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4)

3.

윤찬희는 공부에서 손을 놓았다. 군대 갈 준비를 하는 것도 서러운데 공부까지 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기말고사를 코앞에 두고도 한량처럼 놀았다. 덩달아 소원우도 여러 번 윤찬희에게 끌려다녔다. 이렇게 표현하면 윤찬희는 입술을 내밀고 볼멘소리를 했다.

“네가 거부하면 안 부른다니까. 너도 막상 나오면 잘만 놀면서.”

윤찬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 소원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좀처럼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책을 펼쳐두고 딴생각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2학기 중간고사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냈으나 마지막 기말고사는 운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윤찬희는 군대에 가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산더미라며 명단을 만들어 놓았다. 한 명 한 명 만날 때마다 줄을 그었다. 윤찬희의 친화력이 남다르단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소원우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윤찬희는 발이 넓었다.

“너도 써 봐. 깜빡하고 못 만나고 가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윤찬희는 군대에서의 2년은 세상에서의 2년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몇 십 년 터를 잡고 있던 가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2년이다. 연인이 없던 사람이 결혼을 하고, 애도 낳을 수 있는 2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단까지 만들 만큼 만나야 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소원우는 명단 대신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소원희는 여행에 관한 모든 걸 소원우에게 일임했다. 머물 호텔,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모두 소원우의 마음대로 정하라는 거였다. 그 탓에 소원우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여행 정보만 검색하고 있었다.

소원우는 휴대폰의 시간이 10시가 넘어가자 휴대폰을 껐다. 3일에 한 번 꼴로는 밤 10시 즈음만 되면 일부러 전화를 꺼 두었다.

“또 전화 꺼?”

윤찬희의 물음에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차경은 눈치가 없는 거냐, 아니면 고집을 부리는 거냐? 네가 전화 몇 번 안 받으면 줄어들 만도 한데. 끈질기기론 세계 최고다, 진짜.”

윤찬희가 혀를 쯧, 찼다.

소원우가 말없이 생일 파티를 떠난 후, 권차경에게서 여러 번 전화가 왔다. 모두 받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소원우는 속이 안 좋아져서 바로 집으로 갔다 변명했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멀미를 한 줄 알고 있던 터라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권차경과 매일 주고받는 안부 인사가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좋지 않았는데 좋은 하루를 보낸 척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걸로 알고 있으니 소원우의 스트레스는 정점에 달했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연락을 하지 않아도 매일 연락했다. 소원우는 거의 대답만 했기 때문에 통화 중에 정적이 생기고, 메시지는 다음 화제로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기곤 했다. 그럼에도 권차경은 꾸준히 소원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국 소원우는 정말 전화를 받기 싫은 날에는 휴대폰을 끄게 됐다. 마침 시험 기간이라 공부에 집중하려고 휴대폰을 껐다는 핑계를 대면 권차경도 이해하고 넘어갔다. 온갖 핑계와 거짓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너 모레 생일인데 어쩔 거야? 진짜 원희랑 집에서 보내게?”

“응. 평일이잖아. 다음 날 학교 가야 돼서 어차피 오래 못 놀기도 하고. 원희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계속 집에 늦게 오거든. 원희는 지금 생일이고 뭐고 없어.”

“내가 보기엔 원희는 진짜 대성할 것 같아.”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소원우는 공감을 표했다. 소원희에게 신보훈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권차경과 연락만 주고받아도 소원우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소원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라 매일 신보훈을 봐야 했는데 어떻게 견디는지 궁금했다. 말끔하게 잊었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했다.

소원희의 대답은 명료했다. 아직 신보훈을 좋아하기 때문에 잊으려는 노력은 따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있는 거라고.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져서 이별을 택한 건 아니더라도 어쨌든 소원희와 신보훈은 헤어진 상태였다. 소원희가 목표를 이룰 때까지 신보훈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때가 되면 결정을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소원우의 질문에 소원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후회돼도 어쩔 수 없지. 근데 미래에 후회할지 안 할지 모르는 일 때문에 지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쌍둥이인데도 소원희는 소원우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서 있었다. 학창 시절엔 단 한 번도 소원희보다 뛰어난 성적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소원우는 무던히 그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소원우는 그 노력을 그만두었다. 소원희는 공부를 좋아했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흔쾌히 희생을 감내했다. 소원우가 따라잡고 싶었던 것은 성적 따위가 아니라, 소원희의 강단이었다. 그러나 소원우는 소원희처럼 아침잠을 포기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야. 너도 잘하고 있어.”

씁쓸한 얼굴로 웃는 소원우를 보고 윤찬희가 말을 돌렸다.

“우리도 군대 가기 전에 여행가자. 밤 기차 타고 정동진 가서 일출 보는 거 어때?”

“그래. 새해 일출은 군대에서 맞이해야 될 테니까.”

12월의 마지막 날이 입대일이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 * *

소원희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소원우는 부스럭대는 소리에 얼른 현관으로 나갔다.

“배는 안 고파? 야식 먹을래?”

“괜찮아. 안 그래도 배고파서 분식집 들러서 김밥 한 줄 먹고 왔어.”

소원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주방으로 직행했다. 소원우는 소원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소원희는 정수기에 차가운 물을 한 컵 받고는 단번에 마셨다.

“원희야. 내일 아침 먹고 가. 그럴 시간 있지?”

소원우는 냉장고를 열어서 재료를 확인했다. 미역국을 끓일까 말까 하다 일단 미역과 소고기를 사 두었다. 케이크도 살 테지만, 생일에 미역국을 먹지 않고 넘어가기는 뭔가 아쉬웠다. 미역국은 아침에 끓여 먹고, 케이크는 저녁과 같이 먹으면 좋을 듯했다.

“케이크 사려는데 뭐로 살까?”

“난 치즈케이크가 좋은데, 다른 것도 상관없어. 넌 뭐 먹고 싶은데?”

“나도 상관없어. 그럼 치즈케이크 사자.”

늦은 밤이라 대화는 짧게 끝이 났다. 소원희가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자 소원우도 방으로 향했다. 책상엔 책과 필기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소원우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은 전원을 끄지 않아도 잠잠했다. 덕분에 모처럼 진도가 잘 나가 두어 시간 더 공부할 생각이었다.

소원우는 유독 잘 외워지지 않는 부분은 포스트잇 플래그로 표시해 두고, 꼼꼼히 필기한 수업 내용을 다시 요점만 추려 정리했다. 이미 제출한 과제에서도 문제가 나간다고 해서 저장된 파일을 확인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들렸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었다. 누군가 찾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소원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곧바로 소원희도 방에서 나왔다. 소원우는 술 취한 사람이 집을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하고, 비디오폰으로 초인종을 누른 사람을 확인했다. 소원우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확인한 소원희는 아무 말 없이 소원우를 쳐다보았다.

“내가 부른 거 아니야.”

“알아.”

“……어쩌지?”

망설이던 차에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다. 늦은 시간이라도 집에 불이 켜져 있으니 자지 않고 있다는 건 바깥에 서 있는 사람도 알 터였다.

“나는 문 안 열어 주고 그냥 가라고 하고 싶어.”

“그렇게 할까? 그래도 돼, 원희야.”

소원우는 소원희의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소원우는 잠자코 소원희의 결정을 기다렸다. 소원우를 빤히 보던 소원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쟤가 왜 왔겠어. 열어 줘. 축하 인사는 오래 안 걸리니까 금방 가겠지.”

아. 소원우는 나지막하게 탄성을 뱉었다.

날이 바뀌었다. 권차경은 일부러 자정이 되기를 기다려 초인종을 누른 듯했다. 소원우는 소원희의 눈치를 보며 현관으로 나갔다. 소원우가 문을 열자마자 양손에 케이크를 들고 서 있는 권차경이 보였다.

“생일 축하해, 원우야. 축하한단 말 하고 싶어서 왔어.”

작년에도 자정이 되자마자 축하 인사를 들었지만, 오늘은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전화로 하지. 힘들게 여기까지…….”

소원우는 말을 흐렸다.

“요즘 통화 거의 못 했잖아. 너도 공부하느라 바쁘고.”

뜨끔한 소원우는 말없이 권차경을 안으로 들였다. 소원희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팔짱을 끼고 거실에 서 있었다. 차가운 기류에 소원우는 권차경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권차경이라고 냉담한 기운을 못 느낄 리 없는데 권차경의 표정은 환하기만 했다.

“원희가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랑 원우가 좋아하는 생크림케이크 샀어.”

권차경은 케이크 두 개를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소원희는 케이크 박스를 물끄러미 보다 소원우에게 물었다.

“너 생크림케이크 좋아해?”

“어, 응.”

“치즈케이크는?”

“그것도 좋아해.”

“둘 중엔?”

소원우는 무슨 케이크든 잘 먹었다. 부모님이 치즈케이크를 사 오면 그것도 잘 먹었고, 생크림케이크를 사와도, 고구마케이크를 사 와도 그랬다. 소원희는 치즈케이크만 먹어서 언제부턴가 생일엔 치즈케이크만 먹게 됐다. 소원우는 뭐든 좋았으니 상관없었다. 그래도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생크림케이크였다. 딸기가 잔뜩 박혀 있는 부드러운 생크림케이크가 좋았다.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단한 걸 소원희에게 양보한 게 아니니까.

“둘이 하나씩 먹으라고 두 개 샀어. 생일 축하해. 원우야, 원희야.”

권차경이 둘의 대화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권차경은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종이가방 두 개를 꺼냈다.

“이건 원희 거, 이건 소원우.”

권차경은 양손에 하나씩 선물을 들고서 내밀었다. 소원우가 한 발짝 걸음을 떼고 종이 가방을 받았다. 여전히 다른 하나는 권차경의 손에 있었다. 소원희는 선물은 받지 않고 쏘아붙이듯 물었다.

“내가 왜 널 집에 들였는지 알아?”

권차경은 아무 말 않았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지 소원희가 바로 이어 말했다.

“제일 먼저 너한테 생일 축하한단 말 듣는 게 원우한텐 큰 선물이 될까 봐. 그 정도의 행복까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어.”

소원우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근데 난 너한테 축하받고 싶지 않거든. 밖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기다려도, 내가 좋아하는 거 힘들게 찾아서 선물해 줘도 난 하나도 안 고마워. 그러니까 나한테 말고 원우한테 다 해. 원우는 너한테 축하받을 만하니까.”

소원희는 말을 끝내고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방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소원우는 주인 잃은 선물을 들고 있는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권차경이 낙담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권차경은 소원우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웃었다. 절망감이 배어 있는 눈은 아니었다. 권차경은 담담한 얼굴로, 덤덤하게 소원우에게 물었다.

“너는 내 축하 받아 줄 거야?”

마주선 권차경의 눈은 소원우만을 담고 있었다. 그 눈은 소원우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싫다고 대답한다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원우는 그러지 못했다.

“늦었으니까 자고 가.”

소원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차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이 표정 때문이다. 그래서 소원우는 싫다고 하지 못했다. 마치 소원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하는 표정. 소원희에게 거절당한 일은 없었던 것처럼 권차경의 눈엔 그 어떤 상심도 비치지 않았다. 소원희와는 별개로 자신의 존재가 권차경에게 특별하다고 느껴졌다. 착각이라도 좋았다. 그 착각이 소원우를 행복하게 했으니까.

케이크 두 박스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서 소원우는 한밤중에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시험 기간이라 냉장고 정리를 한동안 하지 못했다. 외식이 잦다 보니 기껏 만들어 놓은 밑반찬은 냉장고 자리만 차지하는 골칫거리였다. 언젠가 먹겠지, 하고 계속 놔두었던 걸 이제야 버리게 됐다. 유통기한이 며칠 지난 우유도 싱크대에 쏟아 붓고, 물크러진 채소도 다 꺼냈다.

권차경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소원우는 고개를 젓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빈자리에 케이크 두 박스를 넣고 보니 설거지거리와 음식물 쓰레기가 싱크대에 가득했다. 소원우는 고무장갑을 끼고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상한 음식물들을 다 버렸다. 작은 비닐봉지는 금세 꽉 차 하나를 더 꺼내어야 했다.

“원우야, 내가 쓰레기 버리고 올게.”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이 싱크대로 쑥 들어왔다.

“아니야. 내가 할게.”

“밖에 추워. 내가 얼른 갔다 올게.”

소원우가 말릴 새도 없이 권차경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집에 놀러올 때마다 편하게 놀다 가지만은 않았다. 설거지도 자처해서 했고, 술판이 벌어졌던 거실 바닥은 떠나기 전에 물걸레로 꼭 닦아 냈다. 알아서 분리수거도 척척했다. 권차경은 깔끔한 걸 좋아했다. 권차경의 집도 항상 깔끔했기에 소원우도 권차경이 집에 올 때마다 대청소를 했다. 눈에 보이는 구석구석 나름대로 깨끗이 쓸고 닦았는데도 더러운 얼룩이 남아 있거나 먼지가 쌓여 있는 게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소원우는 서둘러 설거지를 끝내고 더 해야 할 일이 있는지 주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어서 싱크대 주변 물기들을 닦아 내며 마무리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권차경은 책상 위에 펼쳐진 책들을 보고 공부를 더 하다 자도 된다고 했다. 자신은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면서. 시험 기간인 건 권차경도 마찬가지였는데 권차경은 날짜에 쫓기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등을 기대고 앉아 휴대폰을 보는 모습이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고등학생 때도 권차경은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전보다 낮은 점수를 받아도 무덤덤했다. 어렵지 않게 높은 성적을 되찾곤 했기 때문인지 많은 학생들이 시달리는 성적 스트레스는 권차경에게는 없어 보였다. 여러모로 부러운 게 많았다.

소원우는 책을 덮고, 가방에 넣었다. 바로 뒤에 권차경이 있는데 책상에 앉아 공부에 집중하는 것은 무리였다.

“왜, 더 하지?”

“어차피 금방 자려고 했어.”

“미안. 내가 와서 폐만 끼치네.”

소원우는 괜찮다며 말을 돌렸다.

“폐는 무슨. 아, 맞다. 선물 지금 열어 봐도 돼?”

소원우는 권차경이 준 선물을 살짝 흔들었다. 소원우가 사각 박스를 곱게 싼 포장지를 뜯으려고 하자 권차경이 침대를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원우야, 여기에서 풀어 봐.”

소원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누워 잘 자리였는데도 거기까지 걸어가는 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침대까지 가는데도 긴장감이 맴돌았다.

권차경은 이불을 들어 소원우가 침대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소원우는 조심스럽게 권차경의 옆에 앉았다.

“뭘 사는 게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 원우 네가 워낙 좋은 걸 선물해 줘서 말이야.”

권차경은 자신의 손목을 슥 내밀었다. 권차경의 손목에 걸린 시계는 소원우가 오랫동안 고심해서 고른 것이었다. 권차경의 단단한 손목에 어울릴 만한 디자인을 고르고 골라 선택한 시계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잘 어울렸다. 소원우는 고개를 숙여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며 거친 손길로 포장지를 뜯어냈다. ‘TAG HEUER’ 라고 적혀 있는 검정 박스가 보였다. 소원우도 익히 들어본 브랜드 이름이었다.

“군대에서는 시계가 필수라며. 너 군대 가면 자주 못 볼 텐데 서로 선물해 준 시계 차고 있으면 왠지 가까이에 있는 기분이 들고 그러지 않을까 해서.”

권차경은 소원우가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차길 기다렸다. 그러나 소원우는 섣불리 시계를 꺼내지 못했다. 소원우가 권차경에게 한 선물보다 세 배는 더 나가는 것이었다. 소원우로서는 나름대로 비싼 값을 주고 산 시계였는데도 권차경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원우는 힐긋 권차경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권차경의 손목을 볼 때마다 뿌듯했는데 지금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권차경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시계를 차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소원우는 불안해하면서도 당당하게 권차경에게 묻지 못했다.

소원우가 가만히 시계를 보기만 하자 권차경이 소원우의 손에 놓인 시계 박스를 도로 가지고 갔다.

“내가 껴 줄까? 손 내밀어 봐. 껴 줄게. 이런 건 직접 껴 주면 더 의미 있잖아.”

소원우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권차경의 손은 소원우보다 빨랐다. 소원우가 벌린 거리를 단번에 좁히고서 권차경은 소원우의 손목을 붙들었다. 힘이 들어 있지 않은 손이었는데도 소원우는 뿌리치지 못하고, 권차경에게 손을 맡겼다.

고가의 시계를 군대에 가지고 가라니. 훈련을 받다 보면 바닥에 구르고 나뒹구는 게 일과에다 먼지와 진흙탕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시계에 흠이 생기는 건 당연했고, 수명도 보장하지 못했다. 전역한 선배들이 괜히 저렴한 전자시계를 가지고 가라는 게 아니다.

“잘 어울린다. 예뻐.”

권차경은 흐뭇한 얼굴로 소원우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숫자와 브랜드 이름이 박힌 파란색 베젤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소원우는 손목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지나치게 묵직했다. 시계가 아니라 권차경의 우정이 너무 무거웠다.

“고마워.”

소원우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시계를 풀고 박스에 넣었다.

“벌써 풀어? 손 나란히 하고 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자자, 그만.”

소원우는 시계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불을 껐다. 방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침대를 찾는 일은 매일 하는 일이니만큼 간단했다. 지난밤과 다른 게 있다면 침대 가운데가 아니라 한쪽에 눕는 거였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으로 공간을 재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베개를 찾아 머리를 기대고 누운 순간, 권차경이 “잘 자.” 하고 말했다. 소원우도 똑같이 말했다.

권차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냈다. 소원우는 눈을 감은 채로 권차경의 숨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소원희의 말이 떠올랐다. 소원희는 권차경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끔찍이 싫어했지만, 소원우를 위해서 권차경을 집에 들였다. 권차경에게 축하를 받는다 한들 소원우로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못했다.

누군가를 권차경보다 더 좋아할 수 있을까. 소원우는 늘 그게 궁금했다. 부디 그럴 수 있길 바랐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소원우는 동아줄처럼 붙잡았다.

새벽에도 휴대폰은 부지런히 울려 댔다. 모두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였다. 시험 기간이라 다들 늦게 자는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휴대폰 화면의 밝기를 모두 줄이고 하나씩 답장을 보냈다. 맨 마지막 순서는 윤찬희였다.

[옆에 권차경 있어. 내 옆에서 자.]

소원우는 망설이다 윤찬희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들은 윤찬희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소원우는 전화를 받지 않고 메시지로 답변했다.

[차경이 잔다니까. 깨면 어떡해.]

[너, 참 지극정성이다. 권차경 옆에서 자니까 좋냐? 새근새근 잠든 얼굴 보니 행복해?]

[복잡해. 좋은데 싫고, 싫으면서 미안하고. 미안한데도 떨리고.]

[오늘 생일이잖아. 행복한 하루 보내야지. 오늘은 그냥 정직하게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소원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그 말을 한 번 더 읽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른침을 삼키고서 소원우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자는 얼굴을 마음껏 봐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카페에 앉아 있거나, 약속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권차경의 모습을 멀찍이에서 몰래 감상하곤 했지만, 오래 바라보지는 못했다. 힐끔힐끔 짧게 시선을 두다 금방 거두었다.

같은 침대에 잘 때도, 소원우는 천장을 향해 바로 눕거나 권차경과 등을 지고 누웠다. 욕망이 이글거리는 눈은 감추어지지 않을 터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도 아래가 뻐근해지곤 했다.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뛰어가다시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걸 권차경에게 들킨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한동안 권차경과 거리를 두면서 친구를 향한 더러운 욕망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이라는 아련한 이름 때문에 권차경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했다. 그러나 권차경은 저 깊숙이 묻어 놓은 소원우의 본능을 자극하고, 충동을 일으켰다. 권차경은 쉽게 소원우를 흔들어 놓았다. 권차경에서 멀어지려던 소원우의 안간힘은 또다시 물거품이 됐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윤찬희의 말이 마치 도화선이라도 된 듯 소원우의 몸은 권차경에게로 조금씩 향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소원우는 권차경의 얼굴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권차경이 깨지 않도록 소원우는 천천히 움직였다.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까지도 신경 쓰다 보니 겨우 몇 센티쯤 전진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한결 가까워진 거리에서 소원우는 다시 한번 권차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콧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다음은 가지런한 눈썹이 눈에 들어왔고, 감긴 눈두덩과 기다란 속눈썹을 지나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입술이었다.

권차경을 향한 조심스러운 움직임과 권차경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소원우의 눈. 1년여 전에도 소원우는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 분명히 교훈을 얻었을 텐데, 후회할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을 텐데, 소원우는 멈추지 못했다.

권차경의 생일에 권차경은 소원희를 찾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생일이니까 한 번 빌어 보려고. 내 사랑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원희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권차경은 소원희를 만나러 갔다. 소원희의 입에서 냉담한 소리가 쏟아져 나올 걸 예상했으면서도 권차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걸 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소원우는 자신의 행동을 용기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가엾게 여겨 달라는 애원에 가까웠다.

고작 말실수 하나가 많은 걸 망쳐 버릴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왜 욕심이 차오르는 걸까. 소원우는 마른 입술을 꾹꾹 눌렀다. 그런 작은 움직임으론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권차경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커져서, 마치 애드벌룬처럼 거대해져서 그걸 강제로 터트리지 않고선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을 핑계로 받고 싶은 것은 멋스런 시계가 아니었다. 시계를 건네며 했던 권차경의 말은 소원우에게 위안이 되지 못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소원우는 권차경과 관련된 많은 것들을 처분할 계획이었다. 권차경에게서 받은 선물이나 함께 찍은 사진 따위들을 빈 상자에 넣어 두고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기 전까지는 꺼내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권차경이 준 시계도 소원우의 손목이 아니라 그 상자 안에 채워질 터였다.

권차경은 결코 주지 않을 선물을 소원우는 받아내기로 결정했다. 소원우는 상체를 살짝 들어 머리를 권차경에게로 가져갔다. 권차경은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소원우는 숨을 훅 참았다. 딱 한 번이다. 딱 한 번. 아주 짧게 부딪치고서 곧장 떨어지면 되는 일이다. 그다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아침이 되면 평상시처럼 함께 밥을 먹고 집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며 하루하루 마음을 죽일 것이다.

소원우는 고개를 숙여 권차경의 입술로 슬며시 다가갔다. 꾹 누르지도 못했다. 부드럽다거나 촉촉하다거나 황홀하다거나 하는 어떤 감상도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겨우 입술 끝을 스쳤을 뿐이었지만 소원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소원우는 다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던 순간, 소원우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빛나는 눈빛을 마주했다.

언제 잠에서 깼는지 권차경의 눈이 소원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원우는 중심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권차경이 일어나 앉았다. 등을 기대 편하게 앉은 권차경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원우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전과 같지 않았다. 소원우는 침만 삼켰다. 사막에서 온종일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갈증이 일었다.

잠시간의 정적은 권차경의 질문으로 끝이 났다.

“원우야. 나 좋아해?”

흥분은 조금도 실리지 않은 태연한 목소리였다. 놀랐다거나 충격받은 기색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소원우는 사실을 말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응.”

“왜 좋아하는데?”

권차경은 친구에게 입맞춤을 당한 사람 같지 않게 너무나도 차분했다.

권차경이 좋은 이유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수천 번 생각했다. 고민할 때마다 우연히 교내 정원에서 마주쳤던 순간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권차경은 알지 못하는 순간이다. 권차경이 소원우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체육대회 날부터였다. 오로지 소원우만 간직하고 있는 여러 순간들에서 권차경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배려심 많고, 다정하고, 말을 예쁘게 하고, 화를 잘 내지 않고, 운동을 잘하는 점이 좋았다. 옅은 눈동자와 듣기 좋은 목소리, 기다란 손가락에 자리한 말끔한 손톱도 좋았다. 권차경의 탄탄한 가슴과 넓은 어깨를 소원우는 늘 동경했다. 권차경이 좋은 이유는 ‘모르겠다’는 단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있으면 심장이 떨렸다. 멀리서 바라만 봐도 목이 마르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명확한 이유는 소원우도 몰랐다. 그저 좋았다. 두 번이나 같은 짓을 저질러 버릴 만큼.

“그냥…… 좋아. 처음부터 좋았어, 네가.”

소원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소원우도 느낄 수 있었다. 소원우는 눈에 힘을 꽉 주었다. 이런 허접스러운 고백에 눈물까지 섞이면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았다.

“나도 네가 좋아.”

얼어붙은 소원우와 달리 권차경은 태평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믿을 수 없었다. 소원우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고 눈만 끔뻑대며 권차경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얼마나 표현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눈에 힘이 탁 풀렸다.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은 소원우의 입술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소원우의 붉은 입술이 더욱 짙은 색을 머금었다. 권차경의 시선이 눈물을 따라 소원우의 입술까지 내려갔다.

소원우는 입술만 달싹였다. 권차경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엔 권차경은 무표정이었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굳은 얼굴이었다. 소원우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권차경의 입에서 나온 좋아한다는 말은 소원우의 것과 동일하지 않았다.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참았어야지, 그럼 우린 계속 사이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잖아.”

권차경은 등을 떼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소원우와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어린아이를 타이를 때처럼 권차경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아이가 손을 싹싹 빌며 잘못했다고 말하면 부모는 기꺼이 용서한다. 소원우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 네가 깨어 있는 줄, 몰랐어. 마지막으로…… 작별선물이라 생각하고, 나 곧 떠나니까…….”

변명인 줄 알면서도 소원우는 띄엄띄엄 말했다.

“군대 가면 나 안 보려고 그랬어? 나는 너를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데 넌 그냥 이러고 끝내려고 한 거야?”

권차경의 질문에 소원우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올곧은 시선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듯했다. 머리가 핑 돌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권차경은 아무 말이 없는 소원우를 물끄러미 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나를 좋아한다고 소원희에게 말했어?”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권차경에게 소원우의 침묵을 해석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린 권차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하. 널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원희가 나를 만나 줄 일은 절대 없겠다, 그치? 내가 뭘 하든 소원희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을 거 아니야.”

비아냥대는 말에 소원우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런 목적으로 소원희에게 말한 것은 아니다. 소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많이 지쳤고, 위로가 필요했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소원희에겐 어차피 신보훈이 있었으니까 소원우의 마음과는 별개로 소원희가 권차경을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소원희가 냉정하게 권차경을 거부할 때마다 안심하기는 했다. 소원우는 두 눈을 감았다. 눈을 계속 뜨고 있기가 버거웠다. 외면하고 싶은 것은 권차경의 메마른 눈빛만은 아니었다.

“원우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키스 하나면 날 포기할 수 있었어? 내가 계속 잠든 척했으면 마음 접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러려고 했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소원우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피식, 하고 소원우의 말에 끼어든 비웃음은 흘려들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권차경과 함께 많은 날들을 보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조소였다.

“키스가 뭐라고. 혀 좀 섞고 비비는 거에 왜 대단한 의미를 두는 거야. 우정을 포기해도 될 만큼 이딴 키스를 그렇게 하고 싶었어?”

“네가 너무 좋아서 포기가 안 됐어. 다른 사람을 만나 보려고도 했지만, 안 되더라. 네 전화도 피하고, 널 만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소원우는 시선을 바닥으로 두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 꼬이는 듯했다.

“남자 좋아해?”

소원우는 고개를 들고 단호하게 저었다.

“처음이야. 너 말곤 다른 사람은 좋아해 본 적 없어.”

“나랑 자고 싶은 거야?”

소원우는 말문이 막혔다. 소원우는 또다시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그런 상상을 한 적은 없었다. 꿈속에서 아무 옷도 입지 않은 권차경이 등장하긴 했었으나 소원우의 의지로 만들어 낸 건 아니었다. 숨겨 둔 욕망이 꿈으로 표현됐다는 것은 부인할 순 없겠지만.

“솔직하게 말해 봐. 응?”

“그런 생각한 적 없어.”

“내 생각하면서 자위한 적은 있고?”

아……. 소원우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질문을 한 권차경은 태연한 얼굴인데 도리어 소원우의 얼굴이 발개졌다. 말로는 답하지 못하고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은 어두웠다. 권차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권차경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긴 했지만, 그의 생각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번 자는 걸로 우정을 맞바꾸던데.”

소원우는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걸 바라지 않았다. 하룻밤 자는 걸로 그간의 고생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계획이었더라면 마음이 좀 더 가벼웠을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질질 끌지 않았을 터다.

“난 널 괴롭히고 싶지 않았어.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어. 널 상처…… 주려던 건 아니야.”

미안해. 소원우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허울뿐인 변명이네.”

소원우의 진심은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쏟아진 물은 도로 담을 수가 없는 법이다. 소원우가 어떤 말을 한들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그대로 덮을 수는 없었다.

“너는 원희의 동생일 뿐이었어. 원희에 대해 말해 주고, 원희와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지.”

알고 있었다. 권차경은 그럴 목적으로 소원우에게 다가왔다. 이용 수단에 지나지 않다는 걸 소원우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원우는 권차경이 좋았다. 자기 전에 통화를 하는 것도, 주말에 따로 만나는 것도 너무 좋았다.

“그날 밤에 네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너는 내 친구가 아니라, 원희의 동생으로만 남았을 거야.”

그날 이후 권차경은 소원우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지만, 아주 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날 밤이 권차경에게도 전환점이 된 모양이었다. 묘하게도 신뢰를 깨트릴 만한 사건이 오히려 권차경에겐 신뢰를 준 듯했다. 소원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해졌다고 느낀 것은 소원우의 착각이 아니었다. 소원우도 확연히 느낄 수 있던 거리감은 확 줄어들었다.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이전보다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 통화를 할 때 소원희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지나간 적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이긴 했지만, 소원우에겐 달력에 표시해 둘 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소원희의 동생에서 친구가 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으니 꽤 오래 걸린 셈이었다.

오래 걸린 만큼 권차경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소원우를 대했다. 누가 봐도 소원우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소원우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퍽 많았다. 개중에는 권차경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남자로 태어날 걸 그랬다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소원우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괜히 찔려서 소원우는 남들 앞에서 권차경의 칭찬도 쉽게 하지 못했다.

“너에게 친구로서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줬다고 생각해. 자는 사람에게 몰래 키스를 하는 쓰레기 같은 짓을 네가 정말 할 줄 몰랐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너랑 관계를 끊어 버릴 걸 그랬어. 시간 낭비했네.”

권차경과 함께 쌓은 모든 추억들이 소원우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권차경은 그 모든 걸 시간 낭비라고 했다. 단단한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 소원우는 그저 빌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차경아. 내가 잘못했어.”

소원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차경의 손을 붙들었다. 부끄러운 죄목이라서 용서를 비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은 비난받을 짓을 했다.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멍청한 짓을 했다. 평생 후회할 행동이었다.

“차경아. 내가 뭐든지 할게. 미안해. 내가 진짜 잘못했어.”

소원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불에 떨어진 물방울은 점점 커져 갔다. 소원우의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그저 울며 권차경의 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원희랑 나랑 이어 줄 거야?”

푹 젖은 얼굴로 소원우는 어? 하고 되물었다. 잘못 들었으면 했다. 그러나 권차경은 쐐기를 박았다.

“못 들은 거 아니잖아.”

“그,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원희가 받아주지 않을 거야. 내가 부탁한다고 해도 원희는 안 들어줄 거야.”

암만 생각해도 무리였다. 소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러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아니야, 차경아. 나 진짜 너 포기할 거야. 마음 접을 거야, 확실하게.”

“네가 포기하는 걸 어떻게 믿어? 이미 수없이 실패한 거 아니야?”

소원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숨겨 온 마음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권차경은 어디까지 알아차린 걸까. 소원우는 벌게진 눈으로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확신을 주어야 했다.

“할 수 있어.”

“어떻게?”

“너한테 연락도 하지 않고, 만나러 가지도 않을게. 너와 관련된 사람도 만나지 않을게. 나 곧 군대 가잖아. 네 주위에서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어. 장담할게.”

“내가 원하는 게 그거라고 생각해?”

권차경이 빈정대며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소원희에게 권차경을 좋아해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떤 방도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원한 대로 저지른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원우야. 나는 남자가 얼마나 욕망을 못 숨기는지 알거든.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는지도. 그래도 한 번 너를 믿어 볼까 해.”

소원우는 간절한 눈으로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권차경이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각오도 충분히 다졌다.

“일어나 봐.”

권차경은 명령을 내리듯 툭 내뱉고, 팔짱을 끼고 등을 침대 헤드에 기댔다.

“아. 불 좀 켤래? 확인은 확실하게 해야 되니까.”

소원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 권차경이 뭘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시야가 환해지자 소원우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어두웠을 때도 부끄러웠지만 밝은 빛 아래에서 권차경을 보니 더없이 수치스러웠다. 소원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선을 아래에 두어도 권차경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원우야,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 부끄러움을 알긴 알아?”

권차경이 빈정거렸다. 권차경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같지가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며 비웃는 사람이 권차경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지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차경의 발은 성큼성큼 소원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목을 조이는 듯한 긴장감에 소원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소원우의 시야에 권차경의 발이 들어왔다. 두 발은 거리를 점점 좁히더니 소원우와 딱 한 걸음 정도에서 멈췄다.

그때였다. 소원우는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권차경의 손이 소원우의 배에 닿아 있었다. 소원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소원우가 멀어진 만큼 권차경은 뒤쫓아 왔다.

“왜 피하는 거야. 네가 좋아하는 손이잖아.”

온몸이 덜덜 떨렸다. 보일러를 틀어 두어 실내 온도는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을 텐데 사방에서 찬 공기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옷을 입고 있어서 소름이 오소소 돋은 것까지 들키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권차경은 느긋하게 손을 스윽 움직였다. 배에 닿았던 손가락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더니 이내 소원우의 가슴께 근처까지 다가왔다.

소원우는 혀를 내밀어 건조한 입술을 축였다. 젖은 입술은 금세 말랐다. 입술뿐만이 아니라 목 안도 메말랐다. 냉수 한 잔이 간절했다.

“그만……. 그만 만지면 안 될까?”

“고작 이 정도로 녹다운이야?”

권차경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소원우는 긴장으로 축축해진 양손을 제 바지를 꽉 잡으며 버티었다. 권차경의 손가락이 소원우의 유두를 스치는 순간, 소원우는 눈을 크게 떴다. 입에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차, 차경아. 손이…….”

실수는 아닐까 하고, 소원우는 권차경을 막아섰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오해를 짚어 주려는 듯 소원우의 유두를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명백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무릎이 자꾸 꺾였다. 소원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만이 소원우가 이 상황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눈을 감았어도 권차경의 시선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으니 소리에 민감해졌다. 부스럭대는 작은 소리에도 소원우는 흠칫 떨었다.

“윤찬희가 만질 때도 이렇게 떨어?”

소원우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떠는 이유는 자신을 만지고 있는 사람이 권차경이기 때문이었다. 권차경은 그걸 알면서 일부러 물었다.

권차경의 손은 소원우의 목덜미로 향했다. 소원우의 뒷목을 쓰다듬고, 귓불을 만지자 소원우의 주먹 쥔 손은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민감한 구석을 매만지는 권차경의 손길이 무섭기만 했다.

권차경의 손가락 하나가 소원우의 등 한가운데를 스윽 훑어 내려가는 동시에 따뜻한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말캉한 무언가가 귓가에 스친 것도 같았다.

“원우야.”

달콤한 부름이었다. 싸늘한 눈빛을 하고도 권차경은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소원우는 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권차경은 차가운 눈으로 소원우를 내려다보았다.

“섰네?”

매서운 눈빛이 쏟아졌다. 소원우는 뒤늦게 두 손으로 아래를 가렸다. 그러나 권차경은 똑똑히 보았다. 권차경의 손길에 소원우의 성기가 꼿꼿이 선 것을. 성기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소원우의 것은 제대로 반응했다.

“가릴 거면 제대로 가려. 역겨우니까.”

소원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이 떨렸다. 소원우가 조금만 몸을 떨어도 감기에 걸린 게 아니냐며 이마에 손을 대고 체온을 확인하던 권차경은 이제 없었다.

“포기할 수 있다며. 말만 번지르르 내뱉지 말고 잘 참아 보지 그랬어. 끔찍한 악몽 하나만 더 늘었잖아.”

권차경의 얼굴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더 이상 소원우를 앞에 두고 평온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듯 혐오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축하해, 원우야. 네가 바라는 거 하나는 이루어졌네. 앞으로 원희를 따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원희를 보면 네가 생각이 날 텐데 그때마다 이 역겨운 밤을 떠올릴 수는 없잖아. 나는 너와 달리 확실히 원희를 포기할게.”

할 말을 끝낸 권차경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 소원우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이불로 온몸을 감쌌다. 그걸로 부끄러움이 가려질 리 없을 텐데도, 친친 동여 감았다. 어째서 선 걸까. 권차경이 만질 때마다 두렵고 끔찍했는데, 왜 서 버린 걸까. 끝도 없이 차오르는 수치심에 소원우는 오열했다.

소원우가 그토록 원하던 대로 비로소 권차경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결코 원하지 않은 방법으로 권차경과 남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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