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 왜 그렇게 예민해?
다음 날 아침, 서진은 밤샘하고 퇴근하려는 서윤을 배웅했다. 로비에서 사복 차림의 서윤을 본 서진이 눈을 깜박였다.
“누나 그 가방.”
“어? 이거?”
서윤이 어깨에 멘 가방을 살짝 앞으로 보여 줬다. 서진도 명품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서윤이 메고 있는 가방이 워낙 유명한 브랜드라 눈치를 챈 것뿐이었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건 서윤의 옷이나 가방들은 대체로 기욱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것들이 많았다. 서진이 알기로 서윤이 메고 있는 가방은 기욱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브랜드였다. 언젠가 비싼 가격에 비교해 디자인이 싼 티가 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물론, 서윤이 멘 가방이 싼 티가 난다는 뜻은 아니었다.
“샀어?”
“아, 이거. 시동생이 사 준 거야.”
“시동…… 설마, 박 선생?”
서윤이 말하는 사람이 박운오라는 걸 눈치챈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딱 봐도 천만 원은 더 넘어 보이는데 도대체 박운오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서윤이에게 사 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 몇 달 정도 지원 왔잖아. 근데 J대 분원이 좀 머니까 새로 방 잡기가 애매했나 봐. 당분간 우리 집에서 신세 지고 있는데, 미안하다면서 사 줬어.”
“그런 건 나한테 미리 말했어야지!”
“지금 말하잖아. 왜 화를 내고 그래?”
“아, 아니. 그…… 미안해.”
병원 밖으로 나온 서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서윤의 말대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서진은 평소보다 더 예민해져 있었다. 병원 밖까지 나온 서진이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으려 하자 서윤이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기욱의 차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비싸 보이는 차 한 대가 서윤의 근처로 다가왔다.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운전자를 확인하자 서진의 미간이 한 번 더 구겨졌다. 운오의 차였다.
“데리러 오는 거였어?”
“어. 응.”
한 번 예민하게 굴었던 탓인지 서윤이 서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서진은 조용히 서윤의 등을 떠밀어 주며 차 문을 닫았다.
“조심해서 들어가.”
평소보다 날씨가 추웠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 무렵 시간이 난 서진은 2G 휴대폰을 열고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진이 전화를 건 지 얼마 되지 않아 연구실에서 자고 있던 기욱이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 네가 먼저 전화할 줄 몰랐는데.
잠에 취한 기욱이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숨을 들이쉬자 폐에 남아 있던 담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 얘기 좀 해요.
― 30분만 있다가 와.
― 오빠 왜 그래?
휴대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이 곁에 있는 모양이다. 서진은 혹시 들킬까 후딱 전화를 끊었다. 대충 내려가서 남은 일을 보고 있을 무렵 잠에서 깬 서윤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서윤이 내려온 것을 확인한 서진은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욱의 연구실로 향했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발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목에 묻은 섹스의 흔적들과 늘어진 수술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드물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매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섹스하는 남자는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하긴 그런 기분을 알았다면 기욱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서진은 누가 볼 새라 후딱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들어갔다. 서진은 닫힌 문 앞에 서 붕 뜬 머리를 긁적이는 기욱을 노려봤다. 서윤과 섹스 후 한 시간 정도 자다 깨어난 기욱은 일어나자마자 민감하게 구는 서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서진을 저렇게 불편하게 만든 것이란 말인가.
“왜 그래?”
“누나 가방 바꾼 거 알아요?”
“가방……. 아 K&I 거? 요즘 들고 다니던데. 내 취향은 아니지만.”
갑자기 가방 이야기가 왜 나오냐는 듯 기욱이 의자에 앉으며 뺨을 긁적였다. 기욱의 취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건 없었다.
“박 선생, 박운오 집에 머물고 있어요?”
“좀 됐어.”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그걸 너한테 일일이 말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그 가방 박운오가 누나한테 선물한 거예요.”
서진의 말에 기욱이 서윤의 가방에 대해 다시 고민했다. 서윤이 돈을 모아 가방을 살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살짝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기욱도 운오가 서윤에게 가방을 사 준 사실을 지금 처음 알았다.
“집에 머물고 있으면 말해야 했을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예민해?”
“…….”
서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예민하다. 서윤에게도 들은 말이긴 하지만, 서진은 이상할 정도로 운오만 얽히면 짜증이 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속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기욱의 동생이자 시헌의 동생이기도 한 박운오에게는 성격이 안 맞는 것 이상의 불편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역시 가장 거슬리는 것은 자신이 기욱의 연구실에서 나온 것을 걸고넘어지는 점이었다. 치프가 교수의 연구실에 들락날락할 수도 있는 거지 않는가. 그럼에도 운오의 말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에 깔고 있는 듯했다. 그 시선, 말투는 일정 부분 박기욱의 행동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서진이 제일 싫어하는 부분이었다.
“혹시, 누나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죠?”
“뭐? 강서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천만 원이 넘는 백을 사 주고, 차로 마중까지 나왔어요!! 다, 당신이 남편이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피는 못 속인다. 박기욱의 동생인데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자신과 기욱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누나와 운오의 관계도 충분히 의심해 볼 법했다.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는 서진을 본 기욱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기욱에 서진이 벽에 몸을 붙이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이 떨리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이 서진에게 집착하듯, 강서진의 서윤에 대한 집착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서진이 의심을 하게 될 줄은 기욱도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난 기욱은 잔뜩 흥분한 서진을 범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너 강서윤한테 그러는 것도 병…… 됐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게 뭐예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가라고 할 때 조용히 가.”
손을 놓은 기욱이 이마에 올린 손가락 사이로 서진을 노려봤다. 서진을 범할 기분이 아닐 뿐 마음만 먹으면 강서진을 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기욱의 연구실을 나왔다.
“아아아악!”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과 새벽에 이야기하고, 서진은 거의 뜬눈으로 날밤을 지새웠다. 전공의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와 이런저런 고민이 서진을 더욱 정신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 사 왔는지 모를 음료수 하나로 아침을 때우고 외래 진료를 마치고, 간신히 편의점에서 산 음식으로 점심을 때운 서진은 휴대폰을 어깨에 가져다 대며 전화를 받았다.
“네? 한 시간이요? 아뇨,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예.”
서진이 전화를 끊으며 곧장 응급실로 내려갔다. 운오를 대신해 일을 처리한 서진은 다시 신경외과 의국으로 돌아왔다.
“박 선생 어디 있어. 박운오.”
“아, 걔 아까 나간 거 아니야?”
“정신이 나갔네, 씨발.”
“야, 왜 그래?”
어지간하면 화를 내지 않는 서진이 욕을 내뱉자 연태를 포함해 의국에 있던 의사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몇몇 레지던트들은 언젠가 서진이 한번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 일부러 알면서 모르는 척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서진은 제2스테이션 쪽에 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서 봐도 운오라는 것이 한눈에 티가 났다. 스테이션 앞으로 몸을 기대며 간호사와 떠들고 있는 운오를 본 서진은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야!! 박운오!!”
평소 큰 소리를 잘 내지 않는 서진이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자 간호사들이 깜짝 놀랐다. 지나가던 몇몇 환자와 보호자들도 무슨 일인지 몰라 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큼성큼 스테이션으로 간 서진이 운오의 멱살을 붙잡았다.
“왜 그러는데요?”
“왜? 씨발, 너 지금 우리 병원 레지던트 과정 아니라고 막 나가는 거야? 일 똑바로 안 해!”
주변 시선을 신경 쓸 것도 없을 정도로 열이 받은 게 얼마 만이지. 서진은 적나라한 욕을 빼고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전부 늘어놓았다. 사태가 심각해지는 것을 눈치챈 간호사가 안쪽으로 들어가 서윤을 데리고 나왔다. 운오에게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는 서진을 본 서윤이 깜짝 놀라 서진을 말렸다.
“서진아, 강서진!”
“……누나 놔.”
“너 진짜 그만 안 해? 왜 그래!!”
서윤이 그제야 주변 좀 보라며 눈치를 줬다. 의료진들은 고사하고 근처 병동 환자와 일반인들까지 얼굴을 내밀 정도면 보통 소란은 아니었다. 서진과 눈을 마주친 연태가 적당히 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서진은 등을 돌리며 운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박운오, 너 따라와!”
운오를 데리고 비상계단 안쪽 층계 사이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기 무섭게 서진은 운오를 벽으로 밀쳤다.
“저기요, 강 선생님.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겁니까?”
“뭐?”
“제가 일 안 한 건 맞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쪽 줄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 그거.”
“10분 안에 내려가겠다고 해 놓고 1시간이나 연락이 없는 것도 부족해서 간호사랑 스테이션에서 떠들고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일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ER은 바빠서 깜박한 거고요. 강 선생님도 2년 차 시절에 그런 적 한 번쯤은 있을 거 아닙니까.”
서진의 손을 뿌리친 운오가 흐트러진 가운을 툴툴 털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태도가 다른 건 서진뿐만이 아니었다. 눈매가 달라져 있었다. 서진은 운오를 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닦았다.
“형수 때문에 그래요? 천만 원짜리 백이랑 운전 데리러 온 거?”
“알고 있으면서 묻지 마.”
“형수님한테 못 들었어요? 당분간 신세 지니까 미안해서 선물했다고.”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
예민하다. 그래, 서진도 자신이 예민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이 정상이었을 때나 통하는 단어였다. 서진이 알고 있는 한 박기욱의 피가 흐르는 사람 중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건 비록 반쪽짜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형도 가만히 있는데, 왜 동생인 그쪽이 그렇게 지랄이세요?”
“그 인간은……!!”
서진이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박기욱이 강서윤을 대하는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연기다. 기욱은 한 번도 서윤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사랑? 남자, 여자와 다 섹스가 가능한 그 남자가 과연 사랑을 알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운오의 행동은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좋은 말 할 때 그만해.”
“싫다면요.”
운오는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뻔뻔하고, 또 서진이 싫어하는 박기욱의 안 좋은 점만 전부 닮은 사람이었다. 층계로 끌어낸 순간부터 달라진 운오의 눈빛을 본 서진은 확신했다. 박운오는, 강서진과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안 맞는 사람이었다. 운오는 서진을 위아래로 훑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박기욱은, 형은 누군가를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가 싶더니 서진이 한 것처럼 순식간에 몸을 돌려 서진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박운오의 체형은 서진과 비슷할 정도로 말랐지만, 목 언저리를 누르는 그 힘만큼은 시헌이나 기욱과 비슷할 정도로 강했다. 몸을 빠르게 돌려 서진을 몰아붙이는 데 한 동작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사람, 태권도 했었죠?”
“뭐?”
“아, 미안해요. 제가 그 사람은 별로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서. 박시헌이요. 태권도 꽤 오래 하지 않았어요? 나 이래 봬도 유도했거든요. 그쪽 제압하는 거 어려울 거 같아요?”
운오의 말투는 마치 그동안 서진에게 일부러 당해 줬다는 듯한 말투였다. 운오가 손에 힘을 주자 서진의 숨이 턱 막혀 왔다. 체격과 비교하면 힘이 센 건 시헌뿐만이 아니었다. 박시헌, 운오는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운오가 유도를 시작한 이유도 그래, 별거 없다. 박시헌이 하니까. 늦은 시간까지 운동하는 시헌을 기욱이 데리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운오는 유도를 시작했다. 자신도 시헌과 똑같이 운동해 늦게 끝나면 한 번쯤은 기욱이 데리러 와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사소한 질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지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런 박기욱이 몇 년째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운오가 생각하는 박기욱은 한 여자에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조금 더, 조금 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 기욱이 간호사와, 얼굴이 반반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여자를 몇 년째 좋아할 리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든 운오는 서윤을 떠봤다.
“어리석은 여자.”
“씨발, 너…! 윽….”
“그 여자, 진짜 형이 자길 좋아하는 줄 알고 있더라.”
악착같이 기욱을 믿고 있는 서윤이 운오는 참으로 안쓰러우면서 불쌍했다. 운오가 보기에 서윤은 기욱이 지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잘 세공한 유리 조각 같은 여자였다. 잘 만들어진 유리 세공품일수록 깨지기 쉬우며, 산산이 부서진 유리를 볼 때의 허무함과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운오는 유리를 싫어했다.
강서윤은 본인이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들어진 유리 세공품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에 비교해 동생인 강서진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누나를 사랑하는 건가? 하는 의심도 했다. 그러나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누구든 좋으니 강서윤이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인 집착이었다.
“형이랑 잤어요?”
“너, 윽 이거 안 놔?”
서진이 발악을 하자 운오가 서진의 팔을 뒤로 꺾어 눌렀다. 팔이 꺾이는 아픔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 위로 올라탄 운오를 노려봤다. 운오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랑도 할래?”
“바, 박 선생 미쳤어? 이런 거 아니잖아.”
“회유하려고 하지 마. 다 아니까.”
“……씨발 새끼. 너…!! 아윽….”
“나 전부터 궁금했거든 강 선생님. 더위 잘 타면서 이상하게 수술복 딱 달라붙는 거 입더라?”
“그건…… 하지 마.”
아래층에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이 급하게 목소리를 낮추자 운오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강서진은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서진의 팔을 더욱 비튼 운오는 서진의 가운을 벗긴 뒤 수술복의 목 아래쪽을 살짝 내렸다. 비상계단이 흐릿해서 정확하게 볼 수는 없지만, 담뱃불에 덴 것 같은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운오의 손길에 서진의 몸이 벌벌 떨려 왔다. 등에 난 흉터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제정신으로 있을 자신이 없었다.
누군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달리 층계 계단은 복도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따라, 지금이 유독 더 그랬다. 여전히 서진을 제압해 누른 운오가 휴대폰을 꺼내 서진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너…….”
“소리, 키울까? 어차피 3개월만 있다가 갈 사람인 나는 상관없는데. 치프인 당신이 담당 교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짓…!! 영상에는 네 형도…… 지워!”
서진이 운오의 발을 걸자 넘어지기 전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균형을 잡았다. 유도 했다는 말은 장난이 아니었다. 운오의 휴대폰 속 영상은 다름 아닌 연구실에서 기욱과 섹스를 하는 모습이었다. 운오는 태연하게 영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각도가 좀 미묘해서 잘 안 나오긴 하지만.”
“그만해, 그만…!! 대, 대체 뭐가 목적이야!!”
“내가 말했잖아.”
휴대폰을 쥔 운오가 다시 서진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운오의 기다란 손가락이 서진의 뺨 근처를 콕 짚었다.
“강 선생님. 이제 나랑 할 마음이 들었어?”
미친 것 같다. 박기욱의 집안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같은 피가 흐르는 시헌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 이거 형수한테 보내도 상관없는데.”
서진이 휴대폰을 만지는 운오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 위로 운오의 휴대폰이 떨어졌다. 운오는 휴대폰을 주워 액정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었다.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휴대폰이라 액정이 깨지면 어쩌나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기분이 상한 운오가 서진을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선배에 대한 존중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아, 그래 먹잇감을 노려보는 짐승의 눈과 다르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운오가 재빨리 서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옷 안쪽으로 손을 넣어 일부러 쇄골 근처의 흉터를 만졌다.
“혹시라도 영상에 관한 거, 형에게 말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형수한테 보내 버릴 거야.”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운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슬슬 누군가 찾으러 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서진은 먼저 올라가려는 운오의 가운 자락을 서둘러 붙잡았다. 운오는 계단에 오른 채 서진을 내려다봤다.
“하면…… 지워 준다고 야, 약속해.”
“다음 주 일요일. 연락할 테니까 하는 거 봐서.”
서진의 손을 놓은 운오가 먼저 신경외과 측으로 돌아왔다. 철문을 닫고 문에 기댄 운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서진의 표정은, 강서진에게 관심이 없었던 운오조차도 머뭇거리게 할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박기욱이 왜 그렇게 강서진에게 목을 매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무르다. 강서윤처럼 부서지기 쉬운 유리는 아니었다. 운오가 느끼는 서진은 그래, 마치 무른 찰흙 같은 사람이었다. 멀리 뒤늦게 온 기욱이 비상계단 쪽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 * *
운오가 간 뒤 혼자 남겨진 서진은 벽에 기댄 채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들은 걸까? 그보다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영상을 지워 주는 대가로 몸을 내는 것 정도쯤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운오의 가운을 붙잡고 있었다.
철문이 열리더니 위쪽 계단에서 기욱이 뛰어왔다. 기욱의 발걸음 소리에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아, 박기욱.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줄은 몰랐다. 기욱은 자신의 뺨 근처로 손을 뻗는 서진의 팔을 잡아 재빨리 아래로 내렸다. 서진의 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서진!! 괜찮아?”
“……괜찮아요.”
“박운오가 뭐라 그랬는데.”
“그냥, 일 얘기요.”
기욱은 서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래로 늘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가운이며 서진의 꼴은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서진이 재빨리 수습했지만, 기욱은 이미 서진을 본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서진은 운오와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기욱의 성격상 말을 하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해답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 운오의 이중인격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너 좀 쉬어.”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서진은 그런 기욱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 * *
일이 끝난 서진이 병원 밖으로 나왔다. 병원을 한 바퀴 돌고 뒤쪽으로 가자 지난번에 서윤을 태우러 갔던 운오의 차가 있었다. 차 번호를 보니 운오의 차가 틀림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진은 빠르게 모자를 눌러쓰고 뒷좌석에 앉았다. 제법 탄 기욱의 차와 달리 운오의 차는 어제 새로 뽑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곧장 차를 출발시킨 운오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서진을 흘끗댔다.
“조수석에 앉아도 되는데.”
“신경 꺼.”
서진은 팔짱을 끼며 선팅이 된 유리에 머리를 기댔다. 차는 없지만, 운전에 익숙해진 터라 슬슬 도로가 보였다. 서울 근교에 있는 J대 병원 분원 근처로 가는 걸 보아 운오가 머무는 아파트일 확률이 높았다. 서진은 역시 운오가 일부러 기욱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확신했다.
차에서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운오의 집 역시 새 새집처럼 깨끗했다. 지어진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아파트라고 해도 사람 사는 흔적이 거의 없었다.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면 할 말 다 한 셈이었다. 입고 있던 코트와 넥타이를 드레스룸 안쪽에 걸어 둔 운오는 활짝 열린 침실 문 옆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 팔짱을 꼈다. 저 버릇은 서진이 기욱과 있었을 때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었다.
운오는 이상했다. 어느 쪽이냐고 하냐면 큰형인 기욱이지만, 닮은 듯 닮지 않은 시헌과 달리 운오는 기욱을 흉내 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서진이 운오를 따라 안쪽의 침실로 들어갔다. 탁, 하고 불을 켜자 방 가운데 커다란 퀸 사이즈 침대가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운오는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매를 접어 걷었다.
“벗어.”
“……뭐?”
“우리 놀러 온 거 아니니까 벗으라고.”
방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이럴 각오를 하고 온 거 아닌가. 기욱과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는데 동생인 운오와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진이 입고 있던 잠바와 후드티셔츠를 아래로 벗었다. 운오의 시선이 서진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영상 지워 준다고 약속해.”
“하는 거 봐서.”
눈을 질끔 감은 서진이 벨트를 풀고 바지를 아래로 내렸다. 다리를 약간 벌린 운오가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역시 박기욱에게 말하는 게 좋았을까? 한 걸음 다가가다 머뭇대는 서진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서진을 깔아뭉갠 운오가 서진의 드로우즈를 아래쪽으로 확 벗겼다.
“뭘 그렇게 놀라? 어차피 다 벗을 거였잖아.”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강제로 입술을 벌렸다. 입술을 덮치며 허벅지를 들어 올려 서진의 페니스를 차분하게 주물렀다. 숨이 막힐 것같이 지독한 키스에 서진의 눈가로 눈물이 고였다. 잡아먹을 듯 일방적으로 맴도는 혀의 감촉에 서진이 운오를 급하게 밀어냈다. 이불로 몸을 살짝 가린 서진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허공으로 저었다.
아니다.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 자신이 한 번도 깨끗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몸을 더듬는 손길이며 운오의 키스는 서진이 해 왔던 그 누구의 키스와도 달랐다. 하물며 키스할 때마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욱의 키스보다도 더 불편했다. 손등으로 거칠게 입가를 닦은 서진이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역시 아닌 것 같다.”
“영상, 보내도 상관없지?”
“……너.”
“내가 농담으로 하는 거 같아? 실망인데.”
운오가 서윤과의 카톡을 들어갔다. 동영상 버튼을 누르고 확인만 누르면 금방이라도 서윤에게 영상이 전송될 만한 상황이었다. 서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이런 일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박기욱이라고 완벽하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도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교수의 연구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놓겠느냐마는 피붙이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미친 새끼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서진이 바닥으로 주저앉자 운오가 서진의 팔을 들어 올렸다.
쇄골 근처에 있는 화상 흔적은 지워지지 않은 노예의 낙인과도 같았다. 박기욱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온 서진은 박기욱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리를 벌리고 벨트를 푼 뒤 바지를 벗은 운오가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빨아.”
“…….”
“형한테 어떻게 하면 남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정도는 배웠을 거 아니야.”
운오의 발이 위로 올라오려는 서진의 몸을 눌렀다. 어딜 감히 올라오느냐는 듯한 눈빛에 서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숨을 참다시피 한 서진은 운오의 검은색 드로우즈 위를 혀로 핥았다. 서진이 눈을 꾹 감자 방음이 된 것처럼 주변에 조용해졌다. 한 번씩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익숙하지 않은 체형과 체취가 서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진의 팔을 잡아 허벅지를 잡게 한 운오가 드로우즈를 내렸다. 금방이라도 빳빳하게 설 것 같은 페니스가 서진의 입과 뺨 근처를 툭툭 건드렸다.
“읍… 역시 아닌….”
“아, 형수한테 연락 왔다.”
“뭐…!”
서진이 고개를 들자 운오가 또 손으로 머리를 짓이겨 누른 뒤 양쪽 다리를 오므려 서진을 가뒀다. 박운오의 키는 박기욱과 비슷했지만, 체격은 서진과 마찬가지로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그 힘은 가히 박기욱과 견줄 만했다. 턱을 들어 올려 꾹 다문 입을 강제로 벌렸다. 영상을 보여 줬을 때 순순히 넘어오는 걸 보고 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그냥은 안 하려는 모양이었다. 운오의 손이 축축하게 젖은 서진의 입술을 손톱으로 짓뭉갰다.
“있잖아. 당신, 그렇게 반항하는 거 꽤 꼴린다.”
“……뭐?”
“형이 왜 그렇게 목을 맸는지 알 거 같거든. 적당히 장난 좀 치고 말 생각이었는데, 마음 바뀌었어. 끝까지 놀아 줄게.”
“잠…….”
서진의 턱을 거칠게 놓은 운오가 손바닥을 펼쳐 서진의 말을 막았다. 운오의 휴대폰 너머에서 수화음 소리가 들렸다. 수화음이 늘어지는 게 이렇게 길었던가? 도대체 누구한테 전화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뒤 특유의 끊김 소리가 나더니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서진이랑 있다고?
― 아, 네. 지난번에 일 때문에요. 제가 너무 경솔하게 군 것 같아서 사과드릴 겸 저녁 먹고 있어요.
― 그래? 서진이 연락 안 돼서 걱정했는데.
― 배터리 없다고 카운터에 충전 맡겼어요.
― 알았어, 식사 잘하고 잘 풀어. 서진이가 나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건 아닐 거야.
― 네. 쉬세요.
운오가 전화를 끊으며 휴대폰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은 역시나 저 집안의 피가 흐르는 것이 맞았다.
“뭐 해?”
눈을 질끔 감은 서진이 운오의 페니스 끝을 입에 물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에 머리를 빼내려 하자 운오가 서진의 머리채를 강제로 눌렀다.
“윽, 빼지 말라고.”
“우윽… 윽… 읍….”
“흐, 좋은데 이거.”
언젠가 박기욱의 것을 빼앗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이 집안에서 반쪽짜리 피라는 사실은 중학생 때쯤부터 알고 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기욱의 태도로 더 일찍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운오의 눈에 기욱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그런 기욱의 동생이고자 했다. 박시헌, 그 사람이 싫다. 단지 자신보다 몇 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박기욱에게 대우를 받는 시헌이 싫었다.
박기욱을 보며 흉내를 내는 자신과 달리 박시헌은 누가 봐도 박기욱과 닮았다. 사소한 행동, 말투 하나까지 기욱을 생각나게 할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공부만 해도 그렇다. 기욱이나 하연과 같은 J대에 갈 수 있었지만, 일부러 재수를 했다. 박시헌이 들어간 H대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수하는 시헌을 한심하게 생각했으나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시헌은 한 번의 재수 만에 만점을 받고 H대에 합격했던 반면 운오는 재수해도 그 미묘한 문턱을 넘을 수가 없었다. 과고에 진학을 하고도 평범한 성적을 유지해 왔던 시헌과 달리 운오는 스스로를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헌을 무시했다. 같은 재수, 다른 결과를 본 운오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그래. 박시헌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아닌 척하고 지내고 있는 그 사람이 미웠다.
서진의 머리채를 잡고 거칠게 흔들던 운오가 사정 직전에 서진의 입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허윽… 윽… 콜록….”
서진이 바닥에 팔을 대며 헛구역질했다. 입가로 흐르는 타액을 닦아 냈지만,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운오가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침대 위로 던졌다.
“내가 형처럼 친절하게 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지랄.”
“……뭐?”
“그 사람, 네 좆같은 형은.”
“…….”
“친절하게 한 적 없어.”
한 번도. 서진은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대학교 무렵 동기들에게 당했을 때보다 기욱에게 당하는 섹스의 시간이 서진에게는 지옥이었다. 참고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빛이 보이지 않은 터널을 홀로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 터널의 바닥은 진흙탕투성이였다.
운오는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처음에는 그래, 기욱과 서진이 금단의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진을 보는 기욱의 눈은 환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진의 가슴과 등에 난 흉터, 폭력에 대한 공포를 볼 때 기욱이 얼마나 서진을 범했는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서진의 위에 올라탄 운오가 서진의 다리를 벌려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어오는 손가락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악, 아으으윽!”
운오가 서진의 입안에 손을 넣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서진이 운오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고개를 틀어 운오를 노려봤다. 운오는 그런 서진의 눈빛이 제법 마음에 드는 듯싶었다.
“아아, 당신 진짜.”
“…하아, 으…윽….”
“박기욱의 물건이었구나.”
제대로 찾은 듯 서랍 안에서 로션을 꺼내 바른 운오가 손가락의 개수를 늘리며 서진의 안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로션 때문에 더욱더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불을 입에 물고 신음을 참으려는 서진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운오는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넘겼다. 목이 넘어가며 서진의 입에서 억, 하는 신음이 났다.
“하으… 윽….”
“괜찮아, 신음 내. 섹시하잖아.”
“하, 하아….”
운오는 서진의 꼿꼿하게 선 유두를 손끝으로 살살 긁었다. 이렇게 민감한데, 불편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기욱이 이쪽까지는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렴 기욱은 남자 가슴보다는 여자의 가슴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운오는 벌어진 엉덩이 근처로 페니스를 문댔다.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은 페니스에 서진이 허벅지를 움찔거렸다.
우웅― 계속해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애매하게 들리는 진동 소리에 거슬렸던 운오가 제 휴대폰을 뒤집었다. 자신의 휴대폰은 아니었다. 서진을 두고 거실로 나가 소파 위에 있는 서진의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서진의 스마트폰에서 오는 전화도 아니었다. 어디서 나는 전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운오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온 서진은 가방을 흘끗댔다.
불규칙한 진동 소리는 기욱이 준 2G 휴대폰의 진동이었다. 운오가 가방으로 다가가려 하자 서진이 가방을 낚아챘다. 운오가 그런 서진의 팔을 잡아 거칠게 내쳤다. 검은색 배낭 가방의 앞주머니를 열자 오래된 2G 휴대폰이 나왔다. 마침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끊겼다. 서진이 휴대폰을 빼앗으려 하자 운오가 서진의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강하게 쳤는지 서진의 몸이 바닥 쪽으로 쓰러졌다.
“너…!”
“왜, 내가 못 때릴 것 같았어?”
서진이 뺨을 붙잡으며 운오를 올려다봤다. 박기욱도 처음부터 서진의 몸에 손을 댄 건 아니었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운오는 서진을 질질 끌고 오다시피 해 침대 위로 내던졌다. 반항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미 운오에게 뺨을 맞은 순간부터 서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진을 침대에 눕힌 운오는 곧장 서진의 등 위로 올라탔다. 손에 쥔 2G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기욱의 번호라는 걸 눈치챈 운오가 전화를 받았다.
“잠… 으윽… 아윽… 잠깐… 읍….”
뭐야, 박운오 너 어디야! 휴대폰 너머로 잔뜩 화가 난 듯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오는 일부러 휴대폰을 서진의 입 근처에 가져다 댄 채 허리를 움직였다. 서진이 아무리 신음을 참아도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거친 숨소리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서진의 배 위로 사정을 한 운오가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을 무렵엔 기욱과의 통화는 한참 전에 끊긴 뒤였다.
“하윽, 어흑…… 너, 너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유? 당연한 거 아니야? 선생님이, 형의 것이니까. 형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건 무슨 맛이 날까 궁금했거든.”
“미친 새끼. 윽!”
운오가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이마를 맞댔다. 운오의 눈은 제정신이 아니다. 기욱의 눈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지만, 그런 것과는 다른 완전히 맛이 간 듯한 눈빛이었다.
“형이 좀 놀아 줬다고 기고만장하지 마. 내가 관심 있는 건 당신이 아니거든.”
거실 벽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본 운오가 서진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박기욱이라면 올 거다. 아마, 말을 하지 않아도 제 집으로 찾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운오는 벌어진 서진의 안에 자신의 페니스를 맞췄다.
“형이 올 때까지 좀 더 놀아 줄게. 좋잖아. 이런 거.”
운오가 크게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거칠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늘어진 손이 힘없이 침대 아래로 흔들렸다. 최악이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최악이었다. 운오에게 당해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찰나 머릿속을 울리는 삐 소리와 함께 기욱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쿵쿵, 현관에서부터 기욱의 발걸음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사복 차림의 기욱이 보였다.
“박운오!!”
잔뜩 화가 난 듯 운오를 침대 아래로 끌어당긴 기욱이 주먹을 휘둘렸다. 그나마도 한 대로 참는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기욱은 화가 나 있었다. 운오는 기욱에게 맞은 걸 별로 놀라워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예민하다. 그 예민이 설마 이런 식으로 서진을 몰아붙일 줄은 기욱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기욱이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서진에게 던졌다.
“강서진 옷 입고 아파트 가 있어.”
집, 오피스텔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그게 뭘 말하는지 서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야 나을 거로 생각한 서진이 서둘러 옷을 입었다. 정액이 묻은 허벅지 위에 입는 옷의 감촉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서진을 보낸 기욱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운오를 노려봤다.
“너 병원 넘어올 때 조용히 있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열 받아서 그랬어.”
“네가 뭔데.”
“형은, 여자 같은 걸 사랑할 사람이 아니야. 강서윤은 그렇게 연기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가 아니라고!! 내가 아는 박기욱은……!!”
운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강서윤보다 강서진이 낫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기욱이 그렇게 오랜 시간 목을 매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운오가 느끼는 서진은 기욱과 섹스 동영상 하나에 몸을 내주는 닳고 닳은 남자였다. 운오가 기욱의 앞으로 다가와 가슴 근처로 손을 가져다 댔다. 기욱이 다가오는 운오의 손을 옆으로 치워 냈다.
“박시헌은 되고, 나는 안 돼?”
“박시헌이랑 그런 적 없어.”
“그렇겠지. 형은 한 번도 시헌이 형을 그렇게 본 적이 없으니까.”
기욱에게 시헌은 뭘까? 동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친한, 마치 귀여운 동물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변태가 아닌 이상 동물에게 성적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운오는 아니었다. 운오도 알고 있다. 자신은 한 번도 기욱의 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 기욱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제 어깨에 손을 올리는 운오를 애써 밀어내지 않았다.
“나한테 형은 전부야.”
“반쪽짜리라고 해도 형제는 형제야.”
“강 선생님이랑 하는 건 문제가 안 되고 나랑 하는 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서진의 이름이 나오자 기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반응을 놓칠 이유가 없는 운오가 입꼬리를 올렸다. 박기욱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서진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저, 사랑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었다. 기욱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웠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집착. 그것이 박기욱이라는 사람이 평생 누군가를 사랑한 방법이었다.
운오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 박기욱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것이 반쪽짜리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형, 사랑해.”
“미친 새끼.”
“그거 알아? 그 미친 새끼를 키운 게 누군지.”
운오의 손이 점점 기욱의 몸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 * *
아파트에 도착한 기욱은 문을 연 뒤 거실의 불을 켰다. 기욱은 서진이 두고 간 가방을 거실에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온 게 2주 전이니, 사람의 흔적은 거의 없었지만, 기욱은 거침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의 불을 켜자 구석에 이불을 덮고 있는 서진이 눈에 들어왔다. 톡 튀어나와서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서진의 모습이었다. 서진이 확 하고 이불을 걷자 눈이 부신 듯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잠이라도 잘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에서 잠 같은 게 올 이유가 없었다. 훌쩍거리던 서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기욱을 노려봤다. 아파트에 오고 난 뒤에도 꽤 운 모양인지 눈가가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 서진은 기욱이 내미는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다, 다 참을 수 있었어요.”
“…….”
“근데 이제 못 참겠어요.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이런 꼴을 당해야 하냐고!!”
그냥 사람답게 살면 안 되는 걸까? 서진의 인생은 단 한 번도 우리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지긋지긋했다. 이것도, 저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미칠 것 같았다. 은오에게 당한 아래가 시큰했지만, 아픔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진의 가슴이 아팠다.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타 강제로 옷을 벗겼다.
“놔요. 제발, 제발 그만해!! 누구 때문인데!! 그 영상이 찍힌 게 누구 때문인데 이 와중에도 섹스하고 싶냐구요!!! 당신은, 넌 인간도 아니야!!”
자신의 위에 올라탄 기욱의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도 차근차근 옷을 벗기는 기욱이 싫었다. 운오만큼이나 기욱의 손길이 싫었다. 온몸이 완전히 벗겨지고, 운오의 흔적이 남은 다리가 벌려지자 서진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지를 내린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남아 있던 정액이 눌어붙어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진의 안을 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이 남자는, 입을 다문 채 몇 번이나 서진을 탐하고 또 탐했다. 기욱의 위에서 몸을 흔들던 서진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허리를 흔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기욱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그 머리를 칼로 갈라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윽… 아응….”
그날 밤, 서진이 운오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듯 기욱은 서진을 평소보다 더 거칠게 탐했다. 마지막으로 기욱의 위에서 허리를 흔들던 서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기욱의 담배 향이 코끝에 닿았을 무렵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사복 차림의 기욱이 의자를 가져와 서진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서진은 휴대폰을 보며 담배를 물고 있는 기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진의 손은 기욱의 팔 근처를 닿고 툭, 하고 떨어졌다. 뒤늦게 서진이 깬 걸 눈치챈 기욱이 담배를 껐다. 서진은 쉴 대로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쓰레기예요. ……최악이야.”
정신을 잃은 서진의 팔이 바닥으로 축 처졌다. 서진의 팔을 바로 올린 기욱이 이불을 덮어 주며 이마에 뺨을 맞췄다. 아아, 그래.
“나도 알아.”
한 번도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 * *
그런 일이 있었지만, 사람의 몸이란 참 무서운 듯 서진은 모처럼 푹 잔 것 같았다. 그런 서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다름 아닌 기욱이 내민 휴대폰 때문이었다. 거실에 있던 기욱이 가지고 온 서진의 휴대폰에서는 서윤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낚아챈 서진이 이불을 덮어쓰며 서윤의 통화를 받았다.
― 어, 누나.
― 집이야? 목소리가 왜 그래?
― 아니, 어제 좀 술을 과하게 마셔서…….
― 너희 술까지 마셨어? 대단하다. 화해는 잘했고?
화해라는 말에 서진이 이불 속에서 눈을 굴렸다. 운오가 서윤에게 자신과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떠올랐던 서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불 너머로 기욱의 발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 뭐, 그냥. 일하다 생긴 오해니까.
― 그래. 알았어. 이따 오후에 보자.
― 응. 병원에서 봐.
전화를 끊은 서진이 이불을 확 걷었다. 기욱이 있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이 깬 서진은 거실로 나왔다. 안쪽 방문이 닫혀 있고, 짐이 있는 걸 보니 나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녁 출근이긴 하지만, 온몸이 아팠던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샤워하고 나왔다.
머리가 뜨는 게 싫어 머리를 말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서진은 기욱이 있던 방을 흘끗댔다. 샤워하기 전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려 있었다. 기욱은 담배를 피우러 나간 모양인지 자리에 없었다. 거실에 방 두 개짜리 아파트. 한쪽 방은 침실로 쓰고, 나머지 한쪽은 되는 대로 쓰는 느낌이었다.
주로 서진이 공부를 하던 책상 위에 오늘은 서진의 교재 대신 기욱의 노트북과 서류들이 올려져 있었다. 얼핏 보아하니 병원 관련 자료들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책 중에 암호 관련 인문학 서적도 있었다. 기욱답지 않은 노트북을 살피려 하자 갑자기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깜짝 놀란 서진이 기욱의 손을 밀어냈다.
“이게 다 뭐예요?”
“……별거 아니야.”
대답이 한 템포 늦었다. 수상한 기색이 물씬 풍겼지만, 어젯밤 일을 생각한 서진은 기욱이 하는 일을 캐묻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출근도 해야 하고.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은 서진이 고개를 들며 기욱을 노려봤다.
“이상한 짓만 하지 마세요.”
“걱정해 주는 거야?”
“내가 당신 걱정을 왜 해요.”
그럼 그렇지,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서진의 대답에 기욱은 그럴 줄 알았다는 한편 묘한 서운함이 들었다. 그 순간, 기욱은 서진이 약간 걱정해 주기를 원했다.
* * *
지독하고,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오후가 되었을 무렵 서진은 진호의 부탁으로 외상센터에 지원을 나갔다. 정신이 없는 수술을 마치고, 다음 수술방으로 넘어가려는 우민과 달리 서진은 의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민이 올라가려는 서진을 급하게 붙잡았다.
“왜 그러세요?”
“이거, 먹어라.”
어디서 산 건지 우민이 천 원짜리 초콜릿바 하나를 서진에게 급하게 건넸다. 서진은 우민이 준 초콜릿바를 챙겨 의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수술 기록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우민이 준 초콜릿바는 한동안 책상 위에 방치가 되어 있었다.
새벽 무렵 간신히 짬이 난 서진이 초콜릿바와 담배를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난간 밑에 살짝 튀어나와 있는 돌에 앉아 담배를 문 서진은 우민이 준 초콜릿바의 종이 껍질을 벗겼다. 생각 없이 뜯는 껍질에 뭔가가 떨어졌다. 초콜릿 사이에 쪽지가 있었다. 쪽지를 열어 보니 우민의 휴가 날짜와 약속 장소, 시간이 적혀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자신의 스케줄과 기욱의 스케줄을 확인하니 얼추 시간이 맞았다. 멀리는 못 갈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병원 밖에서 우민의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두 번째 담배를 문 서진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은 뒤 우민이 준 초콜릿의 알루미늄 포장지를 뜯었다. 아무리 의국 실내에 오래 뒀다고는 하지만, 우민이 준 초콜릿은 다 녹아 먹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도 서진은 포장지를 핥다시피 하며 초콜릿을 먹었다.
* * *
2주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당직한 뒤라 피곤하긴 했지만, 서진은 곧장 첫차에 가까운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 눈에 띌까?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서진이 전화를 걸 것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차 한 대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도로변이었던 터라 서진은 후다닥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
“…….”
차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병원 밖에서 만나 본 게 얼마 만이지? 사실 서진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사복 차림이 어색하기는 서진이나 우민이나 서로 마찬가지였다. 우민이 뒤늦게 한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오랜만, 이긴 하네.”
“그러게요.”
또다시 침묵. 우민은 말없이 운전했다. 내비게이션에는 목적지가 찍혀 있지 않았지만, 달리는 방향에 고민이 없는 걸 볼 때 우민이 목적지를 정하고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목적지를 모르는 차에 타는 건 서진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서울을 빠져나온 우민은 곧장 고속도를 탔다. 늘 최고 속도를 아슬아슬할 정도로 밟아 대는 기욱과 달리 우민의 속도는 한결같았다. 일부러 그러는 걸지도 모르지만. 주변이 제법 한적해지자 우민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박기욱은 이제 막 출근했다. 아무리 기욱이라도 출근하자마자 서진을 괴롭힐 여유는 없을 것이었다. 오후쯤에 전화가 와도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기욱만큼이나 서진도 그까짓 거짓말에는 능숙했다. 다만 점점 높은 건물과 서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느껴지는 기분이 있다.
“이러니까 꼭…….”
“불륜 같잖아.”
서진이 흐린 말을 우민이 연결 지었다.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운전을 하는 우민을 바라봤다. 서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우민은 애써 모르는 척 정면을 보며 운전을 했다. 그래, 맞다. 시헌과 연애를 했을 때는 양심의 가책은 느꼈어도 불륜이라는 느낌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서진은 기욱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연애를 한 쪽에 가까웠다. 하여튼 이상하게 외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을 좀 넘게 차에 타고 나니 피곤한 모양인지 서진이 하품을 했다.
“좀 잘게요.”
밤샘했던 서진은 일단 좀 눈을 붙이고 싶었다. 뒤에 있을 일은 자고 난 뒤에 생각하고 싶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서진은 금세 차창 쪽으로 머리를 기대며 잠자리에 들었다.
“강서진. 서진아.”
“하암….”
“일어나라.”
자신을 흔드는 우민의 손길에 서진이 눈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치우며 주변을 둘러봤다. 창문 너머로 확 트인 시야와 먼저 내린 우민에 의해 열린 자동차의 문틈 사이로 바다 냄새가 났다. 강원도 어디로 가는 건 고속도로를 탈 때부터 짐작했지만, 바다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서진이 우민을 따라 바닷가에 내렸다.
여름이 지나서 해수욕은 힘들었다. 애당초 바로 어제 비가 온 탓이라 바다가 거칠었다. 오후긴 하지만, 날이 흐린 탓에 눈이 부시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진의 옆으로 다가온 우민이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시간도, 날씨도 애매했던 탓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차를 대고 나온 바닷가 인근에 전망 좋은 펜션들이 몇 개씩 있었다. 우민은 그중에 가장 최신식으로 지어진 펜션 하나를 손가락질했다.
“저기 예약했어.”
“예약도 했어요?”
“그럼, 차에서 자려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거침없는 운전에 알아서 생각해 둔 게 있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예약까지 했다는 말은 솔직히 좀 당황스럽긴 했다. 기욱은 대체로 현지의 일은 현지에서 신경 쓰자는 식이었다. 서진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은 우민이 가볍게 웃었다.
“기왕 바람피울 거 확실하게 해야지.”
“그게 뭐예요.”
“참고로 저기가 이 근방에서 시설이 가장 괜찮아. 뭔 1박에 40만 원이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정말 고심하고, 고심해서 잡은 날짜였다. 혹시라도 기욱에게 쪽지가 걸리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하고, 갔는데 서진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서진과 바닷가를 걷고 있으니 마냥 실패는 아니었다.
“배 안 고파?”
“고파요. 조금.”
무조건 도착하는 것만 생각했던 터라 중간에 휴게소를 들러야 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서진과 우민은 근처에 있는 순두붓집에 들어갔다. 입구부터 방송에 소개됐니 어쩌니 하는 현수막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가게는 크기보다 한가했지만, 아주 손님이 없지는 않았다. 서진과 우민은 일부러 가게의 가장 안쪽 구석에 앉았다. 두 사람 다 직업이 직업인 터라 먹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투적으로 식사를 하는 둘의 모습을 본 직원이 당황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우민이 먼저 식사를 마치고, 그 뒤로 식사를 마친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다 먹었어?”
“네. 근데…….”
찬물을 마신 서진이 우민의 벽 뒤에 걸려 있는 커다란 디지털시계를 흘끗댔다. 등 뒤에 뭐가 있나? 우민도 등을 돌려 서진이 보고 있는 디지털시계를 바라봤다. 별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한 우민이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서진을 바라봤다.
“5분 걸렸어요.”
“뭐가?”
“저랑 교수님이 식사를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이요.”
서진이 순두부가 나오자마자 시계를 봤으니 틀림없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먹을 줄은 서진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랬나? 천천히 먹어.”
“다 먹었는데요.”
“하하…….”
서진이 물을 한 컵 더 따라 마신 뒤 빈 컵을 내려놓았다. 밥을 먹는다는 목적을 마친 식당에서 더 이상의 볼일은 없었다. 서진과 우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서진은 일부러 우민보다 빨리 걸어 카운터 앞자리를 선점했다. 지갑을 꺼내려는 우민을 밀어낸 서진이 기다렸다는 듯 오만 원권을 직원에게 먼저 건넸다.
“야, 무슨 짓이야.”
“됐어요. 제가 살게요.”
“너 그러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그 인간도 현금은 신경 안 써요.”
우민과 함께 밖으로 나온 서진이 남은 잔돈을 지갑에 넣었다. 거기서 기욱의 카드에서 빼 온 현금을 쓸 생각을 하다니 서진도 서진이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과 좋든 싫든 오래 지나다 보면 피가 섞이지 않아도 영향을 받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서진이 가지고 있던 상식을 흔드는 일까지 말이다. 어린 시절의 서진이었다면 기욱이 주는 돈을 함부로 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지금의 서진은 그러니까, 기욱의 돈을 쓰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쓰라고 준 돈 안 쓰면 저만 손해이지 않은가? 씁쓸할 정도로 현실에 찌든 삶이었다.
“일단 펜션부터 갈까?”
“아니요.”
우민의 옆에 찰싹 붙은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우민이 1박에 40만 원이나 주고 예약했다는 펜션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그냥 우민과 함께 바람을 쐬며 걷고 싶었다. 박기욱과 서윤이 일을 하고, 서진은 당직 후 오프에 우민은 휴가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휴무는 오랜만이었다. 바다를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던 걸까? 오랜만에 맡는 바다 냄새가 서진의 가슴을 자극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 안으로 낯선 공기들이 들어와 자리를 메꾸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냥 교수님이랑 좀 걷고 싶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서진의 손을 붙잡은 우민은 바다를 끼고 무작정 걸었다. 물길이 갈라져 나와 있는 곳에 작은 나무다리가 있었다. 다리의 이음새마다 흰색의 조명이 달린 걸 보아 밤에는 불빛도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다리를 걷자 중간쯤에 톡 튀어나온 공간이 있었다. 나무 의자는 물기가 덜 마른 듯 바랜 색을 하고 있었다. 서진이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앉을래요?”
“됐어.”
서진의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우민이 고개를 저었다. 다리 근처에 식당과 얼마 가지 못해 펜션들이 많은 탓인지 일찍 온 커플과 몇몇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서로 옆에 앉아 있는 것보다야 한 사람이 서 있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애당초 우민은 별로 앉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의자는 물길을 등지고 있다는 것만 빼면 딱 좋았다.
“네가 벌써 레지던트가 끝나 가던가?”
“몇 개월 안 남았죠.”
“인턴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치프 소리 듣고 내 수술방에 기어들어 올 정도라니. 가끔 너 보면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믿을 수가 없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외상센터의 2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우민이 거쳐 간 여느 치프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서진에 우민은 가끔 당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녔다.
“담배 피울래?”
“전 됐어요.”
“아, 그래. 그럼 좀 피운다.”
우민이 서진의 앞에서 담배를 물었다. 서진을 데리고 바다에 오길 잘했다. 바다를 보면서 피우는 담배는 같은 담배라도 그 맛이 색달랐다. 기분 전환도 이런 기분 전환이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우민은 서진이 꽤 만족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년쯤 서진을 유심히 봐 오니 서진의 미묘한 표정을 말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민이 짧아진 담배를 끈 뒤 근처 쓰레기통에 주워 버렸다. 두 번째 담배를 문 우민은 깍지를 끼며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서진을 내려다봤다.
“할 말이 뭐야?”
“없는데요.”
“나한테도 거짓말할 거야?”
“……아니요.”
서진이 하는 태연한 거짓말은 과연 박기욱의 영향일까? 아니면 서진이 사귀었다는 시헌의 영향일까? 어느 쪽이든 우민은 서진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하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깍지를 낀 채 손가락을 살살 떨던 서진이 이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든 하늘은 그리 맑지 않았다. 구름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파란 하늘을 여기저기 가리고 있었다. 구름을 지우면 과연 그 뒤에는 맑은 하늘이 있을까? 그것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냥요. 레지던트가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의대, 인턴, 레지던트.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생각이지만, 남들이 당연히 하는 대로 서진 또한 그렇게 살았다. 기욱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들어가게 된 신경외과라고 해도 강서진이라는 인물 자체가 외과에 자질이 있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박기욱이 문제지 신경외과가 문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드 시험을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험이 붙고 난 이후의 문제였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최근 들어 서진을 괴롭히고 있었다. 어렸을 적 그저, 서윤과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시작한 의사의 길에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의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적성 고민이야? 때려치워 그러면.”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잖아요.”
“남의 일이니까. 네 생각이 어떤지 내가 알 게 뭐야.”
“매정하게 그러지 좀 마세요. 진심이라구요.”
“뭐가? 의사 그만두는 거?”
“의사 그만둘 생각은 없는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진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한둘쯤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다른 일을 하겠다며 안정된 삶을 포기하는 애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서진은 의사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적성도 맞았고. 단지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J대 병원에서 기욱을 따라 펠로우 과정을 밟을 수도 있고, 그냥 로컬로 빠져 조금은 편하게 일할 수도 있었다. 갈 데까지 갔다. 뒷일을 생각해서라도 기욱과 조금씩 거리를 벌려야 할 것 같았다. 다만, 그 방법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담배를 끈 우민은 의자에 앉아 있는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그런 거 나중에 생각해.”
“……네.”
“커피라도 마실까?”
“좋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서진은 우민과 함께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를 걸을 뿐인 데이트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던 시헌의 데이트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참을 돌고 돌아 서진과 우민은 간신히 처음 왔던 펜션이 있는 근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나 걸은 건지 펜션에 도착할 때쯤에는 다리가 아팠다. 우민이 펜션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손가락질했다.
“술이라도 사 갈까?”
“술 마시기엔 시간이 애매하지 않아요?”
오후 2시, 구름이 아니라면 한참 해가 쨍쨍할 때였다. 우민은 머뭇대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
“술에 시간이 어디 있어.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거지.”
역시 의사는 의사구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우민과 함께 편의점의 술과 안주들을 거의 쓸어 오듯 가져왔다. 못해도 4인분은 되어 보이는 소주와 안주들을 챙겨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 직원의 안내를 받고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실내 수영장이 서진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게 뭐…….”
이런저런 설명 하는 여자 직원의 말이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직원이 나가고, 우민과 방에 남겨진 서진은 넓고 긴 방을 둘러보기 바빴다. 유리문을 넘어 들어가자 보이는 수영장 한쪽에는 돌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돌다리를 건너니 앉아서 쉴 수 있는 작은 간이침대가 있었다.
“비쌀 만하네요.”
돌다리를 건너 돌아오니 미니바와 가운데는 2인용 퀸 사이즈 침대가 있었다. 당황하는 서진을 두고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안줏거리를 놓은 우민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차에 고기 사 왔다고 말했었나?”
“아뇨.”
“저녁에 먹자.”
어쩐지 과할 정도로 술을 많이 사는가 싶더니 역시 고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아무리 둘러봐도 고기를 구워 먹을 만한 장소는 없었다.
“바비큐장이 밖에 있던가요?”
“밖에 있으면 40만 원이나 안 하지.”
우민이 한쪽 벽면에 있는 커튼을 걷었다. 커튼 뒤쪽으로 커다란 유리창과 함께 바비큐장이 나왔다. 안쪽에는 아예 실내 텐트가 쳐져 있었다. 우민이 보내 준 쪽지에 옷을 여벌 옷을 챙겨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이유를 서진은 뒤늦게 깨달았다.
“차에 짐이랑 네 가방 가지러 가자.”
“네.”
물에 들어가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펜션의 시설을 목격한 서진은 친구들과 놀러 온 사람처럼 신이 나기 시작했다. 우민의 차에 탔을 때 고기를 못 본 것 같았는데, 서진은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우민이 트렁크에 있는 아이스박스를 꺼냈다.
“왜 이렇게 철저해요. 제가 못 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올 줄 알았어.”
“진짜요?”
“퇴근하기 직전까지 연락하려다가 참았다.”
“하하, 그게 뭐예요.”
서진이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우민과 함께 아이스박스와 가방을 챙겨 펜션으로 돌아왔다. 아이스박스를 챙길 때 무게가 꽤 나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니 고기 굽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었다. 이럴 거면 편의점에서 술이랑 안주는 왜 샀나 싶을 정도였다.
“이거 다 먹을 수는 있는 거겠죠?”
“아마도.”
우민도 장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상관은 없나? 음식들을 꺼내고 나니 안쪽에서 보드카가 나왔다. 7―8만 원짜리 대중적인 보드카를 본 서진은 우민의 철저한 준비에 혀를 내둘렀다. 짐을 전부 넣은 서진은 우민에게 다가갔다. 우민은 실내 수영장 앞에 서 있었다.
“사진보다 좁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펜션에 실내 수영장 딸린 건 처음 봐요.”
마른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이 양말을 벗으며 물에 발끝을 댔다. 서진의 발이 닿자 고요했던 물의 표면이 조금씩 일렁거렸다. 혹시 물이 차면 어떻게 하지? 걱정한 것과 달리 물의 온도는 서진의 생각보다 따듯했다. 서진은 입고 있던 청바지를 살짝 걷으며 발목까지 물에 담갔다. 서진의 뒤에 선 우민이 서진의 등을 앞으로 확 밀었다.
“우왁!”
휘청거리던 서진이 이내 푹, 하고 수영장 앞으로 쓰러졌다. 난데없이 물을 먹은 서진의 몸이 수영장 안으로 훅 빠졌다. 발을 넣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성인 남성의 가슴까지 올 정도니 수영장 물은 생각보다 얕지가 않았다. 팔을 들자 달라붙은 소매 사이로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여분 옷 가져왔다면서.”
“그래도…… 이건. 아, 몰라.”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한숨을 쉬었다. 물에서 올라온 서진이 윗옷과 입고 있던 바지를 벗었다. 난데없이 팬티 차림을 한 서진의 모습에 이번엔 우민이 깜짝 놀랐다.
“그냥 옷 입고 수영하지 뭐 하러.”
“불편해서요. 실내 수영장인데 눈치 볼 것도 없잖아요.”
“아예 벗고 하지 그러냐.”
“교수님이 벗으면 남은 팬티 한 장도 벗을지 고민 좀 해 볼게요.”
“너 마지막에 그렇게 비싸게 구는 거 아니다?”
“제가 좀, 싸진 않죠.”
서진이 큭큭대며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반쯤 담그며 수영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서진을 본 우민은 돌다리를 건너 소파가 있는 쪽으로 넘어왔다. 우민도 펜션을 예약할 때 너무 과했나? 한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물 만난 고기처럼 돌아다니는 서진을 보니 역시 예약하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좋냐?”
“푸읍, 좋은데요.”
입 근처까지 물을 담은 서진이 환하게 웃었다. 서진이 몸을 일으키자 등 뒤와 앞쪽 쇄골에 난 흉터는 우민의 마음을 좀 아프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서진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나이 먹고 연애는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꼬맹이를 좋아하게 될 줄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우민이 꼬마라고 생각하는 서진의 나이도 벌써 서른을 넘었으니. 요즘 들어 하루하루 늙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교수님도 들어와요.”
“난 됐어, 너나 실컷 들어가.”
“제가 다 벗으면 들어올 거예요?”
“너 원래 그렇게 노골적인 사람 아니었잖아. 오늘 왜 그래?”
“그럼 여기까지 와서 손만 잡고 자게요?”
물속에 들어간 서진은 언제부터 그런 낭만적인 사람이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우민을 바라봤다. 우민이 마지못해 입고 있던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물에 몸을 반쯤 담그니 확실히 기분은 좋았다. 우민은 물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민의 나쁜 손이 서진의 아랫도리를 붙잡았다.
“벗는다며.”
물속에서 주물럭대는 우민의 손에 서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괜히 말했다. 서진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서진의 허리를 안은 우민이 부드럽게 서진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술을 뗄 때마다 혀끝이 얼얼한 게 묘한 자극이 됐다. 혀를 섞을 때마다 느껴지는 따듯한 기분이 제법 좋았다.
“흐… 읏….”
물의 온도와 몸의 온도가 일치해지는 것 같았다. 옷을 벗은 우민의 목에는 서진이 선물로 보내 준 목걸이가 있었다. 수술복을 입고 있으면 줄밖에 보이지 않지만, 우민의 목에 걸린 줄을 볼 때마다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기욱이 아니라 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걸.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데다 제멋대로인 기욱과 달리 서진은 자신을 배려해 주는 듯한 우민이 좋았다. 시헌과는 다른 배려였다. 우민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레지던트가 끝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키스를 마치고 붉어진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우민이 젖은 손으로 서진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너 이 자식 책임져.”
먼저 물 밖으로 올라간 우민이 서진을 물 밖으로 올렸다. 서진을 무릎 위로 앉힌 우민이 서진의 드로우즈 안쪽을 주물럭거렸다. 손이 닿는 자리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아아, 이걸 단순한 뜨거움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이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응, 응… 하으….”
서진은 우민의 목에 팔을 감았다. 우민이 손을 댈 때마다 안쪽이 욱씬거렸다. 박기욱과는 조금 다른 욱씬거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섹스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이라는 걸 얼마 만에 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헌과 했던 섹스가 거의 마지막이니 몇 년 전 이야기를 하는 건지도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드로우즈를 벗어 옆으로 내던진 서진이 보란 듯이 허벅지를 붙잡고 다리를 벌렸다. 수영장 물에 촉촉하게 젖은 우민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서진의 안을 넓히며 밀고 들어왔다.
“괜찮아?”
“후… 괜찮아요.”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보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설레 미칠 것 같았다. 내벽을 살살 긁는 그 느낌이 서진을 안달 나게 만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안쪽을 가득 채워 주길 원했다. 우민과의 키스가 끝나기 무섭게 서진이 우민을 재촉했다.
“읏, 넣어 줘요… 제발….”
박기욱의 영향인가? 못 본 사이 서진은 무척이나 적극적인 스타일로 변해 있었다. 우민이 서진의 가슴과 등 부분을 쓰다듬었다. 서진의 몸에 남아 있는 기욱의 낙인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서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저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박기욱의 사랑은 도대체 뭘까? 우민으로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서진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숨 막히는 삶에서, 서진이 자신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밀회는 성공인 셈이었다. 옷을 완전히 벗은 우민이 자신의 페니스를 살살 문질렀다. 손가락을 뺀 뒤 꼿꼿하게 선 페니스를 서진의 안으로 넣었다.
“하으… 응… 아응….”
우민의 페니스가 들어오자 서진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 반응을 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우민이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애달픈 신음이 났다. 우민과 섹스를 할 때마다 우민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손길 하나하나에 그런 섬세한 배려가 묻어났다. 그 배려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흐, 응….”
“후, 읏. 서진아….”
“으… 교수님 흑….”
움직임이 거칠어질수록 서진은 더욱 확실하게 우민의 목을 안았다. 조금이라도 오래, 조금이라도 더 많이 우민을 느끼고 싶었다. 서진의 안은 우민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이고 있었다. 울컥, 우민이 서진의 안에 사정을 했다. 배 속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에 서진이 가파른 숨을 몰아쉬었다. 우민이 페니스를 빼려 하자 서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 왜?”
땀에 젖은 우민이 서진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조막만 한 입술이 벌어지며 신음이 아닌 목소리가 나왔다.
“더. 더 해요.”
한 번의 사정만으로는 부족한 듯 서진이 또 다시 우민을 조였다. 이만큼으로는 안 됐다. 박기욱은 짜증이 나고 지독할 정도로 미운 사람이지만, 늘 서진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그런 기욱의 거친 섹스에 익숙해진 서진이 한 번의 사정과 삽입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민은 서진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박기욱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앞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서진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서진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본인도 모르는 매력이 있었다. 우민이 서진의 앞쪽으로 몸을 살짝 숙여 입술을 덮었다.
“침대에서 할까?”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반쯤 젖은 몸이지만, 우민과 서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침대 위로 올라가기 무섭게 서로의 몸을 정신없이 탐했다.
“하응, 응… 흐… 응….”
허벅지를 잡고 있는 그 손이 우민의 손이라는 굳이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서진은 시헌과 사귀었을 때 시헌이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섹스에, 몸을 섞는 행위에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의 입장이 되고 나니 시헌이 했던 말의, 행동이 하나하나 가슴에 와 닿았다. 그 시절에는 시헌의 사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우민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난 뒤부터, 시헌이 어떤 기분으로 자신을 바라봐 왔는지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미어졌다.
사랑은 실패하면서 하는 거라고 하지만, 시헌과의 사랑은 실패한 사랑이라고 하기엔 그 대가가 너무나 컸다. 손을 뻗은 서진이 우민의 목에 걸려 흔들리는 목걸이를 만졌다.
시헌이 그렇게 반지를 맞추고,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이유를 너무 늦게 알았다. 그 당시엔 시헌의 사랑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우민과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왜 이렇게 박기욱과 박시헌은 다른 걸까. 시헌에게 받아 온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후회가 들면 들수록 우민을 더욱 원하게 됐다. 우민만큼은 시헌처럼 상처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서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사랑을 주고 있었던 시헌인 만큼 서진도 우민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흐… 하읏….”
우민의 사정에 서진의 몸이 침대 위로 살짝 뜨더니 침대 위로 풀썩 떨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은 조금 더, 더 많이. 어쩌면 박기욱보다 더 많이 해도 괜찮은데. 창밖으로 아직도 날이 훤한 것이 보였다.
“밤에 또 해 줄 거죠?”
“이 자식. 작정했구만.”
“당연하죠.”
서진이 어설프게 웃으며 대자로 침대에 누웠다. 서진은 제 옆에 누운 우민과 얼굴을 마주 봤다. 서진의 거친 페이스에 맞춰 가려니 우민도 지치긴 한 모양이었다.
“젊은 게 좋다.”
“저도 늙었어요.”
“이게 진짜 늙은이 앞에서 뭐라는 거야.”
“창창하시잖아요.”
우민이 이불을 덮자 서진이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우민의 가슴에 손을 댄 서진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제가요,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언젠데?”
“행복할 때랑요. 죽을 것처럼 괴로울 때요. 행복할 때는 이 행복이 일 분, 일 초가 너무 아까워서 그렇구요. 괴로울 때는 정말,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시간이 멈춰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을 때 그런 생각을 해요.”
우민의 허리를 안은 서진은 어린아이처럼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유학을 가는 현정과 함께 시헌의 생일날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 위에서 찍은 사진, 시헌과 산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던 것도 있지만 사진을 좋아하지 않은 서진이 두 사람과 찍은 사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헌과, 유학을 앞둔 어린 현정도 그럴 것이다. 그 순간을 평생 잊지 않기 위해. 그건, 어린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사진이 아닌 가슴으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지금은 박기욱에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이런 식으로 몰래 만나는 게 전부지만, 언젠가 당당하게 사귈 수 있을 때가 된다면 아아, 그래. 서진도 그들처럼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서진은 뜬눈으로 우민을 꼬옥 껴안았다. 삼십 분 정도 자다 일어난 서진은 저녁 무렵에 정신을 차려 우민과 식사를 한 뒤 잊기 힘든 오붓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