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6화 (7/14)

남남 2권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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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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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6.

강의가 끝나자 소원우는 책을 챙기고 뒷문으로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강의실 앞문에서 사람이 빠져나오는 강의실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보였다. 뒷모습이었지만, 소원우는 단번에 누군지 알아차렸다. 최근 꽤 많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어! 원우 형.”

그러더니 소원우를 보자마자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기은범. 또 왔어? 진짜 끈질기다, 너도.”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닌데 기은범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 약속 있으세요? 없으면 저랑 저녁 먹어요.”

기은범은 지난주에도 저렇게 물었다. 그 지난주에도 똑같이 물었다. 소원우는 두 번 다 거절했다. 이쯤 하면 포기하겠거니 했는데, 기은범은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이미 윤찬희, 현의진과 셋이 술을 마시기로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기은범과 저녁을 먹는 것은 불발이었다.

“그럼 약속 장소까지만 같이 가면 안 될까요? 형이랑 더 있고 싶은데.”

간청하는 기은범을 소원우는 더 거절하지 못했다. 가는 내내 기은범의 입은 쉬지 않았다. 뭐가 그리 궁금한지 죄다 질문이었다.

“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아?”

“형한테만 그래요. 궁금한 게 많으니까.”

기은범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 소원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원우와 비슷하게 도착할 거라더니 가게 앞에서 윤찬희를 딱 만났다.

“소원우! 왔냐? 옆엔 누구?”

“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

소원우는 적당히 둘러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기은범과의 첫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다.

“우연히 알게 됐다니. 어떻게?”

윤찬희의 질문에 기은범과 소원우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느꼈는지 윤찬희는 현의진이 오려면 한 시간이 남았으니, 얘기나 좀 나누자면서 기은범을 자리에 앉혔다.

처음엔 주저하던 기은범도 막상 자리에 앉고 나서는 어쩌다 소원우를 만나게 됐는지 풀어놓았다.

소원우가 연애를 하고 싶다 한 이후로, 현의진은 정말로 누군가를 소개시켜 주었다. 현의진이 소개시켜 준 사람은 외모나 성격, 어느 하나 뒤처지는 게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밥을 먹으며 얘기는 계속 오갔지만, 그뿐이었다. 데려다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소원우는 가게 앞에서 만남을 끝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소원우에게 기은범이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소원우가 소개팅을 할 때, 기은범도 소원우의 옆 테이블에서 소개팅을 하는 중이었다. 기은범은 마주 앉아서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가 소개팅을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남자 둘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눈치가 빨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은범도 소원우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은범은 소원우를 보자마자 반했다고 했다. 게이인 걸 알고는 운명이라 생각했고, 만약 소개팅이 잘 안 된다면 꼭 말을 걸어야지, 다짐했다고.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소원우는 기은범에게 휴대폰 번호도, 이름도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기은범은 가게에서 얼핏 들었던 소원우의 학교로 무작정 찾아갔다. 전공도, 학년도 모르니 드넓은 캠퍼스에서 소원우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기은범은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소원우를 만나러 학교에 찾아왔는지는 비밀이라 했다. 적어도 한두 번은 아닌 듯했다.

그랬는데 정작 두 사람이 마주친 곳은 소원우의 학교가 아니라 동네의 편의점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걸 알고 기은범은 역시 인연이 맞다며 다시 한번 휴대폰 번호를 물었다. 그 뒤로 기은범과 몇 번 만나서 얘기도 나눴고, 통화도 종종 했지만, 소원우는 그 이상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오, 진짜로? 네가 보는 눈이 있구만. 우리 원우 아주 괜찮지.”

일전에 소원우에게 기은범에 대해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다단계나 사이비가 분명하다며 만나면 그냥 무시해 버리라고 했던 윤찬희는 금세 기은범과 죽이 맞아 절친한 친구처럼 술을 주고받았다.

“은범아. 난 네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아.”

“찬희 형,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원우 형에게도 잘 말해 주세요. 원우 형은 아직도 제가 미덥지 않은가 봐요.”

소원우는 기은범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노릇하게 잘 익은 삼겹살을 입에 넣었다. 고기를 잘 굽는다고 자신 있게 집게를 들었던 기은범은 소원우의 접시가 비지 않도록 소원우의 접시에 고기를 수북이 쌓았다.

“동생. 나도 좀 줘. 원우만 주지 말고.”

윤찬희가 자신의 빈 접시를 흔들었다. 먹기 좋게 잘라 놓은 고기들은 모조리 소원우의 접시에 안착한 상태였다. 기은범은 불판 위에서 익고 있는 기다란 고기를 서둘러 잘랐다.

윤찬희의 적극적인 공세로 기은범은 계속 자리를 지켰다. 현의진도 기은범이 궁금했는지 그냥 보내지 말고 자신이 올 때까지 계속 붙잡아 놓으라고 했다.

현의진은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은 더 늦게 도착했다.

“미안. 원영이가 초밥이 먹고 싶대서 집에 갖다 주고 오느라고 늦었어.”

한 살 많은 연인의 이름을 현의진은 사랑스럽게 불렀다. 현의진은 얼마 전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어졌던 사람과 다시 합쳤다. 그 얘기를 들으려고 만나기로 했던 거였다.

“선임이었다던 그분 맞죠?”

“어떻게 다시 만난 거예요?”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선임이 현의진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알고 있는 소원우와 윤찬희로선 둘의 재회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선임이 전역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은 원수지간처럼 보였다. 선임과 후임의 관계만 아니었다면 몸싸움이 몇 번이나 일어났을 터였다. 선임이 현의진을 괴롭히는 방법은 다양했는데, 그중 제일 황당한 방법은 자신의 자위를 지켜보게 하는 거였다. 선임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 인상을 찌푸리는 현의진을 보며 선임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전역 일주일 앞두고 선임은 현의진을 또다시 화장실로 불렀다. 그날 이후로 아무도 모르게 둘의 관계는 바뀌었다.

현의진은 선임을 만나기 위해 부모님과 연까지 끊었는데 선임은 도망쳤다. 현의진의 사랑이 너무 무거워서 무섭게 느껴진다는 말만 남기고서 선임은 유학을 떠났다. 허탈한 이별이었다.

다신 마주칠 일 없을 것 같던 선임을 만난 곳은 군대 동기의 장례식이었다. 선임을 보고도 현의진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뜨려던 현의진을 선임이 뒤쫓아 왔다. 잘못했다 비는 선임을 현의진은 5개월이 넘도록 무시했다.

“근데 왜…….”

질문을 다 끝내지 못하는 소원우에게 현의진이 웃으며 말했다.

“원영이랑 헤어졌을 때는 원영이만 아니면 될 것 같았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 보니까 원영이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게 확실해지더라. 어쩔 수 없었어.”

“와……. 형 완전히 일편단심이네요.”

“일편단심은 무슨. 저당 잡힌 거지, 뭐. 너희들은 나처럼 되지 마.”

말과는 달리 현의진은 행복해 보였다.

술자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현의진은 몇 잔 주고받지 않고 그만 가야겠다고 했다. 목적지를 생략해도 어디로 가야 된다는 건지 짐작이 됐다.

현의진을 보내고 택시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기은범과는 같은 방향이라 윤찬희를 먼저 택시에 태웠다.

소원우는 집으로 가는 내내 시선을 창밖에만 두었다. 기은범은 두어 번 말을 걸었다가 소원우가 단답형으로만 대답하자 소원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택시는 집 앞 골목 어귀의 편의점 앞에서 멈추었다.

“형. 제가 저녁 자리에 껴서 화났어요?”

이대로 돌아가면 소원우와 또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기은범은 소원우를 붙잡고 물었다.

“형, 저는 진심이에요. 점점 더 형이 좋아져요.”

기은범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랑 만나 보면 안 돼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형에게 알려 주고 싶어요.”

윤찬희와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장난기가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말투였다.

그때였다. 골목 안쪽에서 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다른 사람이 들어도 될 얘기는 아니라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기은범도 묵묵히 소원우의 앞에 서서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던 사람은 시간이 흘러도 골목 어귀를 지나가지 않았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하고 고개를 돌린 소원우는 눈을 크게 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권차경이 거기에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로 소원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든에게서 권차경이 호주에 갔다는 얘기는 들었다. 제이든이 기뻐하는 걸 보고 일이 잘 풀렸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제이든에게만 해당되는 듯했다. 두 달 만에 보는 권차경의 얼굴은 소원우가 알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권차경은 얼굴 살이 다 빠져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둠 속에서도 초췌해진 얼굴이 뚜렷이 드러났다.

소원우와 권차경은 대치하듯 서 있었다. 권차경의 대학교 근처이긴 했으나 이 골목은 학교와 이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은 걸음을 옮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우 형.”

너무 낯선 모습이었던 터라 권차경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소원우는 기은범이 부르고서야 눈을 거두었다.

기은범은 영문도 모른 채 권차경과 소원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그냥 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둘 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소원우는 한숨을 내쉬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대로 권차경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원우야.”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예전에 들었던 상냥한 음성 그대로였다. 한참 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권차경의 목소리는 어느새 낯설어졌다. 소원우는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반응하지 않았다. 멈춰 서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소원우의 뒤를 따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원우 형.”

“원우야.”

소원우를 다급히 부르는 두 개의 목소리가 소원우의 발목을 잡았다. 집이 코앞인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소원우는 뒤를 돌아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물었다.

“왜 왔어?”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소원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돌려보낼 생각으로 그냥 꺼낸 말이 아니라, 정말로 권차경과는 할 얘기가 없었다. 오래전에 끝난 관계였다. 마주 서서 눈을 맞출 이유가 없는 그런 관계였다. 무슨 얘기가 오가든지 소원우에게 득이 되진 않을 터였다. 너무 많이 아팠고, 회복하는 데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같은 단계를 또 밟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하는 말이라도 들어줘.”

권차경은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축였다.

“싫어.”

망설임 없이 거절이 떨어지자 권차경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져갔다.

“원우 형.”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기은범이 소원우를 불렀다. 소원우는 기은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은범은 소원우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우야.”

경쟁이라도 하듯 권차경도 소원우를 불렀다. 이러다 자신의 이름만 계속 들어야 할 것 같아 소원우는 냉정히 뒤돌아서며 말했다.

“기은범, 이리와.”

소원우의 뒤를 바짝 쫓는 발소리가 경쾌했다. 소원우는 빌라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종 모양 버튼을 누르자마자 유리문이 슥 열렸다. 소원우와 기은범이 유리문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원우야. 잠깐만. 집에 같이 가는 거야? 왜?”

권차경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도 하는 사람이었나. 오늘따라 권차경은 소원우가 알지 못하는 얼굴을 보였다. 권차경을 좋아했던 시기였더라면 잠이 푹 들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었다가 일어나면 바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한가득 음식을 차려 놓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권차경의 지친 얼굴을 봐도 조금도 안쓰럽지 않았다.

“넌 그만 돌아가. 그리고 다신 오지 마.”

유리문은 조용히 닫혔다. 기은범은 소원우를 따라가면서도 흘긋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그만 봐.”

“아. 네.”

권차경을 피하려다 보니 기은범을 집에 들이게 됐다.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권차경을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소원희가 아직 집에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금방 안 갈 것 같은데요.”

거실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밖을 살피던 기은범이 말했다.

“아직도 거기 있어?”

“네.”

소원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10시가 넘었다. 권차경은 당장 침대에 누워야 할 것 같이 초췌한 얼굴이었다. 이대로 밖에 계속 서 있다가는 쓰러질지도 몰랐다. 게다가 소원희가 11시면 집에 올 터였다. 집 앞에서 권차경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은범도 돌려보내야 했다. 소원우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간만에 꽉 찬 수업을 듣느라 하루가 빠르게 흘러갔다. 긴 시간 깨어 있는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도 피곤했다.

“너 그냥 가야겠다. 이제 원희 올 거야. 밖에 나가면 걔한테도 집에 가라고 말해 줄래?”

기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는 듯 다부진 끄덕임이었다. 그러나 당장 집을 나서지는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남은 것처럼 소원우의 앞으로 걸어왔다.

“물어봐도 말해 주지 않을 테니까 누구인지는 안 물어볼게요. 대신 아까 제가 했던 말에 대답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형 만난 이후로 형 생각밖에 안 해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아요.”

아까 했던 말. 소원우는 권차경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기은범의 질문을 떠올렸다. 한 번 만나 보면 안 되겠느냐 했다. 자신에게 반했다고, 좋아한다고. 처음으로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다. 때가 되면 연애해야지, 생각은 줄곧 했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그려 본 적은 없었다.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마음을 전하는 일이 이렇게 간단할 수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남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이렇게 쉬운가. 빠르게 질주하는 마음은 금방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소원우는 기은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절할 거라면 안 듣고 그냥 갈게요.”

소원우의 표정에서 어두운 결말이 보였는지 대답을 기다리겠다던 기은범은 소원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만약 권차경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터였다. 길게 말을 주고받을 것 없이 집 앞에서 깔끔하게 기은범을 돌려보냈을 테지만, 상황은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너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맞아요. 솔직히 그래요.”

기은범은 단번에 수긍했다.

“근데 한 번만 봐도 느낌이 올 때가 있잖아요. 더 만나 보고 싶고, 알아보고 싶고. 형이 그래요.”

“난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널 봐도 아무 느낌 안 들어.”

“괜찮아요. 좀 더 만나 보시면 절 좋아하게 될 거예요.”

“어떻게 장담해?”

“전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정말 잘할 거고, 외롭지 않게 할 거고,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줄 거예요. 힘들고 지치면 제가 떠오르도록.”

기은범은 자신 있게 말했다. 꼭 선거에 나가 한 표를 부탁하면서 당찬 포부를 밝히는 모양새였다. 어찌나 당당해 보이는지 정말 모든 것이 기은범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너도 날 모르고, 나도 널 모르는데 어떻게 연애가 시작돼? 난 가볍게 사랑을 말하고, 연애를 시작하고, 그런 거 못 해.”

“무겁게 시작한다고 해도 끝이 늘 좋은 건 아니잖아요. 제가 여기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형이 너무 좋고, 그 마음을 없앨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당장 연애하자는 게 아니라, 형에게 저를 알릴 기회를 주세요.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요?”

소원우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굉장히 무거운 거였다. 사소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쳐 났다. 권차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사랑은 소리 없이 쌓여 갔다. 너무 많이 쌓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아주 멀리 와 버린 상태였다. 포기가 힘들었다. 마음을 접자고 다짐해 봐도, 아무리 던지고 깨트려 봐도 마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사랑은 버겁고 새까만 것이 됐다. 미래를 상상하면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혹은 뿌연 안개로 뒤덮여 갈피를 잃는.

소원우는 자신이 권차경에게 고백했을 때가 생각났다. 주저하면서 털어 놓은 고백은 무참히 짓밟혔다. 그럴 만도 했다. 동성 친구가 고백했을 때의 결과는 뻔했다. 좋은 결말을 기대한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어두움 속에서 입술을 갖다 댄 걸로 소원우는 절망을 경험했다.

그러나 기은범은 빛 아래 서서 소원우에게 당당히 좋아한다고 했다.

권차경이 집 앞에 있지 않았더라면, 다시금 옛일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더라면 소원우는 기은범의 고백을 가볍게 듣고 넘겨 버렸을 것이다. 소원우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권차경은 과거에 남겨 두고, 그로부터 조금씩 멀리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러려면 변화가 필요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변화.

소원우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알겠어.”

“알겠다는 건……”

기은범은 저가 만나 보자고 호기롭게 말해 놓고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소원우의 손을 꽉 붙잡았다.

“와아……. 형 진짜, 제가 진짜 정말 잘할게요.”

“일단 좀 더 만나 보겠단 거지, 연애하자는 말이 아닌데.”

“곧 연애하게 될 거예요.”

기은범은 싱글싱글 웃었다.

11시가 머지않았다. 시간을 확인한 소원우는 서둘러 기은범을 보냈다.

“만약 안 가겠다고 버티면 원희 곧 올 거라고 말해.”

기은범은 밖에 서 있는 이가 누군지 궁금한 얼굴이었지만, 본인이 말했던 대로 묻지 않았다.

“잘 자요, 형.”

“응. 조심히 들어가.”

소원우는 다시 소파에 앉으려다가 거실 창문으로 향했다. 커튼을 아주 살짝만 들어 작은 틈으로 밖을 쳐다보았다. 소원우가 집에 들어온 지 몇 십 분이 더 흘렀는데도 권차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은범이 권차경에게로 가는 게 보였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듯싶더니 기은범이 먼저 자리를 떴다. 권차경이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작은 틈이라 소원우가 보일 리는 없을 텐데도 권차경의 눈이 이쪽을 보는 것 같아 소원우는 황급히 물러섰다.

한참 뒤에 소원우가 조심스럽게 밖을 다시 쳐다보았을 때 권차경은 그 자리에 없었다.

* * *

어둠에 잠긴 방에서 권차경은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구석구석 피로가 묻은 몸은 잠을 원했지만, 권차경은 눈을 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지난날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같은 장면 앞에서 권차경은 또다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때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한 번만 더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면 완전히 다른 결정을 내리리라.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고, 권차경에게 결정을 바꿀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소원우의 얼굴만 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차에서 나올 계획은 없었다. 골목 어귀에서 소원우의 모습이 얼핏 보이자 권차경은 핸들을 붙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소원우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선 남자의 시선은 소원우를 향해 있었다. 편의점의 불빛이 남자의 얼굴을 환히 밝혔다. 권차경은 저도 모르게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남자의 얼굴을 소원우가 보지 않았으면 했다. 소원우를 보며 다정히 웃는 그 얼굴을 소원우가 못 보게 하고 싶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권차경이 몇 번이나 들락거렸던, 단잠을 맛보았던 따뜻하고 포근한 그 집으로.

어디에선가 루크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권차경은 예정된 날보다 하루를 더 호주에 머물렀다. 제이든은 런던으로 떠나고, 다른 친구들도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서 권차경은 홀로 루크가 묻혀 있는 묘지로 향했다. 퍽 긴 시간을 말없이 서 있었다. 할 말을 정리하고 루크를 찾은 것은 아니라서 권차경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무심코 건조한 입술을 문 순간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입술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피에 닿은 혀가 알싸했다. 까끌까끌한 입안에서 나온 말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권차경은 루크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떠나 달라는 거래를 위해 꺼낸 말은 아니었다. 겁에 질려 나온 말이었을 터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가 소원우에게 악몽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 아마도 그게 무서웠던 것 같다. 깨닫자마자 어스름한 새벽녘에 루크를 찾아갔던 걸 보면.

그러나 권차경은 소원우를 마주한 순간, 자신은 이미 소원우의 악몽이 됐다는 걸 알게 됐다. 소원우는 예전처럼 권차경을 보고 웃어 주지 않았다.

사실은 더 버텨 보고 싶었다. 밤새 서 있어 볼까 했다. 소원우는 추운 날, 밖에서 동냥하는 걸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여윳돈을 바구니에 넣어 주곤 했으니 권차경이 찬 바람 속에서 밤새 서 있으면 불쌍히 여겨 밖으로 나와 주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권차경은 돌아서야 했다. 집으로 들어갔던 남자는 소원우의 말을 전해 주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소원희와 마주치는 것을 염려했다. 소원우을 기다릴 때만 해도 권차경은 소원희와 마주친다는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소원희를 좋아했을 때, 소원희가 권차경을 냉정하게 대해도 권차경은 괜찮았다. 소원우가 옆에 있었으니까. 권차경이 괴롭지 않도록 소원우가 감싸 주었으니까. 소원우가 옆에 있었을 땐, 소원희에게서 상처받을 일이 없었다. 애초에 상처받을 만큼 소원희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던가. 묵직하게 내려앉은 의문은 먹은 것도 없는 위를 난도질했다.

소원우는 소원희를 떠나 자신의 옆에 있어 주지 않을 것이다. 소원희가 권차경을 비난하고, 욕을 해 대도 소원우는 가엾게 바라봐 주지 않을 것이다. 그 현실은 권차경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는지 두통이 극심했다. 머리인지, 가슴인지 고통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권차경은 알지 못했다.

* * *

소원우가 신청한 교양 수업은 ‘취업과 진로’와 ‘스페인어’였다. 교양 수업은 전공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전공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배워야 할 걸 생각하면 끔찍하기까지 했다. 복학했으니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으나 개강 직후 의욕은 수그러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함부로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한국의 대학은 전쟁터였다. 손에 익은 무기든, 처음 보는 무기든 일단 잡고 있어야 했다. 이름난 대학에 들어왔다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는 않았다.

소원우는 열람실에 앉자마자 두꺼운 전공 책은 책상 구석에 세워 놓고 스페인어 교재를 폈다. 다음 수업까지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수강 정정 기간에 어떻게든 공강 시간을 줄여 보려고 했지만, 스페인어 강의는 화요일 마지막 수업밖에 없었다. 별 수 없이 그대로 시간표를 고정해야 했다. 그래도 긴 공강이 힘겹지만은 않았다. 무료할 줄만 알았던 세 시간은 과제를 하다 보면 순식간에 지나가곤 했다. 시험 기간이 아니더라도 도서관엔 늘 사람이 넘쳐 났다. 듬성듬성 난 빈자리는 금방 채워졌다.

스페인어 강사는 쪽지 시험을 좋아했다. 과제를 쪽지 시험으로 대체한다고 했다. 일부 사람들은 중간·기말고사 외에 또 시험을 보는 게 싫다고 불평했으나 소원우는 오히려 쪽지 시험이 좋았다. 어릴 적부터 배운 영어와는 달리 스페인어는 모든 게 낯설었다. 그래도 흥미가 생겼다. 소원우는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히 그 생각만 하고 있다가 시간표를 짜기 위해 교양 과목들을 둘러보던 소원우는 스페인어 강의를 보고 고민도 않고 시간표에 넣었다. 덕분에 학교에 늦게까지 붙잡혀 있어야 했지만, 다른 어떤 수업보다 스페인어 수업이 제일 재미있었다.

회화를 하든, 문법을 익히든 단어를 외우는 건 가장 기본이었다. 외워야 할 단어가 수두룩했다.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라서 쪽지 시험을 보면서 수준을 점검받는 게 좋았다. 소원우는 오늘 쪽지 시험에 나올 진도까지 몇 번을 훑어보고도 한 번 더 반복하던 참이었다. 무음으로 해 둔 휴대폰 화면이 탁 켜졌다.

[형. 이따 집에 오면 몇 시쯤 돼요?]

기은범이었다.

[7시 좀 넘을 것 같아.]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문자 끝에 붙은 하트가 존재감을 뽐냈다. 소원우는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만나 보자고 한 지 두 달 즈음 됐을 때, 소원우는 드디어 기은범과의 관계를 연인으로 정의했다. 세상 모든 연인이 다 똑같은 형식을 갖추고 똑같은 단계를 밟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작이 빠른지, 느린지, 혹은 성급했는지 신중했는지 막연하게 결론지을 순 없었다. 단지, 소원우는 기은범이 편했다. 방금 일어나서 머리가 몽롱할 때 전화벨이 울려도 소원우는 긴장하지 않았고, 뭐 먹고 싶으냐는 질문에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대신 구체적인 음식 이름을 댔다. 기은범과 함께 있을 때 신경을 곤두세울 이유가 없었다. 편안하고 좋았다. 그 느낌을 설명하자면 잠을 푹 자고 나왔는데도 잠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연애를 한다면 이런 사람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은범이 주는 편안함을 소원우는 거부할 수 없었다.

소원우는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들고 기은범의 집으로 향했다. 소원우의 집에서 도보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은범의 집은 원룸이었지만, 보통 원룸보다는 두 배는 넓었다. 이 근방에선 제일 넓은 평수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기은범은 학교 기숙사에서 살다가 작년 말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편하게 앉아요, 형.”

소파에 발을 올리고 느긋하게 앉아있던 소원우가 피식 웃었다.

“이미 편하게 앉아 있어.”

“뭐 마실래요? 커피?”

“음. 내가 전에 준 허브티 남아 있지? 그걸로 주라.”

주방에서 “네.”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원우는 소파에 기대 앉아 따뜻한 차를 기다렸다. 소파 옆 서랍 위에 빔 프로젝터가 놓여 있었다.

기은범의 말에 의하면 연애는 별 게 아니었다. 말이 좀 바뀌는 건데, 이를 테면 식사 약속이 데이트가 되고, 영화 관람도 데이트가 되고, 나란히 서서 거리를 걷는 것도 데이트가 된다는 거였다. 친구와도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다 데이트였다. 물론 밖에선 손도 잡지 못하고, 밀착해 앉지도 못한다는 큰 단점이 있지만.

기은범의 집을 찾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감기에 걸린 기은범에게 죽과 허브티를 주러 왔던 게 첫 번째였다. 이전에는 죽만 끓여 주고 조용히 나왔으니 정확히 따지자면 제대로 된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은범은 종종 집에서 편히 영화를 보자고 했다. 벽이 흰 색이라 빔을 쏘면 커다란 스크린이 된다고, 성능 좋은 스피커도 사다 놨으니 언제든 놀러오라는 기은범의 제안에 소원우는 확실하게 대답을 않다가 이번에야 가겠다고 말을 꺼냈다.

“저녁은 뭐로 시킬까요?”

기은범이 배달 요리가 나와 있는 전단지를 소원우에게 건넸다. 영화를 보면서 입이 심심하지 않게 맥주와 안주거리를 잔뜩 사 오긴 했다. 그래 봐야 과자류라 배를 채울 만큼은 아니었다.

“냉장고에 뭐 있어? 재료 있으면 내가 만들 수 있는데.”

소원우의 말에 기은범이 멋쩍게 웃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소원우는 고개를 쭉 내밀어 냉장고 안을 쳐다보았다. 재료를 넣어 두기에 냉장고 크기가 작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냉장고엔 물과 우유, 요거트뿐이었다. 냉동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집에서 밥을 안 해먹어서요.”

민망한지 기은범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간식거리 말고 음식 재료 몇 가지 좀 사올 걸 그랬다. 소원우는 아쉬워하면서 배달책자를 뒤적거렸다. 팔랑팔랑 종이를 넘겨봐도 확 끌리는 건 없어서 포테이토피자 한 판과 치킨 한 마리를 시켰다.

배달이 오는 동안 기은범은 영화 볼 준비를 했다. 영화 보는 게 취미라던 기은범은 소장하고 있는 영화 타이틀이 수십 개였다. 책장을 쭉 살펴보던 소원우는 장르가 다른 영화 하나가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거…….”

소원우는 히어로물과 액션 사이에 껴 있는 이질적인 타이틀 하나를 손가락으로 빼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는 아니었다. 소장을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시중에 풀린 물량도 적었다. 소원우도 어렵게 구한 물건이었다.

“어떻게 구했어?”

“여기저기 다 알아봤죠. 인터넷 검색해 보고.”

연지상 감독의 최근 영화가 흥행하면서 감독의 전작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늘었다. 관객 천만을 돌파한 감독의 상업 영화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특수 촬영 장면과 최첨단 CG 기술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소원우는 아쉽기만 했다. 연지상 감독의 영화라면 몇 번이나 영화관에서 가서 관람했지만, 이번 영화는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거 초창기 작품이라 구하려면 꽤 애를 먹었을 텐데.”

소원우는 빼낸 타이틀을 앞뒤로 한 번 훑어보고는 도로 꽂아 넣었다.

“형이 좋아하는 영화라고 했잖아요.”

기은범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이 좋아하는 거라면 저도 좋아요.”

기은범은 직설적이었다. 감정을 결코 숨기려 들지 않았다. 적극적인 애정 표현에 당황하는 건 언제나 소원우였다.

“너는 참…….”

어색하게 눈을 돌린 소원우는 다시 소파로 가 앉았다.

“형이 얼른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더 많이 말하고 싶은데.”

기은범은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작동시키며 중얼거렸다. 중얼거린다기엔 큰 목소리였지만, 소원우는 못 들은 체하고 화면을 비추는 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집 영화관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거나 소리 나는 음식을 먹으며 관람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기은범과는 영화 보는 시각이 달라 의견을 나누며 보다 보니 영화 한 편이 금세 끝이 났다. 딱 한 편만 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소원우는 쉽사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기은범은 피자와 치킨을 먹느라 손도 대지 못한 간식거리들을 꺼냈다.

“이거 먹으면서 하나 더 볼래요?”

“응.”

아쉬움을 달래 줄 제안을 소원우는 단번에 수락했다. 다음 날엔 1교시부터 수업이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발을 올릴 수 있는 리클라이너 소파는 기은범의 집에서 가장 비싼 가구였다. 안락함을 내세운 소파는 비싼 값을 톡톡히 했다. 더군다나 성인 남자 세 명이 편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널찍했다.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기은범이 아니었더라면 소원우는 소파의 장점을 더 잘 느꼈을 것이다.

“손잡아도 돼요?”

기은범은 손바닥을 보이며 소원우에게 내밀었다. 소원우가 손을 뻗으면 소원우의 손가락 사이로 당장 얽혀 들 것처럼 기은범의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오직 정면의 스크린만 시야를 밝히는 공간에서 소원우는 팔걸이에 올라와 있는 손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닿아 보고 싶은 욕심에 실수처럼 손가락을 툭 건드리거나, 괜히 악수를 청해 욕망을 채우곤 했다. 손을 한 번 잡아 보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소원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손바닥에 손을 올려놓았다. 손바닥이 닿자마자 다섯 개의 손가락이 서로 엉켜들었다. 영화 한 편은 그렇게 손을 꼭 잡고 봤다. 다른 손으로 서로에게 음료수를 넘겨 주고, 입에 과자도 넣어 주면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시각은 자정을 넘겨 있었다. 학교에서부터 계속 휴대폰을 무음으로 하고 있던 터라 소원희에게서 전화가 온 줄도 몰랐다. 부랴부랴 짐을 챙기는 소원우에게 기은범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자고 가면 안 되는 거죠?”

침대 되게 큰데.

질문에 붙은 뒷말에 소원우는 기은범의 등 뒤로 보이는 침대를 흘긋 쳐다보았다. 기은범의 말대로 침대는 두 사람이 나란히 정면으로 누워도 어깨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컸다.

“다음에. 다음엔 자고 갈게.”

말을 하고 있는 소원우도 ‘다음’이 언제쯤인지, 정말 바로 다음 만날 때인지 아니면 기약 없는 저 먼 날인지 알지 못했다. 기은범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그러나 기은범은 아쉬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또 권하지는 않았다.

소원우는 신발을 다 신고 나서 두 팔을 벌렸다. 소원우보다 10센티나 큰 사람이 소원우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소원우는 기은범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조금이 아니라 많이도 기다릴 수 있어요.”

“고마워.”

“‘다음엔’ 다른 말로 해 주기에요.”

기은범이 기다리는 말은, 소원우도 정말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마음은 많이 기운 것 같은데 몸이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았다. 기은범이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고 싶고, 표현해 주고 싶은데 막상 그러려고 하면 온몸이 경직되고 얼어붙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장담해 줄 사람이 없었다.

기은범은 소원우의 품에서 한참 벗어날 생각을 안 하더니 자신도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은범아. 너네 집 1층이잖아. 나오지 말고 여기서 인사하자.”

“형네 집까지 같이 걸으려구요.”

“우리 집, 여기서 10분도 안 걸려. 데려다줄 필요…….”

소원우는 말을 하다 뚝 끊었다. 이전에도 이런 실랑이를 했다. 그때마다 기은범은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 같이 있자.”

소원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은범은 가벼운 걸음으로 소원우를 따라나섰다.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소원희는 보통 새벽 한두 시쯤에야 잠을 자니 야참이라도 먹나 했다. 소원우는 주방 쪽을 쳐다봤지만 소원희는 그곳에 없었다. 소원우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원희는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소원우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소원희는 계속 등을 보였다.

“거기서 뭐 해?”

소원우의 질문에 그제야 소원희가 몸을 돌려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왔어?”

인사를 건네는 소원희의 얼굴이 어딘가 어색했다. 소원우는 소원희가 바라보고 있던 거실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 봤구나.

저녁 내내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도 기은범은 헤어지기 싫다며 투정을 부렸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기은범에게 어떻게 하면 집에 갈 거냐고 물었더니 기은범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손등에 뽀뽀해 달라고. 말은 시원하게 뱉어 놓고 뒤늦게 소원우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 귀여워 소원우는 기은범의 왼손과 오른손 양쪽에 뽀뽀를 해 주었다.

분명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가족에게 아무렇지 않게 보여 줄 장면은 아니었던 터라 소원우는 뒷머리를 긁었다.

“사귀고 있어. 네가 원하면 자리 마련할게. 걔도 너 되게 만나고 싶어 하거든.”

“당연히 보고 싶지. 소원우의 첫 남자친구인데. 내가 말하기 전에 진작 소개시켜 줬어야지, 너무 늦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소원희는 다리 아프게 서서 얘기할 게 아니라 좀 앉자며 소원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소원희는 소원우를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맥주와 구운 오징어를 내놨다.

“맥주 마시게? 너도 내일 일찍 나가야잖아.”

“그래도 술 한 잔 마시면서 들어야지. 가족의 사랑 얘기를 맨입으로 들을 수 있나.”

적극적으로 술자리를 준비하는 소원희에게 소원우는 방금 전까지 배가 부르도록 맥주를 마시고 왔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소원우. 너…….”

“어?”

“언제 말하려고 했어?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거야?”

“찬희는 알아.”

“왜 나한텐 말 안 했는데?”

소원희는 섭섭한 말투로 물었다. 친구도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이 몰랐다는 게 퍽 서운했던지 보란 듯이 맥주캔을 찌그러뜨렸다.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만난다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도 남자였으니까. 소원우 스스로도 자신이 동성애자란 걸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좋아했던 사람이 권차경 하나라서 남자를 좋아하는 건지, 권차경만 특별했던 건지 소원우도 확신할 수 없었다.

소원희는 권차경만 아니라면 어떤 남자든 괜찮다고 말했었지만 권차경이 싫었던 거지, 말 그대로 모든 남자들을 다 환영한다는 뜻은 아닐 터였다. 더 이상 소원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소원희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그 사람이 소원희가 두 팔 벌려 반길 만한 사람이길 바랐다. 기은범의 애정은 만난 시간에 비해 거대하고 깊었지만, 소원우는 아직 기은범과의 관계를 확신하지 못했다.

“좀 더 만나 보고 소개시킬까 했어. 상대가 남자라서 신중하게 돼. 특히 넌 가족이니까. 다 봤잖아,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굴었는지.”

소원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캔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소원희는 소원우가 망가져 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소원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원망하면서도 소원우에게는 모진 말을 하지 못했다. 소원희도, 윤찬희도 소원우가 권차경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소원우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꺼내기 힘든 얘기다.

문득 그 밤이 떠오르면 소원우는 눈을 질끈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머릿속을 공허하게 비워 놓고 나면 곧 뿌옇게 흩어지곤 했다. 상처는 아물었고, 흉터가 남았다. 고작 흉터 따위다. 흔적만 남은 흉터로는 소원우를 다시 망가뜨리지 못할 것이다.

소원희는 캔을 감싸고 있는 소원우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연애 어려운 거 알아, 원우야. 나한테 왜 말 못했는지도 이해가 가. 근데 그거 너한테만 어려운 거 아니야. 나한테도 어렵고, 나도 어떻게 연애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힘들고, 실패도 두려워. 미래를 장담하는 건 나도 못해.”

소원희는 여전히 신보훈을 좋아했다. 이제 성적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는데도 소원희는 신보훈에게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연애에는 때가 있었다. 타이밍이 지나고 나면 오래전의 추억을 현실로 끌어오는 게 쉽지 않았다.

“너 스물셋이야. 네가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아. 그리고 나도 알면 얼마나 알겠어? 사귀다 잘 안 되더라도 너를 위로하고, 너랑 같이 슬퍼할 자리를 나한테 줘야지. 내가 네 누나고, 가족인데.”

소원희는 말을 끝내자마자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더니 소원우에게 물었다.

“그래. 날짜 언제로 잡을래?”

행동력 하나는 정말 빨랐다. 소원희는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장난기 섞인 말투로 소원우를 재촉했다. 소원우가 기은범에게 연락하는 사이 맥주를 한 캔 더 마신 소원희는 금세 잠이 올 것 같지 않다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기은범의 답장은 곧바로 도착했다. 소원희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원우의 말에 기은범은 반색하며 되도록 빨리 날을 정하자고 했다.

[두렵지 않아?]

[뭐가요?]

[소원희 만나는 거.]

[전 너무 좋아요. 형의 가족이잖아요. 형의 세계에 비로소 내가 포함된 것 같기도 하고. 전 완전 좋은데요.]

소원우는 기은범의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얘는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나. 낯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매만지면서도 소원우는 얼굴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흔들거렸다. 조금씩, 조금씩 기은범에게로 기울고 있는 듯했다.

소원우는 방에서 옷가지를 챙겨 들고 거실로 나왔다. 욕실로 들어가려는 소원우를 소원희가 불러 세웠다.

“원우야.”

“응?”

“혹시 오늘……, 카페 갔었어? 버스 정류장 쪽에 있는, 창가에 긴 테이블 있는 카페.”

대학가 근처라 거리에 카페가 즐비했다. 프랜차이즈 카페와 개인 카페가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창가에 긴 테이블이 있는 카페도 한두 군데는 아니었다. 소원우는 그중 가장 자주 가던 카페를 떠올렸다.

“옆에 미용실 있어?”

“어, 맞아. 파란색 간판 달려 있고.”

“오늘은 안 갔는데?”

“……그래?”

소원희는 말을 흐렸다. 안심하는 표정 같기도 하고, 곰곰이 뭔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왜?”

“어, 그게……, 너 그놈…….”

“어?”

“아니, 아니야. 얼른 씻고 나와, 나도 씻게. 너 기다리느라 나도 아직 안 씻었어.”

소원희는 말을 돌리며 소원우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소원우를 꾹꾹 누르는 손길이 꽤 억세서 소원우는 소원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 * *

5월부터 이른 더위가 찾아왔다. 한낮의 볕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카디건이나 셔츠를 걸치고 있다가도 낮이 되면 상승하는 기온 때문에 옷을 벗어야 했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는데 언제부턴가 봄과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기가 힘들어졌다. 추위가 물러나자마자 더위가 걱정됐다. 지금 날씨를 보아 하니 올 여름도 뜨겁게 타오를 모양이었다.

두 시간 후면 오늘 강의는 끝난다는 기은범의 연락에 소원우는 집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카페로 향했다. 시원한 실내에서 커피를 마시다 보면 두 시간이야 훌쩍 지나갈 것이다. 카페들은 많았지만, 공부하기 좋은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죄다 만석이었다.

소원우는 빈자리가 없이 꽉 들어찬 실내를 괜히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한동안 발을 들이지 않았던 곳이 떠올랐다. 내부가 넓지 않고, 사장님이 직접 운영하는 개인 카페라 공부 목적보다는 담소를 나누거나 편하게 쉬고픈 손님들이 많이 가는 곳이었다. 사장님이 직접 원두를 고르고, 로스팅까지 하기 때문에 커피 맛이 상당히 좋았다. 탄 맛을 싫어하는 소원우의 취향에 부합한 곳이기도 했다. 카페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부지런히 드나들었기에 자연스레 주인과 인사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그 집의 향긋한 커피 향이 그리워져 소원우는 걸음을 빨리했다. 부디 빈자리가 있길 바라면서.

멀찍이에서 카페의 파란색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은 투명한 유리창이었다. 자리가 있는지 살펴보려 했지만, 빛에 반사돼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가 보자는 생각에 소원우는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고작 몇 분 걸었다고 목이 탔다. 소원우는 손부채를 부치며 카페 앞에 다다랐다.

출입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소원우는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가끔 소원우가 앉기도 했던 자리다. 바깥 풍경을 살피면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그 자리에 앉았다. 책도 보지 않고, 휴대폰도 가방 안에 넣어 둔 채로. 멍하게 바깥을 보고만 있어도 신기하게도 스트레스가 멎곤 했다.

창가에 앉은 사람은 고개를 돌려 주인이랑 얘기하는 탓에 아직 소원우를 보지 못했다. 소원우가 이대로 뒤돌아서면 소원우가 왔었다는 것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소원우는 돌아갈까 말까 잠깐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출입문 손잡이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에게 아끼는 공간까지 넘겨줄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원우가 포기한 건 좋아하는 마음 하나였지 향긋한 커피나 자주 가던 공원, 아침에 자주 방문했던 영화관 같은 일상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면서 문 위에 달린 종이 딸랑 소리를 냈다. 소원우는 바로 카운터로 걸어갔다. 부지런히 가게 안을 돌아다니던 주인이 소원우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소원우!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너무 오랜만에 오는 거 아니야? 다른 단골집 생겼어? 형 섭섭해.”

소원우를 반기는 주인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성악을 전공했다던 주인의 목소리는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의 귀에도 선명하게 잘 들렸으리라. 군대에 간 후론 한 번도 들르지 않았으니 주인의 말대로 정말 간만이었다.

“복학하고, 학교에 적응하느라 바빴어요. 앞으론 자주 올게요, 형.”

“너 그 말 지켜야 한다. 매상 때문에 하는 말 아니고, 네가 내가 내린 커피 잘 마시는 거 보면 뿌듯하고 좋단 말이야. 자주 오던 손님이 발길 뚝 끊으니까 내 커피가 맛이 없나, 문제가 있나 어찌나 불안해지던지. 너 언제 오나 하고 차경이한테 만날 물었어.”

괜히 등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당사자가 없으면 주인에게 “그래서 걔가 뭐라고 그래요?”라고 물어봤을 테지만 권차경이 뒤에 앉아 있으니 소원우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소원우가 이 카페에 데리고 온 사람은 권차경뿐이었다. 소원우가 혼자 카페에 오는 날엔 주인은 권차경의 안부를 물었다. 권차경이 혼자 왔을 때도 그러겠거니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확연히 달랐다. 종종 카페에 왔으면 형에게 진작 좀 일러 줄 것이지. 소원우는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주인에게 말했다.

“형. 저 오늘의 커피로 주세요. 마시고 갈게요.”

“알았어. 정성을 다해 커피 내릴 테니까 앉아 있어. 간만에 얼굴 봐서 좋다야.”

“저도요.”

소원우는 인사를 끝내고 자리로 가 앉았다. 창가 자리만 비어 있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안쪽에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었다. 테이블이 의자보다 낮아 앉아서 커피를 마시기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원우에겐 그 자리도 감사했다.

소원우는 휴대폰으로 기은범에게 카페 위치를 전했다. 시험이 끝나는 대로 기은범이 오기로 했다.

커피 향기가 가게 내부에 퍼졌다. 이 향이 그리웠다. 커피의 맛보다도 더. 카페들 모두 고유의 커피 향을 품고 있겠지만, 모든 곳이 다 같은 감상을 주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특별히 사랑했던 곳엔 언제나 추억이나 아련한 풍경 같은 게 묻어 있는 법이다.

소원우는 주인의 커피를 기대하고 있다가 주인이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걸어오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원우는 쟁반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직접 가져다주는 걸로 바뀌었어요?”

원래는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고 카운터에서 말하면 직접 받으러 가는 방식이었다.

“바뀌었으면 왔다 갔다 하느라 내 살이 다 빠졌겠지. 난 커피 뽑는 것만도 바빠.”

주인은 자신의 역할을 강조했다. 마치 살을 못 뺀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좁은 공간에서 한정된 걸음으로 걸어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듯이. 하긴, 방식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손이 빈 직원을 두고 주인이 나와 서빙하지는 않을 터였다. 소원우가 그런데 왜? 하는 눈빛을 보내자 주인은 냉큼 소원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눈치가 없진 않아.”

소원우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와 달리 주인은 조용히 속삭였다.

“둘이 싸운 거야? 응? 보니까 인사도 안 하더만.”

궁금한 기색이 가득한 주인은 얘기를 들어도 티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주인이 직접 커피를 가져다주었을 때부터 티가 났다는 거다.

소원우는 흘긋 창가 쪽을 쳐다보았다. 소원우의 자리에선 벽에 가려져 권차경이 보이지 않았다.

“형. 저희 사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이제 쟤한테 제 안부 물어보지 마세요.”

“진짜야? 진짜? 싸운 거야? 왠지 차경이 대답이 썩 시원스럽진 않았어. 내가 너 잘 있느냐고 물어보면 차경이는 그냥 잘 있을 거라고 말했거든. 좀 이상하긴 하잖아. 잘 있을 거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소원우의 안부를 권차경에게 계속 물어봤던 주인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소원우에게 말했다.

“원우 너는 낯빛이 참 좋다.”

“어, 그래요?”

“응. 얼굴도 뽀얗고, 표정이 환하네. 원우는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내 마음이 놓인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군대 다녀오고, 여행도 좀 하고요. 굳은 머리 열심히 풀고는 있는데 힘드네요.”

“에이, 원우 똘똘한 거 다 아는데. 금방 따라잡을 거야. 힘내.”

“네. 고마워요, 형.”

주인은 오랜만에 만난 소원우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할 말이 끝났으면 그만 일어나도 될 것 같은데 주인은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입만 달싹였다. 우물쭈물 망설이면서 연신 입술을 혀로 축이던 주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차경이 몰골이 말이 아니던데. 괜찮은 거야?”

소원우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소원우가 말하지 않자 주인이 성급하게 자신의 질문을 설명했다.

“아니, 나는, 내가 왜 물었냐면. ……차경이가 자주 오거든, 여기. 너도 들어오면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차경이 옛날 얼굴이 아니야. 내가 차경이 처음 봤을 때 한 말 기억나? 내가 지금껏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잘생겼다고 했잖아. 지금 안 잘생겼다는 건 아니고, 뭐라고 해야 되지? 도박으로 전 재산 다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눈빛, 그런 눈빛을 하고 앉아 있는 거야. 걱정돼서 뭔 일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거 없대. 그냥 아무 일 없대. 근데 아무 일 없는 사람 얼굴이 아니잖아.”

주인은 권차경을 보고 굉장히 놀란 모양이었다. 소원우도 집 앞에서 권차경을 봤을 때 그랬으니 주인이 왜 놀랐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누가 봐도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이 아닌데, 잘 지낸다고만 하니 궁금증만 커졌을 것이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답해 줄 사람도 없었는데 권차경과 붙어 다니던 소원우가 나타나자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듯했다.

그러나 소원우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권차경이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왜 충혈된 눈으로 힘겹게 앉아 있는지 소원우도 알지 못했다.

“저도 아무것도 몰라요.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요. 형도 봤다시피 이제 인사도 안 하는 사이고요.”

“그렇구나. 뭐, 둘의 문제니까 내가 참견할 수는 없지. 그냥 차경이가 걱정돼서 물어봤어. 차경이 자주 오거든, 여기. 일주일에 서너 번은 와. 어떨 땐 밤늦게까지 있다 가기도 해. 오래 있어서 미안하다고 커피를 몇 잔이나 시킨다구. 내가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지만, 하루에 몇 잔씩 매일 마시는 걸 권장하지 않아. 안 되겠다 싶으면 내가 알아서 차로 바꿔서 주거나 주스 갈아 주는데, 올 때마다 얼굴이 안 좋아져서 혹시 쓰러지면 어쩌나 싶어. 내가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아…… 네.”

소원우는 어차피 안 보일 줄 알면서도 또 흘긋 창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인의 말에 소원우는 얼마 전에 소원희가 물었던 게 생각이 났다. 창가에 앉아 있는 권차경을 보았을 것이다. 소원우가 그 카페에 종종 갔던 걸 소원희가 모르는 것도 아니니 노파심에 소원우에게 확인 차 물어본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가만히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만약 쓰러지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정말? 그래도 돼?”

“쓰러지면 119에 먼저 신고하고요.”

소원우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저한테 연락 주시면 제가 권차경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볼게요. 다 외국에 있어서 당장 한국으로 오기는 힘들겠지만요.”

주인은 소원우의 말에 안심한 얼굴로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원우는 그저 주인이 자신에게 연락할 일이 없도록 권차경이 무탈하도록 바라야 했다.

주인은 내내 고민했던 게 말끔히 해결되어 후련한지 소원우에게 케이크 하나를 무료로 주었다. 주인이 직접 만든 거라 했다. 적당히 달달한 크림이 드립커피와 궁합이 잘 맞았다.

접시를 다 비우기 전에 기은범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원우는 카페로 들어오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기은범도 권차경의 얼굴을 봤었다. 권차경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자신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기은범에게도 그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달려오는 모양인지 아까까지만 해도 단과대학 앞이라던 기은범은 이제 정문을 막 나왔다고 했다. 소원우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쟁반을 건네며 주인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했다. 그러고 바로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려던 소원우는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 탓이었다. 아주 작게 소원우의 이름이 말라 터진 입술 사이에서 들린 듯도 했다.

“집에 좀 가. 형이 걱정하잖아.”

아마도 뒤에서 주인이 쳐다보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괜한 말을 해 버린 것은.

“……응. 오늘은 이만 갈게.”

권차경이 앉아 있던 테이블엔 커피 잔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긴 시간을 때울 만한 교재나 책, 노트북, 심지어 휴대폰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소원우의 말에 미련 없이 자리를 뜨겠다는 사람은 여기 가만히 앉아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소원우는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한마디를 보탰다.

“건강 챙겨. 쓰러지지 않게.”

권차경이 아니라 순전히 주인을 위해 하는 말이었다. 권차경을 걱정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러니 권차경의 대답은 소원우에게 중요치 않았다. 소원우는 제 할 말만 하고서 문을 열고 가게를 나왔다.

100미터쯤 걸었을까. S대학 쪽으로 걸어가는 소원우의 귀에 밭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고르는 호흡이 불규칙하고, 힘겨워 보였다. 운동장 한 바퀴를 가뿐하게 뛰던 사람 같지 않았다. 안간힘으로 달리는 소원우를 제치고서 선두를 차지했던 사람은 금방 평탄한 호흡을 찾지 못했다.

“……원, 우야.”

소원우의 이름이 띄엄띄엄 불렸다.

소원우는 한걸음에 달려온 권차경을 보고 카페에서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걱정하든지 말든지 그냥 모른 척할 걸 그랬다. 이렇게 쫓아와 자신을 부를 줄 알았으면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후회와는 별개로 힘겹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외면하기는 힘들어서 소원우는 발을 멈추고 권차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할 말이 있어.”

거친 숨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그날 큰 잘…….”

“원우 형!”

누군가 권차경의 말을 끊었다. 기은범이 달려오고 있었다. 소원우는 그제야 들고 있던 휴대폰이 계속 진동하고 있던 걸 알아챘다. 권차경과 말을 주고받지 않았던 것처럼 홱 돌아서기엔 이미 늦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서 멀어지는 대신에 기은범을 이리로 불렀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기은범의 눈빛에 소원우는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고 기은범의 팔목을 잡고 권차경 앞으로 이끌었다.

권차경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소원우의 얼굴에서 소원우의 팔로. 기은범의 팔을 잡고 있는 소원우의 손으로.

소원우가 카페에서 나가고, 권차경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랜만의 대화였다. 초췌해진 자신을 걱정하기라도 하는 말에 일단 소원우를 붙잡고 봐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소원우의 집에 찾아갔을 때처럼 다분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권차경은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뛰기 시작했다.

긴긴 밤을 새우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하나는 자신이 소원우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 였다. 권차경은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소원우에게 치욕을 줄 때도, 그리고 제이든의 친구로 재회할 때까지도 권차경은 스스로에게 당당했다. 소원우의 빈자리를 여실히 느끼면서도 권차경은 소원우를 원망했다. 잠이 오지 않는, 잠에서 억지로 깨는 수많은 밤을 만나면서 소원우에 대한 원망이 커져 갔다.

호주에 가서야 권차경은 깨달았다. 자신이 루크에게 받았던 상처를 소원우에게 떠넘겼다는 것을.

권차경은 사과를 해야 했다. 권차경은 루크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상대에게 끝없는 절망을 남겨 두고 떠나 버리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카페에 올 거라 생각하고 늘 창가에 앉아서 기다렸다. 소원우는 그 카페의 커피를 제일 좋아했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90년대·2000년대의 발라드도,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주인도 좋아했다. 권차경은 소원우를 다시 만난다면 소원우가 좋아하는 장소면 좋겠다고 여겼다. 걱정 받을 몰골로 마주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그걸로 소원우의 관심을 끈다면 얼마든지 더 나약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원우는 이미 누군가에게 옆자리를 내준 모양이었다. 잘못했다는 말을 할 기회만 주어져도 고마울 것 같았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예전처럼 지내고 싶었나 보다. 소원우가 옆에 있는 남자에게 보내는 미소만으로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 힘이 풀리는 걸 보면.

권차경은 단번에 남자가 누군지 알아챘다. 소원우의 집 앞에서 마주쳤던 사람이다. 권차경은 바깥에 남겨졌는데, 그는 소원우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소원우는 그를 지금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는 사람의 범주 안에 있는 정도였다. 한때는 따뜻한 그 시선이 자신에게만 오롯이 향했는데, 이제는 다른 이에게로 떠나 버렸다. 그렇게 만든 이가 자신이었다.

두 달가량 지났을 뿐인데, 두 사람은 얼마나 가까워진 걸까. 권차경은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걸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방해자가 된 기분이 드는데도 권차경은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런 권차경에게 소원우가 남자를 소개했다.

“나랑 사귀는 사람이야.”

소원우는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권차경의 눈에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보이는 것처럼 남자고.”

이 말이 내포한 의미를 권차경이 모르진 않을 것이다. 권차경에게 고백한 이후, 소원우는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이 끔찍이도 싫었다. 비참하고 처절한 삶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기은범 덕분에 웃는 일이 많았다.

권차경은 말이 없었다. 어차피 권차경에게 무슨 말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다. 특별한 반응을 예상하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말해 두는 게 낫겠다고 여겼을 뿐이다. 어쩌면 이제 권차경이 말을 걸거나 더는 소원우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난 잘 지내.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소원우는 기은범의 팔을 반대편으로 잡아끌었다. 기은범은 소원우에게 끌려가면서도 안도한 얼굴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기은범에게 소원우는 전처럼 경고했다.

“돌아보지 마.”

“네.”

기은범은 씩씩하게 답했다. 나란히 몇 걸음 더 걷자 사거리 하나가 나왔다. 왼쪽으로 꺾으면 소원우의 집이었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기은범의 집이었다. 다른 카페라도 가야 할까, 그 사이에서 멈칫하는 소원우에게 기은범이 물었다.

“우리 집으로 갈까요?”

“너 시험 하나 남았잖아.”

“형 얼굴 보면 밤새우는 거 끄떡없어요. 잠깐 집에 있다 가요. 손잡고 싶어요.”

기은범은 자신의 팔에서 떨어져 간 소원우의 손을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같이 가요. 응? 원우 혀엉.”

기은범이 소원우를 조르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반달로 휘는 눈은 소원우가 기은범의 얼굴 중 제일 좋아하는 부위였다.

소원우는 못 이긴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기은범과 같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 아니었다면 기은범의 팔이 아니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얼른 가자.”

“네, 좋아요.”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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