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4)

7.

“……정말 민망하고 창피한데요.”

“응.”

“그래도 형밖에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응. 뭔데?”

편하게 얘기하라는 현의진의 태도에도 소원우는 머뭇거리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형은 처음부터 잘 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지……. 어, 그 과정 말이에요. 언제쯤 해야 할까 하고요.”

“무슨 과정?”

현의진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묘한 미소를 보면 현의진은 소원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지만, 소원우가 확실하게 얘기해 줄 때까지 성급하게 넘겨짚지 않았다.

“섹……, 스요.”

소원우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에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했다. 주위엔 사람 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소원우는 속삭이듯 말했다. 섹스가 창피했던 게 아니라, 남의 섹스를 궁금해하는 게 창피했다. 그런데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어본 이유는 현의진이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했고, 소원우에겐 영상으로 채워지지 못한 의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누구 때문에 보게 됐는지는 분명했다. 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마음대로 소원우의 컴퓨터에 영상을 다운받았다. 영상 이름이 소원우가 신청한 강의 이름과 같아서 소원우는 의심하지 않고 영상을 재생했다.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신음 소리에 소원희가 방으로 찾아왔다. 가족 사이에도 예의를 지키자면서 그런 건 이어폰을 끼고 보라고.

성인이 되어서야 봤다면 충격이 덜했을지는 모르겠다. 새삼 소원우는 첫 음란물을 접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지금 소원우가 보고 있는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이 남자와 남자라는 것이다.

남자 둘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는 텍스트로만 찾아봤을 뿐, 영상이나 사진은 보지 않았다.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본능이, 남자에게 설레고 반응하는 몸이 싫어서 자신을 자극시키는 것들을 피해 다녔다.

기은범과 사귀면서 소원우는 자신의 세계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남자 둘이 벌거벗은 몸으로 껴안고 맞대는 건 자신에게도 곧 닥칠 일이었다.

“아하.”

경쾌한 감탄사에 소원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은범이랑은 이런 얘기 못하겠어요.”

“왜. 네 애인인데 못 할 얘기가 뭐 있어.”

“그래도요.”

준비라고 말했지만, 냉정하게는 극복이었다. 극복해야 했다. 타인에게 맨몸을 드러내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했다. 군대에서 다 같이 목욕을 하는 그 순간이 가장 버거웠다. 군장을 메고 20km를 행진하거나 이른 아침부터 운동장을 뛰고, 화생방에서 가스를 들이마시는 것보다도. 단체로 씻을 때마다 소원우는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했다. 자신의 맨몸이 누군가의 눈에 담기는 게 혐오스러웠다. 지금은 그때보다 한결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공포는 남아 있었다.

뭐든지, 작은 발톱 하나라도 예쁘다고 칭찬하는 기은범었지만, 목석 같이 굳어 있는 소원우를 보고 아무렇지 않게 관계를 이어 가진 못할 터였다.

“마음이 통하면 몸도 통해야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근데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기다려 줘야지. 그건 강요해선 안 되는 거야.”

“은범인 전혀 강요 안 해요. 키스하다가 제 엉덩이에 손이 닿기라도 하면 잽싸게 떨어지는 걸요. 제가 그런 걸 좀 아직 어려워하는 걸 아나 봐요.”

술이 필요한 대화였다. 실내는 답답할 것 같고, 사람들이 가까이에 없어야 했고, 대낮보단 밤이 나을 듯했다. 바람이 선선한 날이라, 동네 뒷산에 올랐다. 산책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긴 했지만, 이내 스쳐 지나갔다.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어요.”

기은범과의 스킨십이 진해질수록 소원우는 해야 할 일을 빠트린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현의진은 소원우가 남자와의 섹스를 두려워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남이 들으면 별것 아닌 고민일 수 있었다. 그래도 현의진은 소원우가 가진 두려움의 크기를 함부로 재지 않았다.

“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롯이 두 사람만의 일이니까 어떤 말을 해 주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 그냥 내 얘기를 예로 들자면, 나랑 원영이는 마음보다 몸부터 붙은 케이스야. 난 내가 남자랑 잔다는 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고, 남자끼리 하는 방법도 몰랐는데 그게 되더라. 신기하게. 원영이랑 잘 때 우리 둘의 미래가 어떨지 고민했겠어? 그저 하룻밤을 기분 좋게 보내기 바빴지. 몸부터 붙었으니까 우리 사이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

현의진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걸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현의진의 뒷말도 천천히 이어졌다.

”난 남자는 원영이가 처음이었는데, 원영인 아니었거든. 너랑 같지. 원영이는 나랑 사귀는 중에도 예전에 다른 남자랑 잤던 얘기도 막 하고 그랬어. 여길 빨아 줘서 좋았다느니, 이러이러해서 물건이 푹 죽었다느니. 내가 그런 얘긴 왜 하냐고 화를 내니까 기분 좋은 섹스를 위해 말한 거라더라. 황당하지?”

소원우에게 공감을 구하는 현의진은 웃고 있었다. 황당하고 어이없던 그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피식 하고 웃는 현의진의 얼굴엔 자조가 아니라, 연인을 향한 사랑이 녹아 있었다.

“전 그분이랑 사귀는 형이 대단한 거 같아요.”

소원우는 현의진의 사랑을 받는 성원영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사실은 성세가 헤어지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어. 나도 헤어져야 한다고 여러 번 생각했고. 근데 못 헤어졌어. 너도 알잖아.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거. 사귀면서 여러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원영이가 말없이 유학 갈 때까지 난 우리가 헤어질 줄 몰랐어.”

소원우는 현의진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별을 말하는 현의진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때의 현의진은 지금처럼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겪었을 고통을 소원우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현의진은 진지하게 얘기를 듣고 있는 소원우에게 미소를 지었다.

“콘돔과 젤을 사고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호텔에서 분위기를 잡는 그런 건 전부 부수적인 거고,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아주 뻔한 얘기야. 은범에게 네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 그게 네가 할 일이야. 두려운 마음도 숨기지 말고. 나한테 얘기하는 것처럼 은범이한테도 하면 돼. 두려운 건 당연해. 근데 원우야, 두렵다고 말을 하는 것도 용기더라고. 난 좀 늦게 알았어, 그걸.”

소원우는 일부러 현의진의 얼굴을 보지 않고 정면에만 시선을 두었다. 소원우가 현의진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이유는 현의진이 자신과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현의진이 괜찮다고 말해 주면 용기가 솟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원우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자신을 데리고 다니며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워 주던 사람은 지금도 자신의 붉어진 눈시울을 모른 척하며, 어깨만 툭 부딪쳐 왔다.

“중요한 거 하나만 더. 할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는 하지 마.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어마어마하게 좋지만, 왜 진작 안 잤을까 후회도 할지 모르지만, 서두르지 말고 정말 네가 원할 때 해.”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우야, 앞에 보여? 와. 야경 끝내준다.”

야트막한 뒷산은 오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다지 힘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소원우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한 만큼 힘겨운 산행은 아니었지만, 소원우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공기를 몸 안에 저장해 두고 싶었다.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소원우는 한참을 숨을 들이마셨다.

* * *

요 근래 권차경이 방문한 장소는 극히 적었다. 집과 학교를 포함해도 다섯 군데가 넘지 않았다. 제대로 요리해서 밥을 먹은 지도 꽤 되었다. 편의점에서 산 인스턴트로 대충 때우는 식이었다. 일상이 예전 같지 않은데 성적이 잘 나올 리는 만무했다. 권차경은 중간고사를 엉망으로 치렀다. 뭐라고 잔뜩 쓰기는 썼는데, 문제에 맞는 답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학점 관리가 엉망이라고 교수에게 한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술 한잔하자는 친구들을 단호하게 거절하고서 권차경은 여느 때처럼 카페로 향했다. 집에 가기 전에 그곳에 들르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됐다.

주인은 고개를 살짝 꾸벅이는 권차경에게 평소와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차경아, 굿 이브닝이야!” 하고 인사했다.

“네, 형. 잘 지내셨죠?”

“잘 지냈지. 얘는 어제도 봐 놓곤 며칠 만에 본 사람처럼 안부를 묻네.”

권차경은 말없이 미소를 짓고는 카운터 찬장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메뉴를 살펴보았다.

“차경아, 커피 마실 거야? 자몽청 담가 놓은 거 오늘 개시했는데 자몽차 마셔 볼래?”

맛이 괜찮다면서 적극 추천한다는 주인의 말에 권차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은 커피를 건너뛸까 했다. 아침부터 위가 쓰렸다. 불규칙한 식습관, 수면 부족. 안 봐도 원인은 뻔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쉬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권차경은 카페로 들어왔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가끔 저 멀리에서 소원우가 보이곤 했다.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있을 때가 많았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라 소원우의 연인이다.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권차경은 헛웃음을 뱉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고 조소하면서도 권차경은 소원우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돌리지 못했다.

권차경은 민트색 머그컵에 담긴 자몽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따뜻한 차에 위통이 조금은 달래지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한 모금씩 자몽차를 마시면서도 생각나는 건 오로지 소원우뿐이었다.

소원우는 잘 지낸다고 했다. 그리고 권차경도 그러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소원우는 무척 행복한 얼굴이어서, 너무 후련해 보여서 권차경은 오히려 소원우가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

루크는 이런 자신을 보면서 뭐라고 말을 할까 궁금해졌다. 망가진 모습에 흡족해하려나. 그러고 보니 어차피 루크를 떼어 낼 수 없다면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호주에서 도망친 건 오로지 루크 때문이었다.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별 차이가 없다면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고, 자신이 나고 자라 익숙한 제 나라로 돌아가는 게 나을 터였다. 그런데도 권차경은 망설여졌다.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건 아니었다.

권차경은 반쯤 남은 차를 그대로 두고 일어섰다.

“어? 가게?”

“어디 좀 가려고요. 형 차 잘 마셨어요. 맛있네요.”

“그래. 조심히 가. 운전 조심하고!”

권차경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한국을 떠나면 더 이상 소원우와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삶에 미련은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단 하나였다. 권차경은 차를 학교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한때는 자주 향했던 소원우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소원우의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소원우가 이미 집에 들어갔을 수도 있는데 권차경은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다. 소원우를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게 씁쓸했다. 우연한 만남을 바라고 소원우의 집 근처에서 긴 시간을 보낼 때마다 권차경과 소원우는 더 이상 연결된 게 없는 사이라는 냉정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 시간 즈음 지났을까. 작은 발소리에도 고개를 쑥 내밀어 사람을 확인하던 권차경은 소원우를 발견했다. 다행히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화를 하면서 걸어오는 소원우 앞에 권차경은 조심스레 자신을 드러냈다.

“……응. 은범아. 나 집에 다 왔어. 자기 전에 또 전화할게.”

권차경을 본 소원우의 걸음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전화를 끊을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던 소원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표정을 굳혔다.

“우리 이제 안 보는 거 아니었어?”

인사는 가차 없이 생략당했다. 바로 본론부터 말하는 소원우에게 권차경은 그래도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우리 그런 거 묻고 답하는 사이 아니잖아.”

싸늘한 대답이 들려왔다. 반갑게 맞이해 줄 거란 기대는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어도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차갑게 식은 소원우의 눈을 보고 있자니 위통이 다시금 자신을 공격하는 듯했다.

“원우야.”

“우리 만나지 말자. 응? 그냥 한 말 아니야. 나 좀 놓아주면 안 돼? 나도 제대로 살게 해 주라.”

빌러 온 사람은 권차경이었는데 소원우가 도리어 빌었다. 간곡히 부탁했다. 권차경은 얼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았다. 권차경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이대로 물러나 준다면 소원우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갈 터였다. 그러나 남겨진 자신은, 다시 또 버려진 자신은 어떻게 될까.

권차경은 소원우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루크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이기적이었다.

“원우야. 너한테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어. 미안해. 이렇게 사과해 봤자 달라지는 게 없을 테지만, 그래도 미안해. 내가 무지했고, 무식했고, 한심했어.”

권차경의 사과에 소원우의 눈이 크게 커졌다.

“난 너랑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었어. 네가 남자를 좋아하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우리 관계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았어. 너를 잃고 싶지 않았던 걸 너를 상처 주는 방식으로 표현해서 미안해.”

소원우가 자신을 좋아한단 걸 알고도 권차경은 모른 체했다.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소원우를 자신의 옆에 묶어 놓았다. 권차경은 그걸 원했다. 소원우가 자신의 옆에 있기를. 그래서 소원우를 좋아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소원우를 좋아해 줄 것처럼, 누구보다 아끼는 척 굴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소원우의 키스가 싫었으면, 소원우의 행동이 실망스러웠으면 거절하고 그 방을 나가 버릴 걸. 권차경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불을 밝히고, 소원우의 몸에 손을 댔던 건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더군다나 그날은 소원우의 생일이었다. 생일선물 하나 제대로 투척한 셈이다. 권차경이라는 쓰레기 선물을.

침이 자꾸 말랐다. 할 말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건조한 목은 말을 자꾸만 가로막았다. 언어는 마음을 완전히 대변해 주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처절하게 반성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은데 말로는 완벽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한다면 소원우의 용서를 받기 좀 더 나은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만, 권차경은 그것까진 말할 생각은 없었다. 루크와의 일을 방패로 용서를 구걸하는 건 비겁한 행동처럼 보였다.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권차경은 죗값을 치러야 했다.

소원우의 굳게 닫힌 입은 한참 동안이나 열리지 않았다. 권차경의 사과에 놀랐던 얼굴이 점차 평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면서 권차경은 불안해졌다. 두 번이나 사과할 기회를 놓치고 억지로 만들어 낸 만남이었다. 그 사과는 얼마든지 튕겨 나갈 수 있었다.

“오래전에 다 끝난 일이야. 이제 와서 그 얘기를 왜 하는 거야.”

이렇게.

발밑에 구멍이 있는 건 아닐까.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훅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데, 정말 제대로 서 있는 게 맞나. 두 다리 땅에 잘 딛고 있는 게 맞는 건가. 권차경은 막막해진 시야에서 소원우의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소원우의 얼굴이 사라지면 끝없는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원우야. 난 그저 사과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잘못했다고. 뒤늦게 깨달아서 미안하다고.”

권차경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소원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사과를 하면 나도 또 내가 한 일을 사과해야 해. 내가 키스했기 때문에, 네가 나한테 그랬던 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문제였어, 이러면서 난 또 자책하고, 죄책감에 젖어야 해. 알아? 그러니까 넌 사과하면 안 돼. 네가 나한테 저지른 일을 꺼내 버리면 난 그날 밤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어. 날 그렇게 만들고 싶은 거야?”

“아니, 아니야. 원우야. 그런 거 아니야.”

권차경은 다급하게 부정했다. 조바심이 일었다.

사과를 하면 안 된다니.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것 말고는 권차경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소원우는 자신에게 사과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럼 뭘 할 수 있는 거지. 권차경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사과하지 마. 너 사과 안 해도 돼.”

“……그럼 너랑 예전처럼 지내려면 뭘 하면 돼?”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잘못을 용서받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면 권차경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권차경은 자신이 매달릴 동아줄 하나가 내려오길 바랐다.

하지만 권차경의 질문을 들은 소원우의 얼굴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 찌푸려진 미간이 권차경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증명해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너도 알지? 예전처럼 지낸다니. 끊어진 관계를 이런 식으로 붙이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소원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주먹 쥔 손도 덜덜 떨렸다.

“원우야.”

무심코 권차경이 한 발 다가가자 소원우는 두 발 더 뒤로 물러났다. 좁혀지기는커녕 더 멀어진 거리를 보며 권차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동아줄을 향해 손을 내밀고 위태롭게 서 있는 권차경을 소원우는 무참히 밀어내며 물었다.

“너 혹시 아직 원희 좋아해? 그래서 이러는 거야?”

권차경은 말을 잇지 못했다. 권차경의 사과는 소원우에게 조금도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을 꺼내 보여 줄 수 없다는 게 사람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라는 걸 처절하게 깨닫는 중이었다. 권차경을 노려보는 소원우의 시선은 차갑고, 따갑기만 했다.

“아니야. 원희는 오래전에 마음 접었어. 정말이야.”

권차경은 열심히 부정했지만, 소원우는 권차경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날 보면 소원희가 생각난다며. 닮은 구석이 많다 그랬잖아, 네가. 소원희가 그리워서 또 날 이용하는 거 아니야?”

권차경은 말문이 막혔다. 과거에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건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반나절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는데, 제 나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한국에 오로지 루크에서 벗어나야겠단 이유 하나만으로 둥지를 틀었는데, 루크는 한국에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아마 한국에서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이었을 거다. 꿈인 걸 아는데도 얼굴을 때리는 거센 물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루크는 안간힘으로 물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권차경의 발목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저 어둠 속으로 같이 가야만 하는 것처럼 강한 손길이었다. 권차경은 악몽에서 벗어나자마자 발목을 확인했다. 루크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틀림없이 발목에 자국이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 권차경은 허탈해했다. 증거가 없이는 누구도 권차경의 증오를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권차경은 분명하게 체험했다. 그러나 죽은 루크가 벌인 일들은 권차경의 삶에만 살아 있는 증거였다.

차가운 물로 몇 번이나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각이었다. 권차경은 느린 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출결이 엉망이면 도로 호주로 가야 할지도 모르니 학교는 성실히 다녀야 했다.

힐긋힐긋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많았다. 전학생에다 호주에서 왔으니 흥미 본위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운동을 했느냐며 몸에 대해 품평해 대는 체육부 선배도 있었고, 몇 반인지도 모르는 동급생이 찾아와 무작정 사귀자고 말하기도 했다. 호주에서 사고를 쳐서 쫓겨났다느니, 부모가 이혼해서 한국으로 보내졌다느니 근거 없는 소문도 휩쓸었다. 권차경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원한 적 없는 관심은 부담스럽고, 거북하기만 했다.

소원우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이었다. 권차경을 보면서 눈을 빛내는 게, 꼭 동경하는 사람을 닮고 싶어서 훔쳐보는 듯했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소원우는 얼른 눈을 피하고 후다닥 자리를 뜨곤 했다. 경박하게 자신을 찔러 대는 가벼운 눈총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아마도 소원우가 자신을 훔쳐보는 것만큼 자신도 소원우를 훔쳐봤을 것이다. 소원우의 시선도 애정이었는데 남들과는 무엇이 달랐는지, 왜 소원우는 특별했는지 권차경은 알지 못했다.

계주 선수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권차경은 소원우를 발견했다. 달리기를 잘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계속 눈이 갔다. 승부욕이 없는 순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소원우에게 소원희가 말을 걸었다. 권차경은 그때 처음으로 소원희를 보았다. 소원희는 소원우와 꼭 닮은 분위기를 풍겼다. 단번에 남매란 걸 알아챘다. 소원희는 당찼고, 두려움이 없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루크가 질투할 만한 사람이었다. 소원희는 루크가 시기하던 사람과 비슷했다. 그런 소원희를 좋아하게 된다면 권차경은 루크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소원희가 긴 다리로 시원하게 뛰어 선두를 거머쥐었을 때, 권차경은 소원희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원희에 대한 감정은 의지로 시작된 거였다.

실제로 루크는 소원희를 좋아하는 동안 사라졌었다. 소원희를 좋아했기 때문인지, 소원우가 함께였기 때문인지 권차경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소원우도, 소원희도 권차경은 소중했다. 두 사람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권차경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소원희에게 여러 번 거부를 당해도 소원희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소원희가 너무 좋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소원우의 생일 이후로 소원희를 좋아하는 마음이 삽시간에 수그러들어서, 악몽을 다시 꾸면서도 소원희가 떠오른 적은 없어서, 이런 변화가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오히려 더 잊고 살았다. 소원희를.

“너랑 다시 만난 후에 단 한 번도 널 보면서 원희를 떠올린 적 없어. 오히려 원희를 보면서 널 생각했어. 네가 안 믿을 거란 걸 알아. 근데 정말이야. 어떻게 하면 네가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뭘 하면 돼? 어떻게 하면 날 믿어 줄 거야?”

“내가 널 왜 믿어 줘야 해?”

소원우는 권차경이 말을 하면 할수록 도리어 질려하는 듯했다.

“권차경. 우리 말하는 내용들이 다 옛날 얘기라는 거 알아? 나 정말 열심히 걸어서 이만큼 왔어. 여러 사람 도움 받아서 부지런히 여기까지 온 거야. 근데 넌 자꾸 날 과거로 옮겨 놔. 끔찍한 일을 자꾸 떠오르게 만들어, 네가. 알았어, 용서할게. 그거면 되지? 나 앞으로 너 욕 안 할게. 원망하는 것도 그만둘게. 그날 일은 너도 나도 다 잊어버리자, 그럼 둘 다 죄책감 안 들고, 편하게 살 수 있어. 아예 우리 함께 한 시간들 다 잊어버릴게.”

소원우는 이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날 잊겠다는데, 날 완전히 지운다는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살아, 원우야. 눈에 잡히는 건물이나 나무 같은 것들이 죄다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소원우를 붙잡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원우는 개운한 말투로 마무리했다.

“너 며칠 전보다 얼굴 더 안 좋아. 집에 들어가서 푹 자. 아침이 오면 홀가분하게 하루를 시작해. 그럼 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으니 아침이 와 봐야 무의미했다. 그러나 소원우는 비로소 원하는 끝을 맺은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잡아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도 쩍 굳어 버렸는지 안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열리지 않았다.

소원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위가 콕콕 쑤셔왔다. 머리는 어질어질했고, 눈앞의 세계는 빙글빙글 돌았다. 정신이 조금씩 흐려졌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원우는 거실 커튼을 살짝 들어 바깥을 살폈다. 대충 스윽 둘러보는데 권차경이 보이지 않았다. 소원우가 들어간 뒤에 권차경도 바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한시름을 놓았다.

권차경이 호주에 갔다는 말을 제이든에게 들었을 때, 소원우는 권차경이 그대로 호주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도록, 영원히 만날 일이 없도록. 권차경을 보고 옛일이 떠올라 아주 잠깐이라도 침울해지는 일이 없게 권차경이 한국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랬는데 이렇게 집에 찾아와 용서를 비는 권차경을 보니 자신이 꼭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권차경에서 두어 걸음 물러났을 때, 소원우는 권차경의 얼굴을 보았다. 권차경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한 해를 다 바쳐 어렵게 키운 꽃 한 송이가 바람 한 점에 똑 부러져 버리는 것을 목격이라도 한 듯한 표정. 권차경의 그 얼굴이 잊히지가 않았다.

찬물로 씻어야겠다. 소원우는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에 머리를 적시고 나면 머릿속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길 바라면서.

씻고 수건으로 몸을 닦을 때였다. 소원희가 욕실 문을 노크했다.

“소원우. 씻는 중이야?”

“다 씻었어. 옷만 입으면 돼.”

“아니야. 천천히 씻어.”

소원희는 괜찮다 했지만 소원우는 서둘러 옷을 입고 나왔다.

“화장실 써.”

“그거 때문에 부른 거 아니야.”

“그럼?”

“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서 내다봤는데 사람들이 우리 빌라 앞에 몰려 있더라구. 뭔 일인가 싶어서. 아, 앰뷸런스 오는 거 보니까 누가 쓰러진 건가 봐.”

소원희가 걱정스런 얼굴로 거실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원우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구급대원 두 명이 쓰러진 사람을 들것에 옮기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려져 들것에 실린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사람을 구급차에 태우기 위해 들것을 들어 올린 순간, 소원우의 눈에 운동화가 들어왔다. 흰 운동화 옆면에 그려진 파란색 로고. 소원우의 집에선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건 분명히 파란색 로고였다. 방금 전에 그 운동화를 봤었다. 소원우 앞으로 다가왔던 그 운동화를.

쓰러져 옮겨지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이 되자마자 소원우는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바로 내려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소원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 원우, 너 아는 사람이야?”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소원우는 서둘러 신발을 신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남은 계단 세 개를 한 번에 점프해 내려온 소원우는 구급차 문을 닫는 구급대원에게로 달려갔다.

“저도 태워 주세요.”

“친구분은 나중에 병원으로 찾아오세요.”

“쟤 호주 사람이에요. 가족이랑 친한 친구 다 호주에 살고, 쟤는 한국에 혼자 살아요. 가족들한테 연락이 간다 해도 한국에 당장 못 들어올 거예요.”

“네? 어……, 일단 타세요, 그럼.”

소원우는 냉큼 구급대원 옆에 앉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휴대폰도, 지갑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잡히는 대로 신발을 신었는데, 짝짝이였다. 한쪽엔 소원희의 슬리퍼를 신고, 젖은 머리는 바람에 날려 산발이었다. 그래도 누워 있는 권차경의 꼴보단 나았다.

어쩌자고 따라온 걸까. 소원우는 착잡한 얼굴로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사람이 권차경인 걸 확인하자마자 그 다음부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뭘 계산하거나 생각해서 움직인 게 아니었다. 카페 주인이 권차경이 쓰러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을 때 이미 소원우는 권차경의 보호자였다.

원치 않은 역할을 억지로 부여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두 번 다시 권차경을 만나지 않을 각오를 한 것도 맞았다. 그래도 자신을 찾아왔다 쓰러진 사람을 두 눈으로 보고 외면할 수는 없었다. 소원우의 말에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권차경이었다. 예전처럼 지내자는 말을 냉정하게 거절했으면서도 위태로운 권차경의 모습에 무심하지는 못했다. 권차경이 쓰러졌을 때 의연해야 했을까. 모르는 사람을 보듯 구급차를 그대로 보내야 했던 걸까. 굳이 답을 찾아보자면, 아마도 권차경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권차경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위 점막 손상이 심하고, 영양불균형도 극심해 몸에 이상이 왔다고 했다.

“영양불균형이요?”

소원우가 놀라서 되묻자 의사는 제때 끼니를 골고루 챙겨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권차경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원우는 자신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휴가를 받아 집에 오면 끼니를 거르고 무기력하게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소원우가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은 이유는 소원우가 튼튼해서가 아니라, 소원희와 윤찬희, 현의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차경의 옆엔 아무도 없었다. 그를 아끼는 가족과 친구들은 권차경이 수척해진 모습으로 병원에 실려 왔다는 것을 믿지 못할 터였다.

소원우는 전화를 빌려 소원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갑과 휴대폰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로비로 내려와 앉았다. 정신이 멍했다. 제이든에게 연락하면 권차경의 부모에게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바로 출발한다 하더라도 꼬박 하루는 걸릴 텐데. 한국에 올 때까지 권차경 혼자 놔둬도 되나. 몇 시간 자고 나면 일어날 거라는데, 그때까지 병실에 있는 게 나을까. 소원희가 도착할 때까지도 소원우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소원희는 20분 만에 도착했다. 소원희는 소원우가 부탁한 물건을 건네며 물었다.

“누구야? 아는 사람 누구?”

걱정하는 말투였다. 소원우는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권차경.”

소원희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걔가 왜 우리 집 앞에서 쓰러져? 넌 권차경인 거 어떻게 알았는데?”

소원희는 제이든의 친구가 권차경이란 것도, 권차경을 따로 만난 적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소원희가 예민하게 받아들일 걸 예상하기도 했지만, 더는 권차경과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소원희에게 권차경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대.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게? 넌 그 얘기 듣고 가만히 있었어? 됐다고, 싫다고 그랬어야지.”

격앙되어 목소리가 높아졌던 소원희는 이곳이 병원이라는 걸 인식하고 황급히 목소리를 죽였다. 흥분으로 들썩거리는 어깨까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넌 그냥 그 개소릴 듣고만 있었어?”

“나도 그럴 마음 없다고 했어.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하고 난 집에 들어온 거야.”

“잘했어. 잘 말했네. 다 해결된 거지? 집에 가자, 그럼.”

소원희가 벌떡 일어났다. 소원우는 자리에 앉은 채로 소원희를 올려다보았다. 소원우가 따라 일어설 줄 알았던 소원희는 소원우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안 가?”

“너도 알잖아. 권차경 가족들 호주에 있어.”

“그렇다고 네가 있어야 돼?”

날 선 물음에 소원우는 잠시 침묵했다. 소원희와 같은 생각을 자신도 했다. 자신이 병원에 남아야 하는 까닭에 대해서. 뚜렷한 이유로는 권차경의 보호자가 한국에 없다는 거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소원우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권차경 깨어나면 갈게. 이대로 집에 가면 계속 생각날 것 같아, 권차경이.”

소원희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한 번 열었다가 소원우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소원우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놀랐던 기색은 사라졌고, 평정을 찾았다. 소원우가 착잡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면 소원희는 강제로라도 소원우를 잡아끌고 갔을 터다.

“알았어. 나 혼자 갈게, 밤새 깨 있지 말고 너도 눈 붙여.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소원희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듯 인사를 건네고서도 몇 분은 더 있다 갔다. 나란히 앉아서 정면을 바라봤다. 소원우는 소원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소원희가 탄 택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후에 소원우는 로비로 돌아왔다. 병실로 올라가기 전에 제이든에게 메일을 보내려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메시지 두 통이 와 있었다. 기은범이었다. 자기 전에 전화하겠다고 했는데, 잘 시간이 되도록 소원우가 전화가 없으니 먼저 연락한 모양이었다. 기은범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10분 전에 메시지가 왔으니 기은범은 아직 깨어 있을 듯했다. 소원우는 기은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금방 연결됐다.

―형. 연락이 없어서 잠들었나 했어요.

받자마자 투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소원우의 전화를 받으려고 꾹 참고 있었다고 했다.

“미안. 연락이 늦었지.”

―아니에요. 이제 잘 거예요?

자세히 설명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게다가 기은범이 들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는 일이었다. 소원우가 병원에 남아 있을 걸 알면 같이 밤을 새우겠다고 나설 게 뻔했다. 기은범에게 권차경에 대해선 첫사랑이라고만 짤막하게 얘기해 두었다. 다 끝난 사이 때문에 새로운 관계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은범이 신경 쓸까 봐 소원우는 상황 보고를 다음으로 미뤘다.

“……응. 그러려고. 넌?”

―형이랑 통화도 했으니 저도 이제 자려고요. 형, 잘 자요. 내일 일어나면 전화해 주세요.

“응. 너도 잘 자.”

전화가 끊기자마자 소원우는 메일을 열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병명과 병원 이름, 병원 전화번호, 병원 위치를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제이든은 하루 종일 휴대폰을 쥐고 살았다. 답장이 올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라 로비는 한산했다. 병실에 있는 보호자 침대보다는 덜 푹신해도 밤을 보내는 장소로는 오히려 로비가 편할 것이다. 그래도 거기로 가야 했다. 소원우는 몸을 일으켰다. 잠이 부족했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1인실로 잡았다. 다인실에 비해 비싼 값을 치러야 할 테지만, 권차경에겐 잠을 푹 잘 수 있는 공간이 다른 것보다 우선이었다.

소원우는 조용히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면서 빛이 어둔 병실 안에 스며들었다. 권차경이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소원우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의자에 앉아 권차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편으론 자신의 집 앞에서 쓰러진 게 다행이었다. 만약 카페에서 쓰러졌더라면 주인은 아연실색해서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수업 시간이었거나 소원우가 연락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면 주인만 고생할 뻔했다.

권차경이 할 얘기가 있다고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소원우는 권차경을 믿지 못했다. 권차경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 거짓일 것만 같았다. 그토록 다정하던 얼굴로 자신을 짓밟았으니 권차경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쳤다. 더는 권차경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예전처럼, 친구였을 때처럼 지내고 싶다는 권차경의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그게 권차경에게 무슨 이득이 될까 싶었다. 한숨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권차경이 일어날 때까지 고민은 오로지 소원우의 몫이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나 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소원우는 눈을 떴다. 병실에 간호사가 와 있었다.

“권차경 님, 바이탈 잴게요.”

“네.”

간호사가 권차경의 이름을 불러 깨웠다. 푹 잠이 들었었는지 간호사가 이름을 여섯 번은 부르고 나서야 권차경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열렸다.

간호사가 권차경의 혈압을 재는 사이 소원우는 주먹을 쥐고 딱딱하게 뭉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왼쪽 오른쪽 어깨를 번갈아가며 몇 번 두드리는 걸론 큰 차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피로를 풀기 위해 뻐근한 허리를 숙였다가, 뒤로 젖혔다가를 반복하던 소원우의 눈이 권차경의 얼굴로 향했다.

권차경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파악하는 모양인지 팔을 간호사에게 맡긴 채로 고개만 이리저리 돌렸다. 이윽고 권차경의 눈이 소원우에게로 닿았다. 권차경의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권차경 님, 갑자기 일어나시면 안 돼요! 누워 있으세요.”

간호사의 말에도 권차경은 몸을 일으켜 침대와 서너 걸음 떨어져 있는 소원우에게로 손을 뻗었다. 팔을 쭉 뻗어 봐야 소원우에게 닿을 리 없는 거리인데도 권차경은 안간힘을 썼다. 다섯 손가락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소원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팔을 휘적거리던 권차경은 암만 해도 소원우에게 닿지 않자 아예 침대를 벗어나려고 했다.

간호사가 보다 못해 소원우를 불렀다.

“보호자 분, 이리로 오셔서 저 좀 도와주실래요?”

간호사의 요청에 그제야 소원우는 제자리를 벗어났다. 소원우가 권차경의 손이 닿는 거리 안에 들어서자 권차경의 격한 움직임도 점차 멎어 들었다.

“누워 있어. 검사 남았다잖아.”

“안……, 갈 거지?”

권차경의 목은 완전히 잠겨 있었다. 쇠를 긁는 소리가 났다. 권차경은 갈라진 목소리로 어떻게든 소원우를 붙들어 두려고 애를 썼다.

“안 갈 테니까 가만히 있어.”

도로 베개에 머리를 붙이면서도 권차경의 시선은 소원우만 좇았다. 잠시라도 놓치면 큰일 날 것처럼 권차경의 눈은 소원우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아침은 7시에 올 거예요. 쉬세요.”

할 일을 마친 간호사가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았다. 두 눈이 마주친 채로 침묵이 이어졌다. 하나는 누워서, 하나는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싸움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어 소원우가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의자로 가려던 참이었다.

“원, 원우야. 가지 마.”

권차경이 조급히 소원우를 불렀다.

“가는 거 아니야. 의자에 앉으려고.”

“거기 말고, 여기에 앉으면 안 돼? 여기 침대 있는데.”

권차경이 환자의 침대 바로 옆에 있는 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 그곳은 권차경의 손에 잡히는 자리였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권차경의 말을 들어주는 게 좋을 테지만, 소원우는 거절하고 뒤로 물러났다.

“아니. 난 저기 앉을래.”

아쉬운 기색이 권차경의 얼굴에 가득했다.

누운 상태로는 소원우와 눈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권차경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결 나았다.

“아침 식사 올 때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았어. 더 자.”

권차경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해.”

소원우는 권차경에서 시선을 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제이든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혹시나 잘못 해석한 부분은 없는지, 제이든의 메일을 꼼꼼하게 두 번을 읽고 나서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상황을 일러 주었다.

“너 위경련이래.”

“그래?”

권차경은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위가 다 헐었다더라. 앞으로 몸 관리 잘해야 된대. 만성되면 고생한다고.”

“응.”

“그리고 제이든이 네 부모님께 연락드렸어. 모레 아침에 한국 도착한대. 어머니는 못 오시고, 아버지만 오실 거래.”

“아…… 안 오셔도 되는데. 오지 말라고 연락드려야겠다. 혹시 내 휴대폰 어디 있는지 알아?”

권차경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대 옆에 있는 서랍을 열자 휴대폰과 소지품들이 보였다.

“그냥 오시라고 해. 너 몸 많이 안 좋은데 가족이 옆에 있어야지.”

“이미 많이 괜찮아졌어. 아버지 오실 즈음엔 다 회복될 걸. 한창 바쁠 시기라서 그래. 다음에 오시라고 하면 돼.”

권차경은 고집을 부렸다. 하나뿐인 아들이 아프다는데 한걸음에 달려오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도 이해갔고, 아픈 와중에도 부모를 배려하는 권차경의 모습도 안타까웠다.

“그래도…….”

“원우야.”

권차경이 소원우의 말을 막았다.

“내가 걱정되면…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면 안 될까? 가장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도, 마주치면 인사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가벼운 안부 정도 묻는 그런 관계 같은 거.”

“…….”

“시간이 비면, 어…… 딱히 할 일 없고 만날 사람도 없으면 밥 한번 먹는, 그 정도 사이로 지내면 안 돼?”

권차경은 간절한 눈빛으로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권차경이 말한 ‘그 정도의 사이’는 소원우의 주변에 아주 많았다. 대학 동기, 고등학교 동창, 군대 후임, 과외 학생. 권차경의 주변에도 차고 넘칠 터다. 그 정도의 관계는.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난 여전히 남자를 좋아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소원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소원우를 냉혹하게 밀어낸 사람은 권차경이었다. 혼자 남겨진 방에서, 권차경이 덮고 잤던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원우가 얼마나 울었는지 권차경은 모른다. 소원우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울분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괜찮아? 너 내가 남자 좋아하는 거 싫어하잖아. 질색하잖아.”

“그때는 네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으면…… 날 좋아할 일이 없으면 너랑 영원히 친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어. 매일…… 후회해. 내가 왜 그랬나 하고.”

“…….”

“……날 미워하거나 내 욕을 해도 상관없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오래 걸려도 되니까……, 옆에 있으면 안 될까? 그것만. 제발, 원우야.”

소원우가 용서해 주지 않는 한 권차경은 루크를 증오하듯 자기 자신을 증오하면서 평생 살아야 했다. 잘못인 걸 깨닫는 순간부터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소원우가 군대에 간 동안 권차경은 나름대로 삶을 살았다. 밥도 잘 먹었고, 사람도 잘 만나고, 여자친구도 사귀고.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태평하게 살 수 없었다. 그게 되지 않았다.

“그럼 말이야. 만약 내가 또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너 어떻게 할래? 나 남자 좋아하니까 너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예전처럼.”

소원우는 일부러 금기와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권차경은 말이 없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얼어붙은 권차경을 보며 소원우는 빈정거렸다.

“거 봐. 소름 돋지? 끔찍하지?”

소원우는 한껏 권차경을 몰아붙였다. 그 밤에 있었던 일을 소원우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기은범을 만나 겨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기은범의 손이 민감한 구석에 닿으면 흠칫 흠칫 떨리는 것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소원우는 기대하는 눈으로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발기한 자신을 보고 비웃었던 입이 뭐라고 말하나 보자 벼르면서.

냉담한 소원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던 권차경은 한 박자 늦은 대답을 꺼내었다.

“그럼 난 너랑 사귈 거야.”

“뭐?”

예상치 못한 답변에 소원우는 경악했다.

“너 쓰러지고 나니까 판단력까지 떨어진 거야?”

“내 실수로 또 한 번 널 놓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나를 다시 좋아해 주면 난 고마워하면서 너랑 사귈 거야.”

“너 동성애자 아니잖아. 날 그런 식으로 좋아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그래도 너라면 괜찮을 거야.”

소원우는 말도 안 되는 답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권차경이 제대로 생각하고 한 말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인 자신과 사귈 수 있다니. 소원우는 그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의심을 품은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던 소원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그럼 확인해 보자.”

“확인?”

“어, 확인. 너도 내 말 못 믿고 나 시험했잖아. 기억나지?”

권차경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날의 일이 권차경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터지던 입이 한순간에 막혔다. 대답이 쉬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이긴 했다. 소원우는 조소했다.

권차경은 흔들거리는 눈을 하고서도 소원우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더는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소원우는 권차경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옇게 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네가 날 용서해 준다면 뭐든 할게.”

그깟 용서가 무어라고. 용서를 얻는다고 전처럼 똑같이 지낼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그걸 모르는지 권차경은 각오가 대단했다. 어쩌면 권차경은 착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죄책감에 시달려서 둘이 함께했던 시간을 잔뜩 미화해 놓았는지도.

소원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 남자친구 만나 볼래?”

“어?”

안정을 찾았던 권차경의 눈이 또다시 미약하게 흔들렸다.

“너랑 다시 친구로 지내게 된다면 셋이 마주칠 일이 없지는 않을 거 아니야. 내가 동성애자여도 괜찮다면 은범이랑 같이 한 번 만나자. 우리 둘이 네 앞에서 손을 잡고, 애정 어린 시선을 주고받아도 네가 꺼림칙해하거나 거북해하지 않으면 나도 네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게.”

기은범은 늘 권차경에 대해 묻고 싶어 했다. 권차경과는 완전히 끝낸 관계였기에 소원우는 ‘첫사랑’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기은범은 그 대답만으론 충분히 의문이 해갈되지 않았음에도 더 묻지는 않았다. 소원우가 말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연인에게 지난 과거를 물으면 실례라는 건 연애가 처음인 소원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은범은 소원우의 전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권차경과 친구가 된다면 기은범에게 권차경의 얘길 안 할 수는 없었다. 한쪽은 붙잡고, 한쪽은 매몰차게 돌아서는 장면을 기은범에게 두 번이나 보였으니 기은범의 궁금치도 한계에 달했으리라.

“응, 원우야.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

권차경은 순순히 수락했다. 소원우가 예상했던 음울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확인이라는 핑계로 다음 만남만 기약하게 된 셈이다.

관계 변화의 양상을 보이며 대화는 끊어졌다.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던져 볼 수는 있겠지만, 소원우도 권차경도 입을 다물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2년, 떨어져 지낸 시간은 그보다 더 되었으니 대화를 이어 가는 일도 고단한 업무 같았다. 밤을 지새우는 동안 뭘 먹은 게 없는데도 속이 더부룩했다. 소원우는 의자에 앉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6시가 되자 가방을 챙기고 갈 준비를 했다.

“나는 그만 가 볼게.”

“어? 벌써?”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소원우의 얼굴만 바라보던 권차경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나 오전 수업 있어. 집에 갔다가 씻고 바로 학교 가야 해.”

병실을 떠나도 되는 일과를 대며 소원우는 일어났다. 6시를 갓 넘겼다. 서두르면 학교에 늦지는 않을 터였다.

“갈게.”

“원우야.”

다인실보다는 넓은 1인실이라도 문까지의 거리는 길지 않았다. 순식간에 문 앞에 다다른 소원우를 권차경이 멈춰 세웠다.

“왜?”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 친구인 거야?”

조심스럽게 묻는 질문에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고, 터벅터벅 권차경의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도로 꺼내 권차경에게 건넸다.

“번호 입력해.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 너 완전히 회복되면 그때 만나.”

“네 건 안 알려 줘? 내가 연락하면 안 되는 거야?”

“빨리 만나려고 너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나았다고 거짓말 할 거잖아. 몸 망가지긴 쉬워도 회복하는 건 어려워. 내가 알던 그 얼굴로 돌아올 즈음에 연락할게.”

소원우는 휴대폰 화면에 찍힌 열한 자리 숫자를 바라보았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소원우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숫자들이었다. 어떤 건 기억하려 애를 써도 쉽게 잊히면서 어떤 것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생생하게 살아남는 걸까.

권차경의 휴대폰 번호 뒷자리는 권차경이 한국에 온 날짜였다.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서핑보드를 선물로 받고 환한 얼굴로 휴대폰 번호를 바꾸러 갔다. 한국에 온 뒤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다면서 그날을 특별하게 기억해 두겠다고 했다.

며칠 뒤에 소원우도 권차경을 처음 본 날로 휴대폰 번호를 바꾸었다. 숫자의 의미를 묻는 권차경에게 소원우는 비밀이라고 둘러댔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휴대폰 뒷자리와 자신의 전학일을 조금도 연상시키지 못했다. 소원우에게는 그토록 특별했던 날이 권차경에겐 별 대단치 않은 날이었을 터다.

완벽하게 기억하는 번호라 휴대폰에 권차경의 이름을 남겨 놓고 싶지 않으면 굳이 저장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소원우는 권차경의 이름을 입력했다. 열한 자리 숫자가 커다랗게 뜰 때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휴대폰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했다. 단순하게 이름만 뜨는 게 더 나았다.

유난히 길었던 밤이었다. 집에 가서 씻고, 아침을 먹고, 맞다. 빌린 책 반납하는 날이구나, 까먹지 말고 챙겨야겠네. 그리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은범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녁에 만나자고 해야지.

소원우는 병실을 떠나면서 할 일을 세어 보았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의 아침일 터였다. 그렇지만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아침이기도 했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소원우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상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병원을 떠나면서 내린 소원우는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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