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 (1)
마법의 신은 사라졌지만 마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의 신은 사라졌지만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관념들은 인간의 몸에 스며들었다.
긴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아쉬움을 떨치며 시빌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어두운 지붕이었다. 진흙으로 틈을 바른 서까래가 연기에 절어 번들거렸다. 가느다란 나이테들이 흐릿한 빛 속에 일렁거렸다. 공기에선 마른 낙엽과 곰팡내가 나고 있었다.
성안에 이런 방이 존재했던가? 몸을 일으키려던 시빌은 엄습하는 두통에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부서진 배가 풍랑을 만난 듯 두서없이 시야가 뒤흔들렸다. 이건 악몽이야. 시빌은 이를 악물며 눈을 뜨려 노력했다. 방금 쓰러진 충격에 뇌가 거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의 이름은 통증이었다.
이처럼 괴로운 건 200년 전 머리 한쪽이 부서졌던 이후 처음이었다. 과거의 통증을 떠올렸던 시빌은 식은땀이 흘렀다. 농담이 아니라 이번에도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부숴놓은 듯했다. 예전엔 이 통증을 어떻게 견뎠더라? 그래. 두통의 원인을 쳐 죽인 뒤 마약을 잔뜩 하고 잠들었었다.
이봐. 어서 의식을 놔. 나쁠 것 없잖아?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게 끝나있을 거야.
유혹적인 목소리에 계속해서 눈이 감겼다. 몇 초가 끊어졌다 이어지는 의식 속에서 시빌은 거의 기적적으로 다시 눈을 떴다. 잠들면 끝나있는 건 두통만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죽음이 된 사례를 얼마나 많이 봤던가? 그중 일부는 스스로 집행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타인의 피를 숱하게 묻혀왔던 그의 과거가 날카로운 채찍이 되어 그의 정신을 후려쳤다. 통증을 잊기 위해 잠드는 건 원인을 쳐 죽인 뒤 해도 늦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잠들면 머저리였다. 일어나야 했다. 안전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보인 낯선 풍경은 그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뿌리가 돋친 듯한 몸을 잡아 뜯듯 일으키자 시야가 일순 새하얘졌다. 머릿속의 두통은 이제 시장바닥과도 같은 소음을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원한 깊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돌로 쳐 반쯤은 깨부쉈던 듯했다. 으르렁거림과도 같은 숨을 내쉬며 시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둡고, 작고, 지저분한 방이었다. 보풀이 일고 때가 탄 낡은 이불이 그의 몸에 감겨 있었다. 짐승 기름을 이용하는 작은 등불이 매캐한 연기를 일으키며 치직치직 타올랐다. 역겨움이 일었다. 초라한 불빛이 닿지 않는 모든 곳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흔들리는 그림자가 환각인지 괴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냥 그림자일 것이다. 시빌은 애써 움켜쥔 주먹에서 힘을 뺐다. 두통 때문에 사물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시빌은 더러운 이불을 그의 몸에서 걷어내며 천천히 일어섰다.
암흑.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시빌의 눈에 보인 건 먼지 쌓인 바닥이었다. 자신이 기절해 쓰러졌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굵은 모래의 질감이 조롱하듯 뺨에 파고들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굴욕이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약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서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약해졌다고? 자연적으로?’
그럴 리는 없었다. 그는 레비쥬의 주인이었다. 예전 머리 한쪽이 함몰됐을 때에도 정신을 차린 후엔 창을 쥐고 전장으로 달려갔었다. 그때에도 두통은 끔찍했지만 몸 자체는 정상이었다. 아니, 재생을 위해 부풀어 오른 세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움직였었다. 나이젤의 목을 베고 그의 성을 함락한 건 결코 요행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이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현재 그의 몸을 옭아매는 건 마법임이 분명했다. 시빌은 이를 갈며 땅을 짚었다. 후들거리는 팔이 몇 번이고 무너져가며 그의 몸을 지탱해 올렸다. 땀으로 목욕을 하고서야 시빌은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었다. 어둠이 갑자기 다행스레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마법사에게 감금된 거라면 어둠이 도망치는 일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조금은 의도적인 여유로움에 싸여 시빌은 어둠을 응시했다. 흔들리는 어둠은 이제 괴물도 감시자도 아닌 그림자 그 자체로만 보였다. 잠시라도 나약한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어둠이 무섭다니, 밀렌이 알게 되면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시빌은 천천히 일어섰다. 완전히 일어나 돌아서려던 때였다. 웃던 얼굴 그대로 시빌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들어본 적 없는 이국의 언어가 그의 귀를 울렸다. 문장이라기보다는 어떤 단어나 주문 같았다. 조잡한 구슬들이 엮인 녹색의 외투가 쓰러진 시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잠들어. 잠들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끝나있을 거야.」
시빌은 아무런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이윽고 더러운 마법사의 손이 쓰러진 시빌의 몸을 질질 끌어 침대 위에 다시 눕혔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검은 눈을 지닌 마법사의 얼굴이었다. 재를 한가득 바른 얼굴이 시체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게 칠한 입술이 더듬더듬 무언가를 속삭였다.
시빌은 다시 잠들었다.
* * *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때, 두통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 지독한 두통과 더러운 방은 역시 꿈이었던가. 눈을 깜빡이며 천장에 새겨진 빛을 바라보던 시빌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날의 그 조잡한 방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덮고 있던 이불을 옆으로 걷어 내렸다. 마법에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수상한 기운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이 몸 안 가득 흐르고 있었다. 시빌은 억눌린 맹수마냥 목을 끓으며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말린 약초며 수액, 꽃향기 같은 저급하고도 야만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빌은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나무 열매며 산새 깃털 따위가 조잡하게 엮여 있는 휘장이 방문께에 걸려 있었다. 전날엔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자신을 재운 것은 생각보다는 별 볼 일 없는 마법사인 듯했고 어쩌면 마법사가 아닐지도 몰랐다. 두통과 함께 온몸을 지배하던 무기력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만인들의 독약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시빌은 마음을 날카롭게 다잡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늘어진 휘장 사이사이로 보이는 복도는 낮임에도 어둠에 반쯤 잠겨 있었다. 지저분한 나무 벽 너머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종종 울렸다. 인기척은 없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시빌은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기억은 파르티잔 숲에서 끊겨 있었다. 유물을 찾는답시고 다른 자의 영토를 침범해 지나간 탓에 꽤나 촉박한 일정을 짰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누구와 함께 움직였더라? 무슨 일이 있었지? 습격당했나? 기습? 기사를 동원한 전면공격?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떠오르는 대신 사라졌다 생각했던 두통만이 재발하였다.
“빌어먹을.”
시빌은 욕설을 내뱉으며 문밖을 노려보았다. 조급함에 몸이 들썩거렸다. 안달하지 않아도, 감히 레비쥬의 주인을 이런 곳에 처박은 마법사를 만나게 되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터였다. 시빌은 초조하게 휘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애매한 상태에 처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이 무얼 하는지 알았고 확신에 차 움직였다.
대체 무슨 일이 내게 있었던 건가?
의문은 길지 않았다. 긴 그림자가 휘장 너머의 바닥에 드리워졌다. 시빌은 나무 바닥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일어섰다. 늘어진 장막을 걷던 손이 비어 있는 침대의 모습에 흠칫 멈췄다.
“왜. 놀라운가?”
시빌은 벼락처럼 달려들어 남자의 멱살을 잡아챘다. 공포에 질린 검은 눈이 파도처럼 흔들리며 시빌을 쳐다보았다. 두려움에 찬 고함이 마법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때가 낀 손톱이 시빌의 팔을 긁으며 발버둥 쳤다. 시빌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남자의 목을 강하게 잡아 눌렀다.
“그래. 네놈의 정체부터 들어볼까? 넌 뭐냐? 카디넬.”
시빌의 질문에 발버둥 치던 몸이 일순 굳었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눈동자가 곧 야비한 기색을 품은 채 시빌의 눈치를 살폈다.
“기억,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무슨 기억?”
“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그건 알아!”
시빌은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마법사가 웅얼거렸다.
“전, 전, 전……. 전 잘 돌봐드렸습니다. 상처를 치료했어요. 정신을 잃으신 동안 아무도 해칠 수 없게. 잘 나을 수 있도록.”
시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겁먹은 카디넬을 쳐다보았다. 무방비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던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데, 이 더러운 집의 주인은 무려 카디넬이었다. 몇 대를 이어지고 피가 섞여도 신에 대한 배신의 증거로, 그들의 자손은 검은색의 눈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시빌은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게다가 이자는 마법사도 아니었다. 마법사라면 응당 지니고 있을 마스터의 목걸이엔 그 어떤 가공물도 걸려 있지 않았다. 나무뿌리며 열매 따위가 얽혀있는 남자의 목걸이는 그가 마법사가 아니라 단순한 숲지기며, 약초장이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정말입니다! 제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 자유로운 몸으로 계실 수 있겠습니까!”
“네가 무슨 수로 내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단 말이냐? 밧줄로?”
“물론 아닙니다. 아닙니다.”
카디넬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웅크렸다. 쥐처럼 이곳저곳을 쳐다보며 카디넬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혜처럼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그 추잡한 모습에 시빌은 그의 뺨을 몇 대 때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카디넬같이 어두운 족속들은 절대 다른 이를 돕지 않았다. 오직 대가가 있을 때만 그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시빌은 불쾌한 마음으로 숲지기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는 대가를 지불했음이 뻔했다. 기억이 없는 것을 기회로 은혜 운운하며 빚을 지우려는 모습에 울화가 솟구쳤다.
“똑바로 말해. 날 처음 봤을 때 내 모습이 어땠지? 어디였나? 잘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카디넬. 난 고문에 일가견이 있다. 만약 네가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되면.”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진실만을!”
시빌은 마법사의 손가락 하나를 잡아 분질렀다. 째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런 꼴을 당할 거다.”
시빌은 멀쩡한 두 번째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고통에 부들거리던 메마른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첫 번째 질문이다. 자. 내가 며칠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지?”
“나흘, 아니 닷새입니다.”
다시 비명이 쏟아졌다. 시빌은 울적한 눈초리로 부러진 두 번째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대답은 정확해야지.”
“닷새! 닷새입니다!”
시빌은 작게 턱을 끄덕이며 숲지기의 세 번째 손가락을 잡았다.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이 정신없이 흐느꼈다. 능숙한 태도로 위협과 고문을 가하며 시빌은 원하는 대답을 하나둘 뽑아냈다. 반나절에 걸쳐 고문을 당한 뒤에야 카디넬은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불었다.
시빌이 숲 속 깊은 곳의 오두막을 떠날 때, 숲지기의 손엔 단 두 개의 손가락만이 멀쩡히 붙어 있었다.
* * *
여름의 숲은 잔인할 정도로 넓고 푸르게 뻗어 있었다. 숲에 고인 짙은 습기가 나무 냄새를 흠뻑 빨아들였다. 수풀에 고인 이슬에 옷자락이 젖어 들었다.
시빌은 빠른 걸음으로 숲을 통과하고 있었다.
뿌리 사이사이 뻗어 있는 이끼와 겨우내 쌓인 낙엽들이 발길을 잡아챘다. 반들거리고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무에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지척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나고, 멀리 짝을 찾는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넓은 이파리들 사이로 흔들리는 빛은 나비의 날갯짓보다 호화로웠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좀체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시빌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곳곳을 노려보았다. 그의 기억이 정확하고 숲지기가 진실을 말했다면 시빌이 지금 통과하고 있는 이 숲은 파르티잔이었다. 숲 중의 숲. 가장 위대한 곳이자 짐승들의 고향. 낙엽 부딪치는 스산한 소리 사이로 풀을 밟고 달리는 가벼운 발소리와 날개 큰 새들의 높은 울음이 들려왔다.
시빌은 천천히 주먹을 쥐어보았다. 약동하는 피와 함께 힘이 흘렀다. 쇠약해져 있으나 짐승에게 죽진 않으리라. 그러나 레비쥬를 만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곳은 성물이 있는 곳이었고 힘 있는 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주 찾는 땅이었다.
유물. 아직 남아 있을까?
혀로 입술을 축이며 숲 속 먼 곳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높았으나 거대한 산맥에서 빛은 금세 스러지는 법이다. 그로선 밤이 얼마나 가까운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시빌은 숲지기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짐승이나 사용할 거칠고 낮은 길을 따라 걷자니 나뭇가지가 자꾸 몸에 부딪쳤다. 마치 그가 떠나는 것을 막는 듯, 그가 걸을 때마다 옷자락을 잡아채는 가느다란 가지들이 파드득 떨리며 휘어지고 구부러졌다.
손도끼라도 하나 들고 올 걸 그랬다고 시빌은 후회했다. 그러나 이제 오두막은 보이지 않았고 그 수상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숲에 들어선 숲지기는 배고픈 이리 떼보다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시빌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오두막은 깊은 숲에 있었지만 숲지기도 인간인지라 도시를 끼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내려가는 길이 그렇게 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밤은 빠르게 찾아와 그 어두운 장막을 숲에 떨어뜨렸다.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해를 삼키며 그 몸을 기울이는 것엔 인간이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있어 시빌은 잠시 발을 멈췄다.
태양이 지배하는 낮 내내 새파랗던 하늘이 밤에 근접해서야 붉게 물드는 것은 대체 왜일까. 하얗던 구름들의 사이사이로 붉은 물이 번지더니 곧 어둠 속에 사그라졌다. 그렇게 하늘이 밤에 덮이자, 그늘에 잠긴 숲의 대기가 날카롭게 변한 것이 피부에도 느껴졌다.
그때 작은 곤충의 눈이, 높이 나는 새가, 짐승 같지 않은 눈빛을 슬그머니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숲지기가 추격을 결심하고 시빌을 찾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시빌은 오감을 곤두세우며 나무 사이로 내달렸다. 빠득 부러지는 나뭇가지 소리에 맞춰 늑대의 울음이 길게 울렸다. 컹컹 부르짖는 짐승들의 숨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죽이는 건 간단했으나 시빌은 욕을 삼키며 달렸다. 무기도 없이 싸웠다간 피투성이가 될 게 뻔했다. 인간이 사는 마을에 그런 꼴로 내려가긴 싫었다.
달이 밝다고는 하나 밤에 숲을 달리는 건 미친 짓이다. 그러나 그 말은 인간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짐승이나 레비쥬에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시빌은 평지를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늑대 또한 자신의 터전을 달리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었다. 돌 부서지는 소리와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소나기마냥 땅을 두드렸다.
좀처럼 격차를 줄이지 못하며 시빌과 늑대는 계속 달렸다. 늑대 무리의 일부가 갈라져 그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이제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늦추면 포위당할 판국이었지만 시빌은 딱히 위험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늑대는 끈질긴 짐승이지만 인가까지 그를 따라오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빌은 주변의 풍경 속에서 나무란 것이 끝장날 때까지 뛸 수 있었다.
만일 돌에라도 걸려 넘어진다면? 그럼 늑대들을 다 죽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시빌은 멈춰 섰다.
그를 쫓던 늑대들이 기다렸다는 듯 양쪽으로 달려와 이를 보였다. 소란스럽던 숲은 순식간에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빌은 자신의 발을 멈추게 한 존재를 노려보았다. 길을 가로막고 선 짐승이 노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색을 알아볼 순 없으나 어두운 빛깔의 털을 지닌 거대한 늑대였다.
놀랍도록 침착한 늑대의 눈이 심판이라도 내리는 듯 엄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적의도 나무람도 품지 않은 어두운 빛의 늑대는 꾹 다문 주둥이를 벌렸다.
“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가 났다.
시빌은 일순간 당황하여 입을 벌렸다.
“까아아악-!!!!”
날카로운 목소리가 피를 쏟는 듯했다. 그가 쳐다보던 늑대 역시 놀라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 시빌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뭇잎 무성한 숲의 하늘을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매처럼 둥글게 하늘을 나는 까마귀의 깃이 거대했다. 나무가 우거져 장애물이 많은 하늘을 까마귀는 아무런 저항도 없다는 듯 날고 있었다.
까마귀를 바라보던 큰 늑대가 ‘컹!’하고 한 번 짖었다.
그 소리를 신호로 늑대들이 물러났다. 거대한 늑대도 시빌을 일견하더니 고개 돌려 울창한 나뭇등걸 사이로 사라졌다.
시빌은 이마를 찌푸렸다. 이유 모를 상황에 처한 게 하루 새 벌써 두 번째였다. 그의 평생 익숙지 않은 일이었고 머리 위를 돌던 까마귀도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엔 이유 없이 뱃속이 뒤틀렸다.
기분이 아주 엿 같았다.
* * *
바레아는 커다란 광장과 군대를 지닌 작은 도시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인구는 1천 명 안팎에 불과했지만 유물을 찾기 위한 군대가 항시 드나드는 탓에 커다란 광장을 갖게 된 도시라는 뜻이다.
로트렉은 광장을 드나드는 네 개의 문 중 하나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었다. 파르티잔에 인접한 탓에 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웠고 별빛은 형형했다. 새하얀 연기가 숨결처럼 밤하늘로 퍼지는 것을 바라보며 로트렉은 광장 벽에 몸을 기댔다. 언제나 가득하던 말 울음소리며 병사들의 고함은, 적어도 오늘은 들려오지 않았다. 바레아는 간만에 아무런 손님도 없는 계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로트렉은 벽 너머의 침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조용한 밤이면 언제나 밀레네가 생각났다. 올해 열일곱 살이 된, 도시의 도공에게 시집간 그의 딸과 거닐었던 밤이 꼭 이랬다. 어둡고, 조용하고, 멀리서 숲 소리와 함께 개울의 반딧불이 알싸하게 피어올라 별이 떨어져 흐르는 듯하던 천국 같은 밤.
망나니 같은 레비쥬도 없고 돌봐야 할 말도 없는 시기라는 건 대체로 대륙이 전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뜻했으나 아무렴 어떤가. 이곳은 이렇게 평온한 것을.
먼 시선으로 숲 쪽을 바라보던 로트렉은 문뜩 어둠이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니. 어둠이 움직이고 있었다. 길 잃은 짐승인가 하며 안력을 돋우며 어둠을 노려본 로트렉은 곧 그것이 두 발로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런 짐도 없는 남자 한 명이 습기 어린 수풀을 헤치며 도시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둡고 조용한 파르티잔에서 나와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에 로트렉은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남자가 더 다가오자 마침 구름에서 벗어난 달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한창나이의 청년이었다. 짧은 금발이 밤공기에 젖어 반짝거렸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던 남자는 곧 자신을 바라보는 로트렉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맙소사.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곳이 바레아가 맞습니까?”
밝고 경쾌한 목소리에 로트렉은 자신도 모르게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남자는 다가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기라도 하는 것마냥 수풀 사이에 멈춰 서 있었다.
“그대가 찾는 곳이 각샨의 바레아라면 여기가 그곳이오! 그런데 그댄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에 도시 안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바레아는 침략을 자주 당하는 도시였고 경계를 누그러졌다 해도 낯선 이를 통과시킬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보초병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로트렉은 수풀 사이의 남자를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인간인가 레비쥬인가?”
“바레아다운 질문이군요! 인간입니다.”
로트렉은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레비쥬처럼 거만한 존재들은 절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인간임을 가장하지 않았다. 아무리 갓 태어난 레비쥬라 해도 인간을 벌레처럼 생각하며 다스리고 짓밟으려 하는 것이 그들의 본성이었다.
“그대의 말을 믿네! 그대는 범죄자인가?”
수풀 속의 남자는 어깨만 으쓱 추켜올렸다.
“이곳까지 흘러드는 범죄자도 있습니까?”
로트렉은 씨익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재판이 없기에 범죄자를 잡으면 바로 처형시켰다. 탈출의 여지조차 없어 죄지은 이들에겐 가장 위험한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없지. 들어와서 몸이라도 녹이지 그러나. 그 숲에서 나온 사정도 좀 얘기해보고.”
어느새 성벽 밖으로 나온 보초 한 명이 남자를 향해 외쳤다.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장창을 등에 멘 남자는 로트렉을 향해 힐난 어린 눈길을 던졌다.
“하여간 유난이시라니깐요. 지금 같은 시기에 레비쥬가 있을 리 없는데.”
로트렉은 담뱃대를 입에 물며 피식 웃었다.
“말 한마디 물을 뿐인걸.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이봐! 화살들 치워! 자네! 거기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들어오시게!”
화살이라는 말에 남자는 흠칫 몸을 떨며 성벽 위쪽을 바라보았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들이 성벽을 따라 길게 울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감탄 어린 시선에 로트렉과 보초의 얼굴이 자부심으로 흡족해졌다.
성벽을 바라보며, 남자는 천천히 바레아로 다가갔다. 잘생기고 영리해 보이는 얼굴과 젊은이다운 활기참이 묻어 있는 인상이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보초와 로트렉의 얼굴이 우호적으로 풀어졌다. 수풀을 헤치며 나온 남자는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시로 들어서는 문턱을 밟았다.
서늘하고 기분 좋은 밤이었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벌레들이 찌르르 거리는, 별빛이 쏟아질 듯 아름다운…….
그때 신발의 밑창과 돌쩌귀가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울렸다. 성문 주위에 몰려있던 자들의 심장이 이유 없이 뒤흔들렸다. 섬뜩함에 돌아보자 그곳엔 인상 좋은 청년 한 명만이 성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송곳니 긴 짐승이 집 안에 들어온 듯 서늘한 냉기가 뺨을 스쳤다. 이유 모를 한기에 로트렉은 밤바람이 생각보다는 차다고 생각하며 옷을 여몄다. 으스스한 밤이었다.
* * *
“맙소사! 그래서 약을 찾으러 이곳까지 왔다는 겐가?”
“딱히 약을 찾으러 왔다기보단 길을 잃은 거지요. 길을 잃은 김에 약장사를 시작했달까. 그쪽이 고향에 돌아가서도 구색이 좀 맞고 체면도 서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제대로 주객전도네~.”
시빌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맥주로 목을 축였다. 로트렉을 따라 들어온 주점은 제법 소란스럽고 복작거렸다. 농번기였으나 농업으로 생계를 잇는 곳이 아니기에 남자들은 느긋한 자세로 여기저기 늘어져 술잔을 잡고 있었다. 자세는 방만했으나 눈초리는 예리하게 갈려 있었고 남자들의 손가락마다 배어 있는 군살들은 농기구가 아니라 무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임을 시빌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못 보던 남자의 등장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던 사람들은 로트렉이 손을 한 번 휘젓자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시빌은 ‘과연’하고 속으로 웃었다.
입에서 담배를 떨어뜨리질 못하며 연신 피워대는 늙은이는 시빌에게 꽤나 좋은 인상을 받은 듯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말의 반은 헛소리였고 나머지 반은 들어줄 만한 얘기들이었다. 시빌은 적당히 대꾸하며 웃었다.
“요근래 세상 돌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중부대로를 지날 예정인데 말썽은 피하고 싶은데요.”
“중부대로? 자네 미쳤나! 그렌달의 군주가 혈기왕성한 애송이라 덕분에 중부는 삼 년째 전쟁통이야!”
별생각 없이 말을 꺼냈던 시빌은 기겁하는 노인의 모습에 안주를 짚던 손을 멈췄다.
“전쟁이 삼 년째라뇨?”
시빌 그 자신이 성을 떠난 것이 겨우 한 달 전이었고 중부는 평화로웠다. 놀란 시빌의 표정에 로트렉이 더욱 놀란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 어디 딴 세상에라도 다녀왔나? 산속에서 한 달을 헤맸다는 작자가 어째서 중부 전쟁을 몰라?”
“아…….”
시빌은 우물쭈물 술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남부 주술사란 작자들이 어떤지 아시잖습니까. 사람이 방문하면 이상한 거 뭐 하나라도 먹이지 않고선 돌려보내질 않으니 저도 제 머릴 못 믿겠습니다. 약초 판 지 반년 만에 마약쟁이가 된 것 같으니 원.”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로트렉은 경계 어린 눈초리로 시빌을 쳐다보았다. 금발의 준수한 청년은 난처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 곧 로트렉은 이 젊은이가 그의 말과는 달리 상인이 아니라 외지의 마을에 도망치듯 떠나온 애송이인가보다 하고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중부는 인간이 갈 곳이 못 돼. 사실 어느 지역이든 마찬가지지. 남부는 세금이 지독하고 북부엔 주인이 없어. 그나마 조용한 곳이 여기 동부의 산맥지인데 여긴 본디 주인 없는 땅이라 전쟁이고 전투고 일어날 일이 없는 곳 아닌가.”
로트렉은 술잔을 움켜쥔 채 꿈쩍도 않는 청년이 내심 충격을 받았나 보구나 생각했다. 시골에서 촌놈으로 살지 않겠다며 뛰쳐나온 것까진 좋았으나 어딜 가도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말을 들었으니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겠지.
“북부가 주인이 없다고요?”
“그래. 졸지에 성주가 된 마법사가 구혼을 받고 있는 중이지.”
“아멜리타 발루아가 구혼을 받고 있다?”
얼음 같은 목소리에 로트렉은 섬뜩해져 시빌을 쳐다보았다. 청년은 기이하게 경직된 미소를 띤 채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
“분명 주인 있는 분이 아니었나요? 북부도 꽤나 탄탄한 레비쥬가 차지하고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쩌다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답니까?”
“자네 정말 오랫동안 산에 있었던 모양이군.”
로트렉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북부의 레비쥬인 시빌 마이언이 행방불명 된 지 벌써 3년이나 되었네. 아멜리타가 연이 끊어졌음을 공표하고 구혼 받기 시작한 것이 2년 전. 그땐 정말 장관이었지.”
분노로 머리통이 윙윙거렸다. 자신이 살아 있는데 대체 무슨 연이 끊어지고 무슨 구혼을 받는단 말인가. 시빌은 간신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올해가 몇 년입니까?”
“72년이네. 아마 맞을 거야. 올해 마도학회에서 내려온 공문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시빌이 영지를 떠날 때가 69년의 가을이었다. 순식간에 생긴 3년이란 공백에 시빌은 멍하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로트렉이 이젠 거의 꺼림칙해진 표정으로 시빌을 바라보았다. 시빌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며 말했다.
“제가 산에서 길을 잃은 게 69년이었는데,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네요.”
“뭐라?”
“어떻게 이런 일이……, 하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3년간 계속되었다는 중부대로의 전쟁, 주인을 잃었다는 북부. 방금 들은 72년이란 엿 같은 년도. 모든 것이 3년이란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빌은 허탈하게 웃으며 이를 갈았다. 3년간의 기억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 없어진 기억 사이에 성과 영지와 군대가 사라지고 마법사도 잃은 채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돌아가서 손가락이 아니라 모가지를 부러뜨려 놓아야 했다. 아파서 누워 있은 지 닷새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 시빌은 술이 손에 잡히는 대로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덜덜 떨렸다. 옆에서 어어 하며 말리는 노인네의 목소리가 그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곳이 바레아만 아니었어도 피가 튀었을 것이다. 참으로 개 같은 경우였다.
하룻밤 꼬박 술을 처마신 덕에 새벽이 되자 시빌은 술에 떡이 되어 비틀거렸다. 쫓겨나듯 술집에서 나가자 새소리가 짹짹거렸다. 새소리. 숲. 그래 숲지기를 아작내야 했다.
발걸음을 성문으로 향하자 머리가 어질거렸다. 엿 같았다. 이 모든 사태가 잠깐 눈 감았다 뜬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고개를 쳐들자 하늘이 흐릿했다. 성문이 열리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문 앞에 앉아 기다릴 작정이었다. 살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이렇게 제대로 엿 먹어 보긴 잃어버린 3년을 빼도 정말 간만이었다. 그래. 머리통 부서진 뒤론 처음이었다.
“다들 알아서 기었으니까!”
허공에 대고 버럭 소리 지르자 지나가던 주민이 기겁한 표정으로 시빌을 쳐다보았다. 웬 미친놈이냐 하는 시선이었다. 평소에 저런 시선을 받았다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텐데, 시빌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목숨 하나 건진 줄 아시게.’
“씨발.”
숲으로 다시 돌아가 숲을 족치자고 마음먹자 그 이상한 늑대와 까마귀가 생각났다. 순간 내키지 않은 마음이 일었다.
멍하니 성문을 바라보는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군대라기엔 작고, 상인이라기엔 너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그 소리에 시빌은 황급히 성문 옆으로 비켜섰다.
-콰드득! -히히히히힝!!!
육중한 나무에 철이 덧대어진 성문이 한바탕 크게 요동치며 울렸다. 단 한 번의 부딪침에 성문의 목재가 우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휘어졌다. 성문 위쪽에서 요란한 나팔이 울려 재꼈다. 조용하던 마을에 순식간에 떠들썩해지며 군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닫혀 있던 창문과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길거리로 쏟아졌다. 마치 도시가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모양새였다.
“손님이다!”
남자들이 성문 옆의 도르래에 달라붙어 힘을 쓰기 시작했다. 밧줄이 도르래에 감기며 육중한 성문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시빌은 목구멍까지 치솟는 욕을 간신히 눌러 삼키며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커지는 문틈 사이로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레비쥬.”
죽어 땅바닥에 널브러진 말과 멍청히 서 있는 인간의 형태. 그리고 멀리서 죽어라 달려 다가오는 후발대까지. 시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멀리서 다가오는 일행들을 살폈다. 말의 수는 넷이었다. 남자 셋과 여자 하나. 무장도 변변찮았고 대열도 형편없었다. 시빌은 날카롭게 한 번 웃었다.
‘일행을 보면 주인을 알 수 있지.’
레비쥬는 막 각성한 풋내기였다.
시빌은 짐짓 놀란 얼간이의 표정을 가장하며 막 도착한 레비쥬를 쳐다보았다. 곱슬거리는 금발을 늘어뜨린 젊은 남자가 죽은 물고기 같은 눈으로 성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무장한 경비대원들이 성문 주변에 몰려와 활과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중 시빌을 맞이했던 남자가 대장인 듯 무리 앞으로 나와 외쳤다.
“인간인가 레비쥬인가?”
“나는 레비쥬. 전신의 조각이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손님의 대답에 무기를 쥔 마을 경비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경비병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다시 외쳤다.
“이곳은 바레아다! 그대는 무슨 용무로 왔는가?”
“유물을 찾으러 왔다. 이곳에서 보급을 한 뒤 떠나고 싶군. 그런데…….
레비쥬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들어가려 하는데 되지 않는군. 마법인가?”
“이 도시엔 초대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렇다면 초대하라.”
오만한 태도였지만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어느새 시빌의 옆에 선 로트렉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젊은 놈이군. 골치 아플 수도 있겠어.”
시빌은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 각성한 것들은 규칙이란 걸 몰랐다.
“들어라! 초대 전에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레비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경비병은 긴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 도시에서 피를 뿌리는 행위는 패배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찾아와 두드릴 것이다. 그대의 깃발을 꺾고 절망을 선사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레비쥬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패배라는 단어는 언제고 레비쥬의 본능을 건드렸다. 그는 메마른 목소리로 고저 없이 말했다.
“믿을 수 없다.”
레비쥬의 대답에 시빌은 피식 웃었다. 허풍 같겠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믿어야 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22년, 라투스라는 이름의 레비쥬가 바레아에서 한 거지를 죽였다.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여느 레비쥬가 다 그렇듯 별 의미 없는 살인이었을 것이다.
그 후 그는 꽤 승승장구했는데, 어찌나 잘 나갔는지 대륙을 거의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륙의 패권을 둔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적의 수장 에라체에게 처참히 패배했고, 남부의 여덟 개 주를 아우르던 그의 왕국도 그렇게 끝났다.
에라체로 말할 것 같으면, 최후의 전투에서 라투스를 죽처럼 으깨버린 뒤 거나한 승전연을 열었다. 그 연회에서 그는 수하와 내기도박을 했는데, 패배하여 벌주를 들이키던 그는 곧 웃던 얼굴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가 바레아에서 사람을 죽인 건 아니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아이 두엇을 좀 팼을 뿐이다. 저주는 융통성이 없어 그런 것을 가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통일되어가던 왕국은 곧 수백 개로 갈라졌고, 그 후 저주로 인한 패배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각성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레비쥬라면 바레아의 저주가 사실이란 걸 모두 알았다. 때문에 바레아에서 피를 뿌리는 건 대개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애송이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핏덩이.
“믿지 않는다면 그대를 도시 안으로 들일 수 없다. 거래가 하고 싶다면 그곳에 서서 해야 할 것이다.”
레비쥬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그가 도시로 들어가고자 몸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움직거린 후에야 그는 도시에 들어서기를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대가 거래하기에 충분한 돈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그대에게 돈을 받고 물건을 던질 것이오. 돈이 있소?”
그 질문에 레비쥬는 멀리서 다가오는 자신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레비쥬의 시선을 느낀 일행들의 속도가 급작스레 빨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똥줄이 탄다는 듯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온 레비쥬의 일행들은 곧 헐떡거리며 말에서 내려섰다.
“헉헉. 마, 많이 기다리진 않으셨죠?”
“저흰 정말 최선을 다해 쫓아왔습니다!”
‘건달이 둘에 사기꾼이 하나, 도둑년이 하나인가.’
본격적으로 구경할 마음이 되어 시빌은 성문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헐떡거리느라 시뻘게졌거나 시퍼렇게 질린 면상들이 볼만했다. 네 명의 인간들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똑같았다. 초조함과 공포.
“계산해라, 당나귀.”
레비쥬의 말에 당나귀라 불린 사기꾼이 허겁지겁 품을 뒤졌다.
“무엇을 사셨습니까?”
“식량.”
불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대꾸에 당나귀는 처연한 표정으로 성안 쪽을 바라보았다. 레비쥬를 상대하고 있던 경비병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물건들을 말하시오. 그럼 우리가 가격을 알려주겠소. 아니, 그대들은 이 도시에 들어올 수 없으니 거기에서 말하시오.”
도시 안으로 들어서려는 일행들을 막으며 경비대장이 말하자 당나귀가 초조한 낯빛으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유일하게 여자인 검은 머리 계집이 기다렸다는 듯 쏘아댔다.
“밀가루가 떨어졌어. 소금은 아직 남아있지만 버터는 더 사야 해. 밀가루 한 포대랑 버터 두 덩이요! 그리고 물을 떠야 하는데.”
경비병이 손짓을 하자 뒤쪽에서 밧줄 묶인 수레를 가지고 왔다.
“수레 안에 물통을 실으시오. 우리가 채워다 주도록 하지.”
“당신들을 어떻게 믿죠?”
“정당한 대가만 치른다면, 우린 레비쥬를 화나게 하지 않소.”
그 말에 여자는 두려운 듯 그들의 주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레비쥬는 여전히 죽어있는 눈빛으로 멍하니 서 있었지만 여자는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소름 끼치는 얼굴을 했다.
“산속에서 며칠이나 있을 줄 알고 한 포대 사는 거야? 한 달 있을지 일 년 있을지 어떻게 아냐?”
“병신 새끼. 다 떨어지면 다시 도시로 와서 사면 되지! 돈 대신 밀가루 열 포대쯤 지고 다닐 셈이냐, 넌?!”
건달 하나가 끼어들었다 본전도 못 찾고 여자에게 쥐어 터졌다. 얼굴에 칼집이 난 다른 건달 하나가 그 모습을 보더니 낄낄 웃었다.
“뭐 이런 개 같은 도시가 다 있어.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보나 했더니 들어서지도 못하게 해? 거기 여관은 손님 없이도 잘 돌아가나 보지, 앙?”
경비병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레비쥬에게 끌려다니는 무리라는 건 제대로 정비된 군대가 아닐 경우 반쯤 미쳐있는 깡패들이기 일쑤였다. 사기꾼이 험악한 기세의 일행을 막아서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이해하십시오. 여행이 고되었거든요.”
“이해하오. 필요한 것은 그게 다요? 밀가루 한 포대와 버터 두 덩이, 그리고 물?”
“예. 아! 그리고.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경비대장이 안색을 급격히 굳히며 대답했다.
“도시에 들어서지 못하는 레비쥬에겐 사람을 팔지 않소.”
“숲에 관해 잘 아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길을 알고 저 산맥을 뒤지겠습니까?”
“다른 답변은 없소. 이 도시에선 안내자를 구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럼 이 도시 말고 안내자를 구할 만한 곳을 알려 주십시오.”
“없소. 그대들은 자신의 힘으로 유물을 찾아야 하오.”
일행들의 얼굴에 울컥하는 기색이 흘렀다.
“그럼 지도라도?”
경비대장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게 존재할만한 산맥이 아니오. 누가 감히 그런 걸 그린단 말이오?”
멍한 눈으로 서 있던 레비쥬마저 얼굴을 들어 경비대장을 바라보았다. 긴장감이 순식간에 고조되며 공기를 저릿저릿 울렸다.
시빌은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제가 가지요.”
경비대장이 험악한 시선으로 시빌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린가.”
“물론 제가 저 산을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닙니다만.”
옆에 서 있던 로트렉이 대경하여 작게 속삭였다.
“정신 차리게. 저자는 레비쥬야! 인간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자라고. 돈에 환장했나?”
시빌은 로트렉의 속삭임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숲지기가 있는 오두막을 하나 봐 뒀지요. 그자라면 저 산맥을 잘 알고 있을 것 같군요. 그곳까지의 안내라면 어떻습니까?”
“좋다.”
레비쥬가 대답하자 사기꾼이 눈치 보며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 그럼 보수는?”
“글쎄요.”
시빌은 웃었다. 이제는 경비대원들도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레비쥬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보수는 차차 생각해보죠. 제가 원할만한 게 뭐가 있을지, 좀 봐야 알겠습니다.”
레비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 * *
당나귀는 샤로필 출신이었다.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지고 다니며 물정 모르는 노인들의 돈을 긁어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특기이자 생업이었다. 그가 사기로 돈을 모으면 왼쪽 상처라 불리는 건달이 그 돈의 대부분을 갈취해갔다. 돈을 벌지 못할 때는 맞았다. 몸집이 작고 통통해서 당나귀라 불리는 사기꾼은 언젠가 크게 한탕 한 뒤 마을을 뜨는 것만 생각하며 살았다. 대륙 반대편의 대도시까지 흘러가면 왼쪽 상처도 자신을 쫓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왼쪽 상처라고 불리는 건달도 샤로필 출신이었다.
날 때부터 싸가지가 없었던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람을 찌르고 다니며 살았다. 사람 패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깡+패짓을 직업으로 삼았고, 나름대로는 꽤나 성공적인 위치에 올라섰다. 패거리를 이끌며 술집과 도박장, 조무래기들의 돈을 갈취하며 살던 그는 어느 날 그의 자리를 노리는 업계 동기에게 칼을 맞았다. 왼쪽 뺨에서부터 입술까지 크게 찢어진 상처는 그에게 왼쪽 상처라는 별명을 달아주었다. 동기를 처리한 뒤로 그는 악명을 얻었지만 동시에 악몽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배에서 내장을 쏟아내며 죽으리란 걸 알았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의 도둑은 멋진 흑발과 손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샤로필 출신은 아니었다. 몸을 팔기 싫어서 도둑질을 하며 살던 그녀는 남동부의 대도시 출신이었다. 그 도시의 모든 물건이 그녀의 것이었다. 붉은 꽃을 귓가에 꽂으면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들 역시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그녀는 자신을 거절한 남자를 바곳으로 독살했다. 도둑질엔 소질이 있었지만 살인에는 소질이 없었던 그녀는 수배를 피해 도시를 떠나 도망쳤다. 그녀는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남자들에 대해 생각하며 길옆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커팅 맷은 왼쪽 상처의 부하였다.
그는 여섯 살 때 왼쪽 상처를 만났고 그 이후 쭉 그의 말을 따랐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에겐 건방진 연놈들도 그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알게 되면 얌전해졌다. 왼쪽 상처는 그의 영웅이었다. 맷은 그의 말대로 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그가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71년 겨울, 샤로필에 레비쥬가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샤로필은 불과 폭력과 전쟁에 휘말렸다. 건물은 돌무더기가 되고 인간은 고깃덩이가 되었다. 피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표현이 비유가 아니었던 그 저녁에, 살아남은 세 명의 남자들을 앞에 두고 레비쥬는 선택을 강요했다. 고깃덩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공포에 영혼을 담근 채 자신의 수하가 될 것인가? 압도적인 폭력으로 채색된 샤로필은 마치 지옥인 듯 보였고 무기조차 없이 서 있는 레비쥬의 모습은 악마와 다름없었다.
세 남자는 살아남았다.
아네모네는 길옆의 풍경에서 네 명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그중 한 명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길 안내를 자처한 이 남자도 곧 같은 신세가 되어 선택을 강요받으리라. 네 명의 노예들은 공모자의 눈짓을 은밀히 주고받았다. 시빌이 꿈꾸고 예상하던 모든 미래와 현재가 공포로 변하리라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빌은 미소 띤 얼굴로 숲 저편을 가리켰다.
“이 산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숲지기의 오두막이 나올 겁니다. 혼자 가기엔 무섭지만 레비쥬가 계시니 괜찮겠지요.”
왼쪽 상처는 피식거리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레비쥬가 위험에 처한 그들을 구해준다면 그건 그에게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일행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 보수는 생각해 봤나, 시빌 군?”
“하하. 생각해 둔 것은 있는데 흔쾌히 주실지는 모르겠군요.”
“역시 돈?”
“아뇨. 돈은 아닙니다.”
시빌은 숨기는 기색도 없이 슬쩍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아네모네의 뺨에 홍조가 살짝 어렸다.
“뭐야, 너 저년에게 반한 거냐? 저년을 달라고 할 셈이야?”
“……길을 안내한 정도로 사람을 받을 순 없죠.”
세 명의 남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시빌과 아네모네를 쳐다보았다. 아네모네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뭘 봐?”
“아니다. 아무것도.”
건달들이 천박하게 웃으며 음란한 손짓을 보란 듯이 해댔다. 여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기가 약한 사기꾼 당나귀 정도였다.
레비쥬의 일행들이 오해를 하든 말든 시빌은 숲을 헤치며 걸어갔다. 딱히 여자를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인간을 원한다는 점에선 통하는 면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이 갓 태어난 레비쥬의 노예들을 가로챌 생각이었다. 보통 레비쥬들은 자신이 탄생한 마을에서 공포를 맛본 인간들을 데리고 다니지만 시빌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때문에 마법사를 지니고 영지를 얻기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시빌은 그처럼 고된 역사를 되풀이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공포를 먹은 인간만큼 다루기 쉬운 것은 없었다. 레비쥬가 인간을 하찮게 생각한다는 통설과는 달리, 인간의 유용성에 대해서 레비쥬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인간 넷을 부려 할 수 있는 일들의 힘을 시빌로선 간과하기 힘들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부릴 수 있는 폭력과 횡포의 역사는 레비쥬의 역사보다 길고 참혹하며 다양한 것이다.
시빌은 자신이 달려 내려왔던 길을 되짚으며 꺾어진 잡목들을 옆으로 치웠다. 이 어린 레비쥬가 도시 출신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이들이 숲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면 나뭇가지의 꺾인 모양새나 방향만으로도 그 힘과 속도를 짐작하고 경계했을 것이다. 시빌은 나직이 휘파람을 불어 재꼈다.
숲을 달려 내려갔던 전날 밤과는 달리 천천히 걸어 움직인 덕에 일행은 반도 못 가서 저녁을 맞이했다. 각자 손에 익은 역할대로 불을 피우고 음식을 하는 것을 시빌은 미소 띤 얼굴로 도왔다.
늑대도 까마귀도 없었고, 레비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마냥 조용히 불 가에 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싸늘한 얼음이 놓여 있는 것 같았고, 자연에 속하지 않은 기묘한 죽음이 숨을 내쉬는 것만 같았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으십니까?”
시빌이 레비쥬에게 말을 걸자 시시껄렁한 농담과 웃음으로 가득 찼던 야영지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자신만만한 악당의 미소로 가득했던 왼쪽 상처의 얼굴조차 공포로 희게 질렸다. 들추지 말아야 할 장막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거둬버린 시빌은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파헤치며 말했다.
“유물이라는 게 대체 뭔가요? 누구의 유물이기에 레비쥬가 원하는 거죠? 전 레비쥬가 가장 먼저 원하는 게 마법사일 거라 생각했는데.”
침묵이 모닥불의 불씨를 타고 춤췄다. 자신의 숨소리가 크게 들릴까 두려워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문 레비쥬의 일행들은 감히 그들의 주인을 쳐다보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법사.”
레비쥬의 탁한 목소리에 그의 노예들은 서슬이라도 맞은 양 몸을 떨었다. 죽은 물고기처럼 탁한 눈동자가 시빌을 바라보았다.
“영지를 지닌 마법사가 한 명 있다지.”
“……예. 한 명 있지요. 듣기로는 엄청난 미인이라더군요.”
“북부로 바로 가는 것보다는 먼저 이곳에 들러 유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북부는 멀고 경쟁자도 많으니 힘을 가져가는 게 현명한 일이겠지.”
시빌은 컵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것을 이런 애송이가 노린다고 생각하자 불쾌함으로 눈알이 뻑뻑해졌다. 시빌은 애송이의 머리통을 필히 조각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말씀대로네요. 유물이란 게 레비쥬에겐 힘이 되는 모양이지요?”
“모른다.”
레비쥬는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다만,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는 건 안다.”
개소리였다.
시빌은 유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작위적으로 레비쥬에게 찾아오는지 알고 있었다. 레비쥬가 되고 나서 지금까지, 시빌은 유물을 찾아야겠다는 열망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유물을 찾으면 힘이 된다는 것은 안다.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안다. 유물을 손에 넣으면 좋다는 것을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레비쥬에게 있어서 유물 찾기는 지상과제가 아니라 부차적인 트로피에 불과했다.
레비쥬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전쟁과 지배였고 마법사나 유물은 그러한 본성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기실 시빌이 유물을 찾기 위해 이 산맥까지 오게 된 것도 수하들이 권했기 때문에…….
‘그래. 부하들이 권해서 왔지. 그리고 사고를 당했다?’
시빌은 자신에게 유물을 찾으라고 권했던 자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쉽지 않았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
“숲지기는 어디에 있지?”
수하들의 얼굴을 떠올리던 시빌은 레비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 차렸다. 생기 없는 눈동자가 시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빌은 팔을 들어 동쪽의 능선을 가리켰다.
“능선을 따라서 저 앞의 봉우리만 넘으면 됩니다. 멀지 않습니다.”
“얼마나 걸리지?”
“내일 오후쯤이면 도착할 겁니다.”
그 말에 레비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일은 아침 일찍 움직이도록 하겠다. 북부로 가는 길이 너무 늦어져서는 안 돼. 발루아 공이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엔 도착해야 한다.”
“……그럼 빨리 잠드는 게 좋겠습니다. 여름 산의 아침은 이르죠. 새소리에 깰 겁니다.”
산행에 지친 일행들은 눕자마자 잠들었다. 그리고 시빌은 레비쥬에게 선사할 영원한 잠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 * *
신이 장대한 노래를 짓다 잉크를 엎어버린 것 같은 밤이었다.
안개 낀 산맥도, 부엉이의 날갯짓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낮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의 불씨를 바라보며 시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행들은 불침번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레비쥬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보호 아래 있다는 방만함이 그들의 굳게 감긴 눈꺼풀로 나타나고 있었다.
어리석었다.
시빌은 수염이 파릇하니 솟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숲지기는 자신이 레비쥬란 걸 알고 있으니 일행들이 그를 만나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했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검이라도 하나 사놓았다면 일이 편했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해치우면 되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일행들의 무장은 시원찮았다. 손바닥 길이를 조금 넘기는 단검 정도가 가장 험악한 무기였고 갑옷이라 할 만한 건 왼쪽 상처가 입고 있는 가죽 보호대 정도였다. 어차피 레비쥬의 전투에서 이 정도 숫자의 인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시빌은 제 할 바만 제대로 하면 되었다.
시빌은 조용히 일어섰다. 기억이 없는 기간을 합치면 삼 년. 기억하는 기간만 치면 두 달 만의 싸움에 마음속이 들떴지만 차분히 가라앉혔다. 암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인간들을 제압하기 위해선 압도적인 광경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시빌은 생각을 훌훌 털어버렸다. 고민 자체가 우스웠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새벽이 오길 기다렸다. 야영지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가 마주치게 되리라 예상했던 늑대나 까마귀, 둘 다 모습도 소리도 없어 같은 숲인가 의심이 됐다.
새벽까지 기다리리라 생각했던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 딱 좋을 정도로 향긋한 풀냄새가 그를 깊은 꿈으로 이끌었다. 꿈속에서 그는 처음 보는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기이한 것은 기분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행복했으며 충만한 기쁨이 가슴 속에 가득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다.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두 손 모두 깨끗했다.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쇠 냄새도, 무기의 손잡이를 감싸는 가죽 냄새도 나지 않았다. 대체 살육과 전쟁이 관련되지 않았는데 이리 행복하다니? 의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쁜 마음으로 시빌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가을의 빛을 받아 잔잔한 호수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일렁거렸다. 문득, 호수에 한 인간이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차가운 물 때문에 그자의 피부 위엔 소름이 돋아 있었다. 시빌은 자신의 피부에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일종의 전율이 몸을 달렸다. 척추가 뻐근해졌다. 마약을 한계까지 들이켜 이제 곧 숨이 끊어지겠구나 싶은 한계감이 쇄골께를 텅텅 울렸다.
‘위험해.’
깨어나야 한다고 자신에게 명령한 순간, 시빌은 눈을 떴다.
새소리가 사방 천지를 메우며 울려대고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새벽의 향기에 시빌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대체 언제부터? 생각할 필요도 없이 깨달았다. 꿈속에서 그 사람을 보았을 때부터다. 그 살결에 인 소름을 보았을 때부터…….
새소리가 울렸다. 미칠 듯한 행복 속에서 머리채를 잡혀 진창으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어지간히 시끄러운 아침이었다. 자고 있던 일행들이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욱하고 속이 뒤틀려 시빌은 모닥불께의 돌을 집어 들었다. 불기에 달궈진 돌이 손을 지졌다. 레비쥬는 일어나 예의 그 멍청한 눈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시빌이 그 무뚝뚝한 얼굴을 돌로 후려치는 덴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머리가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피가 불씨 튀는 것마냥 후둑, 툭툭 뿜어져 나왔다. 일행들은 일어나던 모습 그대로 멍해져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표정이 가관이었다. 시빌은 돌을 퍽퍽 내리쳤다. 어디서 해치울까 고민한 게 멍청한 짓이었다. 내킬 때 그냥 쳐 죽였어야 했다. 바레아에서 나오자마자 죽여 버리고 움직였다면,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허억……! 끄학!”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냐? 금발이 가득한 머리를 깨부수며 시빌은 비웃었다. 머저리 건달 하나가 칼을 반쯤 뽑은 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 시빌은 잠시 휘두르던 팔을 멈추고, 돌을 든 채로 일어섰다. 끈끈한 피가 진득하니 손마디를 타고 흘렀다. 시빌은 숨을 훅하고 내쉬었다.
“씨발.”
그러고는 주저앉은 여자와 당나귀, 건달 두 명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파리해진 얼굴들이 설명을 원하고 있었다.
“갓 각성한 레비쥬가 왜 공포스러운지 아나?”
시빌은 친절이 아니라 조롱을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약하기 때문이다. 부딪치면 깨지니까 아예 건들질 못하도록 독기를 뿜으며 다니는 거지. 지금 이 꼬라지를 봐. 손 한 번 못 써보고 뒈지는 꼴을 말야.”
시빌은 널브러진 레비쥬의 몸을 발로 찼다. 왼쪽 상처가 벌벌 떨며 말했다.
“수, 순식간에, 그런 속도로 덤비면 누구라도…….”
“그건 너희 인간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얘랑은 관련이 없지. 적어도 처음 처맞았을 때 뭐라도 집어 들고 반격했어야 할 거 아니야.”
쓰레기 차듯 레비쥬의 몸을 퍽퍽 차던 시빌은 갑자기 몸을 숙여 피로 물든 머리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뼈가 다 드러나 핏물 낭자한 폭력 사이사이로 흰빛이 비쳐 보였다. 완전히 돌아간 허연색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의미 모를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도살장의 문을 열어젖힌 것 같은, 그 낭자한 광경 속엔 역겨움을 일으키는 요소가 있었다. 마을을 파괴하고 공포로 그들을 목 맨 개처럼 끌고 다닌 대상임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애처로운 슬픔을 일행이 느낄 때였다. 시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서진 레비쥬의 머리에 대고 말했다.
“너 살아 있지? 죽은 척 쇼하지 마, 개새끼야.”
희번뜩 거짓말처럼 굴러 나와 시빌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일행들은 기겁했다.
* * *
로빈 패트릭은 샤로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금발과 아버지의 갈색 눈을 물려받은 그는 허약한 몸도 함께 물려받았다. 책을 좋아했지만 머리는 딱히 좋지 않았고, 그럭저럭 글과 계산하는 법을 익힌 뒤엔 편지를 대신 써주거나 문서계약의 중계를 맡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한 몸 추스를 정도는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겨 제법 단란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가난해도 펜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라, 더욱이 대서일을 하고 있기에 마을에서 그는 제법 존경받는 위치였다. 청혼은 받아들여졌고 결혼을 준비하는 나날들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그것이 그의 눈에 뜨인 것은 아내가 될 여자에게 줄 결혼 선물을 고를 때였다. 이상한 가죽 장정의 책이 가게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홀리듯이 다가간 로빈은 그 책을 펼쳐 읽었다. 내용은 평범한 교리집이었다. 다만, 어느 신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을 펼쳐 읽어 내려갔음에도, 그 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빈은 그 책을 샀다.
믿지도 않는 신의 교리집을 결혼 선물로 줄 수는 없다. 때문에 그 책은 한참 동안 로빈의 서재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가게에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먼지가 초겨울의 눈처럼 책을 덮었다.
그 책이 다시 열린 것은 71년 겨울이었다.
열렸다기보단 먹혔다.
이유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인생 전체가 망가질 만한 사고가 있었다면 그 충격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 따윈 없었다. 어느 날 책을 펼치다 손끝의 가죽 장정이 신경 쓰였고 무슨 가죽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식욕이 일었다.
위가 텅 비어 있는 듯한 식욕이었다. 자신의 손이라도 씹어 삼킬 수 있을 듯한 식욕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책의 장정을 핥았다. 이로 물었다. 씹었다. 삼켰다.
그리고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 것이다.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눈에 보인 것은 붉은 피였다. 아내도 자식도 참살한 그의 손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생채기 없이 새하얀 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손을 들어 냄새를 맡자 쾌락이 치밀어 올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도 금슬 좋은 부부였고 아끼던 자식이었는데, 어차피 그들은 인간이었다.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시빌은 무의식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였다. 마을을 부수고 움직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 칼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자들도 있었지만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식탁의 빵을 쪼개는 기분으로 인간을 쪼개는데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의식이 명령했다. 네가 인간이라는 증거를 지워라.
로빈 패트릭은 그렇게 했다. 자신이 인간의 태에서 났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부모의 집을 가장 먼저 찾아가 부수고 죽였다. 그리고 자신과 가장 친한 자들부터 죽였다.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본능이 수하를 들이라고 명령했기에 혼란을 틈타 도둑질하던 잡놈들을 거둬들였다. 인간의 살을 들이대며 먹으라고 명하자 그들은 죽는 대신 먹었다. 먹지 않은 자들은 죽여주었다.
본능이 또다시 유물을 찾으라고 명했다. 옛날 읽었던 책 중에 파르티잔 숲에 유물이 있다고 하는 구절을 떠올렸다. 마을에 아직 남아 있는 멀쩡한 물건들을 모아 파르티잔을 향해 움직였다. 가는 도중에 여자를 들였다. 음식이 먹을 만해졌다. 성욕이 일었지만 인간을 안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본능이 또다시 속삭여서 로빈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유물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장대한 숲의 한가운데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영광의 아침에 그는 머리가 부서진 채 널브러졌다.
놀라운 것은 머리가 부서졌음에도 살아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를 여기까지 이끈 본능이 다시 속삭였다.
‘저자는 레비쥬다. 당해낼 수 없다. 죽은 척하고 있어라.’
그래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귓가에 속삭인 것이다.
“너 살아 있지? 죽은 척 쇼하지 마, 개새끼야.”
묵직한 돌이 다가오는 것을 로빈은 손을 들어 막았다. 뼈가 부서져 나가고 돌에선 불이 튀었다. 공격이 빗나간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얼어붙은 것 마냥 추웠다. 머리가 깨져 속이 드러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쉬다 보면 나을 테지만, 눈앞의 남자를 없애기 전엔 불가능했다.
살의와 분노와 공포.
‘어째서 공포를 느껴야 하나. 나는 레비쥬인데.’
그와 같은 생각도 찰나. 공포는 금세 끝났다. 머리를 잃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쓰러지는 것을 로빈은 땅바닥에서 바라보았다. 태양을 뒤로 진 인간의 형체가 지옥의 문처럼 검고 거대하게 그를 향해 입을 벌렸다.
죽음이 도래했다. 그를 여기까지 이끈 본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 * *
시빌은 피칠갑을 한 채 우뚝 섰다. 건달 둘은 희게 질려 있었고, 사기꾼은 나무 등치에 토하고 있었다. 기절해 있는 여자를 마지막으로 일견한 뒤 시빌은 손을 털었다. 투둑거리며 떨어지는 피 소리에 건달 하나가 몸서리를 쳤다.
“대체……. 넌 뭐냐?!”
“괴물?”
시빌은 키득거리며 짧게 웃은 뒤 대꾸했다.
“나는 레비쥬, 발치의 이것과 똑같은 작자다. 그리고 혹시 헷갈릴까 봐 말해두겠는데, 너희들은 이제 내 것이다. 예의를 보여라.”
“나, 난 절대 다시는 이따위 짓을 하지 않아! 지랄 마라 이 괴물 새끼야! 저 자식이 죽었으면 끝이야! 난 갈 거다. 갈 거야!”
왼쪽 상처가 발광하는 모습을 시빌은 싸늘히 쳐다보았다. 잇새로 어이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통을 들어 손을 씻으려다 말고 마개를 다시 잠갔다. 맘에 안 드는 놈을 물씬 패 죽인 덕에 풀렸던 마음이 다시 짜증스러워졌다.
“공포가 부족한가? 내가 네놈들에게 인육을 다시 먹여야 하나? 그렇다면 이 넷 중 하나를 도륙해서 먹여줄 마음이 있다. 대답해라. 원하나?”
왼쪽 상처는 후들거리며 주저앉았다. 커팅 맷이 당황하며 왼쪽 상처와 시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왜 레비쥬의 수하가 됐는지 알아? 너희들이 삶을 위해 영혼을 팔아버릴 정도로 나약하고, 악마의 종이 될 만치 사악하기 때문이다. 이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너흰 알 텐데? 날 따르길 거절한다면, 어디 가서 뭘 어쩌려고?”
대답은 없었다. 시빌은 당나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는 아직도 구토하고 있었다. 위액이 줄줄 흘러 땅을 적시는데도 멈추지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봐, 당나귀.”
무심히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던 당나귀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를 목도했다.
* * *
시빌은 콧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걸었다. 그의 뒤로는 죽을상을 한 인간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인간의 수는 셋이었다. 건달 둘과 여자 하나는 한겨울이라도 되는 양 벌벌 떨고 있었다. 곧 익숙해질 거라고 시빌은 생각했다.
산행은 유쾌했다. 밤새 야영했던 자리에는 인간의 형태를 한 고깃덩이 둘이 남았지만 산짐승들이 곧 처치해줄 것이다. 사나흘이면 뼈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전날의 죽은 레비쥬에게 말했던 것과 같이, 숲지기의 오두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나타났다. 다시 봐도 초라한 산장이었다. 잘 정리된 작은 밭을 지나 문 앞에 서자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경계도 하지 않은 집 꼬라지가 짜증스러웠다. 레비쥬에게 거짓을 말하고 겁먹은 나머지 도망친 것인지도 몰랐다.
문을 밀자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열렸다. 시빌은 인간들을 밖에 있도록 한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오임에도 집 안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였다. 벽마다 늘어선 약초들을 피해서 시빌은 침실의 문을 밀었다. 침입자가 온 것도 모르는지, 숲지기는 무방비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들어온 시빌의 모습에 숲지기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시빌은 잠시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녹색의 겉옷을 벗은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 있었다. 간밤의 꿈이 떠올라 숨이 턱 막혀왔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피에 젖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얼기설기, 엮어놓다시피 한 붕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씨발.”
놈에게 저주라도 받은 건가. 그래서 그따위 꿈을 꾼 것인가. 시빌은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물렁한 태도로 행동했기 때문 아닌가. 손이 아니라 모가지를, 그래. 모가지를 부수러 온 거였다.
“너 날 속였겠다.”
숲지기의 새까만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며 다른 곳을 향했다. 빠르게 방 안을 훑는 숲지기의 얼굴이 공포에 젖어 있었다. 도망칠 수 있는 문은 시빌이 막고 있었고 주문을 외우자니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제발……. 자비를 베푸십시오.”
“빌어먹을 도시에 내려가니 삼 년이 지나있더군. 내 마법사는 딴 놈들에게 구혼을 받는 중이고 내 영지도 함께 개판이 됐어! 삼 년이라고!!”
“제가 당신을 봤을 때 당신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숲지기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외쳤다.
“당신은 기억을 잃은 채 저와 살았고 그제가 되어서야 기억을 되찾으신 겁니다. 레비쥬인 것을 잊고 사셨으므로, 굳이 말하여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빌은 기가 막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꺼먼 것이 땟물이 줄줄 흐르는 지저분한 천장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살았다고?!”
거의 비명처럼 들리는 말을 내뱉은 뒤 시빌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골이 아팠다. 이 말도 거짓일지 몰랐지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전 본디 까마귀라 불리는 자로, 빛나는 것을 즐겨 모읍니다. 그 날 당신의 머리가 햇살에 반짝였기에, 몰려드는 짐승들을 물리고 집에 데려온 것입니다.”
“내가 네 옆에서 대체 뭘 했다는 건데?!”
“절 도와주셨습니다. 약초도 캐오고, 짐승도 잡고. 산속은 춥고 외롭습니다. 좋은 말벗이 되어주셨습니다. 당신은.”
숲지기는 방구석으로 도망쳐 줄줄 울었다.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는 모습에 시빌은 기분이 진창에 처박혔다.
“손가락을 열 개 꺾을 때까지 별말도 하지 않더만, 줄줄 잘도 불어대는군.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난 그냥 널 죽이러 온 거다.”
숲지기의 어깨가 크게 움츠러들었다. 물기를 띤 검은 눈이 두려워하면서도 시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빌은 그런 숲지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상처 입은 숲지기의 손을 손안에 놓고 천천히 펴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다 부목이 꼼꼼히 대여 있었다. 좋은 마법사는 아닐지 모르나 솜씨 좋은 약제사임은 분명한 듯 보였다. 시빌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널 끌고 가겠다.”
피 묻은 시빌의 손이 상처 입은 손가락을 어루만지자 숲지기의 몸이 긴장으로 덜덜 떨렸다. 시빌은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널 그냥 죽이고 가도 되겠지만 지금 난 마법사를 잃었어. 대용품이 필요하니 같이 가줘야겠다.”
“대, 대용품이라뇨? 전.”
“마법사가 아니라고? 마법사처럼 보이긴 하지 않으냐.”
시빌은 키들 날카롭게 웃었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레비쥬를 만났지. 유물을 찾으러 온 애송이였는데, 이곳으로 오던 길에 죽였다. 놈이 감히 내 마법사의 이름을 언급하며, 내 땅을 노리더군. 감히.”
분노로 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시빌은 거친 숨을 숨기지도 않으며 숲지기의 상처 입은 손을 움켜쥐었다.
“삼 년 동안 내가 무얼 하고 살았는지 확실해질 때까지, 그게 아니면 내가 다시 내 자리를 찾을 때까지 넌 내 옆에 있어야 한다. 여행 중에 내가 널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단 낫지 않아?”
“자, 자비를 베푸십시오. 전 이곳을 지키고 관리하는 자입니다. 당신을 따라 이 산을 나갈 수는…….”
숲지기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비명 질렀다. 시빌이 쥐고 있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웃었다.
“싫으면 어쩔 수 없다만. 내게 자비를 베풀란 소린 하지 마. 난 지금 심기가 매우 안 좋다.”
시빌은 대답도 듣지 않고 숲지기를 질질 끌고 나왔다. 방을 나와, 전날 익숙하게 보았던 녹색 옷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흐느끼며 외투를 끌어안는 숲지기를 향해 시빌은 고압적으로 명령했다.
“짐 챙겨.”
숲지기는 꿈지럭거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시빌은 버럭 소리 질렀다.
“짐 챙겨! 이 빌어먹을 숲을 태워버리기 전에!!”
어두운 피부가 저렇게 허옇게 질릴 수도 있구나, 시빌은 감탄했다. 불편한 손에도 불구하고, 숲지기는 필사적으로 짐을 꾸렸다. 낡고 커다란 가방이 얼마 안 되는 옷가지로 볼록해지자 시빌은 선반 위의 약병들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약을 챙겨. 네가 의사 짓도 해야 한다.”
숲지기는 벌벌 떨며 시키는 대로 했다. 준비가 대충 끝났다 싶자 시빌은 매가 먹이를 잡아채는 양 숲지기의 팔목을 잡아끌고 나왔다.
문밖에는 세 명의 인간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산장 안에서 터져 나온 비명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며 머리를 움켜쥔 여자가 숲지기의 손을 보고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앞에 숲지기를 던져 놓으며, 시빌은 소개했다.
“이 숲의 숲지기다. 우리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으니 잘 지내도록.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지?”
숲지기는 넘어진 몸을 일으키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븐.”
* * *
바레아는 하루 만에 돌아온 일행들의 모습에 침묵했다. 여섯이었던 숫자는 다섯으로 줄어 있었고, 그나마도 한 명은 다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레비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해하며 일행들을 살펴보던 바레아의 경비대장은 시빌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피투성이였다. 전날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시빌의 옷은 비 온 날 물에 젖은 것마냥 피에 젖어 있었다. 사람 수가 줄었다면, 그것이 누가 한 일인지는 자명했다.
“레비쥬인가 인간인가?”
목구멍이 뭐에라도 막힌 듯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시빌은 경비대장의 질문에 웃음기 하나 없이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지?”
레비쥬는 자신이 레비쥬임을 숨기지 못한다. 때문에 이러한 질문만으로 방문객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 답했었으니 저 자는 분명 인간일 터였다. 하지만 저자가 인간이라면, 대체 어떻게?
목이 조여 오는 듯하여 경비대장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금발의 레비쥬는 어떻게 되었나?”
“죽였다. 참고로 대륙의 법은 레비쥬의 살해를 죄로 취급하지 않지.”
사기꾼 당나귀를 죽인 것은 쏙 빼놓은 채 시빌이 말했다. 경비대장은 레비쥬를 죽였다는 시빌의 말에 현기증이 났다. 유물을 노리고 오는 레비쥬들이 많아 그들끼리 부딪치는 모습도 종종 보곤 했던 바레아의 경비대장이지만 이처럼 인간인 척 행세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초대하지 않을 건가?”
시빌의 뻔뻔스러운 물음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저런 폭탄 같은 자식을 성안으로 들이긴 절대 싫었다.
“거절한다.”
시빌은 싱글싱글 웃었다.
“난 이 성문 앞에서 며칠이고 머물며 오고 가는 상인을 죄 죽여 버릴 수도 있다. 어쨌건 바레아 바깥이니 내게 저주가 올 리도 없지. 너희가 굶어 죽는 게 빠를까? 아니면 성문을 열고 도시 밖으로 나와 내 손에 죽는 게 빠를까?”
“당신은 거짓을 말했고, 때문에 당신의 맹세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당신을 도시로 들여보낼 수는 없소.”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지? 난 인간이고, 또한 레비쥬다. 내가 무슨 산양의 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웃기잖아. 안 그래? 하하!”
시빌은 정말로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가 이 말을 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그는 너무 즐거웠다. 레비쥬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레비쥬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양이 어떻게 늑대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가끔은 낳기도 하는 것이다.
“초대해.”
“거절하겠소.”
시빌은 흥이 깨진 얼굴로 도시 앞에 머물 준비를 명했다. 그 즉시 성루의 궁수들이 시위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레비쥬의 위협을 쉴 새 없이 겪어온 도시이기에 협박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전서구를 올리고 버티다 보면 도시를 구해줄 레비쥬가 오리란 걸 바레아의 사람들은 알았다. 유물을 찾기 위한 전초기지에 빚을 지워두려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시빌 뒤에 서 있던 녹색 외투의 사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상하게도 낯익은 감이 있어 경비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얼굴을 살펴보았다. 깊게 눌러 쓴 후드 사이로 어두운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구슬이 엮여 있는 녹색의 외투는, 들은 바가 있었다. 신음이 절로 흘렀다.
“들여보내 주십시오.”
“어째서 당신이 숲을 나와서…….”
까마귀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피 묻은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모습에 경비대장은 상황이 대충 짐작되었다. 저 무도한 자가 정말로 숲지기를 찾아다가 일을 낸 것이다.
파르티잔의 숲지기는 까마귀라 불렸다. 까마귀라고는 하나 불길해서 그리 불린 것이 아니라, 반짝이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귀한 물건도 싸구려 구슬 하나에 넘기고 반짝이는 쇠붙이에 넋을 잃어 비싼 값을 지불했다. 빛나는 것에 환장하면서도 결코 훔치는 일은 없어서 까마귀란 별명은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대개 어두운 피부에 검은 머리를 지닌 카디넬은 자기들끼리만 교류하며 살았다. 신에게 저주받았다, 버림받았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냥 촌사람이었다. 더구나 숲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것은 언제나 어두운 피부의 인간이었다. 전염병이 돌 때 구제해 주는 것도 그들이었다. 요컨대 파르티잔에 접하며 사는 이들 중 카디넬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드문 것이다.
경비대장은 떨떠름한 심정으로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레비쥬라고 주장하는 저 시빌이란 작자는 정말로 웃는 얼굴로 미친놈 같아 싫었다. 그렇다고 대대로 은혜를 입어온 파르티잔의 숲지기가 들여보내 달라는데 거절할 수는 없다. 더욱이 부상을 입어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경비대장은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성문을 열어라.”
* * *
일행들은 감탄한 시선으로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유물을 찾을 것도 아니면서 저런 손 병신은 왜 데려왔나 의아해하던 일행들은 곧 그의 손놀림에 매료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입놀림이었다. 새가 둥지를 짓고 날개 깃을 정리하는 것 마냥 세심하고 정확하게 붕대를 풀어내고, 다시 싸매는 모습이 흡사 마법이었다.
“키스 잘하겠다.”
도둑의 말에 세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붕대를 싸다 말고 힐끗 도둑을 바라보는 레이븐에 면상엔 땟국물이 가득했다. 맷이 고개를 흔들며 시빌에게 물었다.
“유물은 찾으러 가지 않으십니까?”
“그딴 걸 왜?”
시빌은 대놓고 비웃었다.
“유물을 찾는다고 영지가 절로 손에 들어오나? 군대가 생기나? 오히려 유물을 빼앗기 위한 쟁탈전만 벌어져서 작살나게 고생할걸. 우린 북부로 간다.”
“중앙 대로로 가게 됩니까? 그쪽은 전쟁이라던데…….”
“상황을 봐서 결정하도록 하지. 일단 파르티잔 부근을 벗어나면서 정보를 모아야겠어. 너희들도 그 애송이에게 끌려다녔으면 아는 게 별로 없을 듯한데.”
왼쪽 상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죠. 말을 구입하고부턴 마을에 묵는 일도 거의 없이 이쪽으로 달려왔기 때문에.”
“마차를 구입해 움직이겠다. 말이 네 필이나 있으니 장사를 해도 되겠군. 다음 마을에선 특산품을 구입해야겠어. 이 부근 특산물이 뭐지?”
왼쪽 상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여자도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레이븐을 향했다. 손에 묶은 붕대를 소심하게 매만지고 있던 까마귀는 사람들의 시선에 겁먹은 눈동자로 바짝 굳었다.
“어…, 이 계절이라면 약초나 염료가 많이 날 텐데. 못 삽니다. 관용상인이 아니면 지역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가 없어서.”
맷이 피식 비웃었다.
“난 관의 허락 따위 받고 일한 역사가 없는데.”
시빌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 지역 영주가 누군데?”
“두카토라고 대대로 이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입니다. 이곳과는 많이 떨어져 있어서 허락을 받으러 가자면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시빌이 웃으며 돈주머니 속을 힐끔 보았다.
“이곳에서 멀다면 지배력도 약하겠군. 시골 사람들은 내가 잘 다루지. 마차를 사고 음식을 채워놓도록. 돈은 그럭저럭 있군.”
시빌은 피 묻은 옷을 벗어 갈아입었다.
“무장은 이곳에서 구입할 테니 다들 따라 나오도록. 그 검은 네 것인가?”
왼쪽 상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칼을 툭툭 쳤다.
“다른 무기는 필요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기를 사는 동안 네가 마차를 구입하면 되겠군.”
시빌은 주머니의 돈을 덜어 왼쪽 상처에게 넘겼다. 정직한 거래는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왼쪽 상처는 눈살을 찌푸리며 돈을 받았다.
큼직한 장검을 하나 구입해 옆구리에 찬 시빌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른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다트를 구입한 여자는 손에 무기가 들어오기 무섭게 몸 여기저기로 숨겨 넣었다. 제법 날렵한 솜씨였지만 실제로 무기를 써 본 적은 별로 없겠다고 시빌은 생각했다. 왼쪽 상처의 똘마니 맷은 도끼를 구입해 허리에 바끄러 매었다. 손도끼는 제법 예리하게 날이 갈려 있었지만, 실제로 힘을 쓸 일이 생기면 주먹부터 사용하리라.
강제로 노예취급을 하며 끌고 다니는 주제에 무기를 사주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담이 배 밖에 나왔다고 할 만한 일이었으나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있다면 벌써 쳤을 것이다. 죽일 수 있었다면, 진즉 죽였을 것이다. 레비쥬의 힘을 모르는 이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이 파괴되고, 머리가 부서진 채 눈알을 굴리며 일어서던 레비쥬의 모습을 본 인간들은, 그런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얇게 연마된 가죽 갑옷들을 훑어보던 시빌은 부러진 손가락으로 멀뚱히 서 있는 레이븐을 쳐다보았다. 대장간의 기둥 옆에 선 레이븐은 무기를 진열해 놓은 가판대 앞으로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넌 무슨 무기를 쓰지? 너 말이다, 까마귀.”
갑작스러운 지적에 까마귀는 몸을 작게 구부리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날붙이는 쓸 줄 모릅니다.”
“숲에 혼자 살면서 무기를 다룰 줄 몰라?”
“산적이 있는 숲도 아니고요오…….”
“짐승들이 위험할 테데.”
“전 카디넬이라서…….”
“아. 짐승의 족속이라는 건가.”
웃음기 어린 시빌의 목소리에 까마귀의 몸이 더욱 작아졌다. 멀쩡한 두 개의 손가락이 붕대 위를 끊임없이 매만졌다. 어둑어둑 물든 몸 중 유일하게 하얀 붕대가 눈에 박혀왔다. 이렇게 끌고 다니게 될 줄 알았으면 손가락을 분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시빌은 눈살을 찌푸리며 단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까마귀의 품에 던지자 검이 떨어질까 허겁지겁 끌어안았다.
“손이 그 모양이라 쓸 수는 없겠다만 일단은 그걸…….”
“기왕 주실 거라면 저, 저 단검이 좋겠는데요.”
시빌은 레이븐이 붕대 감은 손으로 가리키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보석 같은 것이 폼멜에 박혀있는 아름다운 단검이 레이븐의 손끝에 놓여 있었다. 실용성은 어디에도 없는, 편지 봉투 자르는 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약해 보이는 단검이었다.
“……, 이걸로 뭘 하려고?
“반짝이잖습니까.”
단박에 튀어나오는 대답에, 의외로 뻔뻔한 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시빌의 머리를 스쳤다. 레이븐의 새까만 눈동자가 한 점 흔들림 없이 단검 끝의 구슬을 향해 있었다. 싸구려임이 분명한 커다란 구슬이 대장간의 불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까마귀의 눈도 똑같이 반들거렸다.
시빌은 말없이 단검을 사서 까마귀의 품에 안겼다. 까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검을 받아 들었다. 부목을 대어 구부려지지도 않는 양손 끝에 단검을 끼운 채, 단검 끝의 구슬만을 바라보며 일행의 뒤를 따라 졸졸 걸었다.
“좀 넣어라…….”
보다 못한 도둑이 말했지만 까마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둑은 자신도 보석을 사랑하지만 적어도 싸구려와 값나가는 건 구분할 줄 안다며 까마귀를 비웃었다.
여관 앞엔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왼쪽 상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내는 건 딱 질색이라는 얼굴로 마차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맷이 달리다시피 그 옆으로 다가가 도끼와 갑옷을 보여주었다. 왼쪽 상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저녁은 풍성했고, 사람들은 아침의 살육을 잊은 듯 행동했다. 시빌은 그런 분위기가 기꺼운 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룻밤을 묵은 뒤 일행은 바레아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아무런 사고도 나지 않은 것에 바레아의 경비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안도하는 경비대와는 달리, 그 옆에 선 로트렉은 심각한 얼굴로 떠나는 일행의 뒤를 바라보았다. 일행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자 그의 눈동자는 불안을 가득 담은 채 파르티잔의 장대한 숲을 향했다. 짐승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 * *
동부를 가로지르는 대로는 파르티잔에서 한참은 남서쪽으로 가야 있었다. 행상들이 만든 길을 따라 마차는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염료와 약초를 구입한 뒤 상인을 위장해 움직인다는 게 시빌의 계획이었다.
산과 숲이 많은 동부답게 여름의 정취는 굉장했다. 유물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부하들과 함께 파르티잔으로 갈 때에도 이와 같은 풍경이었음을 시빌은 떠올렸다.
바로 얼마 전의 기억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숲 사이로 달리는 데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와 땅에 부딪쳐 일어난 물보라가 안개와 섞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영지가 빈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바레아를 우회하여 진격한 터였다. 그를 따른 이십여 명의 시종과 기사들 모두 신중한 자들이라, 시위에 살을 걸친 활을 손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시빌은 일행의 중간에 서 있었다. 선발대가 잡목을 베어 넘겨 만든 길 사이로 말을 탄 채 슬슬 걷고 있었다. 여름이라 비가 쏟아지는 산중이어도 견딜 만했다. 말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이 조금 걱정스럽던 때였다.
번개가 쳤던 것 같기도 하고,
비가 그쳤던 것 같기도 하다.
머리가 부서졌던가? 아니면 목이 떨어졌던가?
사방엔 빗소리가 가득했고 눈으로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비인지, 땀인지도 알 수 없었다. 비 먹은 잎새들이 눈앞에 드리워져 거인의 정원처럼 보였다. 밤 같은 어둠이 왔고,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까마귀의 집이었다. 집 밖은 맑고 맑기만 해서 어디서도 비 온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시빌은 상념을 멈추며 몸을 일으켰다. 동부대로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마을이 적어 길 위에서 노숙할 일이 많았다. 때문에 날이 밝아도 저녁이 곧 야영으로 이어졌고, 연기를 따라 찾아드는 도적 또한 많았다. 무장한 남자가 셋이나 되면 공격을 당하는 일도 웬만해선 없었지만 시빌은 몸에 밴 버릇대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쯤에서 멈추지. 저쪽에 개울이 있다.”
길이 있다고는 하나 산야라 할 만한 지형이었다. 마차를 세우고 말을 풀어 풀을 뜯게 놔둔다. 맷이 불을 피우자 아네모네가 콩을 끓여 요리했다. 여름 저녁의 모닥불은 딱 적당할 정도로 따뜻해서 모두의 몸이 하느작 풀어졌다.
왼쪽 상처는 칼을 갈고, 커팅 맷은 하품을 하고, 아네모네는 손가락 사이로 동전을 굴리며 설거지 좀 하라고 남자들을 향해 잔소리했다. 시빌은 웃고, 왼쪽 상처는 말없이 칼을 갈고, 레이븐은 붕대 감은 손을 들여 보였다. 맷이 투덜거리며 그릇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가자 겉보기만은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와 칼 가는 소리만이 계속되는 가운데 설거지를 끝낸 맷이 돌아왔다. 시빌이 입을 열었다.
“가고 싶은 자는 떠나도 좋다.”
칼 가는 소리는 멈추고 모닥불 타는 소리가 천둥처럼 커졌다. 시빌이 또다시 침묵을 깼다.
“물론 맨몸으로 떠나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 내 눈에 뜨이면 죽는다. 감수할 수 있다면 떠나라.”
아네모네가 조심스레 물었다.
“쫓아와서 죽이지는 않는다는 건가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시빌은 피식 웃으며 모닥불을 뒤적였다.
“도시를 떠났으니 이쯤에서 말해두지. 내 이름은 시빌 마이언. 들어본 자도 있을 것이다. 아니 모르는 이가 있을 리 없지.”
일행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으리라 자신하는 남자의 말은 오만했으나, 실제로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북부의 대국을 차지한 그 레비쥬의 이름은 간교함과 잔인함의 대명사였다.
“주, 죽었다고.”
부들거리는 아네모네의 말에 시빌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뒤처리가 허술했던 게지. 레비쥬의 재생이 가능하도록 놔두게 훈련한 기억은 없는데.”
시빌은 모닥불을 헤집다 말고 턱을 매만졌다.
“북부에 가서 몰려있는 애새끼들 싹 다 죽이고 내 자리를 되찾는 게 지금의 계획이다. 따라온다면 한자리 주지. 내 말만 듣는 개 같은 것들이 필요하거든.”
개 같다는 표현에 눈살을 찌푸린 건 도둑인 아네모네뿐이었다. 왼쪽 상처가 이빨을 드러냈다.
“당신이 발루아 공이라는 건 어떻게 믿고?”
“안 믿어도 네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다. 날 계속 따르거나 지금 그냥 떠나는 것. 폐허가 됐을 네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고, 살만한 곳에 정착하는 것도 괜찮겠지.”
시빌은 몸을 일으켰다.
“변변찮은 시골 깡패로 살아가던가, 왕의 팔이 되어 권세를 부리는가의 차이다.”
인간들의 면면이 각양각색으로 일그러졌다. 욕망과 탐욕이 밑바탕으로 깔린 위에 진창에서 헤엄치는 자의 절망이 드리워졌다. 왼쪽 상처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난 밑바닥이야. 더 떨어질 곳도 없으니 기왕이면 윗물에서 놀겠어. 당신을 따르지.”
왼쪽 상처의 말에 커팅 맷은 주저하며 손바닥의 땀을 무릎에 계속 닦았다.
“빌어먹을. 왼쪽 상처가 남으면 나도 남아. 혼자 다른 곳 가봐야 난 멍청해서 이용만 당할걸. 왼쪽 상처와 있으면 안심할 수 있으니.”
“커팅 맷. 네가 따르는 건 왼쪽 상처가 아니라 나다.”
시빌은 희게 웃었다.
“그 점을 착각해선 안 되지.”
“그건 알고 있…….”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왼쪽 상처를 죽여.”
커팅 맷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왼쪽 상처를 돌아보았다. 눈알이 삐걱거리며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왼쪽 상처는 그런 커팅 맷의 얼굴을 무뚝뚝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시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어서어서. 아니면, 못 하겠나?”
“나, 난 절대로.”
시빌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 돌려 자신을 따르기로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왼쪽 상처?”
왼쪽 상처는 주저 없이 갈고 있던 칼을 커팅 맷의 복부에 쑤셔 넣었다. 붉은 피가 왼쪽 상처의 손등을 타고 쏟아졌다. 몸속에 박힌 칼이 반 바퀴 비틀리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 울렸다. 생생한 도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네모네가 키들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시빌이 아네모네의 이름을 불렀다.
“아네모네?”
“아하하하! 환장하겠네, 정말!”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떨었다. 한겨울이라도 되는 양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귓가에 생명을 잃은 맷의 몸뚱아리가 땅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네모네는 발작처럼 일어난 떨림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시빌을 향해 물었다.
“날 무슨 용도로 쓸 건데?”
“도둑은 도둑으로 써야지.”
“그러다 잡히면 버리고?”
“그렇게 실력이 안 좋나?”
시빌이 아네모네의 곁으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음이 닿기라도 한 듯 아네모네가 몸을 퍼뜩 떨었다.
“꽃은 금세 시들어. 발은 느려지고 힘도 약해지지. 벽도 탈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이 널 경계하기 시작하면, 성실하게 살 줄 모르는 넌 길거리의 쓰레기가 되는 거야.”
“그만해.”
“아네모네. 넌 이미 반쯤 시들었어.”
“그만해!!”
“내가 널 거두는 건 자비를 베푸는 거지.”
아네모네는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그 옆에 손을 씻은 왼쪽 상처가 걸어가 앉았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에 여자의 어깨가 다시 한 번 크게 들렸다. 왼쪽 상처가 칼칼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인자가 이제 와서 구차하게 왜 이 지랄이야? 개는 주인 말만 따르면 돼.”
“넌! 그렇게 널 따르던 자를!”
“내가 아직도 사람이고 녀석의 주인인 줄 아는 그 얼치기만큼 내가 죽이고 싶은 게 없었어. 속이 아주 시원하군.”
왼쪽 상처는 모포를 덮고 돌아누워 잠들었다. 시빌은 차가운 눈동자로 그런 두 인간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곧 까마귀로 눈을 돌렸다.
“넌 선택하지 않아도 돼.”
레이븐의 얼굴은 그저 창백했다. 그는 아무 말도 않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흐느끼는 아네모네의 울음소리 사이로 울렸다.
“저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건 안 되지.”
“정말로 약제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북부의 영지로 돌아가실 거면 마법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븐의 말에 대꾸하려던 시빌은 순간 말을 잃었다. 뭔가 반론하려고 했으나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놓아줘도 그만이었다. 모가지를 부수려다가 충동적으로 끌고 오긴 했지만 솔직히, 설거지 하나 하지 못하는 짐 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놓아주긴 왠지 싫었다.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고, 그 숲으로 돌려보내선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간신히 머릿속을 뒤진 시빌의 입에서 침통한 어조의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이런 말 하긴 정말로 마뜩잖다는 감정이 풀풀 묻어나오는 한마디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까막눈이다. 아까 갈림길에서 표지판도 못 읽는 거 봤잖냐.”
까마귀는 명백히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 북부의 영주님이라면서요?”
“옆에서 읽어 줄 사람 많았다.”
까마귀는 절망 어린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허공을 헤매던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는 곧 반짝거리는 별과 달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시빌은 남몰래 한숨을 쉬며 살아남은 세 명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셋이면 족했다.
* * *
“일어나, 까마귀. 도망치자.”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레이븐은 슬며시 눈을 떴다. 새빨간 눈을 한 아네모네가 그의 옆에 와 있었다.
“도망치자. 같이 가자.”
“어디로 가자는 거예요?”
“어디로든. 저자의 곁을 떠나 어디로든.”
아네모네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는 미쳤어.”
“레비쥬잖습니까.”
“아냐. 미쳤어. 오히려 처음의 레비쥬가 더 나아. 저자는 괴물인 주제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 끔찍해.”
레이븐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아네모네의 얼굴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레이븐은 작은 목소리로 진실을 말해 주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잖아요? 그가 바레아의 성문 앞에서 한 말, 기억하십니까?”
“레비쥬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다면, 그건 그냥 육체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껍데기만 인간이지 알맹이는 그냥 괴물이라구.”
“……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레이븐은 아네모네의 어깨를 붕대 감은 손으로 툭툭 두드려 위로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혼자 도망칠 수도 있는데 카디넬인 절 챙겨주는 거잖아요? 산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카디넬을 싫어합니다. 도시라면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시도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요.”
“그건.”
근처의 지리를 모르기 때문에 안내자가 필요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아네모네를 향해 레이븐이 작게 말했다.
“주무십시오. 모욕당한 것이 분하고 화가 날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도망가면 그는 아마 당신을 쫓을 겁니다.”
아네모네가 초조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는 놓아줄 거라고 했어. 쫓지 않을 거라고.”
“거짓말이 아닐까요?”
레이븐은 잠시 주저하며 시빌이 누운 쪽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자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긴 했으나 당장 눈을 뜬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븐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말했다.
“저는 죽음의 냄새를 잘 맡는 편입니다.”
까마귀잖아요? 레이븐이 동의를 구하자 아네모네가 멍해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면 안 됩니다. 당신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니까 밤에 몰래 도망치려는 거잖습니까?”
“그건, 그자가 너는 보내지 않는다고 하니까.”
“시빌 님을 따라가십시오. 레비쥬는 소유욕이 강해서, 자신의 것이라고 인지한 건 지킬 겁니다.”
그 말에 아네모네가 발끈하여 고개를 쳐들었다.
“대체 왜 그를 편드는 거지? 강제로 끌려온 거 아니었나? 손을 부러뜨린 것도 그라면서? 고문당했다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레이븐의 어깨가 조그매졌다.
“전 언제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좋아해서, 그 벌을 받는 거니까 괜찮습니다.”
레이븐은 우울함에 빠진 것 같은 모습으로 웅얼거렸다.
“반짝이는 것들. 밤하늘을 감히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새는 결국 날개가 부러져 떨어지는도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하도 작아 아네모네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이븐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작은 웃음소리 같은 게 들린 듯했다. 레이븐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강제로 끌려오긴 했지만, 저도 원하는 바가 있어서 나온 겁니다. 절 걱정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 수가 없군.”
아네모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레비쥬도 이상하지만 카디넬도 이상해. 원래 이런가? 수수께끼처럼 말하는 게 마치 마법사나 점쟁이 같아.”
“아. 점은 조금 칠 줄 압니다.”
까마귀는 허둥지둥 품에 손을 넣었다. 반짝이는 돌멩이 대여섯 개가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불편한 손으로 돌을 추스른 레이븐은 조금 과장된 손짓으로 허공에 던져 올렸다.
별빛과 모닥불에 반짝이는 돌들이 어둠 속에서 물에 젖은 양 떠오르는 것을 아네모네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윽고 땅에 떨어진 돌들이 굴러 제 자리에 안착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급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점을 친 거야?”
“어….”
레이븐은 딱딱하게 굳어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도망은 무리라고.”
“……, 그걸 설득이라고 하는 거면 참 솜씨 없는 점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
“아뇨. 감시자가 깨어나서 너흴 지켜보고 있다……. 라고…”
레이븐과 아네모네는 동시에 시빌이 잠든 쪽을 바라보았다. 금발의 아름다운 남자가 두 눈을 갸름하게 뜬 채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름이 쫙 올랐다.
“가려고, 아네모네?”
아네모네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밤에 잠이 안 와서 잠시 깬 것뿐입니다.”
“그래?”
“그럼요.”
그리고 도둑은 일어나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레이븐은 멀쩡한 두 개의 손가락으로 열심히 돌을 주워 담았다.
“레이븐?”
“에, 예? 예?”
시빌은 참으로 예쁘게 웃으며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이리저리 회피하던 레이븐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재미있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아아?”
“네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나를 따라온 거라고?”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레이븐은 잽싸게 시선을 자신의 손으로 떨어뜨렸다. 손가락이 손바닥에 올린 돌멩이를 끊임없이 매만져 깔짝거리는 돌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내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보내주신다면 갈 건데요. 안 보내주실 거라면서요.”
겁먹어 쪼그라든 주제에 레이븐은 어깨를 으쓱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까마귀는 전데 다른 분들이 까막눈이라니. 뭐 어쩔 수 없죠.”
이 건방진 새를 어떻게 족쳐야 하나. 시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지저분한 까마귀는 치료하느라 손만 깨끗하고, 나머진 차마 말하기도 싫은 꼬라지였다. 패느라 만지기도 싫다는 게 본심이었다.
“자존심 상하네. 문맹이야 흔하잖아?”
시빌이 간신히 미소 지으며 말하자 레이븐이 키득 웃으며 웅얼거렸다.
“짐승 같은 카디넬도 글을 아는데. 사람의 몸에서 나서 글을 모르다니. 크큭.”
“…….”
대체 어떻게 간이 부으면 이럴 수 있는 것일까. 시빌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분노와는 다른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모욕감? 그래 그 비슷한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자고 있는데 모기가 왱왱거리며 다가와 발바닥을 물어뜯을 때의 심정이 바로 이랬던 것 같기도 했다.
“죽고 싶냐.”
목소리가 절로 낮아져 지저갱을 연상시켰다. 레이븐은 단숨에 웃음을 잃고 꾸물꾸물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허옇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라.”
짧게 명령하며 시빌은 몸을 누였다. 깔짝거리는 작은 돌 소리와 모포가 구겨지는 소리 같은 것이 곧이어 들려왔다. 시빌은 일행들의 숨소리가 모두 고르게 변한 뒤에야 눈을 감았다.
별빛이 어두운 벌판 가운데에 떨어져 내렸다. 작은 모닥불이 별빛을 반기며 잠깐 허공으로 타오르는 것에 별은 나직이 몸을 떨어 인사했다. 바람이 초목을 뒤흔들어 잠들었던 짐승들이 슬쩍 깨어나 자세를 바꾼다.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란 작은 돌과 다를 게 없어 살아 있는 자도 시체도 공평하게 비추었다.
별빛은 작은 도시에도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별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공평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쳐버린 마법사가 불러낸 유령들이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감히 하늘의 천체가 내려다보고 있는 밤에, 그러한 죽음이 몸을 일으킨 것에 사람들은 놀라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묘지에서 일어난 시체들이 친인의 이름을 썩은 혀로 부르며 끽끽대었다.
“작크도 왔어.”
“닥쳐. 레슬리.”
“밀란도 올 거야. 그땐 너도 이렇게 멀쩡한 표정으로 말할 수 없을걸.”
“닥쳐!”
알도렌은 이를 악물며 성 밖으로 횃불을 던졌다. 불길이 성벽의 어둠을 밝히며 떨어졌다. 그 불이 땅에 닿아 꺼지기 직전, 찢어진 수의를 걸친 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이 성에서 태어나 늙어가고, 죽은 자들이었다. 레슬리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숙부에게 영주 자리를 넘겨. 그럼 저들이 편히 쉴 수 있잖아.”
“겁먹지 마. 썩은 시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물론 썩은 시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많았다.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 말고도 영주 자리를 숙부에게 넘기도록 영지민들을 충동질한다든가 하는 일 말이다.
“알도렌. 제발!”
알도렌은 이를 악물며 차가운 목소리로 내치듯 말했다.
“해가 뜨면 물러날 거야. 알잖아?”
해가 뜨면 물러가기는 했다. 저녁이 되면 다시 나와서 문제지. 도망칠 수도 없었다. 숙부의 군대가 길이란 길은 모두 막은 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을 비운다는 건 항복을 의미했다. 빈 성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한 숙부는 아무런 반대도 없이 영주 위에 오를 것이다.
괜히 버티지 말고 숙부에게 영주 자리를 넘겨버릴까? 잠시 생각했던 알도렌은 콧방귀를 끼며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을 질책했다. 첫날 나온 시체는 그의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시체가 소금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지 않았다면 그날 바로 숙부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줄까 보냐 빌어먹을. 도와주기로 한 마법사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힘 좀 쓴다는 자들은 다 중부 전쟁통으로 갔고, 시체가 일어서서 덤빈다는 말에 온다고 했던 자들도 죄다 꼬리를 뺐어. 제발 알도렌.”
“이런 젠장!”
성벽은 견고했지만 적은 밖의 시체들이 아니었다. 빨리 저 시체들을 처리해서 다시 매장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판국이었다. 편히 쉬길 바랐던 자들이 다시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다면, 그 어떤 인간도 오래 버티기 힘들다.
“알도레에에에에엔~~~!!!”
도움을 청할만한 마법사들의 명단을 세어나가던 알도렌은 전 영주였던 아버지의 목소리에 혀를 씹을 뻔했다. 그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매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소금 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