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소원우가 출근해서 하는 일은 일이 아니라 공부에 가까웠다.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로 공부를 하고 그 교재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하는 것이 소원우의 주된 일이었다. 인터넷으로 강의도 들었다. 어떤 강사의 강의가 머릿속에 쏙쏙 박히는지 소원우는 꼼꼼히 기재했다. 점수를 위한 교재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원우처럼 스페인어에 흥미를 갖고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교수는 중요시 여겼다. 교수는 스페인을 좋아하고,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즐겁게 공부하길 원했다. 공부를 즐겁게 하는 것, 사실 그게 제일 어려운 법이다.
소원우는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스페인을 왜 배우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럴듯한 이유야 많았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그냥’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독일의 중세 마을도, 프랑스의 고풍스런 도시도 다 좋았다. 모래 언덕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려 가며 평평하게 고른 후 누워서 쏟아지는 별똥별을 밤새 바라봤던 모로코의 기억도 생생했다.
발길 닿았던 모든 나라가 다 좋은 기억으로 가득했는데도 스페인이 가장 좋았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뭐가 더 낫고, 뭐가 더 편하고, 뭐가 더 뛰어나고 이런 이유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이 갔다. 스페인으로.
“원래 좋은 건, 아무 이유 없이 좋은 거야.”
한참 고심하던 소원우가 ‘그냥’이라고 말하자 교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스페인은 많은 매력이 있는 나라고.”
교수의 고향은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도시는 아니었다. 그래도 매해 일정한 사람들이 방문을 하는 곳이었는데 소원우는 처음 듣는 이름의 도시였다. 초콜릿으로 유명한 도시라고 했다. 가우디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이 바르셀로나 말고 다른 도시에도 있다는 것도 교수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교수가 나고 자란 아담한 마을을 상상하면 가 보고 싶어 발이 움찔거렸다. 볼거리와 먹을거리, 그리고 그것들을 누릴 사람들로 가득한 대도시만 여행한 게 아쉽기도 했다. 한 나라를 다 알아가기에 일주일은 턱도 없었다.
“다음에 가면 작은 마을들도 둘러보고, 느긋하게 여행하고 싶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계획만 짜도 그저 좋았다.
“음. 가서 한 번 살아 보는 건 어떤가?”
교수가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스페인에서요?”
갑작스런 제의에 소원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아 보는 것만큼 좋은 여행은 없지. 그리고 원우는 아직 많이 어리잖아. 뭐든 도전할 수 있어. 난 추천해. 워킹 홀리데이나 교환학생으로 가는 것도 좋고.”
교수는 자신 있는 말투로 말하고서 슬쩍 복사기 앞에서 인쇄물을 확인하는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민희가 매일 경고해. 한국의 학생들은 취업 때문에 걱정이 많으니까, 막 함부로 권하면 안 된다고.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봤으면 좋겠어. 너무 멀리 있는 미래 걱정은 잠깐 멈추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던, 모처럼 미세먼지가 없던 화창한 날에 교수는 출석을 부르다 말고 말했다.
‘이런 날 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거예요? 나가서 꽃구경도 하고, 한강에 가서 바람도 맞고 그래야지.’
밖에 나가 놀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고 자리를 지킨 학생들을 교수는 장난처럼 나무랐다.
‘결석하면 학점 깎을 거잖아요.’
한 학생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이유를 대자 하나둘씩 의견을 더했다.
‘결석해도 학점에 영향 없으면 당연히 놀러 나가지, 여기 오겠어요?’
‘남들 빠질 때 출석을 해야 장학금을 타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항의에 교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제가 실수했네요. 여러분 말이 다 맞아요. 출석이 제일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일 텐데요.’
교수는 다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날 소원우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스페인어 수업이 소원우가 이번 학기에 유일하게 즐겁게 듣고 있는 과목인데 계속 딴생각이 났다. 점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만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취업을 위해서 학점을 잘 따 두는 게 당연한 일인데 꿈도 없는 상황에서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 열중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 막막했다.
스페인에 살아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교수의 제의로 인해 한층 깊어졌다. 교수의 말대로 그 나라에 살아 보는 건,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특별한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금방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교수는 너무 먼 미래를 벌써부터 걱정하지 말라는데 소원우는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후가 염려됐다. 1년을 헛되게 보내는 건 아닌지, 아니면 스페인에서의 생활이 너무 좋아 다시 한국에 적응하는 게 어렵진 않겠는지, 교환학생을 다녀와서도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닐지. 새로운 길을 알게 됐는데, 고민과 걱정은 훨씬 많아졌다.
“원우, 여기 세 줄 생겼다.”
교수가 소원우의 미간을 가리켰다.
“만약 내년에 가려고 한다면 생각할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야. 가족이랑 친구들과 의논해 봐.”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난 후, 기은범과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다. 전에 기은범에게 스페인에 살아 보고 싶다고 얘길 했을 때 기은범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교수의 제의에 대해 기은범과 함께 고민해야 봐야지 했다.
“전 반대해요.”
기은범이 소원우의 말을 막아섰다. 소원우는 하려던 말을 더 마무리하지 못하고 일단 멈췄다.
“꼭 지금 갈 필요는 없잖아요. 준비된 것도 없고, 뚜렷한 계획도 아직 없고. 교환학생은 9월에 신청 받는 거 아니에요? 9월까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생각해 볼 시간도 너무 부족해요.”
기은범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좋은 기회인 건 맞지 않아?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니까. 잘만 하면 여기에서 흐지부지 공부하는 것보단 훨씬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확실하게 가겠다고 정하지 않았는데, 고민해 보기도 전에 기은범이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니, 도리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소원우는 스페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서 기은범에게 보여 주었다. 알아보기 전에는 한낱 꿈이기만 했는데, 직접 찾아보고 알아보니 충분히 실현 가능한 현실이었다.
“원우 형.”
“응?”
“형 말 틀린 거 없어요. 형이라면 분명 굉장한 경험을 많이 하고 돌아올 거예요.”
“그래?”
소원우는 반색했다.
“근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집스레 안 된다고만 하던 기은범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소원우는 휴대폰으로 정보를 찾아보는 걸 멈추고 가만히 기다렸다. 기은범은 소원우를 부르고 1분은 더 머뭇거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형은 제 생각은 안 하나 봐요.”
퍽 서운한 말투였다.
“어?”
“전 스페인 못 가요. 거기엔 저 없어요.”
아……. 소원우는 눈꺼풀만 느릿하게 깜빡였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스페인에는 기은범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기은범의 부재가 소원우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기은범은 소원우의 침묵이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리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째서 소원우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무해요. 저는 형이 스페인에 가고 싶다니까 형이 내 옆에 없다는 것부터 떠올랐는데.”
“나는……, 나도 그건…….”
소원우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기은범의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소원우가 스페인에 간다 해도 기은범과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터다. 그래서 기은범의 부재가 고민의 이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영상통화도 메시지도 다 주고받을 수 있잖아.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그래도 반대해?”
기은범은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접시에 스테이크는 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소원우의 접시도 마찬가지였다. 밥은 다 먹고 얘기할 걸 그랬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기은범이 배고프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데. 소원우는 차게 식어 가는 음식을 보며 후회했다.
“은범아, 더 먹어.”
“그러고 싶은데 목이 메어서요.”
기은범은 섭섭한 감정을 억지로 숨기지 않았다. 숨기려고 해도 표가 났을 테지만, 기은범은 소원우와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감정을 숨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서운하고 섭섭한 건 또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있어야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고 다툼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가라앉은 기분을 달랠 수 있는 답이 무엇인지 소원우는 잘 알고 있었다. 기은범은 그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스페인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그러나 소원우는 기은범의 원대로 해 줄 수가 없었다. 고민해야 할 큰 이유가 생기긴 했지만, 스페인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기은범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원우가 말을 하지 않아도 기은범은 소원우의 생각을 읽었다.
“저 너무 억지 부리죠.”
기은범은 눈썹이 축 처져서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아니야. 그렇게 안 생각해. 충분히 반대할 수 있지. 누가 애인과 떨어져 지내고 싶겠어.”
“꿈이라는데 응원 못 해 줘서 미안해요. 집 떠나면 힘들 거라고, 괜한 고생 하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해도 저는 응원해 줘야 하는데, 못 그래서 미안해요.”
“네가 왜 미안하다 그래. 그러지 마. 현실이 그렇지. 나도 다 말릴 거라 예상했어.”
“형……, 사실은요. 그런 이유들보다 그냥 형이 내 옆에 계속 있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가지 말라고 붙잡는 거예요. 이건 미안해야 하는 거잖아요.”
기은범은 장거리 연애는 못 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말을 못 들어도 괜찮고, 심지어 섹스를 하지 못해도 괜찮은데 멀리 떨어져서 만나지 못하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스페인에 가서도 변함없이 널 좋아할 자신이 있는데, 너는 아니야?”
소원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전에 짤막하게 얘기 한 번 했었을 거예요.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마음이 식어서 헤어졌었다고.”
기은범은 자신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들어도 무시했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사랑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났다. 힘겨운 여정이긴 했어도 몇 시간 기차나 버스를 타면 연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만남이 줄어들었다. 과제가 많으면 2주에 한 번, 과제가 쌓이고 시험이 겹치면 한 달에 한 번.
매일 통화를 하는 걸로 위안을 삼았다. 서로에게 숨기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루의 일과를 빠트리지 않고 다 얘기하는데도 이상하게 점점 낯설어졌다. 자주 듣던 연인의 친구 이름도 낯설어지고, 연인이 사는 동네도 처음 듣는 지명처럼 느껴졌다. 연인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다.
편하게 술 한 잔 마시고 싶을 때 연인은 없었고, 바람이 선선해서 밤에 공원을 걷고 싶어지던 때도 연인은 옆에 없었다. 그렇게 빈자리가 생기더니 한없이 늘어났다. 결국 떨어져 지낸 지 반년도 안 돼서 헤어졌다.
“자신은 그때도, 지금도 항상 있어요. 문제는 자신감만으로 사랑을 이어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멀리 떨어져서도 잘 사귀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죠.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확신할 수가 없네요.”
‘자신’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말했나 보다. 그 단어가 그렇게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단어인 줄을 소원우는 몰랐다. 소원우는 기은범에게 물었던 것처럼 자신은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절절하게 끓었던 첫사랑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한 사랑인 만큼 쉽게 식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거라고 소원우도 확신하지는 못할 터였다.
“형, 제가 했던 말 기억나요? 형이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제가 알아차리겠다고, 그러니까 제 옆에 있어 달라고요.”
삽입에 실패하고 암담한 얼굴을 하는 소원우에게 기은범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소원우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소원우는 종종 그날 밤을 떠올렸다. 기은범의 곁에서 잤을 때 얼마나 따스하고 편안했던지. 커다란 침대를 혼자 차지하여 잘 때보다 기은범의 옆에서 더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원우에게 주어진 그 평안은 소원우가 그동안 안간힘을 써 봐도, 발버둥을 쳐 봐도 얻어내지 못한 거였다. 사랑한다고 수백 번을 말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애쓰고 노력한 사람은 기은범인데, 행복은 소원우가 누렸다.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다는 소원우에게 기은범은 고개를 저으며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인 법이라고 말했다.
“형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형의 그 말을 믿고 살고 있어요.”
“은범아.”
“저 계속 그래도 돼요?”
기은범의 눈이 간절하게 소원우를 좇았다. 소원우의 아주 미세한 표정도 그 의미를 파헤치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은 집요했다. 기은범도 소원우도 둘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은범은 묻고 있었다. 함께 있기만 하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붙잡고.
“나도 너와 계속 함께하고 싶어.”
소원우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답이었다. 확언하지 않는 게 상처를 덜 주는 대답이라 여겼다. 깨트려진 약속처럼 가여운 건 없을 테니까 소원우는 적당한 가운데 선을 찾았다. 기은범이 듣고 싶어 하는 말처럼 내뱉기는 했으나, 도망 갈 여지를 남겨둔 말이었다,
기은범은 미소만 지었다. 기은범의 미소는 언제나 소원우를 안심시켜 주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다른 말을 할 걸 그랬다. 이렇게 억지로 웃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소원우는 기은범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전영재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친구는 여덟 명이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 둘, 어릴 적부터 쭉 친하게 지낸 친구 셋, 고등학교 동창 셋. 강소미도 여덟 명만을 부른 걸 보면 일부러 숫자를 맞춘 듯했다.
소원우의 자리는 창가였다. 윤찬희는 소원우의 옆자리에 권차경이 앉는 걸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다 소원우의 뒷좌석에 앉았다. 윤찬희의 옆에는 김철의가 앉았다. 가까운 자리에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서은나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소원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아래로 폭신폭신한 구름이 부드러운 솜이불처럼 펼쳐졌다. 봉긋 솟은 구름 무덤으로 뛰어내리면 꼭 침대처럼 몸을 포근히 감싸 줄 것 같기도 했다. 구름 아래로는 짙은 남색의 바다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넘실대다 퍼지는 포말만 봐도 감탄이 나왔다.
점차 멀리 보이던 육지가 사라지고, 끝없는 바다만 시야에 가득했다. 같은 풍경이 반복되자 소원우는 창밖을 바라보는 걸 관두고 눈을 감았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비행시간이라 잠을 청하지는 않고, 머리를 편히 기대고 눈만 감고 있었다. 시각을 차단하니 청각이 민감해졌다. 주변의 작은 소리들이 존재감 있게 다가왔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앉은 자세를 고치는 소리, 아이들이 칭얼대는 소리들도 들려왔다. 그리고 무언가 묵직한 시선도 느껴졌다. 소원우는 긴가민가하다가 눈을 뜨고 고개를 홱 돌렸다.
권차경과 눈이 마주쳤다. 권차경의 눈이 살짝 커진 채로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던 기색은 금방 평연한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왜?”
“뭐가?”
소원우가 무슨 의미로 묻는지 알면서도 권차경은 태연스레 되물었다.
“나 본 거 아니야?”
“보고 싶어서.”
권차경의 시선이 창문으로 비껴갔다. 소원우도 그 시선을 따라 창가로 눈을 돌렸다. 조금씩 뭉쳐서 떠다니는 구름들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보고 싶었겠구나. 올 여름엔 취업 준비하느라 바빠 바다에 가지 못했다고 했다. 매해 여름만 손꼽아 기다리는 권차경이 8월까지 바다에 한 번 못 들어갔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자리 바꿔 줄까? 네가 창가에 앉을래?”
권차경의 자리에선 목을 쭉 빼야 바다가 눈에 담길까 말까 했을 것이다. 소원우는 벨트를 풀며 물었다.
“아니야. 도착하려면 얼마 안 남았는데 뭘.”
“창가 앉고 싶었으면 미리 얘기하지. 바꿔 줬을 텐데.”
“여기서도 보여. 그리고 이 자리가 더 좋아. 보이는 게 더 많거든.”
소원우는 살짝 몸을 권차경 쪽으로 해서 창문을 내다보았다. 옆에서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가 빼꼼 보이는 것이 권차경의 자리가 소원우의 자리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좁은 비행기에서 볼거리가 뭐가 더 있겠나 싶으면서도 소원우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소원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시선이 또 느껴졌다. 자신을 보는 건 아닐 테니 신경 쓰지 말자 생각해도 시선이 화살이 되어 얼굴에 꽂히는 듯했다.
제주도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권차경에겐 천국과도 같을 터다. 그러고 보니 권차경이 제주의 바다가 골드코스트의 바다와 닮아 보인다는 말도 했었다. 제주도에 가서 서핑을 해 보고 싶다던데 해 봤을까. 결혼식이 끝나면 갈 참인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권차경이 바다에 들어가자고 권하면, 이번엔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사실은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지금껏 거짓말을 했었다고. 소원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전영재의 새로운 인생으로 내달렸다.
결혼식 장소는 바다와 오름이 동시에 보이는 곳이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별장은 소규모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강소미의 로망을 이룰 수 있는 장소로 제격이었다. 한여름이라 마침 예약이 비어 있었다.
하객이 양쪽 합쳐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결혼식이라 특별히 오후 5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결혼식까지는 다섯 시간은 더 남아 있어서 호텔에 들러 짐을 두기로 했다.
“아오, 씨발.”
체크인을 마치고 돌아온 윤찬희가 욕을 뱉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어. 있네, 문제. 네가 누구와 방을 쓸지의 문제.”
소원우는 방 배정을 기다리는 사람을 쭉 둘러보았다. 윤찬희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권차경과 방을 같이 쓰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들러리로 웨딩 사진을 찍을 때부터 결혼식이 끝나기 전까지 권차경과 같이 있을 일이 많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난 괜찮아. 카드 줘.”
윤찬희는 고심했다. 윤찬희야 결혼식에 초대된 모든 사람과 아는 사이였으니 누구와 방을 써도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소원우와 권차경은 아니었다. 그 둘은 윤찬희 말고는 친한 사람이 없었다. 둘이 한 방을 쓰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은 게 문제였다. 소원우와 권차경이 한 방에 묵다니. 어떻게든 그건 막아 보고 싶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별수는 없었다. 소원우를 편하게 하자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없었으니.
윤찬희는 카드 키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카드키를 받은 사람들은 먼저 객실로 올라갔다. 윤찬희는 남은 두 개의 카드 키 중 하나를 권차경에게도 건네고 다른 하나는 김철의에게 주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따르려는 소원우를 윤찬희가 붙잡았다.
“네가 우리 방에서 자. 아마 철의 밤새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눈만 붙일 거야. 나도 그럴 거고. 다들 오랜만에 만난 거라서 잘 생각이 없거든. 넌 우리 방에서 자고 권차경은 혼자 방 쓰라고 해.”
소원우는 권차경을 흘끔 쳐다보았다. 몇 걸음 앞서 걷던 권차경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른손을 문 옆에 올린 걸 보니, 열림 버튼을 누르고 소원우가 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대화가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아 소원우는 손을 저어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권차경과 김철의를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렇게까지 피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나 이제 정말 괜찮아.”
권차경에게 들릴까 봐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던 윤찬희는 권차경이 사라지자 원래의 목소리를 찾았다.
“아니,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단 말이야. 너 진짜 아무렇지 않아? 권차경이랑 한 방에서 잘 수 있겠어?”
윤찬희는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물었다. 모처럼 보는 진지한 얼굴이라 소원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안 자 봐서 모르겠는데.”
“소원우.”
윤찬희가 장난치지 말라는 듯 힘주어 이름을 불렀다.
“찬희야,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난 더 이상 권차경에게 설레지 않다는 거야. 같이 있으면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그랬던 건 다 권차경을 좋아했을 때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한 방에 둘만 있어도 당연히 아무렇지 않겠지.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깜짝 놀랄 수도 있어.”
“내가 과민 반응하는 거지? 그냥 난…….”
소원우는 윤찬희가 할 말을 대신 꺼냈다.
“알아. 권차경이 무서운 거.”
“무서운 거 아니거든!”
윤찬희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쏠리는 시선들에 빠르게 목소리를 낮췄지만, 흥분은 얼굴에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걔가 뭐가 무서워?”
“무서운 거야. 권차경이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같이 지내다 보면 권차경을 좋아하게 될까 봐, 괜찮게 생각하게 될까 봐 무서운 거야.”
정곡을 찔렸다는 듯 윤찬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입술만 꼬물꼬물 달싹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넌? 다시 권차경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 안 해?”
소원우는 윤찬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윤찬희가 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다. 윤찬희도 깨달았는지 제 입을 삐쭉였다.
“응, 안 해. 은범이가 있잖아.”
만약 권차경이 네가 좋다고 하면? 윤찬희는 그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삼켜 냈다. 입 밖에 꺼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는 가정이었다. 권차경 개새끼. 사람 헷갈리게 만들고 지랄이야. 짜증나게. 속으로만 권차경을 욕하려니 답답했다. 사방팔방 큰소리로 권차경을 씹어대고 싶었다.
권차경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던 윤찬희는 소원우가 나갔는지부터 확인했다. 누군지는 알 필욘 없을 것 같아 묻지 않았다. 아직 짝사랑인 모양이니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하라 그랬다. 권차경이 연애를 해야 소원우와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고백 안 할 건데.’
‘뭐? 왜? 왜 안 해?’
‘괴롭히고 싶지 않거든.’
윤찬희는 말문이 막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권차경은 인기가 많았다. 권차경을 좋아하는 이유를 윤찬희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권차경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나 큰 키, 건장한 체격뿐만 아니라 운동도 잘했고, 머리도 좋았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했다. 다정하고, 섬세한데 분위기를 이끄는 센스도 충분했다. 당장은 짝사랑일지라도 권차경이 티만 조금 내면 상대도 권차경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야. 나는 네가 진짜 너무너무 아주아주 싫거든?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 고백하면 무조건 잘 된다고 본다. 그러니까 고백해, 시원하게.’
칭찬하는 사람의 얼굴답지 않게 윤찬희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런 윤찬희를 보며 권차경이 피식 웃었다.
‘고백하면 정말 잘 될 것 같아?’
‘그래. 그러니까 당장 고백해. 소원우한테 그만 좀 매달리고.’
‘소원우한테 고백해도 잘 될까?’
너무 놀라서 윤찬희는 소리도 못 질렀다. 머리가 멍했다. 농담을 할 게 따로 있지, 저딴 말을 내뱉고 히죽거리는 낯짝 좀 자세히 보자 싶어 윤찬희는 권차경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는 권차경의 입가에 웃음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굳은 표정이었다.
윤찬희가 권차경을 싫어하는 만큼 권차경도 윤찬희를 싫어했다. 그럴 만도 했다. 소원우와 권차경이 만나고 있으면 방해할 목적으로 일부러 끼곤 했으니까. 중간에 소원우가 화장실이라도 가면 권차경은 얼굴을 굳히고 말없이 술만 마셨다. 윤찬희가 거들먹거리며 권차경이 모르는 소원우 얘기를 할 때마다 냉랭한 눈빛으로 윤찬희를 보곤 했다. 소원우에게는 잘 숨긴 모양이었지만, 윤찬희는 몇 번이나 보았다.
가평에 갔을 때, 윤찬희를 발견한 권차경의 얼굴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소원우가 권차경의 눈치를 살피려고 돌아선 순간 권차경은 표정을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소원우 마음에 들도록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 같았다.
소원우 마음에 들도록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
소원우에게 고백해도 잘 되겠느냐는 건, 윤찬희를 열 받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질문은 명백하게 아니었다. 그럼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니, 내가 미친 거지? 내가 정신이 나가서 이런 의심을 하는 거겠지? 윤찬희는 느닷없이 떠오른 어이없는 상상에 경악을 했다. 저 어처구니없는 질문부터 처리를 해야겠다.
‘뭔 개소…….’
‘나중에 오신 분, 이제 메이크업 할게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 주세요.’
할 말이 남았는데 대화는 강제적으로 끊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윤찬희는 찜찜한 상태로 먼저 자리를 떴다. 찜찜한 상태는 아직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엔 권차경의 표정이 걸렸다.
“찬희야, 그만 올라가자. 철의 기다리겠어.”
권차경과 한 방을 쓸 소원우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윤찬희는 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소원우의 방은 윤찬희의 방과 마주 보고 있었다.
“철의한테 말해 놓을 테니 불편하면 언제든지 여기로 와. 알았지?”
소원우는 대충 고개만 끄덕끄덕하고선 방으로 들어갔다. 짐만 정리하고서 바로 나갈 계획이었다. 근처에 바다와 한라산이 내다보이는 오름이 있었다. 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얼른 다녀올 참이었다.
권차경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은 체크인 하기 전처럼 깔끔했다. 몇 개의 물건이 더해졌을 뿐이었다. 권차경은 가져온 옷을 옷장에 걸고, 신발도 가지런히 꺼내 놓았다. 들고 온 캐리어는 다시 잠가 오가며 채이지 않게 구석에 세워 두었다.
“원우야, 이제 어디 갈 거야?”
“보말칼국수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새별오름에 올라갔다 오려고.”
보말칼국수는 소원희가 추천해 준 메뉴였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초록색 칼국수는 조금도 맛있어 보이지 않았었는데, 먹어 보니 진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계속 당겼다고 했다.
“윤찬희랑 가?”
“응.”
“나도 같이 가도 돼?”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흔쾌히 그러라고 하고 싶었지만, 윤찬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유 시간까지 권차경과 동행해야 하는 걸 윤찬희가 반길 리가 없었다.
“너는 등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협재 해수욕장이라고 들어봤어? 여기서 별로 안 멀다는데, 거기 가는 게 어때? 수영하는 게 더 재밌을 거야. 그리고 바다가 에메랄드 색이래. 골드코스트 바다랑 비슷할지도 몰라.”
“바다는 그동안 많이 갔으니까 이번엔 너랑 같이 오름 올라가고 싶어.”
권차경이 등산을 싫어하는 걸 잘 알고 있는 소원우로서는 쉽사리 오름을 추천해 줄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도중에 힘들다고 해도 안 멈추고 계속 올라갈 거야.”
“응. 잘 따라갈 수 있어.”
망설이지도 않고 냉큼 따라가겠는 걸 보면, 바다에 혼자 가기는 정말 싫은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떼어 놓기도 뭐했다. 문제는 윤찬희였다.
“어, 나야 상관은 없는데 찬희가…….”
“싫어하겠지?”
“아무래도 좀, 많이 불편해할 것 같은데.”
소원우가 말을 순화시켰다.
“나도 너랑 있을 때 윤찬희 오는 거 싫었으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가 달라고 하자.”
권차경이 빙긋 웃었다. 윤찬희를 골탕 먹이는 게 즐거워 보였다.
“너 근데 내가 찬희 와도 되냐고 물었을 때마다 괜찮다 하지 않았어? 싫었어?”
소원우는 늘 권차경에게 허락을 구했다. 윤찬희가 와도 되는지 물어보면 권차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만 있는 게 좋은데.” 하면서도 오겠다는 윤찬희를 막지는 않았다. 그래서 둘만 있고 싶다는 권차경의 말을 소원우는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인사치레처럼 느껴졌다.
“싫었어.”
“왜 말 안 했어? 싫다고 했으면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가 윤찬희를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거든. 윤찬희가 오면 내심 더 편하게 웃는 것 같고.”
권차경을 잊기 위해서 윤찬희를 많이 만났다. 권차경이 보고 싶어지면 윤찬희를 불렀고, 권차경 때문에 입맛이 없으면 윤찬희가 소원우를 데리고 나왔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윤찬희가 소원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이유는 권차경 덕분이었다. 권차경을 끊어 내느라 힘겨울 때마다 윤찬희가 옆에서 도와줬다.
“솔직히 그랬지?”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찬희를 의지한 건 사실이었다. 윤찬희는 소원우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소원우는 권차경의 옆에서 버틸 수가 있었다. 권차경과 둘만 남겨질 때보다 훨씬 편하게 권차경을 대할 수가 있었다.
“윤찬희가 되고 싶다. 네가 날 의지했으면 좋겠고, 내 옆에서 편하게 웃었으면 좋겠어.”
권차경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란 표정을 하는 소원우를 보면서 권차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윤찬희를 부러워하는 날이 올 줄을 몰랐거든.”
“찬희가 왜 부러워. 찬희도 친구고 너도 친군데.”
“응. 그렇지.”
권차경은 너그럽게 웃었지만, 소원우의 말이 그다지 위로가 되어 주진 못한 듯했다. 최근 들어 권차경은 낯설게 웃었다. 갖가지 감정을 웃는 것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10분이 다 되었는지 벨소리가 울렸다. 소원우는 마저 정리하지 못한 짐들은 그대로 두고 지갑과 휴대폰, 물 한 병만 챙겨 들었다.
윤찬희는 문 앞에서 웃는 낯으로 대기하다가 소원우를 따라 나오는 권차경을 보며 인상을 팍 썼다.
“뭐야. 왜 같이 나와?”
“차경이도 같이 가자.”
“싫어!”
윤찬희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던지라 놀랍지도 않았다.
“다들 모여서 노는데, 차경이 혼자 남잖아.”
“그래서 뭐! 쟤는 혼자 못 놀아?”
바로 앞에 권차경이 있는데도 윤찬희는 소원우만 보고 말했다. 권차경은 대화에도 껴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난 쟤랑 같이 있기 싫어. 기분 나빠.”
윤찬희가 권차경을 싫어하는 이유야 소원우가 제일 잘 알고 있지만, 당사자를 앞에 세워 두고 할 말들은 아니었다.
“찬희야.”
소원우는 다른 말은 보태지 않고 이름만 불렀다.
“아, 진짜!”
윤찬희는 고집을 부려 봤자 소원우가 권차경을 데리고 가겠다는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깨달았다.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너는 왜 따라오겠다는 거야? 제주도까지 와서 혼자 놀자니 심심해서?”
윤찬희가 권차경에게 직접 물었다.
“원우가 제주도 얘길 자주 했었어. 바다가 예쁘다고, 같이 여행 가자고 그랬었는데 못 갔거든. 이번이 아니면 같이 여행할 기회가 또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껴 달라고 한 거야.”
소원우는 권차경의 말을 듣고서 협재 해수욕장 얘기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권차경이 한국에 정을 붙였으면 해서 권차경이 제일 좋아한다는 호주의 바다와 비슷한 바다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제주도의 바다 사진 여러 개를 권차경에게 보내고, 대학생이 되면 제주도로 여행을 가자고 했었다. 그럴 일은 오지 않았다.
제주도에 가자는 말을 권차경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권차경은 꽤 많은 걸 기억했다. 종종 소원우가 과거에 했던 말을 꺼내곤 했는데, 소원우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지고 말았던 것도 기억하고 있어서 놀란 적이 많았다.
권차경의 솔직한 말에 윤찬희도 더 거절할 명분은 없었는지 씩씩거리면서 몸을 홱 돌리고 앞장서서 걸었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등산을 힘겨워하는 건 아니었다. 권차경은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고 수월하게 걸었다. 정상까지 거리가 짧은 대신 경사가 비탈진 코스였는데, 권차경은 단숨에 걸어 올라갔다. 제일 뒤처진 사람은 윤찬희였다. 중간쯤 올랐을 때, 윤찬희는 점심으로 먹은 칼국수가 얹힌 것 같다며 가슴을 붙잡고 숨을 헐떡였다. 권차경은 이미 정상이었고, 소원우도 몇 발자국 걸으면 정상이었다. 윤찬희를 보고 도로 내려가려는 소원우에게 윤찬희는 손을 저으며 잠깐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 볼 테니, 정상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날이 화창해서 제주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에 올라와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산을 오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바람은 맛도 없고, 냄새도 없었지만 그만의 존재감이 있었다. 낮은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의 현장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원우는 흘긋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권차경은 가만히 서서 오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지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소원우는 고개를 다시 돌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윤찬희는 15분은 더 지난 후에야 정상에 올라왔다. 바늘로 손을 따야겠다느니, 소화제를 사서 먹어야겠다느니 한참 앓는 소리를 해대더니, 지상으로 내려오자 아픈 게 다 나았다면서 신기하다 했다.
“그래도 밤새 술 마시고 놀려면 소화제 하나는 먹어 두는 게 낫겠다.”
“또 체하면 어떡하려고?”
“안 체해. 아까는 숨이 가쁜 거랑 체한 거랑 헷갈린 거 같아.”
“확실해?”
“그렇다니까. 지금 완전 멀쩡해.”
윤찬희는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고선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상으로 내려오니 걸음은 윤찬희가 제일 빨랐다.
“불편하면 참지 말고 우리 방에 오는 거다.”
“알았다니까. 걱정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
소원우는 못 미더워하는 윤찬희를 복도에 내버려 두고 호텔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안 씻었어?”
“응. 원우, 너 먼저 씻어.”
권차경은 흔쾌히 순서를 양보했다. 한여름의 날씨에 오름까지 올랐으니 당장에라도 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소원우는 옷을 입은 채로 욕실로 직행했다.
찬물을 틀어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샤워기 아래 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에 몸을 맡겼다. 호텔에 오는 동안 차에서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놓아 땀은 일찌감치 식었지만, 물로 씻는 것보다 개운할 수는 없었다.
깨끗이 씻고, 수건으로 몸을 닦을 때야 소원우는 샤워 가운도, 갈아입을 옷도 갖고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왠지 욕실로 들어갈 때, 뒤에서 권차경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샤워가 급해 그냥 넘겨 버렸다.
소원우는 넓지도 않은 욕실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쩌자고 옷을 안 챙기고 들어온 거야. 수건으로 아래를 감싸고 나가면 될 일이었지만, 소원우에겐 그마저도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전역 후에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간 적이 없어 상태를 점검해 보지는 못했다. 예전만큼 공포에 시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권차경에게는 맨몸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수건 두 개로 몸을 가려서 나가 보려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려던 참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권차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우야, 다 씻었어?”
“응? 어……, 그렇기는 한데…….”
소원우는 아직 손에 들린 수건을 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문 앞에 샤워 가운 갖다 놨어. 나 로비에 갔다 올 일이 생겨서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편하게 나와.”
권차경의 말이 끝나고 곧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소원우는 빼꼼, 욕실 문을 살짝 열었다.
“권차경.”
혹시나 하고 이름을 한 번 불러보았다. 잠잠했다. 소원우는 그제야 문을 활짝 열고 앞에 놓인 샤워 가운을 걸쳤다. 권차경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머리도 말리지 않고 재빨리 옷부터 입었다. 소원우가 옷을 차려입고, 머리도 다 말리고서야 권차경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일부러 넉넉히 밖에서 시간을 보낸 듯했다. 전화 통화가 길어졌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소원우가 편하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줄 목적이었단 게 뻔히 보였다.
소원우는 의자에 앉아 티비를 보다가 문득 권차경도 혼자인 게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친구로 지내고 있어도 소원우는 권차경을 좋아했었다. 소원우가 권차경에게 맨몸을 드러내는 게 불편한 만큼 권차경도 그럴지 몰랐다. 물소리가 끊겼을 때, 소원우도 욕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어, 원우야 왜?”
“나도 나가 있을까 해서. 샤워 가운 챙겨 가는 거 봤는데, 너 원래 샤워하고 수건만 두르잖아. 나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나와.”
소원우는 결혼식에 참석할 준비를 다 마친 터라, 로비에서 쭉 대기하고 있을까 했다. 권차경의 답이 들려오지 않아 소원우는 한 번 더 문을 똑똑 두드리며 “차경아?” 하고 물었다.
“내가 수건만 두르고 나가면 너 불편해?”
그래 달라는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권차경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불편하냐고?”
“응.”
“네가 불편할까 봐 그러지.”
“내가 안 불편하다고 하면 너 방 안에 있을 거야?”
가운데 문 하나를 두고 대화가 길게 오갔다.
“원우야. 난 괜찮아, 네가 있어도 안 불편해.”
샤워를 끝마치고도 권차경은 스스로 욕실에 갇혀 있었다. 권차경은 불편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친구 사이라면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소원우가 고백하기 전에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몸을 드러냈다.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기로 했는데 새삼스레 몸을 가리면 그게 더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마음대로 해.”
소원우는 선택을 권차경에게 맡기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소원우가 앉아 있는 의자 옆이 권차경의 침대였다. 침대 정면에 권차경의 캐리어가 세워져 있었다. 눈을 TV에만 두고 있어도 권차경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캐리어를 열어 옷을 꺼내는 권차경의 등이 소원우의 시야에 담겼다. 권차경은 캐리어에서 속옷과 옷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고, 화장품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아까 소원우가 옷부터 서둘러 입은 것과는 반대였다.
구릿빛의 피부가 넓은 등과 잘 어울렸다. 팔이 움직일 때마다 등근육도 같이 움직였다. 권차경은 2년 전보다 체격이 더 커진 듯했다. 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 옷태가 잘 받았다. 소원우는 무심결에 권차경의 등을 계속 보다가 불쑥 든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 웃음소리였는데도 권차경이 들었는지 뒤를 돌았다. 의아한 눈빛이었다. 소원우는 미소 띤 입술로 웃음의 이유를 솔직히 얘기했다.
“내가 너를 좋아했을 때.”
소원우가 첫 문장을 말하자마자 권차경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예상치 못한 서두이긴 했을 터다. 소원우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이었다.
“네 벗은 몸을 이렇게 평온하게 볼 수가 없었거든. 그때는 너무 떨렸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서 되게 신기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싶어.”
권차경과 바다나 수영장에 자주 같이 갔다. 한두 번도 아닌데, 매번 떨렸다. 떨리는 눈을 들킬까 봐 햇빛이 뜨겁다고 둘러대고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권차경이 다른 델 보고 있으면 소원우는 선글라스가 시선을 완전히 차단해 주리라 믿고 권차경을 쳐다보다가 권차경의 자그만 움직임에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홱 돌리곤 했다.
그랬었는데, 지금은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소원우는 권차경도 소원우의 말을 반길 줄 알았다. 맨몸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권차경도 내심 안심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권차경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웠다. 또 낯설게 웃었다.
“너 말이야. 요즘 왜 자꾸 그렇게 웃어?”
소원우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웃는데?”
권차경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소원우는 벌떡 일어나 권차경의 팔을 잡아끌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봐 봐. 나 보이지?”
“응.”
“웃어 봐.”
권차경이 거울 속의 소원우를 보며 웃었다.
“너 예전에는 눈까지 잘 웃었거든. 웃을 때 오른쪽 눈이 더 휘어지는 거 알아? 미세하게 차이 나. 근데 지금은 너 웃을 때, 두 눈이 똑같아. 눈이 웃다가 말아. 눈동자도 흔들거리고 입꼬리도 겨우 이 정도밖에 안 올라가고.”
소원우는 거울 속의 권차경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권차경의 입술 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서는 거울 속에서 눈을 떼고 옆에 있는 권차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권차경의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소원우는 잘못 봤나 하고 거울을 쳐다봤다. 권차경의 얼굴이 빨개지다니. 단 한 번도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소원우는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권차경을 다시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권차경이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가 버린 탓에 붉어진 게 맞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리를 비켜주는 게 낫겠다. 문득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원우는 욕실 문을 똑똑 두드린 후 말했다.
“나 로비에 있을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알았다고 대답하는 권차경의 목소리가 설핏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소원우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 * *
결혼식은 주례 없이 진행되었다. 신랑 신부의 부모의 편지로 주례를 대신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는 자식들을 질책하거나 걱정하기보단 축복과 격려를 쏟아부어 주었다.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전영재가 테이블로 찾아왔다.
“영재야, 축하해.”
“고맙다, 원우야. 하하하. 나 진짜 너무 행복해.”
전영재가 빈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윤찬희의 옆에 앉았다.
“입 찢어지겠네. 좀 점잖게 웃어.”
“윤찬희, 이 새끼.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인마.”
“내년에 아빠 될 새끼 하나도 안 부럽거든? 살림하고 육아 할 준비나 철저하게 해라. 소미 고생시키지 말고.”
“당연하지. 나 요리 학원도 등록했다. 맞다, 차경아. 너 전에 우리한테 해 줬던 로제 파스타 있잖아. 소미가 맛있었다고 그랬거든. 나도 만들어 보고 싶은데, 레시피 좀 알려 주라.”
“응. 별로 안 어려워.”
권차경이 전영재의 휴대폰에 재료와 간단한 요리 방법을 적는 동안 다른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마친 강소미가 소원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제주도까지 와 줘서 고마워. 여기 9시까지 빌렸거든? 천천히 저녁 먹고 잘 놀다가 가.”
아직 초기라 그런지 눈에 띌 만큼 배는 나오지 않았지만, 강소미는 말을 하면서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었다.
“참, 여기 여친 없는 사람!”
강소미의 말에 네 명이 손을 들었다. 김철의와 윤찬희, 전영재의 고등학교 동창인 이재영, 중학교 동창 곽민우였다. 강소미는 자신의 친구들 중 다섯 명이 남자친구가 없다며 솔로들끼리 불토를 즐기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윤찬희도 두 손을 들고 열렬히 환호하다가 얌전히 앉아 있는 권차경을 발견했다.
“권차경, 너 뭐야! 너도 여자친구 없으면서 왜 손 안 들어?”
윤찬희가 억울하단 투로 큰소리를 냈다. 그 탓에 테이블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차경이 여자친구 없어? 잘 됐네. 오늘 애들이랑 같이 놀아. 바닷가에 술 마시러 간댔거든. 다현이랑 주연이는 본 적 있지? 걔들도 갈 거야.”
전영재와 강소미 둘 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터라, 서로의 친구들을 몇 번 보기도 했고, 한 자리에서 같이 만난 적도 꽤 됐다. 알음알음 서로의 얼굴이나 이름은 알고 있어서 권차경의 참석을 다들 반기는 분위기였다.
“좋지. 오늘 밤새 놀아 보자고!”
윤찬희가 와인 잔을 높이 들었다.
신랑 신부를 호텔에 먼저 보내고, 택시를 네 대 불렀다. 다음 날의 여행을 위해 일찍 잠에 들겠다는 몇 말고는 대부분 밤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살갗에 달라붙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렸다. 평소라면 시끌시끌한 벌레소리가 거슬렸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새까만 하늘에 별도 콕콕 박혀 있었다. 시골의 여름 풍광을 뒤로 하고 호텔에 들어가기는 아쉬운 밤이었다. 밤을 샐 정도는 아니어도 소원우도 술 한 잔 더 마실까 해서 사람들 틈에 껴 있었다.
윤찬희가 소원우의 옆에 슥 다가오더니 은밀하게 말을 걸었다.
“넌 호텔 가서 마셔.”
“뭐? 나 혼자?”
“어, 너 혼자. 권차경은 최대한 내가 여기 늦게까지 붙들어 놓을 테니까, 들어가서 푹 쉬어.”
윤찬희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숫자를 셌다.
“호텔에 들어갈 사람 너까지 딱 네 명이다. 택시 한 대로 이동하면 되겠네.”
윤찬희는 소원우와 권차경이 한 방에 있는 걸 어떻게든 막아 볼 모양이었다. 그 부분에 대한 건 낮에 얘기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윤찬희는 고집만 부렸다.
“아, 소원우, 넌 눈치도 없냐? 김다현이 권차경에게 관심 있는 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안다고.”
“어? 진짜로? 왜 난 몰랐지?”
“둔하다, 둔해. 아무튼 선남선녀 둘이 잘 되게 분위기 좀 만들어 보려고 하니까 넌 조용히 호텔에 가 있어. 알겠지?”
“내가 있어도 상관은 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권차경이 네 옆에서 안 떨어질 텐데 김다현에게 눈길이나 주겠냐?”
윤찬희는 성질을 부리다가 슬쩍 김다현을 쳐다보고는 공손한 말투로 바꿨다.
“내가 다현이한테 부탁받은 것도 있지만, 권차경 말이다. 요즘 너만 봐. 너에게 관심이 너무 많아. 좀 끊어 줘야 해.”
윤찬희는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반짝이는 걸 보고, 소원우의 등을 툭툭 쳤다.
“잠깐만 권차경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자. 응?”
택시 두 대가 먼저 도착했다. 여자 셋이 뒷자리에 타고, 소원우는 앞자리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려는데 누군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소원우는 창문을 스르륵 내렸다.
“원우야, 이 택시는 호텔로 가는 거래.”
소원우가 잘못 탄 걸로 알았는지, 권차경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려고 했다.
“응, 호텔 가는 거 맞아. 일찍 들어가서 쉬려고.”
“아까 저녁 먹을 때 맥주 마시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와인도 좋지만, 시원한 생맥주가 더 간절하다고 옆에 앉은 김철의에게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권차경과 소원우 사이에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귀도 밝았다.
“그랬는데, 지금은 또 안 끌리네. 넌 애들이랑 놀다가 와. 재미있게 놀고, 이따 호텔에서 봐.”
소원우는 손을 휙휙 흔들었다. 택시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출발했다. 소원우는 오른쪽의 사이드미러를 바라보았다. 택시가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에도 권차경은 서 있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원우는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에어컨부터 켰다. 천천히 씻고 나왔을 때는 어느새 방이 시원해져 있었다. 소원우는 잠옷 대용으로 가지고 온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한손으론 맥주, 다른 한손으로는 리모컨을 들었다. 주말엔 기은범과 시간을 보내느라 한동안 토요일 밤에 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못했다. 소원우는 리모컨으로 채널 몇 개를 돌리다가 한 채널에 멈췄다. 두 팀으로 나눠 여행을 떠나고, 그들의 여행을 지켜 본 판정단의 점수에 따라 승자를 정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이 시작된 지 30분은 더 되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한 번 여행을 하고 나니, 수시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행도 중독이라 했다. 떠나 본 사람은 또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원우가 발을 밟은 나라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여행자를 기다리는 도시들은 차고 넘쳤다. 가능만 하다면 최대한 많은 나라를 방문하고 싶었다. 먹고 살기 바쁜 시대에 참 현실 감각 떨어지는 소원이었다.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전화해도 되느냐는 기은범의 메시지였다.
“응, 은범아. 호텔에 들어왔어.”
―뒤풀이 안 해요? 늦게까지 놀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러 갔는데 나는 그냥 호텔에 들어왔어.”
소원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기은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혼자 있어요? 뭐 하고 있었어요?
“TV 보고 있었어.”
―뭐 보는데요? 저도 같은 거 볼래요.
“어……, 넌 재미없어 할 것 같은데.”
―왜요? 무슨 내용인데요?
소원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기은범이 TV를 켰는지 휴대폰에서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아무거나 틀다 보니 그거였어.”
저도 모르게 소원우는 변명했다.
기은범과 저번의 대화 이후 스페인 유학에 대한 건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기은범도 마찬가지였다. 꼭 ‘스페인’이란 단어가 금기어라도 된 듯했다.
―형이 좋아하는 내용이네요. 집중해서 보는 게 낫겠다.
기은범이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했다.
“아니야. 네 목소리 듣는 게 더 좋아. TV야 나중에 다시 보기 하면 되지.”
―제 목소리는 내일 아침에 또 들을 수 있으니까 보던 거 재미있게 봐요. 저 내일 아침에 축구 시합 있어서 일찍 자려고 했거든요. 침대에 눕기 직전이에요.
소원우가 마음 쓸까 봐 기은범은 나직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응, 그럼. 잘 자고 내일 또 통화하자.”
―형도 잘 자요.
제대로 인사를 하고 끊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은범과 사귀고 나서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고 말을 해야 오래 연애를 할 수 있다던 사람은 기은범이었는데. 소원우가 스페인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 후로 기은범은 자신의 기분을 소원우에게 숨겼다. 소원우도 다르지 않았다.
소원우가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길면 1년, 짧으면 6개월.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1년. 1년 사이에도 많은 게 변한다 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고 결혼을 하는 걸까.
결혼식에서 강소미는 전영재와 결혼하기로 한 이유를 세 가지 댔다. 첫째는 전영재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 줄 남자는 없을 것 같아서, 둘째는 전영재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 같아서, 셋째는 전영재보다 더 친한 친구를 못 사귈 것 같아서.
평생 같은 길을 걸어갈 사람을 스물셋에 확정 짓기는 쉽지 않았을 터다. 그래도 두 사람은 했다. 매우 어려우면서도 간단한 결정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소원우는 강소미의 말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기은범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자신은 또 어떤가. 자신은 기은범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권차경을 좋아할 때는, 권차경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 연애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권차경만 바라보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헛되게 보냈다.
너무 먼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는 교수의 조언이 떠올랐다. 그래도 소원우는 기은범과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원우의 옆을 지켜 준 사람이다. 권차경을 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 기은범의 덕이 컸다. 그러니 소원우의 빈자리를 염려하는 그에게 1년을 기다려 달라는 뻔뻔한 부탁을 할 수는 없다.
생각에 빠진 사이 틀어 놓았던 프로그램은 언제 끝이 났는지 다른 프로그램으로 바뀌어 있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맥주도 동이 났다. 소원우는 빈 맥주 캔을 찌그려 휴지통에 넣은 후 다시 의자에 앉았다. 소원우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창밖은 실내를 비추었다. 에어컨과 TV, 침대 등 방 안의 풍경을 그대로 비추어 내던 창문에서 소원우가 아닌 사람이 보였다. 소원우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권차경이었다.
“어?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
“재미없어서. 다들 정신없이 술 마시고 있어서 혼자 빠져나왔어.”
소원우는 뒤늦게 권차경이 사라진 걸 알고 난동을 피울 윤찬희의 모습이 상상됐다. 윤찬희의 주사를 받아주기엔 정신이 너무나 곤했다. 소원우는 휴대폰이 울리기 전에 살며시 휴대폰을 껐다.
권차경은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뭔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권차경은 물건을 사러 가면 봉지를 꽉 채워야 한다는 목표가 있는지 늘 넘칠 만큼 샀다.
권차경은 소원우에게로 걸어오다가 휴지통에 버려진 맥주 캔 몇 개를 흘긋 쳐다보았다. 술이 안 끌린다고 거짓말했던 게 떠올라 소원우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씻고 나오니까 맥주 마시고 싶더라고.”
“술 사 오길 잘했다. 더 마실래?”
권차경이 테이블에 봉지를 올려놓았다.
“응. 안 그래도 부족한 참이었는데.”
소원우는 봉지를 열어 맥주를 하나씩 꺼냈다.
“많이도 샀네. 종류별로 다 사 온 거야?”
권차경은 소원우가 호가든을 즐겨 마시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브랜드의 맥주 몇 개를 골라 사 왔다.
“응. 혹시 네 입맛 변했을까 봐.”
풀 탑을 뜯는 소원우의 손이 멈칫했다.
“기억은 다 하는데, 모르는 게 많이 생긴 것 같아. 혹시 더 좋아하는 맥주 생겼어?”
권차경이 소원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소원우는 빠져나온 거품을 흡, 빨아 마셨다.
“아니. 여전히 이게 제일 좋아.”
권차경이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소원우가 알고 있는 그대로.
빈 캔이 하나둘씩 쌓이더니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거침없이 술이 들어갔다. 취기도 적당히 올랐다.
“넌 주사가 뭐야? 그러고 보니 너 취한 거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얼굴이 뜨끈뜨끈해져서 손등으로 연신 뺨을 식히던 소원우가 물었다.
“내 주사는…….”
권차경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뭐야. 망설이니까 더 알고 싶어지잖아 뭔데. 말해줘.”
권차경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더 궁금했다. 소원우는 끈질기게 물었다.
“말해주면 나도 내 주사 말해줄게.”
취한 적이 많지는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진탕 마셔 본 건 두 번 정도였다. 두 번 다 구석 자리를 찾아 몸을 말고 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잤다고 했으니, 잠자는 게 주사라고 말해도 될 터였다. 대단히 놀라운 주사는 아니지만 권차경은 소원우의 주사가 궁금했는지 입을 열었다.
“취하면 솔직해져.”
“솔직해져? 뭐, 물어보거나 하면 거짓말 안 하고 진실만 말하는 거야?”
“응. 물어보는 대로 다 얘기한다더라. 호주에 있을 때는 그랬어. 한국에선 안 취해 봐서 모르겠고.”
“그럼 술자리 보면서 마셔야겠다. 아무 때나 술 취하고 그러면 위험하겠네.”
권차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우는 웃으며 “너한테 비밀 얘기하면 안 되겠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권차경은 피식 웃기만 했다.
“오늘은 어때? 나랑 있을 땐 안심하고 마실 수 있어?”
깊게 생각을 하고서 물은 건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권차경의 얼굴이 티가 나게 굳어 버린 탓에 소원우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니야? 우린 친구잖아. 나랑 있을 땐 취해도 되는 거 아니야?”
소원우는 그랬다. 권차경 앞에서 안심하고 마실 수 있었다. 주사는 어차피 잠자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권차경이라면 자신을 책임지고 집까지 바래다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권차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대답이었다. 괜히 서운했다.
“나랑 친구를 해야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울 때는 언제고. 날 못 믿는 거야?”
소원우는 손에 들린 맥주를 입안에 털어 버렸다. 호가든은 떨어진 지 오래고, 남은 맥주는 스텔라와 기네스였다. 소원우는 스텔라 풀탑을 뜯었다.
“믿어.”
“근데 왜 내 앞에서 취하면 안 되는데?”
권차경은 소원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못 믿어서.”
“너를 못 믿어서 그렇다고?”
소원우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응. 네 앞에서 말하면 안 되는 걸 말할까 봐 걱정돼.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짓말이 선하다고 생각하거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한테 말하지 말아야 될 게 있다는 거야?”
소원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말해 줬으니까 이제 네 차례야. 네 주사는 뭐야?”
권차경은 그쯤에서 정리했다. 소원우가 더 물어도 답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소원우에게로 차례를 넘겼다. 별수는 없이 소원우는 자신의 주사를 말했다.
“그것뿐이야?”
“응. 진짜야. 제이든이 그랬어. 갑자기 내가 사라져서 찾았는데 구석에서 자고 있더래.”
호스텔의 지하 펍은 여행자들의 끝나지 않은 밤으로 북새통이었다. 얌전히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소원우가 갑자기 사라져 제이든이 한참을 소원우를 찾으러 다녔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물어 겨우 소원우를 발견했다. 펍 구석, 그곳도 바닥에서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소원우를.
“제이든은 너 안 지켜보고 뭐했어?”
권차경은 화난 눈을 했다.
“나도 내가 취할 줄 몰랐는데 제이든이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랑 같이 마시며 노는데 제이든이 어떻게 나만 챙겨.”
“그래도 널 계속 신경 쓰고 있어야지.”
권차경은 금방이라도 제이든에게 따질 것만 같았다. 불쌍한 제이든. 소원우의 주사 탓에 괜한 원망을 듣고 있었다.
“제이든은 잠든 날 업어서 방 침대까지 잘 데려다줬어. 내가 제이든한테 민폐 끼친 거야.”
“그래도…….”
“넌 한눈 안 팔고 계속 나 지켜 볼 수 있어? 나 여기 있는 술 다 마실 건데.”
소원우는 권차경을 바라보며 술을 꿀꺽 삼켰다. 사람을 계속 챙긴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술이 들어간 사람은 더욱.
“이미 잘 보고 있어.”
권차경은 아주 쉽게 답했다. 이미 그러고 있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입가에 띤 온화한 미소를 피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 그럼 난 안심하고 마실게.”
술이 왜 이렇게 잘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여름밤이 좋아서 그런 건지, 포기하지 못한 유학 탓인지, 아니면 어색하게 끊긴 기은범과의 통화 때문인 건지.
어느새 마지막 캔 하나만 남았다. 언제부턴가 권차경은 술은 마시지 않고, 자신 있게 얘기한 대로 소원우를 챙겼다. 못 버티겠다 싶으면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누우면 되는 걸, 권차경은 소원우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수시로 더 마실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했다.
“나 술 세. 맥주만 가지고 안 취해.”
“그건 아는데, 혹시 속 버릴까 봐.”
“늦잠 푹 자고 해장하면 돼. 너, 안 졸려? 졸리면 먼저 자.”
끝까지 지켜 보라는 말은 장난이었다. 권차경도 그걸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래도 권차경은 소원우가 마지막 맥주까지 다 마시는 걸 볼 셈인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소원우는 맥주를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시다가 문득 질문 하나가 머리에 스쳤다.
“있잖아. 너, 한국에 올 때, 혹시 걱정은 안 했어? 제이든이나 다른 친구들이랑 자주 못 만나면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거.”
아침부터 밤까지 꼭 붙어 다니던 친구와도 자주 못 보게 되면 멀어지게 되는 법이다. 성큼성큼 거리가 벌어지는 게 아니다. 차츰차츰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멀어지는 거다. 그 거리를 깨닫게 될 때는 잘 지내냐고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조차 어색하고, 미안해진다.
권차경은 열여덟에 한국으로 왔다. 휴대폰과 컴퓨터가 있으니까 친구들과 연락은 끊기지 않겠지만, 살아가는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우정을 지속시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터다. 다행히도 제이든과 권차경의 우정은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고, 더욱 튼튼해졌다. 그래도 권차경이 처음 한국으로 올 때, 그런 걱정은 들지 않았을까.
“안 했어. 자주 못 본다고 사이가 달라질 거라곤 전혀 생각도 안 해 봤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어?”
소원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한테서 제이든의 존재가 약해지지 않을 거란 걸 잘 아니까.”
“만약 제이든이 변했으면 어떻게 했을 거야? 더 좋은 친구가 생기고, 더 자주 만나는 친구가 생겨서 널 잊어버렸으면?”
권차경과 자신은 상황이 달랐다. 그래도 궁금했다. 권차경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알고 싶었다.
“나만 변하지 않으면 돼. 그럼 계속 친구인 거지.”
“그게 뭐야. 혼자 하는 우정이야?”
소원우의 떨떠름한 반응에 권차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응.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혼자 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아니,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소원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혼자 간직할수록 상처만 낳았다.
소원우는 마지막 잔까지 깨끗이 비우고는 일어났다.
“잘 마셨어. 내일 밥은 내가 살 테니까 자고 일어나서 밥 먹으러 가자.”
머릿속이 몽롱했다. 취하진 않았지만, 몸이 공중에 뜬 것처럼 걸음이 살짝 비틀거렸다. 그러니 권차경의 말을 제대로 짚어 볼 겨를이 없었다. 소원우는 멈추지 않고 느릿느릿 걸어 욕실로 들어갔다.
권차경은 다음 날 청소하기 쉽도록 캔을 한곳에 모았다. 앉아 있던 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 편하게 입을 옷을 꺼냈다.
술을 마시는 동안 한 번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 앞에 있는 소원우만 보고 있느라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못 느꼈다. 소원우를 좋아하면서 권차경은 많은 걸 처음 경험하는 중이었다. 감각 체험을 하는 듯했다. 죄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들이었다.
권차경이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소원우는 자고 있었다. 권차경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젖은 머리를 말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오래 걸린대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잠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
윤찬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호텔 카드 키를 쥐고 있었을 때부터 권차경의 심장은 요동쳤다. 한시도 잠잠해지지 못했다. 소원우에게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소원우는 추운지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잠들었다. 권차경은 이불을 덮고도 시원하게 잘 잘 수 있도록 적당히 희망 온도를 높였다. 방 안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고의 미세한 소음, 그리고 소원우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아침부터 꽉 찬 하루였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면 피로를 어느 정도 풀 수 있을 테지만, 권차경은 아까운 밤을 잠으로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소원우의 침대까지는 딱 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권차경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감히 손을 대 보려는 욕심도 내지 않았다. 가는 시간을 붙들고 싶은 마음으로 소원우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사뿐히 내려앉은 속눈썹을 물끄러미 보다가, 권차경은 소원우가 자는 모습을 처음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원우가 함께 잤던 여러 날들에서 소원우가 권차경이 잠들기 전에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몸이 피로하면 눈꺼풀은 무거워진다. 이 당연한 법칙이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소원우는 어떤 얼굴로 자신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을까. 숨소리에도 심장이 가빠지는데, 자신처럼 손바닥으로 꽉 누른 채로 긴 밤을 버텼을까.
권차경은 과거의 일을 후회할 시간에 후회하지 않는 현실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권차경의 머릿속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 번만, 소원우가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권차경은 소원우의 침대 쪽으로 옆으로 누웠다. 소원우. 입속에 맴도는 이름이 꼭 독 같다. 품고 있으면 해가 되고, 뱉어낸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고백할 수도, 포기할 수도, 이리하지도, 저리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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