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4)

2.

소원우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사람들이 지나는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불법적인 곳에 몰래 찾아온 사람처럼 소원우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술집일 뿐이었는데도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무언가가 변할 것만 같았다. 그걸 원했으면서 막상 닥치니 두려움부터 들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계단 밑의 세계에 아는 사람이 미리 와 있다는 거였다.

문틈으로 재즈가 흘러나왔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아니라 좋았다.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는 소원우를 향해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소원우! 여기야!”

윤찬희는 괜찮은 와인을 추천받았다면서 소원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잔부터 건넸다. 시멘트를 거칠게 덧바른 벽과 곳곳에 걸린 여행 사진, 화가들의 그림, 빈티지한 소품들이 은은한 조명 아래서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다. 마치 딴 나라에 와 있는 듯했다.

“딴 나라나 마찬가지지. 나도 너 아니었으면 올 일 없었을걸.”

소원우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소원우와 윤찬희는 어린 축에 속했는데 아무래도 대학생들이 자주 찾아오기엔 가격이 비싼 편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잔잔한 노래가 나오는 조용한 공간보다 유행가가 흐르고,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고 시끄러운 술집이 더 편할 때였다.

“와인에 치즈가 잘 어울린다잖아. 치즈 맛을 아는 사람한테나 최고의 궁합이지, 나는 못 먹겠다.”

윤찬희는 훈제 연어와 새우튀김을 추가로 시켰다. 그제야 입맛이 도는지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네가 보기엔 여기 어떤 것 같아?”

혹시나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윤찬희는 속삭이듯 물었다.

“좋아. 애초에 왜 겁먹었나 싶어.”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진작 와 볼 걸 그랬네.”

소원우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떨어지자 윤찬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윤찬희는 순전히 소원우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아는 형의 비밀 아지트라는데 며칠을 졸라서 알아냈다고 했다.

가게 한구석엔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었다. 모래가 다 떨어지기까지 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마침 소원우가 자리에 앉을 때 모래시계의 위아래가 뒤바뀌었으니 정말 두 시간이면 모래가 다 떨어지는지 확인해 볼 수 있을 터였다. 작은 모래가 우수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던 소원우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옮겨갔다.

모래시계 옆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살짝 입을 맞추고 금방 떨어졌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내부가 어두워서 못 본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그래서만은 아닐 것이다.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가면 많은 이들이 연인이 아닌 듯 거리를 두고 걸어야 한다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나저나 큰 결심했다? 내가 몇 번이나 가 보자고 말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결심이라기보다는 속죄에 가깝지.”

권차경의 생일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서야 소원우는 집으로 돌아갔다. 권차경은 막차도 끊겼으니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소원희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소원우의 예상대로 소원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소원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시간도 줄이고 공부에 매달리는 소원희에게 몹쓸 짓을 했다. 변명 따위는 할 마음도 없었다. 소원우는 말없이 소원희의 옆에 앉았다. 모진 말을 던지든, 뺨을 때리든 소원희가 무얼 하든 간에 소원우는 다 받아 낼 생각이었다.

“원희 아직도 화났어?”

“원희는 화 안 냈어.”

“그럼?”

소원희는 어릴 적부터 소원우보다 눈물이 적었다. 바닥에 쿵 넘어지고서도 울지도 않고 멀뚱멀뚱 앉아 있는 소원희를 보고 사람들은 어쩜 애가 저리 순하고, 얌전하냐며 신기해했다. 베트남으로 떠나는 부모를 배웅할 때도 소원희는 울지 않았고,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았고, 심지어 보훈과 헤어지던 날에도 울지 않았다. 소원우도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소원희와 비교한다면 소원우는 잘 우는 축에 속할 정도였다.

그런 소원희가 울었다.

‘권차경과 연 끊으라고 안 할게. 대신 다른 사람도 만나 봐. 네 마음, 다른 사람한테 옮겨 갈 수도 있잖아. 다들 그렇게 하면서 잊어 가는 거야. 응? 소원우. 누나 부탁 좀 들어주라.’

아주 오랜만에 소원희의 입에서 누나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 단어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나 친척들은 소원우에게 소원희를 누나라고 부르라고 종용했지만, 정작 소원희는 원하지 않았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 같은 친구를 두고 무슨 누나 동생이냐며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다. 소원희가 누나라고 지칭한 의미를 소원우는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됐다. 그럴 순 없었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는데,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동성애자를 찾아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화력이 좋은 성격도 아니라, 무작정 모임에 참석하거나 앱으로 사람을 만나는 방법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윤찬희가 정보 하나를 물어 온 것이다. 몸만 섞는 가벼운 만남이 아니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천천히 관계를 맺어 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술집이라 했다.

소원우는 언젠가 권차경을 완전히 잊겠다고는 다짐했어도 권차경 말고 다른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잘생긴 연예인이나 몸 좋은 스포츠 선수를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권차경을 포기한 후의 삶이 상상되지 않았다. 어떤 사랑을 할지, 누굴 만날지, 그 사람이 남자일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테이블 위에 첫 안주였던 치즈는 그대로 남았다. 뒤이어 시킨 훈제 연어와 새우튀김이 바닥을 보일 무렵, 휴대폰을 확인하던 윤찬희가 호들갑을 떨며 소원우를 불렀다.

“원우야. 나 아는 형이 자기 친구 여기로 오고 있다고, 원하면 한 번 얘기나 해 보라는데 너 괜찮지?”

“누군데?”

“나도 몰라. 우리 형, 아무나 소개시켜 줄 사람은 아니야. 일단 만나나 보자.”

윤찬희가 더 신이 났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며 소원우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 머리를 매만져 주더니 옷매무새까지 점검했다. 특별히 전과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는데도 윤찬희는 흡족한 얼굴로 ‘어이구. 잘생겼네.’ 하며 소원우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왠지 소개팅 같다. 그치?”

“찬희야. 설레발치지 마.”

“설레발은 무슨. 원래 이때가 제일 두근두근하는 때야. 새로운 만남,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랑!”

윤찬희는 게이도 아닌데 남자들의 만남이 조금도 거북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윤찬희는 소원우가 권차경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권차경’이라서가 아니라 ‘짝사랑’이라서 반대했다. 지금이야 권차경의 모든 것을 싫어해서 권차경의 이름만 나와도 진저리를 쳤지만.

윤찬희는 술집 문이 열릴 때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쭉 내뺐다. 소원우는 문과 등지고 앉아 있는 터라 문을 보는 대신 윤찬희의 반응을 살폈는데 윤찬희가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표정이 이랬다저랬다 바뀌는 통에 소원우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뭘 그렇게 일일이 봐. 가만히 기다리면 올 텐데.”

“궁금하니까 그렇지. 형이 일부러 그 사람 사진도 안 보내 주니까. 근데 여기 잘생긴 사람들 많이 오긴 한다. 우리 형이 왜 여기를 비밀로 했는지 알겠다. 혼자 독점하려고 그랬구만.”

눈여겨보지 않아 몰랐는데 윤찬희의 말대로 사람들의 외모가 대체로 준수했다. 첫인상을 좌우하는 요인 중에 외모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다. 소원우만 해도 권차경의 외모만 보고도 호감을 가졌으니까. 그렇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객관적 지표를 바탕으로 형성되지만은 않았다.

“야. 원우야.”

“응?”

소원우를 부르면서도 윤찬희의 시선은 가게 입구에 고정됐다. 윤찬희는 턱을 괴고 심드렁히 앉아 있는 소원우의 팔을 다다다다, 때리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존나 잘생기고 키 크고 옷빨도 죽이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응.”

“헐. 야, 대박이다. 이쪽으로 온다.”

윤찬희는 표가 나게 고개를 홱 돌리고 안 본 체했다. 뒤늦게 시선을 거두었다 해도 이미 뚫어지게 보았던 터라 들키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잘생긴 사람을 보니까 시선을 뗄 수가 없네.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거라고 맹세하는데 권차경한테 전혀 안 밀려.”

그 말을 들으니 소원우도 궁금해졌다. 바로 뒤돌아서 훔쳐보기엔 눈치가 보여서 소원우는 잠깐 간격을 두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뒤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전에 소원우의 눈앞에 남자가 나타났다. 앉아 있는 테이블 바로 옆에 남자가 서 있어서 소원우는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찬희 씨 맞죠? 성세 형이 사진 보내 줘서 단번에 알았어요.”

소원우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싱긋 웃더니 윤찬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윤찬희의 아는 형이 남자에게는 사진을 보낸 모양이었다.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인사를 하는 윤찬희를 보니, 아는 형이 윤찬희에게는 미리 남자의 사진을 안 보내 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얌전하게 앉아 있는 윤찬희가 속으로 얼마나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지 소원우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윤찬희가 귀여워서 소원우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이쪽에 앉은 분은 찬희 씨 친구분?”

남자의 외모에 넋을 놓고 있던 찬희가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 소원우를 소개했다.

“이름은 소원우고요, K대 주거환경학과 다녀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원우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아직도 서 있는 채라 소원우는 안쪽으로 들어가 앉으며 자리를 만들었다. 남자가 소원우의 옆에 앉고 나서야 윤찬희가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헉. 혹시 괜찮으시면 이쪽에 앉으실래요? 거기 앉으셔도 되고요. 아무 데나 앉으시면 되긴 한데.”

소원우를 소개시켜 주는 자리다 보니 남자가 소원우의 맞은편에 앉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꺼낸 말이었다.

“여기 그냥 앉아도 돼요? 이미 앉았는데 굳이 옮길 필요는 없으니까.”

“저는 상관없어요.”

“그럼 여기 앉을게요. 아, 제 이름은 현의진입니다. 성세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에요.”

짝짝짝. 뜬금없는 박수 소리에 소원우와 현의진의 눈이 윤찬희에게로 향했다.

“아…… 자기소개하면 원래 박수 치면서 환영하고 그러잖아요.”

윤찬희는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개팅도 아니고, 더군다나 윤찬희가 긴장할 건 하나도 없는데 윤찬희는 소원우와 현의진을 번갈아 살피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현의진이 먼저 안부를 묻고 대화를 이끌어 가자 어색한 분위기는 조금씩 누그러졌다.

“성세 옆집에 살던 애가 찬희였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어. 성세 쫓겨나는 거 네가 다 봤다면서.”

“저 완전 깜짝 놀랐잖아요. 성세 형 어머니 진짜 인자하시고 항상 웃고 계셔서 화내는 거 처음 봤거든요.”

“성세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잖아. 어머니가 화내실 만했어.”

임성세는 수능을 일주일 앞두고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했다. 전교 1, 2등을 다투던 수재라 평소 부모님의 기대가 컸다. 게다가 임성세의 집안은 의사와 변호사, 검사, 판사, 한의사를 전부 배출한 엘리트 집안이었다. 당연히 임성세도 그들의 뒤를 이어 갈 거라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임성세는 공부에 욕심이 없었다. 명예욕이나 권력욕은 물론이고 승부욕까지 부족했다. 그런데도 임성세의 성적은 늘 높았다. 컨디션만 유지한다면 내로라하는 명문대 입학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성세는 탄탄대로의 삶을 기대하고 있는 부모에게 수능 점수를 걸고 폭탄을 터트렸다.

“아직도 사귀어요?”

“어. 지금도 잘 만나.”

동성끼리는 오래 사귀기가 어렵다는데 무려 구 년이라니. 소원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현의진의 말을 경청했다.

임성세의 부모는 커밍아웃 때문에 임성세를 쫓아낸 게 아니었다. 수능 점수를 걸고 허락을 요구한 오만한 태도 때문이었다. 어쨌든 임성세는 쫓겨났지만 가뿐하게 수능을 치르고,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입학했다. 쏟아지는 과외 아르바이트로 용돈은 충분히 충당했다. 군대 전역한 이후에는 기숙사에서 나와 애인과 동거를 시작했다.

“성세는 은형이 옆에 없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자.”

“이야. 완전 사랑꾼이네, 성세 형.”

“고등학교 때 둘이 앙숙이었거든. 어느 순간 눈 맞고 사귀더니 지금까지도 쭉 사귀는 거야. 대단하지.”

“앙숙이요? 전혀 상상이 안 돼요. 지금은 눈에 꿀 떨어지고 그렇잖아요.”

“응. 나도 보다 보면 새삼 신기하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됐나 하고.”

소원우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보지 못했다. 권차경을 짝사랑하는 미래는 지금보다 더 암울할 것 같았고, 권차경을 좋아하지 않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예상이 안 됐다. 소원우는 자신의 세계에서만 사랑을 하고 있어서 동성 간의 사랑은 참담하리라고만 생각했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가는데, 소원우는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살았다.

현의진은 소원우의 고민을 듣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성세처럼 10대에 만나서 지금까지 쭉 이어 가는 거, 절대 흔하지 않아. 다들 헤어지기도 하고, 차이기도 하면서 더 좋은 사람을 찾아가는 거야.”

“형은 애인 없어요?”

“응. 너무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네.”

윤찬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 원우는 어때요?”

“원우? 원우가 아깝지. 나는 너무 아저씨잖아. 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데.”

현의진이 소원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외모만 봐서는 그만큼 차이나 보이진 않았다.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고 있어서 학생처럼 앳된 티는 보이지 않았지만, 설사 나이가 들어 보인다 하더라도 수려한 외모와 다부진 몸이 완벽하게 보완했다.

얘기를 나눈 지 한 시간가량 지났을 뿐인데 윤찬희는 적극 공세를 펼쳤다. 몇 번 윤찬희를 말리던 소원우도 윤찬희의 지나친 주선에 결국 두 손 들고 포기했다.

현의진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현의진은 다방면으로 잡학다식해서 얘기하다 보니 학업이나 진로에 관련된 것까지도 상담하게 됐다. 첫 만남에 너무 많은 걸 물어본다는 생각에 뒤늦게 사과를 하는 소원우에게 현의진은 명함을 건넸다.

“아니야. 얼마든지 편하게 연락해.”

소원우가 명함을 받고 곧바로 지갑에 넣어 두려 하자 윤찬희가 소원우의 휴대폰과 명함을 빼앗아 갔다.

“전화번호는 바로 등록해야지. 내가 해 줄게.”

소원우는 그러려니 하고, 현의진과의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던 참이었다. 윤찬희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원우는 현의진에게 이제껏 궁금했던 것들을 잔뜩 물어보느라 윤찬희에게 휴대폰을 돌려받지 않았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윤찬희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밖으로 나갔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지만, 토요일 밤이라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나 흥을 분출하는 노랫소리도 어디선가 들려왔다. 갖가지 소리 사이에서 소원우의 휴대폰은 집요하게 진동했다.

윤찬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는 생략했다.

“원우 바빠.”

―왜 네가 전화를 받아?

소원우는 들어본 적 없을 법한 서늘한 목소리였다. 냉담하고 딱딱한 말투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분노를 표현했다.

“네가 알 거 없잖아.”

어차피 상대는 눈앞에 없다. 윤찬희는 뻔뻔하게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소원우를 부러워할지도 모를 만큼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잘했다. 그래 봐야 소원우가 제일 바라는 것은 주지도 않을 거면서. 윤찬희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안 준 사람보다 줬다 뺏은 사람을 더 싫어했다.

―원우 바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상대의 진의를 탐색해 보는 듯이 권차경은 흥분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났다. 권차경은 언제나 싸움에선 우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럽지 않았다. 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진 작은 공격에 큰 타격을 입을 터였다.

“원우 진짜 바빠. 누굴 만나고 있거든.”

―바꿔. 내 전화는 받을 테니까.

윤찬희는 권차경의 저런 자신감이 싫었다. 자신은 소원우에게 늘 우선순위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 그래서 윤찬희는 권차경의 말을 따르는 대신 과장을 섞어 말했다.

“원우 지금 분위기 아주 좋거든? 깨트리지 말자. 너 소원우가 연애 빨리 했으면 좋겠다고 그랬다면서. 원우한테는 나중에 내가 연락하라고 전해 줄게. 그럼 안녕.”

윤찬희는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전원을 꾹 눌렀다. 희열이 치솟았다. 윤찬희는 끊어진 전화를 들고 허탈해할 권차경을 상상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윤찬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소원우와 현의진은 더 친해진 모양이었다. 윤찬희가 없어도 알아서 다음 약속을 잡아 놓은 소원우를 보며 윤찬희는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의진 형도 전시회 가는 거 좋아한대.”

“응응. 전시회 좋지.”

“너도 같이 가자.”

“내가 거길 왜 가?”

윤찬희는 얼른 한 발을 빼고 자신은 전시회나 독립 영화는 관심이 없으니 어디 놀러갈 때나 불러 달라며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소원우는 그렇게 말할 거라고 예상했다면서 현의진에게 ‘그럼 쟤는 빼고 가요.’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날짜를 잡는 둘을 보며 윤찬희는 슬그머니 테이블 위에 소원우의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소원우는 휴대폰이 없어진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미 저녁을 먹고 왔다고 안주는 입에 대지도 않았으면서 현의진은 계산서를 받아 들고 앞장섰다. 만류하는 소원우에게 현의진은 다음에 커피 한 잔 얻어먹겠다면서 커피 값의 몇 배나 되는 금액을 아무렇지 않게 계산했다.

현의진이 대리기사를 부르고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윤찬희는 곧바로 소원우를 밀어붙였다.

“의진 형 괜찮지? 분위기도 좋아 보이던데. 친하게 잘 지내봐.”

“이거 소개팅 아니라니까. 그냥 형 동생으로 연락하고 지내기로 한 거야.”

“형 동생 하다가 여보, 당신 하는 거지 뭘.”

앞서 나가도 한참 앞서 나가는 윤찬희였다. 윤찬희의 닦달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는 소원우는 윤찬희의 부추김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윤찬희가 밖에 잠깐 나갔을 때, 소원우는 현의진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당사자에겐 절대 꺼낼 수 없는 얘기를 처음 본 사람에겐 말할 수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현의진은 마음고생 많이 했겠다면서 소원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울컥, 하고 터져 나오는 설움을 소원우는 가까스로 참아 내었다.

‘나도 큰 도움은 안 될 거야. 나도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거든. 뭐, 같이 놀아 주고, 슬퍼해 주고, 위로해 줄 수는 있지.’

현의진은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소원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소원우는 권차경과 함께했던 취미들을 서서히 줄이려던 참이었다. 소원우가 좋아하는 전시나 공연은 줄곧 권차경과 보러 다녔다. 다른 친구들은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 돈이면 술을 짝으로 쟁여 놓고 마시겠다고 거절했다. 권차경만이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종종 소원우보다도 먼저 티켓을 사 두곤 했다. 모든 게 엉망이 된다면 권차경을 친구로 보지 못한 자신의 탓이다. 소원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골목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의진의 차는 윤찬희의 로망인 레인지로버였다. 윤찬희는 차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면서 감탄을 내질렀다. 차에 올라타고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고개를 쑥 내밀어 마력은 얼마나 좋은지, 연비는 어떤지, 주행감 좀 묘사해 달라며 쉬지 않고 질문을 했다. 저렇게 차를 좋아하는 윤찬희가 권차경의 차를 탔을 때는 입을 꾹 다물었었으니 윤찬희도 대단하긴 대단했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소원우는 내릴 채비를 했다. 윤찬희는 소원우가 내리기 전에 고갯짓으로 휴대폰을 가리켰다.

“원우야. 폰 다시 켜 놔. 스팸 전화가 와서 내가 꺼 놨거든.”

전원을 꾹 누르자 불이 들어왔다. 로딩이 다 되자마자 메시지가 줄줄이 날아들었다. 윤찬희 흘긋 눈동자만 내려 메시지를 훔쳐보았다. 메시지 폭탄의 주인공은 예상했던 대로 권차경이었다. 아무 응답이 없는 전화에 대고 어디냐고 묻는 권차경의 속내가 대체 무엇일까 윤찬희는 모두지 짐작할 수 없었다.

윤찬희가 말한 스팸 메시지를 하나씩 읽던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찬희가 말릴 새도 없었다. 차는 곧 소원우의 집 앞에 도착했고 소원우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바로 내려 버렸다.

연결음은 금방 끊기고 대신 권차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을 자다 받은 것인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소원우가 다시 자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하자 권차경이 소원우를 불렀다.

―잔 거 아니야. 괜찮아.

“응. 연락이 와 있어서 전화했어.”

소원우는 그렇게만 말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침묵이 이어졌다. 소원우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관두고 계단에 걸터앉았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간간이 들리는 잡음과 주변 소음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1학기 때보다 더 바빠졌다는 거다. 과제는 더 많아졌고, 시험은 더 까다로워졌다. 몇몇 동기들은 어차피 군대에 가면 머리가 굳어질 거라며 1학년 성적은 버리겠다고 했지만, 말만 그랬을 뿐 다들 열심이었다. 경쟁은 수능만이 아니었다. 대학만 들어오면 다 잘 될 것 같았는데 1학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소원우는 현실을 깨달았다. 소원우는 가까스로 중간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소원희는 노력한 만큼 높은 성적을 얻어 냈다. 중요한 시험에서 상위권을 차지했으니 하루쯤은 쉬어도 될 텐데 소원희는 매일 할당량을 꼭 채웠다. 보훈과는 친구처럼 지낸다고 했다. 인사도 하고, 친구들 서너 명 모여서 같이 밥도 먹고. 헤어진 연인답지 않아 헤어진 걸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평소처럼 지내는 게 이별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이냐고 물은 소원우에게 소원희는 어깨만 으쓱했다. 소원우는 그제야 알았다. 소원희는 이별에 대처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성실하게 하루를 살 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소원희도, 권차경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한 명은 이전보다 더 차갑게 외면했고, 한 명은 이전보다 더 처참하게 차였지만 그들의 일상은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소원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이 없으면 전화하면 안 돼?

서러움이 묻은 말투였다. 소원우는 너그럽게 달랬다.

“해도 되지, 당연히. 문자를 여러 개나 보내와서 급한 일이 있나 했어.”

권차경은 뚱하게 대꾸했다.

―네 하루가 궁금해서 전화했어. 뭐하는지, 뭐했는지. 그런 거 궁금하잖아.

소원우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하루가 언제나 궁금했지만, 괜히 의심받을까 봐 권차경처럼 쉽게 물을 수 없었다. 권차경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일부러 용건을 만들어 내곤 했다.

“평범한 하루였어. 학교 가서 수업 듣고, 조별 과제 준비하고, 친구 만나서 저녁 먹고 술 한잔했어. 너는?”

소원우는 나긋나긋 대답했다.

―나도 평범했어. 학교 가서 수업 듣고, 도서관 가서 시험 공부하다가 집에 와서 밥 먹고 책 읽었어. 그리고 지금은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중.

“카페야? 혼자?”

―응.

“왜 혼자 갔어? 넌 혼자 있는 거 싫어하잖아.”

권차경은 요리를 다 해 놓고도 혼자 먹기 싫은 기분이 들면 그냥 안 먹고 놔둔다고 했다. 권차경은 웬만하면 혼자 있는 걸 싫어했다. 맞벌이였던 권차경의 부모는 오페어(외국 가정에 입주하여 아이 돌보기 등의 집안일을 하고 약간의 보수를 받으며 언어를 배우는 사람)를 구해 권차경을 돌보게 했다. 권차경은 집에 사람이 있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그런데도 왜 한국에서 혼자 사느냐고 물었을 때 권차경은 호주 얘긴 그만하자며 화제를 돌렸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말해 주지 않는 일들에 관해선 두 번 다시 묻지 않았다. 친구라는 선은 거기까지다. 소원우는 자신의 선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네가 옆에 안 있어 주니까 그렇지.

도리어 선을 넘는 사람은 권차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침범해 왔다. 그때마다 소원우는 영락없이 당하고 말았다.

“내가 언제라고 옆에 있을 줄 알아?”

소원우는 자신이 말을 내뱉어 놓고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버릇처럼 하던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 튀어 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평소대로라면 권차경의 말에 ‘항상 옆에 있을게.’라든가 ‘다음엔 바로 너한테 갈게.’라며 권차경을 달랬을 텐데.

윤찬희가 봤다면 장족의 발전이라며 박수 쳤을 것이다. 그 모습이 상상되어 소원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직한 웃음소리는 스피커로 고스란히 흘러들어 갔다.

권차경은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 누구랑 만났어?

“아. 찬희 만났어. 요즘 찬희랑 거의 매일 보는 것 같아.”

―매일 만나?

“같은 학교잖아. 시간표 짤 때 공강 맞춰서 짰더니 학교 가면 꼭 만나게 되더라.”

윤찬희는 자신의 시간표를 소원우에게 맞췄다. 꼭 들어야 하는 전공 수업을 뺀 나머지 교양 수업은 소원우와 동일했다. 윤찬희를 소개해 준 전영재가 섭섭해할 만큼 윤찬희와 소원우는 자주 만나고 있었다. 윤찬희 말로는 일부러 전영재를 피하는 거라고 했다. 만나면 항상 새로 사귄 여자친구 자랑을 해대서 듣기 싫다면서.

소원우는 그 뒤로 서은나와 연락하지 않았지만, 가끔 전영재가 서은나의 소식을 전해 주곤 했다. 전영재의 여자친구와 함께 셋이서는 종종 만나는 모양이었다. 서은나가 밥도 잘 먹고, 학교도 잘 다닌다는 얘기에 소원우는 한시름 놓았다.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소원우로선 딱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찬희 말고 또 누구? 은나랑은 요즘 안 만나는 것 같은데.

권차경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에 소원우는 순간 어? 하고 되물었다. 권차경이 계속 서은나와 연락하고 있을 줄은 생각 못했다. 물론 두 사람이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공통 화제가 소원우였던 터라 막연히 둘도 더는 연락을 안 하겠구나 싶었다.

“은나랑 아직 연락해?”

―가끔. 오늘 누구랑 만났는데?

서은나 이름이 나온 김에 안부라도 물을까 했는데 권차경은 같은 질문만 계속 던졌다.

“아까 말했잖아. 찬희랑 만났다니까.”

―또?

권차경은 윤찬희 말고 다른 일행도 있다는 걸 확신하듯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하고 생각하던 소원우는 윤찬희가 스팸 전화가 와서 전원을 껐다는 말이 생각났다. 통화하다가 분통 터진 윤찬희가 전화를 끊었을 것이라 결론 내린 소원우는 윤찬희가 말해 주지 않은 얘기를 해 주었다.

“찬희 아는 형이랑 만났어.”

―아는 형? 남자야?

“남자지, 그럼.”

궁금하던 것을 알아냈기 때문인지 권차경은 또 침묵했다. 오늘따라 권차경은 말을 자주 끊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공기도 쌀쌀해졌다. 여름은 달이 바뀌고서도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가 10월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한국에 사계절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을 거라는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소원우는 일어서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은 고요했다. 소원희는 아침 일찍 워크숍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올 터였다. 환기시킨다고 창문을 다 열고 가서 집 안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소원우는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차경아, 언제 집에 갈 거야?”

―슬슬 갈까 생각하고 있었어. 너는 집이야?

“응.”

―거기 갈까? 원희 오늘 집에 없지?

고등학교 때처럼 소원우가 소원희 소식을 전해 줄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소원희와 같은 대학인 권차경이 소식은 더 빨랐다. 소원희의 부재를 소원우가 말해 주지 않아도 권차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서 금방이야. 학교 근처 카페거든.

S대학은 권차경의 집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갔다가 다시 학교로 간 모양이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소원희도 없으니 이쪽으로 오라 해도 됐겠지만, 소원우는 머뭇거렸다.

현의진은 거절에 익숙해지라고 말했다. 먼저 거부하고 물러서다 보면 고백을 하고 혹여 맹혹하게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이미 멀어진 거리가 잊는 시간을 줄여 줄 것이라고.

짐을 챙기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S대학에서 소원우의 집까지는 겨우 10분 남짓이었다. 아마도 권차경은 소원우가 승낙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아니야. 그냥 네 집에 가.”

부산스러운 소리가 뚝 멈추고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더 조르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나 혼자 잘래. 그러고 싶어.”

어떤 말을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듯한 단호한 말투로 소원우는 끝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권차경의 인사가 들려왔다.

―알았어. 잘 자, 원우야.

권차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원우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권차경이 전화를 끊기 전에 소원우가 끊은 것은 처음이었다.

* * *

K대학교 여행 동아리 <방랑>의 10월 여행지는 순천이었다. 당초 1박을 계획했으나 예산 문제로 당일치기로 변경됐다. 첫차를 타고 내려가 밤 8시경 버스로 돌아오는 이번 여행은 큼직하게는 낙안 읍성과 드라마 촬영장, 순천만습지 세 군데를 들르는 일정이었다. 세 군데 모두 걸어서 관람하는 관광지에다 각 관광지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려 여유로운 일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간고사도 끝났고, 날씨도 더없이 화창하고 청명해 겨우 하루 다리를 혹사시키는 일쯤은 모두 개의치 않았다.

새벽 5시 30분까지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모이면 된다는 공지를 보고 소원우는 지하철과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소원우의 집에선 그 시간까지 강남에 도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없지만 택시를 부르면 될 일이었다.

일정표를 보던 권차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야. 택시 타면 돼.”

“주말에 할 일도 없고, 집에만 있으면 따분해서 그래. 아, 차라리 순천까지 데려다줄게. 사람들 순천 도착할 시간에 맞춰 내려가면 되지 않아?”

권차경은 당연히 그래도 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버스를 타면 멀미한다든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어쩔 수 없다든가 하는 타당한 이유를 대면 안 될 것도 없겠지만 소원우에겐 그럴 마음이 없었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뭐 있어. 그냥 택시 타고 갈래.”

“서운하게 딱 잘라 거절하기는.”

권차경이 툴툴거렸다.

“요즘 너 너무 바빠. 우리 진짜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 알아?”

보름 만에 만났으니 권차경의 말대로 퍽 오랜만에 만나는 거긴 했다. 보통 매주에 한 번은 꼭 만났으니까. 소원우는 2학기 들어서 전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주말 이틀 중 하루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머지 날엔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학과 사람들과 동아리 사람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셨고, 현의진과 전시회를 가기도 했고, 윤찬희의 아는 형이라는 임성세와도 한 번 만나 저녁을 먹었다.

“이미 선약이 잡혔으니 어쩔 수 없잖아.”

모두 일부러 잡아 놓은 약속이었지만 소원우는 시치미를 뗐다. 얼굴만 마주하지 않았지, 통화는 매일 했기 때문에 서로의 일상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권차경은 침대에 눕기 전에 꼭 소원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늘 하루 어땠는지 물으면 소원우는 저도 모르게 세세하게 다 답하곤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을까. 소원우는 과거를 더듬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학창 시절의 장면들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문제는 권차경을 만난 이후의 기억만 생생하다는 거다. 권차경이 없었던 학창 시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소원우의 기억에서 떨어져 나갔다. 큼직하게 살아남은 추억들이 죄다 열여덟 이후에 몰려 있으니 소원우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즘 자주 못 만나 아쉽다는 투정은 소원우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삶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원우는 잔을 입으로 갖다 대며 씁쓸한 미소를 숨겼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 그때 권차경은 소원우의 연락처를 물었다. 소원우가 자신의 옆 반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는지, 권차경은 소원우의 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소원우는 땀에 젖은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교실 뒷문으로 나와 바로 이어진 복도를 쭉 걸어가려던 참이었다.

권차경이 소원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는 권차경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했으니 소원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얼른 집에 돌아가 씻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을 확인하고 소원우는 가방끈을 꽉 붙잡았다. 긴장을 감출 수 있는 방법은 가방끈을 붙잡아 축축해진 손을 감추는 것밖에 없는 것처럼.

권차경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소원우에게로 걸어왔다. 권차경은 불필요한 사족은 전부 다 빼고 대신 휴대폰을 내밀었다. 권차경이 말을 건넨 이유는 딱 하나, 소원우의 휴대폰 번호를 얻어 내기 위해서였다.

소원우가 가방끈에서 가까스로 손을 풀고 권차경의 휴대폰을 받아 번호를 등록하기까지의 과정은 느릿느릿하게 진행되었다. 권차경은 재촉하지 않았다. 소원우가 할 일을 마치고 자신에게 휴대폰을 돌려줄 때를 가만히 기다렸다.

소원우가 본 권차경은 동작이 느리거나 성향이 느긋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권차경은 남을 재촉하거나 서두르게 하지 않았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권차경은 휴대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소원우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권차경의 번호가 찍힌 것을 확인하고 나자 권차경은 한 마디만 하고 소원우를 앞질러 걸어갔다.

‘전화할게.’

그날 저녁, 소원우의 정신은 온통 휴대폰에 가 있었다. 벨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음량을 최대로 높이고,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들고 갈 정도였다. 체육대회 다음 날이 하필 주말이었다. 체육대회나 축제 같은 큰 행사를 치르고 나면 금방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몸과 마음의 피로는 주말을 꼬박 쉬어야 풀렸다. 그러니 모두가 체육대회가 금요일이라고 좋아했다. 선생님들까지도. 소원우만이 ‘하필’ 주말 전날에 체육대회를 했다고 불평을 하는 중이었다.

권차경의 연락처를 알고 나니 괜히 다음에 만나면 인사라도 건넬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샘솟았다. 그런데 권차경과 만나려면 사흘 밤을 보내야 하니 소원우는 속이 탔다.

권차경은 이틀이 지나고 일요일 정오 즈음에야 전화를 걸었다. 불행하게도 소원우는 단번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전화였으나 권차경이 전화를 건 시각에 소원우는 베트남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 중이었다. 부모님께 먼저 전화 끊자고 할 수도 없어 소원우는 그저 거실을 빙빙 돌며 부모님이 작별 인사를 건네기만 기다렸다. 참 배은망덕한 아들이었다.

부모님과 통화를 끝내고도 소원우는 선뜻 권차경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전화 걸었느냐고 물으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도 소원우는 그 번호를 누르지 못했다. 권차경의 번호를 저장하지도 못했다. 열한 자리 숫자는 순식간에 외워 버렸지만, 저장하기까지 며칠은 더 걸렸다.

권차경은 밤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소원우는 자기 전에 만화책 한 권을 읽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날 밤 이후로 그 버릇은 사라졌다. 권차경은 대개 비슷한 시간에 전화를 걸었는데 본인도 제 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전에 소원우에게 전화를 건 듯했다. 통화 시간은 보통 15분가량이었고, 가끔은 한 시간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럼 휴대폰도, 얼굴도 뜨끈해져서 소원우는 전화를 끊고 나면 침대에 엎드려 심장을 꾹 눌러 대곤 했다.

권차경은 소원희에 대해 물었고, 소원우는 대답했다. 주로 권차경은 질문, 소원우는 대답을 하는 양상이 쭉 이어지다가 언제부턴가 서로의 안부도 묻게 됐다. 정확한 날짜는 가물가물했지만, 소원우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너도 재밌었어?’

권차경은 그렇게 물었다.

소원희와 같이 바다에 간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원우는 수영을 이제 막 배운 신참이었다. 바다와 수영장은 확연히 달랐다. 엄청난 너울에 소원우는 튜브를 벗지 못했다. 반면 소원희는 두려움이 없었다. 잠수를 해서 다리만 바다에 담그고 있는 소원우의 수영복을 벗기려는 둥 장난을 걸었다. 소원희는 튜브도 안 걸치고, 구명조끼도 안 입고서 바다에서 잘 놀았다는 얘기를 막 끝냈을 때였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어땠는지 물었다. 자신에 대해 물은 건 처음이라 소원우는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바다 수영은 힘겹기만 하고, 별로 재미가 없었지만 소원우는 얼떨결에 재밌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햇살은 뜨거운데 몸은 시원한 물 안에 있으니까 굉장히 행복해졌다고. 그러자 권차경은 웃음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바다 좋아해. 수영도 좋아하고. 여름도 좋고. 다음엔 셋이 같이 바다에 가면 좋겠다.’

그때부터 소원우와 권차경의 사이도 달라졌다. 서로의 하루에 대해 주고받고, 학교에서도 오며 가며 대화를 나누고, 학교 밖에서도 만났다. 관계의 거리는 하루가 지날수록 빠르게 좁혀 들었고, 이내 한 침대에서 함께 잘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그때보다 자란 권차경이 소원우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소원우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원우야. 내 차 타고 가. 주말 내내 못 볼 텐데 잠깐이라도 얼굴 좀 보자.”

권차경은 응? 하면서 소원우의 손을 살짝 잡은 후 놓았다. 마치 그러면 소원우는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듯이. 아주 잠깐이었는데도 권차경의 온기가 손등에 그대로 남은 느낌이었다. 권차경에게도 생각한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게 있음을 체험시켜 줘야 하는데 소원우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못했다. 집 앞까지 데리러 와서 약속 장소인 터미널까지 데려다준다니 소원우로선 아쉬울 게 없는 제안이었다. 그걸로 소원우는 위안을 삼았다.

* * *

당일치기라 따로 짐 챙길 것도 없었다. 보조 배터리와 휴대폰, 이어폰, 지갑을 넣으니 백 팩 안에 공간이 많이 남았다. 더 챙길 게 없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딱히 더 필요한 건 없을 듯했다.

“여행갈 땐 필요한 것만 챙기는 거 아니야.”

“그럼?”

소원희는 방에 들어가 물티슈와 핸드크림을 가져왔다.

“밥 먹기 전에 이걸로 손 한 번 닦아. 그리고 놀다 보면 꼭 옷에 뭐 흘리더라고. 챙겨 두면 다 쓸모 있어.”

“핸드크림은 왜? 나 안 써, 핸드크림.”

“일정 보니까 종일 계속 밖에 있던데. 꺼내서 틈틈이 발라. 요즘 날씨 쌀쌀해서 손 금방 터. 이거 냄새도 거의 안 나는 거야.”

소원희는 소원우의 가방 안에 직접 물티슈와 핸드크림을 넣고 주방으로 가 찬장을 열었다. 그 칸은 과자 창고이기도 했다. 감자칩과 쿠키, 초콜릿 등 군것질거리가 항상 그 칸에 자리했다. 둘 다 군것질을 좋아해서 과자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 사서 채워 두었다.

“버스 탈 때 입이 얼마나 심심한데. 이거 챙겨 가서 너도 먹고, 사람들 하나씩 나눠 줘.”

소원희는 사람들 나눠 줄 양이 충분한지 눈대중으로 세어 보고서 소원우의 가방에 넣었다. 안에 아몬드가 박힌 초콜릿은 소원희가 매일 먹는 거였다. 살이 찔 때마다 이 초콜릿이 원인이라면서도 소원희는 초콜릿을 끊지 않았다. 초콜릿 한 알에서 얻는 행복이 어마어마하다면서. 소원우도 단 걸 좋아하는 터라 소원희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차이가 있다면 소원우는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초콜릿을 선호한다는 거였다.

“서울 도착하면 거의 자정 아니야? 기왕 가는 거 하룻밤 자고 오지.”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연말에 예산 왕창 몰아 쓴다고 이번에 자중하기로 했거든.”

“즐겁게 놀다 와. 터미널까진 택시 타고 가고?”

소원우는 잠시 멈칫했다. 응, 이라고만 말하면 되는 일이다. 그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대화였으나 소원우는 그 한 글자를 내뱉는 게 망설여졌다. 거짓말은 원래 아주 작은 단어에서부터 커져 가는 거였으니까.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대답이 길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물었던 소원희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난감해하는 소원우의 얼굴을 보고 알아챘는지 소원희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권차경이 데려다주기로 했어?”

“……어.”

소원우는 고개를 숙이고 가까스로 대답을 했다.

“동도 안 튼 새벽이라 깜깜할 텐데 몸 편하게 가면 좋지 뭐.”

소원희는 소원우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고는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잘 다녀와.”

“알았어.”

새벽 4시에 일어나려면 아직 잠에 들기엔 일러도 침대에 눕는 게 나을 터였다. 일어날까 했지만, 소원우는 소원희가 욕실에 들어가서 씻는 동안에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30분 정도 후에 소원희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어느 정도 말리고 텀블러에 물을 부었다. 소원희는 자리끼를 꼭 챙겼다. 소원우가 자기 전에 만화책을 읽던 버릇이 있다면 소원희는 자다가 일어나 물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잘 채비를 마친 소원희는 소원우에게 잘 자, 인사를 건네고 거실 벽 뒤로 사라졌다. 소원우는 리모컨을 눌러 보고 있는 미드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후면 끝날 터였다. 마저 보고 방으로 들어가야지 생각했다.

“원우야.”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언제 도로 나왔는지 소원희가 옆에 서 있었다. 소원우는 고개를 돌려 소원희를 바라보았다.

“난 네가 권차경을 만나는 것도 싫고, 권차경을 좋아하는 건 더더욱 싫지만, 그렇다고 내 앞에서 죄인이라도 된 듯 굴지 마. 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인 거 알아.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새삼스레 권차경 이름 나올 때마다 나한테 고개 숙이고, 미안해하고 그러지 마.”

소원우는 목이 메어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소원희는 할 말을 마쳤는데도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소원우가 “그래.”라고 대답하고서야 소원희는 몸을 돌렸다.

소원우는 소원희가 좋았다. 부모와는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탓인지 부모보다도 소원희가 더 좋았다. 소원희는 죄인처럼 굴지 말라고 했지만 소원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기 전까지는 죄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순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미드는 끝이 나서 광고가 나오고 있었지만 소원우는 텔레비전을 끄지 못하고 한참 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을 잔 게 아니라 눈만 잠시 감았다 뜬 기분이었다. 두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으니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일어난 셈이다. 나갈 준비를 다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소원우는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일어났다.

[원우야, 나 도착했어. 준비 다 됐으면 나와.]

불이 켜진 집은 거의 없었다. 토요일이라 직장인들도, 학생들도 평소보다는 두세 시간 더 잘 수 있을 터였다. 단잠을 잘 수 있는 날이라는 건 권차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권차경은 차 내부를 밝히고 소원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원우에게 잘 잤냐고 묻는 권차경의 얼굴은 잠을 얼마 자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잠 안 자서 그래. 너 데려다주고 자려고.”

“밤새웠어?”

소원우는 깜짝 놀라 권차경을 쳐다보았다.

“응. 자면 일어나기 싫을 것 같아서 그냥 안 잤어.”

“나 택시 타고 가도 된다고 했잖아. 왜 밤을 새워.”

소원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권차경이 소원우를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 표정을 보고 소원우는 자신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이었다.

소원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권차경의 눈치를 살폈다. 권차경의 굳은 얼굴을 최근에는 본 적이 없어서 소원우는 머뭇거렸다.

낮에는 꽉 막히는 도로는 한적했다. 차는 고요한 도로를 서슴없이 달렸다. 터미널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신세계 백화점이 보였다. 곧 터미널이었다. 소원우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어?”

미안하다는 말이 소원우의 입에서 나오기 전에 권차경의 말이 먼저 나왔다.

“권차경이 소원우를 많이 생각해 주고 있구나, 네가 이렇게 받아들일 줄 알았어.”

예상치 못한 말에 소원우는 당황했다. 곧 터미널이었다.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소원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빨리 도착해 다행히 집합 시간까지는 10분 넘게 남아 있었다. 권차경의 차는 터미널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권차경은 차를 세웠다. 엔진 소리가 끊기니 주위가 더 고요해졌다. 소원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 안 그래도 너 번거롭게 해서 미안한데 잠도 못 잤다니까 순간 흥분했어.”

“내가 데려다준다고 한 건데 뭐가 번거로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원래 내 성격이 그래. 사람 혼자 보내는 거 불편해. 우리 가족 성격이 다 그렇더라고. 그래서 우리 부모님 한국 오실 때 공항에 마중은 가도, 배웅은 안 가. 우리만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생각하면 쓸쓸하대. 부모님이 싫어하셔서 처음 베트남 가실 때 딱 한 번 배웅하고 이젠 안 가. 나도 네가 데려다주면 몸은 편한데 너 혼자 돌아가는 거 생각하니까 마음이 안 편했어.”

권차경의 굳은 표정은 소원우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진작 사라졌다.

“난 괜찮은데. 좋아하는 사람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면 오히려 짧게 느껴지잖아. 걱정하지 마.”

좋아하는 사람.

소원우는 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았다. 권차경은 종종 소원우를 그렇게 표현했다. 좋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아끼는 사람. 그 말에 파묻혀 며칠을 넋 놓고 지낸 적도 있었다. 권차경은 둘만 있을 때뿐만 아니라 여럿과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소원우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 주었다. 권차경은 자신을 참 좋아하는구나. 소원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권차경이 표현하는 ‘좋아하다.’는 얕지 않았다. 크고, 거대했다. 다만 친구라는 범주 안에 갇혀 있는 감정일 뿐이었다.

“고마워.”

소원우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많은 생각을 멈추고, 그 말로만 마음을 대신했다.

이른 새벽인데도 터미널 안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디론가 떠나는 곳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공항이든, 버스 터미널이든, 기차역이든. 여행을 딱히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런 장소를 떠올리면 막연히 웃음이 났다.

세계 일주를 하는 사촌 누나가 보낸 엽서를 읽다 보면 소원우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사는 사촌 누나가 멋있었다. 소원우도, 소원희도 사촌 누나의 여행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보지 못한 곳, 겪어 보지 못한 체험에 대한 얘기는 흥미롭기만 했다.

물론 친척 어른들의 입장은 달랐다. 큰아버지는 사촌 누나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며 소원우와 소원희를 볼 때마다 사촌 누나처럼 살면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소원희는 일찌감치 찾은 꿈을 착실하게 이루어 가는 중이었다. 문제는 소원우였다. 취업을 위해 1학년 때부터 학점 관리를 한다는 얘기는 과장이 아니었다. 선배들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최대한 많은 자격증을 따고, 영어 공부를 하고,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해 놓으라고 충고했다. 소원우는 벌써부터 군대 이후의 삶이 염려됐다. 안 그래도 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이 가중됐다. 군대 갈 날이 두 달 남짓 남다 보니 걱정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딱 적절한 때에 쉴 틈이 생겼다.

윤찬희의 말대로 복잡한 머리 식히는 데엔 여행만 한 게 없나 보았다. 목적지가 적힌 스크린을 지나칠 때마다 소풍 가는 아이처럼 괜히 설레고 떨렸다.

소원우가 모임 장소에 도착했을 땐 한 사람만 제외하고 다 모인 상태였다. 소원우는 들고 온 비닐봉지에서 커피를 꺼내 나누어 주며 한 명 한 명 인사를 했다.

“뭐야? 이거 다 사 온 거야?”

“우와. 원우 완전 센스 쩐다.”

새벽이라 다들 공복이었던 탓에 소원우의 간식은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무거운 것은 거의 다 나누어 줬는데도 비닐봉지는 갖가지 간식거리로 여전히 두둑했다. 버스에 오르면 아예 째로 사람들에게 돌릴 생각이었다.

소원우처럼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온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표정들은 다들 밝았다. 여행은 잠을 보충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승차권을 받은 사람들은 버스에 올랐다. 소원우는 옆의 빈자리를 보며 메시지를 보냈다. 방금 전에 택시에서 내렸다고 했으니 승차장으로 달려오고 있을 터였다. 소원우는 비닐봉지를 뒷자리로 넘기기 전에 윤찬희의 몫으로 커피와 초코파이를 챙겨 두었다.

“너 돈 너무 많이 쓴 거 아니야? 신입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많이 사 와?”

동아리장 김재철이 비닐봉지 안을 확인하고 놀란 눈을 했다. 소원우도 권차경에게 비닐봉지를 건네받았을 때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제가 산 건 아니고, 친구가 줬어요.”

소원우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권차경도 따라 내리더니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권차경이 넘겨준 커다란 비닐봉지는 사람 수에 맞춘 커피와 각종 과자, 초콜릿, 사탕 등으로 가득했다. 이게 다 뭐냐고 묻는 소원우에게 권차경은 별 대단치 않은 일에 놀란다며 웃었다.

‘새벽이라 밥도 못 먹고 출발할 텐데 다들 배고플 것 같아서 샀어. 우리 원우 잘 부탁한다는 인사도 겸해서.’

몇 명이서 여행 가느냐는 질문에 소원우는 ‘22명, 23명 정도?’라고 대충 얼버무린 것도 권차경은 흘려듣지 않았다. 모자랄까 봐 두 개 정도 넉넉히 사 두었다고 했다. 소원우가 독하게 마음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권차경의 이런 점 때문이었다. 받은 게 많아질수록 미련이 덕지덕지 붙는다.

“이걸 다 챙겨 주다니.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혹시 여자친구?”

“형, 저 여자친구 없는 거 아시면서. 그 친구가 세심한 성격이에요. 여행 간다니까 이것저것 챙겨 주더라고요.”

김재철은 좋은 친구 뒀다면서 소원우의 어깨를 툭 쳤다. 좋은 친구. 소원우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소원우는 동아리 사람들이 모두 고마워한다는 문자를 권차경에게 보냈다. 아직 자지 않는지 곧장 즐겁게 놀다 오라는 짤막한 답장이 왔다.

출발 시간 2분 전에야 지각생이 밭은 숨을 내쉬며 버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윤찬희는 자리에 앉기 전에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했다. 뒤쪽에 앉은 선배 하나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소리를 버럭 지르긴 했지만, 다행히 그것으로 끝이 났다.

“원우한테 고마워 해. 원우가 사 온 간식 때문에 다들 기분 좋게 넘어가는 거야. 알았어?”

“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윤찬희는 한 번 더 사과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쌀쌀한 가을 새벽에, 윤찬희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느라 정신없었다. 소원우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윤찬희에게 주었다. 소원희 말대로 쓸모가 있었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창문 밖은 어두워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빈속을 채운 사람들은 하나둘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했다.

윤찬희는 방해되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진짜 커피가 절실했다. 시계 보고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니까.”

커피를 한 번에 반이 넘게 들이마시고는 잠깐 쉬었다 다시 남은 양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소원우는 비닐봉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커피 하나를 꺼냈다.

“하나 더 있었어? 이건 초코파이랑 먹으면 되겠다. 근데 새벽부터 이걸 다 살 여유가 있었냐? 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는데.”

윤찬희는 초코파이 봉지를 옆으로 뜯어 한 입 베어 물고 바로 커피를 마셨다.

“야, 이거 존나 맛있다.”

“권차경이 줬어.”

“쿨럭. 뭐?”

윤찬희는 기침을 거칠게 내뱉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큰 소리가 나는 것은 막았지만 입에서 나온 내용물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소원우는 다시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권차경이 준 거라고 미리 말을 해야지. 에이. 괜히 먹었어.”

“음식이 무슨 죄가 있냐. 그냥 먹어.”

“싫어. 안 먹어.”

윤찬희는 토라진 아이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싫음 말고.”

소원우는 윤찬희의 손에서 초코파이와 커피를 잡아채고, 쓰레기비닐에 넣었다. 마지막까지 커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윤찬희는 도로 달라고 하지 않았다.

버스 안은 고요했다. 한두 명이 잠을 자기 시작하더니 전염이라도 된 듯 너도나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개중에서 제일 잠을 많이 자고 온 윤찬희도 몸을 꿈틀대면서 잘 자세를 취했다.

버스는 어둠 속을 한참 달리다가 천천히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이 환해지고 나서야 소원우는 눈을 감았다. 밀린 잠이 쏟아졌다.

* * *

소원우는 꼼꼼하게 안내문을 읽은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윤찬희와 멀찍이 떨어져서 성벽을 따라 걸었다. 둥근 초가지붕과 낮은 돌담길이 내려다보였다. 읍성을 전부 다 돌아보기엔 일정이 빠듯했다. 소원우는 빠르게 걸어 최대한 많은 것을 눈에 담는 대신 높은 곳에서 읍성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도심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지만, 읍성 내에도 사람이 산다 하니 시간이 멈춘 곳은 아니었다.

시간이 멈춘 곳은 따로 있었다. 유명 드라마들의 배경이 된 드라마 촬영장은 60~80년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부서진 연탄이 쌓여 있는 담벼락이나 언덕 위에 빼곡한 판잣집, 옛 간판을 단 구멍가게들을 소원우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낙안 읍성과 드라마 촬영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이동한 장소는 순천만이었다. 용산 전망대까지는 한 시간은 걸어야 했다. 드넓은 갈대밭 사이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다녔다. 소원우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몇 번 찍다가 그만두었다. 좋은 실력을 가진 카메라맨이라면 모두가 감탄할 만한 사진을 남길 수 있겠지만 소원우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으므로 천천히 걸으며 눈에 담기로 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갈대숲 사이를 쭉 걷다 보니 순천만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용산 전망대가 나왔다.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산등성이가 보였다. 낙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용산 전망대에 올랐다. 동아리 사람들도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도착하는 시간은 천차만별이었어도 다들 용산전망대까지 포기 않고 걸어온 기쁨을 만끽했다.

중요한 날, 이를 테면 새해나 수능 100일 전, 그런 날에는 일출을 보러 동해를 찾곤 했는데 일몰을 보러 어딘가에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늘은 연보랏빛이 섞인 불그스름한 색이었다가 분홍색 물감이 흩뿌려진 바다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몰이 언제나 이런 모습일 것이란 보장이 없어서 소원우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카메라에 찍힌 사진은 눈앞의 풍경과는 같지 않았다.

“구경 잘 했어?”

윤찬희가 옆에 와 물었다. 소원우는 다소 늦게 전망대에 도착한 편이었는데 그때에도 윤찬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체력이 좋은 편에다가 걸음도 빠른 사람이니 윤찬희는 일부러 천천히 왔을 터였다.

소원우는 흘깃 눈을 옆으로 돌렸다. 윤찬희는 소원우가 누군가를 찾는 듯한 시선을 느꼈는지 입을 열어 설명했다.

“서진영 여기 없어. 중간에 되돌아갔어.”

“왜 같이 안 오고?”

동아리 동기인 서진영은 소원우에게 순천 여행에서 윤찬희와 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소원우가 따로 둘의 자리를 만들기 전에 서진영은 알아서 윤찬희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윤찬희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둘은 종일 행동을 같이 했다.

“뭐, 그렇게 됐어. 아무래도 얼굴 보기가 좀 그랬겠지.”

“얼굴 보기가 왜? 뭐가 잘 안 된 거야?”

종일 두 사람은 괜찮은 분위기를 풍겼기에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거니 했다. 여행 동아리 내의 커플들은 여행지에서 사귀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 중 한 사람이 마음을 털어놓으면 둘의 사이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군대 가는 판에 무슨 연애야.”

“그래도 서진영은 상관없다고 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

“근데도 넌 안 된다고 했어?”

“당연하지.”

윤찬희는 딱 잘라 말했다.

“연애는 사랑받으면서 하는 거야. 나 군대 가 버리면 걔 혼자 남아서 뭘 할 수 있겠냐. 처음에야 괜찮다고 하겠지만, 필요할 때가 내가 옆에 못 있어 주고 그러면 지칠 게 뻔하지.”

“넌 서진영 좋아해?”

“좋아해. 뭐, 근데 괜찮을 거야. 걔 없이 어떻게 살지, 이 정도는 아니니까. 서진영도 금방 정리될 거고.”

윤찬희는 소원우에게 충고했던 대로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서진영을 좋아하면서도. 그렇게 끊어 내는 게 가능한가. 소원우는 윤찬희가 신기했다. 윤찬희는 소원우의 눈빛에서 생각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해 봤거든. 울어 보고 매달리고 난리도 쳐 보고. 근데 어느 순간에 정신 차리게 되더라. 그때부터는 별 다른 노력 안 해도 엄청난 속도로 잊혀져.”

소원우는 문득 권차경이 첫사랑이란 것을 떠올렸다.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보고, 잊어 본 적이 없어서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이후에 누군가를 다시 만날 때는 좀 더 수월할 것이다. 그때는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

“<방랑>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버스 시간에 늦지 않게 다들 서두릅시다!”

김재철의 말에 사람들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워낙 쉴 틈 없는 하루였던 터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소원우는 여행에 방해되지 않게 시간을 확인하거나 사진을 찍는 용도 외엔 일부러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순천만 생태 공원 입구에 도착할 즈음에야 소원우는 밀린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권차경에게서도 서너 개가 와 있었지만, 소원우가 제일 먼저 확인한 메시지는 현의진의 것이었다.

며칠 전 연락했을 때, 현의진도 같은 날에 여수에 내려온다고 했다. 여수에서 일을 보고, 밤에 다시 서울로 간다고 했는데 일정이 바뀐 모양이었다.

“의진 형, 여수에서 하룻밤 자고 간대. 괜찮으면 여수에 와서 놀다 내일 같이 서울 올라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데? 차 가지고 내려왔다고.”

소원우의 말에 윤찬희가 반색을 했다.

“진짜? 잠깐만. 그럼 내가 재철이 형한테 물어보고 올게.”

“허락해 줄까? 단체로 온 거라 우리 둘만 빠지면 안 될 것 같은데.”

“일단 한 번 물어보자. 버스비는 안 받아도 된다고 하고.”

윤찬희가 동아리장에게 물어보러 간 사이 소원우는 읽지 않은 다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소원희와 다른 친구들에게 답신을 다 보낸 후에 권차경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후 2시쯤에 그제야 일어났다는 메시지가 하나 왔고, 5시쯤엔 밥은 잘 먹고 있느냐는 메시지가, 방금 전엔 서울에 도착하면 몇 시쯤 되겠느냐는 질문이 왔다.

소원우는 일정표에 적힌 대로 자정이 좀 넘어서 도착할 것이라고 보냈다. 소원우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윤찬희가 뛰어오며 말했다.

“허락받았다. 같이 터미널로 이동한 다음 우리는 여수 가는 버스 타고 가면 돼. 원래 이탈하면 안 되는 건데 이번만 특별히 봐준대.”

아무래도 네 간식 덕분인 것 같다, 고 윤찬희는 덧붙였다. 확실히 김재철은 하루 종일 소원우에게 호의적이었다. 김재철뿐만 아니라 선배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리 친하지 않은 선배들까지도 소원우가 잘 구경하고 있는지 이따금 묻곤 했으니까 간식을 산 권차경의 목적은 제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소원우와 윤찬희는 순천 버스 터미널에서 사람들과 헤어지고 여수행 버스에 올랐다.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현의진이 터미널에 데리러 오기로 했다. 소원우가 번거롭게 일정을 조절하면서까지 타지에서 만날 필요가 있을까 묻자 윤찬희가 안 될 게 뭐 있느냐며 도리어 반문했다.

안 될 거야 없지만…… 하고 말을 흘리는 소원우에게 윤찬희는 단호히 말했다.

“되도록이면 의진 형이랑 자주 만나. 권차경 말고도 괜찮은 사람이 많다는 걸 넌 확실하게 알아야 해.”

소원우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는 소원우를 보고 윤찬희가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근데 너 의진 형이랑 연락 자주 하나 보네? 의진 형 나한텐 여수 왔다고 말도 안 했는데.”

“가끔 연락해. 일주일에 한두 번?”

“그게 무슨 가끔이야. 직장인들이 얼마나 바쁜데. 일주일에 한두 번도 자주 하는 편이지.”

“그래?”

“그래, 인마. 보기 좋네.”

윤찬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현의진은 소원우와 윤찬희가 머물 트윈 룸까지 미리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종일 빠듯하게 돌아다닌 터라 술집 대신 호텔에서 적당히 마시기로 했다.

현의진의 방에서 조촐한 술판이 벌어졌다. 빠른 속도로 술을 들이마신 윤찬희가 제일 먼저 뻗었다. 술이 잘 들어갈 만한 날이었다.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말처럼 정말 아무렇지만은 않을 터였다.

“오늘 찬희 많이 마시네.”

“어……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안 됐거든요.”

윤찬희는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듯 잔뜩 찡그린 얼굴이었다. 깨워서 다른 방으로 옮기기가 미안해질 정도라 현의진은 자신의 침대를 윤찬희에게 넘겨주었다. 그 덕택에 소원우는 현의진과 한 방에서 머물게 됐다.

샤워를 누가 먼저 하느냐를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소원우는 현의진이 호텔비도 냈고, 연장자이고, 내일 서울까지 운전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샤워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현의진에게는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콸콸 잘만 나오는 물이 한 명이 씻고 나면 뚝 끊기는 것도 아니라 쓸모없는 논쟁이긴 했다. 그래도 소원우는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매번 현의진은 양보만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소원우는 현의진의 호의를 거저 받게 됐다.

“어! 전화 왔다. 씻고 있어. 나 통화하고 올게.”

현의진은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의견 다툼은 허망하게 끝이 났다. 소원우는 샤워 가운만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특히 쉴 틈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던 종아리가 제일 뻐근했다. 아까까지는 문제없이 걸었는데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고 있으니 오히려 다리가 배로 무겁게 느껴졌다. 따뜻하게 몸을 녹이는 걸로는 피로가 풀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마사지가 절실했다.

소원우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헹굴 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통화가 꽤 길어졌는지 현의진은 이제야 방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서둘러 헹구고 샤워를 끝냈다. 얼른 현의진에게 욕실을 넘겨줘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욕실 문이 열리자 의자에 앉아 있던 현의진이 뭔가를 들고 걸어왔다.

“이거 속옷. 사이즈는 몰라서 대충 짐작해서 사왔어.”

“이거 사러 나갔다 온 거예요?”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아래 로비로 내려갔는데 마침 맞은편에 편의점이 보이더라고. 속옷이 없는 게 생각나서 산 거야. 너네도 없을 것 같아서 내 거 사는 김에 샀어.”

소원우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뒤돌아서 샤워 가운의 끈을 풀고 속옷을 입었다. 속옷은 소원우에게 딱 맞았다. 별 것 아닌데 기분이 좋아졌다.

“잘 맞아요.”

소원우는 자랑하듯 가운을 벌려 현의진에게 속옷을 보여주었다.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던 현의진이 소원우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뭘 보여 주는 거야?”

“뭐 남자끼린데 어때요.”

소원우의 말이 끝나자 현의진이 성큼성큼 소원우에게로 다가왔다. 현의진은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소원우의 맨가슴을 흘끔 바라보더니 검지로 가슴께를 콕콕 찔렀다.

“너는 간지러움 잘 안 타?”

“음. 좀 무덤덤한 편인가 봐요. 친구들이랑 놀다 보면 일부러 민감한 부위도 툭 치고, 간질이고 그러잖아요. 전 별 반응이 없어서 놀리는 맛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현의진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더니, 소원우의 말을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 소원우의 몸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옆구리나 겨드랑이 쪽을 공략하던 현의진은 소원우가 웃음을 꾹 참고 버티자 항복을 선언하듯 양손을 들었다.

“잘 버티네.”

소원우는 괜스레 뿌듯해져 당당하게 샤워 가운을 다시 고쳐 입었다.

“짝사랑 상대가 널 만진 적은 없어?”

현의진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져요. 어깨동무는 만날 때마다 하는 편이고 뒤에서 안거나 어깨에 머리 부비거나 그런 것도 자주 해요.”

권차경의 말로는 자신은 원래 스킨십이 많은 편은 아니라 했다. 그 말대로 고등학교 때만 해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권차경의 스킨십이 확 늘었다. 날이 추워지면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한겨울의 날씨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고 했다. 골드코스트의 겨울은 한국과 비교하면 가을 수준이었다. 패딩 점퍼도 필요 없고, 코트도 잘 입지 않는다니 권차경이 한국의 겨울을 유난히 힘들어할 만했다.

“권차경이 만질 때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아뇨.”

소원우는 말을 멈추었다. 감촉이 생생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권차경을 보고만 있어도 몸은 긴장 태세에 접어들었다. 몸의 반응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소원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숨만 겨우 참는 것뿐이었다.

“숨을 최대한 참은 다음,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에 조심스럽게 떨어지죠. 권차경에겐 티가 안 나길 바랄 뿐이에요.”

“권차경도 둔한 편이야?”

“아닐 거예요.”

권차경은 간지럼에 약했다. 그걸 아는 친구들은 간혹 권차경에게서 얻어 낼 게 필요하면 옆구리를 간질이곤 했다. 손가락만 살짝 닿아도 권차경은 몸을 뒤틀며 거기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물론 힘으로는 권차경을 이길 사람은 없어서 권차경의 빈틈을 노리거나 여럿이 한꺼번에 덤벼야 권차경을 간질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못 만지게 하면서도 정작 권차경은 남을 잘 만졌다. 확실히 그런 건 이기적이었다.

“힘들었겠다.”

소원우는 현의진을 쳐다보았다. 소원우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됐다. 소원우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본인이 나서서 족쇄를 차고, 구덩이로 들어간 꼴이었다. 단단히 각오한 일이나 그렇다고 견딜 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원우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그간의 마음고생을 간단히 표현했다.

현의진이 씻을 채비를 하고 욕실로 들어가자 소원우는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가운을 입은 채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종아리가 단단하게 굳었다. 몇 번 주무르는 것만으로는 다 풀리지 않을 테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새벽부터 밤까지 꽉 찬 하루였다. 졸음이 슬슬 몰려왔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소원우는 벽에 등을 기대고 현의진을 기다렸다. 잘 자라는 인사는 하고 싶었다.

갑자기 정적을 찢는 벨소리가 울렸다. 현의진의 것인가 했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소원우의 휴대폰 벨소리였다. 휴대폰을 넣어 둔 가방은 현의진의 침대 너머 테이블 위에 있었다. 거기까지 가지러 가기가 귀찮아 소원우는 못 들은 체했다. 벨소리는 잠시 멎었다가,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에도 못 들은 척하려 했으나 욕실에 있는 현의진이 “전화 왔어. 소원우야.”라고 친절히 말해 준 덕택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소원우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 윤찬희가 뒤늦게 정신이 들어 전화를 걸었나 생각했지만 윤찬희는 아니었다. 소원우가 받을 때까지 전화는 끊기지 않을 것 같았다. 소원우는 긴 한숨을 한 번 내쉰 뒤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차경아.”

―응. 원우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소원우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권차경과 통화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늦은 밤과 유난히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늦게 웬일이야?”

―……또 그렇게 묻는다.

최근 들어 소원우는 권차경에게서 항의를 받고 있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용건부터 묻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권차경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 왔다. 드문드문 그러던 때가 점점 잦아지는 중이었다.

소원우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등을 기댔다. 서 있을 기운이 없었다.

“미안. 이제 막 자려고 했거든.”

―지금 어디쯤 왔어? 곧 서울 도착할 시간이라 전화한 거야. 피곤하면 내가 데리러 갈까 하고.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피곤한지 알겠다.

아, 맞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새벽 1시쯤 서울에 도착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지만 얼결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소원우가 잠시 뜸을 들이며 할 말을 찾는 때에 현의진이 욕실에서 나왔다. 현의진은 곧바로 드라이어를 들어 머리를 말리다가 거울 속에 비친 소원우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 걸 보고 뒤를 돌았다.

“전화하는 중이야? 못 봤어. 바로 끌게.”

위잉 울리던 드라이어 소리는 금방 멈췄지만 이미 전화 상대는 드라이어 소리도, 말소리도 다 들은 상황이었다.

소원우가 입을 열기 전에 권차경이 말했다.

―버스가 아닌 것 같은데.

“어…… 여기, 지금 여수야.”

―여수?

“응. 어쩌다 그렇게 됐어. 동아리 사람들은 서울 올라가고 나랑 찬희는 여수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서울 가.”

―둘만 여수로 이동한 거야? 여수에 볼일이 있었어?

“그런 건 아닌데…….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소원우는 말을 얼버무렸다. 솔직하게 아는 사람을 만나기로 해서 왔다고 하면 되는데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쳤다. 권차경과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없는 말을 지어내고, 거짓으로 둘러대던 버릇 탓이었다. 당황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진의를 의심할 만한 답변도 아닌 터라 소원우는 권차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원우야.

“응?”

소원우와 달리 권차경의 목소리 톤은 일정했다. 머뭇거림이나 떨림이 없었다.

―지금 누구랑 있어?

권차경의 질문도 그러했다. 오늘 하루 어땠느냐고 물을 때처럼 평범한 말투였다. 그러나 괜히 찔린 소원우는 단번에 대답하지 못했다. 윤찬희와 여수에 온 건 맞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윤찬희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거짓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빼먹은 내용이 있을 뿐이다.

현의진은 통화가 끝나면 머리를 말릴 모양인지 소원우처럼 벽에 등을 기대앉아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소원우가 흘깃흘깃 현의진을 보며 눈치를 살피자 현의진은 소원우의 눈빛을 느꼈는지 계속 통화를 해도 된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밖에 나가 통화를 하고 들어오면 좋겠는데 가운만 입고 있는 상태라 그럴 수도 없어서 소원우는 일단 통화부터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는 형이랑 있어. 출장 때문에 여수 내려왔다고 했거든. 찬희도 아는 사람이라 같이 만났어. 형이 호텔 예약해 둬서 여기서 같이 자고 내일 그 형 차 타고 서울 올라가. 걱정 안 해도 돼.”

소원우는 뒷말을 강조했다. 권차경이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전화를 건 이유도 늦은 밤에 소원우가 집에 어떻게 갈지 걱정됐기 때문일 테니까. 소원우는 끝인사를 준비했다. 권차경이 그렇구나, 하면 바로 잘 자라는 인사를 꺼낼 수 있도록.

그러나 권차경은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모르는 형?

“어.”

―윤찬희는 알고?

뭔가 탐탁지 않은 말투였다. 소원우는 순간 멈칫했다. 소원우는 오랫동안 권차경에게 맞춘 답을 해 왔다. 권차경이 좋아할 만한 화제를 찾아 대화를 이어 가는 일은 소원우에겐 어렵지 않았다. 나름대로 권차경을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대화는 미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형이랑 처음 만날 때 찬희도 같이 있었거든.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인데 통하는 게 많아서 요즘 자주 연락하고 지내.”

―그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데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난감해하며 또다시 옆을 흘긋 보던 소원우는 이쪽을 보고 있는 현의진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얘기가 나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꼭 말해야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너랑은 별로 상관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소원우가 상관없다는 단어를 쓴 것은 현의진을 만난 장소 때문이었다. 소원우와 현의진의 공통점. 윤찬희는 알아도 권차경은 몰라야 하는 정체성.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현의진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소원우의 말에 현의진이 뭔가 말할 것처럼 상체를 일으켰다가 다시 벽에 기대었다. 현의진의 눈은 더 이상 휴대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번엔 권차경이 머뭇거렸다. 안부 인사로 간단히 끝을 낼 전화였는데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소원우에 대해서 점점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아.

소원우는 뜨끔했다.

“에이, 무슨. 나도 네 주변 사람 다 아는 거 아니잖아. 네가 같이 수업을 듣는 대학 동기나 선배 다 모르는데 뭘.”

―나한텐 별로 의미 없는 사람들이야. 네가 알 필요가 전혀 없는.

냉정한 말이었다. 친하지 않다는 말 정도로 표현해도 될 텐데 권차경은 좀 더 냉담하게 정의했다. 의외였다. 권차경은 두루두루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독한 사람은 없어도 웬만큼 다 친한 사람일 줄 알았다. 매일 학교에서 보는 사이에다 밥도 자주 같이 먹을 테니 적어도 지금 소원우와 현의진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사이일 거라 생각했다.

좀 더 설명을 듣고 싶긴 했지만, 의문을 다 해소시키려면 통화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 소원우는 적당히 마무리했다.

“차경아, 우리 내일 다시 통화하자. 늦은 시간인데 나 때문에 잠 못 자면 미안하잖아.”

다시 현의진과 눈이 마주쳤다. 현의진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소원우는 현의진에게 금방 끊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긴 한숨 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끝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치 읊조리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원우야. 나 너 몇 시간이나 기다렸어.

권차경은 빈말을 내뱉는 성격은 아니었다. 데리러 갈 수 있다고 말을 꺼냈을 때는 당장 밖으로 나갈 준비가 다 돼 있을 터였다.

소원우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미리 말 못해서. 그때는 여수에 갈지 확정이 안 됐을 때였거든.”

―내가 너한테 뒷전이 된 건 아니지?

소원우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목이 메었다. 권차경은 소원우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았다. 점점 모르는 부분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것들은 다 몰랐다. 권차경은 소원우를 보고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른 부분이 훨씬 많았다. 일일이 다 얘기할 수 없었다. 일부러 꺼내지 않은 뒷얘기들을 이제 와서 이 상황에 꺼낼 필요는 없었다.

“네가 무슨 뒷전이야. 넌 나한테 항상 첫 번째인데.”

소원우는 많은 말을 감췄다. 그래도 이 말엔 거짓이 없었다. 과장도, 어떤 속셈도. 속뜻을 안다면 어쩌면 권차경이 화를 내거나 역겨워할 수도 있는 소원우의 고백이었다. 하지만 권차경은 소원우의 말을 간단히 알아들었다. 단순하고 간략하게. 권차경의 투정을 달래 주기에 적합하게. 그것으로 권차경은 만족한 모양이었다.

―잘 자, 원우야.

소원우가 그토록 듣고 싶은 끝인사가 드디어 나왔다. 그러나 금세 쏟아질 것 같았던 잠은 다 달아나고, 남은 것은 허탈함이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앉아 있는 소원우에게 현의진이 말을 걸었다.

“안 졸리면 나랑 얘기나 더 할까?”

소원우는 기운이 다 빠져나간 얼굴로 현의진을 바라보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금세 잠이 들 것만 같은데도 소원우는 현의진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권차경의 일은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골칫거리였다. 속이 답답해서 어딘가에 토로하고 싶을 때면 소원우는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긴긴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권차경을 좋아하고 나서 한숨마저도 짐이 되는 기분을 매 순간 느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일을 날마다 경험하는 중이었다.

현의진은 소원희처럼 피를 나눈 사이도, 윤찬희처럼 매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다. 현의진이 어딘가에서 소원우를 비웃거나 우스워 해도 소원우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의진은 딱 그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현의진에게 상처받지 않을 거리, 현의진을 괴롭히지 않을 거리.

소원우는 고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권차경한테는 내가 단 한 번도 첫 번째가 된 적이 없는데, 왜 권차경은 여전히 나의 첫 번째일까요.”

억울해요.

소원우의 뒷말은 아주 작았지만, 고요한 방에서 소원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현의진에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 억울할 자격은 없지만요. 그냥 그렇다고 말해 보고 싶었어요. 사실은 속상하고, 화나고, 분하고…… 슬프다고.”

어떻게 사람들은 누군가를 잊고, 지우는 걸까. 어떻게 그게 되는 걸까. 왜 자신은 안 되는 걸까. 소원우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놓으면서도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현의진에게 울지 말라는 위로까지 시킬 수는 없었다.

현의진은 소원우의 호흡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원우 넌 권차경이 널 좋아해 주길 바라는 거야?”

상기되었던 소원우의 얼굴이 제 색을 찾자 현의진은 그제야 물었다.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아뇨. 별똥별이 눈앞에서 떨어져도 그런 건 소원으로도 못 빌어요.”

소원우는 뜸도 들이지 않고 답했다.

“빌어 보지 그랬어. 꿈은 원래 크게 꾸는 거라잖아.”

“전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며칠 전이었다. 소원우는 과제 때문에 권차경에게 책 하나를 빌렸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몇몇 군데가 막혔다. 까다로운 교수라 수업 내용을 놓치지 않고 꼼꼼히 필기했는데도 그 내용으로만 과제를 작성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였다. 도서관에서 참고 자료를 빌리려 했을 땐 이미 한 발 늦은 상황이었다. 소원희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소원희는 공부에 집중할 땐 종종 휴대폰을 꺼 두곤 했다. 언제 다시 연락이 될지 몰라 소원우는 할 수 없이 권차경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권차경의 대학에는 자료가 있었다. 30분 후에 만나기로 하고, 자료를 받으면 바로 과제를 시작할 수 있도록 소원우는 미리 샤워를 했다.

S대학 정문에서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걸어갔다 오는 사이에 머리가 대충 마를 거라 생각하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시간인 데다 비가 쏟아질 것처럼 습한 날씨라 머리는 빨리 마르지 않았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젖은 머리를 보더니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다음엔 꼭 머리를 다 말리고 오라고 했다. 권차경이 걱정 어린 눈으로 소원우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까지만 해도 소원우는 머리를 말리고 오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원우야. 원희 뒤통수도 너처럼 이렇게 동그래?’

그 순간 냉골에 들어간 것처럼 온몸이 차게 식었다. 머릿속까지 차가워진 탓에 소원우의 입에선 퉁명스런 대답이 튀어나갔다.

‘나도 안 만져 봐서 몰라.’

‘쌍둥이니까 뒤통수도 닮았을 거야. 원희가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린 걸 보면 너랑 비슷할 것 같아.’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소원우는 과제가 급하단 핑계로 대화를 끝내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소원희 생각으로 가득 찬 권차경에게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감히 빌 수가 없었다. 소원우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바라는 거라면 다만…… 원희랑 저를 겹쳐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원우는 언제나 권차경의 눈이 가장 무서웠다. 앞에 있는 사람의 눈이 자신이 아니라 소원희를 보고 있을까 봐 그 눈동자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원우는 너무 착해.”

“제가요? 제가 뭐가 착해요. 저 때문에 주변 사람들 다 힘들어하는데.”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넌 더 힘들어하잖아. 미안해하고, 자책하고,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하는 거, 다 네가 착해서 그래.”

“아니에요. 착한 거. 제가 정말 착했으면 원희가 울 일은 없었을 거예요.”

자꾸 목소리가 떨려서 소원우는 몇 번이나 침을 삼켰다. 소원희가 우는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어떻게 얼굴이 일그러졌는지, 어떻게 눈물이 떨어져 내렸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게 착한 거라니까. 원희가 우는 걸 보고 미안해했잖아. 난 내가 연애할 때 얼마나 이기적으로 굴었는데. 참견은 필요 없다면서 가족들이 걱정하는 말들 다 무시하고, 연락도 끊어 버렸어.”

욕도 엄청 했다고 스스로 말하는데도 현의진의 말이 진짠지 믿기가 힘들었다. 지금의 모습만 아는 소원우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현의진은 궁금한 얼굴을 하면서도 먼저 묻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소원우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내가 남자랑 사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군대에 가서 알았어. 선임 중에 나만 보면 인상 찡그리고 말도 안 되는 꼬투리 잡아서 사사건건 시비 걸던 사람이 있었는데 휴가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야.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CCTV도 있는 곳에서 남자랑 키스하고 있더라고.”

“진짜요? 그래서요?”

“술에 잔뜩 취해서 내가 있는지도 모르던데. 근데 그 옆에 있던 사람은 정신이 말짱했는지 날 보고 놀라서 선임을 내팽개치고 도망가더라.”

현의진은 몇 년 전의 순간을 떠올렸다.

선임은 몸을 지탱하던 사람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현의진은 엘리베이터 문 바깥에서 바닥을 더듬으며 사람을 찾는 선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임은 손에 잡히는 게 없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풀린 동공은 곧 현의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일어날 힘도 없으면서 선임은 현의진의 다리를 꽉 붙들었다. 현의진이 엘리베이터에 탄 이유는 다리를 붙들고 앉아 있는 선임 때문이 아니라 약속 상대가 호텔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대로 다리를 내어 둔 채로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다행히도 중간에 멈추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랐다. 띵, 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현의진은 다리에 힘을 주고 선임의 팔을 떨쳐 냈다. 더러운 벌레를 떨쳐 내듯이 툭툭.

선임은 붙들고 있던 다리가 또 사라지자 이번엔 울기 시작했다. 서러움이 가득 담긴 울음소리였다. 현의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곧장 빠져나왔다. 성큼성큼 방으로 걸어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선임은 카드 키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버려두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떠올랐다.

현의진은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서는 선임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로 범벅인 얼굴을 현의진의 옷에 자꾸 비벼대는 바람에 현의진의 얼굴은 점점 험악해져 갔다.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몸 편히 군대 생활을 하겠거니 했지만, 결과적으로 약점을 잡힌 사람은 현의진이었다. 선임이 제대하기 전에 사귀기 시작해서 3년을 연애했다. 그리고 현의진은 차였다.

“성세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 친하시거든. 우리 부모님 성세가 쫓겨났을 때는 성세 편 들어주면서 성세 부모님 설득하시더니, 자기 아들이 남자랑 사귄다니까 태도가 확 바뀌더라. 나도 반항했지, 성세처럼. 부모님 연락 안 받고, 누나, 형도 피하고.”

남매간의 우애까지 깨트리면서 만난 사람과는 결국 잘 되지 않았다. 아마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현의진은 똑같이 남자랑 사귀었을 거고, 가족은 똑같이 반대했을 것이다.

“후회는 안 하세요?”

“음. 이런 생각은 해. 왜 하필 처음 사귄 남자 상대가 선임이었을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성세처럼 지금까지 잘 사귀고 있지 않았을까.”

헤어진 지 2년 정도 되었는데도 현의진은 다음 연애를 시작하지 못했다. 소원우에게 위로는 해 줄 수 있어도 별 도움은 안 될 거라 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뭐, 어쨌든 다 지난 얘기야.”

소원우는 딱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 끝난 얘기에 새삼 위로를 보내기도 애매했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응원을 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난감한 얼굴로 소원우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현의진은 복잡한 얼굴로 입만 달싹이는 소원우를 가만히 보다가 대뜸 소원우를 불렀다.

“원우야.”

“네?”

“앞머리 다시 올려 봐.”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소원우는 현의진의 말대로 다시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가려져 있던 이마와 눈썹이 드러났다.

“앞머리 올리니까 이미지가 완전 다른데?”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소원우는 침대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소원우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다. 앞머리가 있든 없든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의진은 다른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켜 소원우 가까이에 앉더니 소원우의 눈썹을 자세히 살폈다.

“순한 인상인 줄 알았는데 눈썹이 보이니까 인상이 달라진다.”

현의진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현의진은 손을 들었다.

“눈썹 만져 봐도 돼?”

“어……, 네, 뭐.”

소원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현의진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소원우의 눈썹을 쓸었다. 소원우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자신의 눈썹을 누가 만져 본 적 없었고, 남의 눈썹을 만져 본 적도 없어서 소원우는 어색한 자세로 현의진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눈썹 끝이 올라가 있어. 눈썹 뼈도 살짝 튀어나왔네. 눈썹 따로 다듬어 본 적 없지?”

“없어요.”

“숱이 많은데도 가지런해서 깔끔하고 멋있네.”

소원우는 자신의 얼굴이야 지겹도록 봤지만, 눈썹이 어떤 모양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제대로 살펴본 적도 없었다. 마음껏 남의 눈썹을 들여다본 현의진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소원우는 올린 앞머리를 내렸다. 현의진이 신기한 눈으로 소원우를 쳐다보았다.

“눈썹 하나가 사람 인상을 좌우한다는 걸 널 보니 확실히 알겠다. 원우야, 눈썹 드러내고 다녀. 잘생겼어, 너. 꼭 다른 사람 같아.”

“한 번도 앞머리 올린 적이 없어서 뭔가 어색해요.”

“똑같은 눈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지? 차가운 분위기까지 나. 장담하는데 너 앞머리 올리고 다니면, 권차경이 널 보고 원희랑 닮았단 말은 안 할 거야.”

소원우의 머리스타일은 고등학교 때부터 쭉 그대로였다. 단정하게 내린 머리. 수능이 끝나자마자 파마를 하거나, 옆머리를 밀거나, 단발처럼 길러서 변화를 준 친구들이 꽤 있었지만 소원우는 기껏 밤색으로 염색 한 번 했을 뿐이었다. 전과 별 차이가 없는 염색한 머리는 수개월이 지나 이미 다 잘라 낸 뒤였다.

“아주 사소한 변화야. 하지만 그런 게 삶을 바꾸어 가지.”

곰곰이 생각하며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소원우에게 현의진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같이 미용실에 가 줄게.”

소원우의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현의진은 만족스런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소원우도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2시가 코앞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뻣뻣하던 온몸이 피로를 덜어낸 듯 개운해졌다.

“잘 자, 원우야.”

두어 시간 전, 전화로 들은 것과 같은 인사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잠이 무척 잘 올 것만 같았다. 예상대로 소원우가 눈을 감은 지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군대 가기 전이라고 새로운 스타일 한 번 해 보자 싶었어?”

전영재는 만나자마자 소원우의 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윤찬희와 반응이 똑같았다. 윤찬희도 소원우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머리를 가리켰다. 현의진의 말대로 아주 사소한 변화를 줬을 뿐인데 주위 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한 마다씩 건넸다. 칭찬에 낯이 뜨겁기도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멋있는데.”

“고맙다.”

“진작 바꾸지 그랬냐. 한 달 후면 박박 밀어야 되는데 아깝다야.”

“군대만 다녀오면 머리야 얼마든지 기를 수 있는걸 뭐.”

드디어 영장이 나왔다. 새해가 되기 전에 소원우는 입대할 예정이었다. 이맘때면 대부분 영장이 나올 즈음이라 곳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전영재는 입대를 1년 뒤로 미뤘다. 학업을 핑계로 댔지만, 연애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선임을 만나더라도 아직은 여자친구와 헤어질 수 없다고 했다.

군대에 들어가면 많은 연인들이 헤어진다. 어느 한쪽의 변심이긴 해도 원인은 군대 탓이다. 매일 주고받던 안부 인사가 끊기고, 일주일에 몇 번 갖던 만남은 몇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든다. 하루가 지날수록 물리적인 거리만 멀어지는 게 아니라, 정보로부터도 멀어진다. 모르는 사람이 생기고, 없던 꿈이 생기고, 일상이 바뀐다. 업데이트 되지 못한 소식들은 묵직하게 쌓이다가 썩어 버리고 만다. 그걸 깨달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다.

소원우는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는 게 마냥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소원우에겐 적합한 때였다.

“권차경은 군대 안 가지? 좋겠다. 그놈이 제일 부러워. 나도 외국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영재는 벌써부터 1년 뒤를 걱정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몸에 좋을 것 하나 없는 지나치게 이른 염려였다.

“군대 생각은 그만해. 나 이제 수업 들어야 돼. 이따가 만나.”

“알았어. 7시다! 늦지 마.”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뒤돌아섰다.

전영재의 여자친구 생일이었다. 전영재는 제대로 된 축하파티를 준비하고 싶다며 몇 주 전부터 장소를 섭외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전영재의 여자친구는 둘만 조용히 축하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더 원한 모양이었다. 덕택에 오랜만에 서은나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서은나가 고백한 후로는 처음이었다. 혹시 자기 때문에 소원우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걱정돼서 메시지를 보내는 거라 했다.

오히려 소원우는 서은나가 걱정이었다. 자신을 만나는 게 쉽지만은 아닐 터였다. 서은나가 잘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괜히 연락을 했다가 더 불편해질까 봐 소원우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소원우는 서은나의 연락이 반갑기만 했다. 마주치기 떨떠름한 상대는 서은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권차경과 만나서 약속 장소로 가기로 돼 있었다. 전영재와도, 서은나와도 아는 사이인 권차경 역시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윤찬희가 못마땅한 얼굴로 권차경과는 어색한 사이라는 둥, 권차경은 무척 바쁘다는 둥 전영재에게 슬쩍 권차경을 초대하지 말라는 언질을 주었으나 전영재는 윤찬희의 속뜻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소원우도 권차경이 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서은나와 권차경은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 듯했다. 소원우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진 않아도 권차경의 입에서 서은나의 소식이 은근히 들려오긴 했다. 혹시라도 전영재나 권차경이 다 끝난 일을 들먹이며 괜한 얘기를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권차경은 마지막 강의가 휴강이 되었다면서 K대학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권차경이 소원우의 대학교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집에서 쉬었다가 시간 맞춰 오라는 소원우의 말에 권차경은 예쁘기로 유명한 교내 정원도 한 번 둘러볼 겸 산책하고 있을 테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나오라고 말했다.

권차경은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그런 점이 좋았다. 번거로운 일을 불평 없이 하고, 함부로 부정적인 평가나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권차경의 진중하고, 배려 있는 모습에 소원우는 길을 잃고 그 속에 갇혔다. 심지어 소원우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을 때에도 권차경은 소원우를 비난하는 대신 소원우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2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권차경은 소원우에 대해 나쁘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소원우는 지금 권차경의 말이 퍽 당황스러웠다.

“안 어울려.”

권차경의 얼굴은 소원우를 발견하자마자 굳었다.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도 권차경의 입가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진 게 보였다. 소원우가 무슨 일인지 묻자 권차경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바뀐 머리가 별로라고.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 그러던데.”

마주친 이들 모두가 멋있어졌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외모로 칭찬을 받은 적이 많지 않아서 소원우는 기분이 좋았다. 권차경뿐만 아니라 같이 다니는 윤찬희나 전영재도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이라 소원우는 가끔 자신의 얼굴이 신경 쓰이곤 했다. 한 번은 소원우가 시무룩한 얼굴로 권차경에게 ‘너 너무 잘생겨서 옆에 있기 싫어. 내가 더 못생겨 보이잖아.’라고 말했을 때, 권차경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눈에는 못생긴 구석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낯간지러운 말을 어떻게 그리 뻔뻔하게 하느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소원우는 속으로 행복해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표정을 굳히고 냉담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소원우 안 같아.”

“…… 안 같아? 난 만족스럽거든. 뭔가 새로워진 기분도 들고, 사람들 반응도 다 괜찮았고.”

소원우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로야. 앞머리 내린 게 더 예뻐.”

권차경은 ‘예쁘다’라는 긍정적인 단어를 들었지만 소원우는 권차경의 말이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소원우는 권차경과 만날 때,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쓰곤 했다. 어떻게 하면 권차경에게 더 멋있어 보일까, 괜찮아 보일까 생각하고 옷과 신발을 골랐다. 권차경은 소원우가 무엇을 입었든 늘 칭찬을 했다. 멋있다거나 예쁘다는 표현은 권차경의 입에선 아주 쉽게 나오는 단어였다. 그런 진부한 칭찬이라도 듣고 싶어서 소원우는 약속 전날에 수십 번 옷장을 열고 닫으면서 준비를 했다. 권차경은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는 사람에게도 “오늘 멋있다.”, “옷 예쁘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남들에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칭찬이어도 소원우는 좋았다.

오늘도 그랬다. 소원우는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 앞에서 한참을 머리를 만졌다. 어색한 손길로 왁스 바른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권차경의 반응을 기대했다. 특별한 반응이 아니라 그저 소원우가 하루 종일 들었던 사람들의 칭찬, 예의상 건네는 말과 닮아도 괜찮았다. 권차경에게 멋있게 보인다면. 남자다워 보일 수 있다면.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기대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스스로를 하대하고, 낮춘 수많은 날들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이런 수고들을 권차경은 모른다. 알 리가 없다.

“난 마음에 들어.”

소원우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선 실망스러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날까 봐 앞장서서 걸었다. 빠르게 걸어가는 소원우를 권차경은 놓치지 않았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어렵지 않게 소원우의 옆에 섰다.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해졌는데도 소원우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권차경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원우야. 기분이 안 좋아?”

“아니, 뭐. 별로 좋고 나쁘고 없는데.”

소원우는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상한 기분을 완전히 숨기진 않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솔직해지지도 못했다. 그래도 권차경은 감정의 굴곡을 알아차렸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 내가 아는 소원우의 얼굴이 아닌 것 같아서. 이제껏 쭉 같은 모습만 봤잖아.”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너무 많은 게 변한 느낌이라서……. 네가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어. 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어. 왜지?”

권차경은 의문문으로 말했지만, 소원우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혼자 답을 찾아보는 듯했다. 권차경은 금방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차에 들어가기 앉기 전에 소원우는 정답을 알려주었다.

“원희랑 안 닮은 것 같아서 그랬겠지.”

소원우의 말에 권차경은 눈썹을 추어올렸다.

아! 그제야 깨달은 듯, 권차경은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둘이 눈매나 입술이 닮아서 그런지 풍기는 이미지나 분위기가 비슷해. 이런 말 많이 들었지? 그래서 그런지 원희를 보면 네가 생각나고, 너를 보면 원희가 생각났거든. 항상. 이제야 이유를 알겠네.”

역시 그랬다. 권차경은 소원우에게서 소원희를 찾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콧등이 시큰거렸다.

소원우가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앉자, 권차경도 따라 들어가 앉았다.

차 내부는 바깥 온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권차경은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권차경이 글러브박스를 열면 핫 팩이 있으니 추우면 꺼내라고 했지만, 소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좌석도, 온도도 금세 달아오를 터였다.

퇴근 시간에 맞물려 정체가 심했다. 차는 거북이처럼 찔끔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는 건물과 차들이 내뿜는 빛으로 하루를 이어 가고 있었다.

“원우야, 소미 선물은 뭐 샀어?”

“팔찌 샀어. 영재한테 슬쩍 소미가 뭘 갖고 싶어 하는지 물어봤거든. 줄에 다는 참까지 사니까 가격이 좀 세서 찬희랑 같이 샀어. 너는?”

사람의 취향이 얼마나 다양한지 선물을 살 때마다 느꼈다. 소원우의 눈에는 하나도 예뻐 보이지 않은 팔찌였다. 고르는 데 한참 시간이 걸린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강소미가 어떤 걸 마음에 들어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윤찬희도 같은 마음이었다. 결국 직원에게 인기 있는 제품으로 추천받아 겨우 골랐다.

“나는 소미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백화점 상품권 샀어.”

“나도 상품권 살걸. 원하는 걸 직접 고를 수 있게.”

“그래도 네가 소미 생각하면서 고민한 시간까지 선물받는 거니까 팔찌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나라면 그럴 거야.”

아쉬워하는 소원우를 보며 권차경은 싱긋 웃었다. 반달처럼 휘는 눈은 소원우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권차경의 곁에 있으면 소원우는 갖가지 감정 속에 파묻혔다. 어떨 때는 편안함, 어떨 때는 긴장감, 어떨 때는 짜릿함, 어떨 때는 절망감. 너무 좋아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어도 소원우는 마냥 행복하지 못했다. 하늘을 난다는 건 추락할 위험도 있다는 거니까.

“원우야. 당분간은 계속 그 머리 할 거야?”

오늘은 좀 빠르게 추락할 모양이었다. 정체가 길어질수록 원치 않는 대화도 길어졌다. 대답을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럴까 해. 머리 바꾼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래?”

권차경은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본관 앞에서 만났을 때처럼 표정을 굳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탐탁지 않은 기색은 여전했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권차경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냥 한마디만 보태자면 네가 낯설어 보이는 게 싫은 것뿐이야. 넌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까.”

히터를 켜고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차안은 따뜻해졌다. 차가웠던 손은 따끈따끈 포근한 열을 내고 있었으나 소원우는 머리를 식힐 찬 바람이 절실했다.

“잠깐 창문 내려도 돼?”

“멀미야? 속이 안 좋아졌어?”

권차경은 소원우의 말에 곧바로 창문부터 내렸다.

싸늘한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전 같으면 바람에 머리가 휘날려서 손을 계속 머리에 두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멀미 심하면 차 세울까? 아니면 약국으로 갈까?”

권차경은 운전을 하면서 흘긋흘긋 소원우를 살폈다.

약속 장소는 머지않았지만, 정체가 심해 약속 시간 전까지 여유 있게 도착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소원우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멀미는 아니었다.

소원우는 바람을 맞으며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권차경은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끊겼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지런히 액셀을 밟았다. 소원우의 멀미를 가라앉히려면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소원우는 끝까지 멀미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파티의 주인공은 고깔모자를 쓰고 나와 소원우를 반겼다.

“차경이랑 같이 왔구나? 와 줘서 고마워. 이쪽으로 와. 사람들 거의 다 왔어. 전영재! 원우랑 차경이 왔어.”

먼저 도착한 사람들끼리 다들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예약한 안주와 술이 테이블 가득 차려졌다. 테이블 가운데는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가 있었다. 파란색의 크림으로 덮인 케이크였다. 저런 색깔의 케이크도 있나. 소원우가 유심히 케이크를 바라보자 전영재가 다가와 속삭였다.

“요즘엔 저런 레터링 케이크가 인기래. 누나가 말해 줘서 처음 주문해 본 건데 완전 성공이야. 케이크 꺼내자마자 소미가 좋아서 소리 지르더라고.”

전영재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전영재는 수업 시간에도 딴청을 피우며 몇 날 며칠을 한참 고민하더니 제법 괜찮은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초대한 사람들이 다 모이자 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커다란 장미꽃다발과 종이 가방을 건네는 전영재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강소미에게 선물을 건넸다. 소원우도 찬희와 같이 강소미에게 가서 선물을 주었다.

모인 사람들 중 반 이상은 소원우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권차경이 강소미에게 선물을 주는 사이 자연스레 소원우는 구석에 앉았다.

“오랜만이야.”

서은나가 소원우의 옆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가게에 들어오면서 눈인사는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는 이제야 나누는 거였다.

“은나야, 잘 지냈어?”

“응. 살 오른 거 보이지? 아주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냈어.”

소원우는 몇 킬로 안 되는 차이는 구별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살 쪘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했던 “난 잘 모르겠어.”라는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서은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냈는지 얼굴이 밝았다. 소원우와의 일이 상처를 만들어 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살 찐 거야? 더 예뻐진 것 같은데.”

“어이구. 기대도 않던 칭찬을? 고맙다, 원우야.”

서은나가 호쾌하게 웃었다.

“너야말로 제대로 변신했는걸.”

소원우는 흘긋 옆을 쳐다보았다. 권차경은 전영재와 얘기하고 있었다. 소원우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아는 사람이 한번 해 보라고 해서 바꿔 봤어……. 어때?”

서은나는 흐응, 하고 소원우의 얼굴과 머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괜찮은데? 전에는 바르고 순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까리해.”

“사실 거울 보면 좀 어색해. 너무 오버한 것 같고.”

“그럼 또 어때. 이런 소원우, 저런 소원우, 다양한 소원우를 만나 보는 거지. 그러다 보면 네가 모르는 너의 매력들을 발견하게 될 수 있고.”

서은나는 별 걱정을 다 한다며 빙긋 웃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소원우가 새로운 모습이라 더 반가워.”

서은나의 말에 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내내 복잡하던 머릿속이 깨끗이 정리되는 듯했다. 소원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익숙한 곳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소원우의 마음만 제외하면 권차경과의 관계도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그걸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권차경에겐 환영받지 않은 새로운 모습을 서은나는 좋아해 주었다. 커다란 위안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잘 돼 가? 나도 물어보고 싶지는 않은데 한편으론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작게만 얘기해도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힐 텐데도, 서은나는 소원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친한 친구에게까지도 숨기고 있는 비밀이라 지켜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포기하는 중이야.”

“왜?”

“어차피 안 될 거라서.”

“고백은 해 봤고?”

“말한 적은 없어.”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키스하려고 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은 전달됐을 터였다. 아니, 말보다 훨씬 확실하고 명확하게 표현됐을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건 모를 테지만.

“그냥 고백하라니까.”

“말처럼 쉽지가 않아.”

“당연히 안 쉽지. 평탄한 관계가 뒤집어질 수 있는 건데. 나도 너한테 고백하고 널 잃었잖아.”

당사자를 앞에 두고 서은나는 호탕하게 털어놓았다. 소원우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어쨌거나 난 너한테 고백하길 잘했다고 생각해. 고백 안 했으면 이런 식으로 네 앞에서 못 웃었을 거야. 포장된 웃음만 지었겠지.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잖아. 너 곧 군대 간다면서. 시원하게 말하고 가. 차이는 거, 의외로 괜찮은 경험이더라고. 거절당하는 게 안 무서워졌거든.”

서은나는 소원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째서 서은나는 자신을 격려할 수 있는 걸까. 자신은 그러지 못했는데.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깨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좀 더 맡기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평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영재가 이쪽을 가리키며 큰소리를 냈다.

“둘이 뭐야? 왜 둘이 바짝 붙어서 얘기해? 분위기가 수상한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을 향했다. 권차경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소원우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꽂히자 당황해 입만 달싹였다. 그런 소원우를 구해 준 사람은 윤찬희였다. 정확히는 구해 준 게 아니라 다른 문제로 확장시켰다.

“소원우, 만나는 사람 있다.”

전영재는 단순히 놀리려는 말이었지만, 윤찬희는 아니었다. 권차경을 의식하고 던진 거짓말이었다.

서은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원우는 작게 얘기했다.

“윤찬희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냥 아는 사람이야. 가끔 만나서 밥 먹는.”

“찬희도 몰라? 너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소원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권차경이 소원우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권차경은 소원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손아귀의 힘이 꽤 셌다. 권차경이 힘을 풀기 전엔 소원우 스스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권차경을 따라가면서 소원우는 고개를 돌려 이 사태의 원인인 윤찬희를 쳐다보았다. 윤찬희는 팔을 들고 주먹을 꽉 쥐었다. 꼭 응원처럼 보여서 소원우는 한숨을 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권차경은 소원우를 끌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식당과 술집이 즐비한 골목이라 밖이라고 조용하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이 뒤섞인 곳에서 권차경은 입을 열었다.

“진짜야? 너 만나는 사람 있었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윤찬희가 장난을 친 거라고. 그러나 소원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권차경은 환하게 웃었다.

“왜 말 안 해 준 거야. 여자친구 생긴 거 맞지? 이유 없이 머리를 바꾼 게 아니었네.”

권차경은 친한 친구의 연애를 진심으로 축하한단 얼굴이었다. 소원우를 꽉 껴안고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원우야. 너무 기쁜 소식이야.”

그동안 너무 높이 날았나 보다. 올라간 만큼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권차경의 품에 안겨 있는데도 끝없는 절망 속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눈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만으론 해결이 되지 않을 듯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소원우의 등을 감싸고 있던 두 팔은 금방 떨어졌다. 그리고 소원우의 손으로 향했다.

“춥지, 원우야.”

권차경은 소원우의 손을 감싸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렇게 하면 금방 따뜻해질 것처럼 정성스레 소원우의 손을 만지작댔다. 소원우는 물끄러미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권차경의 손을 뿌리쳐 보고 싶다. 필요 없으니까 떨어지라고 냉정하게 말하면 권차경도 상처 입은 얼굴을 할까. 아니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권차경은 소원희에게 심한 말을 들어도, 연락이 끊기고, 실연을 당해도 괜찮아 보였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울 법도 한데 권차경은 그렇지 않았다. 그게 참 신기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좋아하면서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같은 처지인 권차경은 소원희의 냉랭한 태도에도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듯했다.

눈은 여전히 따끔거렸고, 입술은 메말랐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권차경의 손은 조금 더 소원우를 붙들고 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안에 들어가자.”

권차경은 밖으로 나올 때처럼 다시 소원우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엔 힘을 주지 않고 살짝 잡고 있다는 점만이 달랐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따라 걷지 않고 쭈그려 앉았다. 잡혀 있던 팔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난 잠깐 앉아 있다 갈게. 너 먼저 들어가.”

“같이 들어가지, 왜. 추운데.”

“별로 안 추워. 괜찮아.”

소원우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손을 흔들었다. 권차경은 더 권하지 않았다. 권차경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소원우는 휴대폰을 꺼냈다. 곧장 최근 통화 버튼을 눌러 요즘 연락이 잦은 상대의 이름을 찾았다. 연결음이 끊기는 순간, 휴대폰이 아니라 뒤에서 소원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원우야.

한 발 늦게 통화 상대도 소원우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만요. 다시 전화할게요.”

소원우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통화하는 중이었어? 미안해. 뭐 하나만 물어보려고. 이제 금방 네 생일이잖아. 우리도 이렇게 가게 빌려서 파티 하는 거 어떨까 해서.”

소원우의 생일은 열흘가량 남아 있었다. 기말고사가 코앞이라 바쁠 때였다. 특히 소원희는 마지막 기말고사에 모든 걸 쏟아붓고 있어 생일 당일엔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간단하게 축하할 계획이었다. 게다가 소원우와 소원희 둘 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다.

“괜찮아. 그날은 조용히 지내려고.”

“원희랑 둘만?”

“응. 원희도 바빠서 생일에는 그냥 집에서 같이 밥 먹기로 했어.”

권차경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다시 들어갈게. 통화하고 와.”

권차경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소원우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만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생겼느냐는 물음에 소원우가 부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소원우는 정정할 여력이 없었을 뿐이다. 부서질 게 더는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의외로 굉장히 견고하고 단단한 모양이었다.

소원우는 익숙한 번호를 다시 눌렀다. 자주 통화하다 보니 저절로 외워진 번호였다.

―재밌게 놀고 있어?

다정한 목소리에 경직됐던 몸이 그제야 파르르 녹았다. 소원우는 고개를 무릎에 묻으며 말했다.

“형. 저 데리러 와 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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