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 내가, 사랑한다고 했잖아
“고생하셨습니다.”
수술실에서 나온 서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5분, 갑작스럽게 들어가게 된 응급수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을 잡아먹은 탓도 있었다. 그나마 내일이 주말에, 근무가 없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까. 서진은 너무 비벼 빨갛게 충혈돼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은 뒤 병원을 나왔다. 병원 정문 근처 구급차가 들어오는 모습보다 서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응급실 한쪽에 있는 빨간색 자판기였다. 일하며 밥을 먹을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오늘따라 유독 입맛이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새벽에 출근했을 때부터 물 외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서진은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사실 아직도 입맛이 없는 건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차가 끊겨 버린 이 시간에 배고픔을 이기고 무사히 집까지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서진은 자판기 앞에 서서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흐음….”
“야, 강서진. 너 뭐 해?”
마침 볼일을 마치고 응급실을 지나가던 우민은 응급실 밖에서 사복 차림으로 자판기 앞에 서 있는 서진에게 다가갔다.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우민의 행동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서진은 여전히 자판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콜라와 사이다 중에 뭘 먹으면 더 배가 부를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야.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기가 막힌다는 우민의 질문에 서진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풀린 눈으로 자판기를 바라보는 서진을 무시한 우민은 주머니를 뒤졌다. 가운 주머니 속 잡동사니와 함께 5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나왔다.
“일 끝났으면 얼른 집이나 가지 뭐 하는 거야?”
“배고파요.”
“하루 이틀 일해? 누가 밥 안 먹으래? 자. 이거 먹고, 정 배고프면 나가서 순댓국이라도 사 먹고 들어가.”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캔 사이다를 주워 서진에게 건넸다. 표면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져 있는 알루미늄 캔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서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콜라 먹으려고 했는데.”
“먹기 싫으면 말아!”
“아아, 줘요! 줬다가 빼앗는 게 어디 있어!”
서진은 사이다를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안으며 우민을 노려봤다. 먹이를 빼앗는 고양이 같은 표정에 우민은 기가 막힌다며 혀를 내둘렀다. 서진의 몰골을 보아하니 며칠 집에 안 들어간 모양인데, 제정신도 아닌 녀석과 말싸움을 해 좋을 게 없다는 것이 우민의 지론이었다. 더 이상 서진에게 시간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던 우민은 정문이 있는 쪽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가라 가.”
“…….”
“가라니까? 안 가고 뭐 하는데?”
“순댓국집. 어딘지 알려 줘요. 먹고 가게.”
“너 진짜…….”
요즘 남자애들이란, 뭐가 저리 까탈스러운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민은 휴대폰으로 서진에게 주소를 찍어 보냈다. 주소를 확인한 서진이 우민을 향해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몇 걸음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는 것을 반복하는 서진의 태도에 우민의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꺼지라고 좀!!”
응급실 주변이 크게 울릴 정도의 외침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가운 차림의 우민을 이상한 눈빛으로 훑어봤다. 도무지 더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쪽팔림을 느낀 우민은 도망치듯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우민이 추천해 준 24시간 순댓국집은 서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맛이 있었다. 아무렴, 서진이 유독 배가 고픈 탓도 있었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사이다에 탄산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한 캔을 순식간에 비운 서진은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허기에 져 있었다.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물을 마시는 것조차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마셔야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물 한 컵을 비우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순식간에 순댓국 하나를 다 비운 서진은 술을 마시고 있는 옆 테이블을 보며 진지하게 소주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배가 부를 뿐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는 데다 잘 곳만 있다면 어디서든 바로 잠이 들 자신이 있을 만큼 피곤한 상황에서도 소주 한 병이 그렇게 당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생과 소주의 맛은 반비례한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서진은 테이블 위로 손을 살짝 들었다.
“저기 여기…….”
“네?”
가게가 시끄러워 서진이 부르는 걸 듣지 못한 직원 한 명이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하려던 순간 서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손을 내리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고개를 돌린 뒤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서윤에게서 온 전화였다.
― 누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 어, 서진아 미안한데. 혹시 오빠 어디 있는지 알아?
― 매형? 퇴근한 거 아니야?
이미 시간은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서진도 저녁부터는 내리 수술실에만 있어서 기욱이 퇴근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집에 안 왔다면 뭐, 연구실에서 자고 있지 않을까? 아무렴 박기욱이니 어딘가에 알아서 잘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조차 들지 않았다.
― 최 교수님한테 물어보니까 연구실에도 없다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고.
― 어……. 응.
서진은 걱정스러운 서윤의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서윤의 말대로 오늘의 기욱은 참으로 이상했다. 설령 연기든 아니든, 기욱은 아무 말도 없이 외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서윤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는 날 서진을 찾지 않은 것도 드물었다. 진심을 말하자면 찾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어디에도 없지만, 서진의 입은 이미 서윤을 달래고 있었다.
―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혹시 모르니까 나도 한번 연락해 볼게.
― 알았어. 아까 이 선생이 그러던데 수술 늦게 끝났다면서?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얼른 집에 들어가.
― 응, 들어갈 거야.
통화를 끊기 전 서진은 몇 번이나 기욱을 찾아보겠다는 말로 서윤을 달랬다. 술을 마실 기분은 이미 싹 가신 뒤였다. 계산하고 밖으로 나온 서진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숨어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 좋은 날 기욱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차선책으로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서진은 결국 메고 온 배낭 가방 안에 있는 2G 휴대폰을 꺼내 기욱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어디예요?」 오전 1:32
탁탁, 보지도 않고 담배 케이스를 털었지만, 텅 빈 담배 케이스에 달라붙어 있던 담뱃재가 서진의 손 위로 떨어졌다. 분명 꽤 많이 남아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벌써 한 갑을 전부 피운 모양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피우기 시작할 때 몇 개비가 있었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건 언제 산 담배였을까? 사람의 무의식이란 참으로 무섭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담배 케이스를 구겨 전봇대 옆에 가득한 쓰레기 더미 사이에 끼워 넣은 서진은 진동이 울리는 2G 휴대폰을 열었다. 기욱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ㅁㅝ?」 오전 1:40
정체를 알 수 없는 답장에 서진은 제 눈을 의심했다. “뭐?”라고 보낸 것 같은데, 설령 똑바로 문자를 쳐서 보냈다고 해도 이게 서진이 보낸 문자에 대한 정상적인 답변일 수 없음은 명확했다.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갑자기 잠이 훅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대로와 골목 사이, 손님을 골라 태우려는 택시들과 그런 택시를 어떻게든 잡으려는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었다.
“제길.”
박기욱 따위 알 게 뭐야. 언제는 걱정한다고 달라진 것이 있던가? 서진에게 박기욱은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기욱의 눈에 서진은 중학교 시절과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몰랐다. 새벽, 우민에게 추천받은 순댓국을 먹고 마음 편히 집에서 자려던 계획이 무너진 서진은 찝찝한 마음을 안고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 * *
삑, 삑, 삐빅,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불편한 기계음이 복도로 울려 퍼졌다. 찰칵, 철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럴 리 없는 거실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눈치챈 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문을 반쯤 열자마자 훅하고 강한 알코올 냄새가 서진의 코를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
아아, 최악이다. 차라리 순댓국집에서 진창 술을 마시고 어딘가의 거리에서 술에 취해 응급실에라도 실려 가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병원에서 하루 동안 취객으로 철창신세를 지는 것도 괜찮다. 냄새만으로도 서진을 취하게 할 정도로 꽉 막혀 있는 술 냄새에 서진은 최대한 조용히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멋대로 거실 한쪽에 있는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기욱의 뒷모습을 본 서진이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그제야 병째 마시고 있던 소주를 내려놓은 기욱이 등을 돌렸다.
“너, 지금 몇 시야.”
“제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지금 몇 신 줄 알아요? 집에 가요. 누나가 걱정하잖아요.”
“너는?”
“뭐가요.”
“나 걱정해서 그런 문자 보낸 거 아냐? 응? 강서진.”
문자를 확인하려는 듯 쥐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테이블 사이로 들어간 휴대폰을 불편한 자세로 주우려는 기욱에 서진은 한숨을 쉬며 기욱을 대신해 휴대폰을 주워 거칠게 테이블 위에 올렸다.
“집에 가라고 했잖아요. 도대체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예요 이게! 누나한테 전화할 거예요.”
“강서진!!”
“윽.”
기욱이 서진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반대편 손에는 서진의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불편하긴 해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서윤에게 전화할 수 있었다. 기욱은 의자에 앉아 그런 서진을 가소롭다는 듯 올려다봤다.
“씨발, 전화해.”
“…….”
“강서윤한테. 나랑 너랑 어? 존나 떡 치는 거 보여 주고 싶으면 전화해.”
“미친 새끼. 집에 가요. 제발.”
휴대폰을 쥔 손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서진의 목소리 또한 내려갔다. 남은 방법이라고는 기욱을 살살 달래 돌려보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편의점에 있는 소주를 상자째로 싹쓸이해 오기라도 한 걸까? 기욱은 종이컵이 넘칠 정도로 소주를 부은 뒤 컵의 몸통을 손가락으로 툭, 하고 건드렸다. 표면에 맺혀 있는 소주가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종이컵 아래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앉아.”
“…….”
“한잔해.”
서진은 기욱에게 붙잡힌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강하게 붙잡았으면 그사이에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손에 가는 피가 훅 줄어든 게 느껴지는 듯 손목이 아려 왔다. 테이블에 팔을 괸 기욱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앉아 있는 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소주가 가득 담긴 종이컵을 쥔 서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최근 일에 대해 고민을 해 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서진이 알고 있는 한 박기욱이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답지 않은 기욱의 행동, 무엇이 기욱을 이렇게 몰아붙였는지 서진은 알 수가 없었다. 술이 당기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과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서진은 억지로 종이컵에 있는 소주를 전부 비운 뒤 주먹으로 종이컵을 구겼다.
“윽, 이제 됐죠? 집에 가세요.”
“너, 뭔데 집에 가라 마라야? 이 집 니 거야?”
“……집에 가라구요. 부탁이니까.”
“나한테 명령하지 마.”
외곬 같은 새끼. 아무래도 기욱은 서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술에 절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감자칩을 입에 넣은 기욱이 별안간 새로 뜯었던 소주를 병째로 서진에게 내밀었다.
“한 잔으로는 성에 안 차잖아.”
“됐으니까 집에 가요.”
“너 이 시간까지 대체 뭐 했어? 어?”
“벽에 대고 말을 해도 당신보다는 나을 거예요!!”
“마시라고.”
말이 통하지 않았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할까? 슬슬 짜증보다는 불안한 감정이 앞서기 시작한 서진은 다시금 소주를 들었다. 딱히 오기 때문은 아니었다. 기욱은 서진이 소주를 마실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었다. 단지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셔 주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기욱의 매서운 시선을 보며 간신히 병째로 소주를 다 비운 서진은 병을 내려놓기 무섭게 정수기로 뛰어가 컵을 사용하지도 않은 채 물을 마셨다. 씨발.
“크읍… 윽….”
인생과 소주의 맛은 반비례한다고? 취소다. 인생과 소주의 맛은 절대 반비례할 수 없다.
기욱이 준 술은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쓰고 역겨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컵에 물을 따라 마셨지만, 그 역겨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던 서진은 정수기를 붙잡은 채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방금 먹은 순댓국이 전부 올라올 것만 같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서진이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아 있는 기욱에게 다가갔다.
“이제, 윽… 집에 가 줘요.”
눈가에 고인 눈물은 헛구역질 때문에만은 아니었다. 서진은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고개를 천천히 든 기욱은 빨갛게 상기되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서진을 바라봤다. 그 눈빛, 20대 시절 골목에서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와 섹스를 즐기고 있을 무렵 자신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눈빛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경멸에 가까운 듯한 강렬한 눈빛이 닿을 때마다 기욱의 깊숙한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려 오는 게 눈에 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기욱이 답답했던 서진은 못 참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씨발, 집에 가라고!! 악!”
“닥쳐.”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난 기욱이 서진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테이블 위에 서 있던 소주병처럼 기울어진 서진이 바닥에 손을 짚으며 기욱을 노려봤다. 한쪽 뺨이 누가 봐도 아플 정도로 빨갛게 부풀었지만, 서진은 뺨 근처로 손조차 가져다 대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서진의 모습을 본 기욱이 기가 막힌다며 코웃음을 쳤다. 몸을 아래로 숙여 시선을 맞춘 기욱이 강제로 서진의 머리채를 잡았다.
“한 번만 그놈의 집에 가라 소리 해.”
“……가.”
“야.”
“가라고!! 가! 가란 말이야!!”
서진의 외침과 동시에 기욱이 바닥으로 내던진 소주병의 파편들이 정신없이 바닥으로 튀었다. 기욱도 소란이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거칠게 숨을 골랐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벨 소리가 들렸다. 경찰은 아니고, 아래층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문틈을 살짝 연 기욱이 바닥에 주저앉아 얼어붙은 서진을 대신에 멋대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친구랑 말싸움해서. 정말 말 같지도 않은 핑계였다. 여자가 가고 난 뒤 철문을 닫은 기욱이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서진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소주병을 던진 탓인지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계속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기욱이 서진에게 손을 가까이했다. 서진의 몸이 기욱의 손에 닿기도 전에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때릴 생각은 없었어.”
그걸 사과라고 하는 건지. 기욱의 손을 차마 쳐 내지 못한 서진은 대신 등을 반쯤 돌리며 기욱을 노려봤다. 사실은 금방이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실타래처럼 얇아진 끈을 자존심 아닌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었다.
“돼, 됐어요.”
“뭐가 돼.”
“그깟 뺨 한 대. 아프지도 않아요.”
아이러니하지만 정말이었다. 소주병을 바닥으로 내던진 건 좀 놀랐지만, 이제 기욱에게 뺨 한 대 맞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뺨 한쪽의 감각이 마비된 듯 아렸지만, 그동안 기욱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하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서진의 처지에서 보기엔 인제 와서 뺨 한 대 쳐놓고 답지 않은 사과를 하는 기욱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박기욱이 언제 이런 일로 양심의 가책이나 느끼는 사람이었던가? 기욱은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고 있는 주제에 저런 말을 내뱉는 서진이 가소로웠다. 멋대로 서진의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서진을 안쪽 방에 있는 침대에 내던졌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항할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기욱의 손은 두꺼운 대못이 되어 서진을 침대에 꼼작도 할 수 없게끔 눌렀다.
“너, 한 선배랑 했지?”
서진은 애써 고개를 돌려 기욱을 외면했다. 왜 또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걸까? 박기욱은 이런 일에만 유독 날카로웠다. 그리고 대개 기욱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경우는 무언가의 확신하고 있을 때뿐이었다. 도대체 언제? 역시나 머리를 굴려도 어디서 걸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욱은 언제나 서진의 머리 위에서 놀았다.
“아, 안 했다고 하면 믿어 줄 거 아니잖아요.”
“했어. 안 했어.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안 했어요.”
“거짓말하지 마.”
“안 했다고 했잖아요. 즈, 증거 있어요? 저랑 한 교수님이랑 했다는 증거 있냐고!”
“너네 그렇고 그런 눈으로 보잖아.”
“하, 하하… 뭐야 그게.”
간신히 기욱에게 벗어나 침대 뒤로 물러난 서진은 기욱의 기막힘에 헛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그 시절의 강서진이 아니었다. 설령 우민과 했다고 해도 증거 같은 걸 남길 거라 생각하는가? 기욱의 서진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것을 벗어나려는 서진의 행동도 분명히 교묘해졌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지긋지긋한 세상 살 수가 없었다.
“당신, 그거 병이에요.”
“서진아, 불륜이야 그거. 감히 내가 있는데 다른 놈이랑 눈이 맞아?”
“불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우린 처음부터, 다! 한 번도 불륜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고!! 내가 누굴 좋아하든 무슨 상관이야!”
적어도 서진이 사랑하는 상대가 기욱이 아님은 분명했다. 기욱을 처음 만났을 당시의 서진은 너무나 어렸다. 서윤이 행복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어렸을 적 서진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히듯 서윤에게 얽매여 있었다. 그 시절 서윤은 서진의 삶의 전부였으며 박기욱은 그 사실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기욱은 서진이 입고 있는 바지와 옷들을 강제로 벗겨 냈다. 반항할 틈도, 여유도 없었지만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던 서진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버려졌다. 기욱은 서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우리 서진이, 많이 컸다?”
“…….”
“내가, 사랑한다고 했잖아. 근데 감히 내 앞에서 다른 사람 얘길 해?”
“필요 없어!”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어긋난 걸까?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박기욱을 증오했다. 기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박기욱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설령 시헌과 만나지 못하고 의대에 가지 못하고, 의사가 아니라 해도 어딘가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지 않을까? 할 수만 있다면 박기욱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서진은 호텔 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자신을 상대로 역겨운 상상했을 기욱의 앞에서 죽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이 과거로 돌아간 서진이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이자 상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서진에게는 제 목을 스스로 그을 자신이 없었다.
“당신의 사랑 따위. 필요하다고 말한 적도 없고, 원한 적도 없… 아윽…! 어흑….”
“너 미쳤지?”
“미친 건 당신이야!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니가 날 사랑해? 그러면 제발 날 내버려 둬!! 제발, 흐으윽… 부탁이니까 그만하라고!”
어깨를 붙잡고 매달리며 눈물을 흘리고, 사정하고 애원도 해 봤다. 기욱이 시키는 대로 안겨 본 적도 있고, 의식이 끊길 때까지 반항해 본 적도 있다. 죽는 것 외에 기욱에게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나보고 네가 한 선배랑 박시헌이랑 뒹구는 걸 보고 있으라고?”
“그래!! 그게 뭐가 나쁜데!! 네가 말하는,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진짜라면.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이랑 행복해지길 바라라고!!”
기욱의 행동이 한 번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서진이 생각하는 사랑은 이런 게 아니다. 기욱이 서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서진은 기욱을 평생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박기욱은 평생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서진은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나 기욱의 몸을 강하게 밀어냈다. 꼴도 보기 싫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도, 누군가를 당연하게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요. 집에 가. 가라고!”
“강서진 넌 내 거야.”
“몇 번을 말하지만 나는…….”
“이 집도, 네 H대라는 학벌도, 네가 일하고 있는 J대 의사라는 그 직업도!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쓴 줄 알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하는 소리가 돈이라니 반박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은 억울함이었다.
“저도 돈 벌 거든요? 당신 같은 거 없어도…….”
“서윤이한테 들었는데 너, 인턴 때부터 착실하게 월급 모으고 있다더라? 얼마 모았어? 1억? 2억?”
침대 위로 올라온 기욱이 서진의 가슴에 손을 짚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간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고통에 서진은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술 끝을 깨물었다. 허벅지를 강제로 벌린 뒤 아무 감정 없이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그 돈, 누구 덕에 모으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
“난 말이야. 누구보다도 널 오랫동안 봐 왔어.”
서진이 기욱을 알기 전부터, 기욱은 강서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강서진, 강서진. 그가 아니면 안 된다. 영혼의 끝에서부터 기욱은 강서진을 원하고 또 원하고 있었다. 서진의 페니스를 강하게 쥐었던 손에 힘을 푼 기욱은 난데없이 침대 옆에 있는 벽장을 열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벽장 안쪽으로 손을 넣은 기욱은 겨울 코트와 옷으로 잔뜩 덮어 둔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침대 위로 내던졌다. 손바닥 두 개 크기의 작은 상자는 기욱이 보내 왔던 서윤의 사진이 있는 외장 하드와 함께 빛바랜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추억을 만들지 않은 서진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몇 없는 물건이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장롱에서 상자를 찾았다는 것은 기욱이 이미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했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런 네가 내 앞에서 감히 기분을, 다른 사람과의 행복을, 감정을 논해? 네가 말한 사랑이란 거, 이런 거야 어? 씨발, 그래서 이런 종이 쪼가리 하나 못 버리는 게 사랑이냐고!!”
추억이 있는 상자라고 해도 들어 있는 것이라고는 외장 하드와 사진 두 장이 전부였다. 한 장은 중학교 때. 우리가 아직 지옥이 뭔지 알지 못했을 철없을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옥상에서 찍었던 사진이었고, 두 번째 사진은 산에 올라가서 시헌과 찍었던 사진이었다.
박시헌, 한우민. 강서진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기욱과 아슬아슬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뿐이었다. 서진은 시헌이 자신과 다르다고 하지만, 기욱은 그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물며 한우민 같은 건 그저 맞는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 같은 자식일 뿐이었다. 어느 부분에서 서진이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이해라고는 할 수조차 없었다.
“헤어졌으면 똑바로 버려.”
서진은 몇 번이나 시헌과는 이제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하지만, 기욱은 서진과 시헌이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조차 불편했다. 정말로 마음이 없다면 이런 사진 같은 걸 남겨 둘 리가 없지 않은가. 헤어진 상대가 가지고 있던 물건에 미련을 남겨 본 적이 없는 기욱으로서 서진의 행동은 말뿐인 실천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상자 안에 있는 사진을 봤을 때 얼마나 배신감에 화가 치밀었는지 서진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 마, 하지 마!”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온 서진이 몇 번이나 그만두라며 기욱에게 매달렸지만, 기욱의 손은 서진과 시헌의 사진을 찢어 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시헌을 여전히 사랑해서 사진을 남겨 둔 것은 아니다. 그때의 그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라는 걸, 기욱은 이해하지 못했다. 기욱의 손에서 사진이 찢겨 나갈 때마다 서진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을 맞춰 볼 틈도 없이 기욱은 서진을 침대 위로 끌고 올라왔다. 기욱에게 팔이 붙잡힌 서진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그런 서진을 막기 위해 기욱 또한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욱에게 맞은 상처들이 어떻게 몸을 아프게 하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시끄럽다며 틀어막은 입을 물어뜯고 몇 번이나 발길질했음에도 기욱은 멈추지 않았다. 술에 취한 기욱을 서진은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후, 씨발.”
입고 있던 셔츠로 입을 틀어막고, 멋대로 서진의 장롱 안에 있는 넥타이로 침대 헤드 쪽에 팔을 묶어 버린 뒤 서진과 간신히 거리를 벌린 기욱은 서진이 물어뜯어 피가 나는 손을 휴지로 대충 닦아 냈다. 서진과 한바탕한 덕분에 몇 시간 동안 진탕 마셨던 술이 확 깨며 정신이 들었다. 적당히 지혈한 기욱이 침대 위로 올라가 서진의 머리채를 잡고 앞쪽으로 꺾었다. 입을 막고 있던 셔츠가 약간 헐렁해졌다.
“눈 깔아, 강서진. 아래 보라고. 흉터 또 하나 만들어 줄까? 어? 작작 안 해?”
왼쪽 쇄골 아래로 나 있는 흉터를 본 서진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기욱에게 맞는 것 이상으로 몸에 남은 상처는 서진의 마음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서진은 여전히 기욱을 강하게 노려봤다.
“죽어.”
“…….”
“죽으라고! 이, 소시오패스 같은 자식!!”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박기욱은 정말 미쳤다. 보통 사람이 여기까지 하면 양심의 가책이나 감정의 변화라도 있어야 할 텐데 기욱은 그런 감정을 마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타인의 일처럼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이 왜 자신을 이렇게 미치도록 원하는지 서진으로서는 이해할 방법도, 도리도 없었다.
평소보다 거친 반항에 서진의 얼굴과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 눈에 보이는 곳은 될 수 있으면 손을 대지 않은 기욱이지만 서로의 감정이 극에 달한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침대 헤드에 묶어 놨던 넥타이를 풀어 주는가 싶던 기욱은 더욱 강하게 서진의 팔을 다시 묶었다. 다음 날의 출근 같은 건 신경을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손목이 끊어질 것만 같은 아픔에 몇 번이나 그만해 달라고 사정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끅, 끅… 윽… 흑….”
“읏, 강서진…….”
어울리지 않은 무척이나 애틋한 목소리로 서진의 이름을 부른 기욱이 손가락을 넣으며 서진의 안을 강제로 넓혔다. 한두 번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가는 느낌이 들음과 동시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욱의 페니스가 들어왔다. 기욱은 아프다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베개의 시트 끝을 이빨로 물며 끅끅대는 서진의 허리를 잡아 깊숙이 밀어 넣었다.
“허윽, 어흑…!!”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했던 반항도 지금 와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발끝과 허벅지, 다리 아래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해 머리끝까지 박기욱이라는 존재가 서진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페니스를 넣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더욱 괴로웠다.
“살려… 줘요. 잘못했어요… 아악, 악! 움직이지 마! 제발.”
머리를 침대에 박은 서진이 고개를 흔들며 그만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기욱의 숨소리, 사소한 말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서진의 몸과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왔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라 그런지 유독 민감해진 서진이 감당하기에 오늘 기욱의 페니스는 너무나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아악!”
서진은 한 번도 기욱과의 관계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기욱의 페니스는 점점 발기하며 딱딱하게 서진의 안을 찔렀다. 강서진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기욱의 안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감정이 들었다. 있는 힘껏 밀던 손에 힘이 풀어지며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듯 몸을 내주는 서진을 볼 때면 기욱은 오히려 안심됐다. 기욱에게 강서진이란 신기루 또는 모래와 같았다. 한 주먹 가득 펐을 때 느껴지는 그 기분이 전부였다. 손을 펴고 눈을 뜨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바닥으로 떨어져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모래였다. 그렇다면 더욱 꽉,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쥐면 그만이었다.
“아으윽!! 아악! 으으읍!”
기욱이 침대 밑으로 떨어진 셔츠로 서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쇄골에 난 흉터를 혀로 핥는가 싶더니 이내 이빨을 세워 강하게 자국을 냈다. 마치 그때의 기억들을 상기시키듯 서진의 온몸이 거침없이 떨렸다.
“아윽… 하아, 으….”
“강서진, 설마 갔어?”
기욱이 서진의 페니스를 툭툭 건드렸다. 기욱에게 뺨을 맞거나 몸을 맞았을 때보다 더 아팠다. 그 고통은 입으로 내뱉는 것 이상으로 괴로웠다. 몸이 아닌 마음 깊숙한 곳을 후벼 파는 듯한 괴로움에 서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기억에 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아무리 말을 해도 서진에게 기욱은 눈과 귀를 모두 막은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발, 하으윽….”
노골적으로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찔렀다. 갈 곳 없는 몸이 허공으로 거칠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머리가 벽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묶었던 팔을 풀어 줬다고는 하지만 이미 반항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뒤늦게 오는 술기운에 온몸이 다 어지러웠다. 그르렁거리며 사정을 한 기욱은 수도 없이 자세를 바꾸며 몇 번이나 서진을 탐했다.
“하응, 응… 읏… 으응….”
“강서진, 서진아. 일어나.”
기욱의 손등이 잔뜩 부푼 서진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을 흘리면 눈가가 쓰라렸다.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욱의 허벅지 위에 올라간 서진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의식이 끊기는 서진을 붙잡으려 하듯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귀두 끝을 살살 긁었다.
“하윽, 윽… 으읏!”
갑작스러운 자극에 서진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사정 직전에 달하자 기욱은 보란 듯이 입구를 막으며 서진을 좀 괴롭혔다.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되니 서진은 머리가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다.
“잘못했어요. 제가… 으윽… 잘못했어요.”
“뭘?”
“다, 아흐윽… 다. 하으, 으… 다….”
팔을 목에 건 서진은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언제쯤 이 시간이 끝이 날까, 박기욱은 얼마나 더 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놔야 속이 풀릴지, 이 터널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다음 날, 서진이 정신을 차린 건 해가 중천에 뜰 오후 무렵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 경보음 때문이었다.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참을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던 서진은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뜬 채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디뎠다.
“허윽…….”
땅에 발이 닿자마자 서진은 침대의 매트를 붙잡으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창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밖의 자동차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린 서진은 거의 바닥을 질질 기다시피 해 침실에서 거실로 나왔다. 기욱은 없었고, 거실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박기욱이 치우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은 뒤 밤과 아침 사이에 온 연락들을 확인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서윤에게서 온 연락이 가장 먼저 서진의 눈을 사로잡았다.
「서진아~ 오빠 새벽에 들어왔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오전 6:12
보아하니 서진이 기절하듯 쓰러진 뒤에 집에 들어가긴 한 모양이었다. 답장을 보낼 기운조차 없었던 서진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은 채 맨바닥에 웅크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웅크린 바닥은 무척이나 차고, 아팠지만 무엇 하나 서진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밤새 너무 울어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맨바닥을 뒹구는 서진의 눈에 선반 밑에 들어가 있던 소주병 조각이 들어왔다. 손가락 마디보다 조금 큰 조각은 기욱이 청소를 할 때 찾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팔을 뻗어 병 조각을 가지고 온 서진은 진지하게 손목 근처로 가져다 댔다.
어차피 자신을 찾는 사람은 없을 테니 손목을 그으면 되지 않을까? 더 큰 한 방을 노릴까? 아니, 아예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버릴까? 별의별 생각들이 서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서진은 병 조각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하하, 으흑… 끄윽…….”
너무 울어서 눈물은 더 이상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났다. 퉁퉁 부어 쓰라린 눈에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마치 물기가 가득한 수건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만약 제가 죽는다면 박기욱은 과연 슬퍼해 줄까? 죽는 게 복수가 될까? 죽음은, 그 사람에게 복수가 될 수가 없었다. 그저 억울함에 한이 받친 서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 * *
다음 날, 오전에 병원에 출근한 서진은 아침부터 온갖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오자마자 마스크를 눌러썼다고는 해도 서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과 얼굴은 퉁퉁 부었지, 그나마 수술복 사이로 보이는 팔에는 잔상처들을 치료한 흔적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한눈에 봐도 정상적인 몰골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하늘 같은 4년 차라 감히 말을 걸지 못하는 레지던트도 서진의 비정상적인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연태가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야, 강서진. 너……. 괜찮냐?”
“응.”
“도대체 퇴근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주변을 둘러보던 서진이 마스크 안쪽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마스크를 내리니 입술에도 피가 몰려 퉁퉁 부어 있었다.
“술 마시고, 좀. 싸웠어. 왜?”
“아, 아니. 혹시 무슨 일 있었나 해서.”
“없어.”
다시 마스크를 올린 서진은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몇 시간 뒤 오후에 출근한 서윤이 서진의 소식을 듣고 놀라 뛰어오긴 했지만, 서윤의 호들갑을 제외하면 서진이 상처투성이로 출근한 것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후우….”
당직이었던 서진은 밤새워 먹을 음료수를 뽑기 위해 로비로 내려갔다. 멀리 서진의 모습을 발견한 우민이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게 눈 들어왔다.
“강서진!”
없는 죄책감이라도 느끼라며 보란 듯이 출근한 서진이지만, 딱 한 사람 우민만큼은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서진은 일부러 못 본 척 등을 돌려 우민을 피했다. 걸음을 멈추며 당연히 서진이 올 거라고 생각했던 우민은 이상하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서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료수를 품에 안으며 한참 전에 진료가 종료된 외래진료실까지 와 버린 서진은 복도 쪽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비상등 외에는 거의 불이 켜지지 않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야.”
“…….”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우민의 목소리에 서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우민은 그런 서진을 놓칠 리 없다는 듯 붙잡았다. 우민에게 손목이 잡히자 깜짝 놀란 서진이 다른 쪽 품에 안고 있던 음료수를 떨어트렸다. 요란한 캔 소리가 바닥을 시끄럽게 울렸다. 음료수 캔을 주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진은 몸을 반쯤 숙인 채 우민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뭐 해 안 줍고?”
바닥에 캔을 두고 제사라도 지낼 생각인가? 우민의 반박에 서진은 그제야 콜라 캔을 집었다. 차마 돌리지 못한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도망 다녔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진은 우민의 시야에 닿지 않도록 손을 몸 안쪽으로 모았다. 아무리 근무 장소가 달라도 같은 과인 서진이 이렇게까지 상처투성이로 출근을 했다는 사실을 우민이 모를 리 없었다. 언젠가 우민이 알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서진은 적어도 얼굴과 몸에 있는 상처의 흔적이 옅어지고 난 뒤에 만나고 싶었다. 한쪽 면이 찌그러진 콜라 캔을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말야, 도대체 술 먹다가 시비가 붙어서 소주병을 깼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 하하, 그러게요.”
아무래도 과에서 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장난스러운 듯한 말투를 보니 박기욱이라고는 의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서진은 차라리 이 편이 나을 거라는 판단에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술버릇이 어쩌고 했던 우민의 표정에 어둡게 그늘졌다. 차마 가볍게 말을 꺼낼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서진은 그제야 우민이 했던 말이 자신의 등을 돌리기 위한 수법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 그 얼굴…….”
“싸워서 그, 그런 거예요.”
“팔은 어떻게 변명할 건데?”
우민이 양 손목에 테이핑을 한 서진의 한쪽 팔을 잡아 올렸다. 서진의 팔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당히 손목이 아파서라고 핑계를 대면 끝날 일이었지만, 우민은 그런 얄팍한 수의 변명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서진은 우민에게 잡힌 손목이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미안하다는 듯 우민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을 내려놓았다.
“박기욱이지?”
“…….”
서진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기욱이냐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참 싫었다. 우민이 그 이름을 꺼냄과 동시에 기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몸을 떨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 하나 반병신 만들어 놓고도 죄책감이 하나 없는 기욱이 우민은 무척이나 싫었다. 애당초 박기욱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씨발 새끼.”
저게 어딜 봐서 술 먹고 싸운 사람의 몰골이란 말인가?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출근을 한 건, 결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욕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우민에게 박기욱은 욕을 하는 것조차 아까운 쓰레기 자식이었다. 금방이라도 기욱을 찾아가 한 방 먹일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에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반나절 지나 좀 가라앉긴 했어도 여전히 부어 있는 서진의 눈가가 다시 시뻘겋게 변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민이 뭘 생각하는지는 서진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서진은 자신으로 인해 또다시 누군가 다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았다. 박시헌도 그랬는데, 눈앞에 있는 한우민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결코 없었다.
“하지 마세요.”
“야.”
“그냥……. 저만 참으면 되는 거니까.”
힘없이 허공에 뜬 서진의 손이 우민의 허리를 안았다. 우민의 손이 서진의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우민의 가슴에 반쯤 얼굴을 묻은 서진은 비상등의 조명에 의해 반사되어 영롱한 빛을 내는 회색의 바닥을 보며 눈물을 참았다. 기욱과의 관계는 단 한 번도 쌍방향으로 이뤄진 적이 없었다. 눈을 질끔 감았다. 박기욱에게 맞으며, 기절할 때까지 당했던 것은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병원에 출근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이, 이런 거. 하루 이틀 일도……. 흐윽….”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마치 누군가 목에 칼을 집어넣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있던가? 서진에게 기욱은 한 번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참아 왔던 수도꼭지를 강제로 돌린 것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흐으윽… 흐윽… 끄윽….”
우민을 위로하기는커녕, 서진은 우민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괜찮지 않다.
* * *
점심을 먹고 의국으로 돌아온 연태는 구석에 앉아 있는 서진의 옆에 커피를 탁, 하고 올려놓았다. 이어폰을 낀 채 건들지 말라는 포스를 잔뜩 풍기며 집중하고 있던 서진이 흠칫 놀리며 고개를 살짝 뒤로 했다.
“커피 사 오라며. 안 마실 거야?”
“아, 어.”
서진이 이어폰을 빼며 연태가 사 온 커피를 만지작거렸다. 연태는 얼음이 절반 이상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그에 비교해 보기만 해도 더울 것 같은 뜨거운 커피를 홀짝인 서진은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
“왜 그래?”
비어 있는 서진의 옆자리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연태는 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밖에 남지 않은 컵에 서진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부었다. 이렇게 빼앗아 먹을 거면 처음부터 큰 걸 시켜 먹든지, 사 오지 말든지. 서진은 반밖에 남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사수하듯 책상 안쪽으로 옮겼다.
“파일 날렸어.”
“복구 안 돼?”
“모르겠다.”
키보드를 밀어낸 서진은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짜증을 냈다. 서진을 대신해 마우스를 빼앗은 연태가 파일을 만졌지만, 복구는 힘들 것 같았다. 연태는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고 교수님이랑 하는 그거지?”
“응.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서진은 책상 위에 있는 탁상 달력을 툭툭 건드렸다. 작은 달력 안에는 온갖 펜으로 빼곡하게 일정이 써 있었는데, 글씨체가 다 달라서 누가 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서진에게 빼앗은 커피 또한 순식간에 마신 연태는 뚜껑을 열어 얼음을 으득으득 씹어 먹었다.
“아 참, 우리 학술제 날 무슨 행사 하나 더 하는 거 알아?”
“아, 그 심포지엄? 원래 K대에서 하기로 한 거 뭐, 옮겼다면서, 대충 들었어. 뭔 같은 날에 행사를 두 개나 해?”
이미 반쯤 포기한 서진은 책상에 팔을 괴며 마우스를 깨작거렸다. 파일을 날린 건 짜증이 나지만, 요 근래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 어지간한 일에는 스트레스조차 받지 않았다. 까짓거 집에 안 가고 새벽에 작업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제 과 행사도 벅차 죽겠는데 다른 과 행사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서진은 반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성의 없이 중얼거렸다.
“알 게 뭐야. 그런 거.”
“근데 좀 의외네.”
“뭐가?”
“난 네가 한 교수님이나 박 교수님 팀에 들어갈 줄 알았거든. 못해도 최 교수님?”
“박 교수님이나 최 교수님이나 그게 그거잖아.”
박기욱이나 그 밑에서 일하는 최규건이나, 서진이 보기에는 별반 다를 건 없었다. 하물며 이런 일에 있어 우민이라고 크게 차이가 나는 않았다. 서랍을 뒤적거린 연태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초콜릿을 꺼내 뜯었다.
“그 둘 얘기는 하지도 마라. 지긋지긋하다.”
그놈의 라인, 누구 밑에서 일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지 서진이 느끼기에 그런 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었다. 누구 교수님이랑 친하냐에 따라 보이지 않는 대우가 있긴 하지만, 이젠 그냥 다 지겨울 뿐이었다. 연태가 초콜릿을 반절 뜯어 서진에게 건넸다.
“먹을래?”
“어. 줘, 당 떨어진다.”
서진이 초콜릿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던 중 저도 모르게 연태의 손을 쳤다. 툭, 하고 알루미늄 비늘이 뜯긴 초콜릿이 바닥에서 다시 한번 반으로 쪼개졌다. 아, 하는 연태의 탄식이 나오기도 전에 서진이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을 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연태가 깜짝 놀라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야야! 그걸 왜 또 주워.”
“아니…….”
그러게. 왜 떨어진 걸 주워 먹으려 했던 걸까? 무의식중에라도 자연스럽게 먹으려 했던 서진은 한숨을 쉬며 초콜릿을 옆쪽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연태가 결국 다시 일어나 서랍에서 새 초콜릿 하나를 꺼내 서진에게 건넸다. 저놈의 자식은 초콜릿을 얼마나 숨겨 놓고 있는 건지, 초콜릿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새거 먹어라. 새거.”
“병 걸리겠다.”
“바닥에 떨어진 거 주워 먹으려는 너보다야 백번 낫다!!”
서진은 연태의 잔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단걸 먹은 게 꽤 오래전이었던 것 같았다. 순식간에 초콜릿 하나를 다 먹고 손가락에 녹은 초콜릿까지 핥아 먹고 있는 서진에게 1년 차 레지던트 하나가 다가왔다. 인턴 때 거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의사라 아직 서진과는 데면데면했다.
“저기…….”
“왜?”
“박 교수님이 찾으시는데요.”
박 교수라는 말에 서진이 알루미늄 호일을 구기며 쓰레기통에 버린 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노골적으로 못 들은 척하는 서진을 본 연태가 한숨을 쉬며 대신 대답했다.
“누구?”
“치프요.”
책상 밑으로 휴대폰을 여니 기욱에게 전화가 산더미처럼 와 있었다. 전화를 안 받은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일하다 보면 안 받을 수도 있지, 기욱의 집착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서진이 휴대폰을 구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할 거야?”
“가야지 뭐,”
“천천히 있다가 와!”
연태가 가는 김에 쉬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치프는 서진이었지만, 서진이 해야 할 일의 절반 이상을 연태가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진이 연태에 대해 눈을 감아주는 것도 몇 번 있으니 사실상 위아래를 구분해야 할 의미는 없었다.
* * *
의국을 나온 서진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축 처진 몸을 질질 끌고 연구실로 향했다. 그날 이후 기욱은 외부 일 때문에 며칠 동안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욱에게 맞은 상처들은 많이 나았지만, 그래도 흔적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비밀번호를 끝까지 누르기도 전에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들어와.”
복도에 가만히 선 서진은 머리 위에 있는 CCTV를 흘끗댔다. CCTV라도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않아 몰골이 휑한 서진과 달리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기욱은 드물게 정장 차림이었다.
“용건 없으면 돌아갈게요.”
“너 언제 집에 들어갔어?”
“신경 꺼요.”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하루 이틀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기욱에 의해 난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는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 한편이 칼로 후벼 판 듯 아팠다.
“세미나 날, 다른 거 없지?”
“세미나 날 뭐가 더 있어요. 없어요.”
서진은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기욱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날 다른 행사가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장소도 다를뿐더러 과도 다른 서진이 그쪽 행사에 참여할 일은 없었다. 아니면 또 다른 일을 말하는 건가? 아무렴 자기중심적인 기욱의 말은 때때로 의도를 알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다. 기욱은 할 말 다 했으면 가 보겠다며 몸을 돌리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서진의 팔에는 가까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희미한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욱은 여전히 서진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세미나만 해.”
“알아듣게 설명해요.”
“다른 데 가지 말라고.”
“뭐……. 아마도 그렇겠죠.”
그날은 세미나 진행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텐데 다른 데 가서 일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서진은 기욱의 경고를 별 시답잖은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며 한 귀로 흘려들었다.
“용건 이게 다면 가 볼게요.”
“어딜 가?”
여전히 팔을 놓지 않은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균형을 무너트렸다. 안 그래도 지쳐 있었던 서진은 힘없이 기욱 쪽으로 쓰러졌다. 벗어나려고 해도 작정이라도 한 듯 힘껏 안은 기욱에 서진은 반쯤 포기한 채 기욱에게 안겼다. 커튼이 걷힌 창문 너머로 따스한 햇볕이 서진과 기욱의 몸을 적셨다. 맑은 가을 하늘, 빌어먹게 좋은 날씨에 다른 곳도 아닌 병원의 연구실에서 가운 차림으로 연인도 아닌 남자에게 안겨 있어야 한다니 참으로 최악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뭐가 좋은 걸까? 서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욱은 새벽에 샤워하고 대충 말려 푸석푸석해진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샴푸 바꿨어?”
“비누로 감았거든요?”
서진은 노골적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는 기욱에 인상을 찌푸렸다. 보통 사람이 여기까지 싫어하면 싫어한다는 자각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박기욱은 마치 강서진이라면 뭐든 좋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기욱의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서진은 기욱이 도대체 자신의 어디에 이렇게 끌리는지 이해가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허리를 안는 손에 힘은 풀어졌지만, 기욱은 도통 서진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자세로 안겨 있는 것도 일이 분이지 계속되니 서진도 부담스러웠다. 고개를 슬쩍 들자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리며 엄지로 바싹 마른 입술 끝을 문질렀다. 원래부터 피부가 흰 편이긴 했지만, 서진의 입술은 오늘따라 유독 더 창백했다. 반항할 틈도 없이 입술을 덮치며 두꺼운 피부가 서진의 마른 입술과 입안을 축축하게 적시고 들어왔다. 서진의 입안에서는 연구실에 오기 불과 몇 분 전에 먹었던 초콜릿과 커피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꼼꼼히 핥아 대는 기욱과 달리 서진은 입을 벌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네킹에 키스하는 것 같은 이상한 상황이 한동안 연출됐지만, 기욱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서진을 소파에 앉힌 기욱은 그렇게 몇 번이나 서진의 입술을 탐했다. 기욱과의 불편한 키스보다 서진은 기욱이 끝까지 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난데없이 머리채를 잡아당긴 기욱이 몸을 옆으로 돌며 다리 사이로 서진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욱의 힘으로 머리가 눌린 서진은 눈을 위로 치켜뜨며 기욱을 노려봤다.
“변태 새끼.”
“박히는 게 좋아?”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허리 근처로 올렸다. 신은 참 무심하지, 이런 날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라도 와야 하는데 말이다. 차마 끝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던 서진은 눈을 질끔 감으며 기욱의 벨트를 푼 뒤 천천히 바지를 내렸다. 벽돌에 하는 거나 다름없는 키스를 하면서 느끼기라도 한 건지 드로우즈를 내리자 기욱의 페니스가 툭 튀어나오며 서진의 입술을 근처를 건드렸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기욱은 제 페니스를 손으로 쥐며 서진의 입안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으읍…….”
“박히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해.”
“흐으… 브읍….”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서진은 과연 기욱이 펠라만으로 멈춰 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펠라를 하면, 그걸로 만족을 못 해 쑤셔 박고 싶은 게 박기욱이라는 사람의 심리였다. 서진과 했던 뻣뻣한 키스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번엔 기욱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제 페니스를 쥐며 혀를 움직이는 서진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럴 때면 혹시라도 끝까지 하지 않을까 놀란 서진이 몸을 움찔거린 채 눈물을 머금으며 저를 노려보는 그 순간이 그렇게 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매달리는 강서진은 기욱이 보기에 애처롭기보다 미치도록 야했다. 서진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미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지만, 기욱은 서진이 미쳐도 괜찮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만 바라보는 강서진을 가질 수 있다면, 강서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것쯤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후우…. 너 내가 몇 번이나 내 팀에 들어오라고 했잖아.”
“읍, 윽. 뒤에서 말 나오는 건 저도 싫거든요!”
잠시 입술을 뗀 서진이 고개를 들며 한마디 했다.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의 입술을 덮었다. 불과 바로 전에까지 제 페니스를 핥던 것과 이런 식으로 키스를 하고 싶을까? 속 안에서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이 흘러나왔지만 서진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기욱의 페니스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 가라앉을 줄을 몰랐고, 서진은 다시 숨을 고른 뒤 커다랗게 부푼 페니스를 입안에 머금었다.
말이 나와서 싫다라, 참으로 그럴듯한 변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한우민 팀에도 안 들어간 걸까? 제 행동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욱은 그런 서진이 참으로 같잖았다.
“많든 적든 말은 나와.”
“으읍… 누구 때문에…! 당신이 그런 짓만 하지 않았어도…… 우윽….”
서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기욱이 머리를 잡고 서진의 입안으로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숨이 막혀 헛구역질하는 서진을 무시한 채 제 본능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것은 서진의 말투였다. 왜 강서진은 이 지경이 되면서도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을 모르는 걸까? 포기를 모르는 건지, 반항하다가 심하게 당하는 게 취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으윽… 우윽….”
“네가 GS에 가면! 박시헌이랑 놀아날지 어떻게 알아!”
외과에 지망한 강서진을 신경외과로 바꾼 건 박기욱이 한 짓이었다. 그러나 기욱은 3년도 더 된 일로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는 서진이 우스웠다. 움직임이 거칠어지면 질수록 입안이 기욱의 미적지근한 액체로 가득 차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정말로 숨을 꽉 막아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욱… 윽… 그만…!”
“후, 서진아….”
기욱이 서진의 입안에 끝내 사정을 했다. 입안이 억지로 매워지는 것 같은 불편한 기분에 서진이 그만 놓아 달라며 기욱의 허벅지를 때렸지만 기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입안에 있는 페니스가 울렁일 때마다 서진의 몸도 움찔거렸다. 코를 찌르고 뇌를 자극하는 기욱의 정액 냄새에 서진은 머릿속으로 현기증이 났다. 헛구역질하려는 서진의 목을 붙잡아 얼굴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입안과 바깥쪽으로 희멀건 정액이 연핑크색의 입술과 조화를 이루며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으윽… 으븝….”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작은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혀 발버둥을 쳤음에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입안에 있는 정액들이 전부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기욱은 서진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거칠게 놓았다.
“캑캑… 으윽… 이제…!”
소파 밑으로 떨어지다시피 한 서진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연신 헛구역질했다. 이미 삼켜 버린 정액이 섞인 희멀건 타액이 바닥을 정신없이 적셨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미칠 것 같았다. 바지를 살짝 올린 기욱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서진이 걸치고 있던 가운을 강제로 벗겨 던졌다.
“잠깐….”
반항할 틈도 없이 서진의 팔을 잡고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서진을 끌어당겼다. 서진을 내동댕이친 뒤 그 위에 올라탄 기욱의 손은 이미 서진의 가슴과 엉덩이를 주무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고 같은 방 안에서 서진은 짐승 같은 남자를 향해 몇 번이나 반항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강제로 다리를 벌리고 한두 번의 애무 끝으로 참을 수 없다는 듯 흉악하게 부푼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아윽, 아으읍….”
“강서진.”
“아, 아악….”
“사랑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혀를 감아올리는 기욱은 몇 번이나 서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당신의 감정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당신은 모른다.
* * *
일이 끝난 서진은 병원 근처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가 있으라는 지섭의 말에 알겠다며 자리를 잡고 있긴 한데, 고깃집치고 가게의 메뉴판 가격이 심상치 않았다. 일행이 오면 시키겠다는 말로 밑반찬이랑 물만 먹는 것이 눈치가 보일 무렵 비에 반쯤 젖은 지섭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서진은 기다렸다는 듯 의자 위로 지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미안. 미안. 늦었지.”
“아뇨, 밥 사 준다는데 기다려야죠.”
“그래. 금방 들어가 봐야 되긴 하는데. 아직 주문 안 했지? 먹고 싶은 거 시켜.”
비가 많이 오는지 지섭은 우산을 접어 넣으며 옷에 묻은 물을 털어 냈다. 그 사이 메뉴판을 보던 서진이 진짜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그렇게 말하시면 막 시켜요?”
“어어, 맘대로 시켜.”
목이 마른지 물을 마시는 지섭에 서진은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고기 안 먹은 지 꽤 됐는데, 서진으로서는 횡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가게도 지섭이 정했겠다, 서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 마구 주문을 했다.
“물회 2개랑요, 꽃등심 2인분, 특수 모둠 2인분이랑 참이슬 2병 해서 주세요.”
“푸웁, 야…….”
“아, 혹시 부담이세요?”
“어. 아니야. 괜찮아. 시켜!”
지섭의 말에 서진은 그렇게 해 달라며 메뉴판을 넘겼다. 어제저녁도 대충 때우고, 아침에는 새벽에 누가 시켰는지 모를 식은 치킨 몇 개를 주워 먹고 난 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진은 돌이라도 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진은 고기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어느 정도 배가 찼을 무렵 서진은 물 대신 소주를 마시며 잔을 내려놓았다. 다시 근무로 돌아가 봐야 한다는 지섭은 술에 손을 대지 않았고, 서진이 시킨 소주 두 병은 사실상 서진 혼자 마시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부탁할 게 뭔데요?”
말을 꺼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되묻는 서진에 지섭이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밑반찬과 고기를 입에 넣었다. 지섭과 사적으로 친하긴 하지만, 다시 근무로 돌아가 봐야 할 정도로 무리를 해 시간을 내 고기를 사 먹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서진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미안, 나 27일 날 행사 좀 도와주라! 너 발표 시간에는 안 늦게 최대한 맞춰 줄게.”
여기저기 시간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아 결국 서진에게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서진은 얼마 남지 않은 소주를 따라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날짜가 변경됐다고 해도 그렇지, 같은 날 행사를 2개나 잡는 사람들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진짜로?”
“처음부터 도와줄 생각이었어요. 이렇게 얻어먹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요?”
서진이 거절하면 고기를 핑계로라도 매달릴 생각인 건 안 봐도 뻔했다. 괜히 인상 찌푸리며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알겠다고 하고 먹을 거 먹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서진은 지나가던 직원을 다시 붙잡았다.
“꽃등심이랑 물회 하나씩 더 주세요. 아, 그리고 소주도 한 병 더.”
“야야, 너…….”
“왜요?”
“아니다. 먹어라. 먹어.”
아예 본전을 뽑기로 작정을 한 듯 주문을 해 대는 서진의 모습에 지섭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서진은 새 고기를 올리며 밑반찬을 입에 넣었다.
‘세미나만 해.’
익은 고기를 입에 넣던 중 서진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연구실에서 했던 기욱의 말이 서진의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다. 기욱의 그 말뜻은 뭐지? 서진은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도와줄 수 있는 거 맞지? 괜히 그때 가서 안 된다고 그러면 가만 안 둬 너.”
“알았어요. 제가 또 약속 하나는 확실하잖아요. 인턴 때부터 봤으면서 뭘 그러시나.”
“능청스러운 자식.”
여전히 기욱의 말이 불편하게 서진의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서진은 모르는 척 술과 고기를 먹는 데 집중을 했다.
뭐, 언제는 박기욱의 말을 제대로 들은 적이 있던가.
* * *
연구실 의자에 앉은 기욱은 팔짱을 낀 채 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자료를 넘겨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요 몇 주간 기욱의 머릿속은 병원장인 태익과 한 대화로 심히 혼란스러웠다. 기욱의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휴대폰 벨 소리였다. 규건에게 알아서 내려갈 테니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전화는 기욱의 심기를 좀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발신자를 확인한 기욱은 화를 가라앉히며 전화를 받았다.
― 무슨 일입니까? 병원장님.
― 이형진이 와 있네.
― 이형진? 그게 누굽니까?
의자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운 기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생처음 듣는 이름임에도 태익이 저렇게 말하는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욱이 아는 사람 중에 이형진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 김 의원 세컨드 집사. 자네한테 보여 줬던 사진 있지 않나? 그거 그쪽 애들이 시켜서 찍은 거야.
― 씨발, 그걸 지금 말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 나라고 이 실장이 직접 나설 줄 알았나?
태익이 억울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기욱은 다리를 꼰 채 책상에 놓여 있는 펜을 돌리며 전화를 계속 받았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떻게 병원에 온다는 겁니까?
― 김남정 복지부 장관이 외부에서 데려온 경호 인력 중에 있다고 하네.
― 경호는 이쪽에서 하기로 한 거 아닙니까?
― 그 인간이 워낙 완고해서 어쩔 수가 없는 거 알지 않나. 어쨌든 심포지엄 쪽은 내 어떻게 해 볼 테니까. 강서진은?
펜을 내려놓은 기욱은 책상 앞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가까이 가지고 왔다.
― 뭐, 세미나 준비로 정신없을 겁니다. 그보다 이런 얘길 왜 저에게 해 주시는 겁니까?
― 같은 편이지 않나. 자넨 이걸로 나한테 빚진 걸세.
태익이 먼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기욱은 빳빳하게 세운 머리끝을 살짝 건드리며 벽 한쪽에 걸어 뒀던 가운을 걸친 뒤 연구실을 나왔다.
* * *
오늘따라 유독 사람들도 많고, 정신이 없는 병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기욱은 서진이 있을 만한 곳을 돌아다녔다. 그 사이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서진은 기욱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돌아다닌 끝에 병동 근처로 돌아온 기욱과 연태가 몸을 부딪쳤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기욱은 반대편으로 향하는 연태를 보더니 후다닥 다시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 연태를 불렀다.
“강 선생!”
“네?”
분명 엘리베이터에 탔을 기욱이 밖에 나와 있자 연태가 당황하며 몸을 돌렸다.
“강……. 아니 강서진 봤어?”
“서진이…… 아.”
짧은 시간 복도에 정적이 퍼졌다. 서진과 친한 연태는 미묘하게 서진이 기욱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진에게서 특별한 전달은 없었지만, 서진의 위치를 알려 줘서 좋아질 게 없다고 연태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연태는 모르는 일이라며 태연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는데요.”
“진짜 몰라?”
“네. 못 봤어요.”
“제길.”
기욱은 귀찮게 됐다며 비상계단 쪽으로 등을 돌렸다. 서진이 문자나 연락에 제때 답을 안 하는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걱정이 들지 않지만, 오늘은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응급의학과 심포지엄이 있는 회의실 근처로 향했다.
“강서진, 아오.”
단톡에 연락 좀 받으라며 공지까지 쓴 기욱이 복도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운을 입은 기욱이 돌아다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기욱은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남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마침 태익에게서 사진이 한 장 날아왔다.
“뭐야?”
이형진이라는 사람의 사진이었다. 이제 와서 이런 사진을 보낸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다. 마침 건너편 복도에 유독 지나가는 의사들을 수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멀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태익이 보내 준 이형진이라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밍 좋게 어디서 본 것 같은 신경외과 인턴 한 명이 기욱의 옆을 지나갔다. 기욱은 어린 인턴의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저기…?”
“너, 신분증이랑 가운 좀 바꾸자.”
“네?”
“됐으니까 내놔.”
기욱은 멋대로 인턴의 가운을 빼앗아 바꿔 입었다. 뒤늦게 기욱의 얼굴을 눈치챈 인턴이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턴이 들고 있는 제 가운 주머니에서 도수가 없는 안경을 걸친 뒤 세운 머리를 최대한 헝클어트린 기욱은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눈을 바닥에 깔면서도 은근슬쩍 남자를 확인한 기욱은 가장 안쪽에 있는 사내가 태익이 말한 이형진이라는 걸 확신했다. 기욱은 일부러 휴대폰을 들고 있는 사내 한 명과 몸을 부딪쳤다. 남자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기욱이 남자보다 한발 앞서서 몸을 가리며 휴대폰을 주웠다. 휴대폰 화면에 있는 사진은 기욱과 마스크 차림의 서진이 있는 사진이었다. 기욱은 태연하게 휴대폰을 주워 남자에게 돌려줬다. 마치 바쁜 사람처럼 제 갈 길을 가려던 기욱을 이형진이라는 자가 불렀다.
“선생님, 혹시…….”
“야!! 최지훈!! 빨리 안 와?”
인턴의 이름이 최지훈이라는 걸 확인한 기욱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기욱이 달려가는 걸 본 그는 됐다는 듯 등을 돌렸다. 인턴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진호였다.
“너 도대체 어딜 갔다…… 어? 누구세요?”
“뭐?”
기욱은 머리를 대충 다시 올렸다. 안경과 작은 가운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박기욱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앞머리가 눈을 완전히 가려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던 진호는 기욱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바, 박 교수님?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유 교수님,”
뒤늦게 뛰어온 최지훈이라는 사람이 기욱의 가운을 대신 입은 채 울먹이며 다가왔다. 보아하니 기욱이 인턴의 신분증과 가운을 훔쳐 흉내 좀 낸 모양인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했는지는 진호로서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 강서진은? 안 보이던데.”
“어? 서진이요? 못 만나셨어요?”
“무슨 소리야?”
“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 교수님이랑 있었거든요.”
기욱의 기억이 맞다면 진호가 말하는 안 교수는 응급의학과 교수인 안윤성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말을 들은 기욱은 인상을 확 구겼다. 서진이 연락을 받지 않고 있을 때부터 수상하다고 눈치를 챘어야 했다. 진호가 말을 할 것도 없이 마침 타이밍 좋게 서진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남자들을 보아하니 아직 사진 속 인물이 서진임을 찾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병원 내부를 잘 아는 의사들은 남자들이 서 있는 정면이 아닌 뒤쪽 복도로 많이 다녔다. 보아하니 남자들은 이제 막 온 것 같은데, 괜히 강서진이랑 마주치게 내버려 둬서 좋을 건 없었다.
“그래서? 서진인 지금 어디 있는데?”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진호가 곤란하다며 말을 흐렸다. 기욱은 그런 진호의 끝말마저 손을 들어 자르며 복도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됐어.”
“네? 뭐가 되셨다는…! 아, 우리 애 옷이랑 ID카드는 주고 가셔야죠!”
진호가 말릴 틈도 없이 기욱은 순식간에 뒤쪽 코너를 돌아 버렸다. 기욱이 사라진 복도를 보며 진호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턴이 어떻게 하면 좋냐는 듯 진호를 빤히 바라봤다.
“내버려 둬, 저 인간 가끔 저럴 때 있어.”
옷은 나중에 알아서 돌려주러 오겠거니 생각한 진호는 인턴을 데리고 갈 길을 마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