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4)

4.

바르셀로나의 숙소는 소원우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묵었던 숙소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라 가격이 광장 주변의 다른 숙소들보다는 저렴한 편이었다. 하나하나 따져 보면 요즘 인기 많은 신식 호스텔에 비해 갖춘 게 부족했다. 엘리베이터는 건물에 하나뿐이었고, 침대는 개인 커튼이 없었고, 샤워실도 협소했다.

그래도 방에 딸린 테라스가 그 모든 단점을 상쇄시켰다. 테라스는 넓지는 않았지만, 여유롭게 바깥 풍경을 구경하기엔 충분했다. 테라스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작은 화분들이 놓인 테라스들이 옛 건물을 따라 줄줄이 이어진 것이 보였다.

저녁 늦게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바람에, 이대로 구경하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소원우는 가까운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잔뜩 사 두는 걸로 바르셀로나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잠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원우는 점점 커지는 신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소원우의 맞은편 침대 아래층에선 남녀가 누워 있었다. 신음 소리와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섞여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 명밖에 누울 수 없는 1인용 침대에서 둘이 누워 신음을 뱉는 이유는 하나였다.

소원우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럽의 호스텔은 대부분 믹스 룸이었다. 속옷만 입고 자는 남자는 널렸고, 남자가 있어도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여자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소원우는 고개를 홱 돌리고 어색한 표정으로 있었다. 문화 차이인가 보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있는 방에서 섹스를 하는 것도 문화 차이로 봐야 하나 의문이었다. 항의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소원우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을까 하다가 문득 맞은편 침대 이층의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철제 침대는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아래층의 흔들거림을 위층에서는 고스란히 느끼고 있을 터였다.

제이든은 앉아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다. 소원우처럼 잠을 방해받았을 제이든의 표정에 짜증은 보이지 않았다. 태평한 그의 태도에 소원우는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런 일이 흔하냐고 슬쩍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날이 되자마자 소원우는 이층 침대에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을 제이든 쉬터라 소개한 남자는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다. 틈만 나면 여행을 다니는데 바르셀로나엔 열 번도 넘게 왔다고 했다. 스페인에 사는 친구들이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하는데도 일부러 여행자들이 머무는 호스텔에 묵는다고 했다. 각 나라마다 호스텔 곳곳을 돌아다니며 별점 리스트를 만드는 게 제이든의 취미였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제이든은 어제와 같은 일을 종종 겪었다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의 사랑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법이라면서 소원우에게도 특별한 만남을 추천했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원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이든은 굉장히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대화를 나누다보면 유독 ‘경험’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새로운 경험은 사람을 새롭게 만들지. 그게 여행의 재미 아니겠어.』

제이든은 자신의 말처럼 다양한 경험을 했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익스트림 스포츠도 즐겨 했다. 제이든과 대화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제이든은 친한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어서 한국에도 몇 번 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제이든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한국의 청년들의 고민에도 공감을 표했다. 소원우는 제이든과 금세 친해졌다. 낮에는 시내를 돌아다니고, 밤에는 제이든과 술을 마시느라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 * *

소원우는 빠르게 씻고, 부랴부랴 가방을 챙겼다. 아침 8시 반까지 투어 모임 장소로 가야 하는데, 소원우가 일어났을 때는 7시 반이었다. 투어 전날엔 늦게까지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전날의 자신을 원망하면서 소원우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투어 업체에서는 소매치기가 극성인 명소들이니 여권이나 큰돈은 되도록 지니고 있지 말라고 했다. 나갔다가 방으로 다시 되돌아온 소원우는 어깨에 멘 가방 안쪽에 넣어 두었던 여권과 지갑을 꺼내 캐리어에 옮겼다.

다행히도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카탈루냐 광장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5분도 남지 않아서 소원우는 전력 질주를 했다. 이렇게 달린 것은 고등학교 때 계주 선수로 나선 이후 처음이었다.

소원우처럼 투어에 혼자 온 사람들이 몇 있었다. 사람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 주고, 점심도 같이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여행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처음 만난 사이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가우디가 설계한 공원과 건물들을 둘러보는 투어는 한나절 일정을 꽉 채웠다. 한국말로 설명을 들으니 귓가에 쏙쏙 박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갈 때마다 영어로 설명을 듣긴 했으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기본적인 영어 회화는 가능하다 생각했는데 그 이상은 무리였다.

구엘 공원과 몬주익 언덕, 카사 바트요, 카사 밀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도는 투어는 오후 5시 즈음에 끝이 났다. 여행객들을 태운 투어 버스는 아침에 모였던 카탈루냐 광장에서 멈췄다.

하루를 함께한 사람들은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워했다. 무리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말을 했던 남자가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야경도 보고, 밥도 먹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내놨다. 모두가 동의했다. 한 시간 후에 야경 명소로 유명한 벙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소원우는 일단 숙소로 향했다. 아침에 서둘러 챙기는 바람에 머리를 감지 못하고 모자를 쓰고 나온 터라 집에 가서 좀 씻고 싶었다. 돈도 넉넉히 챙겨 나올 생각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소원우는 속옷을 꺼내기 위해 캐리어를 열다 위화감을 느꼈다. 아침에 분주하게 챙기긴 했지만 옷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넣지는 않았는데. 소원우는 캐리어 안의 내용물을 뭉텅이로 들어 꺼냈다. 지갑과 여권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옷 사이에 껴있지 않을까 하나하나 다 털어 보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행 내내 캐리어에 채우고 다녔던 자물쇠가 보이지 않았다. 소원우는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원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처음엔 자물쇠를 잠그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다가 아무래도 소매치기가 염려되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돈은 최소한으로만 빼고, 여권과 남은 예산이 든 지갑을 몽땅 캐리어에 도로 넣었다. 그 다음 지퍼를 닫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허탈한 얼굴로 잠시 앉아 있던 소원우는 정신을 차리고 리셉션으로 갔다. 직원에게 오늘 체크아웃을 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명이 체크아웃을 했다고 했다. 캐리어에 넣어둔 여권과 지갑을 도난당했다고 하니 직원이 경찰을 불러 주었다. 경찰은 도둑을 잡기도 어렵고, 잡는다고 하더라도 소원우가 잃어버린 돈을 보상받기는 힘들 거라 말했다.

여권을 재발급받으려면 한국 대사관이 있는 마드리드로 가야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막 보름을 넘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기차나 비행기 같은 큰 교통수단은 미리 결제를 다 끝냈다 하더라도 숙박비와 식비가 문제였다. 돈도 없고, 카드도 없고, 여권도 없는 상황이었다. 휴대폰이라도 남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람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원우는 돈을 도난당해 나갈 수 없겠노라고 연락을 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구해 볼까 잠깐 생각했지만 겨우 몇 시간 얘기 나눈 사람에게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실례일 듯해 그만두었다.

여행 커뮤니티를 확인해 보니 여행하면서 소매치기를 당했거나 호스텔에서 도난당한 사례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한인 민박에서 도난당했다는 사례도 꽤 있었다. 그 일이 자신에게도 닥칠 줄은 몰랐다.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허기는 밀려왔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밥을 사먹을 돈은 물론이고, 카드도 없었다.

『원우. 재밌게 놀다 왔어?』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소원우에게 제이든이 말을 걸었다. 싱글싱글 웃던 제이든이 가라앉은 소원우의 얼굴을 보고서 표정을 굳혔다.

『헤이. 무슨 일이야.』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걸 자책하는 소원우에게 제이든은 평소 말버릇처럼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말하는 대신에 다른 걸 물었다.

『내가 돈 빌려줄까?』

손간 소원우의 귀가 쫑긋 섰다.

『얼마 정도 필요해?』

제이든은 소원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갑을 열었다. 지갑 안엔 지폐가 수두룩했다. 제이든은 세 보지도 않고 덥석 집어 소원우에게 내밀었다. 소원우는 깜짝 놀라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제이든. 나 이 돈 못 받아. 언제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제이든과 얘기할 때마다 참 호탕한 성격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만난 지 며칠 안 된 사람에게 흔쾌히 돈을 빌려주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괜찮아. 원우는 돈이 필요하고, 난 돈이 있고.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건데 뭐 어때. 어차피 나 여행할 돈은 남겨 두고 빌려주는 거야. 부담 없이 받아도 돼.』

『날 뭘 믿고 돈을 빌려줘. 내가 이 돈 갖고 연락 끊으면 어떡하려고.』

소원우의 거절에도 제이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근데 원우는 안 그럴 거잖아. 꼭 갚을 것 같은데?』.

『당연하지.』

그래도 소원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불편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제이든이 소원우를 달랬다.

『이대로 여행이 끝나 버리면 바르셀로나는 원우한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그럼 나도 아쉬울 거야. 난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가 원우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거든. 내 욕심이기도 하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받아도 돼. 남은 여행을 잘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그때 나한테 돌려줘.』

제이든은 소원우의 손을 직접 잡고 돈을 건네주었다.

『정말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 우리 서로 안 지 얼마 안 된 사이인데.』

『우리 친구 아니었어? 이런. 난 이미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원우는 아니었던 거야?』

제이든은 일부러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소원우는 냉큼 자신도 친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됐다는 듯 제이든이 씩 웃었다.

『친구가 되는 데 긴 시간은 필요 없어. 안 지 얼마 안 됐어도 얼마든지 특별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다. 소원우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목소리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다신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주 간만에 얼굴을 떠올렸다. 예전만큼은 힘들지 않았다. 소원우는 금세 평정을 찾았다.

『아, 그리고 나 두 달 뒤에 한국 가. 내가 얘기한 적 있지? 한국에 친구 있다고. 한국 가면 연락할 테니까 빌린 돈은 그때 줘. 그럼 됐지? 이제 걸리는 거 없지?』

제이든은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고서 싱긋 웃었다. 소원우는 제이든의 친절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이든, 고마워. 정말로.』

『고마우면 나 한국 갔을 때 소원우가 가이드 해 줘.』

『그걸로 되겠어?』

『그럼. 충분하지.』

마드리드로 떠나기 전까지 소원우는 제이든과 함께 보냈다. 제이든은 가이드를 자처했다. 제이든은 바르셀로나의 숨은 맛집과 명소로 소원우를 안내했다. 언제나 관광객들이 많은 바르셀로나지만, 제이든 덕분에 일요일에 세 시간만 개방하는 특별한 정원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제이든의 유쾌한 성격은 소원우를 계속 웃게 했다.

『제이든. 이 은혜는 절대 못 잊을 거야. 네 덕분에 바르셀로나는 좋은 기억밖에 없어.』

『와. 진짜? 다행이야. 우리 또 언젠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나자.』

『응. 그 전에 한국에서 만나고!』

소원우는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전에 제이든의 런던 집 주소와 메일 주소, 휴대폰 번호를 받아 놓았다. 제이든에게 자신의 집 주소와 메일 주소, 휴대폰 번호도 적어 주었다.

제이든은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소원우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앞으로의 삶을 걱정할 때, 제이든은 축 처진 소원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눈앞에 있는 풍경을 눈에 담으라고 했다. 미래를 걱정하면서 눈앞의 것을 놓치지 말라면서. 제이든의 말을 듣다 보면 모든 고민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제이든은 소원우의 은인이었다. 제이든 덕분에 남은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소원우는 두 달 뒤에 한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제이든과 작별했다.

* * *

소원우는 마드리드에서 새 여권을 발급받고 무사히 마라케시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모로코에는 사하라 사막이 있었다. 오로지 사막 때문에 모로코 여행을 결정했다. 사막에서의 하룻밤을 위해서는 마라케시에서 버스를 타고 열세 시간을 가야 했다. 버스는 굽이굽이 산길을 달렸다. 버스가 딱 두 번만 휴게소에 멈춘다는 얘기에 소원우는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 봐 물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했다.

소원우가 예약한 숙소는 한국인에게 유명한 곳이었다. 한국인들만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숙소는 아니었으나 한국인의 입맛을 저격한 식사와 사진 서비스, 캠프파이어로 숙소를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숙소 건물의 벽은 사막의 색과 같았다. 소원우는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벽을 손으로 슥 매만졌다. 어두워서 제대로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잠깐 바라본 동네는 꼭 폐허처럼 보였다. 고층 건물들이 둘러싼 도시, 한밤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나라에 살다 보니 이곳은 시간이 멈춘 곳처럼 느껴졌다. 가운데가 뻥 뚫린 건물이라 방문만 열고 나오면 하늘이 펼쳐졌다.

별이 가득했다. 소원우는 드넓은 하늘을 꽉 메운 별들을 바라보았다. 최근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하늘에 별이 뜬 게 아니라, 별 사이사이로 하늘이 끼어든 것 같았다. 소원우는 방에 들어가다 말고 입을 벌리고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막 투어를 떠나는 사람은 소원우까지 여섯 명이었다. 공교롭게도 여자가 세 명, 남자가 세 명으로 비율이 딱 맞았다.

사람 수에 맞춰 낙타가 줄줄이 앉아 있었다. 소원우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자 직원이 낙타를 툭 쳤다. 앉아 있던 낙타가 다리를 폈다. 낙타가 일어서면서 반대로 소원우의 몸은 아래로 훅 쏠렸다. 직원이 익숙한 손길로 소원우의 몸을 붙들고 중심을 잡아 주었다. 꼭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었다.

광활한 사막은 어디를 봐도 동일한 풍경이었다.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모래 언덕은 끝이 없었다. 길을 잃지 않을 방법은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끌고 걷는 직원을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낙타는 모래 위를 능숙하게 걸어 다녔다. 누군가를 태우고 걷는 게 익숙한지 걸음이 일정했다. 그러나 낙타의 등에 앉은 소원우는 달랐다. 낙타의 발이 모래에 푹푹 파묻힐 때마다 소원우의 몸이 흔들거렸다. 낙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붙잡았다.

사막에서의 밤은 짧지 않았다. 지루할 만큼 사진을 찍고, 근사하게 차려진 모로코식 저녁을 먹고, 베르베르인의 공연과 함께 캠프파이어까지 즐겼다.

“같이 술 드실래요? 술이 엄청 많아요. 사막에선 술을 꼭 마셔야 된다고 해서 다들 하나씩 챙겨 왔거든요.”

제일 나이가 많은 남자가 소원우를 불렀다.

이슬람 문화권인 모로코에서는 술을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술을 마시지 않고 그냥 보내기는 아쉬운 사막의 밤인지라 쏟아지는 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여행자들은 와인이나 맥주, 보드카 등을 미리 사서 사막으로 가지고 왔다.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소원우도 그 사이에 앉아 종이컵 하나를 들었다.

“와인? 아니면 소주?”

어젯밤에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이가 물었다. 사막의 밤을 위해 모로코까지 한국 소주를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저는 와인으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소원우는 두 손으로 종이컵을 들어 와인을 받았다.

별똥별이 곳곳에서 떨어졌다. 하늘을 보고 술 한 잔, 별이 떨어지는 걸 보고 또 한 잔. 배가 잔뜩 불렀지만 술은 자꾸만 들어갔다. 탁탁탁 튀는 불씨 속에서 마시는 술은 술집에서 마시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여행자들이다 보니 화제는 주로 여행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전의 여정, 앞으로의 여정, 좋았던 도시, 실망했던 도시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말도 놓고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부터 해서 꿈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고 싶고, 고민은 무엇인지에 대해. 모로코를 떠나면, 아니 당장 이 사막을 떠나자마자 헤어질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속을 감추지 않았다. 어쩌면 헤어지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화제가 계속 뒤바뀌다가 어느새 연애 얘기까지 흘러 들어왔다. 여기 모인 이 중 연인이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원우는 사귀는 사람 있어?”

“없어요.”

“왜 없어. 한창 좋을 땐데.”

무척 안타깝다는 말투였다. 결혼보다는 여행을 선택했다며 연애가 고프지 않다고 방금 전에 말한 사람이었다.

“뭐……. 딱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

“아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난 네 나이 때 소개팅을 밥 먹듯 했어.”

“소개팅을 그렇게 많이 했으면 오히려 인기 없단 얘기 아니야?”

그는 바로 투정을 부리며 반박했다.

“아, 누나.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저 연애 한 번 했다 하면 오래 했거든요. 연애를 시작하기가 어려웠지.”

그는 자신은 이젠 연애에 관심이 없다면서도 소원우를 누군가와 이어 주고자 안달이었다.

“원우 어때? 원우 정도면 완전 괜찮지 않아?”

괜한 참견에 소원우는 낯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굴도 잘생겼고, 괜찮죠. 원우 요즘 여자들한테 완전 인기 있는 스타일이에요.”

“야, 거봐. 원우야. 너 인기 좋댄다.”

“근데 원우가 연애를 하고 싶어야 하지 옆에서 부추긴다고 잘 되나요, 뭐.”

“왜 연애에 관심이 없을까. 첫사랑은 있지?”

첫사랑은 언제나 모두의 주목을 받는 관심사인 모양이었다. 소원우의 편을 들어주던 사람도 갑자기 눈을 빛냈다.

“와. 궁금하다. 저도 듣고 싶어요.”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소원우는 도망갈 길이 없었다.

첫사랑. 소원우에겐 끔찍한 기억으로만 남은 단어였다. 스무 살 생일을 엉망으로 보내고, 소원우는 도피하듯 입대했다. 휴가를 나와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휴가가 며칠이든 거의 집에서만 보냈다. 가끔 소원희가 억지로 소원우를 바깥으로 끌고 나오긴 했지만,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더 바빠져서 소원우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소원우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영화를 쉬지 않고 봤다. 미드를 통째로 결제해 보다 보면 어느새 휴가가 끝났다.

첫 해는 그렇게 보냈다. 군대 밖에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와 얘기하지 않고. 소원우의 집은 S대학 근처였다. 권차경과 마주칠까 봐 소원우는 집 근처 편의점에도 늦은 밤에야 다녀오곤 했다.

그런 소원우를 밖으로 다시 끌고 나온 사람은 현의진이었다. 윤찬희와는 가끔 편지만 주고받았는데, 윤찬희는 며칠 안 되는 휴가 때, 소원우가 있는 철원으로 면회를 왔다. 저도 군인이면서 귀한 휴가를 소원우를 위해 썼다. 윤찬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건강하게 잘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랬는데 살이 다 빠진 소원우의 얼굴을 더는 못 보겠다며, 현의진에게 부탁을 해 놓았다.

현의진은 소원우를 데리고 다니면서 보양식을 챙겨 먹였다. 괜찮다는 소원우의 말은 듣지 않았다. 소원우의 모습만 보고도 현의진은 소원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는 게 당연하고,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는 하나, 같은 경험을 해 본 사람으로서 밥은 챙겨 먹여야겠다고 말했다.

현의진이 한 일은 딱 하나였다. 맛있다는 식당을 골라 다니며 밥을 같이 먹는 것. 두 번째 해의 휴가는 대부분 현의진과 보냈다. 겨우 다섯 술을 뜰까 말까 했던 소원우는 점차 양을 늘리더니 이내 밥 한 공기를 싹 비워 냈다. 모이를 받아먹는 새끼를 보는 어미 새처럼 현의진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밥 먹는 게 그리 중요한 거냐고 소원우가 물었을 때 현의진은 밥을 챙겨 먹는 일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잘 먹어야, 잘 잘 수 있고, 잘 자야 잘 지낼 수 있어. 잘 먹는 사람은 얼굴 빛깔부터 달라. 네가 못 지내는 걸 보고 권차경이 안타까워할까? 더 우스워질 뿐이야. 원우야. 권차경과 마주치는 걸 무서워하면 안 돼. 너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 얼마든지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권차경에게 그걸 증명해야지. 스스로에게도.’

바닥까지 낮아졌던 소원우의 자존감을 현의진은 천천히 끌어 올렸다. 소원우는 점차 대낮에도 외출을 했고, 사람들과도 만나기 시작했다. 권차경과 만날 일은 없었다. 전영재도 입대를 했으니 권차경의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은 없었다. S대학 학생들이 자주 드나드는 편의점에도 스스럼없이 다녔다.

권차경의 얼굴이 떠올라도 무덤덤해지기까지 꼬박 1년 반이 걸렸다. 오래 걸린 만큼 심장은 단단해졌다. 어떤 말을 들어도 더는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소원우는 초롱초롱한 사람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첫사랑 없어요.”

소원우의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말도 안 돼. 그럼 연애도 한 번도 안 해 봤어?”

“의외다. 소원우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고백은 받아봤지?”

연달아 들어오는 질문에 소원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왜 안 사귀었어? 고백한 사람이 별로였어?”

“아니요. 좋은 사람이에요. 단지…….”

소원우는 다음 말을 생각하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서은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서은나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소원우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소원우는 서은나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서은나에 대해 가볍게 툭 던져 놓고 싶지 않았다. 군대에 가면서 서은나의 소식은 끊겼다. 전영재에게 물어보면 소식이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겠지만, 소원우는 그러지 않았다. 서은나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길, 좋은 연인을 만났길 진심으로 바랐다.

소원우의 얘기를 시작으로 한 차례 연애 얘기가 휘몰아쳤다. 초등학생 때의 연애도 연애 경험으로 인정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놓고 한참을 토론하기도 했다.

별이 가득한 밤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걸 보고 있으면 속에 감춰둔 말들도 자연스레 나오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마음에 묻어 놓은 각각의 아픔들을, 이를 테면 이별의 고통이나 취업의 실패 따위들을 꺼낸 뒤 모래 깊숙이 묻었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갈 땐 여행을 시작했을 때보다 홀가분해져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여행이 좋은 점은 이런 거였다. 대단한 게 변하는 게 아니라, 일상이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 치유되지 않을 것 같던 상처가 어느 순간 가벼워지는 것.

겨울을 앞둔 사막은 찬 공기로 가득했다. 여름이라면 모래 위에 누워 별을 보다 잠들어도 됐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체온이 떨어지자 하나둘 간이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일출을 보고 사막을 떠나 하실라비드의 숙소로 갈 예정이었다. 잘 시간이 많지 않았다. 소원우도 뒤늦게 잠을 청했다. 깊은 밤이었다.

* * *

인천공항에는 바쁜 소원희 대신 윤찬희가 마중을 나왔다. 윤찬희는 입국장에서 나오는 소원우를 보고서 종이를 거세게 흔들었다. 소원우는 종이 내용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거 뭐야? 창피하게.”

[소원우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합니다.]

에이포용지에 매직으로 쓴 대단치 않은 플래카드였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소원우는 종이를 건네받아 곱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뭘 이런 걸 다 썼어.”

“한국 도착하자마자 이걸 보니까 느낌 딱 오지 않냐? 진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고 막.”

“어. 네 말대로 느낌 온다, 진짜.”

소원우는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윤찬희의 말대로 정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소원우의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에 와 기다렸을 윤찬희를 생각하니 뭉클해졌다. 소원우가 도착한 시간이 이른 아침이라 고마움이 배가 됐다.

“너 피곤하겠다. 집에 가서 푹 자.”

“너는?”

“나도 집에 가야지. 나도 집에 가서 잠 좀 자고 오후 즈음 일어나려고.”

소원우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개운한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비행기에서 몇 시간 푹 잔 터라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자자. 서너 시간만 자고 밥 먹으러 나가자.”

“그래? 너 안 피곤하겠어?”

“응. 괜찮아.”

소원우는 리무진 버스에 올라탔다. 서울대입구역까지는 한 시간 반쯤 걸린다고 했다. 출근 시간이 겹쳐 도로는 몇 번이나 정체되었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도로를 채웠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소원우는 마드리드의 공원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는데 눈 깜빡할 새에 한국의 버스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뭐가 제일 좋았어?”

윤찬희의 질문에 소원우는 고민했다. 좋은 게 너무 많았다. 중세 시대를 그대로 품고 있는 도시, 동화에 나올 듯한 아기자기한 집들, 정각이 되면 불빛이 깜빡거리던 에펠탑, 밤하늘을 메운 사막의 별, 가우디의 역작…… 발이 닿는 곳곳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리는 많았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

어느 곳에서든 소원우는 그 자유를 만끽했다. 한낮의 햇볕 아래에서 소원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시계가 필요 없었다. 아무도 소원우에게 시간을 보람차게 보내야 한다고 재촉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소원우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명문 대학이 취업을 책임져 주지 않는 현실이 되었음에도 그래도 명문 대학에 진학해야 다른 사람들보단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존재해서는 안 될 것처럼 살았다.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든지, 공연을 보든지, 게임을 하든지 간에 어쨌거나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냥 다 좋았어. 공원 한가운데 분수 주위를 아무 생각 없이 걸어보기도 하고, 잠깐 낮잠도 자고.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 가면 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지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잘 놀고 왔네. 잘했다. 아! 너 도둑맞은 건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묻고 싶었는데 너 여행 중이라 일단 그냥 넘겼거든.”

윤찬희는 여행 중에 자주 연락해 오지는 않았다. 잠시 연락을 멈춰 주어야 소원우의 여행을 돕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소원우의 일도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 소원우는 마드리드에서 새 여권을 발급받은 뒤에야 윤찬희에게 도난당한 사실을 밝혔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흥분하는 윤찬희를 소원우는 모두 잘 해결됐다면서 잘 타일렀다.

“바르셀로나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어. 런던에 사는 대학생인데 여행하는 데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흔쾌히 돈을 빌려주더라구. 마침 1월에 한국 놀러온대서 그때 만나기로 했어.”

“그 사람 진짜 대단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잘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돈을 팍팍 빌려줄 수 있지?”

윤찬희는 믿기 힘든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나도 신기해. 근데, 찬희야. 너도 대단해.”

“자식. 야, 눈 좀 붙여.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윤찬희는 씨익 웃으며 소원우의 머리를 헝클였다.

캐리어에 넣어 둔 짐들은 집에 오자마자 바로 정리를 했지만, 윤찬희와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빨래를 하지 못했다. 옷들이 두꺼워 두 번으로 나눠 해야 될 듯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사이 소원우는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소원희는 소원우가 떠난 사이 집에서 밥을 통 안 해 먹었는지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오늘은 소원희가 일찍 온다고 했으니 같이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다. 소원우는 파스타 재료들과 함께 스페인산 드라이와인과 사과와 오렌지도 바구니에 넣었다. 상그리아도 곁들이면, 달콤한 와인을 좋아하는 소원희의 입맛엔 잘 맞을 터였다.

근사하게 차려 놓은 식탁을 보고 소원희는 환히 웃었다. 소원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파스타는 금세 줄어들었다. 양이 모자라다고 해서 면을 더 삶아야 했다.

“제이든이 한국에 오면 나도 불러. 나도 만나고 싶어.”

“그래. 쌍둥이 누나 있다니까 제이든도 너 보고 싶어 했어.”

제이든은 벌써부터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윤찬희와 현의진도 제이든을 만나고 싶어 했다. 제이든이 한국에 오면 다 같이 모일 자리 한 번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사진 봤는데 잘생겼던데. 너 외국인은 별로야?”

“어?”

“외국인도 괜찮지 않아? 제이든은 어때?”

소원우는 당황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제이든은 게이 아니야.”

“너한테 너무 잘해 줘서 혹시나 했는데.”

소원희는 입술을 쭉 내밀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소원우는 벌써 세 번째 듣는 질문이었다. 윤찬희도, 현의진도 같은 질문을 했다. 제이든이 소원우에게 유난히 친절하게 대해 주긴 했지만,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제이든의 천성 같아 보였다. 한국 친구가 있어서 특별히 한국인을 더 반가워한다고 제이든이 말하기도 했고.

“연애를 한다면 제이든 같은 사람이 좋을 것 같아.”

소원희는 잔에 상그리아를 따르며 말했다. 네 번째 잔이었다.

“친절해서?”

“응. 다정하잖아.”

소원희의 말에 소원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제이든은 인도에 걸을 때 소원우를 안쪽으로 걷게 했는데, 소원우가 자신은 남자라서 그럴 필요 없다고 하자 제이든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남자라서가 아니라, 너는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너도 소중해. 그러니까 네가 안쪽에서 걸어.’

‘다음에. 이번엔 소원우가 안쪽에서 걸어.’

제이든은 배려심이 많았다. 앞에서 문을 잡아 주어 소원우가 먼저 들어가게 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챙겨 주고, 좋은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러나 제이든의 이런 친절이 왠지 모르게 거북했다. 제이든의 행동은 권차경과 비슷했다. 제이든을 볼 때마다 권차경이 연상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거부감이 들었다. 제이든의 다정한 손길을 소원우는 기꺼이 받지 못했다.

“난 다정한 사람은 안 만나려고.”

“왜?”

소원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말투였다.

“너무 다정한 사람은 못 좋아할 것 같아.”

사막에서 첫사랑이 없다고 말한 이유는 권차경을 좋아했던 사실이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권차경에 대해 어떤 기억도 남겨 놓고 싶지 않았다. 이제 권차경은 소원우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스쳐 지나갈 남이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마주한대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권차경의 영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차경 때문에 소원우는 다정한 사람에겐 사랑을 느끼지 못할 터였다.

* * *

제이든은 한국에 한 달가량 머문다고 했다. 소원우는 제이든에게 어디에서 묵을 것인지 물었다. 제이든이 원한다면 방을 내주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 자도 괜찮았다.

제이든은 2주는 친구의 집에서, 2주는 별점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여러 도시를 전전할 거라 말했다. 한국 여행을 함께하겠느냐는 제이든의 제안에 소원우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소원우는 제이든이 한국에 오면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제이든이 소원우에게 해 줬던 것처럼 소원우도 제이든에게 즐거운 여행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여행 경비와 교통비, 숙소 등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 제이든이 가려는 도시 목록을 미리 받았다. 소원우가 안 가 본 도시가 서너 군데 있었지만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주변에 많았다.

소원우의 한국 여행 얘기를 들은 윤찬희는 자신도 끼면 안 되겠느냐고 소원우를 졸랐다. 조수의 몫을 톡톡히 해내겠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윤찬희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소원우를 쳐다보았다.

복학을 앞두고 윤찬희는 틈만 나면 놀 생각만 했다. 소원우와는 달리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는 넉넉한 재정 상태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뒹굴어도 잔소리 하나 안 들어도 되는 게 더 부러웠다. 물론 소원우도 부모님이 베트남에 있으니 잔소리는 안 들어도 됐지만 윤찬희처럼 태평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웬만한 관광 도시는 다 여행을 해본 윤찬희가 곁에 있으면 여러 모로 든든할 터였다. 제이든만 허락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제이든은 친구들이 제이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원우의 말에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면서 기뻐했다. 하루는 집에 초대해 소원희와 같이 저녁을 먹고, 다른 날에는 윤찬희와 현의진과 함께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 윤찬희가 여행에 동참해도 되냐는 말에도 제이든은 반색했다. 거기까지는 순탄했다.

문제는 제이든이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는 모토를 소원우에게도 적용한다는 거였다. 제이든은 소원우에게 친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제이든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고 했다. 제이든의 친구라면 좋은 사람일 게 분명했다. 소원우는 흔쾌히 제이든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든이 온다는 날, 소원희는 하루 종일 요리를 했다. 제이든을 집에 초대하자는 제안은 소원희가 먼저 꺼냈다. 소원우가 받은 도움엔 비할 게 못 되지만 그래도 정성껏 제이든을 대접하고 싶어 했다. 전날에 한가득 장까지 봐 가며 외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 불고기와 잡채, 찜닭, 그리고 개인 취향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월남쌈까지 차려놓았다. 식탁이 꽉 찼는데도 소원희는 더 모자란 게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소원희는 제이든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소원우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만나서 반가워. 환영해.』

제이든은 웃는 얼굴로 살짝 허리를 숙여 소원희를 마주 안았다.

『집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소원우는 제이든의 가방을 받아 들며 물었다.

『오는 길은 안 어려웠어?』

『응. 택시 타고 왔어. 빌라 바로 앞에 내려 주더라.』

제이든은 소원우에게 케이크를 내밀었다. 소원우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고 했는데 제이든은 소원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빈손으로 와도 된다고 소원우가 몇 번이나 말할 때마다 제이든은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다. 제이든에게 자꾸 받기만 해서 미안한 마음에 소원우는 오전에 통화를 할 때도 선물을 사오지 말라고 강조했다. 다시 돌려보낼 거라면서. 제이든은 화난 체하는 소원우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먹는 건 괜찮잖아. 그치?』

제이든이 소원우의 팔을 가볍게 툭 치며 넉살을 떨었다. 그제야 소원우는 화난 표정을 멈추고 기분 좋게 케이크를 받았다. 제이든은 기억력이 좋았다. 바르셀로나의 노천카페에서 소원우가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제이든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원우는 케이크를 받아 냉장고에 넣었다. 후식으론 과일을 준비했는데, 제이든이 사 온 케이크도 같이 내가면 될 듯했다.

소원희는 밥을 가득 퍼서 제이든의 자리에 놓았다. 제이든은 자신의 앞에 놓인 고봉밥을 물끄러미 보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트를 미리 풀어야 될까?』

『제이든. 너무 무리하지 마. 남으면 음식 싸 줄게.』

『아니야. 먹고 싶은 음식이 너무 많아. 나 두 공기 먹을지도 몰라.』

예의상 하는 말이래도 종일 음식을 준비한 사람 입장에선 기분 좋은 말이었다.

소원우와 소원희도 나란히 앉았다. 간을 여러 번 보긴 했는데 제이든의 입맛엔 어떨지 몰라 두 사람 모두 긴장한 얼굴로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제이든은 제일 먼저 불고기를 집었다. 우물우물 불고기를 씹던 제이든은 만족스런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행히 음식이 제이든의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안심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제이든은 차려진 모든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입발림 소리만은 아닌 듯 제이든의 젓가락은 여러 음식을 골고루 오갔다. 제이든이 가리는 음식이 딱히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김치를 찾는 걸 보고 소원우는 새삼 놀랐다. 제이든은 김치 한 접시를 말끔히 비웠다.

『원우한테 전해 들었을 텐데 그래도 한 번 더 말할게. 원우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소원희의 인사에 제이든은 너무 과한 대접을 받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소원우는 아직도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겨우 밥 한 끼 대접했을 뿐이다. 신세를 갚으려면 멀었다. 제이든은 그런 소원우의 마음을 알아챈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만 고마워해도 돼. 원우를 도울 수 있어서 나도 좋았는걸.』

제이든의 따스한 눈빛에 소원우도 미소로 화답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

소원우는 제이든을 화장실로 안내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원희가 소원우의 등을 탁 치며 말했다.

“뭐야. 천사야?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있대.”

“그치. 나도 진짜 깜짝 놀랐어.”

소원희는 소원우의 손을 꽉 붙들었다.

“원우야. 제이든과 친구가 된 게 너한테는 엄청난 행운이다. 절대 놓치지 마.”

“응. 제이든이 런던에 한 번 놀러오라더라.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가 봐야지.”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기회를 계속 만들어야 돼! 연락 계속 주고받고! 제이든 같은 친구를 어디서 또 사귈 수 있겠어.”

소원우도 소원희의 말에 공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지금 알고 지내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이든 같은 사람은 또 만나기 어려울 터였다. 사람의 관계는 한쪽이 억지로 갖다 붙인다고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니다. 제이든이 연락을 끊지만 않는다면 소원우는 제이든과 오래도록 만나고 싶었다.

제이든이 사 온 케이크는 치즈케이크였다. 소원희는 싱글벙글 웃으며 케이크를 잘랐다.

『일부러 치즈케이크로 사 왔어. 원우랑은 따로 딸기케이크 먹으러 가면 되니까.』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든이 한국에 있는 동안 제이든과 만날 날이 많았다.

후식까지 다 먹고 나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요리하면서 중간중간 설거지를 하긴 했지만, 음식을 담았던 그릇들과 냄비가 싱크대에 산을 이뤘다. 혼자서는 힘들 텐데도 소원희는 뒷정리를 자처했다. 소원우가 돕겠다고 나서도 소원희가 밀어낼 게 뻔해서 소원우는 제이든과 밖으로 나섰다. 택시를 타기 전에 부른 배도 소화시킬 겸 집 근처 공원에서 잠깐 산책하기로 했다.

『제이든. 또 시간 언제 돼? 내 친구들 소개시켜 줄게.』

『잠시만. 스케줄 좀 보고.』

제이든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3일 뒤에 시간이 된다고 했다. 소원우는 오전에 과외 아르바이트 하나만 하면 오후 내내 시간이 비는 날이었지만, 직장인인 현의진에겐 평일 저녁 약속은 부담이 될 것 같았다. 소원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오는 주말 이틀은 다 약속이 있어?』

『토요일에 친구랑 외출하기로 했는데 조정은 가능해. 아! 원우는 목요일에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럼 내 친구를 먼저 만나는 거 어때? 그럼 토요일엔 원우 친구랑 만날 수 있어.』

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목요일에 만나자. 음, 근데 네 친구도 모르는 사람이랑 만나서 밥 먹는 거 그런 거 괜찮아 해?』

제이든과 성격이 비슷하다면 낯가림은 없겠지만, 소원우는 혹시나 그 친구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낯가림은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제이든의 소꿉친구라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벌써부터 반갑고, 호감이 갔다. 소원우는 기대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 * *

주소만 봤을 때는 어디인지 몰랐다. 근처 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면서 소원우는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이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레스토랑에 다다르기 전에 소원우는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소원우도 한 번 갔던 곳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의 용돈으론 사먹기 힘든 고급 코스 요리가 줄줄이 나오던 고풍스럽고 우아한 레스토랑이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식이었지만 불행히도 소원우는 그 음식의 맛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를 예약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소원우만 혼자 남겨져 나온 음식들을 억지로 먹었던 그곳에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소원우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안 좋은 기억을 계속 상기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소원우는 성큼성큼 걸었다. 소원우가 제이든의 이름을 대자 직원은 앞장서서 2층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인지 저녁 시간인데도 내부는 조용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직원과 소원우의 발소리가 퍽 크게 들렸다. 바닥에 닿는 구두 소리는 안쪽 끝까지 가서 멈췄다. 직원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원우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섰다.

소원우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제이든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제이든이 일어나 소원우를 반겼다. 제이든과 포옹으로 인사를 나눈 후에야 소원우는 제이든의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놀라면 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제이든의 앞자리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소원우는 놀란 눈을 애써 감추고, 여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고선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드디어 만났네. 이쪽은 캘런이야. 한국 이름은 차경이고, 옆에는 캘런 여자친구야.』

소원우를 바라보는 권차경의 눈에도 놀란 기색이 있었다. 확 티가 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소원우는 권차경의 눈에 스친 미묘한 감정을 알아차렸다.

소원우가 금방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진 것처럼 권차경도 그랬다. 제이든도, 캘런의 여자친구도 권차경과 소원우가 아는 사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재빠른 변화였다.

제이든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소원우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원우입니다.』

소원우는 미소를 띤 얼굴로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손을 흘긋 보더니 천천히 손을 마주잡았다.

『권차경입니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손을 잡자마자 바로 손을 풀었다. 권차경의 손은 무척 찼다. 바깥은 영하 5도쯤 되었으나 실내는 외투를 벗어도 괜찮을 만큼 따뜻했다. 그런데도 레스토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소원우의 손보다도 권차경의 손이 더 차가웠다.

원래 권차경의 손이 찬 편이었던가. 수년 전에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 터다. 손을 잡아 보자는 핑계로 종종 장난치듯 악수를 건넸으니까. 권차경의 손이 따뜻한 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고민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물가물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해 낼 필요는 없어서 소원우는 눈을 옆으로 돌렸다.

소원우는 자리에 앉기 전에 권차경의 여자친구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소원우와 눈높이가 같았다. 소원우와 비슷하거나 2~3센티 가량밖에 차이 나지 않을 듯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데 영어로 말을 해야 할지, 한국어로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망설여졌다.

“어…….”

소원우가 뜸을 들이자 여자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이든이 한국말을 전혀 못 해서 영어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네, 저는 소원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오세미라고 해요.』

오세미는 연예인처럼 보였다. 시원시원한 미소가 예뻤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화려한 인상이라 길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듯했다.

소원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제이든이 말했다.

『세미는 모델이야.』

『와. 정말 예쁘세요.』

『감사합니다.』

예쁘다는 말은 수천 번 들어봤을 텐데도 오세미는 정말 기쁘다는 얼굴로 웃었다.

메뉴를 봐도 어떤 음식을 골라야 할지 모를 것 같아서 소원우는 제이든에게 선택을 맡겼다. 전에 혼자 먹었을 때는 음식이 하나씩 들어올 때마다 무작정 집어 먹었다.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든 음식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셰프가 자부심을 갖고 만들었을 음식이었을 텐데 소원우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소원우는 맛있게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기억은 나쁜 기억을 상쇄시킬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큼 괜찮은 곳이니 소원우는 나빴던 기억을 덮을 겸 기대하는 눈으로 포크를 들었다. 코스 요리라 한 접시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아쉽지 않도록 음식이 계속 이어졌다.

한국인이 세 명인데 대화는 모두 영어로 이루어졌다. 영어가 모국어인 제이든과 권차경이 대화를 할 때는 말이 너무 빨라서 소원우는 단번에 대화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오세미도 미국에 몇 년 살았던 터라 소원우보다 훨씬 영어를 잘했다. 그러다 보니 소원우는 대화에 참여하기보다는 가만히 듣고 있을 때가 많았다. 제이든은 중간중간 소원우를 살피다가 통역을 하듯 소원우에게 한 번 더 천천히 말해주었다.

소원우는 식탁 아래에서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이든의 탄탄한 허벅지를 톡톡 쳤다. 제이든이 소원우를 쳐다보자 소원우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적었다.

THANK YOU.

제이든은 소원우를 보고 미소 짓고는 똑같이 소원우의 허벅지에 답장을 보냈다.

NO WORRIES.

별 것 아닌 대화인데도 허벅지로 주고받았기 때문인지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뭔가 낯간지럽기도 해서 소원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을 참으려고 소원우가 입을 꾹 다문 걸 보고 제이든은 일부러 소원우의 허벅지를 더 간질였다. 결국 소원우는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권차경과 오세미의 눈이 소원우에게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했죠? 근데 두 사람 꼭 몇 년 알고 지낸 친구 같아요. 제이든은 차경이보다 원우 씨랑 더 친해 보이는데요?』

오세미는 말을 끝내며 권차경에게 장난스런 눈짓을 보냈다. 권차경은 질문처럼 던진 오세미의 말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소원우가 보기에도 권차경과 제이든 사이엔 거리감이 있었다. 십여 년을 알고 지낸 데다 한국까지 놀러 올 만큼 친한 사이인데도 마냥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제이든이 일방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상황이었다. 몇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걸던 권차경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권차경의 외모는 변한 게 없는데 이질감이 들었다.

소원우가 열렬히도 좋아했던 권차경의 모습이 진짜였는지 소원우도 알 수가 없었다. 권차경을 남처럼 생각해서가 아니라, 여기 있는 권차경은 정말 낯선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제이든이나 오세미는 그런 권차경이 익숙한 듯했다.

소원우는 오세미를 보고 말했다.

『며칠 만에 제이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됐거든요. 친구가 되는 데 기간은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이든은 소원우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긴. 시간은 그다지 상관이 없죠.』

오세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원우의 말에 공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권차경은 달랐다. 권차경이 굳은 표정으로 소원우를 보고 있었다. 밥을 먹는 내내 권차경의 시선은 앞에 앉아 있는 제이든이나 오세미에게만 향했다. 권차경과 눈이 마주친 건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인사를 나눌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처음 인사할 때도 권차경은 웃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아니었다.

소원우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오래 눈을 마주 볼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주는 예의도 둘의 관계에선 불필요했다.

소원우는 연어스테이크를 크게 썰었다. 살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흩어졌다. 연어를 촉촉이 적신 소스 맛이 일품이었다. 만약 레시피를 안다 해도 이 맛을 내지 못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연어 맛있지? 나 작년에도 여기에서 연어 먹었었는데 맛있었거든. 원우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

제이든은 바르셀로나에서 소원우가 연어구이를 맛있게 먹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 소원우는 연어보다는 대구나 조기, 갈치 같은 흰 살 생선을 선호했다. 연어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제이든이 추천한 대로 연어 요리를 시켰다가 소원우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

『캘런이 스테이크로 통일하자고 했는데, 내가 소원우는 연어를 좋아할 거라 했어. 잘했지?』

이번에는 제이든과 오세미의 시선 말고도 다른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연어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소원우는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를 좋아했고, 생선보다는 소고기를 좋아했다. 소원우도, 소원희도 생선은 제일 뒷전이었다. 그러나 취향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법이다.

제이든은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강아지가 주인에게 몸을 부비며 애교를 피우듯이 제이든은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부딪쳐 왔다. 소원우도 흔쾌히 자신의 몸을 기울여 제이든의 몸을 받아냈다.

권차경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제이든과 오세미가 화두를 던지면 소원우도 틈틈이 껴서 얘기를 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사귀게 됐어요?』

제이든의 질문에 오세미는 반색하며 답했다.

『제 친구가 차경이랑 같은 대학 다니거든요. 축제 놀러 갔다가 차경이를 봤어요. 잘생겨서 눈이 자꾸 갔는데 역시나 학교에서 아주 유명하더라고요. 차경이가 잘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놓치고 싶지 않아서 제가 먼저 만나 보자고 했어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네요. 차차는 호주에서도 인기가 많았어요.』

『차차?』

오세미가 되물었다.

권차경의 영어 이름을 이미 알고 있던 소원우도 ‘차차’는 처음 들어서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호주에서 친구들끼리 캘런을 차차라고 불렀어요. 애칭이에요. 귀엽지 않아요, 차차? 캘런의 부모님은 캘런을 한국 이름으로 불렀는데 저희는 그 이름을 발음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경’이 어려워서 ‘경’을 발음하기 전에 차…… 차…… 하고 한 템포 쉬던 게 애칭이 됐어요. 제일 먼저 차차 라고 부르던 친구가 죽어서 그런지 캘런이 더 이상 차차라고 부르지 말라고는 했는데 습관이 돼서 가끔 툭툭 튀어나와요.』

『쉬터.』

차가운 목소리가 제이든의 말을 비집고 들어왔다.

『미안해. 실수했어.』

제이든이 얼른 사과했다. 그러나 삽시간에 얼어붙은 공기는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단순히 이름을 잘못 부른 탓만은 아닌 듯했다.

제이든을 성으로 부른 권차경은 말없이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제이든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따라 나갔다.

제이든이 나가자 오세미는 바로 한국말을 했다.

“화가 많이 났나. 차경이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아닌데.”

“그러게요.”

한국말이 편한 만큼 방심하기 쉬웠다. 소원우는 저도 모르게 오세미의 말에 수긍한 걸 알고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오세미는 소원우의 말을 넘겨들었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화가 길어지는 모양인데 먼저 먹을까요?”

“그래요.”

먼저 먹자고 말한 사람은 오세미인데 오세미는 디저트 접시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포크로 푸딩 끄트머리를 살짝 찍어 맛만 봤을 뿐이었다. 아주 작은 부스러기 정도였다. 의아하게 보는 소원우에게 오세미는 다이어트 때문에 디저트는 못 먹는다고 말했다. 오세미는 체중 감량이 필요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른 편이었다. 오세미는 소원우의 안타까운 시선을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하는 거 좋아요. 재밌어요. 몇 년 하지 못할 일인 것 같아서 최선을 다하려고요. 후회가 남지 않도록.”

달콤한 디저트를 바라보며 아쉬워하던 오세미의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소원우는 하고 싶은 일도 찾지 못했는데 오세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었다. 멋있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오세미와 사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원우가 디저트를 다 먹을 무렵에야 두 사람이 들어왔다.

『자리 비워서 미안해.』

제이든이 사과했다. 소원우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제이든도 권차경도 디저트를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원우가 접시를 비우고 나자 금방 파하는 분위기가 됐다.

『캘런은 세미 집에 데려다준대. 자기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같이 집에 들어가도 된다는데 어떻게 할까?』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냥 여기서 걸어가. 여기서 집 가까워.』

『응? 원우, 캘런 집 어딘지 알아?』

소원우는 코트를 입다가 멈칫했다. 권차경은 저 앞에서 걷고 있었다. 거기까지 소원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소원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손을 움직였다.

『어……, 네가 말했을걸. 한국에 오면 강남에 머무른다고.』

『그랬나?』

소원우의 둘러대는 말을 제이든은 더 파고들지 않았다. 소원우는 안도했다. 감정이 사라졌다고 기억까지 깡그리 지워지지는 않았다. 권차경의 손이 차가웠는지 따뜻했는지 헷갈렸다고 해서 그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잊힌 건 아니었다. 전에는 소중히 간직했던 것들에 무덤덤해졌을 뿐이었다.

권차경의 넓은 어깨나 기다란 손가락, 나직한 목소리도 그대로였지만, 소원우의 심장은 잠잠했다. 달라진 건 소원우 하나였다. 소원우 자신이 바뀌고 나니 권차경은 2년 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낯선 사람이 되었다.

2년은 길었다. 연어를 좋아하게 되고, 누구보다 소중했던 사람에게 무심해지는. 윤찬희가 공항에서 들고 서 있던 종이의 문구가 떠올랐다. 거창하게 무슨 새로운 인생이야, 했는데 정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소원우는 오히려 권차경을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권차경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속이 후련했다.

연애가 두려웠고, 사랑은 공포였던 암흑과도 같던 날들이 드디어 끝이 났다.

『원우, 다른 일정 없으면 술 한잔할래?』

축배를 들고자 하는 소원우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제이든이 물었다.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끌벅적한 가게들이 골목에 즐비했다. 토속적인 분위기를 내는 막걸리집 앞에서 소원우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 갈래?』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찍은 인증 사진이 SNS에 넘쳐 났다. 그러나 제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여긴 너무 시끄러워. 좀 조용한 곳 없을까?』

제이든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식사할 때까지만 해도 표정이 밝았는데 권차경과 나갔다 온 뒤로 제이든은 잘 웃지 않았다.

소원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보다는 인적이 뜸한 골목에 자리한 가게로 제이든을 데리고 갔다. 배부르게 먹었으니 안주가 맛있는 집이 필요치 않았다. 소주와 어묵탕 하나를 시켜놓았다.

빈 병은 어느 새 세 병이 되었다. 안주도 하나 더 늘었다. 소원희는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고 했는데 소원우는 술 배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소주 두 병은 거뜬했고, 컨디션이 좋은 날은 세 병도 괜찮았다.

제이든도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제이든도 잘 마시는 편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선 매일 밤 술을 마셨다. 꽤나 많은 양을 비웠지만, 둘 다 취하지 않아서 서로의 주량에 감탄하기도 했다.

소주도 마셔 봤다 하니 소원우는 빠르게 잔을 비우는 제이든을 말리지 않았다. 술이 당기는 기분을 알 것 같아서 제이든이 원하는 한 잔을 계속 채워 주었다. 빈 병이 하나 더 늘었다. 소원우의 얼굴도 뜨끈뜨끈 술기운에 달아올랐다.

『나 호주 사람이라고 원우한테 얘기했었나?』

『응. 골드코스트에 살았다고 했었어.』

『맞아. 아직도 내 친한 친구들 거기에 살아.』

『자주 못 만나서 아쉽겠다.』

『응……. 그래서 한국에서 캘런 만나서 너무 행복해.』

행복하다는 단어를 잘못 꺼낸 것처럼, 제이든의 낯빛은 어두웠다. 말도 조금씩 느려졌다. 드문드문 끊기기도 했다.

소원우는 혹시나 해서 제이든의 가까이에 있는 술병들을 테이블 끝으로 멀리 놓았다. 손에 잡히는 병이 없자 제이든이 팔을 쭉 펴고 술병을 잡았다.

『많이 마신 것 같아.』

『더……, 마시고 싶어.』

『오늘은 그만 마시고, 다음에 또 마시자.』

『지금 마시고…… 싶어. 속상하거든…….』

제이든의 말에 소원우는 깜짝 놀랐다. 레스토랑에서 제이든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제이든의 얼굴은 밝았다.

『친구랑 무슨 일 있었어?』

소원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권차경과 둘이 잠깐 나갔다 온 후부터 제이든이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제이든은 좀처럼 말을 잇지 않았다. 소원우도 더 묻지 않았다. 이럴 때는 뭘 어떻게 해 주려는 것보다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소원우는 잘 알고 있었다.

제이든은 잔에 담긴 소주를 단번에 비우고는 다시 채웠다. 소원우가 채워 줄 새도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던 제이든이 툭 내뱉었다.

『캘런이 집에 안 가.』

권차경이 집엘 안 간다니. 소원우가 의아한 얼굴로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호주 집. 호주에는 부모님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무덤도 있는데.』

무덤이라 했다. 자주 듣던 영어 단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제이든은 무덤이라 말했다. 누구의 무덤일까 생각해 보기도 전에 제이든이 먼저 말해 주었다.

『루크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근데 캘런이 보러 가질…… 않아. 루크가, 제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캘런인데……. 루크 죽고 나서 한국에 가더니 한 번도…… 호주에 안 갔어.』

속상하고 서운한 말투였다. 속을 달래 줄 것은 술밖에 없다는 듯 제이든의 손은 부지런히 술잔을 향했다.

루크. 소원우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권차경은 호주의 친구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뭉뚱그려 호주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듣기는 했다. 틈만 나면 서핑을 하러 바다에 가고, 새해 첫날엔 항상 다 같이 일출을 보러 가고, 바비큐 파티나 캠핑도 자주 했다고. 호주 얘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권차경은 호주가 화제에 오르는 걸 꺼렸다.

『캘런이랑, 루크…… 보러 같이 가고 싶어…….』

제이든은 어눌한 말투로 더듬더듬 말했다. 제이든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깜빡이더니 잠이 든 것처럼 곧 눈을 아예 감아 버렸다. 소원우가 제이든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 제이든의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아 소원우는 제이든의 이마에 손을 받치고 제이든을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

제이든이 취하는 과정엔 중간 과정이 없었다. 말이 살짝 느려진다 싶더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적지 않은 양을 마시기는 했지만, 취할 때까지 마시려던 건 아니라서 소원우는 당황했다. 제이든이 금방 일어날 수도 있으니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드문 골목에 위치한 가게라 소원우가 들어온 뒤로도 겨우 두 테이블 들어오고 말았다. 게다가 먼저 들어온 소원우보다 일찍 나갔다. 어느새 가게엔 소원우와 제이든밖에 없었다.

소원우는 텔레비전 앞에 무심하게 앉아 있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 몇 시에 문 닫나요?”

“1시요.”

주인은 고개만 뒤로 돌아 딱딱하게 대꾸했다.

소원우는 휴대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을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치워야 할 테이블이 하나라 그런지 주인은 마감 준비를 할 기미가 없었다. 얼른 나가라는 눈치를 주지 않는 걸 고마워하면서 소원우는 좀 더 앉아 있었다.

10분쯤 지났을 무렵,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소원우의 휴대폰 화면은 게임을 하던 그대로였으니 소원우의 것은 아니었다. 벨소리는 제이든의 코트 주머니에서 울리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벨소리에도 제이든은 미동도 없었다. 소원우는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Callan.

소원우는 모른 척하고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다시 꺼냈다.

제이든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걱정돼 전화를 했을 것이다. 데이터도 터지지 않는 나라를 배낭 하나 메고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어도 늦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걱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소원우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일단 가만히 있었다.

―『제이든. 어디야?』

제이든을 찾는 목소리는 다급했다.

―『어딘지 모르겠으면 지도 캡처해서 나한테 보내. 내가 거기로 갈게.』

옷을 입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소원우는 입을 뗐다.

“여기 ○○실내 포장마차입니다. 검색하면 위치 나올 거예요.”

권차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제이든의 휴대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아. 소원우…… 씨.

뒤늦게 붙여진 ‘씨’ 자에 소원우는 침을 삼켰다. 한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고, 짤막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왜 이렇게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걸까 싶더니 다른 게 아니라 언어 때문이었다. 한국어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가 확연한.

영어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대화하기가 좀 더 쉬웠다. 영어로 말하니 정말 낯선 사람 같았다. 아까 만난 사람은 권차경이 아니라 제이든의 친구 캘런이었는데, 한국말로 대화를 할 때는 캘런이 아니라 권차경이었다. 소원우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척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꼭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취할 기미가 안 보였는데 갑자기 잠들어 버려서요.”

소원우는 제이든을 흘긋 쳐다보았다. 제이든은 여전히 잠든 채로 엎드려 있었다.

―거기로 가겠습니다.

권차경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금방 도착할 터였다. 소원우는 주변을 정리했다. 놓고 가는 게 없는지 테이블 위와 아래를 한 번 둘러보았다. 소원우는 의자에 걸쳐 놓은 외투를 입고 나서 제이든의 코트를 챙겼다.

제이든은 운동을 한 몸이라 그런지 제이든의 상체를 들어 올리는 데도 힘이 꽤 필요했다. 소원우는 끙 소리를 내며 제이든에게 코트를 입히고 술값을 미리 지불했다. 제이든을 부축해 가게 앞에 나가 있으려고 했는데 소원우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제이든이 다칠 수도 있으니 소원우는 얌전히 권차경을 기다리기로 했다.

소원우는 몸을 돌려 텔레비전으로 눈을 두었다. 하루 동안 최대한 많은 음식을 먹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네 개의 햄버거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게 신기해서 소원우는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사람이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주인이 문 닫을 시간이라고 말하는 소리에 소원우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권차경이 서서 소원우를 보고 있었다.

“어…… 저희 일행이에요. 잘 먹었습니다.”

소원우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권차경이 제이든을 업으려는지 앉아서 제이든의 팔을 잡아끌었다. 혼자선 힘들 것 같아서 소원우는 제이든을 권차경의 등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제이든의 체격이 큰 편이라 무거울 터였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뒤에 서서 제이든이 혹시 떨어지면 바로 받칠 수 있도록 손을 가까이하고 걸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골목을 지나 큰 대로로 나왔다. 가게에서 차를 세워 둔 주차장까지 200m는 더 가야 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발소리도 주변 상가에서 나오는 소리들에 묻혔다.

제이든은 권차경보다 키는 약간 작았고, 체격은 더 컸다. 고등학교 때 럭비를 했다는데 그 덕인지 몸이 대단히 좋았다. 그런 제이든을 업고 걷는 게 쉽진 않을 것이다. 권차경은 제이든을 업고 걷다가 중간중간 멈춰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가 업을까요?”

권차경이 힘들어 보여서 한 번 물어봤지만 권차경은 반응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소원우는 한 발짝 뒤에서 권차경을 따라갔다. 이렇게까지 푹 잘 수가 있나. 소원우는 절대 깨지 않는 제이든을 보면서 제이든의 주사를 꼭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권차경의 차는 그대로였다. 권차경이 힘겹게 주머니에서 스마트키를 꺼냈다. 불이 한 번 깜빡이자 소원우는 얼른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권차경이 제이든을 뒷좌석에 눕히는 걸 보고 소원우는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무 말 않고 그냥 가 버리는 것도 좀 그래서 잠깐 망설이던 찰나였다.

“데려다줘야 됩니까?”

뒷문을 탁, 닫은 권차경이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그걸 바라고 주차장까지 쫓아온 사람처럼 보이나 싶어서 소원우는 냉큼 대답했다.

“아뇨.”

소원우가 주차장까지 따라간 이유는 제이든이 무사히 차에 타는 걸 보기 위해서였다.

“제이든이 걱정돼서 따라온 겁니다. 차에 탄 걸 봤으니까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소원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뒤돌아서 두어 걸음 뗐을 때였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뭐라고.”

소원우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권차경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하고 권차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권차경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렇게 제이든이 걱정되면 앞으로 제이든 만나지 마.”

황당한 요구에 소원우는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내내 하고 싶었을 텐데 어떻게 참았을까.

“제가 왜 그래야 되죠?”

소원우의 웃음에 권차경이 험악한 표정으로 소원우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몰라서 묻는 거야? 제이든이 나와 똑같은 짓을 당할까 봐 걱정돼서 말이야. 소원우 씨가 제이든에겐 안 그런단 보장이 없잖습니까.”

권차경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말했다. 그 때문에 지금 권차경은 캘런인지, 아니면 권차경인지 구분이 모호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소원우는 이를 악 다물고 말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쪽은 벌써 잊어버렸나 보죠? 앞에 앉아서 싱글싱글 잘도 웃던데. 마음 편해서 좋으시겠습니다.”

소원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단 한 번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권차경을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을 때까지 불면에 허덕였고, 편두통에 시달렸고, 위염은 나았다가도 금세 도졌다. 이제는 없었던 일처럼 웃을 수 있다고 해서 울면서 보낸 수많은 밤들이 소원우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마음 편한 적 없습니다. 제가 권차경 씨에게 잘못을 한 건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권차경 씨도 저한테 못할 짓을 했잖아요.”

“못할 짓?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좋아한 적 없습니다.”

“만져 주니까 섰잖아요.”

“그건…….”

소원우는 말문이 막혔다. 섰으니까 좋아한 거라니. 권차경의 말을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될지 캄캄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 밤에 권차경의 손길에 반응한 이유는 권차경을 좋아했기 때문일 터다. 그때까지만 해도 권차경을 좋아하는 마음은 1g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몸의 반응은 마음만 따라가지는 않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기도 한다. 권차경이 만질 때마다 소원우가 느낀 것은 설레고 행복한 감정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조금도 좋지 않았습니다. 전 수치스러웠고, 끔찍했습니다.”

소원우는 그 밤의 감상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때가 어땠는지는 그만 얘기하겠습니다. 다 끝난 얘기 계속해서 뭣 합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은 권차경 씨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권차경 씨를 봐도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아요. 제이든의 친구일 뿐입니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자신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속셈도 없고, 몰래 감추는 것도 없으니 제이든의 친구로만 봐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권차경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소원우를 바라보는 눈매에 힘이 잔뜩 실렸다.

“전 아직도 악몽을 꾸는데 말입니다. 소원우 씨는 잘도 끝내셨네요.”

권차경의 말에 소원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악몽이라니. 권차경은 악몽을 꾸는 이유를 소원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이든 만나지 마.”

권차경은 입을 악다물었다.

맹렬히 경고하는 말투였다. 대화는 도로 원점이었다. 열심히 설명했건만 소원우의 말은 조금도 권차경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소원우도 권차경이 바라는 건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제이든이 걱정되면 제이든의 소원부터 들어주지 그래? 제이든이 바라는 게 뭔지 알잖아.”

자세한 내막은 알지도 못하면서 소원우는 무작정 던졌다. 소원우의 생각은 적중했다. 권차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소원우는 한 마디 더 던졌다.

“나 경계할 시간 있으면 루크나 보러 가.”

소원우의 입에서 루크 이름이 나오자마자 권차경은 평정을 잃은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뭘 알아?”

주차장을 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소원우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권차경의 표정도 그랬다. 일그러진 얼굴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충격에 빠진 것에 더 가까운 얼굴이었다. 권차경은 소원우를 한참 노려보다 차에 올라탔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싫어할 줄 알면서도 민감한 얘길 꺼냈다. 열 받으라고 꺼낸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권차경을 흥분시킬 줄은 몰랐다. 계획은 성공했는데도 조금도 후련하지 않았다. 차의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도 소원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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