정신의 공격을 오랫동안 받으면 버티지 못한다. 광증을 보이며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마법사가 널 해치게 두지 않겠다.”
시빌은 자신의 말이 너무나 빈약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비겁해 보여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래도 난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레이븐은 당장에 흰 눈으로 시빌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단 한 번도, 절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낮은 목소리는 절규처럼 울렸고, 시빌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레이븐은 풀어 헤쳐진 옷을 여미고는 녹색 외투를 몸에 걸쳤다.
마차 한구석은 이제 완전히 레이븐의 자리가 되어 마른 짚과 모포가 둥글게 말려 있었다. 레이븐은 그 둥글게 말린 자리에 들어가 몸을 동그랗게 하고는 잤다. 그것은 마치 둥지 같아서, 시빌은 마차 한구석에 새집이 있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시빌은 둥지 옆으로 다가가 레이븐을 잡고 흔들었다.
“레이븐. 그렇게 누워있지 말고, 덥지도 않아?”
“힘듭니다. 목구멍도 아프고.”
“오늘은 부드러운 음식으로 해먹자. 미안해. 부리가 너무 예뻐서 그랬어.”
“부리이?”
“아니 입술. 내가 언제 부리라고 했어?”
“……. 부끄러워서 대체 어떻게 두 사람을 봐야 할지.”
“끝까지 간 것도 아니고 모를 거야. 에, 다음부터 마차에선 안 하…지는 않고, 주의할 테니까. 응?”
레이븐은 단단히 열 받은 모습으로 둥지에 처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숫제 대답도 하지 않는 것에 시빌은 한숨을 내쉬며 최종병기를 꺼냈다.
“다음 마을에서 반지 사 줄게. 반짝반짝하는 걸로. 진짜 보석으로.”
돌아누운 레이븐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사탕도 사줄게. 한 봉지 가득 사줄 테니까.”
“뇌, 뇌물 따위에.”
흔들리는 레이븐의 모습에 시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약점이 분명하니 구슬리기도 쉬웠다.
“영지에 도착하면 보석으로 카펫을 깔아 줄 테니까.”
“……. 혼자 가시죠.”
“레, 레이븐? 야! 까마귀! 썅, 더럽게 깐깐하네!”
시빌은 이마를 확 구기며 마차 벽에 등을 기댔다. 레이븐은 완전히 비위가 상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굽은 등을 처연하게 바라보면서 시빌은 소박맞은 남편의 기분을 체감했다.
‘근데 왠지 좀 익숙한데.’
시빌은 머리를 움켜쥐고는 고통스레 신음했다. 레이븐은 시빌이 자신을 사랑한 적 없다고 한 맺힌 목소리로 외쳤지만, 한눈에 반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꿈은 둘째 치고서라도, 이렇게 몸에 익어있는 태도라는 게 온통 애처가의 행동패턴인데 누가 누굴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억울함에 이를 살짝 갈아붙이며 시빌은 레이븐과 그의 둥지를 노려보았다. 더위와 공기를 물들인 정액 냄새에 확 역정이 일었다. 그는 마차의 옆구리에 뚫린 창을 열어 바람이 들어오도록 했다.
여름은 가을에 저항하는 듯 가장 지독한 무더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벌판엔 쭉정이가 반, 곡식이 반이었으나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그 모습만은 장관이었다. 시퍼런 녹색의 파도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시빌은, 문득 저 멀리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 * *
전쟁이 눈앞에 드러나자, 사람 없던 한적한 여행길은 순식간에 끔찍한 폐허로 변해버렸다. 인기척이 없는 것은 흉한 일을 두려워 한 사람들이 피했기 때문이고,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건 관리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여름 우거진 나뭇가지 아래를 마차로 달리던 일행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시체 냄새는 아직 나지 않았으나 날이 더우니 당장 하루만 지나도 역겨운 냄새가 날 터였다.
레이븐은 멍한 눈동자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뭇가지나 무너진 돌담, 지붕마다 내려앉아 시체들을 쏘아보는 까마귀의 수가 엄청났다. 땅에서는 들개며 쥐 같은 것들이 죽은 자들 사이를 제집처럼 누볐다.
왼쪽 상처가 죽은 병사의 몸을 뒤집으며 투덜거렸다.
“벌써 도둑들이 한바탕 쓸어갔구만.”
전투가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반지며 돈이 든 주머니 같은 것들은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 아네모네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용케 옷은 안 벗겨갔네?”
“내일 아침쯤 되면 다들 벌거벗고 있을걸. 적어도 신발은 사라지고 없겠지.”
그렇게 말하며 왼쪽 상처는 상태가 좋아 보이는 시신을 발로 밀어 엎었다. 시빌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관둬. 우린 상인이지 도둑이 아니야. 시신을 도둑질하다 걸리면 참수당한다. 괜히 일 만들지 마.”
왼쪽 상처는 바닥에 침을 한번 내뱉고는 시신에서 떨어졌다. 아네모네가 경멸 어린 어조로 말했다.
“나도 도둑엔 소질이 있지만 죽은 사람 것을 훔치진 않아. 장의사나 그런 짓을 하지.”
“우리보다 더 막장일 자들이 있다니 그것참 위안이 되어 주는군. 하!”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늘어놓던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불안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몰려든 까마귀의 눈동자와 검은 부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새들이 보기에 산 자와 죽은 자는 얼마나 달라 보일까? 시체라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달려들지는 않을까?
“전투는 오늘 아침에 있었고 까마귀들은 시체가 더 썩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힘 센 자가 근처에 있으니 주의하라는군요.”
“레비쥬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푸른 머리카락이라고 하니 쿠다스인 것 같습니다.”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 젊은 레비쥬는 동부에서 전쟁 중인 영주들 중 하나였다. 작은 영지에서 시작해 점점 세력을 키워나간 그의 행보는 레비쥬의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과 잔인함을 바탕으로 주변 영지들을 짓밟고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 방법은 느리지만 확실했고, 주변에 그를 견제할 만한 세력의 레비쥬가 없을 경우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레비쥬가 있는 진영이라면 마법사도 있겠군. 걸리면 귀찮으니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
시빌이 마차를 향해 턱짓하자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는 군소리 없이 움직였다. 시빌은 자신도 마차에 타기 위해 움직이다가 레이븐이 시체 더미를 뒤지고 있는 모습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너 이 자식 뭐하는 거야!”
“아름다운 눈알이 아닙니까.”
생각도 못 한 대답에 시빌의 얼굴이 멍해졌다. 시체의 눈알을 뽑아낸 레이븐이 황홀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죽음의 벌판에 서서 검은 얼굴로 인간의 눈을 바라보는 레이븐의 모습은 참으로 기이했다. 추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그저 하나의 정물처럼 담담하게만 보였다. 황홀하게 풀어진 그 표정조차 그러했다. 시빌은 소름이 끼쳤다.
“까마귀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위가 눈알이라는 것 아십니까?”
“그걸 누가 몰…, 먹지 마!!”
시빌은 버럭 소리 질렀다.
“사탕 이백 봉지 사줄 테니 먹지 마! 빌어먹을!!”
눈알을 얼굴 근처로 가져가 뚫어져라 쳐다보던 레이븐은 시빌의 외침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주저하며 반짝거리는 푸른 눈을 바라보던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앉은 까마귀에게 들고 있던 눈알을 건넸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시빌은 잔뜩 혈압 오른 얼굴로 레이븐의 손가락에 식수를 콸콸 부어 씻었다. 멀쩡한 두 개의 손가락 끝에 핏물이 묻어 있었다.
“시빌.”
조금 어눌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와 시빌은 레이븐을 힐끔 쳐다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회한에 잠겨 있었다.
“이런 저는 역시 싫습니까?”
“눈알 먹은 입에 키스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낮은 목소리가 불쾌한 감정으로 부글거렸다.
“이름이 레이븐이라고 하는 짓까지 까마귀일 필요는 없잖아?”
“이름은 곧 본질을 나타낸다는 말이 있죠. 저는 그 말이 매우 많은 면에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레이븐은 물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시빌을 가리켰다.
“레비쥬라던가.”
그리고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레이븐이라는 제 이름 같은 것.”
레이븐은 눈만 돌려 마차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의 이름도 각각 그 자신을 대표하지요. 특성에 따라 이름이 지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에 따라 인간의 성향이 바뀌기도 합니다만.”
“네 이름은 부모가 지은 것인가?”
납을 녹여 부은 듯 무거운 목소리였다. 시빌의 표정 또한 차갑게 굳어 가면을 쓴 것 같았다. 단 한 번, 검을 뽑았을 때 이러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레이븐은 기억해냈다.
“카디넬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짓습니다. 당신은요?”
“내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셨지. 위로 형이 셋이나 있어서 한 명쯤은 도시로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나.”
서늘한 의문이 레이븐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레비쥬라는 것은 산 위에 놓인 배를 보는 듯한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짐짓 모른 척하며 레이븐은 물 묻은 손으로 마차 외곽에 글씨를 썼다. Civil.
“이게 맞나요?”
자신의 이름 정도는 알아보고, 또 쓸 수도 있었기에 시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론적으로 도시에 들어앉아 영주 짓을 했었으니 네 말대로 이름엔 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시빌은 마차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시빌은 잠시 고개를 돌려 마차 너머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땅 너머로 엷은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빌은 들고 있던 물통을 마차에 뿌려 글자를 지웠다.
“온다.”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죽음의 기운을 잔뜩 품은 무리가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깃에 수 놓인 푸른 사자의 모양이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게 쿠다스인가?”
“네. 레비쥬도 있습니다.”
“골치 아프군.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시간을 허비했어.”
시빌은 허리에 찬 검을 보이지 않게 쓰다듬었다.
말에 탄 50여 기의 기사들은 들판을 채운 시체 앞에서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곧 다시 움직여 시빌의 앞에 당도했다. 새하얀 말 위에 올라탄 갈색 머리의 기사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하는 무리냐?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귀족임이 분명한 하대와 목소리에 시빌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상인입니다. 북부로 가는 길이고 혹시 살아 있는 자가 있을까 싶어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상인이? 살아 있는 자가 있다고 해도 구할 수 있나. 내가 보기엔 도둑 같은데. 시체털이범.”
여상한 눈으로 시빌을 쳐다보던 기사는 그 옆에 선 레이븐의 모습에 시선을 멈추었다. 중부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카디넬의 갈색 피부에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이래 봬도 약초를 다루는 상인입니다. 살아 있는 자가 있다면, 에…, 은혜를 갚아주실 거라 생각했지요.”
“카디넬인가. 신이 만드신 도로를 저주받은 짐승의 족속들이 밟고 있다니. 이 자는 뭐냐?”
“이자는 제 노예입니다. 동부에서 구입했지요. 약초와 약을 잘 알고 있어서 장사에 도움이 됩니다.”
시빌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고 기사는 코웃음 쳤다. 그는 레이븐의 단정한 얼굴과 피부에 남은 울혈들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장사뿐만 아니라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모양이군.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지만 알겠다. 안쪽에 있는 자들은?”
기사의 외침에 마차로 들어갔던 왼쪽 상처와 아네모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가 아름다운 미녀의 등장에 병사들의 입에서 야유의 함성이 쏟아졌다. 기사가 비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인이라?”
“영주께 받은 조합증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 아가씨는 승객으로 삼촌 되는 자로부터 운임비를 받았습니다. 기사 나리, 저희는 로즈마리와 치자 따위의 약초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물건이 있다면 적당한 가격에 팔겠습니다만 구하시는 게 없다면 이만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기사는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말했다.
“물건을 보도록 하지. 요새는 뭐든 다 부족하니까 행상인의 보따리가 차 있을 때 풀어보도록 하겠네.”
시빌은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며 레이븐을 마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시빌의 이중적인 모습에 이제 완전히 익숙해진 일행들도 장단을 맞춰 움직였다. 보관이 용이하도록 손질된 약초며 약병들이 마차 밖으로 운반되어 나왔고 그사이 기사는 본진으로 사람을 보내어 치유사를 불렀다.
시빌은 내심 솟아오르는 불쾌감을 누르며 장사나 하자고 자기 자신을 달랬다. 전투 지역에서 가까운지라 기사와 병사들의 움직임은 긴장에 차있었고 안 보는 듯하면서도 예리한 눈빛으로 시빌과 일행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허투루 움직이면 시빌은 몰라도 일행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터였다. 아니 무장한 레비쥬가 있었으므로 시빌 그 자신도 반드시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레비쥬는 선발대의 중앙에 앉아 마차와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군마에 올라탄 모습은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으나 새파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만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레이븐의 모습에 따라 움직였는데, 레이븐이 마차에서 나오면 밝아지고 마차로 들어가면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빌은 초조함을 느꼈다. 아무리 카디넬이라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경멸하는 기색을 내보이던 방금 전의 기사도 조금은 감탄한 기세로 레이븐의 모습을 보고 있었고 병사들 중에 몇은 대놓고 음란한 손짓을 했다.
‘마차에 써놓은 이름 지우지 말고 까마귀한테 흙탕물이나 끼얹었어야 했어.’
시빌은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치유사가 레이븐과 몇 마디 말을 나누며 흥정하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치유사는 약초를 만지고 약병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며 꼼꼼히 체크하고서야 일어섰다.
“전부 다 구입했으면 합니다, 영주님. 모두 필요한 약초들이고 약의 품질도 매우 좋습니다.”
“알겠다. 그런데 너! 카디넬. 이리 와 봐라.”
흥정을 마치고 물건을 정리하던 레이븐은 갑작스러운 레비쥬의 부름에 몸을 작게 움츠렸다.
“저, 저, 저 말입니까?”
“그래 너. 가까이 와라.”
레이븐은 시빌의 눈치를 보며 어정어정 느리게 걸어갔다. 돈을 받아 셈하던 시빌은 금화를 헤아리던 손을 멈추고 험악한 눈초리로 쿠다스를 노려보았다. 쿠다스는 레이븐이 미적거리자 답답함을 느꼈는지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갑주 울리는 소리를 쿵쿵 내며 레이븐에게 다가간 그는 대뜸 목덜미에 손을 집어넣었다.
“힉!”
놀라서 떨리는 몸을 무시하며 그는 레이븐의 목덜미에서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자연물만이 걸려 있는 초라한 숲지기의 목걸이가 햇빛 아래 드러났다.
약초와 열매 등으로만 만들어진 목걸이를 차례차례 훑어볼수록 쿠다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곧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레이븐의 목걸이를 내팽개쳤다.
“숲지기인가. 마법사가 아닐까 기대했는데 형편없군.”
그 말에 갈색 머리의 기사가 이죽거렸다.
“노예라지 않습니까. 마법사가 노예가 될 리는 없죠.”
“하하. 마법사라고 해도, 설마 카디넬을 맞으시게요? 하긴 저 외모라면 좆질하긴 좋겠네요.”
천박한 목소리들 사이에 웃음과 야유가 섞여 울렸다. 쿠다스는 비죽하니 웃으며 시빌을 바라보았다.
“저 노예는 얼마를 주고 샀지?”
“…저 노예는 팔지 않습니다, 영주님.”
다음 순간 시빌은 발로 차여 나뒹굴었다.
“시체 한 구 더해도 난 상관없는데. 얼마냐고 물었는데 왜 딴 대답이 나오나?”
시빌은 터져 나오려는 숨을 꽉 붙들어 매었다. 이 개자식을 어떻게 죽일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획기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고 짜증만 났다.
‘씨발.’
시빌은 몸을 일으켜 세워서는 비굴하게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영주님. 카디넬이 괜히 카디넬이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외모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야. 밤에 늑대로 변신이라도 하냐?”
시빌은 고통스럽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은 까마귀 족속으로 하는 짓이 까마귀와 똑같습니다. 방금 전에도 눈알을 먹으려는 걸 막은 참이죠.”
모든 사람들이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백여 개의 눈동자에 레이븐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쿠다스는 반쯤 지진이 나서 갈라진 것 같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눈알? 사람 눈알?”
시빌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쿠다스는 레이븐을 바라보았고, 레이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사람들의 시선이 시빌을 향했다.
“믿을 걸 믿으라고 해라. 하여간 상인 새끼들 이빨 까는 건 알아줘야 해. 하하하!”
“그러게요. 지는 실컷 안아놓고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해봤자 누가 믿어? 와하하하!”
시빌은 병사들의 웃음 속에서 생각했다. 돈도 받았고 마차는 비어 있었다. 바야흐로 도망치기엔 최고의 여건. 재빨리 일행들을 쳐다보며 도주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는데 점점 주변의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시빌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이븐이 두 개의 멀쩡한 손가락을 우아하게 놀려 시체에서 뽑아낸 안구를 시식하려던 참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먹지 마! 이 등신아! 손 씻겨놨더니 그건 왜 또 뽑아 드는 거야!”
레이븐은 잠시 시빌과 눈알, 쿠다스와 병사들을 둘러보더니 소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까악?”
“지랄한다!!”
시빌은 레이븐에게로 달려갔다. 손을 후려쳐 눈알을 뺏고 하는 김에 후드도 깊숙이 뒤집어 씌웠다. 잘생긴 청년의 얼굴에 드리워진 절망 같은 피곤함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깊숙이 후려쳤다. 쿠다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중부에서 카디넬은 그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므로 종종 친인의 노예를 가정하여 움직이고는 했다. 아무래도 저 둘은 그런 관계인 것 같았다.
“알겠다. 눈알이나 먹어대는 카디넬을 진지에 들여 봤자 흉흉한 소문밖엔 안 돌겠지. 그대들은 이만 가 봐도 좋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시빌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쿠다스는 자신의 말에 올라타 다시 한 번 전장을 바라보았다. 폭력과 살육이 한바탕 할퀴고 지나간 땅에선 피비린내와 썩은 내, 철과 재의 냄새가 났다. 굳이 여기에 새로운 시체를 더하는 건 옳지 않아 보였다. 치유사는 솜씨 좋은 카디넬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지만, 그가 방금 말했던 대로 저주받은 자를 진지에 들여 좋을 건 없었다. 쿠다스는 떠나기 전 흘끗 상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시빌이라고 합니다.”
“시빌?”
익숙한 이름이었기에 쿠다스는 새삼 상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금을 쏟아부어 만든 듯한 금발과 새파란 눈동자가 주의를 끌었다. 마치 배경처럼 서 있던 짐승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행상인치고는 곧은 허리와 단단한 시선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시빌이라는 이름은 북부에서 흔한 이름 중 하나였고 금발이나 푸른 눈 또한 흔히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상인인 것이다. 장사를 하며 굽실거리는 레비쥬란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허튼 생각을 했군.’
“무사히 북부로 돌아가길 빌겠다. 가자!”
쿠다스는 수하들과 함께 본진을 향해 달려갔다. 전쟁과 전투와 마법사, 권력에의 불타오르는 욕망만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레이븐은 멀어지는 군마의 소리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실 멀어지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들이 사라진 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레비쥬의 군대였으며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그것이 타인의 죽음이든 그들 자신의 죽음이든 새들에겐 별 상관이 없었다.
까마귀의 무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레이븐에게 레비쥬와 그들의 무리가 일으킨 죽음의 크기를 조심스레 경고해주었다.
‘새들인 우리는 가까이 가도 되지만 인간의 몸을 지닌 당신은 오면 안 돼요.’
까마귀들의 경고를 어길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동행 중인 레비쥬는 기어코 전쟁터로 향할 것이다. 레이븐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며 멀어지는 까마귀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선택한 동행길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북부로의 여행이 끝나고 나면 이와 같은 참상을 볼 일도 없이 다시 사계의 숲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혼자서, 아득하게…….
레이븐은 마차 한쪽에 놓인 물통을 가져와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바닥에 물을 살짝 쏟아낸 뒤 손가락으로 잡아끌자 짙은 글씨가 만들어졌다. Raven. 거대한 까마귀를 뜻하는 단어였다.
이름은 본질을 반영한다고 했다. 진실로 그러했다.
레이븐. 그것은 그의 본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