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1 너를 위한 랩소디
“…….”
서정수에게 USB를 받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기욱의 사정에 대해 전반적으로 들은 우민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엄청난 일에 발을 들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없던 편두통이 생기는 듯한 기욱의 사연에 우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새끼. 대부분 네 잘못이잖아. 그런 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냥 넘겨줬어야 할 거 아니야. 왜 지금까지 가지고 있어서 지랄인데.”
“후,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기욱도 할 수만 있다면 사고를 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당장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를 꼰 우민이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제가 뭐 좋다고 선배한테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저라고 선배 얼굴 보고 싶은 줄 아십니까?”
“그렇긴 한데…….”
우민이 말끝을 흘렸다. 같은 병원, 같은 과 교수만 아니면 꼴 보기 싫은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이야기의 디테일도 그렇고 우민도 기욱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어서 더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남 병원장님 아들 말입니다.”
“아, 몇 년 전에 죽은 거? 우리 병원에서 장례식 했잖아. 필리핀에서 TA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청부 살인이래요.”
“그런 소문이 돌긴 했지. ……잠깐만, 진짜로?”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던 우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만한 정황과 관련된 소문이 병원 내에서 잠깐 돌긴 했지만, 워낙 소문이 무성한 곳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었다. 기욱도 비슷한 느낌이었다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진짭니다.”
기욱이 휴대폰을 꺼내 희열과 녹음한 내용을 들려 줬다. 10분가량 중요한 녹음 내용을 듣던 우민이 기가 찬다며 고개를 저었다. 기욱이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대화를 잘랐다.
“선배 메일로 보내 놨습니다.”
“아, 그래.”
우민이 휴대폰을 열어 개인 메일을 확인했다. 언제 보내 놓은 것인지 기욱에게 [제목 없음]으로 온 메일이 하나 있었다. 휴대폰을 넣은 우민이 수술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 엉덩이가 아팠다. 아침 회의까지 지각은 아니더라도 여유가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나만 묻자. 너 강서진에 사랑한다느니 뭐라느니 얘기하고 다닌다면서.”
“사랑합니다. 서진이.”
“그런 짓거리 놓고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서진이 그동안 기욱에게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우민은 기욱의 얼굴을 때린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혼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박기욱이라는 존재가 강서진에게 있어 어느 정도 두려움의 대상인지 우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박기욱은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박기욱에게 사랑은 뭘까? 아무리 같은 외과 의사라 해도 우민의 심정으로는 기욱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기욱이 우민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선배, 사랑이 뭔데?”
사랑이 뭘까?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몸을 섞는 것? 아니면 기쁨, 슬픔, 분노처럼 그저 한순간의 감정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데서 오는 일시적인 행위일 뿐인가? 그럼 자신은 뭐지? 기욱은 한 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란 섹스까지의 과정 중에 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니까, 단지 그뿐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강서진은 달랐다. 강서진이 곁에 없으면 기욱은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기욱에게 강서진의 존재는 메마른 사막 속 한 움큼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정신을 잃을 듯한 갈증 속에서 그 물은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멈추지 않았다. 한번 마시면 더 많이, 더 자주 마시고 싶은 마치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약에 중독되어 가는 그것처럼 기욱을 먹어 들어갔다. 그런 기분을 과연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우민이 서진을 무슨 기분으로 받아들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욱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강서진을 원하고 강서진을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사랑한다는 게 뭐냐고. 난 모르겠는데. 당신은 알아?”
그런 강서진이 떠나갔다. 어쩌면 징조는 우민과 만나기 이전, 훨씬 더 예전부터 있었는지도 몰랐다. 기욱과 서진의 만남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욱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건, 정의할 수 없는 거야.”
가슴을 꽉 쥐었다. 아픈 곳도 없는데 심장이, 마음이, 머리가 아파졌다. 강서진만 생각하면 늘 그래 왔고 지금도 그랬다. 누군가 제 가슴을 쥐어뜯는 것만 같았다. 강서진이 아니면, 오직 강서진이어야만 멈출 수 있는 고통이었다.
기욱의 그런 변명에 우민은 기가 찬다며 혀를 내둘렀다.
“서진이에게 준 상처를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지 마라. 쓰레기 자식아.”
“나는, 선배보다 더 오래! 강서진이 나를 알기 전부터 강서진을 봤어. 그건, 내 거야.”
“강서진은 물건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너의 그 잘못된 생각이 서진이를……. 씨발, 말해서 뭐 해.”
우민은 신경질적으로 눌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기욱이 서진을 진심으로 사랑하든 말든 그런 건 우민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민이 중요한 건 그 제멋대로인 감정으로 인해 강서진의 마음은 이미 잔뜩 상처를 입고, 부서졌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 아픔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상처를 줘도 괜찮다는 식의 생각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민과 기욱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데다 이해할 생각조차 없는 탓에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기욱도 그 사실을 알긴 아는 모양인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한 건 있었다.
“선배가 절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강서진을 위해서 뭐든 합니다.”
예전부터 자기 사람에 대한 책임감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었다. 설령 서진이 마음을 돌렸다 해도 기욱이 서진을 버리지 않는 이상 박기욱이라는 인물은 외부에서 봤을 때 강서진에게 해가 되는 짓을 쉽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해라는 기준이 어디까지나 박기욱 개인의 기준이었다.
“서정수가 병원 옥상에서 자살했을 당시에 목격한 사람이 서진이랑 시헌입니다. 그리고 선배는 서정수가 자살하기 직전 주치의였고요. 지금도 간간이 기자들에게 연락이 오는 모양인데, 여기서 선배랑 서진이랑 사귄다는 거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강서진이 내 약점이라도 된다고 말 하고 싶은 거냐?”
“착각하지 마시죠. 선배가 제 약점인 겁니다. 선배도 서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 눈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압니까?”
우민을 건드리면 기욱은 또다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기 전에 제 발로 우민을 찾아온 것뿐이었다. 대놓고 이용하겠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태도에 우민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가면 되잖아.”
“전 이미 마크당했으니까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뿐입니다.”
“설령 그게 싫어하는 나라도?”
“선배와 저는 기본적으로 밑바탕에 깔린 이해라는 사고방식이 달라 싫어하는 것일 뿐, 객관적인 상황에서 믿을 만한 거라는 별개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답하는 걸 원한다면 솔직히 저도 이 상황이 좆같습니다.”
기욱이 가운 주머니에 손을 살짝 집어넣었다. 손 외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소시오패스적 기질이 있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또 이런 식으로 발휘될 줄은 몰랐다. 우민은 기욱의 가운 주머니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야, 나도 좆같아 나도. 다음 주에 지방에 세미나 있어. 차 타고 갈 거니까 가는 길에 들르면 자연스러울 거다. 자료인지 뭔지 건네준 뒤에는 강서진에 손 하나 못 대게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슬슬 시간이 없는 우민이 빨리 달라며 손을 흔들었다. 기욱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USB인 줄 알았는데 휴대폰 조금 작은 크기의 검은색 외장 하드였다. 새거나 다름없는 외장 하드를 우민에게 건네주려던 기욱의 손이 잠시 멈췄다. 이상함을 느낀 우민이 수술실 너머 복도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침 수술을 준비하기 위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시간이니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한 기욱은 우민에게 외장하드를 완전히 건넸다.
“서진이, 일주일 정도 쉬게 해 주시죠.”
“……지금 이 시기에?”
기욱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당장 서진이가 빠지면 그 공백을 메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우민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기욱이 마지못해 혀를 찼다.
“제가 대신 들어가면 되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를 써서라도 서진이를 제 밑에 두는 건데 하고 후회가 들었다. 기욱은 우민과 함께 수술실을 나왔다. 살짝 뒤처진 기욱을 이상하게 생각한 우민이 고개를 돌렸다. 답지 않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기욱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기욱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수술실에 있을 때 가지고 나온 탓에 못 본 듯싶었다.
“할 말 있어?”
“이거.”
기욱이 고급스럽게 포장된 남색 상자를 우민에게 내밀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브랜드에 고개를 갸웃거린 우민이 상자를 가져왔다.
“뇌물이냐?”
“선배 거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다. 슬슬 출근 시간이라고는 해도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었다. 우민은 벽에 몸을 살짝 기댄 뒤 멋대로 기욱이 건넨 상자를 열어 봤다. 넥타이와 넥타이핀, 그리고 가격 대신 정장의 상품명이 적혀 있는 영수증이 하나 나왔다.
“디자인은 제 쪽에서 다 골라 놨으니까 치수만 재면 된다고 전해 주시죠. 원래라면 레지 끝난 기념으로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해?”
우민도 서진에게 뭔가 특별한 걸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넥타이와 넥타이핀의 센스를 보아하니 기욱이 평소에 하고 다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 소리인즉 서진에게 맞는 걸 찾기 위해 기욱 나름대로 꽤 고민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민은 여기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한 기욱이 이런 물건을 자신에게 넘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돌직구에 가까운 우민의 질문에 기욱의 어깨에 힘이 쭉 풀리며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강서진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거짓이 아니다. 서진을 사랑하고, 서진이 아니면 이 아픔을 없앨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서진이 선택한 사람은 늘 자신이 아니었다. 무엇이 엇나갔는지 알면서도 그걸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기욱에게도 명확한 건 있었다. 제 입으로, 그것도 가장 말하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기욱은 한약재를 입에 강제로 처넣은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슬슬, 저도 미움받기 시작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녀석이 만취한 강서진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해?
그렇게 말을 하고 싶었으나 우민은 눈앞에 있는 기욱의 모습을 보고 끝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늘 매사에 당당했던 기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랑과 이별이라는 단어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고소하기보다는 좀 안타까웠다.
박기욱이 서진에게 한 짓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짓임은 맞지만, 그는 태생부터가 공감이라는 걸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조금 더 빨리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어쩌면 서진과 기욱은 이렇게까지 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물론, 만약 그랬다면 우민과 서진이 사귀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가정은 가정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서진에게 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에, 돈깨나 나가 보이는 넥타이핀. 그리고 기욱이 신경을 썼다는 정장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레지던트 수료를 마쳤다는 축하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과한 느낌이 있었다.
“……아.”
요즘 날짜 가는 감각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우민이 재빨리 휴대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우민의 예상이 맞았다.
“슬슬 서진이 생일이었지.”
생일 선물을 겸하는 거라면 조금 과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네가 줬다고 말해?”
“그건, 선배가 알아서 하시죠.”
기욱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서진은, 제가 줬던 선물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건 기욱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미움받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탁, 또다시 낯선 의사가 우민과 기욱 사이를 지나가며 우민의 어깨를 부딪쳤다. 워낙 빠르게 지나갔던 터라 말을 섞을 틈도 없었다.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한 우민은 부딪힌 어깨를 툴툴 털었다. 뒷모습을 보니 기욱을 만나러 수술실에 왔을 때도 부딪혔던 의사였다.
“뭐지?”
“왜 그러십니까?”
“그게, 아까도 부딪쳤거든 저 녀석. 누군지 물어볼 걸 그랬나.”
괜히 기욱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서 그런지 묘하게 찝찝했다. 기욱이 한발 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우민과 부딪힌 의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타이밍 좋게 우민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슬슬 아침 회의에 얼굴을 비쳐야 할 시간이었다.
“연락할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욱이 먼저 가겠다는 우민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 * *
이른 아침, 서진은 로비의 카페 문이 열리기 무섭게 도착해 커피를 시켰다. 어차피 오늘 온종일 커피 시킬 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가장 큰 사이즈를 주문했다. 휴대폰을 하는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깜짝 놀란 서진이 등을 돌렸다.
“바빠?”
“아, 박시헌. 하아… 놀랐잖아.”
서진이 타이밍 좋게 나온 커피를 받아 왔다. 서진이 커피를 챙기는 사이 시헌도 카운터로 가 커피를 주문했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카페 안은 비교적 한가했다. 커피를 가져온 시헌이 비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이제 막 출근해 사복 차림인 시헌과 달리 서진은 수술복에 가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살짝 접어 올린 수술복 바지와 목에 걸린 마스크, 그리고 다 마시면 화장실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해야 할 것만 같은 양의 커피를 들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마치 시헌이 과거에 봤던 정혁의 모습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금방 간다고 답장을 보낸 서진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헌의 시선을 느끼고 잔뜩 예민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쳐다봐?”
“그냥. 급한 거 아니면 쉬다 가.”
“하아, 그럴까.”
안 그래도 피곤했던 서진은 별말 없이 시헌의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비록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지만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날밤을 꼬박 새운 서진은 시헌의 앞에서 커다란 빨대로 커피를 홀짝였다.
“왜 쳐다보냐고.”
“아니, 그냥. 시간 참 빨리 간다고 생각해서. 의사 같은 거 정말 먼,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는데 당장 눈앞에 있는 네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낯설어서 그래.”
“……그런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의사를 꿈꿔 왔던 서진은 가끔 현실성이 없을 때는 있지만, 낯설다고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박시헌이야 기욱 다음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다른 의미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니 그걸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결혼식 갔었어.”
“푸웁… 뭐? 못 온다며. 언제 왔는데?”
서진과 마찬가지로 커피를 마시던 시헌이 사래가 걸린 듯 헛기침하며 입가에 흐르는 커피를 닦았다. 청첩장을 주기는 했어도 서진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한 적도 없었다. 마지막 전날까지도 서진은 시헌에게 못 갈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시헌은 자신의 결혼식에 온 많은 하객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서진을 본 기억은 없었다.
“금방 왔다 갔어.”
“식사라도 하고 가지 그랬어.”
“그러게 말이다. 나 슬슬 먼저 일어날게.”
서진이 커피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헌의 결혼식에 정말 아주 잠깐, 얼굴을 비치고 사라진 건 사실이었다. 서진은 차마 잘 차려입은 시헌과 현장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지만, 역시 사정을 아는 서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화감이 들었다.
“하아… 모르겠다.”
마치 엇갈린 퍼즐에 접착제를 발라 강제로 붙인 그림을 보는 듯했다.
* * *
당직실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에어컨을 틀고 혼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보던 서진은 갑자기 열린 문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우민이었다.
“주무시러 오셨어요?”
“어, 근데 너 안 자냐?”
아침에 커피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오를 넘기지 못한 서진이 당직실로 들어온 건 한 시간도 전쯤이었다. 그렇게 하품을 하며 들어가더니 몰래 숨어서 논문이나 읽고 있다니 잘하는 짓이었다. 서진은 1층 침대에 털썩 누운 우민의 앞으로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10분 전에 올라온 스케줄 때문이었다.
“교수님, 저 스케줄이 이상한데요?”
“쉬어, 쉬어.”
어제 아침부터 꼬박 스물네 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했던 우민은 조명이 눈이 부시다는 생각도 잊은 채 이불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날도 안 더운데 에어컨은 왜 이렇게 처틀어 놓은 건지 당직실은 냉방병에 걸려 얼어 죽을 정도로 추웠다. 서진은 그런 우민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계속해서 덮고 있는 이불을 흔들었다.
“저 아직 연차도 없는데 이렇게 쉬어도 돼요?”
“내가 쉬라면 쉬는 거지 말이 많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남들은 못 쉬어서 안달인데 쉬는 것도 불편해하는 서진의 모습에 답답한 우민이 확, 하고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침대 안으로 이끌었다. 우민은 제 위에 올라탄 서진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우민보다 더 일찍 당직실에 들어온 서진의 뺨은 얼음장처럼 찼다.
“너 생일 선물이라 생각하고, 그냥 쉬어.”
“삼 일이나요? 교수님, 무슨 일 있어요?”
“서진아 나 믿어?”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하다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던 우민의 태도가 사뭇 진지하게 바뀌었다. 서진은 우민에게 붙잡힌 팔에 힘을 주었다. 최근 들어 병원 분위기도 흉흉한 것도 왠지 모를 갑작스러운 휴가가 불편한 데에 한몫했다.
“믿어요.”
믿을 수 없어도 믿어야 했다.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헌에게 자신을 믿을 수 있겠냐고 했을 때 시헌이 자신을 믿어 준 것처럼,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면 서진은 우민을 믿을 자신이 있었다.
“금요일 날, 세미나 끝나고 케이크 사 갈게.”
“갑자기 케이크요?”
“생일 파티하자.”
“교수님 생일은 멀어…… 아.”
서진은 우민이 말하는 생일케이크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한발 늦게 깨달았다. 생일 같은 거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리고 있었던 터라 제 생일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서진을 본 우민이 서진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우민을 원했다.
“……교수님?”
“…….”
“자요?”
피곤하긴 했던 모양인지 우민은 서진이 깨워도 반응이 없었다. 괜히 허무한 기분이 들었던 서진은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우민의 옆에서 같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저 퇴근합니다.”
시간이 되자마자 수술실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서진은 옷을 갈아입기 전에 진호에게 다가가 형식적으로 말을 했다. 차트를 보고 있던 진호가 서진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민에게 서진이 퇴근하는 걸 내버려 두라고 들은 뒤였다.
“그래, 쉬어.”
“감사해요.”
아무도 안 쉬고 일을 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공백이 얼마나 큰지 서진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미안해진 서진은 찝찝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우민과의 동거에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동거라고 해도 서진도 우민도 집에는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 데다 두 사람이 같이 집에 있는 날은 더더욱 적었다.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거실에 서진은 에어컨을 켜고 멍하니 앉았다. 한숨 잘까 하고 침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얇은 이불을 들고 소파에 누워 봤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일하고 있을 때는 어디든 재워만 준다면 잘 수 있다고 말을 하고 다녔지만, 막상 이렇게 예정에도 없이 일찍 집에 오고 나니 잠은커녕 커피를 열 잔 마신 것처럼 눈이 감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침대까지 가고 싶지도 않았던 서진은 이불을 덮은 채 계속 몸을 뒤척였다.
지금쯤이면 출발했겠지? 우민에게 전화해 볼까 하던 서진은 시간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전화하자고 생각하며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자긴 잤네.”
당장 누웠을 때는 안 잘 것처럼 굴더니. 당직실의 침대인 줄 알고 몸을 뒤척이다 소파에서 거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서진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뒤척인 시간을 제외하고 세 시간 정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불을 대충 개 올린 뒤 거실에 있는 블라인드를 살짝 걷자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어둠이 져 있었다.
“배고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서진은 냉장고 안을 뒤졌다. 당연하지만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두 사람이 집에서 먹을 만한 걸 사 뒀을 리는 없었다. 이제 와서 편의점 도시락이나 외식으로 식사를 때우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기에 편의점으로 향했다.
“14,600원입니다.”
담배와 적당히 마실 음료수, 도시락을 사니 만 원이 훌쩍 넘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카드로 계산을 하는 사이 서진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집에 들어갔어?」 오후 2:24
서진이 잠든 사이 우민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카드와 영수증, 그리고 봉지를 챙긴 서진은 편의점 가게 안에서 우민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제 일어났어요」 오후 6:33
「잘 잤어?」 오후 6:33
편의점을 나가기도 전에 답장이 왔다. 밖으로 나온 서진은 편의점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담배를 물며 다시 휴대폰을 만졌다.
「그냥, 그래요.」
「편의점 나왔어요.」
「교수님은 아직도 출발 안 했어요?」 오후 6:34
「이제 갈 거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내일까지 조용히 집에서 쉬고 있어. 알겠지?」 오후 5:04
「제가 애예요?」
「말 안 해도 그럴 거예요」 오후 6:34
「사랑해」 오후 6:35
서진이 담배를 끄며 휴대폰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디서 샀는지 모를 이모티콘까지 잔뜩 보낸 우민의 행동에 괜스레 비닐봉지를 꼭 쥐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사랑해요」 오후 5:07
바쁘긴 한 모양인지 우민은 더 이상 톡을 읽지 않았다. 서진은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으며 갈 준비를 했다. 터벅터벅, 오피스텔을 나오기 전에는 비교적 환했는데 갑자기 훅 주변이 어두워졌다.
“…….”
오피스텔로 향하던 서진의 걸음이 멈췄다. 계속해서 누군가 쫓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분 탓인 것 같았는데, 뒤쪽에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을 보니 그런 것 같지만은 않았다. 서진은 곧바로 집을 향하지 않고 집 근처를 배회했다.
‘기자인가?’
최근 대통령의 혼외자니 불륜설이니 뭐가 많이 터지면서, J대 병원에서 자살했던 서정수에 대해 캐고 다니는 기자들이 늘었다. 그중에서도 건너편 건물에서 자살을 목격한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안 기자들이 서진과 시헌을 떠보거나 찾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참을 돌던 서진은 저도 모르게 오피스텔이 아닌 한적한 주택가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윤과 살았던 반지하방 주택가와 비슷한 풍경의 골목이었다. 사람도 없고, 주변도 어두워져 너무 왔다고 생각한 서진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을 돌았다. 동시에 모자를 쓴 남자와 서진의 몸이 부딪혔다.
남자가 너무나 갑자기 튀어나왔던 탓에 깜짝 놀란 서진은 들고 있던 편의점 봉지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아, 죄송…….”
“서진아.”
“…….”
“잘 지냈어?”
눌러쓴 모자 너머로 들리는 조인훈의 목소리에 서진은 소름이 돋았다. 검은색 야구모자를 완전히 벗자 그 모습이 명확해졌다. 놀란 서진이 떨어진 봉지를 주울 틈도 없이 등을 돌리자 인훈이 재빨리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씨, 씨발 너…….”
“왜 그러는 거야 대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날 왜 감옥에 넣었냐고!! 우리 사랑했던 거 아니야? 서진아, 너 이상해. 그 녀석이 너한테 뭐라 그랬어?”
“그 녀석……?”
“병원에서 날 때린 그 개자식 말야. 죽여 버리겠어. 감히……!”
“씨발 뭐라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조인훈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인훈을 자극해 봤자 좋을 일이 없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인훈에 의해 벽 쪽으로 몰린 서진은 신발에 본드를 발라 놓은 것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의 잊어버리고 있었던 기억들이 인훈을 보더니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인훈의 손이 서진의 목을 조여 왔다.
“커흑……!”
“너도 좋아했잖아. 강서진, 강서진…!! 네가, 날 미치게 한 거야.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못 줘…!!”
“거기!! 무슨 일 있습니까?”
“……허윽….”
“저기요!!”
“씨발!”
멀리 골목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인훈은 다가온 남자가 딱 봐도 자신보다 체격이 좋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서진의 목에서 손을 놓은 뒤 빠르게 도망쳤다. 갑작스럽게 도망친 인훈에 남자가 인훈의 뒤를 쫓으려 했다.
“가지… 하아, 하… 마세요!”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이 다급하게 남자를 붙잡았다. 서진의 만류에 남자가 어쩔 수 없이 서진에게 다가와 서진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 카, 칼 가지고 있어서…….”
목을 졸린 것보다 서진을 무섭게 만든 건 입고 있는 옷 사이로 닿았던 날붙이였다.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남자가 서진을 달랬지만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경찰을 불러 주겠다는 남자의 손을 뿌리친 서진은 무작정 달려 지나가는 택시를 가로막았다. 깜짝 놀란 택시 기사가 서진을 향해 화를 내려 하자 서진은 곧장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J, J대 병원으로 가 주세요.”
“아, 예.”
서진은 떨림을 간신히 참으며 간신히 병원에 도착했다. 발을 들이지 못한 채 병원 근처에서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서진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후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서진은 병원으로 들어갔다.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라커 안쪽에서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얇은 목 폴라티가 나왔다. 안에 폴라티를 받쳐 목을 대충 가린 서진은 그 위에 옷을 챙겨 입고 센터로 들어갔다. 구석에 앉아서 급하게 라면을 먹고 있던 진호는 다가오는 의사에 고개를 들었다.
“나 밥 먹고 있……. 엥? 서진아?”
“선생님, 퇴근하신 거 아니셨어요?”
서진을 알아본 간호사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을 이상하게 생각한 진호가 나중에 얘기하자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간호사가 가고 난 뒤 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일하게 해 주세요.”
“너 상태가 안 좋은데? 한 교수님이 집에 보내라고 그랬어.”
“됐으니까……. 그냥 그러면 병원에 있을래요.”
“……괜찮냐 너?”
서진이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의 공백만큼 기욱이 도와주고 있어서 딱히 문제가 있거나 하진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라면을 전부 비운 진호가 국물을 반쯤 마신 뒤 목덜미를 긁적였다.
“한 교수님이 너 부르지 말라고 그랬는데. 어쩔 수 없지. 대신 교수님한테는 잘 말해라?”
“그럼요.”
“아까 임 교수님이 손 좀 필요하다 그러더라. 우리 쪽에는 아직 별일 없으니까 그쪽이라도 도와주고 있어. 생기면 바로 부를게.”
“감사해요.”
서진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떴다.
* * *
서진은 정신없이 일했다. 집에서 좀 자고 나온 것도 있었지만, 일에 집중하면 힘든 일은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다. 서진은 짜증이 나거나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미친 듯이 공부에 집중하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욱에게 가장 많이 시달렸던 고3 시절이 서진이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재수하긴 해도 그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억지를 써 가며 병원에 출근한 지 정확하게 24시간이 지났다. 시간을 내 잠시 나온 서진은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나왔다. 머리를 대충 말려 떨어진 물기가 가운 위로 떨어졌다. 휴대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아침에 서윤과 형식적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는 통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
서진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생일이라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서진의 생일을 축하해 준 적이 없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배 안에서 자신을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품었을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서윤에게 대한 집착이 잘못됐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제 어린 시절의 절반 이상은 강서윤으로 칠해져 있었다. 서윤이 없었다면 서진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우웅, 휴대폰에서 진동과 함께 벨 소리가 울렸다. 콜인 줄 알았는데 우민에게서 온 전화였다. 병원에 출근하고 일부러 연락을 안 했기에 언젠가 전화가 올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서진의 생각보다 늦게 전화가 왔을 뿐인 일이었다.
― 여보세요?
― 너 어디야?
― 알면서 묻지 마세요.
― 하아, 진호한테 들었다. 너 저녁에 다시 병원 왔다면서? 왜 그랬어?
그러게 말이다. 그 사연을 일일이 설명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서진은 뒤늦게 우민에게 어렸을 적 스토킹을 당했던 사건과 대학 시절 강간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거기서 차마 출소를 한 그 녀석이 피해망상인지 반쯤 미쳐서 또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말을 했다가는 불에 기름을 붓는 수준이 될 거라는 것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았다.
― 집에 가.
― 싫어요.
― 너 진짜, 왜 이렇게 고집부리는 거야?
― 싫다고 했잖아요. 그러는 교수님은 왜 저를 집에 보내려는 건데요? 병원에 있으면 안 돼요?
―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 병원에 내버려 두는 게 날 생각하는 거라고!
― 나 믿는다며. 강서진.
계속해서 실랑이가 이어졌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서진은 마르지 않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었다. 짜증이 나, 스트레스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폴라티를 살짝 내리자 아직도 벌겋게 목이 졸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짜증이 날 때는 뭐든 좋으니 그냥 자신을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 나도, 나도 힘들다고!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 …후, 일단 끊어. 나중에 얘기하자.
― 집에…… 안 갈 거예요.
서진이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런 서진의 고집에 우민이 휴대폰 너머로 한숨을 내쉬었다.
― 알았어, 좀 있다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서진은 씩씩거리며 센터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온다더니 꽤 늦게 온 서진은 입이 잔뜩 나와 있었다. 집에 갔다 온 서진은 누가 봐도 예민하다는 포스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진호가 보기에도 서진은 한 번씩 저런 식으로 폭발할 때가 종종 있었다. 평소에는 그저 그런 바람 빠진 풍선 같다가도 한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할 때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다들 거기에 바늘을 꽂아 터지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서진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야, 한 교수님이 뭐래? 그냥 집에 갈래?”
“몰라요. 집에 가라고 잔소리해요. 부모예요?”
“사랑싸움도 작작해라. 괜히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진호의 아닌 경고에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우민이랑 사귀는 걸 아는 사람은 서윤과 기욱, 그리고 시헌 정도였다. 진호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서진의 표정에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리 교수님 게이인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둘이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는 사람이 신기한 거다.”
“티 많이 났어요?”
“그걸 이제 와 물어봐?”
“그러네요.”
이미 날 만큼 난 소문을 두고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서진은 반쯤 마른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얌전히 있을 자신 없으면 조용히 집에 가.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까.”
“안 갈 거예요.”
서진은 아무리 진호라도 그것만큼은 양보 못 한다며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사실 진호가 걱정하는 건 서진보다는 기욱 쪽에 가까웠다. 서진의 갑작스러운 휴무에 다른 사람도 아닌 박기욱이 직접 나서서 대타를 뛰어 주겠다고 말할 때부터 뭔가 평범한 휴무라는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하면 좋게 달래 집에 보내려 했는데 말하는 투를 보니 서진은 단단히 토라져 있었다. 신경외과 출신 의사들 특유의 고집은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물론, 그 고집에 진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관은 없는데…… 아.”
진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아래층에서 박기욱이 내려왔다. 막 내려온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기욱은 진호와 함께 있는 서진을 보더니 미간을 구겼다. 등을 돌리고 있던 서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진호가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호의 목례를 반쯤 무시한 기욱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아, 그럼 저는 이만.”
괜히 끼어들어 좋아질 게 없다고 판단한 진호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서진은 기욱에게 붙잡힌 팔을 내려다봤다. 도무지 센터 한가운데서 할 만한 행동은 아녔다. 예상대로 눈치 빠른 의료진들이 지나다니며 서진과 기욱을 수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진이 기욱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따라와.”
“싫어요.”
“강서진, 일 크게 벌이지 말고 와.”
기욱이 먼저 앞장섰다. 서진과 눈이 마주친 진호가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뭉그적거리며 외상센터 밖으로 나왔다. 바깥쪽에서 기다리던 기욱은 서진이 나오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다시 서진의 팔을 잡고 강제로 이끌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섹스는 안 할 거예요.”
“…….”
“안 한다고 했어.”
무엇이 목적인지는 알고 있었고, 동물처럼 질질 이끌려 가는 건 익숙했다. 그러나 동물도 동물 나름의 자존심이 있었다. 인훈에게 목 졸림까지 당한 서진의 멘탈은 아직도 회복 전이었다. 지금 기욱에게 강제로 당한다면 서진은 진짜 반쯤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손으로 연구실의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연 기욱이 서진을 연구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강서진, 너 왜 퇴근 안 했어?”
“……도대체 뭐예요? 제 퇴근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녔다. 사연을 말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강요하는 행동은 박기욱이 자주 하는 짓 중의 하나였다. 서진은 설마 거기에 기욱이 끼어 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나갈 거예요.”
“집에 데려다줄게.”
“집에 안 간다고 했잖아요. 도대체 뭐예요? 뭔데 둘이 그래요?”
다른 사람도 아닌 우민이 기욱의 말을 순순히 듣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서진은 뭔가 자신이 모르는 거래가 있음을 확신했다.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점점 뒤로 물러난 서진의 몸은 어느새 침대가 있는 방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진은 그제야 기욱의 의도대로 몰린 것을 눈치챘다.
“비, 비켜요… 섹스 안 한다고 했잖아요!”
“그건 내가 정해.”
“그만…… 제발, 나 오늘 진짜…… 그만 …으읍!”
기욱이 서진의 입을 틀어막으며 방 안으로 내던졌다. 이 좁은 공간에서 그동안 얼마나 당했는지 셀 수가 없었다. 우민과 사귀면 더 이상 자신을 안 건드릴 줄 알았다.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몰랐다. 서진을 침대로 밀은 기욱은 서진의 위에 올라타 서진을 눌렀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기욱은 서진의 몸을 쓰다듬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강서진을 원했다. 후에 있을 일에 대한 뒷감당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서진의 안에 자신의 것을 밀어 넣고 범하고 싶었다. 강서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충동이 기욱을 좀먹어 들어갔다. 가운을 벗어 바닥에 던지며 잔뜩 흥분해 제정신이 아닌 듯한 기욱의 시선에 서진이 불안함을 느꼈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바지 안쪽으로 들어와 서진의 페니스를 꽉 쥐었다.
박기욱과 섹스를 할 때면 서진은 한 번도 제정신으로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기욱에게 안겨 신음을 흘리는 자신을 인식하면 할수록 끝없는 심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인훈도 그렇고, 박기욱도 그렇고 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걸까? 기욱의 손이 몸 곳곳을 만질 때마다 눈을 질끔 감은 서진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그러나 역시 오늘은 아니었다. 만약 다른 날에 우민 몰래 상대를 해 주는 일이 있어도 오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반쯤 이성을 놓은 서진이 기욱에게 매달렸다.
“잘못했어요. 나중에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제발 오늘은 하지 마세요.”
“…….”
입을 꾹 다문 기욱의 손이 다시금 서진을 만졌다.
“아악…!”
그저 손을 스친 것뿐임에도 과거의 기억들이 트라우마처럼 되살아나 서진을 괴롭혔다. 잘못했어요. 싫어. 그만해. 비명에 가까운 처절한 외침들은 기욱이 과거에 서진을 안으며 수도 없이 들어 왔던 말들이었다. 지금 있는 섹스도 과거의 수많은 섹스 중 하나일 뿐인데, 왜인지 모르게 사뭇 그 느낌이 달랐다. 마치 제가 원했던 섹스는 이런 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지 마세요. 죄송해요. 흐윽, 으윽… 제발, 오늘은…….”
“……내가 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진의 몸을 더듬던 기욱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혼란스러워했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강서진에게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강서진에게 왜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기욱은 어떻게든 이 찝찝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 서진의 목폴라를 걷어 냈다.
목을 가리던 티를 치워 낸 순간 기욱의 손이 또다시 멈췄다. 평소 서진은 수술복 안에 뭔가를 받쳐 입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 서진이 목을 가리는 답답한 옷을 안에 입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서진의 목에는 희미하지만, 목을 졸랐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기욱이 아는 사람 중에 서진에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강서진, 누구야. 어떤 새끼가 그랬어!”
“아아… 으윽, 죄송해요. 아아악!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어떤 개새끼가 감히…….”
“아아아악!! 그만….”
“제길.”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기욱이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며 벌벌 떠는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거칠게 서진을 밀어냈다. 도망치듯 구석으로 들어간 서진은 매트릭스 침대 위에 있는 담요로 몸을 가렸다. 그럼에도 담요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간 기욱이 서진의 머리카락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자, 잘못…….”
“그만해.”
“죄송…….”
“사과하는 거 그만하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서진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기욱의 손이 떨어지자 서진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 맑은 눈동자에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물을 왜 어째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지? 언제나와 같은 패턴이지만, 오늘 서진의 눈물은 기욱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제길.”
서진을 안으면, 섹스를 하면 이 고통이 가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고장 난 기계처럼 마음이 아팠다.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울고 있는 서진을 강제로 안는다고 해서 이 기분이 사라질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자.”
“…….”
“다, 당신은요?”
기욱이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툴툴 털자 서진이 그런 기욱의 가운을 손끝으로 살짝 붙잡았다. 아아, 나는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녀석을 강제로 안았던 건가? 금방이라도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눈빛의 서진을 도대체 어떻게 안았던 거지? 기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밖에 있을 거야.”
“…….”
“나올 생각 하기만 해 봐.”
어차피 밤새 할 일도 있고, 시간상 곧 있으면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온 우민이 예정된 장소로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민의 오피스텔은 희열이 붙여 놓은 사람이 감시하고 있기에 더 안전할 거로 생각했는데, 차라리 밤새 자신의 연구실에서 옆에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기욱은 불을 끈 뒤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문틈으로 불빛과 함께 기욱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진은 병원 담요를 덮어쓰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사이 우민에게 꽤 많은 전화가 와 있었다.
* * *
투 툭, 툭. 예정에 없던 빗방울이 우민의 창문을 두드렸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민은 약속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일이 많이 바쁜 건가 전화를 줄 줄 알았는데 서진은 연락이 없었다.
“빌어먹을.”
늦은 저녁, 사람과 차가 거의 없는 재래시장 근처의 1차선 도로를 돌아다니던 우민은 뜻밖에도 아직 문을 열고 있는 빵집을 발견했다. 인근에 차를 대고 혹시나 하고 빵집으로 들어갔다. 빵 대부분이 팔린 상태였었지만, 케이크 한 개가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많아 서진에게 사 줄 케이크를 챙겨 가지 못했는데 운이 좋았다. 마감을 위해 쓰레기를 버리고 온 알바생은 가게에 있는 우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민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생크림 케이크를 손가락질했다. 서진이 생크림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렴 설령 생크림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제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얼마예요?”
“2만 8천 원인데. 2만 원에 해 드릴게요.”
“그냥 원래대로 긁어 주세요.”
어차피 우민이 사 가지 않았다면 버려질 케이크였기에 할인해 준다는 제안을 한사코 거절한 우민은 제값을 주고 케이크를 챙겨 차로 돌아왔다. 잠깐 사이 비가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케이크를 챙긴 뒤, 차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아 있던 빵집 간판의 불도 꺼졌다. 거리를 비추는 것이라고는 군데군데 놓여 있는 가로등밖에 남지 않았다.
슬슬 이동해야 했기에 케이크를 조수석 쪽에 둔 뒤에 차를 출발시켰다. 12시가 넘어서 도착할 거라는 건 예상한 일이었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생일 당일 날 해 주고 싶었기에 서진에게 전화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우민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서진이라는 것을 확인한 우민이 차에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로 전화를 받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전화가 연결됐지만 한동안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래도 기분은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한 우민이 먼저 말을 했다.
― 집에 갔어?
― 안 갔어요.
― 그럴 줄 알았어. 나 12시 좀 넘어가서 도착할 것 같으니까 병원으로 갈게.
― 화, 안 내요?
― 아까 냈잖아. 네가 그런 거로 순순히 집에 갈 거라고도 생각 안 했어.
강서진은 보기와 다르게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억지로 가라고 소리를 질러봤자 싸움뿐이었다. 시간도 시간이고, 일이 이렇게 됐다면 차라리 보는 눈이 많은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 근처라고 했는데? 내비에도 잘 찍히지 않는 낯선 장소에 우민은 서진과 통화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 사이 평소보다 조금 하이톤인 서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 저 있잖아요. 할 말 있어요.
― 뭔데?
― 박기욱 연구실에 있어요. 지금.
― 개새끼가……!
― 아니, 아,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안 당했어요. 그냥,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진이 다급하게 오해하지 말라며 우민을 달랬다. 서진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병원에 가면 증명이 될 일이었다. 어쨌든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더 물어봤자 좋을 건 없었다. 통화하는 서진의 목소리가 술을 마신 사람처럼 높다고 했더니 그 이유가 있었다. 박기욱에게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서진이 순순히 기욱의 연구실에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서진이 울었다는 걸 눈치챈 우민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운전대를 꽉 쥐었다.
― 서진아.
― 왜요?
― 생일 축하한다. 그…….
통화로 하려니 갑자기 낯이 간지러웠던 우민이 말을 흐렸다. 우민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서진이 다시 말했다.
― 뭐예요?
― 아니야, 됐어.
― 뭐예요. 말할 것처럼 해 놓고.
― 하하, 그러게 말이다.
괜히 분위기를 머쓱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우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우민과 통화를 한 탓인지 서진의 목소리가 처음보다는 좀 차분해졌다
― 있잖아요. 제가 그날, 박기욱한테 당했을 때요. 어디서였지?
― 너네 집이었어.
― 아, 맞아. 그랬어요.
서진의 목소리가 마치 라디오처럼 빗소리와 어울려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우민은 일부러 통화 소리를 최대한으로 키웠다.
― 그때, 눈 떴는데 교수님이 옆에 있었잖아요. 좀, 아니. 많이 기뻤어요.
도망칠 줄 알았다. 이제 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민은 제 옆에 있어 줬다. 서진에게 있어서 그것은 큰 힘이 되었다.
― 사랑해요.
― 아, 나 신호 바뀌었다. 금방 다시 전화할게.
우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이놈의 길은 넓기만 하고 차들은 없고,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운전 경력이 있는 우민도 이런 길은 처음이었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됐어요. 저 잘 거예요.
― 그럼 눈 뜨면 네 옆에 있을 테니까 자고 있어.
― 알았어요.
서진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역시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했나?
“귀여운 자식.”
차를 돌려 다시 신호에 걸린 우민이 휴대폰을 가지고 와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이어지며 빗소리가 점점 시끄럽게 차를 강하게 두드렸다.
끼익.
귀가 먹을 정도로 거친 타이어 밀린 자국 소리와 함께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1톤 트럭이 난데없이 우민의 차를 들이받았다. 요란한 자동차 경보음과 함께 에어백이 터지며 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며 사방으로 유리 파편이 튀었다.
“으윽….”
간신히 운전대를 붙잡고 정신을 차렸지만,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모든 게 거꾸로 보였다. 아아, 뒤집힌 건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운전을 하는 차인가. 머리와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쏠리며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뒤집힌 차에서 아래쪽으로 눈을 돌렸다.
서진에게 사 주려고 했던 케이크가 상자 밖으로 튀어나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너졌다. 아아, 케이크는 글렀나. 우민은 케이크 상자 옆으로 떨어진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안전띠가 엉켜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바람과 함께 스산한 소리가 났다. 차의 경보음이 우민의 가뿐 호흡처럼 빠르게 울리고 있었다.
“후… 윽, 조금만 더….”
간신히 휴대폰을 가져왔지만, 액정이 반 깨져 있었다. 어떻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화면을 들어갔지만 붉은 피가 이내 손에 있는 휴대폰마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다. 우민의 손이 달달 떨렸다. 뭐라고 보냈는지도 모른 채 손에 힘이 풀리며 휴대폰이 툭 떨어졌다.
한 번의 충격이 가고 두 번째 충격이 다시금 우민의 차를 덮쳤다.
* * *
추적추적, 창밖으로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일어나도 일어난 것 같지 않은 찝찝하고 무거운 공기가 서진의 어깨와 몸을 눌렀다. 왠지 기분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눈가를 비비며 손에 꽉 쥐고 잠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우민은 없었다. 신발을 신고 일어난 서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날밤을 새운 듯 잠이 들기 전과 후가 다를 게 없는 기욱이 블루라이터 필터가 있는 얇은 테 안경을 내려놓으며 눈을 깜박였다.
“…어. 자, 잘 잤어요?”
기욱이 손을 대지 않은 채 기욱의 근처에서 잠이 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찝찝하긴 해도 잠은 제대로 잤던 서진은 어색한 아침 인사를 했다. 서진의 인사에 기욱은 책상에 놓인 머그잔을 살짝 들었다. 커피가 없었다. 괜히 민망해진 기욱이 컵을 내려놓았다. 목이 말랐던 서진도 선반 위에 있는 컵을 챙겼다. 서진의 시선이 기욱이 만지고 있는 물이 없는 머그잔에 닿았다.
“줘요.”
“어, 그래.”
서진은 기욱이 내민 컵을 가지고 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서진의 작은 손이 컵을 쥐고 있는 기욱의 손을 스쳤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던 서진이 후다닥 기욱의 컵을 빼앗듯 가져왔다. 정수기에 자신이 가져온 컵의 물을 반쯤 따라 마신 뒤 기욱의 컵에 물을 따르며 휴대폰을 만졌다.
매번 잠이 들면 생각하는 게 있다. 자신이 잠이 든 사이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그러면 안 되고, 대게의 경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아주 가끔 드물게 자고 일어난 사이에 병원이 발칵 뒤집히거나 멀쩡했던 환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톡을 보니 다행히 오늘은 별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 어, 나야. 왜?
등 뒤로 들린 기욱의 목소리에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밀린 톡을 전부 다 보고 습관처럼 화면을 잠그려던 순간 갑자기 뭔가가 훅, 하고 올라왔다.
「야」
「한 교수님 TA 당하셨대.」 오전 6; 21
뭘 잘못 읽은 걸까? 머그컵에 있던 물이 넘쳐 손을 놓자 머그컵이 아래로 떨어지며 깨졌다. 소리에 놀란 서진이 뒷걸음질 치더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내 통화를 하던 기욱도 앉아 있던 의자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 한 교수님, TA 당하셔서…… 아까 30분 전에 사망하셨다고…….
책상에 손을 짚으며 바닥에 앉은 서진을 내려다봤다.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서진이 급하게 바닥에 같이 떨어진 휴대폰을 열어 이어서 오는 톡을 확인했다.
「한 교수님 사망하셨대.」
휴대폰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고장이 난 기계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린 서진이 기욱과 눈을 마주쳤다.
“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다시 한번 서진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 * *
J대 병원 지하에 있는 장례식장에는 평소보다 더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마치 시체 같았다. 등 뒤로 수군대는 목소리에도 저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트럭이 2번이나 들이받았다고 했다. 분명 정상적으로 세미나를 마치고 왔다면 갈 일이 없는 장소에서 사고를 당했다. 헬기까지 동원돼 인근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됐다..
해당 병원에서 우민의 신원을 파악한 뒤 뒤늦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J대 측으로 연락을 해 정혁이 최소한의 인원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지만, 시간은 정혁의 편이 아니었다. 정혁이 도착했을 때 우민은 이미 3번의 심정지와 다발성 장기 손상 등으로 사실상 사망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한 교수님 세미나는 청주였잖아. 사고 난 건 강원도 정선 인근이래.”
“거길 왜 간 거야?”
“근데 거기 도로가 공사는 다 됐는데, 요금 문제 때문에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더라고.”
“근데 강 선생이랑 한 교수님이랑 사귄 거 진짜지?”
“말도 마, 강 선생. 벌써 10시간도 넘게 저러고 있어. 충격이 장난 아닌 모양이야.”
우민의 죽음을 두고 온갖 말들이 떠돌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참 이기적이었다. 일 년에 수십 번,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런데도 죽는다는 건 나와 관련이 없거나 먼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왜 하필 이 사람이야?
왜?
왜냐고.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우민이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그가 이렇게 갑자기 죽어야 하는지 서진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서진아, 일단 좀 일어나자.”
우민의 장례식장에 방문한 서윤이 굳은 돌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우민의 사진을 보고 있는 서진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서윤의 걱정에도 서진의 시선은 여전히 사진 속 우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린다.
우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 눈 뜨면 네 옆에 있을 테니까 자고 있어.’
금방이라도 그 약속을 지키러 올 것만 같았다. 서윤이 계속해서 서진을 일으키려 시도하자 서진이 서윤의 손을 쳐 냈다.
“서진아.”
“놔.”
“그만 가자. 아니면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 응?”
“건들지 말라고!! 누… 누나가 뭘… 알아! 야, 약속했단 말이야…… 눈 뜨면 곁에 있겠다고…!! 나한테……. 며, 몇 시간 전에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통화했다고!! 그런데 왜? 왜!!!”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이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통화를 끊지 말걸,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해 줬어야 했다. 차라리 세미나에 같이 갔어야 했나? 집에 가 있으라는 우민의 말에 화를 내며 이유를 물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모든 게 제 잘못 같았다. 잔다고 하지 말걸. 조금 더 우민을 기다릴걸.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들었다.
우민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가슴을 조여 왔다. 어떻게 하면 우민을 살릴 수 있었던 거지? 어떻게 하면 우민이 죽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이 장례식은 다 거짓말이 아닐까. 어딘가의 착오가 있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온갖 생각들이 다 들었다.
“서진아…… 제발 그만해.”
“……가.”
“서진아.”
“가라고, 건들지 마!! 내버려 둬. 왜 그러는데!! 누나가, 누나가 교수님에 대해 뭘…… 뭘 안다고…!!”
서진의 목소리에 입구 쪽에 있던 기욱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검은 정장 차림의 기욱을 본 서진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 얼굴이 다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우민의 죽음이 왜 이렇게 아픈 거지? 왜 나한테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주변을 둘러본 기욱은 제정신이 아닌 서진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오빠!! 왜, 왜 그러는 거야!”
“씨발… 너”
서진의 몸이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근처에 있던 다른 의사들도 놀라 그런 기욱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낸 서진은 바닥을 질질 기다시피 하며 기욱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기욱에게 맞은 뺨에 아픔은 없었다. 이깟 고통, 당신에게 당신이 나에게 준 고통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갈 이유가 없는 곳에서 당한 수상한 교통사고, 해당 트럭은 인근 야산에서 발견됐지만, 조회가 되지 않는 대포 차량이었다. 평범한 차량을 1톤 트럭이 두 번이나 들이받았다고?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 일부러 그런 거다. 그리고 서로 곧 죽어도 싫어하는 두 사람이 자신을 집에 보내려 기를 썼다. 뭔가 있다. 서진이 모르는 뭔가가 있고, 죽은 우민과 달리 살아 있는 기욱은 우민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너, 네가… 하하. 네가 죽인 거야!!”
“서진아!”
“넌 무슨 일인지 알지? 교수님이 거기 갔는지 알잖아! 말해…! 왜!! 왜 죽였어! 아냐. 아니야. 교수님이 죽었을 리가 없어. 너,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죽어야 되는 건 교수님이 아니라 박기욱, 너라고!!”
“야, 강서진! 그만 안 해?”
기욱을 말리던 진호가 적당히 하라며 눈치를 줬지만, 서진은 들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다 자신과 기욱을 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서진 못지않은 그늘이 가득했다. 우민과 친했던 몇몇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아악… 아아아악!!”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온몸이 고통스럽게 타들어 가도 이것보다는 덜 아플 것 같았다.
죽어야 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박기욱이었다.
이제야 좀, 행복해질 줄 알았다.
* * *
“후우….”
회색의 담배 연기가 기욱의 주변을 맴돌았다. 손을 저어 연기를 걷어 냈다. 비가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내뱉은 담배 연기만큼이나 흐리고 무거웠다.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임에도 비는 오지 않았다. 묵직하게 비구름을 쌓아 놓는 모습이 억지로 뭔가를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습한 공기에 기욱은 짜증을 내며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연신 줄담배를 피우는 기욱의 옆으로 희열이 다가와 벽에 등을 기댔다.
“남 병원장님, 사퇴한다더군요.”
“알아.”
“선배라고 들었는데.”
“선배는 무슨.”
기욱이 짜증을 내며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기름을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라이터가 말썽이었다. 희열이 기욱 쪽으로 제 지포라이터를 던졌다. 희열의 라이터로 불을 붙인 기욱이 다시 연기를 내뱉었다.
“선배는 무슨, 모릅니다. 그런 거.”
기욱과 우민은 악연이었다. 일하는 스타일하며 근본적인 사고방식, 성격부터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지던트를 막 시작할 때는 저 녀석을 죽이고 나도 죽어 버리겠다는 식으로 들이받은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우민이 4년 차가 끝나 갈 시절에 제발 우민이 H대든 K대든 좋으니 꺼져 줬으면 좋겠다며 물을 받아 놓고 기도까지 했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같은 병원에서 교수로 일하는 걸로도 부족해 강서진까지 빼앗길 줄 그때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긋지긋한 원수가 사라졌으니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담배를 피우는 기욱의 입가에서는 씁쓸하고 찝찝한 향기만 맴돌았다. 기욱이라고 우민이 사고가 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강서진이 선택한 건 자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서진이 자신과 달리 얼마나 우민을 좋아하는지도 뼈아플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우민이 좋아서가 아니다. 우민이 상처를 입으면 서진이 아파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우민을 건드리지 않은 것뿐이었다. 강서진이 자신 외에 다른 사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건 용서 못 한다. 이기적이고, 잘못된 사랑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트럭 운전자 찾았습니다.”
“벌써?”
“예. 인근 마을 주민이 신고했는데, 농약 중독으로 이미 사망한 뒤더군요. 자살로 결론지을 겁니다.”
“부검도 안 했는데 자살 확정이라. 대단하네. 인근에 CCTV 없다고 들었는데 그 남자가 트럭 운전자라는 건 어떻게 알아?”
“한 교수님, 사고 났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게 우리 애들입니다. 트럭 운전자 얼굴 정도는 봤습니다. 놓쳐서 문제지. 그쪽 말대로 제대로 된 증거도 없는 게 복잡하게 만들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자료는?”
“잘 챙겼습니다. 그게 진짜가 맞다면요.”
“이걸로 빚은 값은 거다.”
기욱이 희열에게 받은 라이터를 허공으로 던졌다. 깜짝 놀란 희열이 붕 뜬 라이터를 다급하게 양손으로 받았다. 눈빛에서부터 얼마짜리 라이터인 줄 아냐며 불만이 가득했다. 간신히 라이터를 챙겨 주머니에 넣은 희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욱을 바라봤다.
“내가 말했잖아. 빚지고는 못 사는 공격이라고.”
“하하,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희열은 당연히 박기욱과 강서진 사이에 뭔가 있을 줄 알았다. 장례식장에서 들은 이야기는 아무리 희열이라고 해도 뜻밖이었다. 설마 죽은 한우민과 강서진이 사귀고 있었을 줄이야. 기욱의 태도를 보니 둘이 사귀는 걸 모르고 있는 눈치는 아니었다. 참으로 복잡한 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자기 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관심을 가져서 좋을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었다. 기욱과 서진, 그리고 둘을 둘러싼 주변 관계는 희열이 관심을 둬서 득을 볼 일은 결코 없었다.
“한 교수님 사망 사건과 관련해서 회장님께서 언론은 걱정할 것 없다고 하시더군요.”
“당연히 그래야지.”
흉흉한 분위기에 자칫 잘못하면 대형 스캔들이 될 법한 사건을 묻어 줬으니 그 정도도 해 주지 않는다면 그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물론, 희열은 기욱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나중에 식사라도 한번 하시죠.”
“기분 내키면. 그보다, 말 나온 김에 부탁 하나만 더 하지.”
“그쪽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드리라고 했으니까 말씀하시죠.”
기욱이 담배를 끄며 희열의 앞으로 다가가 뭔가를 말했다. 기욱의 말을 차분하게 들은 희열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무립니다. 알고 계시죠?”
“그 정도는 알아.”
“수사가 다 마무리되면, 꼭 해 드린다고 약속하죠.”
“그래.”
“그럼 저는 일이 있어서.”
대화를 마친 희열이 먼저 자리를 떴다. 희열이 가고 난 뒤 기욱은 소매 끝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담배를 더 피우려다가 라이터가 고장 난 것을 다시 닫고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기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차로 돌아왔다. 제정신이 아닌 서진에게 자신의 존재는 눈에 띄는 그것만으로도 기름을 붓는 행위라는 걸 기욱도 잘 알고 있었다. 편두통이 올 것만 같았다. 우민의 죽음에 많은 의료진이 왔다 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사람들의 눈을 피할 곳이 필요했던 기욱은 한참을 돌고 돌아 차 안으로 돌아왔다.
30분 정도 알람을 맞춰 놓은 뒤 운전석의 의자를 뒤로 눕힌 순간 기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에 숨어 있던 정체를 모를 남성이 순식간에 기욱의 목 근처로 스턴건을 들이댔고, 기욱은 빠르게 의식을 잃었다.
* * *
“윽….”
편두통이 더 강해진 기분이었다. 몸이 아직도 뻣뻣했다. 스턴건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손을 움직인 기욱은 제가 뭔가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넓은 폐공장 안을 울렸다. 탁,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빛이 기욱을 비췄다. 자는 척 하는 게 좋겠군. 상황을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 기욱은 눈을 질끔 감으며 쓰러진 척을 했다.
촤악, 이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이 기욱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뭔가 차가운 물이 뺨을 적시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감지했던 터라 심적으로 크게 놀란 상황은 아니었다. 후, 어쩔 수 없나. 물에 잔뜩 젖은 기욱이 내려앉은 눈꺼풀을 천천히 올렸다.
“…후우.”
어딘지 모르는 폐공장은 군데군데 기름 냄새가 났으며, 성인 남성들이 기욱을 둘러싸고 있었다. 살다 살다 낯선 사람에게 납치를 당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희열의 말대로 뭐든 한다더니 그 말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 한 명이 입을 다물고 있는 기욱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이내 기욱이 그런 남자를 강하게 노려봤다.
“씨, 씨발 꼴아보면 어쩔 건데!”
“…….”
말을 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기욱은 이를 악문 채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차라리 납치를 당한 게 서진이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아무렴 자신을 납치하고도 좋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험한 작업복을 입고 있는 사내들과 달리 비교적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기욱의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손을 까닥이자 얼굴을 비추던 조명이 옆으로 틀어졌다. 덕분에 조금은 거지 같은 빛 번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자 한 명이 기욱의 머리채를 붙잡아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기욱이 얼어붙은 입꼬리를 반쯤 올렸다.
기욱은 남자를 알고 있다. 남자도 기욱을 알고 있다. 서로서로 알지만 말을 섞어 본 적이 없는 사이일 뿐인 관계였다. 이형진. 기욱의 기억이 맞았다면 자신을 납치한 사람은 이형진이 맞았다. 현 대통령이자 김 의원이라고 불렸던 남자의 두 번째 비서였다.
“후, 우리 교수님이 설마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칠 줄은 몰랐네.”
“…….”
“설마 지 검사 그 자식이랑 인연이 있을 줄이야. 덕분에 우리 의원님, 화 많이 나셨거든. 너 때문에 다 같이 좆된 거라고 알아? 작업 치다가 선수 당하는 건 또 오랜만이네.”
우민이 죽을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자료를 빨리 넘기고 손을 턴 것은 현명한 선택인 듯싶었다.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앞으로 당긴 기욱이 남자―이형진을 노려봤다.
“나한테 없어.”
“가져와. 너 지 검사랑 친하잖아. 아니면 다 죽는 거야. 교수님이니까 보험 정도는 들어 놓았을 거 아냐.”
“…….”
기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형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진짜를 없애고 사본을 떴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사본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외장 하드 사이트에 있는 자료는 기욱의 장난질로 이상한 자료만 가득 차 있었다. 철컥,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가 기욱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아래로 내려 입안을 메우는 딱딱한 물건을 확인한 기욱이 미간을 구겼다. 이형진이 기욱의 입안에 틀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총구였다.
“아, 그러고 보니 와이프가 곧 출산이라면서? 결혼 몇 년 만에 가진 애라고 했던가……. 그런 주제에 처남이랑 섹스해? 하하, 의사 새끼들 또라이 많다 들었는데 이건 완전 거물이네!”
기욱은 폐공장 외벽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주변을 비추는 것이라고는 기욱의 근처에 있는 스탠드형 조명이 다였다. 얼마나 의식을 잃고 기절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총구를 뺀 이형도가 기욱의 머리를 후려쳤다. 몸이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 뒤에 있던 남자가 다시 의자를 일으켰다.
“하나씩 뒤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
“넌 맨 마지막이야. 좆같은 새끼.”
“씨발.”
“씨발 새끼는 너지. 어? 감히, 누가 누구한테.”
이형진이 기욱이 묶여 있는 의자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위로 든 기욱은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했다.
“하하, 하하하하하!’
“…….”
갑작스러운 기욱의 웃음에 남자들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보통 갑자기 잡혀 오거나 하면 아무리 다 큰 성인 남자라 해도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눈을 뜬 순간부터 기욱은 이 상황에 겁을 먹거나 무서워하는 듯한 느낌이 아니었다. 따로 믿는 바가 있는 건가? 단순한 허세는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뭘 믿고 저런 미친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멋대로 웃음을 멈춘 기욱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넨,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미친 새끼가 뭐래. 야! 이 또라이 새끼 잘 보고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망을 보게 한 뒤 이형진은 다른 남자 하나를 데리고 잠시 자리를 떴다. 뚝뚝, 기욱의 몸에 있던 물이 시멘트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나갔다 온다던 이형진은 꽤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망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기욱의 근처에 의자를 가져와 앉아 저들끼리 뭐라 떠들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까 고민하며 기욱은 잠시 눈을 감았다.
‘흐응… 아응… 읏, 좋아… 아흐… 으 그만…’
기욱의 귓가로 익숙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음질이 좋지 않았지만, 서진의 신음이 틀림없었다. 눈을 뜬 기욱과 기욱이 서진을 안으며 찍었던 동영상을 돌려보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고 있던 남자의 눈이 맞았다. 남자 하나가 기욱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야, 큭큭. 씨발, 좋았냐?”
“…….”
“남자 좆 맛은 무슨 맛이냐? 어?”
그가 기욱의 다리 사이를 발로 건드리며 도발했다. 기욱은 일부러 보란 듯이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축축하게 젖은 옷 하며, 피 때문에 요염하게 붉은 입술, 노골적인 유혹에 남자 하나가 반쯤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와 섹스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기욱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눈치를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간 그가 기욱의 앞으로 다가가 제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정리가 되지 않은 털하며 흉물스러운 남자의 물건이 기욱의 입가를 건드렸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빨아 봐 씨발.”
후우,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에 기욱은 입술 끝을 살짝 깨물며 남자의 페니스를 입에 물었다. 물건을 감아올리는 보드라운 혀에 남자가 이내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윽… 씨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이거….”
제대로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한 남자가 허리를 움직였다. 주변에서도 그런 기욱과 남자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쯤 했으면 상관없겠지? 분위기를 보던 기욱은 이를 세워 남자의 페니스를 강하게 물어뜯었다.
“아아아아아악!!”
난데없는 비명과 함께 남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남자들도 당황하며 잠깐 얼어붙었다. 남자 하나가 기욱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기욱의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일부러 넘어진 기욱은 제 몸을 묶고 있던 청테이프를 뜯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씨발… 어떻게…!”
“아윽, 아아아아악! 아악!”
피가 멈추지 않았다. 퉤, 하고 기욱이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피와 함께 살점 같은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욱에게 물린 남자가 바닥을 구르며 애처로울 정도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런 또라이가…!!!”
화를 참지 못한 다른 남자 하나가 기욱에게 덤벼들었다. 기욱을 납치한 사람들이 실수한 게 있다면 그건 납치를 한 기욱의 몸을 수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남자의 주먹을 피한 기욱은 남자의 등 뒤에서 목을 붙잡아 비틀었다.
“이런 개…….”
당연하게 반항을 하려던 남자는 목에 닿는 칼날에 머뭇거렸다. 눈을 아래로 깔자 작은 커터칼 같은 게 눈에 띄었다. 아니, 살짝 스치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이 벌어지는 칼은 커터칼 같은 수준 낮고 조잡한 칼이 아니었다.
“너… 씨발, 이거…….”
메스의 날은 갈아 끼울 수 있는 데다 칼날 하나의 크기는 무척 작아 숨기기 쉬운 편이었다. 일반인이 들고 있는 것과 외과 의사인 기욱이 들고 있는 것은 그 차원이 달랐다.
“뒤져, 씨발.”
기욱은 거침없이 남자의 경동맥을 그었다.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는 남자를 옆으로 밀어낸 기욱은 손을 강하게 털었다. 후두둑, 누구의 피인지 모를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과 피가 섞여 주변이 난장판이었다. 몸의 반이 피투성이가 된 기욱이 남자들을 올려다봤다. 기욱에게 물어뜯긴 남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남자와 거리를 벌린 기욱은 남자들이 앉아 있던 의자에 걸려 있는 자신의 정장 마이를 가지고 와 마이 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희열과 담배를 피울 때, 기욱이 가지고 있던 지포라이터는 불이 붙지 않았다. 붙지 않은 게 아니라 붙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메스 날은 생각보다 금방 상해 오래 쓸 수가 없었다. 사용한 날을 지포라이터 안에 집어넣은 뒤 새 칼날을 꺼냈다. 태연한 기욱의 모습에 남자 하나가 칼을 든 채 기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 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의사 아니냐고!!”
“좆까.”
일반인들은 모른다. 단순히 의사 집안이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 건가. 주변에서는 실수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뛰어난 의사였다면 죽지 않았을 환자들이 죽었다. 제 미숙함이 사람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피 묻은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 왔는데, 이제 와서 살아 있는 사람 한두 명 죽인다고 해서 놀랄 건 없었다. 수술실에서 죽은 사망은 합법이고, 밖에서 당한 사고는 불법이라는 건 누가 정한 일인가? 가족이 허락하면 당사자가 죽은 건 문제가 없는가? 그런 건 기욱에게 있어 저들끼리 멋대로 한 약속에 지나지 않았다.
기욱이 남자에게 다가가자 난데없이 자동차 헤드 라이터가 기욱을 비췄다. 기욱은 본능적으로 차를 피했다. 차를 운전했던 남자가 다급하게 차에서 내리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탕, 남자의 손에 있던 총알이 빠져나가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기욱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사람에게 총을 쏴 본 건 처음인지 피를 흘리는 기욱에 남자가 머뭇거렸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에 기욱은 남자를 밀어낸 뒤 운전석을 강탈했다. 그제야 차를 빼앗긴 걸 눈치챈 남자가 기욱이 탄 차를 향해 총을 쐈지만 빗나갔다.
급하게 챙긴 마이에서 휴대폰을 꺼낸 기욱은 서둘러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기욱의 예상대로 주변은 밤이었다. 내비게이션으로 대충 위치를 파악함과 동시에 통화가 연결됐다.
― 형! 연락도 안 되고 대체 어디야!!
― 윽, 어디야?
―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 씨발, 강… 윽, 서진… 어디냐고…
― 뭐라고? 형 진짜 뭐라고 돌아다니는 거야?
― 차… 찾아, 강서진… 윽, 찾아!
피가 멈추질 않았다. 전화를 끊으려 해도 손이 떨려 휴대폰을 만질 수가 없었다. 폐공장에는 다른 차들도 있었다. 기욱을 쫓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기욱의 앞으로 구급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기욱은 액셀을 밟으며 강하게 구급차의 뒤를 박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급차와 기욱의 차가 멈췄다. 뒷문이 찌그러질 정도의 강한 충격에 이내 문이 열리며 구급대원이 내렸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윽, 씨발… 비켜….”
구급대원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간 기욱은 무작정 구급차 안에 있는 물품을 뒤졌다. 이런 걸로 뭘 할 수 있겠느냐마는 당장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나았다. 기욱이 지나가는 자리와 몸이 피범벅인 걸 눈치챈 구급대원이 깜짝 놀랐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윽…….”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외과를 할 걸 그랬나, 총상에 대한 외상적 지식은 많이 없는 데다 열악한 환경에서 혼자서 응급처치를 할 만큼 능숙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 응급처치를 한 기욱은 구급대원을 밀어내며 다시 차로 돌아왔다. 폐공장이라 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병원에서 마냥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 * *
“뭐야 대체?”
휴대폰 너머로 지직거리는 소리만 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못해 전화를 끊은 시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민의 장례식 도중 기욱이 사라졌다. 잠시 볼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과 달리 기욱은 아침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우민의 공백과 기욱의 잠수에 신경외과는 다른 의미로 아침부터 비상 그 자체였다. 이런 분위기에 무단으로 잠적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시헌은 기욱의 행동이 이상하기만 했다.
‘찾아… 서진….’
그 말을 끝으로 귀가 먹을 정도로 소음이 났다. 마치 사고가 난 것 같은 요란한 울림이었다. 기욱에게 다시 전화해 봤지만, 기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시헌은 다른 의사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와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어, 시헌이니? 무슨 일이야?
― 저기 그……. 혹시 어디세요?
기욱을 걱정한 건 비단 병원 사람들뿐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서윤이 기욱을 많이 걱정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헌은 어제저녁 울다 지친 서진을 서윤과 함께 집에 데려다줬었다.
― 하아, 아직 서진이 집이야. 오빠랑 연락도 안 되고…….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 서진이는 좀 괜찮아요?
― 아니, 한 교수님 방에 들어가서 꿈적도 안 하고 있어.
자는 건지 아니면 울고 있는 건지 방문을 잠가 버린 탓에 차마 알 수가 없었다. 시헌도 정말 어쩔 수 없이 출근했지만, 서진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우민의 죽음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이 기욱에게 했던 말은 불과 반나절 사이에 소문이 되어 흉흉한 소문으로 병원을 돌아다녔다. 정상적으로 세미나를 마치고 올라왔으면 갈 곳이 없는 장소에서 죽은 한 교수의 죽음이 박기욱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음 날 거짓말처럼 기욱이 잠적을 하자 소문은 더욱 사실인 양 돌았다.
― 저 형이랑 방금 통화했어요.
― 오빠랑? 오빠 괘, 괜찮대? 어디래?
― 그게……. 저도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몰라서……. 저 지금 바로 집으로 출발할 테니까 그냥 계세요!
다급했던 시헌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곧장 센터로 돌아와 서랍 안쪽에 넣어 뒀던 차 키를 꺼냈다. 마침 볼일이 있어 시헌을 찾고 있던 정혁이 시헌의 손에 있는 차 키를 보고 재빨리 시헌을 붙잡았다.
“야, 너까지 그럴 거야? 어디 가는데?”
“죄송합니다. 급해요.”
일일이 사정을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시헌은 나중에 다 설명하겠다며 정혁을 뿌리쳤다. 정혁은 멀어지는 시헌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사고 치면 가만 안 둬!!”
요 몇 달 동안 병원에 마가 꼈다. 안 좋은 일투성이였다.
* * *
“시헌아?”
무슨 일이지? 기욱과 통화를 했다는 소식에 기쁨도 잠시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시헌에 사정을 모르는 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벌써 몇 시간째지? 기욱만큼이나 서진이 걱정된 서윤이 문을 두드렸다.
“서진아, 누나 슬슬 갈 거야.”
“…….”
“문 좀 열어 봐. 응?”
서윤이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인기척은 있는 모양인데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우민의 죽음이 충격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서윤은 현신 한숨을 내쉬었다. 딩동, 벨 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끊기 전 시헌이 온다고 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한 서윤은 아무런 생각 없이 현관으로 갔다. 서진이 이사를 온 탓에 비밀번호를 모르는 걸까? 계속해서 눌리는 벨 소리에 서윤이 문을 열었다.
“시헌이야? 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