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 의심
일이 끝나고, 사복 차림으로 병원을 나온 서윤을 본 서진이 손을 흔들었다. 서윤의 옆에는 가운 차림의 기욱이 서 있었다.
“누나!”
일부러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서진은 퇴근을 하는 서윤을 마중 나왔다. 기욱이 사복 차림의 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괜히 찔리는 것 같은 느낌에 서진이 잠시 긴장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기욱은 이내 다시 일을 하러 가 봐야 한다며 적당히 손을 흔들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서진은 모처럼 서윤과 저녁을 먹었다. 어차피 저녁에 기욱이 들어올 거라는 걸 안 서진은 서윤의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다. 기욱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욱이 그런 걸 거절할 사람이 아니는 걸 서진도 잘 알고 있었다. 11시가 좀 넘어서 슬슬 기욱이 퇴근을 해야 할 무렵에도 연락이 없었다.
기욱의 방에 있는 책상에 앉아 가져온 교재로 공부를 하고 있던 서진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거실로 나갔다. 마침 서윤이 기욱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응, 아……. 알았어. 아니야. 서진이랑 있어. 오늘 자고 간대. 응. 오빠도 잘 자.”
뭔가 통화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서진이 조심스럽게 서윤에게 다가갔다. 서진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서윤이 통화를 끊으며 깜짝 놀랐다.
“서진아, 왜?”
“매형이랑 통화한 거야? 온대?”
“그게 어……. 오늘 집에 못 들어온다네.”
“병원 일?”
당연하게 병원 일이라고 생각해 되물은 서진의 질문에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서윤의 안색이 살짝 어두웠다. 서윤의 말에 의하면 친한 변호사 친구의 사건의 자문을 도와주느라 그쪽 사무실에서 날밤을 새고 온다는 것이었다. 있을 법한 일이긴 하지만 서진은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는 기욱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기욱이 서진에 대해 불신이 가득하듯, 서진도 박기욱이라는 인물에 대해 있는 거라고는 불신뿐이었다. 당하는 서윤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도, 서진은 기욱이 그 변호사 친구를 거짓말로 팔아먹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이기도 했다. 박기욱이 수상했다.
“있잖아 누나. 자주 있었어? 그……. 변호사 일 봐주는 거?”
“어, 몇 번인가. 왜?”
“아니, 그냥.”
“누난 슬슬 잘 건데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어……. 공부 좀 더 하다 자려고. 역시 좀, 너무 안 하기는 그래서.”
“그래, 알았어.”
거실 불을 끈 서윤이 안쪽 침실로 들어갔다. 서윤이 들어가고 기욱의 방으로 들어온 서진이 문을 닫았다. 기욱의 책상에서 공부를 한 건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다. 조용히 문을 잠군 서진은 기욱의 책상 이곳저곳을 뒤졌다.
책상뿐 아니라 책장까지 구석구석 뒤졌지만, 특별하게 그렇다 할 만한 흔적은 찾지 못했다. 더 이상 뒤졌다가는 기욱이 눈치를 챌 것 같은 기분에 후다닥 방 안을 정리한 서진이 의자에 앉아 기욱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기욱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서진은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을 대비해 펜을 쥐었다.
* * *
서울에 있는 한 호텔의 중식당, 주말에 모처럼 시간이 맞은 세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러 왔다.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10분 정도 대기가 걸린 사이 서진과 기욱은 호텔 밖으로 나와 인근에서 담배를 피웠다. 툭툭, 담뱃재를 턴 서진이 기욱을 바라봤다.
“일주일 전쯤에, 저녁에요. ……23일.”
서진이 두 번째 담배를 입 근처로 가져다 대자 기욱이 손을 올렸다. 금방 들어가 봐야 된다는 뜻이었다. 서진은 입에 대지 않은 담배를 케이스 안으로 집어넣었다.
“23일이 왜?”
“집에 안 들어왔잖아요.”
담배 케이스와 함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서진이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이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서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기욱이 뒷목을 붙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별거 아니야.”
“무슨 일인데요?”
“강서진,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별거 아닌 일에 외박을 해요?”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는데.”
“당신은 나 한 번이라도 믿어 본 적 있어요? 똑같은 거죠.”
“서진아.”
두 사람의 식사 자리에 잘 따라오지 않는 서진이 나오겠다고 할 때부터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긴 했었다. 서진은 제 손을 붙잡으려는 기욱의 팔을 쳐 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야외였다. 기욱이 서진에게 맞은 손을 급하게 내려놓았다.
타이밍 좋게 유리문이 열리며 서윤이 얼굴을 내밀었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모양이었다. 서진은 기욱을 위아래로 훑으며 서윤이 있는 호텔 로비로 따라 들어갔다. 기다렸던 것만큼 식사는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기욱의 건너편에 앉은 서진은 입을 다문 채로 밥을 먹고 있었다.
밥을 먹는 서진에게 기욱과 서윤의 대화 같은 건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험으로 습득한 것이라고 해야 될까? 셋이서 식사를 할 때, 기욱은 서진이 관심을 주면 줄수록 묘하게 서진을 자극하는 행동들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서진은 그게 싫어 셋이 식사를 할 때 두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진. 강서진.”
기욱의 목소리에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기욱은 서진이 고개를 들기 무섭게 들고 있던 냅킨으로 서진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갑자기 다가온 기욱의 손에 어찌 할 도리도 없었던 서진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내 자신의 냅킨으로 남은 부분을 급하게 닦았다.
“묻히고 먹지 좀 마.”
“아, 네.”
서진이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거의 다 해서 상관은 없었지만, 서윤의 표정이 살짝 좋지 않았다. 서윤이 기욱의 옆에 팔짱을 끼며 기욱을 재촉했다.
“오빠,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어, 응.”
기욱이 팔짱을 풀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메인 식사를 마치고 서진은 두 사람 사이에서 입을 다물며 과일을 먹었다.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서진에게 기욱이 말을 걸었다.
“너 머리 좀 잘라야겠다. 앞머리가 그게 뭐야?”
“아, 어……. 그러려구요.”
눈가를 찌르는 앞머리를 서진이 옆으로 넘겼다. 서윤은 계속해서 대화 중간마다 서진를 걸고넘어지는 기욱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을 신경 쓰는 것치고는 그 정도가 조금 과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렇다. 아무리 옆을 보기가 어렵다고 해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서진을 바라보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서진이 제 동생이라고 해도 약간은 기분이 상한 서윤이 팔짱을 풀며 짜증을 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기욱이었다.
“오빠,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홀짝인 기욱이 서윤의 짜증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짜증 난 목소리를 들은 기욱은 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기욱이 느끼기에 식사는 평소와 같았다. 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이유 없는 짜증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는데?”
“왜? 오빠 진짜 몰라서 물어? 아무리 서진이랑 같이 밥 먹어도 좀 너무하잖아. 내가 말한 거 듣긴 했어?”
“그게…….”
서윤의 앙칼진 목소리에 기욱이 말을 흐렸다. 기욱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 와중에도 기욱은 입을 다물며 눈으로 서진을 흘기고 있었다. 서윤이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서진의 손등에 튄 물이 더 걱정됐다. 돌이켜보니 기욱은 서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서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한발 늦게 깨달은 기욱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서진의 사소한 행동들이 요즘 들어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참다못한 서진이 테이블 밑에서 기욱의 무릎을 찼다. 서진에게 무릎을 차인 기욱이 그제야 정신이 확 들었다.
“서진이, 곧 있으면 레지던트 끝나잖아. 심란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
“나도 그랬으니까. 병원에 남을지, 로컬로 갈지 고민 많이 했었어.”
“그랬어?”
서윤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서진과 기욱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실 서윤도 제 동생을 앞에 두고 질투를 하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에 한풀 누그러진 상태였다. 서진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매형한테 상담, 했었거든.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좀 심란하더라고. 그래서 그런 걸 거야.”
그런 상담 한 적 없지만. 솔직히 로컬로 빠질까 아니면 펠로우를 밟을까 고민을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서진이 다시 한번 기욱의 발을 꾹 밟았다. 기욱이 그제야 포크로 마지막 남아 있는 사과를 찍어 서윤에게 내밀었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어……. 미안해.”
입을 벌려 기욱이 주는 사과를 받아먹은 서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기욱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서윤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커피를 마셨다. 이상하게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기욱이 조금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말을 꺼냈다.
“서진이랑 셋이 해서 여행 갈까?”
“난 상관없는데, 서진이 시간 괜찮아?”
“맞춰 볼게.”
서진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는 듯 기욱이 멋대로 대답을 했다. 서진이 또다시 기욱의 발을 밟으려고 했지만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는 듯 기욱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서진의 발을 피했다. 서진은 기욱이 자신의 발을 피한 걸 확인하고 입술을 약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별로 여행 같은 거에 관심이 없지만, 안 간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알았어요.”
“주말쯤에 스케줄 확인하고 알려 줄게.”
그렇게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은 점심 식사가 끝났다. 서윤을 데려다준 뒤 서진은 기욱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서진과 기욱은 당직이었다. 서진은 일부러 운전석 쪽을 선점했다. 삐빅,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리자마자 서진은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는 서진을 본 기욱은 말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이제는 운전 실력이 많이 는 서진은 익숙하게 기욱의 차를 몰아 아파트를 나왔다.
“차 뽑을래?”
기욱이 말하지 않아도 서진의 월급 정도면 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괜찮은 차를 살 정도까지는 될 것이었다. 집값부터, 생활비의 전반을 기욱이 대 주고 있는 서진은 사실 제 월급을 절반 이상 써 본 기억이 없었다. 아파트 근처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서진이 핸들을 양손으로 쥐며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점심에, 왜 그랬어요?”
“뭐가?”
“……됐어요.”
서진이 입을 다물며 속도를 냈다. 점심을 먹을 때 서진도 기욱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감을 확신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서진은 그런 류의 시선을 알고 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은 그래, 마치 시헌이 자신을 보고 있을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박기욱과 박시헌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러나 시헌에는 기욱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적어도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이냐고 묻는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시헌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서진은 이제 와서 기욱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를 바랐다. 박기욱답지도 않을뿐더러, 이젠 그래서도 안 됐다.
* * *
시간상 멀리는 못 가고, 서진은 두 사람과 함께 경기도 인근에 있는 호텔로 갔다. 성수기가 지난 탓이라 호텔은 전체적으로 한가했다. 한가하다 못해 마치 전세를 낸 듯한 느낌이었다. 스위트룸이 있는 층으로 올라오기 무섭게 서진은 작은 방 쪽에 있는 침대에 누웠다.
“서진아 밖에 좀 구경하고 그래.”
커튼을 걷으며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던 서윤이 침대부터 찾아 엎드린 서진을 향해 잔소리했다. 잠바와 양말을 벗은 뒤 서진은 아예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직을 선 서진은 기욱의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차 안에서 공부를 했다. 괜히 호텔에 와서 어설프게 공부를 하는 그것보다 차 안에서 공부하고 호텔에서 잠이나 자자고 생각했다. 이불을 머리까지 눌러쓴 서진을 뒤늦게 본 기욱이 혀를 찼다. 기욱을 대신해 서윤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서진아, 같이 나가서 점심이라도 먹자.”
“됐어. 그냥 졸리니까 둘이 갔다 와.”
서진이 이불을 눌러쓴 채 몸을 뒤척였다. 일어날 생각이 없는 서진을 본 서윤과 기욱이 자기들끼리 떠들더니 결국 조용히 호텔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고 정적에 흐르는 방 안에서 이불 사이로 얼굴을 삐죽 내민 서진이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서윤은 놀러 와서 좀 밖도 보고하는 걸 좋아한다면, 서진은 그냥 호텔이라는 낯선 방 자체가 좋았다. 익숙하지 않은 방만으로도 충분히 놀러 온 듯한 분위기가 났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난번처럼 그런 일을 겪고 두 사람과 같이 뭔가가 할 수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약간 건조한 데다 춥긴 했지만, 이불을 눌러쓴 탓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품한 서진은 이내 곧 잠에 빠져들었다. 서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오후 무렵이었다. 푹은 아니더라도, 만족할 만큼 잠을 자고 일어난 서진은 방에 있는 암막 커튼을 살짝 걷으며 뜬 머리를 긁적였다.
스위트룸을 두리번거렸지만, 서윤과 기욱은 없었다. 약 세 시간 정도를 잔 듯싶었다. 저녁을 먹기도, 점심을 먹기도 모호한 시간대였다. 서진은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알았어. 나갈게.”
호텔은 생각보다 넓었다. 호텔 말고 밖으로 나가 식사를 한 두 사람은 막 호텔로 돌아와 호텔 주변의 정원을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진은 호텔 밖으로 나와 서윤이 말한 동상을 지나 정자가 있는 쪽으로 갔다. 투숙객이 많지 않아 정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서진을 발견한 서윤이 손을 흔들었다.
“서진아, 너 잠바는?”
“금방 올라갈 거 아니야?”
“그래도 춥잖아.”
“어……, 그러게.”
서진이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금방 올라갈 거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나온 탓도 한몫했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겨울이 다 와 가는 듯 밖은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치고 나와 있기에는 확실히 추웠다. 여름이 평생 안 갈 것 같더니 벌써 겨울이 오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기욱과 서윤이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들으려 했는데, 중간부터 솔직히 좀 춥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에취…!”
이내 서진이 재채기했다. 코를 훌쩍이는 서진에 기욱과 서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벤치에 앉은 서윤과 달리 서 있던 기욱이 입고 있던 코트를 서진에게 걸쳐 줬다. 서진의 눈에 서윤이 들어왔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나온 기욱과 달리 서윤의 잠바 또한 상당히 얇은 옷이었다. 챙겨 줘야 할 사람은 이제 막 나온 서진이 아니라 얇은 잠바를 입고 있는 서윤이었다. 서진이 기욱에게 받은 코트를 벗어 서윤에게 걸쳐 줬다.
“서진아, 너 입어.”
“됐어. 누나, 밖에 오래 있었잖아.”
서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기욱을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서윤의 어깨에 기욱의 코트를 걸쳐 준 서진은 먼저 가 있겠다며 호텔 쪽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서진을 붙잡으려던 기욱이 이내 서윤을 보더니 등을 돌렸다. 서윤은 서진이 걸쳐 준 기욱의 코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세 사람의 1박 2일 여행은, 코트 사건을 제외하면 별다른 일은 없었다.
* * *
가을 공기가 가득한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집 대신 아파트로 불려 나온 서진은 저녁 무렵에 잠시 들른 기욱과 몸을 섞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오피스텔을 따로 구해 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최근 들어 아파트로 불러내는 횟수가 잦았다.
“하… 읏….”
오늘따라 유독 민감한 서진은 자신의 손가락을 물며 신음을 참았다. 기계처럼 흔들리는 몸과 등 뒤로 기욱의 무거운 신음 섞인 공기가 흘러 서진의 몸을 자극했다. 움직임이 거칠어지면 질수록, 서진은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기욱이 입에 물고 있는 서진의 손가락을 치워 냈다.
“하응… 윽….”
손가락을 치우자 흘러나오는 신음과 동시에 기욱이 난데없이 움직임을 멈췄다. 금방이라도 갈 것 같았던 타이밍에서 멈춘 기욱 탓에 서진은 애매하게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이라는 게 자극의 동물이 맞긴 한 듯, 서진의 몸은 기욱의 거친 섹스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흐… 으읏….”
“강서진, 혼자 허리 흔들고 움직여.”
서진이 위로 올라타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가슴을 눌렀다. 밑에 깔린 채로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자세로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던 서진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페니스를 손으로 쥐었다. 아아, 걸치듯 박혀 있는 기욱의 페니스와 자신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 때마다 조금씩 잊혔던 자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 으응….”
기욱과 섹스를 할 때는, 그냥 다 잊고 하는 게 편했다. 싫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페니스를 잡고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기욱의 몸에 올라탈 때와 달리 애매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페니스에 서진은 미칠 것 같았다.
“흐읏, 읏….”
기욱은 석상처럼 꿈적도 하지 않은 채 서진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서진은 그런 기욱의 밑에서 어떻게든 사정을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안쪽에 들어간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페니스를 엉덩이를 움직이며 필사적으로 비볐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부족하다는 생각만이 서진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하으읏…….”
기욱의 페니스를 넣은 채 침대 사이에 공간이 생길 정도로 허리를 튕긴 서진이 제 손안에서 사정했다.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지자 자신의 안이 기욱의 것을 조였다 놨다를 반복했다. 기욱이 몸을 앞쪽으로 숙이자 안쪽 깊숙한 곳까지 페니스가 들어왔다.
“하윽….”
“부족하지?”
짜증이 나지만, 지금 서진의 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진이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줬으면 좋겠다. 서진이 기욱의 목에 팔을 두르며 기욱에게 부탁했다.
“해 줘요.”
“어떻게?”
“그냥. 막, 아무렇게나 제발…….”
사정했음에도 열이 가시지 않았다. 부족하다는 게 이런 건가? 남아 있는 열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기욱의 페니스가 자신의 안을 정신없이 쑤셔 주길 원했다. 서진의 앞머리를 넘긴 기욱이 서진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이제야 좀 강서진이라는 사람이 제 마음에 알맞게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넣어 줘요.”
“이미 넣었는데?”
“더, 윽… 깊숙이. 흐윽, 어떻게 좀…….”
서진이 허벅지를 비비며 필사적으로 기욱에게 애원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리를 벌리며 애무를 하는 서진이 기욱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술을 먹지 않은 서진이 언제 이렇게 적극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서진의 가슴을 쓰다듬던 기욱의 손길이 담배가 지나간 흔적이 남은 흉터에 닿았다. 서진을 눕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기욱이 경고하듯 입술을 뗐다.
“강서진 잊지 마.”
“…….”
“넌 내 거야. 알아들었어?”
기욱의 손톱이 흔적이 남은 서진의 흉터를 누르자 서진이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착하네. 착한 아이한테는 상을 줘야지.”
서진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은 기욱이 거친 소리를 내며 서진의 안을 정신없이 탐했다. 더 거칠게, 일부러 요란하게 허리를 흔드는 기욱에 서진은 기욱에게 안긴 채 평소보다 빠르게 절정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서진은 기욱의 몸을 탐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이 닿는 소리가 나며 엉덩이 안쪽은 물론 허벅지까지 기욱과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으윽… 아윽….”
눈가에 눈물이 고이며 정신없이 몸을 떨었다. 그만, 그만하자는 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거칠게 서진을 탐하고 있을 무렵 침대 옆 선반에 올려 뒀던 기욱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서윤이었다. 한 번 무시를 했더니 다시 전화가 왔다. 기욱은 서윤에게 이미 몇 시간 정도 늦는다고 거짓말을 해 놓은 상태였다. 계속되는 전화가 거슬렸던 기욱이 움직임을 멈추고 서윤의 통화를 받았다.
“어, 자기야.”
“하아… 으….”
휴대폰을 귀에 댄 기욱이 손가락 사이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눈치껏 서윤이라는 걸 안 서진이 이불을 입에 물며 숨을 참았다. 금방 끊을 것 같았던 통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마지막쯤 되고 나니 기욱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졌다.
“아니, 서윤아. 그건 아니고. 내가, 말이 그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야?”
“…….”
침대에 기절하듯 쓰러져 있는 서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기욱의 손이 멈췄다. 침대에서 일어난 기욱이 휴대폰을 어깨에 걸치며 침대 밑으로 떨어진 옷가지들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알았어. 뭐? 30분 안에 갈게. 서윤아 가서 이야기해. 서윤아?”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기욱은 전화가 끊긴 화면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서윤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을 만한 사람은 아닌데. 역시 결혼과 연애는 다르다는 걸 최근 들어 열심히 실감하는 중이었다. 조금은 정신이 돌아온 서진이 발밑에 있는 이불을 끌어와 몸을 가린 뒤 침대에 앉았다. 가슴 아래쪽부터 온몸이 아팠다. 기욱은 어느새 처음 왔을 때의 차림 그대로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좀 흐트러지긴 했지만. 기욱은 서진이 묻지 않아도 멋대로 입을 열었다.
“집에 가 봐야 돼.”
“어차피 갈 거였잖아요.”
거의 후반부이긴 했지만, 서진은 왜 갑자기 기욱이 섹스를 멈추고 다급하게 집에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서윤이한테 거짓말한 거 걸린 거 같아.”
“…….”
거짓말이 걸렸다는 말에 서진의 입이 굳게 닫혔다.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서진은 피곤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가방을 챙기는 기욱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사람이란 게 참 이상하다. 분명 서윤과의 연애는 기욱이 자초한 일일 텐데, 어느 순간부터 기욱은 서윤에게 목을 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서윤과의 화목한 가정 연기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 이유가 다분히 강서진 때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서윤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 기욱은 서윤이 아닌 강서진이라는 인물 자체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강서진과 박기욱의 관계는 정답이 없는 관계였다.
“알아서 해요.”
여태까지 그래 왔듯 기욱이 알아서 할 것으로 생각한 서진은 지친 몸을 바로 뉘이며 이불을 눌러썼다. 탁, 하고 불이 꺼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기욱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정적이 감도는 방 안에서 기욱에게 시달리느라 지친 서진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아파트에서 곧장 병원으로 출근한 서진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기욱에게 묻지 않았다. 사실 그런 걸 물을 만한 시간도 없었고, 잠시 볼일이 있어 지나간 복도에서 두 사람이 같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기 때문도 있었다. 기우겠거니 하고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있을 즈음 기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계단을 반쯤 내려온 서진은 2G 휴대전화에 온 기욱의 전화를 받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인 서진과 달리 당직인 기욱이 갑자기 서진을 불러낼 일은 적었다. 한 계단만 내려가면 지하철로 향하는 대리석 바닥이었다. 바닥에 발을 내딛던 서진이 별안간 내려왔던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유독 병원 앞 지하철역 입구는 계단이 많아서 짜증이 나는 곳이었다. 에스컬레이터라도 좀 설치를 해 주지, 다 내려온 계단을 힘겹게 다시 올라가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진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 ……넥타이핀 말하는 거 맞죠?
― 그래. 아파트에 있으니까 내일 줘.
― 그냥 직접 가져오면 안 돼요?
솔직히 귀찮았던 서진은 지하철 안쪽을 보며 혀를 찼다. 심부름도 이런 귀찮은 심부름이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깟 넥타이핀쯤 하루 이틀 없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그런 서진의 생각을 읽은 듯 기욱이 대답했다.
― 며칠 전에 서윤이랑 싸웠잖아. 그거 서윤이가 선물한 거야.
― 누나가요?
― 그래.
기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선물이라고 해도 하루 이틀 정도는 넘어갈 수 있지 않냐라는 생각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서진은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서윤의 갑작스러운 의심 때문인지 서진도 혹시나 싶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하철에서 등을 돌린 서진은 올라갈 계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끊어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뒤 계단을 올라가 역으로 나온 서진은 근처에 있는 택시를 잡아 아파트로 갔다. 기욱의 신용카드를 이용해 기본금을 결제한 뒤 아파트로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 바쁘면 이 주에 한 번 올 때도 있지만 썰렁했던 아파트는 몇 년 사이 그럭저럭 사람 사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도 썰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 기욱이 왔다 간 걸까? 아파트는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왔다 갔으면 넥타이핀 정도는 직접 찾아갈 것이지. 서진은 정리가 된 방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큰 방 침대 밑으로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자 기욱의 넥타이핀이 나왔다. 14K 넥타이 핀 끝에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딱 봐도 싸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화려한 넥타이핀은 박기욱이나 되니까 소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서진은 넥타이핀을 주머니에 챙겨 넣은 뒤 볼일이 끝난 아파트를 나왔다.
잠깐 들렀다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를 돌아 집으로 가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귀찮은 관계로 택시를 타고 새로 잡은 오피스텔 근처에 도착할 무렵에는 해가 뉘엿뉘엿해지며 주황색 노을빛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노을을 본 건 꽤 오랜만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서진은 5층 버튼을 눌렀다. 5층에서 문이 열리자 서진의 오피스텔이 있는 복도 끝으로 서윤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
연락도 하지 않고, 서윤이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서진이 혹시나 하고 입을 열자 서윤이 몸을 돌려 서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서윤이 맞았다. 서진은 서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서진아.”
“누나, 여기서 뭐 해?”
“그게……. 별일은 아닌데.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었어.”
방금 막 도착해 서진과 엇갈린 모양인지 서윤이 서진에게 전화를 걸려 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심하진 않았지만, 서윤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결혼하고 기욱과 싸운 모습을 많이 본 적은 없지만, 서진은 저런 서윤이 익숙했다. 서진이 서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재빨리 한 손으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일단 들어와.”
“고마워.”
오피스텔로 들어간 서윤이 거실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기욱은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싸운다고 해도 집에서 자도 상관없다. 서윤이 찾아온 타이밍이 살짝 미묘하긴 했어도 서진은 제집까지 찾아온 서윤을 쫓아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안해. 누나가 괜히 찾아왔지?”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아…….”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온 서진이 냉장고 문을 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는 거의 병원에서 먹거나 외식으로 때우는 서진의 오피스텔 안에 제대로 된 반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서윤의 눈치가 보였던 서진이 재빨리 냉장고 문을 닫았다.
“하하, 누나. 좀 이르긴 한데 나가서 저녁이라도 먹을까?”
“그럴까?”
“으, 응. 나가자.”
갑작스럽게 찾아온 서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할 만한 밑반찬도 없거니와 서진은 서윤에게 처참한 냉장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서진은 서윤과 함께 오피스텔 건너 블록의 식당가에서 고기를 먹었다. 기욱과 왜 싸웠냐고 물어보기도 그랬던 터라 끝내 기욱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서윤과 단둘이 먹는 식사에서 박기욱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한 뒤에는 더더욱 둘만 같이 있을 기회가 없었다. 고기를 먹고, 오피스텔로 돌아올 즈음에는 밖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역시 이르긴 해도 저녁은 저녁이었다.
거실 하나에 방 2개, 지난번 복층 오피스텔보다 조금 더 넓은 평수였다. 서진은 반쯤 열려 있는 침실 쪽을 손가락질했다.
“피곤하면 씻고 먼저 자. 난 공부 좀 하다가 잘게.”
“괜찮겠어? 내가 침대 써도?”
“바닥이나 침대나 다 똑같지 뭐. 공부 다 하고 이불 펴고 잘 테니까.”
“미안해. 갑자기 찾아와서.”
풀이 죽은 서윤에 서진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서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서진의 가슴이 아팠다. 우리 남매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다. 진짜 어른이란 뭘까? 애당초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어른이라는 건, 어린이라는 건 누가 정한 걸까?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서진이 세상을 경험하며 느낀 그 어떤 문제보다 어려웠다. 너무 어려워서 그 답을 정의하는 것조차 가늠이 서지 않을 지경이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난 누나 편이야.”
“고마워, 서진아.”
“응. 잘 자.”
서윤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서진은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바에는 아파트에서 가져온 기욱의 넥타이핀이 그대로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 뒀다가는 까먹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서진은 선반 안쪽에 넥타이핀을 올려 둔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남지 않은 시험에 날밤을 새운 서진은 마지막에 책상에 엎드려 한 시간 정도 잤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창문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새벽 네 시 사십 분, 여섯 시 반까지 출근인 걸 생각하면 조금 일찍 일어난 감도 있지만 여유롭게 씻고 나가면 딱 맞는 시간이었다. 서진은 눈을 비비며 샤워를 하고 나왔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은 뒤 고등학교 시절 책가방이나 다를 바가 없는 배낭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아, 넥타이핀.”
최대한 오후에 출근하는 서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나가려던 서진은 기욱의 넥타이핀을 잊은 걸 깨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넥타이핀을 뒀던 유리 선반 문을 열었으나 자리에 있어야 할 넥타이핀은 없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서윤이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하암, 서진아. 출근하려고?”
“응. 어……. 혹시 누나 어제 여기 있었던 거 못 봤어?”
서진이 이제 막 잠에서 깬 서윤을 앞에 두고 유리 선반 앞을 손가락질했다. 유리 선반 내부는 서윤이 서 있는 방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차마 자신이 찾고 있는 물건이 기욱의 넥타이핀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거기 뭐가 있는데?”
“아니야. 아무것도. 나 갈 테니까 좀 더 자.”
“잘 다녀와.”
하품한 서윤이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지체를 했다가는 늦을지도 몰랐다. 분명 선반 위에 둔 것 같은데, 아무렴 제 오피스텔에 가지고 온 것은 분명하니 어딘가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서진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다. 마침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바쁜 날이었다. 4년 차인 서진이 오랜만에 발에 불이 떨어질 정도로 뛰어다녔다면 할 말 다 한 셈이었다. 바쁜 건 서진뿐만이 아니라 펠로우나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박기욱을 봐도 일 이야기 외에 다른 말을 걸 틈조차 없었다.
기욱을 볼 때마다 말해야지, 해야지 해 놓고도 서진은 끝내 넥타이핀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거의 16시간 이상을 한 번도 쉬지 못한 서진은 4시간 전쯤에 출근한 동기 연태에게 뒷일을 맡긴 뒤 쓰러지듯 당직실에서 잠을 잤다. 눈을 뜨니 다음 날 아침이었고, 서진은 적당히 세수하고 씻은 뒤 연속으로 근무를 설 수밖에 없었다.
밤사이 기욱에게 전화가 와 있었지만, 2G폰까지 연락이 오지는 않아 특별히 답장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금방 얼굴을 볼 수밖에 없으니까. 서진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멀끔한 차림의 기욱이 아침, 신경외과 간의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갈아입지 않은 수술복과 정장 위에 대충 가운을 걸친 것을 봐 집에 들어갔다 온 것이 틀림없었다. 어제가 유독 바쁘긴 했지만, 아침에 하는 건 늘 그게 그거였다. 뒤쪽에 앉은 서진이 드는 생각이라고는 브리핑을 하는 펠로우 선생님의 옆에 서 있는 기욱이 마냥 부럽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집에 들어갔다 올 수 있다는 게. 교수의 특권이라면 그게 또 특권이었다.
어느새 서진의 차례가 됐고, 서진이 밤새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짧은 토론이 오가고 빠르게 주변이 정리됐다. 다들 각자 일을 하러 나가는 모습에 서진이 오늘도 고생 좀 하자며 구석에서 저 혼자 어깨를 풀었다. 그런 서진과 막 의국을 나가려는 기욱의 눈이 맞았다.
기욱의 차림을 본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확하게는 기욱이 가운 안에 입고 있는 흰 셔츠에 걸려 있는 넥타이 때문이었다. 기욱의 파란색 넥타이에는 며칠 전 서진이 제 오피스텔로 가지고 온 넥타이핀이 고스란히 걸려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서진의 팔이 내려갔다. 넥타이핀을 아파트에서 제 오피스텔로 가지고 온 기억은 있어도, 오피스텔에서 병원으로 가지고 온 기억은 없다. 설령 제 착각이라고 해도 서진은 어제 기욱에게 넥타이핀을 건네주지 않았다. 넥타이핀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어도, 상대에게 물건을 줬는지 주지 않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진이 복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기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이제 막 출근해 간호사 데스크의 간호사들과 잠깐 대화를 하고 있던 서윤이 얼굴을 내민 서진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기욱과 화해는 한 모양이었다.
서윤의 인사에 서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서진의 어깨 위로 정체 모를 손이 올라왔다.
“아, 깜짝아. 왜?”
“너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괜찮냐?”
“……아니, 그냥. 좀 그래.”
“괜찮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괜찮아.”
연태의 걱정에 어깨에 올라온 손을 옆으로 밀어낸 서진이 신경 쓰지 말라며 등을 돌렸다. 서진은 휴대폰을 열어 기욱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다른 교수님의 외래 진료 보조라 어제 같은 사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욱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기욱에게 문자를 보낸 뒤, 답장도 확인하지 않은 채 외래진료실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이번 주는 집에 들어가기는 힘든 듯싶었다. 외래 진료가 끝나기 무섭게 응급실과 외상센터를 번갈아 오가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서진은 밤 11시가 지나서야 간신히 30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것도 응급실에서 내려오려면 얼마나 걸리냐는 대답에 짜증이 나 30분 뒤에 내려가겠다고 소리를 친 뒤에야 간신히 만든 시간이었다.
환자의 CT를 보니 큰 문제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약간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이렇게 만든 시간이 아니면 오늘도 기욱과 대화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서진이 간신히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진이 전화를 걸기 무섭게 기욱은 전화를 받았다.
오전에 서진이 보낸 문자에 특별히 답장을 보내지 않은 기욱은 서진의 전화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왜?
― 연구실이에요?
― 어.
― 저 지금 올라가요.
― …….
서진이 기욱의 연구실로 향하는 사이 휴대폰 너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기욱의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정의 대답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주로 귀찮고, 성가실 때 기욱은 침묵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이 상태가 지속한다면 최소 이틀은 더 병원에서 먹고 자야 하는 서진은 지금이 아니면 결코 제대로 된 시간이 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지던트 생활 3년 6개월 동안 몸으로 구르고 배운 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서진이 잡은 엘리베이터가 내려와 문이 열리자 기욱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 지금 온다고?
― 가고 있어요.
― 알았어.
기욱 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기욱도 서진이 오지 말라고 안 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애써 거절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기욱의 연구실이 있는 층에서 내린 서진은 곧장 연구실 문 앞 도어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서진이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귀신같이 기욱이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들어와.”
목소리를 낮춘 기욱이 턱을 살짝 까닥였다. 노골적으로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니 복도 끝에서부터 서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서진은 기욱의 옷차림을 살폈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침의 정장 대신 가운 안에 수술복을 받쳐 입고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쉬지 못하고 일을 한 건 기욱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좀 쉬나 했더니 서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기욱이 수술모에 눌린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지난번에 어떻게 됐어요.”
“지난번에?”
“누나랑 싸운 거요.”
“아, 그거. 잘 해결됐어.”
수술복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찾아오겠다길래 무슨 엄청난 소리를 하나 했더니 지난번 서윤과 있었던 일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거라면 전화로도 잠깐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커다란 책상에 팔을 괸 기욱이 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서진의 용무가 서윤이 했던 의심에 관한 말 말고 더 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주먹을 꽉 쥔 서진이 기욱의 정장이 걸려 있을 라커룸을 흘끗댔다.
“넥타이핀 어디서 났어요?”
“내 것?”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도 서진의 시선을 따라 옆에 있는 라커룸을 바라봤다. 서진에게 아파트에서 넥타이핀 좀 가져달라는 심부름을 시킨 날 기욱은 서윤과 전화로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다. 그 사실을 일일이 서진에게 말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중에 서윤의 말을 들어 보니 서윤이 서진의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기욱은 서진이 자신에게 서윤을 재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살짝 기분이 나쁜 상황이었다. 지금은 너무 본론에서 떨어진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기욱이 다시 말했다.
“네가 강서윤한테 준 거 아니야?”
“누나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어.”
서진의 질문에 기욱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대답이 한 템포 느려졌다. 서윤이 서진의 집에서 머문 건 맞지만, 서진은 서윤에게 기욱의 넥타이핀을 준 적이 없었다.
“제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해요.”
“너 지금…….”
“출근할 때 가져가려고 거실 선반에 넥타이핀을 올려 뒀었어요. 아침에 보니까 없었구요.”
“너 미쳤어? 그걸 왜 거기다 올려 두는데?”
기욱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언성이 올라갔다. 서진은 그런 기욱에게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서진이 넥타이핀을 둔 곳은 선반의 안쪽으로, 그것도 액자에 가려져 있는 뒤쪽이었다. 서진은 서윤이 혹시라도 우연히 그걸 발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찾을 수 없는 곳이라구요!”
“미치겠군.”
책상 위에 올라온 팔로 얼굴을 짚었다. 기욱은 긴말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싸운 것도 좀 그랬다. 그 정도의 말싸움은 두 사람이 사귈 때도 항시 있었다. 기욱은 그런 사소한 말싸움이 서윤이 제집이 아닌 서진의 오피스텔까지 갈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윤이 서진의 오피스텔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윤과 기욱은 금방 화해를 했다. 그날, 두 사람의 말싸움은 그 정도로 아주 보잘것없는 감정싸움이었다.
서윤이 어떻게 의심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챌 것이 틀림없었다. 기욱을 바라보는 서진의 검은 눈동자가 떨렸다. 보다 못한 기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에게 다가갔다.
“서진아. 강서진.”
“건들지 마요.”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의 손을 애써 내치지 않은 채 주먹을 쥔 채로 기욱을 노려봤다. 서진의 어깨에 올리려던 기욱의 손이 저도 모르게 가슴 아래로 내려갔다. 경멸, 혐오. 서진의 눈동자에 비친 단어를 읽어 낸 기욱이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이상했다. 요즘 들어 제가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강서진이 이상한 건지 느끼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서진의 눈빛이 기욱은 한 번도 상처로 와 닿은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서진의 시선은 분명하게 기욱에게 상처로서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에 기욱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감정을 추스르는 것 이상으로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당신 잘못이에요. 누나 앞에서 그런 짓을 하니까……. 의심하는 거잖아요!!”
“내가 뭘 했다고.”
“정말 본인이 뭘 했는지 몰라요? 밥 먹을 때나 놀러 갔을 때도 나만 봤잖아요.”
서진은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다. 달라지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서진의 감정은 늘 한결같았다. 단 한 번도 박기욱이라는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고, 사랑할 마음조차 없었다. 최근 들어 그런 기욱의 시선이 바뀌었다.
본인은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서진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시선이 명확해지면 질수록 서진은 소름이 돋았다. 서진은 그런 시선을 알고 있다. 서진을 온몸으로 따라오는 시선은 어린 시절부터 시헌이 자신을 바라봤던 시선과 닮아 있었다.
“내가 너만…… 봤다고?”
“나 사랑해요?”
“뭐라고?”
“나 좋아하냐고 묻는 거잖아요.”
“하하, 강서진 너 지금……. 네가 나한테 그런 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기욱은 기욱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질문하는 사람이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 아니, 반대인 게 정상이잖아. 왜 이런 질문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서진에게 받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좋아해? 사랑해? 서진이 기욱에게 했던 질문은 박기욱이라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한결같이 했던 질문들이었다. 사람이란 참 쉽다. 조금만 잘해 주면 그게 진짜인 줄 알고 마음을 준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그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건 강서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 한 명 눈앞에 있는 강서진은 달랐다. 서진은 한 번도 기욱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기욱은 그런 서진을 곁에 두고자 끝없이 노력했다.
강서진의 약점인 강서윤을 곁에 뒀고, 그것조차 힘들 때는 서진에 대한 집착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강서진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제 동생 박시헌과 놀아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근데 왜? 정말로 서진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건 기욱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여태껏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의문들이 기욱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치고 있었다. 비틀거리던 기욱이 서진의 앞에 있는 소파에 주저앉아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널…….”
“그럴 리가 없죠.”
서진은 제 질문에 충격을 받는 기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욱이 자신을 사랑한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이 기욱에게 받은 상처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기억들이 아니었다.
서윤이 원하는 것은 어머니와 비슷한, 행복한 가정에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양날의 검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윤이 행복해지면 행복해질수록, 서진의 인생은 불행해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는 하나, 서진도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박기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욱이 서진을 원하는 이상 서진은 그것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구요.”
“재촉하지 마.”
“…….”
“나한테 질문한 건 너야.”
간신히 서진의 말을 잘랐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진을 향한 집착이 한 번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란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에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자신이,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강서진에게? 아니, 애당초 자신의 행동이 사랑이 맞긴 했던 걸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당연히 당장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욱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불현듯 어린 시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 나 좋아하냐?’
한우성.
왜 그 이름을 잊고 지냈는지는 모른다. 이제는 그 얼굴, 목소리조차 기억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 자신을 향해 했던 그 말이 서진의 목소리와 함께 겹쳐 떠올랐다. 한우성은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질문만 잔뜩이고 제대로 된 답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서진의 휴대폰에 연락이 왔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언제쯤 내려와 줄 수 있냐는 간호사의 연락이었다. 서진이 5분 안에 내려가겠다며 짧게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어, 어쨌든. 알아서 잘 해결해요.”
알아서라는 말을 강조한 서진은 더는 미룰 수 없다며 도망치듯 연구실을 나갔다. 서진이 나가고 홀로 남겨진 기욱은 남아 있는 일을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커다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기욱이 눈을 감았다.
‘네 사랑은 좀 무섭거든.’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땐 그냥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가볍게 흘려 넘겼던 말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욱을 괴롭게 만들었다. 눈을 뜬 기욱이 아무것도 없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평소와 같은 멀쩡한 손이 기욱의 눈에는 무척이나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떨리는 건 손뿐만이 아니다. 가슴이, 머리부터 시작해 온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뜨겁게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뜨거움은 멈출 줄을 몰라 기욱을 점점 태워 들어가고 있었다.
“강서진, 강서진…….”
서진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강서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다는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이 서진에게 느꼈던 감정은 질투, 그리고 분노였다. 강서진이 자신만 봤으면 좋겠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볼 때면 짜증이 났다. 제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집착하고, 또 집착하면 언젠가 서진이 자신만을 볼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사실 서진 연배의 남자를 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기욱이 원하는 건 강서진이라는 사람이지 강서진 또래 남자의 몸이 아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면서까지 서진을 곁에 두고, 서진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
“……내가. 강서진을.”
이게, 사랑이라니 믿을 수 없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서진에 대한 자신의 모든 행동이 명확해졌다. 기욱은 강서진을 곁에 두고 싶었던 것보다, 강서진의 마음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 감정을 주체할 수 있는 거지? 기욱은 연구실을 나간 서진을 붙잡지 못한 것부터 바로 후회가 들었다. 벌떡 일어난 기욱은 서진이 통화를 하며 내려간다고 했던 응급실로 서둘러 내려갔다. 마침 타이밍 좋게 환자를 보고 올라온 서진과 마주칠 수 있었다. 갑자기 복도에서 나타난 기욱에 서진이 깜짝 놀라 물러났다.
“왜, 왜요?”
“얘기 좀 해.”
기욱이 주변에 지나가는 의료진들의 눈치를 보며 서진을 따로 불러냈다. 이야기는 연구실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또 할 말이 있었던 줄 몰랐다. 누가 봐도 급하게 나온 것 같은 기욱의 모습에 서진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서진은 기욱과 함께 지하의 비상계단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시간이라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벽에 기댄 서진이 팔짱을 끼며 말없이 기욱을 바라봤다.
“할 말이 뭔데요?”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을 하는 건, 시헌만의 전매특허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뒤늦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관성 없는 행동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버릇이 시헌이 아닌 기욱에게도 있을 줄 몰랐다. 서진이 다가오는 기욱을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그래서요?”
“…….”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는 말로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세요.”
참으로 기분이 이상했다. 박기욱에게 저런 말을 들으면 서진은 아무 느낌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서진은 기욱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애당초 기욱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을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기욱의 입에서 좋아하느니,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서진은 가슴 한구석이 울컥했다. 기욱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럴 리가 없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싫어하는데,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 한마디로 정당화시키려는 기욱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여태까지 서진이 견뎌 와야 했던 치욕과 인내의 감정들은 결코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당화될 수 없다.
명확한 건 그래, 그 말을 입에 꺼낸 기욱은 서진에게 한 행동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있지 않은가. 서진의 인생은 뒤틀려 있는 삶이었지만, 서진은 시헌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배웠고, 우민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잘 모르겠어.”
“뭐가요?”
“내가 널 좋아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고.”
이런 건, 박기욱답지 않다. 박기욱은 분명 매력적이고,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헌신적인 남자였다. 그에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재능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있을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한때는 서진도 기욱을 동경했던 적이 있었다. 차라리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게 사랑 때문이라고 그러면 어떻게든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을 말하기에는 모든 게 너무 늦었다. 서진은 기욱의 멱살을 잡으며 얼굴을 맞댔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서윤이 행복하길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제 발에 족쇄를 채운 건 서진뿐 아니라 기욱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서진과 기욱이 같이 책임을 져야 할 문제였다.
“누나한테 똑바로 해.”
“…….”
“만약에 이혼하겠다느니 이상한 소리 하면 죽어 버릴 거야.”
“강서진…!”
인상을 찌푸리는 기욱과 거리를 벌린 서진이 먼저 계단을 하나 올라갔다. 못 할 거 같아? 서진이 기욱을 평생 저주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몇 번이고 다짐한 것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박기욱의 행동들은 잘못된 사랑에서 나온 본인도 모르는 비뚤어진 애정이 틀림없었다. 박기욱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다.
“본인이 책임진 연기는 끝까지 해.”
“…….”
“그럴 생각으로 나한테 준 거잖아. 돈.”
박기욱은 모른다. 서진의 지갑에는 십 년도 더 지난 수표가 들어 있었다. 10만 원짜리 수표, 그것을 받는 순간 모든 게 시작됐다. 박기욱의 신용카드를 제 돈처럼 쓰는 서진이라 해도 그 돈만큼은 결코 쓸 수가 없었다. 강요는 안 한다. 기욱이 서진에게 돈을 주며 했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박기욱이 몰아붙였다고 해도 결국 기욱과 식사를 하고 돈을 챙긴 건 서진 개인의 의지였다.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이건 박기욱과 자신이 같이 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풀이 죽은 기욱을 뒤로한 서진이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철문을 닫은 서진이 문에 기대 얼굴을 가렸다.
기욱에게 당한 담배의 상처가 아려 왔다. 서진은 여전히 박기욱이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기욱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분명 한 방 먹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뒷맛이 찝찝하기만 했다. 아아, 최악이다.
“담배 피우러 가야겠다.”
감지 못한 앞머리를 헝클어트린 서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최대한 태연하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지금은 그냥, 미친 듯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 *
기욱의 연구실, 자리에 앉은 지 두 시간이 넘었지만, 기욱은 좀처럼 일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기욱은 멍하니 책상에 앉아 팔을 괸 채 답지 않은 사색에 빠졌다. 강서진이 독해진 걸까? 아니면 기욱이 물러진 걸까? 죽어 버리겠다는 서진의 말이 그렇게 충격으로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요 며칠간 제가 도대체 어떻게 일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평소에도 필요한 말 외에 말을 별로 하지 않았던 기욱의 말수가 더욱 줄어들자 다들 기욱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저녁 무렵 담배를 피우러 올라온 옥상에서 규건을 만났다. 담배 대신 사탕을 물고 있는 규건은 줄담배를 피우는 기욱을 흘끗거렸다.
“박 교수님.”
“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괜한 질문을 한 걸까? 담배를 피우던 기욱의 미간이 약간 움츠러들었다. 그나마 오랫동안 같이 선배 후배 하고 일해 왔던 규건이니까 간신히 이런 질문이나 할 수 있다. 다른 의료진들은 기욱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말조차 못 붙이는 것이 현실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짧아진 담배를 끈 뒤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쓰레기통에 버렸다. 담배를 한 대 더 피우려 하자 규건이 말렸다.
“그러다 진짜 폐암 걸려요.”
의사들은 딱 두 가지 분류가 있다. 담배의 위험성을 알고 담배를 피우지 않은 채 일을 하거나, 혹은 위험성을 알고도 담배를 피우거나. 이미 기욱이 연속으로 다섯 개비가 넘는 담배를 피우는 걸 목격한 규건은 그 이상은 나중에 해 두라며 손을 저었다. 저도 담배를 피우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도라는 게 있었다. 말이 5개비지 규건이 없을 때 기욱이 담배를 더 피웠을 것을 고려한다면 멈춰야 하는 것이 맞았다. 불을 붙이려던 기욱이 규건의 충고를 듣고 담배를 집어넣었다. 사실은 제가 먹으려 했던 것이지만. 규건은 기분이 나쁜 기욱에게 서비스인 셈 치며 커피를 건넸다.
“그래서 무슨 일이예요?”
규건이 준 커피를 반 모금 마신 기욱이 다시 규건에게 커피를 돌려줬다. 미안하기도 했고, 워낙 줄담배를 피운 탓에 커피 맛인지 담배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가자마자 이부터 닦아야 할 것 같은 찝찝함이었다. 병원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기욱답지 않게 감상에 빠졌다.
‘죽어 버릴 거예요.’
아아, 강서진. 대체 널 어떻게 해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어째서 매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걸까. 어르고 달래 보기도 하고, 때로는 욕을 하기도 하며 화도 많이 냈다.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서진은 한 번도 기욱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기욱이 충격을 받는 것은, 서진이 제 앞에서 죽어 버리겠다는 소리를 한 것보다 자신이 서진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늘 삶과 죽음을 목격하고 손끝에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제 앞에서 죽음 같은 걸 논하다니. 기욱은 서진을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차가운 난간을 손으로 쥔 기욱이 고개를 들어 규건을 바라봤다. 몇 년 전에 결혼한 규건은 두 살짜리 애 아빠였다.
첫날밤에 애가 생긴 규건을 능력자라고 떠드는 것과 달리 결혼 5년 차가 다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자식 소식이 없는 기욱은 혹시 건강 상태가 좋지 않냐는 소문까지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실 젊은 시절을 문란하게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치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애가 잘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아직은, 그러니까 기욱은 굳이 자신을 닮은 자식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이 늘 들었다. 그래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서윤을 임신시키면 강서진이 조금 더 자신을 돌아봐 줄까? 이젠 임신의 이유조차 강서진이 되어야 할 정도로 기욱의 삶은 알게 모르게 서진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개 같네! 진짜.”
“네?”
갑작스러운 기욱의 욕설에 사탕이 없는 막대를 씹으며 기욱이 남긴 캔커피를 마시고 있던 규건이 깜짝 놀랐다. 기욱이 신경 쓰지 말라며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결혼하니까 좋냐?”
“저보다 먼저 결혼한 사람이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서 좋냐고.”
“한창 좋을 때는 지났죠. 와이프보다는 아들 보는 맛으로 산다고 말하면 좀 미안하긴 한데.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사랑이 뭘까.”
“선배, 뭐 잘못 드셨어요?”
“그런 거 아니라고.”
기욱은 괜히 말했다며 난간에서 몸을 뗐다. 정말이지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기욱도 자신이 이 나이를 먹고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기욱에게 사랑이란 당연하게 받는 건 줄 알았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환자를 수술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고, 강서진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 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잘못되었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을 때마다 회의감이 들었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강서진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박기욱은 박기욱이 아니었다. 착잡한 기분이 계속된 채로 기욱은 연구실에서 잠을 잤다.
* * *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기욱은 다음 날 오후 무렵 남 병원장의 연구실로 불려 갔다. 기욱은 한동안 조용했던 남 병원장의 호출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태익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 기욱의 몰골을 훑어봤다.
“요즘 신경외과 의사들이 자네 눈치 보느라 바람 잘 날이 없다던데. 뭐가 우리 박 교수를 불편하게 했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제발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물론, 기욱은 저런 말이 입에 발린 소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벌써 2주째 집에 들어가지 않은 기욱은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서 가장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기욱은 태익이 주는 커피 잔을 살짝 기울여 홀짝였다. 혀끝에 닿은 커피의 맛이 쓰기보다는 마취라도 당한 것처럼 얼얼했다.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서정수, 기욱도 상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난 교통사고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커피를 별로 마시지 못한 기욱과 달리 커피를 반쯤 비운 태익이 다리 사이로 깍지를 끼며 기욱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남태익 병원장, 그는 철저하게 기욱의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욱보다는 기욱의 아버지 편에 가까웠다. 사실상 반평생을 충성했던 사람이 눈에 보이는 명목상 그의 아들을 챙겨 주는 것은 특별하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가 쓰러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자네가 쓰러지면 신경외과에는 누가 남나?”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원장님 말씀대로 제가 요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 휴가라도 내서 쉬고 오는 건 어떤가? 서윤이에게는 내가 잘 이야기해 주지. 일편단심인 것도 좋지만, 바람 쐬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나.”
태익의 노골적인 발언에 기욱이 미간을 구겼다. 일편단심이라,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도 기욱은 서윤에게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만약 진짜 그랬다면 서진을 그렇게까지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기욱이 일편단심인 건 어쩌면 서윤보다는 서진이 아닐까 싶었다. 기욱은 거의 억지로 마시다시피 남아 있는 커피를 비웠다. 무슨 커피가 이렇게 쓴 건지 한약을 먹어도 이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해 제 입안이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태익이 내놓은 커피가 쓴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욱은 커피를 더 마실 거냐는 태익의 제안을 손을 저어 한사코 거절했다. 여기서 더 이상 마셨다가는 방금 넘긴 커피마저 넘어올지도 모를 정도로 구역질이 났다.
“시답잖은 말씀 마시고, 본론이나 말씀하시죠.”
“자네, 혹시 이렇게 생긴 USB를 알고 있나?”
태익이 휴대폰을 만지자, 기욱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도 좋다며 고개를 까딱이는 태익을 본 기욱이 휴대폰을 열었다. 익숙한 USB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의 USB는 기욱이 잘 알고 있는 디자인이었다. 관심이 없다는 듯 원목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엎은 기욱이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평범한 UBS 아닙니까?”
“죽은 서정수가 파기한 자료의 사본이 들어 있는 USB일세. 원본이 파기되었으니 사실상 그 USB에 있는 자료들이 진짜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 고위 정치인은 물론 정관계 인사들의 비리 파일이 들어 있는 해외 외장 하드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자네가 가지고 있지?”
용건부터 말하랬더니, 직설적으로 들어오는 태익의 질문에 기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쓴 게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 한 잔 더 준다고 할 때 마실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성가시게 꼬아 놓긴 했지만, 기욱이 그 계정으로 외장 하드 사이트를 들어가 확인을 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뭔가 수상한 자료라고는 생각했지만, 기욱도 설마 그런 자료일 거라고 생각하고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정치인과 경제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중에는 기욱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기욱은 고가의 소파에 몸을 뒤로 기대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천장 조명이 유독 기욱의 눈을 따갑게 찔렀다.
“남 병원장님. 꽤 화려한 여성 편력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태익이 원래부터 기욱에게 이렇게 남다른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전 병원장이자 이사장의 아들로서의 예우는 해 줬지만, 기욱과 태익은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개인적인 일로 독대를 할 만큼 친하지 않았다. 태익이 기욱을 불러내기 시작한 것도 쓸데없는 일로 살살 달랜 것도 서정수 환자의 사망 사건 이후부터였다. 병원장실 내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맴돌았다. 이마를 짚었던 손은 이미 아래로 내려가 기욱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피곤한 듯 눈을 붙이고 있는 기욱의 태도는 무례하기 그지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질 필요성은 없었다. 기욱이 반쯤 눈을 감으며 흘러가는 정적을 즐기고 있을 무렵 책상을 흔드는 요란한 진동 소리가 났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치우고 몸을 앞으로 하니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태익이 눈에 들어왔다. 또 무슨 사진을 보낸 것인지. 기욱이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열었다.
“…….”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흐릿한 사진을 몇 번이나 확대해 본 기욱이 입술을 짙게 깨물었다.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 밑으로 더욱 짙은 그늘이 졌다. 검은색 옷차림에 모자와 병원에서 그대로 하고 나온 것 같은 마스크를 눌러쓰고 있는 서진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기욱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기욱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감기에 걸린 서진이 퇴근을 하면서 유독 중무장을 하고 온 날이 있었다. 사진이 찍힌 건 기분이 나쁘지만, 서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운이 좋다면 좋은 것이었다. 문제는 당장 옷차림이나 체형만 보고 강서진임을 눈치챈 기욱과 달리 태익이 사진 속 인물이 강서진인지 알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태익은 휴대폰을 쥐고 있는 기욱의 손등을 손가락질했다.
“남매를 둘 다 가지는 기분은 어떤가?”
“…….”
태익의 말에 기욱은 의자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거의 없는 손톱이 살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해도 서진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진을 보고 금방 강서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사진이었다. 발뺌할까? 모르는 척할까? 짧은 시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손에 힘을 푼 기욱이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으며 크게 숨을 골랐다.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 확인 좀 합시다. 이 사진, 병원장님이 찍으신 겁니까?”
“나도 건너 전해 받은 걸세. 누군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받았지.”
“사진 속 인물이 강서진이라고 말하신 건?”
“아직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고 약속하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내가 자네 아버지 밑에서 몇 년이나 일한 줄 아나. 까놓고 말하자면 어느 쪽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 사실이지 않나? 그에 비교하면 자네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고. 이건, 서정수 환자의 H/O일세.”
기욱은 태익에게 받은 서류 뭉치를 성의 없이 손에 쥐었다. 죽은 서정수의 병력은 전부 알고 있다. 그에겐 J대 병원 외에 그렇다 할 만한 병력은 없었다. 눈치가 보여 태익이 줬던 자료를 넘기는 척이라도 할 생각으로 손에 잡히는 페이지를 읽었다. 이건, 그의 병력이 아니었다.
“서정수의 별명이 뭔지 아나? 집사야 집사. 평생을 VIP 옆에서 모셔 온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배신을?”
“김 의원이 초선 시절에 말이야, 사촌이 교통사고를 크게 냈거든. 사촌이 사고를 낸 아이가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서정수의 아들인데, 평생 병원에 신세를 저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어.”
“그래 보이네요.”
서정수가 아닌 아들의 차트라는 걸 안 기욱이 고개를 약간 들며 대답했다. 꼼꼼하게 볼 필요도 없이 한눈으로 봐도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김 의원은 사죄의 의미로 서정수 환자의 병원비와 간병비 등을 비교적 최근까지 전부 내줬다. 도저히 단순히 사고를 묻기 위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기욱이 아들의 차트를 보며 들은 말에 의하면 그게 서정수가 김 의원의 집사로 활동하게 된 계기라고 했다.
“문제는 말야, 그 아들이 최근에 사망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촌의 교통사고라는 게 일부러 낸 사고라는 게 밝혀진 거지.”
“일부러?”
“20살 때 사고 쳐서 낳은 자식에 여자는 도망가고, 친척이라고는 8촌을 뒤져도 없는 고아에 머리 잘 굴러가는 H대 출신. 써먹기 딱 좋은 말 아닌가? 뭐, 그 사실을 알고 폭로를 하니 뭐니 하면서 고생은 있는 대로 했지.”
“원장님, 김 의원이랑 친하시지 않습니까?”
“나도 무너질 배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눈은 있다네. 자넨 정말로 서정수가 나를 치려 했다고 생각하나?”
툭, 하고 차트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서정수가 타이밍 좋게 밖으로 나와 있는 남태익을 치려 했던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설마 다친 채로 차를 끌고 왔을 줄은 몰랐지만, 계획대로였다면 가까스로 차를 피한 태익이 도와주는 척 서정수에게 USB를 넘기는 것이 예정이었다.
“자네가 끼어든 거야.”
“하아. 그런 거면 병원에서 서로 좋게 자료 건네고 넘어갔으면 됐잖습니까?”
“글쎄, 그의 상태가 워낙 안 좋았던 것도 있고. 아마도 나도 못 믿었던 건 아닐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서정수가 남태익이 아닌 기욱에게 자료를 맡긴 이유는 끝까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기욱은 골치가 아파도 단단히 아픈 일에 얽힌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이었다.
“설령 자료를 안 지워도 상관없네. 내가 요구하는 조건은 나와 관련된 걸 전부 삭제하는 것이 다일세. 그러면 강서진 건은 모른다고 일관할 테니.”
“원장님의 뒤에는 누가 있습니까?”
기욱의 질문에 태익이 말할 수 없다며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지워 달라는 건 차선책일 뿐이라는 걸 기욱도 모르지는 않았다. 태익이 기욱이 내려놓은 차트를 제 쪽으로 끌어오며 입을 열었다.
“그 자료, 나한테 넘겨.”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기욱은 휴대폰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거침없이 원장실을 나왔다. 밖과 안의 공기가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잠깐 비가 왔었는지 창문에 물방울이 고여 있었다. 뻑뻑한 눈을 비빈 기욱은 혀를 찼다. 이번 주말에는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