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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박시헌 X 강서진] 차라리 너였으면 (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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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박시헌 X 강서진] 차라리 너였으면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오자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빗물에 의해 바닥이 점점 검게 물들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다들 당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빗발이 조금씩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강의동까지 거리가 좀 있어 비를 맞고 갈 수는 없었던 시헌은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생각했다. 서진이 한발 늦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어. 비다.”

“…뭐?”

기계처럼 딱딱한 서진의 감탄사에 시헌은 어이가 없었다. 우산을 사러 가야 하는지 아니면 비를 맞고 강의동까지 달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마당에 비를 보고 저런 말이 나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시헌은 얼마 가지 않아 서진이 태연한 이유를 깨달았다. 커다란 배낭 가방을 앞으로 멘 서진이 가방 안쪽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 펼쳤다.

“너 우산 있었어?”

“원래 가지고 다녀. 비가 올 줄은 몰랐네.”

서진은 태연하게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접이식 우산은 생각보다 좁아 남자 둘이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작았다. 점점 굵어지는 빗발에 시헌이 서진에게 더욱 꽉 달라붙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나눠 쓰는 남자는 비단 서진과 시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해지는 빗발에 시헌은 더욱더 서진에게 꽉 달라붙었다. 서진은 시헌의 행동의 절반 이상 사심이 들어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서진이 편의점 앞에 걸음을 멈췄다.

“우산 사.”

“돈 없는데?”

“1억을 벌써 다 썼어?”

서진과 함께 알바를 하다 걸린 시헌은 반강제로 부모님에게 꽤 큰 금액의 용돈을 받았다. 돈이 궁했던 것도 아니고, 서진이 없으면 알바를 할 이유가 없었던 시헌은 금방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서진 또한 시헌의 생일 선물이 목적이었던 터라 목표 금액만 달성한 뒤 바로 그만둔 상황이었다. 1억이라는 말을 입에 꺼낸 시헌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자기야.”

“야! 어디서…….”

서진이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비가 많이 오다 못해 점점 두꺼워져 두 사람이 쓰고 있는 우산을 강하게 후렸다. 불행 중 다행일까? 확 강해진 빗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어지간한 비라면 그냥 넘어갈 텐데, 이건 정도가 좀 심했다. 이렇게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던가? 결국, 시헌은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커다란 우산을 샀다. 시헌은 검은 우산을 펼치더니 서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뭐 해 안 가?”

“우산이 너무 커.”

“잘됐네.”

“크다고.”

“아놔, 돌겠네. 알았어. 알았다고, 같이 쓰면 되잖아.”

시헌은 기어코 비를 핑계 삼아 서진과 함께 우산을 같이 썼다. 비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언덕을 타고 빗물이 계곡처럼 흘러내렸다. 신발이 미끄러운 데다 가방까지 앞으로 메고 있었던 터라 넘어질 것 같았다. 시헌은 비틀거리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야…….”

“너 불안해서 그래.”

시헌은 괜찮다며 주변을 둘러봤다. 비도 많이 오는 데다 의학관으로 가는 사람들이 없어 둘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

* * *

쉬는 시간에 밖으로 나온 서진은 복도에서 캔 음료를 뽑아 마셨다. 휴대폰을 열자 방금 짠 조별과제 단톡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뽑기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조에서 서진만 혼자 남자였다. 여학생들끼리 떠드는 데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쌓여 있는 톡을 읽었다.

서진이 나오는 걸 본 시헌이 서진을 따라 밖으로 쫓아 나왔다. 어차피 금방 들어갈 건데 왜 이렇게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오는지 모르겠다. 의도를 눈치챈 시헌은 서진이 앉아 있는 벤치 옆 자판기에 서 헛기침했다. 슬쩍 서진이 마시고 있는 음료수를 보더니 똑같은 것을 뽑아 마셨다. 역시나 일부러 나온 것이 맞았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인지 시헌은 대놓고 서진의 옆에 앉았다. 음료수를 마시며 서진의 휴대폰을 흘끗흘끗 쳐다봤다.

“……왜?”

시선이 부담스러운 서진이 한마디 하자 시헌은 음료수 끝을 살짝 씹더니 고개를 돌렸다.

“짜증 나.”

“뭐가?”

“조별과제, 왜 너 혼자 남잔데?”

“그럼 다 남자였으면 좋겠어?”

“아니! 그건 아닌데…….”

순식간에 음료수를 전부 비운 시헌이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질투가 난다니까? 근데 남자건 여자건 뭐가 중요하냐고. 제 기분을 알아주지 못하는 서진에 서운했다. 서진은 어느 순간부터 시헌의 질투를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조별과제 뽑기 결과가 뜨기 무섭게 제 이름보다 서진의 이름을 먼저 찾은 시헌은 서진과 같은 조 학생들을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공정하게 뽑기를 돌린 거라 어떻게 할 수가 없는지 강의 시간 내내 들으라는 수업은 안 듣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헛웃음이 다 나왔다. 내심 서진도 저 말을 언제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닌데 뭐?”

“좀……. 그, 그런 거 있잖아. 골고루?”

“그런다고 해서 네 성격이 어디 가?”

“……그건 아닌데. 그래도 좀 그렇다.”

“뭘, 이미 질리도록 얼굴 본 애들인데.”

질투도 이쯤 해 두라며 서진이 시헌을 달랬다. 삐죽 입술을 내민 시헌이 슬슬 들어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주말에 일 있어.”

책을 펼치던 서진은 시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잠시 눈을 깜박였다. 이번 주말에?

“아, 재혁이랑 술 마시기로 했었지? 너 못 나와?”

“응. 집안일 있어서, 내려오래.”

“뭐……. 그럴 수 있지.”

서진은 충분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헌이 서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또 할 말이 있는 거야? 짜증이 난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왜!”

아주 짧은 시간 강의실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이목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서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시헌을 노려봤다. 교수님이 늦게 들어와서 다행이지. 서진이 질투를 하는 시헌을 즐기는 것처럼 시헌도 은근히 서진이 당황하는 걸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책상에 팔을 괸 시헌이 서진을 보며 낮게 웃었다.

“주말에 연락할게.”

취하면 죽어. 주변을 의식해 하지 못한 말이 서진의 머리를 타고 텔레파시처럼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저 웃음하며, 말을 돌리는 습관은 누가 봐도 박기욱에게서 배운 것이 틀림없다 싶을 정도로 똑같았다. 서진은 기욱의 위화감을 잊기 위해 무릎을 꽉 꼬집었다. 회의가 오래 걸렸다며 교수 하나가 뒤늦게 들어왔다.

“알겠어.”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진아?」 오후 9:32

「너 술 마시는 중이라며 ㅡㅡ?」 오후 9:40

「적당히 마시라 그랬잖아」오후 10:23

「강재혁도 연락 안 되는데. 너 진짜 연락 안 받을래? 전화 좀 받지?」 오후 10:40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할 일을 다 하고 고모네 집에 온 시헌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샤워를 마친 큰누나 하연이 거실에 있는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시헌아, 너 씻어. 옷도 안 갈아입고 뭐 해?”

“누나 나 서울 올라가도 돼?”

“너? 지금? 이 시간에?”

수건으로 머리를 닦은 뒤 거실로 나온 하연이 커다란 엔틱 괘종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당연히 자고 갈 거로 생각했던 하연의 뜻밖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내일 강의 오후라며? 그냥 자고 가지 뭘 또 올라가?”

“일이 좀 생겨서. 안 돼?”

“너 술 안 마셨지?”

“어.”

“그래, 조심해서 올라가라.”

내려올 때가 문제였지 올라가는 길은 매형이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하연을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시헌이 없어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하연은 다음에 보자며 손을 흔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시헌은 다시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님의 사정으로…….

언제나처럼 들리는 한결같은 목소리에 짜증이 난 시헌은 전화를 끊은 뒤 벗어 뒀던 정장 재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술자리에 있을 법한 동기들과 선배들에게 전화를 전부 돌렸다. 한참 만에 동기 한 명과 연락이 됐다. 사정을 듣자 하니 서진을 잘 돌봐주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재혁은 가장 먼저 꼴았고, 그런 재혁을 데리고 노래방에 오기 무섭게 서진도 쓰러져 둘이 사이좋게 잠들어 있는 꼴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두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시헌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시헌은 한숨을 쉬며 동기가 알려 준 노래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시간인 데다 속도를 높인 탓인지 시헌은 시간이 끝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노래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 시헌아! 여기, 여기!”

근처에 차를 대놓고 허둥지둥 지하로 내려가자 화장실에서 나온 다른 동기가 시헌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안쪽 방이라며 손짓을 하는 동기를 따라 가장 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이랍시고 귀가 먹을 정도로 시끄러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 일행들 사이로 서로 기대 쓰려져 자는 서진과 재혁이 있었다.

“강재혁이 씹…….”

시헌은 술에 꼴은 서진보다 그걸 책임지겠다며 약속까지 했던 재혁에 대한 실망감이 더욱 컸다. 그래도 나름 믿었는데 어쩜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지 입이 얼어서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노래방 시간이 끝나고, 아예 밤샘을 작정한 애들 몇 명이 신이 나서 다음 장소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그 와중에 세상모르고 자는 서진과 재혁은 그들에게 있어서 짐이나 다름없었다. 비교적 술이 덜 취한 동기가 갑갑하다며 서 있는 시헌과 함께 두 사람에 대해 의논을 했다. 시헌은 목에 걸려 있는 줄도 몰랐던 붉은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서진에게 다가갔다.

“바로 건너편에 모텔 있던데.”

“걍 거기다 던져 둬도 되겠지? 방값은?”

“내가 알아서 낼게. 강재혁 이 자식 옮기는 것만 좀 도와줘라.”

마음 같아서는 서진만 데리고 가고, 재혁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고 싶었다. 차마 동기들이 보는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던 시헌은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서진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진아, 강서진.”

“으… 으윽….”

“일어날 수 있어? 몸만 좀 일으켜 봐.”

시헌이 서진에게 말하자 서진은 좀비라도 된 것처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감기는 눈과 몸을 가누지 못해 불안하게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시헌은 그런 서진의 몸을 완전히 기울여 제 쪽으로 붙였다. 시헌이 서진을 일으키자 다른 동기 두 명이 재혁을 힘겹게 일으켰다.

거의 남자 서너 명이 달라붙어 시헌과 재혁을 간신히 근처에 있는 큰 모텔방에 던져 놓았다. 안 그래도 방이 없어 무슨 프리미엄인지 뭔지 가장 비싼 방을 결제한 시헌을 본 동기들이 진짜 괜찮은 거냐며 몇 번이나 시헌에게 되물었다. 시헌과 서진이 친하긴 해도 술도 안 마시고 찾아와 술 취한 두 명을 감당하는 건 좀 어딘가 이상했다. 시헌도 그 사실을 인식하긴 했는지 소매를 걷으며 변명을 했다.

“내일 눈 뜨면 돈 다 받아 낼 거야. 아니, 내일 오전에 나랑 약속 있었다고.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하하, 둘이 작정하고 마시긴 했지. 그러면 우린 갈 테니까 낼 오후에 학교에서 보자!”

“들어가.”

간신히 동기들을 보낸 서진은 방 안의 불을 완전히 켰다. 비싼 방이라 그런지 침대가 꽤 컸다. 침대 위에는 서진과 재혁이 나란히 누워 이상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장롱을 뒤지자 의외로 이불이 나왔다. 바닥에 이불을 대충 깐 시헌은 재혁의 몸을 옆으로 밀었다.

“으어억…!”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재혁이 바닥을 뒤척거리며 벽 쪽으로 달라붙었다. 시헌은 바닥을 구르는 재혁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시헌이 몸을 숙여 서진의 뺨에 키스했다.

“하아… 후….”

술을 얼마나 닿기만 해도 술 냄새가 진동했다. 시헌은 서진의 바싹 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입안이 텁텁해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자 혀끝에 손이 닿았다. 시헌은 엉망이 된 서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술에 취해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도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벨트를 풀고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유두를 살살 지분거렸다. 움찔거리며 잇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침대 아래에서 자는 재혁을 내려다봤다.

* * *

“하… 으읏….”

몸이 뜨거웠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아, 술을 마셨었지. 서진은 자기가 알아서 해 주겠다는 재혁의 말만 믿고 무작정 술을 들이켰다. 정작 그렇게 말한 재혁이 먼저 술에 꼴이 한심하다며 손가락질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뒤에 어떻게 됐더라? 아, 으….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이 귓가에 계속 울렸다.

“으… 아응….”

“쉿. 조용히.”

가라앉지 않은 열기에 서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사정할 즈음 온몸이 빳빳하게 달아오르자 그제야 주인 모르는 신음이 제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읍….”

당황한 손목에 힘이 풀어지며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서진에 시헌이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이불을 덮은 채 옆으로 제 것이 아닌 감촉이 느껴졌다. 불을 전부 꺼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함에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손목을 잡아 누르는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누구…… 읏….”

“일어났어?”

“시, 시헌이야? 불 좀 켜… 주면 안 돼? 어떻게 된 거야?”

시헌의 손이 다시 서진의 입을 막았다. 야릇하게 귓가를 핥는 시헌의 혀에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분명 시헌은 친척네서 자고 온다고 그러지 않았나? 느낌으로 볼 때 침대 위에 같이 있다는 건 분명한데, 여기가 대체 어디 침대 위인지 알 길이 없었다. 술이 덜 깬 서진은 제 손목을 붙잡는 시헌의 손을 꽉 쥐었다.

“지, 진짜 시헌이 맞지?”

“맞아.”

“놀랐잖아. 읏… 야야, 어딜 만지는……!”

어둠 속에서도 시헌은 꿋꿋하게 잠이 깬 서진의 페니스를 쥐며 움직였다. 가라앉았던 페니스가 다시 서기 시작했다. 도대체 바지는 언제 벗긴 것인지 아래가 완전히 시원했다.

“너… 읍….”

아니, 하다못해 불이라도 켜고 말하라고! 여기 대체 어딘데! 시헌은 서진이 말할 틈을 주지 않겠다며 계속해서 키스를 공세를 퍼부었다. 키스할 생각이 없었던 서진이 계속 시헌을 밀어내려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밀어내려는 자와 넣으려는 자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지치는 건 서진 쪽이었다.

“하, 으으… 아읏… 으읏…!”

키스하면서도 꿋꿋하게 서진의 페니스를 주물렀던 터라 자극은 여전했다. 서진은 이내 시헌의 손안에서 사정했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시헌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전부터 계속 안쪽이 얼얼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진이 잠든 사이 시헌이 계속해서 서진의 안을 넓혀 놓았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두 개가 들어가자 서진은 시트에 얼굴을 묻으며 이를 악물었다.

“읏… 자, 잠깐… 아래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없어.”

“여… 하윽! 여기 모텔 맞지? 아니, 뭔가 부딪힌 거 같은…… 으읏… 근데 너 대체 어떻게 온 거야?”

술에서 깼다고 해서 모든 상황 파악이 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더 안심은 했으나, 딱 그게 다였다. 불이 켜지지 않으니 어디인지도 몇 시인지 그리고 제 꼴이 어떤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서진의 기억은 재혁이 쓰러지고, 노래방에 온 뒤 끊겨 있었다. 손가락을 뺀 시헌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페니스를 살살 비볐다. 굳이 보지 않아도 잔뜩 발기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 하윽, 나 잘 때 이래도 되는 거야? 읍….”

뒤로 안은 시헌이 서진의 입안으로 손을 넣으며 조용히 하라는 듯 채근 댔다. 오늘따라 유독 소리에 민감한 것 같은데 뭐가 보이지 않으니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적당히 마신다며.”

“……아, 미안.”

“연락도 안 받고. 나 많이 참은 거야.”

“읏… 그래도… 이걸… 하윽!”

서진이 신음을 내지름과 동시에 덜컥, 하고 소리가 났다. 시헌도 들을 정도로 뭔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였기에 당황한 서진이 발버둥을 쳤다.

“역시 뭐가 있는…!”

“괜찮다니까.”

“하윽… 읏…!”

시트를 꽉 쥠과 동시에 시헌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서진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시헌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역시 방 안에 뭔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벅지를 옆으로 벌린 시헌의 움직임에 서진의 몸이 달아올랐다.

“윽… 으읏….”

평소처럼 크게 움직이진 않지만, 그 미세한 떨림이 더욱 서진을 자극했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어둠 속에서 시헌은 정확하게 서진의 입술을 찾아 덮었다. 입술을 뗀 시헌의 혀가 서진의 목덜미를 핥았다. 시헌의 등을 안으며 허리를 움직이던 서진이 깜짝 놀랐다.

“하, 하지 마….”

“벌이야.”

“제… 제발, 시헌아. 흔적… 나, 남기지 마. 어? 읏.”

시헌의 입술이 서진의 피부를 조금씩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그런지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다. 서진은 섹스를 할 때 흔적을 남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로 생각한 시헌은 끝내 서진의 목에 흔적을 남겼다.

“하으… 아윽… 너… 가만 안 으읍….”

어둠 속이라 서로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걸 어떻게 숨기라고. 시헌에게는 주변 사람들에게 걸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핑계를 댔지만, 그 이유보다는 박기욱의 눈에 들고 싶지 않은 것이 더 컸다. 제발,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기욱이 저를 부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술기운에 오래 생각할 수 없었던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시헌에게 몸을 맡겼다.

“하으… 아으, 앙… 으읏….”

“…읏, 서진아.”

“…….”

침대 밑에 몸을 반쯤 구겨 넣으며 자고 있던 재혁은 뜬금없이 들려오는 신음에 제 귀를 의심했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일으키자 위쪽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제자리에 누운 재혁은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 흐으… 진짜 우리만 있는 거 맞아?”

“맞다고.”

“너… 아응… 읏….”

둘이 지금 섹스하는 거 맞지? 침대 위에는 서진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 재혁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침대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박시헌이 틀림없었다. 모텔에 오기 전 잠깐 깼던 재혁은 중간에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좆됐다….’

자신은 왜 바닥에 있는 것이며, 위쪽에서는 낯선 서진의 신음에 재혁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차마 고개를 위로 들 수 없었던 재혁은 그저 눈만 질끔 감았다. 작정이라도 한 듯 아예 찌걱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침대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하으… 아응… 아… 으윽….”

털썩, 서진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지며 침대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끝난 거 맞지? 재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여자와 남자가 3D로 섹스하는 걸 봐도 환장할 지경인데,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형 둘이서 섹스하고 있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니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비록 불이 완전히 꺼져 깜깜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머릿속의 상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적과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번갈아 가며 가득 메웠다.

바닥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유심히 귀를 기울인 순간 어둠 속에서 침대 한 바퀴를 돈 시헌이 발끝으로 재혁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윽….”

몸을 숙인 시헌은 정확하게 재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소한 빛 하나 들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일어나 자신을 찾아낼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술에 취한 서진을 좋을 대로 범하고 난 시헌의 숨소리는 평소보다 다소 거칠었다. 시헌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재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술 깼으면.”

“…….”

“조용히 일어나서 나와.”

앞서간 시헌이 모텔 방문을 열자 불빛이 들어왔다. 간신히 일어난 재혁은 침대 쪽을 흘끗 쳐다봤다. 이불을 덮고 기절한 듯 쓰러져 있는 서진이 보였는데, 침대 밑으로 서진의 것이라 추정되는 바지가 굴러다녔다. 재혁은 시헌이 일부러 문을 끝까지 닫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문틈 사이에 있는 시헌과 눈이 마주치자 재혁은 바닥을 설설 기며 복도 밖으로 나왔다. 복도 한쪽에서 팔짱을 낀 시헌이 재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형….”

술이 완전히 깬 건 아니었던 재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재혁이 벽을 짚고 일어나자 시헌은 조용히 모텔 방의 문을 닫았다. 시헌은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며 필터를 씹었다. 그제야 재혁은 술을 먹기 전 시헌에게 서진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시헌과 서진은 친하니까, 솔직히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애써 신경을 쓰며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 그 증거였다. 시헌은 입을 다문 채 따라오라는 듯 재혁을 위아래로 훑으며 모텔 밖으로 나왔다. 새벽인 모양인지 주변이 어슴푸레했다. 시헌은 침에 젖은 담배를 가볍게 털었다. 재혁이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줬다. 후, 새벽의 찬 공기와 함께 잿빛 벽을 타고 흰 연기가 뭉게뭉게 구름을 그리며 올라갔다.

“서, 서진이 형이랑…….”

“사귀어.”

“헐…?”

“강서진한테 티 내면 죽인다.”

시헌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담배를 계속 피웠다. 집안일이 있어 못 온다고는 들었는데 서진 때문에 급하게 서울로 올라온 티가 났다. 익숙하지 않은 정장 차림의 시헌은 무척이나 포스가 있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서진의 신음이 떠나질 않았다. 담배를 끈 시헌의 발끝이 재혁의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지, 진짜……. 형, 그럼 막…….”

“막 뭐. 어차피 안 보였잖아.”

“그래도 소리……. 아니, 진짜 사귀는 거야?”

“왜? 너 괴롭히려고 강서진이랑 짜고 가짜로 몰카라도 했을까 봐? 몇 번을 말해. 사귀는 거 맞다고.”

“이, 일부러 보여……. 아니. 들려 준 거예요?”

“어.”

숨을 들이쉰 시헌은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실수로라도 어이가 없는데 시헌은 일말의 변명조차 하지 않고 맞다고 대답했다. 의대생 동기 중에서 또라이들이 많은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놀라울 것이 없으나, 그중에서도 오늘의 시헌은 특히 더 대박이었다. 이건 독특의 정도를 넘어섰다. 머리가 하얗게 질린 재혁은 시헌의 옆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니 상황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헌과 서진의 사이는 확실히 좀 묘하긴 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정황이 조금씩 이해가 됐다. 담배를 끈 재혁은 시헌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자, 잘할게요.”

“당연하지.”

시헌은 담배를 끄며 혀를 찼다.

* * *

다음 날 모텔에서 정신을 차린 서진은 시헌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서진이 자연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시헌의 차 조수석에 탔다.

“야, 너 괜찮아?”

“하암. 응.”

시동을 끄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시헌이 하품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서진은 며칠 전 편의점에서 사 놓고 안 먹은 캔커피를 시헌에게 건넸다. 캔커피를 받아 마신 시헌이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서진은 정장 차림인 시헌을 흘끗댔다. 키가 조금 작아 아쉽긴 해도 마치 제 몸처럼 정장이 참 잘 어울렸다. 서진은 왠지 모르게 정장에 익숙한 시헌을 볼 때마다 묘한 거리감이 들었다.

“나도 정장이나 한 벌 맞출까?”

“너 집에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없는데……. 그냥.”

“어차피 나중에 싫어도 입게 될걸.”

어른이지만 어른이 아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20살이 지나면 어른일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차를 운전하고, 강의를 듣는다는 대학생들이 다 어른 같아 보였는데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당장 정장을 맞출 만한 돈도 없었던 서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운전을 했다. 욱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렇지 시헌의 성격 자체는 유한 편이라서 운전 또한 대체로 부드러웠다. 그 점은 기욱과 다르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주말에 바다 보러 갈까?”

“갑자기 무슨 바다야?”

슬슬 다가오는 시험 기간 준비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는데 바다라니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서진은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가.”

“자기야. 어제 술 마신 거 생각 안 해?”

“그건……. 강재혁 그 자식이 억지로 먹인 거라고!”

“그래서? 자기도 받아먹었잖아. 연락한다고 해 놓고 연락도 안 하고. 계속 그러면 말 안 한다?”

“아니…….”

시헌이 조금씩 속도를 높이며 입을 다물었다. 말을 안 하겠다니, 협박도 그런 협박이 없었다. 협박할 거면 좀 더 누구처럼 확실하게 하든가. 박기욱의 협박에 비교하면 동생이라고 하는 시헌의 말은 협박이 아니란 부탁에 가까운 애교였다. 그것 또한 시헌의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서진이 거절하지 못한다는 점을 시헌은 잘 알고 있었다. 말을 안 하겠다고 선언한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옆에 앉은 서진이 몸을 배배 꼬았다. 서진은 불편한 침묵에 익숙하지 않았다. 차가 신호에 걸리고 멈추지 서진이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가. 가면 되잖아! 대신에 시험 기간에 어디 놀러 가자는 말 하기만 해 봐!”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의자를 뒤로 밀고 눈을 붙였다. 눈을 살짝 흘기자 입이 귀에까지 걸리며 웃고 있는 시헌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헌이 웃으니 저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 * *

쉬는 시간이 되기 무섭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서진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시헌은 재혁과 떠드느라 서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걸까? 기욱은 이런 타이밍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사람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너 주말에 나와.

― 네?

주말이라는 말에 서진이 미간을 구겼다. 병원인 것 같은데, 휴대폰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욱 말고도 다른 사람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섹스를 하자고 부르는 것과는 묘하게 패턴이 다르다는 것을 짐작했다.

― 전화 바꿔 줄게.

그 전에 주말에 일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제가 무슨 부르면 나오는 사람인 줄 아나. 뭐, 실제로 박기욱이 부르면 예외 없이 나가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기욱이 근처에 있는 의사에게 전화를 넘겼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기욱과 같은 대학을 졸업한 동문이자 후배 교수인 최규건이었다.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도 있고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어 서진도 규건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 아, 강 간호사 동생 맞죠? 다른 게 아니라…….

규건이 기욱을 대신해 상황을 설명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병원 근처 호텔에서 하는 내부 행사인데 나오기로 했던 자원봉사자 몇 명이 못 나오게 됐다며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제 학교 병원에서 하는 행사에 나가는 것도 귀찮은데 하물며 남의 대학 병원 자원봉사 같은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주말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 제가 그때…….

― 아, 박 교수님이 바꿔 달라시네.

기왕이면 최 교수라는 사람에게 변명하고 싶었는데, 또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전화를 바꿨다. 기욱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서진의 입에 보이지 않는 재갈이 물렸다.

― 일 없지?

― 일 있어요. 그리고 곧 있으면 시험 기간…….

― 나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하,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일이 있냐 없냐는 왜 물어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툭,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걱정이 됐는지 뒤늦게 신경을 쓰는 듯한 답장이 왔다. 서진은 기욱이 보낸 문자를 보자마자 지웠다. 탁, 하고 타이밍 좋게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슬슬 교수님 올 때가 다 됐는데 통화를 하러 나간 서진이 꽤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아 나와 본 것이었다.

“누구야?”

“어, 그게. 별거 아니야.”

“누군데 그래?”

시헌이 추궁하듯 캐물었다. 이렇게 물어 오는 시헌은 집요했다. 괜히 시헌과 싸우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나중에 말하겠다며 시헌의 등을 떠밀었다. 마침 교수님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와 서진의 통화에 관한 이야기는 무산이 되는 듯싶었다.

강의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시헌의 차에 탔다. 서진이 조수석에 앉기 무섭게 먼저 들어와 있던 시헌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까 누구랑 통화했는데?”

그냥 무산되는 줄 알았는데,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나 보다. 시헌이 제발 통화에 관해 물어보지 않기를 바랐던 서진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침묵이 오래갈수록 입술이 바르르 탔다.

“너네 형.”

“우리 형? 형한테 전화 온 거야?”

“응.”

“왜? 형이 연락할 일이 있었나?”

괜히 졸았다고 생각한 시헌은 자연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기욱과 서진의 누나인 서윤이 사귀고 있으니, 시헌이 보기에도 서진과 기욱이 연락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헌에게 있어서 당연한 질문이 서진에게는 비수를 꽂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서진의 침묵이 다시 길어지자 시헌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냥 대답하면 될 텐데, 평소와 다르게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달리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던 서진이 마지못해 사실대로 실토했다.

“너희 형이, 병원에서 하는 행사 좀 도와 달래.”

“J대 병원에서? 언젠데?”

“주말에.”

“그래서 한다고 그랬어?”

설마, 그러진 않겠지. 시헌의 기대를 배반한 게 양심이 찔린 듯 서진이 침묵했다. 서진의 침묵은 긍정의 침묵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집 근처 도로에 차를 세웠다. 차 안으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우리 바다에 가는 거 일요일 날 당일치기로 하면 안 될까?”

“아니, 우리 학교도 아닌데 그걸 왜……. 거절하면 되잖아.”

“이미 간다고 말해서 좀.”

“너 학교 행사 나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자대 병원 행사뿐 아니라 학교 행사도 안 좋아하는 녀석이 다른 학교 행사를 좋다고 나갈 이유가 없었다. 시헌도 기욱에게 몇 번인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긴 해도, 서진이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기욱의 부탁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아, 너 그 행사가 언젠데?”

“토요일 날. 일요일은 괜찮아. 당일치기로 가면 안 될까?”

“서진아, 너…….”

시헌은 아무리 봐도 서진이 억지로 행사에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윤에게 민감한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런 것과는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서진은 제 형인 박기욱에게 약했다.

“너 내가 중요해 형이 중요해?”

“……시헌아 왜 그래.”

“그냥 가지 마. 어차피 너 아니어도 나갈 사람 많아.”

“그래도 약속한 건데 좀 그렇잖아.”

“약속은! 내가 먼저 했잖아! 나랑 한 건 약속 아니야?”

“미안해.”

시헌이 주먹을 꽉 쥐었다. 거기서 미안하다는 말이 왜 나와? 차라리 화라도 내면 할 말이라도 있었다. 도대체 뭘 잘못한 거냐고, 시헌은 서진의 소극적인 태도가 무척이나 답답했다. 창문을 살짝 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차 안으로 시헌이 내뱉은 담배 냄새가 났다. 시헌은 담배 하나를 꿋꿋하게 다 피운 뒤 창문을 닫았다.

“너 형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왜 가는 건데.”

“시헌아 제발.”

서진은 더 캐묻지 말아 달라며 시헌을 말렸다. 이쯤 되니 정말 제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서진의 집 근처에 차를 댄 시헌은 핸들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아, 일단은 일요일 날 데리러 갈게.”

“……알았어.”

“잘 자.”

가방을 챙긴 서진은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 * *

생각보다 병원에 일찍 도착했다. 아무 생각 없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난 뒤 거울을 본 서진이 미간을 구겼다. 목 쪽으로 시헌이 남긴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긴 해도 박기욱이라면 혹시 모를 일이었다. 밴드를 붙이면 너무 티가 날 것 같고, 한참을 고민하던 서진은 옷으로 대충 가리기로 했다.

서진이 예정된 행사 몇 시간도 전부터 병원에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보내고 로비에서 머뭇거리자 젊은 의사 하나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저기 그……. 강서진 학생?”

“네네. 맞아요.”

“아, 네. 박 교수님이 연구실로 데려오라고 하셔서. 따라서 오세요.”

20대 후반의 젊은 인턴 하나가 서진을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의대생이지만, 서진은 아직도 대학 병원이라는 곳이 썩 익숙하지는 않았다. 철문을 두드리고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자 그가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 줬다.

“고생하세요.”

“예.”

인턴 말년차나 다름없는 그는 거의 기계처럼 제 할 일만 하고 떠났다. 서진은 와 본 적이 없는 기욱의 연구실을 두리번거렸다. 자료와 책들을 보관하는 안쪽 창고에서 기욱이 얼굴을 내밀었다. 가운을 입은 박기욱을 본 서진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거기 앉아 있어 봐.”

기욱이 편한 데 앉으라며 휙휙 손을 저었다. 잠시 뒤 안쪽 정리를 마친 기욱은 제법 큰 상자 하나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상자는 서진이 앉아 있는 의자 위에 올려졌다. 자세히 보니 무슨 옷 브랜드 이름이었다. 서진의 앞에 앉은 기욱이 상자를 서진 쪽으로 밀었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상자를 열었다. 역시 옷 브랜드가 맞았다. 상자 안에는 잘 포장된 검은 정장과 셔츠가 들어 있었다. 기욱은 발밑에 있는 백화점 봉투도 같이 올렸다.

“이게 다…….”

“다음에 기회 되면 제대로 맞춰 줄 테니까. 이번엔 그냥 입어.”

“제 거예요?”

서진의 질문에 자리에서 일어난 기욱이 당연한 걸 묻지 말라는 듯 바라봤다. 맞춤 정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장 한 벌은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최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진은 기욱에게 이런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신발에, 넥타이, 셔츠까지 사실상 풀 세트나 다름이 없었다. 서진은 상자를 덮으며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입으라고 준 거야.”

“아, 네. 그렇겠죠.”

그럼 장식품이겠는가? 서진은 기욱이답지 않게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서진의 중얼거림에 기욱의 손이 상자 위로 올라왔다.

“오늘 입으라고.”

“오늘요?”

“그래.”

“아, 알았어요. 어디서 갈아입으면 돼요?”

서진의 물음에 기욱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갈아입으라는 뜻이었다.

“지금요?”

“그럼 언제 갈아입게?”

“알았어요.”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다. 알몸을 보인 적은 많아서 부끄러울 것도 없긴 한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괜히 긴장은 됐다. 다가온 기욱이 서진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잠가 줬다. 갑자기 누나라도 들어오면 어쩌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도 안 들어와.”

“저도 알아요.”

기욱이 마음을 읽는 데 탁월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서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최근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 주는 기욱이 편리하기까지 했다. 상자를 뒤진 기욱은 서진에게 넥타이를 매 줬다.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을 훑었다. 저도 가운에 익숙하긴 해도 역시 진짜 의사는 달랐다. 아니, 이젠 교수지. 더 어렸을 때는 레지던트나 인턴이나 멀기는 마찬가지였다.

의대생이 되고 난 뒤에는 그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기욱은 뭘 하든 서진보다 한발 앞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았다. 도대체 언제쯤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지, 서진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긴, 차라리 그런 날은 오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을 이해하게 됐다는 뜻은 결국 박기욱과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정장 입기는 끝나 있었다. 아주 잠깐 기욱의 인형이 되어 인형 놀이를 당한 것 같았다.

“괜찮네.”

조금 크긴 해도 움직이는 데 불편하거나 이상한 정도는 아니었다. 기욱이 준 신발까지 신으니 갑자기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요?”

“넥타이 틀어졌다.”

다가간 기욱이 서진의 넥타이를 바로 해 줬다. 중간부터 목을 의식한 서진은 기욱과 빨리 거리를 벌리고 싶어 했다. 기욱은 서진이 묘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러는 거지? 서진을 빠르게 위아래로 훑던 기욱이 미간을 구겼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서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욱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서진의 손목을 붙잡은 뒤 목을 쥔 손을 옆으로 틀었다.

“목에 힘 빼.”

기욱이 말을 하자 서진이 마지못해 힘을 뺐다. 손을 약간 치우자 목덜미 안쪽으로 흐릿하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벌레에 물렸다고 변명할 수 있을 정도의 붉은 반점이었다. 탁상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흘끗댄 기욱이 서진을 강하게 노려봤다.

“어떤 새끼야.”

“아,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강서진! 너 지금 네가…….”

“지, 진짜예요.”

“뭐냐고 묻잖아.”

“수… 술….”

서진은 화가 난 듯한 기욱을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 애를 썼다. 기욱을 붙잡은 서진의 몸이 금방이라도 땅에 닿을 것처럼 숙어졌다.

“술 뭐?”

“수, 술 게임이었어요.”

“뭐?”

“저번주에 술을 좀 많이 마셨는데. 그때 과하게 놀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라는 걸 기욱이 모를 리 없었다. 서진의 필사적인 모습에 이를 악문 기욱이 휴대폰을 열었다.

“같이 술 먹은 동기 번호랑 이름.”

서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누구 이름을 말해야 걸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서진이 시간을 벌고 있다는 걸 눈치챈 기욱이 서진을 향해 소리쳤다.

“강서진!”

“가, 강재혁이요.”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던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재혁의 이름과 번호를 불렀다. 가장 먼저 꼴았으니 기억에 없어 입을 맞춰 줄 수도 있었다. 번호를 받은 기욱이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진을 흘끗 본 기욱은 안쪽 방으로 들어가 재혁과 통화를 했다.

“…….”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시헌의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됐다. 잠시 뒤 전화를 마친 기욱은 말없이 주변에 있는 상자들을 정리해 한쪽으로 몰아냈다. 기욱이 앉으라며 눈치를 줬다.

“한 번만 더 그따위 장난치면 가만 안 둬.”

“죄송해요.”

“너 오늘 병원 오는 거, 시헌이한테 말했어?”

“……네?”

어떻게 숨기려 했던 이름인데. 서진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행히 기욱은 그런 서진의 반응을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기욱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며 들고 있는 휴대폰을 허공으로 흔들었다. 주말에 약속이 어쩌고 하면서 안 나오려고 하더니 동기들과 놀러 갈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주말에, 강원도 간다면서. 아까 강재혁인지 하는 애한테 물어보니까 맞다던데.”

재혁과 기욱이 무슨 통화를 했는지는 몰라도 기욱이 원하는 대로 입을 맞췄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진은 고개를 두번 끄덕였다.

“일요일 날, 집에 있어. 서윤이 오프야.”

“아, 알았어요.”

기욱은 더 말하지 않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병원 내 행사는 별 탈 없이 끝났다.

* * *

이른 새벽부터 들리는 물소리에 서윤은 하품하며 거실로 나왔다. 거실 불을 켜자 화장실에서 나온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하암, 서진아 어디 가?”

“과제 때문에……. 학교 도서실.”

“아, 그래? 잘 다녀와.”

서윤은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따라 마셨다. 잠바를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하던 중 서진이 몸을 살짝 돌려 서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누나 있잖아.”

“왜?”

“나 오늘 학교 가는 거 말이야. 혹시 기욱 형님한테 전화 오면 그냥 집에 있다고 말해 주면 안 돼?”

“오빠한테?”

“그냥, 나갔다고 말하지 말아 줘.”

답지 않은 서진의 완곡한 부탁에 서윤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을 믿은 서진은 가방을 챙긴 뒤 밖으로 나왔다. 문 너머로 시헌의 차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근 뒤 시헌의 차에 탔다. 차가 출발했음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형님한테 전화했었어?”

“응.”

“뭐라 그랬는데?”

“그냥, 별말 안 했어.”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기욱에게 괜히 서진과의 관계가 들통나 좋을 건 없었다. 참다못한 시헌이 얼마 가지 못해 도로 한쪽에 잠시 차를 댔다. 안전벨트를 푼 시헌은 몸을 옆으로 틀어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헌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던 서진은 시헌의 팔을 잡아당겨 키스했다. 서로의 혀가 섞이며 녹아들 때마다 며칠 동안 쌓였던 앙금도 같이 녹는 것 같았다. 시헌의 손이 서진의 가슴 근처에 닿았고, 서진의 손 또한 시헌의 가슴 위에 있었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시헌과 눈을 마주쳤다. 박기욱과 비슷한 검은 눈동자지만, 그 무게는 사뭇 달랐다.

“시헌아.”

어린 시절부터 줄곧 불러 왔던 그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왜?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낯간지럽기만 했다. 차 안이라는 장소는 의미가 없었다. 시헌의 가슴이 뛰는 만큼 제 가슴도 똑같이 뛰고 있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몸을 숙여 시헌의 가슴에 제 얼굴을 묻었다. 시헌은 말없이 서진을 안았다.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차라리 박기욱이 아니라 박시헌이었으면 좋았을걸. 시헌과의 이런 시간이 언젠가는 깨질 한순간의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진은 시헌을 원했다.

“사랑해.”

이 시절, 이 순간 차 안에서 했던 고백만큼은 두말할 것도 없는 서진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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