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4)

5.

루크의 이름이 소원우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권차경은 참지 못했다. 어떤 정신으로 차를 운전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제이든을 방에 눕히고 거실로 나왔다. 암막커튼을 치니 모든 빛이 차단됐다. 권차경은 소파에 앉았다. 깜깜하고 어두운 거실은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술에 잔뜩 취한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제이든이 한국에 온 이유를 권차경도 잘 알고 있었다. 이맘때면 유난히 친구들의 연락이 잦아졌다. 부모님도 몇 차례나 호주에 들어오라고 권유했다. 권차경은 딱 잘라 거절했다.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권차경이 호주를 떠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권차경은 며칠 동안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켜켜이 쌓인 피로는 머릿속을 흐트러뜨렸다.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잠이 쏟아질 것 같은 곤한 상태인데도 권차경은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권차경은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고요한 집 안에서 권차경은 소음을 느꼈다. 귓가에 소원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제이든과 만난 지도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첫 만남을 더듬어 보려면 까마득한 시간을 거슬러야 했다.

권차경의 부모는 모든 자금을 사업에 갖다 부었다. 이국의 사회 구성원으로 완전히 자리 잡기 위해선 시간과 돈, 어느 한쪽도 아낄 수가 없었다.

권차경의 부모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지만, 당연히도 영어는 모국어만큼 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특히 비즈니스 관계로 만난 상대에게 실수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들의 영어 실력은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쌓인 거였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만큼은 편히 말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곱씹지 않아도 되는 언어로.

어린 아들을 돌보면서 사업을 챙기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를 평일 내내 유치원에 보내기엔 비용이 너무 비쌌다. 권차경의 부모는 한국인 오페어를 채용했다.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 그때부턴 권차경의 교육에 집중하리라. 권차경은 순한 아들이었다. 바쁜 부모를 붙잡고 투정 부리지 않았다. 부모의 삶을 이해하는 것처럼 떼를 쓰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권차경의 부모는 주말 이틀만을 아들과 함께했다. 바다에 가서 수영을 하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한가로운 주말이 끝나면 다시 전쟁 같은 일주일이 시작됐다. 권차경은 주말 내내 오페어 얘기를 했다. 자신을 얼마나 잘 돌봐 주는지, 무엇 하고 놀았는지 종알종알 부모에게 말했다. 부모는 안심했다. 비자 때문에 1년을 다 못 채우고 오페어를 바꿔야 했지만, 권차경은 새로 온 오페어와도 잘 지냈다.

권차경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까지 영어는 단어만 겨우 말할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애와 같이 놀아 줄 친구는 없었다.

툭 하면 듣는 말이 ‘네 나라로 돌아가!’였다. 권차경은 호주 시민인데도 호주가 자신의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반 애들과는 외양도 달랐고, 언어도 달랐다. 자신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도 있었다. 권차경이 친근감을 갖고 그 애에게 더듬더듬 ‘Hi’라고 인사했을 때 그 애는 권차경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난 너랑 다르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

발이 걸려 넘어지고 숙제 노트가 없어지는 일은 허다했다. 그네를 밀어 준답시고 공중에서 떨어지게 해서 권차경은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놀다가 넘어졌다는 말을 부모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권차경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심히 놀아야지, 말했다. 권차경은 자신이 학교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오페어에게도 비밀이 생겼다. 오페어에게 말하면 틀림없이 부모의 귀에도 들어갈 터였다. 부모는 너무 바빴다. 잠 잘 시간도 부족한 부모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깁스를 했다고 해서 동정을 받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그렇다고 깁스를 한 애의 몸을 잡고 주머니를 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값비싼 물건은 갖고 있지 않았다. 쓸 만한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부모가 사 준 가방과 신발 정도였다. 애들은 권차경을 둘러싸고 신발과 가방을 빼앗았다. 맨발로 터덜터덜 걷는 권차경을 발견한 사람이 루크였다.

‘제이든. 우리도 맨발로 걸을까?’

호주에선 길거리를 맨발로 걸어 다니는 애들이 많았다. 발이 새까매져도 부모는 아이에게 신발을 신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바다 근처 거리에선 어른들도 종종 맨발로 걸었다.

제이든은 루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깁스를 한 애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고 있었다. 맨발로 걷고 싶어서 걷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루크와 제이든이 권차경에게 달려왔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고개를 푹 숙여 걷는 권차경에게 말을 걸었다.

‘팔 많이 아파?’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아이는 얼굴을 찡그러뜨리고 물었다. 마치 꼭 자신도 같이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권차경의 눈에 걸려 있던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루크는 당황해 제이든의 팔을 거세게 흔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도르르도르르 굴리던 제이든은 쪼그려 앉았다. 그편이 권차경의 얼굴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자세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이든은 자그마한 밤색 머리를 갸웃거리며 권차경에게 물었다.

‘너 괜찮아? 집이 어디야?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두 사람은 권차경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걸 보고도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권차경의 부모는 루크의 부모에게 전화를 받고 나서야 권차경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권차경과 쭉 함께였다.

‘내 친구도 이젠 네 친구야.’

루크가 권차경의 집에 데리고 온 친구는 제이든을 빼고 셋이었다. 권차경에게 친구가 다섯이나 생겼다. 그렇게 여섯이서 함께 자랐다.

두 살 많은 제이든은 꼭 친형 같았다. 루크가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면 제이든은 짐짓 어른처럼 목소리를 굵게 내어 루크를 말렸다. 루크와 권차경이 저지른 장난을 수습하는 사람도 제이든이었다. 루크와 공놀이를 하다 서랍장 위에 놓인 액자들을 줄줄이 깨트렸을 때, 제이든은 나서서 죄를 뒤집어썼다. 모범적이고, 쾌활하고, 똑 부러진 제이든을 어른들은 예뻐했다. 제이든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제이든이 새로 사귄 친구를 권차경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우정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이든은 온갖 말로 권차경을 졸라 댔다. 권차경은 결국 승낙을 했다. 그놈의 ‘친구의 친구는 친구’. 오래전엔 그 말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 말이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2년 만에 만난 소원우의 눈은 제이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원우가 손을 내밀며 권차경을 보고 지은 웃음은 진짜 웃음이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무의미한 미소. 권차경은 자신이 소원우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권차경이 바랐던 결과였다.

소원우는 살이 빠졌는지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전과는 달랐다. 그래도 눈은 여전했다. 끝이 살짝 처진 소원우의 눈은 종종 강아지의 눈처럼 보였다. 소원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을 때면 어떻게든 달래 주고 싶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가끔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권차경은 가끔 소원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권차경은 오래 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소원우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엔 언제나 온기가 가득했다. 버거울 만큼 따스했던 눈빛이었다. 소원우가 고백만 하지 않았으면 그 눈빛은 변함없이 자신을 향해 있을 거였다.

머리가 또 지끈거렸다. 소원우 생각만 하면 그랬다. 눈이 뻑뻑해 권차경은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 * *

권차경은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날이 흐렸다. 비가 올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했다. 여행 첫날부터 흐린 날씨라니. 제이든이 알면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싶었다. 음식으로라도 위로해 줄까 해서 권차경은 주방으로 향했다.

권차경은 냉장고에서 달걀과 버터, 베이컨을 꺼냈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버터를 둥글게 바르고 식빵 두 장을 올렸다. 빵이 구워지는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빵의 겉면이 노릇노릇해지자 권차경은 빵을 꺼내고 빈자리에 베이컨을 올렸다. 얇은 베이컨이 기름을 내며 맛있게 익어 갔다. 노른자를 깨트리지 않은 달걀 프라이까지 접시에 옮기고 난 후, 권차경은 제이든을 깨웠다.

『캘런. 넌 벌써 밥 먹었어?』

식탁 위에 놓인 접시는 하나였다.

『어.』

『뭐 먹었는데?』

『대충 먹었어.』

『대충 과일 몇 개 집어 먹었지?』

『알면서 뭘 물어봐.』

제이든은 숙취가 없었다. 술을 잔뜩 마시고 난 다음 날은 과일이나 음료로 아침 점심을 때우는 권차경과는 달리 제이든은 일어나자마자 기름진 음식을 잘도 먹었다. 권차경은 바나나와 우유, 프로틴 가루를 믹서기에 넣고 갈았다. 컵 두 개에 주스를 따르고 하나를 제이든에게 주었다.

『난 이거면 돼.』

권차경은 컵을 살짝 흔들었다.

『고맙다. 잘 먹을게.』

제이든은 빠른 속도로 음식을 해치웠다. 제이든은 먹는 걸 좋아했다. 낯선 재료도 서슴지 않았다. 모르는 음식이 나와도 일단 입에 넣고 보았다. 여행자로선 최적이었다.

『날씨가 흐려서 어떡하냐.』

권차경의 걱정에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행 한두 번 해 보냐. 이제는 비가 내려도 좋고, 흐려도 좋고, 볕이 뜨거워도 오케이야. 이런저런 날들이 다 괜찮더라고.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추억이 돼.』

긍정적인 성격 하나는 최고였다. 제이든이 한국에 일주일 넘게 머무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정이 길어지자 제이든은 주저 않고 한국 여행을 계획했다. 남이랑 부대껴서 자는 건 딱 질색인 권차경은 단박에 거절했다.

권차경은 잠버릇이 예민했다. 빛에 제일 취약했고, 그다음이 소리였다. 학교에서 단체로 떠나는 캠프나 수련회에서는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어둠을 가르는 휴대폰 불빛과 새벽녘까지 잠들지 않는 아이들의 말소리 때문에 권차경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수면제를 먹어 보기도 했지만 신경만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돈도 많으면서 왜 호텔에서 안 자? 남이랑 자면 안 불편해?』

『난 사람들 만나고 친해지는 게 좋아. 재밌어. 그리고 호스텔에서 지냈기 때문에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던 거야. 소원우도 만나고. 너야 다른 사람이랑은 같이 못 자니까 어쩔 수 없지.』

또 그 이름이 나왔다. 2년 동안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는데 지금은 제이든에게 소원우에 관한 것들을 매일 듣고 있었다.

『잠버릇 말이야. 그건 못 고치는 거지? 결혼하면 부인이랑 같이 자야 될 텐데.』

귀마개를 끼고,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매트리스 침대를 사면 좀 나으려나. 권차경은 상상을 해 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여자친구와도 같이 한 침대에 누워 자지 못했다. 권차경은 섹스가 끝나면 언제나 여자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자고 가겠다는 여자친구를 매번 단호히 거절했다.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딱 한 사람만 제외하고. 권차경은 자신이 편안하게 머물던 곳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서 권차경은 유난히 적극적으로 굴었다. 소원희와 친해지기 위해서 소원우의 집을 종종 찾아갔었다. 무작정 간 것은 아니었다. 시험공부를 같이 하자는 둥, 혼자 밥을 먹기 싫다는 둥 적당한 핑계를 대면 소원우는 늘 고개를 끄덕였다.

방 두 개와 작은 거실이 있는 집은 아담하고 포근했다. 찬 몇 개를 두고 두 사람은 행복해했다. 소원우는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는 첫 시도라면서 수줍게 웃었다. 숟가락을 입에 넣자마자 김치의 신맛이 혀를 톡 쏘았다. 권차경은 슬쩍 소원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원희는 엄지를 치켜들며 소원우를 칭찬했다. 그러고선 소원우 모르게 식탁 아래에서 권차경의 다리를 툭 쳤다. 신호를 눈치챈 권차경도 소원희를 따라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긋나긋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권차경은 문득 이 집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는 왠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남는 방이 없다는 소원우에게 권차경은 소원우만 괜찮다면 같은 침대에서 자도 된다고 말했다. 소원우는 몇 분간 고심하더니 또 고개를 끄덕였다.

권차경이 다른 사람과 잠을 자지 못한다는 걸 알면 소원우는 권차경과 같이 자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권차경은 소원우가 깨어 있을 때는 잘 자는 척했다. 잠든 사람처럼 숨소리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건 권차경의 특기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소원우가 몸을 수차례 뒤척여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권차경의 예상대로 그날 밤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한 침대에 누워 있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은 소원우밖에 없었다.

루크는 한동안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행복에 젖어 살던 권차경의 꿈에 루크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소원우의 생일날부터였다. 빌어먹게도 루크는 혼자 나타나지 않았다. 루크는 늘 소원우를 데리고 왔다. 권차경은 생일날의 소원우를 꿈속에서 수백 번 만났다. 2년 만에 만난 소원우가 소원우처럼 느껴지지 않은 이유도 이 탓일 터다. 권차경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꿈속의 사람이 아니라 제이든의 친구였다. 그는 권차경이 모르는 눈빛을 하고, 처음 뵙겠다는 인사를 했다.

제이든은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설거지거리는 컵 두 개와 접시 하나뿐이라 권차경은 물에 담가 놓고 차 키를 챙겼다.

『짐 챙겨. 데려다줄게.』

권차경은 고속버스터미널의 주차장에 제이든을 내려 주었다. 차창 밖에서 소원우가 제이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꽤 먼 거리였어도 소원우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윤찬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만 보면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었던 윤찬희가 이번 여행에 합류한 이유는 가평에 따라온 것과는 다를 게 분명했다.

『끼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난 됐어. 즐겁게 놀다 와.』

권차경은 손을 흔들었다. 차는 세 사람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 * *

소원우는 목도리를 꼼꼼히 여미고 밖으로 나왔다. 일출 시간은 오전 7시 32분. 해를 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전날 내내 내리던 비는 늦은 밤이 돼서야 멈췄다. 며칠째 이어지는 한파로 바다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새벽 늦게야 잠이 들었던 터라 소원우의 얼굴에 졸음이 가득했다.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모래사장에 앉았다. 어둑어둑했던 사위는 조금씩 빛을 머금었다. 일출 시간이 다가올수록 대화는 줄어들었다. 찬바람에 입술이 얼어붙었다. 오늘의 해가 어제의 해와 특별히 다를 게 없을 텐데도 굳이 일출을 보러 정동진에 왔다.

바다의 끝은 하늘이었다. 철썩대는 파도 저 너머에서 해는 제 몸뚱이의 아주 작은 일부분만을 내보였다. 선명하게 붉은 해는 볼 수 없었다. 단지 일출을 보기 위해 정동진에 왔더라면 허탈했을 것이다.

윤찬희는 둥실 떠오른 해가 다시 구름에 가려지자 미련 없이 모래사장에 덜렁 누웠다. 머리카락이 모래에 파묻혔다. 제이든도 윤찬희를 따라 몸을 젖혔다. 일출만 보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둘은 못내 아쉬웠던지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했다.

『안 추워?』

소원우가 묻자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추워.』

『당연히 춥지.』

제이든의 코끝이 빨갰다. 윤찬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원우는 목도리를 풀어 머리에 댈까 하다가 그냥 누워 버렸다. 머리카락에 엉킨 모래는 물에 씻겨 떠내려갈 것이다. 모래 따위는 망설일 이유가 되지 못했다.

말없이 몇 분을 보냈다. 찬바람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에 잡히는 건 안개처럼 흐트러진 구름뿐이었다.

『해가 바뀐 지 한 달이 다 됐는데, 나 아직까지 새해 계획을 안 세웠어.』

윤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소원우라고 다르진 않았다. 가운데에 누워 있던 제이든이 한 가지 제안을 냈다.

『그럼 우리 여기서 새해 소원을 말해 볼까? 해는 못 봤지만.』

아. 낭만적이야.

제이든이 덧붙인 말에 소원우의 입가에 미소가 퍼져 갔다. 여행을 하면서 제이든은 ‘낭만’이란 단어를 많이 뱉었다. 한옥마을 사이를 걸을 때나 웅장하고 거대한 불상 앞에 섰을 때, 돼지의 살코기와 부속물이 잔뜩 든 국밥 한 그릇을 바라보면서도 제이든은 낭만적이라고 말했다.

제이든은 발이 닿는 모든 공간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세울 게 없는 소박한 풍경도 제이든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소원우는 일정한 걸음으로 휙휙 둘러보다가 멈춰서있는 제이든의 눈을 따라 같은 곳에 시선을 던지곤 했다.

『나는 딱 하나야. 우리 가족과 내 친구들, 주변 사람들 모두 아프지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제이든. 이러면 내가 좀 속물 같잖아. 난 고작 성적 좀 잘 받았으면 하는 건데.』

윤찬희의 볼멘소리에 제이든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것도 좋은 소원이지.” 했다.

『내가 더 속물 같을걸.』

『넌 뭔데?』

소원우는 한 템포 쉬고 답했다.

『연애.』

『뭐?』

『연애하고 싶어.』

윤찬희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진짜야? 너 연애하고 싶다고? 정말로?”

윤찬희는 냉큼 소원우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원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마치 소원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영어로 말해. 제이든 못 알아듣잖아.”

『알았어, 알았어. 나 잘못 들은 줄. 깜짝 놀랐다.』

『왜? 뭐가 그리 놀라운데?』

제이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제이든의 입장에선 윤찬희의 격한 반응이 이해되지 않을 터였다.

소원우는 윤찬희와 눈이 마주쳤다. 굳이 숨겨야 할 이유는 없어서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우 대신에 윤찬희가 놀란 이유를 답해 주었다.

『소원우가 연애를 한 번도 못 해 봤거든.』

『정말이야?』

『응. 그래서 올해는 연애해 볼까 하고. 하고 싶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겠지만.』

『당연히 할 수 있어. 네가 왜 못해? 내가 장담해.』

윤찬희가 실실 웃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의진 형한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어.”

차갑게 언 손으로 윤찬희는 손을 움직였다.

신이 난 윤찬희를 물끄러미 보던 제이든이 불쑥 물었다.

『원우, 왜 그동안 연애를 안 했어?』

제이든의 질문에 소원우는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간략하게 답했다.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못 만났어.』

유일하게 좋아했던 사람이 남자에다 친구라서 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권차경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윤찬희는 목이 터져라 말했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소원우는 누군가를 방패로 삼아 권차경을 잊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좀 더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오롯이 혼자 버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소원우의 판단은 다행히도 옳았다. 소원우를 옭아매고 있던 과거는 어느새 풀려 있었다. 권차경을 만나고, 권차경을 보고도 더 이상 떨리지 않다는 걸 확인한 순간, 소원우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겠다고 결정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어?』

『야. 그래. 말해 봐라. 내가 진짜 여기저기 다 수소문해서라도 꼭 찾아 줄게.』

그것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소원우는 “음.” 하고 입만 뗀 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형이란 게 딱히 없었다. 권차경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를 좋아하는 줄도 몰랐다. 여자에겐 성욕을 느낀 적이 없으니까 아마도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맞겠지만, 호감을 느낀 남자도 권차경뿐이라서 어떤 사람이 좋을지 짐작해 보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다.

『어떤 성격의 사람이 너와 잘 맞을 것 같아?』

소원우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제이든이 질문을 던졌다.

『어…… 진중한 사람? 어떤 고민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깊은 사람.』

『들으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원우도 알지? 캘…….』

『nononononono.』

소원우의 안색이 굳어지기 전에 윤찬희가 급하게 제이든의 말을 잘라 냈다. 부자연스럽게 말을 막아서 제이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원우로선 윤찬희의 참견이 무척 고마웠다.

제이든과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제이든의 친구가 누구인지 윤찬희와 현의진에게 일러두었다. 윤찬희는 욕을 했고, 현의진은 술만 들이켰다. 두 사람을 또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제이든이 혹시나 그들에게도 권차경과 만나자는 얘길 하지 않을까 염려됐기 때문이었는데 역시나 제이든은 식사 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괜찮으면 자신의 친구를 소개시켜 주고 싶단 말을 꺼냈다. 제이든의 친구가 누구인지 몰랐다면 두 사람은 흔쾌히 친구를 부르라 했을 터였다. 소원우가 말을 해 둔 덕에 적당히 핑계를 대며 거절할 수 있었다.

제이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윤찬희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핫. 원우가 진지한 편이잖아. 연애 상대는 오히려 정반대 성격이 잘 맞지 않나?』

엉겁결에 나온 말인데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찬희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내가 좀 딱딱하고 정적이니까 재밌는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

말을 하고 나니 정말로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으면 너무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험을 소원우도 하고 싶었다.

『유머 있는 사람 좋지!』

윤찬희가 박수를 짝 쳤다.

『누구를 만나든 원우를 웃게 해 주는 사람이면 돼.』

제이든은 미소를 지었다. 찬바람도 잠시 잊을 만큼 인자한 미소였다.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고마워, 제이든.』

제이든은 소원우에게 아주 큰 선물이었다. 그가 권차경의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소원우는 제이든이라는 사람을 만난 게 기쁘고 행복했다. 제이든과의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건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현실을 살다 보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그곳에서 겪은 많은 일들이 조금씩 아득해진다. 같은 땅에 살아도 자주 보지 못하면 멀어지는 법인데, 런던과는 시차까지 있으니 연락이 더 빠르게 뜸해질 수도 있다. 어쩌면 이대로가 끝일 수도 있었지만, 소원우는 말을 아꼈다. 또 만나는 일이 없더라도 제이든의 얼굴만은 생생하게 기억하려고 소원우는 제이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따끈한 해장국 한 그릇 먹고 출발하자.』

윤찬희의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서로의 등과 엉덩이에 붙은 모래들을 손으로 탁탁 쳐서 털었다.

어느새 날은 환해졌다. 새로운 아침이 묵직하게 찾아왔다.

* * *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를 타고 루크의 몸이 흔들거렸다. 이른 아침에도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바다였으나 지금은 루크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강한 바람이 불었다. 권차경은 큰소리로 외쳤다.

『루크. 그만 나와!』

권차경의 목소리는 세찬 파도에 묻혔다. 아무리 크게 내질러도 루크는 바다 속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않았다. 권차경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에 힘을 주어도 발이 땅에 박힌 것처럼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루크를 부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루크!』

몇 번이나 더 불렀을까. 드디어 루크의 눈이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루크는 천천히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권차경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루크는 한 손으로 무언가를 질질 끌고 있었다. 아마 서핑보드일 터다. 루크가 권차경의 앞에 선 순간, 권차경은 루크의 손에 잡힌 기다란 물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핑보드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Shit.”

또 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몇 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권차경은 서랍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새벽이었다. 권차경은 몇 시간 눈 붙이지 못하고 또다시 하루를 맞이해야 했다.

제이든은 다음 날 오전 비행기로 호주로 떠날 예정이었다. 제이든은 권차경의 티켓까지 미리 끊어 놓았다.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발권한 건 자신이니 권차경이 티켓 값을 물어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권차경이 결정만 내리면 당장 떠날 수 있도록 편의를 위해서 끊어 놓은 것뿐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도 했다.

최근 들어 권차경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루크는 권차경의 꿈속에서 여러 번 죽었다. 루크가 죽은 걸로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나 루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루크는 기어이 권차경을 호주로 부르려는 모양이었다. 축 늘어진 소원우의 몸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루크는 권차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루크의 표정은 이래도 괜찮으냐고 묻는 것 같았다.

“가면 되잖아. 씨발.”

권차경은 베개를 집어 던졌다.

또래보단 월등히 왜소했던 권차경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부쩍 자랐다. 키는 여섯 중에 두 번째로 컸고, 체격으로 비교하면 딱 중간이었다.

권차경의 친구들 모두 인기가 많았다. 어느 것 하나 뒤처지는 게 없으니 당연했다. 영어를 술술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권차경에게도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권차경은 딱 두 번 연애를 했다. 두 번 다 상대방이 고백해서였다. 상대방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들어서기도 전에 섹스부터 했다. 망설이는 권차경에게 상대방은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섹스를 하면 더 좋아질 거라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섹스를 하고 난 뒤론 쌀쌀한 바람 한 점에도 여자친구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게 됐으니까.

권차경은 연인이 생기면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집을 비운 집에서 파티를 열어 놀기도 했다. 그때마다 여자친구와 동행했다. 제이든과 이슨, 크리스, 라이언, 그리고 루크도 그랬다. 모든 순간을 그들과 함께했다. 생일이나 졸업식, 크리스마스, 새해, 평범한 일상도. 더없이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부모의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권차경의 성적은 명문대에 가뿐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우수했다. 이른 아침, 너울거리는 파도를 타고 물 위를 날 때마다 권차경은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밤이 더 용서가 안 됐다.

권차경의 부모가 시드니로 출장을 간 사이 친구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다른 방들을 친구들에게 내주고 권차경은 부모의 침실에서 자고 있었다. 방 밖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끝날 때까지 권차경은 자지 못했다. 눈만 감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주 얇은 선잠만 들었던 권차경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조심스러운 인기척을 느꼈다. 침입자가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숨을 죽여 걷고 있다는 걸 권차경은 알 수 있었다. 권차경은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들어왔나 싶었다. 잠든 사이 얼굴에 낙서를 하거나 치약을 바르는 등의 장난을 권차경은 한 번도 당한 적이 없었다. 깊게 잠들지 못하는 잠버릇 덕분이었다. 노력이 가상하니 이번엔 당하는 척해 볼까 하고 누워 있던 권차경은 입술에 닿는 감촉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런 장난은 치지 말라고 경고하려던 권차경은 상대방의 눈을 보고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루크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루크의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차차. 우리 한 번만 자 보자.’

제 귀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의심이 들 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너도 좋아할 거야. 분명히.’

루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밀어붙였다. 권차경을 눕히고 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수 있을 것처럼 루크는 권차경을 침대에 눕히기 위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루크. 난 그럴 마음 없어. 못 들은 걸로 할게.’

루크에게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했지만, 권차경은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호주는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드문 나라가 아니다. 이곳에서는 길거리에서 애정 표현을 하고, 가족들에게 동성 연인을 소개하는 일이 흔했다.

‘너 날 볼 때 항상 애틋하게 쳐다봤잖아. 나 다 알아. 나도 너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어. 혹시나 해서 남자랑 자 봤는데 되더라구. 기분 꽤 좋았어. 너랑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루크는 막무가내였다. 술기운에 이러는 것 같지 않았다.

‘너 위드 피웠어?’

‘어. 기분 죽인다. 너도 할래?’

‘루크. 내가 약 끊으라 했잖아. 매년마다 약에 취한 놈들이 호텔에서 떨어져 죽는 거 못 봤어? 방에 들어가서 자. 다음 날 깨면 너 후회할 거야.’

‘후회 안 해. 나 각오하고 왔어. 너랑 자려고. 셀레나한테 들었는데 차차 엄청 잘한다면서. 나도 궁금해.’

권차경은 루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지켜 주었던 사람이 약에 취해 해롱대고 있었다. 자신보다 한 뼘은 컸던 루크는 이제 자신보다 한 뼘이 작았다. 힘으로 겨루면 루크는 권차경을 이기지 못할 터였다.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권차경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루크는 동성을 좋아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루크는 줄곧 여자친구만 사귀었다. 진지하게 교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질 때마다 루크는 마음이 식었다고 변명했다.

‘넌 기분만 좋으면 돼?’

‘차차도 기분 좋게 해 줄게.’

권차경은 루크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이었다. 깁스한 팔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소년을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루크를 빼고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없었다. 부모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은 모두 루크가 채웠다. 루크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난 친구랑 이 짓 못 해. 루크. 듣고 있어? 난 친구랑은 안 해.’

마지막 경고였다. 우정을 깨트리고 싶지 않으면 여기에서 멈추라는 뜻을 루크는 새겨듣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웃었다. 권차경이 허락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욕구만 해소된다면 우정 따윈 내팽개칠 수 있는 걸까. 어째서 루크가 이러고 있는 걸까. 믿기 힘들었다.

권차경은 눈을 감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틈새로 혀가 들어올 때도 권차경은 눈을 뜨고 있었다. 정신없이 몸을 비벼 오는 사람의 얼굴에서 후회하는 빛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바로 그만둘 수 있도록 권차경은 루크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권차경은 목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루크는 아무 반응도 없는 권차경의 몸을 만져 댔다.

‘긴장해서 그래. 기분 좋은 거야, 이거. 너도 해 봐서 알잖아. 내가 만져 줄게.’

루크의 손이 자신의 바지 지퍼로 내려오는 걸 보자 권차경은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맞닿은 입술까지는 참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루크의 손이 자신의 성기에 닿는 순간 구역질이 일었다.

권차경은 목 위로 솟구치는 토기를 더는 참지 못했다. 화장실로 달려갈 시간도 내지 못했다. 권차경은 이불 위에서 토를 쏟아 냈다. 권차경이 앉은 자리에서 토를 하자, 루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루크는 굳은 얼굴로 화를 냈다.

‘뭐야. 너.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은 건 나한테 다 양보하고, 내가 춥다 그러면 옷도 벗어 주고, 나 바다에서 나오면 수건 들고 내 몸 닦아 주고 그랬잖아.’

루크는 권차경에게 쏘아 댔다. 모든 잘못은 권차경에게 있는 것처럼 화살을 권차경에게 돌렸다. 권차경은 뭐라 대꾸할 힘도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토가 묻은 이불을 치워야 했는데 눈앞이 흔들거리고 머리는 어질어질했다.

‘……루크.’

권차경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난 네가 소중해. 루크.’

‘나도 네가 소중해. 차차 그러니까 나랑 사귀자.’

‘내가 너한테 한 모든 행동은 네가 친구라서 그런 거야.’

‘친구일 때와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권차경은 애원하듯 말했다.

‘루크. 그만하자. 응?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루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귀지 마 그럼. 나도 이제 너랑 친구 안 해.’

권차경은 루크에게 언젠가 말했다. 루크가 자신에게 말을 건 그날이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고. 권차경의 말을 듣고 루크는 환하게 웃었다. 루크는 권차경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우정을 끊겠다고 말하는 거다. 어린 아이가 토라져서 절교하겠다는 말과는 무게가 달랐다. 권차경이 지금 어떤 마음일지 루크는 모를 리 없었다.

‘루크.’

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등을 돌려 방문을 나갔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문이 세게 닫혔다.

두 사람의 미묘한 거리감을 다른 친구들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늘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 눈도 마주치지 않으니 당연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제이든에게 루크는 ‘차차에게 물어봐.’ 라고 떠넘겼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루크는 권차경에게 설명을 미뤘다. 권차경의 잘못으로 사이가 어그러진 것처럼 비춰졌다.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권차경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0여 년을 자신의 옆을 지켜 준 루크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권차경이 루크와 단번에 멀어지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친구들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친구들의 관계까지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루크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겨웠지만 그래도 권차경은 숨어 버리지 않았다. 루크는 그것을 기회라고 생각했나 보았다. 자신은 약에 취해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라, 용기 있게 행동한 거라고 말했다.

용기라니. 그게 어떻게 용기야. 이제는 친구 사이도 뭣도 아니었지만, 그 뭣도 아닌 관계까지도 잘라 내야 할 때인가 보다 싶었다. 권차경은 더 이상 루크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루크의 연락을 며칠 동안 받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의 연락도 잠깐 끊었다. 루크에게도 여러 번 메시지가 왔지만 권차경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권차경은 목욕을 하느라 전화를 늦게 받았다. 30분 새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 넘었다. 제일 많이 이름이 찍힌 제이든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가 죽었다. 서핑을 한다고 새벽에 나간 루크는 이안류에 휩쓸렸다. 수영 실력을 과신한 결과였다.

이날 새벽 루크는 권차경에게 전화를 했었다. 권차경은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말까 하다가 루크에게 해 줄 말이 있어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연락이 돼서 좋았는지 루크의 목소리가 밝았다. 파도가 좋다고, 전처럼 같이 수영을 하자는 루크의 말에 권차경은 한 단어로 거절했다.

‘싫어.’

단호한 거절에 루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차차. 너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었어?’

‘루크. 나한테 연락하지 마. 나도 이제 너 안 만나도 돼.’

그렇게 말했어도, 루크와 함께 수영할 마음이 없긴 했어도 평생 루크를 보지 못하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루크는 모든 걸 권차경에게 떠넘기고 죽었다. 남아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루크에 대한 추억을 회상시켜 줄 역할까지도 권차경에게 넘기고.

권차경은 그날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루크가 죽은 뒤로도 권차경은 루크를 보아야 했다. 루크는 꿈에도 나왔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새에도 껴 있었고, 심지어는 파도와 함께 권차경을 덮치기도 했다. 권차경은 그 좋아하던 수영도 한동안 하지 못했다. 바다에 있으면 루크가 자신을 데리고 갈 것만 같았다. 바다가 무섭다고 느껴졌을 때. 권차경은 호주를 떠났다. 더는 호주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살 수 없었다.

* * *

권차경은 기내식 메뉴를 건네는 승무원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안 먹게?』

『어. 생각 없어.』

『도착하면 바로 밥 먹으러 가자. 다섯이서 모이는 게 대체 얼마만이야.』

권차경이 호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제이든은 말없이 권차경을 껴안았다. 며칠 전만 해도 완강하게 거절하던 권차경이 왜 마음을 바꿨는지 제이든은 물어보지 않았다. 환하게 웃으면서 비행기 시간을 알려 주었을 뿐이었다.

『그거 알아? 골코에 트램이 생겼어. 그리피스에서 브로드비치까지 연결됐다구.』

『그래?』

『버스보다 훨씬 편해. 자주 다니고. 뭐, 이젠 다들 차가 있어서 버스 탈 일이 없지만. 아! 그리고 우리 자주 가던 버거하우스 말이야. 재작년에 없어졌어. 매튜가 캔버라로 이사 갔거든. 딸이 캔버라에서 일하게 됐대. 매튜가 우리 볼 때마다 너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어봤었는데. 우리 거기 완전 단골이었잖아.』

권차경이 변한 환경에 깜짝 놀라기라도 할 것 같은지 제이든은 생각나는 대로 하나하나 일러 주었다. 그 세심한 배려에도 권차경은 무덤덤했다. 사실 제이든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즈니스라 공간의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좁은 곳에 몸을 욱여넣은 것처럼 갑갑했다. 비행기에서 잘 생각으로 간밤에 뜬눈으로 버텼건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은 많으나 공간은 한정돼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적었다. 권차경은 영화 네 편을 내리 보았다. 마지막 편은 연지상 감독의 영화였다. 연지상 감독의 두 번째 상업 영화는 대박을 쳤다. 텅텅 빈 상영관에서 보았던 영화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개봉 당시 큰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다. 관객 수가 천만이 넘었다고 호평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평론가들의 별점은 관객들보다 낮았다. 평론가들의 감상이 옳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권차경은 그들의 말에 공감할 수는 있었다. 예고편만 보아도 전작과는 차이가 많이 났으니까. 어쨌거나 연지상 감독의 이름을 대중에게 완전히 각인시킨 영화를 권차경은 뒤늦게 비행기에서야 보았다.

권차경은 연지상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지루하고, 무던하기만 했다. 소원우는 삼삼한 매력이 있다고 했지만, 권차경은 몇 번을 봐도 그 삼삼한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차경은 일일이 연지상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았다. 소원우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소원우가 좋아했던 감독 특유의 영상미와 배경음악은 이 영화에선 빛을 발하지 않았다. 연지상 감독의 오랜 팬인 소원우는 영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권차경은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가 황급히 모니터 화면을 껐다.

조그마한 창문 밖에선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캘런. 더 오래 머물고 싶으면 돌아가는 날짜 변경하면 돼.』

『그럴 필요 없어.』

냉정한 거절에도 제이든은 어깨만 으쓱했다.

『혹시나 해서. 마음은 바뀔 수도 있으니까.』

제이든은 여덟 시간 동안 붙잡고 있던 책을 드디어 덮었다. 집중해서 보느라 꽤 오래 걸렸다. 결린 어깨를 풀어 줄 겸 제이든은 구석으로 가 두 팔을 위로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제이든이 자리에 다시 돌아왔을 때 권차경이 책을 들고 훑어보고 있었다.

『너 읽을래?』

『한국 작가 책이네.』

『응. 맨부커상 받은 책이라 한 번 읽어 봐야지 했었는데 선물 받았어. 원우한테.』

책장을 넘기던 손이 뚝 멈췄다.

『너 책 읽을 때 영문판이 편하지?』

『어. 근데 도착할 시간 다 됐으니까 다음에 읽을게. 도중에 끊기는 거 싫거든.』

권차경은 책을 덮고 그대로 제이든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하면 대화는 이렇게 종료될 거라 생각했다.

『캘런. 있잖아.』

제이든은 권차경을 부르고서도 말을 잇지 않았다. 꼬물거리는 제이든을 기다리던 권차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원우 어때?』

『뭐?』

『안 지 몇 달 안 됐는데 원우가 편하고 좋아. 그리고 난 캘런도 좋아해. 그러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면 어떨까 하고. 두 사람 다 생각이 깊고 진중한 성격이잖아. 말도 잘 통하고 마음도 잘 맞지 않을까 생각해.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고.』

권차경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싫어.』

『고민도 안 해 보고 대답하기야?』

두 사람이 잘 맞을 거라 생각하고 꺼낸 말인데 권차경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제이든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풀었다. 사람 관계를 억지로 이을 수는 없었다.

『둘이 친해지면 캘런한테 원우 ‘소개팅’ 부탁해 볼까 했는데, 안 되겠네.』

영어 사이로 한국말이 들렸다. 권차경은 잘못 들었나 하고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한국식 표현 하나 배웠지. 소개팅. 원우 연애하고 싶다고 했거든. 좋은 사람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내가 아는 사람은 다 외국인이잖아. 원우는 외국 사람은 만날 생각 없대. 난 가볍게 연애를 시작하는 편인데 원우는 안 그렇더라고. 괜찮은 사람 찾는 데 오래 걸릴까 봐 캘런한테도 소개 부탁하려 했지. 너 아는 사람 많으니까.』

제이든은 소원우가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소원우의 연애 걱정을 다 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서 소원우는 연애를 한다니. 권차경은 실소를 지었다. 소원우가 자신을 까맣게 잊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자신을 바라보던 소원우의 눈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소원우는 없었다.

소원우가 루크처럼 방에 몰래 들어와 키스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권차경은 소원우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몰랐을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권차경에게 소원우는 소원희의 동생에 불과했으니 소원우를 끊어 내는 것쯤은 간단했다. 그러나 소원우는 물러났고, 권차경은 루크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소원우를 달리 보게 됐다.

소원우의 눈빛을 인식하고 났더니 확연히 보였다. 소원우는 소원희와 닮은 눈으로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소원희와 닮은 입으로 권차경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너무 좋았다. 소원우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소원우는 루크를 미워하면서 사는 권차경을, 마음 깊은 구석에 증오를 품고 사는 권차경을 다정한 사람이, 상냥한 사람이, 배려하는 사람이 되게 했다. 소원우가 자신을 향한 애정만 포기한다면 권차경은 소원우와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소원우의 눈이 식어 버리지 않게 소원우를 붙잡아 두면서도 권차경은 소원우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소원희와도, 소원우와도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공중에 두둥실 온기를 뿜어내던 애정이 가라앉고 나면 그토록 차가워질 줄 모르고.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누구를…….

비행기에 타기 전에 두통약을 먹었는데 약 기운이 다 떨어졌는지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통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소원우가 걱정되면 네가 그 연애 상대가 되는 건 어때?』

『원우가 날 원하면 그것도 괜찮지.』

권차경은 제이든의 반응에 눈을 치켜떴다.

『놀라기는. 나도 농담이야.』

『그런 농담은 하지 마.』

『농담이긴 한데 완전히 거짓은 아니야. 원우 좋은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하고 연애하는 게 어때서.』

『남자잖아.』

『남자라도 마음이 가면 연애할 수 있는 거지.』

제이든은 성별 따윈 뭐가 문제냐는 태도였다.

『너 남자도 돼?』

권차경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사귀어 본 적은 없어. 남자와 자고 싶은 생각도 들진 않아. 내 말은 그러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남자라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 사람이 소원우라는 거야?』

『사실은 원우한테 이미 물어봤어. 나는 어떠냐고.』

권차경은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제이든은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고 권차경은 제이든을 재촉했다. 진지하게 나눈 대화가 아니란 건 제이든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권차경은 소원우의 대답이 궁금했다.

『소원우가 뭐랬는데?』

제이든은 권차경을 실컷 궁금하게 해 놓은 후에야 말을 이었다.

『나처럼 다정한 사람하곤 사귀고 싶지 않대.』

제이든은 싱글싱글 웃으며 권차경에게 물었다.

『내가 다정한 편인가?』

『그런가 보지.』

『대충 대답할 거야?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계속 날이 서 있네, 우리 차차.』

제이든은 권차경이 장난에 반응하지 않자 재미없다며 툴툴댔다.

호주에 떠나기 직전 권차경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좋아지지 않아서. 좋아할 수가 없어서. 몇 개월간의 연애가 겨우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권차경이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걸 미리 알았는지, 헤어지자는 말은 정작 오세미의 입에서 나왔다. 오세미는 눈치가 빨랐다. 권차경이 숨기고 있던 걸 알아챘다. 궁금한 게 많았을 텐데도 헤어질 때까지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화를 낼까 했는데, 돌이켜 보면 네가 날 서운하게 한 일은 없더라. 남자친구란 게 너의 임무라고 치면 넌 정말 잘했어. 사귀자고 한 사람도 나고,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사람은 나였으니까 이제 와서 왜 날 안 좋아해 주냐는 이런 불평은 안 할게.’

오세미는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길 잘했다면서 벌컥벌컥 커피를 들이마셨다.

‘근데 좀 분하긴 해. 날 좋아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이 말은 해야겠어. 네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떨쳐 내기 전에는 너 제대로 된 연애 절대 못 할 거야.’

오세미는 경고하듯 말했다. 공격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조언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오세미 전에도 고백은 여러 번 받았다. 오세미는 권차경이 소원희를 좋아했단 얘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모양이었다. 딱히 숨긴 적은 없어 암암리에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얘기였다. 소원희를 대하는 권차경의 모습을 보고 권차경에게 고백한 사람이 많았다. 오세미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권차경은 오세미와 사귀었다.

학교 앞 카페에서 오세미와 앉아 있다가 소원희를 본 적이 있었다. 권차경은 두꺼운 책을 안아 들고 걸어가는 소원희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몇 년 만에 보는 짧은 머리였다. 오세미는 권차경의 눈을 따라 밖을 흘긋 보더니 무덤덤하게 아직도 소원희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권차경은 아니라고 말했다. 단호하게 떨어진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세미는 미소를 지었다.

그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다만 뒷말을 생략했을 뿐이다. 권차경은 소원희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았다. 소원희와 닮은 사람을.

권차경은 소원희를 잊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잊는 과정이 이렇게 쉬울 줄 알았더라면 짝사랑 따윈 진작 관둘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에겐 질투심도 없었다. 소원희가 신보훈과 손잡고 걷는 걸 봤을 때도 살짝 씁쓸하고 말았다. 소원희에게 차여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어째서 그런 걸까 의문이 들긴 했어도 권차경은 자신은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하나 보다고 넘겼다.

곧 브리즈번에 착륙하겠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권차경은 젖힌 의자를 바로 하고, 식판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머릿속을 차지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권차경은 두 눈을 감았다. 루크가 사라진다면, 소원우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루크를 떨쳐 내고 나면 소원우를 떠올리는 일도 더는 없을 터였다. 권차경은 그렇게 믿었다.

* * *

오랫동안 비워둔 방은 그대로였다. 이불만 달라졌다. 권차경이 온다고 하니 새로 이불을 사 놓은 듯했다. 권차경의 부모는 시드니에 가 있었다. 급작스럽게 잡힌 출장인 데다 대응을 잘 하지 않으면 사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라 다른 날로 변경하지 못했다. 미안해하는 부모님에게 권차경은 괜찮다고 말했다. 부모님이야 1년에 두세 번은 한국에서 만나니 이번에 못 만난다 하더라도 아쉽지는 않았다.

친구들은 예전처럼 음식과 술을 하나씩 사 들고 권차경의 집에 모였다. 여기서 자고, 다 같이 루크의 묘에 가기로 했다.

『내년부턴 이렇게 다 모이기도 힘들 거야.』

『맞아. 다행이야. 내년에 왔으면 못 만날 수도 있었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슨은 시드니, 라이언은 멜번으로 간다고 했다. 권차경과 제이든도 호주를 떠나 사니 골드코스트에 남는 사람은 크리스밖에 없었다.

『캘런. 다음엔 또 언제 올 거야?』

『글쎄.』

권차경은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확실하게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루크의 기일을 보내고 또다시 진저리를 치며 호주를 떠날지, 아니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지는 권차경도 알 수 없었다.

『나 결혼할 때는 올 거지?』

『그래. 결혼식은 가야지.』

이슨은 미셸과 7년째 교제하는 중이었다. 7년을 사귀면서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었다. 이슨은 번듯한 직장을 잡아 미셸에게 프러포즈 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미셸에게 어떻게 프러포즈를 하면 좋을지 고민을 했다.

몇몇끼리는 가끔 만났지만 이렇게 다섯이 모인 것은 5년 만이라서 아무도 잘 생각을 않았다. 술 취해 늦잠을 자는 일이 없게 다들 적정량을 지켰다. 그러나 술기운에 점차 목소리는 높아져 가고,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묵은 얘기들도 잔뜩 터져 나왔다.

루크와 함께 한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쌓인 기억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나둘씩 꺼내다 보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권차경이 수상하게 보일 터였다. 루크의 기일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캘런. 너 루크만 졸졸 쫓아다녔던 거 기억나? 우리랑 친해지기까지 반년이나 걸렸어.』

『그때 캘런 완전 울보였어. 루크만 사라지면 안절부절못하고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 우리가 만날 루크 찾아 줬잖아.』

『맞아 맞아, 그랬어.』

술이 들어가니 속에 넣어 둔 말들이 길을 잃고 새어 나왔다. 한 명이 물꼬를 틀자 다른 이들도 하나씩 말을 보탰다. 루크와 왜 싸웠는지 말해 달라는 라이언에 이어 크리스와 이슨도 권차경에게 물었다.

『나도 줄곧 궁금했어. 말해 주면 안 되는 거야?』

『네가 정말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우리잖아. 우리가 보통 사이야? 우리한테 못 할 말이 어디 있어.』

섭섭하단 얼굴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을 제이든이 저지했다. 궁금한 건 제이든도 마찬가지였으나 제이든은 남들보다 인내심이 많았다.

『사정이 있겠지. 캘런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얘기 아닐까. 루크도 없으니 더 조심스러울 거고.』

『그런 거야? 차차.』

권차경은 앞에 놓인 맥주캔을 말끔히 비워 냈다. 이들에게 모든 걸 말해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권차경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스스로를 불편하게 가두었다. 말을 하고 나면 루크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차올랐다.

괜찮아. 이해해. 루크를 미워하는 게 당연해. 힘들었지. 고생했다.

이런 말들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는 혼자 깊은 밤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말할게. 그때도 듣고 싶어 한다면.』

그러나 권차경은 이번에도 말을 아꼈다. 저들은 여전히 루크를 그리워했다. 루크는 여섯 중에 제일 작았지만, 늘 중심에 있었다. 루크를 중심으로 관계가 유지됐다. 루크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나 많았다. 루크는 적극적이고, 유쾌한 성격이었으니 루크와의 시간을 즐겁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술자리도 같았다. 네 사람은 술을 마시며 루크와의 추억을 늘어놓았다. 루크가 권차경에게 한 일을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다 같이 모여 어린 시절 얘기를 주고받긴 어려울 터였다. 루크의 죽음을 여전히 슬퍼하는 그들에게 짐 하나를 더 실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권차경과 루크, 둘의 문제였다. 한쪽이 이미 죽었어도 루크와의 싸움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루크는 권차경이 호주에 와서도 꿈에 나타났다. 호주에 왔다고 사라질 거란 기대는 안 했다. 그래도 루크가 선명히 보이는 순간, 권차경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루크는 권차경을 가까운 곳에 불러냈기 때문인지 훨씬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럼에도 권차경은 루크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묻는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루크는 약이 오른 얼굴로 권차경을 건드리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차차. 넌 이기적이야.’

권차경은 더 참아 내지 못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루크. 이젠 내 탓을 하는 거야?’

악에 받쳐 소리치는 권차경을 보며 루크는 키득키득 요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너랑 내가 뭐가 다른데?’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잊었어?’

권차경은 이를 악물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도 나와 똑같아, 차차. 넌 모르나 본데 너도 나랑 같아.’

‘뭐?’

루크는 그 말을 하고 사라졌다.

권차경은 계속 루크의 이름을 부르다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깰 때마다 매번 꿈의 내용을 완전히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꿈에선 루크의 말이 생생하게 남았다. 하나라도 놓쳐선 안 될 것처럼 루크는 권차경에게 똑똑히 말해 주었다.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간에, 루크와의 일을 터트려 버리고 호주를 떠나 버리면 그만인데도, 권차경은 혼자 비밀을 간직했다. 루크는 그런 노력을 비웃었다.

권차경은 루크가 그립다며 눈물을 흘리는 라이언을 무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침이 오면 일찍 루크의 묘지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들처럼 울기는커녕 묘 앞에 서서 루크를 욕하지 않게 조심해야 할 판이었다.

한여름의 날씨답게 햇볕이 내리쬈다. 볕 좋은 곳에 루크는 잠들어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루크의 부모는 일부러 바다 가까이에 있는 묘지를 택했다고 했다. 루크는 바다를 좋아했다. 바다에서 빠져 죽었어도 루크를 묻을 가장 좋은 장소는 바다 옆이라 여겼다. 집에서 자주 찾아가긴 꽤 먼 거리였지만, 루크의 부모는 그런 수고 따위는 감내할 수 있었다.

무더운 날씨라 순식간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래도 권차경은 이 여름이 좋았다. 한국의 여름과는 달리 호주는 습하지 않았다. 그늘에 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반대편인 한국에선 연일 지속된 한파로 땅은 얼어붙고, 수도가 동파되어 난리였다. 물이 얼어 세탁기도 돌리지 못하는 강추위에 한국을 떠나 여름의 나라로 간다며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루크의 부모는 권차경을 반갑게 맞았다. 5년 사이에 무척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들. 캘런이 왔어. 오랜만에 만나는 거지?』

권차경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루크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권차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굳어있는 권차경의 얼굴을 본 제이든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자리를 비켜줄까요? 캘런은 5년 만에 온 거라 루크와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캘런의 부모는 흔쾌히 걸음을 옮겼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사 다 하면 주차장으로 와. 벌리헤드 비치로 갈 거야.』

제이든이 권차경의 등을 어루만지듯 툭툭 치곤 마지막으로 떠났다.

권차경은 루크의 이름이 적힌 비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굉장히 짧은 인생이었다.

『너한테 동정심 안 느껴. 네가 죽은 바다에 가도 그럴 거야.』

약에서 깬 루크가 찾아와 미안하다고 말했다면 권차경은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루크는 너무 빨리 죽었다. 루크가 권차경에게 잘못했다 말하기 전에. 권차경이 루크를 용서해 줄 기회도 주지 않고서 권차경이 계속 그를 미워하게 했다. 그것이 루크의 두 번째 잘못이었다. 누군가를 증오하면서 살아 봐야 득이 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루크에게 얽매어 빠져나가지 못했다. 반듯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은 오래전부터 엉망이 됐다. 루크가 그렇게 만들었다. 묘 앞에 서면 욕이 튀어나가지 않을까 했는데,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루크 테일러. 나 좀 놓아주면 안 되냐?』

도리어 애원이 나왔다.

『나 좀 놔줘. 이만하면 됐잖아.』

권차경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슬에 젖은 풀꽃들이 바지에 흔적을 남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출할 줄 알았던 술자리는 어디서 연락을 받고 왔는지 하나둘씩 합류하면서 몸집이 불어났다. 사람이 많으니 시끄러워지는 건 당연했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권차경은 전 여자친구였던 셀레나가 펍에 와 있는 걸 보고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기일 때문에 모인 거 아니야?』

술자리를 주최한 크리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렇긴 한데…… 생각해 봐. 루크 성격에 우리가 축 처져서 질질 짜고 있는 걸 과연 좋아할까? 너무 슬퍼하는 것보다 그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끼리 모여서 즐겁게 루크 얘길 나누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그래서 셀레나도 불렀어?』

『아니야. 난 안 불렀어. 쟤가 그냥 찾아온 거야. 너 골코에 왔다는 소식 다 퍼졌잖아. 루크 기일 겸 네 얼굴도 볼 겸 온 거겠지, 뭐.』

권차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펍에는 반가운 얼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루크는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루크의 친구들 중 몇몇은 약을 수시로 흡입하는 약쟁이들이었다. 권차경은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지만 루크는 새겨듣지 않았다.

펍에선 루크가 좋아했던 노래들이 쭉 재생되고 있었다. 루크를 추모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는데, 당사자인 루크는 몰라도 권차경에게 맞는 방식은 아니었다. 죄다 쾅쾅 울리는 노래뿐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귀를 꽉 틀어막을 게 아니라면 밖으로 나가는 게 나을 듯했다. 적당히 안부를 주고받을 사람과는 인사를 끝냈기에 권차경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쇼핑몰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중심 거리엔 밤을 누리러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의 걸음들은 분주하지 않았다. 목적 없이 느긋하게 주위를 방랑하던 두 다리들은 당연한 것처럼 해변에 다다랐다.

금빛 해변은 이 도시의 자랑이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자들은 바다를 사랑했다. 권차경도 그랬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을 꼽으라면 단연 바다였다. 프로 선수들이나 탄다는 서핑보드를 부모님께 선물로 받고 나서 권차경은 새벽마다 바다로 나갔다. 파도가 좋든 나쁘든 바다에 가고 보았다. 서핑보드는 권차경의 보물이었다. 서핑보드를 꼼꼼하게 닦아 부식되지 않게 관리하는 게 하루의 중요 일과였다.

한국으로 떠날 때 서핑보드는 호주에 두었다.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급하게 떠나느라 챙길 여력이 없어서였다. 한국에서의 첫 여름에 권차경은 종종 소원우에게 호주에 두고 온 서핑보드 얘기를 했다. 그리고 8월의 마지막 날, 서핑보드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이미 여름은 끝을 고하는 중이었고, 해수욕장은 폐장했으니 때늦은 선물이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권차경이 아끼던 보드보단 모든 게 별로였다. 가격 차이부터 상당했다. 고등학생이 살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괜찮은 걸로 고른 듯했다. 서핑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제 능력껏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은 보드를 권차경은 기쁘게 받았다. 면밀히 따지면 권차경에게 이국인 한국에 정을 붙이게 된 날이 그날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소원우는 대단한 일을 해낸 거였다. 친구 하나 없던 한국이었으나 살 만했다. 누구 때문에.

『캘런.』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권차경을 누군가 불렀다. 권차경은 뒤를 돌아 얼굴을 확인했다.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온 줄 알았건만. 권차경은 냉랭한 말투로 답했다.

『용건만 말해.』

『오랜만에 보는데 그런 눈으로 볼 거야?』

『셀레나. 루크 때문에 온 거면 루크 추모나 해.』

권차경의 말에 셀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권차경이 그렇게 말할 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셀레나와는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헤어졌다. 셀레나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은 루크였다. 루크의 연락을 받아 파티 장소로 갔을 때, 셀레나는 약에 취해 권차경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셀레나의 상대는 루크의 친구였다. 권차경은 그 자리에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와 사귈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셀레나가 찾아와 매달리며 빌었다. 약에 취해 저지른 실수라고 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사랑한다고 용서해 달라는 셀레나를 권차경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뒤로 권차경은 셀레나에게서 오는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난 루크 싫어해. 루크 때문에 너랑 헤어진 거야. 난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네가 다른 남자랑 잤잖아, 셀레나.』

『그건 캘런이 날 외롭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외로웠다고?』

권차경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 외로웠다니. 뒤늦게 이런 불평을 내뱉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소홀히 했었어? 내가 알기론 난 너한테 최선을 다했는데.』

『날 특별하게 여겨 주지 않았잖아.』

『어째서 네가 특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난 최선을…….』

『최선! 그래. 최선을 다했겠지.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했겠지.』

셀레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연애는 두 번째라고 해서 애정 표현에 서툰 줄만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라 그냥 날 좋아하지 않은 거였어. 그걸 누가 말해 줬는지 알아?』

셀레나는 맞춰 보라는 듯 권차경에게 질문을 던져 놓고는 권차경의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루크 테일러. 루크가 그랬어.』

『난 루크에게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 같은 거 한 적 없어.』

『알아, 나도. 너랑 헤어진 뒤에 루크가 그러더라. 차차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뻐기면서 하는 소리가 네가 꼭 충성스런 개 같대. 날 비웃더라고, 그 나쁜 새끼가.』

충성스런 개. 친구를 표현할 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권차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권차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던 셀레나는 흠칫, 몸을 떨면서도 할 말을 마저 끝냈다.

『내가 루크에게 말했어. 그래 봐야 캘런에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넌 물러나야 할 거라고. 네가 캘런과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난 했으니까 난 네게 진 게 아니라고 그랬지.』

루크와 셀레나 사이에 있던 일을 권차경은 처음 들었다. 셀레나는 아무도 모르는 얘기라고 말했다. 누구한테든 털어놓고 싶었지만, 루크가 죽고 나서는 그럴 마음도 먹지 못했다고.

많은 이들이 슬픔에 잠겼다. 한창 젊은 나이에 바다에 빠져 죽은 이를 모두가 그리워했다. 다른 남자와 자서 캘런에게 차인 사람의 말을 누가 들어줄까 싶었다. 그래도 셀레나는 캘런을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루크는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캘런은 한국으로 떠난 뒤였다.

『네 소식을 아는 사람이 몇 없더라. 가끔 다른 애들의 페이스북에서 네 사진을 보긴 했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안도했지. 근데 최근 2년 동안은 네 사진 한 장도 안 올라오더라구.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는데 네가 여기에 왔다잖아. 그래서 널 보러 온 거야. 루크 기일 때문이 아니라.』

두통의 원인을 없애려고 호주에 왔는데, 나날이 고통은 커져갔다. 진절머리가 났다. 권차경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루크 욕하고 싶어서?』

『아니. 네가 또 속아서 루크를 보러 왔나 해서. 루크가 너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네가 루크를 보러 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셀레나가 손을 뻗었다. 권차경은 자신의 팔에 닿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을까. 몇 걸음은 떨어져 있던 셀레나가 어느새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줄곧 사과하고 싶었어. 미안해, 캘런.』

셀레나는 발개진 눈으로 말했다. 셀레나의 떨림이 권차경에게도 전해졌다. 셀레나의 손은 작은 힘에도 툭 떨어져 나갈 것처럼 가까스로 권차경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너무 많은 얘길 들었다. 머릿속에선 경보음이 울렸다. 이리저리 꼬인 줄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고 하는데 권차경은 지금 뭘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면 되나. 그러면 셀레나와는 깔끔히 마무리되는 건가.

권차경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셀레나의 손도 떼어 내지 못하고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이제 와서 너와 잘 지내보겠다고 욕심 부리는 거 아니야. 그냥 꼭 말하고 싶었어. 그리고…….』

셀레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한 번 목 안으로 넘기고선 입을 열었다.

『루크 미워해도 돼. 걔가 널 구해 줬다고 해서 네 애정을 강취할 순 없는 거야. 난 네가 루크에게서 해방되고 한국에서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네 얼굴이 너무 어둡더라. 그래서 쫓아왔어. 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캘런, 네가 원한다면 루크 얘길 퍼트려 줄 수 있어. 그럼 좋을까?』

셀레나는 권차경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당장 펍으로 달려가 루크가 했던 일들을 큰소리로 모두에게 일러 줄 생각이었다.

『됐어.』

권차경은 왼손을 들어 오른팔을 붙들고 있는 셀레나의 손을 떨어뜨렸다.

『네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라면 그래도 돼. 날 위해서라면 그럴 필요 없어.』

『왜? 왜, 캘런? 난 이해가 안 돼.』

『루크는 죽었어, 셀레나. 모두가 루크의 잘못을 알게 된대도 루크를 싫어하는 사람만 늘어날 뿐, 내 일상에 달라지는 건 없어.』

권차경이라고 셀레나와 같은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혼자만 증오하는 게 힘들어, 루크를 증오할 사람이 더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루크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은 아니었다. 죽은 루크는 상처받지 않을 테고, 루크에게 내던진 칼은 도로 권차경에게 와 박힐 거였다.

『그럼 호주엔 왜 왔어?』

권차경은 셀레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이만 집에 들어가. 너 술 많이 마셨어.』

권차경은 해변가를 도는 택시를 잡았다. 셀레나는 할 말이 남은 것처럼 창문을 열었다가 손만 흔들었다. 권차경은 아무 말도 않았다. 손을 흔들지도 않고 셀레나를 태운 하얀 택시가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권차경은 펍에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택시를 타고 벌리헤드 비치로 갔다. 전날 다녀온 그 바다로 권차경은 다시 향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다. 휴가철이나 공휴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바다에 나와 시간을 보냈다. 한여름이면 바닷가 근처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권차경은 모래사장에 앉았다. 파도 소리도 요란하지 않은 밤이었다. 하늘엔 별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근래 한국의 하늘에선 별이 드물었다. 이 하늘 그대로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잠잠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사방에서 소리들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차 소리, 아이의 웃음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권차경은 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들 사이를 루크가 끼어들곤 했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권차경은 누려선 안 된다는 것처럼.

셀레나에겐 루크 얘길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이 없다 했지만, 루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자신 말고 하나 더 있다는 게 웃기게도 권차경에게 한 줌의 위로가 됐다. 루크는 자신과 셀레나를 망쳤다. 셀레나의 얘기를 들으면서 권차경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권차경은 정말로 셀레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셀레나와 헤어지고도 슬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셀레나가 다른 사람과 잔 걸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권차경은 슬퍼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 놓고 다른 사람과 잘 수 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

좋아하지 않고도 권차경은 셀레나와 잤다. 셀레나도, 그 전에 사귀었던 엘리도 그렇게 말했다. 섹스를 하면 좋아질 거라고. 섹스는 상대방을 더 좋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셀레나와 섹스했을 때, 권차경은 적당한 쾌감을 느꼈다. 자신의 몸은 셀레나에게 반응했으니까 셀레나가 좋아진 줄 알았다. 지금껏 쭉 그렇게 믿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리를 후려쳤다.

‘조금도 좋지 않았습니다. 전 수치스러웠고, 끔찍했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소원우는 그 밤에 대해서 조금도 좋지 않았더라고. 그래, 그렇게 말했다.

그때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지. 코웃음 쳤던 것 같은데. 자신에게 반응했으니까, 발기를 했으니까 소원우는 좋아했을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나.

자신을 좋아하면서도 포기하겠단 말 따위를 하니까 권차경은 확인해야만 했다. 소원우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동시에 자신은 소원우를 얼마나 싫어하게 될지.

권차경은 떨리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새까만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깊은 심연에서부터 루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차차, 너도 나와 똑같아.

권차경은 두 눈을 감았다. 바다를 피해 눈을 감으면 그 목소리가 끊길 것 같았는데, 도리어 더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차차, 너도 나와 똑같아.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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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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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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