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박기욱 X 강서진] 봄아, 아름다운 나의 봄아
「다음 주 토요일, 서윤이 부산 내려가.」 오전 9:23
「들었어?」 오전 9:55
「답장 안 해?」 오전 10:30
하필이면 1교시부터 연강이었던 서진은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서진은 책상 밑으로 손을 넣은 뒤 휴대폰을 만졌다. 고등학교 때 몰래 휴대폰을 하던 습관이 남아 있었다. 고작해야 한두 시간 답장을 안 보낸 것 아닌가.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이런 일에 집착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기욱은 서진이 일부러 연락을 무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동이 왔지만, 서진은 강의를 듣는다고 핑계를 대고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학생이라고 해도 강의 시간에 휴대폰 만지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아무렴 이제라도 쉬는 시간이 되었으니 답장을 보내면 될 일이었다.
서윤이 고등학교 시절 부산으로 이사를 간 친구를 보러 간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참 이상하지. 만약에 1박 2일로 놀러 간다는 사람이 서윤이 아니라 자신이면 기욱은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학교에서 가는 MT도 썩 달가워하지 않았던 기욱이지 않은가. 집착해야 할 대상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연강이었어요.」
「저도 알아요.」
「왜요?」 오전 10:57
서진이 휴대폰을 채 닫기도 전에 기욱에게 답장이 왔다.
「서윤이 데려다줄 거야. 너도 같이 내려갔다가 올라오자.」 오전 10:58
이 인간 일 안 해? 마치 미리 써 두고 답장이 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보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알았어요.」 오전 10:59
어차피 처음부터 서진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다시 교수님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기욱과 연락을 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서진은 억지로라도 강의에 집중했다.
* * *
한 달이 지나니 대학 생활에도 그럭저럭 적응됐다. 강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강의실을 나온 서진은 시헌과 마주쳤다. 우연히 마주친 것을 가장하고 싶어 한 듯싶었지만,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다. 서진이 나오기 무섭게 시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서진에게 달려갔다.
설마, 시헌이 저와 같은 H대 의대에 진학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재수했다는 사실도, 집안이 그러니 어딘가의 의대에 들어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같은 대학교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박시헌이라면 형과 누나, 그리고 집안의 입김이 센 J대에 진학할 줄 알았다.
시헌이 왜 J대가 아닌 H대에 진학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중학교에 이어 끊겼던 인연이 이어지려 하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요 근래 유심히 지켜본 시헌은 마치 옛 첫사랑을 만난 사람처럼 해맑았다. 고등학교 때도 아주 얼굴을 안 본 게 아닐 텐데. 같은 대학이라는 게 기쁘긴 기쁜 모양이었다.
“서진아!”
“…….”
“점심 먹을 거지? 같이 가자.”
“아니, 괜찮아.”
“내가 사 줄게. 여기 맛있는 데 알아.”
“괜찮다고.”
서진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헌을 무시한 채 사물함에 전공 책을 집어넣었다. 시헌은 자신과 달리 사람이 붙는 타입이었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헌을 좋아했고, 시헌의 옆에 있으려고 했다. 그런 시헌과 비교해 서진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랑 다르게 친구가 없어도 학교생활을 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적응됐다 뿐이지 주변을 겉도는 동기들은 서진 말고도 여럿 있었다. 서진이 계속해서 거절하자 시헌은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였다. 재수하는 사이에 머리라도 어떻게 된 건지 왜 이런 귀여운 척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
“같이 먹자.”
시헌의 목소리는 쫓겨난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 못한 동기 하나가 비교적 친한 시헌에게 내버려 두라며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지나간 동기 말대로 내버려 두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시헌과 식사를 하는 것 이상으로 주목을 받는 것이 싫었던 서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사는 거다?”
“응. 그럼!”
서진의 대답에 시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사실은 슬픈 표정을 지었던 것도 연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 * *
시헌은 서진을 데리고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식당으로 들어갔다. 대기까지 서야 했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도 좁은 식당에 가득 찬 사람 만큼이나 알차게 나온 음식이 맛이 있었다. 어쩌면 요즈음 가장 잘 먹은 점심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식사를 끝낸 서진은 먼저 나가 있겠다며 자리를 떴다. 서진이 나간 뒤 시헌은 계산을 했다. 나이가 비슷한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카드와 함께 돌아온 영수증을 주머니에 구겨 넣는 시헌을 불렀다.
“손님, 휴대폰 두고 가셨어요.”
“감사합니다.”
시헌은 그 휴대폰이 서진의 것이라는 걸 알고 재빠르게 가지고 나왔다. 들어올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줄은 길었다. 밖으로 나온 시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건너편 건물의 틈 사이에서 담배를 피우던 서진이 손을 흔들었다. 시헌이 서진에게 다가갔다.
후, 담배를 내뱉는 솜씨가 한두 번이 아닌 듯싶었다. 시헌은 담배를 피우는 서진은 익숙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현정의 담배를 빼앗아 담배는 안 된다며 설교를 늘어놓던 기억들이 엊그제 같았다. 그 시절엔 교복을 입던 날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줄 알았다.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날린 서진은 뒤늦게 시헌의 시선을 느꼈다.
“뭘 그렇게 봐?”
“그냥. 너도 많이 달라졌구나 해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시헌이 뭘 생각하는지 서진도 모르지 않았다. 은소의 죽음하며 J대 병원 응급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살아 있으니, 어떻게든 살기 위해 하루하루 발버둥을 칠 뿐이었다. 담배를 끄는 서진을 본 시헌은 잊고 있었다며 손에 쥔 서진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거, 두고 왔더라.”
“맞다. 그만…….”
“아….”
휴대폰을 넘겨받던 서진의 손이 미끄러졌다. 쩍 소리를 내며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바닥에 돌이 있어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안색이 어두워진 서진은 혹시나 하고 재빨리 몸을 숙여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놔…….”
“괜찮아?”
“괜찮아 보이냐?”
액정 필름 너머로 액정이 금이 가다 못해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어떻게 이렇게 깨질 수 있는 거지? 액정화면에 불은 들어와도 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불빛만 연속으로 이어졌다. 재수 끝나고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휴대폰을 이렇게 허무하게 깨 먹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지금 몇 시야?”
“1시 45분.”
휴대폰 대신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시헌이 대답했다. 휴대폰은 휴대폰이고 강의는 강의였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 서진은 액정이 나간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시헌과 함께 강의실로 돌아왔다.
강의 시작 5분 전이라 자리가 거의 차 있었다. 서진은 얼떨결에 시헌과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됐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서진의 휴대폰을 쥐고 있었던 시헌은 죄책감이 들었다.
“서진아.”
“…….”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진이 시헌을 노려봤다. 시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지금의 서진은 상당히 예민했다. 짜증이 나면 예민해지는 건 성인이 된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서진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했다.
“학과 공지 같은 거 있으면 서윤 누나한테 통해서 연락해 줄게.”
“지금 그게 문제가…….”
“미안.”
“됐어.”
원인을 따지자면 휴대폰을 두고 나온 자신, 시헌이 건네줄 때 한눈을 팔고 똑바로 받지 않은 제 잘못이었다. 서진은 이런 일로 시헌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죄책감은 고등학교 시절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일주일 뒤 주말을 보낸 서진은 여느 때처럼 강의실로 들어왔다. 고치려고 알아봤으나 액정이 깨진 것으로도 부족해 메인보드까지 나간 휴대폰은 새로 사는 게 더 쌌다. 서진은 빈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하필이면 마음에 드는 자리라고는 시헌의 옆자리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맨 앞이나 맨 뒤는 싫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시헌은 서진을 보며 의자를 발끝으로 살짝 건드리고 있었다. 저 얄미운 녀석. 재수하면서 공부를 한 게 아니라 사람 약을 올리는 법만 배운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의자에 앉기 무섭게 시헌이 말을 걸었다.
“휴대폰 고쳤어?”
“아니.”
“그러면? 새로 사? 번호는 그대로야?”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시헌답지 않게 질문이 많아 서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오전 강의 끝나고 가지러 갈 거야.”
“같이 가자.”
“왜 따라오는데.”
“점심 사 줄게.”
“내가 애야? 먹을 걸로 유혹하게?”
“그래서 싫어?”
“시, 싫지는 않은데. 어쨌든 나도 돈 있어.”
돌이켜보면 저번주 내내 시헌에게 얻어먹기만 했던 서진은 양심이 좀 찔렸다.
“점심 같이 먹을 거지?”
“어디서 먹을지나 생각해 둬.”
“응.”
“강의는 제대로 들어라.”
“알았어.”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시헌이 웃고 있는 걸 본 서진은 별걸 가지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강의가 끝나고 서진은 시헌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시헌이 추천해 주는 가게는 대체로 맛이 좋았다. 가끔 줄을 오래 서야 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학교 인근의 대리점에서 개통이 된 새 휴대폰을 받았다. 다행히 전화번호부는 살릴 수 있었다. 조금 일찍 강의실로 돌아온 서진은 계속 휴대폰을 만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해 단톡방도 들어가고, 하나둘씩 정리를 했다. 아직 강의 시각까지는 널널하게 남아 있던 서진은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머, 서진아. 휴대폰 고쳤어?
― 응. 이참에 번호도 바꿨어.
― 이번엔 고장 내지 말고.
― 미안해. 이걸로 저장해 줘.
― 아, 맞다. 누나 오늘 스케줄이 좀 바뀌어서 저녁에 출근해.
― 알았어. 그……. 아니야. 그냥, 내일 보자.
서진은 서윤과 전화를 끊은 뒤 한숨을 쉬었다. 기욱에게 대신 말 좀 해 달라고 하려던 찰나, 옆에 있는 시헌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를 끊은 서진이 시헌을 흘끗대자 시헌은 못 들은 척 이어폰을 꼈다. 다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한마디 할까 고민하던 서진은 한숨을 쉬며 남아 있는 휴대폰을 계속 만졌다.
* * *
시험 기간이라 강의가 끝나고 곧장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도서관에서 밤샘할 계획이었다. 자리를 잡고 짐을 풀기 무섭게 기욱에게 전화가 왔다. 기욱은 서진이 시간표를 짜기 무섭게 받아 간 사람 중의 하나였다. 차마 전화를 씹을 용기가 없었던 서진은 마지못해 기욱의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너 번호 바꾼 거 왜 말 안 했어?
― …….
― 말하려 했어요.
― 가장 먼저 연락했어야지.
생각해 보면 기욱이 어떻게 바뀐 제 번호를 알았는지도 의심이 됐다. 좋든 싫든 알아서 연락해 줄 텐데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한지 모르겠다.
― 어차피 누나 통해서 다 알았으면서.
― 그래서?
― 뭐가 그래서예요?
― 잘했냐고. 네가.
휴대폰임에도 기욱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 불편한 말투가, 뭘 잘했는데 뻔뻔하게 구냐고 서진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진은 이를 꽉 악물었다.
― 저 잘못한 거 없는데요.
― 어디야?
― …….
― 강서진 너 지금 어디냐고.
도대체 이 사람은 뭐가 문제라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도서관 밖으로 나와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서진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 학교 도서관이요.
― 서윤이 나이트 근무야.
― 들었어요.
― 두 시간 내로 갈 테니까 거기서 가만히 기다려.
― 저 시험 기간이라고 했잖아요.
― 두 시간 동안 공부하면 되잖아.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아, 알았어요.
입 아프게 싸워서 뭐 해. 어차피 오지 말란다고 안 올 사람도 아니었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서진은 거칠게 라이터를 켰다. 이놈의 라이터는 꼭 이럴 때 기름이 떨어져 지랄이다. 탁탁, 손톱이 까질 정도로 부싯돌을 돌린 뒤에야 간신히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담배를 끈 서진은 이를 악문 채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너…….”
자리로 돌아오니 비어 있는 제 앞자리에 시헌이 앉아 있었다. 이 넓은 도서관에서 이런 우연이 있을 리 없었다. 제 가방인 건 또 어떻게 알고 와서 앉은 건지 누가 박기욱 동생 아니랄까 봐 눈썰미 하나는 좋았다. 도서관이라 시끄럽게 할 수도 없었던 서진은 눈을 마주친 시헌의 시선을 무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할 공부는 많았고, 기욱이 데리러 오기 전까지 2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정확히 2시간이 되자 앞에 놓인 휴대폰의 불빛이 반짝였다. 시헌이 기욱의 번호를 볼까 서진은 다급하게 전화를 껐다. 기욱에게 곧바로 답장이 왔다.
「내려와.」 오후 9:23
딱 30분만 더 하고 싶은데, 이 이상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서진을 시헌이 이상하게 바라봤다. 복도로 나온 서진은 근처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셨다.
“서진아.”
등 뒤로 저를 부르는 시헌의 목소리에 서진이 미간을 구겼다. 커피를 전부 비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을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캔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차라리 그냥 바로 내려갈 걸 후회가 들었다.
“어디 가?”
“집에.”
“재혁이가 너 오늘 날샌다고 그러던데.”
강재혁, 그놈의 주둥아리가 문제다. 날을 샐 계획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계획은 계획일 뿐 틀어질 수도 있었다. 서진은 괜히 목을 잡으며 피곤한 척 굴었다.
“그냥, 집에서 공부하려고.”
“차 태워다 줄게.”
“막차 안 끊겼어.”
“피곤해 보이는데, 나도 집에 갈 거야.”
집에 가긴 무슨. 박기욱만 아니었으면 밤을 새울 생각이었던 자신과 달리 시헌은 어디서든 잘하는 사람이었다. 잘 오지 않는 도서관에서 우연을 가장하고 제 앞자리에 않는 시헌이 저와 있기 위해서 따라서 온 걸 모를 리 없었다. 박기욱처럼 대놓고 하는 집착은 아니더라도 시헌이 하는 행동이 느낌만 다를 뿐 집착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진의 기억 속 시헌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재수하는 1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달라진 건 시헌뿐이 아닌지도 모른다. 시헌이 평소와 같고 그런 시헌을 받아들이는 제 태도에 변화가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서진은 지금의 시헌이 부담스러웠다. 은소가 죽고, 더 이상 교복을 입던 그 시절이 아닌 지금 두 사람은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서진은 제 손을 붙잡으려는 시헌의 손을 쳐 냈다. 아래층에 박기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헌에게 기욱과 자신의 관계가 발각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네가 박기욱의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덜했을 텐데. 씁쓸한 기분을 뒤로한 서진은 억지로 시헌을 노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어, 미… 미안.”
한동안 같이 다니고, 밥도 먹고 독서실에서 공부까지 했던 시헌은 서진의 반응이 갑작스러웠다. 나름 전처럼 잘 지내 보려 했는데 왜인지 서진은 여전히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서진은 왜 아직도 상처를 받은 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풀이 죽은 시헌의 모습을 본 서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아, 재수 기간 시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다. 성인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우리의 관계는 왜 고등학교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나도…… 미안해.”
“아니야.”
“갈게. 내일 보자.”
“응.”
서진은 등을 돌린 채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일 초라도 빨리 시헌과 멀어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박기욱을 볼 자신이 없었다. 도서관을 나와 정문 쪽으로 향했다. 밤이라서 그런지 차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서진의 휴대폰에 전화가 왔다.
― 어디예요?
― 건너편.
기욱이 시키는 대로 몸을 돌렸다. 바로 건너편에 검은색 세단에 몸을 기대고 뭔가를 마시고 있는 기욱이 보였다. 병원에서 나온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한 정장 차림의 기욱은 근처를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될 정도로 눈에 띄었다. 서진이 작은 건널목을 건너가 기욱에게 다가갔다. 기욱이 타라며 눈치를 줬고, 서진은 조수석 쪽에 앉았다. 잠시 뒤 짧은 통화를 마친 기욱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차 안의 조명을 밝힌 기욱은 서진에게 뭔가를 건넸다. 기욱이 마시는 것과 같은 인근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산 커피였다.
“약간 식긴 해도 먹을 만해.”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뚜껑을 열었다. 매일 캔커피만 마시다 보니 이런 아메리카노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댔다. 기욱의 말대로 식어서 그리 뜨겁지는 않았다. 색은 커피라고 하기보다는 간장색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안전띠를 맨 기욱이 천천히 출발했다. 그저 간판들을 보며 J대 병원 근처를 향하고 있다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기욱은 J대 병원을 지나 일부러 10분 정도 떨어진 번화가 근처에서 속도를 늦췄다.
“병원에 괜찮은 모텔 있어.”
“모텔요?”
“그럼 집에 갈까?”
얼핏 보면 별거 아닌 말이지만, 그 의미에는 다른 뜻이 숨겨져 있었다. 시헌이 집에 들어올지 말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윤이 없는 집에서 그 남자 친구와 남동생이 몸을 섞는다니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모… 모텔로 가요.”
처음부터 서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기욱은 모텔 1층 주차장에 차를 댔다. 들어갈 줄 알았던 기욱이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손가락질했다.
“술 사 갈까?”
“저 술은 좀…….’
“조금만 마셔.”
“알았어요.”
서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기욱이 저에게 술을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재수할 때는 좀 나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달리 거절할 변명거리도 없었던 서진은 기욱과 함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기욱이 술을 고르는 사이 서진은 건너편에 있는 간식거리를 고르고 있었다. 서진이 적당히 과자 몇 개를 고르고, 기욱이 소주와 맥주, 그리고 술안주에 적당한 육포 등을 골랐다.
편의점 자체는 기욱과 서진이 먼저 들어왔으나 여자들이 두 사람보다 먼저 술과 안주를 골랐다. 그게 그거였던 서진은 먼저 계산하라며 뒤로 비켜줬다.
“아, 고마워요.”
서진의 배려에 여자 하나가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서진과 나이 차이가 썩 많이 나 보이지는 않았다. 여자들이 나가고 뒤를 이어 기욱과 서진이 계산을 했다. 편의점 봉투를 든 서진을 뒤로하고 기욱이 카운터로 가 키를 받았다.
살짝 나이 차이가 있긴 해도 성인 남자 둘이 술을 마시러 모텔을 찾는 것 자체는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서진은 기욱과 함께 3층의 방으로 들어갔다. 기욱의 말대로 모텔이라고 하기보다는 펜션에 가까운 깔끔한 느낌이 났다. 아무 생각 없이 편의점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기욱이 서진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서진의 몸이 휘청거렸다.
“무슨…! 뭐 하는 거예요?”
“너 뭐 하는 짓이야.”
“그,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라구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 여자한테 꼬리 쳤잖아. 안 비켜 줘도 됐을 거 비켜 준 이유가 그거야?”
여자? 무슨 여자? 기욱은 그제야 기욱이 말하는 여자라는 게 편의점에서 봤던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서진은 있는 힘을 다해 기욱을 밀어냈다.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냥 비켜 준 게 다예요.”
“눈 마주쳤잖아. 대학 들어가니까 좋은가 보지.”
“아, 아니에요…….”
“뭐가 아닌데?”
기욱이 성큼성큼 서진에게 다가왔다. 얼어붙은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기욱에게 붙잡힌 손이 멋대로 올라와 기욱의 뺨에 닿았다. 손을 따라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같은 검은색 눈동자인데 어찌 이리 다른지 모르겠다.
“요즘 내가 서윤이한테 너무 잘해 줬네.”
“아……. 하, 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그런 눈으로 안 봤어요. 제발….”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하얗게 질렸다. 왜 이러는 거야. 다급해진 서진은 기욱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매달렸다.
“제발, 누나한테 그러지 마… 말아 주세요.”
“강서진 고개 들어. 꼬리 친 거잖아. 아니야?”
“맞아요…. 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누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서진의 눈가가 촉촉하게 고였다. 기욱은 이런 식이었다. 서진이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부터는 위기의식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집착의 수위가 더 높아졌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이 기욱에게 있어서는 불만의 요소였다.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넘겼다. 눈을 뜨자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욱의 싸늘한 시선이 온몸을 따갑게 찔렀다.
“연락 똑바로 받고, 답장 제때 해.”
“네. 그럴게요.”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내 앞에서 다른 사람한테 꼬리 치면.”
“…….”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서진은 몇 번이나 명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가만두지 않겠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강서윤, 서진에게 있어 강서윤은 세상 전부였다. 기욱은 그런 서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저에게 이런 식으로 구는지는 몰라도 서진은 자신이 기욱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머리채를 놓기 무섭게 서진의 몸이 한쪽으로 쓰러졌다. 기욱은 입고 있는 정장 재킷을 벗어 벽에 걸어 뒀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덤덤하게 입술을 뗐다.
“술 한잔하자.”
“아, 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어색한 분위기에 서진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뭔 소주를 이렇게 많이 사 온 것인지 모르겠다. 의사들이 대체로 술을 좋아하는 건 이해를 했다. 서진의 동기 중에서도 벌써 될 싹들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두 명이 7병은 좀 정도가 과했다. 마실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맥주 안 샀어요?”
“소주 마셔.”
“소주 컵은요?”
“종이컵 샀잖아.”
“…아, 네.”
서진은 비닐봉지 안쪽에 있는 종이컵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시작부터 소주 7병과 종이컵을 사는 경우는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소주 컵을 꺼낸 기욱이 서진의 앞에 놓인 종이컵에 가득 소주를 따랐다. 정확하게 넘치지 않을 정도로 끊어 따른 것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님이 분명했다. 당연하겠지, 이제 1학년인 서진과 교수인 기욱은 술자리에서도 경험치가 달랐다. 서진은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은 소주를 내려봤다. 차마 들지 못한 채 종이 소주 컵을 손으로 쥐었다.
“이걸…….”
“첫 잔은 원샷이야.”
“모, 못 마셔요.”
서진이 절대 무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선배들 끼고 마시는 술자리에서도 이런 짓은 안 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기욱은 서진의 앞에 놓인 종이컵을 가져와 자신이 전부 비웠다. 저게 들어갈까 싶었는데, 기욱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채 소주를 마셨다. 다 마신 소주 컵을 구겨 바닥으로 내던졌다.
“만족해?”
“그런 의미가…….”
“똑같이 마셔 준다고 했잖아. 하아, 내려와.”
역시 모텔의 의자는 불편했다. 기욱은 서진과 함께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기욱이 다시금 서진의 종이컵에 술을 따랐다. 마시고 싶지 않은데, 먼저 똑같은 양의 술을 마신 기욱을 두고 더 뺄 수도 없었던 서진은 이를 악물며 소주를 비웠다.
“크읍… 콜록….”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바닥에 손을 짚은 서진은 목을 붙잡고 헛구역질했다. 간신히 다 넘기는 데는 성공했으나 속이 역해 몇 번이나 입을 막았다. 소주인지 타액인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기욱이 서진에게 종이컵 하나를 더 건넸다. 마찬가지로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물이야.”
서진은 혀로 끝을 살짝 찍어 맛을 본 뒤에야 물을 비웠다. 갑자기 들어온 술에 훅, 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기욱이 자신의 앞에 놓인 비어 있는 소주 컵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말하지 않아도 따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던 서진은 남아 있는 소주를 기욱의 종이컵에 엎었다. 정확하게 절반이 조금 넘는 양이 따라졌다. 제 컵에 따라진 소주를 본 기욱은 조용히 새 소주를 뜯어 서진이 자신에게 따라 준 만큼 따랐다.
“나눠서 마셔도 돼.”
“거참……. 고맙네요.”
이미 먹이고 싶은 만큼 먹였으면서 이제 와서 선심 쓰듯 말하는 기욱이 얄미웠다. 잔을 부딪친 서진은 기욱과 함께 술을 마셨다. 달리 할 말도 없었던 탓에 계속해서 따라 주는 술을 생각 없이 부어 마셨다.
“흐어… 그만… 윽…, 끅… 그만 주세요.”
술에 잔뜩 절은 서진은 그만 먹이라며 모기를 잡듯 허공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여섯 병이 넘었을 때까지는 기억했는데, 나머지 한 병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근데 여섯 병을 어떻게 다 마셨지? 여섯 병이 빈 병이 맞긴 한가?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딸꾹질한 서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병을 손가락으로 셌다.
“…다섯 병? 우리 다섯 병밖에 안 믁었어요?”
“아홉 병째야.”
기욱도 주량을 살짝 넘긴 건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한 서진을 보고 싶어서 소주를 샀는데, 서진이 생각보다 꼴딱꼴딱 잘 넘기는 탓에 기욱도 계속 먹게 됐다. 거기에는 한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 기욱의 상황도 한몫했다. 쟤는 왜 중간에 나갔다 들어온 건 쏙 빼먹고 이야기하는 건데?
기욱도 더운 모양인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들을 하나씩 풀었다. 머리를 가누지 못한 서진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대박, 와! 여덟 병이나 마셨어요? 근데 첨에 일곱 병 사짜나요.”
“편의점 갔다 왔잖아. 그리고 아홉 병이라고.”
“먼 소리예여. 여덟 병이라면서요. 편의점은 또 언제 갔다 왔어요?”
“같이 나갔다고 했잖아. 너 가서 아이스크림 사 왔고.”
“아이스크림이! 어디! 있는데요…….”
이상한 데서 힘을 주고 난리야. 기욱도 술에 취했는지 서진의 말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게 아이스크림 어떻게 했더라? 먹었나? 냉장고에 넣어 뒀나? 비틀거리며 일어난 기욱이 작은 냉장고 안을 뒤졌다.
“냉장고 안에 암것도 없거든요.”
“알아!”
기욱은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에 서진의 무릎 밑에 있는 아이스크림 비닐봉지를 찾을 수 있었다. 기욱이 서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네가 다 먹었잖아.”
“저 먹은 기억 없거든요?”
“밑에 쓰레긴 뭔데.”
“……그러게요.”
“뭐가 그러게야, 한잔해.”
기욱이 마지막 남아 있는 소주를 서진의 컵에 따랐다. 종이컵 가득 먹는 것도 힘들어했던 주제에 이제는 그냥 따라 주는 대로 전부 다 마셨다. 기욱도 남아 있는 잔을 비웠다. 이젠 정말 소주가 없었고, 술에 취해 밖에 나갈 기운도 없었다. 기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은 여전히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있었다.
“강서진, 일어나.”
“으어….”
서진이 정신없이 몸을 비틀거렸다. 기욱이 팔을 잡아 일으키기 무섭게 기욱 쪽으로 안겼다. 툭툭, 손으로 뺨을 가볍게 두드려 보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완전히 꼴은 건 아닌 듯싶은데, 내일 제대로 기억이나 할지는 의문이었다. 기욱은 서진을 안아 침대에 누웠다.
“하… 으어….”
“후우… 하, 팔 벌려.”
인형이 된 것처럼 시키는 대로 팔을 옆으로 벌렸다.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옷을 하나씩 벗겨 냈다. 추운 모양인지 괜히 밑에 있는 이불을 주워 아래를 가렸다. 마음대로 하라지. 손톱을 세운 기욱은 서진의 유두를 살살 간지럽혔다. 자극할 때마다 조금씩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입으로 살살 가져다 대니 단맛이 났다. 위쪽으로 들뜬 숨소리가 들렸다. 느리게 위로 올라가며 입술을 덮었다. 쪽쪽거리며 키스를 할 때마다 서진이 몸을 배배 꼬았다.
“하으… 응….”
“서진아, 좋아?”
“…흐… 읏….”
모르겠다. 술기운과 자극에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하며 살결을 지나가는 손길까지 사소한 것들이 평소보다 더 자극적으로 서진을 괴롭혔다. 기욱은 땀에 젖은 서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어차피 할 거면 즐기는 게 좋잖아.”
“하으…….”
기욱의 손이 이불 안쪽으로 들어가 서진의 허벅지를 옆으로 벌렸다. 마치 구체 관절 인형이 된 것 같다. 기욱이 팔을 꺾으면 꺾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몸이 움직였다. 즐겨? 뭘? 술에 취해 의식이 혼미한 서진은 기욱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 자극과 열기를 누군가 해소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진의 벗은 몸을 차분히 유린하던 기욱은 매트 위로 팔을 짚으며 서진을 내려다봤다.
“후…….”
요즘 들어 강서진에 대한 집착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는 걸 기욱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짜증이 나는걸. 재수할 때야 그러려니 하고 참을 수 있어도 새내기가 된 서진이 제가 모르는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겠다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났다. 한두 개만 틀려도 H대가 아닌 J대에 지원해 보라고 했을 텐데, 정말로 수능을 다 맞고 H대를 지원하겠다고 하니 말릴 만한 건수도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제 허벅지를 붙잡도록 움직였다.
“벌려. 더.”
“하… 으읏….”
“옆으로 더 벌리라고, 그래 그렇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진은 그저 기욱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허벅지를 꽉 잡아 옆으로 벌렸다. 치부가 그대로 드러나자 괜히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이다음에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하기도 전에 기욱은 서진의 페니스를 제 입에 머금었다. 귀두 끝을 말아 올리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에 서진의 몸이 뒤틀렸다.
“하응, 응…….”
누군가, 특히 남자에게 펠라를 해 준 게 얼마 만이더라? 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이렇게 펠라를 하면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빨았던 그 개 같은 선배의 좆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지내는지는 몰라도 죽었다는 말은 들은 게 없으니 어딘가에서 알아서 살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제 펠라는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보다 특별했다. 이제는 서진이 아니면 이런 걸 할 사람도 없지만. 기욱은 혀와 손으로 서진의 페니스를 천천히 발기시켰다. 본능적으로 허벅지를 붙잡던 손 하나가 머리 위로 올라왔다.
“하, 아아… 으응, 아읏….”
서진의 신음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사람과 몸을 섞었지만 강서진 같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듣기 싫은 신음이 아니라 듣는 것만으로도 넣고 싶어지는 목소리였다. 단순히 강서진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하기보다는 그동안 참아 왔던 보상심리가 한꺼번에 터진 것도 한몫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침한 눈으로 바라보는 너를 상상 속에서는 얼마나 범하고 또 범했는지 생각하기 힘들 것이었다. 설령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넜다 해도 기욱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강서진을 가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기욱에게 강서진은 그저 그렇고 무료한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단비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하으, 으응… 읏….”
슬슬 사정할 모양인지 서진의 숨이 가팔라졌다. 얼굴이 점점 붉어진 서진은 기욱의 입안에서 사정했다. 입안으로 묵직한 서진의 정액이 묻어났다. 몸을 일으킨 기욱은 입을 막으며 서진의 것을 음미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썩 좋은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넘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강서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욱은 제 사람에게는 관대했다. 그러나 제 사람을 정하는 기준은 오직 박기욱에게만 있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필요와 욕구 때문에 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강서진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정작 서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욱은 서진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까도 까도 질리지 않는 사람은 서진이 처음이었다.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액을 닦아 낸 기욱은 미리 사 온 젤을 서진의 배꼽 아래와 허벅지에 떨어트렸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놀라 피부가 부르르 떨렸다.
“괜찮아.”
“흐… 으읏….”
“금방 좋게 해 줄게.”
서진은 아직 섹스에 익숙하지 않았다. 싫다며 울며불며 매달리는 서진도 썩 싫은 건 아니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어차피 뭘 하든 기욱은 서진과 섹스를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인상 찌푸리고 하는 것보다 서로 기분이 좋은 게 훨씬 나았다. 최근 들어 스트레스가 쌓인 기욱은 서진이 평소처럼 구는 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가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날지도 몰랐다. 술을 먹인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귀엽네.”
서진의 목덜미를 핥던 기욱이 나지막이 속삭이며 몸에 묻은 젤의 범위를 점점 넓혀 갔다. 젤이 스며들 때마다 몸에 온도가 조금씩 올라갔다. 내뱉는 숨이 뜨거워 미칠 것 같았다. 몸 안에 갇혀 있는 열기에 온몸의 혈관이 팽팽하게 부풀고 있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조금씩 개척하고 있었다.
“하으, 아으읏…!”
“여기 좋아?”
“으하, 으으….”
“말해.”
“읏, 좋… 좋아. 하으, 미칠 것…….”
이런 자극은 처음이었던 서진은 그저 되는대로 몸을 맡겼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감각에 없었다. 손가락의 개수를 늘린 기욱이 서진이 느끼는 곳을 찌르며 위아래로 조금씩 진동을 했다. 기욱의 움직임에 맞춰 서진의 허리가 흔들렸다.
“허윽… 윽… 하앙….”
제 입에서 이런 신음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내뱉는 신음이 제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이어지는 쾌락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 어으윽….”
“후, 서진아. 일어나 봐.”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안았다. 여전히 들어가 있는 기욱의 손가락에 아래가 얼얼했다. 앞으로 들어왔던 손가락이 위로 올라오자 느낌이 색달랐다. 기욱이 서진의 입안을 천천히 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서진의 모든 것을 원했다. 서진의 이런 야한 모습도, 신음도 남에게 보여 줄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허리 움직여.”
“으어… 어떻게….”
기욱의 손이 서진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움찔거린 서진이 안에 있는 기욱의 손을 강하게 조였다. 그 상태로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잡은 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저 손가락일 뿐인데도 현기증이 났다.
“허으… 하….”
“보여 이거?”
기욱이 아래를 보라며 서진의 고개를 잡아 강제로 숙였다. 서진은 눈을 깜박이며 다리 사이의 풍경을 구경했다. 잔뜩 발기한 기욱과 자신의 페니스, 그리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기욱의 손가락이 들어가 있었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하얀 손가락이 깊이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보라고 해서 보고 있긴 한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하으… 응….”
기욱은 못 참겠다며 다급하게 손을 빼냈다. 갑작스럽게 나온 손가락에 놀랄 틈도 없이 양팔이 붙잡혀 앞으로 당겨졌다. 서진의 두 손이 기욱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떻게 해 줄까?”
“하는… 으….”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몸안에 가득 찬 열을 내릴 수 있는 거지? 그보다 왜 이렇게 뜨거운 거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페니스를 손으로 만지며 자극을 해 놓은 기욱은 빨리 말하라며 서진의 엉덩이를 꼬집었다.
“윽… 아파….”
“어떻게 해 달라고?”
그제야 기욱이 원하는 말을 눈치챈 서진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기욱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던 저 또한 기욱과 마찬가지로 남자였다. 부끄럼에 서진이 얼굴을 붉히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그런 서진의 반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순간의 부끄러움보다 열기를 내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뚝뚝 흘린 서진은 고개를 들어 기욱에게 애원했다.
“넣어… 아, 넣어 주세요.”
“착하네.”
매일 이렇게 얌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점점 올라오는 술기운을 뒤로한 기욱은 서진을 눕힌 뒤 거칠게 다리를 벌렸다. 서진의 손이 치부를 가리려 했으나 기욱이 손을 쳐 내는 속도가 더 빨랐다. 기욱은 자신의 페니스를 서진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힘 풀고, 숨 쉬어.”
“하아, 하아… 으….”
기욱이 시키는 대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힘을 풀기를 반복했다. 기욱의 페니스가 제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아픈 건 아픈 것이었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침대의 시트를 꽉 쥐었다. 벌어진 잇새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흐으… 윽… 끅….”
무서웠다. 거칠게 자신을 탐하는 박기욱도, 그리고 섹스라는 행위 자체에도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욱의 페니스가 자신을 가득 메울 때면 그 자극과 감촉에 그리고 박기욱에 익숙해질까 봐 더 무서웠다.
“왜 또 울고 그래?”
“으… 읏, 아파요….”
“안 아파. 후, 서진아.”
연인을 대하듯 나긋나긋하게 서진을 달래던 기욱이 별안간 서진의 무릎을 잡고 페니스를 완전히 밀어 넣었다. 끝까지 들어오자 정말로 온몸이 반 토막이 나는 것 같았다.
아무렴 오늘의 서진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기욱은 참아 왔던 울분을 토하듯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살이 닿는 소리가 날 때마다 목 끝에서부터 신음이 올라오며 서진의 작은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허 윽, 윽, 아응… 으… 윽….”
“윽, 강서진. 하아….”
아픔을 이기지 못한 서진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기욱은 몇 번이나 체위를 바꿔 가며 서진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더 쉽게 만족이 되지 않았다. 고통만큼이나 성욕 또한 무뎌진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보다 더 길고 강한 자극을 원했던 기욱은 서진을 계속해서 탐했다.
“아아, 아으… 아아! 아파… 흐윽….”
“아프긴. 후, 좋으면서.”
“모르겠어요. 흐윽, 몰라….”
이제 아픈 것인지, 아니면 기욱의 말대로 정말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기욱의 위로 올라왔다. 침대에 누운 기욱은 어설프게 허리를 움직이는 서진을 천천히 감상했다.
“후… 읏….”
기욱의 위에 올라탄 서진은 기욱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을 위로 올렸으나 그럴 때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 아래로 눌렀다. 엉덩방아를 찧듯 빠져나가려는 행위와 눌러 잡으려는 힘이 반복되면 될수록 괴로운 것은 서진이었다.
“움직이라고.”
“흐윽, 윽… 아파요. 하으, 으읏….”
아직 서진에겐 너무 일렀던 것일까? 아프다며 눈물을 흘리는 서진을 달랜 기욱이 허리를 살살 움직였다. 흔들리는 몸을 바로 잡기 위해 애를 쓴 서진은 기욱의 위에서 의식이 희미해질 때까지 신음을 흘렸다. 여전히 몸안에 있는 열은 빠져나갈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언제가 되면 이 열기가 사라질지 서진도 알 수가 없었다.
* * *
이른 아침 지방의 한 휴게소에 들른 서윤과 기욱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왔다. 기욱보다 한발 앞서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서윤은 뒷좌석에서 담요를 덮으며 세상모르고 자는 서진을 바라봤다. 사실 휴게소가 처음이 아니라 몇 번인가 서진을 깨웠으나 서진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윤은 서진이 도서관에서 밤샘을 한 줄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있으라고 그럴 걸 그랬네.”
“뭐, 잘 자잖아. 내버려 둬.”
운전석에 앉은 기욱은 서윤과 함께 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조수석 쪽으로 몸을 다가가자 서윤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기욱의 손이 서윤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서진이 자잖아.”
“그래도…….”
“싫어?”
기욱도 서윤과 마찬가지로 서진을 의식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느낌이 사뭇 달라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욱은 키스만 하자며 서윤을 계속 자극했다.
“우리 자기, 그냥 이대로 다시 서울 올라갈까?”
“아, 오빠 왜 그래. 부끄러워서 그렇지.”
능구렁이 같은 자식, 사실 두 사람이 나갔을 때부터 서진은 잠에서 깨어 있었었다. 완전히 깬 것도 아닐뿐더러 쭉 잤는데 일어난 척해 봤자 좋아질 게 없어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이 꼴이었다.
차 안이라 별다른 짓은 안 해도, 키스만으로도 충분히 자극됐다. 서진은 이를 악물며 눈을 더욱 질끔 감았다. 자신만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이 시절의 서진은 끝내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