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4)

10.

소원희는 두 달 전부터 신보훈과 두 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스무 살 때보다 덜 바빠진 것도 아니고, 공부할 게 줄어든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원희는 연애를 선택했다.

“원우야. 난 진짜 두 번 다시 보훈이랑 연애 못 할 줄 알았어.”

신보훈은 소원희와 헤어진 후로 줄곧 혼자였다. 고백은 두어 번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상대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냉정히 관계를 끊어 냈다. 소원희와 신보훈이 사귀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소원희에게 신보훈이 아직 소원희를 좋아하고 있다며 넌지시 얘기하곤 했다. 신보훈도 같은 말을 들었을 터다. 그래도 두 사람은 친구로 지냈다. 다시 연인으로 돌아가는 게 어려울 만큼 친구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다.

“네가 사귀자고 했어?”

“응. 내가 말했어.”

“네가 헤어지자 해 놓고, 이번엔 다시 사귀자고 말했다고?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소원우가 장난 섞인 말투로 물었다.

“자신감은 아니고, 간절했던 거지. 보훈이 옆자리가.”

소원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훈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몇 년 동안 꾸준히 치료 받으면서 완치 판정을 기대해도 될 정도로 많이 좋아지셨는데, 재발이 됐어. 가족들 다 충격을 많이 받았지. 보훈이는 어머니 때문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거라서 정말 많이 힘들어했어.”

소원희는 장례식 내내 신보훈의 곁을 지켰다. 신보훈의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신보훈이 웃을 수 있을까. 소원희는 그것만 생각했다. 소원희는 49재가 끝난 후에 신보훈에게 다시 교제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내가 사귀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하더라.”

“진짜? 왜?”

소원우는 의아한 얼굴로 소원희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를 좋아하니까!”

소원희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 이유만으로?”

“응. 그 이유만으로.”

명랑한 목소리 때문일까. 소원희의 연애가 퍽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을 텐데도.

“나는 보훈이가 좋고, 보훈이도 날 좋아하고. 나는 보훈이 옆에 있고 싶고 보훈이도 그렇고. 그래서 다시 만나기로 한 거야.”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헤어진 거였잖아. 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어떡하려고? 안 버겁겠어?”

원하는 목표는 이루었지만, 가야 할 길은 어마어마하게 멀었다. 소원희는 여전히 자는 시간을 줄이고, 취미도 접어 두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지금도 버겁지. 밤새 책을 들여다봐도 다음 날 되면 가물가물해. 미쳐 버리겠다니까. 근데, 그런 걸 이제는 보훈이랑 나누려고. 보훈이나 나나 서로를 잘 알잖아. 어떨 때 혼자 있게 해 줘야 되는지, 어떨 땐 함께해야 하는지 아니까 걱정은 미리 안 하려고.”

말을 하는 동안에도 소원희의 밥그릇은 쉬지 않고 줄었다. 오히려 듣고만 있는 소원우의 밥그릇이 그대로였다. 소원우는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밥알만 깨작댔다. 소원희는 오물오물 밥을 씹다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너, 스페인 가고 싶다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섭섭하게.”

소원우는 놀라 소원희를 쳐다보았다. 소원희가 알고 있는지 몰랐다. 소원희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곧 개강인 데다 서류 접수 날짜도 며칠 안 남아서 부모님에게만 털어놓았다. 소원우의 부모는 30여 분간 1년을 버리는 건 아니냐며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전화를 끊기 전에 소원우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얘기했어?”

“어. 나 완전 깜짝 놀랐잖아. 웬 교환학생인가 하고. 네가 스페인 좋아한다는 건 알아도, 거기에서 살아 보려고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줄은 몰랐지.”

“최근에 생각한 거야. 고민한 지는 한 달도 안 됐어.”

뭔가를 결정하기에 너무 짧은 기간인지 모른다. 그래서 소원우는 좀처럼 확신을 갖지 못했다. 원하는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으니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데, 어떤 걸 포기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야. 유명한 말 몰라? 갈까 말까 하면 가라! 가면 되지.”

“내가 그래서 너한테 미리 말 못한 거야. 이렇게 시원하게 가라고 할까봐.”

“그 말 듣고 싶었던 거 아니야? 가라고 등 떠밀어 줄 사람 원했잖아.”

쌍둥이는 정말 특별한 게 있나 보다. 때때로 소원희는 소원우가 숨겨놓은 속마음을 간단하게 끄집어냈다.

“은범이가 장거리 연애는 못 하겠대?”

“응…….”

“어렵지. 둘 다 소중한데 하나를 포기하기가. 그치?”

소원희는 소원우가 했던 고민을 이미 겪은 사람이었다. 하나가 덜 소중해서 포기했던 게 아니었다. 내려놓은 한쪽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원우야,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난 널 응원해.”

소원희는 늘 소원우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소원우는 고민을 끝내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기은범과 통화는 매일 하고, 일주일에 세 번은 그와 만나지만, 전처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 변화를 깨달은 순간, 소원우는 더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소원우는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더위를 피해 실내로 피신한 사람들이 많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뜨거운 햇살을 손이나 부채로 막아 보려 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이들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걸었다. 8월의 끝자락에 왔는데도 더위는 주춤하지 않았다. 올 여름은 사상 최고 기온을 경신했다. 그렇겐 무더웠던 여름에 소원우는 물놀이 한 번 가지 않았다.

개강하기 전에 맡은 일을 마무리하려다 보니 방학을 여유롭게 즐길 시간이 없긴 했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방학이었다. 이제껏 보낸 그 어떤 방학보다 보람찼다. 침대에 누워 수고로이 보낸 하루를 돌아보면 뿌듯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자괴감이 찾아왔다. 부지런히 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도 수시로 들었다.

기은범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더 심했다. 다섯 시간이 넘게 함께 있었는데도 그날 기은범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편안했던 게, 이제는 5분만 말이 끊겨도 갑갑해졌고, 침묵을 메워 보려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소원우를 보면서 기은범은 애써 웃었다. 소원우가 보기에도 기은범은 힘겹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은범은 소원우를 배려하느라고 억지로 웃었다. 기은범은 그렇게 웃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소원우가 그렇게 만들었다.

“형, 뭘 그렇게 봐요?”

“어? 어디로 왔어? 창문 계속 봤는데 너 안 보였거든.”

“친구 잠깐 만났다 오느라고 버스 타고 왔어요.”

“친구 누구?”

“민우요.”

“아, 민우. ……민우가 같은 과 친구지?”

“잠시만요. 커피 받고 올게요.”

기은범이 잠깐 일어났다.

실내는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놓아 공기가 꽤 서늘한데도 손바닥에 자꾸 땀이 났다. 목도 탔다. 소원우는 그제야 한참 전에 시켜 놓고도 양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라떼를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를 받아 들고 온 기은범은 “아까 뭐라 했죠?”라고 물었다.

“어, 민우가 요리 잘하는, 그 친구 맞지?”

“맞아요. 축제 때 주점 했었는데 그 친구 덕분에 매출이 어마어마하게 높았다고 얘기했었죠.”

“응. 그랬지. 아무렇게나 만드는 것 같은데 다 맛있어서 놀랐다고.”

소원우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기은범이 민우란 친구에 대해 더 했던 말이 있었는지 찾아보다가 그거 말고는 더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무슨 얘길 할까 곰곰이 생각하는 소원우에게 기은범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형. 형이 하고 싶은 말해도 돼요.”

기은범은 소원우가 억지로 대화거리를 찾는 걸 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랬는데도 소원우는 입을 열지 못했다. 소원우가 해야 하는 말은 친구 얘길 하듯 쉽게 꺼낼 수 없는 얘기였다.

“뭐라고 말하려는지 알 것 같으니까 그냥 해요. 괜찮아요.”

소원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말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은 여러 문장들을 생각해 오긴 했다. 어떻게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고, 무슨 말이 제일 괜찮을지 기은범의 입장에서 들어 보기도 했다. 소원우가 무슨 노력을 하든 소원우의 말이 기은범에겐 상처가 된다는 게 시뮬레이션의 결과였다.

“미안해.”

정작 제일 먼저 튀어나온 말은 사과였다. 준비했던 많은 말들을 입에서만 맴돌았다. 미안하단 말 하나만으로 기은범은 소원우가 이어서 하려는 얘기들을 짐작할 터였다.

기은범은 어디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소원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은범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변명과도 같은 소원우의 긴긴 계획들을 듣기만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소원우의 일방적인 포부도 그저 듣고만 있었다. 듣고 싶은 말은 하나도 없어서, 조금 더 기다리면 자신이 원하는 말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다려 보는 사람처럼 기은범은 소원우의 입이 점점 느려지고, 이윽고 멈추는데도 좀처럼 소원우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은범아. 네 생각을 말해 주면 안 될까?”

결국 소원우가 묻고 말았다.

“전에 겪은 일 때문에 불안한 거 이해해. 장거리 연애가 쉽지 않은 것도 잘 알아. 근데 그것 때문에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 서로 좋아하는데, 꼭 헤어져야 하는 거야?”

서로 아직 좋아하고 있는데 어째서 헤어져야 되는 걸까. 기은범만 괜찮다 하면 소원우는 연애를 지속하고 싶었다. 가까이에 있을 때나, 멀리 있을 때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스페인에 가서도 절 계속 좋아할 수 있어요?”

드디어 기은범의 입이 열렸다.

“응. 떨어져 있다고 내 마음이 식거나 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소원우는 반색하며 답했다. 애초에 소원우는 마음이 가벼운 편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좋아하고, 잊는 과정이 굉장히 길었다는 것은 기은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원우는 힘주어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기은범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으로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만약 헤어지더라도 아마도 나는 너를 계속 좋아할 거야.”

소원우는 진심이었다.

“아니요. 형은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기은범은 소원우의 말을 즉각 부정했다. 소원우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하듯 강한 어조였다. 기은범의 태도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소원우는 “어……, 어…….” 하고 입만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내가 왜 못 그러는데? 네가 나를, 나보다 더 잘 알아?”

분풀이에 가까운 물음에 기은범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답했다.

“네. 잘 알아요. 형은요, 내가 형을 좋아해서 나를 좋아했던 거예요. 내가 형을 좋아하지 않으면 형도 날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소원우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은범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줄줄이 늘어놓을 수 있었다. 기은범에게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기은범이 왜 좋은지에 대해서 사귀는 동안 몇 번이나 말했건만 기은범은 소원우가 기은범을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기은범이 소원우를 좋아해서, 그래서 소원우가 그 마음에 보답하고 있다는 것처럼 얘기했다.

“나는 널 좋아해.”

소원우는 한 번 더 말했다.

“제가 형을 좋아하니까요.”

“네가 날 좋아하고, 내가 널 좋아하면 우리 사이는 괜찮은 거 아니야?”

“제가 형을 안 좋아하게 되면요?”

소원우는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기은범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기은범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되다니. 그런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사람 마음은 어느 순간에, 어떤 이유로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데도 기은범은 늘 같으리라 여겼다. 참 오만한 믿음이었다.

“저는 형이 지금도 아주 많이 좋지만,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연애를 끌고 갈 수는 없어요. 형이 떠나면 전 형의 빈자리를 매일매일 느끼겠죠. 하필 우린 같은 동네에 살아서 전 집으로 걸어갈 때마다 형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전화를 걸었는데 형이 자고 있느라 제 전화를 못 받으면 왜 전화를 못 받는지 알면서도 저는 외로워지겠죠. 그런 날이 점점 많아지고, 형의 빈자리는 날로 늘어 가는데 형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제 빈자리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거고요.”

하필. 기은범은 ‘하필’이라고 말했다. 분명히 전에는 같은 동네에 살아서 우리가 만나게 됐고, 같은 동네에 살아서 자주 만날 수 있다고 행복하다고 그랬었는데.

눈이 뻑뻑해져서 소원우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 빈자리, 못 느끼게 내가 노력하면 안 될까?”

스페인과 기은범을 두고 하나를 선택할 때, 한 가지 확신은 있었다. 기은범만 설득한다면 관계가 깨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 소원우는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기은범 또한 소원우의 그 마음을 믿어 줄 거라 생각했다.

“형은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요. 나를 더 좋아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형의 노력 덕분에 이렇게 몇 달 동안 우리가 연인으로 지낸 거예요. 우리 관계가 이래요, 형. 제 입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하게 됐네요. 결말을 미리 얘기해 볼까요? 형이 제 옆에 없어서, 형의 노력을 볼 수가 없으면 저는 틀림없이 불안해지고, 불행해지고 결국은 지쳐 나가떨어질 거예요.”

기은범의 말투는 덤덤했다. 제삼자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태도였다. 평소와 비교하면 훨씬 감정이 덜 드러난 말투였다. 기은범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소원우가 잘 모르는 사람 같았다. 여태껏 본 적 없던 기은범의 표정이나 말투에 소원우는 애써 놀람을 감추었다.

“그럼……, 우리, 오늘…….”

소원우는 힘겹게 말을 잇다 포기했다.

“헤어져요.”

기은범이 소원우가 잇지 못한 말을 마무리했다.

잔에 담긴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컵에 맺힌 물방울들이 흘러내려 테이블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소원우는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의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스페인과 기은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이별이 빨리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소원우가 매달리면 기은범은 언제나 그랬듯 소원우의 의견을 따라 줄 거라 여겼다. 기은범은 언제나 소원우를 따랐으니까, 혹시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괜히 기대했다. 속은 막막하고, 눈은 뻑뻑하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저한테 미안해요?”

순간 울컥했다. 소원우는 울먹임을 참고 “응.”이라고 말했다.

“많이 미안해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좋아하게 될 때까지 형은 아무도 좋아하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기은범은 “저 이기적이죠?” 하고 덧붙였다.

“아니. 내가 이기적이지.”

“아니에요. 제가 형 차는 거니까, 제가 이기적인 거예요.”

기은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같이 앉아 있다가 따로따로 나가려니 좀 어색하네요. 아, 형. 우리 헤어졌다고 나 피해서 빙빙 돌아서 집 가고 그러지 마요. 우연히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게 인사해요. 알겠죠?”

소원우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기은범은 유쾌했다. 순전히 소원우를 위해서 웃었다. 막말을 내뱉어도 당연한 상황인데 기은범은 그러지 않았다.

기은범이 소원우를 스치고 지나갔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별이었다. 이 좋은 사람을 소원우가 내려놓았다. 스페인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시간만 낭비할지도 모르는 불안감만 떠안은 채로 소원우를 위해 좋은 것만 건네주던 사람을 포기했다.

기은범과 만나고 헤어졌는데도 여전히 낮이었다. 기은범을 낮에 만나면 늘 밤까지 함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서로의 집을 바래다주길 반복하며 얘기를 더 나누곤 했다. 뭘 그리 나눌 말이 많았던 걸까. 또렷이 떠오르는 기억마다 소원우는 웃고 있었다. 허리를 뒤로 젖혀 가기까지 하면서. 기은범은 소원우를 그렇게 웃게 해 줬다.

얼음이 녹은 탓에 커피의 양은 거의 다 차 있었다. 몇 모금 마시지 않은 커피를 그대로 반납대에 가져다 놓고서 소원우는 카페를 나왔다.

대낮에 집에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소원우는 교수의 사무실에 들렀다. 몇 시간을 앉아 있으며 교수가 추려 준 교환학생 정보를 확인했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교수의 제안도 흔쾌히 받아들여 밥과 술까지 얻어먹고서야 소원우는 집으로 향했다. 연인이 없으니 휴대폰을 꼬박꼬박 확인할 필요도 없어 몇 시간 동안 가방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볼 생각도 않았다.

집 근처 사거리에서 소원우는 기은범을 떠올렸다. 그래서 기은범은 ‘하필’이라 말했던 거구나. 추억이 많은 동네였다. 아니, 동네가 아니라 기은범과의 데이트 장소 같았다. 기은범도 오늘 집으로 가는 동안 같은 생각을 했을까 싶어 또다시 먹먹해졌다.

기은범은 같은 동네에 살기 때문에 소원우가 더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이른 새벽, 안개에 묻힌 산을 보고 있다가 문득 소원우가 보고 싶어졌다며 불쑥 전화를 걸어와 아침 등산을 가자고 했다. 소원우가 안 해 본 일들을 기은범과 함께했다. 못 봤던 풍경들도 기은범과 함께 보았다. 손으로 헤집어 보지 못할 만큼 하나하나 쌓인 시간들이 꽤 많았다. 그것들을 자신이 다 놓아 버렸다.

매일 보는 거리 풍경들이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아니, 넘실거리는 건 소원우의 눈 속이었다. 눈물이 고인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천천히 집 앞으로 향했을 때, 소원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은범일까 하고 빠르게 뒤를 돌아본 소원우는 어둠 속에 서 있는 권차경을 발견했다.

“늦게 들어오는구나. 연락했었는데.”

“그래? 폰 확인 안 해서 몰랐어.”

소원우는 이제라도 휴대폰을 꺼내서 볼까 했지만, 가방을 여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얼른 집에 들어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왜? 할 말 있었어?”

“있긴 있는데…….”

권차경은 망설였다. 뒷말이 끝맺지 못하고 뚝 떨어졌다. 소원우는 더 기다려 주지 않고 권차경의 말을 잘랐다.

“차경아, 미안한데 급한 거 아니면 내일 얘기하면 안 돼? 나 지금 너무 피곤해.”

권차경과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은범에게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기은범과 아무 사이가 아니게 되었어도, 소원우의 집 앞에 기은범이 더는 찾아올 일이 없어도, 기은범과 헤어진 날에 권차경과 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원우야, 혹시 울었어?”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도 권차경은 알아차렸다.

“아니.”

“눈이 빨개.”

권차경은 끈질기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권차경이 소원우의 얼굴이 잘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을 소원우의 등에 갖다 대고 달래려는 순간, 소원우가 몸을 홱 떨어뜨렸다.

“가.”

“원우야.”

“가라고! 너 눈치도 없어? 나 오늘 네 얼굴 보기 싫다고. 제발 오늘은 그냥 가.”

소원우는 격앙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권차경은 공중에 어색하게 손을 올린 상태로 잠시 굳어 있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붙잡아서. 들어가, 원우야. 나도 갈게.”

권차경에게 한 행동은 명백한 화풀이였다. 그걸 알면서도 원우는 사과하지 못했다. 지금 상태로는 날 선 말만 튀어나올 것 같아 아무 인사도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소원우는 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평소보다 5분은 더 느리게 집에 도착했다. 소원우는 가방을 바닥에 툭 던져 놓고 침대에 누웠다. 무기력해서 손 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헤어질 걸 각오하고 내린 결정이니 후회를 해선 안 됐다. 소원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은 후회는 아니었다. 죄책감. 미안해서 뭐든 해야 될 것 같은데, 기은범이 원하는 건 정작 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는지 모르겠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소원우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온 후에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소원우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서 읽지 않은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무표정으로 메시지들을 확인하던 소원우는 권차경의 메시지를 읽고 멈칫했다.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가 넘었다. 더위는 여전한데 계절이 이름을 바꾼 첫날이었다.

권차경의 생일이 지났다. 소원우는 그제야 권차경이 집에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생일 축하한단 말을 듣고 싶어서 집엘 찾아왔을 것이다. 고작 생일 축하한단 그 말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소원우는 망설이다가 권차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

답장은 금세 왔다. 잠이 안 와서 그냥 누워 있다는 말에 소원우는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바로 연결됐다. 아직 안 잤냐고 묻는 권차경의 목소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했다. 그래서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휴대폰, 이제야 확인했어.”

소원우는 어렵게 말문을 뗐다.

―그랬어? 미안, 약속도 안 하고 와서.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싶어서.

권차경은 소원우가 왜 전화를 했는지 알 텐데도 도리어 사과를 했다.

“이미 하루가 지났네. 그래도 이제라도 말할게. 생일 축하해.”

3년 전에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었는데, 오랜만에 전하는 축하 인사는 어색하기만 했다.

권차경은 잠시 대답이 없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고마워, 원우야.

“생일 선물은 뭐로 줄까? 필요한 거 뭐 있어?”

선물은 권차경의 생일이 오기 전에 항상 미리 준비했다. 매년 권차경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느라 며칠을 끙끙댔다. 소원우가 준비한 선물은 권차경은 늘 환한 얼굴로 받아 주었다.

―나…… 싫어하지 마.

권차경의 소원은 휴대폰이 귓가에 바짝 붙어 있는데도 희미하게 들렸다.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생일 선물로 요구하기에는 갑작스런 말이라 소원우는 되물어 봤다.

“……싫어하지 말라고?”

―응.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 게, 생일 선물이야.

뜬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던 소원우는 아까 집 앞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권차경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얼굴 보기 싫으니 가라고 했다.

“너 안 싫어해. 아까는……. 아깐, 좀 예민한 상태였거든.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아니야, 원우야. 내가 무작정 너 기다렸던 건데.

상처받았을 권차경에게 사과하려고 전화한 건 원우였는데, 권차경은 또다시 원우를 위로했다.

―힘든 하루였어? 지금까지 잠 못 잔 거 보니까 계속 뭔가 생각하고 그런 것 같은데, 피아노 연주곡이나 클래식 연주곡 틀어 두고 거기에 집중해 봐. 그러다 보면 잠이 올 거야.

“너도 지금까지 안 잤잖아.”

―응. 난 그래도 안 자길 잘했어. 생일 축하한단 말도 듣고.

“만나면 맛있는 거 사 줄게.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고마워. 원우야, 피곤할 텐데 이제 쉬어.

소원우는 권차경의 말대로 피아노 연주곡을 틀었다. 부드러운 선율이 귓가를 간질거렸다. 몇 분 듣지 않았는데도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씩 잠잠해지는 듯했다. 어느새 소원우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윤찬희와 현의진은 둘 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기은범과 헤어졌다는 소식과 1월 말에 스페인으로 간다는 소식을 함께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교환학생 지원자가 꽤 많았다. 만반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떨어질 가능성도 있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 두고 있었다. 최종 합격 소식을 통보받고 나서야 소원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뭐야. 너무 갑작스럽잖아.”

윤찬희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페인에서 살아 보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너 이렇게 실행력이 좋았어? 언제 이렇게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됐냐.”

“교수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 두 지역을 놓고 고민하는 소원우에게 교수는 발렌시아 대학교를 권했다. 교수의 할머니가 발렌시아에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 소원우가 원하는 대로 현지 문화생활도 빨리 익히고, 스페인어 공부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라 했다. 집세도 다른 곳에 비해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소원우는 이 좋은 기회를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너 진짜 스페인 가는 거야? 나한테 말도 없이 혼자 다 결정해 버리고. 난 속상하다. 너무너무 속상해.”

윤찬희는 입을 삐쭉삐쭉 내밀었다. 중대한 사항을 비밀로 했다고 섭섭해했다.

“뭘 삐치고 그래. 원우한테 좋은 일이잖아.”

현의진이 윤찬희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며 윤찬희를 살살 달랬다.

“원우의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당연히 좋긴 하죠. 은범이랑 헤어지지만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드디어 원우가 괜찮은 남자 만나서 연애한다 싶더니.”

윤찬희는 대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윤찬희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라 소원우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좋은 연애를 했고, 좋은 이별도 경험한 거지. 안 그래?”

현의진이 소원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현의진 식의 위로였다.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걸로 충분했다.

“아, 난 모르겠어. 은범이가 너한텐 딱이었는데. 걔랑 너랑 진짜 잘 어울렸단 말이야. 나 왕따시키고 니들 둘만 소곤대며 킥킥거려도 하나도 안 얄미웠다고. 한 몇 년은 사귈 줄 알았건만.”

윤찬희는 몇 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나도 그래서 고민 많이 했어. 은범이 같은 사람 또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소원우는 손가락만 만지작댔다. 스페인에 떠나기 전날까지도 혹시 잘못 선택한 건 아닐까 매일 의심할지도 모른다.

“아니야. 만날 수 있어.”

“진짜요?”

“응.”

불안한 눈빛으로 묻는 소원우에게 현의진이 말했다.

“니들 스무 살일 때도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스물셋도 아직 어린 나이야. 본인은 몰라도 남들이 보면 알아. 작년에 비해서 얼마나 자랐는지. 그렇게 자라고 자라면서 시야도 계속 넓어지고, 사람 보는 눈도 더 커져. 때가 되면, 그만큼의 좋은 사람을 또 발견할 수 있어.”

“형은 더 좋은 사람 안 만나고 사귀던 사람 다시 만났잖아요. 안 자라서 그런 거예요, 뭐예요.”

윤찬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윤찬희의 말이 맞았다. 분명히 시야도 넓어졌고, 눈도 커졌으나 기껏 발견한 사람은 또다시 성원영이었다. 짐짓 어른인체 굴었는데 현의진이야말로 조언할 자격이 없었다. 현의진은 오류를 지적받고 그저 웃기만 했다.

“소원우도 형처럼 그러면 어떡하냐구요.”

당사자인 소원우보다 윤찬희가 더 불안에 떨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권차경은 너 스페인 간다니까 뭐라 그래?”

최근 윤찬희는 툭하면 권차경의 소식을 물었다. 소원우가 지나가는 말이라도 권차경 얘기를 하면 손으로 귀를 꽉 막고선 궁금하지 않으니 말하지 말라던 사람의 입에서 최근 들어 권차경 이름이 자주 나왔다.

“너, 요즘 권차경한테 관심이 많다?”

“야, 관심은 무슨!”

윤찬희가 흥분을 하며 잡아뗐다.

“내가 그 새끼한테 무슨 관심이 있다고 그래! 관심이 아니라 경계야, 경계.”

“권차경을 왜 경계해?”

현의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형이 걔 보면 알아요. 경계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소원우만 졸졸 쫓아다니고.”

또 시작이었다. 윤찬희의 말을 심드렁하게 넘기는 소원우와 달리 현의진은 귀 기울여 듣자, 윤찬희는 이때다 싶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윤찬희의 설명엔 과장이 가득했다.

“윤찬희, 너 진짜. 왜 네 마음대로 해석을 해.”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권차경이 의심스럽게 행동한다니까 그러네.”

답답해하는 윤찬희와는 달리 현의진은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왜, 뭐가 의심스러운데?”

“형, 들어봐요. 걔가 지 입으로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거든요? 그 새끼 인기 존나 많은데 고백도 안 하고, 좋아하는 사람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말 안 해 주고 그냥 웃기만 해요. 소원우한테 영화 보자, 밥 먹자, 잘 자라, 잘 잤냐, 어디 아픈 덴 없냐, 전날 물어본 거 또 물어보고 소원우 만나면 계속 해쭉거리고 아주 좋아 죽어요.”

소원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경이는 원래 그랬다니까. 상냥한 성격이라 그래.”

“상냥한 정도가 너무 지나치잖아. 그리고 뭐가 원래 그렇다는 거야. 너한테만 유독 그러는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한테만 그러는지 아닌지.”

“알지. 제이든한테 물어봤으니까.”

아, 씨발. 실수했네. 윤찬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이든한테 그런 걸 물어봤어?”

윤찬희는 뒷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고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

“왜?”

“왜긴 왜야. 권차경이 너한테 너어어어어무 상냥해서 굴어서 궁금해서 그랬다. 네가 만날 권차경은 원래 성격이 좋아, 원래 착해, 다정했어. 이러니까 호주에 살았을 때도 너한테 하듯 다른 사람들한테 그랬는지 궁금해서!”

이틀 전, 제이든이 보낸 장문의 메일에는 윤찬희와의 대화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윤찬희가 실수했다고 말한 걸 보면 비밀로 해 달라고 제이든에게 부탁한 듯싶었다.

“제이든이 뭐라 했는지는 안 말해 줄 거야. 알고 싶으면 네가 직접 물어봐!”

윤찬희는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지 뭐.”

그러자 윤찬희가 소원우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아니야. 물어보지 마.”

“윤찬희. 이랬다저랬다 할래?”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너도 나처럼 권차경을 의심하게 될 걸.”

“무슨 의심? 너, 설마 권차경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는 거 아니지?”

소원우는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튀어나올 줄 알고 물었지만, 윤찬희는 소원우의 눈치만 보았다.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

“없어. 윤찬희. 정신 차려. 권차경 몰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차경이야.”

“알지. 권차경이 어떤 놈인지 잘 알지. 누굴 좋아했었는지도 잘 알지.”

윤찬희는 착잡한 얼굴로 연거푸 술만 들이마셨다. 소원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조차 어이가 없었다.

현의진은 소원우와 윤찬희의 대화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생각의 결론을 말했다.

“내년에 해답이 풀리겠네. 소원우가 스페인에 가면 어떻게 나올지 보면 되겠다.”

“그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무래도 찬희가 차경이한테 안 좋은 감정이 남아 있어서 모든 행동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윤찬희는 소원우의 말에 속이 답답해졌는지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권차경은 너 스페인 가는 거 아직 모르지?”

“네. 모레 만나면 말하려고요.”

윤찬희는 소원우가 매일 권차경을 만난다고 했지만, 만나는 건 나흘에 한 번 꼴이었다. 그것도 윤찬희는 많다 했다. 같은 학교도 아니고, 같은 동네도 아닌데 남자 둘이 나흘마다 보는 거면 매일 보는 거와 같다고. 예전에는 뜸하게 만나는 게 사흘에 한 번일 정도로 권차경을 더 자주 만났다. 지금이 훨씬 줄어든 횟수인데도 윤찬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은범이랑 헤어졌다는 것도 얘기하고?”

“……제가 먼저 말은 안 꺼내겠지만요.”

스페인에 간다고 하면 기은범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당연하게 따라올 터였다.

윤찬희는 또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은범이랑 헤어진 거 알면 매일 전화하고, 매일 너 찾아가고 그럴 것 같아.”

권차경과 통화는 지금도 매일 하고 있었지만 소원우는 그 말은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도 권차경에게 메시지가 왔다. 소원우는 내용 확인만 하고 도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윤찬희는 빠른 속도로 들이마신 탓에 금방 취해 널브러졌다. 이번 만남의 주된 목적은 스페인에 간다는 것과 기은범과 헤어진 소식을 전하는 거였는데, 모든 얘기가 다 권차경으로 끝나 버렸다.

기운이 다 빠졌다. 소원우는 노곤한 눈으로 윤찬희를 바라보았다. 자리를 시끄럽게 만들고선 혼자 나가떨어졌다. 윤찬희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불편한 자세였지만,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현의진과 만난 거였는데, 윤찬희가 허튼 말을 내뱉는 바람에 현의진과는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애인이랑 같이 사는 건 어때요?”

“이런 걸로도 말싸움이 되는 구나, 싶을 만큼 매일 다퉈.”

현의진은 몇 달 전부터 성원영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 속속들이 다 아는 사이에도 새삼스레 맞춰 가야 할 게 많았다.

“자주 싸우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소원우가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래도 같이 살기를 잘했다고 생각해. 원영이가 그러더라. 싸울 때마다 나랑 평생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대.”

“진짜요?”

“응. 자기 성격 받아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느낀다더라. 너나 은범이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원영이가 이기적이지. 그치?”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 힘든 말에 소원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알콩달콩 잘 살고 있어. 나도 가끔은 이기적으로 구니까 뭐.”

“형이요? 어떻게요? 상상이 안 되는데.”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참기만 하겠어.”

현의진이 화를 내는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안 참으면 어떻게 하는데요?”

“그건 비밀.”

소원우는 거듭 물어봤지만 현의진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소원우까지도 미소 짓게 하는 행복한 웃음이었다.

“권차경은 졸업반이지? 호주는 안 돌아간대?”

“요즘 면접 보러 다니거든요. 한국에서 일하려나 봐요.”

권차경은 면접을 보고 나면 소원우를 만나러 왔다. 졸업 직전은 특히 위로가 많이 필요한 때였다. 지친 하루의 끝에 친구에게서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고 싶은 심정을 소원우도 몇 년 후면 겪을 터였다. 나직한 목소리로 소원우를 만나고 싶다고 할 때마다 냉정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다 최종 면접까지 가는 걸 보면, 곧 좋은 소식 있을 것 같아요.”

“권차경은 회사에 들어가서도 인기 진짜 많겠어.”

아마 그럴 것이다. 권차경은 어딜 가나 예쁨 받았다. 지금까지 쭉 그랬다.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하잖아요. 성실하고, 세심하고, 책임감도 있고.”

“잘난 점이 너무 많네. 단점은 없어? 내가 아는 단점 말고.”

현의진은 ‘내가 아는’에 강조를 했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소원우는 피식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깊이 생각해 보았다. 장점은 술술 나왔는데 단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너한테는 좋은 점만 보여 주는구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현의진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끝내 떠오른 단점은 없었다.

“으으…….”

윤찬희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불편하게 꺾인 고개가 한계점을 맞이한 모양이었다. 소원우와 현의진은 이미 시켜 놓은 병들만 처리하고 일어날 채비를 했다. 윤찬희가 취해 버린 탓에 예정보다 술자리가 일찍 파했다. 소원우는 아쉬워하며 현의진과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소원우는 택시를 탄 후에, 휴대폰을 꺼내 아까 도착했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찬희네 집 가고 있어.]

[오늘 거기서 자?]

[응.]

[좋겠다.]

권차경도 과 동기들이랑 만나는 중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술자리는 한창이었다.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권차경이었다. 윤찬희가 일찍 취하는 바람에 소원우는 잘 마시다가 끊긴 상태였다.

[난 오늘 끝이야. 찬희 이미 뻗었거든.]

[다음에 우리 집도 놀러와, 원우야.]

아. 이런 뜻의 ‘좋겠다.’였구나. 막힘없이 자판을 누르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가 서서히 끝을 맞이할 즈음에야 소원우는 썼다 지웠다 한 대답을 보냈다.

[그래.]

이 한마디를 보내는 게 오래도 걸렸다. 그러겠노라 인사치레로 대답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실제로 권차경의 집에 발을 들이는 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좋은 기억이 많지 않은 집이다. 그곳에서는 늘 밤을 힘겹게 버티었다.

메시지가 이후로도 몇 개 더 왔지만, 소원우는 읽어 보지도 않고 손에 들고만 있었다.

* * *

“나 합격했어, 원우야.”

만나자마자 권차경은 좋은 소식을 전했다. 메시지로 말하려다가 얼굴을 보고 축하받고 싶은 마음에 꾹 참고 기다렸다고 했다. 면접은 나쁘지 않게 본 것 같은데, 경쟁률이 워낙 높아 합격을 장담할 수 없다 했던 만큼 기쁨은 더 컸다.

“진짜? 축하해. 한 달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준비했잖아, 이제 마음 편히 잘 수 있겠다.”

“응. 고마워.”

권차경은 환하게 웃었다.

“나도 좋은 소식 있는데.”

덕분에 소원우도 말을 꺼내기가 한결 쉬워졌다.

“너도? 뭔데?”

“나 내년에 교환학생으로 스페인에 가게 됐어. 잘 됐지?”

소원우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공부해 보고 잘 맞으면, 본격적으로 스페인어로 전공도 바꿀까 생각도 하고 있어.”

어차피 적당히 점수에 맞춰 선택한 학과였다. 지원 가능한 학과들 중에서 권차경과 접점이 있을 만한 것으로 골랐다. 소원우의 미래는 오로지 권차경이었다. 어떻게든 미래에도 그와 가까이 있으려고 발버둥을 친 결과는, 지금의 소원우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뭐야. 나는 축하해 줬는데, 너는 입 다물고 있기야?”

소원우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데도 적막함은 깨어지지 않았다. 권차경은 창백한 얼굴로 굳어있었다.

“놀랐어? 교환학생 안 될지도 몰라서 미리 말 안 했던 거야. 친구들한테도 이번에야 소식 전했어.”

“……기은범은?”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은범이한텐 얘기했었지.”

권차경은 암담한 눈이었다. 파리해진 낯은 금방 혈색을 되찾지 못했다.

“은범이 때문에 많이 고민했는데, 떠나기로 결정했어.”

“네가 가도 괜찮대?”

“……아니.”

“그럼?”

권차경은 가라앉은 얼굴로 재차 물었다.

“은범이가 떨어져 지내는 건 힘들대. 헤어지기로 했어.”

“헤어졌다고?”

권차경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한 달 좀 넘었어.”

우연히 만나면 피하지 말고 인사를 나누자던 기은범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같은 동네라서 매일 만날 수 있다고 좋아했었는데, 어쩌면 그 잦은 만남이 모두 기은범의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도 소원우에겐 안부를 물을 자격이 없었다. 우연히 마주치기만 기다렸지만,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가 있는 거야?”

“1년.”

“1년 후에 돌아오는 거야?”

“모르겠어. 더 살아 보고 싶으면 더 있을 수도 있고.”

1년 후를 아직 계획해 놓지는 않았다. 1년을 사는 것도 준비할 게 많았다. 비자나 입학 허가서 외에 스페인 거주지 증명서, 여행자 보험 증명서, 재정 증명서 등 갖춰야 할 서류도 산더미였다. 떠나는 기쁨에 비하면 이런 자잘한 수고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너한테 좋은 일이지?”

“그렇지. 간절히 원하던 것 하나가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럼 축하해 줘야 되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권차경의 낯빛은 어두웠다. 불길한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불안한 기색이 완연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라 놀란 듯했다. 권차경에게는 스페인에서 살고 싶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깰 겸, 소원우는 일부러 농담을 던졌다.

“축하한다는 사람 얼굴이 아닌데?”

소원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나 권차경의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권차경의 주먹 쥔 손이 소원우의 눈에 들어왔다. 핏줄이 튀어나올 만큼 힘주어 꽉 쥔 손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꾹 누르는 고통은 소원우도 잘 알고 있다. 버티어 보려고 주먹도 쥐어 보고 입술도 깨물어 봐도 그다지 나아지는 게 없다. 떨리는 몸을 감추려면 자리를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소원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권차경은 많이 놀라 보였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이미 친구와 떨어져 본 경험이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다.

“손바닥에 상처 나겠어. 손 풀어.”

소원우가 차경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부드럽게 쳤다.

그때였다. 권차경이 갑자기 소원우의 손을 붙잡았다. 손아귀의 힘이 셌다. 소원우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여서 소원우는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잡혀 있었다.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던 권차경은 힘없이 소원우의 손을 놓아주었다.

“원우야, 미안한데 나 먼저 일어날게.”

“어? 어, 그렇게 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권차경은 끝까지 웃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던 소원우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권차경은 식당을 나가며 왼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소원우를 붙잡았던 왼손이었다.

윤찬희의 말이 둥둥 울렸다. 소원우가 보기에도 오늘 권차경의 반응은 묘했다. 권차경이 줄곧 바라는 자리가 친구의 자리인지 아니면 소원우의 가장 가까운 자리, 한때는 권차경이 가졌었던 그 자리인지 소원우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 * *

집이 엉망이었다. 옷가지들은 바닥에 내팽개쳐졌고, 식탁에는 빈 술병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지만 않아도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성미인데도 권차경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권차경은 떨리는 손을 응시했다. 소원우의 손을 붙잡은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 탓에 그동안 갑갑하게 눌러 온 말을 꺼내 놓을 뻔했다.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하지 못할 만큼 머리가 멍했다.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신경 쓸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빠져나왔다.

권차경이 한국에 남은 이유는 소원우 하나였다. 소원우가 없는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다. 평범한 일상도 갑자기 두려워졌다.

권차경의 부모는 권차경이 대학을 졸업하면 호주로 돌아오길 원했다. 한국의 현실은 한국에서 일했었던 부모가 더 잘 알았다. 밤낮없이 일해도 삶은 고달팠다. 젊음을 다 바쳐 에너지를 쏟고 쏟을 뿐, 충전할 시간은 없었다. 긴 휴가는 고사하고 정년까지 일할 거라는 장담도 할 수 없었다. 팍팍한 현실을 피해 호주로 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자신들과 같은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권차경은 부모의 어떤 말에도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소원우 때문에 한국에 마음을 붙였고, 소원우 때문에 한국에 살기로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은 바쁘게 살다 보면 순식간에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소원우 없이 그 시간을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소원우를 향한 마음은 더 커져 가는데, 소원우는 그만큼 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진즉에 멀어졌던 걸까. 자신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만나자는 친구들의 약속도 다 거절하고 하루를 비워 놓았다. 자정이 되자마자 축하한다는 연락이 왔었으니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기를 기다렸다. 12시가 되자 휴대폰은 생일 축하 메시지로 연신 울려 댔지만 소원우의 것은 없었다. 혹시나 하고 새벽 2시까지 기다렸다. 또 혹시나 하고 아침을 맞았고, 또 낮을 맞았다.

그러다 문득 소원우가 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동안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소원우를 기다리는 모습이 어쩐지 초라해 보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소원우를 꼭 올 테니까.

기다림이 길어지는 것쯤은 괜찮다. 오기만 한다면. 그러나 소원우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만남만, 연락만 오갈 뿐 여전히 소원우는 권차경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스페인으로 간다는 말에 권차경은 확연히 깨달았다. 소원우는 권차경 없이도 살 수 있다. 소원우가 스페인에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불확실한 게 문제가 아니라, 소원우에게서 잊히는 게 문제였다.

비 내리는 소리가 집 안까지 들려왔다. 가을에 접어든 날씨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했다. 비 내린 뒤 기온은 더 떨어진다고 했다. 권차경은 외투 하나 들고서 집을 나섰다.

차에 들어가 있어도 되는 걸 권차경은 세찬 비를 다 맞고 섰다.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복잡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젖었다. 체온이 떨어지니 몸이 자동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권차경은 소원우의 집 앞을 떠나지 못했다.

7시가 넘어서면서 조금씩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이윽고 그쳤다. 소원우가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인데 비가 그쳐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권차경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저가 보기에도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권차경은 젖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털었다. 그것으로는 어림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했다.

소원우는 빌라에서 나오다 권차경을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눈이 한껏 커졌다.

“너 여기에서 뭐 해? 다 젖었잖아. 얼마나 서 있었던 거야?”

“할 말이, 있어서.”

입이 얼어붙었는지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야. 너 얼굴 완전 하얗게 질렸어. 아, 진짜.”

소원우는 시계를 연신 쳐다보더니 결심을 했는지 권차경을 집으로 잡아끌었다.

“일단 따뜻한 물에 몸 좀 담그고 그 다음 얘기하자.”

“소원희 있잖아. 소원희 불편할 거야.”

“그걸 아는 놈이 왜 자꾸 집에 찾아오냐?”

“……그러게. 나 한심하지.”

권차경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비에 젖은 탓에 어깨도 축축 처졌다. 당당하게 서 있고 싶었는데, 어느 때보다 초라한 꼴이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현관에 세워 놓고 소원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큰소리가 몇 번 나더니 소원우의 뒤로 소원희가 따라 나왔다. 권차경을 보며 소원희는 입을 벌리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얘 꼴이 왜 이래? 입술 파란 거 봐라.”

“정말 쓰러질 것 같아서 그래. 젖은 옷부터 얼른 벗겨야겠어.”

“얼마나 초췌하기에 집까지 데려오나 했는데…….”

소원희는 말문이 막혔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강제로 욕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제대로 몸 데우고 나와. 갈아입을 옷 문 앞에 놓을게.”

권차경이 씻고 나왔을 때는 소원희는 집에 없었다.

“눈곱만 떼고 나갔어. 카페 가 있겠대.”

“폐 끼쳐서 미안해.”

“내가 집에 데리고 온 거니까 사과는 됐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비를 다 맞으며 서 있었던 거야? 이럴 거면 그냥 전화를 해.”

소원우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을 건네며 말했다. 권차경은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들고 묵묵히 바라보았다. 눈이 빡빡해졌다. 울컥하고 치솟는 감정을 더는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네가 없는 삶이 상상이 안 돼. 나 어떡하냐. 원우야. 너 떠나면 난 어떻게 살아.”

권차경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울음을 참아 보려고 눈에 힘을 주고 손도 꽉 쥐어 봤지만 울음이 이런 식으로 터지는 것도, 또 가까스로 막아 보는 것도 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능숙하게 해내지 못했다.

소원우는 당황했는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왜 그래. 1년 그거 별로 안 길어. 너 회사 다니면서 적응하다 보면 금방 지나갈 거야.”

소원우는 위태하게 서 있는 권차경의 등을 툭툭 쳤다.

“너 전에 자주 못 봐도 우정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 근데 뭘 그렇게 불안해해.”

아, 그런 말을 했었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걱정할 게 없다고. 이제까지는 그랬다. 그게 가능했다. 그러나 소원우가 떠난다는 생각만 하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발 디딜 작은 조각 하나 없이 저 끝없는 심연으로 빠지는 듯했다. 어떻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상당한 고통이 찾아오는데.

“네 미래에 나는 없어?”

권차경을 달래주며 애써 웃음 짓던 소원우의 얼굴이 굳었다.

“내 미래에는 너밖에 없어. 너만 있어. 네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너는……, 아니야?”

드문드문 말이 끊겼다. 권차경의 말 사이사이마다 울음이 섞여 나왔다.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적막이 흘렀다. 한참 만에 소원우의 입이 열렸다.

“나는……. 나는 스페인에 간다고 은범이랑 헤어졌어. 내 미래에 은범이가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두 개를 다 가질 수 없어서 은범이를 놓은 거야. 하나를 갖고, 어떻게 하나를 또 욕심내. 그래서 은범이도 넣어 두지 못했어.”

소원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내뱉고 있는지 숨소리가 힘겨워 보였다. 기은범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걸까.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입매가 비틀어지면서 권차경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해.”

만약 고백을 하게 된다면 근사하게 하고 싶었다. 세세하게 짜 놓지는 않았지만, 소원우에게 좋아한다고 말을 한다면. 만약 그랬다면 잘 차려입은 멋있는 모습으로 할 줄 알았지,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두서없이 “좋아해.” 하고 바로 털어놓을 줄이야.

“뭐?”

“네가 좋아.”

“날 좋아한다고?”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하던 소원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어떻게 나를 좋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소원우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권차경의 말을 부정했다.

“왜 말이 안 돼? 네가 좋은데, 너 말고는 이렇게 날 만든 사람이 없는데, 왜 내가 널 좋아하는 게 말이 안 돼.”

불안한 상태에서 차마 더 억누르지 못하고 터져 나온 고백이었지만, 결코 얕은 감정이 아니었다. 소원우처럼 권차경도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을 수천 번 부정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은 처절하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소원우에 대한 감정은 깎아내릴 수 없는 진실이었다.

“차경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미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너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싶었고, 뭐든 다 너에게 맞춰주었어. 넌 내가 너를 그렇게 대하는 게 익숙했던 거야. 내가 너를 좋아했을 때 했던 행동들을 지금은 하지 않으니까 네가 어색하게 느끼는 거고. 일종의 박탈감 같은 거라 생각해.”

권차경이 무슨 말을 해도 소원우는 권차경의 말을 믿지 않았다. 권차경이 무슨 말을 하든 부정부터 했다.

“박탈감?”

권차경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젖은 눈을 손으로 거칠게 눌렀다.

“원우야. 네가 날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너만 보면 갈증이 일고, 숨이 막히고, 심장이 뛰고, 말이 떨어지지 않고, 식은땀까지 흘러. 네가 말해 봐. 내가 왜 이럴까.”

“그, 그건 박탈감…….”

권차경은 한 걸음 소원우에게 다가갔다.

“박탈감 때문에 흥분을 해? 너를 만지고 싶고, 네 몸을 보고 싶고, 너와 자고 싶고 그런 마음이 박탈감 때문에 드는 거라고?”

소원우는 몸을 움찔 떨었다. 권차경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표정이 점점 얼어붙었다. 권차경이 한 걸음 소원우에게 다가가자 소원우가 흠칫하고 물러났다. 권차경은 또다시 벌어진 거리를 확인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권차경은 자꾸만 멀어지려는 소원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방문이 확 열렸다. 소원우는 주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너의 혐오스런 눈빛이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 너도 기억나지? 여기였잖아. 근데 날 좋아한다고? 네가 이 방에서 날 어떤 눈으로 봤는데,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어떻게 날 좋아한다고 그래?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권차경은 더 이상 소원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문턱 너머 서 있는 소원우는 권차경이 진저리치며 떨쳐 낸 소원우였다. 가시 돋친 말들로 소원우를 찔러 댔다.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비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원우를 상처 입혔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니 믿기 힘든 게 당연했다.

“평생 사죄할게. 원우야. 내가 잘못했어. 나는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너를 친구로 두는 게 유일하게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어.”

소원우는 차게 식은 눈으로 권차경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 뾰족한 시선이 권차경의 두 다리를 내리찍는 듯했다. 소원우의 냉정한 거부 때문인지, 비 때문에 열이 오른 탓인지 머리가 어질했다. 또 한심하게 소원우의 앞에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때였다. 소원우가 빙긋 웃었다. 권차경은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소원우의 웃는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차경아, 그만 사과해. 이미 용서했어. 그래서 우리 다시 친구가 된 거잖아.”

한결 누그러진 말투였다. 암담하게 내려앉은 분위기도 슬그머니 물러나는 듯했다.

“네가 그토록 원했던 친구가 됐는데 그걸 무너뜨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설사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안 그래?”

소원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권차경의 입을 가로막았다. 권차경의 고백은 허망하게 흩어졌다. 소원우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관계가 간절했다. 그리고 소원우는 권차경의 원대로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토록 우정이 간절했다. 그게 사랑인 줄 모르고.

권차경은 뒤늦게 감정을 알아차린 자신을 원망했다. 친구로는 소원우의 방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소원우가 똑똑히 일러 주었다. 이미 용서받았으니 지난날의 과오를 사과해 봐야 소용없었다. 분명히 용서를 받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벌은 끝나지 않았다.

“차경아, 이만 집으로 가.”

방문이 가차 없이 닫혔다. 문만 열면 소원우가 있는데도 권차경은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루크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떠돌아다녔다. 자신밖에 듣지 못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권차경은 소원우가 루크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소원우의 집에서 나왔다. 등에 얹힌 무게는 루크의 무게만은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 또한 등에 업혀 있었다.

* * *

소원우는 미리 만들어 놓은 물품 리스트를 체크했다. 생필품이나 잡다한 것들은 스페인에 가서 사도 될 테니 한국에서 꼭 들고 가야 하는 것들만 챙겨 두었다. 화창한 날에 카페 바깥 자리에 앉아 읽을 생각으로 소설책도 몇 권 챙겼다. 겨울 옷가지들만 챙겨 가고 여름옷은 택배로 받기로 했다.

1월 말에 출발하려던 날짜를 앞당겨 학기가 끝나면 곧장 출발하기로 했다. 집도 다 정해졌으니 마음 편히 공부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매주 만났다. 이따금씩 연락만 주고받던 친구들 중 몇몇하고는 만나 밥을 먹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날 때마다 소원우에게 권차경의 안부를 물었다. 당연히 소원우와 권차경은 여전히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윤찬희는 거 보라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럴 줄 알았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니 권차경과 담판을 지어야겠다며 권차경을 부르라고 난리를 피웠다. 연락을 끊었느냐고 묻는 윤찬희에게 소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날 싫어하지 마. 제발. 나를 싫어하지 마, 소원우야.

술에 전 목소리로 권차경은 간곡히 빌었다. 좋아해 달라는 게 아니라, 고백에 응해 달라는 게 아니라,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소원우에게서 미움을 받는 게 그 어떤 것보다 두려운 일인 것처럼 권차경은 절절맸다.

그 모습에서 소원우는 오래전의 자신을 보았다. 같은 마음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미움 받지 않기 위해 거짓말만 늘어놓았다. 바다를 좋아해, 여름을 좋아해. 좋은 건 권차경 하나였는데.

권차경의 등 뒤로 자신의 옛 모습이 뭉실뭉실 떠올랐다. 권차경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연락이 오면 고민을 하다가 결국 받곤 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바뀐 출국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소원우가 떠났다는 걸 뒤늦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새해가 되면 권차경은 더는 학생이 아니었다. 소원우 없이 못 산다고 말했어도 어떻게든 살게 될 것이다. 기은범의 말처럼 전화를 해도 바로 이어지지 못하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날들이 반복되다 보면 애틋한 그리움은 사라지고, 차디차게 식은 마음만 덩그러니 남을 터였다.

소원우는 그렇게 장담했다.

“너 떠나면 나 이제 혼자 살아야 되네. 나 외로워서 어쩌지.”

소원희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과장되게 축 처진 눈꼬리 때문에 소원우는 속지 않았다.

“외롭기는. 보훈이 있잖아.”

소원희는 환히 웃었다. 신보훈의 이름만 나와도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이 딱 맞지. 나 보훈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으면, 너 떠나지 말라고 붙잡았을 수도 있어. 혼자는 외로워서 못 산다고.”

소원희는 소원우의 손을 잡았다.

“사람에게 다 때가 있는 것 같아. 잘 떠나는 거야. 분명히 넌 아주아주 좋은 경험들 하게 될 거야.”

소원희는 마주 잡은 손을 꽉 잡았다. 소원우는 별 말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부모님과 헤어져 산 지 오래되어서 작별 인사엔 익숙한데도 기분이 좀 달랐다. 소원희와 떨어져 지내는 건 처음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소원희와 줄곧 함께였다. 쌍둥이였지만, 남자와 여자라서 그런지 동성 쌍둥이보다는 적당히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도 서로가 필요할 때는 항상 옆에 있었다.

캐리어 하나는 컨베이어 벨트에 실어 보내고, 45L 배낭은 등에 멨다. 꼭 필요한 것만 추렸는데도 커다란 가방 두 개가 꽉 찼다.

출국장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소원우에게 전화 통화를 하던 윤찬희가 황급히 흔들었다.

“원우야! 소원우! 전화 받아.”

“어?”

“일단 통화부터 해.”

윤찬희는 휴대폰을 건네고 소원희를 데리고 잠깐 떨어졌다.

“여보세요?”

―원우 형?

얼떨떨한 소원우의 목소리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범아.”

기은범은 사실은 생일에 연락을 할까 했는데, 떠나는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들까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미안하지. 전부 다.”

―형. 저는 형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요. 좋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나도 그래. 너와 연애를 해서 행복했어.”

소원우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내려앉았다가 사뿐 올라갔다. 평온한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기은범이 침묵하고 있었지만, 소원우는 전처럼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럼 형, 잘 가요. 건강하게 지내시고요.

“너도 건강해…….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소원우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진심이었다. 기은범은 그래야만 했다. 소원우보다 훨씬 좋은 사람, 다정한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연애를 할 자격이 있었다.

기은범은 낮게 웃었다.

―그럴 거예요. 형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통화는 짤막하게 끝났다. 이 짧은 통화가 배낭의 무게를 다 앗아가 버린 듯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소원우는 전화를 윤찬희에게 돌려주었다.

“나 가끔 은범이랑 연락해.”

윤찬희가 소원우의 눈치를 보았다.

“알아. 계속 친하게 지내도 돼. 둘이 잘 지내는 게 난 더 좋아.”

윤찬희와 기은범은 쿵짝이 잘 맞았다. 활발하고 쾌활한 성격도 그렇고,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도 그랬다. 두 사람이 만나는데 자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윤찬희는 소원우를 꽉 껴안았다. 두툼한 배낭 탓에 두 팔은 배낭에 걸쳐야 했지만, 그래도 있는 힘껏 소원우를 안았다.

“유럽 여행을 갈 때만 해도 네가 걱정되고 그랬거든. 밥은 잘 챙겨 먹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잠은 제대로 잘 수나 있을까,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한없이 불안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걱정 안 돼. 어, 물론 완전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닌데 전이랑은 달라.”

윤찬희는 횡설수설했다.

“걱정은 하긴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게 아니라…… 정리가 안 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응. 우리 헤어져 있어도 여전히 친구라는 거.”

윤찬희는 “잉?”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그 말이 맞다. 뭐, 한 문장으로 말하면 그거 맞네.” 했다.

시차가 일곱 시간에 거리는 약 6천 마일. 영원을 함부로 약속할 수는 없겠지만 소원우는 1년 후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윤찬희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윤찬희는 소원우가 가장 힘들었을 때 소원우의 옆에 있었다. 소원우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소원우를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소원우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친구라고 해서 모든 슬픔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껏 건넨 위로가 튕겨져 나올 때마다 우정도 힘을 잃는다. 혼자 계속 힘을 부어 주기가 버거웠을 텐데도 윤찬희는 소원우를 놓지 않았다.

“찬희야. 사랑해.”

“뭐야. 남자끼리 낯간지럽게 그런 말을.”

윤찬희는 오글거린다면서 소원우를 안은 채로 소원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긴 포옹을 끝내고 소원우는 가방에 넣어놓은 여권과 보딩 패스를 꺼냈다.

“나 이제 들어갈게.”

“……원우야.”

“응?”

윤찬희는 머뭇머뭇 망설이다 물었다.

“권차경은 모르지? 오늘 너 떠나는 거.”

“어. 1월에 가는 걸로 알고 있을 거야.”

소원우의 생일에 권차경은 카메라를 선물했다. 유명 브랜드의 최신 모델이었다. 극구 받지 않겠다는 소원우에게 권차경은 자신이 선물한 카메라로 스페인의 풍경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으로 함께 있는 기분을 느끼겠다고, 그걸로 1년을 참아 보겠다고 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열흘 뒤에 떠난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끝내 하지 못했다.

“말해 주지 그랬냐. 너 떠나 버린 거 알면 걔 심장 떨어지겠다.”

“의외로 괜찮을 수도 있잖아.”

윤찬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권차경이 쉽게 마음 접을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끈질긴 놈이거든.”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원우는 마지막으로 소원희와 한 번 더 포옹했다. 소원희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봤지만, 소원우는 모른 체하고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소원우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떠나는 자들만 모인 공간에 들어서고 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말 떠나는구나. 새벽에 안개가 많이 껴서 연착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행기는 제시간에 게이트를 열었다.

소원우는 배낭을 짐칸에 올려놓고 좌석에 앉았다. 휴대폰을 끄기 전에, 소원우는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원우야. 오늘 뭐 해?]

20분 전에 권차경이 보낸 메시지였다.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자판을 누르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한데, 뭐라 답해야 될지 몰랐다.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부탁하던 권차경의 얼굴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휴대폰을 들고 멍하니 앉아있는 소원우에게 승무원이 다가와 곧 이륙하겠으니 휴대폰을 꺼 달라고 요청했다. 소원우는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휴대폰을 껐다.

빠르게 달리던 비행기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육지를 벗어나자 바다가 보였다. 끝도 없는 짙은 바다가 조그마한 창문을 다 차지했다. 몇 달 전에도 소원우는 비행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도 소원우가 창가 좌석이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창가를 양보했다. 실컷 바다를 볼 수 있는 자리를 권차경은 마다했다.

‘바다보다 다른 걸 보는 게 좋아.’

권차경은 이제 바다보다 다른 게 좋다는데, 소원우는 바다만 보면 권차경을 떠올렸다. 소원우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바다를 벗어나 있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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