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0 가질 수 없는 너
“아아악!!”
서진에게 맞은 뺨과 다리가 슬슬 아팠다. 벽에 주먹을 박은 기욱은 소리를 지르고 질러도 분이 가시지 않았다. 강서진이, 강서진이…!! 감히 어떻게 자신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누구라도 자신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사람은 강서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휴대폰을 꺼낸 기욱이 계단을 올라가며 어딘가로 연락을 보냈다.
「16일 8시」
기욱이 연락을 보냄과 동시에 전화가 왔다. 대충 엘리베이터에 탄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오는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듣기 싫을 정도로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오빠! 먼저 연락해 줄 몰랐는데 모 해?
― 시끄러워. 전화 끊어.
― 에이, 울 오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랬지.
― 끊으라고. 일하는 중이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욱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마침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규건과 눈이 마주쳤다. 기욱이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듯 몸을 옮겼다. 기욱은 규건과 같은 수술실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
“교수님 뺨, 왜 그래요?”
“몰라 씨발.”
알게 뭐냐는 듯 규건을 빠르게 지나친 기욱이 다시 휴대폰을 열었다. 그 사이 여자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시간 비울게~ 대신에 꼭 와야 해? 응?」
“미친년 진짜.”
기욱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안쪽에 있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서진 덕분에 먼지투성이인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 * *
입을 꾹 다문 기욱은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기욱이 걸터앉은 커다란 침대 뒤에 나체로 누워 있던 여자가 기욱의 목에 팔을 두르며 다가왔다. 연수는 기욱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멋대로 빼앗아 입에 문 뒤 침대 옆 선반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껐다.
“오빠, 근데 요즘 너무 자주 부르는 거 아니야?”
“좋으면서.”
은은하게 비치는 조명 아래에서 연수는 자연스럽게 기욱의 무릎 위에 올라왔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시를 한 기욱이 두 번째 담배를 물었다. 알몸 차림의 연수는 제 가슴을 기욱의 팔에 비비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욱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그 여자 사진 봤다?”
“누구 사진을 봐.”
안 그래도 사진에 예민해진 기욱이 담배를 입술에서 떼며 연수를 노려봤다. 연수의 손이 기욱의 튼튼한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팔을 뻗은 연수가 침대 위에 있던 화려한 휴대폰을 가져와 기욱의 앞에 내밀었다.
“누구긴 누구야, 오빠 부인.”
“누가 멋대로 보래?”
기욱은 괜한 걱정을 했다며 연수의 휴대폰을 옆으로 밀어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그녀가 다시 기욱에게 매달렸다. 화려하게 네일이 된 손톱이 기욱의 뺨을 살살 긁었다.
“이해가 안 돼.”
“뭐가 또?”
“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뭐가 좋다고 이런 여자랑 결혼한 거야?”
기욱은 날카롭게 뺨을 긁는 손을 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기욱이 보기에 서윤이나 눈앞에 있는 연수나 사실은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러나 기욱은 연수가 서윤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언짢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역시 강서진 외에 없었다.
“서윤이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아, 화났어? 근데 무슨 심경의 변화야? 뻣뻣하게 굴 때는 언제고?”
“싫으면 관둬.”
“에이, 계속 그런다. 싫을 리가 없잖아.”
연수가 다리를 약간 벌리며 기욱을 유혹했다. 연수는 확실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기욱이 몇 년만 젊었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한 번쯤 꼬셔 봐도 괜찮을 여자임은 틀림없었다. 애당초 눈앞에 있는 연수는 기욱과 비슷한 과였다. 기욱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 맞다. 엄마가 오빠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더라.”
“그래서?”
“그냥 이혼하면 안 돼?”
이혼이라는 단어에 기욱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서윤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것도 이젠 끝이라는 걸 기욱도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연수가 손등으로 기욱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왜 아무 말을 안 해?”
“너 또 뭐 들었어?”
기욱은 연수의 얇은 팔목을 누르며 다리 사이로 제 페니스를 가져다 댔다. 이미 할 만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기욱의 페니스를 내려다본 연서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빠야, 서 집사 입원했을 때 뭐 받았지. 그거 우리 엄마 줘.”
몸을 앞으로 당긴 연서가 기욱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면 모든 게 해결돼.”
기욱은 연서의 다리를 거칠게 벌렸다. 뭘 하든 상관없다는 듯 연서는 그런 기욱을 편하게 올려다봤다. 등 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식은땀이 났다.
“또 하려고?”
“꼬우면 관둬.”
“그럴 리가 없잖아.”
기욱이 천천히 몸을 아래로 숙였다.
* * *
아침이 다 돼서야 집에 들어온 기욱은 출근하러 나온 서윤과 마주쳤다. 밤새 연락을 받지 않았던 터라 서윤은 기욱을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왔다.
“오빠! 밤새 연락도 없이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태민이 사……. 알 거 없잖아.”
기욱이 다가오는 서윤의 손을 치워 내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흐트러진 셔츠하며 기욱의 몸에서는 서윤이 평소 사용하는 것이 아닌 향수의 냄새가 났다.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한두 번은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말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든지 오늘처럼 노골적으로 여자의 향수를 풍기며 나타나는 경우가 늘었다. 기욱은 서윤을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가 셔츠를 벗었다. 셔츠에는 연수가 남긴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빠, 얘기 좀 해! 도대체 요즘 왜 그러는 거야? 뭐냐고 대체!”
서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기욱에게 매달렸다. 이젠 서윤이 매달리는 것도 정말 순수하게 짜증이 났다. 기욱은 가벼운 티셔츠로 갈아입은 뒤 서윤의 손을 쳐 냈다. 강서진이 없으면, 서윤을 좋아하는 척 연기를 해야 할 필요성도 더 이상 없었다. 기욱에게 서윤은 처음부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무섭기만 했다.
“강서윤.”
“어?”
“이혼할까?”
강서진도 작정한 것이 틀림없다.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에 기욱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농담 같은 게 아니었다. 사정을 모르는 서윤은 기욱에게 매달렸지만, 기욱은 그런 서윤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너, 그러는 거. 지겹다고.”
“오빠……. 흐윽, 나, 나 출근해야 해서. 나중에 이야기……. 할게.”
병원에 늦을 수 없었던 서윤은 마지못해 거실로 나와 가방을 챙긴 뒤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서윤이 문을 닫고 나가자 기욱은 가방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서진에게 톡을 보냈다. 이혼할 거라는 톡을 읽은 서진은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언제부터였지? 기욱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씨발, 강서진!!”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휴대폰을 거칠게 바닥에 내려쳤다. 강서진을 향한 이 기분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단 말인가? 가슴 한쪽이 마치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 * *
이른 아침, 평소처럼 무난하게 진행되는 수술실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시간을 좀 잡아먹긴 하지만,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늘 똑같은 수술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기욱의 옆에서 어시스트를 서던 규건이 기욱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말을 걸었다.
“교수님, 강 선생님이랑 싸우셨어요?”
기욱의 손이 짧은 시간 동안 멈추더니 규건을 노려봤다. 서윤과 친한 간호사 한 명이 그만 말하라며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괜히 좋았던 수술실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기욱이 기구를 옆으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다행히 또 다른 간호사의 눈치로 규건은 기욱에게 더 이상의 것을 물어보지는 못했다. 기욱이 규건을 다시 마주친 것은 새벽에 응급실 근처에서였다. 기욱을 발견하자마자 규건은 밝은 표정으로 쪼르르 기욱에게 달려왔다. 펠로우 때도 아니고, 부교수나 됐으면 홀로서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교수님. 강 선생님, 오늘 온종일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던데. 진짜 이혼하실 거예요? 진짜?”
“씨발, 누가 계속 소문내고 다니는 거야?”
기욱은 규건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욱이 불을 붙이기도 전에 규건이 재빨리 기욱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 규건이 신경을 쓰는 걸 보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병원에서 규건은 서윤과 의사와 간호사로서 죽이 잘 맞는 편에 속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용서해 주세요.”
“왜 니가 걔 편을 들고 둘이 지랄인데.”
“그거야 들 수밖에 없죠. 같은 팀이고, 최근 들어서 둘이 언제 크게 싸운 적이 있어요?”
둘이 사귈 때 몇 번인가 큰 트러블이 있긴 했었지만, 그것도 몇 년 전 일인지 아득했다. 어쨌든 주변에서 보기에 두 사람이 원만하게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간호사와 의사로 근무하면서 둘만큼 사이가 좋기는 힘들었다. 내부 사정은 둘밖에 모르는 일이라 해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이혼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임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 시기가. 말을 아낀 규건이 조심스럽게 기욱을 달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거는 좀 아니잖아요. 선배, 다른 여자랑 뒹구는 것도 적당히 해야죠. 선배가 잘못했잖아요. 솔직히.”
늘 교수님이라고 부르던 규건의 선배 타령에 기욱은 입을 꾹 다물며 담배를 껐다. 기욱도 뭔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는 채고 있었다.
“저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선배 성격 잘 알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 굽히고 들어가고 그러세요.”
기욱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하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같은 병원에 있지만 특별한 집안일이 아닌 이상 이 시간에 찾을 리가 없는 하연의 전화에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자 10분 내로 자신의 연구실로 오라는 톡이 왔다. 하연이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할 만한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규건과 하연에게 연락이 온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본 기욱이 혀를 차며 금방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도대체 저랑 서윤의 일에 왜 이렇게 참견하고 끼어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 좀 해 보고.”
“어디 가세요?”
“누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며 기욱은 건너편에 있는 건물로 넘어가 하연의 연구실을 찾았다. 평소 잘 다니지 않던 길을 오랜만에 가려고 하니 미로가 따로 없었다. 한참 만에 하연의 연구실에 도착한 기욱이 문고리를 살짝 당겼다. 문이 열려 있었다. 하연이 일부러 열어 둔 것이 틀림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의자에 앉아 있던 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기욱은 애써 앉을 필요 없다는 듯 문 근처에 몸을 삐딱하게 기댔다.
“나 바빠.”
“씨발년이.”
“아, 놈이라고. 그 나이 처먹고 동생한테 욕하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쳐?”
성큼성큼, 하연이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반항할 틈도 없이 하연의 손이 기욱의 뺨을 치며 발이 기욱의 다리를 강타했다. 책장 쪽으로 넘어질 뻔한 기욱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책장 모서리를 붙잡으며 하연을 노려봤다.
“아놔.”
“깔아라. 눈 안 깔아? 이런, 정신 나간 년이!”
“아윽….”
동생이라서도 있지만, 기욱은 예전부터 하연에게 제대로 반항을 해 본 적이 없었다. 20대 시절 하연은 유도만 13년을 넘게 해 온 유단자였고, 중, 고등학교 때는 어지간한 또래 남자들은 하연 앞에서 힘도 못 쓸 정도로 싸움을 잘했다. 단순히 여자치고 키가 크고 힘이 센 것뿐만이 아니라 기술 센스도 어지간한 선수 못지않게 좋았다. 최근 들어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기욱과 달리 하연은 최근까지도 꾸준히 몸 관리를 하는 철저한 여자였다. 하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기욱의 머리채를 잡고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넌 뭘 잘했다고 말대답이야?”
“아, 씨발! 내가 뭐!! 나한테 왜 이러는데!!”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하연의 손을 치워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규건뿐만이 아니다. 오늘 종일 만나는 사람마다 강서윤, 강 선생!! 그놈의 강서윤 얘기가 멈추질 않았다. 서윤이 병원에 친한 간호사들에게 이야기했을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건 그 정도가 심했다.
“후우, 너 서윤이가 본가 들어와서 울고 난리 친 거 알아? 몰라?”
“……몰라 씨발.”
강서윤이 집에 들어오기 이전에 저도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데, 본가에 들어갔다는 소식 같은 걸 알 리가 없었다. 조금 진정을 한 하윤이 제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다리를 꼬며 주저앉았다.
“하, 천하의 박기욱이. 왜 그렇게 잘해 주나 했다. 내가 너 언젠가 걸릴 줄 알았다.”
“무슨 소리냐고 좀.”
“야, 젊은 년이 그렇게 좋길래 분 냄새 풀풀 내면서 들어오냐? 그동안 가만히 있더니 왜? 이제 와서 그년이 애라도 생겼대? 바람을 피울 거면 티라도 내질 말든가 씨발 진짜.”
서윤이 이야길 했나? 그런 것치고는 하연의 반응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하연은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기욱에게 내밀었다. 평소 SNS 같은 건 하지 않는 기욱이 이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사진 속에는 엉덩이 위쪽으로 이불을 덮고 엎드려 자는 기욱과 그런 기욱을 상대로 몸을 살짝 가린 채 사진을 찍은 연서의 모습이 있었다. 와우.
“아, 미친년 진짜. 이년은 왜 이걸 처올린 건데. 야, 이거 설마…….”
어쩐지 규건도, 다른 의사들도 오늘따라 유독 제 눈치를 심하게 살피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기욱은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휴대폰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하연이 분이 풀리지 않는다며 기욱의 무릎을 다시 발로 찼다.
안 그래도 기욱과 키가 비슷한 하연이지만, 힐을 신은 하연은 기욱보다도 키가 컸다. 보통 키 큰 여자들은 키가 큰 걸 싫어한다는데 하연은 독특해도 보통 독특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욱은 하연의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연서의 집은 아닌 호텔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연서와 호텔에 간 건 비교적 최근 일은 아니었다. 하연은 기욱에게 휴대폰을 빼앗아 가지고 왔다.
박기욱이 한 여자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서윤의 말을 들어 보면 노골적으로 티를 내고 들어왔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임신했어.”
“누가 임신……. 아니, 안 했어.”
최근까지 연서와 연락을 했지만, 그녀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기욱이 아는 한 연서는 임신하지 않았다.
“임신했어.”
“아놔! 안 했다고!!”
“강서윤. 임신했다고.”
“뭐? 강서윤?”
기욱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며 눈을 깜박였다. 기욱이 여태까지 온갖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지면서도 사고 한번 치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제 몸이 남들과 비교하면 임신을 하기 어려운 몸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실에 대해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애당초 자식이란 게 꼭 필요한지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기욱에게 서윤의 임신 소식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기욱은 머릿속으로 서윤과 마지막으로 했을 때를 떠올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기가 미묘하게 들어맞는 감이 있었다.
“누나, 나랑 지금 농담하는 거지? 다, 알아?”
“너만 모른다고 너만! 하아, 잘한다 잘해. 지 와이프 결혼 몇 년 만에 임신한 것도 모르고 다른 년이랑 바람나서 말 꺼내기도 전에 이혼 소리나 하는 개자식이 내 동생이라니.”
“강서윤. 아니, 서윤이는?”
“왜? 임신했다고 하니까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마음이 좀 드냐?”
기욱이 하연의 가운을 붙잡으며 재촉했다. 오늘 하루 동안 병원에서 서윤이를 본 기억이 없었다. 뒤늦게 서윤을 찾는 기욱이 하연은 참으로 한심했다. 도대체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같은 과에 있는 자기 여자가 출근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머릿속에 두지 않는단 말인가.
“강서윤 출근 안 했어. 휴가 내고 본가에 있다고.”
“엄마랑?”
본가라는 말에 기욱이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하윤의 성격이 드센 건 단순히 하윤이 독특해서뿐만은 아니었다. 하윤만큼이나 젊었을 적 엄마도 한 성격 했던 걸 알고 있는 기욱은 낭패라며 이마를 짚었다. 하윤이 기욱의 질문에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 버리겠네.”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빠른 시일 내 가.”
“…….”
“대답 안 해?”
“아, 알았다고.”
하연의 말에 기욱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유독 복잡한 새벽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규건에게 뒤를 부탁한 기욱은 곧장 본가로 향했다. 차를 대고 벨을 부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서 편한 옷차림의 서윤과 마주쳤다. 엄마는 외출하고 없는 모양이었다. 기욱의 눈치를 보던 서윤이 조심스럽게 기욱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뺨 근처에 닿는 얼음장 같은 손을 기욱은 거부하지 않았다.
“오빠, 뺨이 왜 이렇게 부었어.”
하연에게 맞은 뺨이 밤사이에 빨갛게 부풀었다. 얼굴에는 자잘한 손톱자국도 나 있었다. 서윤의 손을 감싸 안듯 쥔 기욱이 몸을 살짝 숙이며 서윤을 안았다.
“못 본 사이에 살도 빠진 것 같고…….”
제 품에 안겨 울먹이는 서윤을 기욱은 차마 무슨 말로 달래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욱의 손이 서윤의 배 근처에 닿았다. 강서진의 아닌 충고가 기욱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짓말도 작작했어야 했다는 그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 너무나 와 닿았다. 기욱은 자신이 강서윤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강서진을 가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기욱은 서윤을 선택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욱이 서윤을 강하게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경솔했어.”
“오빠는 날 사랑하지?”
서윤이 고개를 숙인 기욱의 뺨에 입술을 맞추며 귓가에 속삭였다. 늘 울던 서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기가 서린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나간 줄 알았는데, 큰방 쪽 문틈에서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몰래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는 걸 확신한 기욱은 거리를 살짝 벌리며 서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결혼하고 자식 압박은 없었지만, 생긴 자식을 두고 무슨 결정을 내릴지는 안 봐도 뻔했다. 기욱이 마지못해 서윤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서윤이 그런 기욱과 몸을 숙이며 눈을 맞췄다.
“정말이지, 오빠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
기욱의 뺨을 쓰다듬은 서윤이 다시금 기욱을 안았다.
“다시는 그러면 안 돼?”
“서윤아, 내가 미쳤나 봐.”
고개를 든 기욱이 조심스럽게 서윤의 입술을 맞췄다.
* * *
우민이 새로 이사한 집은 주택가들이 즐비한 곳으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번화가가 있었다. 최근에는 골목까지 상권이 들어와서 군데군데 작은 카페나 술집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서진은 무작정 걸어 나와 역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 두 병과 구운 쥐포 등 적당히 먹을 걸 시킨 뒤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열었다.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배가 고팠지만, 오늘은 그냥 빈속에 술을 먹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욱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서윤이 임신했어.」
자세히 보니 이틀 전에 온 연락을 서진이 무시하고 지나친 것이었다.
“씨발.”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서진은 맥주잔에 소주를 반쯤 따라 그 자리에서 비웠다. 물을 한 모금 마셔 입안을 헹궜다. 서윤이 임신하자마자 기욱이 이혼 이야기를 꺼내 병원에서 난리가 난 게 언제 이야기인데 그 사실을 이틀 전에 알았다고? 참으로 가관이었다. 언제나처럼 무시할까 생각했던 서진은 복받치는 짜증에 신경질적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대단하시네」
이틀이 지난 연락에 답장을 보냈음에도 기욱은 금방 서진의 톡을 읽었다. 답장을 치는 건가 싶더니 별안간 서진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요란하게 큰 기상나팔 소리에 깜짝 놀란 서진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를 껐다. 기욱에게서 온 전화였다. 서진은 전화를 받자마자 꺼 버렸다. 이후 기욱에게 온 연락들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서진은 쥐포를 씹으며 혼자 술을 들이마셨다.
얼마나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까? 어지러움에 머리를 기대며 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일이 끝난 우민에게서 온 전화였다. 우민의 목소리가 약간 평소보다 낮았다.
― 서진아, 미안하다.
그 말을 들은 서진은 컵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물인 줄 알고 마셨는데, 소주였다. 뱉기도 뭐해 전부 넘긴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우민이 말한 퇴근 시간은 서진이 집을 나올 때부터 훨씬 지나 있었다. 일이 바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알아서 연락이 오겠거니 하고 기다렸지만, 막상 이렇게 전화를 받으니 조금 서운하긴 했다.
― 됐어요. 바쁘실 텐데 시간 내서 전화하지 말고 끊어요.
― 병원에서 보자. 술 적당히 마시고.
― 사랑…….
아, 끊겼네. 진짜 바쁜 모양인가 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서운한 서진은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아 소주 두 병을 더 시켰다. 한참 일을 하는 병원 교수와 사귄다는 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몇 달 동안 한 번도 몸을 섞을 기회가 없으니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그냥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조금 일찍 퇴근한 기욱은 차로 들어간 뒤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윤은 한동안 본가에서 신세를 지기로 결정이 난 상태였기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블루투스 스피커 너머로 무미한 수화음 소리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올 즈음 서진이 전화를 씹는다는 걸 눈치챈 기욱이 전화를 끊으려 하던 순간 통화가 이어졌다.
― 여보세요?
스피커폰 너머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욱이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수화음 너머가 이상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어딘가의 식당이나 번화가라는 걸 눈치챈 기욱이 병원 앞 길목에 차를 세운 뒤 전화를 받았다.
― 누구십니까?
― 아, 여기 술집인데요. 이 손님이 혼자 술을 너무 많이 마시셔서. 지금 경찰을 부르려 했는데……. 혹시 아는 분이세요?
― 하아, 거기가 어딥니까? 금방 가겠습니다.
주소를 받은 기욱이 새로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적당한 골목에 차를 대고 남자가 말한 가게로 가니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엎드려 자는 서진이 눈에 들어왔다.
“강서진.”
“으음…….”
서진을 몇 번 흔들었지만, 서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발밑에는 꽤 많은 소주병이 쌓여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있는 빌지에는 그것에 두 배에 가까운 소주가 찍혀 있었다. 알바생 한 명이 기욱에게 다가왔다.
“일행분이세요?”
“예. 계산 좀 해 주세요.”
기욱이 카드와 함께 수표 한 장을 대충 꺼냈다. 수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알바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행이 신세 졌습니다.”
“아, 하하 네.”
수표를 챙긴 그가 카드로 서진의 술값을 계산하고 돌아왔다. 영수증과 함께 카드를 챙긴 기욱은 서진의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던 서진이 이내 기욱 쪽으로 푹 쓰러졌다.
“너 뭐야… 씨발, 뭔데…… 으읍….”
기욱은 서진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상대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신 서진은 간신히 기욱의 어깨에 기대 일어날 수 있었다.
“닥치고 똑바로 걸어.”
“니가 먼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걸을 수 있다고 했잖아….”
서진이 기욱을 밀어내며 비틀거린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옆 테이블에 부딪히나 싶더니 피해 가는 것도 참 요령이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뒤늦게 밖으로 나온 기욱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서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벽에 머리를 박으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 골목 사이로 숨어드는 서진을 발견한 기욱이 혀를 찼다. 기욱이 점점 골목으로 들어가는 서진의 뒤를 따르며 말을 걸었다.
“강서진 어디 가.”
“신경 끄세여!”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휘휘 저으며 앞으로 나간 서진이 벽에 몸을 기댄 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답지 않은 서진의 모습을 본 기욱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정신없이 가게를 나오면서 가져왔던 영수증이 손에 잡혔다. 둘이 먹어도 많은 양의 소주의 개수가 찍혀 있는 걸 본 기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서진의 모습은 단순히 주정이라고 하기에는 상태가 이상했다. 서진은 술을 마셔도 비교적 혀가 잘 꼬이지 않는 편이었다. 서진이 빈속에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욱은 서진의 상태를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기욱의 예상대로 서진은 담뱃불조차 똑바로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담배를 입에 무는 건 성공한 모양인데, 그게 다였다. 계속해서 헛손질하던 서진은 결국 라이터를 떨어트렸다. 싸구려 라이터라 그런지 바깥의 플라스틱에 금이 갔다. 금이 간 사실도 모른 채 불을 붙이려는 서진을 본 기욱이 재빨리 제 지포라이터로 서진의 담배에 불을 붙여 줬다. 서진이 갑자기 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담배가 아닌 뺨 쪽으로 불이 스쳤다.
“아뜨, 아뜨드! 화상 입었잖아!!”
“이게 왜 나한테 신경질이야?”
기욱이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줬다. 일단 담배만 피우게 하고, 차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기욱은 서진이 담배를 다 피우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너머로 철 지난 가요들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서진이 담뱃재를 한 번도 안 털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기욱이 담배를 빼앗기도 전에 쌓인 담뱃재가 서진의 손가락 위로 툭 떨어졌다.
“아놔, 내놔!”
기욱이 다급하게 서진의 담배를 빼앗았다. 서진이 담뱃재를 툴툴 털었지만, 이미 화상을 입은 뒤였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서진이 피우던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거칠게 내던졌다. 제정신이 아닌 서진은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내 서진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더라. 우민이 맞긴 한 거 같은데 왠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큭큭, 하하하.”
“웃겨?”
“그치만. 간접키스잖아. 나랑 당신이랑.”
서진이 기욱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세상에 박기욱 같은 거랑 키스하게 될 줄이야. 미쳤나? 음. 잘 모르겠다. 서진은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쁘다더니 한가했나 보네요.”
“…….”
“아니믄, 왜? 내가 걱정됐어요?”
벽을 짚고 일어난 서진이 비틀거리며 기욱의 품에 안겼다. 기욱이 말을 하기도 전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기욱의 입술 근처에 닿았다.
그 목소리에 기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짜증이 일었다. 입을 꾹 다문 기욱은 서진의 손을 붙잡아 질질 끌고 차로 향했다. 서진이 몇 번인가 놓아 달라고 말을 했지만, 기욱이 서진을 차에 밀어 넣는 게 조금 더 빨랐다. 뒷좌석에 들어간 서진이 기어 나오려는 것을 밀어 넣은 기욱이 운전석에 탔다.
“어디 가여.”
“…….”
“아씨, 몰라.”
차가 출발하자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뒷좌석에 쪼그려 잠에 빠졌다.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길목의 모텔촌에 도착한 기욱은 차를 댄 뒤 서진을 깨웠다. 비몽사몽인 서진이 기욱의 품에 안긴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텔로 들어갔다. 간신히 서진을 데리고 들어온 기욱은 서진을 침대 위에 내던졌다. 서진은 침대 위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에어컨을 튼 뒤 온도를 맞춘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뺨을 손으로 쓸었다.
“……제길.”
마지막이라는 서진의 그 시선이 그날 이후 잊히지 않았다. 그 생각만 하면 미치도록 숨이 막혔다. 아무리 술에 잔뜩 취했다고 해도, 제 이름이 아닌 우민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기욱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차라리 평생 잠들어 있으면 좋을 텐데, 기욱은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서진의 입술을 덮쳤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자는 사람에게 성욕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강서진은 예외였던 모양인가 보다. 서진의 옷 안으로 손을 넣은 기욱은 서진이 입고 있던 옷들을 하나씩 벗겨 내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젠 강서진이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 * *
“아응, 아… 으응….”
속이 좋지 않았다. 멀미할 것 같았다. 밑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서진을 지배하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듯 아팠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쾌락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울컥, 사정한 듯 배 안 깊숙한 곳부터 뜨거운 열기가 서진의 몸을 지배했다.
“하으… 응… 아응… 앙… 더 흐응….”
“야한데.”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기욱이 가볍게 손을 두드렸다. 박기욱과 거친 섹스는 지옥 같았지만, 서진에게 진짜 쾌락의 끝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 줬다. 정신이 없는 서진은 본능이 따르는 대로 기욱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였다.
“후으… 윽… 서진아.”
강서진이 이렇게 적극적이었던 것이 얼마 만일까? 비록 술에 취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서진의 몸을 눕히고 다리를 벌려 페니스를 살짝 빼냈다. 허벅지 사이로 정액이 묻어났다. 서진의 안에 있던 정액이 흘러내리며 시트를 적혔다. 에어컨 온도를 끝까지 낮춘 기욱이 서진의 다리를 벌리며 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지친 모양인지 부르르 떨며 축 처진 것도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동안 기욱의 거친 숨소리와 에어컨 바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하으… 아응, 아응… 윽….”
서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위에서 제 몸이 강제로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텔의 천장이 움직였다. 반쯤 정신을 차린 서진은 기욱을 알아보고 정신이 들었다.
“하윽….”
허리가 끊어질 듯한 아픔과 함께 점점 온몸이 달아올랐다. 기욱은 서진이 깨어난 줄도 모른 채 서진의 안에 거침없이 박아 댔다. 갑작스러운 섹스에 놀란 서진이 반항을 했지만, 막 일어난 서진은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즐길 만큼 즐기던 기욱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진을 바라봤다. 벌어진 다리하며 기욱의 흉물스러운 것을 넣은 채 얼어붙어 있는 스스로에 서진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작정이라도 한 듯 기욱이 제 페니스를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일어났어?”
“도, 도대체…… 왜… 왜…!!”
술을 많이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게 끝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하다 깼으면 이것보다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서진이 양손으로 눈을 가리자 기욱은 다시 이를 악물며 페니스를 움직였다. 입술을 깨물지만, 자극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신음이 멈추질 않았다. 박기욱은 강서진이 어딜 어떻게 해야 느끼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몸에 서진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아, 아… 그만… 아윽… 어으… 그만해…!”
손을 뻗어도 기욱의 몸에 닿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사정 직전에 서진이 간신히 기욱의 몸을 발로 차며 거리를 벌렸다. 이불인지 시트인지 모를 것을 끌어당겨 몸을 가린 서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옷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 도대체 왜…….”
기욱이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아래로 깔았다. 강서진이 언젠가 정신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땀이 가득한 머리를 쓸어 넘긴 기욱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서진의 몸에 난 흉터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속삭였다.
“한 교수랑 나 착각했잖아.”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기욱이 침대 위에 굴러다니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침대 뒤쪽으로 물러난 서진을 두고 기욱의 휴대폰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응, 앙, 으응….」
「좋아?」
「흐…으응, 읏, 더… 응….」
「음란하긴.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주제에.」
기욱이 휴대폰을 서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머릿속이 다른 의미로 하얗게 질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내 분노에 찬 서진이 기욱에게 달려들었다. 기욱이 금방이라도 전송 버튼을 누를 것만 같았다.
“강서진, 이거 보면 한 교수가 좋아하겠다.”
“지, 지워 줘요……. 씨발, 네 동생이랑 다른 게 뭐냐고! 으윽…!”
침대 아래로 떨어진 휴대폰 너머로 서진의 신음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목을 조였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기욱이 서진의 안에 자신의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기욱이 손에서 간신히 벗어난 서진이 소리를 질렀다.
“아윽! 왜 그래, 내가… 내가 당신한테 뭘 했냐고! 대체 뭘! 아흑, 잘못했다고 그래!!”
발버둥을 쳐도 닫지 않는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기욱은 더욱 거칠게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겨 움직였다. 그렇게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기욱의 머릿속은 강서진이라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기욱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강서진이었다.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직 강서진이기 때문에 성립하는 감정이었다.
“네가 아니면!!”
심장이, 머리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싫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최근에서야 그 말이 얼마나 가슴 아픈 말인지를 깨닫는 중이었다. 서진의 목덜미를 핥으며 온몸에 흔적을 남긴 기욱이 고개를 들었다.
“사랑해. 그래, 네가! 날 사랑하면 되잖아!”
“너… 아윽… 너 같은 거….”
아응. 응. 좋아. 기욱의 휴대폰 너머로 서진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휴대폰 속 목소리와 기욱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양팔을 잡아당겼다. 울컥, 하고 저도 모르게 사정을 한 서진의 목이 힘없이 뒤로 꺾였다.
“좋아 죽는 주제에.”
아아, 최악이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시트 아래로 떨어졌다.
* * *
서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이었다. 작은 창문 틈 사이로 드문드문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기욱은 없었고, 서진의 옷은 한쪽에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서진은 비틀거리며 휴대폰을 가져왔다. 불과 몇 분 전에 우민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온몸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서진은 헛기침을 하며 우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아, 서진아. 일어났어? 어제 술 많이 마신 것 같아서 전화해 봤어. 출근은 할 수 있지?
― 그게……. 윽. 아, 네.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나간 모양이었다. 가기 전에 따듯한 물이라도 마시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서진은 짜증을 내며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댔다. 집에 들를 여유는 없었다. 우민은 서진의 갈라진 목소리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 목이 왜 그래?
― 크읍, 지금 일어나서 그래요.
― 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 하하, 택시 타고 금방 갈게요.
―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천천히 와.
우민과 전화를 끊은 서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에서 샤워했다. 머리부터 등 뒤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작은 욕실 안이 금방 연기로 가득 찼다. 주먹을 꽉 쥐며 몇 번이나 벽을 두드린 서진은 이내 벽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악! 박기욱!!! 박기욱!”
왜 그는 매번 이런 선택을 하는 걸까? 정말로 서진이 기욱에게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해서 그랬다는 구차한 변명 따위가 아니었다. 서진은 일부러 더욱 물을 뜨겁게 틀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박기욱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진은 거울로 목덜미를 살폈다. 다른 곳이야 옷을 입으면 가려져도 목 부분은 좀 힘들 것 같았다. 취한 사이 손목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계산은 이미 끝났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조용히 모텔을 나온 서진은 바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렀다. 따듯한 커피와 반창고, 담배, 라이터를 산 뒤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배터리가 얼마 없는 휴대폰에 와 있는 연락을 하나씩 확인했다. 박기욱에게 동영상 하나가 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나 하고 동영상을 튼 서진이 깜짝 놀라 소리를 줄이며 동영상을 껐다.
“씨발 새끼.”
흐릿했던 어젯밤의 기억들은 꿈이 아니었다. 서진은 사진을 지우며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필터를 씹었다. 담배를 피울 기분이 들지 않아 다시 집어넣었다. 곧장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 서진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사복 차림으로 신경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마침 복도 건너편에서 의국으로 향하는 기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복의 서진을 먼저 알아본 연태가 손을 흔들었다.
“어, 서진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연태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다가간 서진은 있는 힘껏 기욱의 무릎을 발로 찼다. 서진의 발차기에 기욱은 미동조차 안 했지만, 서진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분풀이가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야야, 넌 또 왜 그러는 거야!”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연태의 손을 뿌리치며 등을 돌렸다.
“쓰레기 자식.”
그 말 외에 기욱에게 해 줄 말은 없었다.
* * *
옷을 갈아입고 올라간 서진은 우민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일해야 했다. 사실, 그런 것보다 기욱에게 온 동영상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신경이 쓰였다. 덕분에 서진은 은근슬쩍 우민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한가해질 무렵 서진은 간신히 시간을 내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 담배가 짧아지고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등을 돌렸다. 갑자기 다가온 우민에 서진이 담배를 떨어트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진과 한 보 정도 거리를 벌린 우민이 담배를 물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분명 시선은 서진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서진은 마치 우민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너 오늘 왜 나 피해?”
* * *
<대통령의 내연녀 대체 누구? 국정 개입 증거 있어. >
<이 회장 직접 기자 회견 “이연수 뇌물 사건은 허위 소문. 증거 없다 밝혀.”>
<국민당 관계자 ‘대통령 연설문 미리 본 적 있어.’ 국정 농단 자료 존재한다.>
<오늘 저녁 예정된 대국민 기자회견 돌연 취소, 청와대 측 별다른 설명 없이 일방 통보.>
<대통령의 집사? KB 일보 출신 ‘서정수’의 이상한 자살, J대 남태익 원장 자세한 사정 몰라……>
“…….”
오늘따라 유독 주차장에는 차가 많았다. 요 몇 달 내내 불안한 느낌은 있었지만, 최근 일주일 들어 급격히 주차장을 차지하는 차들이 늘어났다.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방송국 로고가 찍힌 이동식 차량을 본 기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량 근처에 있던 기자 한 명이 기욱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가 휴대폰을 보며 기욱의 차량 번호판을 손가락질하며 동료와 떠들고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을 들여다보는 얼굴에 기욱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해가 어슴푸레하게 뜨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안은 무슨 시장바닥인 것처럼 기자들이 돌아다녔다. 사건이 있다면 구급차 한 대가 기자들을 물리치며 외상센터 안쪽으로 급히 들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후, 대체 어떤 새끼야?”
언젠가 일이 크게 터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일이 이렇게 빠르게 터질 줄은 기욱도 상상하지 못했다. 상황 파악 이전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일찍 병원에 도착한 기욱은 시트에 등을 기댔다. 타이밍 좋게 병원장인 태익에게 전화가 왔다. 벨 소리가 채 울리기도 전에 기욱이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 안 그래도 전화하려 했습니다.
― 자네 어디야?
― 지금, ER 근처 주차장입니다.
― 왜 지정석에 주차하지 않고……. 됐네. 그보다 좀 올라오게.
급한 모양인지 올라오라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하던 태익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본 기욱은 한숨을 쉬었다. 지정석에 주차할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기욱은 서류 가방을 챙긴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막내 기자가 재빨리 멀리 있는 선배에게 눈치를 줬고, 이내 두세 명이 빠르게 기욱의 옆으로 붙었다.
“KJN 기자입니다. 혹시 신경외과 교수님 맞으시죠?”
“…….”
“죽은 서정수 환자를 치료한 한우민 교수와는 무슨 사이입니까? 예정대로라면 교수님께서 수술할 계획이셨다는데. 혹시 이유가 있습니까?”
“하아, 없습니다.”
멋대로 제 할 말만 하는 기자들에 기욱이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담당 교수가 바뀐 것에 대해 뭔가 대단한 일이 있을 거라는 기자들의 착각과 달리 당시 기욱은 서윤과의 결혼식과 신혼여행으로 인해 부재중이었을 뿐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런 사실을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의무는 기욱에게 없었다.
“그럼 서정수의 자살에 대해서 아시는 건 없나요?”
“…모릅니다.”
기자를 물리친 기욱은 일부러 기자들이 출입할 수 없는 응급실을 통해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전 국민이 관심이 있는 사안인 만큼 기자들은 기사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는 일에 대해 목을 매고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병원장실로 들어갔다. 기욱이 문을 열자마자 심각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태익이 기욱을 반겼다.
“일단 앉게.”
“빨리 가야 합니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기욱이 한숨을 쉬었다. 사건은 사건이고, 일은 일이기 때문에 기욱에게는 기욱 나름의 일정이 있었다. 기자들에게 붙잡히고, 일부러 한참을 돌아 들어온 것은 기욱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용건만 말하라는 기욱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태익은 계속해서 앉으라며 눈치를 줬다. 기욱이 마지못해 태익의 앞에 앉았다. 소란스러운 병원 밖과 달리 안은 이질적일 정도로 조용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병원장실은 마치 병원 내에서도 또 다른 의미로 격리된 공간 같았다. 둘 사이로 불편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기욱이 내려다보고 있는 손목시계의 초침이 정확하게 한 바퀴를 돌자 태익이 기다렸다는 듯 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그 자료, 최대한 빨리 줄 수 있겠나?”
용건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일이 터지기 전부터 태익은 기욱에게 자료를 달라고 했으니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는 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내연녀 이희연과 혼외자식인 이연수, 그리고 수년 동안 민간인인 이희연이 뇌물을 수수하거나 국정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는 자료 파일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기욱이 눈으로 본 것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 기자들과 다른 관계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자료는 죽은 서정수가 기욱에게 남기고 간 USB 속 파일이 맞았다. 정확하게는 USB 속에 있는 해외의 외장 하드의 계정과 비밀번호였다.
기욱이 입을 다물고 있자 불안한 태익이 기욱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 태익의 눈치를 본 기욱은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확인했다. 비교적 선명한 사진 속 남자는 기욱의 기억 저편에 있는 누군가와 무척 닮아 있었다.
“KJN 정치부의 장병욱 기자일세. 공채로 기자 생활한 베테랑인데 원래 연예부 출신 막내였고. 그를 정치부로 데리고 온 게 서정수였거든. 서정수가 KJN 방송국을 그만두고 난 뒤에도 계속 사적으로 연락을 했던 모양이더군. 죽은 서정수가 이번 국정농단과 관련된 자료를 들고 있을 거라고 최초 보도 기사를 낸 것도 장 기자네.”
“그렇군요.”
태익의 설명을 들으며 기욱은 몇 번이나 사진 속 얼굴을 확인했다. 이름과 기욱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태익이 말하고 있는 장병욱은 기욱이 알고 있는 그 장병욱과 동일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과거, 기욱이 서윤이 서진의 친누나라는 사실을 알기 전 서윤과 사귀었던 기욱의 학창 시절 동기였다. 오래전 일이라 아는 사이라고 칭하기도 뭐했지만, 서로 과거에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을 한 기욱은 태연하게 휴대폰의 사진을 껐다. 태익이 기욱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래서 자료는……?”
“드리겠습니다. 저도 이런 찝찝한 물건 오래 가지고 있어 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요. 저녁쯤에 집에 들러…….”
“아, 그래! 잘 알겠네! 그, 그보다 오후에 있을 OP 말일세. 내 좀 부탁할 게 있네.”
태익이 일방적으로 기욱의 말을 자르며 다른 이야기를 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기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후에 수술이 있긴 하지만, 늘 있는 수술 스케줄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병원장인 태익과 논의를 해야 할 만큼 심각한 환자를 받은 기억은 더더욱 없었다.
당황하는 기욱을 앞에 둔 태익은 눈앞에 있는 찻잔에 입술을 대며 살짝 내려놓았다. 외부에서 보기엔 그저 차를 마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태익의 앞에 있는 찻잔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음료도 들어 있지 않았다. 태익의 의도를 눈치챈 기욱은 입을 다문 채 태익의 말을 들었다. 기욱의 예상대로 태익이 하는 말의 절반 이상은 기욱이 오늘 있을 수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그저 용어들을 나열할 뿐인 태익의 행동에 기욱은 무언가를 놓칠까 집중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신경 좀 써 줬으면 좋겠네.”
“예, 물론이죠. 아 참, 이 차트는 제가 가지고 가도 됩니까?”
“물론이지.”
대화하는 내내 기욱은 태익의 앞에 있는 서류뭉치들이 거슬렸다. 태익은 은근슬쩍 파일을 기욱 쪽으로 밀었고, 종이 뭉치들을 건네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욱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챙긴 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
복도에 나온 뒤 철문을 열고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층과 층 사이에 선 뒤 벽에 몸을 기댄 기욱은 태익에게서 받아 온 서류를 살폈다. 평범하게 쓸모없는 환자 기록철의 사이에는 혹시라도 떨어질까 투명 테이프로 붙여 놓은 명함이 있었다. 기욱은 테이프에 붙은 명함을 떼 살폈다. 태익이 건네준 명함이 검찰 관계자의 명함이라는 사실보다 명함 속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희열’
기욱이 아는 사람 중에서 검사로 일을 하고, 이런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사람의 얼굴은 한 명밖에 없었다. 반반하게 생긴 주제에 입이 험한 그 녀석을 다시 만나야 한다니 벌써 골치가 아팠다.
“하아.”
명함을 가운 안쪽 주머니에 넣은 기욱은 좋지 않은 몸 상태에 이마를 짚었다. 편두통이 올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수상한 건 태익도 마찬가지였다. 기욱에게 이연수를 소개해 준 태익이 인제 와서 김 의원과 적이 아닌 것처럼 구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슬슬 내려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기욱은 휴대폰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명함을 확인할 것도 없이 기욱의 전화번호부에서는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와 다르지 않은 희열의 번호가 나왔다.
* * *
대학 근처 번화가의 사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의대생 시절 동기들과 종종 술을 마시곤 했던 대학로는 거리에 있는 간판과 건물들의 모습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리에 녹아들었던 기욱이 이제는 이질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오후 1시,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길거리는 유독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희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사기당한 거 아니야? 시계를 보며 불쾌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무렵 멀리 선글라스를 쓴 청년 하나가 기욱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잘빠진 스타일 하며 희멀건 얼굴이 멀리서 봐도 기욱이 연락한 검사인 희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 희열이 기욱과 눈을 마주쳤다. 기욱은 그런 희열을 보며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아, 또 너야.”
기욱은 이 전에도 서정수가 남긴 USB를 탐내는 희열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별다른 연락이 없기에 사실상 희열에 대한 것은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쨌든 기욱은 묘하게 반반하게 생긴 어린 검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희열의 접어 올린 셔츠 소매 사이에는 몇억은 족히 호가하는 한정판 시계가 차 있었다. 희열이 마음만 먹으면 이런 길목이 아닌 더 좋은 장소도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왜 이런 곳을 만남의 장소로 선호하는지 기욱이 알 길은 없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그래.”
태익이 무슨 목적으로 희열의 명함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정을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기욱은 희열과 함께 바로 근처의 룸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는 거의 만석에 가까웠으며, 근처에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들리는 최신 가요에 섞여 노이즈처럼 시끄럽게 들렸다. 확실히 이 정도 소음에 목소리를 낮추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욱과 희열의 말을 엿듣기는 어려웠다. 바닥에 앉기 무섭게 희열은 따듯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잠시 뒤 점원이 가져온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뒤 커튼을 닫고 나갔다. 두 사람은 앞에 놓인 커피는 손조차 대지 않았다. 한참 만에 희열이 선글라스를 벗어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자료는요?”
“글쎄.”
“지금 장난하십니까?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린데.”
기욱이라고 시간이 나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느라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후, 숨을 들이켠 희열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홀짝인 뒤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뉴스는 보고 계시죠?”
“시간 날 때마다. 다는 아냐.”
“일 더 커질 겁니다. 다음 대선까지 1년도 안 남았는데,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잘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한테 제안을 한 건 우리 병원장님과 네가 다야.”
아, 한 명 더 있었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기욱은 이연수에 대한 것은 굳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기욱의 답에 희열이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당연히 기욱이 누군가와 자신을 저울질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방금 하신 말 진짭니까?”
“그래.”
믿든지 말든지 자유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기욱이 아닌 희열의 몫이었다. 희열이 커피 잔에서 손을 놓자 이번엔 기욱이 커피를 살짝 홀짝였다. 자리가 좋아서 그런지 커피가 별로 맛이 있지는 않았다.
“사연부터 듣고. 나한테 이희연의 딸인 이연수를 소개해 준 건 남 병원장이었거든.”
“남지혁이라고 아십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 맞다면.”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기욱이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남지혁은 남태익 병원장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된 건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M&B 과장을 밟은 뒤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남 병원장의 아들을 알게 된 건 그만한 사연이 있어서였다. 그도 그럴 게, 남지혁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필리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들었는데.”
워낙 큰일인 데다 한국으로 돌아와 장례식을 J대 병원에서 치렀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기욱이 그 이름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단순히 병원장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어서뿐만은 아니었다. 병원장의 아들이 필리핀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서 교통사고가 아니라 살해를 당한 거라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괴소문이라고 하기에는 당시 부검 내용에 워낙 수상한 게 꽤 있었다. 물론, 그 뒤 병원장과 그 가족이 입을 다문 탓에 소문은 J대 병원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희열이 유리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거, 청부 살인입니다.”
“뭐?”
“그때 약혼녀가 이연수였거든요. 남지혁이 이연수에게 꽤 심하게 집착을 한 모양이더라구요. 이연수라고 해도 어머니가 정한 정략결혼을 파기할 수는 없어서 필리핀에서 교통사고로 위장한 겁니다.”
“……와우.”
“이희연과 불륜이라고 해도 그 일로 사이가 거의 틀어지다시피 했고, 저희 쪽에 붙은 지 좀 됐습니다. 이만하면 설명이 되셨습니까?”
기욱은 남은 커피를 전부 마셨다. 커피는 한약을 마시는 것처럼 써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목이 타 물이라도 따로 마시고 싶을 지경이었다. 침묵 대신 건너편 방의 웃음소리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룸을 매웠다. 툭툭,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던 기욱의 손이 멈췄다.
“너 그냥 검사가 아니지?”
“K그룹 이희훈 회장의 차녀가 제 약혼녀입니다.”
“K그룹 장학생 중에서도 우등생이네. 그러니 목숨 걸고 뇌물수수 건은 지우고 싶어 할 만하지.”
언론에서 뇌물수수는 사실이 아니다 어쩌다 말이 많지만, 기욱은 그 소문 또한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보통 귀찮은 일에 얽힌 게 아니었다. 이쯤 되니 처음 희열이 찾아왔을 때 그냥 자료를 줄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아니, 그놈의 교통사고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 탓을 하려면 그날 병원에 차를 끌고 들어온 기욱 자신을 탓해야 했다.
“알아들으셨으면 조용히 자료 넘기시죠. 경고하는데 혹시라도 저울질하는 거라면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랑 달리 그쪽은 예전부터 수단 방법 안 가리기로 유명하거든요.”
“사람이라도 쓰나 보지.”
“그게 정말 필요하다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자료 가지고 오시죠. 아니, 그 USB에 있는 게 해외 외장 하드 사이트의 계정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당신 머리라면 계정과 비밀번호 정도는 외웠겠죠.”
“날렸어.”
“지금… 무슨…… 당신 미쳤습니까?”
당황하는 희열의 모습에 기욱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커튼을 살짝 열어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아 물 한 잔을 부탁했다. 알바생이 가져온 물을 반쯤 마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기욱이 탁, 하고 물 컵을 내려놓았다. 기욱이 파일을 확인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본을 떠 놓은 뒤 원본을 날리는 것이었다.
“온라인은 해킹의 위험이 있지만, 온라인에 있는 자료가 오프라인으로 바뀌는 순간 이걸 아는 사람은 나뿐인 거야.”
“당장 집에 가서 가져오시죠.”
“지금 가면, 집 근처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보장은?”
희열은 분명 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랬다. 세미나 때도 그렇고, 이제 와서 미행을 당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예상대로 한참을 머뭇거리던 희열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못 합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사본을 넘겨주신다고 약속만 해 주신다면 그쪽 안전은 확실하게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힘들게 임신한 와이프 생각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열이 테이블 밑에 있던 휴대폰을 위로 올렸다. 카페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내용을 녹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기욱은 휴대폰 화면에 뜨는 녹음화면이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좋아. 대신 조건을 한 가지 더 붙이지.”
“뭡니까?”
“안전을 보장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어. 강서진이야.”
강서진이라는 이름에 희열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희열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강서진은 강서윤의 남동생이었다. 그러나 희열은 기욱이 서윤과 결혼을 하기도 전부터 강서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사건이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기욱의 서진에 대한 집착은 심히 의심스러웠다. 심증은 있지만 당장 그걸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애당초 그런 사적인 일은 희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뭐, 일단 가족이니까 같이 챙겨는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서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 안 둬.”
이 와중에도 서진의 이름을 명확하게 언급을 하는 기욱에 희열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 진심으로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강서진이라는 걸 사실상 확인하는 말투였다.
“그러면 자료는 어떻게 넘겨주실 생각입니까?”
한눈에 보자마자 위험한 자료라 판단하고 사본을 뜬 뒤 원본을 지운 기욱이다. 아무 데나 관련 파일을 넣어 뒀을 거라고는 쉽게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희열의 질문에 기욱은 남은 물을 전부 비웠다.
“그걸 넘겨주는 건 내가 아니야.”
* * *
이른 아침, 밤새 수술을 하고 간신히 당직실의 침대에 누운 우민은 잠이 든 지 한 시간 만에 휴대폰 불빛에 잠이 깼다. 우민은 인상을 찌푸린 채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누구… 윽. 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줄 알고 놀랐던 우민은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기욱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 새벽에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정신이 번쩍 든 것만큼은 분명했다. 우민은 눈만 비빈 채 당직실 밖으로 나왔다.
“어, 알았어. 그래. 금방 갈게.”
우민은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신발을 질질 끌며 센터를 통해 지나가던 중 우민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진호와 마주쳤다.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를 흘끗댄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주무시러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아, 그러게 말이다.”
급하게 갈 필요는 없겠지. 뭉그적거리며 차트를 이리저리 뒤적거린 우민이 하품했다. 우민이 자러 간 한 시간 사이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우스를 놓은 우민은 진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일 있으면 불러.”
“자러 가시게요?”
“글쎄다.”
자러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민의 귓가에는 휴대폰 너머로 얼굴 좀 보자는 기욱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쥔 우민은 위층에 있는 수술실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일부 방을 제외하고 수술실 대부분은 한가한 분위기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우민과 복도 끝에 있던 낯선 의사가 몸을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아냐, 됐어.”
앳된 의사가 당황하며 사과를 하자 우민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인턴이나 초년차 레지던트 같았다. 의사를 지나친 우민은 아무도 없는 수술방을 열고 들어갔다. 먼저 와 있는 기욱 덕에 수술방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우민은 성큼성큼 안쪽에서 나오는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기욱과 이렇게 따로 사적으로 보는 건 우민도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우민은 여전히 꽉 쥔 주먹을 살짝 들었다.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
기욱이 채 말을 하기도 전에 우민이 기욱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을 맞은 기욱이 휘청거리더니 벽에 팔을 짚으며 간신히 바로 섰다. 기욱을 때린 손이 아렸지만, 우민은 넘어지지 않은 기욱을 보고 더 강하게 때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만큼 박기욱은 우민에게 맞아도 괜찮은 존재였다. 바로 선 기욱은 안쪽에 고인 피를 억지로 삼켰다. 말은 하지 않아도 얼굴 보자마자 때린 우민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우민은 팔짱을 끼며 그런 기욱을 보란 듯이 내려다봤다.
“서진이와 관련된 거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씨발, 지난번처럼 섹스 동영상 같은 걸로 협박할 생각이라면 이번엔 진짜 뒤진다.”
“안 물어봐요?”
“뭘?”
“그 동영상, 언제 찍은 것인지. 어떻게 찍은 건지.”
“미친 새끼.”
우민은 기욱을 한 대 더 때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기욱의 맛이 간 눈빛을 본 우민은 됐다며 손에 힘을 풀었다. 박기욱은 우민이 아무리 때려도 꿈쩍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주먹도 효과가 있는 사람에게나 하는 것이었다. 맞아도 안 될 놈은 처음부터 안 됐다.
기욱이 보낸 동영상 속 서진은 우민이 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날, 술을 마신 서진이 끝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원인을 따지자면 금방 간다고 해 놓고 서진을 내버려 둔 제 잘못이었다. 우민의 분노는 서진이 만취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멋대로 안은 기욱에 대한 분노였다.
화가 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면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이 기욱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박기욱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조종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고, 우민은 기욱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또 섹스 동영상 보여 줄 거면 뒤진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리고 중요한 겁니다. 강서진에 관련된 거라는 것도 사실이고.”
“들어나 보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아침 회의까지 시간이 있었던 우민은 의자를 끌어와 적당히 걸터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