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14)

12.

세 사람은 소원우가 사무실에 들어온 것도 모르는지 대화에만 열중했다.

“진경 씨 할 때도 왔어?”

“네. 제일 눈에 띄는 사람 찾으면 된다더니 단번에 알겠더라구요. 출석 체크 하다가 저도 모르게 반갑다고 인사할 뻔했어요. 어느새 이름도 익숙해져 가지고.”

“시선이 자꾸 가지?”

“투어 참석한 사람들 모두 최소 한 번씩은 그 사람 쳐다봤을걸요.”

“투어에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던데, 왜 계속 신청할까요? 누구 할 때 처음 왔지? 윤정 씨 때였나?”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소원우는 사람들의 대화를 방해할까 봐 조용한 걸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기척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던 탓인지 이진경이 소원우를 발견하고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원우 씨 언제 왔어?”

“방금 왔어요.”

김진무와 박순영도 소원우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원우 씨는 내일이 두 번째지?”

“네. 두 번짼데도 긴장되네요.”

“한 열 번 정도 하면 말이 술술 나오게 될 거야.”

박순영의 말에 이진경과 김진무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은 멘트를 반복해서 하다 보면 말이 머리를 안 거치고 입에서 바로 튀어나온다 했다.

첫 투어 때 긴장해서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도 깜빡했던 소원우는 외운 내용을 망설이지 않고 술술 내뱉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학창 시절부터 암기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외운 부분을 시험으로 검사받는 것이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편이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후기 올라온 거 원우 씨도 읽어 봤죠? 반응 괜찮던데.”

“그래, 원우 씨. 긴장할 거 없어. 원우 씨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는지 우리가 다 알잖아. 금방 능숙해질 거야.”

모두 소원우와 같은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소원우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배들의 격려에 소원우는 미소를 지었다.

투어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소원우는 후기부터 찾아보았다. 첫 후기는 투어를 마친 다음 날 저녁에야 올라왔다. 처음이라 어색하고 서투른 기색은 보였지만, 그래도 꼼꼼하게 설명해 주고, 맛있는 한국 식당이나 기념품 사기에 좋은 가게를 묻는 사소한 질문에도 정성껏 답변해 주는 모습이 좋았다던 후기였다. 원우는 그 후기를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뿌듯했다.

소원우는 교환학생을 끝내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투어 업체의 인턴 가이드에 지원했다. 가이드가 되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스페인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많은 돈을 벌 목적이었다면, 다른 일을 선택했을 것이다.

졸업을 미뤄두고 스페인에 더 남기로 결정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도 취업 전쟁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딱히 모자란 부분 하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한 살 어리다는 것도 대단한 장점이 됐다. 그걸 알면서도 소원우는 스페인에서 1년 더 살아 보기로 결정했다. 취업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스페인어 자격증은 이미 따 두었지만 현지에서 실력을 더 키우고 싶었다. 미련 없이 스페인을 떠나기에 1년은 확실히 짧았다.

“원우 씨, 투어 신청자 명단 받았어?”

“잠깐만요. 메일 왔는지 확인해 볼게요.”

예약 담당인 정민영은 언제나 투어 전날 정오 즈음에 투어 신청자의 이름과 나이, 연락처, 당일에 받아야 할 금액이 정리되어 있는 파일을 보냈다.

“내일도 오려나?”

“저는 ‘신청했다’에 한 표요. 왠지 그럴 것 같아.”

“난 ‘신청 안 했다’에 한 표. 설마 또 신청했겠어요?”

“며칠째지? 내일이면 5일째인가?”

“뭐가요?”

사람들의 대화는 소원우의 질문에 일순 중단되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소원우에게로 모였다.

“메일 왔어요?”

“네, 왔어요.”

“파일 열어 봐요.”

“네?”

“투어 신청자 좀 확인해 보려구. 얼른 열어 봐.”

가우디 투어는 매일 진행되는 투어다. 인기가 많은 투어인 만큼 신청하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기본 투어 외에 별도로 야경 투어, 프리미엄 투어도 진행하는 가이드들이 다른 가이드의 투어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여태껏 다른 이의 투어 신청자에 관심을 가져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소원우를 재촉했다.

소원우는 얼떨떨한 얼굴로 첨부된 파일을 열었다. 소원우가 투어를 진행할 날의 가우디 투어에 신청한 사람들의 명단이 주르륵 떴다. 가나다순으로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잠깐만!”

소원우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김진무의 말소리에 뚝 멈췄다.

“있다, 있어!”

“어디?”

“와, 진짜 있네. 여기요.”

소원우는 의아한 눈빛으로 모니터 한 부분을 가리키는 이진경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소원우는 이름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한 사람의 얼굴이 빠르게 소원우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자신이 아는 사람일 것만 같았다. 이진경의 손가락이 이름의 끝 글자를 가렸는데도 소원우는 당연히 끝 글자가 ‘경’일 거라 예상했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권차경의 이름 옆에 기재된 나이도 소원우와 같았으니 소원우가 아는 권차경일 확률이 더 커졌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요?”

소원우는 놀란 표정을 지우고 태연하게 물었다.

아까부터 권차경은 대화의 중심에 있었다. 어째서 권차경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그 연유가 궁금했다.

“아, 아직 원우 씨는 못 봤죠. 그 사람 말이야. 권차경이란 사람. 내일도 투어 오면 5일 연속으로 투어 참가하는 거예요.”

“대화할 기회가 생기면 한번 물어봐. 가우디 투어 계속 신청하는 이유가 무언지. 가우디를 좋아해서 그런가 했는데, 아닌 것 같아. 어딜 가나 다 무심한 얼굴이야. 사진을 단 한 장도 안 찍는 거 있지. 바르셀로나에 와서, 가우디 투어를 하는데 사진을 하나도 안 찍는다니 말이 돼?”

세 사람은 권차경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만 갸웃했다. 소원우는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다가 권차경과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결정했다. 친구라고 괜히 말을 꺼냈다가 권차경을 향한 모든 궁금증을 해소시켜 줘야 할지도 몰랐다.

소원우는 어젯밤과 별 다르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괜히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했다. 잠시 머무는 여행자들에게 비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버스로 이동하는 투어라서 갑작스런 비가 내린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날이 좋아야 하루를 시작하는 여행자들의 기분도 좋을 게 당연했다. 누군가에겐 놀랍도록 아름다운 곳이 누군가에겐 별 감흥 없는 평범한 장소가 되는 게 여행이었다. 소원우는 바르셀로나가 여행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하고픈 아름다운 도시가 되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내일 날씨는 맑을 예정이었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도시는 아니니까 아마도 예보대로 화창할 터였다.

가우디 투어는 카탈루냐 광장의 하드록 카페 앞에서 모인 후, 구엘 공원으로 이동해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소원우의 집은 구엘 공원 근처였다. 구엘 공원은 직원이 출근하기 전, 이른 아침엔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소원우는 종종 일찍 일어나 구엘 공원을 산책했다. 수십 번 들락날락한 곳이라 구엘 공원이 더는 관광지가 아니라 동네 공원처럼 느껴질 법도 했지만, 소원우는 구엘 공원에 갈 때마다 그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처럼 매번 가우디의 걸작에 감탄했다.

소원우가 천재 건축가인 가우디라는 사람에 관심을 가진 건 고등학생 때였다. ‘가우디’는 권차경이 유심히 보고 있던 책 제목이기도 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가우디를 좋아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권차경이 좋아하는 걸, 소원우도 좋아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원우는 집에 돌아와 가우디에 대해 알아보았다.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도 빌렸다. 오로지 권차경 때문에 읽는 책이라 집중도 잘 되지 않고, 흥미도 생기지 않았지만, 가우디에 관한 몇 가지 중점적인 내용은 열심히 외웠다. 성실히 암기한 내용을 토대로 권차경과 대화를 나누려고 기회를 엿보곤 했다. 몇 년 후에 가우디 투어를 진행하게 될 줄이야. 그때는 상상도 못했다. 기분이 묘했다.

세 사람은 가우디의 어떤 작품도 권차경의 마음은 흔들지 못했다고 했으나 그건 사실이 아닐 터였다. 권차경은 가우디를 좋아했다. 가우디를 향한 존경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소원우는 확신했다. 다만, 소원우도 호기심이 일었다. 권차경은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을 만큼 가우디에 대한 지식이 충분했다. 똑같은 투어를 여러 번 신청해서 듣는 이유는 가우디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았다.

“여자친구 있을까요? 손에 반지는 없었는데.”

“어머, 얘 봐라. 그걸 또 언제 봤어?”

박순영이 까르르 웃으며 팔꿈치로 이진경을 툭 밀었다.

“없으면 어쩌려구. 만나보자고 용기 낼 거야?”

“잠깐 여행 온 사람한테 뭘 만나자고 그러겠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 사람 내내 무표정이었거든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자친구한테는 잘 웃고 그러겠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 거 있죠.”

세 사람은 권차경에 대해 좀 더 얘기할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관심 없는 척 슬그머니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1년은 스페인에 대해 다 알아 가기는 부족한 시간인 동시에 누군가와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긴 시간이기도 했다. 사실 권차경과 아는 사이라는 걸 밝히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명백하게 따지자면 권차경과 끊어진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1년 동안 권차경이 어떻게 지냈는지 소원우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권차경과 어떻게 남남이 되었는지 모르는 윤찬희와 소원희가 권차경의 소식을 전해 주려 했지만, 소원우는 권차경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권차경에 관한 어떤 얘기도 듣지 않겠다고 말했다. 권차경이 소원우를 모르고 사는 기간 동안 소원우도 그래야 된다고 여겼다. 어쩌면 그게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다.

권차경과 완전히 끊어진 채로 1년이, 정확히는 1년하고도 두 달이 더 지났다. 1년이 지나가는 사이에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는 권차경을 만나야 알 수 있을 터였다.

소원우는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가 올렸다. 권차경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더 발전된 투어를 선보일 기회가 계속 있겠지만, 여행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이 가우디 투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원우는 최대한 많은 정보들을, 기존에 접했던 것 이상의 이야기들을 여행자들에게 전해 줄 수 있도록 준비한 파일을 꼼꼼히 갈무리했다.

* * *

가우디 투어는 아침부터 저녁 즈음까지 진행되는 긴 투어다. 초반부에 시간이 조금씩 지체되다 보면 오후에는 집중력과 체력이 저하돼 투어에 흥미를 잃는 사람들이 생기곤 했다. 여행자들의 만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무의미한 시간을 줄이는 게 필수였다.

투어 업체에서는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에게 8시 30분이 되면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출발하겠다고 일괄적으로 메일을 보냈다고 했으나, 공지는 그저 공지일 뿐이었다.

소원우는 연신 시계를 흘긋거리며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지하철에서 내렸다고 하니까 금방 오실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소원우가 고개를 살짝 숙여가며 대리 사과를 한 지 5분이 지나고서야 두 명의 지각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친 게 미안했던지 “죄송합니다”를 반복해 말했다.

사람들이 버스에 다 오른 걸 확인하고 소원우는 맨 끝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구엘 공원까지 이동하는 동안 소원우는 자기소개를 하고 바르셀로나에 대해, 가우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한꺼번에 들어 봐야 소용없다는 건 소원우도 경험해 봐서 잘 알았다. 버스 안은 투어에 대한 기대나 여행자의 설렘, 은근한 긴장감으로 뒤섞였다.

“구엘 공원까지는 여기서 15분 정도 걸릴 거예요. 노래를 틀어 드릴 테니까 노래 감상하시면서 이동할게요.”

감성적인 멜로디가 이어폰을 타고 흘렀다. 소원우는 등을 편히 기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줄곧 긴장 태세였다. 투어를 준비하느라 잠도 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신 덕분인지 졸음이 오지는 않았다. 사실은 커피 말고 다른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소원우는 좌석을 뒤로 젖혀 더 편히 기대고 싶었지만, 바로 뒷좌석에 사람이 앉아 있어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어야 했다. 사십 명이 탈 수 있는 버스에 가이드와 운전기사까지 열일곱 명만 타서 빈 좌석이 많았다. 사람들은 원하는 자리를 찾아 여유롭게 앉았다. 어차피 수신기가 있어서 가이드와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가이드의 말을 크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권차경은 소원우의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버스까지 걸어오는 길에서도 소원우의 가장 가까이에서 걷던 사람은 권차경이었다.

권차경이 올 거라 예상은 했어도 소원우는 놀라고 말았다. 흔들리는 눈으로 권차경과 마주했다. 수 초를 아무 말도 못했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웃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로 잠깐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권차경도 소원우와 다를 바 없었다. 굳은 얼굴을 하고, 눈으로 소원우를 좇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소원우였다. 소원우는 자신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떤 말로 첫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소원우는 가이드로서 첫마디를 뗐다. 사람들이 소원우의 주변에 서 있었다. 괜히 다른 얘기가 불거질 수도 있으니, 권차경과의 사적인 대화는 투어가 끝난 뒤에 하는 게 나을 듯했다.

“권차경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묵직한 목소리였다. 왠지 키도 좀 더 큰 듯했다. 20대 중반에도 키가 아직 자라나. 소원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명단에 이름을 체크했다. 권차경에게 수신기를 주며 가지고 온 이어폰과 잘 호환되었는지 확인하고 사람들이 다 모일 때까지 잠시 대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권차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딱 그만큼만 멀어졌다. 권차경과의 거리는 투어하는 동안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깃발을 들고 맨 앞에서 걷는 소원우의 바로 뒤는 권차경이었다.

구엘 공원과 몬주익 언덕까지 보는 동안 혼자 온 사람들끼리 어느새 짝이 되어 서로 사진을 찍어 주고 나란히 앉아 대화도 나누는데 권차경은 계속 혼자였다. 자유 시간을 주어도 권차경은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자리를 지켰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점심을 먹을 거예요. 길 따라서 맛집이 쭉 있는데요. 왼편 보시면, 파란색 글씨로 쓰인 식당 보이시죠? 저 레스토랑은 작은 가게로 시작했는데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서 마드리드와 말라가에 분점까지 생겼어요. 해산물 요리는 거의 다 맛있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오징어 요리가 제일 맛있었어요. 해산물 드시고 싶으신 분께는 저 레스토랑 추천합니다. 빠에야는 오른편의 줄무늬 천막집, 거기도 괜찮고요, 평범하게 햄버거 같은 거 드시고 싶으신 분께는 저기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 바로 옆의 빈즈버거 추천합니다.”

소원우는 자신이 직접 가 보고 만족스러웠던 식당들만 사람들에게 권했다. 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이 해변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걸 알고, 식당 주인들이 은밀하게 소원우에게 자신의 가게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을 하기도 했지만, 소원우는 다 거절했다. 여행자들에게 좋은 것만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돈을 좀 더 벌자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혼자 여행할 때의 단점은 음식을 여러 개 시켜서 먹을 수 없다는 거다. 투어에 혼자 온 사람들은 투어를 하는 동안 서로 눈을 주고받다가 동행이 되어 함께 식사하러 가곤 했다. 다양한 음식을 시켜 먹을 수도 있고, 투어 하는 동안 서로 사진들도 원하는 대로 찍어 줄 수 있으니 굳이 혼자를 자처하는 것보다 이득이 더 많았다.

“……식사하러 안 가세요? 아까 다른 분들이 같이 먹자고 하는 것 같던데.”

소원우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은 사람을 보며 물었다. 권차경과의 대화가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소원우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존댓말로 말했다.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투어 끝나려면 한참 남아서 나중에 배고프실 거예요.”

“괜찮습니다.”

소원우는 가만히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권차경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참 잘생겼구나,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 선배들이 왜 권차경을 두고 수군거렸는지 납득이 갔다.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데다 전체적으로 비율이 좋아 무리 사이에 있어도 눈에 띄었다. 그런 사람이 커다란 나무 아래 우뚝 서서 소원우만 보고 있었다. 남남이 되기로 하고 헤어지긴 했는데,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소원우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다시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제가 맛있다고 말씀드렸던 빈즈버거 보이죠?”

소원우가 팔을 들어 가게를 가리켰다. 권차경의 눈도 소원우의 눈을 따라갔다.

“빈즈버거 옆 골목에서 오십 미터 정도 안쪽으로 걸어가면 작은 카페가 있어요. 오후 2시까지만 샌드위치를 파는데 특히 치아바타 샌드위치가 맛있어요. 직접 만든 소스를 빵에 바르고, 큼지막한 햄이랑 모짜렐라 치즈를 넣는데 제가 바르셀로나에서 먹어 본 샌드위치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가게가 무척 비좁고 주인이 워낙 태평한 사람이라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싫어해서 알음알음만 알려 드리고 있어요.”

소원우가 주절주절 한 가게의 샌드위치를 찬양하는 동안 권차경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어디 갈 예정이 없으면 저랑 같이 샌드위치 먹으러 갈래요?”

소원우는 말간 눈으로 권차경에게 물었다. 소원우의 눈꺼풀이 두 번 깜빡였을 때 권차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이라 가게 내부의 몇 개 안 되는 테이블이 꽉 찼다. 소원우는 빈자리가 없는 걸 확인하고 카운터로 곧장 걸어갔다.

『안토니오, 치아바타 샌드위치 남았어요?』

『잠깐만. 한 개 있어. 줘?』

『네. 크루아상 샌드위치 있으면 그것도 하나 주세요. 포장으로요.』

소원우는 샌드위치 두 개를 받아들고 방금 전까지 맛있다고 찬양했던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권차경에게 내밀었다.

“여기 커피도 맛있는데, 커피는 테이크아웃을 안 해. 커피는 샌드위치 먹고 따로 마시자.”

소원우는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말을 놓았다. 권차경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배 안 고파도 먹어. 오후엔 더 많이 걸어야 돼.”

권차경은 말없이 샌드위치를 건네받았다.

골목 끝까지 걸어가면 샌드위치를 먹기 좋은 벤치가 있었다. 바다의 끄트머리, 높은 건물들 때문에 바다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소원우는 종종 샌드위치를 포장해 이곳으로 왔다.

사람 한 명의 자리만큼 떨어져 앉은 채로 두 사람은 샌드위치만 먹었다.

소원우는 오물오물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할 말을 생각했다. 스페인을 미련 없이 떠나기엔 1년은 무척 짧았다. 그러나 권차경의 마음이 식을 만큼 충분히 길기도 했다. 1년이라는 막연한 기한을 정해 놓기만 했을 뿐, 그 뒤의 계획들은 모두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솔직히 권차경이 계속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믿지 못했다.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으니 1년이 지났다고 권차경에게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1년에서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어느덧 두 달이 지났을 때. 소원우는 권차경이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가우디 좋아해?”

말을 놓은 후 권차경의 입에서 나온 첫 문장이었다. 가우디를 좋아해서 가이드도 하고 있지만, 그걸 제일 먼저 물을 줄은 몰랐다. 소원우는 입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꼭꼭 씹어 넘긴 뒤에 대답했다.

“좋아해. 바르셀로나도 좋아하고. 이 도시에서 살아 보고 싶었어.”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졸업이 늦어지고, 혹 나중에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은 1년이었다고 회상하게 된대도 지금으로선 상관없었다.

소원우는 가우디를 처음 알게 된 계기를 떠올리며 권차경에게 물었다.

“너도 좋아하지, 가우디?”

권차경은 대답은 않고 물끄러미 소원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제도 투어 신청했더라. 그제도 그랬고. 가우디가 그렇게 좋아?”

권차경이 피식 웃었다.

난데없는 웃음이었다. 저렇게 웃음이 나올 만한 질문이었던가. 소원우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좋아해.”

권차경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혹시 내일 투어도 신청했어?”

혹시 일주일을 꽉 채우려나, 했는데 권차경은 고개를 저었다.

“했는데, 취소할 거야.”

“하루 전에 취소하면 이미 낸 금액은 못 돌려받는데 괜찮아?”

“어.”

권차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원우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서둘러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부지런히 오후까지 견디려면 커피는 필수였다. 소원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샌드위치를 포장한 종이와 비닐을 벤치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너도 커피 마실 거지?”

권차경은 벤치에 앉아서 소원우를 올려다보았다.

“가자. 커피 마시러.”

소원우가 손짓을 했지만, 권차경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앉아 있게?”

“버스에 타면 나한테 다시 존댓말 할 거야?”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존댓말을 하는 사이로 돌아가느냐고 묻는 권차경에게 소원우는 그렇다고 답했다.

“응. 투어 끝날 때까진 그럴 거야.”

“그 후엔?”

투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 투어에 대해 정리할 계획이었다. 실수는 안 했는지, 설명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일일이 기록해 놔야 다음 투어를 할 때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너랑 같이 저녁 먹을 생각인데.”

그러나 소원우는 이미 세워 놓은 계획을 지우고, 딴 얘기를 꺼냈다. 권차경의 낯빛이 바뀌었다. 환한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가우디 좋아해.”

권차경은 뜬금없는 고백을 던졌다.

“아까도 말했잖아.”

소원우는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근데 가우디와는 비교도 안 되게 널 더 좋아해.”

그 순간만큼은 커피가 생각나지 않았다. 소원우는 멍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네가 가이드가 됐다고 제이든이 말해 줬어. 솔직히 말하면 가끔 제이든에게 물어봤어. 너 어떻게 지내는지. 너에 대한 건 다 끊고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겐 못 하겠더라. 매일 밤이 고비였어. 당장 비행기 타고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져서 제이든이 간간이 전해 주는 소식으로 겨우 참았어.”

권차경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하면서도 소원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신중하게 살폈다. 소원우의 굳은 표정이 풀리지 않자 초조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우의 앞에 섰다.

“여전히 네가 좋아.”

권차경은 ‘여전히’를 말하고 잠깐 숨을 쉬고는 뒷말을 꺼냈다. 그 탓에 ‘여전히’에 묵직한 무게가 실린 것처럼 느껴졌다.

소원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이 건조했다.

“1년이 되어도 네 연락이 없어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좀만 더 버텨 보자 하다가 더는 안 되겠어서 왔어. 억지로 또 집 앞에 찾아가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서 가우디 투어를 신청한 거야? 내가 가이드 하는 날이 언젠지 모르니까 무작정 며칠을?”

권차경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소원우는 권차경이 5일을 연속으로 가우디 투어를 신청한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1년이 흘렀는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자신을 여전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권차경의 마음의 깊이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제는 그 마음을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안 보인다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소원우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커피는 고사하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걸어가야 할 판이었다.

“일단 가자.”

“어?”

“가이드가 늦으면 안 되잖아.”

소원우는 권차경의 팔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팔을 잡힌 채로 뒤따라 걸었다. 반대편 골목 끝에 다다를 즈음에 소원우는 권차경의 팔을 놓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가우디를 너 때문에 알았어.”

권차경의 눈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앞으로 가우디 투어를 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네가 생각이 날 것 같아.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잖아. 그럼 어딜 가도 네 생각이 나겠지.”

소원우의 말을 듣는 권차경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시간이 없으니까 이 뒤는 나중에 투어 끝나고 얘기하자. 달려야 돼, 이제.”

소원우는 뛰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르는데도 미소에 입가에 퍼져 나갔다. 소원우의 뒤를 따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저 발은 자신이 어딜 가든 뒤따라올 것만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근데 너 회사는?”

소원우의 질문에 잔을 잡고 있던 권차경의 손이 살짝 흔들거렸다. 큰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소원우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나 때문에 그만두고 왔다는 말은 하지 말아 주라.”

“…….”

권차경의 입이 굳게 닫혔다.

침묵이 무겁게 소원우를 짓눌렀다. 소원우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너 진짜……. 정말로 그만두고 온 거야?”

“어.”

참 자랑스럽게도 말한다. 소원우는 와인을 맥주처럼 벌컥 들이켰다.

권차경이 들어간 회사는 건축 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다. 야근을 밥 먹듯 한다지만, 그 회사엘 들어가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섰다. 연봉이나 사내 복지 수준이 높아 야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며 지원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데 권차경은 거기를 그만두고 스페인으로 온 것이다.

“좋은 회사에서 일할 기회는 많아.”

소원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 기회가 많으면 왜 한국의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말하겠냐?”

한국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인지 권차경은 태연하기만 했다.

“평생 찾아올까 말까 한 기회를 찬 거다, 너. 나중에 울고불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네가 회사 관둬 버리고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악착같이 공부하고, 스펙 쌓을 거라고.”

소원우는 권차경의 무모한 행동을 지적했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한창 열을 올리던 소원우는 자신이 스페인으로 떠날 때 들었던 말들을 그대로 권차경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자신을 위한 조언임을 알면서도 그 말들을 다 흘려보내고 스페인으로 왔다. 그래 놓고 권차경에게 이래라저래라 허세를 부리는 꼴이었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기다. 내가 뭐라고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냐.”

소원우는 빈 잔을 채우려 와인 병으로 손을 내밀었다. 권차경이 한 발 빨리 병을 잡고, 원우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천천히 마셔.”

“나 술 세. 이 와인 한 병 혼자 다 비워도 안 취해.”

“알아. 너랑 좀 더 오래 있고 싶어서 그래. 이거 다 마시면 너 집에 갈 거잖아.”

소원우는 뜨끔해져서 시선을 돌리며 와인 한 모금만 겨우 목으로 넘기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원우야. 네가 준 기회를 붙잡는 게 나한텐 더 중요했어. 다른 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어. 너를 만나러 가는 날만 기다렸어.”

권차경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까지 그만두고 스페인으로 올 만큼 결단력이 있으면서도 소원우 앞에서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하겠다고 점심시간에 잘라 냈던 소원우의 뒷얘기를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렸다.

소원우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권차경의 기다란 손가락에 시선을 멈췄다. 뭐라도 붙잡아야겠는지 양손은 깍지를 끼고 있었다.

소원우는 저 손이 자신을 어떻게 만졌는지 잊지 못했다. 손이 닿는 몸의 자리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새겨졌다.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한때는 사랑했고, 한때는 증오했던 손이 소원우의 눈앞에 있었다.

소원우는 퍽 오랫동안 권차경의 손을 응시했다. 그리고 결정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손 줘 봐.”

권차경이 깍지를 풀고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살짝 벌려진 권차경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사이사이 맞물린 손가락들이 착 감겼다. 누구의 손가락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손밖에 안 돼. 너를 껴안고 싶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너와 키스를 하는 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포근하게 안아 주어도 됐을 텐데 1년을 변함없이 기다린 사람에게 소원우는 고작 이 정도밖에 열어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권차경은 해사하게 웃었다.

“응. 괜찮아.”

오른쪽 눈이 유난히 더 휘는 웃음이었다. 입꼬리도 시원하게 위로 솟았다. 저 웃는 얼굴을 앞으로 아주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괜히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라 소원우는 권차경과 잡고 있는 손을 풀고 바지에 슬며시 문질렀다.

“한국은 언제 돌아가는 거야?”

“1년 뒤에.”

“뭐?”

소원우는 소리를 크게 냈다. 다른 테이블까지 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황당해서 한 번 더 되물었다.

“1년 뒤에 간다고?”

“어. 나도 워킹 홀리데이 비자 받고 온 거야.”

소원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권차경은 호주에서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웠다. 소원우가 알기로 스페인어는 배운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일하게? 넌 스페인어 못하잖아.”

영어와 불어가 된다 해도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면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1년 동안 공부했어.”

“회사 다니면서?”

“너 만나고 한국 돌아가자마자 학원부터 끊었어. 배우길 잘했다. 네가 1년 더 머무를 걸 예상했나봐.”

권차경이 소원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소원우는 여전히 황당한 표정이었다.

“너 아까 메뉴 모르겠다고 설명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

나탈리가 바르셀로나에 갈 때 마다 꼭 방문한다는 이 식당 메뉴엔 따로 영어 설명이 없었다. 손님들 대부분이 현지인들이었다. 권차경은 메뉴를 슥 훑더니 도로 덮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소원우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너 스페인어 하는 목소리 듣고 싶었거든. 한국말 할 때와 달라. 나지막하고, 부드러워.”

권차경은 솔직하게 자신의 속셈을 고백하고서 직원을 불렀다. 꽤 능숙한 스페인어로 후식을 주문했다. 권차경의 그릇엔 아직 음식이 더 남았지만 권차경은 소원우의 식사 속도에 맞췄다.

소원우는 스페인식 푸딩, 나띠야를 한술 입에 넣으며 물었다.

“집은 구했어?”

“아직.”

“어디에서 살려고?”

“넌 어느 지역에 살아?”

“말해 주면 우리 동네로 구하게?”

“응.”

호기롭게 말해 놓고 권차경은 소원우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앞서나가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소원우와 가까이 살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구엘 공원 근처야.”

같은 동네에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권차경도 받아들일 것이다. 억지로 자신의 욕심을 밀어붙일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소원우는 흔쾌히 말해 주었다. 기대하지 않았는지 권차경이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 동네 살기 좋아. 건물도 예쁘고, 카페도 많고, 큰 도서관도 있고, 무엇보다 구엘 공원이 가깝고. 네가 우리 집 근처에 살면 자주 만날 수 있겠네.”

소원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차경이 고개를 홱 옆으로 돌렸다. 소원우의 눈을 피하는 게 너무 티가 나서 소원우는 의아한 눈빛으로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소원우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권차경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그렇게 좋냐.”

“알면서 자꾸 물어보지 마.”

“자주 물어볼 것 같은데. 음. 사실 아직도 좀 신기하거든.”

이런 권차경은 처음 보았다. 자주 만날 수 있겠다는 말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묘했다.

“안 물어볼걸.”

“왜?”

“확인이 필요 없을 만큼 애정 표현 많이 할 거라서.”

“……그래?”

권차경의 얼굴은 다시 제 낯빛을 찾았지만, 반대로 소원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권차경도 눈치챘을 것이다. 소원우는 권차경처럼 눈을 피하는 대신 활짝 웃었다.

“기대할게.”

* * *

이진경이 호들갑을 떨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러분! 커피 한 잔씩 드세요.”

이진경은 양손 가득 들고 온 커피를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안 그래도 커피가 당겼다며 박순영이 덥석 받았다.

“웬 커피를 다 사 왔어?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제가 요 앞 카페에서 누구 만난 줄 알아요?”

이진경이 호들갑을 떨었다.

“혹시 연예인?”

김진무가 잠깐 고민을 하더니 “송여원인가? 바르셀로나 왔다고 기사 떴던데요.” 하고 말했다.

“송여원 본 거면 완전 대박이죠. 송여원은 아니고요.”

“그럼?”

“가우디 투어 5일 연속으로 신청했던 남자 기억나요?”

소원우는 커피를 쪼르르 빨아 마시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원우 씨, 커피 마시고 체하면 답 없다. 천천히 마셔요.”

소원우는 마시던 커피를 바로 내려놓았다.

권차경은 소원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가우디 투어에 신청하지 않았다. 사무실 사람들은 궁금증을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는 눈빛으로 소원우를 쳐다보았지만, 소원우는 권차경과 대화를 못 해 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모두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사무실에서 권차경의 얘기가 그만 나왔으면 하는 소원우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소원우의 바람과는 달리 사무실 사람들의 입에 권차경의 이름이 이틀은 더 오르내렸다. 한 번도 후기를 남기지 않았던 권차경이 투어 후기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소원우 가이드를 칭찬하는 내용이 태반이라 투어 후기가 아니라 가이드 후기 같았다. 당사자가 민망해질 만큼 호평으로 꽉 찬 후기에 선배 가이드들의 부러운 눈길이 이어졌다.

“원우 씨는 확실히 기억나죠? 그 사람. 카페에서 커피를 잔뜩 사서 나오더라구요. 눈이 딱 마주쳤는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거예요. 나한테!”

이진경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하면서 커피를 주는 거예요. 사무실 사람들에게 하나씩 주라고 하면서. 저 완전 놀랐잖아요.”

“아니 근데 대체 왜? 그 사람이 커피를 왜 사 주지?”

박순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김진무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너무 놀라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받았어요. 우리 투어가 마음에 들었나?”

이유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소원우는 답을 추측해 보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돌아와 권차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야? 아직도 카페야?]

[자료 찾을 게 있어서 도서관에 가는 중이야.]

한 시간 전에 사무실에 몇 명 있는지 물어봤던 게 사람 수대로 커피를 사기 위해서인 듯했다.

권차경은 종종 사무실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면서 간식거리를 사서 보냈다. 막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걸 다 사오냐고, 혹시 누가 괴롭히거나 부담을 줬냐고 사무실 사람들이 도리어 걱정하는 통에 얼마 전부터 권차경의 친절을 모조리 거절하는 중이었다.

그랬더니 권차경은 기어이 다른 사람 손을 빌렸다.

[간식 보내는 거 하지 말라니까.]

[네가 아까 달달한 커피 마시고 싶다 그랬잖아. 네 거 사면서 다른 사람들 것도 산 거야.]

[그래도 그렇지. 네가 우리 사무실에서 유명인인 거 몰라? 드디어 네 얘기가 끊겼나 했는데, 또 말 돌게 생겼어.]

이진경은 권차경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진경은 권차경에게 제일 관심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만날 일이 없으니 별 생각을 않고 있었는데, 권차경이 오히려 일을 벌인 셈이었다.

[앞으로 절대 사무실 근처에 오지 마. 알았지?]

[그냥 네 친구라고 하고 인사드리면 안 돼?]

[안 돼.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 오늘은 몇 시에 끝나?]

[7시 전엔 집에 갈 것 같아.]

권차경은 스페인에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원우와 함께하기 위해 왔다며,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했다. 권차경이 영어와 불어 과외로 벌어들이는 돈이 소원우의 월급보다 더 많았다. 어느 나라나 영어를 잘하면 굶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권차경이 구한 집은 소원우가 사는 5층 건물 맞은편의 아파트였다. 두 건물은 4차선의 도로를 앞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한쪽은 신식 아파트였고, 한쪽은 구식 빌라였다. 구식 빌라에는 오래된 건물답게 문을 직접 잡아당겨서 타야 하는, 장정 셋이면 꽉 차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층에 멈출 때마다 덜커덩 소리가 났다. 몇 달을 살아도 그 소리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소원우의 집은 딱 필요한 것만 갖춘 원룸이었다. 집이 좁아 식탁도 사지 못해 책상에서 밥을 먹었다. 공부한다고 잔뜩 사 놓은 책들이 책상의 반을 차지한 탓에 반찬 여러 개를 꺼내 놓고 먹는 대신 파스타나 카레 같은 한 그릇 요리들로 배를 채우곤 했다.

그러고 보니 소원우가 요리한 지도 퍽 오래됐다. 소원우의 냉장고엔 권차경이 만들어놓은 음식만 한가득 찼다. 권차경의 일상은 소원우의 스케줄에 맞춰졌다. 가이드라는 직업이 주말이 따로 있지 않았다. 게다가 가우디 투어뿐만 아니라 야경 투어도 같이 담당하게 돼서 휴일도 매달 달랐다. 그런데도 벌써 다섯 번의 휴일을 모두 권차경과 보냈다. 사실 휴일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날이 권차경과 함께였다.

[오늘 저녁 메뉴는 돼지고기 넣은 김치찌개야. 계란말이랑 계란찜 중엔 뭐가 더 좋아?]

소원우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계란말이.]

[알겠어. 밥값은?]

[지금?]

[응.]

소원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소원우는 카메라를 켜려다 말고, 앨범을 열었다. 아직 권차경에게 보내지 않은 사진들이 있나 하고 검지로 화면을 밀며 쑥쑥 내려갔다.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 아닌데 밥값을 내느라고 최근에 사진을 꽤 많이 찍었다. 상당수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거나 얼어있는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권차경은 좋아했다.

권차경이 차리는 저녁은 사진 한 장으로 값을 치를 수 없는 음식들이었다. 집에서 만들기 번거로운 음식들도 많았다. 김밥처럼 은근히 손이 가는 음식 말고도, 소원우가 먹고 싶다고 흘리듯이 말했던 순대볶음이나 탕수육도 만들어 가져왔다. 소원우가 고사해도 권차경은 그만두지 않았다. 자신이 먹을 밥에 일인분 더하는 것뿐이니 고마우면 사진이나 한 장 보내라던 게 지금껏 쭉 이어지고 있었다.

소원우는 회사 회식 때, 박순영이 찍어 준 사진을 보냈다. 어두운 데에서 찍어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고 살짝 흔들리기도 했지만, 소원우가 크게 입을 벌리고 웃는 사진이었다.

[예쁘다.]

소원우는 민망해서 재빨리 휴대폰 화면을 꺼 버렸으나 연이어 메시지가 오는 바람에 화면이 다시 켜졌다.

[보고 싶어, 원우야.]

얘가 오늘 따라 왜 이러냐.

[이따 볼 거잖아. 나 일해야 돼. 퇴근하면 연락할게.]

소원우는 휴대폰 케이스가 위로 오도록 뒤집었다.

소원우는 손등으로 입을 꾹 눌렀다. 그것으로는 웃음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비실비실 새어 나온 웃음은 한참이나 소원우의 입가에 머물렀다.

* * *

“야. 너는 스페인이 잘 맞나 보다. 신수가 훤해졌네.”

윤찬희는 소원우를 보자마자 소원우의 뺨을 콕콕 찔렀다.

“많이 살 쪘어?”

“아니. 딱 보기 좋아. 스페인 음식 질린다더니 잘 먹고 지내나 보네?”

소원우 전용 요리사가 있다는 걸 윤찬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소원우는 권차경과 사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권차경이 바르셀로나에 와 있다는 것도 아직 윤찬희에게 말하지 않았다. 전화나 메일로 설명하기 복잡한 얘기이기도 했고, 권차경과 사귀기 전에 이미 윤찬희가 여름에 바르셀로나에 온다고 했었기 때문에 소원우는 윤찬희를 만나 얘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안 피곤해?”

“어. 늦잠 푹 자고 출발해서 괜찮아. 그보다 배가 너무 고프다. 얼른 밥부터 먹으러 가자.”

방학을 맞이해 유럽 여행을 떠난 윤찬희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넘어왔다.

“뭐 먹을래? 말만 해. 다 사 줄게.”

윤찬희를 오랜만에 보는 데다 한국이 아닌 바르셀로나에서 만나니 더 반가웠다. 소원우는 앞장서서 윤찬희를 이끌었다.

“오, 소원우. 일하니까 주머니 사정이 좋아졌나 보다.”

“안 좋아도 네가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대접해야지.”

“그럼 네가 한 밥 먹어도 되냐? 며칠째 외식만 하니 당기는 음식이 없어.”

소원우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마침 된장찌개와 어묵볶음, 소고기 장조림이 있어서 한 상 대접하기에 괜찮을 듯했다.

여행하면서 한국 음식을 한 번도 먹지 못했다던 윤찬희는 상이 차려지자마자 허겁지겁 음식에 달려들었다.

“천천히 먹어. 누가 안 뺏어가.”

소원우는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나 한국 음식 엄청 그립다거나 꼭 먹어야겠다거나 그런 생각 진짜로 하나도 안 했거든? 근데 막상 눈앞에 있으니까 계속 들어가.”

윤찬희는 먹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공깃밥 두 그릇에 모든 반찬을 거덜 내다시피 한 뒤에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너 요리 잘한다. 외국에 나와서 사니까 요리 실력이 더 늘었네.”

소원우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윤찬희가 먹은 모든 음식은 모두 권차경이 만든 것이었다.

윤찬희는 부른 배를 문지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 소원우는 납작복숭아 네 개를 깨끗이 씻고 조각내 잘랐다. 윤찬희는 배가 너무 불러서 꼼짝도 못 하겠다면서도 냉큼 손을 뻗어 복숭아를 집었다.

“커피 마실래?”

“아니, 이거면 충분해.”

윤찬희는 몇 조각 더 연이어 입에 넣더니 불쑥 물었다.

“외롭진 않고?”

“……어?”

“스페인에 온 지 1년이 넘었잖아. 가이드 일이 잘 맞는다 해도 쉽진 않을 거고. 뭐 힘든 일은 없나 해서.”

윤찬희는 소원우가 잘 지낸다, 괜찮다고 하는 모든 말들이 남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 둘러대는 말일까 봐 염려했다.

윤찬희의 말대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이긴 해도 매번 즐겁지만은 않았다. 약속 시간에 늦는 한두 사람 때문에 자신이 욕을 먹기도 하고, 갑작스런 파업이나 시위 때문에 투어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라도 하면 수습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열심히 알아보고 준비해 설명한 내용들이 신선하지 않다거나, 별로 와 닿지 않았다는 후기가 올라오는 날에는 밤새 침울해하기도 했다.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아마도 권차경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찬희야.”

“응?”

“나 연애해.”

언제 말을 하는 게 좋을까 타이밍을 재고 있던 소원우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윤찬희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진짜야? 언제?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왜 이제야 말해, 그런 중요한 소식을. 누구랑? 한국인이야? 아님 스페인 사람?”

윤찬희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소원우는 모든 질문이 다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간략하게 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윤찬희의 흥분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자, 소원우는 본론을 꺼냈다.

“권차경이랑.”

입을 헤 벌리고 굳은 윤찬희의 얼굴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1년이 넘도록 권차경의 이름이 언급도 되지 않다가 그와 연애한다니 놀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차경이랑 연애한다고 말한 거 맞지?”

“응.”

“그니까 내가 아는 권차경이 네가 연애한다는 그 권차경이라는 거지?”

소원우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파악하고 난 후 윤찬희가 제일 먼저 내뱉은 단어는 욕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 욕이었다.

“너한테 욕한 거 아니야.”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던 건지 윤찬희가 손을 들고 해명했다. 우물쭈물 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권차경한테 한 것도 아니고…….”

권차경과 사귀기로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감히 바라지 않았다. 잘 사귀라는 어물쩍한 축복을 들을 바에야 솔직한 욕을 듣는 게 더 나았다.

“4개월 좀 됐어.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어서 미리 말 안 한 거야. 전화나 메일로는 아무래도 제대로 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냐. 너무 놀랐잖아.”

사색이 된 윤찬희의 낯빛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소원우, 너 오늘밤에 잠 못 자. 어디 도망갈 생각 하지 말고, 하나도 숨김없이 다 얘기하는 거다. 집에 술은 있어?”

“맥주랑 와인.”

“좋네. 일단 화장실 먼저 가야겠다. 찬물로 세수 좀 하고, 정신 차리고 올 테니까 술 꺼내 놔.”

맨 정신에 들을 수 없겠다면서 윤찬희는 맥주를 들이부었다. 하필 배가 터질 정도로 밥을 잔뜩 먹은 뒤에 얘길 꺼냈다고 소원우를 원망했다.

“걔가 진짜 좋아? 좋아졌어?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

정말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권차경을 다시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끈질긴 마음에 감동했던 건지도, 아니면 처절한 구애에 동정심이 들었던 건지 모르겠다. 첫 시작은 애정이 아니라 그런 모호한 감정이었을 거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었어.”

“이 건물 엘리베이터? 무진장 낡았던데 안전한 거 맞아?”

“점검은 정기적으로 한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는 평소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가다가 거세게 흔들리며 멈췄다. 진동이 유난히 세다고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려던 소원우는 엘리베이터가 층과 층 사이에서 멈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원우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이대로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엘리베이터 바닥에 주저앉아 얌전히 있었다. 1분이 이런 때엔 얼마나 긴지 절실히 체감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권차경이었다. 권차경은 엘리베이터가 멈춘 위치 부근까지 계단으로 올라와서는 관리자들이 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소원우를 안심시켰다.

“차경이가 그러더라. 스페인어를 배우길 잘했다고. 나를 구해 줄 수 있어서, 내가 필요로 할 때 달려올 수 있어서 스페인어를 배운 목적이 이루어졌대.”

소원우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급박한 상황에서 누굴 제일 먼저 떠올렸는지를 깨달았다. 관리자 전화번호가 문에 붙어 있는데도, 직접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데도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내 인생에는 우리 가족이 있고, 너도 있고, 의진 형, 영재, 제이든도 있거든. 근데 차경이는 인생에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살아. 나는 차경이랑은 절대 같은 마음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 차이가 벌어진 채로, 난 그걸 미안해하면서, 걔는 괜찮다고 하면서 이렇게 계속 가겠지 싶었어.”

마음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권차경과 끝을 맞이한다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줄어들지 않는 거리 때문이지 않을까 했다. 지금은 괜찮다 하더라도 1년 후에도 괜찮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앞서 달리는 사람은 바람의 저항과 싸워야 한다. 많은 힘을 들여야 하는 만큼 빨리 지칠 터였다.

“어느새 차경이가 내 옆에 있는 게 익숙해졌나 봐.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나 차경이만 생각했어. 걔만 옆에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서울 것 같았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권차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리의 힘이 풀렸다. 소원우는 두 팔을 뻗어 권차경을 껴안았다. 권차경의 팔이 자신을 꽉 둘러 안았다. 마음이 놓였다.

소원우의 얘기를 잠자코 듣던 윤찬희는 잔을 소리가 나도록 탁 내려놓았다.

“권차경 오라 그래.”

“여기에?”

“어. 스페인에 와서 네 남자친구 안 보고 갈 수 없지. 제대로 인사시켜 줘.”

소원우가 권차경에게 전화를 거는 사이 윤찬희는 집을 훑어보았다. 꼭 필요한 것만 있는 이 집은 커다란 남자 셋이 모이기엔 너무 좁았다. 식탁이 없어 술판을 벌이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윤찬희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원우야, 권차경네 집은 여기보다 넓어?”

“응. 방도 두 개 있고, 거실도 커.”

“그럼 거기 가도 되냐고 물어봐. 우리 원우 애인 집 좀 구경하자. 평소에 청소는 잘 하나? 바로 쳐들어가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건데.”

소원우가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윤찬희의 커다란 목소리는 전화기를 타고 흘러갔다.

권차경은 흔쾌히 오라 했지만 소원우는 망설였다. 권차경의 집에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귄 지 넉 달이 되어도 좀처럼 발을 들이기가 어려웠다. 집 내부가 어떤지는 사진으로만 봤다. 권차경은 언제든 마음 편히 놀러 오라며, 현관 비밀번호도 일러 주었다.

권차경은 집에 오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서 소원우의 좁은 집으로 건너오는 괜한 수고를 하면서도 서운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얼마나 걸려? 지하철 타야 돼?”

“2분.”

“지하철 타고 2분?”

“걸어서.”

소원우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저기야. 권차경네 집.”

창문 너머에는 세련된 아파트가 자리해 있었다.

“야, 너네 진짜……. 참 대단하다, 대단해. 여기 와서도 징하게 붙어 있네.”

“그러게.”

소원우가 피식 웃었다.

권차경과 매일 만나고, 매일 같이 밥을 먹는다. 권차경이 옆에 있는 게 완전히 익숙해졌다. 좋아한단 말을 들으면 쑥스럽긴 해도 더는 거북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 차경이네 집 처음 가는 거야.”

“엉? 안 가봤다고? 바로 앞인데?”

윤찬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갸웃거렸다.

“보통은 차경이가 우리 집에 왔거든.”

자신의 공간에 권차경이 들어오는 건 허락했으면서 권차경의 공간에 들어가는 걸 망설이는 이유를 소원우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권차경과 자신 사이에 있는 마지막 담장이 아닐까 싶었다. 언젠가는 허물어야지, 하면서 줄곧 넘어가지도, 부수지도 않았던 담장을 이제는 뛰어넘어야겠다.

“가자. 차경이 기다리겠다.”

소원우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제대로 인사하겠다고 호방하게 권차경을 부르라던 윤찬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원우야, 뭐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어. 밥 먹고 와서 배불러.”

“냉동실에 아이스크림 있는데 갖다 줄까?”

소원우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권차경은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윤찬희가 흘끔 권차경을 쳐다보더니 오랫동안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나한텐 안 물어보냐?”

“먹고 싶어?”

“어! 원우만 입이냐? 나도 입 있어, 여기!”

어색하게 고갯짓으로만 인사를 주고받은 뒤의 첫 대화가 이거였다.

소원우와 눈이 마주치자 윤찬희가 속삭였다.

“너네 완전 친해 보인다?”

윤찬희가 목소리까지 낮춰 가며 꺼낸 말은 소원우를 황당하게 했다.

“우리 사귀는데.”

“말로 들었을 때랑 직접 보는 거랑 다르단 얘기야. 이제야 좀 실감이 난달까.”

실감. 소원우는 실감이라는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권차경과는 친구 관계였다. 정확히는 친구라는 이름만 가졌을 뿐이었다. 윤찬희를 대할 때처럼 권차경을 대하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니 권차경과 완벽하게 친구였던 적은 없었다. 한 사람은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친구라고 둘러댔었다.

“솔직히 말해서 상상이 안 갔거든. 그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사귀는 사이에서 나오는 기류 같은 거. 너네한테도 그런 게 있을까 했는데….”

권차경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걸 보고 윤찬희는 입을 다물었다. 뒷말이 궁금했지만, 권차경을 옆에 두고 그런 얘길 듣는 게 왠지 민망하기도 해서 소원우는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권차경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살뜰히 소원우를 챙겼다. 흡사 시중을 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차경아, 왔다 갔다 그만하고 앉아. 너 계속 움직이느라 제대로 못 먹고 있잖아.”

권차경은 식탁에 음식이 떨어지면 소원우의 옷에 묻을까봐 얼른 일어나 물티슈를 가져오고, 접시가 비기 전에 음식을 채우고, 빈 병들이 식탁을 차지하지 않게 곧바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네가 원우한테 죽고 못 사는 건 알고는 있었지. 거 참, 좋아해서 그런 거였으면 빨리 좀 알아차려야 될 거 아니야. 진작 깨달았으면 둘이 이렇게 먼 길 돌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맘고생만 잔뜩 하고.”

술기운이 돌자 윤찬희는 하고 싶던 말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윤찬희는 지난 일이 떠올랐는지 벌게진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는 다 지나 버린 과거일 뿐이다. 옛일에 열을 내봐야 소용없다는 건 윤찬희도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분풀이는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리 원우, 행복해야 되는데. 왜 하필 너야. 원우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인 줄 알았는데.”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소원우는 윤찬희가 누굴 말하고자 했는지 알아차렸다. 권차경도 마찬가지였다. 윤찬희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실수했다는 걸 본인도 자각한 듯했다.

침묵이 감돌았다. 술 따르는 소리와 잔을 내려놓는 소리만 들렸다.

“찬희야.”

소원우가 적막을 깼다. 이름을 불린 윤찬희뿐 아니라 권차경의 시선도 소원우에게로 향했다.

“네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라 생각해. 너에겐 고마운 게 너무 많아.”

절망밖에 없던 시절에 윤찬희가 옆에 있어 주었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됐다. 덕분에 진창에서 빠져나왔고,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해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고, 좋은 기억만 남은 그런 연애도 했다. 그런 과정들이 지금의 소원우를 만들었다.

“직접 여기 와서 나 보니까 어때? 앞으로 걱정할 일 없을 것 같지 않아?”

소원우는 권차경의 팔을 툭 쳤다.

“얘 덕분이야. 날 진짜 너무 좋아하거든. 날 얼마나 소중하게 대하는지 내가 약해질 틈이 없어.”

소원우의 말에 권차경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네 말은……, 지금 행복하다는 거지?”

윤찬희가 물었다.

소원우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식탁 아래에서 권차경에게 손을 뻗었다. 권차경의 손을 톡 건드리자 권차경이 곧장 손가락을 감아 왔다.

소원우와 권차경이 시선을 부딪치며 웃는 걸 본 윤찬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얘들 봐라. 앞에 사람 있거든요? 닭살 돋는 짓은 둘만 있을 때 해. 보는 사람 눈 둘 곳 없으니까. 이참에 미리 부탁 하나 할게. 외국이라고 제발 내 앞에서 키스하거나 그러지는 말아주라.”

순간 권차경의 손이 움찔했다. 미세한 요동을 소원우는 그대로 느꼈다. 장난스럽게 꺼낸 말이니 장난스럽게 받아쳐야 되는데 소원우도, 권차경도 잠잠했다.

침묵이 또다시 이어졌다. 갑자가 가라앉은 분위기에 윤찬희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또 나 말실수 했어? 내 앞에서 키스하지 말래서 화난 거야? 농담이지, 농담. 하고 싶으면 해. 연인들의 애정 행각을 어떻게 말리겠냐.”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윤찬희의 노력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고요했다.

“야…… ,설마.”

윤찬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허망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직 안 했어?”

윤찬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윤찬희보다 더 당황한 사람은 소원우였다. 손을 잡고 있는 상태라 상대방의 긴장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사귀자고 하기 전에, 소원우는 이미 그런 얘길 했다. 손은 잡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스킨십은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권차경은 괜찮다 했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욕심내면 안 된다는 듯이. 손을 잡는 것도, 포옹을 하는 것도 다 소원우가 먼저 했다.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권차경의 얼굴에 감탄이 나온 때가 있었다. 창가를 비추는 햇살에 권차경의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보고 권차경이 싱긋 웃었다. 눈이 부셨다. 권차경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그날의 감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소원우를 보고 눈을 휘며 웃을 때나 음식의 간을 봐달라고 숟가락을 내밀 때, 긴 다리로 성큼 걷다가 속도를 늦추고 소원우와 걸음을 맞출 때, 그런 때 문득 문득 소원우는 권차경과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 될 일을 소원우는 기회만 엿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난 당연히 한 줄 알았지.”

윤찬희는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 슬슬 졸리다. 우리 이제 잘까?”

요상한 분위기를 탈출할 핑계를 대며 윤찬희는 서둘러 일어났다.

“이만 가자, 원우야.”

“둘이 같이 자?”

권차경이 불쑥 물었다.

“응. 내가 숙소 따로 잡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자라고 했거든.”

“여분 이불 없잖아.”

“침대에서 같이 자면 되지.”

권차경은 말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인 듯 표정이 시무룩했다. 소원우가 가방을 챙기는 걸 도와주면서도 뾰로통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뭐, 애인 입장에선 싫을 수도 있겠네.”

윤찬희가 뜬금없이 권차경의 편을 들고 나섰다. 권차경도 놀랐는지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는 원우네 집에서 자고, 원우는 이 집에서 자는 건 어때? 방도 두 개라며.”

소원우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윤찬희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신고서 소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 열쇠 줘. 안 그래도 국경 넘느라 피곤했어. 혼자 편히 자면 피로가 잘 풀릴 것 같은데 그래도 되지, 원우야?”

소원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를 넘겨주자마자 윤찬희는 잽싸게 사라졌다. 늦잠 푹 자고 출발한 터라 체력도 괜찮고, 밤새 술 마실 계획이니 어디 도망갈 생각 말라 했던 윤찬희는 떠나 버리고 소원우는 덩그러니 남았다.

“차경아.”

“어?”

“웃는 거 다 보여.”

권차경은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는 데 실패했다. 윤찬희가 떠나고 순식간에 환해진 얼굴이 소원우의 눈에 딱 걸렸다.

술을 한참 마시다 뚝 끊긴 상황이라 소원우는 식탁을 흘긋 쳐다보았다. 더 마실까 말까 고민했다. 몇 잔 더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말간 눈으로 빈 방이 어디냐고 묻는 소원우에게 권차경은 방을 알려주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 방에 매트리스만 있고, 이불은 없어.”

“너 얼마 전에 여름용 시트랑 이불 다 새로 샀잖아.”

“아직 못 빨았어.”

소원우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권차경은 할 일을 미뤄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권차경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거짓말을 할 거면 확실하게 할 것이지, 티가 너무 나서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수가 없었다.

“네 방 침대 커?”

소원우의 질문에 권차경이 곧바로 대답했다.

“세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큼 커.”

“그렇구나. 음, 화장실 옆에 있는 방이 안 쓰는 방 맞지?”

소원우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기대하고 있던 말이 아니었는지 권차경의 얼굴에 실망이 엿보였다. 그래도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소원우를 남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단출했다. 옷장과 침대, 책상이 전부였다. 퀸 사이즈의 침대에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소원우의 시선이 침대에 머물자 권차경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 집에 발을 들였을 때의 첫 느낌은 낯설지 않다는 거였다. 몇 번 들락날락했던 것처럼 편하고 익숙했다. 해답은 금방 찾았다.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줄 알았던 두꺼운 담장은 소원우가 인식하기 전에 이미 무너져 내린 모양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권차경과 하고 싶은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소원우는 방 안을 쭉 둘러보고는,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나 이 방에서 잘까?”

“……너 편한 대로 해.”

“나 편한 대로? 아무래도 혼자 자는 게 편하긴 하겠지.”

“…….”

소원우는 권차경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꽉 다물린 입술이 오히려 많은 말을 건네는 듯했다.

소원우는 씨익 웃었다.

“몸이 편한 대로 할까 아니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할까?”

권차경의 눈이 흔들거렸다. 소원우는 흔들거리는 눈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권차경의 눈은 소원우만 담고 있었다.

소원우는 머뭇거리지 않고 발을 옮겼다. 또 다른 방문 앞에 섰다. 이 문이 꼭 권차경에게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같았다.

똑똑.

“들어가도 됩니까?”

소원우는 정중하게 허락을 구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다시는 망설일 일도, 불안해할 일도 없을 것이다.

소원우를 뒤따라온 방의 주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얼른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나 이 방에서 자도 되나요?”

권차경의 눈이 조금씩 커지더니 이내 방문이 확 열렸다.

불을 끄니 어둠이 찾아왔다. 침대는 권차경이 말한 대로 널찍했다. 옆에서 들려오는 얕은 숨소리만 아니라면 누군가와 함께 누워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권차경과 한 방에서 잤던 밤이 떠올랐다. 권차경과 함께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권차경이 조금도 의식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졸음이 쏟아지고, 금세 잠이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한 소원우와는 달리 권차경은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날 말이야. 제주도에서 같이 잤던 날.”

“응.”

“그때 잠은 좀 잤어?”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한숨도 못 잤어.”

“나 때문에?”

“응. 너 보느라고.”

소원우도 그런 적이 있었다. 권차경의 잠든 얼굴을 보느라 밤을 꼬박 샜었다. 권차경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순간을 잠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권차경이 잠에서 깰까 봐 자세를 바꾸지도 못하고, 숨도 참아 가면서 그렇게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권차경도 그러했을 것이다. 서로 같은 과정을 겪고 다시 만났다.

“오늘은 푹 잘 수 있겠다.”

앞으론 함께 잘 날이 많을 테니, 지나가는 하루를 아까워하지 않아도 된다.

소원우는 몸을 돌려 권차경을 향해 누웠다. 바로 누워 있을 때보다 권차경과 더 가까워졌다. 소원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권차경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러면 난 오늘도 잠 못 잘 것 같은데.”

소원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어쩌지.”

권차경이 소원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 자도 돼.”

시선이 맞부딪쳤다.

“진짜?”

“어.”

“밤새 나 쳐다보게?”

“그래도 되면.”

“너 내일 아침부터 일 있잖아.”

“괜찮아.”

괜찮기는. 소원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꼬물꼬물 몸을 움직였다. 권차경과의 거리가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도 권차경의 속눈썹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소원우는 입을 열었다.

“나랑……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한 적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차경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소원우는 잠자코 권차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안 했던 순간을 대는 게 더 쉽겠다.”

그런 적 있다는 간단한 대답 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을 빗나갔다. 별거 아닌 척 물어본 소원우의 얼굴이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소원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권차경의 눈은 그런 소원우를 놓치지 않았다. 권차경의 집요한 시선에 뺨이 뜨거워졌다. 소원우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오래 알면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게 되는 모양이었다. 같은 질문을 소원우에게 던지고 싶은 눈빛을 하면서도 권차경은 말없이 소원우를 보기만 했다.

같은 마음이 아닐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기 위한 긴장감. 이런저런 염려가 섞인 눈을 소원우도 가져 본 적이 있었다. 그런 눈을 이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손부터 움직였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옷깃을 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약한 힘에도 권차경은 끌려오듯 따라왔다.

제일 먼저 부딪친 곳은 코였다. 서로의 코끝이 톡 닿자마자 소원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동시에 권차경의 두 팔이 소원우를 끌어안았다.

엄밀히 따지면 권차경과 입을 맞추는 건 두 번째였다.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떨어져 나갔던 첫 번째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입술을 꾹 눌렀다. 아니다, 이것이 처음이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간질거리는 기분은 처음 느끼는 거였다. 소원우는 입술이 닿은 채로 웃었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할 걸 그랬다.

웃느라 살짝 벌려진 입술 틈새로 권차경의 혀가 들어왔다. 숨어있는 소원우의 혀를 찾아 빨아 당겼다. 성급한 움직임은 아니었는데도 숨이 달렸다. 소원우는 뭐라도 붙잡아야겠다 싶어 손을 휘저었다. 권차경이 허리를 감은 손 하나를 풀어 소원우의 손을 잡았다.

권차경의 혀는 소원우의 입안을 완전히 점령한 뒤에야 제자리를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소원우의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고 나서 입술이 떨어졌다.

소원우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밀린 숨부터 몰아쉬었다. 권차경이 소원우를 꽉 껴안았다. 권차경의 품에 안기게 된 소원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세차게 뛰었다. 제 존재를 과시하는 커다란 박동이었다.

“심장 터질 것 같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소원우의 말에 권차경이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내 심장 말고 네 심장 얘기야.”

소원우는 괜히 권차경의 가슴을 손등으로 툭 쳤다. 그리곤 귀를 권차경의 가슴에 댔다. 여전히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 * *

제이든의 첫마디는 『아하.』였다. 그 짧은 단어에 함축된 의미들을 짐작해 보면서 소원우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원우가 캘런이 자주 얘기했던 친구인 거구나.』

제이든은 낯선 땅으로 혼자 떠나 버린 권차경이 언제나 눈에 밟혔다. 매일 권차경과 통화를 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권차경은 별말 덧붙이지 않고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만 대답했다.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10여 년 전의 권차경이 떠올랐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외톨이처럼 쓸쓸한 걸음을 내딛던 작은 아이. 지금의 권차경은 그때의 아이라고 연상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제이든은 권차경이 늘 걱정이었다.

어느 날부터 권차경은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전했다. 새로 사귀었다는 친구 얘길 전하는 권차경의 목소리엔 흥분이 섞여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제이든은 권차경에게 호주에 돌아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자신처럼 외국의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없냐고 묻는 제이든에게 권차경은 한국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친구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서.

루크가 죽고 나서 권차경은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위태로워질 만큼 굉장히 예민하게 굴었기 때문에, 권차경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게 제이든은 그저 좋았다.

『너 때문에 한국에 살기로 했다는데, 지금은 스페인에 와 있는 걸 봐. 캘런이 너에게 푹 빠졌나 보다.』

제이든이 싱글싱글 웃었다.

권차경과 사귄다고 했을 때 윤찬희는 경악했고, 소원희는 한숨만 쉬었다. 그에 비하면 제이든은 유순한 반응이었다.

『넌 별로 안 놀라네.』

자신이 소개시켜 준 두 사람이 알고 보니 과거에 친구였다가, 지금은 연인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제이든은 무난하게 받아들였다.

『나? 음. 아니야, 놀라긴 했어. 단지…….』

제이든은 뒷말을 흐렸다.

소원우는 의아한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아주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라서.』

소원우는 납득이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이든은 예상했다는 거야? 어떻게?』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레스토랑에서 밥 먹은 날 있잖아. 캘런이랑 원우랑 처음 만난 날. 사실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날 캘런이 많이 이상했거든.』

여행하다 만난 한국 친구를 함께 만나자고 했을 때, 권차경은 고민도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든의 친구니 잘 대접해야 할 것 같다며 레스토랑도 직접 예약했다. 제이든은 권차경과 소원우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이든이 보기엔 두 사람이 성격도 잘 맞을 것 같았고, 자신이라는 공통점도 있었으니까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소원우를 본 권차경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권차경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무표정 정도로 인식했겠지만, 제이든은 분명한 차이를 느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무표정이 아니었다. 의미가 담긴 냉랭한 시선이었다.

권차경은 험담이나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첫인상이 안 좋았다 하더라도 권차경은 상대에게 늘 기회를 주었다. 누군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알게 돼도 함부로 말을 옮기지 않았다. 제이든은 권차경이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친구라는 게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그런 권차경이 소원우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꽉 다물고 있는 입매가 열리면 서늘한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미소를 지어 주던 권차경이 아니었다.

‘원우가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왜 물어?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안 만날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냥 뭔가 신기해서. 원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미 원우를 싫어하기로 결심을 한 사람 같아서. 더 이상한 거 말해 줄까? 너 말이야. 원우가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델 보고 있으면 원우를 흘끔 쳐다보는 거 알아? 원우와 절대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꾸 원우를 보더라구. 그래서 헷갈렸잖아. 원우가 마음에 드는 건지, 안 드는 건지.’

그렇게 말했을 때, 권차경이 지은 표정을 제이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사람 같았다. 굳은 얼굴로 ‘내가 소원우를 몰래 쳐다봤다고?’ 하고 되묻는 걸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인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권차경은 소원우 얘기만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했다. 관심 없다는 듯,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하고, 말을 돌리면서도 흔들리는 눈을 했다. 그러다 하루는 제이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차경은 입을 악다물고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감은 눈이 바르르 떨렸다. 주먹까지 꼭 쥔 권차경의 모습에 제이든은 그 후로 소원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본인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제이든은 권차경이 소원우를 싫어하려고 힘겨운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캘런 입원했다고 너한테서 메일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둘이 언제부터 연락하고 지냈나, 왜 캘런이 입원한 걸 원우가 알고 있나.』

오히려 제이든은 권차경과 사귄다는 얘길 들었을 때보다 그때 더 놀랐다고 했다.

『차경이가 남자랑 사귀는 건 안 놀라워?』

『남자랑 사귄다는 건 놀랍지만, 원우랑 사귀는 건 납득이 가. 너 군대 가기 전까지 캘런이 나랑 통화할 때마다 네 얘길 했었어. 서핑보드, 네가 선물해 준 거지?』

『응.』

『서핑보드 선물로 받고 나한테 전화해서 뭐라 그랬는지 알아?』

소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한국이래.』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소원우에게 제이든이 싱긋 웃으며 자세히 설명했다.

『한국은 캘런 부모님의 조국이잖아. 캘런은 한국말을 하고, 한국 문화를 배우면서 자랐어. 이미 한국에 익숙해져 있었는데도, 그러더라구. 자기한테 한국의 의미는 전부 너라고. 네가 됐다고.』

말을 끝내자마자 제이든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딱 쳤다.

『캘런의 친구가 원우라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 캘런이 널 부를 때 ‘원우’라고 안 하고 ‘소원’이라고 불렀거든.』

제이든이 하는 말들은 소원우는 다 처음 전해 듣는 얘기였다.

『난 줄곧 ‘소원’이 이름인 줄 알았어. 캘런은 널 왜 그렇게 불렀을까? 한국 이름을 호주식으로 부른 건가? sowon woo. 이렇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캘런한테 물어봐. 나도 궁금해.』

『그래야겠다. 아, 제이든. 하나만 물어봐도 돼? 차경이는 원래 다정한 성격이 아니야?』

언젠가 윤찬희는 소원우를 대하는 권차경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제이든에게 확인해 보라 했다. 윤찬희는 권차경이 소원우에게만 다정한 거라고 주장했다.

『캘런은 다정해.』

『그렇지? 역시.』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소원우가 아는 권차경은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챙겨 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우를 위해 누군가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고, 원우랑 말다툼이라도 하게 되면 스스로에게 짜증을 낼 사람이고, 원우를 따라가기 위해서 쌓아 온 것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사람이기도 해. 있잖아, 캘런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원우가 될 거야. 오랫동안 캘런과 알고 지낸 내가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해. 내가 본 적 없는 캘런의 모습을 원우는 잔뜩 봤을 거거든. 그치?』

제이든의 말을 들을수록 권차경이 보고 싶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람블라스 거리 한복판이라도 권차경을 꽉 껴안고 싶은 기분이었다.

『캘런을 잘 부탁해.』

제이든이 캘런의 친구로서 말했다.

『응.』

소원우는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 * *

제이든은 딱 반나절만 있다가 다시 런던으로 떠났다. 권차경과 사귄다는 말에 이건 만나서 얘길 들어야 한다고, 어렵게 시간을 빼서 바르셀로나에 온 거였다. 하필 과외 시간이 겹쳐 권차경은 함께 하지 못했다.

“둘이 무슨 얘기했어?”

권차경이 쌀을 씻으며 슬쩍 물었다.

“이런저런 얘기 했지.”

“…….”

“…….”

“비밀 나눈 거 아니면 더 자세히 말해 주면 안 돼?”

비밀이라는 단어에 소원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제이든과 만나기로 한 전날에도 권차경은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자신이 모르는, 둘만 아는 비밀이 있지는 않느냐고 물어보기에 어떻게 하다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소원우가 되물어봤다. 권차경은 우물쭈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연어를 좋아하는 줄 몰랐거든. 근데 제이든은 알고 있었잖아.’

웬 연어. 뜬금없이 생선 이름이 튀어나왔다. 무슨 얘긴가 곰곰이 생각해 보던 소원우는 권차경과 재회하던 날을 떠올렸다. 권차경이 소고기 스테이크로 통일하자는 걸, 제이든이 소원우는 연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소원우의 몫은 연어로 주문했었다.

‘그게 왜?’

‘나는 모르는 걸 제이든은 알고 있는 거잖아. 그게 싫어.’

권차경은 툴툴댔다.

자신과 끊겨 있는 기간에 일어난 소소한 변화들을 권차경은 비밀이라고 불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얼굴이 귀여워 보였다.

“제이든이랑 만나서 네 얘기만 했어.”

“어떤 얘기?”

“네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한 얘기.”

권차경이 피식 웃었다.

“그걸 들어야 알아? 나 많이 표현하지 않았나.”

“표현은 많이 했지. 근데 나한테 말 안 한 것도 있더라고. 너야말로 비밀이 있네.”

“말 안 한 거? 그런 거 없는데.”

권차경은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나를 왜 ‘소원’이라고 불렀어?”

권차경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장난스럽게 물었는데, 정적이 이어지자 소원우도 미소를 지웠다.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소원우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니야.”

권차경이 한국으로 떠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루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호주를 벗어나면 루크에게서도 벗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루크는 한국까지 쫓아와서 권차경을 옭아맸다. 모든 게 허망해졌다.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바쁘게 살지 않으면 루크의 잔상은 더 심해졌다. 하루를 겨우 버티고 침대에 누웠지만, 눈을 감는 게 무서웠다. 악몽을 꾸지 않고 잠을 자는 게 소원이 됐다.

“네가 내 소원을 이뤄 줬어, 원우야.”

언젠가 루크와 있었던 일을 말하게 된다면 결코 담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악에 받쳐 있거나, 정신이 나가 멍한 상태일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권차경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정작 넋이 나간 사람은 소원우였다. ‘소원’이라고 부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권차경은 루크 얘길 결코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랬으면…….”

소원우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자신이 권차경에게 저지른 일은 작은 실수 따위가 아니었다. 권차경이 방문을 세게 닫고 나가고 난 뒤 자신의 삶만 무너진 줄 알았다. 자신의 세계만 무너진 줄 알았다. 권차경의 세계는 이미 무너져 버렸는지도 모르고.

“차경아, 미안해.”

소원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권차경이 소원우를 안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원우야, 이제 내 소원은 악몽을 안 꾸는 게 아니야. 악몽 때문에 잠을 설쳐도 좋고, 루크 때문에 하던 일이 엉망이 되어도 상관없어. 네 미래에 내가 있기만 한다면. 아주 작은 자리여도 괜찮아. 그럼 난 뭐든 감당할 수 있어.”

소원우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권차경에게 안긴 채로 한참을 울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권차경의 가슴에 묻은 채로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원우야, 배 안 고파?”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밥이 다 됐다는 소리가 울렸다. 한창 저녁을 만들던 중이었다.

소원우는 살짝 얼굴을 들고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권차경이 미소 지었다.

“볶음밥 해 줄게.”

“밥 안 먹을래.”

“다른 거 먹을래?”

“너 배 많이 고파?”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렇게 고프진 않은데, 넌 아까부터 계속 배고프다 그랬잖아.”

소원우는 가만히 권차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럼 밥은 나중에 먹자.”

소원우는 권차경의 뒷목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입술이 겹쳐지는 순간, 소원우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이 입술의 감촉도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였다. 권차경과 입을 맞추고 있는 게 좋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권차경이라는 것도 너무 좋았다.

권차경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소원우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벌려진 입술 틈새로 권차경의 혀가 부드럽게 들어왔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입술이며 목덜미며 턱이며 연신 입을 맞췄다.

소원우가 흡, 낮게 숨소리를 냈다. 권차경의 손이 소원우의 맨살에 닿아 있었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갔던 모양이었다. 손이 차가워서 살짝 놀랐을 뿐이었는데 권차경은 빠르게 반응했다.

“미안.”

권차경이 한 걸음 물러났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사과해?”

소원우는 다시 거리를 좁혔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면서 소원우는 권차경의 손을 끌어당겼다.

“방으로 가자.”

권차경의 침대에서 몇 번 더 잠을 잤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도 했고, 등을 권차경의 가슴에 기댄 채로 아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권차경과 아침과 밤, 하루를 함께 하는 게 완전히 자연스러워졌다.

“사랑해.”

사랑한단 말은 처음 내뱉는 거였다. 권차경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권차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소원우의 손을 잡고 마디 끝마다 입을 맞추었다. 아주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권차경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소원우의 몸 어느 한 부분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정성스레 입을 맞췄다. 안달이 난 사람은 소원우였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움직임을 잠깐 제지하고서 옷을 벗어던졌다.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던 상태라, 바로 맨몸이 드러났다. 권차경의 눈이 원우의 상체로 향했다. 열기를 머금은 눈빛이었다.

“너도 벗어.”

권차경은 주저 않고 티셔츠를 벗었다.

입맞춤이 다시 이어졌다. 소원우의 것을 부드럽게 잘근대고 빨아 당기던 권차경의 입술은 턱과 목으로 내려갔다. 곧 소원우의 온몸을 헤집어가기 시작했다. 권차경의 손가락도 부지런히 소원우의 몸을 쓰다듬었다. 권차경의 손이 민감한 구석을 지날 때마다 소원우는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럴 때면 권차경은 손을 떼고 소원우의 얼굴을 살폈다.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소원우는 권차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맞닿은 가슴보다 권차경의 묵직한 성기가 먼저 느껴졌다.

애무가 짙어질수록 정신을 부여잡기가 힘들었다. 권차경이 유두를 핥는 순간 소원우는 발가락 끝을 바짝 세우며 신음을 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곤 믿기 힘들었다. 권차경의 손이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낙인이 찍힌 것처럼 뜨거워졌다. 소원우는 밭은 숨을 내쉬며 이불을 꽉 쥐었다. 손에 힘이 빠져 자꾸 미끄러졌다.

“원우야, 날 잡아.”

권차경이 이불을 붙든 소원우의 손을 빼내 자신의 팔로 가져갔다. 그냥 살짝 잡고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권차경의 입술이 배꼽을 핥으며 아래로 내려가자 그럴 수가 없었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힘이 팍 들어갔다. 꽤 아플 텐데도 권차경은 나지막이 웃었다.

소원우는 웃을 여유조차 없었다. 권차경이 소원우의 허벅지 안쪽을 천천히 쓰다듬는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성기라고 다를 리 없었다. 소원우는 너무 빨리 사정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시간이 더 필요하면 말해. 멈출 수 있어.”

소원우의 노력을 부수어 버리는 말이 들려왔다.

소원우는 황당해하며 손등으로 완전히 발기해 단단히 서 있는 권차경의 성기를 톡 건드렸다.

“이렇게 됐는데 멈출 수 있다고?”

“네가 원하지 않으면.”

감동스러운 말이었다. 권차경은 처음부터 소원우를 배려했다. 사소한 것까지 소원우에게 맞춰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지금 소원우에게 그런 배려는 필요 없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몰라? 나 섰어. 너도 섰고. 내가 안 원하는 것 같아?”

“아니.”

“근데 뭘 망설여?”

소원우는 권차경의 성기를 한손에 잡고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소원우의 손길에 여태까지 태연했던 권차경의 호흡도 가빠졌다. 다 커진 줄 알았던 권차경의 성기는 소원우의 손에서 더 불어났다.

“도대체 어디까지 커지는 거야?”

소원우가 투덜거리자 권차경이 피식 웃었다. 동시에 권차경의 손이 소원우의 성기를 잡았다. 남자의 성기는 처음 잡아 봤을 텐데도 권차경의 손길은 제법 자연스러웠다. 소원우가 어디에 약한지 다 꿰차고 있는 듯했다. 권차경을 만지고 있던 소원우의 손은 어느샌가 멈춰 있었다. 권차경의 엄지손가락이 귀두 끝을 문질렀을 때, 소원우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소원우의 성기에서 진득한 정액이 뚝뚝 떨어져 나왔다.

권차경은 정액이 묻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소원우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곤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입술은 주저 없이 오른손으로 향했다.

“너…….”

말릴 새도 없이 권차경은 하던 일을 이어 나갔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입술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보고 말을 잃었다.

“그걸 왜 먹어?”

“다 먹던데.”

“뭘 봤기…….”

소원우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권차경의 컴퓨터에 있던 영상이 떠올랐다. 휴일에 권차경의 집에 놀러 왔다 급하게 서류를 보낼 일이 생겨서 권차경의 컴퓨터를 빌렸었다. 영상은 바탕화면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업로더가 올린 적나라한 파일 이름 그대로 저장된 탓에 영상을 틀지 않아도 무슨 영상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 것까지 따라하지 않아도 돼.”

“따라하는 거 아니야. 먹고 싶어서 먹은 거지. 솔직하게 말하면 맛이 좋지는 않아.”

“좋겠냐?”

소원우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맛 자체는 별로지만, 네 거잖아.”

권차경은 씩 웃더니 소원우의 성기를 입에 덥석 물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소원우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뺐지만 성기는 이미 권차경의 입안에 갇힌 후였다. 순간 섬광이 번쩍인 듯했다. 말캉한 혀가 음경의 구석구석을 핥고 지나갈 때마다 소원우는 허리를 비틀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쾌감에 젖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사정감은 아까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입안에서 두 번째 사정을 하고 말았다. 권차경이 정액을 삼키는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차경아.”

자신이 두 번이나 가는 동안 권차경은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흉흉하게 서 있는 권차경의 성기는 시들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갔어도 저걸 사정시키고 뻗어야지, 하면서 소원우는 두 팔을 뻗어 권차경을 끌어안았다.

“나 힘 다 빠지기 전에 넣어.”

권차경은 잠시 멈칫했다.

“안에 들어가면 그땐 진짜 못 참을 거야.”

“참지 말라니까.”

소원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권차경은 침대 옆의 서랍을 열어 젤과 콘돔을 꺼냈다.

“그거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키스한 다음날에 샀어.”

“빨리 쓰고 싶었겠네.”

어떤 얼굴로 저걸 다 샀을까. 하고 싶어서 샀을 텐데 소원우에겐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엉덩이에 닿는 젤의 감촉에 소원우는 움찔 떨었다. 엉덩이에 이물질이 들어오는 기분은 앞으로도 익숙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넣는 사람은 다른 느낌일까 궁금해져서 권차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네 표정이 어떤지 모르지? 앞에 거울이 없는 게 다행이다.”

“왜? 이상해?”

“……말 안 해 줄 거야. 나만 알고 있을래.”

살짝 젖은 머리카락, 흥분에 젖은 눈, 열락에 물든 얼굴이 소원우를 탐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욕심나는 건 오로지 소원우뿐인 것처럼 뜨거운 시선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향한 다정한 미소는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래를 파고든 손가락은 하나였다가 두 개로 늘어났고. 이윽고 세 개가 되었다. 구멍을 찬찬히 넓히고 나서, 한참 넓힌 것 같은데도 감감무소식이라 소원우가 재촉하고 나서야 권차경이 성기를 구멍 안에 넣었다.

권차경의 성기를 눈으로 봤기 때문에 얼마나 아플지 가늠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호흡이 힘들어질 만큼 낯선 이질감이 소원우의 정신을 흩트렸다. 눈앞이 뿌예졌다. 묵직하게 들어온 성기는 꾸준한 움직임으로 소원우의 안을 더 넓혀갔다. 권차경의 성기를 자신이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권차경이 움직일 때마다 아랫도리에 감각이 전부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안으로 자신을 계속 밀어 넣으면서도 소원우의 뺨과, 콧등, 입술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고통을 옅게 해주려는 입맞춤 덕분인지 마냥 아플 것만 같던 고통이 조금씩 쾌감으로 바뀌었다. 반쯤 다시 일어난 소원우의 성기에서 뿌연 액체가 찔끔 흘러나왔다. 권차경의 성기가 어느 지점을 꾹 누를 때마다 아찔한 쾌감이 몸을 휩쓸었다. 벌려진 입에서 열띤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 변화를 본인보다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권차경이었다. 권차경은 시선을 소원우의 얼굴에 고정하고 허리를 움직였다. 처음과는 달리 한 지점만을 찔러댔다. 정신을 붙들 수가 없었다. 두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겨웠다. 눈물이 맺혀 있던 모양이었다. 권차경이 혀를 내밀어 소원우의 눈가를 핥았다.

귀를 기울이면 분명히 차가 오가는 소리가 들릴 텐데 소원우의 귀엔 살덩이가 부딪치는 마찰음만 들렸다. 행위를 드러내는 적나라한 소리에 소원우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을 찔러 대는 성기의 움직임이 거세어졌다. 권차경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원우야.”

소원우는 자신도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소원우는 허덕거리며 권차경의 목을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원우의 허리를 단단하게 부여잡은 손이 소원우를 들어올렸다. 마주 안은 자세에서 권차경은 사정했다. 콘돔을 껴서 정액이 새어 나오지 않았을 텐데도, 소원우는 자신의 안을 가득 메우는 욕망을 느꼈다. 소원우는 남은 힘을 다해 권차경에게 매달렸다. 벅찬 숨을 내쉬며 권차경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댄 것이 그날 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눈치가 없는 사람도 이쯤하면 알아차릴 듯했다. 눈이 마주쳐도 싱긋 웃으면 그냥 넘어갈 일을 이진경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티가 나게 소원우를 피했으니 소원우도 뭔가 이상하다 느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어려울 만큼 이진경도 많이 놀랐다. 구엘 공원에서 소원우를 본 후로, 어떤 얼굴로 소원우를 대해야 되나 내내 고민했다.

어쩌다 그걸 봐 가지고는……. 이진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이드를 하며 지겹도록 들락거린 구엘 공원을 이른 아침에 방문한 이유는 스페인에 놀러온 엄마 때문이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구경을 못했다면서 한적한 시간에 한 번 더 둘러보러 가자고 이진경을 졸라댔다. 이국에서 고생하는 딸을 만나겠다고 긴 시간 좁은 비행기를 타고 온 엄마였다.

해가 뜨자마자 채비하고 나왔다. 몇 시간 후면 금세 붐빌 공원은 이른 아침엔 한적했다. 엄마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진경에게 일대일 가이드를 받았다. 이미 다 들었던 내용인데도 이진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수를 치며 열렬히 반응했다. 이런 여행객들만 있다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머, 얘 저기 봐라. 남자들끼리 손잡고 다닌다.’

한국에선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엄마가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그렇게 막 손가락질하고 그러면 안 돼. 무례한 거야. 여기는 남자끼리, 여자끼리 사귀는 사람들 많이 보이니까 수군대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그러지 마.’

그들이 앞에서 걷고 있어서 엄마의 손가락질을 못 봐서 다행이었지, 마주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랬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진경은 미리 경고해 두었다.

‘머리가 검은 거 보니 동양인 같다.’

‘엄마! 관심 갖지 말라니까.’

‘소리 지르지 마. 엄마도 다 알아. 훤칠해서 한 번 더 본 거야. 둘 다 키도 크고 멀끔한 것 같아서.’

얼마나 훤칠하기에 엄마가 자꾸 훔쳐보는 건가 해서 이진경도 흘끔 쳐다보았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은 참 보기 좋았다. 키가 큰 남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체격이 좋고 키가 커서 눈에 띄었다. 뒷모습이 낯설지는 않았다. 모델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진경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이진경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걸었다. 잘못 본 건 아닐까 하고, 자세히 살피는데 두 사람이 대화하면서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진경이 생각하던 사람이 맞았다. 놀란 것도 잠시, 이진경은 권차경의 옆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옆모습뿐이었지만 누군지 알아차리기엔 문제없었다. 이진경은 걸음을 뚝 멈추고 엄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 왜?’

‘엄마, 이쪽으로 가자.’

‘아까 본 데 아니여?’

‘아니야. 여기로 가도 다 연결돼 있어. 이리로 가.’

혹시나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볼까 봐 이진경은 황급히 진로를 바꿨다.

그래서 사무실 근처에서 권차경과 자주 마주쳤구나. 이진경은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것도 모르고 권차경과 인연일지도 모른다고 설레발을 쳤다. 다음에 마주치면 연락처라도 달라고 해볼까,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진 말에 소원우가 권차경이 애인이 있다고 말했었다. 기껏 마음에 든 사람을 찾았는데 이미 애인이 있다니. 이진경은 몹시 아쉬워했다.

그 애인이 소원우였을 줄이야.

이진경은 하루 종일 소원우와 얘기해 보려고 소원우의 주변을 서성이다가도 막상 소원우가 말을 걸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혹시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퇴근하기 전까지 도통 타이밍을 잡지 못한 이진경에게 소원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 아, 그게 말이에요.”

이진경은 뜸을 들였다. 무슨 말로 포문을 열까 망설이던 이진경은 자신도 생각지도 못한 말로 입을 열었다.

“권차경 씨, 애인 있다 그랬잖아요.”

“……네.”

“애인이랑 사이좋죠? 헤어질 기미는 없고?”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이진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소원우는 갑작스런 질문에 답을 생각하느라 이진경의 표정을 못 본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어……, 네. 그럴 거예요.”

소원우는 난감해했다.

이진경은 괜히 심술이 났다. 아주 조금. 운명적인 사람을 찾았다 생각했는데, 이미 애인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앞에. 그러고 보니 소원우에게 커피를 주고 싶어서 자신을 이용한 게 아닌가. 것도 모르고 난리를 치며 좋아했다니. 이진경은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며 소원에게 물었다.

“권차경 씨 말이에요. 애인한테 다정해요? 투어할 때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거든요. 차가운 성격 같던데.”

소원우를 살짝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에요. 되게 다정해요.”

이진경의 덫에 소원우는 덥석 걸려들었다. 소원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진경이 묻는 말마다 해명하기 바빴다.

“애인한텐 잘 웃어 주려나?”

“잘 웃어요.”

“사랑한단 말도 많이 하고요?”

“네.”

“원우 씨, 권차경 씨 애인에 대해 잘 아네요?”

소원우의 표정이 굳었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뒤늦게 이진경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조금 알아요.”

“맞다. 원우 씨, 권차경 씨랑 간간이 연락은 주고받는댔지.”

소원우는 그 정도 선까지만 둘의 관계를 밝힐 생각이었을 거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야 좋을 거 하나 없긴 했다. 사무실의 사람들은 스페인에 오랫동안 살아도 한국식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소원우가 거짓말을 한 이유를 이진경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놀리는 건 여기에서 그만해야겠다.

이진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권차경 씨 애인이 부러워서 심술 좀 부려봤어요.”

이진경도 남자가 끊긴 적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예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연애도 몇 번 했다. 다 상대방에게 고백을 받아 연애를 시작했고, 매번 이진경이 연애를 끝냈다. 아무튼 지금은 혼자였지만.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랄게요.”

이진경은 모호하게 축복을 건넸다. 소원우는 이진경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진경은 소원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선 자리를 떠났다.

저녁 시간인데도 볕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시원한 라떼 한 잔 마셔야겠다 생각하고 카페로 들어갔다.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런. 이진경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어……, 안녕하세요.”

“일 끝나셨나 봐요.”

“네. ……원우 씨 기다리세요?”

권차경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우의 이름만 나와도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잘 웃는 남자였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투어를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곧 나올 거예요.”

“그래요?”

권차경이 카운터로 걸어갔다.

“커피 드시려고 온 거죠? 저도 한 잔 더 주문하려는데 같이 주문해드릴게요.”

“괜찮아요. 제 건 제가 살게요.”

“원우 잘 챙겨 주신다고 들었어요. 고맙다고 한 번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권차경은 마치 이진경이 둘의 관계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도움은 저도 많이 받고 있어요.”

“원우가 집에 와서도 계속 자료 찾아보고, 후기 검색해 보고 그래요.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성에 안 차나 봐요.”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 예쁘게 봐달라는 참 귀여운 아부였다. 이진경은 권차경이 주문한 커피를 흔쾌히 받았다.

“원우 씨를 많이 생각하시네요.”

“네. 굉장히 소중한 친구거든요.”

아, 친구……. 이진경은 절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랬다가는 분명히 권차경은 이진경에게 소원우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소원우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일일이 전해 줘야 될지도 몰랐다.

권차경이 아무리 잘생겼다 한들, 마주 앉아 애인의 자랑만 들으면 이 잘생긴 얼굴도 금방 질릴 터였다. 이진경은 완벽하게 마음을 비웠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권차경에게 작별을 고했다.

“커피 잘 마실게요. 행복하세요.”

소원우에게 그랬듯 권차경에게도 똑같은 축복을 건네고서 이진경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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