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원우는 새벽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명치가 꽉 막힌 걸 보면 체한 게 분명했다. 약도 소용이 없었다.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하고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하루 집에서 푹 쉬면 좋겠지만 하필 과제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조별 과제였고, 발표자가 자신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소원우는 수액을 맞고 나서 학교로 가야만 했다.
등굣길은 한산했다. 11시가 넘었으니 학생들은 교실에서 한창 수업을 들고 있을 터였다. 소원우는 모처럼 느릿하게 걸었다. 지각이긴 해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교문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 소원우는 동지 한 명을 발견했다. 가방을 멘 걸 보니 자신처럼 느지막이 등교를 하는 듯했다.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는 걸음이었다. 소원우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소원우는 곧바로 교무실로 갔다. 담임은 수업 시간이 아니었는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원우 왔냐? 이제 몸은 괜찮고?”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 다행이네. 아직 수업 시간 10분 남았으니까 저기 앉아 있다가 종 울리면 교실 들어가라.”
고개를 꾸벅하고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이고, 원우 어디 아프냐?”
소원희의 담임이 고개를 쑥 내밀며 물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몸조리 잘해야 된다잉. 컨디션 조절, 지금부터 잘 해 놔야 돼. 쌓이고 쌓이다가 수능 날 터지면 끝나 버리는 거여.”
소원희의 담임은 소원우를 세워두고 어떻게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하는지 설교를 시작했다. 소원희는 자신의 담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명문 대학을 보내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사람이라고 했다. 소원희에게 “너만 믿는다.”, “너는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말을 시험 결과가 나올 때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짜증 난다고 진저리를 쳤다.
소원우는 소원희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하나도 와닿지 않는 설교를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들었다. 이제 그만 앉고 싶은데. 소원우는 간절하게 소파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아까 소원우의 앞에서 걷던 학생이었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가 전학생이란 걸 알았다.
소원우는 전학생의 얼굴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금방 뗄 수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이견이 없을 잘생긴 외모였다. 지금까지 남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따져 본 적이 없던 소원우는 저도 모르게 전학생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깔끔하고 짙은 눈썹, 높은 콧대, 또렷한 턱선에 속으로 감탄했다. 흘깃흘깃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전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어떤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은 무심한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소원우는 부자연스럽게 눈을 홱 피했다. 전학생의 눈은 금방 거두어졌다. 그러나 소원우는 그러지 못했다. 시선이 자꾸 전학생에게로 향했다.
“원우야, 알겠냐? 응? 부모님께 영양제 사다 달라고 해서 매일 챙겨 먹어라. 원희도 꼭 챙겨 주고.”
“네.”
드디어 설교가 끝이 났다. 소원우는 재빨리 대답하고서 소파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전학생과 가까워졌다. 교복 재킷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권차경.
소원우는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어째서인지 그 이름이 입안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나도 궁금해서 얼굴 한 번 보고 올까 하다가 보훈이 생각해서 꾹 참았지.”
소원희는 치킨 다리를 양손에 잡고 번갈아 뜯으며 말했다.
“하나씩 들고 먹으면 안 돼?”
“하나는 양념, 하나는 프라이드야. 번갈아 먹으면 더 맛있다고. 걔, 호주에 살다가 왔다더라. 영어 잘해서 좋겠다.”
“너도 잘하면서 뭘.”
“우리는 정말, 아주, 힘겹게 노력하는 거잖아. 점수를 잘 유지하는 거지,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야. 잠깐 좀 놓으면 금방 잊어버릴걸.”
소원우는 전학생에 대해, 이름은 물론이고 호주에서 살던 곳, 취미는 서핑, 한국에 온 이유는 호주에 살기 싫어졌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단 하루 만에 알게 됐다. 잠깐 등굣길에서 마주쳤을 땐 그리 상냥한 성격인 것 같지는 않았는데 몰려드는 질문 세례에 하나하나 다 답해 준 걸 보면 실제 성격은 소원우의 첫인상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나 있잖아. 보훈이보다 더 좋아할 사람은 안 생길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밥 한 숟가락을 크게 퍼서 입에 넣으며 소원희가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소원우는 황당한 얼굴로 현실을 짚었다.
“너 남자친구 사귄 거 처음 아니야? 벌써부터 뭘 그런 확신을 해.”
“보훈이만 좋아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은 걔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전혀 상상이 안 된다는 말이지. 담임이 그렇게 강조하는 모의고사가 코앞이었는데, 내가 보훈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거야. 나도 깜짝 놀랐어. 이런 적 처음이거든.”
열여덟에는 대체로 많은 일들을 처음 해 본다.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소원희가 그 사실을 모르고 한 말은 아닐 터였다.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게 좋아하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보통은.”
보통이란 말은 명료할 것 같으면서도 복잡한 단어다. 소원우는 하루 종일 전학생만 생각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를 거듭해서 떠올렸다. 걸음걸이는 어땠고, 손은 어디에 두었고, 어떤 가방을 멨었는지 소소한 것까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행위를 소원우는 호기심이라고 확정 지은 참이었다.
소원희는 밥 위에 장조림과 김치를 얹어 놓고 또 한 입 먹었다. 양 볼에 밥과 반찬을 가득 채워 놓고 쉬지 않고 씹어 대는 소원희를 보며 소원우는 쌍둥이인데도 많은 것이 다르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나 이제 그만 먹을래.”
소원희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만 먹는다고 했지만, 밥공기는 깨끗이 비워져 있었으니 정확하게는 다 먹었다는 뜻이었다. 소원우는 소원희의 빈 그릇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밥은 아직 반이나 남았다. 소원희가 일어나다가 소원우의 밥그릇을 흘긋 쳐다보더니 다시 앉았다.
“기다려 줄까?”
“아니, 나도 그만 먹을래.”
소원우는 남은 반찬 그릇을 랩으로 싸고, 냉장고에 넣었다. 아침에 새로 음식을 만들 필요 없이 남은 음식을 먹으면 되겠다.
“설거지는 보훈이 만나고 와서 할게.”
부모님이 일 때문에 베트남에 가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둘만 남았다. 부모님은 조부모를 모셔 오겠다고 했지만, 소원우도 소원희도 그건 원치 않았다. 집안일도, 요리도 제대로 해 본 적 없지만 그래도 둘만 사는 게 남과 사는 것보다는 훨씬 편할 듯했다. 처음에는 바꿔 가며 집안일을 하다가 점차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맡아 하게 됐다.
소원우는 설거지보단 요리가 좋았고, 소원희는 그 반대였다. 소원우가 빨래를 널면 소원희가 걷고, 소원우가 청소기를 돌리면, 소원희가 닦기로 했다. 욕실 청소는 번갈아 가면서. 둘 다 늦게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한 달에 한 번 제대로 청소를 할까 말까였지만. 다행히 둘 다 지나치게 깔끔하거나 지나치게 지저분하진 않았다. 맞춰 가며 그럭저럭 잘 해내 가고 있었다.
소원우는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무장갑을 꼈다. 안 해도 됐지만, 지금 소원우는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책을 들여다봐도 딴 데로 새기 일쑤였다. 뇌를 좀 쉬어 주자는 의미로 멍하니 있으면 하루 종일 자신의 머리를 지배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차라리 손이라도 좀 움직이자 싶어 모의고사를 치르느라 한 달 넘게 밀린 청소를 하나씩 해 가기 시작했다.
몸을 노곤하게 만든 보람도 없이, 소원우는 자려고 누웠을 때 눈을 감기 전에 천장에 자리한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실물을 보는 게 낫겠다. 소원우는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래오래 찾아오지 않았다.
옆 반이라 마음만 먹으면 얼굴이야 볼 수 있었지만, 소원우는 점점 권차경의 목소리가 궁금해졌고, 권차경과 인사를 하는 친구들이 부러워졌고, 권차경과 함께 밥을 먹고 싶어졌다.
소원우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권차경을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게 안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까지 얕은 것은 아니었다. 감정은 정보가 아니라 거리의 문제였나. 한 번 마음에 사람이 들어오니 눈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까지 마음에서도 벗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평소보다 한참 낮게 나온 성적을 보고 소원우는 왜 많은 부모님과 선생님이 연애는 대학 가서 하라고 말하는지 수긍이 갔다. 책상에 수북이 쌓아 놓은 책들을 보기는 다 봤는데, 저장이 하나도 안 된 모양이었다. 시험을 보는 내내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머리도 꽉 막힌 기분이었다. 점수는 예상대로였다.
“체육대회랑 축제 끝나고 다시 해. 그때까지 머리 좀 쉬어. 너는 나랑 달라. 넌 쉬면서 해야 더 잘 되는 편이야.”
정작 연애를 하는 사람은 소원희인데 소원희는 점수가 더 올랐다.
“내가 보훈이랑 사귀면서 결심했던 것 하나가 연애 때문에 점수 떨어트리지 말자였어.”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나?”
“학교 졸업해 봐라. 내가 암만 노력해도 안 되는 것 천지야. 그래도 지금은 연애나 공부는 노력한 만큼 나오니까 이 두 개는 놓치고 싶지 않아.”
소원희는 총각김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이거 맛있네. 어디서 샀어?”
“할머니가 보내 줬어.”
“응. 맛있다, 이거. 할머니한테 전화해야겠네.”
소원희는 곧바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마자 소원희의 목소리 톤이 변했다. 김치 덕분에 밥 한 공기 뚝딱 비웠다며 애교를 부렸다. 소원희는 애교가 많은 성격이 아닌데도 할머니가 좋아한다며 일부러 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소원우는 소원희가 좋았다. 소원희와 둘이 살아서 그런지, 쌍둥이라 특별한 케이스인지는 몰라도 남매 사이인데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친구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했지만.
“원우야, 너도 계주 나가지?”
“응. 너도?”
“우리는 거의 매해 나가네, 계주.”
체육특기생들은 주종목에 출전할 수 없기 때문에 소원우나 소원희는 자주 계주 선수로 뽑히곤 했다.
“보훈이도 축구 나간대. 응원해야지.”
“너랑 다른 팀 아니야?”
“응. 축구만 응원할 거야. 다른 종목은 다 우리 팀 응원해야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30분 일찍 일어나 조깅하는 거 어때? 체육대회 때까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해?”
“왜? 힘들 것 같아? 그러면 나 혼자 하고.”
소원우는 아침잠이 많았다. 일어나야 할 시간보다 10분은 일찍 모닝콜을 설정해 두는 이유도 완전히 잠이 깨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계주 연습한답시고 30분 일찍 일어난다면 오히려 체육대회 할 즈음에는 체력이 더 떨어질지도 몰랐다. 소원희도 소원우의 약한 면을 알기에 더 권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공부하느라 잠이 제일 고플 텐데도 소원희는 계획한 대로 하루도 쉬지 않고 일찍 일어나 조깅을 했다. 소원우가 일어날 때 소원희는 샤워까지 다 끝낸 뒤였다. 소원희가 목표를 이룰 때마다 소원우는 소원희가 자랑스러웠다.
소원희가 부회장에 당선됐을 때도, 전교 1등을 했을 때도 소원우는 소원희가 자랑스러웠다. 소원우가 못하는 걸 소원희가 해내는 게 좋았다. 소원우는 대체로 이기고 지는 것에 무덤덤한 성정이었다. 소원희는 승리에 기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만약 소원희와 둘이 겨뤄야 할 일이 생기면 소원우는 소원희에게 승리를 주고 싶었다. 소원우 역시 최선을 다할 테지만, 이기는 사람이 소원희였으면 좋겠다. 소원우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 * *
1, 2등 팀의 점수 차는 근소했다. 승부욕이 발동한 아이들은 응원전에도 목숨을 걸었다. 주찬은 목이 쉬어 걸걸해진 목소리로 소원우의 어깨를 주물렀다.
“우리 반의 희망, 소원우. 잘할 수 있지? 우리 계주 이기면 바로 역전이다.”
“믿는다, 원우야. 아, 떨려서 죽을 것 같아. 심장 만져 봐. 완전 빨리 뛰지?”
“이 새끼, 심장 터질 것 같은데? 존나 빨리 뛰어.”
친구들이 소원우의 다리와 어깨를 주무르고 난리가 났다. 몸이 가벼워야 속도가 높아진다며 소원우의 밥까지 뺏어 먹었다.
계주가 마지막 경기라 승부욕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게다가 1등을 바짝 뒤쫓고 있는 상황이라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 소원희는 난리가 났다. 1등을 놓치지 않을 거라며 의욕을 불태웠다.
남자 계주는 여자 계주 다음이었다. 모든 학생이 한 종목에 꼭 참가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데 권차경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다. 각 팀마다 겨루는 경기가 달라 운동장 곳곳으로 이동을 할 때마다 소원우는 목을 곧추세우고 권차경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전 학년이 다 모인 터라 권차경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학교 식당에서야 소원우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밥을 먹고 있는 권차경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계주였구나.
남녀 계주 선수들 다 모인 곳에서 소원우는 그제야 권차경을 보았다. 농구나 축구, 인기 있는 종목에도 권차경이 없어서 어딜 나갈지 궁금했는데 저와 같은 계주라니 괜히 더 반갑고 설렜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권차경과 함께하는 것은 정원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밥은 좀 먹었어? 너 긴장 되면 잘 못 먹잖아.”
소원희가 몸을 풀며 말을 걸자 모여 있던 선수들 몇몇이 시선을 던졌다. 소원희는 쇼트커트에 키가 큰 편이라 혼자 있어도 눈에 띄는데 같이 있으면 누가 봐도 가족처럼 닮은지라 더 눈길을 받곤 했다.
“안 그래도 애들이 다 뺏어 먹었어.”
“뭐야? 어떤 새끼들이야. 우리 원우, 키 더 커야 되는데.”
“난 내 키에 만족하거든.”
소원희와는 키가 5cm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소원희와 같이 서 있으면 소원희는 더 커 보였고, 소원우는 작아 보였다.
“네가 만족하면 됐다. 아! 여자 계주 이제 하나 봐. 나 응원할 거지?”
“……여기 귀 많아.”
“나 응원할 거면서. 그럼 이따 봐.”
호탕하게 웃으며 소원희는 여자 선수들이 모인 곳으로 떠났다. 여자 계주가 끝나면 곧바로 남자 계주가 시작하기 때문에 소원우도 자신이 뛸 곳으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누나야?”
“어?”
“누나? 아니면 동생?”
권차경이었다. 권차경과 대화를 나누는 상상은 해 봤지만, 난데없이 이루어질 줄은 몰라서 소원우는 즉시 입술을 열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원우를 보며 권차경이 눈썹을 치켜뜨자 소원우는 그제야 더듬더듬 대답했다.
“싸, 쌍둥이야.”
권차경은 여자 선수들이 모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쌍둥이인 걸 확인하는 듯 소원희를 쳐다보던 권차경의 시선이 다시 소원우에게로 향했다.
“닮았네.”
권차경이 웃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권차경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나면 소원우는 최대한 권차경을 보지 않으려 했다. 소원우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할까 봐, 혹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그러다 남들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게 드러날까 봐 소원우는 권차경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권차경이 먼저 소원우에게 말을 걸고, 웃어 준 건 소원우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소원우는 기뻐하지 못했다.
“이제 곧 여자 계주 경기가 시작됩니다. 남녀 선수들 모두 자리에서 준비해 주세요.”
진행팀의 말에 소원우는 소원희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1학년과 2학년은 반 바퀴, 3학년은 한 바퀴를 뛰는 계주는 학년끼리 뛰는 자리가 같았다.
“원우야, 하이파이브!”
1학년 선수가 달려오는 걸 보고 소원희가 소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쫙,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고 곧 소원희가 뛰기 시작했다.
네 팀 중 소원희는 세 번째로 출발했다. 반 바퀴밖에 되지 않아서 두 명 다 제치기는 무리일 거라 생각했지만, 소원희는 빨간 바통을 들고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한 명을 추월하고 또다시 한 명을 제쳐 소원희가 선두가 되었을 때 소원희를 환호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흘끔 바라보았다.
권차경과 소원희는 한 팀이었다. 계주에서 이기면 우승이었다. 그렇지만 권차경은 자신의 팀이 이기고 있어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닐 터다.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권차경은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소원희가 선두로 바통을 넘겼을 때도, 마지막 3학년 선수가 끝까지 선두를 지켜 골인을 했을 때도 권차경의 시선은 줄곧 한 사람에게만 박혀 있었다.
아직 소원우는 달리지도 않았는데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소원우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니 아마 약도 없을 것이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소원우는 겨우 버티고 섰다.
소원희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 소원우에게로 다가오더니 세게 껴안았다.
“소원우, 봤어? 내가 해냈다! 역시 아침마다 뛴 보람이 있어. 너도 내 기를 받아 일등해.”
같은 팀 선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소원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원우를 응원했다. 평소대로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소원우는 권차경이 신경 쓰여 얼른 소원희를 밀어냈다.
“안지 마. 여기 학교잖아.”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긴. 나 결승선에서 기다릴게. 힘내. 파이팅!”
소원희가 떠나고, 소원우는 일부러 권차경을 등지고 서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지금 소원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유일했다. 이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권차경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등 뒤에서 나직하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소원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막상 뛸 때가 되자 빠르게 뛰던 심장도 천천히 제 속도를 유지했다. 소원우의 팀 선수는 스타트부터 굉장히 빨랐다. 나머지 선수들이 비등비등하게 달리는 것과는 달리 선두를 끝까지 지켜 2등과는 차이를 많이 낸 상태로 소원우에게 바통을 넘겼다. 역전으로 계주에서 이겨 본 적도 많은 소원우는 이 정도 거리 차라면 충분히 우승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수 없이 바통을 건네받고 소원우는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소원희나 목이 터져라 제 이름을 부르고 있겠지만, 지금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는 3학년 선수가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조금만 더 달리면 선두로 바통을 넘길 수 있었다.
막바지까지 빠른 속도로 달린 소원우가 뒤로 손을 젖혀 기다리고 있는 3학년 선수에게로 바통을 넘길 때였다. 소원우는 누군가의 등을 보았다. 아주 근소한 차였다. 그래도 누가 먼저 바통을 넘겼는지는 확인할 수 있는 차이였다. 다리가 풀린 소원우의 몸이 흔들거렸다. 다행히도 소원우의 바통은 3학년 선수에게로 넘겨진 다음이었다.
소원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땀에 젖은 머리가 시야를 가렸지만, 선두를 달리는 사람의 바통 색이 확연히 보였다. 승부는 뒤바뀌지 않았고, 그대로 경기는 끝이 났다.
“수고했어, 원우야. 물 마셔.”
소원희가 달려와 소원우에게 생수를 내밀었다. 소원우는 헐떡이며 물을 들이마셨다. 물은 줄어드는데 갈증이 끝이 없었다.
“소원우, 너는 연습 하나도 안 했는데도 진짜 빠르더라.”
소원희가 소원우 옆에 앉아 소원우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이 위로의 말에 과장이 없다는 것을 소원우는 알고 있었다. 소원우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기록만 본다면야 어쩌면 작년보다도 더 빨랐을 것이다. 잔뜩 긴장한 것을 생각한다면 소원우 스스로는 만족할 법한 결과였다. 다만 다른 사람이 소원우보다 더 빨랐을 뿐이었다. 그 차이는 소원우가 소원희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연습했어도 넘을 수 없었다.
“나는 안 줘?”
“뭘?”
“나도 수고했는데 물 좀 주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소원우의 온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갈증이 더 심해졌다. 소원희가 소원우의 등 뒤로 시선을 보냈다. 권차경이 바로 뒤에 있는 모양이었다.
“목마르면 네가 갖다 먹어.”
소원희가 다시 한번 소원우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소원희가 먼저 일어서서 소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원우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냥 여느 때처럼 혼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면 될 텐데 몸을 일으키며 저도 모르게 소원희의 시선을 피했다. 소원우의 표정을 살펴보려는 듯 소원희가 고개를 숙였지만 소원우는 소원희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친구들이 너 찾잖아. 가 봐. 나도 이제 가야겠다.”
“그래. 이따 집에서 봐, 그럼.”
오랜만에 전력 질주한 탓에 종아리가 뻐근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권차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지금은 말 걸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소원우의 바람과는 달리 권차경은 소원우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우리 친구할까?”
“……왜?”
“소원희랑 친구하고 싶어서.”
속내를 숨기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머리카락 끝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땀방울이 뺨으로 내려앉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은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다시 주저앉고 싶었다. 이곳을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그래서 소원우는 대용품은 되기 싫다는 말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그래.”
소원우는 권차경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까 달렸던 것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이윽고 친구들과 가까워졌을 때, 친구들이 수고했다며 소원우를 껴안고 소원우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그제야 소원우는 옆을 바라보았다. 그때 권차경은 소원우의 옆에 없었다. 아마 소원우에게 듣고 싶은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떠났을 것이다. 목적을 이뤘을 테니 그 어떤 미련도 없이.
* * *
시내의 영화관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한 장소로 영화관은 안성맞춤이었다. 상영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는 곧 천만 돌파를 앞두고 있었다. 권차경이 예매해 놓은 영화는 인기 영화 사이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이른 오전과 저녁 시간대 하나씩만 있어 소원우는 늦잠도 자지 못하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소원우는 1층에 자리한 카페에 들어갔다. 권차경도 곧 도착할 시간이었다. 둘 다 영화를 볼 때는 음료만 마셨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오면 바로 영화관으로 들어갈 수 있게 미리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카페 라떼를 주문해 놓았다.
권차경은 휴대폰 번호를 주고받은 직후에는 소원희에 대해서만 물었다. 소원우도 모르는 내용에는 소원희에게 물어보고 답했다. 소원희는 갑자기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느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대답은 다 해 주었다. 소원우가 소원희의 모습을 묘사하며 말해 주자 권차경이 귀엽다며 웃었다. 휴대폰 너머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소원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권차경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원우의 이름을 불렀다.
소원우. 원우야.
통하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던 권차경과는 의외로 맞는 게 많았다. 둘 다 축구나 야구보다는 배구를 좋아했고, 책은 주로 추리소설을 읽었으며, 공포영화는 절대 보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도 비슷했다. 매운 음식은 꺼리고, 밥이나 면, 빵 등 다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한두 번 억지로 연락하던 횟수가 점점 잦아지더니 어느새 누가 봐도 둘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가 됐다.
소원우는 자신의 짝사랑이 이리 오래갈 줄은 몰랐다. 권차경이 좋아하는 사람이 소원희였으니까 권차경을 잊으려는 노력은 배로 했다. 노력만으로 억지로 좋아할 수는 없는 것처럼, 노력한다고 잊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권차경의 마음 역시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둘 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소원우는 음료를 받아 들고 잠깐 자리에 앉았다. 창밖에선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걸어가고, 나뭇잎이 흔들거렸다. 이렇게만 보면 평화로워 보이는데 현실은 바쁘고 정신없었다. 소원희는 의대라 공부할 양이 산더미라며 학교 도서관에서 사는 수준이라 일부러 대학 근처로 이사까지 했다.
권차경에게 소원희가 남자친구와 같이 의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권차경은 웃었다. 소원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그게 무척 만족스럽다는 것처럼.
소원우는 수능에서는 모의고사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고, 소원희는 평소와 비슷한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소원우는 소원희와 같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원우는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대학이 다르니까 얼굴 보기 힘들다.”
권차경이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것까지 샀어? 고마워. 이따 밥은 내가 살게.”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아닐 터였다. 소원우는 자신의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커피가 넘어갈 때마다 권차경의 울대가 움직였다. 소원우는 유독 권차경의 목에 약했다. 어떤 밤엔 권차경의 울대뼈를 생각하다 화장실로 뛰어가곤 했다. 화장실 안에서 벌어진 그 뒤까지 생각나자 소원우는 벌떡 일어났다.
“가자. 영화 시간 다 됐어.”
“영화 기대되지? 너 많이 보고 싶어 했잖아.”
권차경이 소원우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팔 좀 내려. 무겁다.”
내려앉은 팔 무게가 버거운 것은 어깨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네가 팔 올릴래?”
“네가 나보다 10cm 더 크잖아. 네 어깨보다 내 팔이 더 아프겠다.”
소원우의 투덜거림에 권차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절당하는 사람은 권차경인데 소원우는 매번 자신이 거절당하는 기분이었다. 권차경은 조금도 시무룩해지지 않았다.
“나 호주에 살 때는 이렇게 남자랑 딱 붙어 걸어 본 적이 없거든. 스킨십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안 믿기는 말인데.”
“진짜라니까.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텐 안 그러잖아. 너랑 붙어 있으면 따뜻하고 기분 좋아. 네 몸에 뭐가 있나.”
권차경이 가늘게 뜬 눈으로 소원우의 상체를 더듬기 시작했다. 소원우의 팔과 가슴팍, 배를 헤집는 손바닥이 좀 더 아래로 향하자 소원우는 화들짝 놀라며 권차경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야!”
“알았어, 안 할게. 이리 와.”
“거짓말하지 마.”
소원우는 슬쩍 거리를 두고 걸었다. 권차경은 그러니까 더 놀리게 된다며 소원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는 손은 힘이 묻어 있지 않았다. 소원우가 팔을 한 번만 휘둘러도 쉽게 떨어질 만큼. 그러나 소원우는 권차경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끌려가 주었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권차경의 옆에 바짝 붙어 서게 됐을 때부터 소원우는 멀어져야 할 때를 각오해야 했다. 가까워지면서 얻은 행복은 아마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영화가 상영됐던 2관은 한산했다. 두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만큼의 적은 관객과 함께 영화를 봤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였다. 사실 소원우는 개봉하자마자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다. 독립영화만 만들던 연지상 감독의 첫 상업 영화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평론가들로부터도 좋은 평점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소원우는 연지상 감독 특유의 영상미를 좋아했다.
권차경에게 이미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권차경의 옆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볼 때가 아니면 나란히 앉을 일이 없으니까.
영화는 줄곧 초여름 날, 밭과 밭 사이의 시골길을 걷는 것처럼 느릿하고, 평화롭고, 잔잔하게 흘러갔다. 영상 뒤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별 아래 누워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더없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소원우는 팔걸이에 올려놓은 커피로 손을 뻗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놓으려는데 팔걸이에 올라와 있는 손이 보였다.
소원우는 자신이 욕심이 없는 편이라 생각했다.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으냐는 질문에도 한참 고민해야 했다. 소원희는 언제나 바로 얘기했지만, 소원우는 언제나 오랫동안 고민해야 했다. 정 생각나지 않으면 소원희에게 고르라고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점점 욕심이 많아졌다. 정확하게는 한 종류에만.
사랑은 눈이 말해 준다던가. 환한 곳에서는 권차경을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소원우는 어두운 상영관을 방패로 권차경을 훔쳐보았다. 어떤 얼굴로 이 영화를 보고 있나, 지루할지도 모르는데 잠은 자지 않는가 하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영화를 보는 척하며 눈만 내려 팔걸이에 올라와 있는 손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만약 소원우에게 투명 인간이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원우는 권차경의 손을 잡아야지 했다. 악수하듯 잠깐 잡고 떨어지는 것 말고 깍지를 끼고 한참을 놓지 말아야지. 소원우에게 생기는 욕심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욕심이 권차경에게만 발산됐다.
소원우는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끝까지 앉아 있던 사람은 둘밖에 없어 마지막으로 상영관을 나왔다.
“영화는 어땠어?”
“딱 소원우가 좋아할 영화구나, 했지.”
“넌 별로였어?”
“집중이 잘 안 되긴 했어.”
“지루해서?”
“네가 자꾸 내 손을 보니까 내 손에 뭐가 있나 찾아보느라고.”
걸렸구나. 소원우는 다 마신 플라스틱 컵을 힘껏 구겼다. 어쩐지 왜 손을 가만히 두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나 싶었는데.
“네가 내 팔걸이에 팔 올려놨잖아. 너 팔 안 건드리게 커피 마시느라고 네 손 좀 봤다. 신경 쓰였으면 진작 말을 하지.”
끝까지 모르는 척하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티를 좀 내든가 할 것이지 사람 민망하게 이제 와서. 소원우의 마음은 들통난 지 오래였지만, 권차경은 그 마음을 눈치챈 사람 같지 않게 굴었다. 권차경이 장담했던 대로 둘의 관계에선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도 스킨십도 그대로였다. 소원우만이 그 새벽에 있었던 일이 진짜가 맞는지 되새겨 볼 뿐이었다.
소원우는 구긴 컵을 쓰레기통에 넣고 얼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로 쏙 들어가는 소원우의 뒤를 권차경이 따라 들어왔다. 소원우는 자리를 잡아 지퍼를 내리다 멈췄다.
“너도 싸려고?”
“아니.”
“그럼 나가서 기다리지, 왜 들어와.”
“내 마음이야.”
대꾸할 말이 딱히 없어서 소원우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지퍼를 내렸다.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양이 꽤 많았다. 소원우가 볼일을 보는 동안 권차경도 나름대로 화장실 안에서 제 할 일을 했다. 손을 씻고, 손을 말리고, 머리도 매만지고, 옷도 한 번 살피고. 소원우가 손을 씻으러 세면대로 오자 권차경이 자리를 비켜 주면서 웃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설레서가 아니라 자괴감 때문이었다. 전부 들통이 났는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불행이었다. 그걸 소원우는 너무 늦게 알았다.
영화관을 나오니 한낮이었다.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한동안 황사와 미세 먼지 탓에 환기도 제대로 못 시켰는데 외출하기 전에 창문을 열고 나오길 잘했다.
“원우야, 배고파? 밥부터 먹을까?”
“응. 점심 먹자.”
메뉴를 정하지 않고 일단 발부터 옮겼다. 번화가에는 음식점이나 카페가 즐비했다. 신입생이 참석해야 할 모임이 왜 그렇게 많은지 매주 술 모임이 있었다. 그 탓에 최근 들어 외식을 많이 하다 보니 마땅히 끌리는 음식이 없었다. 소원우는 눈에 잡히는 식당이 있을까 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고 싶은 데 없으면 뷔페 갈까? 나 초대권 있어.”
“어디 뷔페?”
권차경이 지갑에서 초대권을 꺼냈다. 인당 팔만 원이 넘는 호텔 뷔페 초대권이었다. 디저트가 특히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디저트에 별 관심이 없는 소원우가 그 호텔을 알고 있는 이유는 소원희가 생일에 가겠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어. 원희는 남자친구랑 가겠다고 하더라.”
소원우는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을 권차경에게 꺼내지 못했다. 말하기도 전에 차단당했다. 감히 꺼내 보겠다고 고민하지도 못할 만큼 냉정했던 밤이었다. 그러나 권차경은 달랐다. 수시로 소원우의 집에 놀러왔고, 소원희와 만날 기회를 잡았다.
소원희는 밖에서 권차경을 만나는 것은 매번 거절했다. 소원희는 소원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소원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굴 좋아하는지도 알았다.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소원우는 권차경의 사랑을 막지 말아야 했다. 그게 소원희가 소원우에게 권차경을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 이유였다.
뷔페에선 짧게 머무를 수 없다. 소원우는 일부러 만든 약속을 떠올렸다. 3시가 되려면 두 시간 남짓 남았다. 밥을 먹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미리 말하는 게 나을 듯했다.
“나 밥 먹고 친구 만나기로 했어.”
권차경이 걷다 말고 멈춰 섰다.
“이미 약속한 거야?”
“응. 계속 시간이 안 맞아서 오늘 겨우 맞췄거든.”
“누군데? 전영재?”
맞다. 권차경은 전영재랑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었지. 소원우의 친구는 자신의 친구라며 권차경이 술자리를 만들었다. 소원우도 권차경이 새로 사귄 친구가 궁금하다며 데려오라 했지만, 권차경은 혼자 등장했다. 대신 전영재와 쿵짝이 맞아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너는 모르는 사람이야.”
“내가 모르는 사람 누구?”
“……대학 친구야.”
같은 대학인 것도 맞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찬희는 전영재의 친구였다. 술에 취한 전영재를 데리러 왔다가 윤찬희는 소원우가 우는 것을 보았다. 우는 주사는 없는데 하필 그날따라 속이 불편했다. 술은 안 먹히고, 중간고사는 말아먹고, 모든 게 짜증이 났다. 옆에서 전영재는 주정을 부리며 윤찬희를 불러댔다.
소원우도 전영재처럼 권차경을 부르고 싶었다. 술에 취해 못 걷겠으니 와서 부축 좀 해 달라고 조르고 싶었다. 만약 전화를 걸어 여기로 와 달라고 했으면 권차경은 와 줬을 것이다. 권차경이 와 주어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게 서러웠다. 윤찬희가 전영재를 데리러 왔을 때, 소원우는 정직하지 못한 우정을 탓하며 울고 말았다.
“영재 말고 다른 친구? 나도 같이 만나면 안 돼? 다 같이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하나도 안 좋아. 같이 엮이면 엮일수록 풀 때 더 힘든 법이다. 새로 만들어진 관계에선 권차경을 모르길 바랐다. 소원우에게 권차경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더 생기지 않도록 소원우는 나름대로 노력 중이었다.
“어…… 우리 산 타기로 했어.”
“오후인데?”
“응. 일몰 보고 내려올 거야.”
“언제 같이 등산하는 친구가 생겼어? 나한테는 같이 산 가자고 한 적도 없으면서.”
권차경은 툴툴대면서도 저도 오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권차경은 산보단 바다를, 걷는 것보다는 드라이브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을 준비하려면 체력이 받쳐 줘야 한다는 이유로 소풍을 북한산으로 갔다. 낙오한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도 권차경은 그만두지는 않았다. 오기로 정상까지 기어이 오르고서는 거친 숨을 내쉬며 씩씩댔다.
앞으로 산은 절대 안 가.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소원우가 등산을 권할 리가 없었다.
“너도 다른 친구랑 놀면 되잖아.”
“걔들이 너랑 같아? 넌 특별하다고.”
전에는 이런 말에도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특별의 거리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헤집느라고 밤을 새곤 했다. 이제는 알고 있다. 아무리 특별해도 친구는 그저 친구였다. 다른 이와 다를 게 없다.
소원우는 별 반응하지 않고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호텔은 여기에서 걸어가기엔 조금 먼 거리였다.
“너는 뭐 할 말 없어?”
“무슨 할 말?”
앞서 걷던 소원우의 걸음을 다 따라잡은 권차경이 물었다.
“넌 나한테 각별하다니까.”
“그래. 알았어.”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소원우를 보며 권차경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너한테 그런 존재지?”
권차경은 소원우의 팔을 툭 치며 대답을 요구했다.
“그렇지?”
권차경이 낯간지러운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이유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특별하다는 단어로 소원우의 사랑을 억누르려는 걸까. 혹은 받아주지 못하는 짝사랑에 대한 위로인 걸까.
윤찬희는 권차경을 싫어했다. 권차경이 자신이 친구로 남아 준 것은 권차경이 다정하기 때문이라고 소원우가 말했을 때 윤찬희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서 상냥하게 구는 건 다정한 게 아니야. 잔인한 거지. 정말 다정한 사람이라면 네가 마음을 다 정리할 수 있도록 만나거나 연락하지 않고 너와 거리를 뒀을 걸.’
소원우는 권차경이 다정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납득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권차경과 거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다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엔 동의했다. 권차경의 다정한 말들이 소원우를 계속 붙잡았다. 괜히 들뜨지 않도록 소원우는 늘 간질거리는 대화에서 재빨리 벗어나야 했다.
멀리 오던 택시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소원우의 앞에 섰다. 소원우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원우야, 뭐 해? 얼른 타.”
권차경은 소원우의 손짓에야 몸을 움직였다.
나란히 택시에 앉아 호텔까지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권차경은 오른쪽, 소원우는 왼쪽으로 서로 다른 풍경을 보았다. 익숙한 거리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흘러나오는 노랫말엔 봄이 가득했다. 그래, 이 즈음이었다. 학교 정원은 권차경을 처음 본 날처럼 꽃이 피고 녹음이 움터서 산책하기 좋을 터였다.
“넌 그게 문제야. 뭐 하나하나 권차경과 다 연관 짓고 있어.”
윤찬희는 맥주 캔을 콱, 구겨 내려놓고는 거칠게 재킷을 벗어 옆에 올려놓았다. 흙 묻는 게 싫다며 더워도 안 벗더니 소원우의 얘기가 퍽 답답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윤찬희는 소원희를 제외하고 소원우의 짝사랑 상대가 누군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윤찬희를 만나면 권차경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죄다 한탄과 하소연에 가까운 얘기였다.
“솔직히 말해 봐. 너는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지? 권차경이 너의 정성에 감흥해서 널 받아줬으면 하는 거잖아.”
윤찬희는 봉지를 뒤적거려 맥주 한 캔을 더 꺼냈다. 한 손은 맥주를, 한 손은 소원우를 잡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네 마음 잘 안다. 나도 친구 좋아해 본 적 있어. 내가 술기운에 고백하니까 술이 확 깰 정도로 세게 후려치고는 마음 정리하면 그때 연락하라더라. 집 찾아가서 울고불고 난동을 쳐도 얼굴 한 번 안 내밀었어. 독한 새끼. 덕분에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됐지. 잃을 게 많아지면 얼마나 힘든지 너는 아직 몰라서 그래. 우정 그거 별거 아니야. 지금은 권차경이 영혼의 동반자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막상 관두고 나면 걔 때문에 더 좋은 인연 못 만난 게 보일걸.”
소원우는 발아래 내려앉은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풍경이 낮에 본 풍경보다 더 아름다웠다. 낮에는 웅크려 있다가 밤이 되면 밝은 빛을 내는 풍경을 소원우는 가만히 눈에 담았다. 야경을 보며 시원한 맥주라니. 더없이 좋은 조합이었다.
소원우는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마신 뒤 비닐에서 새로 하나를 꺼냈다. 넉넉히 들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둘이 세 캔씩 비워 냈다. 안주로 가져온 감자튀김과 치킨은 한참 남았는데 맥주만 점점 사라졌다.
“소원우, 너 술 잘 안 취하지?”
“그런가 봐. 완전 취해 본 적은 없어.”
“다행이네. 너 술까지 약했으면 왠지 못 볼 꼴 다 보였을 것 같아.”
“뭐 어때. 친구끼리. 난 하나도 안 창피해.”
“나 말고 권차경 말이다. 너 걔랑 술 먹지 마. 너 그때도 술 마셔서 그런 일 생긴 거 아니야. 괜히 흑역사 또 만들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았지?”
술에 기댄 용기를 윤찬희는 흑역사라 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용기는 사실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었으니까 소원우도 윤찬희의 말을 뒤집지는 못했다. 그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동아리 어디 들었어?”
“아직 결정 못 했어. 딱히 들고 싶은 데도 없고.”
“그럼 우리 동아리 들어와. 여행 동아리인데 한 달에 한 번 1박 2일 여행 가. 시간 안 되면 당일치기로 참석해도 돼.”
“그래?”
소원우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윤찬희는 남자 선배들이 군대에 가서 성비 차이가 심하다며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여행을 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체력도 좋아지고, 깊은 자아 성찰은 물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서 여행의 이점을 늘어놓았다.
“복잡한 머리 식히는 데는 여행만큼 좋은 게 없어. 실연도 금방 극복할 수 있을 거다. 이곳저곳 알아 두면 권차경이 모르는 곳으로 도망갈 수도 있고.”
도망은 무슨. 도망을 가도 권차경이 가지, 내가 가겠냐 싶으면서도 소원우를 끌어들이려고 별별 말을 다 하는 윤찬희의 그 정성이 갸륵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고요한 산속에서 이따금씩 소리가 울렸다. 그때마다 윤찬희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지만 소원우는 그러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으면 답답할 것 같았는데 막상 산에 올라오니 휴대폰은 감상을 가로막는 방해물에 불과했다. 산에서 부는 바람엔 특별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소원우는 온갖 꽃, 나무, 풀 냄새가 섞인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 * *
의대에 들어간 소원희에게 집은 잠을 자는 공간이었다. 사흘이 넘도록 소원희는 집에서 밥 먹을 시간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바쁜 와중에도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밥 때가 되면 소원희는 자신의 식단을 사진 찍어 소원우에게 보냈다.
권차경까지 셋이 밥을 먹는 게 얼마만이더라. 소원희가 중요한 시험을 마치고 며칠 숨 돌릴 틈이 났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권차경은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소원희와 둘만 사는 집이지만 작지는 않았다. 서로의 사생활이 완벽하게 지켜졌다. 소원우도 소원희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고, 소원희 역시 소원우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실과 주방, 화장실 이 세 군데의 공동 구역만 돌아가면서 청소할 뿐, 각자의 방은 각자가 알아서 했다.
소원우는 선반에 놓인 액자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찍은 가족사진과 고등학교 졸업식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돌잔치 때 소원희와 나란히 앉아 울고 있는 사진은 항상 제자리였고, 맨 끝자리만 바뀌었다. 대체로 권차경과 둘이 찍은 사진이 자리했다가 어떤 때는 독사진, 또 어떤 때는 부모님의 사진이었다가 드넓은 사막이나 하늘이 찍힌 풍경 사진으로 바뀌기도 했다.
소원우는 액자에서 꺼낸 사진을 서랍에 넣어 두고, 지갑 속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화사하게 보정된 스티커 사진이었다. 주로 휴대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서 인화해 놓은 사진이 없었는데, 윤찬희는 자신의 스무 살 생일을 제대로 기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소원우를 스티커 사진기로 끌고 갔다.
억지로 찍혔다는 게 표가 날 만큼 소원우의 표정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윤찬희는 소원우의 얼굴에는 잔뜩 낙서를 해 놓고 자신의 머리엔 왕관을 얹어 놓고는 지갑에 넣어 지니고 다니라 했다. 퍽 우습게 나온 사진이라 볼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소원우는 액자의 빈자리에 그 사진을 넣어 놓았다.
“소원우. 권차경 왔어.”
밖에서 소원희가 부르는 소리에 소원우는 서랍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서둘러 나갔다.
불편한 자리를 만든 책임을 음식으로 달래 보려는지 권차경은 커다란 비닐 두 봉지를 꽉 채워 갖고 왔다.
“이렇게 많이 사 오지 말라니까.”
한쪽엔 고기, 다른 비닐엔 채소와 음료수, 과일이 들어 있었다. 소원우는 비닐을 받아들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미 사 왔으니 어쩔 수 없어 하나씩 꺼내 정리하는데 한우 종류만 해도 네 가지가 됐다.
“한우 좋아하지? 고기 구워 먹으려고 많이 사 왔어.”
한우는 소원희가 좋아했다. 소원우는 소고기보단 돼지고기를 더 좋아했다. 소원희와 셋이 밥을 먹을 때 고기는 항상 소고기였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구워 먹는 거 괜찮아?”
소원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찬장에서 불판을 꺼내려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소원희가 말했다.
“냄새나서 싫어.”
“환기시키면 되지. 그냥 먹자. 집에서 자주 구워 먹었잖아.”
“오늘은 고기 냄새 맡기 싫다고.”
일부러 내는 짜증이다. 소원우의 마음을 알게 된 후로 소원희는 권차경에게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체육대회 이후로 권차경은 종종 소원우의 집에 놀러왔다. 자연스럽게 셋이 밥을 같이 먹고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다른 친구들과 있다가 자신을 보고 달려오는 게 좋았다. 손이 시리다는 소원우에게 장갑을 벗어 주는 것도 좋았고, 주말에 둘만 교외로 놀러 가는 것도 좋았다.
그러다 소원우는 점점 권차경이 집에 오는 게 싫어졌다. 셋이 대화를 할 때 권차경이 주로 소원희를 보고 있는 것도 싫었고, 반찬을 소원희 앞으로 밀어 주는 것도 싫었고, 이과 시험 얘기에서 소원우만 소외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도 참을 만했던 이유는 소원희를 바라보는 권차경의 시선이 호기심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선에 변화가 오고 말았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모르길 바랐다.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 변화는 왜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게 되는 걸까. 권차경이 소원희가 좋다며 소원우에게 말했을 때, 소원우는 한동안 계절 타는 사람처럼 울적한 얼굴로 멍하니 굴었다. 밥도 종종 건너뛰었고, 주말에는 방 밖에 나올 생각을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소원희의 추궁에 소원우는 나날이 떨어지는 성적 탓으로 돌렸지만, 소원희는 소원우에게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권차경을 좋아한다는 말을 꺼낸 건 홧김이었다. 쌍둥이라고 다 나눠야 하는 건 아닌데 소원우의 모든 것을 알려 들려는 소원희가 짜증났다. 혼자 움켜쥐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대학, 미래, 꿈에 대한 것들을 한창 고민할 때였으니까 소원희가 제발 저 좀 내버려 뒀으면 했다. 아니, 사실은 권차경이 소원희를 좋아하니까. 소원희가 부러우니까. 소원희에게 심술도 부리고, 화풀이도 좀 하고. 그러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권차경이 소원희에게 고백하던 날, 소원희는 권차경을 매정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소원우를 붙잡고 빌었다.
‘원우야. 그만하자. 응? 너만 접으면 모든 게 다 좋아져. 다른 사람으로 해. 남자여도 되니까, 걔는 좋아하지 마.’
소원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머리가 결정을 내렸다고 그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었다. 소원우는 소원희에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소원우 나름대로 권차경을 잊어 보려고 애쓴다는 걸 소원희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원희는 소원우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다. 셋이 같이 밥을 먹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소원희는 소원우를 보며 꾹 참았다. 권차경이 이미 소원우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소원희는 모르고 있었다. 만약 소원희가 알게 되면 밥상을 뒤엎고도 남을 터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요리해 먹을 만한 재료는 고기밖에 없는데 불고기는 괜찮아? 최대한 냄새 안 배게 할게.”
소원희는 권차경의 말에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선 텔레비전만 쳐다보았다.
냄새 안 나는 고기 요리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 권차경이 소원희의 심기를 맞추려 애쓰는 모양새가 퍽 안쓰러웠다. 소원우는 소원희가 왜 자신을 한심스럽게 보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방에게 모든 걸 맞추다 보면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날씨를 좋아하고, 누구 음악을 즐겨 듣는지 흐려진다. 어느새 자신의 것은 사라지고, 상대의 것만 남는 법이다.
권차경은 불고기는 한 번도 안 만들어 봤다면서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았다. 몇 개의 레시피를 보더니 금방 습득했는지 고기를 손질하고, 양념을 만들어냈다. 요리는 꽤 잘하니까 처음 만드는 불고기라도 웬만큼 맛을 낼 것 같았다. 요리가 시작되자 달짝지근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권차경은 흘끔흘끔 소원희 눈치를 봤다. 퍼지는 냄새를 막아 보려는지 환풍기를 켜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다행히 소원희는 상이 차려질 때까지 더 불평하지는 않았다.
소원우는 몰래 구급상자에서 소화제 한 알을 꺼내 먹었다. 차려진 음식들은 소원희를 위한 요리였다. 먹기도 전에 체한 기분이 들었다.
밥을 먹는 내내 소원우는 가시방석이었다. 이 삭막한 분위기를 권차경이 못 느낄 리 없는데도 권차경은 태평했다. 나서서 물을 떠다 주고, 밑반찬을 정리했다. 소원희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빠르게 먹고는 보훈일 만나겠다며 나갔다. 권차경은 아쉬웠겠지만 소원우는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소원우는 설거지를 끝내고 권차경이 사 온 딸기를 꺼내 씻었다. 알이 크고 색이 붉어 달아 보였다.
“다음엔 딸기 사 오지 마. 원희는 딸기 안 좋아해.”
소원우는 씻은 딸기를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인 소원우와는 달리 소원희는 과일은 편식했다. 배가 고파도 싫어하는 과일엔 손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권차경은 과일도 넉넉히 사 왔다. 소원희가 좋아하는 사과와 포도도 빼놓지 않았다.
권차경은 웃으며 딸기 꼭지를 떼고 입에 넣었다.
“네가 딸기 좋아하잖아.”
말이란 건 참 무섭다. 냉정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해도 한순간 말에 휘둘리게 된다. 소원우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귀가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손으로 꾹 눌러 온도를 내리고 싶어도 움직임 하나하나가 유난스럽게 보일까 조심스러웠다.
“오늘 자고 가도 돼?”
“뭐?”
소원우는 순간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갑자기 왜?”
“오늘 집에 가기가 너무 싫다. 나 재워 주면 내일 아침도 내가 차려 줄게. 토요일이니까 늦잠 자고 오후에 전시회 가자. 모네전 내일부터 시작이래.”
소원우의 심란한 마음을 권차경이 알 리 없었다. 그러니 자고 가겠다는 말을 쉽게 꺼내겠지.
고등학생 때는 서로의 집에 가서 자주 묵곤 했다. 권차경이나 소원우나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시니 아지트가 되기 딱 좋았다. 소원우는 소원희 덕택에 친구들에게서 집을 지킬 수 있었지만, 권차경은 아니었다. 여럿이서 권차경의 집에 몰려가 밤새 놀다 온 적도 많았고, 소원우만 가서 자고 온 적도 있었다. 권차경도 집이 시끌벅적한 게 좋다며 흔쾌히 집을 개방했다.
“오랜만에 같이 자자. 넌 우리 집 놀러오라고 해도 안 오잖아. 전엔 많이 왔으면서.”
그야 당연하지.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텐데 권차경은 태연스레 입에 담았다.
“아니…… 뭐, 대학생 되니까 바쁘기도 하고…….”
“너 바쁘다니까 내가 왔잖아. 오늘 자고 가도 되는 거지? 그러고 보니까 이사한 후로 자 본 적이 없네.”
권차경은 몇 번이나 소원우에게 재워 달라고 했지만 소원우는 매번 소원희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소원희가 불편하다고 해서 안 되겠어. 그리 말하면 권차경은 아쉬워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원희가 싫다고 할 거야.”
“너 아까 설거지할 때 휴대폰 울렸는데 한 번 확인해 봐.”
대화하다 말고 권차경은 고갯짓으로 휴대폰을 가리켰다. 소원우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들었다. 소원희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나 오늘 외박한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없음 연락하지 마.]
“보려고 한 건 아니고 메시지 내용이 화면에 떴더라고.”
소원우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론 둘만 자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권차경의 집처럼 따로 손님방이 있는 게 아니니 한방에서 나란히 누워 자야 했다. 권차경이 집에 찾아오는 이유는 소원희 때문이었다. 소원희를 만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머물 필요는 없을 텐데 왜 굳이 자고 간다는 건지 의아했다.
“나 불편해?”
권차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 네가 불편한 게 아니라 이사하면서 이불도 다 버리고, 새로 사는 바람에 여분이 없거든. 그래서……”
“너 침대 크잖아. 같이 자면 되지.”
소원우는 이 집보다 더 넓고 좋은 집에 살면서 구태여 여기서 자겠다는 권차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땅히 거절할 명분을 대지 못하고 소원우는 허락을 하고 말았다. 권차경이 싱글싱글 웃으며 일어났다.
“냉장고에 감자랑 양파랑 다 있더라. 당근도 있고. 내일 아침에 볶음밥 만들어 줄게.”
“먹을 사람 나밖에 없어. 대충 해.”
“네가 먹을 건데 어떻게 대충 해. 맛있게 해 줄게.”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사과와 당근을 갈아서 주스도 만들겠다고 했다. 권차경은 소원희가 누구랑 외박하는지 알면서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게 됐으니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건가.
소원우는 벌써부터 밤이 무서웠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고, 주위가 고요해지면 그땐 숨을 뱉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될 테니 잠을 자기는 글렀다.
권차경이 속옷을 사고 오겠다며 나간 사이에 소원우는 소원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원희가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권차경이 자고 간다 얘기해야 맞다고 생각했다.
―너 바보야? 왜 그놈을 집에 재워?
“딱히 거절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어. 여태껏 네가 불편해서 안 된다고 둘러댔는데 네가 오늘 안 들어온다니까 ….”
소원우는 말을 흐렸다.
―소원우. 내 핑계 그만 대. 보훈이랑 사귀기 전에 내가 보훈이 먼저 좋아했으니까 짝사랑 힘든 거 나도 알아. 근데 난 너처럼 구질구질하게 안 굴었어. 신보훈이 나 안 좋아하더라도 그래도 난 다른 누굴 만나서 잘 사귀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너 수능 망쳤어도 남들 가고 싶은 대학 붙었잖아. 멀쩡한 허우대에 성격도 좋은데 왜 아무것도 못 가진 사람처럼 행동해? 너, 겨우 스물이야. 대체 왜 걔가 네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데?
소원희는 분통을 터트렸다. 오랫동안 쌓은 게 많았는지 씩씩대는 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또렷이 들려왔다. 소원희는 말 꺼낸 김에 다 해야겠다며 소원우를 다그쳤다.
―너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내가 장담해. 원우야. 다정하다고 넘어가지 마. 응? 네가 걷어차자. 처음만 힘들어. 끊어 내기까지 힘들지, 막상 끊으면 편해질 거야.
날 선 목소리는 점점 애원으로 바뀌어 갔다. 소원희가 원하는 말을 해 주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사랑이 다 여물지 않은 탓이다. 완전히 익으면 그때는 가지에 더 매달리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질 텐데, 아직은 설익은 사랑이라 적절한 햇빛과 비와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둘 수 있는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 나 권차경만 바라보고 있는 거 아니야. 아주 잘, 잊을 수 있는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때는 쉽게 잊을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몇 달 후면 군대도 가야 해. 이러는 것도 얼마 안 남았어.”
첫사랑인데, 겨우 스물인데 소원우는 너무 많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상처가 마음을 갉아먹으면 사랑이 더 줄어들어야 하는데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방어하느라 오히려 불어났다. 소원희는 열여덟에 신보훈보다 더 좋아할 사람은 못 만날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소원우가 딱 그 마음이었다.
―권차경이 뭐라고 잊는 시기가 따로 필요하냐? 너 진짜 한심하다.
입안이 씁쓸했다. 양치를 했는데 어느새 상쾌함이 다 사라지고 남은 것은 쓴맛뿐이었다.
―그래도 사랑해, 원우야. 잘 자.
소원희는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고는 마지막은 따뜻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소원우는 소원희를 미워할 수 없었다. 소원희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권차경이 소원희를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의 마음만 아니었다면 소원우는 소원희의 짝으로 신보훈이 아니라 권차경을 적극적으로 밀었을 것이다.
끝이 없는 사색에 잠기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을 열기 전에 소원우는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점검했다. 소원희와 통화할 때 젖은 목소리가 나오기에 혹시 눈가가 발갛게 되지 않았나 했는데 권차경이 눈치챌 정도까진 아니었다.
권차경은 또다시 비닐 하나를 꽉 채워 들고 왔다.
“아까 술은 안 사 왔거든. 이대로 자기 아깝잖아. 한 잔씩 마시자.”
집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했더니 차를 몰고 마트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새우 좋아하지? 감바스라고 와인이랑 같이 마시면 괜찮은 요리 있어. 그거 만들어 줄게. 앉아서 TV 보고 있어.”
외박을 처음 허락받은 아이처럼 권차경은 이 밤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원우는 집 부엌을 권차경에게 완전히 맡겼다.
자취 생활을 몇 년 하다 보니 소원우도 몇 가지 요리는 꽤 하는 편인데 권차경의 요리 실력은 소원우보다 더 좋았다. 권차경은 한식뿐만 아니라 외국 요리에도 능숙했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에게 각 나라 음식 하나씩은 다 배웠다고 했다.
“너 호주에서는 한 도시에서 쭉 살았다면서. 친구들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대부분 5년, 10년 지기들이니까.”
“한국 안 놀러온대?”
“안 그래도 연말에 놀러오겠대. 겨울의 크리스마스에 로망 있는 애들이 몇 놈 있어.”
권차경의 집에 갔을 때, 앨범을 구경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만 골라 넣어 두었다고 했다. 권차경은 친한 친구들이라며 한 명 한 명 손으로 짚어 주면서 사진으로 인사시켜 주었다. 소원우가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권차경은 고민하는 듯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너.’
‘나랑 알게 된 지 1년도 안 됐잖아.’
‘친구 사이에 기간이 중요한가. 안 지 얼마 안 됐어도 제일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아. 아마도 그때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권차경을 좋아하는 게 맞다고 소원우는 그때 확신했다.
권차경은 온도 오른 올리브유에 편마늘을 넣었다. 마늘이 튀겨지면서 마늘향이 집 안에 가득했다. 마늘이 노릇해지면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 새우를 넣고, 맵지 않을 만큼의 페퍼론치노를 송송 썰어 넣었다.
밥과 과일로 배를 채워 얼마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새로운 음식이 나와선지 위가 자리를 더 만들어 냈다.
“너 주량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
“필름이 완전히 끊길 때까지 마셔 본 적은 없긴 해.”
“그럼 다른 사람이랑 마실 땐 많이 마시지 마. 어떤 주사 있을지 모르니까 적당히 마셔. 나랑 마실 때는 상관없지만.”
주량을 모르는 것은 권차경도 마찬가지였다. 소원우는 네 걱정이나 해, 라고 대꾸하면서 말을 이었다.
“술 취해도 끝까지 나 책임져 줄 친구 몇 있어. 걱정 마.”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채의나 성영이는 당연하고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찬희도 믿고 마실 수 있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취할 때까지 마시지 마. 술 취해서 일 저지르고 후회 안 하는 사람 없더라.”
소원우는 괜히 뜨끔했다. 권차경의 방에 몰래 들어갔던 그 새벽을 두고 하는 말일까 해서 슬그머니 권차경의 눈치를 봤다. 윤찬희가 권차경과 둘이 술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는데 며칠 못 가 이렇게 술자리를 벌였다.
소원우는 난감한 얼굴로 잔에 담긴 와인을 비웠다. 권차경은 그런 소원우를 말없이 보다 소원우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었다. 속내를 알기 힘든 웃음이라 소원우는 또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밤은 아침보다 조용히 찾아왔다. 늦은 밤에야 집으로 돌아오는지 주택가를 오가는 차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와인의 양이 줄어들수록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친구들과 마실 때는 술이 들어갈수록 왁자지껄해졌는데 지금은 말 한 마디를 내뱉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몸보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먼저 다가왔다. 아무런 말이 없어도 편한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는데 소원우는 단 한 번도 권차경이 편한 적이 없었다.
더 마시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잔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소원우는 빈 잔을 그냥 들고만 있었다. 먼저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한 사람은 권차경이었다. 권차경은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옮겨 놓고 쓰레기를 정리했다. 소원우도 같이 치우려 했지만, 권차경이 먼저 빠르게 척척 정리하는 바람에 소원우는 텅 빈 손으로 왔다 갔다만 했다.
“원우야, 졸리지? 씻고 와. 자자.”
권차경은 설거지까지 끝내려는지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꼈다.
“그냥 놔둬. 내가 내일 아침에 한다니까.”
“그릇 몇 개 없어서 금방 해. 설거지 끝내고 나도 씻게 너는 얼른 샤워부터 해.”
소원우가 말린다 한들 권차경이 그만둘 것 같지 않아서 소원우는 포기하고 속옷과 잠옷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맞으니 몸이 노곤해졌다. 와인을 먹길 잘했다. 맨정신이었다면 잠에 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욕실에 들어간 사이 방에 먼저 들어갔다. 권차경이 집에 온다고 했을 때부터 방 청소를 깔끔히 한 터라 더 치울 것은 없었다. 침대는 넓은데 벌써부터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소원우는 자신의 방인데도 어디 편히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권차경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소원우는 몸을 움찔 떨었다. 혹시 들켰을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권차경을 반기려던 순간, 소원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잠옷 빌려줄 수 있어?”
권차경은 속옷만 입은 채였다.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온 물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렀다. 소원우의 시선도 물방울을 따라갔다. 어렸을 적부터 수영을 했기 때문인지 권차경의 어깨는 남들보다 더 넓은 편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적당히 탄 구릿빛 피부에서 소원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젖은 머리에서 날렵한 턱선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그리고 배꼽까지 가던 소원우의 눈동자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꽤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싶을 즈음,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있다고 안 해도 돼. 너무 많이 들었거든.”
망했다.
이제 와 못 본 척해 봐야 늦었지만 소원우는 고개를 홱 돌렸다. 머리가 어질해지는 걸 겨우 붙들고, 소원우는 서랍장을 열었다. 살짝 넉넉한 트레이닝 바지와 반팔 티를 찾아 권차경에게 건넸다.
“이거 입어.”
“나 좀 더 벗고 있을까? 더 볼래?”
“……부러워서 잠깐 좀 본 거야. 나도 운동할까 싶어서.”
“운동하면 당연히 좋아지지. 나랑 같이 운동할래, 원우야?”
“나중에. 옷 빨리 입어.”
“응. 잘 입을게, 원우야.”
원우야.
권차경은 이름을 많이 부르는 편이었다. 말의 시작이나 끝에 대화 상대의 이름을 붙이곤 했는데 권차경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소원우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권차경은 보통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소원우의 이름을 부를 때는 더욱 그랬다. 권차경이 ‘원우야.’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어서 소원우는 가끔 권차경의 말을 못 들은 척하기도 했다.
권차경이 옷을 다 입을 때까지도 소원우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어색하게 서 있는지도 모르고 소원우는 시선만 다른 곳에 돌린 채로 얼어 있었다.
“왜 그렇게 어색하게 서 있어? 내가 침대까지 데려다줄까?”
권차경이 소원우의 손을 잡으며 장난을 치자 저 멀리로 달아났던 정신이 이제야 돌아왔다. 소원우는 잡힌 손을 빼내려 팔을 세게 흔들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탓에 퍽 거칠게 뿌리친 모양이 됐다.
“……나 손잡는 거 안 좋아해.”
“그랬어? 미안해. 난 손잡는 거 좋아하거든. 괜히 장난쳤다.”
소원우는 자신이 얼마나 예민하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별것 아닌 일에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제어되지 않았다.
“그만 자자.”
소원우는 침대로 들어가 한쪽을 비우고 누웠다. 권차경은 침대로 걸어가면서 방을 한 번 슥 둘러보더니 선반 앞에서 멈췄다. 사진을 보는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보다가 권차경은 갑자기 액자로 손을 뻗었다.
무슨 사진을 그리 자세히 보고 있나 궁금해진 소원우는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권차경이 보고 있는 것은 맨 끝의 사진이었다.
소원우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아야 하나, 아니면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서 자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권차경이 구경을 다 끝냈는지 침대로 걸어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남자 둘이 누워도 충분히 널찍한 침대인데도 권차경이 옆에 누우니 비좁게만 느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요동칠 것 같고, 몸을 뒤척일 수도 없을 만큼 협소해진 듯했다.
“잘 자.”
소원우는 재빨리 인사를 끝내고 몸을 옆으로 누웠다. 벌써 자는 건 아닐 텐데 등 뒤에선 인사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눈을 감고 몇 분쯤 흘렀을까. 권차경은 소원우가 아직 자고 있지 않은 걸 알고 있는지 말을 걸었다.
“많이 친한가 봐?”
“응?”
“둘이 찍은 사진 있잖아. 맨 마지막에.”
“아. 찬희?”
“대학 친구? 많이 친해졌나 봐. 액자에 둘만 찍은 사진은 그것밖에 없던데.”
알고 된 시기에 비해서 빠르게 친해진 사이였다. 윤찬희와 있을 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편했다. 윤찬희는 만날 때마다 그동안 있었던 온갖 화제를 다 꺼내 놓는 터라 조용할 때가 별로 없긴 했지만. 워낙 말을 재밌게 하는 친구였다. 단순한 일화도 윤찬희가 얘기하면 남달랐다.
“응. 찬희가 말이 되게 많거든. 낯도 안 가리고 친화력도 좋아서 금방 친해졌어.”
윤찬희는 사진 찍는 것도 좋아했다. 카페에 가거나 식당에 가면 음식도 꼭 사진을 찍어야 했고, 어딜 놀러 가면 인증 샷도 꼭 남겼다. 윤찬희는 그래서 소원우를 좋아했다. 소원우는 한 번도 빨리 찍으라고 재촉한 적이 없다면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덩달아 사진을 많이 찍게 되는 모양이다. 윤찬희와 함께 다니면서 소원우의 사진도 늘었다. 소원우가 찍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윤찬희는 소원우를 세워 놓고 셔터를 눌렀다. 윤찬희가 신경 써서 찍어 준 덕에 사진도 웬만큼 다 잘 나왔다.
“원우야. 방학하면 가평 갈까?”
“가평? 거기는 왜?”
“여름이잖아. 래프팅도 하고, 캠핑장 있던데 텐트 치고 하룻밤 자고 오자.”
지난 가을부터 권차경은 여름만 기다렸다. 여름이 한 해의 반이나 되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바다도, 수영도, 뜨거운 햇살도 계속 그리워했다.
“원우 너 수영할 줄 알지? 못해도 괜찮아. 구명조끼 입고 놀면 돼.”
소원우는 가을을 좋아했지만, 여름과 겨울,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겨울이 더 나았다. 바다보다는 산, 수영보다는 스키가 좋았다.
권차경과 처음 연락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는 권차경과 닮은 게 많아서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다른 게 훨씬 많았다. 소원우는 권차경과 잘 맞는 척 스스로를 속이고 뻔뻔하게 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확연하게 드러났다. 숨겨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가자.”
언젠가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겠지. 소원우는 권차경이 기다리고 있는 대답을 해 주고서 눈을 감았다. 권차경도 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암막커튼을 달았기 때문에 바깥의 불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소원우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권차경은 보지 못할 것이다. 혹여 권차경의 몸과 닿을까 봐 소원우는 새우처럼 다리를 웅크렸다. 와인을 좀 더 마셨어야 했나. 샤워를 할 때만 해도 쉽게 잠에 들 것만 같았는데 그새 다 깼는지 정신이 또렷했다. 그래도 소원우는 눈을 꼭 감고 몸을 펴지 않았다.
* * *
전영재는 수능에서 소위 대박을 친 케이스였다. 모의고사 때보다 1등급씩은 다 올랐고, 혹시나 하고 상향 지원한 대학에 운 좋게 턱걸이로 붙었다. 집안의 경사였다. 전영재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명문대에 들어간 덕에 용돈을 두둑이 받으면서 대학 생활을 신나게 즐겼다.
대학에 들어가면 제일 하고 싶었던 게 연애라 한 만큼 입학하자마자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첫 연애라 서툰 대신에 지극정성을 다했다. 전영재의 중심은 여자친구였다. 전영재의 아침부터 밤까지, 온 하루가 여자친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여자친구가 있어 행복이 컸던 만큼 여자친구가 없을 때의 불행도 상당했다.
“내가 저놈 저렇게 될 줄 알았다.”
윤찬희는 전영재를 보며 혀를 쯧, 찼다. 전영재는 윤찬희에게 안겨서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한참 울더니, 눈물을 그치고서는 앞장서 술집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주량을 넘긴 지 오래였다.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술잔을 놓지 않았다.
“그만 좀 마셔. 쓰러지겠어.”
소원우가 전영재의 잔을 뺏었지만 전영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병째로 술을 들이마셨다.
“그냥 놔둬. 죽을 것 같은 숙취를 느껴봐야 정신 차릴 수 있을 거다.”
“그래도 너무 많이 마시잖아.”
“좀 있으면 그냥 쓰러져 잘 거야. 신경 쓰지 말고 이거나 먹어. 너 아까부터 전영재 신경 쓰느라 제대로 못 먹더라.”
소원우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면서도 전영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윤찬희의 말대로 전영재는 졸린 듯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더니 상에 엎드렸다. 감긴 눈꺼풀에 눈물방울이 대롱 매달려 있었다.
“가슴 찢어질 것처럼 아픈 것 같아도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져. 대부분 다 겪는 일인데 뭘.”
집에 데려가 눕혀야 되는 것 아니냐는 소원우의 말에 윤찬희는 걱정할 것 없다며 전영재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
“난 전영재는 걱정 안 해. 네가 걱정이지.”
“나를 왜. 내가 영재보다 뭐가 못 미더워서. 난 저렇게 취할 때까지 마시지도 않을 거고, 너한테 매달려 울지도 않을 건데.”
“그러니까 걱정하는 거지. 차라리 전영재처럼 해. 그럼 나도 익숙하게 위로도 하고, 정신 차리라고 엉덩이도 걷어차고 밥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도 하면 되는데 넌 아무렇지 않게 밥도 알아서 먹고, 울지도 않고, 술도 안 마시면서 반듯하게 지낼 것 같아서 내가 할 일이 없을까 봐 걱정이다.”
소원우는 윤찬희의 말에 피식 웃었다. 윤찬희의 말만 들으면 아주 괜찮게 지내는 건데 왜 걱정인지 모르겠다. 소원우가 바라는 일이었다. 권차경이 없어도 평소처럼 지낼 수 있다면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마음을 잘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얘가 뭘 몰라도 너무 모르네. 너는 권차경에게 분노해야 돼. 권차경 앞에서 난동 피우라는 게 아니라 네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너를 좋아해 주지 않는 게 그놈의 큰 잘못이라 생각하고 분노하란 말이야.”
윤찬희는 말을 하다 말고 체한 사람처럼 가슴을 몇 번 쿵쿵 치더니 콜라를 시켰다. 잔에 따른 콜라를 벌컥벌컥 다 들이마시고 또다시 화를 냈다.
“근데 권차경은 네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란 거 잘 알 거야. 그러니까 너랑 친구를 계속하려는 거지. 문제는 그냥 그것뿐이란 거야. 네 노력이 부족해서 권차경이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는 차라리 네가 시원하게 차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한테 울고불고 했으면 좋겠어. 너한텐 실연이 필요해. 난 그렇다고 본다.”
윤찬희의 거친 위로방식에 소원우는 웃고 말았다. 찬희의 방식이 맞을 수도 있었다. 잊으려는 노력은 할 만큼 했으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원희가 요즘 보훈이랑 사이가 많이 안 좋나 봐.”
“진짜? 왜?”
“요즘 안 만나는 것 같더라고. 보훈이 얘길 잘 안 해. 보훈이 잘 지내냐고 물으면 그냥 그렇다고 대답만 하고.”
신보훈보다 더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소원희의 말 때문이었는지, 소원우는 소원희가 신보훈과 헤어진다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권태긴가. 어쨌거나 그거 권차경에게는 말하지 마라.”
“응.”
입안이 텁텁했다.
소원희의 개인적인 일까지 굳이 권차경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소원우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커다란 비밀을 감춘 사람처럼 권차경을 만날 때마다 속이 껄끄러웠다.
‘진짜 아무 문제없어?’
‘응. 원희는 별다른 말 안 하던데?’
소원희가 신보훈과 잘 지내고 있는지 먼저 물어본 사람은 권차경이었다. 권차경은 소원희와 같은 대학이니까 뭔가 알고 소원우에게 물어봤는지도 모른다.
윤찬희는 휴지를 들고 전영재의 눈을 꽉 눌렀다.
“전영재 우는 거 봐라. 아주 절절하다, 절절해.”
윤찬희는 거친 손길로 전영재의 얼굴을 닦더니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소원우도 뭐 놓고 가는 거 없는지 식탁 주위를 꼼꼼히 챙기고서 일어났다. 윤찬희는 자기보다 큰 전영재를 업고 끙끙댔다.
“이 새끼 겁나 무거워. 택시 좀 불러 주라. 이놈 그냥 우리 집 데려가서 재우는 게 낫겠다.”
금요일 밤이라 택시는 곧잘 잡히지 않았다. 한참 택시를 기다렸다 겨우 하나를 잡았다. 윤찬희가 같이 타고 가자고 했지만, 소원우의 집에 들렀다 윤찬희의 집에 가려면 빙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소원우는 손을 저었다. 어차피 여기서 집까지 걸어서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선한 여름밤이라 걷기에도 괜찮았다.
초여름부터 무더운 날씨가 계속 됐다. 공기는 후덥지근했고, 바람은 끈적거렸다. 얼마 걷지 않아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날씨 탓에 소원우는 방학하자마자 집에 틀어박혔다. 권차경은 방학을 하자마자 소원우에게 수영장에 가자, 바다에 가자 계속 연락을 해 왔다. 한 번은 과외 아르바이트 핑계를 대고, 또 두어 번은 날씨가 너무 덥다고 거절했지만, 매번 그 핑계를 대며 피하는 건 무리였다.
가평은 다음 주 금요일에 떠나기로 했다. 권차경은 숙소나 음식도 자신이 다 알아볼 테니 몸만 오라고 했다. 밖에서 둘이서만 하룻밤을 보낸 적은 없으니 걱정되는 한편 설레는 마음도 들었다.
아직은 권차경이 너무 많이 좋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가 다시 길어졌다.
* * *
방 안엔 더운 기운이 가득했다. 타이머를 맞춰 둔 선풍기는 몇 시간 전에 꺼졌을 터였다. 소원우는 일어나는 대신 선풍기를 다시 켜 놓고, 도로 누웠다. 모처럼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었다. 반나절은 침대에서 꿈지럭거릴 계획이었다. 밥도 시켜 먹고. 그러나 소원우는 방금 날아든 문자에 몸을 일으켰다.
[나 비빔국수 먹고 싶어.]
한동안 소원희와 제대로 얼굴 마주하고 얘기 나눌 시간이 없었다. 기말고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소원희는 독서실을 끊어 놓았다. 고등학생 때도 지금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공부하는 데 보냈지만, 지금보다는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마음의 여유. 공부가 재미있다던 소원희는 대학에 들어와서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장 보고 올게. 한 시간만 기다려.]
한낮의 햇살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모든 걸 태워 버릴 듯한 맹렬한 더위에 소원우는 10분 거리의 대형 마트 대신 집 가까이에 자리한 작은 슈퍼를 선택했다. 소면과 육수를 낼 멸치와 다시마, 무 그리고 비빔국수의 고명으로는 오이와 상추를 골랐다.
돌아오니 소원희가 독서실에서 돌아와 있었다. 소원우는 서둘러 냄비 하나엔 국수를 삶고, 다른 냄비 하나엔 육수를 끓였다. 소원희 몫의 비빔국수를 맞은편에 놓고 소원우는 자신의 그릇에 육수를 부었다.
“넌 멸치국수?”
“응. 비빔국수 양념장은 따로 빼 놨으니까 네가 먹어 보고 조절해서 넣어.”
거실엔 에어컨이 있었다. 실내 온도를 낮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시원해졌다. 멸치국수의 국물은 살짝 심심했지만, 김치와 같이 먹으니 간이 딱 맞았다. 소원희는 양념장을 듬뿍 넣었다. 하얗던 국수 면발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안 매워?”
“매워. 근데 매운 게 먹고 싶었어.”
소원희는 말없이 국수에 집중했다. 입맛에 맞았는지 국수를 입에 넣는 소원희의 손길이 부지런했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선 다시 삶아 놓은 면발을 그릇에 넣더니 이번엔 육수를 부어 먹기 시작했다.
소원희는 편식하지 않고 대체로 다 잘 먹는 편이었지만, 과식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소원희가 빠른 속도로 많이 먹는 것은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물을 것은 많았지만 소원우는 다른 말을 꺼내었다.
“원희야. 천천히 먹어.”
소원희는 소원우가 한 그릇을 비울 때, 두 그릇을 해치웠다. 아무래도 체할 것 같아서 소원우는 약통에서 소화제를 미리 식탁에 꺼내 놓았다.
“세심하기는. 맛있게 잘 먹었다. 소원우 요리 실력은 날로 느네. 과일은 너무 배부르니까 후식으로는 커피 마실까?”
“그래. 나는 라떼로.”
“응. 소파에 앉아 있어. 설거지하고 커피 가져갈게.”
TV에선 지난 주말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이미 반은 지나갔으나 딱히 보고 싶은 방송이 있는 게 아니라서 소원우는 채널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캡슐을 내리자마자 향긋한 커피 냄새가 집 안을 채웠다. 시럽이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달게 느껴졌다.
“캐러멜 마키아토에 쿠키까지 먹으면 너무 달지 않아?”
“그래서 먹는 거야. 단맛 제대로 느껴 보려고.”
소원희는 쿠키를 와그작 베어 먹었다. 쿠키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소원희는 소파 위에 흩뿌려진 가루들을 도로 거실 바닥으로 털어 냈다.
“먹고 나서 바로 청소기 돌릴 거니까 뭐라고 하지 말기!”
소원희는 발랄한 목소리로 미리 엄포를 두었다.
개그맨들의 웃음소리와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 에어컨 소리, 부서지는 쿠키 소리. 곳곳에서 소리는 송출되는데 묘하게도 고요한 분위기였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소원우는 자리를 지켰다. 소원희는 아까 말했던 대로 곧장 청소기를 가지고 와 거실과 주방 모두 슥슥 밀고 나서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나 보훈이랑 헤어졌어.”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당황스러웠다. 소원우가 무슨 말을 해 주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소원희가 말을 이었다.
“나는 아직 보훈이가 좋고, 보훈이도 내가 좋다는데 그래도 헤어지자고 했어.”
“네가?”
“응. 내가 그러자고 했어.”
“어…… 왜?”
소원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원희가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문을 해소시켜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소원희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연애하면서 수능을 준비했잖아. 성적도 안 떨어졌고, 둘 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가기까지 하니까 자신이 있었지. 우선순위는 언제나 공부지만, 그렇다고 연애를 포기하진 않아도 되는구나. 근데 대학에 오니까 나보다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은 거야. 잘하는 애들만 모인 곳이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그래도 충격이었어. 내 성적이 중간도 안 된다는 게. 보훈일 만나면 너무 좋고, 계속 함께 있고 싶은데, 이렇게 뒤처지다가는 공부가 재미없어질 것 같아서 무서워졌어. 나는 정말 공부가 재밌거든. 계속 재밌었으면 좋겠어.”
소원희는 신보훈과 만나는 횟수를 줄여도 원하는 만큼 올라갈 수는 없을 거라 했다. 1학기 성적이 나온 날에 소원희는 신보훈과 헤어졌다.
“보훈인 뭐래?”
“내가 듣고 싶은 말 해 줬어. 그래서 고맙다 하고, 한 번 꽉 껴안고 헤어졌지.”
소원희는 신보훈이 무슨 말을 해 주었는지 말해 주진 않았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내일부터 소원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독서실로 갈 것이다. 본인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소원희는 목표한 것은 늘 쟁취해 냈으니까 소원우가 도울 일은 하나였다.
“나 내일 모레 가평에 가. 하룻밤 자고 올 거야.”
소원희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뒤따라 나올 이름 때문일 터였다. 반응 참 빠르네. 소원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권차경이랑.”
“둘만?”
“……아니. 다른 친구들도 부르려고.”
권차경에게 미리 얘기하면 친구들은 두고 둘만 가자고 말할 테니까 소원우는 윤찬희와 전영재에게 당일에 곧장 가평으로 오라고 했다. 전영재는 실연의 슬픔이 오래 가는지 날마다 술판을 벌였다. 윤찬희도 어쩔 수 없이 매일 그 술자리에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가평으로 놀러 가자고 했더니 두 명 모두 단번에 수락했다. 영재는 놀러 나가기 딱 좋은 완벽한 날이라면서 격하게 환영했다. 전영재나 윤찬희나 아무래도 제대로 나들이를 즐길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수영복이나 옷을 다 챙겨 놓았다고 했다.
이 둘 말고 신난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권차경은 맛집과 레저 사진을 하루에도 열 개씩 보내곤 했다. 가평에서 다른 일행을 보고 권차경이 실망할까, 안 할까 윤찬희는 제멋대로 내기를 걸었다.
전영재는 아무런 내막도 모르면서 권차경이라면 당연히 좋아할 거라 큰소리쳤다. 술자리에서 만났을 때 자신과 얘기가 잘 통했다면서 소원우와 둘이 가는 것보다 더 즐거워할 거라고 말했다. 윤찬희는 헛소리라며 근거 없는 주장에 핀잔을 던졌다.
‘네가 마음에 들었는데 한 번 만나고 끝이냐?’
‘서로 바빴으니까 그렇지. 야. 그리고 놀러 가는데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더 재밌지, 안 재밌겠냐?’
‘글쎄다. 권차경이 어떤 애인지 난 잘 몰라서.’
‘직접 만나 보면 너도 알 거다. 그놈 참 괜찮은 놈이야.’
‘하루 만났으면서 지가 뭘 얼마나 안다고.’
한참 둘은 티격태격하더니 윤찬희는 권차경이 실망한다는 데에 10만 원, 전영재는 권차경이 좋아한다는 데에 10만 원을 걸었다. 이 둘의 내기를 보고 황당한 얼굴을 하는 소원우에게 윤찬희가 조용히 속삭였다.
‘재밌긴 하겠다. 이참에 권차경이 어떤 식으로 굴기에 소원우가 못 빠져나오는지 구경 좀 해 보지 뭐.’
권차경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소원우에게 들은 얘기가 다인데도 윤찬희는 권차경이 자신의 원수라도 된 것처럼 별렀다.
[어디까지 왔어?]
[마트에서 고기 사고 가는 중이야.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아.]
트렁크에는 고기와 쌈 싸 먹을 채소, 수박, 음료수와 술로 가득했다. 권차경 몰래 어떻게 음식을 넉넉히 살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권차경이 알아서 목살과 삼겹살, 한우, 소시지까지 종류대로 골라 넣은 덕에 찬희와 영재 몫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놀이하기 딱 좋은 화창한 날씨였다. 뜨거운 볕도 오늘만큼은 싫지 않았다. 소원우는 바깥 풍경을 구경하다 옆을 흘끔 보았다. 운전을 하는 내내 권차경은 웃고 있었다. 아니, 아침에 만날 때부터 그랬다. 권차경은 소원우의 집 앞까지 데리러 왔다. 소원희는 아침 일찍 독서실로 간 터라 못 만난 것이 아쉬운 듯했지만 그래도 권차경의 입가에서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캠핑장 주차장은 차들이 빼곡했다. 한창 휴가철이라 어딜 가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권차경은 2인용 글램핑 숙소를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찬희와 영재가 머물 숙소를 따로 예약해야 했다. 성수기라 값이 비싸긴 했지만 다행히 숙소가 남아 있었다.
둘은 먼저 도착해 짐을 풀고 소원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소원우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지가 넓어서 만날 장소를 따로 정하는 게 나을 듯했다. 일단 트렁크에 가득한 짐들을 빼냈다.
“원우야, 이거 들어. 이게 더 가볍다.”
권차경은 고기와 채소, 과자 등이 들어 있는 봉지를 소원우에게 건넸다. 남은 것들은 수박 한 통과 술병, 맥주 캔, 음료수 페트병이 든 두둑한 박스였다.
“너 너무 무겁잖아. 수박은 내가 들게, 그럼.”
“아니야. 두 번 왔다 갔다 하면 돼.”
권차경이 배려심이 강한 건 알지만 소원우는 이렇게까지 대접받고 싶지 않았다. 짐을 옮기는 일에 괜히 시간 낭비하기도 싫었다.
“뭐 하러 그런 고생을 해? 그냥 한 번에 가져가는 게 낫지.”
소원우는 수박을 뺏어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권차경이 곧 빠르게 다가와 소원우의 옆에 나란히 섰다.
“너 힘세다.”
“몰랐어? 이 정도는 가뿐히 들 수 있거든요.”
소원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히죽 웃었다. 그런 소원우를 빤히 보던 권차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처음 봤을 때 원희 머리 짧았잖아. 지금 네 머리가 그때의 원희 머리랑 비슷해. 그래서 네가 가끔 원희처럼 느껴지나 봐. 짐 들어주고 싶고, 좋은 자리 양보해 주고 싶고.”
입매에 걸린 미소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소원우는 표정을 감추는 데 재능이 없었다. 이쯤 되면 티 나지 않게 웃을 법도 한데 억지로 웃으려고 할수록 입매는 부자연스럽게 경직됐다. 권차경에게서 소원희 얘기를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닌데 이번은 유독 입안이 씁쓸했다.
소원희와 닮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다. 친척들에게서도, 이웃들에게서도 자주 듣는 말이다. 그때마다 소원우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소원희와 닮았다는 말은 칭찬과 같았다. 그러나 권차경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한동안은 권차경이 자신을 볼 때마다, 자신을 보고 웃을 때마다 혹시 소원희를 떠올리고 있진 않은지 염려해야 했으니까.
양손이 무거웠다. 소원우는 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짐을 정리하고 찬희를 부르고 싶었다. 뒤에서 권차경이 넘어질지 모르니 천천히 걸으라고 했지만 소원우는 더 빨리 걸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숙소엔 없을 게 없었다. 내부는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작아 보였지만 둘이 머물기엔 적당했다. 냉장고에 음식들을 넣어 두고 앞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휴게소 들른 지 얼마 안 돼서 배는 안 고프지? 바로 물놀이하러 갈까?”
권차경이 수영복을 꺼내려는지 가방을 뒤적거렸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등에 손을 갑자기 올린대도 권차경은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태연한 얼굴로 ‘왜? 할 말 있어?’ 하고 물을 것이다. 소원우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차경아.”
“응, 원우야. 왜?”
권차경은 가방에서 옷을 꺼내다 말고 멈춰서 소원우를 바라보았다. 하던 일을 하면서 한 귀로 흘리듯 들어도 되는데 권차경은 소원우의 말에 항상 집중했다. 어떤 얘기라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그래서 더 불편했다.
“사실 내가…… 친구를 불렀어.”
“친구? 여기로?”
“어…….”
왠지 권차경의 표정이 순간 변한 것 같아서 소원우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왜?”
잘못 봤나. 분명 입을 꽉 다물었던 것 같은데. 되묻는 권차경의 얼굴엔 다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원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질문에 답했다.
“사람이 많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말을 꺼낼지 생각을 안 해 둔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거북했다.
“우리 둘만 있으면 재미없어?”
“어? 아니, 재밌지. 재밌는데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불렀어.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 말해서 미안해.”
사과까지 했으니 괜찮다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권차경은 가만히 소원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 번 더 사과를 하는 게 나으려나. 소원우가 고민하는 사이 권차경이 입을 열었다.
“스티커 사진 같이 찍은 친구?”
“사진? 어, 맞아. 찬희라고…… 너도 궁금해했잖아. 같이 놀다 보면 금방 친해질 수 있으니까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걔한테 나를 소개시켜 주려는 거야, 아니면 나한테 걔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던 거야?”
뭐가 다르지? 소원우는 권차경의 질문을 듣고 머뭇거렸다. 소원우는 둘이 맞닥뜨리는 상황만 생각했지, 누가 누구에게 소개를 받고, 소개를 하는 장면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소원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권차경의 질문의 의도가 뭐든 간에 권차경은 소원우가 다른 사람을 부른 것을 언짢아했고, 소원우는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말 못해서 미안해. 이미 여기 와 있어. 문자 보내면 바로 여기로 올 거야. 영재도 같이 왔어. 영재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아마 너 만나자마자 반가운 척 엄청 할 거야.”
권차경은 웃고 있는데도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차라리 웃지 않는 얼굴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권차경이 대놓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서 소원우의 미안하단 말도 스며들지 못하고 자꾸 튕겨 나갔다. 소원우의 사과는 도리어 권차경을 압박하는 모양새였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속 좁은 사람이 된다는 것처럼.
소원우는 권차경의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을 또 덧붙일까 고민했다. 그런 소원우를 빤히 바라보던 권차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원우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원우는 냉큼 대답했다.
“응? 어. 말해, 차경아.”
“밤에는 둘만 있자.”
소원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에 소원우는 대답할 타이밍을 잃고,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권차경이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전영재는 내기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멀리서부터 뛰어와 권차경을 껴안았다.
“오랜만이다. 자식, 더 멋있어졌네. 잘 지냈어?”
덥석 안겨 든 것도 모자라 전영재는 권차경의 손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윤찬희는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두 손을 보며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둘의 내기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소원우는 내기의 승리자는 전영재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권차경이라면 설사 원치 않는 손님이 등장했더라도 웃으며 반겨 주었을 것이다. 권차경은 꽤 괜찮은 인맥을 자랑했다. 한국에 온 지 3년 즈음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꾸준히 연락하고 만나는 사람은 오히려 소원우보다 더 많았다. 낯을 가리는 소원우와는 달리 권차경은 처음 보는 사람과도 대화를 잘 나누었다. 학기 초에 있는 별별 과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니까 캠퍼스를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눌 사람도 많을 터였다. 오죽하면 도서관과 의과대학에만 붙어 있는 소원희에게까지도 권차경의 소식을 물었으니까.
윤찬희는 자신의 인사차례를 기다렸다. 전영재는 금방 권차경을 놓아주지 않았다. 최근 근황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고서야 윤찬희에게도 인사할 기회를 넘겨주었다.
소원우는 걱정스런 눈으로 윤찬희를 바라보았다. 소원우의 눈동자는 윤찬희와 권차경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안녕. 윤찬희다. 원우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윤찬희였다. 윤찬희는 싱긋 웃었다. 누가 봐도 환한 웃음이었으나 소원우는 긴장을 놓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권차경입니다. 저는 찬희 씨에 대해서 별로 들은 얘기가 없는데 원우가 저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는지 궁금하네요.”
모두가 같은 나이에다 친구들이 서로 아는 사이니 바로 말을 놓아도 무례해 보이지 않았을 텐데, 권차경이 존댓말로 대답하는 바람에 윤찬희의 입장이 퍽 난감해졌다. 그러나 윤찬희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뭐, 별 대단한 애기는 아니었어. 어쨌든 만나서 반갑다.”
“네. 반갑습니다.”
“날씨 좋다. 바로 수영하러 갈까?”
“그래요. 옷은 다 챙겨 오셨죠?”
한쪽은 반말을, 한쪽은 존댓말을 하니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아도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았다. 권차경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윤찬희는 소원우에게 다가가 팔꿈치로 툭 쳤다.
“쟤 나 마음에 안 들어 하네.”
“처음 만나는 거니까 나름대로 예의 있게 대하려는 게 아닐까?”
“그 이유 때문은 아니라는 것에 내가 또 10만 원 건다.”
“넌 왜 이렇게 내기를 좋아해? 그래도 차경이 계속 웃는 거 보니까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은 것 같은데 뭘.”
“내가 웃을 땐 불안해했으면서 권차경이 웃으니까 안심하기는.”
그야 넌 애초부터 꿍꿍이가 있었으니까 그렇지. 소원우는 혼잣말처럼 읊조렸지만 다 들은 윤찬희는 소원우의 뒤에 서서 소원우의 목에 팔을 걸었다. 힘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장난이라 소원우는 윤찬희에게 편히 기대어 섰다.
“우리 온다니까 권차경은 뭐래? 별로 안 좋아했지?”
권차경의 반응이 조금 남다르긴 했다. 싫다는 말은 안 했지만, 친구들을 환영했다고는 할 수 없을 듯했다. 그러나 10만 원이 오가는 내기라 소원우는 발을 쏙 빼고, 결정권을 당사자들에게 넘겼다.
“둘이 상의해서 정해. 난 모르겠다.”
“이놈 시키가. 내 편을 들어 줘야지.”
“뭘 네 편을 들어? 야! 윤찬희! 너 인마. 비겁하게.”
뒷말을 들었는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전영재가 윤찬희의 엉덩이를 발로, 퍽 밀었다. 윤찬희에게 기대어 있던 소원우까지도 덩달아 밀려서 넘어질 뻔했다. 소원우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누군가가 소원우의 팔을 붙잡았다.
“조심해야지.”
“원우가 조심할 게 뭐 있담. 전영재 때문인데.”
소원우의 팔을 동시에 잡은 두 사람이 다시 부딪쳤다. 안 넘어지게 해 준 것은 고마운데 참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찬희야 소원우의 짝사랑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니 권차경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으나 권차경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권차경은 찬희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소원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우야, 선크림 발랐어?”
“어. 발랐지.”
“팔이랑 다리도?”
“아니. 얼굴만 발랐는데?”
“너 잘 타잖아. 볕 뜨거워서 금방 타. 여기 앉아서 팔 내밀어 봐. 발라 줄게.”
권차경은 소원우가 팔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소원우의 팔을 들어 선크림을 쭉 짜낸 뒤 손바닥으로 펴 발랐다.
“물놀이할 때 티 벗을 거야? 그럼 등도 바르고.”
“아니. 그냥 티는 입고 있으려고.”
“그래, 그럼.”
양팔을 권차경에게 가만히 맡기고 있던 소원우는 한참 후에야 자신이 직접 선크림을 발라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이미 권차경이 팔을 끝내고 다리에 선크림을 바르고 있었다. 선크림을 건네받으려고 소원우가 손을 뻗었다.
“다리는 내가 할게.”
“시작한 김에 그냥 발라 줄게. 어차피 나 손에 선크림 다 묻었어.”
권차경은 손을 휙 뒤로 빼더니 쭈그리고 앉아서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소원우는 윤찬희와 전영재를 바라보았다. 한 명은 헛웃음을 짓고 있고, 한 명은 부럽다는 눈빛이었다. 각기 다른 의미였지만, 소원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퍽 뜨거웠다. 권차경의 극진한 대접에 민망해진 소원우는 손부채를 불어 붉어진 얼굴을 식혔다.
“나, 나도 등 발라 주라. 등을 깜빡했네.”
선크림을 다 발랐는지 권차경이 몸을 일으키자 전영재가 옷을 벗으며 황급히 말했다. 권차경은 눈앞에 드밀어진 등을 빤히 보기만 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움직일 기미가 없는 권차경을 보며 소원우가 손을 내밀었다.
“줘 봐. 영재는 내가 발라 줄게.”
“……됐어. 내가 할게.”
소원우를 물리고 권차경이 선크림을 다시 들었다. 갑자기 윤찬희가 선크림을 확 채 갔다.
“줘. 내가 바를 테니까.”
윤찬희는 거칠게 선크림을 뺏어 들고는 전영재의 등에 바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문지르는 게 아니라 마치 때리듯이 찰싹찰싹 소리가 났다. 소리만 요란한 건 아닌 모양인지 전영재가 아프다며 펄쩍 펄쩍 뛰었다.
“가만히 좀 있어. 네 등짝 존나 태평양처럼 넓어서 끝나지가 않는다.”
“넓은 등짝이 내 매력 포인트지.”
“무슨 말만 하면 다 지 장점이래.”
윤찬희는 끝까지 찰싹 소리를 내며 선크림을 발랐다. 윤찬희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발갛게 흔적이 남았다. 흰 선크림을 발랐으나 오히려 벌게진 그 등에 대해 아무도 전영재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차경아, 래프팅 하는 데까지 네 차로 가는 거지?”
“응. 여기서 얼마 안 걸려.”
“얼마나 걸리는데?”
“10분 정도요.”
소원우와 권차경의 대화에 윤찬희는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왔다.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도 권차경은 목소리의 주인을 헷갈리지 않았다. 존댓말에 대해서 짚어 두지 않으면 하루가 다가도록 말을 안 놓을지도 몰랐다. 소원우가 얘기하려 했지만 윤찬희가 한 발 빨랐다.
“우리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말 좀 놓지?”
“제가 원래 말을 바로 못 놓아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반말하세요.”
권차경의 말에 전영재가 ‘잉?’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권차경과 함께 했던 술자리를 회상하는 듯했다. 소원우도 가만히 그날을 떠올렸다. 전영재나 권차경이나 둘 다 인사는 존댓말로 나누었지만 금방 말을 놓고 놀았던 걸로 기억했다.
“그럼 뭐 찬찬히 놓든지. 근데 원우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소원우는 갑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화살에 당황했다. 소원우를 바라보고 있는 권차경의 눈은 윤찬희의 말이 맞는지 묻고 있었다.
“아니야.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안 불편해.”
소원우는 양손을 저으며 완강히 부정하고서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윤찬희의 팔을 잡고 꾹 눌렀다.
“찬희야. 우리 잘 놀다 가자. 응?”
“알았다, 알았어. 그만할게.”
눈치 빠른 윤찬희는 소원우의 경고를 알아들었다. 반면 눈치가 없는 전영재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래그래! 우리 재밌게 놀자.”
세 명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갔다.
* * *
소원우가 수영보다 스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물보다 눈이 좋아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눈이 오는 날에는 무조건 밖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했다. 부모님이 장갑을 챙겨 주었지만 소원우는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눈을 만졌다. 단단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그 감촉이 좋았다.
부모님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을 때에도 소원우는 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특히 바다는. 소금기 가득한 몸을 씻는 과정이 귀찮았다. 넘실거리는 파도도, 콧속으로 들어오는 짠물도 싫었다. 수영장이나 계곡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그랬던 소원우가 지금은 수영을 하는 이유는 단연 하나였다.
권차경이 전학 오고 나서 맞이한 첫 여름에 소원우는 집 근처에 있는 수영장에 등록했다. 소원희는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소원우는 기왕 배울 거 제대로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권차경이 살았다던 골드코스트는 세계적인 휴양지였다. 황금빛 해안이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곳에서 권차경이 어떻게 살았을까 혼자 상상하곤 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즐겨 했다는 서핑이 어떤 건가 싶어서 영상을 검색해서 보기까지 했다. 함께 뭐라도 하고 싶었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내뱉고서 소원우는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소원우는 겨우 수영을 할 뿐이었다. 웨이크보드를 타고 점프를 하고 회전을 하는 권차경을 보며 소원우는 그만큼의 거리를 느꼈다. 아무리 쫓아가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보였다.
“이야. 권차경 멋있다, 진짜.”
공중회전을 하는 권차경을 보며 전영재가 손을 입에 모으고 환호성을 질렀다. 권차경을 구경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몇몇은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기도 했다.
소원우는 여름의 권차경이 가장 좋았다. 소원우의 눈에야 권차경은 사계절 내내 빛이 나는 사람이었지만, 여름엔 유독 더 환했다. 소원우의 눈에만 권차경이 빛나 보이는 건 아니었다. 권차경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소원희밖에 없었다. 윤찬희마저 권차경을 보며 재수 없지만 멋있다고 말했으니.
“찬희야. 너도 저거 할 수 있어?”
“야. 나를 뭘로 보고.”
“진짜? 그럼 다음에 너 해 봐. 한 번 보자.”
“못 하지, 당연히. 내가 저걸 어떻게 하냐?”
“영재는?”
“저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여. 난 안 넘어지고 가만히 매달리기만 해도 대성공이다야.”
빠르게 달리는 모터보트는 커다란 파도를 만들어 냈다. 권차경은 그 거센 파도를 가지고 놀았다. 소원우는 한숨을 쉬었다. 권차경을 보는 눈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고 싶었는데. 권차경이 이쪽으로 다가올수록 옆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권차경은 자신에게 주목된 시선들이 익숙한지 태연하게 걸어왔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허리에 수건만 두르고 맨몸으로 나왔던 권차경의 몸이 연상됐다. 구명조끼를 벗으면 모두가 그 몸을 볼 터였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구명조끼를 벗지 못하게 얼른 팔을 잡아끌고 다른 레저 기구로 향했다.
“이거 타려고?”
“응. 너랑 같이 타려고 기다렸어.”
“그래. 그럼 바나나 보트 타자.”
아. 잘못 골랐다. 바나나 보트는 물에 빠질 수밖에 없대서 보류해 뒀던 건데.
이제 와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원우는 바나나 보트가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사이 몇 번이나 떨어졌다. 젖은 얼굴은 콧물인지 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고, 소원우는 구명조끼가 있는데도 저도 모르게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댔다. 물을 먹고 캑캑거리는 소원우를 보고 권차경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저도 다 젖었으면서 자신의 손으로 소원우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았다.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도 뒤로 넘겨 깔끔히 정리해 주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고 있는 권차경의 눈이 햇살에 반짝였다. 따스한 그 눈빛이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것 같아서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권차경이 애써 닦아 준 보람도 없이 소원우는 다시 호수로 들어가 얼굴을 적셨다.
“원우야, 괜찮아?”
권차경이 소리쳤다. 쥐가 난 거냐며 당장에라도 다리를 주무를 것 같아서 소원우는 얼른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야. 괜찮아. 쥐 난 거 아니야. 돌아가자, 이제. 벌써 지친다.”
권차경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바나나 보트에 오르고 손을 뻗어 소원우가 쉽게 올라올 수 있도록 했다.
“천천히 가 주실래요? 친구가 몸이 별로 안 좋아서요.”
속도가 확연히 줄었다. 마주쳐 오는 바람은 권차경을 스치고 뒷자리의 소원우에게로 넘어왔다. 바람은 아무런 맛도, 냄새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소원우는 이 바람을 잊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은 고기가 다 사라지기도 전에 생고기가 또다시 불판에 올랐다. 소시지도 노릇노릇하게 굽고, 양파와 새송이 버섯도 슬라이스 해서 불판 한쪽에 올려놓았다. 쉬지 않고 먹어 댔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놀이를 한 뒤에는 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전영재의 주장에 고기가 익는 동안 라면 두 개를 끓여 먹었더니 배가 금세 찼다.
“우리 올 줄도 몰랐는데 고기만 1kg 넘게 산 거 봐라. 역시 권차경이야. 덕분에 진짜 잘 먹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정확하게 고기만 공략해서 먹던 전영재는 만족스런 얼굴로 배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전영재는 뜨거운 불판 앞을 끝까지 지킨 권차경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아 들었다.
“넌 그만 굽고 가서 먹어. 이제 내가 구울게.”
“괜찮아. 얼마 안 남았는데 뭘.”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할게. 너도 편하게 앉아서 먹어.”
소원우가 쌈을 싸서 몇 번 먹여 주긴 했지만, 권차경은 계속 고기를 굽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다. 소원우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권차경에게 넘겼다.
열대야가 한창이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은 입김을 부는 것처럼 열기를 한가득 머금었다. 고기 때문이 아니라 더위 때문에 맥주는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미치도록 덥다.”
윤찬희는 부채를 펼쳐 강하게 흔들었다. 그러나 시원한 건 잠시뿐이었다. 여름밤의 정취를 만끽하는 것도 좋았지만 일단 더위를 식히는 게 우선이었다. 남은 고기는 한데 모아 쿠킹 포일에 싸고, 쓰레기는 종류마다 분리수거해 놓았다. 대부분 버릴 것들이라 정리는 금방 끝났다.
“우리 노래방 갈까? 한 시간에 2만 원이래. 괜찮지 않아?”
전영재의 말에 소원우는 권차경의 표정을 살폈다. 권차경은 저녁을 먹을 때부터 유난히 말이 없었다. 수영이 워낙 체력 소모가 큰 운동이니 피곤할 법도 했다. 게다가 가평까지 혼자 운전을 하고 왔으니.
“소원우. 어쩔래? 갈래?”
윤찬희는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었다. 소원우가 가면 가고, 말면 말겠다는 뜻으로 소원우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권차경은 둘만 있자고 했으나 소원우는 되도록 둘만 있고 싶지 않았다. 권차경의 눈치를 보던 소원우는 입을 열었다.
“그럼 한 시간만 놀다 올까?”
윤찬희도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전영재는 바로 사장님께 말하겠다며 사무실로 뛰어갔다.
결정은 내렸는데 왠지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소원우는 뒤에 서 있을 권차경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큰마음 먹고 돌아섰다. 소원우를 계속 보고 있었는지 뒤를 돌아서자마자 권차경과 눈이 마주쳤다. 소원우는 순간 움찔했다. 권차경의 눈은 아무것도 담아내지 않은 것처럼 공허해 보였다. 소원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피로한 얼굴이었다.
“차경아. 너는 먼저 들어가서 쉴래? 피곤해 보인다.”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권차경은 낮과는 확연히 달랐다. 불청객을 반기지는 않았지만, 물놀이할 때만큼은 즐거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휴식이 필요한 듯했다.
“너는?”
“어?”
“너는 노래방 갈 거야? 나랑 같이 안 있고?”
어……. 소원우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익숙한 자신의 방도 권차경이 들어오면 낯선 곳처럼 느껴진다. 매트리스가 단단해서 흔들림이 적은데도 권차경과 함께 누워 있을 때는 작은 움직임에도 요동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소원우는 몸이 굳은 사람처럼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바로 누워 자는 편인데도, 일부러 등을 보이고, 한쪽으로 누워 잤다. 늘 잠을 설쳤다. 혹시나 권차경이 깰까 봐 휴대폰도 켜지 못했다.
그러니 이 분위기 좋은 숙소가 소원우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아주 늦게 들어가려 했다. 기왕이면 알딸딸한 정신으로. 취해서 그냥 애들과 잠들어 버렸다는 핑계도 준비했다.
그런 소원우의 속셈을 미리 알아챈 것처럼 권차경이 말을 꺼냈다.
‘밤에는 둘만 있자.’
어쨌든 약속을 한 거다. 권차경은 그 약속을 안 지킬 거냐고 묻고 있었다.
“바로 잘 거 아니야? 그러면 내가 나가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해서.”
어떻게든 소원우는 둘만 남겨지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권차경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전영재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야. 대박이다, 대박! 노래방 물어보러 갔다가 나 헌팅당했다. 같이 놀자는데 어때? 노래방보다 훨씬 재밌을 것 같은데. 가자, 가자. 그쪽도 4명이래.”
소리를 내지르며 기뻐하는 전영재와는 다르게 세 명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모두가 좋아할 소식일 줄 알았는데 예기치 않게 정적이 흐르자 전영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 명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뭐야? 뭐, 나 뭐 잘못했어? 분위기가 왜 이래?”
세 명 중 제일 먼저 윤찬희가 입을 열었다. 소원우는 윤찬희라면 알아서 거절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한시름 놓았다.
“그래. 좋아. 숫자도 딱 맞네. 미팅 같고. 응?”
“……윤찬희.”
봉변이었다. 권차경과 둘만 남겨지지 않게 도와달랬지, 이런 방식을 쓸 줄은 몰랐다. 권차경을 피하려고 모르는 사람과 노는 것은 싫었다. 게다가 이성이라면 더더욱.
“원우야. 괜찮잖아. 안 그래도 전영재 매일 청승 떠는 거 지겨웠는데 이참에 여자친구 사귀면 좋지.”
윤찬희가 동의하고 나서자 전영재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맞아. 나 진짜 요새 외로웠다구. 이게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안 그래?”
전영재는 다음 타자를 소원우로 정했는지 소원우의 손을 꽉 붙잡고 조곤조곤 말했다.
“한 번만 도와주라, 원우야. 사실 나한테 놀자고 말 건 사람, 마음에 들었거든. 분위기는 내가 다 띄울게. 응?”
전영재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소원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곤란해하는 소원우 대신 누군가 나서 대답했다.
“그래. 영재가 저렇게 원하는데 놀다 오는 게 뭐 어려운 거라고.”
권차경이었다. 권차경이 수락할 줄은 몰랐다. 소원우가 알겠다고 해도 권차경은 반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식들. 고맙다 진짜. 내가 잘 되면 한턱 쏠게. 나 전화한다? 놀자고.”
언제 전화번호를 땄는지 전영재는 바로 전화를 걸어 만날 장소를 정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소원우의 걸음은 사막을 걷는 사람처럼 느릿했다. 두 발이 깊은 모래에 푹푹 빠졌다 나오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더뎠다.
소원우의 눈은 영재와 나란히 걷는 권차경의 등으로 향했다. 영재와 말을 나누며 걷는 권차경은 조금도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의 기운 없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권차경을 빤히 보던 윤찬희가 말했다.
“의외다. 너는 따라와도 권차경은 안 갈 줄 알았거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쟤는 네 누나 좋아하잖아. 어차피 짝사랑이니까 여자들이랑 노는 건 별개로 보나? 그래도 네가 없으면 모를까, 가족인 네가 옆에 있는데 말이야.”
소원우는 힘없이 따라가며 속으로 결심했다. 만약 권차경이 누군가와 진득하게 붙어 놀고 있으면 그걸 꼬투리 잡아 소원희를 포기하라고 말하리라. 여행을 왔고, 여름밤의 추억이라지만 소원희의 남동생으로서 일회성 만남을 갖는 사람은 반대라고.
그러나 소원우가 경고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술판이 벌어지기도 전에 권차경은 자기소개를 하며 현재 옆에 앉아 있는 소원우의 누나를 짝사랑 중이라 선언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네 명 중 두 명의 시선은 권차경에게 주시되어 있었는데 권차경의 말에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곧바로 파시식 부서졌다.
분위기를 띄우겠다던 전영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도 제대로 못 꺼냈다. 그 탓에 윤찬희가 술자리를 이끌어 가게 됐다. 전영재가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으면 더 말을 못한다는 걸 아는 윤찬희는 한심한 눈으로 전영재의 컵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도움이 되지 않으니 먹고 취하라는 뜻이었다. 전영재의 술잔이 빌세라 윤찬희는 꼬박 꼬박 전영재의 잔을 채웠다.
술병이 한 바퀴 돌고 나니 서먹했던 술자리는 금세 풀어졌다. 윤찬희의 입담도 한몫했다. 어색한 얼굴로 앉아 있던 소원우의 얼굴도 조금씩 풀려 갔다. 게임을 하면서 자리도 계속 바뀌었다. 그러는 중에도 권차경은 소원우의 왼쪽 자리를 계속 지켰다.
“원우는 쌍둥이 누나랑 닮은 편이야? 누나 얼굴 궁금하다.”
어느새 소원우 오른쪽에 앉아 있던 서은나가 물었다.
닮았나. 같이 있으면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긴 했다. 소원희의 머리가 짧았을 때는 소원우가 보기에도 확실히 닮아 보였다. 성격은 다른 점이 훨씬 많았지만.
사진을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소원우는 휴대폰 갤러리를 뒤적였다. 최근에는 같이 사진 찍은 적이 없었지만, 소원희 사진은 꽤 많이 저장해 두고 있었다.
소원희의 독사진 하나와 같이 찍은 사진 하나를 보여 주자 서은나는 소원우와 완전 닮았다며 그 사진을 다른 친구들에게도 보여 주었다.
“신기한 게 둘이 완전 닮았는데 원우는 딱 남자 같고, 원우 누나는 딱 여자 같아. 내가 아는 쌍둥이 남매 중에 제일 닮았어. 특히 입!”
“입?”
“응, 입. 입꼬리 올라간 거랑 윗입술 가운데 도톰한 거. 그리고 입술 색도 빨간 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입이야. 부러워.”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원우에게 서은나가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보여 주었다. 거울 속의 입이 소원희의 입과 정말 비슷한지 소원우는 번갈아 보았다.
“닮았지, 차경아? 넌 원우 누나도 실제로 봤잖아.”
서은나의 질문에 권차경의 시선은 소원우의 눈에서 코를 거쳐 입술로 향했다. 비교를 위해 보는 거였지만 소원우는 어쩔 줄 몰랐다. 긴장된 소원우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삼켰다. 안으로 움푹 들어갔다 나오는 입술은 색을 잃었다가 다시 붉게 변했다.
“응. 닮았어.”
“그치? 원우가 잘생긴 거 보니까 원우 누나도 예쁘겠다.”
누구에게 듣던 가족의 칭찬은 기분 좋은 법이다. 소원우는 부끄러워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소원우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예뻐. 입술뿐만 아니라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이마도 예쁘고, 다 예뻐.”
좋았던 기분은 금세 추락했다. 미소 짓던 소원우의 입술은 그대로 경직됐다. 소원우는 잔에 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서 입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어색하게 굳은 입술을 숨겼다.
서은나는 권차경의 말에 그 정도로 예뻤냐면서 사진을 다시 봐야겠다며 소원우의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소원우를 가운데로 두고 권차경과 서은나는 소원희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권차경은 서은나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소원희를 예쁘게 봐줬기 때문이었을까. 권차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원희를 처음 만난 순간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 순간은 소원우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소원우는 권차경의 등을 보며 뛰었다. 안간힘을 냈지만, 권차경을 앞지르지 못했다. 권차경은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선두로 결승선에 들어오는 것만큼 자신의 존재를 멋지게 각인시키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소원희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권차경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눈이 머는 것 같았어.”
나도 그랬어. 나도 그날 널 보고 눈이 멀었어.
권차경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소원희가 얼마나 좋은지 말하는 동안, 소원우는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을 체험하고 있었다. 팔불출 같다는 서은나의 말에 권차경은 사랑이 너무 크면 숨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럼 나는? 내 사랑은 이미 넘쳐 어딘가로 흘러내린 걸까. 그런데 왜 난 아직도 버겁고 힘겨운 거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끝없는 심해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짝사랑 중이야? 너 정도면 완전 괜찮은데.”
“이미 남자친구가 있거든. 헤어지면 다시 고백하려고 기다리고 있지.”
서은나를 보던 권차경의 눈은 다시 소원우를 향했다. 소원희가 보훈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권차경은 모른다. 소원우가 말하기 전까진 아마 모를 것이다.
희미해진 눈앞이 다시 선명해졌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아직은 권차경을 놓을 수 없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눈을 피했다. 테이블 위엔 사진 속의 소원희가 웃고 있었다.
새로운 커플은 탄생하지 않았지만, 술자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파했다. 호감 가는 상대에게 제대로 말도 붙이지 못한 전영재는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다행히 연락처는 받아 두었다며 다시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한 번 더 도전할 용기가 남아 있다니. 소원우는 전영재가 부러웠다. 소원우는 권차경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채로 실연당했다.
그날. 이대로 나가면 다 없던 일로 하겠다던 그 말 그대로 권차경은 소원우가 자신에게 키스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권차경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굴었다. 권차경의 태연한 모습에 소원우는 마치 자신이 꿈을 꿨었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꿈도 아니었고, 허상도 아니었다. 권차경은 태연하게 행동해도 일을 저질렀다 들킨 소원우는 그럴 수 없었다. 며칠은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만나면 눈치를 살피고, 전화도 몇 번 피하고, 약속을 미루기도 했다. 소원우가 그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권차경은 절대 그날을 입에 담지 않았다. 소원우의 어색한 행동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런 배려가 고마웠다. 친구 사이를 지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 권차경 덕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서글펐다. 소원우가 권차경의 방문을 열기까지의 용기, 잠들지 못했던 수많은 밤, 입안이 헐어 한동안 꺼끌꺼끌하던 밥알, 권차경의 침대로 걸어가던 걸음 하나하나에 실린 무겁고 연약한 유리 같은 마음까지도 모두 없던 일이 되었으니.
전영재는 기운을 내야겠다며 일부러 힘차게 걷는데 반대로 소원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소원우의 발도 조금씩 느려졌다. 앞서 걷던 권차경이 뒤를 흘긋 보더니 속도를 늦추고 소원우에게 걸음을 맞췄다. 소원우는 고개를 숙여 나란히 걷는 발 네 개를 바라보았다.
잘난 사람은 안 예쁜 구석이 없다던데 그 말대로 권차경은 발가락까지도 고왔다.
“원우야.”
부드럽고 나긋해서 라디오로 종일 틀어 놓고 싶은 목소리다.
“왜?”
“은나 어때? 얘기해보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한 번 만나 봐.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너 화장실 갔을 때 나한테 너 여자친구 없는지 물어보더라.”
소원우가 좋아하는 낮은 목소리로 권차경은 잔인한 말을 사정없이 내뱉었다.
“차경아.”
“없다고 했어.”
소원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난 너를 좋아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겨우 삼켜 내었다. 어차피 이 여름이 지나가면, 그리고 가을이 오면, 가을이 지나가면, 그래서 겨울이 오면 원치 않아도 이별을 해야 했다. 그때까지 끌려간 마음이라도 2년이면 깨끗이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권차경은 더 빠른 이별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난 지금 누굴 사귈 마음 없어.”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권차경도 더 권하지 않았다.
전영재와 윤찬희와는 간단한 손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소원우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씻었다. 뒤이어 씻으러 들어간 권차경이 나오기 전에 잘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트윈 침대로 예약했는지 확인해 두길 잘했다. 소원우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씻고 나온 권차경이 덥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원우가 아무 말이 없자 권차경이 곧 불을 껐다. 이불 안에 숨은 소원우는 얼굴이 가려졌는데도 두 눈을 뜨지 못했다. 자는 척하느라 숨도 편히 내쉬지 못했다.
“원우야, 자?”
권차경이 한 번 더 소원우를 불렀다. 이번에도 소원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우야.”
권차경은 소원우가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듯 말을 이었다.
“나 원희 정말 좋아해. 나 더 노력할게. 널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다짐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소원우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저런 말들은. 권차경은 소원우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소원우는 권차경을 소원희의 남자친구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소원희 역시 권차경을 좋아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결국 포기하고 나가떨어질 사람은 권차경이다.
밤이 길었다. 침대는 두 개였지만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원우는 밤새 이불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그리고 동이 트기도 전에, 소원우는 먼저 짐을 챙겨 떠났다.
콜택시를 불러 역으로 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열차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맞은편 창가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해가 크고 붉어서 눈을 뜨고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문득 지하철에서 아침 해를 보고 이렇게 살 수 없다며 홀연히 한국을 떠난 사람이 생각났다.
소원우의 사촌 누나는 2년 넘게 해외를 떠돌아다니는 방랑객이었다. 간간이 엽서를 통해 자신의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그 엽서가 스무 장이 넘었다. 재학 중에 공무원 시험을 쳤고, 졸업하기 전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어려운 시대에 사촌 누나의 이른 취업은 자랑거리였다. 일이 적성에 맞느냐는 질문에 사촌 누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근데 말이야, 적성에 맞는 일이 진짜 있을까? 얼마나 많은 일을 해 봐야 내 적성에 맞는 일이 이거구나, 확신할 수 있지? 난 그냥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사촌 누나는 5년을 성실하게 일했다. 일에 관련해 불만을 터트린 적도 없었다. 별다른 취미 또한 없었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사촌 누나는 퇴직 신청을 했고, 모은 돈을 모두 가지고 여행길에 올랐다. 어떤 날의 일출이 사촌 누나에게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사촌 누나의 부모는 속이 터졌지만, 사촌 누나를 말릴 수 없었다.
사촌 누나처럼 일출을 보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면 좋겠지만, 소원우는 눈을 감고 해를 피했다. 선택을 나중으로 미뤘다.
소원우가 집에 도착해서 막 씻고 나왔을 때였다. 권차경에게서 연락이 왔다. 문자 소리에 깰까 봐 먼저 간다고 적은 메모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걸 나중에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원우야, 너 찾느라 캠핑장 주변을 다 돌아다녔어.
“미안. 너 푹 자고 있어서 안 깨우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
―그냥 깨우지 그랬어. 볼일 있었어? 같이 가자고 했으면 바로 일어났을 텐데.
“어…… 응. 갑자기 연락이 와서. 주말이라 차 막히겠다. 조심히 올라와.”
소원우는 대충 얼버무리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권차경과 통화하는 사이에 윤찬희에게서도 메시지가 왔다. 전날 대중교통으로 가평에 온 두 사람은 다행히 권차경이 차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너 덕분에 권차경이 드디어 나한테 말 놨다.]
[우리 숙소 찾아와서 대뜸 묻더라고. 너 어디 갔는지 아냐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걔는 지가 말 놨는지도 몰랐을 거다.]
[그랬구나. 지금 올라오는 중이야?]
[응. 전영재가 조수석에 앉아서 계속 쫑알대고 있어. 권차경은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전영재는 눈치라곤 밥 말아 먹은 놈이라 알 리 있나. 그나저나 저 입은 쉬지 않고 일하네. 시끄러워 죽겠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소원우가 집에 도착해 가방을 정리하고, 씻는 한 시간 동안 부재중 통화가 9건이나 됐다. 다섯 통은 권차경, 윤찬희와 전영재에게서 두 통씩.
권차경은 소원우에게 상냥했다. 소원우가 권차경을 신경 쓰는 것보다 더 세심하게 소원우를 챙겼다. 타고난 기질인 듯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고, 양보와 배려가 몸에 뱄다. 길이든 가게든 안쪽자리는 항상 소원우의 몫이었다. 저도 남자니까 자리 양보는 필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소원우는 그 배려를 받았다. 권차경의 다정함에 기대어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밤을 맞이하고, 오래 전에 끊겼을 수도 있던 끈을 간신히 이어 나갔다.
저 멀리 드디어 한계점이 보이는 듯했다. 이제야 하루가 시작되었으나 소원우는 이미 하루를 망쳐 버린 기분이 들었다.
* * *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러는 게 이해 안 가지? 나도 황당해. 근데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서은나는 소원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소원우의 눈치를 살피느라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지도 않았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당했다.
가평에서의 만남 이래 서은나와는 하루에 한 번 이상 연락을 주고받았다. 처음엔 권차경이 연락처를 알려 준 줄 알았는데 범인은 따로 있었다.
전영재의 짝사랑은 순탄하게 흘러가 금방 결실을 맺었다. 상대와 힘겹게 약속을 잡아 두세 번 더 만났는데 초반엔 쭈뼛거리며 분위기를 어둡게 하더니 금세 제 장점을 발휘했다. 전영재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소원우도 몇 번 자리에 같이 나갔다. 연인이라면 둘만 시간을 보내는 좋을 텐데 굳이 소원우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뻔했다.
그러는 동안 소원우도 서은나와 계속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다. 서은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소원우는 그래서 서은나를 거절해야만 했다. 서은나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당당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야 했다.
“미안.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서은나는 예상한 대답이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권차경은 아닐 거라 했지만.”
“권차경한테 물어봤어?”
“응. 혹시 너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는 거 아니냐구. 없다더라고. 제일 친한 친구가 하는 말이니 그런가 했는데 널 만날 때마다 왠지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거처럼 느껴지더라고.”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는 말처럼 마음을 꽉 봉해 놓아도 어딘가 자꾸 새는 모양이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눈치챌 정도면 작은 가시 하나에 완전 터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근데 왜 권차경한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말 안 했어? 너희 베프잖아. 권차경이 알면 섭섭해하겠는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소원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영재뿐만 아니라 권차경도 소원우에게 서은나 얘기를 종종 했다. 둘이 따로 연락한다는 것도 알았고, 주된 화제가 소원우라는 것도 알았다. 어쨌든 권차경에게 다른 누구와 사귈 마음이 없다고 했으니 적당히 하고 말리라 생각했다.
“미안해, 은나야.”
“소원우. 나 너한테 사귀자고 안 했어. 좋아한다고 말했지.”
서은나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헤아리는 소원우에게 서은나는 덧붙여 말했다.
“나는 소원우가 너무 좋아서 말 못 하고는 못 살겠어서 말한 거야. 이기적이라는 거 알면서도. 나도 미안. 죄책감 들게 해서. 그래도 덕분에 나는 너를 매일 매일 조금씩 포기할 수 있게 됐어.”
서은나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서은나가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이기 위해 고백한다 하더라도 조금의 통증도 없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소원우는 말을 쉬이 꺼내지 못했다. 소원우는 알고 있는 몇몇의 문장을 더듬으며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소원우가 취한 행동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거였다.
침묵 끝에 서은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서은나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원우야. 힘들지? 있잖아. 그냥 고백해 버려. 네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해 버리고 그만 숨 좀 편하게 쉬어.”
그 말을 듣고서야 소원우는 자신이 숨도 편히 쉬지 못한 채로 지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권차경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원우가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소원우는 억지로 지워 버린 기억들을 떠올렸다.
속이 문드러진 채로 수능을 준비한 것치고는 소원우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평소보다 점수는 떨어졌어도 다른 수험생들과 비하면 괜찮은 성적이었다. 오히려 소원우는 점수가 떨어진 게 좋았다. 일부러 점수를 낮게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덕택에 권차경과 다른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소원우의 지망 대학을 보며 권차경은 황당한 말을 했다.
‘원우야. 나도 K대학으로 갈까?’
1등급투성이인 성적으로 K대학으로 하향 지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담임이 그렇게 하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터였다.
‘너 원희랑 같은 대학에 갈 수 있잖아. 그런데도 K대학 간다고? 후회할 짓 하지 마.’
‘음. 그렇지? 널 따라가면 후회하겠지?’
‘당연하지. 네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거야.’
권차경은 예정대로 S대학으로 진학하기로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원우에게 권차경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원우야.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돼. 한순간에 삶이 진창으로 빠질 수 있으니까. 그렇지?’
‘그, 그렇지.’
’때로는 말실수 하나가 많은 걸 망치기도 하잖아.’
권차경은 애초부터 K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뒷말을 하기 위해서 소원우를 떠봤을 뿐이었다. 혹시 소원우가 자신을 따라 K대학으로 오라고 말했으면 권차경은 그날 바로 자신을 쳐 냈을 것이다. 소원우는 그 뜻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권차경은 그날 밤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중간중간 경고를 던졌던 거였다. 그러려고 자신의 옆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원우의 고백을 소원희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권차경의 노력은 반만 성공했다. 소원우가 소원희에게 이미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원우는 매번 권차경의 눈치를 살피며 움츠러들었으니까. 소원우 혼자서 끙끙 앓다 어떻게든 소멸시키리라 믿었을 거다.
[은나가 오늘 고백할 거라는데 어떻게 됐어? 사귀면 좋을 텐데.]
그러니 소원우의 마음을 무시하고 이런 문자를 보낼 수 있었겠지.
서은나는 소원우에게 이기적으로 굴라고 했지만 소원우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이미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다. 소원희도, 권차경도 원치 않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기적인데 여기서 얼마나 더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할까.
소원우는 서은나의 집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이 짙어지자 주택가의 불이 하나 둘 꺼졌다. 자정이 되자마자 소원우는 알림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권차경의 생일이었다.
권차경이 한국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생일이었다. 열여덟에 권차경을 만난 후로 서로의 생일엔 항상 함께 있었다. 무엇을 선물할지 정하기도 전에 소원우는 예산을 마련해 두려고 무리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정한 것은 시계였다. 드라마였든가 라디오였든가 어딘가에서 시계를 선물하는 의미를 우연찮게 들었다. 그런 마음에서 사는 건 아니었는데도 시계를 고르는 내내 소원우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며칠 전에 권차경이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권차경은 저녁 식사에 언제나 소원우를, 그리고 소원희를 초대했다. 소원희는 작년부터 함께 하지 않았다. 올해 역시 그럴 터였다.
00:01
멍하니 있다가 자정을 넘겼다. 마치 마법에 걸려 있다 풀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이 먼저 움직였다.
[생일 축하해.]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휴대폰을 쥐고 사는 사람처럼 권차경은 소원우의 연락에 늘 바로바로 반응했다.
[고마워, 원우야. 아직 안 잤어?]
[응. 이제 자려고.]
[그래. 잘 자고 저녁에 봐.]
짤막한 대화를 끝내고 소원우는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대로변의 택시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택시를 탔다. 소원우는 창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택시는 불 꺼진 상가 근처를 지나고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즐비한 거리를 통과하고, 사람들로 가득 찬 술집 앞에서 잠시 정차했다가 초록불로 바뀌자 다시 출발했다.
* * *
권차경이 예약했다는 레스토랑은 소원우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검색해 보니 고급 코스 요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2층짜리 단독주택을 개조한 레스토랑은 운치 있게 꾸며 놓은 야외 정원이 유명했다. 아버지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편하게 입고 와도 된다던 권차경의 말을 그대로 따랐으면 부끄러울 뻔했다.
소원우는 옷장을 열었다. 옷장 한쪽 구석에는 부모님께서 대학 입학 선물로 맞춰 주신 정장이 있었다. 앞으로 정장 입을 일이 종종 생길 거라며 영국 유명 브랜드 정장을 맞춰 주셨는데 지나치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탓에 정작 입학식에는 입고 가지 못했고, 그 뒤로도 옷장에서 나오지 못한 옷이었다.
소원우의 부모는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한 것을 늘 미안해했다. 밥은 꼭 챙겨 먹으라며 매달 생활비며, 교재비, 용돈 등을 넉넉히 보냈다. 소원우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는 쓸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권차경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는데 권차경이 입는 옷,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 즐기는 운동에 맞추다 보니 씀씀이가 날로 커졌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데 소원우는 찢어지는 줄 알면서도 황새를 포기하지 못했다.
소원우는 덮어 놓은 커버를 벗기려다가 말았다. 한여름에 맞춤 정장은 무리였다. 대신 흰 린넨 셔츠와 검정 슬랙스 바지를 입고, 수제 구두를 신었다. 정장과 함께 맞춘 수제구두 역시 첫 개시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발이 좀 더 커 보였다. 소원우는 키에 비에 발이 작은 편이었다. 173cm의 소원희와 178cm의 소원우의 발 사이즈는 동일해서 가끔 소원희가 소원우의 운동화를 신기도 했다. 소원우의 부모는 둘 다 발 사이즈가 평균을 웃돌았는데 소원우만 유독 작았다. 소원우는 신체 콤플렉스를 꼽으라면 늘 발을 골랐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발도 퍽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기는 권차경의 말 때문이었다.
‘발 귀엽다. 만져 보고 싶어.’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소원우의 발을 보고 권차경이 툭 내던졌다. 만지지도 않았고, 그 뒤로는 소원우의 발에 대해 다시 언급한 적도 없었지만 소원우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권차경은 기억도 못할 많은 말들을 소원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한 사람만 기억하다니 불공평한 일이다. 소원우가 스스로 불공평하게 만들었기에 불평할 수는 없었다. 짝사랑은 그런 것이다. 최선의 길이 있어도 최악의 길을 걷는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감내하기로 결심하는 것. 그 마음도 일종의 용기였다. 다만 당사자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가엾은 용기일 뿐이다.
소원우는 몇 주 전에 미리 사 둔 선물을 가방에 넣었다. 소원희는 수업이 다 끝났을 텐데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권차경의 생일이라 해서 소원희가 저녁 초대에 흔쾌히 응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권차경 역시 막연한 기대는 하지 않겠지만 텅 빈 자리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을 터였다. 소원우는 권차경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또 어떤 말로 소원희를 대변해 권차경을 위로해 주어야 하나 생각하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권차경은 잠깐 볼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거라며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소원우는 권차경의 이름을 대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2층은 연예인이나 저명한 인사들도 편히 식사할 수 있도록 작은 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자리를 안내해 준 직원은 주문을 미리 받았으니 일행이 오면 음식을 바로 내오겠다고 했다.
소원희에게선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메시지를 연달아 몇 개씩 남겨 두었으나 읽지도 않았다. 권차경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소원우의 연락을 피하는 듯했다. 권차경의 생일이니 축하한다는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을 때 소원희는 딱 잘라 싫다고 말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15분 즈음 더 기다렸을 때 권차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권차경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원우야.
한창 차가 막힐 시간이었으니 좀 더 늦어지나 보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와도 된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권차경이 먼저 말을 이었다.
―원희,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면서.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체라도 한 듯 명치가 답답해졌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 같은 대학이니까 어딘가에서 소식을 들었을 수 있겠지. 완벽한 비밀로 만들려던 건 아니었으나 소원우는 자신의 입으로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권차경이 소원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 그 말을 제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원우는 두 달 가까이 소원희의 결별을 숨겼다.
―언제 나한테 말하려고 했어?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는 권차경이 끝까지 몰랐으면 했다. 소원희가 언젠가 연애를 할 때까지. 다시 보훈을 만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내가 원희한테 너무 부족한 사람이야?
“……아니.”
소원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이 멨다. 물로 목을 축였지만 별로 나아지진 않았다.
―네 마음에 안 드는 단점이 있어?
“그런 거 없어, 차경아.”
―원우야. 나 네 친구 맞지?
권차경이 체육대회 때 소원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소원우에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권차경과 친구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때는 권차경과 눈이 잠깐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날 하루가 행복해졌다. 옷깃이라도 스치면 그 순간을 머릿속으로 몇 백 번, 몇 천 번 되돌려 봤다. 소원우는 몰래 바라만 보는 걸로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권차경과 말이라도 한 번 섞어 보려고 이리저리 방도를 찾아봤을 터다. 권차경과 친구가 된 것은 소원우에게 행운이었다.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원우야. 나 응원해 주면 안 될까? 내가 차일 게 뻔하더라도 시원하게 고백하고 오라고 나 격려해 주면 안 돼?
어떻게 그래. 나보고 어떻게 널 응원하라고 말해. 결국 소원우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더는 참지 못했다. 분리된 공간인 덕분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날까 봐 소원우는 입을 열지 못했다. 정적이 길어졌는데도 통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권차경은 묵묵히 소원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말하고 와.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다, 털어놓고 와.”
이렇게 말하기까지 소원우는 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익숙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처럼 띄엄띄엄, 느릿하게 말하는 소원우를 권차경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소원우는 마음에 없는 말은 하기 싫다던 소원희가 생각났다. 소원우의 멍청한 짓 때문에 소원희는 원하지 않는 고백을 들어야만 했다. 눈물이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떨어진 눈물방울을 소원우는 무심결에 손으로 닦았다. 닦아지기는커녕 더 크게 번졌다.
―고마워, 원우야. 음식 곧 나갈 거야. 천천히 먹고 가. 계산은 이미 다 해 뒀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소원우는 티슈로 테이블을 닦다 말고 다급히 권차경을 불렀다.
“너 여기 안 올 거야?”
―생일이니까 한 번 빌어 보려고. 내 사랑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미 한 번은 소원희에게 고백했었으니 소원우 역시 마음의 준비가 됐을 법도 한데 조금도 나아진 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귓가에서 웅웅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전화가 끊어지고, 권차경의 말대로 곧 음식이 들어왔다. 단번에 테이블 위에 차려졌으면 차라리 괜찮았을 텐데 코스 요리라 직원은 일정 간격을 두고 계속 방에 들어왔다. 목이 메어 어떤 음식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소원우는 최소한의 양을 목 안쪽으로 밀어 두었다.
여기는 권차경이 예약한 레스토랑이었고, 이미 계산까지 끝내 놓았는데 준비된 음식을 그대로 버리게 할 수가 없었다.
하나가 차려지고, 하나가 치워지고, 다시 하나가 차려졌다. 평소엔 먹어 보지 못하는 음식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맛도 냄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소원우는 사랑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쓴맛이나, 매운맛이 아니라 무(無)맛일 거라 생각했다.
레스토랑을 나온 소원우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원희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종일 묵묵부답이었던 소원희에게 전화가 세 통이나 왔으나 소원우는 받지 않았다. 별 일이 없는 한 자정 전에는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서로 묻지 않았다. 묻기 전에 알아서 먼저 각자의 일정을 말해 주는 편이었다. 소원희가 전화하는 이유는 소원우의 행방 때문이 아닐 터였다. 소원희와 권차경이 번갈아 가며 소원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히 두 사람에게 전해 듣지 않아도 결말이야 뻔했다. 소원우는 만남의 결말은 궁금하지 않았다. 권차경이 어떤 얼굴로 말했을까, 목소리 톤은 어땠을까, 무슨 말을 했을까. 소원희는 뭐라고 답했을까. 이런 부수적인 것들도 알고 싶지 않았다.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소원우는 ‘친구’라는 역할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소원우는 소원희의 동생이 아니라, 권차경의 친구로 있기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소원희의 동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듯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소원우는 엄청나게 후퇴했다. 소원우는 더는 소원희의 동생이라는 핑계로 권차경을 말릴 수 없었다.
수제 구두라서 편할 줄로만 알았는데, 오래 걸으니 발바닥이 찌릿했다.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걸은 것은 아니었는데 소원우의 발길이 향한 곳은 익숙한 동네였다. 한때는 제집처럼 드나들기도 했던 곳. 아파트 단지 안에 놀이터나,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아이들이나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의 방식대로 사계절을 나눈다면 여름의 마지막 날. 매년 찾아오는 여름이건만 여름이 가는 것을 늘 아쉬워하는 권차경의 집 앞에서 소원우는 권차경을 기다렸다.
가방 속에 둔 휴대폰이 또 울려 댔지만, 소원우는 받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벤치에도 앉지 않고, 서서 기다리길 30분. 권차경이 멀리서 얼굴을 드러냈다. 권차경 역시 금방 소원우를 발견했다. 권차경이 환하게 웃었다. 휘어진 반달눈 때문에 실연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원우야. 이상하게 왠지 네가 여기 올 것 같더라.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차장에서 바로 안 올라가고 여기로 온 거야.”
어째서 이럴 때는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걸까. 권차경은 소원우와 마음이 통한 것이 기쁘다는 듯 얼른 뛰어와 소원우의 앞에 섰다.
“나 안아 줄래?”
소원우는 대답 대신 팔을 벌렸다. 권차경의 뒷목에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종종 맡던 향이었다.
“향수 뭐 써?”
“마음에 들어? 줄까?”
“응.”
“올라가자. 챙겨 줄게.”
소원우는 권차경의 뒤를 따랐다. 현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뒤돌아서지 않았다. 육중한 문이 서서히 닫혔다. 소원우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무리되는 여름에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신은 결코 여름을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