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9 서진아, 강서진 (2)(10권) (75/83)

Chapter. 69 서진아, 강서진 (2)

거의 막 퇴근인 서진은 오랜만에 서윤과 휴무를 맞춰 외식하러 나왔다. 햇살이 짱짱하게 비추는 낮에 서윤과 함께 나온 건 꽤 오랜만이었다. 화려하게 먹을 생각은 없었던 두 사람은 백화점에 있는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이런저런 음식을 퍼 온 서진이 서윤의 앞에 앉았다.

“매형은?”

“오빠? 오빠는 지금 일하고 있지. 왜?”

“아니, 그냥.”

일단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 서진은 별말을 하지 않은 채 밥을 먹었다. 기욱에게는 이미 서윤과 밥을 먹는다고 말을 해 두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윤은 서진이 만난다고 해도 유일하게 별말을 하지 않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가고, 커피를 마실 무렵 서진이 간신히 말을 꺼냈다.

“누나, 나 할 말이 있어.”

“응? 무슨 말인데?”

일부러 구석진 자리를 선택한 서진은 근처에 앉은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반쯤 마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우민이 시킨 대로 말을 마치고 나니 30분이 좀 지나 있었다. 그 사이 커피를 몇 번이나 가지고 온 서윤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 사실 오빠도 알아?”

“아…, 알고 있어. 최근에 알았어. 그래서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런 건 아니야.”

서진은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윤의 기분을 거슬러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 서윤은 서진만큼이나 차분했다.

“서진아, 누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어, 응.”

“그래도 이건……. 생각할 시간 좀 줄래?”

“알았어.”

서진도 무리한 이야기라는 걸 알긴 안 모양인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문의 시험을 핑계로 몰아 뒀던 연차를 사용한 서진은 며칠 동안 병원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서진이 연차를 써 휴가를 낸 건 시험 때문이 아니었다. 서진은 방 안에 있는 짐들을 박스 안에 정리하고 있었다. 잘 정리된 집 안의 모습이 금방 이사를 갈 것 같은 사람의 집이었다. 박스로 테이프를 밀봉하던 서진은 묘한 인기척에 등을 돌렸다. 현관문에 귀를 가져다 대니 발소리가 들렸다. 체인을 잠글 틈도 없이 잠금장치의 비밀번호가 눌리며 기욱이 문을 거칠게 열었다. 기욱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서진의 멱살을 붙잡고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반강제로 뒷걸음질 친 서진은 기욱보다 기욱이 닫지 않고 들어온 문을 흘끗댔다.

“강서진, 너……. 너……!”

“문 닫아요.”

“네가 어떻게…….”

“문 닫으라고 했잖아요!”

“씨발! 너 거기 가만히 있어!”

기욱은 서진을 거칠게 내동댕이치며 손가락질한 뒤 거칠게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서진은 책상에 있는 책들을 흘끗대며 한숨을 쉬었다. 기욱이 온 이상 오늘 공부는 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해 둘 걸 하고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은 후회가 들었다. 기욱이 다시 다가와 서진의 멱살을 잡고 침실 쪽으로 이끌었다.

“너, 너 지금 미쳤어?”

“그게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할 말이에요?”

서진의 침실에도 상자들은 있었다. 이삿짐을 싸고 있다는 걸 눈치챈 기욱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윤에게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씨발, 니가 너……. 네가 한우민이랑! 지금, 후. 뭐 하자는 수작이야 너!”

“목소리 낮춰요. 그리고 누나한테 들었으면 됐잖아요. 나가요.”

기욱이 찾아올 것쯤은 예상했다. 서진이 기욱의 등을 떠밀었음에도 기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방 안 가득한 상자들을 본 기욱이 인상을 구겼다.

“뭐 하냐 지금?”

오빠, 한 교수님이랑 서진이랑 사귀는 거 알아? 서윤의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데, 정작 서진의 집은 야반도주라도 할 사람처럼 상자가 쌓여 있었다. 이 갑작스럽고도 기가 막힌 상황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기욱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서진은 제 팔을 잡으려는 기욱의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벌린 뒤 팔짱을 꼈다.

“보면 몰라요?”

“뭐 하는 거냐고.”

서진은 팔짱을 풀며 성큼성큼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기욱의 욱하는 성격은 서진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그런 눈으로 본다고 해서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이를 악물고 숨을 크게 들이쉰 서진이 기욱을 올려다봤다.

“때려요.”

“…야.”

“씨발, 때리라고! 그렇게 불만이면 때려!”

“너…….”

기욱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벌리고 서진을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서진은 그런 기욱을 모르는 척 등을 돌려 마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 정리를 하는 서진을 본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사 갈 거예요.”

“어딜, 누구 멋대로 나가. 누가 나가래?”

기욱이 적당히 하라며 서진의 손을 붙잡자 서진이 방해하지 말라는 듯 기욱을 노려봤다. 여전히 서진의 눈동자는 떨려 왔지만, 애써 노력하는 것이 기욱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뭐가 서진을 이렇게 만든 거지? 한우민인가? 기욱의 머릿속이 좀 혼란스러웠다.

“당신 눈에는, 내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때의 강서진으로 보여요?”

“네가 나한테 반항을 해? 너 그러면 강서윤 가만 안 둬.”

강서윤, 서진과 있는 자리에서 기욱이 그 이름을 꺼낼 때는 좋은 일로 꺼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보통 서윤을 걸고넘어지면 꼬리를 내리는 서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박기욱은 자기 세계에 빠져 사는 버릇을 고칠 필요성이 있었다. 특히 강서윤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하, 누나랑 이혼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하시죠.”

“……뭐?”

“우리 누나 인질로 잡는 거, 이젠 지긋지긋하지도 않아요? 뭐, 그런들 누나가 놓아줄 거 같지는 않지만요.”

박기욱은 강서윤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다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걸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는가? 거짓말도 계속하면 진실이 되는 법이라는 걸 서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진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협박 아닌 협박을 계속했다. 기욱의 눈에는 서진이 갑자기 실성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한우민이 뭔가 수작을 부렸거나.

“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놔요.”

“강서진!”

“연기할 거면, 처음부터 적당히 해야 했어. 나가요!”

서진의 계속되는 발악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서진을 침대에 강제로 눕혔다. 하다못해 조금만 더 늦게 오지,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서진이 눈을 질끔 감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서진은 제 위로 올라타는 기욱을 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그런 서진의 턱을 붙잡아 다시 눈을 맞췄다.

왜 강서진은 항상 이렇게 되는 걸까? 박시헌도 그렇고 한우민도 그래. 서진이 선택하는 사람은 늘 기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둘은 기욱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자식이랑 사귄다고 해서, 내가 널 못 안을 줄 알아?”

“마음대로 해요.”

“…….”

“당신한테 이런 식으로 당하는 것도 마지막이니까.”

기욱이 서진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기욱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서진도 익숙했다. 언제는 둘 사이에 감정이란 게 오고 간 적이 있었던가? 서진은 한 번도 기욱과 제대로 된 섹스를 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진이 느끼기에 기욱은 자신을 말 잘 듣는 인형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도대체 자신의 무엇이 이렇게 박기욱을 미치게 만들었는지 말이다.

“각오해, 강서진.”

“아윽…!”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의 귓불을 강하게 깨물었다. 딱딱하게 굳은 목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서진의 옷을 강제로 벗겨 낸 기욱은 그 혀로 서진의 몸 이곳저곳을 핥았다. 이 지경이 돼서도 흥분을 하는 기욱의 뇌 구조가 신기했다.

“으, 읍….”

강제로 벌어진 다리 사이 페니스를 주무르며 입안을 정신없이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기욱의 손에서 사정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옷을 다 벗은 기욱이 위로 올라탔을 때였다. 기욱은 제 페니스를 강제로 서진의 입안에 욱여넣었다. 거칠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짙은 체취가 서진의 코를 찔렀다.

“하윽… 윽… 욱….”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듯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은 기욱이 안쪽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몸이 움찔거릴 때마다 기욱은 더욱 깊숙이 제 페니스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사정하자 서진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침대 밑으로 정액을 뱉어 냈다.

“크윽… 캑….”

“올라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긴 기욱이 강제로 서진을 위로 올린 뒤 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서진은 똑같은 신음만 반복적으로 내뱉었다. 퍽퍽, 살이 닿는 소리와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반동에 서진의 몸 또한 위아래로 정신없이 튀었다. 배 안 깊숙한 곳을 채운 정액이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기욱의 페니스를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기욱의 두꺼운 손가락이 다시 서진의 입안을 헤집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몸이 기울어질 때마다 몇 번이고 서진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흐윽… 윽…!”

기욱은 몸을 돌린 서진의 뒤를 거칠게 박았다. 서진의 안이 기욱의 페니스를 조일 때마다 찰나의 쾌락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짜증이 기욱을 지배했다. 이런 적은 없었다. 섹스하면서도, 이렇게 짜증이 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진을 거칠게 대할 때마다 오히려 스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페니스를 빼 쓰러진 서진의 배 위로 사정을 한 기욱이 서진의 목을 쥐었다. 다시 페니스를 밀어 넣자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후우, 하… 읏… 너 뭐야.”

“…….”

“내가,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 내가…!!”

수많은 사람들과 자고, 또 만나 왔지만. 기욱에게 강서진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가질 수 없는 존재였다. 남들에게 하면 금방 넘어오는 온갖 행동들도 강서진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고 넘어갔다. 진정으로 사람을 깔보고 있는 것은 어쩌면 기욱이 아닌 서진일지도 몰랐다. 기욱에게 목이 잡힌 서진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그 태도가 잘못된 거라구요! 왜 몰라!”

“…너, 나랑 해보자는 거지?”

“그… 윽, 이만큼 했으면 됐… 아으윽…! 어흑!”

화가 나도 상관없었다. 기욱은 강서윤을 통해 한우민과 사귄다는 말을 전해 듣게 한 서진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으로 서진을 범하고 또 범했다. 기욱은 강서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범하고, 괴롭히면 다시 자신을 볼 것이 틀림없었다. 제 앞에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꺼낸 서진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며 울고불고 매달릴 때까지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허윽… 으… 으윽….”

“일어나. 가슴 주무르면서 움직여. 똑바로.”

제 위에 올라탄 서진이 쓰러지는 것을 바로 세운 기욱은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평소와 달리 신음만 내뱉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기욱도 슬슬 불안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을 바로 눕힌 기욱이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연결음 소리에 서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마, 하지 마… 아악! 전화하지 말라고… 으읍!!”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진이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휴대폰을 달라고 아등바등 반항했음에도 기욱은 그런 서진을 밀어내며 꿋꿋하게 우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오는 연결음 소리가 서진의 귓가에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서진의 정신을 좀먹어 들어갔다.

“아아… 으읍….”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다고, 서진은 제 양손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틀어막았다.

“누가 멋대로 입 막으래?”

기욱이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로 서진의 손목을 묶었다. 기욱이 손목을 다 묶음과 동시에 우민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서진아?

“아악… 으….”

― 야, 강서진. 너… 박기욱이냐?

“하으으윽…!!”

씨발, 휴대폰 너머로 욕설이 계속해서 들렸지만, 기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서진의 허벅지를 잡아당겨 제 페니스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꼭 이렇게 해야만 시원했을까? 살이 맞닿는 소리가 더욱 크고 노골적으로 들렸다. 우민의 욕설도, 그걸 무시한 채 자신을 범하고 있는 기욱도 서진은 모두 견딜 수 없었다. 울컥, 기욱이 사정을 하자 서진의 몸 또한 부르르 떨렸다. 이미 몇 번이나 사정했던 서진은 더 이상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흐윽… 윽… 제발…….”

기욱이 전화를 끊은 뒤 서진을 제 위로 올렸다. 강서진은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반쯤 정신을 잃은 서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른 채 기욱에게 매달려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기욱은 소리를 낼 기운도 없이 지쳐 쓰러진 서진의 허리를 잡아 페니스를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흐려 가는 기억 속에서 서진의 눈을 뜨게 만든 것은 또다시 들려온 도어락의 기계음이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왔나 보네.”

“아… 아악! 제발… 하지 마, 씨발… 으읍! 하지 말라고!!”

또다. 그때의 시헌이 도망쳤던 그때의 기억이, 그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서진이 그만하라며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기욱은 거칠게 서진을 괴롭혔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쿵쿵, 우민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서진의 심장 또한 멎어갔다. 우민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욱에게 깔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우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챈 서진이 양손이 묶인 채 기욱의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아아아악! 그만! 그만, 싫어…!!”

“야… 니네…….”

“아…….”

반항하던 서진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서진이 몸을 돌려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발목을 잡아당겨 서진을 안았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민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아도, 감아도 그 모습이 서진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도망치지 마. 제발, 시헌아.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서진은 몇 번이나 시헌이 되돌아오길 바라고 또 바랐지만, 끝내 시헌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그럴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서진은 눈물을 흘렸다.

“씨발, 박기욱!!”

서진이 의식을 잃기 전, 기욱과 우민이 크게 싸우는 소리가 났다.

* * *

서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이 완전히 어두울 무렵이었다. 얼마나 기절을 한 건지는 몰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온몸이 아팠다.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방 안은 온통 엉망이었으며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 그럼 그렇지.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서진은 누가 덮어 줬는지 모를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며 흐느꼈다.

“흐으윽… 으윽… 끅….”

“뭐야? 일어나자마자 왜 또 울고 그래?”

이불 너머에서 들리는 뜻밖의 목소리에 서진이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든 서진은 이불을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민의 목소리였다. 남은 짐들을 정리하고, 적당히 먹을 걸 준비하고 있던 우민이 서진의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침대가 푹 아래로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윽, 끄극… 박기욱은요?”

“알 게 뭐야, 그딴 쓰레기 자식.”

이불 안쪽으로 들어온 손을 꽉 쥐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따듯한 온기에 다시 참아 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목이 메 말이 나오지 않았던 서진은 다른 손으로 이불을 걷어 내며 머리를 삐죽 내밀었다. 우민이 불편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서진을 대신해 이불을 살짝 걷어 줬다. 우민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서진은 손을 뻗어 부어오른 우민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뭐야, 잘생긴 얼굴이. 상처투성이잖아요.”

서진의 손을 붙잡아 살짝 핥은 우민이 손을 놓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거,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막상 눈앞에서 본 두 사람의 섹스는 우민의 생각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일어난 서진을 무슨 말로 달래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우민은 몸을 숙여 서진을 안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서진을 끓어오르게 했다.

“흐윽… 흐으윽… 허으윽….”

“그래, 많이 울어.”

우민은 서진이 울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저 조용히 서진을 달랬다.

* * *

“더 할까?”

“출근해야 하잖아.”

기욱이 서윤의 손을 치우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기욱은 서진과 말조차 못 붙였다. 기욱의 목에 매달리던 서윤은 거실에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서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서진이라는 걸 눈치챈 기욱이 넥타이를 바로 맨 뒤 먼저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가 있을게.”

“어, 응. 금방 갈게!”

서윤 또한 방으로 돌아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 미안해, 오빠가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어. 아직도 둘이 사이 안 좋지?

― 뭐, 그냥 그래.

― 계속 설득했는데, 나도 무서워서 말을 못 붙일 정도더라고.

― 됐어, 그런 얘기 안 해도 돼. 그보다 누나는 괜찮아? 별일 없지?

그 일이 있고 나서 서진은 기욱이 서윤에게 해코지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일을 벌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본인도 자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현관으로 나온 서윤이 신발을 신자 기욱이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기욱에 서윤은 나중에 전화하자며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 * *

서윤과 통화를 끊은 서진은 한숨을 쉬며 옥상의 철문을 몸으로 밀었다. 그 뒤 기욱과 서진이 크게 싸웠다는 말을 들은 서윤은 둘 사이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애당초 서진도, 기욱도 서로 화해를 할 생각이라고는 없었다. 이 어색한 관계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도 없을뿐더러 그걸 화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도 웃겼다.

시험은 통과했고, 전문의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처음에는 다른 방을 구할 때까지 일이 주 정도만 우민의 집에서 머물 계획이었으나, 인턴 시절 옆집에 살았던 서진이 없듯 우민 또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새로 이사한 빌라는 전에 살던 집보다는 낡았지만, 우민 혼자 살기에는 넓은 집이었고, 결과적으로 서진은 새집을 알아보기는커녕 우민의 집에서 자취 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별의별 것이 다 나온다.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서진의 다음 직장을 두고 우민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박기욱이 아닌 누군가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밤새 떠들고 대화를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민은 한동안 H대 병원이나 로컬을 고수하는 처지이었지만, 서진의 선택은 다시 J대 병원이었다. 이번에는 박기욱 때문이 아닌 스스로 정한 결정이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우민이 J대 병원을 관두고 다른 병원을 옮기지 않는 이상 서진도 다른 곳을 갈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일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인 일이었다. 탁탁, 불을 붙여 봤지만, 스파크만 연속으로 일었다. 이놈의 라이터는 좀 쓸 만하다 싶으면 고장이었다.

“풉.”

노골적인 비웃음 소리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서진이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헌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다란 박스를 난간 밑에 깔고 기대 누워 있었다. 연락해 볼 것도 없이 레지던트가 끝나고 임 교수 밑으로 들어간 시헌은 여전히 J대 병원에 남아 있었다. 잘 거면 에어컨 빵빵한 당직실에서 잘 것이지 왜 이런 데 나와 혼자 피크닉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이터 좀 사.”

20살 무렵부터 고집하던 편의점 라이터 습관은 어째 시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매번 고장 나는 거 생각하면 차라리 큰맘 먹고 좋은 거 하나 사는 게 편할 텐데 말이다. 버린 라이터값만 모아도 지포라이터 몇 개는 샀겠다는 게 시헌의 중론이었다. 하긴, 그 소리는 서진이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했으니 전부 부질없는 과거 이야기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시헌 또한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제 라이터를 서진에게 건넸다. 서진은 시헌의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담배 연기를 한쪽으로 내뱉었다.

“너는 거기서 뭐 하는데?”

“피크닉.”

진짜 피크닉이었어? 서진은 그제야 시헌이 깔고 누운 박스 위쪽에 편의점 봉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 원래 출근일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출근한 서진과 달리 시헌은 이미 펠로우 생활에 적응이 끝난 것 같았다. 시헌은 팩으로 된 사과 맛 음료수를 빨 때로 쭉쭉 빨아 마셨다.

“30분 쉬고 오라는데, 당직실 들어가면 영원히 못 나올 거 같아서.”

“몇 시간 잤는데?”

“36시간째야.”

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진이 오기 전까지 시헌은 커다란 박스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식은 삼각김밥을 꺼냈다. 박스를 깔고 앉아 있다고 해도 시헌의 등은 철로 된 난간에 바싹 기대고 있었다. 예전부터 이런 거에는 겁이 없는 시헌이었다.

“너 형이랑 싸웠다며?”

시헌도 자세한 내용을 아는 건 아니지만, 본가에 온 서윤과 기욱이 심각하게 싸우는 걸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결혼한 후에도, 결혼하기 전에도 한 번도 연인다운 제대로 된 싸움을 본 적이 없었던 시헌은 둘이 제대로 된 싸움을 하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봤었다.

“그렇게 됐어.”

“한 교수님이랑 진짜 사귀어?”

“그것도 그래.”

서진이 시헌의 라이터로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여유가 있었던 것도 있지만, 담배라는 건 원래 시작은 자유여도 끝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었다. 많은 말을 할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시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옛 연인이었던 탓에 이런저런 감정이 교차했다. 시헌이 이불로 덮고 있던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려 뭔가를 건넸다. 흰색의 수려한 디자인의 빳빳한 카드는 내용을 보지 않아도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다른 손으로 청첩장 안을 살짝 펼쳤다.

“나 결혼해.”

장현정이라는 글씨를 본 서진이 다시 청첩장을 덮으며 주머니에 넣었다.

“요즘 누가 이런 종이 청첩장을 써.”

“몇 개 안 뽑았어.”

“그래?”

“너한테는 직접 주고 싶어서.”

시헌이 서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아, 그러겠지. 예전부터 현정과 시헌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 둘도 서진과 시헌만큼이나 마음이 잘 맞았다. 주변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목소리와 두 사람의 감정은 별개였다. 박기욱에 의해 남자고, 여자고 이젠 아무래도 좋게 되어 버린 서진과 달리 박시헌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여자라는 것에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 생물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어쩌면 시헌은 서진이 생각했던 것 이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헌이 이렇게 결혼이라니 세월도 참 무심했다.

“한동안 말 없다 했더니 언제 하나 싶었다.”

“보드 패스했으니까.”

“주변에서는 뭐래?”

“잘 어울린대.”

“그럼 됐지 뭐.”

결과적으로 나쁜 결혼도 아니지 않은가? 양가 집안에서 반대도 없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한 다리 건너 듣자 하니 현정을 때렸던 도원의 소문이 전부 퍼지면서 시헌이 현정을 책임지겠다고 했을 때 현정의 어머니가 시헌의 손을 붙잡고 잘 부탁한다며 울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과장이 섞여 있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하나,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었다. 현정의 어머니는 현정을 낳고 반평생 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정이 걱정인 사람이었다. 가운을 걸치고 다시 난간이 부러질 것처럼 난간에 등을 기댄 시헌은 아예 난간 뒤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현정이,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거 알잖아.”

“…….”

“그래도 현정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사촌의 일, 강간과 살인을 당할 뻔한 경험, 현정이 그 자리에서 도망쳤기에 누군가가 죽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처참하게 살해당한 그 아이는 죽지 않았을까? 지금쯤 자신과 같은 나이가 되었을 같은 반 여학생을 죽인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트라우마와 고통에서 그 누구도 현정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행복이란 게 도대체 뭘까? 평범하게 산다는 건 어떻게 보면 그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었다. 누구보다도 현정을 잘 알고, 오래 봐 온 시헌은 이렇게밖에 선택하지 못하는 현정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서진은 그런 시헌의 기분을 이해했다. 중학교 시절, 서진 또한 서윤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 결과가 잘못된 길로 드는 것이었지만 이제 와서 그걸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이해해.”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무슨 생각?”

“내가 한 교수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시헌의 진심 어린 고백에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진이 사랑한 한우민과 박시헌은 서로 다른 인물이었다. 살아온 환경부터, 성격, 연령, 병원에서의 계급 또한 모든 게 달랐다. 박기욱을 감당하기에 그 시절 시헌은 너무나 힘이 없었고, 어렸다.

지금 와서 서진과 다시 만난들 박기욱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박기욱의 동생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와 비해 우민은 틀렸다. 박기욱에게 속박된 사람이 아니니까, 적어도 시헌은 그가 어린 시절의 자신보다 서진을 잘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지 못했던 자신이,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빌어 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스스로가 비참하고 가슴이 아팠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간 시헌이 서진의 가슴 근처로 주먹을 가져다 댔다. 시헌의 그런 고뇌가 절실히 느껴지는 한마디에 서진은 시헌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 하지도 마.”

시헌의 기분도 백번 이해는 아지만, 서진은 시헌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헌과 사귀었던 시간은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로 소중한 기억이었다. 앞으로 남은 삶을 살면서 그렇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 올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 어쩌면 그 누구도 이런 서진을 시헌만큼 사랑해 주지 못할지도 몰랐다.

“만약에라도 네가 한 교수님이 된다면. 그건 너랑 있었던 일을 부정하게 되는 거니까.”

“하하, 뭐야 그게……. 우리 서진이 다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난 원래부터 컸어.”

서진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시헌을 내려다봤다. 중학교 시절 시헌의 키는 평균으로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시헌의 키는 그게 다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컸다고 해도 시헌이 큰 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진은 훌쩍 커 버렸다. 그런 것과는 다르게 갑자기 서진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뒤쪽의 인기척을 느낀 시헌이 서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 슬슬 내려가 봐야 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서진은 조금 더 있다 가도 됐기에 상관은 없었다. 나중에 보자는 식으로 떠나보내려는 서진의 태도에 시헌이 고개를 들어 서진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 줄래?”

어쩌면 거짓말이 아닌, 정말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헌이 서진에게 먼저 안겼다. 이젠 더는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같은 유치한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난 일은 지난 일로 잊어버려야 할 수밖에 없는 일도, 살다 보면 있는 법이었다.

“저기 시헌아…….”

“나 가 볼게.”

“야야, 박시헌?”

안을 만큼 안았다고 느낀 건가? 시헌은 갑자기 서진을 밀어내며 도망치듯 후다닥 옥상을 내려갔다. 시헌의 얼굴이 닿았던 가슴 부근이 약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런 것치고는 도망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시헌이 왜 그렇게 빠르게 도망쳤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너편 출구로 나온 우민이 성큼성큼 서진에게 걸어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방금 올라온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서진은 그제야 헛기침하며 시헌이 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시헌 이 자식…….’

어쩐지 도망치는 속도가 빠르다 했더니 서진보다 먼저 우민을 발견해서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우민은 도망치려는 서진의 목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이, 있으면 있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눈치 못 챈 네가 나쁜 거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처음부터.”

서진은 잡힌 뒷덜미를 놓아 달라며 발버둥을 쳤다. 둘이 있는 걸 보고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분위기를 깨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멀리 보고만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첫 출근이라 천천히 오라고 아침에 안 깨워 줬더니. 일찍 와서 연애질해?”

“제가 아, 놔줘요! 교수님 말고 연애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질투해요?”

서진이 흐트러진 가운을 바로 하며 등을 돌렸다. 우민은 그런 서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려서 그런가? 저걸 진짜 말이라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연애를 한 게 오래됐을 뿐 서진보다 연애 경험이 많다고 자부한 우민은 왠지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제길……. 그래! 질투한다 질투해! 너, 너네 둘이 얼마나 그림인지 모르지?”

단순히 분위기 때문에만은 아니었다. 서진과 시헌은 둘이서 있으면 서 있는 것 자체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는 경향이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건 보통 마음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우민에 서진이 뺨을 긁적였다.

“그야,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으니까요.”

“영혼의 동반자 뭐 이런 거야?”

“아씨! 부끄러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게 뭐예요!”

서진이 얼굴을 붉히자 우민이 대뜸 서진이 입고 있는 수술복 안으로 손을 넣었다. 우민이 서진의 목에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목걸이, 제대로 하고 나왔네.”

“아, 뭐……. 네.”

“내려가자 내려가.”

혹시라도 서진이 못 찾으면 어쩌지 걱정하며 문자까지 남겨 놓았는데 안 하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진은 목걸이를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우민이 서진의 등을 떠밀었다.

* * *

아침에 우민과 함께 계단을 내려옴과 동시에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른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우민을 제외하고 서진은 진호와 함께 수술실을 나왔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환자의 상태를 보고 오겠다는 진호를 대신해 보호자에게 진행된 수술에 관해 설명을 끝마치고 나니 타이밍 좋게 진호가 나왔다. 마스크를 내린 진호가 하품을 하는 서진을 붙잡았다.

“서진아, 밥은 먹었어?”

“하하, 아뇨. 종일 너무 바빠서 그럴 틈도 없었네요.”

뭐, 언제는 제대로 밥 먹은 적이 있던가? 펠로우라 해서 특별히 뭔가 대단한 기대를 하고 온 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진호가 어깨를 두르며 서진을 이끌고 가 연구실에 있는 컵라면과 햇반을 서진에게 던졌다.

“밥 먹으러 가자.”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또 뭐가 있어. 야식 먹을 때까지 버틸 생각 하지 말고.”

서진이 기억하기에 진호도 병원에는 꽤 오래 있었지만, 정작 서진이 레지던트로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외상센터로 내려간 탓에 같이 얼굴 보고 일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래도 서로 얼굴 본 정이 있어 사이가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진은 진호와 함께 직원 식당으로 내려왔다. 시간이 시간이었던 탓에 식당 내부는 썰렁했다. 적당히 정수기 근처에 자리를 잡은 뒤 라면에 물을 부었다.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하는 서진과 달리 진호는 면이 풀리기 무섭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벌써 익었어요?”

“난 꼬들꼬들한 게 좋더라.”

“그것도 적당히 익어야…….”

서진은 어이가 없는지 말을 흐렸다. 사람 취향이란 천차만별이니 그걸 제가 뭐라 할 자격은 없었다. 서진이 라면을 먹기 시작할 즈음 면을 다 먹은 진호는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햇반을 그대로 넣었다. 굳이 따지자면 면이 부식이고 라면 국물에 만 밥이 주식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진호가 은근슬쩍 서진을 떠봤다.

“근데 한 교수님이랑 박 교수님, 대체 무슨 일이냐?”

“네?”

“아니, 너라면 알 줄 알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해 되물은 것뿐인데 아무래도 짐짓 오해한 모양이었다. 괜히 또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진호의 오해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기욱과 우민은 레지던트 때부터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일적으로 같이 지낼 뿐 서로서로 싫어하는 건 어느 직장에서나 있는 일이니 상관은 없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최근 특별히 병원에서 부딪칠 만한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술을 먹여도 말을 안 하더라. 진짜 몰라?”

“그게……. 저도 모르겠네요.”

밥을 다 먹은 진호가 국물을 비우며 빈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았다. 강서진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굳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캐서 좋을 건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들을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 진호는 가져온 텀블러에 정수기에 있는 물을 따라 마셨다. 식사라고 했지만, 서진과 진호가 밥을 다 먹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라면 물을 끓이는 시간까지 포함해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밥을 먹었다고 하는 편보다는 마셨다고 하는 편이 더 맞았다.

“그나저나 너 로컬 안 갈 거라는 건 다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네가 설마 우리 팀으로 올 줄은 몰랐다.”

처음에 서진이 올 거라는 얘기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서진이 쉬는 동안 별의별 말이 다 돌은 걸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서로 얼굴은 알아도 이렇게 제대로 앉아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던 진호는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시답잖게 뭔가를 숨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진호가 국물을 마시는 서진을 손가락질했다.

“너 박 교수님 라인이잖아.”

“아, 진짜 무슨 라인을 따지고 그래요.”

“그도 그럴 게 강 선생…….”

“그건 누나 사정이구요. 저도 말은 안 했지만, 솔직히 그렇게 대하는 거 엄청 부담스러워요.”

서진은 그만 말하자며 고개를 저었다. 대놓고 서진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어도 서진도 알고 있었다. 숨을 고른 서진이 쓰레기들을 버린 뒤 고인 물을 들이켰다.

“저는 그 사람 싫어하거든요.”

“미안하다. 괜한 말을 했네.”

“됐어요. 분위기 싸하게 만든 제가 죄송하죠.”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 * *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새벽에 특별한 일이 없어 교대로 두 시간씩 자기로 한 서진은 책상 쪽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2층 침대의 아래에서 자던 서진이 침대의 불을 탁, 하고 켰다. 당직실에 들어온 의사보다 졸린 게 먼저였던 서진은 머리맡에 뒀던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잠이 든 지 고작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 미안. 자는 데 깨웠지. 금방 나갈게.”

반쯤 감은 눈 너머로 들려오는 우민의 목소리에 서진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뭔가 저를 붙잡으려고 하긴 하는데 잠에 취해 눈도 뜨지 못하는 채로 손을 휘젓는 서진이 불쌍해진 우민은 마지못해 서진의 손을 제 가운 근처로 가져다 댔다. 서진이 본능적으로 우민의 가운을 붙잡았다.

“가지 마요.”

“바빠 인마.”

2층 침대의 조명도 눈이 부실 정도로 잠에 취했으면서 불은 왜 켠 것인지, 우민이 한숨을 쉬며 침대의 불을 끈 뒤 서진을 눕혔다. 불이 꺼지자 서진이 더욱 우민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이거 제정신이 맞긴 한 걸까? 정말로 금방 나가 봐야 했던 우민은 어둠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서진의 입술에 키스했다.

“읍….”

짧게 하려고 했는데 서진의 혀가 일방적으로 우민의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강서진이 이렇게 키스를 잘했던가? 역으로 덮쳐지는 상황이 된 우민이 오히려 깜짝 놀랐다. 서진의 손이 제 몸 위로 올라온 우민의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었다. 정신을 차린 우민이 서진을 밀어내며 다급하게 2층 침대의 불을 켰다.

우민이 정신 좀 차리라며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 우민의 뒤를 쫓던 서진은 결국 침대의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얼마나 강하게 부딪쳤는지 우민도 소리에 깜짝 놀라 등을 돌릴 지경이었다.

“아윽… 윽!”

“이게! 어디까지 하려고 그러는 거야!”

“싫어요?”

머리를 긁적이는 서진을 본 우민은 한숨을 쉬며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이마까지 맞으니 정말 울 것 같았다.

“이거 잠이 덜 깼구만, 장소 구분해.”

“하고 싶어요.”

“쌓였냐?”

우민은 진지하게 몸을 숙이며 서진을 내려다봤다. 우민이 다가오기 무섭게 서진은 우민에게 안기며 얼굴을 묻었다. 잠이 덜 깬 서진은 마치 애 같았다. 원래부터 약간 어린애 같은 구석은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또 의외였다.

“쌓였어요.”

“너 진짜 직설적이네.”

“누구 때문인데.”

우민과 거리를 벌린 서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전히 서진은 잠에 취해 눈도 똑바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슬슬 정말로 돌아가 봐야 하는 우민은 휴대폰을 열어 빠르게 일정을 확인했다.

“너 다음 주 주말에 집에 가던가?”

우민의 대답을 듣긴 한 걸까 서진은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는 것인지 대답을 하는 건지 솔직히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때 좀 시간 내 볼게.”

“약속해요.”

서진이 당직실을 나가려는 우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내밀 거면 똑바로 내밀던가. 우민은 적당히 아무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대충 건 뒤 서진을 눕혔다.

“그래, 그러니까 잘 수 있을 때 자 둬라?”

우민이 이불을 서진의 가슴까지 덮자마자 서진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서진이 잠든 걸 확인한 우민이 조용히 문을 닫으며 당직실을 나왔다.

* * *

정확히 2시간을 자고, 진호와 교대를 한 우민이 밖으로 나왔다. 토요일 새벽이라 그런지 유독 술을 먹고 다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인훈.’

어디서 많이 들은, 아니 잊을 수 없는 이름에 서진이 미간을 구겼다. 혹시나 하고 나이를 확인하니 서진과 나이가 같았다. 당직실을 나오기 전까지 잠이 덜 깼던 서진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인훈이 있는 자리는 서진이 앉아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조인훈,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걸친 서진의 스토커였다. 감옥에 갔다고 듣긴 했지만, 애당초 오래 있을 만한 죄목은 아니었다.

“강 선생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창백한데.”

“아, 네네.”

지나가던 간호사의 걱정에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침 낮에 봤던 인턴 하나가 서진의 옆을 지나갔다. 서진은 틈을 놓치지 않고 인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직 앳된 얼굴의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깜짝 놀라 서진을 바라봤다.

“선생님, 바쁘세요?”

“아, 아뇨.”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의 서진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수술복 차림새에 병원에 익숙해 보이는 서진이 뭘 하든 자신보다 위일 거라 생각한 그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잠깐 좀 와 봐요.”

서진이 인턴에게 CT를 보여 주며 대충 설명을 했다. 크게 어려운 걸 말하는 게 아니었던 터라 인턴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게 왜요?”

“가서 환자한테 말하고 오면 돼요.”

“……제가요?”

“하아, 제가 뒤따라갈 테니까 부탁 좀 할게요.”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짓는 서진에 뭔가 사연이 있음을 눈치챈 인턴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서진은 착잡한 기분으로 인턴의 뒤를 따랐다. 인턴이 커튼을 걷자 예상했던 대로 이마에 거즈를 대고 있는 인훈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얼굴을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인훈은 가운 차림의 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인턴이 시키는 대로 설명을 했지만, 두 사람은 인턴의 말을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둘만 잠깐 다른 공간에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만에 인훈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

“똑같네.”

그 한마디에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서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복도 사이에 숨은 서진은 벽을 붙잡고 헛구역질했다. 구역질이 역겨워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 와서 저 자식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기억들을 누군가가 강제로 끄집어내는 것만 같았다. 서진의 상태가 이상한 의료진들이 다가가지는 못한 채 유심히 서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태를 수습한 인턴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우윽….”

“선생님, 선생님. 괜찮으세요? 환자는 어떻게 할까요?”

“윽, 많이 안 다쳤으니까 퇴원하라 해.”

“네? 근데 아까는 하룻밤 정도는 지켜봐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나요?”

“퇴원시키라고 했잖아!!”

순간 외상센터 내로 정적이 흘렀다. 마침 밖으로 나온 정혁이 뛰어와 서진을 진정시켰다. 서진은 여전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야, 서진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정혁은 알아서 하겠다며 인턴을 향해 가라는 듯 손을 저은 뒤 서진을 더욱 안쪽으로 데리고 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교, 교수님 A7에 화, 환자…… 아, 알고 있어요? 저 스토킹했던 녀석…….”

“하아.”

하필이면 제가 잠시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정혁은 제가 받은 환자가 아님은 확실하다는 걸 깨닫고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정혁도 얼굴은 대충 알고 있었다. 강서진의 스토킹뿐만 아니라, 시헌을 칼로 찔렀던 남자지 않는가. 그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제 불찰이었다.

“한 교수한테는 내가 잘 말할 테니까. 나가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죄송해요.”

“됐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조용히 올라갔다 오라는 정혁의 언질에 서진이 고개를 숙이며 후다닥 센터를 빠져나왔다. 사람이 거의 없는 본관 로비에 도착하자 서진이 숨을 골랐다. 일단 옥상에라도 한번 갔다 와야 하나 싶을 무렵 다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서진아.”

“씨발.”

서진은 이를 악물며 인훈을 무시하고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길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무려 2주 만에 집에 가는 서진은 라커에 넣어 뒀던 배낭 가방을 챙겨 멘 뒤 휴대폰을 열었다. 몇 시간 만에 연 휴대폰에는 기욱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와 톡이 잔뜩 있었다. 바꾼 번호가 오래가지 않을 것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너 오늘 집에 가지?」

「강서진, 연락 좀 해」

「야」

「읽었음 답장을 하라고」

서진은 며칠 전부터 기욱의 연락을 전부 무시하는 중이었다. 화해? 박기욱이랑 싸웠다고? 기욱이 서진에게 집착하는 이상 서진과 연락을 하지 못하면 아쉬운 건 서진이 아니라 박기욱이었다. 제가 라커룸에서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걸까? 정말이지 여전히 타이밍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사람이었다. 서진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옷을 갈아입는 내내 모르는 번호로 계속해서 전화가 오는 중이었다. 서진이 저장되어 있지 않은 걸 보니 완전히 제삼자의 휴대폰 같았다. 이젠 이런 사람의 휴대폰까지 빌려 전화를 거는 기욱이 서진은 같잖았다. 계속 전화가 오는 것도 짜증이 났던 서진은 기욱의 전화를 받자마자 끊었다.

“…….”

“…….”

그렇게 무사히 병원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별관을 통해서 나갈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정말 딱 본관을 나와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욱과 마주쳤다. 응급실에서 일을 보고 밖으로 나와 돌아가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서진이 모른 척 기욱을 지나치려 하자 그 틈을 놓칠 리 없다는 듯 기욱이 서진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강서진, 얘기 좀 해.”

“싫어요.”

“잠깐이면 되니까 얘가 좀 하자고.”

“할 말 없다고 했잖아요!”

안 그래도 오늘 집에 간다고 밤 꼬박 새우고 나와 피곤해 죽겠는데, 이 타이밍에 박기욱까지 마주치니 더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서진의 외침에 주변 사람들이 서진과 기욱을 쳐다봤다. 서진은 미처 감지 못해 떡이 진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길, 5분 만이에요.”

서진은 기욱을 데리고 연구동과 건물 사이에 있는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박기욱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했지. 이제 그런 지난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팔짱을 낀 서진은 참아 왔던 불만을 토로했다.

“전화 그만 좀 해요.”

“뭐?”

“요 며칠간! 나한테 계속 전화했잖아! 그만 좀 하라고! 스토커야 당신?”

정체 모를 번호는 도대체 어디서 난 건지 끊임없이 전화를 해대 일하는 데 지장이 올 정도였다. 박기욱은 일을 안 하는 건지 뭘 하고 다니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서진은 기욱의 전화가 지긋지긋했다. 안 그래도 환자로 방문한 조인훈 때문에 예민한데, 박기욱까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말을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난 전화한 적 없어.”

“…….”

하늘에 있는 구름이 두 사람 위를 지나가며 순간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다. 어디선가 부는 선선한 바람이 시원하기보다는 소름이 돋았다. 씨발,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서진이 저 혼자 욕설을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 박기욱이 눈앞에 있는 지금도 서진의 휴대폰에서는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서진의 반응에 기욱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한발 늦게 눈치를 챘다.

“어떤 새끼야.”

“아, 알 거 없잖아요.”

재빨리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은 서진이 고개를 저으며 모르는 척 발뺌을 했다. 스토킹의 상대가 몇 년 만에 다시 나타난 조인훈이라는 걸 알아채면 박기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기욱과 어떻게 사이가 틀어졌는데, 이런 일로 다시 박기욱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기욱이 서진의 손을 거칠게 붙잡았다.

“너 스토킹당하고 있는 거잖아. 씨발, 어떤 새끼야?”

“스토킹을 당하든 말든 내, 내가 아, 알아서 해요!”

“…….”

“제길, 당신이 한 줄 알고……. 괜히 말했네요.”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며 기욱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기욱은 계단을 올라가려는 서진의 앞길을 막았다. 저랑 있었던 일이야 그렇다 쳐도 서진이 스토커 때문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생각하면 보통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진은 계속해서 계단을 막는 기욱을 옆으로 밀어냈다.

“스토킹을 당하는 말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끄라구요 좀!!”

서진의 짜증에 길목을 지나가던 사람이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기욱과 마주친 남자는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가던 길을 마저 갔고, 남자가 사라진 걸 본 서진은 짜증을 내며 벽 뒤쪽으로 기댔다. 옆쪽으로 환풍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래?”

“뭐가요.”

후, 하고 내뱉은 담배 연기가 허공을 타고 건물 사이로 뭉게뭉게 올라갔다. 서진은 그런 기욱을 싸늘하게 올려다봤다. 그늘에 가려진 서진의 그 시선이 오늘따라 유독 기욱을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강서진이 언제부터 저런 눈을 하게 되었던 거지?

“뭐가 불만이냐고 묻잖아.”

“전 당신이 싫어요.”

아니,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서진이 또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래,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박기욱은 박기욱이다. 이제 와서 그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애당초 서진은 기욱에게 그런 기대 한 적도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지경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계단 앞에서 서진을 막던 기욱이 계단을 내려가 담배를 피우던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서진의 손에서 불이 붙은 담배가 하염없이 타들어 갔다.

“난 널 사랑해.”

“그래서요?”

서진은 기가 막힌다며 빈정댔다. 그런 서진의 감정에 기욱은 드물게 반박할 말이 없어졌다. 강서진을 원한다. 아니, 사랑한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그리고 미치도록 원한다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기욱은 고작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어떻게 주체해아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강서진은 기욱에게 모래 같은 존재였고, 놓치지 않게 주먹을 쥐면 쥘수록 틈새로 빠져나가는 모래였다. 어쩌면 서진에게 해야 할 건 주먹을 쥐는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뭘, 내가 얼마나 더 해야 하는데!”

기욱이 서진의 멱살을 잡으며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한 번밖에 피우지 못한 담배는 결국 서진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서진은 기욱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바닥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박기욱이 아니었다면 서진은 시헌과 계속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헤어졌다고 해도 그 이유는 여타 다른 연인들과 비슷했을 것이지 박기욱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민을 만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 사람이 박기욱이 아님은 분명했다. 기욱이 얼마만큼 서진에게 잘하든 서진은 박기욱이라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다.

“우린 인연이 아니었나 보죠.”

“인연? 하, 인연이 뭔데.”

“그 자기중심적인 사고부터 버리면 안 돼요? 당신은 언제나 그래. 내가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럼, 그런 내 마음은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싫다는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냔 말야!”

몸을 튼 서진은 소매를 걷으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처음 말한 5분은 훌쩍 지나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5분 됐네요.”

서진이 계단을 반쯤 오르자 기욱이 서진의 팔을 뒤로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서진의 몸이 뒤로 넘어지며 기욱의 위로 올라탔다. 왜 이렇게 위험한 짓을 스스럼없이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나마 가방 때문에 산 서진은 먼지 묻은 바지를 툴툴 털었다.

“사랑한다고, 내가 이렇게 말하잖아.”

“씨발, 앵무새예요? 사랑한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바닥에 주저앉은 기욱을 본 서진 또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으며 입고 있던 긴팔 셔츠의 한쪽을 내렸다. 서진의 몸에는 기욱이 낸 흉터가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보여요? 당신이 만든 자국. 흉터!!”

“…….”

“당신의 눈엔 이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행동이냐고! 미쳤어, 당신은 미쳤다고!!”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등을 돌리자 기욱이 다시 서진의 등을 안았다. 설마 강서진이 이렇게 등을 돌릴 줄은 몰랐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설령 싫어해도 자신만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 생각이 이렇게 서진을 몰아붙였다는 것을 기욱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서진은 기욱과 닿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귓가로 속삭이는 악마 같은 속삭임도, 달콤하기는커녕 진짜 악마의 목소리로 들렸다. 몸을 돌린 서진이 있는 힘껏 기욱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당황한 기욱이 다가오자 서진은 있는 힘껏 기욱의 무릎을 발로 찼다.

“너 같은 거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한 번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던지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기욱을 향해 또다시 발을 휘둘렀다. 서진이 휘두른 발이 기욱의 무릎을 때리고 지나갔다.

“앞으로 평생 말 걸지 마세요!”

이젠 정말 더 해 주고 싶어도 할 말이 없다. 기욱이 손을 뻗기도 전에 서진은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위쪽으로 올라가는 서진을 본 기욱이 멀어지는 서진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너! 후회할 거야 강서진!!!”

발악에 가까운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진은 이어폰을 끼며 모르는 척 걸음을 빨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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