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박기욱X강서진] 그때 그 시절 너
숨이 멎을 것 같다. 온몸의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들지 않았다. 멍하니, 그저 멍하니 방 안에 켜진 천장의 조명을 보며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의식했다. 지금이 밤인지, 아니면 낮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나는 누구지? 아주 조금씩 희미하게 흩어진 기억들이 떠올랐다.
박시헌, 그리고 박기욱. 시헌과 몰래 사귀었다는 사실이 기욱에게 발각되고 시헌과의 추억이 있었던 그 별장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몇 시간,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힘겹게 몸을 돌려 이불로 몸을 가렸다. 이불에 닿는 살결이 쓰라렸다. 온몸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나 있는 멍 자국들이 서진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서진은 이불을 머리까지 눌러쓴 채 끅끅대며 울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서진은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댔다.
어느 순간부터 우는 것을 포기한 서진은 닫혀 있는 문을 흘끗흘끗 쳐다봤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체감상 반나절 이상을 침대에서만 생활했던 탓에 바닥이 익숙하지 않아 무릎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팔을 짚으며 간신히 일어나 닫혀 있는 문 너머로 귀를 가져다 댔다.
“……”
인기척은 없었다. 기욱은 어딜 간 걸까? 몇 분 동안 숨을 죽이며 바깥을 예의주시한 서진은 안쪽에 나 있는 열쇠 구멍 사이로 손을 넣으며 발버둥을 쳤다.
“아아… 흐윽… 윽….”
열쇠 구멍으로 손을 넣어 보기도 하고, 방 안을 뒤적거리며 뾰족한 물건을 찾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기욱이 그런 물건을 서진과 함께 둘 이유가 없었다. 계속되는 폐쇄감에 서진은 미칠 것 같았다.
“제발… 아… 열어 주세요! 제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안심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구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마 없는 손톱으로 문을 긁던 서진은 또다시 제 풀에 지쳐 쓰러졌다.
* * *
도어락을 열고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노을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 거실을 비췄다. 커튼을 완전히 친 기욱은 안쪽 방을 흘끗댔다. 성큼성큼 다가간 기욱은 문고리 잡아 돌린 뒤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돌돌 말고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서진이 있었다. 기욱이 몸을 숙이자 서진의 눈꺼풀이 떨렸다.
“강서진.”
방 안으로 기욱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몇 시간,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사람의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저를 부르고 있음이 틀림없는 단어에 서진은 이를 악물며 눈을 꽉 감았다. 기욱이 확, 하고 서진이 덮고 있는 이불을 걷었다.
“자는 척하는 거 다 알아.”
“……”
“일어나지?”
몸을 숙인 기욱은 쪼그리고 있는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틈이라도 보고 있었는지 정신을 차린 서진이 무작정 열린 문 쪽으로 몸을 던지려 시도를 했다.
“이게! 어딜…!”
“아윽… 윽!”
이미 몇 번이나 당한 적이 있었던 기욱은 그럴 줄 알았다며 재빠르게 서진을 제압했다.
“놔요! 제발… 흐윽, 제발 내보내…… 으읍…!”
제정신이 아닌 듯 서진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반항을 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넘긴 뒤 입을 틀어막았다.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서진의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한 번만 더 그러면 확 묶어 버리는 수가 있어.”
“…….”
“대답 안 해?”
“…자, 잘못했어요.”
온종일 갇혀 있는 것도 끔찍해 죽겠는데 침대 위 어딘가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났다. 고개를 끄덕이는 서진에 기욱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서진의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저 멍하니 기욱을 올려다봤다.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별장을 나갈 수 있을까. 기욱의 손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일어나, 침대에 올라가 있어.”
서진은 반강제로 기욱이 시키는 대로 침대 위에 올라갔다. 가장 먼저 기욱이 던져 놓은 이불로 몸을 가렸다. 침대로 살짝 올라온 기욱이 서진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기욱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서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방 올게.”
“제발…….”
제발, 뭐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보내 달라고? 잘못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빌어야 기욱이 만족을 할 수 있을지 서진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침대의 시트를 꽉 쥐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진의 표정에 기욱은 걱정하지 말라며 나지막이 말했다.
“죽 데워 올 거야. 밥은 먹어야지.”
서진은 그제야 자신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분리된 공간에서는 배고픔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철컥, 기욱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서진은 덩그러니 방 너머에서 들리는 기욱의 발걸음 소리와 인기척에만 예의주시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잠시 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기욱이 다시 들어왔다.
쟁반에 외부에서 사 온 것 같은 죽을 데워 가지고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기욱은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기욱이 한쪽 벽에 내려놓은 검은색 서류 케이스가 보였다. 어쩌면 저 가방 안에 차 키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자연스럽게 기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욱은 서진이 앉아 있는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이리 와.”
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욱이 손짓하는 곳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마치 연인에게 하듯 수저로 죽을 저은 뒤 서진에게 내밀었다. 그 행동이, 분노에 이성을 잃으며 자신을 거칠게 범하던 기억과는 너무나 괴리감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제, 제가 먹을게요.”
“입 벌려.”
기욱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서진의 입 근처로 수저를 가져다 댔다. 이 이상 기욱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아질 게 없다고 판단한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 비어 있는 위장에 오랜만에 음식물이 들어왔다. 입안으로 퍼지는 묵직한 밥 알갱이를 씹는 둥 마는 둥 하며 넘겼다. 서진은 기욱이 주는 죽을 말없이 받아먹었다. 뒤늦게 죽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눈치챈 서진이 별안간 몸을 옆으로 틀더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우윽… 으으윽…!”
입안으로 들어왔던 죽이 입술을 타고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지만,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까지 짜낸 서진은 간신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소, 속이 안 좋아요.”
“……”
“화장실 좀……악!”
난데없이 기욱의 손이 서진의 뺨을 때렸다. 설마 뺨을 맞을 줄은 몰랐던 서진의 몸이 침대 한쪽으로 쓰러졌다. 기욱은 거의 다 먹은 죽 그릇을 한쪽으로 치운 뒤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몸을 일으키려던 서진은 갑작스럽게 올라탄 기욱에 의해 다시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기욱은 뺨 근처로 손을 대고 있는 서진의 손목을 옆으로 치워 냈다. 기욱이 때린 뺨이 빨갛게 부풀어 올라와 있었다. 기욱에게 붙잡힌 손목이 아파지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 방금, 일부러 토했지?”
“그… 그게…….”
당황한 서진이 애써 몸을 꼬며 기욱을 피하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 눌렀다. 기욱의 다리 사이로 살짝 열려 있는 문틈이 보였다.
“누가 문 보래?”
“자, 잘못했어요.”
서진은 그제야 기욱이 일부러 문을 끝까지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가방을 가져간다 해도 가방 안에 서진이 원하는 물건은 없을 가능성이 컸다. 저 가방조차도 일부러 서진의 눈에 잘 보이게끔 기욱이 계산을 해 내려놓은 것이었다.
기욱은 저를 시험한 것이었고, 서진은 그런 기욱의 덫에 보기 좋게 걸려 들어간 셈이었다.
“아… 아아,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서진은 어떻게든 기욱에게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기욱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에 서진은 점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갈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그렇게 도망치려 한 게 기욱에게 더 좋은 자리를 내주고 만 셈이 되었다. 서진의 팔을 뒤로 꺾어 누른 기욱은 등 쪽으로 혀를 가져다 댔다. 기욱의 손길이며 혀가 지나간 자리가 인두에 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 으윽… 아, 흐으…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만… 으….”
“뭘 잘못했는데?”
“다, 다요. 흐윽, 시헌이랑 모… 몰래 사귄 거랑 말 안 들은 거랑 전부다. 아아… 으흑…”
베개에 얼굴을 묻은 서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든 좋으니까 섹스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온몸이 뚫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쾌락에 젖어 가는 제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기욱은 용서할 생각이 없는 듯 서진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뭘 잘못했는지 알면서.”
“그만… 으윽… 윽….”
“감히 도망을 가려 해?”
서진의 안을 벌린 기욱이 손가락 두 개를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 예고 없이 들어온 손가락은 정확하게 서진이 느끼는 지점을 누르고 있었다.
“아… 으으….”
그나마 나았던 목이 다시 갈라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욱은 서진이 어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억지로 사정을 참고 있을 때 서진의 모습은 기욱을 미치게 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있는 페니스를 가볍게 주물러 주자 피가 쏠린 듯 붉게 변하며 금방 꼿꼿하게 섰다.
“하… 으으… 어흑…! 그만… 윽….”
“뭘 또 참아. 참긴.”
기욱이 손가락을 살살 흔들었다. 아픈데, 미칠 것 같은 쾌감에 갈 곳 없는 손이 침대 헤드 너머 벽을 손톱으로 긁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허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강서진은 꽤 피부에 민감한 편인데 특히 사정 직전에 허리를 쓸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하으으으… 아으… 아응….”
기욱의 예상대로 갑작스럽게 등을 부드럽게 지나가는 손길에 놀란 서진이 몸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어렵게 참아 왔던 절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허벅지와 벽을 짚고 있는 손이 벌벌 떨리며 서진의 몸이 침대 앞쪽으로 확 쓰러졌다. 기욱의 손이 우악스럽게 서진의 발목을 붙잡아 아래로 이끌었다. 차마 기욱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서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애원했다.
“하아… 으… 그만해요… 흐윽….”
“손 치워.”
“제발… 아아아악! 때리지 마세요. 아… 으윽…”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해도 기욱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 위에 있는 기욱이 허공으로 손을 들자 놀란 서진은 재빨리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웠다. 금방이라도 서진을 때릴 것처럼 내려온 기욱의 손이 붉게 부푼 서진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착하네.”
“흐… 으윽….”
아래로 내려간 손이 입술 근처에 닿았다. 손가락이 입안을 밀고 들어왔다. 뭘 하고 있냐는 듯 기욱이 서진의 페니스를 끝을 가볍게 손으로 문질렀다. 당황한 서진은 재빨리 기욱의 손을 입에 넣으며 빨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저릿함에 기욱 또한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아, 강서진.”
그 이름 석 자를 부를 때마다 기욱은 서진에게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기욱에게 서진은 마약 같은 존재였다. 한번 맛을 보면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었다. 자신 외에 누군가가 강서진을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과 몰래 사귀어? 설령 저와 서진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철컥, 뒤로 벨트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도망치려는 서진의 위로 올라탄 기욱은 못 참겠다는 듯 바지와 드로우즈를 내렸다. 엉덩이골 사이로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가 닿으며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아… 으으윽!”
“힘 빼지?”
기욱이 서진의 엉덩이를 살살 토닥이며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자신의 페니스를 살살 밀어 넣었다. 점점 제 안을 메우는 페니스에 서진의 숨이 가팔라졌다. 기욱의 두꺼운 페니스보다 무서운 것이 분위기였다. 아래에 힘을 줄 때마다 제 몸이 마치 박기욱에게 맞춰 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 으으윽….”
“가만히 있어. 읏, 강서진.”
참다못한 기욱이 서진의 몸을 돌렸다. 허벅지를 옆으로 벌린 뒤 제 페니스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저 넣은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땀이 찬 이마를 뒤로 쓸어 넘긴 기욱이 매정하게 서진을 내려봤다.
“하으… 응… 아으… 아파.”
“뭐가 아파. 아프긴. 시헌이랑 하는 건 좋고, 나랑 하는 건 아파?”
“아니, 흐윽…으브… 으으읍….”
“엄살… 읏, 부리지 마.”
철벅, 허리를 크게 움직인 기욱이 서진의 안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기욱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제 몸의 모든 신경이 곤두서 반응을 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몸인지 아니면 침대와 세상이 흔들리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입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혀에 고인 침을 넘길 여유조차 없었다. 벌어진 입술을 타고 묽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하… 으응… 그만… 흐으윽….”
“움직여.”
“어흑… 제발… 아파요. 그만… 아아아악!”
매달리고, 소리를 지르고, 울며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작정이라도 한 듯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한 기욱은 서진을 탐하고 또 탐했다. 손을 뻗어 보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런 흰색의 벽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했다. 자신과 박기욱의 행위에 대한 의미조차 잊어버린 채 서진은 그저 기욱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행동했다.
배 안쪽으로 묵직한 정액이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벌써 몇 번째 사정인지 모르겠다. 이젠 뭐든 좋으니까 끝을 내줬으면 싶은데, 기욱은 영 페니스를 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닳고 닳은 구멍의 틈새로 묽은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기욱의 페니스만큼이나 배 안에서 느껴지는 정액의 미끄덩거리는 감촉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방금 먹은 죽을 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기욱은 여전히 서진을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 으으… 으흑… 잘못했어요.”
그 말을 끝으로 혼절을 한 듯 서진이 정신을 놓았다. 바람 빠진 인형처럼 앞으로 축 처진 서진을 뒤늦게 눈치챈 기욱이 천천히 움직임을 늦췄다. 허리를 붙잡던 손으로 엉덩이를 두드려 봤지만, 미동이 없었다. 기절한 듯싶었다.
“쯧.”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혀를 찬 기욱은 쓰러진 서진의 팔을 잡아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다행히 거의 사정 직전이었던 터라 금방 사정을 할 수가 있었다. 페니스를 빼내자 안쪽으로 잔뜩 싸 놓았던 기욱의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기욱은 엎드려 미동이 없는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저 잠시 쓰러진 것일 뿐 특별히 문제는 없었다. 엉덩이 위쪽으로 이불을 덮어 준 뒤 나른함에 담배를 물었다. 기욱이 내뱉은 희뿌연 담배 연기가 천장을 맴돌았다.
씻기는 건 나중에 해도 되겠지. 기욱은 조용히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 소파 한쪽에 서진의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 서진의 지갑이 올려져 있었다.
소파에 주저앉은 기욱은 생각 없이 지갑을 가져왔다. 그 지갑은 서진이 재수를 끝마치고 의대에 합격했을 때 기욱이 사 준 지갑이었다. 아직도 가지고 있을 줄은 또 몰랐다. 지갑을 열고 안을 살폈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 동전 지갑에서 스티커 사진 하나가 나왔다.
“…하.”
놀이동산에서 찍은 듯한 옛날 사진을 본 기욱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라리 이때 버릇을 잘 들였어야 했었던 걸까? 하고 후회가 들었다. 스티커 사진을 꽉 쥔 기욱은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 * *
쉬는 시간, 습관처럼 휴대폰을 연 서진은 수업 시간에 기욱에게서 문자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윤이 10일 날 일본으로 연수가.」 오전 9:45
「들었어?」 오전 9:45
연수라니, 들은 기억이 없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답장을 보내기 전 혹시나 하고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서윤은 금방 서진의 전화를 받았다.
― 어, 서진아 무슨 일이야?
― 누나. 10일 날에 무슨 일본 연수 가?
― 아, 병원에서 2박 3일 보내 주는 거야. 어떻게 알았어?
― 그게……. 기욱 형이 알려 줬어.
― 오빠가? 그렇구나. 내가 먼저 말해 줬어야 했는데, 바빠서 못 했네. 안 그래도 내가 아까 오빠한테 부탁 하나 하고 왔거든. 그래서 너한테 연락했나 보다.
― 무슨 부탁?
복도로 나와 창가에 몸을 기댄 서진이 계속해서 전화를 받았다. 서윤이 기욱에게 한 부탁이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열려 있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 일본 연수 갔다 오는 동안 너 좀 맡아 달라고 했지.
― ……무슨 말이야 그게? 기욱 형이랑 있으라고? 내가 왜?
― 걱정 돼서 그래. 주말 끼고, 가는 거라 오빠 시간 괜찮다고 하니까 어디 놀러라도 갔다 오고 그래.
― 왜 그런 짓을……! 아니, 아……. 알았어.
슬슬 쉬는 시간이 끝나 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미 기욱의 귀에 들어간 말임이 틀림없었다. 저에게 먼저 물어보지 않고 기욱과 이야기를 해 버린 건 서운하지만, 서윤의 그 행동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한 행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일로 서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을 생각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기욱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박기욱이 저와 있을 절호의 기회를 놓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결국, 서진은 시키는 전화를 끊은 뒤 자리로 돌아와 기욱에게 답장을 보냈다.
「누나랑 방금 통화했어요. 알았어요.」 오전 10:09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진동 소리가 울렸다. 이 인간 일 안 해? 마침 선생님이 들어오기도 했던 서진은 애써 기욱의 답장을 무시했다.
* * *
서진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기욱의 차를 타고 인천공항에 서윤을 데려다줬다. 다른 동료 간호사와 서윤이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멀어진 뒤에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공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윤과 다른 간호사들이 면세점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기욱은 옆에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서진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무슨 연락해?”
“……연락 안 했어요.”
“흐음, 그래?”
습관처럼 입술 근처로 손을 가져다 대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인데, 아무래도 의심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서진은 괜히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후다닥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기욱은 공항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밥 먹었어?”
“아니요.”
“밥 먹을까?”
“일 안 나가요?”
“오늘 쉬어, 뭐 먹고 싶어?”
밥 먹는다고 말한 적 없는데. 이미 기욱의 머릿속에서 서진은 대답을 하고 난 뒤였다. 기욱은 근처에 있는 한식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갈까?”
“하아,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온종일 기욱에게 시달릴 거라고 생각한 서진은 기욱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공항 내에 있는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식당이라 썩 맛이 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먹을 만은 했다.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던 중 기욱이 소매를 걷으며 시계를 봤다.
“슬슬, 서윤이 출국했겠네.”
그 말에 서진도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을 먹고 왔음에도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집에 가서 조금 더 쉬고 싶은데 과연 기욱이 순순히 집으로 데려다줄지는 의문이 들었다. 서진은 아직은 어색한 기욱의 차에 타기 위해 다가갔다. 그 순간 기욱이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타.”
“그냥 뒤에 타면 안 돼요?”
될 수 있으면 기욱과 나란히 앉고 싶지 않았는데, 기욱은 그런 서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정색을 하며 운전석에 앉았다. 서진은 혹시나 하고 뒷좌석 문을 열어 봤으나 기욱이 잠가 버린 터라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지못해 차를 반 바퀴 돌아 조수석에 탔다.
“벨트 매.”
“맬 거예요.”
서진도 기욱에게 익숙해졌는지 곧바로 벨트부터 맸다. 기욱이 벨트를 매라고 말하는 건 비단 서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다. 서윤에게도 몇 번인가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기욱은 안전벨트에 집착을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천천히 공항을 나온 기욱이 서진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어디 갈까?”
“그냥 집에 가면 안 돼요?”
“안 돼.”
“……”
“모처럼 나왔는데 아깝잖아.”
솔직히 서진은 뭐가 아까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신호에 걸리자 기욱이 핸들로 손가락을 툭툭 건드렸다. 습관인 것 같았다.
“놀이동산 갈래?”
“놀이동산이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서진의 눈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 놀이동산이라니, 말만 들었지 정작 가 본 적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갈 기회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래. 별로 안 멀어. 갈래?”
“상관없어요.”
차마 말은 못 해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손을 뻗은 기욱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네.”
서진은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 * *
자유 이용권을 끊은 뒤 서진은 기욱과 함께 놀이동산 안으로 들어왔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꽤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자 넓은 중앙 홀이 서진을 반겼다. 막상 기욱과 함께 온 것까지는 좋은데 뭘 어떻게 타야 할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진과 달리 이미 질릴 정도로 많이 와 본 기욱은 넓은 놀이동산을 제집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부터 탈래?”
“……”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서진이 당황했다. 타는 게 순서가 정해져 있는 거야? 롤러코스터? 근데 롤러코스터가 어디 있는 건데? 놀아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눈치챘다.
“뭘 긴장하고 그래, 한 번도 안 와 봤어?”
“네.”
숨겨 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서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보통 고등학생쯤 되면 놀이동산 한두 번은 와 봤을 거라 생각하니까. 여태껏 한 번도 안 와 보고 뭐 했냐고 우월감에 젖은 목소리로 비웃을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기욱은 태연했다.
“그럴 수 있지. 이리 와.”
기욱은 서진의 손을 잡고 인포메이션으로 향했다. 한쪽에 비치된 지도를 서진에게 건넸다. 기욱에게 받은 지도를 천천히 펼쳤다. 놀이동산은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들어올 때부터 외부에도 놀이기구가 있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과연 종일 다 탈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을 정도로 놀이기구가 많았다.
“어차피 하루 안에 다 못 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기욱은 마치 서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멋대로 대답을 했다. 지도를 봐도 뭐가 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서진에게 지도를 줘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기욱이 서진이 보고 있던 지도를 다시 빼앗아 제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무서운 거 잘 타?”
서진은 요란한 비명을 내며 근처를 지나가는 열차를 흘끗 바라봤다.
“안 죽겠죠?”
“그럴 리가.”
“아니, 진짜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요.”
“나 의사야.”
기욱은 서진이 우려하는 그럴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일어난다고 해도 제가 눈앞에 있는 이상 강서진을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의사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는 기욱의 말은 그럴 일이 거의 없다는 표현의 다른 말이었다. 기욱의 태도에 서진도 너무 민감하게 생각했음을 인정했다.
“무서운 거는 아마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고소공포증은?”
“아마도……. 없을걸요.”
아직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 본 적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적어도 학교 옥상이나 창문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무섭지 않으니 없겠거니 하고 짐작만 뿐이었다. 물어볼 걸 다 물어본 듯 기욱이 다시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꼭 손을 붙잡고 다녀야 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여태껏 살면서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이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었던 서진은 오늘따라 유독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기욱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사실상 기욱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서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줄을 섰다. 놀이동산이라는 데가 줄을 서야 하는 곳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유독 기욱이 데려간 곳이 다른 놀이기구에 비교해 줄이 길었다. 서진은 어린아이처럼 기욱의 옆에 딱 달라붙어 기욱을 올려다봤다.
“이건 무슨 줄이에요?”
“아틀란티스. 저거.”
기욱이 바로 옆 레일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놀이기구를 손가락질했다.
“못 탈 것 같으면 말해.”
“아뇨, 타 볼게요.”
다 사람 타려고 만든 건데 설마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솔직히 친구들과 왔으면 안 타는 걸 고려해 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확실히 여자와 남자는 묘하게 달랐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서진의 마음은 기욱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이제 막 고등학생인 서진의 눈에 성인인 기욱은 너무나 컸다. 친구나 연인, 가족끼리 온 사람들은 줄을 서며 각자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그에 비교해 서진과 기욱은 줄을 서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도 없었거니와 사실 썩 어울리는 조합도 아니었다. 차라리 서윤이라도 있었으면 덜할 텐데. 누나의 남자 친구와 남동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화감이 있었다. 줄은 서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에도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으며, 이미 서진이 처음 서 있었던 줄보다 훨씬 더 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줄이 중간쯤에 도착했을 무렵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기욱이 별안간 줄을 넘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알았어요.”
뭔진 모르겠지만 서진은 무작정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기욱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슬슬 안으로 들어갈 차례라 초라해지기 시작한 서진이 연락을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다. 그 순간 바로 옆에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보고 있는 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서진은 기욱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제 다 기다린 줄 알았는데 안쪽에도 꽤 긴 줄이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다른 놀이기구 예약.”
“아아.”
그런 게 있어? 모든 게 처음이었던 서진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 보아하니 기욱이 하고 온 일은 그것뿐만이 아닌 듯싶었다. 기욱은 돌아오면서 사 온 목걸이에 자유 이용권 패스를 넣고 서진의 목에 걸어 줬다. 서진은 자유 이용권 패스가 들어 있는 목걸이를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정말 별것이 다 있었다.
기다리는 데는 익숙했고, 서진이 생각했던 그것보다는 빨리 놀이기구를 탈 수 있었다. 막상 앉긴 했는데, 안전벨트를 어떻게 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진의 옆에 앉은 기욱이 그럴 줄 알았다며 서진을 대신해 안전벨트를 꽉 조여 줬다. 무릎이 눌리는 게 살짝 아프긴 했지만 아무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놀이기구가 출발하려 하자 밑에 있던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서진 쪽으로 다가왔다. 평소라면 밀어내야 마땅할 손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의 손을 누구보다도 꽉 쥐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꼭대기까지 올라간 열차가 아래로 떨어졌다.
* * *
“으윽….”
“괜찮아?”
간신히 열차를 타고 내려온 서진은 어지러움에 비틀거리며 기욱의 품에 안겼다. 그런 두 사람을 흘기며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당장 현기증이 나 미칠 것 같았던 서진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고소공포증도 괜찮고, 빠른 것도 괜찮은데 설마 멀미가 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서진은 인근 벤치에 앉아 기욱의 품에서 간신히 진정했다. 아직도 빠르게 뛰는 가슴이 가라앉질 앉았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숨 쉬어.”
“후우… 하…,”
“그래, 천천히.”
기욱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나니 조금은 울렁거림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서진이 그제야 제가 꽤 오래 기욱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하며 기욱을 밀어내기 위해 고개를 들자 기욱과 눈이 맞았다.
“…….”
뒤쪽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의 비명이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기욱의 엄지손가락이 아주 자연스럽게 서진의 입술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하는 서진을 두고 기욱이 천천히 일어났다. 이후 기욱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입술은 한동안 계속 얼얼하게 서진을 괴롭혔다.
“다른 거 탈 수 있어?”
“아마도요.”
이렇게 빠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지 현기증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일단 타 보자는 기욱의 말에 서진은 기욱과 함께 놀이기구 몇 개를 더 탔다. 다행히 처음부터 가장 센 걸 탄 탓인지 이후에 타는 놀이기구들은 썩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꽤 들어오는 탓에 놀이기구 하나를 타는 데도 시간이 꽤 소모됐다. 한두 개 타기 시작한 뒤 서진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기욱에게 제법 적극적으로 타고 싶은 것을 요구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뒤를 보호자처럼 쫓아다녔다. 실외에서 실내로 들어온 기욱은 시간을 확인했다.
“배 안 고파?”
“고파요.”
“이거 타고 근처에서 점심이라도 먹자.”
기욱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비교적 줄이 짧은 컵처럼 생긴 놀이기구를 탔다. 왠지 모르게 빙빙 돌 때부터 어지러울 거로 생각했는데 정말 어지러웠다. 땅에 발을 내딛고도 적응을 하지 못하던 서진이 휘청거리며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과 몸을 부딪쳤다.
“꺅…!”
“어머, 어떻게 해!”
여자 둘이 놀러 왔는데. 하필이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여자가 서진과 부딪혔다. 그녀의 밝은색 옷 위로 먹고 있던 콘 아이스크림이 묻었다. 여자가 점점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고, 서진도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잠시 휴대폰을 하느라 모든 상황을 놓쳤던 기욱이 한발 늦게 서진에게 다가왔다.
“강서진! 무슨 일이야?”
“제가 그……죄송해요.”
“갑자기 무슨…… 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서진을 뒤로한 기욱은 눈앞에서 아이스크림이 묻은 얼룩을 지우려 애쓰는 여자 둘과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기욱은 서진과 여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괜찮으세요?”
“아, 네. 저기 근데…….”
“일행이에요. 제 동생이 실수를 좀 저지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서진도 기욱의 뒤에서 미안하다며 연신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어린애가 실수한 거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남성에 그녀는 적당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를 대신해 물티슈로 대략 얼룩을 지워 준 기욱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스크림 다시 사 드리겠습니다.”
“아뇨……. 거의 다 먹은 건데 괜찮아요.”
“꼭 아이스크림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까. 거의 다 먹었다 해도 다 먹지 못한 건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다른 거로라도 대신해 주겠다는 기욱에 여자 둘이 눈치를 살폈다. 기욱은 여자 둘에게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 주고 보낸 뒤에야 서진에게 돌아왔다. 아직은 기욱이 어색하다. 나이 차이를 떠나 기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것은 화가 난 기욱은 무섭다는 사실이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린 서진은 형형색색의 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놀이동산 특유의 비명과 화려한 음악들이 저에게는 다른 세상 같았다.
“죄송해요.”
“내 앞에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사과하지 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괜찮다고.”
“그래도 저 때문에…….”
“강서진.”
팔짱을 끼며 내려다보던 기욱이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서진이 또다시 흠칫 놀랐다.
“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서진이 알지는 모르겠으나, 기욱은 자신의 사람이 한 실수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주변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을 의미했다. 서진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기욱이 보기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자 안에서 움직이는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기욱은 다시금 서진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아까 타 보고 싶다는 거 타러 가자.”
짜증을 내거나 추궁을 할 줄 알았는데, 기욱은 의외로 서진의 실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계속해서 어긋나는 예상에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기욱은 괜찮은 사람인가? 아니, 그러면 누나를 빌미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럼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 기욱과 함께 넓은 놀이동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놀았지만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콕콕 아팠다. 너무 돌아다녀 지친 서진은 솜사탕을 입에 넣으며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꽤 많이 탄 것 같은데 지도를 보니 아직도 못 타 본 것이 수두룩했다. 기욱의 말대로 전세라도 내지 않는 이상 하루 만에 다 타는 것은 무리였다. 기욱은 솜사탕을 먹는 서진의 옆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점심 먹을까?”
“좋아요.”
“서진아, 이리 와 봐.”
그래도 신이 난 듯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진을 본 기욱이 손을 까닥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서진이 기욱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기욱의 손이 서진의 입술 근처를 살살 긁었다.
“뭐 하는……”
“설탕 굳었어.”
기욱은 손가락에 묻은 솜사탕의 설탕을 혀로 살짝 핥았다. 그 모습이 또다시 밖에서 있었던 키스와 비슷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들어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손수건을 꺼낸 기욱이 서진의 입가에 묻은 설탕들을 닦아 줬다. 저를 보며 나지막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자 서진의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박기욱은 남자인 서진이 봐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신이 있다면 기욱에게 유전자를 몰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아직 어린 제가 이렇게 느낄 정도라면 누나나 다른 여자들이 봤을 때 기욱은 이상적인 남자 그 자체였다. 아니, 어쩌면 제가 어린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면 저 역시 기욱을 원하는 수많은 여자 중에 한 명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당신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잘해 주는지 어린 서진은 이해조차 알 수 없었다.
“서진아, 점심 안 먹을 거야?”
“아뇨. 먹을 거예요.”
박기욱은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끔은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맞추는 감이 있었다. 서진은 혹시라도 제 마음을 기욱에게 읽힐까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욱과 함께 인근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한식은 아침에 먹었고, 이미 이거저거 간식을 주워 먹은 탓에 입이 달아서 밥은 당기지 않았다.
“언제까지 놀 거예요?”
“맘대로 놀아. 폐점까지 있어도 상관은 없어.”
“그러면 집에는 언제 가요?”
“여기서 자고 갈 거야.”
기욱이 벽 쪽에 유독 많이 나 있는 창문들을 손가락질했다. 궁금하긴 했는데 저게 뭔데?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콜라를 마셨다.
“호텔. 예약해 뒀어.”
“호텔도 있었구나. 내일은 출근 안 해요?”
저야 내일도 주말이라 상관은 없긴 하지만, 어쨌든 기욱은 직장이 있었다. 솔직히 가운을 입은 기욱의 모습은 별로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서진이 아는 의사들이란 매일 집에도 못 들어가고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기욱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반쯤 남은 햄버거를 씹어 목으로 넘긴 서진은 기욱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한마디 할 거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눈을 움직였으나 기욱의 햄버거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벌써 다 먹었어요? 엄청 빠르네.”
먹은 게 아니라 마신 거 아니야? 서진이 기억하기로 분명 기욱의 햄버거보다 자신의 햄버거가 먼저 나왔다. 햄버거가 생각보다 맛있어 먹는 데 눈이 팔린 건 맞지만, 도대체 언제 기욱이 햄버거를 다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사잖아.”
“의사인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의사랑 밥 빨리 먹는 거랑 상관관계가 있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서진을 본 기욱은 이해 못 하면 말라는 듯 서진의 질문을 가벼운 조소로 흘려 넘겼다. 기욱은 서진의 얼굴에 뭐가 묻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쳐다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던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느긋하게 햄버거를 먹었다.
* * *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기욱이 추천한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서였다. 안에도 사람이 많은 줄 알았는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만만치가 않았다. 기욱과 온종일 붙어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진은 처음보다는 많이 경계심이 누그러진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줄을 서며 두 사람이 특별히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다. 줄이 조금씩 앞으로 당겨질 때마다 기욱은 서진이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 부단히 신경을 썼다. 줄이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지자 기욱이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뭐 먹을래?”
“저한테 할 말이 먹을래? 밖에 없어요?”
“…….”
“돼지 되겠네.”
무슨 놀이기구 한 번 탈 때마다 먹을 걸 사다 바치니 뒤늦게 이런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달은 서진도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처음엔 이것저것 신기한 간식이 많아 사 먹긴 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잔뜩 토라진 서진을 본 기욱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뭐가 웃긴 거예요?”
계속되는 기욱의 웃음에 서진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웃겨? 어디가?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웃음 포인트에 어이가 없었다. 꿋꿋하게 자기 웃을 걸 전부 웃은 기욱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낸 뒤 서진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기욱이 놀이동산을 같이 온 사람은 서진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연인이든 연인에 따르는 상대든 기욱은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신경을 써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원래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터라 계속해서 간식을 먹는다고 한다면 기분이 나빴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 자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서진에게 계속해서 간식을 사 먹이고 있었다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진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기욱 또한 이 행위가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좀 많이 먹이긴 했지. 서진을 앞으로 보낸 기욱은 서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살 좀 쪄.”
“진짜 찌울 생각이었어요?”
“뭐, 통통해진 것도 나쁘진 않겠네.”
기욱이 보기에 서진은 살이 찐 모습도 크게 이상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이 잘 붙지 않은 타입에 입도 짧아서 서진이 살이 붙을 가능성은 적었다. 딱히 서진을 찌울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으나, 그렇게 살을 찌워 자신만 바라보게 만든다면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먹고 있는 서진은 꽤 귀여웠지.
“알았어, 그만 먹일게.”
기욱은 서진과 함께 놀이기구에 올라탔다. 점심을 먹고, 몇 개를 더 타고 나니 저녁이었다. 이미 놀이기구를 타면서 기욱이 주는 간식을 주워 먹었던 서진은 저녁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다 타지는 못해도 어지간한 건 거의 다 한 번은 타 본 것 같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애들이 타는 거나 썩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놀이기구들뿐이었다. 놀이기구를 타는 데 지친 듯 서진과 기욱은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녔다. 다행히 놀이기구 외에도 할 만한 것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서진과 기욱은 게임 시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기욱은 다트로 풍선을 맞추는 게임을 손가락질했다.
“한 판 할래?”
해 본 적은 없지만, 하고는 싶었던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 서진을 대신해 돈을 내줬다. 서진은 자신에게 할당이 된 다트를 주워 이리저리 던졌다. 자세부터가 틀린 탓에 풍선을 맞추기는커녕 그 근처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오기가 생긴 듯 억지로 남아 있는 다트를 전부 다 던졌으나 끝내 한 개도 맞추지 못했다.
“윽……. 웃을 거면 웃어도 돼요.”
“안 웃어.”
기욱은 제법 진지하게 그럴 일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박기욱은 서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른의 여유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성격일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누군가의 미숙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기욱은 다시 계산한 뒤 다트를 가지고 왔다. 서진의 등 뒤에서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손목으로,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듯 던지는 거야.”
기욱이 시키는 대로 던졌으나 역시 잘 안 되었다. 기욱은 서진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힘 빼. 긴장하지 말고.”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차근차근 알려 주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다시 다트를 던지자 이번에는 한쪽에 있는 풍선이 터졌다. 처음으로 풍선을 터트리자 서진이 해맑게 웃었다.
“됐어요!”
“그래, 그렇게 해.”
뒤로 물러선 기욱이 팔짱을 끼며 서진을 바라봤다. 비록 남아 있는 다트를 전부 풍선에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 개도 맞추지 못했던 처음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상품을 따지 못해도 맞췄다는 그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서진과 기욱은 조금 더 게임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농구대가 있었다. 몇 번인가 영화관에 있는 게임센터에서 해 본 적이 있었던 서진이 농구대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저 이거는 할 줄 알아요!”
“흠, 시합할까?”
“그건 싫은데요.”
“잘한다며.”
“할 줄 안다고 했지 잘한다고는 안 했는데요.”
“한 손으로 할게. 어때?”
핸디캡을 주겠다는 기욱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과 기욱이 동시에 게임을 시작했다. 점프까지 하고, 뒤꿈치까지 들어가며 공을 던졌지만 어째서인지 공은 계속해서 헛나갔다. 그에 비교해 기욱은 한 손으로 던지는 것마다 척척 골을 넣었다. 뭐야? 사실은 한 손으로 하면 더 잘 되는 거 아니야? 중간쯤에 기욱을 따라 한 손으로 공을 던졌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공도 큰 데다 한 손으로 하자니 손목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결국, 서진은 기욱에게 엄청난 점수 차이로 졌다. 은근히 오기와 승부욕이 있는 서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키 때문에 그런 거예요.”
“너도 안 작아. 실력이야.”
기욱은 남아 있는 동전을 하나 더 넣으며 혼자 한 판을 했다. 한 손으로 했을 때보다 두 손으로 하니 확실히 속도가 빨랐다. 그 속도를 보니 기욱이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들어가는 공에 서진 또한 멍하니 기욱이 게임을 하는 것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그런 기욱을 보고 있었다. 게임이 끝날 무렵 기욱은 신기록을 경신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잘하는 거예요?”
도대체 당신, 못 하는 게 뭐야? 뭐 하나는 기욱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던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 농구부였어.”
“반칙이잖아요!”
“시작하기 전에 농구한 적 있냐고 물어보지 않은 네 잘못이지.”
“윽……. 보통 거기까지 생각하냐구요.”
“어쨌든 내가 이겼으니까……. 흐음, 뭘 시킬까?”
“아무것도 건 거 없거든요?”
“내기는 내기지.”
주변을 둘러보던 기욱은 마침 사람들이 나오는 스티커 사진 기계를 손가락질했다.
“저거 찍으러 가자.”
“아, 저런 걸 왜 해요.”
“뭐가 어때서?”
“애도 아니고.”
“애는 너잖아.”
“말꼬리 잡지 마시구요. 안 한다니까요!”
기욱이 저런 걸 좋아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반면 원래부터 사진 찍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던 터라 스티커 사진이라는 게 부담스럽기만 했다. 둘은 서로 바뀐 듯한 실랑이를 한동안 이어 갔다.
“내가 이겼잖아.”
“내기한다고 한 적 없거든요?”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잖아. 그렇게 말 안 들으면 다른 걸로 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기욱도 더 말하고 싶지 않다며 등을 돌렸다. 다른 게 뭔데? 잔뜩 토라진 기욱이 말하는 다른 거라는 게 서진이 좋아하는 게 아닐 것일 가능성은 매우 컸다. 기욱은 은근히 자신이 곤란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뭔진 몰라도 기욱에게 농락당하는 것만큼은 싫은 서진이 다급하게 기욱의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스티커 사진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까짓거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눈 딱 감고 사진 찍히는 게 훨씬 나았다.
“잘 나왔네.”
기욱은 서진과 찍은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그에 비교해 서진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기욱에게 안겨 있는 것이 마치 제가 곰 인형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사진의 절반이 담긴 봉투를 서진에게 건넸다.
“아, 싫어요.”
“가지고 있어. 모처럼 찍었는데 아깝잖아.”
“…….”
“네가 이상한 소리만 안 하면 이상하게 볼 사람 아무도 없어.”
무얼 경계하는지 알고 있는 듯한 기욱의 말투에 서진은 마지못해 스티커 사진이 담긴 봉투를 지갑 안쪽에 넣어 뒀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놀이기구를 몇 개 더 탔다.
* * *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나니 낮과 달리 실내의 조명들이 반짝반짝한 게 다른 의미로 눈이 즐거웠다. 저야 서진이 원한다면 폐장 직전까지 어울려 놀아 줄 수 있지만, 서진의 모습을 보아하니 지친 것으로 보였다. 기욱은 천장 위에 달려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열기구를 손가락질했다.
“마지막으로 저거 타고 슬슬 들어갈까?”
“저거 타는 거였어요?”
“그럼 장식이겠어?”
“그건 아니지만…….”
“위에서 보면 예뻐.”
기욱이 다시 서진의 손을 잡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몇 번을 붙잡힌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젠 저를 끌어당기는 묵직한 손도 익숙했다. 다행히 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서진은 기욱과 함께 금방 열기구 앞에 섰다. 흔들리는 거 아니지? 괜찮지? 단순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열차를 타는 것과는 다른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쉽게 안으로 못 들어가는 서진을 보던 기욱이 먼저 열기구에 탄 뒤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이 부자연스러운 시선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오해를 살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한 서진은 눈을 질끔 감고 기욱이 있는 열기구로 올라탔다. 서진이 올라서자 덜컹, 하고 열기구가 한 번 흔들렸다. 열기구가 출발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서진은 기욱의 옷자락을 꽉 안으며 품에 안겼다.
“일어나, 괜찮아.”
기욱은 천천히 서진을 달랬다. 아직도 무서운 모양인지 서진은 기욱의 몸을 꽉 붙잡았다. 필사적인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서진이 자신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래쪽으로 서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노, 놓으면 안 되는 거 알죠?”
“안 놔. 그러니까 이리 와.”
안쪽에 있던 기욱이 서진을 바깥쪽으로 이끌었다. 후우, 숨을 고른 서진이 기욱의 손을 붙잡으며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조명으로 반짝반짝한 실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인공적이라고 해도 절경에 가까운 모습에 서진은 금세 두려움은 잊은 채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모습을 서윤과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간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안았다.
“서진아, 강서진.”
“네? 아….”
아래를 구경하고 있던 서진은 그제야 기욱이 저에게 가까이 달라붙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래로 떨어질까 봐 무서웠던 서진은 차마 기욱을 밀어낼 수 없었다. 가슴 부근에 닿았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서진은 그저 얼어붙은 채 멍하니 기욱을 바라봤다. 점점 더, 위로 올라온 손이 서진의 목을 가볍게 쥐었다.
“괜찮아. 안 보여.”
마침 뒤에 있는 열기구는 고장으로 인해 사람을 태우지 않았다. 건너편 열기구와는 거리가 조금 있었고, 앞쪽에 있는 열기구에 탄 연인들은 뒤에 있는 둘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위를 보지 않는 이상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열기구 안에 있는 서진과 기욱을 볼 가능성은 작았다. 기욱의 다른 손이 다가와 서진의 입안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입술에 닿은 손가락이 불에 덴 것처럼 후끈후끈 뜨거웠다. 사실 이는 낮부터 계속 진행돼 오던 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과 흥분이 서진을 자극했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못 참겠다는 듯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하, 으읍…….”
“서진아.”
강서진, 그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코너에 돌자 작정이라도 한 듯 기욱의 혀가 완전히 입안으로 들어왔다. 기욱 외에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어 비교할 수는 없으나, 기욱은 정말로 키스를 잘했다.
숨이 멎을 듯한 그리고 그 끝에서 올라오는 자극이 서진의 발끝과 온몸의 신경을 저리게 만들었다. 앞쪽에 있는 연인들이 등을 돌리려 하자 서진이 다급하게 기욱을 놓았다.
다행히 기욱도 그만할 생각이었던 터라 서진을 금방 놓아 줬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서진은 멍하니 선 채 손으로 입 근처를 가렸다. 기욱에게 닿은 입술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얼얼했다. 기욱은 다시금 서진을 붙잡았다. 그제야 열기구가 한 바퀴를 다 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신히 땅을 밟은 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키스를 하고도,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태연한 걸까? 어른들이란 다 이런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슬슬 가자.”
서진은 입을 꾹 다문 채 기욱의 뒤를 따라 놀이동산 밖으로 나왔다. 바로 건너편에 호텔이 있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체크인하기 위해 들어간 로비에서 뜻밖의 사람과 만났다. 낮에 서진이 부딪혔던 여자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서진보다 먼저 기욱을 알아본 여자가 기욱을 향해 인사를 했다. 기욱도 여자들을 만날 거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마지못해 대답했다. 멀찍이 떨어진 서진을 두고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거리가 좀 있어 무슨 대화를 하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형식적인 대화라는 걸 알면서도 서진은 휴대폰을 만지는 두 사람이 불편했다.
잠시 뒤 룸카드를 챙긴 기욱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여자들이 급하게 들어왔다. 왜인지 일부러 타이밍을 보고 있다가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여자들의 층수는 두 사람의 층보다 낮았다. 기욱에게 번호를 얻은 그녀는 내리기 직전까지 엘리베이터 안 기욱을 흘끗댔다.
다음 층에서 내린 서진은 기욱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이 열어 주는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왜 자신들의 방이 여자들보다 높은지를 알 수 있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가구들과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공간은 누가 봐도 일반 객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온종일 서진을 데리고 돌아다니느라 지친 기욱이 소파에 앉았다.
“서진아, 이리 와.”
도대체 박기욱은 자신을 뭐로 생각하는 걸까? 설마 강아지 같은 거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오라 가라 하는 기욱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달리 선택권이 없었던 서진은 자연스럽게 기욱이 있는 거실로 나왔다.
“놀이동산, 처음부터 올 생각이었죠?”
소파에 기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은 기욱이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서윤이가 너 한 번도 와 본 적 없을 거라고 말했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방을 바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기욱은 어떻게든 서진을 데리고 놀이동산을 올 생각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은 듯한 기분이 든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은 계속해서 서 있는 서진을 보더니 몸을 앞으로 숙여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훅, 하고 서진의 몸이 소파 위로 쓰러졌다. 청바지 위로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기욱의 손길이 느껴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닳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윽.”
이것도 성희롱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욱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서진의 몸에 묘한 전기가 튀었다. 그 낯선 기분이 불편하면서도 마냥 싫지가 않았다. 모순이었다. 옷 위로 서진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던 기욱이 금방 서진을 놓아줬다. 역시 옷 위로 만지는 건 별로 재미가 없었을뿐더러 만지면 만질수록 당장이라도 전부 다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에 미칠 것 같았다.
아직은. 아아, 그래. 아직은 아니었다. 기욱의 시선은 마치 덜 익은 과일의 시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눈빛과도 같았다. 아직은 새파랗지만, 점점 무르익어 절정에 달했을 그 순간을 기욱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에 침이 넘어갔다.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 여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빠르기도 하지.
그럴 생각도 없을뿐더러, 취향도 아니다. 그런데도 기욱이 번호를 달라는 여자의 말에 순순히 응한 것은 반쯤 서진 때문이었다. 기욱은 일부러 서진의 시선을 못 본 척하고 답장을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만졌다. 그 순간, 서진이 기욱의 손을 붙잡았다.
“미쳤어요?”
“뭐가?”
“답장 보내지 마세요.”
“…….”
“이런 거 약속이 다… 다르잖아요.”
“별로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뭐가 걱정이냐는 듯한 기욱의 태도에 서진의 눈이 흔들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맞는 말이라고 해서 다 옳다는 법은 없었다. 아무리 어린 서진이라 해도 그녀가 사심을 가지고 기욱의 번호를 얻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한 손으로 휴대폰을 쥔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안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지탱할 것이 사라진 서진이 기욱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기욱에게 안기는지 모르겠다. 기욱이 휴대폰을 허공으로 흔들며 서진을 자극했다.
“지울까?”
“지, 지워요! 지우라구요. 이런 거…… 이런 건…… 지, 집에 갈 거예요!”
“그게 협박이 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아.”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시간에 대체 어딜, 어떻게 나간단 말인가? 말뿐인 협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협박이라는 건 본디 제가 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 더 어울렸다. 물론, 기욱은 자신의 행동이 협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선택을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서진이잖아? 언제나 그렇듯 강요는 안 했다. 서진의 입장에서는 이게 강요랑 뭐가 다른지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은 천천히 기욱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기욱이 뭘 원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말은 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다. 서진은 기욱이 원하는 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늘 일방적으로 당하는 키스에만 익숙했던 터라 이런 키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기욱을 만족하게 해 보려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기욱이 일부러 혀를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걸 안 순간 서진의 눈에 당혹감이 들었다. 기욱은 옷 위로 서진의 엉덩이를 계속 주물럭거렸다.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 기욱의 혀를 애무했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질척한 소리에 부끄러워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아… 하….”
간신히 입술을 떼고 소파에 주저앉은 서진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숨을 고르는 서진의 앞으로 기욱의 휴대폰이 들이밀어졌다. 기욱은 보란 듯이 여자에게서 온 문자를 지웠다. 입가에 묻은 타액을 혀로 핥은 뒤 가볍게 웃었다.
“다음엔 잘해 봐.”
“……윽.”
서진은 자존심이 상했다. 하긴, 제 키스는 기욱의 키스에 비교하면 하등 보잘것없었다. 기욱도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입을 섞었는지 서진에게는 알 길이 없었다. 서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여자를 만난 것은 우연일지 몰라도, 연락처를 교환하는 부분부터 기욱에게 놀아난 것이었다. 기욱이 진심이었다면 처음부터 여자가 번호를 줄 때 거절했으면 될 일이다. 그걸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필시 서진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 증거로 기욱의 휴대폰에 여자의 번호는 제대로 저장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전화번호부에 점 하나가 웬 말인가.
“씻고 와.”
“말 안 해도 그럴 거예요!”
잔뜩 토라진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옷을 전부 벗고 샤워가 한창일 무렵 난데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뭐 하는 거예요?”
“나도 씻게.”
“저 씨, 씻고 있잖아요!”
몰랐다는 말로는 변명이 안 될 것이었다. 서진은 기욱이 일부러 욕실에 쫓아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키스하고, 제멋대로 엉덩이를 주물러지기까지 했지만 이렇게 알몸을 보이는 건 또 달랐다. 다급하게 불을 끈 서진은 부끄러움에 수건을 찾았다. 기욱이 확, 하고 선수를 쳐 수건을 낚아챘다.
“거품 묻었잖아. 마저 씻어.”
“줘요…….”
“뭐 어때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성인 남성들은 다 이런 걸까? 좁은 시야로는 기욱을 이해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기욱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당황한 서진이 재빨리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렸다. 그게 더 남자를 자극하는 방법이라는 걸 서진은 잘 모르는 듯싶었다. 물에 젖은 서진의 몸은 기욱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관능적이었다.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는 것만으로도 한계가 있었던 기욱은 숨을 크게 내쉬며 서진의 앞에서 천천히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냥 씻기만 할 거야.”
“거, 거짓말.”
윗옷을 벗어 걸어 놓은 기욱이 서진을 벽 쪽으로 내다 몰았다. 촉촉하게 젖은 몸을 위아래로 훑은 기욱은 서진의 귓불을 혀로 살짝 핥았다. 이미 묻어 있는 물방울과 기욱의 타액이 한데 섞여 서진의 피부 위를 골고루 적셨다. 낯선 자극에 당황한 서진이 기욱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읏… 으으….”
“귀엽네.”
진심으로 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서진이 당황하며 기욱을 노려봤다. 귀엽다고? 제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닌 기욱의 말에 괜히 서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몸에 체온이 올라가는 게 단순히 욕실에 있는 열기 때문에만은 아니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가슴에 올라왔다. 이번만큼은 정말 맨살에 닿는 감촉이었다.
“설렜어?”
“미, 미쳤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황한 서진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기욱이 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알면서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관계가 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변함이 없었다.
서진을 뒤로한 기욱은 남아 있는 옷을 벗었다. 기욱의 알몸을 흘긴 서진은 최대한 진정을 하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래, 기욱의 말대로 그저 같이 씻기만 뿐이었다. 동성의 친구들끼리 목욕탕도 가는 마당에 같이 씻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다행히 기욱은 크게 서진을 건드리거나 하지 않았다.
* * *
“하아….”
샤워를 마친 서진은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침부터 온종일 서 있고, 돌아다니느라 온몸이 찌뿌둥했다. 새거나 다름없는 폭신폭신한 침대에 누우니 벌써 잠이 왔다. 서진보다 조금 늦게 나온 기욱도 서진이 누워 있는 침대에 같이 누웠다. 따로 자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겨 끌어와 안았다.
“저녁 안 먹어도 괜찮아?”
“모르겠어요.”
“아침에 조식 먹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에 서진이 눈을 질끔 감았다. 남자끼리 섹스도 가능하다는 걸 안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서진은 아주 잠깐 기욱이라면 저를 덮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자신의 생각을 걸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예상했던 대로 기욱이 서진의 입술을 훔쳤다. 입 밖으로 나온 혀가 다시금 서진의 목덜미를 핥았다.
“자… 으, 읏 잠깐…!”
느낌이 이상하다. 당황한 서진이 기욱을 밀어냈지만 기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잇새를 세운 기욱은 기어코 서진의 목덜미에 흔적을 남겼다.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는 키스 마크에 서진의 몸이 달아올랐다. 다시금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기욱이 서진의 입안에 손을 넣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입안을 헤집는 손가락 두 개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서진이 입을 벌린 채 기욱을 올려다봤다.
“핥아 봐.”
“으….”
“아니면 키스가 좋아?”
키스보다야. 그래도 손가락을 핥는 게 더 나을 거로 생각한 서진은 순순히 기욱이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열심히 핥았다. 입안에 고이는 침이 쌓이며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간신히 기욱이 손가락을 빼자 서진은 헛기침했다. 기욱은 서진의 입에 들어갔던 손가락을 다시금 제 입 근처로 가져다 댔다. 서진은 도대체 이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서진이 끝내 기욱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서진이 이렇게 물어볼 거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기욱의 눈이 지그시 서진을 응시했다. 이내 갑자기 기욱의 손이 서진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침대 위에 엎드린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제 몸이 다리 사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진의 턱을 잡아 올린 기욱이 다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달은 서진이 입술을 꽉 닫았다.
“…….”
“아까 잘했잖아.”
“이… 이게…….”
그런 행위의 하위 버전일 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목욕 가운 너머 욕실에서 봤던 기욱의 물건을 생각한 서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욱은 반강제로 서진의 입을 벌려 손을 밀어 넣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강제성이 짙은 행위였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갑자기 역겨워졌다. 헛구역질하는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벌어진 입술 아래로 타액이 뚝뚝 떨어져 침대의 시트 위를 적셨다.
“좋은 말 할 때 하지?”
“으… 으읍….”
기욱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서진은 눈을 질끔 감은 채 기욱이 시키는 대로 혀를 써 손가락을 핥았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쾌락이 서진을 자극했다. 그건, 비단 서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허벅지 안쪽이 쓰라려 미칠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며 몇 번이나 부정해도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하… 윽….”
“제길…!”
난데없이 손가락을 빼낸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서진을 내동댕이치더니 욕실 쪽으로 들어갔다. 욕실에 들어간 기욱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서진 또한 온몸에 가득한 열기가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욕실의 물소리가 끊긴 뒤 기욱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오 분이 좀 지난 후였다. 다시 샤워하고 온 걸까? 침대에 올라온 기욱의 몸에서 뜨거운 물의 열기가 느껴졌다. 기욱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등을 돌린 서진을 내려다봤다.
“꼴렸어?”
등 뒤로 들리는 그 말에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도망치듯 욕실로 떠난 사람이 그게 할 말인가. 화가 난 서진이 이불을 머리까지 덮자 기욱이 다시 이불을 목 근처로 내렸다. 기욱은 서진의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니요.”
“거짓말하지 마.”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약간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있는 시트를 손가락질했다.
“여기 묻어 있는데.”
“그럴 리가 없……!”
깜짝 놀란 서진에 기욱은 손가락을 입술 근처로 가져다 대며 웃었다.
“거짓말이야.”
사람을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다. 서진은 못 참겠다며 기욱의 손을 쳐 낸 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이불을 치워 내려던 기욱은 한숨을 쉬며 이불 위에서 속삭였다.
“했어?”
위에서 들리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불 안에서 인상을 찌푸린 서진이 몸을 움츠렸다.
“다, 당신도 했잖아요! 잘 거예요!”
더 이상 손대지 말라며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기욱은 이불을 올려 쓴 서진을 그대로 안았다. 얇은 이불 바로 너머에 있는 기욱의 살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기욱은 눈을 감는 척하는 서진에게 보란 듯이 속삭였다.
“알지?”
“…….”
“너 내가 많이 참고 있는 거.”
이불 속에서 서진은 기도를 하듯 양손을 꽉 쥐었다. 도대체 왜 나란 말인가. 아직도 기욱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흔적이 서진을 괴롭혔다. 목덜미며, 다리 사이까지 마치 피부 깊이 파고든 문신과도 같았다. 서진은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하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 * *
“…차라리 이때.”
덮쳐 버렸어야 하는 건데. 사진 속 놀이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기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시절 기욱은 그래도 아직은 미성년자라며 별것도 아닌 걱정에 휩싸여 끝내 서진을 건드리지 못했다. 당시 기욱의 나이와 지금 서진의 나이는 사뭇 비슷했다.
물론, 성인이 되기 무섭게 서진을 안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었으나 어차피 할 거면 무르익었든 말든 더 일찍 하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를 할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덜 익은 과일은 덜 익은 그 자체의 매력이 있었다. 기욱이 행동을 후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더 일찍 서진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감히 제 동생과 눈이 맞을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했을 것이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었다. 자신을 저주하는 강서진이 무슨 생각으로 지난날의 사진을 가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설령 강서진이 자는 자신의 목을 조른다 해도 기욱은 서진을 용서할 자신이 있었다. 그것 또한 강서진의 한 형태라면 말이다. 사진을 제자리에 넣어 둔 기욱은 닫혀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 사이에 잠에서 깬 서진이 이불로 몸을 가린 채 기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욱은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아 서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서진아.”
“자…, 잘못했어요. 아아… 아악!”
“씻어야지?”
지옥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