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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2 (78/83)

Chapter. 72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에 있어 계단을 오르던 시헌은 위층에서 들리는 비명에 다급하게 속도를 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비명은 서윤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복도를 달린 시헌이 가장 안쪽에 문이 열려 있는 서진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피 냄새가 진동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거실 바닥을 기고 있는 서윤의 몸에 꽂힌 칼을 뽑았다. 남자의 모자가 아래로 떨어지고 시헌과 인훈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너…!! 박시헌!”

“씨발 새끼가…!”

시헌이 주먹을 쥐며 인훈과 몸싸움했다. 뒤늦게 소란스러움과 비명을 들은 서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누나 대체 무슨 일…… 누, 누나? 박시헌?”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서윤과 그런 서윤을 옆에 두고 인훈과 시헌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인훈을 본 서진이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19 부르고……!! 정신 차려! 강서진!!”

“시, 시헌…….”

소란을 눈치챈 사람들이 몰려들며 다급하게 119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서진이 응급처치를 하는 사이 시헌과 인훈이 바닥을 굴렀다. 칼을 손에 쥐고 있는 인훈에게 함부로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윽….”

인훈을 벽으로 몰아붙인 뒤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닥을 뒹굴었고, 밑으로 깔린 시헌의 목 근처로 칼이 다가왔다.

“씨발…!”

“너 때문에…!! 서진이가, 강서진은 내 거라고!”

“미친 새끼가… 윽…! 강서진 이쪽 보지 마!!”

시헌이 신경 쓰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시헌과 인훈의 몸싸움이 이어지며 인훈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이 서윤에게 다가왔지만, 큰 방으로 들어가 싸우고 있는 시헌과 인훈을 도와주러 갈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안쪽 방에서 다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큰 방 입구에서 인훈이 떨어트린 칼을 들었다.

“…윽… 으윽….”

“강서진, 강서진….”

“네가….”

“야야, 하지 마!!”

거실에 있는 두 명의 사람들은 서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쯤 정신을 잃으며 칼을 쥔 서진을 보고 당황한 시헌이 서진을 말렸다. 시헌이 등을 돌린 틈을 타 주먹을 휘두르려 인훈이 다가왔고, 순식간에 세 사람이 넘어지며 방 안이 난장판이 됐다.

“허윽….”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넘어지면서 서진의 손에 있던 칼이 인훈의 목에 박혔다. 칼날을 타고 검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진의 손이 인훈의 목에 있는 칼을 쥐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시헌이 서진을 밀어냈다.

“…나… 내가….”

“나가, 누나 챙기라고!”

거실에는 경찰과 구급대원이 와 있었다. 서진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서윤에게 다가갔고, 홀로 남겨진 시헌은 목에 칼이 박힌 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인훈을 내려다봤다.

“…어… 강… 윽, 서진은… 내 거… 야.”

시헌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빠르게 교차하며 지나갔다. 불가항력이었다고 해도 서진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들고 들어온 건 사실이었다. 한때, 그리고 아직도 마음 한구석으로 서진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서진이 살인자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제길…!!”

시헌은 이를 악물며 인훈은 목에 걸린 칼을 빼냈다. 목에 있던 피가 분수처럼 튀며 시헌의 시야를 빨갛게 가렸다.

* * *

J대 병원 외상센터는 유례없는 소란이 일어났다. 시헌은 수술실로 들어간 서윤과 수술실로 들어가겠다며 난리를 치는 서진을 말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강 선생님. 제발 진정 좀 하세요! 네?”

“놔, 놓으라고…!!”

“아 진짜, 교수님들이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나가…….”

뒤늦게 서진이 해당 병원의 전문의라는 걸 안 형사들은 자기네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며 반쯤 포기한 듯 혀를 내둘렀다.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했지만……. 당장 수술에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아, 그렇군요,”

형사가 유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상태가 워낙 좋지 않은 데다 대부분의 메인 의료진들이 서윤의 수술에 매달려 있어 수술방을 열어도 만약의 사태에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섭은 형사에게 굳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섭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상황은 서윤의 수술이 진행되는 사이 응급처치를 해 놓은 인훈의 상태가 호전돼 수술이 끝나자마자 이어서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담당 형사와 짧은 대화를 마친 지섭은 입구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는 서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갈 거라고 했잖아요!”

“아, 제발….”

“야, 강서진!!”

“형, 아 진짜. 제발, 우리 누나 어떻게…… 나 좀 들여보내… 어윽….”

지섭을 발견한 서진이 매달리자 지섭은 서진의 무릎을 발로 강하게 찼다. 지섭에게 맞은 것보다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의사가 됐는데, 정작 이런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발 늦게 인훈에게서 손을 뗀 시헌이 바닥에 있는 서진에게 다가갔다. 지금 병원이 무슨 꼴인지 알고는 있을까? 서윤의 수술에 병원에서 내로라는 교수들이 전부 매달리고 있었다. 우민이 죽은 게 사고든 아니든 다시는 병원 관계자가 죽어 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우, 지금 우리 교수님에 임 교수님도 들어가 계시는 거 알잖아.”

“그거야…….”

“네가 들어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다는 건데?”

“……죄송해요.”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형사 한 명이 마스크를 살짝 내린 시헌의 얼굴을 알아봤다.

“혹시 현장에서 말입니다…….”

그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난데없이 간호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마침 입구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잘됐다며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박 선생, 도 선생님 교수님들이 빨리 들어오래요!!”

“제길.”

이럴 줄 알았다며 지섭이 가장 먼저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엄청 급하긴 한 모양인지 간호사가 시헌을 향해 빨리 오라며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안 됩니다. 이 사람은…….”

탁, 하고 시헌이 거칠게 형사의 손을 뿌리쳤다.

“도망가는 거 아닙니다.”

시헌 또한 간호사를 따라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1분이, 1초 같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상황을 봐 주겠다는 연태의 덕에 서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센터 안에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센터에서 일하며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중에 아무도 서진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형사가 하나가 서진에게 밖에서 사 온 찬 커피 캔을 건넸다. 서진은 제 앞으로 내민 커피 캔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본인이 캔을 뜯어 비운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현장에 있던 용의자 말인데요. 방 안에 있던 목격자 말로는 당신이 칼을 들고 들어갔다고 하던데…….”

“…….”

하하, 이럴 줄 알았다. 사고라고 해도 칼을 들고 인훈을 죽일 생각으로 들어간 건 사실이었다. 아니,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진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훈이 서윤과 같은 병원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로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인훈을 치료하고 있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은 서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형사를 올려다봤다. 서진의 살기에 흠칫 놀란 형사가 커피 캔에서 입술을 뗐다.

“당신이…….”

“제가 했습니다.”

“너… 누나는….”

“잠깐 나온 거야. 아직 장담 못 해.”

시헌의 단호한 태도에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던 서진이 다시 주저앉았다. 서진을 추궁하려 시도한 형사는 수술실에 들어가려는 시헌을 붙잡았던 형사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선생님!! 막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또다시 입구 쪽에서 소란이 났다. 눈을 돌린 시헌은 사람들 틈 사이에 있는 기욱의 모습을 포착하고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기욱의 출입을 막으려던 사람들도 피범벅이 된 기욱의 상태를 본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무릎을 꿇은 기욱이 시헌의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유리창 너머로 엉망으로 서 있는 정체불명의 차 한 대가 있었다. 서윤이 칼에 찔리고, 병원이 난리가 났는데 이제야 나타나는 기욱이 시헌은 어이가 없었다.

“형!! 대체 뭐 하고 다니는…….”

“…서… 진이는?”

“잠깐만 형, 제길 여기 누가 좀 도와줘요!!!”

아무래도 단순한 상처 같지 않아 보였던 시헌이 안으로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불렀다. 기욱의 몸이 힘없이 시헌 쪽으로 쓰러졌다. 피범벅이 된 기욱의 셔츠를 뜯어 상처를 본 시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침대가 오고 몇몇 의사들이 뛰어왔다. 기욱을 간신히 침대에 올리고 안쪽으로 이송함과 동시에 머리 위쪽으로 병원 전체 안내방송이 울렸다. 세 번의 벨 소리, 불길함이 사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시헌이 짧은 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TICU[Trauma Intensive Care Unit] : 외상 중환자실

*Code Blue : 심폐소생술을 하는 상황

예상대로의 방송에 시헌이 인상을 구겼다. 심정지가 일어난 환자가 지섭과 시헌이 애를 써서 올린 조인훈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씨발…! 누가 C라인 잡을 수 있는 사람 좀 잡아 봐!”

“야야, 박시헌 너 뭐 하는데…!”

손을 넘긴 시헌이 다급하게 근처에 있는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하루 이상 연락이 안 됐던 걸로도 부족해 도대체 어디서 총을 맞고 온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시헌은 이 상황을 도무지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헌이 비상 호출 번호를 누르자 다시 한번 안내 방송 음이 울렸다. 병원 전체를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맞춰 숨을 고른 시헌이 인터폰에 입을 가져다 댔다.

<트라우마 센터, *Code Black…….>

*Code Black : 의료진이 부족해 환자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

* * *

수술실 문이 열리며 시헌과 지섭은 거의 동시에 각자의 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지섭과 시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딱 붙어 같은 속도로 긴 복도를 걸었다. 지섭이 자신보다 키가 작은 시헌을 슬쩍 내려다보며 짧게 입을 뗐다.

“형은?”

“괜찮아요. 교수님 쪽은요?”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달이 지났고, 시헌은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총상의 상처 부위가 터져 급하게 수술실에 들어간 기욱과 달리 서윤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살릴 수 있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갈지 다들 걱정이 많았다. 걸음을 걸으며 지섭은 어두운 표정으로 서윤의 상태를 말해 줬다. 서윤의 상태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지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들도 서윤이 이렇게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면…….”

“최 교수님이 그러시더라. 슬슬 결정하거나 마음 정리를 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더는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대.”

“아…… 최 교수님은요?”

“지금 강서진이랑 면담하고 있어.”

걸음을 멈추던 시헌이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지섭도 유감이라는 말밖에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한대요?”

“길어야 6시간 정도. 그것도 간당간당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또 수술실에 들어간 기욱 때문에 난리가 났을 가족과 서진을 생각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쨌든 가 보기는 해야 했기에 시헌의 걸음은 좋든 싫든 서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 가요?”

당연히 같이 갈 줄 알았던 지섭이 방향을 틀자 시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좀 볼일이 있어서. 금방 갈게.”

“아, 네네.”

시헌은 나중에 보자며 고개를 끄덕인 뒤 입원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윤이 쓰러지고 난 뒤, 무리하게 일을 한 서진은 몇 번인가 쓰러져 병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리해서라도 쉬지 않고 뭔가 몰두할 것을 찾는 건 서진의 오랜 습관이었다. 결국, 병원 차원에서 임시 정직을 시킨 뒤 병원에 입원을 결정했다. 서진이 쓰러진 것이 과로를 포함한 영양실조도 겸하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그동안 몇몇 간호사들이 본 자살미수 건도 포함이 됐다.

병실에서 도망 나온 기욱이 쓰러진 것도 서윤이 수술실에 들어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서진을 보러 가려 나온 것이었다. 이젠 정말로 각오를 해야 한다는 지섭의 말에 시헌은 주먹을 꽉 쥐며 서진의 병실 문을 열었다. 시헌이 오기 전부터 열려 있는 문 너머는 시장바닥처럼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살려, 살리라고! 미쳤어? 누나 살려요. 미쳤어요, 지금?”

“우리도 많이 고민하고 선택한 거야. 알잖아.”

“그래서? 누나 죽이고, 자식이라도 살리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너도 의사잖아. 얘기 들어서 알잖아! 누군들 올케가 죽길 원하는 줄 알아?”

서윤의 배 속에 있는 아이와 서윤, 둘 중 하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한쪽이 살면 필연적으로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쪽이 죽는다 해서 다른 한쪽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느 쪽이든 큰 수술이었고, 하연의 말대로 서윤의 경과를 지켜본 서진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본다면 서윤을 살리는 것보다 배 속의 아이를 살리는 것이 더 가능성이 컸다.

“아아….”

그사이 비쩍 마른 서진이 양손으로 얼굴을 더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우민의 죽음에 정신이 팔렸었던 제 잘못이다. 그래, 원인을 따지자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우민이 죽은 것도, 그 당시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도 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이니라. 서진은 미칠 것만 같았다.

“누나가… 누나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개를 든 서진이 가운 차림의 시헌과 눈을 마주쳤다. 갈 곳 없는 자의 눈빛을 서진은 잘 알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하고 있었지만, 시헌은 서진과 자신의 사이에 두꺼운 유리벽이 생긴 것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진을 잠깐 서진이 혼자 있게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누나, 조금만…….”

하윤에게 다가간 시헌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았어. 대신에 잠깐만이야.”

시헌을 대신에 하연이 집안 어른들을 설득했다. 사람들이 나가고 갑자기 좁은 병실이 확 넓어졌다. 마지막 사람까지 나가고, 시헌은 완전히 문을 닫고 서진이 앉아 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침대에서 몸을 내민 서진이 시헌의 옷과 함께 몸을 잡아당겼다.

“시… 헌아….”

서진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시헌은 목이 멨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서진의 목에 팔을 두르며 제 품에 안았다. 시헌도 지섭에게 들어서,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번 서윤의 기록을 살폈다. 아마 서진은 시헌보다 병원의 그 누구보다도 서윤이 가망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머리는 알고 있는데, 마음이 용서를 하지 않았다.

“아아… 흐윽… 시헌아, 시헌아… 시헌아….”

시헌의 품에 안긴 서진은 계속해서 그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서진에게 있어서 박시헌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마법 같은 사람이었다. 세상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표정 변화도 없고, 모든 것이 재미없어 보이는 사람 같아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주변에 관심이 많고 섬세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시헌이 그렇게 말을 하면 정말로 어떻게든 해결이 됐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반평생을 동굴 속에서 살아온 것 같은 세상에서 살아왔다. 우민과 사귀기 시작하고 빛을 보는 줄 알았는데 빛이 아닌 낭떠러지였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떠나갔다. 제 인생은 저주를 받은 게 틀림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았던 삶은 이윽고 주변 사람들의 피를 말렸다. 자신에게 남은 거라고는 이제 눈앞에 있는 시헌밖에 없었다.

“시헌아, 제발. 살려 줘…….”

시헌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신이 아니었다. 아픔의 크기는 달라도 서윤의 죽음이 많은 사람이 힘들게 결정을 한 사실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진아.”

시헌이 입을 다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각 과에서 내로라하는 교수들이 한 달을 넘게 붙어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시헌은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그만하자.”

“아아, 으으윽… 아아아아아악!”

우민의 죽음 이후로 차마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서진을 미치게 했다.

* * *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수술복만큼이나 익숙해진 환자복을 입은 서진은 인형처럼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옥상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중에 환자는 없었다. 사실상 의료진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잠시 쉬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으로 환자에게 개방된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앉아 있는 서진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끼익, 요란한 철문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사복 차림의 기욱이 다가왔다.

기욱과 서진을 알아본 몇몇 의사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서진의 근처로 다가간 기욱은 입을 꾹 다물며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서진은 그런 기욱을 눈 아래로 슬쩍 흘겨보더니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자리를 뜰 타이밍을 놓친 채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의사가 기욱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바닥이 아플 텐데 기욱은 꽤 오래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만에 기욱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미안하다.”

그 말은 서진이 수도 없이 기욱에게 해 왔던 말이었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 원하지 않은 서진을 기욱이 안을 때마다 서진은 몇 번이고 하지도 않은 잘못에 용서를 구하며 애원했다. 자신은 도대체 박기욱에게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런데도 기욱은 매정했고, 한 번도 서진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런 기욱이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서진이 기욱을 만나고 난 뒤 단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고개를 돌린 서진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우는 것만 반복해 가늘어진 몸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기욱을 향해 발길질했다. 발을 휘두르고, 머리채를 잡고, 또다시 발길질해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서진은 뒤늦게 우민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냈다. 병원에 도는 소문 같은 것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우민은 기욱의 부탁을 받고, 자료를 건네주러 갔다 사고를 위장한 살해를 당한 것이었다.

“네가, 네가 죽었어야 했어!!!”

“미안하다.”

“씨발, 네가. 네가 당신이…!! 죽어야 했다고!!!”

“미안하다. 진심으로.”

목이 멨다. 처음부터 제 잘못이었다. 개인적인 호기심과 이기심으로 서진과 주변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한 번도 강서진을 똑바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저 제 갈증을 채우며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기 바빴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 서진은 기욱에게 사과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 별장에서 지독하게 당했을 때도,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눈물을 흘렸을 때도, 우민의 앞에서 자신을 안았을 때도……. 그리고 우민이 죽었을 때도 그랬다. 그래도 한 번쯤은 사과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때려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계속되는 폭력에 놀란 의사가 뛰어와 서진을 말렸다. 서진은 그를 뿌리치며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기욱의 멱살을 붙잡았다.

미안하다. 그건, 서진이 기욱에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 말을, 왜!!”

“…….”

“왜 지금 하냐고!!!”

만약 조금 더 일찍 했다면, 우리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미치도록 후회가 들었다.

* * *

서윤의 장례식은 서진의 부탁으로 비교적 조용히 치러졌다. 서윤의 유골함을 품에 안은 서진은 기욱을 보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둘만 있게 해 주세요.”

“그게 지금…….”

“누나, 그만해. 알아서 하게 둬.”

시헌이 하윤과 집안 어른들을 말렸다. 서진이 선택한 사람이 왜 하필 기욱인지는 시헌도 모른다. 그러나 시헌은 서진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문 서진은 기욱의 차로 다가갔다. 기욱이 차 문을 열어 주자, 서진이 기다렸다는 듯 조수석에 탔다. 알아서 하겠다며 눈치를 준 뒤 기욱 또한 운전석에 앉았다.

“어디로 갈 건데.”

기욱은 서진에게 안전벨트를 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차를 출발시켜 산 아래로 내려왔다. 여전히 서진은 창밖을 보며 말이 없었다. 기욱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결이야.”

“……?”

뜬금없는 기욱의 말에 영문을 모르는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기욱은 운전대를 붙잡으며 속도를 늦췄다.

“아들 이름.”

“…….”

“내가 지은 거 아니야.”

서윤도 그 이름으로 해야지 하고 기욱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서윤과 사귀었을 당시 애가 생기면 그런 이름으로 하자고 했던 것이 떠올라 정했을 뿐이었다. 기욱은 그런 사실을 굳이 서진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서진은 서윤의 유골함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저요, 누나가 행복하길 바랐어요.”

“……알아.”

“근데 그게 다 자기만족이더라구요.”

서진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린 시절의 욕심으로 누군가를 몰아붙인 건 비단 기욱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 애정을 서윤에게서 찾았다. 그런 서진의 비틀린 집착을 기욱은 교묘하게 이용했다. 서진의 서윤이 행복하길 바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진심으로 서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서진의 이기심일 뿐이었다.

이제 그만 울 때도 됐는데 또 눈물이 났다. 서진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몇 번이나 입을 벙끗거렸다. 할 말이 있는데, 목이 메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말을 꺼냈다.

“나는… 누나가… 흐윽… 누나의 유골 하나 뿌릴 장소도… 끅… 떠오르지 않아요.”

서윤의 행복 이전에 서윤에 대해서 조금 더 배려를 해야 했다. 서윤이 행복하길 바랐다면, 아무리 서윤의 선택이라 해도 박기욱 같은 사람과 어울리게 둬서는 안 됐다. 서윤과 그런 일로 싸우고, 그렇게 우는 서윤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몰랐다. 전부 제 잘못이었다.

간신히 꺼낸 서진의 말에 기욱은 차를 돌렸다. 어디로 간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한 시간을 좀 넘게 달리니 차창 너머로 바다 냄새가 났다. 차를 대고, 기욱을 따라가니 벼랑이 나왔다. 아래쪽으로 바람과 함께 거친 파도가 일고 있었다.

“서윤이가 좋아했던 장소야.”

“……저랑은 온 적 없잖아요.”

“나는 안 좋아했으니까.”

기욱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기욱은 많은 시간 동안 제가 좋아하는 장소에 서진을 강제로 데리고 갔다. 서진이 와 본 기억이 없는 건 서윤이 좋아했던 곳이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다시 서윤의 생각에 눈물이 났다.

“흐윽… 윽….”

“무리면 안 해도 돼.”

“괜찮아요.”

할 수 있다. 제가 해야만 한다. 최소한 마지막이라도 이렇게 보내 주고 싶었다. 이 절벽이, 이제는 제가 좋아하는 장소가 되길 바라며 서진은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

마지막이라도 편안하게 잠들기를.

* * *

“괜찮아?”

“그럭저럭요.”

서윤의 유골을 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비가 왔다. 많이 내린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서 있을 수도 없었던 노릇이라 서진과 기욱은 차로 돌아왔다. 기욱은 서윤의 유골을 뿌렸다고 서진을 대신해 하연에게 연락을 보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빗물에 얼굴이 젖은 것도 있었지만, 피곤함에 지친 서진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며 살짝 눈을 감았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뒤에야 서진이 잠든 걸 눈치챈 기욱은 졸음쉼터 한쪽에 차를 댄 뒤 서진에게 다가갔다. 긴장이 풀린 걸까? 얼굴이 반쪽이 된 서진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조용히 안전벨트를 메 준 뒤 품에 안고 있던 유골함을 뒷좌석으로 옮겼다. 어린애 같은 그 모습에 기욱은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사랑해.”

설령 그 사랑이 어떻게 비치든 상관없었다. 서진이 저를 평생 원망해도 상관없다. 그 집착이, 강서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아픔들이 모두 서진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다.

끼이익―

거친 소리와 함께 우민을 쳤던 트럭과 비슷한 트럭이 두 사람이 타고 있던 자동차를 밀어냈다. 가드레일을 박으며 기욱의 차량이 도로 아래쪽으로 굴렀다.

“으윽….”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아, 선배도 이런 느낌이었나? 거참 더럽게 아프다 갔겠군. 안전벨트를 하고 있던 서진은 잠이 든 채로 의식을 잃었다. 넘어지면서 차에 박힌 나뭇가지가 서진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기욱의 다리가 끼어 움직이지 않았다.

“서진아… 윽….”

온몸에 피를 흘리며 영영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서진을 향해 팔을 뻗었다. 기욱에게 서진은 처음부터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손을 뻗어 닿을 것 같은 순간 뒤로 물러서 사라지고 없는 존재였다. 그런 서진이, 이제야 조금 닿을 것 같았다. 너에 대해 알 것 같은데 너는 또다시 이런 식으로 멀어지고 말았다.

기욱과 서진을 찾는 듯 신고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서진에게 다가간 기욱은 서진을 안은 채 그 입술을 덮었다.

강서진.

수도 없이 불러 왔던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 * *

시헌이 코드 블랙을 선언한 뒤 몇 달간 조용한가 싶더니 별안간 사고가 터졌다. 기욱과 서진의 교통사고, 그중에서도 이번엔 서진의 상태가 심각했다. 이를 악물며 일어서려는 의료진들이 기욱을 진정시키고 말리기를 반복할 무렵 기욱은 급하게 내려온 의사 하나를 붙잡았다.

“교수님 제발….”

간호사가 진심으로 애원하듯 말했지만, 기욱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30초만, 그가 멀리 있는 의사들을 향해 사인한 뒤 기욱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몸을 숙였다.

흉부외과 과장 정석빈.

기욱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던 편이지만, 각 과를 대표하는 병원 의사들의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기욱은 할 말이 있다며 손을 까닥였다. 기욱의 입술 근처로 귀를 가져다 댄 석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하시는 겁니까?”

“내가… 윽… 농담하는 거로 보여?”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설령 그렇다 해도…….”

“부탁할 테니까…….”

“교수님!!”

레지던트 하나가 빨리 오라며 석빈을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기욱에게서 떨어져 서진에게 간 뒤에도 석빈은 기욱의 말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박기욱은 과연 그 말을 제정신으로 했던 걸까?

* * *

중환자실을 나온 서진은 몇 시간 전쯤에 일반 병동으로 옮겼다. 병동을 옮긴 서진의 상태를 보려 레지던트 하나가 와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서진은 그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정 교수님 불러와요.”

“네?”

막 1년 차가 된 그가 담당한 환자 중에서는 가장 큰 케이스였던 그는 서진의 말에 당황했다. 딱 봐도 초년차 같은데, 서진은 사정 모르는 사람에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할 기분이 아니었다. 여전히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정석빈 교수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일단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제가 정 교수님에게는…….”

“…….”

서진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레지던트를 노려봤다. 뒤늦게 서진이 의사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그가 정신을 차리며 말을 다듬었다.

“정 교수님 금방 회진하러 오실 거예요. 그때…….”

“야.”

“부, 불러올게요!”

서진의 목소리에 그가 잔뜩 졸아 후다닥 병실을 나갔다. 도망치듯 젊은 레지던트가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석빈이 병실로 들어왔다.

“나 불렀다고 들었어.”

“…….”

“그렇게 인상 찌푸리지 마. 우리 애가 잘 몰라서 그러니까 이해 좀 해 줘라.”

“어디서 저런 답도 없는 녀석을……. 됐어요.”

오랫동안 원하지 않은 환자 생활을 해 와서 그런지 서진은 이제 뭐든지 다 지긋지긋했다. 의사로서 환자를 내려다보는 것과 환자로서 의사를 올려다보는 건 사뭇 그 느낌이 달랐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아직도 한 교수님, 사랑해요?”

우민의 이름이 나오자 어깨에 잔뜩 힘을 줬던 석빈의 힘이 풀렸다. 석빈이 서진이 앉아 있는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석빈은 서진이 병원 알바로 왔을 때를 똑똑하게 기억했다. 씁쓸하지만, 그때부터 두 사람이 잘 맞을 거라는 생각을 해 왔었다. 우민의 장례식에서 서진과 우민이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도 석빈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적어도 석빈이 느끼기에 그 자리에서 서진은 누구보다도 우민의 죽음을 믿지 못했고, 또 가장 많이 아파했으며 슬퍼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우민을 향한 아픔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서진이 우민을 사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젠 결혼을 하고, 애까지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한우민이라는 사람의 앙금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 사랑보다 서진 우민을 향한 사랑이 더 컸을 뿐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한발 떨어져 행복하길 바라는 것도 또 하나의 다른 이름의 가슴 아픈 사랑이었다.

“저도, 알아요.”

“…….”

“교수님이 한 교수님 많이 사랑했다는 거.”

우민의 장례식에서 석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진이 무릎을 꿇은 채 우민의 죽음에 분노했지만, 서진이 처음 온 그 순간부터 구석에 앉아 있던 석빈은 그저 앉아 혼자 끊임없이 술을 마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민을 애도하고 달랬다.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뿐 서진이 기욱에게 화를 내고 몇 번이나 장례식장에 소란이 일었을 때도 석빈은 있었다. 그래서 알았다. 아, 이 사람은 정말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우민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사랑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너는 사랑해?”

“사랑해요.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상처투성이에 모순투성이인 자신을 우민은 있는 그대로 봐 줬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며. 강서진이라는 인물을 그 자체로 좋아하고 받아들여 준 사람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우민과 박시헌뿐이었다. 그리고 서진은 그런 우민을 평생 마음속에 묻고 가야 했다. 몸을 돌린 서진이 다가오는 석빈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걸 알면서!! 왜, 왜 절 살렸어요!! 왜!!!”

서윤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오는 길, 서진과 기욱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우민을 친 트럭과 비슷한 수법의 교통사고였다. 운이 좋은 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금방 신고를 했다는 것과 J대 병원에서 헬기로 2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거리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점뿐이었다. 커다란 나뭇가지가 서진의 심장을 관통했고, 기욱은 머리를 심하게 다쳐 들어왔다. 언젠가 기욱의 지갑에서 장기기증 카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통사고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서진은 무척이나 피곤했고, 긴장이 풀려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다. 차라리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걸.

“한 교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왜!!”

“…….”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어!! 그러면 우민을 사랑하는 강서진으로 영원히 남아 있었을 텐데!!!”

“먼저 검사를 해 보라고 한 건 박 교수님이었어, 이런 사례는 없어서 놀랐고. 살아난 건 기적이야.”

“그런 기적!! 필요 없다고! 누가 그런 거 알고 싶다 그랬어?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나 혼자 대체 어떻게 하라고!!!”

사는 게 죽는 것만큼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죽어 나가는데 왜 자신만 이렇게 끔찍한 형태로 살아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서진에게 이 세상은 아름답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아픔의 연속이었다.

석빈도 강서진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우민의 죽음 충격을 잊지 못하고 과도하게 근무를 해 몇 번이나 쓰러진 적이 있었던 서진은 과장급 회의에서도 몇 번인가 골치가 아프다며 언급이 됐다. 서윤과 배 안에 있는 아이를 놓고 해서는 안 되는 저울질을 했을 때도 따라 죽겠다며 난리를 피운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석빈은 제 멱살을 잡는 서진을 떼어 놓으며 있는 힘껏 손으로 뺨을 후렸다.

“그렇게 죽으면 한 선배가 좋아할 것 같아?”

“당신은 몰라, 당신이 나에 대해서…….”

“몰라.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평생 모르겠지. 박기욱이 너한테 어떤 존재인지 나는 모를 거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근데 그래도 네가 한 선배를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알아.”

“…….”

“박 교수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도 알아.”

“그런 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흐윽…….”

“한 선배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다. 내가 아는 선배는, 그런 사람이거든.”

석빈이 눈물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 서진의 머리가 앞쪽으로 쓰러지자 놀란 석빈이 서진을 안았다. 이내 일부러 몸을 기울어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흐윽… 으으으윽… 허으으으윽…….”

서진은 그 상태로 석빈의 가운 자락을 쥐며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없다. 이런 세상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이 나오지 않았다.

* * *

퇴원한 서진은 정말 오랜만에 집에 왔다. 집이라고 해 봤자 월세만 간신히 내고 교통사고를 당한 뒤 찾지 않아 사실상 몇 개월 만에 집에 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원에 있는 서진을 대신해 이전에 우민의 오피스텔에서 서진의 짐을 받아 와 옮겨 준 것은 시헌이었다. 덕분에 서진의 원룸은 몇 개월 된 원룸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자들만 가득한 새집이나 다름없었다.

“하아….”

숨을 쉴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퇴원 직전 서진을 방문한 규건과 진호가 상태가 좋아진 뒤에 제가 원하면 병원에 복귀할 수 있도록 힘을 써 보겠다고 말했다. 신경외과에 기욱과 우민의 공백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형식상 알겠다고 말은 했지만, 서진은 신경외과로 복귀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었다.

서진이 지원한 과는 신경외과가 아닌 외과와 응급의학과였다. 뭘 해도 잘 열심히 하는 편인 데다 신경외과도 결국은 외과의라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박기욱이 없는 지금 신경외과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음에도 살 수밖에 없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다. 어렸을 때는 의사, 의대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 뒤에는 남들처럼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레지던트가 됐고 서윤과 같은 J대 병원에서 일하는 걸 목표로 J대 병원에 들어왔다. 그렇게 서진은 목표했던 모든 것을 이뤘다.

후회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슴 한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린 시절 자신이 의사를 목표로 했던 이유 역시 단순했다. 서윤이 자신 때문에 의대에 진학을 못 했으니까, 서윤이 J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옆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의 인생의 대부분은 서윤이 원인이었다. 톱니바퀴의 바퀴들이 산산조각 무너진 것만 같았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 서진에게 전화가 왔다.

“네? 법원이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온 연락에 서진은 잠시 통화를 붙잡았다. 전화를 끝마친 서진은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 때나 와도 된다고 그랬다는 건 오늘 방문해도 상관없겠다는 뜻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법원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전화를 거니 직원 하나가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강서진 씨 맞으시죠?”

“그런데요.”

“사건 담당하신 검사님께서 현장에 있는 물건은 토씨 하나 빠트리지 말고 건네 드리라고 하셨어요.”

“저한테요?”

무슨 사건인지는 몰라도 왜 하필 자신인 거지? 서진은 그런 말은 건네 들은 기억이 없었다. 아무렴 직원은 강서진이라는 사람에게 해당 자료를 꼭 건네 달라고 부탁을 받았기에 서진에게 상자를 줄 수밖에 없었다. 상자 안에는 당시 우민의 차 안에 있었던 물건들과 서류 파일들이 담겨 있었다. 서진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교통사고가 난 뒤 우민의 물건들은 유실이 되어 가족들조차 건네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걸 사고가 나고 1년이 가까이 된 지금 자신에게 준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서진은 상자에 적힌 담당 검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지희열. 이런 사람은 모른다. 생판 모르는 검사가 어떻게 알고 우민의 물건을 자신에게 준단 말인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멍하니 상자를 들고 있는 서진을 두고 남자가 멋대로 말을 했다.

“휴대폰은 디지털 포렌식 돌린 내용의 전문이구요. 외부에 유출만 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그…… 차에 케이크가 있었는데.”

“케이크요…?”

“네네. 워낙 차량 상태가 안 좋고 그래서 다 뒤집히고, 음식이잖아요. 그래서 그냥 사진만 남겨 놨어요. 검사님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나도 빠짐없이 건네주라고 하셨거든요.”

그는 서진에게 상자를 건네며 계속해서 담당 검사의 명령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정작 서진과 지희열이라는 사람은 일면식도 없었다. 서진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우민의 차 안에서 케이크가 발견됐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 케이크라는 단어가, 서진의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맴돌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하하, 네. 감사해요.”

저도 모르게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서진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상자를 챙겼다. 집으로 돌아와 상자를 열어 봤다. 우민의 차에 늘 있던 잡동사니에 가까운 물건들이 흙먼지가 잔뜩 묻어 나왔다.

그리고 남자가 말한 다 부서진 케이크 사진 또한 있었다. 사진 속 케이크에 서진은 사진을 품에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아, 으윽…… 으으윽…….”

그날은 서진의 생일이었다. 병원에 오면 12시가 지날 걸 알면서도 우민은 서진의 케이크를 사 집에 가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서진은 우민의 휴대폰을 복구한 파일들을 살폈다. 서진과의 통화 내역, 문자 어느 것 하나 우민의 휴대폰이 맞았다. 그리고 서진의 시선을 붙잡는 건 통화를 끊고 난 뒤 우민의 휴대폰 메시지 임시저장함에 있던 문자였다.

<ㅅ라ㅇ해 긍ㄱㅇ방 갈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문자를 친 우민은 마지막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끝까지 보내지 못한 문자를 이제라도 읽게 된 서진은 서류를 쥐며 눈물을 흘렸다.

“저도… 사랑해요.”

닿지 않을 목소리를,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또 했다. 조금 진정이 된 서진은 상자 안쪽에서 전혀 뜻밖의 물건을 꺼냈다. 피가 눌어붙어 있었지만,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작은 상자였다. 상자를 연 서진은 깊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넥타이와 비싸 보이는 넥타이핀, 그리고 브랜드 양복점의 영수증이 나왔다. 서진은 그 선물이 당연히 우민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 * *

영수증을 보고 전화를 한 뒤 서진은 백화점의 한 양복가게로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여기가 맞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서진이 직원에게 영수증을 보여 줬다. 여직원이 통화한 서진을 기억한 듯 손뼉을 쳤다.

“아! 강서진 씨 맞으시죠?”

“네.”

“안내해 드릴게요. 돈을 많이 지불하셔서, 어떻게든 연락을 해 보려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 많이 했어요.”

이렇게라도 와 줘서 고맙다며 그녀는 서진을 안쪽에 있는 피팅룸으로 이끌었다. 이미 디자인은 다 정해져 있는 모양이라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치수만 쟀다.

“두 달 정도 걸리실 거예요.”

“네, 감사해요.”

인사를 한 뒤 양복점을 나왔다. 시간은 생각보다 일찍 지나갔다. 삶에 목표가 없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집에 있던 서진은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가격도 가격이고, 연락이 안 됐던 기간이 워낙 길었던 터라 본사 쪽에서도 신경을 써 예정보다 2주 정도 빨리 완성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서진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시키는 대로 매장에 방문했다. 1년도 더 전에 주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양복은 마치 서진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서진에게 잘 어울렸다. 서진은 상자 안에 있던 넥타이와 넥타이핀을 같이 멨다.

“여기 사인 한번만 해 주실래요?”

그녀의 부탁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쥐었다. 그녀가 빼곡하게 적힌 장부 중에서 유일하게 비어 있는 공란을 손가락질했다. 아무렇지 않게 시키는 대로 사인을 하려던 서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사람이에요?”

“돈 지불하고 가신 사람 이름이에요. 박기욱 씨 아닌가요?”

“……마, 맞아요.”

뭔가 잘못됐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던 서진은 그녀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 챙겨 드릴까요?”

“그냥 갈게요. 들를 데가 있어서요.”

밖으로 나온 서진은 기욱의 차와 똑같은 외제차 한 대를 렌트한 뒤 운전을 했다. 말없이 운전한 뒤 두 시간여 만에 도착한 곳은 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납골당이었다. 주차한 뒤 납골당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의 장례식 때, 기욱의 심장을 이식한 서진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기욱이 사망한 이후 거짓말처럼 회복이 됐다. 서진이 기욱의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당연히 우민이 준비한 옷인 줄 알았다. 그 상자가 왜 그날 우민의 차 안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우민이 죽은 뒤에도 말할 타이밍은 있었을 텐데 기욱은 끝까지 상자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은 채 떠났다.

그것은, 우민이 서진에게 주는 선물이 아닌 기욱이 서진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기욱이 고른 정장을 챙겨 입은 서진은 납골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안쪽 자리에 유리창 너머로 당신의 사진이 보였다.

그 사진은 중학교 시절의 서진이 기욱을 처음 봤을 때, 너무나 먼 당신의 20대 시절의 모습이었다. 꽃조차 챙겨 오지 않은 서진은 주먹을 유리 앞으로 가져다 댔다.

“씨발 새끼…, 씨발…!!”

몇 번이나 유리가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주먹으로 두꺼운 유리를 내려쳤다. 미동조차 하지 않은 유리에 머리를 박던 서진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죽으란다고 진짜 죽냐?”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을 거면 혼자 죽던가. 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너무나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열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흐윽… 으으윽……… 아아… 끄윽…….”

서진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우민과 서윤의 장례식에서 흘렸던 눈물보다 더 진한 눈물이었다.

이것은 나와, 누나.

그리고 그와 그의 동생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서진은 빌고 또 빌었다.

그의 사진 앞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이

최소한 너를 위한 마지막 랩소디가 되길,

Epilogue. 남겨진 자

응급실의 복도를 걸어 나온 서진은 하품하며 데스크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라면을 먹고 있던 응급의학과 부교수인 재혁과 눈이 맞았다. 서진은 태연하게 들고 온 작은 오렌지 주스 하나를 재혁의 책상 위로 탁, 올려놓았다.

“나 들어간다. 고생해.”

“아, 예. 들어가요.”

“저녁에 봐.”

말이 그렇지 밤새 당직실에서 자고, 아침에서야 미적미적 나와 퇴근한다고 하는 서진은 응급실엔 사실상 얼굴을 비치러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혁의 옆에 앉은 인턴 하나가 그런 서진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제 막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을 갓 시작한 그는 서진의 태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비교적 재혁과 친한 인턴이 은근슬쩍 재혁을 떴다.

“강 선생님, 집에 자주 들어가시네요.”

“자주는 얼어 죽을. 3일 만에 가는 거잖아.”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집에 언제 들어가셨는데요?”

“나? 난 저번 달이었나? 몰라, 기억 안 나는데.”

“저는 오늘 2주하고 3일째인데요.”

그가 재혁을 향해 불만이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순식간에 면을 다 먹은 재혁은 서진이 사다 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초턴부터 ER이라니, 이러다가 EM 인턴 기간 동안 한 번도 집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닌지 몰라요.”

“나도 그랬다.”

“분명히 칼퇴라 그랬는데…….”

“그거는 의대에서나 통하는 입에 발린 얘기잖아.”

“그래서 교수님은 EM 전공하시는 거예요?”

“인턴 훅 가 인마, 당장 전공 선택은 해야 하는데 뭐 맘에 드는 거는 하나도 없지. 내가 잴 첨에 배운 게 이거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됐지 뭐.”

재혁은 라면을 국물까지 비웠다. 요즘 인턴 애들은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모르겠다. 딱히 상관은 없는데.

“그런 것치고는 천직 같으신데요.”

“죽는다? 인턴 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어.”

“에이, 우리 사이에 이러시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요. 뭔가 강 선생님, 2년 차 같지 않다는 거죠.”

재혁의 눈치를 본 인턴이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가 보기에 서진은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사이에서도 서열이 미묘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건 단순히 나이의 문제는 아니었다. 요즘은 늦게 졸업해서 일을 시작하는 의사들도 많으니 새삼 놀라울 건 없었다. 그게 아닌, 뭔가 더 2년 차치고는 고차원적인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인턴은 서진이 뭔가 어디서 대단한 일을 하고 온 사람인 건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당장 재혁의 서진에 대한 태도만 봐도 그랬다. 재혁은 서진에 대해 3일 만에 집에 가는 거라고 말을 했지만, 같은 2년 차 중에 대부분이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다.

2년 차가 감히 아무렇지 않게 교수에게 퇴근해 보겠다고 말하는 것도 그걸 받아 주는 재혁도 이상했다.

“저번에요, 교수님 안 계실 때. DDA(도착후 사망) 환자가 하나 있었는데, 사망선고 하자마자 임정혁 교수님이 내려오신 적이 있거든요. 그 사망선고 강 선생님이 하셨는데, 그 뒤에 강 선생님, 임 교수님한테 담배 빌려 피우러 가시던데요.”

“그래서?”

“임 교수님, J대에서 완전 스타 의사잖아요. 포스도 있고, 근데 2년 차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 툭툭 치고 담배 빌려 갈 만한 짬이에요?”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더 이상한 건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 이상한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인턴의 의문에 재혁은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다며 대답했다.

“그 형 복수 뛰고 있는 거 말 안 했었냐?”

“복수라면……. 더블 보드요?”

“트리플보드. 임 교수님 밑에서 GS도 같이 하고 있어.”

“GS도 2년 차예요?”

“아니, 전문의 땄지. 그러니까 너 왜 강 선생님 나이트 근무만 한다고 뭐라 하면 안 돼.”

재혁이 오해라며 단호하게 잘랐다. 재혁의 말대로라면 서진이 3일 만에 집에 간다는 건 3일 내내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일을 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에서 서진을 대단하게 바라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근데 트리플이라면서요. 그러면 GS 전문의에, 최초는 무슨 전공이었는데요?”

“NS 7년 했어. 뇌외상이랑 종양 전문.”

“……헐. 아, 그건. 존경할 만하네요.”

“알아들었으면 농땡이 피우지 말고, 할 일이나 해.”

재혁이 쓰레기를 모아 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J대에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하고 정혁과 함께 H대로 넘어오는가 싶더니 서진의 독함에는 재혁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데도 재혁은 서진을 말리지 않았다. 서진이 독하다는 건 의대 시절부터 알고 있었기에 놀라울 건 없었다.

* * *

옷을 갈아입고 병원을 나온 서진은 지하철을 탈까? 택시를 탈까 고민을 했다. 마침 택시 한 대가 눈치를 보며 근처로 다가왔고, 서진은 망설임 없이 택시에 탔다. 뒷좌석에 탄 서진은 주소를 말한 뒤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저기요. 손님?”

“아, 예.”

정신을 잃다시피 잠을 잔 서진이 눈을 비빈 뒤 택시비를 보지도 않은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한 뒤 아파트 근처에서 내렸다. 후문의 편의점에서 담배와 커피를 하나 샀다. 빨대가 있지만, 일부러 뚜껑을 열어 커피를 순식간에 비웠다.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당장 잠이 안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셨다는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다. 11층에서 내린 서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연이 마련해 준 아파트는 혼자 살기에는 전망도 너무 좋고 넓었다. 거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욕실 쪽 문이 열리며 이제 일곱 살이 된 한결이 나왔다. 목에 수건을 두르며 나오는 모습이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한결이 서진을 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밥 먹었어요?”

“아니.”

“먹을래요?”

“됐어.”

“알았어요.”

단답형에 가까운 서진의 대답에도 한결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은 채 혼자 냉장고를 뒤적이며 반찬들을 꺼내 제 키보다 큰 탁자 위로 올렸다.

한결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한결은 서진의 집에서 살았다. 한결을 몇 번 찾아간 것도 아닌데, 한결은 이상할 정도로 서진을 따랐다. 서진과 같이 살겠다고 우긴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한결이었다. 서진이 하는 일이라고는 며칠에 한 번 들어와서 반찬을 해 놓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 반찬이라는 것도 집에 오는 길에 있는 시장에서 대충 만들어진 것을 산 게 다였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깜빡 졸아 사 오지 못했지만, 다행히 지난번에 산 반찬이 남아 있었다. 혼자 밥을 차려 먹는 한결을 본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거실로 나온 서진이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서진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한결의 유치원 버스는 이미 떠났을 시간이었다.

“오늘은 안 올 줄 알았어요.”

“늦어서 미안.”

“택시 타고 왔어요?”

그 말투에 서진이 깜짝 놀랐다. 말을 하기 시작한 한결은 가끔 무서울 정도로 박기욱을 연상시키게 하는 말을 꺼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태연하게 나오는 그 말이 기욱을 떠올리게 해 서진을 소름 돋게 만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한결이 저런 말을 할 때면 저 작은 어린아이가 박기욱의 피가 이어진 자식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기욱과 서윤이 살아 있었다면 그래도 그 사이에서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헛된 망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서진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결은 그 작은 손가락으로 서진의 머리를 손가락질했다.

“머리 떴어요.”

“아, 맞아. 택시 탔어.”

서진의 머리가 붕 떠 택시에서 잠이 들고 쭉 온 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서진은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한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근의 사설 유치원을 다니는 한결은 저 혼자도 깔끔하게 교복을 차려입었다. 몸을 숙인 서진은 한결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메 줬다.

“차 태워 줄 수 있어요?”

서진이 소매에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에는 서진이 없어도 유치원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서진이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결이 아침을 먹기 시작했고, 그 시간에 제대로 나갔다면 버스를 놓칠 일은 없었다. 서진은 한결이 일부러 버스를 놓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진은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었다.

“머리만 말리고.”

“알았어요.”

머리를 말린 서진은 차 키를 챙긴 뒤 현관으로 나왔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던 한결이 서진을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 나와 달라붙었다. 한결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찾았다. 너무 오랜만에 타는 거라 어디에다 뒀는지도 헷갈렸다. 간신히 차를 찾은 서진이 뒷좌석 문을 열자 한결이 고개를 저으며 조수석 앞으로 다가갔다.

뒷좌석에 탔으면 좋았을 텐데. 뒷좌석 대신 조수석을 좋아하는 것 역시 박기욱을 닮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한결은 제힘으로 조수석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차 안이 습해 에어컨을 틀었다. 몇 달 만에 타는 차라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요 최근 슬슬 EM 쪽에도 일이 늘어나기 시작해 바쁜 것도 한몫했다. 안전띠를 맨 한결이 다리를 떨며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세차 좀 해요. 비싼 차 아깝게.”

“…….”

천천히 운전해 주차장을 나와 신호를 기다리던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결이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서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충 샀어. 이거 안 비싸.”

“2천만 원이요?”

신호가 바뀌고 속도를 낸 서진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한결을 바라봤다. 한결은 하연이 사 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실실 웃었다. 휴대폰 화면을 흘끗대니 대충 무슨 쇼핑 화면이라는 것만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운전하면서 휴대폰을 쳐다볼 여유는 없었다.

“이거요. 찍으면 얼마인지 알려 줘요. 그래서 찍어 봤어요.”

어린애들의 호기심이었나 보다. 서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휴대폰을 만진 한결이 멋대로 이야기를 했다.

“근데 우리 집은 얼마인지 안 나오더라구요.”

당연하지. 서진은 먼지가 쌓인 차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비싼 거 아냐.”

“차는 원래 더 비싸요?”

“좋은 건 더 비싸.”

“그래요? 콜록….”

한결이 기침을 하자 서진이 고개를 돌리며 급하게 에어컨 온도를 줄였다. 그런데도 한결은 서진의 눈치를 보며 낮은 기침을 했다. 서진은 유치원 인근 근처 소아과 간판을 흘끗댔다.

“병원 갈래?”

“저… 콜록, 저 많이 아파요?”

고작 기침 몇 번 했다고 죽을병인 것처럼 걱정하는 한결에 서진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애는 애였다. 감기에 걸릴 날씨는 아니었지만, 감기라는 게 날씨에 맞춰 걸리라는 법은 없었다. 만약 한결이 걱정하는 뭔가의 병이라 해도 서진은 무당이 아니었기에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몰라.”

“의사잖아요.”

“의사고 눈으로 본다고 해서 다 알지는 못해.”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본 거예요?”

“그래.”

속도를 늦춘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이 다시 기침하더니 고개를 들어 운전을 하는 서진을 바라봤다.

“안 괜찮다고 하면요?”

“병원에 데려다줄게.”

“삼촌이 일하는 곳요?”

“아니.”

서진은 한결을 유치원에 데려다준 적이 많이 없어 길을 헷갈리고 있었다. 답답해하는 서진과 달리 한결은 서진과 더 오래 있을 수 있어서 좋아하고 있었다. 박기욱과 닮은 말투, 그러나 상대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구는 구석은 박기욱이 아닌 서윤에 가까웠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어요?”

“안 오는 게 좋은 곳이야. 정 아프면 근처 병원에 데려다줄 테니까.”

“그럼 괜찮아요. 안 아파요.”

서진이 일하는 병원이 아니라는 말에 삐진 모양인지 한결이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리 박기욱 같은 말투로 말을 해도 어린애는 애였다. 또 길을 잘못 들은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쯤 되면 한결이 지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정작 초조해하는 서진과 달리 당사자인 한결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도 그럴 게 한결은 유치원 따위보다 서진과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간신히 유턴한 서진은 제 옆에서 또 기침하는 한결을 흘끗댔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참 애매했다. 한결을 병원에 데려다줄까 고민하던 순간 서진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유치원 근처에 도착해 속도를 늦춘 서진이 휴대폰을 어깨에 낀 채 전화를 받았다.

“네? 아뇨, 데려다주는 중입니다. 아……. 하하, 죄송합니다. 거의 다 도착했어요. 예. 감사합니다.”

한결의 유치원 담임선생님에게서 온 전화였다.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무릎 위로 올린 서진은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한결을 슬쩍 바라봤다. 그렇게 열심히 휴대폰을 하길래 적어도 선생님한테 연락 한 통 정도는 알아서 넣겠거니 생각했다. 유치원 선생님은 한결이 버스도 타지 않고, 집에서 별다른 연락이 없어 걱정한 모양이었다.

“선생님한테 말 안 했어?”

“전화 올 거 알았으니까요.”

“하아, 그래.”

그런 면은 정말 아버지인 박기욱과 똑 닮아 있었다. 기욱을 연상하게 하는 말에는 적당히 대답하고 넘어가는 게 편했다. 유치원 근처에 도착하자 한결은 난데없이 뒷좌석으로 가 가방을 가져왔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한결이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진에게 내밀었다. 적당히 주차한 서진은 한결이 내민 종이를 확인했다.

‘공개 수업 안내.’

요즘 유치원은 공개 수업이라는 것도 하나 보다. 서진은 아무런 감흥 없이 날짜를 살폈다. 날짜가 거의 임박한 공개 수업이었다.

“조금 일찍 주지 그랬어.”

서진의 말에 한결이 입술을 내밀며 서진을 노려봤다.

“집에 들어와야 말하죠!”

“아, 알았어. 미안해.”

서진은 종이를 잘 접어 데시보드 위에 올려놓은 뒤 한결과 함께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탔다. 하연이 추천해 준 유치원은 건물 4개와 옥상을 전부 사용하는 사립 영어 유치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생님이 얼굴을 비췄다.

“아, 안녕하세요.”

여전히 여자 선생님이 어색한 서진이 꾸벅 인사를 했고, 그녀도 밝은 목소리로 서진에게 인사를 했다. 서진은 얼른 들어가라며 한결을 내려다봤다. 쉽게 발을 떼지 못한 한결은 마지못해 현관 앞에서 등을 돌렸다.

“병원 갈 거예요?”

“아마도.”

“다음에 또 언제 올 수 있어요?”

진심으로 서진을 보고 싶어 하는 한결이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한결에게 차마 서진은 언제라고 말할 수 없었다.

“빨리 갈게.”

서진이 들어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 * *

한숨 자고, 병원으로 돌아간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EM과 GS 양쪽에서 사고가 터지니 반나절을 거의 숨 쉴 틈 없이 뛰어다녔다. 간신히 숨을 돌린 서진이 정혁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아, 맞다. 너 밤에 유 교수 환자 네가 봤다면서? 내일 OP 들어간다던데.”

“네. 어쩌다 보니까요. NS는 신경 끄려고 했는데 이게 또 잘 안 되네요.”

“보이는 게 많으면 오지랖도 넓어지게 되는 거지. 네가 들어가.”

뜬금없는 정혁의 말에 서진이 눈을 깜박였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런데도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옥상으로 올라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의 담배를 물었다. 후, 먼저 연기를 내뱉은 서진은 정혁의 말이 신경 쓰인다며 시선을 돌렸다.

“너 그 OP 해 본 적 있다며. 아까 유 교수랑 얘기 좀 했는데 불안한 모양이더라.”

“뭐, 임상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환자가 아니긴 한데……. 수술 자체는 안 어렵잖아요. 싫은데요.”

“이게 어디다 대고 교수 말에 토를 달아?”

“그래서 남의 과 수술방에 들어가라 시키는 게 담당 교수가 할 짓입니까? 그리고 유민혁 걔는 썅, 레지 때부터 그러더니 존심도 없대요?”

유민혁은 서진이 3년 차 때 막 1년 차로 들어온 후배였다. 자신을 유독 잘 따른 기억은 있었지만, 정작 서진은 유민혁에게 잘해 준 기억이 없었다. J대에서 레지던트가 끝나고 H대에서 펠로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민혁은 H대에 온 서진을 무척이나 반겼다.

“야야, 니 후배잖아. 그리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안 합니다.”

“유 교수가 상관없다고 그랬으니까 가서 좀 도와줘라. 왜 이렇게 까탈스러워?”

“아씨, 알았어요.”

서진이 휴대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가만, 그 수술 몇 시예요?”

“내일 열한 시. 왜? 너 할 일 있어?”

내일은 한결의 공개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유치원 공개 수업이 뭐 대단하겠느냐마는. 수술이 11시에 시작이면 아무래도 유치원에 다녀오기는 힘들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덮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새 담배를 물었다.

“아뇨, 없어요.”

따로 연락을 남길 필요는 없겠지? 애당초 간다고 말한 것도 아니니까. 유치원 공개 수업 따위 대수가 아니잖나. 서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 * *

수술이 끝난 서진은 밖으로 나와 찬물을 들이켰다. 뒤이어 나온 민혁이 서진에게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배,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아시죠? 제가 이레귤러하지 않은 거에 약하잖아요.”

“……어. 뭐.”

서진이야 워낙 신경외과 시절부터 여러 교수님을 전전했던 탓에 비슷한 연차의 의사들보다 다양하게 경험이 있는 편이었다. 교수마다 자주 하고, 많이 하는 수술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민혁이 연신 물을 마시는 서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여기가 다 H대 출신밖에 없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니까요. 눈치도 되게 보여요. 알잖아요. 저는 뼛속까지 J대인 거.”

“그런 걸 아는 사람이 H대 교수를 해? 나도 H대 출신이야 인마.”

“에이, 또 그러신다. 선배는 선배구요. 근데 설마 선배랑 임 교수님이 H대에서 외과를 다시 밟을 줄은 몰랐어요. 지금 EM도 하고 계시지 않아요? 이제 NS는 완전히 떠난 거예요? 실력 보니까 안 죽었던데요.”

“모르겠다.”

인생의 목표를 반쯤 잃었던 서진에게 남아 있는 거라고는 기욱 때문에 하지 못했던 외과와 응급의학과를 다시 전공하는 것이었다. 대단하기보다는 남아 있는 선택지가 그거밖에 없었을 뿐이었다. 거기에 뭔가에 집중해야 할 만한 것이 필요한 것도 한몫했다.

“아, 맞다. 그래도 저희 과랑 겹치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 주세요! 아직 부교수에 H대 출신도 아니긴 해도. 교수는 교수니까요. 애들한테 잘 말해서 도와 드릴게요.”

“말이라도 고맙다.”

“ER 가시는 거예요?”

“오늘은 아냐.”

외과에서 할 일이 있었기에 응급실에 내려갈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정혁의 부탁으로 서진은 다른 의사가 올 때까지 중환자실을 보고 있었다. 두세 시간쯤 한숨 자고 나온 의사가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와 둘이 중환자실을 보기 시작하니 처음보다는 나았다. 바쁜 건 매한가지여도 손이 하나 늘어나는 건 무시를 못 했다.

“강 쌤, 전화 왔어요.”

“아, 네네.”

간호사 한 명이 데스크에 올려 뒀던 휴대폰을 들고 흔들었다. 당연히 또 누군가의 콜일 거라 생각한 서진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보고도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 네, GS의 강서진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 아, 강 선생님. 여기 소아 응급실인데요.

소아 응급실에서 왜 전화가 오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서진이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같이 일을 하던 의사가 뭔가 수상함을 느꼈는지 서진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요?”

“나 잠깐 내려갔다 올게.”

“아, 예. 천천히 다녀오세요.”

당장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꽤 많이 잠잠해졌던 터라 그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통화하며 계단을 통해 응급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서진과 통화를 하는 의사가 눈이 마주쳤다.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 있었던 그가 서진을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혼자 왔다구요?”

“아, 예.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니까 몸이 안 좋아서 택시 타고 왔다는 거예요. 간호사가 물어보니까 강 선생님 찾길래 연락드렸어요. 일단 검사는 다 맡겨 놨고, 상태는 좀 봐야 할 거 같네요.”

“아……. 예. 하아, 감사해요.”

검사를 해 봐야 알지만,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는 그의 말에 서진은 이마를 짚었다. 기침을 계속할 때 신경을 더 써 줄 걸 괜히 후회가 들었다. 커튼을 걷자 혼자 누워 있던 한결이 서진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어.”

“콜록… 진짜… 의사였네요. 외삼촌.”

“…….”

“저…. 콜록, 죽어요?”

“안 죽어.”

“죽으면… 콜록, 옆에 있어 줄 거예요? 악!”

한결의 말을 듣다가 짜증이 난 서진이 손가락으로 한결의 이마를 튕겼다. 딱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한결이 이마를 붙잡았다. 새하얀 피부에 빨갛게 서진의 손가락이 닿은 자국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린애가 못 하는 말이 없어. 안 죽어.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그치만요. 다른 애들은 다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는데. 왜 저만 없어요?”

“하연 고모가 잘해 주잖아. 그 집도 하연 고모가 해 준 거야.”

“그래요?”

처음 알았다는 한결의 대답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이 서진과 같이 살겠다고 말했을 때 서진의 원룸을 보고 기겁을 한 하연이 저런 집에서 키울 거면 절대 안 된다며 멋대로 해 준 아파트였지만 말이다. 그 집은 한결을 위한 아파트나 다름없었다.

“고모는 고모잖아요. 하연 고모는 막, 잔소리도 심하고 싫어요. 으.”

“나도.”

“…….”

“네 부모가 될 수는 없어.”

이내 아픈 어린애한테 할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한결을 볼 때마다 기욱과 서윤을 떠올린다 해도 한결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칫 매정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서진의 태도에 한결은 서진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그래도 저는 외삼촌이 좋아요.”

“나는…….”

서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결이 다시 기침했다. 서진은 그런 한결의 상태를 진정시키며 조용히 안았다.

* * *

결국, 한결은 며칠 정도 짧게 입원을 하기로 했다. 한결이 입원을 한 뒤에도 서진은 여전히 병원 일로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시간을 내 한결이 있는 소아과 병동으로 간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실 입구에 있어야 할 한결의 이름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대신 말했다.

“쌤, 한결이 1인실로 옮겼어요.”

“……왜요? 무슨 일 있었나요?”

자신한테 말도 없이 갑자기 1인실이라니 이상했다. 한결의 보호자가 병원 의사인 서진이라는 것은 병동 내에서 공공연하게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얼굴 아는 소아과 의사에게 신경 좀 써 달라고 부탁도 해 놨으니 만약 한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서진이 문을 열고 병동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예상대로 한결을 1인실로 옮겨 놓은 사람은 하연이었다. 아무래도 하연에게 연락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톡을 남겨 놓은 기억이 있었다. 박기욱의 누나 아니랄까 봐 하연은 여자치고는 꽤 성격이 있었다. 방금 막 점심을 끝낸 한결은 하연이 사 온 케이크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한결이 서진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외삼촌!”

“너…….”

처음 응급실에 왔을 때보다 밝은 표정의 한결과 달리 서진을 본 하연은 표정을 굳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온 하연이 이내 서진의 뺨을 후려쳤다. 문이 닫히지도 않았던 터라 지나가던 간호사가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너 미쳤어?”

“…죄송해요.”

“도대체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던 거야? 제정신이야?”

서진은 아픈 뺨을 만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잘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결은 하연이 싫다고 했지만, 누군가의 어머니인 사람과 아무것도 책임져 보지 않은 사람의 아이에 대한 무게는 틀렸다. 갑작스러운 하연의 고성에 케이크를 먹던 한결이 깜짝 놀랐다.

“괜찮아.”

그냥 먹으라고 눈치를 줬지만, 어린 한결이 그런 걸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하연은 손수건을 꺼내 한결을 달랬다.

“울지 말고, 이모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가만히 있을 수 있지?”

“으흑… 끅… 삼촌… 때리지 마세요… 흐윽….”

“아냐. 아냐. 삼촌이 잘못해서 그래. 고모가 미안. 금방 얘기하고 올게.”

한결이 울음을 그치자 하연은 재빨리 서진에게 나가라며 눈을 까닥였다. 복도를 지나가며 서진이 뺨을 맞는 걸 본 간호사가 눈을 깜박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쌤, 괜찮으세요?”

“아……. 네. 뭐, 뺨 맞는 건 익숙해서요.”

기욱에게 맞은 걸 생각하면, 뺨이나 머리채를 잡히는 것쯤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후끈거리는 아픔이 오히려 정겨울 지경이었다. 하연이 나오자 간호사가 요령껏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팔짱을 끼며 잔뜩 화가 난 하연이 서진을 내려다봤다.

“넌 도대체 애가…! 아까 유치원 담임이랑 전화했어. 며칠 전부터 아팠다고 그러는데 왜 병원에 안 보낸 거야?”

“…….”

“아팠는지도 몰랐지? 남의 환자에 정신 팔려서 제 새끼 죽어 가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의사 자격은 없어.”

“죄송해요.”

“세상에……. 하, 오죽했으면 애가 택시를 타고 병원까지 온 것도 몰라? 그리고 반찬 사다 먹이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가 정 힘들면 사람 쓰라고 했을 텐데. 도대체 한참 자라야 할 애한테…….”

하연은 기가 막힌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키워 본 적 없고, 혼자 사는 남자라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한결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서진의 행동이라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진은 그런 하연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한참 부모 품에서 자랄 애한테 못 할 짓을 한 것도 전부 사실이고, 한결이 혼자 방 안에서 기침을 하며 아파할 때 곁에 없었던 것 또한 맞았다. 전부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제 옷을 잡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그 작은 몸을 볼 때마다 서진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보는 기다랗고 생생한 검은 눈동자가 서윤을,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박기욱을 떠올리게 만들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한결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하연의 부탁으로 몇 번인가 방문을 한 게 다였다. 특별히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한결은 마치 서진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서진을 보자마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서진에게 안겼다. 한결이 느끼기에 커다란 나무나 다름없을 법한 다리를 안으며 어떻게든 눈을 마주쳐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외삼촌이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를 서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한결을 처음 본 그날 이후, 집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에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또다시 감정에 복받친 서진은 하연의 앞에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눈물을 참았다.

“너…….”

“지워지지 않아요… 한결을 볼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이마 위로 올린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물을 흘린 채 하연을 마주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울면 눈물이 말라 없어질까? 그만 울고 싶었다. 그만 울고 싶은데, 제 안에 눈물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호수같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저만큼이나 눈앞에 있는 하연도 한결을 볼 때마다 힘이 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혼자 남겨졌을 때 이제 정말 다 끝난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녔다. 두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자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서진은 한결이 하연보다 더 자신을 부모처럼 따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제 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박기욱의, 그리고 한결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던 서윤의 피가 서진의 안에는 모두 있었다.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요.”

“한결이는 우리 집에서 맡기는 걸로 해.”

“하하, 그편이 낫겠네요.”

한결이 유치원도 가지 않고 서진과 같이 살고 싶다고 떼를 썼을 때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한결을 보지 않고 사는 편이 서진에게도, 그리고 앞으로 자랄 한결에게도 더 나을지도 몰랐다. 억지로 마주해 봤자 좋아질 게 없는 사이였다. 문틈을 열어 놓고 그사이에 숨어 대화를 엿듣고 있던 한결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시… 싫어요….”

“한결아, 들어가 있어. 고모 얘기하고 있잖아.”

“싫어. 싫어요…!! 싫어! 싫어… 흐윽, 싫어…!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제가 아파서 그런 거죠? 안 아플 테니까… 잘못했어요. 흐윽….”

“한결아, 그런 거 아니니까……. 외삼촌이 일도 바쁘고, 우리 한결이 챙기기 힘들어서 그런 거야.”

하연이 우는 한결을 달랬지만, 도무지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연을 뿌리친 한결이 서진에게 다가와 안겼다. 키가 작아 팔을 올려도 가슴 부근까지는 닿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제발, 저 버리지 마세요….”

“…….”

“한결아, 그런 거 아니야. 자주 볼 수 있는 거 알면서 왜 그래?”

“싫어… 흐윽….”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한결이 저에게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른 의미로 서진의 가슴에 꽂혀 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그 말은 내가, 너에게 수도 없이 했던 말이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한 손으로 한결을 밀어냈다.

“그만, 그만해!”

“잘못했…….”

“그만해. 제발! 그런 말, 필요 없으니까 고모한테 가.”

아아, 최악이다.

서윤의 죽음을 결정할 때, 기욱의 심장을 받고 눈을 떴을 때만큼이나 최악이었다.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울기 시작하는 한결에게서 등을 돌린 채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 * *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었다. 교통사고 환자 수술의 뒷정리를 한 뒤 환자를 올리고 나온 서진은 응급실의 데스크에 있는 주인 없는 물을 순식간에 비웠다. 물 컵의 주인인 재혁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고생했어요.”

“어, 그래. 아. 맞다. 스케줄 짠 거 보내 줄게.”

서진이 휴대폰을 만져 재혁에게 톡을 보냈다.

“3년 차인데 머릿수만 채워서 미안하다.”

“……뭘요. 병원 터지면 형 같은 사람이 어딨다고. 이런 거 안 해 줘도 되는데.”

새벽부터 수술실에 들어가서 오후가 다 돼서 나온 서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밖은 여전히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태풍 2개가 연속으로 한반도를 직격할 예정이라고 했다. 덕분에 응급실은 비로 인한 습한 공기만큼이나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직은 괜찮지만, 또 어떻게 사고가 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근데, 형. 현장 나가는 거 안 힘들어요?”

“힘들어. 젖는 게.”

“뭐예요, 그게.”

“난 비가 싫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정혁은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H대 병원 교수로 들어와서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인근에 있는 소방서들과 연계를 한다는 등의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문제도 많았지만, 장단점을 보완한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밑에 있는 콘센트를 이용해 휴대폰을 충전한 서진은 타이밍 좋게 오는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를 확인할 틈도 없었다.

― 예, GS 강서진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안내 방송을 하듯 기계처럼 말하는 서진의 말에 휴대폰 너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애들 떠드는 듯한 소리가 가끔 들렸다. 한결은 서진이 전화를 끊으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 여보세요? 외삼촌?

― …….

― 끄, 끊지 마세요!

한결과 헤어진 뒤 서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번호를 바꿨다. 하연의 집에 간 한결이 시도 때도 없이 서진에게 연락한 것도 있었지만, 막 정혁과 현장에 나간 서진이 휴대폰을 부숴 먹은 것도 한몫했다. 내부 파일은 살릴 수 있었지만 고칠 바에는 새로 사는 게 나을 정도로 부서졌던 터라 여차하면서 번호까지 바꾼 것이었다.

― 저 학교 입학했어요. 고모 말도 잘 듣고……. 삼촌 보고 싶다고 안 울고……. 잘 지내고 있어요.

― 그래, 그럼 다행이네.

한결이 하연의 자식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입학식에 얼굴이라도 비쳐 줄까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입학식쯤 시작한 소방서 연계 프로그램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사실상 잊어버렸다는 편이 더 맞았다. 잘 지내고 있다면 걱정할 건 없었다. 적당히 말하고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다짐할 즈음 한결이 또다시 말했다.

― 다, 다음 주 월요일 날 시간 돼요? 공개 수업 있어요.

― …….

― 고모랑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외삼촌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10시인데……. 바, 바쁘면 12시까지 와도 돼요!

서진은 이미 한 번 한결의 유치원 공개 수업을 안 나간 적이 있었다. 한결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 다시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때 못 갔던 게 조금은 미안했다. 간호사 중 한 명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CPR 환자를 받을 수 있냐는 물음에 재혁이 알았다며 수신호를 했다.

― 문자 보내 줄 테니까 꼭 와요.

“형!”

“알았어.”

저를 부르는 재혁의 목소리에 서진은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 * *

비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빗길에서 간신히 환자를 이송하고 응급실로 돌아온 서진은 작업복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수건으로 빗물이 줄줄 흐르는 머리를 털며 휴대폰을 열었다. 밀린 문자 사이에 며칠 전에 한결이 보내 놓은 문자가 눈에 띄었다.

「늦으면 12시까지 와도 돼요! 이번 주 금요일. 1―6반이고 2층에 있어요! 고모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며칠 전에 왔던 거니 이제 와서 답장을 보내기도 뭐했던 서진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잠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행히 환자의 상태가 심하지 않아 대기하고 있던 팀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최악이야.”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서진의 곁으로 정혁이 다가왔다.

“비, 월요일까지 계속 온다더라.”

“교수님.”

“왜?”

“저 월요일 오전에 반차 낼게요.”

“야, 넌 그런 걸 무슨 통보하듯이 말하냐?”

서진의 뻔뻔함에 정혁이 기가 막힌다며 혀를 찼다. 서진은 그런 재혁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태연하게 머리를 말렸다.

“누가 박시헌 친구 아니랄까 봐.”

“아씨, 걔랑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시죠.”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아. 세상에 자기 형 죽었다고 사직서 하나 던져 놓고 아프간으로 추노하는 녀석은 또 살다 살다 처음 본다. 걔는 인마 전설이야 전설.”

박기욱이 죽은 충격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시헌의 태도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턴이나 초년차 레지던트 때나 하는 사직서 추노 짓에 그 끝이 아프간이라니 무식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아직 죽었다는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어딘가에서 잘 살아 있겠구나 하고 짐작만 뿐이었다. 하긴, 시헌은 생명력 하나만큼은 끈질긴 사람이었다. 서진만큼이나 시헌을 오랫동안 봐 왔던 정혁도 왠지 모르게 시헌이 죽지 않고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것과 강서진은 별개였다.

“최소한 인마 반차 내도 돼요? 도 아니고 낼게요가 뭐냐. 너 다음 주에 오프 없다.”

“상관없어요.”

그 오프라는 것도 끽해야 8시간짜리인 걸 서진도 모르지 않았다.

“근데 무슨 일인데?”

어지간하지 않으면 급하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안 정혁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서진은 끝내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 * *

환자의 상태를 간신히 안정시킨 서진은 괜히 정혁을 향해 짜증을 냈다. 빗길을 가르는 구급차는 평소보다 더욱 크게 흔들렸다. 작업복을 입은 서진의 옷은 흙탕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제길, 일찍 보내 준다면서요!!”

“너 진짜 그럴래? 야! 너 진흙탕에서 구른 거 가지고 짜증이 난 거 다 알거든? 똑바로 잡아!”

정혁의 짜증에도 서진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같이 일하다 보니 서로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내는 것쯤은 별다른 문제도 되지 않았다. H대 병원에 도착하고, 기다리고 있던 다른 팀이 환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여전히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혁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과 달리 서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정혁은 비바람 속에서 서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야! 어디 가!!”

“퇴근해요!”

“인마!! 옷은 벗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몰라!!”

정혁을 무시한 채 병원을 나와 인근에서 택시를 붙잡아 탔다. 목적지를 말한 뒤 물에 젖은 생쥐 꼴처럼 뒷좌석에 앉은 서진은 방수 재질의 재킷을 툴툴 덜었다. 재킷 안쪽의 수술복은 젖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술복 차림으로 학교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서진은 마지못해 지퍼를 올렸다. 학교에 도착해 정문에 내린 서진은 경비에게 공개 수업이라고 말을 한 뒤 허락을 받아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1―6반. 수업 중이라 그런지 복도 너머에서 선생님들의 말소리가 들렸고, 서진은 조용히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꽤 많은 학부모가 교실의 뒤편에 와 있었다.

서진은 중간쯤에 앉은 한결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뒤를 돌아봤던 탓에 한결은 서진이 왔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계속해서 뒤를 보는 한결에 서진은 앞을 보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서진의 손짓을 이해한 한결은 더 이상 뒤를 보지 않았다.

창밖은 여전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2주째 기록적인 폭우가 오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재난을 선포하니 마니 하는 소리까지 돌고 있었다.

“…….”

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 서진은 주변의 공기가 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하게 오는 것만 생각했던 터라 자신의 차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교실 안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여자였다.

부부가 같이 온 경우도 있었는데, 그조차도 남편 또한 말끔한 차림에 깔끔하게 입고 들어와 있었다. 그에 비교해 아직 병원 마크가 제대로 박힌 재킷도 아닌 임시로 챙겨 입은 방수복과 바지를 벗지도 않은 채 물에 잔뜩 젖어 가장 늦게 도착한 서진은 누가 봐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좋은 학교다 보니까 더 그런 건가? 서진은 차마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학부모들과 거리를 벌려 뺨을 긁적였다. 이내 그것도 잠시뿐, 서진은 병원에서 오는 연락들에 서진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비는 대체 언제 그치는지 모른다.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여느 다른 아이들이 그렇듯 한결도 가장 먼저 서진에게 다가왔다.

“외삼촌! 와 줄 줄 알았어요!”

“금방 다시 가야 해.”

외삼촌이라는 한결의 말을 들은 부모들이 서진을 이상하게 흘끗댔다. 그 시선을 무시한 서진은 안기려는 한결을 살짝 밀어냈다.

“젖어서 그래.”

“그래도 상관없는데.”

“이리 와 봐.”

서진은 그나마 마른 손으로 몸을 숙이며 한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박기욱은 싫었지만, 가끔 쓰러져 울고 잠들어 있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기욱의 손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기욱이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이 자신에게서 기욱의 향기를 느끼고 있다면 아주 잠시라도 상관없었다.

* * *

끝날 것 같지 않은 비가 그쳤다. 라커룸에 다녀온 서진은 정장 차림으로 응급실로 들어왔다. 퇴근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배에게 신신당부한 뒤 등을 돌린 서진과 정혁이 마주쳤다.

“너, 그 차림……. 오늘이 그날이었나?”

“그렇게 됐어요.”

“하아, 갔다 와라.”

정혁도 까먹고 있었다며 서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서윤의 기일이 되면 서진은 형식적으로 기욱이 남기고 간 옷을 입은 뒤 휴가를 냈다. 서진은 빌린 외제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을 무렵 전화가 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오늘이 서진에게 무슨 날인지 알고 있기에 병원에서 전화가 올 가능성은 적았다. 어지간히 심한 일인가? 서진은 전화를 받았다.

― 아, 한결이 외삼촌분 되세요?

서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여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결이의 학교에서 온 전화였다. 그 전처럼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한결이에 대한 것은 다 하연이 책임지고 있었기에 학교에서 온 전화는 뜻밖이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 다른 게 아니라요. 하아, 한결이가 학교 폭력을 좀 일으켜서요…….

담임선생님의 말에 서진은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차가 막히지 않아 생각보다 금방 학교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하교한 초등학교 교실, 1―6반에는 유독 어른들이 많이 있었다. 서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과 마찬가지로 연락을 받고 온 학부모들이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한결과 싸운 아이들의 부모는 그날 공개 수업에서 서진을 노골적으로 내려다보며 깔봤던 사람들이었다.

한결과 제 부모들 근처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과 몸에 상처가 나 있었다. 꽤 험하게 싸운 모양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서진이 담임선생님을 바라봤다.

한결이 계속 외삼촌한테 전화하라고 난리를 쳐서 부르긴 했는데, 그녀는 솔직히 그날 봤던 꾀죄죄한 차림의 서진보다 하연을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학비만 수백만 원이 넘는 사립학교임에도 가끔 무리해서 자식을 보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모들은 다른 부모들과 마찰이 생겼을 때 해결하기도 힘들고, 교사로서도 귀찮은 것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 생각과 달리 깔끔한 차림으로 등장한 서진은 조금 의외라는 기분이 없잖아 있었다. 담임이 늦게 온 서진을 한쪽으로 불러 설명을 했다.

“한결이가요, 외삼촌을 많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애들이 그날 그…….”

“그냥 말씀하시죠.”

“애들이 그날 공개 수업에 온 외삼촌을 두고 놀렸나 봐요.”

“놀려요?”

담임이 서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워낙 있는 집 애들 부모를 상대하다 보니 옷이나 하는 차림만 봐도 그 인물의 견적이 나왔다. 게다가 한결에게 자기 외삼촌이 의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었다. 담임은 최대한 서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돌려 말을 했다.

“그날 한결이 외삼촌, 아니. 선생님 차림새가 좀 그러셨잖아요.”

“하하, 뭐. 그랬죠. 비도 내리고 급하게 오느라.”

거기에 현장에서 빗물이 가득 담긴 진흙 바닥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굴러 넘어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담임은 서진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눈치였다.

“근데 애들이 보기에는 그게 좀 그랬나 봐요. 막노동하는 거 아니냐고 막 놀렸나 봐요.”

“아하하……. 별걸 가지고 참. 일단 알겠습니다.”

말을 들어 보니 결국 애들 싸움이었다. 다른 학부모들의 눈치를 본 담임이 적당히 말을 잘랐다. 서진은 혼자 앉아 있는 한결이에게 다가갔다.

“외삼촌 저…….”

“아, 해 봐. 아….”

서진이 안절부절못하는 한결의 상태를 살폈다. 소아과는 전공이 아니지만, 특별히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보건 선생님이 대략적인 응급처치를 해 준 탓도 있었다. 서진은 한결이 등 뒤로 손을 숨기는 걸 눈치채고 팔을 잡아당겼다. 보건 선생님이 왔다 갔을 때는 괜찮았던 팔이 퍼렇게 부어 있었다. 서진이 손을 대자 한결이 눈물을 질끔 흘렸다.

“이거는?”

“끅, 의자에요.”

한결의 시선이 건너편에 부모님들과 있는 덩치가 큰 남학생 하나를 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봐야 알 것 같은데 부러진 거라면 울지 않고 참은 게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이미 담임에게 들었지만, 서진은 답답한 마음에 한 번 더 물었다.

“도대체 왜 때린 거야?”

“끄흑… 윽… 그치만…… 흐윽…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사과하지 말고.”

“흐으윽… 제가 잘못했어요… 흐윽….”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한결은 서진만 보면 사과부터 했다. 애처롭게 울며 잘못을 비는 모습이 마치 죽은 박기욱을 대신하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저 태어난 것밖에 없는 이 어린애가 대체 태어나기 전부터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서진은 그런 한결을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한결을 본 부모들이 작심하고 서진과 한결을 몰아붙였다.

“하, 이봐요! 애 좀 똑바로 안 달래요? 원, 누가 가해자인 줄 모르겠네.”

“…….”

“쳐다보면 어쩔 건데요? 그날 학부모들 사이에서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아세요? 원, 그런 꼴로 의사라니. 기가 막혀서 참.”

“죽은 부모는 안 봐도 뻔하네요. 우리 애 이거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네?”

“하아.”

서진은 건너편에 있는 아이들과 부모를 훑어봤다. 한결과 싸운 학생들은 한결을 제외하고 네 명이었다. 아무리 애들 싸움이라 해도 네 명이 한 명의 학생을 두고 싸우면 어느 쪽이 가해자고 피해자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서진의 눈에는 넷이서 한결이 하나를 상대로 잡지 못해 상처를 입은 애들이 한심했다. 서진은 입고 있던 정장 마이를 벗어 더 이상 팔이 움직이지 않도록 꽉 묶어 고정한 뒤 다치지 않은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으켰다.

“가자.”

“당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예?”

일방적인 무시에 같이 온 남자가 서진에게 소리를 지르며 서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덩치를 빌미로 겁을 주려는 모양이었지만, 서진에게 그런 식의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말이야, 진짜 무서운 걸 몰라. 분명 체격으로는 남자가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어깨에 올라온 남자의 손을 치워 내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위아래로 훑었다.

“고소하시죠.”

“…….”

“한결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거기 그쪽요. 방금 한결이 부모님 욕한 거는 따로 추가 고소하겠습니다. 나이를 숫자로 처먹은 게 아니면 애 앞에서 씨발, 지껄일 말은 아니잖아. 애 부모가 어쨌든지 니네가 어떻게 알아.”

박기욱을 욕하는 것도, 서윤에게 대한 걸 말할 수 있는 자격은 그 사건에 대해 관련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었다. 잔뜩 화가 난 서진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을 강하게 노려봤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저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참 우스운 줄 아는 세상이 참 싫었다. 한결이 그만하라며 서진의 팔을 꽉 쥐었다. 서진은 한숨을 쉬며 연락을 준 담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사람 저울질하지 마시구요. 이런 수준 낮은 학교에서 애 키울 생각 없으니 다른 학교 알아보겠습니다. 나머진 변호사 통해서 이야기하시고. 네 명이 애 팔 부러트린 거는 또 따로 청구할 테니, 그렇게 아시고.”

서진은 한결의 손을 잡은 뒤 복도로 나왔다. 서진의 태도에 다들 황당해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꺼낸 서진이 눈을 맞추며 한결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과 상처들을 대충 닦아 줬다. 한결의 손이 서진의 어깨에 올라왔다.

“삼촌, 나 전학 가?”

“그럴 거야.”

제아무리 한결에 대한 양육권이 없다고 해도 저런 부모를 자식으로 둔 애들과 같은 교실에 한결을 둘 생각은 없었다. 하연은 이런 일에 대해서는 칼 같은 사람이었다. 아마 서진이 말하면 잔소리는 하겠지만, 곱게 끝날 일은 결코 없었다. 서진의 대답에 한결이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눈물을 흘렸다.

“제가… 끅…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흐윽….”

서진의 그런 걱정과 달리 한결은 자신의 잘못으로 전학을 가게 되는 거라고 착각한 듯 울기 시작했다.

“끄윽… 윽… 잘못했어요. 저, 흑….”

“그만해.”

“저는… 흐윽… 그냥 외삼촌이랑 같이 살고 싶었는데…! 외삼촌은 내가 짐인 거 같아서…… 그래서 얼른 커서 피해도 안 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고모 말도 잘 들으면…… 흑… 혼자 밥도 차려 먹고 반찬도 해 먹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또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흐으으윽… 잘못했어요.”

한결이 서진의 품에 안기며 복도가 떠나가라 울었다. 그저 어린아이의 투정이라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의 반성에 서진은 눈물을 참으며 한결을 안았다. 박기욱이 한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욱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 결여되어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기욱의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박기욱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기욱이 진심으로 느낄 만한 사랑을 주지 않았다. 기욱이 서진에게 집착한 이유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아는 서진이 떠나갈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기욱이 제게 저지른 모든 행동을 정당화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제가 서윤에게 한 짓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눈앞에 있는 한결을 외면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작은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서진이 서윤에게 집착을 한 건 혼자가 되는 게,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윤이 행복하면 자신을 버리지 않을 줄 알았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서진은 잘 알고 있었다.

“흑, 흐윽… 제가,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흐윽… 저를 버리지 마세요….”

서진은 울고 있는 한결을 꼬옥 안았다.

“알았어. 안 버릴게.”

어쩌면 그 말이, 기욱이 진심으로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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