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한우민 X 강서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알림 소리가 서진을 깨웠다. 지칠 줄 모르고 울리는 메시지 알림 소리에 손을 뻗어 침대 주변을 만졌다.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킨 서진은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휴대폰은 없었다.
“하암, 어디 간 거야.”
하품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언제 떨어진 것인지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린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알림 소리가 울렸다. 휴대폰은 또 언제 떨어진 건지, 그리고 톡은 도대체 어떤 새끼가 보내고 난리인지 모른다.
근 2주 만에 집에 들어온 서진은 어떤 정신으로 집에 들어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 위에서 쓰러져 잠들었다. 마치 술에 잔뜩 취해 블랙아웃 현상이 왔을 때와 비슷했다. 그 증거로 침실에는 서진이 벗어 던진 신발 한 짝이 굴러다녔다. 도대체 신발은 왜 또 방 안에 굴러다니는 것인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간신히 긴 막대기를 찾아 휴대폰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이상한 연락이면 가만 안 둬.”
신경외과 의사만 6년 차, 막 병원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외과 의사들이 왜 이렇게 잠에 대해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은 그 심정이 백번 이해가 됐다. 우민의 밑으로 펠로우를 들어가고 난 뒤부터 정말 인턴이고 레지던트고 거의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선배가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해 놓고 정작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변해 가고 있는 스스로를 보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은 하품을 하며 자신의 잠을 깨운 주범이 보낸 연락을 확인했다.
「형」
「형!」
「형 어디야?」
「형 J대 한 우민 교수님 밑에서 일하지 않음? 한 교수님 와 계시는데 형 안 오는 거야?」 오전 8:56
「아ㅋ 방금 한 교수님이랑 얘기함 형 오프라며?」 8:59
「쏘리」
「쉬셈 혹시 잠 깼으면 형 미안ㅎㅎ」 오전 9:00
그놈의 형은 몇 번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간신히 침대 위로 올라온 서진은 붕 뜬 머리를 긁적이며 연락을 보낸 H대 병원 응급의학과 펠로우 강재혁에게 답장을 보냈다.
「덕분에 잠 다 깼다.」
「존나 고맙네 ㅎㅎㅎㅎ」
「뒤질래??」
「우리 과 레지들도 나 퇴근하면 연락 안 하는데」 오전 9:01
휴대폰을 챙긴 서진은 다시 이불로 기어 들어왔다. 재혁에게서 금방 답장이 왔다.
「아니 ㅡㅡ」
「왜 이렇게 예민하세요.」
「외과 의사 다되셨네」
「하여튼 미안 ㅋ 나중에 술 사 줄게」 오전 9:05
“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술 마실 시간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답장을 보내려던 서진은 문득 재혁과 한 톡을 올려봤다. 한 교수님이 와 있다고? 근데 얘는 H대인데 대체 어디서 한우민 교수님 얘기를 하는 거지? 잠에서 깬 서진은 정신을 차리며 휴대폰으로 교수들의 일정이 들어 있는 다이어리에 접속했다. K&H 제약회사, K 호텔. 이게 뭐야. 마지막으로 일정을 확인한 게 며칠 전이긴 했어도 이런 일정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이라 추측한 서진이 미간을 구기며 재혁에게 답장을 보냈다.
「야.」
「너 우리 교수님 만났다. 그랬지?」 오전 9:11
「엥? 그런데?」 오전 9:11
「한 교수님 보조 누구 왔냐?」 오전 9:12
「아니 ㅋㅋㅋ형」
「나 H대예요. 내가 형네 의사 누가 왔는지 어케알음ㅋㅋ」오전 9:13
「ㅡㅡ 그럼 도촬이라도 해서 내놔」오전 9:15
「ㅋㅋㅋㅋ개 웃기네ㅋㅋㅋ」
「형 교수님 오는 거 몰랐어요?」
「기다려요.」 오전 9:16
시키면 할 것이지 뭔 말이 많아. 잠시 뒤 서진은 재혁으로부터 몰래 찍은 듯한 사진 한 장을 받을 수 있었다. 우민의 옆에는 서진과 나이가 비슷한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누구예요? 형네 NS(신경외과)?」 오전 9:20
「아니야 ㅡㅡ」 오전 9:25
「아, 어쨌든 저희 교수님 담에 발표라서 나중에 톡할게요. 잠 깼으면 진짜 쏘리~」 오전 9:27
더 답장을 보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서진은 재혁의 연락을 무시한 채 휴대폰을 치우고 눈을 감았다. 다시 잠이 들기 전까지 서진은 재혁에게 받은 사진 속 젊은 여자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 * *
서진은 모처럼 오프를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오는 데만 썼다. 원룸을 나와 이사를 했다는 우민의 집은 서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그동안 모아 둔 돈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새집이라 더 그랬다. 그래도 역시 서진은 우민과 같은 병원, 같은 공간에서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이젠 집이 아니라 병원이 더 집 같았다. 우민의 집으로 들어간 지 1년이 넘었음에도 아직도 서진은 그 집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만큼 병원에서 생활이 익숙했다는 뜻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온 서진은 평소와 다르게 잔뜩 씩씩대며 어딘가로 향했다. 분명 쉬고 온 서진이답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며 걸어가는 걸 본 레지던트들이 괜히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외상센터 안으로 들어간 서진은 구석에 자리를 잡은 여자 하나에 말을 걸었다. 정혁이 보내 줬던 사진 속에 있는 그 여자였다.
“정 비서님, 왜 그날 K&H 제약 강의 보조하신 거 저한테 말씀 안 했어요?”
“네?”
“K 호텔. 한 교수님이랑 간 거 왜 말 안 했냐구요.”
“……아니. 쌤 그날 오프였잖아요. 무슨 상관인데요?”
“그럼 있다고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서진이 팔짱을 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최근 들어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는 큰 수술을 몇 건인가 하면서 센터장인 임정혁 못지않게 입지가 넓어진 우민은 스케줄 감당이 되질 않아 담당 비서를 새로 구했다. 서진은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여자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도 예쁘지, 일도 야물게 잘하는 그녀는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다. 제가 오프였으면 남아 있는 다른 의사를 보내면 되지 않는가. 왜 굳이 거길 쫓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서진의 말에 그녀는 억지라며 잡아뗐다.
“강 쌤! 쌤 일이나 잘하세요. 괜히 이상한 트집 잡지 마시구요. 어제 쌤 빠지고 얼마나 바빴는 줄 아세요? 오죽했으면 제가 갔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세요?”
“그럼 전화하시던지요.”
“평소에 전화하지 말라면서요! 그렇게 이랬다저랬다 좀 하지 마세요. 한 교수님 일정 제가 담당하지 쌤이 담당해요? 갑자기 들어온 스케줄까지 일일이 보고하게?”
서진도 억지 트집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민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턱대고 짜증부터 났다. 요즘 들어 제가 이상한 쪽으로 예민해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었다. 마침 볼일이 있어 들어온 우민은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두 사람부터 떼어 놓아야겠다고 판단한 우민이 서진을 달랬다.
“서진아, 너 왜 그래?”
“…….”
“어제 급하게 잡힌 K&H 제약 세미나요. 강 쌤이 왜 저보고 갔냐고 뭐라 그러시는데 교수님이 한마디 좀 하세요.”
“아, 알았어요. 내가 알아서 말할 테니까 진정해요. 아니, 서진아. 너 정 비서 성격 알면서 왜 건드리는 거야.”
“아니…….”
“강 선생, 나 좀 봐.”
입술을 내밀며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서진을 본 우민이 재빨리 서진의 입을 막았다. 서진을 밖으로 쫓아낸 우민은 잔뜩 화가 난 정 비서를 살살 달랬다.
“아, 하하. 미안해. 강 선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화 풀어.”
“하아, 알았어요. 무슨 일이세요?”
“일단……. 급한 거 아니니까 나중에 얘기할게.”
“진짜 잘 좀 하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일은 야무지게 잘하지만 그만큼 성격이 칼 같은 그녀가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민은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정신이 없긴 해도 서진과 잠깐 대화할 시간은 났다.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서진과 얘기하고 올 테니 일이 있으면 부르라며 언질을 준 우민은 서진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비상계단 쪽으로 들어갔다.
“교수님…….”
“야, 너 왜 그러는 거야? 정 비서한테 내가 말하지 말라 그랬어, 내가. 너 쉬는 데 방해될까 봐. 근데 그거 가지고 싸우면 어떻게 해?”
“교수님이……. 그랬다구요?”
“그래, 괜히 신경 쓰지 말라고.”
정 비서에게 어제 일은 제가 말하지 말라 그랬다는 사실도 말하지 말라고 언질을 줘 일어난 일이었다. 나름 서진을 걱정해 한 일이 서진을 이렇게 애가 타게 만들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민은 팔짱을 끼며 서진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문제야?”
“저…….”
안절부절 몸을 비비 꼬던 서진이 우민의 가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병원 한가운데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민은 가운을 붙잡은 것만으로도 서진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버리지 마세요.”
꿈을 꿨다. 박기욱에게 당했던 그날의 꿈을, 요즘 들어 종종 꾼다. 우민과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이것조차 꿈만 같았다. 저에게는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도 되는 건가 의심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요즘 들어 제 일상이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이 시기가 끝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끝날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안기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 서진은 그저 눈가만 축축하게 적셨다. 저에게 남은 사람이라고는 이제 눈앞에 있는 남자인 한우민밖에 없었다. 그런 우민이 제가 모르는 장소에서 다른 여자와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 질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진은 요즘 들어 우민에 대한 제 집착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우민이 없으면, 우민이 아니면 안 됐다. 박기욱에게서 자신을 구해 준 우민은 서진에게 있어서 세상 전부였다. 서진이 눈가를 축축하게 적셨다.
“좋아해요. 교수님 제발,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마세요.”
“하아, 서진아.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울지 말고.”
그런 서진이 안타까운 우민은 조용히 서진을 안아 등을 도닥였다. 마침 지나가는 의사가 달뜬 눈으로 서진과 우민을 바라봤다. 우민은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었고, 그는 이내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며 못 본 척 자리를 떴다.
“진정해, 알았지?”
“사랑해요.”
“그래, 그래. 뚝 그치고. 이렇게 해서 어떻게 일할래? 응?”
“흑, 알았어요.”
우민은 조용히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 * *
여느 때처럼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생각보다 회의가 일찍 끝나자 일정을 전부 정리한 정 비서가 미간을 구겼다. 저번달보다 일정이 빡빡해져 있었다. 본인은 소화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소화의 문제가 아니라 서포트하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손이 너무 많이 갔다. 바로 옆에 앉은 우민도 생각보다 일이 많은 걸 눈치채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은 첫째 주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둘째랑 셋째 주는 좀 힘들어요. 이날 OP도 많으시고.”
“그러면 그때만이라도 사람 한 명 더 붙여 줄게요.”
“그래야 할 것 같네요. 흐음…… 지금 아직 방학 기간이니까…….”
그녀는 볼펜대로 급하게 받아 적은 A4용지 위를 툭툭 건드렸다. 앞에 앉아 있는 서진이 그녀의 볼펜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원, 갑자기 잡힌 세미나 강의 하나 말 안 해 줬다고 신경질을 그렇게 내더니 정작 회의 시간에 졸고 있는 서진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민만큼이나 고생을 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얄미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잠이 덜 깬 서진이 고개를 들며 그녀를 바라봤다.
“강 쌤, 혹시 괜찮은 후배 없어요?”
“…….”
처음에는 다른 의사인 줄 알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던 서진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깜박였다. 입을 가리며 하품을 참은 서진이 말했다. 잠결에 일정이 어쩌고 하며 임시로 사람을 뽑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어머, 그러면 한 쌤이랑 유 쌤한테 물어볼까요? 대학 졸업한 지 10년도 더 되신 분들인데? 그래도 강 쌤은 아직 후배 좀 남아 있을 거 같은데요.”
“지금 저랑 싸우자는…….”
“아아, 왜 그래. 왜. 그 정 비서님,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안 그래도 고생하는 애한테.”
“고생은 교수님이 다 하시죠. 무슨.”
그녀가 다리를 꼬며 서진을 내려다봤다. 우민은 서진과 여자의 기 싸움에 혀를 찼다. 가만 보면 둘은 성격이 아주 안 맞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이날 회의는 그렇게 싸늘한 분위기에서 우민의 중재로 끝이 났다. 회의 시간에 싸웠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서진은 여느 때처럼 스케줄 확인을 위해 정 비서에게 찾아갔다. 늘 있는 그녀의 자리 옆에는 작은 간이 책상이 새로 생겨 있었다. 아직 20대 초반인 그는 다가오는 서진을 보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실 그가 온 지는 3일이 넘었지만, 정신이 없었던 서진은 그의 얼굴을 사실상 처음 보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 교수님.”
“교수는 무슨. 그보다 정 비서님은?”
“잠깐 위층에 회의하러 올라가셨어요.”
“아……. 17일 날 일정 바뀐 거 있다 들었는데, 아직 안 올라온 거 같거든요? 확인 한 번만 해 줘요. 나도 그때 일 있는 거 같아서.”
“네네, 금방 해 드릴게요.”
그가 정 비서를 대신해 서진의 일정을 확인해 줬다. 걱정했는데 얼추 큰 문제가 없이 맞아 들어갔다. 일이 바빠서 아직 공유 다이어리에 올려놓지 못했을 뿐인 일이었다. 짜증이 나긴 해도 정 비서는 이런 일 하나는 완벽했다.
“아, 맞다. 저 강 교수님이랑 같은 학교예요.”
“같은 학교? 아, H대 다녀요?”
“네네, 선배한테 여기에 NS 펠로우 하는 선배 있다고 들었는 거든요. 잘 부탁드려요.”
“하하, 예.”
서진은 친근하게 구는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20대, 저도 분명 의대를 졸업했다. 그때만 해도 의대에 들어가도 의사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런 제가 어느 순간부터 신기루처럼 보기만 하던 사람 중에 한 명이 되었다는 게 이럴 때 실감이 잘 안 되었다. 30대가 된 서진은 안에 있는 남자가 어리다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모르겠다.”
아무렴 이제 와서 그런 걸 고민한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서진은 눈앞에 있는 일이나 열심히 하자며 뺨을 때렸다.
* * *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방학 시즌이 끝났다. 우민의 팀은 모처럼 병원 인근의 고깃집에서 회식하기로 결정이 났다. 거의 7개월 만에 하는 회식이었다.
술 몇 잔을 걸친 뒤 분위기가 익어 갈 무렵 낯익은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알바로 2주 정도 일을 했던 그때 그 H대 학생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던 그는 서진을 알아보고는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어어, 와서 앉아.”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난 정 비서가 그를 챙겼다. 그를 부른 사람도 정 비서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한 서진은 제 앞에 놓인 소주를 비웠다.
“왜 부른 거야 대체.”
“어머, 알바는 사람 아니에요?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강 쌤 진짜 너무한다.”
“귀도 좋으세요. 누가 뭐라 그랬어요?”
“아, 여기 앉아요. 여기.”
정 비서가 자리를 만들어 주려 했으나 이미 건너편으로 돌아가 버린 뒤였다.
“저 여기 앉아도 되나요?”
정확하게 서진의 한 자리 옆이었다. 두 자리는 우민과 부교수인 유진호의 자리였다. 청년은 비어 있는 자리인 줄 알고 한 자리 건너편인 진호의 자리에 앉았다. 타이밍 좋게 두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 우민과 진호가 다가오자 그가 그제야 사람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 아. 자리 있었던 거예요?”
“아냐. 그냥 앉아요. 교수님 제가 저쪽으로 갈게요.”
진호가 괜찮다며 자리를 옮겼다. 서진은 건너편에 앉은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리기도 어릴뿐더러 반반하게 생긴 게 그 또한 우민의 취향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혼자 소주를 따라 계속 마셨다.
“적당히 마셔. 혼자 달리지 말고.”
“알았어요.”
애도 아니고, 알아서 조절하겠다며 서진은 손을 휘휘 저었다. 술이 몇 잔 더 오갔다. 그 와중에도 서진은 과할 정도로 혼자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이야, 자리 잘 고르시네요. 어떻게 거기가 교수님 자린 줄 알고 앉았어요? 이러다 나중에 우리 병원 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하, 저는 그래도 그냥 자대에서 할 것 같아요.”
“어머, 사람 일 모르는 거죠. 강 쌤이라고 자대에서 안 하고 싶었겠어요?”
“전 제 발로 들어온 거거든요?”
“누가 뭐래요? 찔려요?”
정말이지,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이 전 병원이 여자가 많은 병원에서 일했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인지 돌려 까는 게 수준급이었다. 술을 마신 서진이 한마디 하려 하자 우민은 테이블 밑으로 서진의 발을 조용히 밟았다.
“좋은 날에 왜들 그러십니까. 자자, 한잔해요.”
우민이 먼저 말을 꺼내자 다시금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식사가 끝나고, 병원에 돌아가야 할 사람들은 돌아갔다. 1차에서 워낙 달린 탓에 2차는 안 하는 분위기였다. 먼저 밖으로 나온 서진은 담배를 입에 물며 구석에서 담배를 피웠다.
“어어, 괜찮아요?”
“으… 개안아요. 개안아녀!”
멀리 잔뜩 취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취했네! 저거. 다들 요령껏 마실 때 괜히 긴장해서 많이 마실 때부터 알아봤다며 혀를 찼다. 아예 필름이 끊긴 듯 몸을 아예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서진도 담배를 끄고 다가갔다.
“괜찮대요?”
“완전히 갔는데요? 병원 보낼까요?”
“뭘 병원까지 보내요. 그냥 집에 가서 재우면 돼요.”
아예 대자로 누워 있는 청년을 간호사들이 내려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쳐다봐서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서진과 마찬가지로 뒤늦게 가게에서 나온 우민은 엉망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청년을 일으켰다.
“하아, 내가 데려다줄게.”
“제가 할게요.”
“유 교수, 넌 병원 들어가 봐야 하잖아.”
“들렀다가 가면 되죠.”
차마 교수님에게 시킬 수 없다는 진호의 말에도 우민은 한결같이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다른 간호사가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가 사실상 우민의 품에 안기다시피 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그냥 집에 들어가. 너도 술 많이 마셨잖아.”
“괜찮아요. 그럼 같이 가면 되죠.”
“서진아, 사람들도 다 보는 데서 뭐 하는 거야? 집에 가.”
우민이 괜한 소리 하지 말라며 딱 잘라 말을 했다. 우민과 술에 취한 의대생 청년이 택시를 타고 떠난 뒤 다들 알아서 갈 길을 갔다. 혼자 남겨진 서진은 편의점에 들른다는 이유로 자리를 떴다.
* * *
청년을 데려다준 뒤 우민은 다시 택시에 탔다. 당연하게 집으로 가는 주소를 부른 우민은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었다. 휴대폰에 온 연락을 확인한 우민이 미간을 구기며 다급하게 택시기사를 불렀다.
“J대 병원, 서현역 사거리로 다시 돌아가 주세요.”
“네? 아, 예.”
우민의 말에 택시가 다급하게 방향을 돌렸다. 당연히 집에 들어갔을 거로 생각한 우민의 예상과 달리 서진에게 온 연락은 아직도 사거리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내일이 한 달 만에 오프라고 해도, 새벽 세 시가 넘었는데 뭘 하는 짓인 건가 싶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았던 장소에서 내린 우민은 처음 갔던 고깃집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다급해진 우민이 서진에게 연락을 보냈다. 뭐가 아직도 거기 있어요, 인가. 역시 서진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가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려고 하는 순간, 탁 하고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너…….”
몸을 돌린 우민은 서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진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핫도그를 먹고 있었다. 입에 케첩까지 묻히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교수님? 왜 아직도 집에 안 가셨어요?”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너 니가 톡 뭐라고 썼는지 알기나 해?”
“떡볶이만 먹고 금방 간다고 쓴 거 같은데요? 아닌가?”
뭐라 보냈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서진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열었다. 손이 미끄러져 떨어질 뻔한 휴대폰을 우민이 간신이 주웠다. 하마터면 액정이 나갈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우민의 도움으로 휴대폰을 건네받은 서진은 우민에게 보낸 연락을 확인했다.
「ㄱㅕ수님」
「저 있어요」
「저희 고기 먹은 데요」 오전 2:40
“어라.”
남아 있는 핫도그를 전부 입에 넣은 서진은 눈을 의심했다. 분명 먹고 있다고 보낸 것 같은데 ‘떡볶이 먹고’라는 글자는 사라진 상태였고, 금방 집에 들어간다고 보낸 연락도 없었다.
“아, 하하하. 그럴 수 있죠.”
“내가 바로 집에 들어가라 그랬잖아.”
“누가 안 들어간다 그랬어요? 바람 좀 쐬고 들어가려 그랬죠.”
“시간이 몇이신데 바람을 쐐? 그리고 너 술 많이 마셨잖아.”
“아직 새벽 세 시밖에 안 됐거든요? 글구 술 한두 번 마셔요? 제가 애도 아니고.”
“애잖아.”
“언제는 뭐, 애 취급해 줬나? 아아, 좋겠네요. 최 선생은, 나이도 어리고 술까지 취해서 교수님이 데려다주고.”
정 비서의 임시 보조로 온 젊은 학생을 같이 일하는 팀 내에서는 최 선생이라 불렀다. 서진은 나무 끝을 씹으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시간이 시간이었던 터라 거리는 제법 한산했다. 술을 마실 때보다 한가해졌을 뿐 거리에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번화가는 번화가였다.
등을 돌린 서진은 술에 취한 의대생 청년을 질투했다. 다른 교수님과 선생님들이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 그냥 알겠다고 했으면 차라리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묘하게 우민이 그를 챙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긴, 병원 생활에 찌들 대로 찌든 저와 달리 그는 아직 순수했다. 서진은 J대 병원에 처음 와 우민을 만났을 시절 본 흉부외과 출신인 석빈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자신은 늘 어린 줄 알았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향해 어리다고 말하는 나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우민은 그조차도 어리다고 말하니, 도대체 몇 살이 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성인이 되는지 짐작을 할 수조차 없었다.
“너 질투하는 거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질투 안 하겠어요?”
미칠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정신을 차리면 우민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안 된다며 참으면 참을수록 과거에 시헌에게 했던 자신의 행동들이 발목을 잡았다. 늘 받는 사랑에만 익숙했던 서진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든 줄 몰랐다.
“하아, 서진아. 강서진.”
“왜요!”
“고개 돌려 봐. 나 봐 봐.”
“싫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성진이 걔 사촌이야 사촌.”
뜻밖의 말에 서진이 몸을 돌렸다. 서진을 본 우민은 온몸에 힘이 풀렸는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서진은 사촌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미간을 구겼다. 그동안 유독 신경을 썼던 것이 한 번에 이해가 됐다. 그런데도 서진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걸 말 안 해 주는 건데요!”
“괜히 선입견 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야.”
“최소한 저한테는 말해 줬어야……. 했잖아요. K 호텔 세미나 때도 그렇고…….”
서진은 좀 억울했다. 사귀면,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저를 위해서 주변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는 말이 이렇게 상처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술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서진은 끝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 야야, 울지 말고. 내가 미안해.”
“흑… 끄윽….”
“이, 일단 집에 가자.”
우민은 서진의 손을 잡고 다가오는 택시를 붙잡았다. 뒷좌석에는 정적만 흘렀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서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붙잡고 있는 우민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놓아 달라는 의미로 꼼지락대자 우민은 더욱 꽉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다행히 뒷좌석이라 택시기사에게 그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괜한 거로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계산하고, 집 근처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다. 계산을 마친 우민은 서진의 다른 손도 붙잡았다.
“손이 왜 이렇게 차.”
“몰라요.”
“아직도 삐진 거야?”
“사촌인 거 말해 줬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왔잖아요. 이게 다 교수님 때문이에요.”
“알았어.”
“뭘 알아요! 당신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헉….”
“그만, 그만 울어. 내가 미안해.”
서진은 보기와 달리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단지 성격에 독기가 있어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눈물을 보이는 짓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우민은 조용히 서진을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뭐가… 끅, 흑, 미안해요… 대체 뭐가…….”
“다. 내가 다 미안해. 다음부터는 꼭 얘기해 줄게. 나도 네가 그런 거에 예민할 줄 몰랐어. 울지 말고.”
우민의 손이 서진의 눈가에 있는 눈물을 닦아 줬다. 붉게 상기된 서진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더 아름다웠다. 우민은 이번 일은 자신의 불찰이 맞다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동안 서진이 기욱에게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서진의 불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민은 서진의 손을 붙잡으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사귀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모든 연인이 무조건 다 서로 맞는 것은 아니었다. 우민에게 있어서 연애라는 건 양보나 배려와도 같았다. 연애라는 건 나이와 관계없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민은 서진의 뺨을 쓰다듬으며 우는 서진을 달랬다.
“너도 인마,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짜증만 내지 말고.”
“흑…….”
“나한테 똑바로 말해.”
“알았어요.”
“들어가자 들어가.”
우민은 서진의 손을 잡으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걸어 들어오기 무섭게 먼저 들어왔던 서진이 우민에게 안겼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키스를 하며 혀를 섞었다. 일도 일인 데다, 늘 오프 시간대도 달라 집에 같이 있는 날이 드물었다. 서진의 체감으로는 마지막으로 병원 밖에서 온전히 우민과 함께 있었던 것이 한 달도 더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아… 응….”
“서진아, 들어갈까?”
우민의 엄지가 서진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우민에게 안긴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뱉는 숨이 점점 뜨거워졌다.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끝까지 안 해도 상관없다. 그저 이렇게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어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침대 위를 야릇한 소리가 가득 메웠다.
“너… 윽, 술 많이 마시긴 했구나.”
서진이 술을 꽤 마셨다는 건 알고 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술을 아주 먹지 않은 우민이 느낄 정도면 서진이 멀쩡하게 서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흐읏… 상관없잖아요….”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서진은 우민의 옷 안으로 손을 넣으며 다급하게 재촉했다. 아래가 뜨거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속옷에 쓸리는 것조차 자극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와 몸을 섞는 걸 이렇게 원했던 적은 꽤 오랜만이었다. 시헌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시헌과 사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 서진은 우민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매달렸다.
“교수님 제발…….”
몸안에 있는 열이 나갈 곳을 찾지 못해 구석구석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분이 무척이나 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후, 숨을 고른 우민이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눈물을 흘리며 흐트러진 서진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키스하던 우민의 시선이 가슴 위쪽으로 닿았다. 잔인한 흉터 자국이 우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손끝으로 쓰다듬자 기분이 이상한 서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하아….”
정말 괜찮은 걸까? 괜찮다는 의미를 똑바로 이해한 게 맞을까에 대해 의심이 됐다. 서진의 몸에 나 있는 흉터가 기욱의 짓이라는 걸 우민은 모르지 않았다. 기욱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흉터를 남기거나 서진을 때릴 때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만 집중해서 때렸다. 옷 안, 몸 안 구석구석 남아 있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흔적을 볼 때마다 우민의 가슴이 미어졌다.
“서진아.”
이런다고 그 흉터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혀를 내밀어 흉터 부위를 부드럽게 핥았다. 서진은 그 자리에 흉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우민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느꼈다.
“하, 교수님… 사랑해요.”
어깨까지 늘어진 셔츠 자락을 붙잡으며 서진은 우민에게 매달렸다. 저에게 있어 우민은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밖에 보지 못했던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한 자신을 구해 줬던 사람이 서윤이라면, 이젠 그 사람이 우민이었다.
우민이 아니었다면 박기욱에게 끝없이 유린당한 채 어딘가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서윤에게 속박이 되어 있지만, 결국 서윤이 친누나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기욱은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걸 알고 서윤을 노린 것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우민은 달랐다. 가족이 아니었고, 제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서진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기욱과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며 횟수를 세기 힘들어질 즈음부터 서진은 옷을 벗는다는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건, 사실 시헌과 섹스를 할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민은 달랐다. 제 모든 걸 봐 주길 원함과 동시에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있는 페니스를 가리려 하는 서진을 본 우민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뭘 또 가리고 그래.”
“그래도….”
우민이 서진의 손을 치워 내며 서진의 페니스를 가볍게 문질렀다. 이미 잔뜩 민감해져 있었던 터라 서진은 금방 우민의 손에 발기가 됐다. 우민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서진의 페니스 끝을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서진은 어린애 같은 신음을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 목소리를 참지 못한 우민도 남아 있는 옷을 전부 벗었다. 완전하지 않음에도 그 크기가 잔뜩 발기한 제 것과 비슷하거나 더 컸다. 어디든, 어떻게든 좋으니 우민이 제 안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설령 오해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질투의 응어리가 아직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민이 저를 안는다면 이 불편한 기분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하으, 읍….”
“야야, 괜찮아… 읏….”
몸을 앞으로 일으킨 서진은 우민의 페니스를 입안에 머금었다. 갑작스러운 펠라에 당황한 우민은 서진을 밀어내려 애썼지만, 서진의 펠라는 꽤 기분이 좋았다. 위쪽으로 달뜬 숨소리를 내는 우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처럼 달콤한 목소리는 아닐지라도 흥분한 우민의 목소리 또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 윽….”
서진은 우민을 보며 입안 구석구석 우민의 페니스를 탐했다. 입을 완전히 메우는 감촉이 썩 편하지는 않았어도 아무렴 기욱에게 억지로 당하는 펠라보다 훨씬 나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이런 서진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기욱이었다. 입안에서 혀를 굴릴 때마다 우민의 페니스가 조금씩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입뿐만이 아니라 안쪽도 우민을 원했다. 허벅지를 벌린 서진은 안쪽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조금씩 밀어 넣었다.
“너….”
“하으… 으읍….”
“윽, 잠깐…….”
사정할 것 같은 우민이 다급하게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넘겼다. 타이밍이 한발 늦었는지 얼굴로 정액이 튀었다. 다급하게 서랍에서 휴지를 꺼낸 우민이 서진의 얼굴을 닦아 줬다.
“이게 뭐야. 안 그래도 된다니까.”
“제가 좋아서… 윽, 한 거니까요.”
우민이 다시 서진의 입안을 천천히 핥았다. 확실히 서진의 펠라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긴 여전했다. 능숙함의 그늘을 알고 있는 우민은 서진을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살살 핥은 우민이 낯간지럽게 속삭였다.
“서진아.”
“…흐….”
“사랑해.”
“흑, 정말요?”
“내가 널 버릴 리가 없잖아.”
“버리지… 흐윽, 마세요….”
그런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우민은 어린애처럼 매달리는 서진을 부드럽게 달랬다. 기욱이 낸 상처는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허벅지 안에도 희미하게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민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서진의 안을 벌리고 들어갔다. 이미 서진이 한 번 적셔 놓았던 터라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응… 응….”
“후, 천천히. 여기 좋아?”
“아응, 으… 하… 교수님….”
침대의 시트를 꽉 쥔 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픈 건가? 당황한 우민이 손을 빼려 하자 서진은 다급하게 우민의 어깨를 잡아당겨 얼굴을 묻었다. 하아, 하. 숨을 쉴 때마다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아파?”
“아니… 으, 교수님 거… 하… 넣어 주세요.”
“왜 이렇게 안달이 나 있어.”
“당연하죠!”
서진은 억울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다시금 우민의 허리를 안았다. 한 달이 넘게 못 했다. 우민은 매일매일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니 괜찮지 않냐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서진은 아니었다.
그야 우민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긴 해도 병원에서의 우민은 서진만의 것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일을 오래해 이미 두 사람의 사이를 짐작한 의료진들이 있다는 걸 서진도 모르지 않았다. 암암리에 알고 있다 해도 서진은 때때로 아예 우민과의 사이를 폭로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제 것이라고 도장을 찍으면 우민을 넘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시헌이 비밀연애에 안달이 났었는지 서진은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때는 시헌이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 알았다. 그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제 것이니, 넘보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운 행위였다.
아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이던가. 당시의 서진은 시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서진은 당시의 시헌의 마음과 아픔을 공감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철이 없었고, 쓰디쓴 사랑이었다.
“그러니 제발… 저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윽, 아프면 말해.”
계속되는 서진의 유혹에 우민이 침을 삼켰다. 우민이 보기에 서진은 충분히 매력이 있었다. 서진은 어린애를 질투하는 모양이지만, 우민이 생각하기에 그건 정말 우스웠다. 지금의 서진은 확실히 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민이 어리다고 말하는 건 너 역시 그 시절이 있지 않았냐는 뜻의 어림이었다.
이제는 나이도 있는 데다 원래부터 어린애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눈앞의 서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민의 취향이었다. 그 사실을 질투에 눈이 먼 서진만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진이 들으면 좋아서 자지러질 말이나, 우민은 서진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취향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우민이 서진을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기욱과의 시간이 전부 치유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상처로 남겠지. 우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래에 상처를 안고 갈 서진이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도록 보듬어 주는 것뿐이었다. 우민은 조심스럽게 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하으… 읏!”
“서진아….”
“하아, 으… 괜찮아요. 그냥, 해 주세요.”
아픈 걸 참는 건 익숙했다. 아무렴 뭘 하든 기욱과의 섹스만 하겠는가. 꼭 기욱이 아니어도 그렇다. 어린 그때의 순수했던 강서진은 없었다. 한 번도 제 몸이 깨끗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의 강서진은 더 이상 없었다. 우민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하윽, 서진아.”
“하응, 응… 교수님….”
단순히 넣은 것뿐인데 안을 꽉꽉 메우는 느낌만으로도 갈 것 같았다. 우민이 제 안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됐다. 우민이 천천히 서진을 안았다.
“후, 움직일게.”
“아응, 아… 응….”
우민이 천천히 서진의 안에서 피스톤질을 했다. 방 안으로 두 사람의 달뜬 숨소리가 차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프기는커녕 서진은 더욱더 우민을 원했다. 서민은 우민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잔뜩 땀에 젖은 우민은 무척이나 섹시하고 또 관능적이었다. 우민을 본 서진은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제 페니스를 붙잡았다.
“하아… 읏…… 하, 더….”
“윽, 서진아… 하….”
사정 직전의 우민이 다급하게 페니스를 빼냈다. 우민이 내뱉은 정액이 서진의 배 위로 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도 사정했다. 한동안 하지 않아서 그런지 꽤 많은 양이 나왔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우민의 혀가 서진의 입안을 들어와 적셨다. 키스할 때 설탕을 입에 머금고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았다. 한번 먹으면 또 먹고 싶어지는 마약 같은 맛에 서진은 계속해서 우민의 입안을 탐했다. 농염하게 이어지는 키스에 서진은 우민의 목덜미로 혀를 가져다 댔다.
“읏, 야 너 뭐 하는…….”
“안 돼요?”
서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민을 올려다봤다. 섹스하며 누군가에게 흔적을 남겨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우민이 처음이었다. 서진을 이기지 못한 우민이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땀에 젖은 목덜미를 혀로 핥던 서진은 우민의 목덜미에 제 흔적을 남겼다. 조금씩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우민의 어깨를 눌러 뒤로 눕힌 뒤 위로 올라탔다.
“야야, 그만….”
“하윽… 아… 읏….”
허벅지를 벌린 서진은 제 안으로 우민의 것을 밀어 넣었다. 간신히 우민을 전부 받아 낸 서진은 우민의 가슴을 짚으며 숨을 골랐다.
“하… 아응, 으….”
“무리 안 해도 된다니까.”
우민이 서진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서진이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우민은 씁쓸했다. 서진도 나이가 있으니 섹스 경험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다. 중요한 건, 그 경험의 박기욱과 원하지 않은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제 위에서 요염하게 허리를 흔드는 서진이 좋으면서도 안타까운 이유였다. 아무것도 몰랐을 서진을 얼마나 괴롭혔으면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렇게 당한 당사자의 심정은 우민으로서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하응, 응… 마음대로… 하, 해도 되니까…….”
“정말이지 못 살아.”
“안에 해 주세요… 후……. 그 사람, 잊어버리게.”
몸을 숙인 서진이 기어코 우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민이 어떤 심정으로 저를 안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었다. 그러니 최소한 우민과 사귀고 있는 지금 조금이라도 더 많이, 우민을 원했다. 기욱과의 흔적들을 전부 우민의 것으로 덮고 싶었다. 서진의 말에 초점이 나간 듯 우민은 몸을 뒤집어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그동안 서진의 상태를 살피며 했던 우민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아프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우민과의 섹스에 집중했다.
“교수님… 하, 사랑해요. 흑….”
“나도 사랑해.”
이날, 서진은 몇 번이고 우민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내뱉었다. 왜일까?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섹스하면 할수록 갈증은 채워지지 않고 우민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서진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우민을 탐하고 또 탐했다. 그렇게 해도 부족했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 * *
당직실에서 조금 일찍 나온 서진은 로비의 카페에서 커피를 샀다. 봉투를 들고 가장 먼저 정 비서의 자리를 찾았다. 며칠 동안 쉬고 온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은 서진을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서진은 탁, 하고 그녀의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렸다. 가장 큰 사이즈에 가격도 꽤 비싼 커피였다. 그녀는 커피를 만지작거리더니 서진을 보며 말했다.
“어머, 강 쌤. 지금 저한테 뇌물 주시는 거예요?”
“맞아요.”
“네?”
“한 교수님 잘 부탁한다고 뇌물 드리는 거라고요. 저 한 교수님이랑 사귀어요. 뭐, 알고 있겠지만.”
같은 팀 내에서 다들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흰색의 빳빳한 청첩장이었다.
“저 결혼해요. 이상한 오해는 이제 그만두시는 거죠?”
“죄송해요.”
“됐어요. 솔직히 강 쌤이 언제 말해 주나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우리 그래도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그럼요.”
“커피, 잘 마실게요.”
그녀가 고생하라며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나중에 보자며 복도로 나왔다. 남아 있는 커피를 전부 비운 뒤 심호흡을 했다. 멀리 환자가 들어온 듯 우민이 큰 소리로 서진을 불렀다. 서진은 근처의 쓰레기통에 커피 컵을 버린 뒤 서둘러 우민에게 뛰어갔다.
“강 선생!”
“지금 가요!”
그래, 이제 괜찮을 거다. 설령 이게 태풍의 눈이 맞다고 해도, 서진은 지금 이 시각에 충실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