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앉을 자리 하나 없는 지하철은 사람을 한가득 뱉어 내고도, 또 여럿을 품고 떠났다. 배차 간격이 5분도 채 되지 않는 지하철마다 사람이 들어찬 것만 봐도 어딜 가나 복작복작하겠구나 생각했다. 역시나 주말 저녁 번화가의 식당들은 손님들로 꽉꽉 찼다. 소원우가 가는 식당은 방송에 한 번 나오지 않고도 사람들이 줄지어 먹는 곳이었다. 예약을 했기 망정이지, 저녁 시간에 식당에 도착했더라면 최소 4, 50분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소원우는 식당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과외가 지체되는 바람에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소원우는 두 사람에게 식당에 도착하면 먼저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셋이서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공통분모인 소원우가 빠졌으니 어색해하진 않을까 염려했는데 괜한 걱정인 모양이었다.
“왔어?”
“왔어요, 형?”
마주 앉아 얘기하던 소원희와 기은범이 소원우를 반겨 주었다. 어색한 기류는 보이지 않았다. 둘 다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긴 했다.
“응. 음식은 뭐로 시켰어?”
소원우가 소원희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어. 무제한으로 시켰어. 은범이 많이 먹으라구.”
그새 말도 놓았는지 소원희가 친근하게 기은범의 이름을 불렀다. 소원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은범을 바라보자 기은범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육수에 넣은 채소들이 알맞게 익을 무렵, 얇은 소고기를 육수에 퐁당 집어넣었다. 고기는 금방 익었다.
기은범은 그릇에 고기와 채소를 골고루 담고 소원희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원우 먼저 안 주고?”
“누나한테 잘 보이려고요.”
소원희의 장난스런 물음에도 기은범은 넉살맞게 받아 넘겼다. 소원희는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물었다.
“원우한텐 잘 안 보여도 돼?”
“원우 형한테는 평소에 잘 하거든요. 그렇죠, 형?”
“맞아, 원우야?”
소원우에게 쏠리는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며 소원우는 젓가락을 잡았다.
“우리 얘기는 밥 먹고 하자. 나 배고파.”
과외 두 개를 연이어 하느라 점심도 먹지 못했다. 소원우가 없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잘 지내는 걸 보니 소원우는 허기를 달래는 데 집중해도 될 듯했다.
“형,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요. 음료 갖다드릴까요?”
“어, 그럼 사이다 한 잔만.”
“네. 누나는요?”
“나는 괜찮아. 난 밥 다 먹고 커피 마실래.”
기은범이 자리를 뜨자마자 소원희가 소원우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너 제대로 골랐다.”
“응?”
“성격이 화통해. 난 저런 애 좋아. 속내 감추지 않는 사람.”
소원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기를 세 개를 집어 한 입에 넣었다. 기은범 때문에 무제한으로 시켰다더니, 접시를 누구보다 빠르게 비우는 사람은 소원희였다. 오히려 기은범은 샐러드바를 들락거리느라 제대로 자리에 앉아서 먹지 못했다. 소원희의 만류에도 기은범은 괜찮다면서 부지런히 재료를 날랐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까지 젓가락을 붙든 사람은 기은범이었다. 테이블에서 살짝 물러나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은 두 사람을 보며 기은범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 드셨어요? 일어날까요?”
“아니. 다 안 먹었어.”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소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말과는 달리 등을 기대앉은 소원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은범은 냄비 안을 훑어보고 퍼뜩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리를 안 넣었네요. 형 칼국수 좋아하잖아요. 넣을까요?”
“응. 너 먹고 싶으면.”
“형은요.”
“난 배불러.”
“다 안 먹었다면서요.”
“우리 챙기느라 너 별로 못 먹었잖아. 우리 눈치 보지 말고, 천천히 먹어. 너 배 채우려면 더 먹어야 하는 거 다 알아.”
소원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그래, 너 얼마 못 먹더라. 편히 더 먹어.”
두 사람의 권유에 기은범은 내려놓은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천천히 먹어도 된다는 말에도 속도는 줄일 수 없는지 냄비 안이 빠르게 비워져 갔다. 아까와는 반대로 소원우가 일어나서 음료와 부족한 야채와 고기를 가져다주었다.
“잘 먹어서 보기 좋다.”
소원희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많이 먹지 않아요?”
“많이 먹으면 어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참을 이유는 없잖아. 아침마다 조깅한댔지? 체력 보충하려면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소원우가 없던 짧은 시간 동안 기은범과 많은 얘기를 나눴는지 소원희는 소원우가 얘기해 주지 않은 내용들을 말했다. 내심 마음 졸이며 이 만남을 주선했던 소원우는 그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근데 은범이는 왜 원우한테 존댓말 하는 거야? 사귀는 사이면 말 놓는 게 낫지 않아?”
소원희의 질문에 소원우와 기은범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한 번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었다. 연애는 처음인 데다, 남자와의 연애라 소원우는 모든 게 다 서툴렀다. 정보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찾은 정보들을 전부 실전에 적용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소원우의 수고를 알아챈 기은범이 연애를 배우지 말고, 연애를 하자고 말했다. 말을 빨리 놓으면 사이가 빨리 가까워질 수도 있겠지만, 서두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나아가자는 기은범의 의견을 소원우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반말을 하면 자꾸 애교를 부리게 돼서요. 자제하고 있어요. 전 형한테 의젓해 보이고 싶거든요.”
의젓해 보이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기은범은 어깨를 폈다. 넓은 어깨를 자랑하는 듯한 자세에 소원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간밤에 그런 얘길 나눴다. 기은범은 자신의 신체 중 어디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소원우에게 물었다. 멋있지 않은 부분이 없어서 답하기 무척 어려울 거라면서 퍽 뻔뻔한 태도로. 일부러 소원우는 아주 꼼꼼하게 기은범의 몸을 살펴보았다. 소원우가 심오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기은범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며 굵은 허벅지나 탄탄한 복근을 내보였다. 오랜 고민 끝에 소원우가 꼽은 신체 부위는 어깨였다. 장난스럽게 어깨? 하고 미묘하게 끝을 올려 말하자 기은범이 어깨요? 하고 되묻더니 소원우를 껴안았다. 꽉 껴안고서는 “저는 형의 모든 게 좋아요.”라고 말했다. 소원우도 뒤늦게 “나도 그래.” 하고 답했으나 기은범은 그 말을 믿지는 않은 듯했다.
어깨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냥한 말이 아니었다. 기은범은 키가 190센티였다. 체격도 소원우보다는 월등히 커서 기은범과 안고 있으면, 안고 있기보다는 안겨 있는 모습이 됐다. 넓은 어깨에 감싸 안기면 소음이 멎어 들고, 사위는 고요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기은범의 품이 좋았다. 서로의 심장 고동을 오롯이 느끼는 그 순간이 소원우는 좋았다.
소원희는 중요한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도서관에서 밤을 새울 예정이었다. 카페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고,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로 나갔다.
“형도 집에 들어가실 거예요?”
다들 최종 목적지는 같았다. 소원우의 집과 소원희의 대학, 기은범의 집이 다 근처였다.
“아니야. 원우는 너랑 좀 더 놀고 이따가 갈 거야.”
소원희가 나서서 답했다. 연인들의 데이트에 소원희가 당사자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은범아, 만나서 반가웠어. 우리 자주 만나.”
“전 너무 좋죠, 누나. 조심히 들어가요.”
두 사람은 헤어짐이 아쉬운 얼굴로 악수를 주고받았다. 소원희는 택시에 타기 전에 한 번 더 인사했다.
“은범아, 안녕. 원우는 은범이랑 잘 놀다 와.”
“응. 집에서 봐.”
소원희를 보내고 어디로 갈까 묻는 기은범에게 소원우는 칵테일을 마시자고 했다. 현의진과 갔었던 바는 모던하고 깔끔한 분위기라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형, 칵테일 좋아해요?”
“난 술은 다 좋아해. 맥주든 막걸리든 칵테일이든.”
“전 완전 맥주파예요. 1순위는 흑맥주고요.”
독일을 가야겠네, 하고 웃는 소원우에게 기은범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로망이에요. 독일에서 맥주 투어하는 거요.”
“멋진데? 재밌겠다.”
“형도 이런 로망 있어요?”
소원우는 고민을 하며 잭콕을 한 모금 마셨다. 특별히 마음에 담아 둔 로망은 없었으나, 기은범의 질문을 받고 떠오른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스페인에서 살아 보고 싶어.”
“스페인이요?”
“응. 작년에 여행 갔을 때 너무 좋았거든. 스페인어도 배우는 중인데 되게 재밌어. 현지에서 살면서 좀 더 배워 보고 싶단 욕심이 들더라고. 네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그냥 생각일 뿐이었는데, 너한테 말하고 나니까 꿈이 된 것 같아.”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다는 게 현재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소원우만 하는 고민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그랬다. 성적에 맞춰 학교에 들어오고,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학점에 맞춰 결정했다. 미래는 막연한데, 살아남을 길도 보이지 않았다. 교수는 꿈을 찾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찾으라 했다. 요즘 같은 때엔 그것도 어려운 과제였다.
소원우는 기은범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우리 여행 갈까? 독일이랑 스페인이랑.”
기은범이 반색했다.
“형. 우리 꼭 가요. 너무 좋아요. 상상만으로도 좋아요.”
유럽은 가는 데만 해도 반나절이고, 비용도 많이 드는 여행지다. 원한다고 뚝딱 떠날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을 먹고 차근차근 준비하다 보면 머나먼 풍경이 어느새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찬찬히 계획해 보자.”
기은범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어떡해요. 벌써부터 설레요.”
“나도.”
기은범은 기분 좋은 얼굴로 남은 맥주를 원샷한 다음 추가 주문을 했다. 소원우도 이번엔 맥주로 주문을 했다. 잔을 가득 채운 술이 앞에 놓이자 대화는 또 다른 화제를 타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은범은 한 화제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연결했다. 침묵이 생길 틈이 없었다. 자신과 사귀면 심심하지는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기은범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은범과 함께 있으면 소원우는 주로 기은범의 얘기를 듣는 입장이었다. 기은범보다 말수가 적기도 했지만, 기은범의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평범한 하루도 기은범의 입을 통해서는 유쾌하고 명랑하게 탈바꿈했다.
가만히 앉아서 기은범의 독특한 친구 얘기를 듣던 소원우는 기은범의 말이 끝나자 입가에 띤 미소를 잠시 지웠다.
“은범아, 혹시 아직 듣고 싶어?”
“뭘요?”
“저번에 길거리에서 나랑 얘기하던 사람에 대한 거 말이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기은범은 누구에 대한 얘기인지 단번에 파악해 냈다.
“형 첫사랑이요?”
웃음이 떠나지 않던 기은범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만약 기은범이 원하지 않으면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권차경이 소원우의 연락을 기다리든 말든 소원우는 기은범의 의견에 따르려 했다. 소원우의 과거를 모르는 게 두 사람의 관계 발전에 더 나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소원우는 묵묵히 기은범의 답을 기다렸다.
기은범은 남은 맥주를 또 말끔히 비워 내고는 마시던 것보다 더 큰 사이즈의 잔을 주문했다. 금세 기포가 보글보글한 생맥주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기은범은 목이 마른 사람처럼 맥주를 두어 모금을 연달아 마시고는 진지한 표정을 거두었다.
“네. 말해 주세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잖아요.”
“걔는 네 라이벌이나 적이 아니야. 네가 신경 쓸 정도도 못 돼.”
“라이벌이라고 생각 안 해요. 형이 제 옆에 있는걸요.”
기은범은 소원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는 형이 필요로 하는 걸 채워 주고 싶고, 형이 받고 싶었던 사랑도 넘치도록 부어 주고 싶어요. 그러려고 형에게 묻는 거예요. 그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원우를 바라보는 기은범의 눈이 따스했다. 기은범은 이미 넘치도록 사랑을 주고 있었다. 더 받다가는 도리어 미안해질 만큼. 그러나 기은범은 더 주겠노라고 말을 했다. 지금보다 더, 앞으로도.
한참 전에 마무리 지었던 얘기들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 소원우는 울창한 초록색 잎들 사이로 햇살이 반짝거리던 봄을 떠올렸다. 이름 모를 꽃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던 봄날에 소원우는 무심한 얼굴로 교정을 걷는 한 사람을 보았다.
이름도, 나이도, 성격도, 취향도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는데 신기하게도 사랑이 시작됐다. 매일 눈으로 좇았다. 자꾸만 그에게로 시선이 갔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납득할 수가 없어서 마음을 접어 보려고 어떤 날은 꾹 참고 외면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와 말 한 번 나눠 보는 게 소원이었다. 오며 가며 그와 인사를 나누는 같은 반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소원희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실타래는 꼬인 상황이었다. 엉망으로 끝이 난 건 뻔한 결과였다.
권차경과 함께 있으면 너무 설렜고, 지나치게 떨었고, 그게 티가 날까 봐 포장된 삶을 살았다. 숱한 거짓말들이 소원우의 입술에서 빠져나갔다.
“너무 많이 거짓을 말했어. 여전히 걔는 모를걸. 내가 여름을 싫어하고, 수영도 안 좋아한다는 거.”
권차경을 좋아했던 많은 날들이 정직하지 못했다. 소원우는 말을 멈추고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소원우를 붙잡고 있는 기은범의 손은 소원우의 얘기들을 듣고도 풀리지 않았다. 기은범은 알고 있었다.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소원우의 손을 놓치지 않는 게 더 큰 용기를 줄 것이라는 걸. 소원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을 이었다.
소원우가 두 번이나 추한 욕망을 드러냈다는 말에 기은범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기은범의 얼굴을 보고 소원우는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귄 지 몇 달이 지나고도 섹스를 못하는 이유가 소원우의 지저분한 과거 때문이었으니 기은범이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할 터였다. 소원우의 첫사랑은 깨끗하고 순수하지 못했다. 지저분한 결말에 기은범이 실망한대도 소원우는 이해했다.
권차경이 소원우에게 한 행동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소원우와 권차경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죄의 경중을 따질 기준은 서로에게만 있다고 소원우는 생각했다. 그러니 다른 누구에게 털어놓아 위로를 받거나 권차경의 행동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운 사랑을 한 스스로에게 내린 일종의 벌이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소원우의 키스에 경악을 하고 그 자리에서 절교를 선언하고 떠났다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기은범이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음. 그렇게 끝이 났는데 왜 그 사람은 형과 다시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거예요?”
윤찬희도, 현의진도, 소원희도 물었던 질문이었다. 싸늘하게 소원우를 떠났던 권차경이 이제와 소원우를 왜 찾는 것인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나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하대. 심하게 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더라. 걔 말로는 다시 친구가 되어야만 용서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대.”
병상에 누운 권차경의 얼굴이 소원우의 눈앞을 스쳐 갔다. 눈 아래가 꺼멓게 죽어서는 소원우에게 용서를 구했다. 물 한 컵도 술술 넘기지 못할 것 같이 나약해진 몸뚱이로 옆에 있어 달라고 소원우에게 애원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죠.”
기은범은 툭 내뱉은 말이었는데, 소원우는 바로 응수하지 못했다. 왜 이제 와서 말문이 막히는지 모르겠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터미널로 데려다주던 권차경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버스에서 먹을 간식과 커피가 든 비닐을 건네던 권차경의 미소가 며칠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소원우는 나지막이 말했다.
“……응, 원래는 상냥한 사람이야. 사과고 뭐고 그냥 다 잊고 살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기은범은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토록 알고자 했던 소원우의 과거를 다 들었다. 고심하는 기은범의 얼굴을 보며 소원우는 나이를 하나 먹는다는 건, 선택을 하나 더 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밤 권차경에게 키스를 하기로 한 선택이 얼마나 많은 걸 바꾸었던가. 권차경이 떠났기 때문에 기은범을 만났을 것이다. 과거를 끄집어 내어도 그립거나 애틋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 소원우의 앞에 있었다.
“은범아.”
“네.”
“권차경을 좋아했던 건 너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의문형처럼 말했어도 질문은 아니었다. 힘든 과정을 거치고 지금에 다다른 것은 기은범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소원우는 확신했다.
기은범의 입가에 웃음이 퍼졌다. 소원우의 손이 꽉 붙들렸다. 소원우는 반으로 접힌 눈을 하고 환하게 웃는 기은범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 * *
외우고 있는 번호였으니 숫자를 바로 누를 수도 있었겠지만, 소원우는 번거롭게 이름을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권차경의 번호를 저장한 지 2주가 막 지난 즈음이었다. 휴대폰을 쥐고 있었는지 연결음이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우야?
권차경은 ‘여보세요’도 생략하고 가타부타 소원우의 이름부터 불렀다. 소원우의 연락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권차경은 감추지 않았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
―어. 다 나았어.
권차경의 대답은 소원우의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아마 일주일 전에 물었어도 대답을 같았을 것이다.
“벌써?”
―밥 잘 챙겨 먹으니까 금방 회복되더라. 아침마다 집 근처 센터에서 수영도 하고 있어. 나 정말 괜찮아, 소원우야.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인지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숨쉬기도 버거운 쉰 목소리더니.
소원우는 책상 앞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았다.
기은범은 권차경을 만나겠다고 말했다. 권차경을 테스트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소원우의 연인으로서 당당하게 인사하고 싶다고 했다. 소원우를 좋아해 주지 않아서 소원우와 사귈 수 있었다며, 권차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돌아오는 토요일에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다. 이미 잡혀 있는 일정이 있으면 다음 주에 만나도 된다는 말에 권차경은 마침 아무 약속도 없는 날이라고 대답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필요는 없었다. 저녁은 알아서 먹고, 이후에 술자리만 같이 하기로 했다. 9시에 만나기로 일정을 잡고 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통화를 마무리하려는데 권차경이 물었다.
―원우야. 너는 잘 지내? 아픈 데는 없어?
“난 건강하지.”
―넌 초여름에 감기에 잘 걸렸잖아. 목소리 들어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 다행이다.
아…… 그랬었지. 소원우는 겨울엔 감기에 안 걸리고 여름에 감기에 걸리곤 했다. 감기가 한번 찾아오면 지긋지긋하게 떨어지지 않아서 한 달 이상은 고생해야 했다. 빨리 나으려고 에어컨도 틀지 않았다. 덕택에 하루에 세 번을 샤워한 적도 있었다. 소원우의 여름은 감기가 끝나고서야 진짜 시작이었다.
“응. 올해는 안 걸리나 보다.”
―그래도 조심해. 에어컨 바람 너무 많이 쐬지 말고, 과일 많이 먹고.
아직 친구로 지내기로 한 게 아닌데, 통화 내용만 보면 이미 친구였다. 걱정이 담긴 말투에 소원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까 꺼내지 못한 마무리 인사를 했다.
“그래. 그럼 토요일에 만나. 이만 끊을게.”
―응. 원우야. 잘 자.
“너도.”
소원우는 전화를 끊으며 하나를 결심했다. 만약 권차경과 또 통화할 일이 생긴다면 밤에는 하지 말자고. 아주 오랜만에 권차경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들었다. 밤늦은 시간이면 으레 주고받는 인사인데도 소원우는 뭔가 거북했다. 늘 그러했듯 습관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중지된 채로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오랜 습관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옛사랑에 미련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이런 습관들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몸에 뱄을 뿐인데, 여전히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듯했다.
그러나 소원우는 혼동하지 않았다. 소원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이가 있었다. 소원우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자기 전에 통화를 하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기은범은 졸린 눈을 하고서도 자지 않고 소원우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를 받을 때면 기은범은 조금도 졸리지 않은 것처럼 말똥말똥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래도 티가 났다. 소원우는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소원우는 연인의 번호를 눌렀다. 숫자 다섯 개를 누르자마자 아래 저장된 이름이 떴다.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할 때 소원우는 성을 꼭 붙였다. 호칭은 이름 뒤에 붙였다. 그래야 헷갈리지 않았다. 이름 없이 저장된 사람은 부모님과 소원희밖에 없었다. 기은범은 자신의 번호가 ‘기은범’이라고 저장된 것에 시무룩해하다가 남들과 다른 한 가지를 발견했다. 기은범의 이름 끝에는 하트가 있었다. 하트를 붙인 이름은 기은범 하나였다. 소원우가 누군가의 번호를 저장할 때 이름에 하트를 붙여 저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기은범에게 처음인 것을 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며 소원우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첫 방문을 기억해 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뒤바뀌는 건 아닐까 공포심에 젖었었다. 계단 하나하나 내려가는 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용기를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옆에 기은범이 있었다. 더는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계단 아래나 계단 위에나 자신은 소원우 그대로였다.
권차경은 그때의 소원우와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권차경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세계였다. 피하고자 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권차경에게 이 가게는 게이들만 오는 곳이라고 미리 언질을 하긴 했다. 부담스러우면 장소를 바꾸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권차경은 장소를 듣고 멈칫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흔쾌히 괜찮다고 답했다.
소원우는 내부를 둘러보며 빈자리를 찾았다. 주말 밤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예약을 받지 않아서 불안하긴 했는데 역시나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이제라도 장소를 바꿀까 고민하던 찰나에 소원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원우는 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혹시 늦은 건 아닐까 했는데, 약속 시간인 9시까진 5분이 더 남아 있었다. 일어나서 손짓하는 권차경을 보고 먼저 걸음을 옮긴 사람은 기은범이었다. 소원우의 손을 잡고 기은범은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안녕, 원우야.”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먼저 인사를 한 후 기은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권차경입니다.”
권차경은 기은범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게이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조금의 이질감이 없이 허리를 곧추선 채로. 권차경에게 겁을 주고자 혹은 그를 무시하려고 이곳으로 부른 건 아니었다. 권차경은 모르고 살아도 되는 세상이니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확실하게 알려 주고 싶었다.
권차경은 많이 호전되긴 했다. 퀭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빠진 살이 다 붙지는 않은 듯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뚜렷한 턱선 때문인지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기은범은 소원우를 잡은 손을 풀고 권차경의 손을 마주잡으며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기은범이라고 합니다.”
“인사 다 했으면 자리에 앉자.”
소원우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양쪽 좌석 끝에 앉았다. 비어 있는 두 자리를 보고 소원우는 망설임 없이 기은범의 옆자리에 앉았다. 좌석이 넓은 편은 아니라 소원우의 허벅지와 기은범의 허벅지가 맞닿았다. 그런데도 비좁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편안했다.
“자리 안 좁지?”
소원우는 혹시나 하고 기은범에게 물었다. 기은범은 소원우보다 체격이 더 크니 불편할 수도 있었다.
“안 좁아요. 더 붙어 앉을까요?”
“더 붙을 자리가 어디 있어.”
능청스런 질문에 소원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소원우는 웃다가 맞은편의 권차경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했는데, 권차경도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소원우는 잘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소원우가 자신이 아는 얼굴로 만나자고 권차경에게 말했을 때, 소원우는 말을 하면서도 억지라고 생각했다. 3년이 지났다. 키가 중고교 시절처럼 눈에 띄게 자라진 않아도 몸은 변화를 겪는다. 3년은 눈빛이 달라지거나 인상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누군가는 십 킬로를 빼고, 또 누군가는 십 킬로를 찌울 수도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을 시간이 흘렀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데도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소원우가 권차경의 모습 중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두 가지를 꼽으라면 미소와 목소리일 것이다. 그 두 개를 그대로 보여 주었으니 권차경은 소원우가 제시했던 전제 조건을 충족한 셈이었다.
술과 음식을 주문하자 테이블에 정적이 찾아왔다.
“원우 형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기은범이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말을 꺼낸 건 기은범이었는데 권차경의 시선은 소원우에게로 향했다.
기은범은 이어 말했다.
“저는 원우 형을 만난 게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소원우를 보던 권차경의 시선이 기은범에게로 옮겨 갔다.
기은범은 소원우가 어떤 사람인지 줄줄이 읊었다. 소원우가 얼마나 세심한지, 소소한 것까지도 기억하고 있다가 챙겨 준다는 둥, 배려심이 많다는 둥 소원우도 잘 모르는 자신의 장점을 끝도 없이 얘기했다. 권차경을 앞에 두고도 기은범의 애정 표현은 거침이 없었다. 한두 번 겪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소원우는 이런 애정 표현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했다.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성격의 차이였다. 소원우는 당당한 자세로 권차경에게 웃어 보이고 싶었지만,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굉장히 빨리 깨달으셨네요. 저는 되게 오래 걸렸거든요.”
소원우는 담담한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권차경은 거기에서 말을 그쳤다.
권차경은 입에 맴도는 뒷말을 집어삼켰다. 그리곤 소원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소원우의 연락을 받고 권차경은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소원우를 만나면 계속 웃고 있자고. 몇 년 전에는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소원우와 함께 있을 땐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웃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소원우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서 그제야 웃고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권차경은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게 자신의 실제 성격인 줄 알았다.
언제부턴가 웃는 게 어려워졌다. 웃을 일이 많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공부할 양이 늘었고, 시험도 많아졌고, 진로도 확정지어야 했고, 졸업 후의 계획도 세워야 했으니 점점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갔다. 친구 하나를 잃었을 뿐인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철저한 노력으로 꾸며 낸 미소를 소원우가 모르기만을 바랐다. 올라간 입꼬리에서 경련이 일 때마다 권차경은 슬쩍 고개를 숙이거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어색함을 숨겼다.
이 가게의 커플은 권차경의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뿐만은 아니었다. 권차경의 시야에 손깍지를 끼고 있거나 음식을 먹여 주거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모습들이 잡혔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은 아니었다. 이 가게를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찍이 떨어질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소원우는 이 가게에 오면 권차경이 당황할 것이라 예상했겠지만, 사실 권차경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호주에서 살 때는 이보다 진한 스킨십을 하는 동성애자 커플들을 길거리에서도 종종 보곤 했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동성애자라서 그를 밀어낸 게 아니라고 증명해 내고 싶었다. 우정을 쌓는 데 그런 건 문제될 게 없음을 확인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예전처럼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통화를 하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화장실 갈 건데 같이 갈래요?”
권차경은 순간 움찔했다. 그 탓에 젓가락 사이에 잘 자리 잡았던 닭튀김이 툭 떨어졌다. 권차경은 금방 다시 떨어진 닭튀김을 집고는 입에 넣었다.
가게에는 양변기 칸이 두 개인 화장실과 칸막이 없이 소변기만 세 개가 있는 화장실이 있었다. 직원도, 손님도 죄다 남자니 두 군데 모두 남자용이었다. 여럿이 쓸 수 있는 화장실이라 같이 들어간대도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터였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많아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화장실 벽에 붙은 게 아닐까 했다.
“……어, 아니, 난 됐어. 다녀와.”
“그래요, 그럼. 전 갔다 올게요.”
기은범은 짧은 헤어짐도 아쉬운 사람처럼 소원우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는 자리를 떠났다.
“미안. 못 볼 꼴 보였네.”
소원우가 민망한 듯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사과했다. 그래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야. 좋아 보여.”
세 사람이 마주 앉아 할 말이라곤 공통분모인 소원우에 대한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인 소원우는 대화에서 한 걸음 물러서고 기은범과 권차경 두 사람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기은범은 소원우의 학창 시절을 궁금해했다.
권차경은 자신의 기억 안에 있는 소원우에 대한 모든 것들을 꺼내 놓았다. 기은범의 호기심을 채워 주며 퍽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 소원우를 잘 알고 있다고, 기은범이 모르는 소원우를 자신은 알고 있다고 자만심에 젖어 있나 보았다. 권차경의 기나긴 얘기를 듣고 기은범이 “아. 이제 정말 원우 형에 대해 다 알게 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권차경은 무언가 자신에게서 빠져나갔다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권차경도 갖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권차경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미묘한 감정들에 의문이 들었다. 이건 뭐지. 이런 건 대체 뭔가.
이젠 소원우도 권차경을 밀어내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어 주기도 하는데, 이전과 똑같지가 않았다. 권차경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예전처럼 앞에 소원우가 앉아 있는데, 무언가가 달랐다.
“차경아.”
“어?”
차경이라고 불렀다. 소원우가 이렇게 다정히 불러 주는 게 얼마만일까. 권차경은 말까지 더듬었다.
“어, 어. 얘기해, 원우야.”
권차경은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가리며 말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어졌다. 제대로 웃고 있는지, 경직되어 있진 않은지 확인이 필요했다. 거울을 꺼낼 수 없으니 권차경이 볼 수 있는 건 소원우의 눈동자뿐이었다. 소원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엉망으로 망가져 있진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원우의 말을 기다렸다.
소원우는 고개를 뒤로 돌려 화장실 쪽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밤에는 전화하지 마.”
권차경이 못 들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고 확실하고 단호한 어조였다. 그런데도 권차경은 되물을 뻔했다.
“내가 또 뭐 잘못했어? 그럼 미…….”
“아니. 너 잘못한 거 없어.”
일단 사과부터 하려는 권차경의 말을 소원우가 막았다.
“용건이 있으면 전화해도 돼. 되도록 밤에는 피해 달라는 거야. 나 자기 전에 항상 은범이랑 통화하거든. 그 시간은 은범이와 보내고 싶어.”
용건이 없어도 전화하는 사이였다. 하루에 몇 번이나 전화를 했고, 자기 전에 굿나잇 인사를 주고받는 게 당연한 일과였다.
분명히 권차경은 ‘친구’를 원했다. 그 자리를 갈구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바람대로 그 자리를 돌려주었다. 그러니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자꾸만 무언가 엇나가고 있었다.
“우리 친구지?”
권차경은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
소원우에게서 맞다는 대답이 떨어졌다. 권차경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낮에는 전화해도 돼?”
“……어.”
썩 내키지는 않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권차경은 모른 체했다.
“밤에는 안 할게.”
이 말을 내뱉기가 어려워서 권차경은 마른침을 두 번 삼키고서야 꺼낼 수 있었다. 그 뒤로 적막이 흘렀다. 얘기를 이끌어가던 기은범이 없으니 마치 처음 만난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것처럼 어색한 기류가 테이블을 에워쌌다.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권차경과는 달리 소원우는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기은범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소원우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바로 테이블에 내려놓고 기은범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니 아까는 몰랐던 차이들이 확연히 보였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전처럼 자신에게 웃어 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권차경은 소원우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 거라 착각했다. 예전과 같아졌다고, 전처럼 소원우와 함께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은범을 바라보는 소원우의 눈을 보고 권차경은 불안감의 원인을 발견해 냈다. 권차경이 알던 미소는 권차경에게로 향했던 게 아니었다. 권차경을 보고 웃던 소원우의 미소는 여러 사람에게 쏟아졌던 것과 같았다.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 입술을 끌어 올리며 다정히 웃는 미소는 기은범의 것이었다.
소원우가 변한 게 아니다. 권차경을 친구로 받아들여 준 것도 맞았다. 다만 소원우는 더 이상 권차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소원우와 친구였던 내내 권차경은 소원우의 애정을 받아먹었다. 그 특별한 애정이 없는 친구 사이를 권차경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친구는 맞는데, 그때도 소원우의 친구로 옆에 있었고, 지금도 소원우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데, 처음 맺는 관계와 다름없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권차경은 손바닥을 명치에 가져다 댔다. 그 부근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의사 말로는 호전되어 더는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데, 왜 숨이 가빠지는 건지 모르겠다.
아프다고 하면 소원우가 돌려보낼 것만 같아서 권차경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젓가락으론 부지런히 음식을 집었고, 간간이 술도 마셨다.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이면서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연신 쥐었다 폈다. 통증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체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화제 한 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술 더 드시고 싶으세요?”
기은범이 물었다.
권차경은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간다 싶었는데도 어느새 자정을 넘겨 있었다.
“아뇨. 일어나죠.”
두 사람을 앞세우고 권차경의 뒤에서 따라 걸었다. 계단을 다 오르고, 가게 입구 앞에 서서 기은범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네, 저도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소원우는 별 다른 말없이 손만 살짝 흔들고는 바로 뒤돌아섰다. 권차경은 저도 모르게 소원우를 붙잡았다.
“원우야.”
권차경이 부른 사람은 소원우였는데, 기은범이 대답했다.
“왜요?”
“저 차 갖고 왔어요. 대리 부를 건데 같이 타고 가요.”
권차경의 말에 기은범이 소원우를 쳐다보았다. 결정권은 소원우에게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기은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흰 그냥 갈게요.”
“원우야. 늦었는데 타고 가. 이 시간에 택시 잡기도 어렵잖아.”
권차경이 한 번 더 붙잡았다. 그러자 이번엔 기은범이 답했다.
“저희 둘이서 좀 더 데이트하려고요.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서요.”
더 권할 핑계가 사라졌다. 말이 없는 권차경에게 소원우가 다시 손을 흔들었다.
“우리 먼저 갈게. 조심히 들어가.”
두 사람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권차경은 가만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란한 어깨가 서로 딱 붙어 걸었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것처럼 바짝 붙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권차경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끌벅적한 소음 사이로 소원우가 사라진 뒤에야 권차경은 휴대폰을 들어 자주 이용하는 대리운전 업체로 전화를 걸었다. 10분이면 도착한다는 운전사를 기다리면서 권차경은 손바닥으로 명치를 어루만졌다. 통증이 있었던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조금 아래쪽으로 손을 옮겼다. 그쪽도 아니었다. 고통의 근원지를 찾듯 이리저리 손을 움직인 권차경은 심장에 손바닥을 대고 고동 소리를 들었다.
불규칙하게 뛰는 고동 소리 뒤로 설핏 루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통증의 이유를 가늠해 보기 싫었다. 권차경은 손을 내리고 천천히 주차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 * *
스페인어 기말 과제는 스페인어로 방학 계획을 쓰는 거였다. 사진이나 그림, 영상을 이용해도 상관은 없지만, 한 학기 동안 배웠던 단어를 사용해 문장을 완성해 냈는지가 평가 기준이었다.
계획이랄 건 딱히 없었다. 군대에 가기 전처럼 마냥 놀 수만은 없었다. 졸업이 한참 남았는데도 자소서에 쓸 만한 자격증을 따거나 특별활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가득했다. 그런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얘길 과제로 써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적어 놓은 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원우는 펜으로 북북 지우고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한 학기 강좌로 스페인어 공부를 마치기엔 너무도 아쉬웠다. 외운 단어를 활용해 문장을 만드는 재미가 한창이었다. 기왕 시작한 거 좀 더 배워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면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호스텔도 좋지만, 현지인의 집에서 묵는 카우치서핑이나 텐트를 치는 여행도 괜찮을 듯했다.
소원우가 과제로 제출한 방학 계획은 딱 한 가지였다. 스페인어 공부를 하는 것. 스페인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스페인어를 공부해서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를 바탕으로 과제를 완성했다. 스페인에서 찍었던 사진들도 적절이 배치했다.
의욕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던 만큼 스페인어 성적을 잘 받는 것도 목표이긴 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와 과제를 하면서 좋은 말들로 포장하고, 거창하게 꾸며 낸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엔 점수를 받기 위한 과제가 아니라서 재밌었다. 막연하게 스페인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꿈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 소원우는 스페인어 강사에게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스페인어 강사는 이번 학기까지만 강의를 하고 그만둔다고 했다. 그만둔 후엔 스페인어 회화 교재를 만들기로 했다던 강사는 이미 스페인어에 능숙한 사람은 물론, 스페인어를 배우는 사람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실질적인 부분이 중요했다.
“그래서 하기로 했어?”
“나한테는 너무 좋은 기회잖아. 게다가 돈까지 벌 수 있고.”
방학 동안 자신과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는 강사의 제안을 소원우는 덥석 받아들였다.
“잘 됐다, 진짜. 은범이는 뭐래?”
“좋다고 하지. 근데 주말밖에 못 볼 것 같다니까 시무룩해졌어.”
“방학이라고 여기저기 놀러 가려고 생각했을 텐데 아쉽긴 하겠구만. 은범이는 모레 시험 끝난댔지?”
기은범과 쿵짝이 잘 맞는 윤찬희는 기은범의 마음을 이해했다.
“응.”
방학인데도 자주 못 보겠다고 기은범은 벌써부터 아쉬워했다. 기은범을 달래 주려 주말에는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일하기로 해서 기은범과 만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수 있도록 소원우는 토요일 하루를 비워 놓았다. 평범한 데이트로 끝낼 하루는 아니었다. 기은범에게는 당일이 되어서야 말해 줄 계획이었다. 저녁을 함께 보낼 장소를 말해 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음. 권차경은 여전히 꼬박꼬박 전화해?”
기은범을 생각하고 있던 소원우는 한 발 늦게 대답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는 말만 들은 것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윤찬희는 소원우가 권차경과 통화를 하는 걸 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정말 친구처럼 대화가 술술 이어지는 것도 신기했고, 소원우의 표정이 평온한 것도 놀라웠다. 헤어진 사람과는 연을 끊고 사는 윤찬희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무슨 얘길 하디?”
“그냥 뭐. 평범하지. 학교에서 이랬고, 누굴 만났고, 밥은 뭘 먹었고. 그런 것들이야.”
“예전이랑 똑같네?”
소원우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소원우는 주로 답을 하고, 권차경은 주로 질문을 하긴 했지만 오가는 내용들은 윤찬희의 말대로 예전과 비슷한 편이었다. 통화하는 시간대가 낮이다 보니 소원우가 누굴 만나고 있을 때가 많았다. 통화를 길게 할 수가 없었다. 길어야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전에는 한 번 통화를 하면 10분은 기본이었다. 그것도 짧게 느껴져서 소원우는 어떻게든 더 이어 나가 보려고 온갖 화제를 끌어 모으곤 했다.
권차경은 전화를 끊기 전에 늘 같은 걸 물었다. 전에는 물을 필요가 없던 질문이었다.
언제 만날 수 있어?
소원우는 매번 핑계를 댔다. 이미 약속이 있어서, 바빠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모든 걸 뭉뚱그려 ‘나중에.’라고 얼버무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험을 핑계로 답변을 미루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 번 보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게 되면 괜히 빨리 자리를 뜨려고 서둘러 밥을 먹는 것처럼 소원우는 권차경을 피할 핑계만 찾게 됐다. 권차경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권차경이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했다. 편했고, 떨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변화가 자신에게는 무척 어색했다. 이렇게 권차경과 지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워서 권차경을 피했다.
“근데 은범인 권차경이랑 통화하고 만나고 이러는 거 괜찮대?”
소원우도 그게 궁금해서 기은범에게 물어보았다. 소원희가 걱정한 것도 그것이었다. 권차경과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는 말에 소원희는 기은범도 알고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기은범은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소원우의 마음이 어디로 달아나지 않게 자신이 잘 붙들고 있으니 불안하지 않다고. 새삼 소원우는 안도했다. 자신의 마음이 기은범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다는 걸 당사자에게 확인받았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 가던 길 꾸준히 잘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 * *
옷장 문을 몇 번이나 열고 닫았는지 셀 수가 없었다. 옷을 입고 벗는 것도 반복하길 여러 번. 고심하던 끝에 한 벌을 골라 차려입었지만, 소원우의 눈엔 직전에 입었던 옷이나 이거나 그게 그거였다. 소원우는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데이트할 때는 이러지 않았다. 나름대로 중요한 날이라고 신경 쓰는 자신의 모습이 퍽 웃겼다.
적당히 캐주얼한 옷을 골라 입는 소원우와는 달리 기은범은 꽤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했다. 평범하지 않은 옷도 잘 소화하는 편이라 아르바이트로 쇼핑몰 모델도 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기은범과 자신의 옷차림을 비교한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오늘은 옷장 안을 유심히 살펴보게 됐다.
사실은 옷이 문제는 아니었다. 옷 속이 문제지. 가방 안에 콘돔과 젤을 잘 챙겨 놓고도 소원우는 가방을 여러 번 헤집었다.
밤새 잠을 못 잤다. 침대에 눕긴 누웠으나,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잠자기를 시도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결국 소원우는 이불을 걷어차고 어둠 속에서 영상을 돌려 보았다. 이론이야 이제는 완벽히 아는데도 조바심이 일었다. 사람의 감정이 노력만으로 움직여지지 않듯 몸도 그랬다. 지식은 채워졌다 하더라도 제대로 반응할지는 모르는 법이다. 기은범의 손길에 겁을 먹어 움츠러들지만 않기만을 바랐다.
현의진은 원하는 때에 하면 된다고 했다. 원하는 때는 이미 왔다. 기은범의 발기한 성기를 느낄 때마다, 황급히 소원우에게서 떨어져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걸 볼 때마다 소원우는 기은범과 잘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모른 척하는 것도 몇 번이었다. 더 미루면 기은범과의 관계가 정체되지 않을까 염려됐다.
기은범은 더 기다릴 수 있다면서도 소원우가 한 발자국 다가와 준 것에 대해 뛸 듯이 기뻐했다. 기은범은 좋은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제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소원우는 호텔을 예약했다.
이틀 전에 기은범의 형수가 아이를 낳았다. 기은범의 형 부부가 임신을 시도한 지 5년 만에 귀하게 얻은 자식이었다. 온 집안의 경사였다. 가족들끼리 모여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던 기은범은 밥만 먹고 바로 빠져나오겠다고 했다. 원래는 데이트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호텔로 가려 했지만, 급하게 잡힌 가족 모임 탓에 기은범과는 호텔에서 만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소원우는 시간을 확인하고 서둘렀다. 여유롭게 준비할 생각으로 일찍부터 일어나 움직였는데도 곧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놓고 가는 게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본 후에 집을 나섰다. 빌라 현관을 나오자마자 소원우는 걸음을 뚝 멈추었다.
권차경이 있었다.
권차경도 갑자기 소원우가 나타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여기 있어?”
권차경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소원우는 의아한 눈으로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볼일이 있어서 근처 왔다가…… 잠깐 들렀어. 네가 집에 있는지 몰랐어.”
권차경에게서 집 앞에 왔다거나, 만나자거나 하는 연락이 없었으니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권차경이 변명을 하듯 눈치를 보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의문을 품은 채로 권차경을 바라보는데 권차경이 말을 돌렸다.
“너 어디 가?”
그러고 보니 여기 서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어, 약속 있어. 나 가야 되니까 다음에 얘기하자.”
“어디로 가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 지하철 타고 가면 돼.”
소원우는 거절하고 몇 걸음 옮겼다. 권차경이 소원우를 뒤따라왔다.
“데려다줄게. 나 드라이브 하고 싶거든. 그 김에.”
권차경은 도리어 부탁을 하는 태도였다. 소원우는 그대로 걸음을 이어 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중구에 있는 S호텔 알아? 동대입구 쪽에 있는 데.”
“호텔?”
“응. 남산이랑 동국대 근처에 있어.”
소원우는 지도를 켜서 권차경에게 보여 주었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내민 휴대폰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호텔은 왜? 아, 저녁 먹으러?”
뻔한 질문을 하는 권차경에게 소원우는 담담하게 답했다.
“호텔에 왜 가겠어. 자러 가지.”
권차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을 권차경은 굳이 던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러니까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권차경도 알지 못했다. 다만 소원우의 대답을 듣고 호텔에 가는 다른 목적이 있길 바랐단 것만 확실해졌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분명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권차경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친구라는 관계만 있으면 소원우와는 전처럼 지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 믿음은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권차경은 큼직하게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애써 모른 척했다. 외면한다고 감출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두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않고 있으면 영원히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기은범이 물었었다. 소원우의 어떤 부분이 좋으냐고. 권차경의 표정이 굳어지자 기은범은 ‘친구로서요.’ 하고 덧붙여 말했다. 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입이 열렸다. ‘사람을 따뜻하게 해 줘요.’ 머릿속에 많은 말들이 떠돌아다녔는데도 고작 그 하나밖에 말하지 못했다. 당사자가 앞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은범이 모르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가득했다.
‘아아. 맞아요. 원우 형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죠. 배려심이 많아서 그래요. 좋은 건 늘 양보하고요.’
기은범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권차경보다 더 많은 걸 아는 듯했다. 권차경만 알고 있던 소원우에 대한 많은 것들은 사장된 지 오래였다. 권차경이 모르는 것으로 변했고, 변화하는 중이었다.
연인과 친구의 차이를 권차경은 모르지 않았다. 선택의 기로에 서면 당연히 연인이 우선이라는 건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속이 답답했다. 또다시 명치가 아파 왔다. 정확히 따지면 명치가 아픈 게 아닌데도 권차경은 명치만 꾹꾹 눌러 댔다.
그러는 동안 소원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권차경의 차에 타는 건 오랜만이었다. 권차경의 차는 여전히 깨끗하고 산뜻했다. 다시는 이 차에 탈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거의 3년 만이네.”
권차경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주말이라 도로는 정체가 심했다. 소원우는 연신 휴대폰과 창밖을 번갈아 보았다. 정해둔 약속 시간 전에는 도착하겠지만, 오히려 소원우가 기은범보다 늦게 도착할 듯했다. 먼저 도착해서 기은범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별거 아닌데도 괜히 아쉬웠다.
권차경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줄었다.
“아. 너 만나면 해 줄 얘기 있었어. 제이든이 너 연락 자주 하라고 전해 달래.”
아무 표정 없이 운전을 하던 권차경이 피식 웃었다.
“나 입원한 후로 제이든이 매일 연락해. 네가 나 괜찮다고 좀 해 줘. 제이든은 내 말 안 믿어.”
“걱정되니까 그렇지. 가뜩이나 멀리 살아서 소식이 궁금할 텐데 자주 연락해 줘.”
“일주일에 한 번은 하고 있어. 이 정도면 자주 연락하는 거 아니야?”
“나한텐 더 자주 하잖아.”
소원우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핸들을 붙잡고 있는 권차경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제이든은 나보다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나한테 하는 것보다 더 자주 해야지.”
권차경이 먼저 연락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주로 부모님과 호주의 친구들, 그리고 소원우였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이면 ‘자주’에 속한다고 여겼다. 그것에 비하면 소원우에게 연락하는 횟수는 상당했다. 사실은 그것도 모자랐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소원우에게 연락하고 싶은 걸 권차경은 참고 이틀에 한 번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소원우의 소소한 일상이 궁금했다. 뭐하고 있을지, 밥은 먹었는지, 학교는 잘 다녀왔는지, 잠은 잘 잤는지 매일 묻고 싶었다. 친구니까 그 정도는 궁금한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닌 걸까. 여기저기서 의심이 피어올랐다. 대답해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데, 자신만이 질문에 답할 수가 있는데 권차경은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았다.
의문을 품은 채 쭉 달리다 보니 어느새 차는 도착지에 와 있었다. 차가 호텔 앞에 멈추자마자 소원우는 빠른 손길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조심히 가.”
차 문은 미련 없이 탁 닫혔다.
권차경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소원우의 뒷모습만 바라보느라 휴식을 갖지 못하던 권차경의 눈이 금세 발갛게 충혈되었다.
가지 마, 원우야.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권차경의 말을 들은 사람은 권차경뿐이었다. 대체 왜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건지 권차경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친구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소원우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건지 권차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소원우의 옆에 선 사람이, 소원우와 지금 호텔로 들어가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차오른 순간, 속이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위통 때문은 아니다. 그것과는 달랐다. 아픈 곳이 위는 아니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 몸 어딘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터였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통증이었다.
명백한 질투였다. 그러나 그 감정은 자신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무력감에 젖은 권차경은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호텔에서 빠져나와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맸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집에 들어서게 되면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폭발할 것만 같았다. 겁쟁이처럼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빙빙 돌다 도달한 곳은 한강이었다. 권차경은 차를 세워 두고,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소원희에게 차였던 생일에 케이크를 잘라 먹으면서 소원우가 물었다.
‘내가 대신 울어 줄까?’
소원우가 있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으니까, 차여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으니까 울어 줄 사람을 구하지 않아도 됐었다.
‘대신 울어 줄 수 있어. 너를 보니까 난 좀 울고 싶거든.’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좋아한다는 표현을 울고 싶다는 말로 대신하는 소원우에게 뭐라고 말했더라. 아마 그럴 필요 없다고 했던 것 같다. 포기하는 게 아니니까 울 필요도 없다고. 권차경의 말에 소원우는 거절을 당하고도 어떻게 사랑이 끝나지 않느냐면서 웃었다. 어떤 마음으로 웃었을까, 소원우는.
울고 싶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시야에 잡히는 그 어떤 것도 분명한 모습이 없었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흐를 것 같고, 몸에 힘을 풀면 통증이 느껴졌다. 흐릿하고, 어슴푸레한 풍경 속에서 소원우의 모습만이 또렷했다.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권차경은 결국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권차경은 소원우를 호텔에 바래다준 뒤로 3일 동안 외출 한 번 하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었다. 밤이 되어도 집 안의 등을 밝힐 생각도 않았다. 어둠에 눌린 채로 시계도 보지 않고 지내면서 권차경은 언젠가 소원우가 이 집에 왔었던 날을 떠올렸다.
나란한 두 베개를 보면서 소원우는 비어 있는 방을 두고 왜 같이 잠을 자야 되느냐고 물었다. 발간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어정쩡히 숙이고서. 소원우의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권차경은 오히려 소원우가 자신을 잊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소원우를 떨어 놓기는커녕 더 곁에 붙여 두려 했다.
딱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아도 ‘친구’라는 단어 하나로 소원우는 권차경의 의도대로 움직여 줬다. 친구끼리 같이 자는 게 뭐 어때. 아마 그렇게 말했을 거다. 다른 방에 가서 자겠다던 소원우는 권차경의 그 말에 고집부리기를 그만뒀다.
평온한 상태로 잠을 청하는 권차경과는 달리 소원우는 편히 뒤척이지도 못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면 권차경이 깰까 봐 등을 보이고 누워서 얌전히 있었다. 권차경의 손이나 발이 몸에 닿으면 소원우는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권차경에게 닿아서는 안 될 것처럼. 고생하는구나, 노력하는구나. 권차경은 소원우의 등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곤 했다.
고요해진 새벽에는 숨소리도 커다래졌다. 어쩌면 소원우는 숨도 참아 가며 버텼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버텼을까. 자신은 감정을 자각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고 정신이 혼란스러운데, 두 발을 딛고 가만히 서는 것도 힘겨워 자꾸 주저앉게 되는데 소원우는 어떤 마음으로 긴 시간을 견디었을까. 아프다고, 힘들다고 누군가에겐 털어놓았을까.
권차경은 소원우와 오래오래 함께하기 위해서는 친구가 되거나, 혹은 그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차경은 욕심을 부렸다. 친구인 동시에 가족이 된다면 끊어질 수 없는 진한 관계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소원우의 친구로 소원우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었지만, 그건 권차경의 상상에서나 가능했던 비현실적인 소망이었다. 정작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독 같은 존재였다. 그때 욕심을 부렸던 벌을 이제야 받는 중이었다.
권차경은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전화를 거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었던가. 전화 하나에 벌벌 떨 줄은 몰랐다. 소원우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부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처음 겪는 통증, 처음 느낀 두려움. 터져 나오는 독점욕과 질투심. 온 하루가 소원우 중심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소원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제 만날 수 있냐고 물을 때마다 소원우는 당분간 일이 많아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기은범을 만날 시간도 부족할 거라고 웃는 소원우에게 이른 새벽도, 늦은 밤에도 상관없으니 자투리 시간만이라도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그 말을 참아 내길 잘했다. 친구의 자리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 친구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의문이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고, 어떤 행동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지 모호했다. 너무 바빠 식사를 거르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사무실로 간식을 사다 보내면 그건 괜찮은 건가. 친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인 건가.
소원우는 친구로 남겠다고 선택했었으니, 어디까지가 친구의 자리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소원우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 선이 소원우에게서 너무 떨어진 곳에 그어졌을까 봐 권차경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다.
* * *
늦은 오후에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전영재가 보낸 우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전영재가 집 주소를 물어보았다. 친한 친구들 집 주소 정도는 알아 두고 싶다는 말에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일러 주었다. 편지 같은 걸 보낼 줄은 몰라서 소원우는 의아하게 여기며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엔 카드 한 장이 있었다. 카드엔 날짜와 장소, 시간, 간략한 인사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결혼 소식을 전하는 청첩장이었다. 소원우는 다시 한번 신랑의 이름을 확인했다.
신랑 전영재, 신부 강소미.
소원우는 곧바로 휴대폰부터 집었다. 전영재는 전화를 받자마자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우편으로 소식을 전했다 했다. 하루 종일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있다 했다.
전영재는 강소미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기십 번 했다. 이렇게 일찍 이뤄질 줄은 두 사람 다 몰랐겠지만 어쨌거나 전영재는 소원을 이루게 됐다.
양가 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 만큼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조촐하게.’ 전영재는 그렇게 표현했다. 분위기 좋은 별장을 빌려서 친척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해서 결혼식을 할 거라고.
그러나 결코 조촐한 결혼식은 아닐 듯했다. 결혼식 장소부터가 평범하지 않았다. 바다 건너 제주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니. 하룻밤을 묵을 숙소와 비행기표까지 준비해 뒀다는 전영재의 말에 소원우는 놀라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원우야, 진짜 나 괜찮아?”
윤찬희는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정돈된 머리카락도 자꾸 만지작거렸다.
“그렇다니까. 머리 그만 만져. 망가지겠다.”
“나는 이마 보이는 머리 스타일 안 어울리지 않냐? 웨딩 사진은 두고두고 남을 텐데.”
“네 결혼식 아니다. 영재가 멋있게 나와야지.”
“그건 그래.”
소원우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윤찬희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몸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서서 물었다.
“권차경 10분 후면 도착한댔나?”
“응. 거의 다 왔대.”
“아. 권차경이랑 똑같은 옷 입기 싫어. 하여튼 전영재. 왜 권차경까지 들러리를 세워 가지고 이 사달을 만드냐. 난 권차경이랑 한 공간에 같이 있을 날이 또 올 줄 몰랐다.”
윤찬희는 여전히 권차경을 원수 보듯 했다. 소원우의 입에서 나오는 ‘차경’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윤찬희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네 마음 다 이해하는데, 그래도 영재 앞에선 불평하지 마.”
윤찬희는 강소미가 권차경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들러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걸 알면서도 전영재 탓을 하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싫어?”
“권차경? 어, 싫어. 난 싫어. 내가 권차경을 좋아할 이유가 어디 있어.”
윤찬희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빠른 반응 속도에 소원우가 피식 웃자 그제야 일그러뜨린 인상을 폈다.
“웃지 마. 너 웃으니까 찔리잖아.”
“왜 찔리는데?”
“걔가 지금은 너한테 어떻게 하는지 아니까 찔리지. 너한테 하는 행동 보면 권차경을 싫어하는 내가 천하의 나쁜 놈이 되는 기분이야.”
윤찬희는 불퉁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나쁜 놈이 되겠어. 그건 그렇고 은범인 뭐래? 같이 가고 싶어 하지 않아?”
“따라오고 싶은 눈치긴 해.”
“같이 못 가서 아쉽다.”
“영재가 친한 사람 몇 명만 불렀으니까 어쩔 수 없지.”
윤찬희는 기은범 없이, 제주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기은범과 잘 지낸다 말해도 윤찬희는 권차경을 경계했다. 권차경이 소원우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은범인 오늘 뭐 해?”
“은범이도 오늘 바빠. 본가 가서 요리해야 돼.”
“요리?”
“응. 은범이 형수님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됐거든. 산후조리원에 계셨다가 이제 집에 오시는데, 형수님 드실 음식 만들어서 보내 준다 하더라고. 손이 모자라다고 은범이도 부르셨어.”
기은범은 만든 요리를 하나씩 사진을 찍어 소원우에게 보냈다. 소원우에게 줄 것까지 따로 챙겨 두었다고 했다. 기은범이 주는 것만큼 소원우는 되돌려 주지 못했다.
기은범을 좋아한다. 충분히 좋아하고 있다. 이보다 더 좋아질 수 없을 만큼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몸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언제든지 마음을 배신할 수 있는 몸뚱이라서 이번에도 그랬던 걸까.
긴 시간을 기다려 왔던 날이니만큼 기대가 컸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욕실에 같이 들어가 씻을 때까지만 해도 소원우의 몸에 와 닿는 기은범의 손길이나 눈길, 그 어떤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맨몸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기은범의 입술이 소원우의 유두를 빨아 당기자 몸이 점점 경직되기 시작했다. 소원우는 파리해지는 안색을 숨기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운 척했다. 기은범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소원우는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고 속으로 한 가지만 되뇌었다.
반응해야 해.
기은범의 입과 손이 몸의 구석구석에 닿을 때마다 머리가 어질해졌다. 소원우는 머릿속이 흐트러질 때마다 안간힘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기은범은 급히 욕구를 채우려 하지 않았다. 흥분한 제 성기는 내버려 둔 채로 소원우만 정성껏 애무했다. 그 고된 노력에 소원우는 오랜 시간이 걸려 응답했다. 정액을 내뿜는 자신의 성기를 보며 소원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의 기은범은 정말 기뻐 보였다. 기은범의 얼굴에 넘쳐 나는 행복이 오롯이 소원우에게까지 전달되어서 소원우는 기은범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기은범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서 미안했다. 벅차거나 희열에 찬 그런 감상이 아니라, 몇 번이나 실패했던 과업을 해냈다는 안도감. 사정을 하는 순간 들었던 감정은 그거였다. 그래도 첫 고비를 무사히 넘겼으니 그제부턴 더 순탄히 진행되리라 여겼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묻는 기은범에게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짝거리는 기은범의 눈을 보고 소원우는 설핏 웃었다. 웃은 줄 알았다.
‘형, 울어요?’
‘……어?’
‘우는 것처럼 보여요. 힘들어요?’
소원우는 저도 모르게 울었을까 봐 손등으로 눈부터 닦았다. 물기는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안 우는데. 나 안 울어.’
‘형, 지금 형이 어떤 얼굴인지 모르죠?’
소원우는 의아한 눈으로 기은범을 쳐다보았다. 기은범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앉았다. 누운 채로는 기은범과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소원우도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우는 것처럼 웃어요.’
우는 것처럼 웃는다니. 그게 어떤 표정인지 소원우는 알 수가 없었다.
‘잘 봐 봐. 나 눈물 하나도 안 나왔어. 우는 거 아니야.’
‘우는 게 낫겠어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는 사람들 많대요. 겁도 나고, 걱정도 되니까요. 두려운 게 당연해요. 차라리 울었으면 어떻게든 안심시켜 줬을 텐데,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니까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기은범은 씁쓸한 얼굴이었다. 늘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방황하는 눈으로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안심시켜 줘야 할 사람은 기은범이 아니라 소원우였다. 소원우는 기은범을 껴안았다. 맨가슴이 맞닿았다. 쿵쿵 심장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계속하자.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 같아. 나 너랑 자는 거 안 무서워. 조금도 싫지 않아.’
소원우는 손을 뻗어 기은범의 성기를 잡았다. 방금 전까지 단단했던 성기는 어느새 축 늘어져 있었다. 남의 것을 잡아 본 건 처음이었다. 손에 닿는 감촉은 제 성기를 만졌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호기롭게 성기를 잡은 것 치곤 소원우는 좀처럼 다음으로 이어 나가지 못했다.
기은범이 소원우의 손을 잡고 성기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형. 익숙해질 필요 없어요. 익숙해지는 건 습관이 된다는 거잖아요. 밥 챙겨 먹는 것처럼 섹스하는 건 싫어요.’
‘그럼 난 어떻게 내 마음을 증명해?’
기은범은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소원우의 팔을 살짝 잡아끌어 소원우도 눕게 했다.
‘손잡을까요?’
‘응.’
소원우가 손을 내밀자 기은범이 깍지를 꼈다. 그리고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 형수님이요, 우리 형 6년을 쫓아다녔어요. 고백은 다섯 번이나 하고요. 둘이 대학교 동기였는데, 형수님이 엠티에서 술에 취한 채로 형에게 처음 고백을 했고, 그 다음엔 형의 군부대로 편지를 보내서 좋아한다고 하고, 형 전역하고 나서 집에 찾아와 또 고백하고, 형 졸업식에 네 번째 고백을 했어요.’
‘진짜? 차였는데도 계속 고백한 거야?’
‘네. 대단하죠?’
‘어. 다섯 번째는?’
‘다섯 번째는 결혼식 날에 했어요.’
소원우는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번째 고백과 다섯 번째 고백 사이가 상당히 멀었다. 중간에 생략된 내용을 말해 달라고 소원우는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렸다.
‘형수님이 졸업식에서 고백하면서 여기서 거절하면 다시는 좋아한단 말을 안 하겠다고 했어요. 형은 또 거절했죠. 그래서 이제 진짜 끝났구나 했는데, 형이 취업한 로펌이 형수님이랑 같은 곳이었던 거예요. 우리 형수님이 워낙 능력이 좋거든요. 같이 일하다 보니 뒤늦게 형수님의 매력에 빠진 거죠. 이미 네 번이나 형수님을 찼는데 우리 형 염치도 없이 형수님이 자기 오랫동안 좋아했었다고 자만해서 사귀자고 한 거예요.’
‘그래서?’
‘형수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거절했지? 이미 마음 다 정리했을 것 같은데.’
기은범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사귀자고 했어요.’
‘진짜?’
‘네. 근데 사귀긴 하는데 좋아한단 말은 안 할 거라고 그랬대요.’
‘어?’
‘완전 웃기죠? 네 번째로 차였을 때 다시는 좋아한단 말 안 하기로 했다고, 사귀더라도 좋아한단 말 들을 생각은 말라는 거예요. 형은 형수님 나름대로의 복수겠거니 하고 대충 넘겼는데, 실제로 3년을 사귀는 동안 한 번도 좋아한단 말 안 했어요.’
놀라운 연애담이었다. 상상해 보려 해도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3년이나 사귈 수 있어?’
‘저도 그게 궁금해서 형한테 물어봤는데 그런 말 안 해도 눈빛이나 행동에서 사랑이 느껴졌대요. 우리 형수님 끝까지 버티다가 결혼하는 날에야 사랑한다고 말해 준 거 있죠. 우리 형 결혼식에서 엄청 울었어요. 그렇게 형 펑펑 우는 거 엄마도 처음 봤대니까요.’
기은범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긴 얘기의 결론을 맺을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소원우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원우 형. 굳이 사랑을 보여 주지 않아도 돼요. 제가 알아차릴게요.’
어떻게 마음을 증명하느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소원우가 부채처럼 짊어지고 있는 부담을, 기은범은 단번에 앗아 갔다.
‘옆에 있기만 하면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 옆에 계속 있어 주세요.’
기은범은 소원우의 손에 깍지를 낀 채로 손등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하는 소원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와 뺨에도 입을 맞췄다. 그날 밤새 대화를 나누다 날이 밝아 올 즈음에야 눈을 붙였다.
“찬희야. 은범이 옆에서 누워 자는데, 잠이 쏟아지더라. 잠이 너무 잘 왔어. 그게 너무 좋아.”
“그랬냐?”
기은범의 옆자리는 양지였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네가 잘 사귀는 거 보니까 나도 연애하고 싶다.”
“어. 연애해. 좋아.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했나 모르겠다.”
“그렇게 좋아?”
“응.”
소원우가 환하게 웃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권차경이 들어왔다.
권차경은 혼자가 아니었다. 강소미의 친구이자 소원우와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서은나가 소원우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소원우! 잘 지냈어? 바빠서 한동안 못 만나겠다 했는데, 애들 결혼 덕에 예상보다 빨리 만나게 됐네.”
“그러게. 너도 잘 지냈어?”
“나야 언제나 잘 지내지. 못 지내도 잘 지낸다고 말하면서.”
서은나가 호쾌하게 웃었다.
“잘 지내는 거 맞는 거지?”
소원우가 웃으면서 한 번 더 물었다.
“잘은 지내. 근데 요즘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쁘게 지내고 있어. 결혼식이 한 달밖에 안 남아서 준비할 게 산더미야. 친구들 모두 주변에 결혼한 사람이 없어서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더라고. 누가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 알았겠어.”
“내 친구들 중에서도 영재가 첫 번째야. 영재가 소미랑 결혼하겠다고 자주 말하고 다녀서 언젠가는 둘이 결혼하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할 줄은 몰랐어.”
서은나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에휴,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이 결혼 반대해.”
“어, 진짜?”
“응. 고생길을 제 발로 들어가잖아. 누가 환영하겠어. 우리 소미, 앞길이 창창한데 말이야.”
서은나는 기왕 말이 나온 거 속상한 마음 좀 토로하겠다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은나가 복잡한 심경으로 털어놓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은 소원우가 학창시절 성교육 비디오나 양호 선생님의 짧은 강의로 접한 상식보다 훨씬 막대했다. 먹을 걸 줘도 기저귀를 갈아 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아 왜 우는지 모른 채로 아기를 달래느라 날밤을 꼬박 새야 하는 날들이 태반일 터였다.
“애 하나 때문에 인생 망치면 안 된다는 얘기까지 했어. 그 말 하니까 전영재 눈물 뚝뚝 흘리는 거 있지. 자기가 잘못했다고, 자기 탓이라고 펑펑 우는데 그 눈물에 넘어갔다, 소미가.”
“전영재, 그 새끼 옛날부터 울보였어.”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는지 윤찬희가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분명히 전영재가 잘못했거든? 근데 맨날 미안하다고 하면서 처연하게 우니까 아무도 걔를 못 혼내는 거야. 아직도 기억나. 우리 집에서 공 가지고 놀다가 영재가 컴퓨터 모니터 박살냈는데 나만 엄청 혼났어. 난 분명히 공놀이하지 말자 그랬고, 영재가 우겨서 한 건데.”
윤찬희는 여전히 분하다는 얼굴로 불평을 뱉었다. 이제라도 윤찬희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데 윤찬희의 억울해하는 표정과 전영재의 우는 얼굴이 겹쳐서 지나가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전영재의 우는 얼굴이 얼마나 안쓰러운지 모두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뭐, 어쩌겠어. 둘이 결혼을 결심했다는데 축복해 줄 수밖에.”
서은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 속 누가 다 알겠냐만 그래도 내가 이제까지 봐 온 전영재는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놈이라서, 소미 실망 안 시키게 열심히 살 거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해. 소미랑 영재 둘이 보면 행복해보이긴 하더라고. 매번 웃고 있어. 둘이 매일 붙어 있는데도 늘 재밌나 봐. 연애하면 원래 다 그런 거야, 원우야?”
불쑥 질문이 날아들었다. 서은나는 소원우의 연애 상대가 남자인 건 몰라도 한창 연애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걸 보니 놀리려고 물은 게 뻔했다.
소원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려 했지만, 서은나에게서 배턴을 넘겨받은 윤찬희가 끈질기게 대답을 재촉했다.
“원우야. 은나가 궁금해하는데 말 좀 해 줘. 연애하니까 어때? 행복해 죽을 것 같으냐?”
서은나가 대기실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소원우의 답을 들었으면서 윤찬희는 대답을 요구했다. 힐끔힐끔 권차경을 쳐다보며, 소원우에게 눈빛을 보내는 모습이 윤찬희의 목적을 나타냈다. 어떤 답을 원하는지 아는 터라 소원우의 입은 가볍게 열리지 않았다.
“내가 괜히 물었네. 원우 행복한 거 여기 있는 사람 다 알 텐데. 차경아. 소원우 얼굴 완전 폈지? 내가 원우 처음 봤을 땐 지금과 좀 달랐거든.”
질문의 대상이 난데없이 권차경에게로 향했다. 윤찬희는 참지 못하고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의 이유를 오해한 서은나가 말을 덧붙였다.
“왜 웃어? 난 그렇게 느꼈어. 원우 말이야, 애가 상냥하게 잘 웃는데, 어딘가 불안하고, 불안정한 분위기를 풍기더라구. 그래서 얼마나 마음 쓰였는데. 자꾸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니까.”
한창 권차경을 짝사랑하던 시기에 서은나를 처음 만났다. 서은나의 말대로 암울하게 살았던 때였다. 속은 문드러지고 상해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 웃으며 살았는데 그게 다 티가 난 모양이었다. 고작 짝사랑 때문에 그러고 살았다.
권차경에게 물었으니 자연스레 눈들이 권차경에게로 쏠렸다. 그 당시에 소원우와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다들 궁금한 얼굴이었다. 이제 와서 권차경의 의견이 뭐가 중요한가 싶으면서도 소원우도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소원우가 입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권차경은 소원우의 마음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권차경에게는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른 이들이 느꼈을 절망적인 기운도 권차경은 알지 못했을 터였다.
권차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럿이었는데, 권차경의 눈은 한 사람에게로만 향했다. 말끄러미 소원우를 바라보는 눈은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권차경의 심중을 모르겠다. 요즘 소원우는 자주 그렇게 느꼈다. 같이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건 오래전 친구였을 때와 같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 가끔 권차경은 눈을 마주치면 황급히 피하기도 했고,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렸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분위기. 서은나의 표현대로 권차경은 최근 그런 분위기를 자주 풍겼다.
“힘들었던 때였어. 지금 돌아보면 별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권차경이 입을 열기 전에 소원우가 깔끔히 과거를 정리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가엾고 어리석기만 한. 그때는 이 사랑 하나 잃으면 꼭 세상이 끝나 버릴 것처럼 두려웠다. 권차경 없이도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맞아.”
윤찬희가 소원우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권차경을 바라보는 윤찬희의 시선이 매서웠다.
“정말로 별일 아니었어. 소원우 인생에 티끌조차 안 남을 불필요한 시간들이었지.”
말을 하는 사람은 윤찬희인데도 권차경의 눈은 여전히 소원우만을 향했다. 권차경을 자극시키는 윤찬희의 의도가 통하기는 했는지 권차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지난날 들먹이는 건 그만하자. 소원우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잘 산다. 안 그래도 너네 오기 전에 연애해서 너무 좋다고 난리였어. 나보고도 연애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더라고.”
“그랬어? 애인은 어떻게 만났어? 원우야, 얘기 좀 해 줘. 남 연애 얘기는 왜 이렇게 재밌나 몰라.”
서은나가 소원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서은나에게 말하는 거야 아무 문제없었지만, 권차경과 윤찬희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싫었다. 소원우는 아직도 권차경을 노려보는 윤찬희를 툭 치며 일어났다.
“영재랑 소미 촬영하는 거 구경하고 있을게. 은나야, 잠깐 나갔다 오자.”
서은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경이 너도 얼른 옷 갈아입고 준비해.”
권차경의 시선은 소원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끝까지 소원우의 뒷모습을 좇았다.
“허어, 참.”
윤찬희가 황당한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소원우. 빨리 나가라.”
윤찬희가 소원우를 떠밀었다. 소원우가 문 앞에 거의 다다른 걸 보고 윤찬희는 빈정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너는 연애 안 하냐?”
윤찬희는 소원우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근질거리는 입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원우 애인이랑 놀 시간도 부족하다는데, 원우 붙잡고 만나자, 놀자 졸라 대지 말고 심심하면 너도 연애해. 소개팅 해 볼래? 나 아는 사람 많아.”
쟤가 진짜. 소원우는 문고리를 잡으며 낮은 한숨을 흘렸다. 소원우가 드문드문 권차경과의 만남을 이어 갈 때마다 윤찬희는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표했다. 권차경이 솔로라서 소원우에게 더 집착하는 것 같다며, 권차경을 떼어 내기 위해서는 권차경에게 소개팅도 주선해 주겠다 했었다. 그렇다고 정말 물어볼 줄이야.
서은나가 뒤를 돌아 둘의 대화에 관심을 보였지만 소원우는 멈추지 않고 문을 열었다. 소원우가 앞으로 나가자 서은나도 소원우의 뒤를 따라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권차경의 입에서 느릿하게 첫마디가 떨어졌다.
“좋아하는 사람……”
뒷말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전영재와 강소미가 촬영하는 동안, 소원우는 서은나에게 기은범의 얘기를 했다. 소원우는 서은나에게 말하면서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사랑받고 있는지 재확인했다. 사랑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에만 감춰 두고 있어도 혼자 무럭무럭 자라는 거라 여겼는데, 어쩌면 여기저기 말을 흩트려 놓을 때 더 커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기은범이 없는 곳에서 기은범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기은범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전영재와 강소미의 촬영이 마무리 될 때 즈음, 윤찬희와 김철의가 왔다. 김철의는 전영재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윤찬희와 전영재와 얘기하다 보면 김철의 이름이 종종 튀어나왔다. 그 탓에 김철의를 만나는 것은 처음인데도 몇 번 봤던 것처럼 익숙했다. 소원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김철의에게 인사한 다음, 윤찬희의 뒤쪽을 쳐다보았다.
“차경이는?”
“머리 하고 있어. 거의 다 됐어. 금방 올 거야.”
서은나가 강소미의 옆으로 간 사이 윤찬희가 소원우의 등을 툭툭 쳤다.
“야. 원우야.”
“응.”
“들었어? 아까…….”
윤찬희는 주변으로부터 거리를 살짝 두고 입을 열었다가 금방 닫아 버렸다.
“아니다.”
“권차경 얘기야?”
안 봐도 뻔했다. 문이 닫히면서 끊긴 대화를 윤찬희가 다시 이으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어. 말할까 했는데……, 안 할래. 그래도 되지?”
윤찬희는 착잡한 얼굴이었다. 소원우가 듣지 않는 게 나으리라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아예 듣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포문이 열렸던 상태라 순간적으로 궁금증이 차올랐다. 그러나 소원우는 윤찬희의 입을 억지로 열지 않았다. 소원우가 들어야 하는 얘기였다면 윤찬희는 진작 말하고도 남았을 터다.
“권차경, 이 자식. 네가 신랑보다 더 멋있게 하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전영재의 촐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원우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올려 반듯한 이마를 드러내고, 긴 다리와 넓은 어깨가 잘 드러나는 정장을 입은 권차경이 웃고 있었다.
“원우야.”
윤찬희가 소원우를 불렀다.
“어?”
소원우의 시선을 붙잡고 윤찬희가 말했다.
“사진 빨리 찍자. 얼른 끝내 버리고, 은범이 불러서 같이 저녁 먹자.”
“응. 그러자.”
그러나 윤찬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촬영은 장소와 의상을 바꿔 가며 진행됐고, 예상한 시간보다 두 시간은 더 늦게 끝이 났다. 결혼식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 조급한 일정에도 전영재와 강소미는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환하게 웃었다. 신랑 신부의 웃는 얼굴 앞에서 집에 가고 싶다느니 촬영이 힘들다니 하는 불평을 쏟을 수가 없었다.
신부 들러리가 넷, 신랑 들러리가 넷.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윤찬희는 소원우의 옆자리를 사수하려 했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사진작가는 다양한 포즈를 요구했다. 전영재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권차경과 가까이 붙어 서서 찍어야 할 때도 많았다. 팔이나 손이 소원우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건 예사였고, 소원우가 권차경의 가슴팍에 기대게 될 때도 있었다. 몸이 닿을 때마다 권차경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미안.” 하고 사과했다. 사과를 하는 권차경의 몸이 더 떨리는 듯해서 소원우는 그저 괜찮다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