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5 나는, 널 사랑할 자신이 없어 (70/83)

Chapter. 65 나는, 널 사랑할 자신이 없어

119 구급차 안, 시헌은 급한 대로 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영은 시헌의 얼굴을 보고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을 잃었다.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더 나았다. 시헌이 다급하게 라인을 잡으며 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뭐?? 야, 잠깐만 영상으로 다시 걸 테니까 받아.

말을 하는 것도 아까운 시헌이 휴대폰을 앞쪽에 있는 구급대원에게 건넸다. 휴대폰 화면 바깥쪽과 안쪽 모두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휴대폰 너머의 의사들이 바뀌었다. 급하게 내려온 교수인 모양이었다. 차분하게 응급처치를 하던 중 윤영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왔다. 어쩔 줄 모르는 부모를 뒤로하고 시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서진이었다.

“강서진!!”

구급차 안을 본 서진이 급하게 사람들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왔다. 시헌은 서진에게 자리를 넘겨준 뒤 건너편으로 돌아섰다. 슬슬 출발하려던 찰나 구급차 안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시헌의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야, 박시헌! 뭐 해?”

“잠깐만.”

구급차 밖으로 몸을 빼낸 시헌이 근처에 있는 형사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가 시헌에게 다가왔다. 시헌은 사람들 틈에 있는 남자를 흘끗 보더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걸었다.

“현장에서 진흙 묻은 워커 족적을 봤어요. 물에 안 젖은 거.”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시헌은 CCTV를 정확히 보지 않아 남자의 인상착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신은 워커가 부자연스럽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시헌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형사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남자의 뒤로 돌아섰다. 남자를 붙잡는 듯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시헌이 문을 닫으려 했고 현정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뭐라도 하게 해 줘.”

“제길!”

구급차가 출발하는 와중에 내리라고 할 수도 없었던 시헌이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술을 마친 시헌이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기자들이 잠시 마스크를 내리는 시헌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혹시 수술은…….”

“저한테 묻지 마세요.”

시헌은 현정의 이모와 현정을 안쪽으로 불러 진행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한동안 중환자실에서 상태를 지켜봐야 할 문제라는 말에 끝내 현정의 이모가 울음을 터트렸다. 한숨을 쉰 시헌이 말없이 두 사람을 달랜 뒤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윤영을 옮긴 뒤 정혁이 팔짱을 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은 했어도 일은 정혁의 생각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김 교수랑 브리핑할 건데 너도 와.”

“저요?”

“그래, 너 현장에 있었잖아. 최초로 응급처치 한 의사고.”

“강서진은요?”

“걔는 안 되는 거 알잖아.”

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서진이 언론에 들어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박기욱은 서진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왜 거기 갔냐고 한 소리를 들었을 서진을 생각하면 시헌은 역시 서진을 돌려보냈어야 했나 하고 후회가 들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시헌은 윤영의 상태를 한번 살핀 뒤 중환자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한동안 집에 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자신이 집에 가지 않음으로써 윤영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까짓거 병원에 몇 달이든 남아 줄 수 있었다. 피곤한 듯 이마를 짚은 시헌이 걸음을 멈췄다. 복도 건너편에 현정이 있었다. 아직 병원에 남아 있었구나. 말을 걸려고 다가가자 기둥 뒤로 팔짱을 끼며 짜증이 난 듯한 도원이 현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 미쳤어? 박시헌이랑 거길 대체 왜 가!!”

“시헌이 중학교 친구야. 얼굴 한번 보자고 한 게 뭔 잘못인데?”

“병원에 찾아왔으면 됐잖아! 내 말이 우스워?”

짝, 하고 도원이 현정의 뺨을 때렸다. 휘청거리는 현정의 몸을 본 시헌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나타난 시헌에 도원이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아흑…!”

도원이 채 말을 하기도 전에 시헌의 주먹이 도원의 얼굴을 때렸다. 몸이 휘청거린 도원이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헌이 주먹을 쥐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대기실의 기자가 다가왔다.

“저기 이윤영 어린이 보호자시죠? 무슨 일인가요?”

“윤영이랑 상관없으니까 신경 끄세요!”

현정이 그만하라며 손을 저었다. 안 그래도 윤영이 사건 때문에 병원은 민감해져 있는 상태였다. 타이밍 좋게 복도로 나온 정혁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너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너, 박시헌 너…! 가만 안 둬!!”

“씨발, 안 닥쳐? 내가 분명히 현정이 건들지 말라고…….”

“박시헌! 입은 네가 닥쳐. 들어가 너.”

정혁이 그만하라며 시헌과 도원 사이를 말렸다. 이놈의 의사들은 왜 이럴까. 화가 나면 주먹부터 쓰는 사람들이 많은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숙인 현정이 시헌의 가운 자락을 잡아당겼다. 현정의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본 시헌이 마지못해 현정의 팔을 붙잡고 등을 돌렸다.

“야, 장현정! 넌 걔랑 가면 안 되지!”

“김 선생, 입 다물어.”

정혁이 시헌과 현정에게 가라며 눈치를 준 뒤 도원과 남아 사태를 수습했다. 시헌은 현정의 팔을 잡고 비어 있는 당직실로 들어갔다.

“너 도대체 그 개자식이랑 왜 사귀는 거야?”

“너, 너랑 상관없잖아.”

“맞으면서까지 그런 놈이랑 사귀어야겠냐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원의 폭력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도원만큼이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현정의 선택이었다. 시헌이 아는 현정은 이런 선택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대체 현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랑 결혼해 줄 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마.”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시헌의 반문에 현정이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하면 입을 닫지 않은 현정이 작정하고 침묵을 유지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헌은 예전부터 현정의 침묵에 약했다. 조금은 화를 누그러트린 시헌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뭐?”

“기, 기욱 오빠도, 서윤 언니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 아니라면서. 그러면 너도 할 수 있잖아!”

“형은 형이고! 나는, 널 사랑할 자신이 없다고 했잖아!”

어쩌면 현정이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시헌은 어떤 여자가 와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틀 수 없었다. 사랑을 연기할 수 있는 기욱과 시헌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시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연기할 수가 없었다.

“박시헌, 착각하지 마. 누가 날 사랑해 달라고 그랬어? 나, 난! 그냥 날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고!! 사랑받을 생각도 없고, 사랑할 생각도 없어!!”

“진심이야?”

“내가 한 번이라도 네 앞에서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있어?”

“미안, 다음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헌이 등을 돌렸다. 현정은 등을 돌리는 시헌의 수술복 자락을 붙잡았다. 시헌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떨렸다. 시헌아. 어린 시절 얼마나 많이 불러 왔던 이름이던가. 미국으로 떠나던 그날 이렇게 오랫동안 시헌의 이름을 못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 왠지 모르게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과 친척들은 일이 해결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며 현정을 달랬다. 기약 없는 미국 생활에 지쳐 갈 무렵 현정은 이미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은 없어.”

“……뭐?”

“나 곧 결혼해.”

시헌의 휴대폰에서 연락이 왔다. 상당히 급해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곧 자리를 떴지만, 시헌 역시 복도에 서 있는 현정을 두고 발을 떼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현정과 헤어진 뒤 내리 한 달을 병원에 살다시피 했다. 한참 휴가철이라 사고를 당해 병원에 온 사람도 많을뿐더러 병원도 휴가를 낸 사람들로 인해 인력이 부족했다. 아쉬울 것 없이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고생을 하는 것은 이 시즌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시헌은 인턴 시절을 제외하고 레지던트 생활 3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휴가를 간 적이 없었다. 하물며 병원 로비 편의점 알바도 휴가를 간다고 단기 알바생을 쓰는 마당에 병원에 남아 있는 스스로가 참 허탈하게 느껴졌다.

날이 무더웠다. 병원 밖을 잠시라도 나갔다가 들어오면 화상을 입을 것처럼 피부가 따가웠다. 윤영이의 사건만큼이나 이번 여름은 지독하리만큼 더웠다. 시헌은 편의점에서 사 온 봉지 안에서 고카페인 음료수를 꺼내 홀짝이며 의국으로 들어갔다.

잠시 볼일이 있어 들른 것뿐인데 의국 안이 소란스러웠다. 마침 도원이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나눠 주고 있었다. 도원을 포함해 시헌을 본 레지던트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의 손에는 흰색의 두꺼운 고급 종이로 되어 있는 청첩장이 들려 있었다. 도원은 한 개씩 나눠 준 청첩장을 뭉치로 들고 있었다. 도원이 시헌에에 청첩장을 건넸다.

“다음 달에 결혼해.”

“어, 그래.”

“병원에서는 치프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와 줬으면 좋겠는데.”

“생각해 볼게.”

뻔뻔한 새끼.

도원이 건네준 것은 어린 시절 학교 아이들에게 돌렸던 생일 초대장이 성인이 되어서 결혼식 청첩장으로 글씨가 다르게 프린트된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성의 없이 청첩장을 챙긴 뒤 필요한 자료가 담긴 외장 하드를 챙긴 시헌이 의국을 나왔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가득한 엘리베이터의 구석에 자리한 시헌은 음료수 캔을 입 끝으로 물며 청첩장을 살짝 펼쳐 그 안을 확인했다.

‘나 곧 결혼해.’

그 뒤로 현정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시헌이 바빴던 것도 있지만, 서로서로 피하고 있음이 명백한 상황이었다. 간혹 윤영이 병문안을 올 때면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현정을 본 것이 어제 오후 무렵이니 청첩장 정도는 제 손으로 줘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아니, 시헌은 알고 있었다. 현정이 이 결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자신의 손이 아닌 도원의 손으로 청첩장을 받는 순간부터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계속 있다가는 지하까지 내려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연결된 통로를 통해 외상센터로 들어갔다. 정혁에게 간신히 1시간 정도 점심시간을 허락받고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사 센터로 돌아온 시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근처의 쓰레기통에 도원이 준 청첩장을 버리는 것이었다. 시헌이 버린 청첩장이 쓰레기통 사이에 걸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그새 그걸 주워 시헌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치프쌤, 이거 떨어지셨는데요?”

“버리는 거예요.”

시헌은 청첩장을 건네는 간호사의 손을 쳐 내며 비어 있는 정혁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외상센터는 전쟁이다. 전쟁터 중에서도 최전방이다. 우민은 외상센터를 전쟁이라는 단어 말고 달리 표현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전쟁터는 전쟁터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박기욱에게 폭력을 휘둘러 사실상 좌천되다시피 해 넘어왔다고 해도, 2년이 지난 지금 정혁은 아예 센터에 못을 박고 있었다.

생과 사가 오가는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당장 눈앞에 있는 고민 따위는 사소하게 느껴졌다. 현실 도피라는 걸 알면서도 모든 걸 잊어버리며 당장의 현실에 집중하는 그 순간이 마약처럼 짜릿하게 다가왔다. 인턴 시절에 조금만 더 생각이 있었다면 신경외과보다는 응급의학과를 선택했을지도 몰랐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우민은 정혁의 냉장고 안에 넣어 뒀던 바나나우유와 삼각김밥을 챙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제 연구실도 있지만, 센터에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좁은 창고가 더 제집 같았다. 빨대를 꼽은 뒤 바나나우유를 홀짝인 우민은 창고 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시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깜짝 아!! 너 뭐야!!”

딱히 누군가 들어오는 걸 금지한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박시헌이 자신의 임시 사무실 안에 있을 줄은 몰랐던 우민이 깜짝 놀랐다. 성인 남자 두 명만 들어와도 정신이 없는 창고에서 선반과 선반 사이의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시헌을 본 우민은 시헌이 확실히 체구가 작긴 작구나 하고 실감을 했다. 평소엔 어깨 쫙 펴고 다니던 시헌이라 체격이나 키가 작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지만, 기운 없이 쭈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의사 가운을 훔쳐 입은 고등학생 같았다.

우민의 인기척에 고개를 든 시헌이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2년 동안 우민도 시헌에게 잔정이 든 상태였다. 미운 정도 정이었다. 같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 시무룩해 있는 시헌은 처음 본 우민이 당황하며 반쯤 마시던 바나나우유를 시헌 쪽으로 살짝 내밀었다.

“먹을래?”

무슨 먹이 주는 것도 아니고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시헌이 코앞으로 다가온 바나나우유를 멍하나 바라봤다. 입을 다물고 있는 시헌이 답답한 우민이 짜증을 냈다.

“아씨, 먹기 싫음 말고.”

우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헌이 우민이 마시던 바나나우유를 낚아채 입에 물었다. 먹을 거면서. 좀 아깝긴 했지만, 우민은 한쪽에 있는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왜 왔어?”

“마땅히 숨을 데가 없어서요.”

“너 이 자식 외과 치프가 숨을 짬이냐?”

어딘가 숨어 있는 것은 인턴들이나 할 만한 짓이었다. 여태껏 잘해 왔던 시헌이 이제 와서 갑자기 늦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민이 알기로 시헌은 힘들다는 이유로 월초에 몇 개월간 다른 병원에 지원을 나갔다 온 상태였다.

“사람이 숨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죠.”

태연하게 바나나우유를 마시는 시헌은 당당했다. 우민은 시헌의 앞에 놓인 편의점 봉지 안을 멋대로 열었다. 밥을 먹으려고 사 온 모양인데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나나우유 대신이라고 생각한 우민은 시헌이 마시려고 산 사이다를 꺼냈다.

“하긴, 말년이 가장 좆같긴 하지. 무슨 일인데?”

박기욱과 박시헌은, 비슷한 듯 달랐다. 우민이 느낀 시헌은 박기욱스러운 면이 있으면서도 비교적 박기욱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인간적이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 우민의 눈에는 보였다. 우민은 시헌이 이제 와서 말년 병장 같은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민이 잘 알지 못하는 뭔가가, 시헌의 기분을 무척이나 심란하게 흔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헌은 우민이 준 바나나우유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제야 우민이 자신이 먹으려던 사이다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 제 건데요.”

“바나나우유 줬잖아!”

“교수님은 먹던 거고, 사이다는 새거잖아요.”

“교수가 먹던 우유랑 치프가 산 사이다랑 비교가 돼?”

어린아이도 안 하는 유치한 말싸움에 시헌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민이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헌도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있는데요. 결혼하자고 그래요.”

사이다를 마시며 전자레인지에 돌린 삼각김밥을 뜯어 먹은 우민이 시헌의 발언에 대해 잠시 고민을 했다. 시헌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헌이 여자를 보는 눈을 우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고백에 발목을 잡히는 건 시헌답지 않았다. 거절하면 그만일 일은 고민할 만한 가치가 되지 않았다.

“그 중학교 친구가 널 좋아하는 게 문제야?”

“잘 모르겠어요. 절 좋아하는 거 같진 않은데. 게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고 그래서, 이해가 안 돼요.”

“나 임 선배한테 들었다. 너 요즘 막 무슨 선보러 다닌다면서?”

“좀 된 거긴 하지만요.”

윤영이 사건에 시헌이 얽힌 걸 엄마가 알게 된 탓인지 엄마는 전문의를 따고 생각하자며 시헌의 결혼이니 맞선에 대해서는 나중으로 미뤘다. 원치 않게 얼마 정도 시간을 벌게 된 셈이었다. 우민은 빈 사이다 캔과 삼각김밥 쓰레기를 모아 버린 뒤 손을 닦았다.

“게이인 거 알면서도 결혼하자 그러는 거면 땡큐 아니냐? 너네 집안, 결혼이면 되는 거잖아.”

남의 집 이야기라는 걸 알 정도로 냉정한 말이지만, 동시에 사실이었다. 우민이 나중에 들은 사실로는 시헌의 집안 첫째. 박하연도 의대생 시절 박기욱 못지않게 잘 노는 걸로 유명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유부남을 그렇게 많이 건드려 유부남 킬러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지금은 어딘가의 제약회사 이사와 결혼을 해 애까지 낳고 잘 사는 모양인데, 그게 보여 주기식인지 아니면 진짜인지는 당사자들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박하연에 박기욱만 봐도 그런 상황에서, 우민은 게이라는 시헌이 여자가 아닌 남자들을 꾀고 다니지 않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시헌은 형과 누나가 으레 그렇듯 사람을 꾀는 매력이 있었다. 시헌도 알게 모르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민의 말대로 만약 현정이 아닌 다른 여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우민에게 현정을 중학교 친구라고 말한 것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시헌이 머뭇거리고 있는 건 현정이 중학교, 초등학교 동창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장현정이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현정과 시헌의 관계는 두 사람이 아닌 이상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친구 이상, 그러나 한 번도 연인이었던 적은 없다.

은소는 죽었다. 그날 개발이 중단돼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 옥상에서 웃으며 생일파티를 했던 네 사람은 다 흩어졌다. 남은 것은 미국에서 돌아온 현정 하나뿐이었다. 자신과 서진은 아니더라도 현정만이라도 웃으며 행복하길 바랐다.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된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현정이 행복하길 원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시헌은 현정이 다른 여자들처럼 평범하게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결혼을 하는 순간 현정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미안하잖아요.”

시헌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우민에게 할 소린 아니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랑이 뭘까, 그런 거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혼이라는 족쇄로 현정이 언젠가 만날 누군가와 할 사랑을 강제로 빼앗고 싶지 않았다.

시헌의 말로 우민은 모든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었다.

“나 강서진이랑 잤다.”

시헌이 고개를 들며 우민을 노려봤다.

“지금 저랑 싸우자는 거예요?”

우민은 시헌이 고개를 들기 무섭게 수술복 안쪽에 가려져 있던 목걸이를 꺼내 시헌에게 보여 줬다. 어느 순간부터 우민이 목걸이를 차고 다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목줄의 길이가 길어 옷 아래로 내려갔던 탓에 목걸이 끝에 뭐가 있는지를 정확히 본 사람은 없었다.

우민의 목걸이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14K 이니셜 목걸이였다. 자기랑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왜 저런 걸 하고 다니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강서진, 우리 건너편 오피스텔에 살았던 거 기억해?”

“이사 간 후에 들어서 알아요.”

우연히 기욱이 잡아 준 오피스텔 건너편에 우민이 산다는 사실보다 시헌은 그 사실을 서진이 숨기고 있었던 것이 더 대단했다. 하긴, 강서진은 몇 년이나 박기욱에게 자신과 연애한다는 사실을 숨겼던 사람이었다. 건너편에 우민이 산다는 사실을 입단속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기욱은 곧장 서진의 오피스텔을 옮겼다. 우민 또한 서진이 오피스텔을 나온 지 알면 되지 않아 다른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2년 전에, 그 일 있고 서진이가 먼저 이사 갔는데 내 우편함에 넣어 주더라.”

제 이름이 적힌 목걸이를 서진이 무슨 생각으로 두고 갔는지는 몰라도, 우민은 서진의 마음을 헛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우민이 외상센터에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부터 목걸이를 차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브랜드가 어디예요?”

“어? KI·S라고 쓰여 있는데 왜?”

뜬금없는 질문에 우민이 목걸이를 뒤집어 브랜드 이름을 확인했다. 우민의 대답에 시헌은 그럴 줄 알았다며 중얼거렸다.

“서진이랑 제가 처음 반지 맞췄을 때 그 브랜드에서 샀어요.”

“너네 커플링 브랜드냐.”

목걸이의 비밀을 알게 된 우민은 허무하다며 중얼거렸다. 이런 걸로 서운해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 애인 커플링 브랜드는 좀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조금 들었다.

“사귀어요? 강서진이랑?”

“아직. 사귀고 있으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있겠냐.”

징계로 내려왔다가 자발적으로 머문 거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우민이 신경외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상센터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발목을 묶고 있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민의 징계는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우민은 목걸이를 다시 안쪽으로 넣었다. 어느새 1년 차에서 시헌과 마찬가지로 신경외과 치프가 된 서진을 불현듯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우민은 보란 듯이 목걸이를 차고 다녔다. 서진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음만 같이하는 중이야.”

“그게 뭐야.”

“몸도 마음도 따로따로인 너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팩트 폭행하지 마세요. 마음 아프니까.”

태연한 척 굴어도 뭘 하든 현재 상황에서 서진에게 승자는 시헌이 아닌 우민이었다. 뭘 어떻게 하든 서진과는 옛날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민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시헌의 가슴 한쪽이 시큰시큰 아렸다. 우민이 시헌의 어깨 위로 가볍게 손을 올렸다.

“강서진 미련 버리고 다른 사람 찾아.”

“미련은 진작 버렸어요.”

“거짓말하지 마.”

시헌이 신경 끄라며 우민의 손을 옆으로 밀어냈다. 눈물이 고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억울하긴 한 모양이었다. 사람마다 아픔의 정도는 다르지만 때로는 긴 아픔이 인생에 발목을 붙잡는 일도 있었다. 시헌은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너무 좋았다. 시헌을 이렇게까지 빠지게 만든 강서진이라는 인물이 특이한 걸지도 몰랐다. 요즘 들어 우민은 알게 모르게 기욱이 서진에게 목을 매는 이유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강서진은 보면 볼수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물어본 적 있어?”

“뭘요?”

“그 여자? 애가 왜 너한테 결혼하자고 말하는지.”

시헌이 말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시헌이 여자에 대한 연애감정이 없는 만큼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우민은 알고 있었다. 중학교 친구쯤 되면 시헌의 그런 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시 레즈일지도 모르잖아.”

“걔 레즈 아니거든요?”

“그건 네 생각이고.”

우민의 반박에 시헌의 고개가 또다시 숙여졌다. 그 모습이 마치 폭삭 익은 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간에 도는 소문이나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복잡한 생물이었다. 언제까지 창고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던 시헌이 옷을 털고 일어났다.

“조금은……. 알 거 같아요.”

“그럼 됐고.”

우민은 한숨 자야겠다며 침대에 누웠다. 우민과 이야기를 하고 나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발밑에 있는 이불을 꺼내 덮는 우민을 향해 시헌이 잘 자라며 꾸벅 인사를 했다. 나가는 시헌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우유 갚아라.”

“맛도 없는 거.”

시헌이 가볍게 중얼거리며 창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쉬는 시간을 10분 넘게 초과한 데다 시헌을 찾으러 온 정혁에게 타이밍 좋게 걸린 시헌은 잔소리를 들을 틈도 없이 현장에 투입됐다. 정혁이 한 짓이라고는 밤을 꼬박 새운 시헌을 불러 꿀밤을 한 대 때린 것이 전부였다. 정혁이 전쟁이라고 말하는 센터는 후배 의사를 붙잡고 혼낼 여유조차 없었다.

정혁에게 꿀밤을 맞고 오늘 휴식은 없다는 소리를 들은 시헌은 밥 대신 서서 다이어트 콜라로 점심을 대신하며 정신없이 병원을 뛰어다녔다. 예민할 대로 잔뜩 예민해진 시헌은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자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기계처럼 어깨에 휴대폰을 껴 전화를 받았다.

― 네. 박시헌입니다.

― 시헌아…… 살려 줘…….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던 일을 손에서 놓았다. 통화하는 시헌을 본 손이 빈 3년 차 의사가 시헌의 손짓을 눈치채고 재빨리 시헌의 일에 뒤를 이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후배에게 뒷일을 맡긴 시헌은 기둥 뒤에 숨어 전화를 계속 받았다. 시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너 어디야? 씨발, 미친 거 아닌…… 알았어. 장현정, 전화 끊지 말고 주소 보내.”

시헌이 다급하게 정혁의 연구실 문을 벌컥 열었다. 난데없이 쳐들어온 시헌에 책상에 앉아 있던 정혁이 깜짝 놀랐다. 시헌은 멋대로 정혁의 책상 옆에 있는 라커 문을 열었다.

“야야, 박시헌 너 뭐 해?”

“교수님 옷 좀 빌리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잠시 외출 좀 하겠습니다.”

라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일분일초가 급했던 시헌은 목에 걸치고 있던 마스크와 신발만 대충 갈아 신은 뒤 정혁의 겨울 코트를 꺼내 대충 걸쳤다.

“야, 야 이 뭔 미친 소릴 하는 거야 갑자기?”

“갔다 와서 설명하겠습니다.”

“씨발. 야! 하, 저 자식 말년 되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거야? 왜 저래? 야!! 오늘 안에는 돌아와라!!”

무슨 일인진 몰라도 시헌이 다급해할 정도면 정말 급한 일이라고 생각한 정혁이 연구실을 나가는 시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센터 밖으로 나온 시헌은 병원 근처에서 다급하게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아 탔다. 타이밍 좋게 현정에게서 온 카톡으로 병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전화를 걸까 고민도 해 봤지만, 괜히 자신이 전화를 걸어 현정이 더 피해를 보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지갑을 챙기는 것도 까먹었던 시헌은 정혁의 주머니에 있는 카드로 대충 계산을 했다. 나중에 한 소리 듣겠지만,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306호 오피스텔이 있는 복도로 들어가자 쿵쿵거리는 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현정의 목소리라는 걸 안 시헌이 입술을 깨물며 정혁의 잠바에 있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벨을 눌렀다. 인터폰 너머로 예상했던 남자―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세요?

― 택배입니다.

― 택배 시킨 적 없습니다!

― 김도원 씨 아닌가요?

다시 오피스텔 복도 너머로 쿵쿵 소리가 들렸다. 잔뜩 화가 난 도원의 발걸음 소리였다. 도원이 철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택배 시킨 적 없다고…!! 너 박시헌…!”

도원을 밀치고 시헌은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딱 봐도 누군가 싸운 흔적이 가득한 집 안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헌에게 도움을 요청한 현정은 없었다. 멋대로 집안을 뒤지는 시헌에 놀란 도원이 시헌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장현정 어디 있어?”

“하, 씨발년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너랑 알 거 없잖아!”

“장현정.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도원의 팔을 잡아 누른 시헌이 멱살을 붙잡았다. 시헌에게 멱살을 붙잡힌 도원의 시선이 굳게 닫힌 안쪽 방문을 향하고 있었다. 안쪽 방이군. 시헌은 도원을 뿌리치며 닫힌 방문을 활짝 열었다.

“흐흑… 시헌아….”

문을 열자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현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엉망이 된 화장이며 산발이 된 머리, 얼굴 양쪽에는 뺨 자국이 가득했으며 눈가와 입은 퉁퉁 부어 있었다.

네 사람 중, 현정만이라도 행복하길 바랐다.

적어도 시헌이 기억하는 현정의 행복은 이런 식으로 남자에게 맞으며 눈물을 흘리는 행복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네 사람이 불행했던 이유와 학교에서 겉돌았던 것이 사실은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찰나의 시간 동안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숨이 막혀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현정도 처음부터 똑같았던 걸지도 모른다. 등을 돌리자 잔뜩 화가 난 시헌에 도원이 알 수 없는 변명을 했다. 차마 오고 갈 수 없는 말들을 무시한 채 도원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 소란을 느낀 경찰이 문을 두드렸다. 그건, 상대방과 싸운다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어떻게 저 작은 체구에서 저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도원은 일방적으로 시헌에게 맞았다.

경찰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도원에 대한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도무지 제압되지 않는 시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경찰들을 본 현정이 시헌의 허리를 안았다.

“시헌아… 시헌아!!”

“…….”

현정의 얼굴 이상으로 퉁퉁 부은 도원의 뺨을 후려치려던 시헌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시헌의 등에 얼굴을 묻은 현정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그만해…….”

“……놔.”

“그만해! 제발, 난 괜찮으니까 그만하자? 시헌아 제발.”

현정이 애원하듯 매달렸다. 도원을 때리려던 시헌의 손이 현정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헌이 눈을 돌리자 도원이 기겁을 하며 도망치듯 가구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달라진 것이 없었다. 떨고 있는 도원에게 구급대원이 다가간 것처럼 현정에게도 구급대원이 다가왔다. 시헌은 현정의 얼굴에 손을 대려는 남자 구급대원의 손을 치워 냈다. 도원을 패던 모습을 눈앞에서 봤던 구급대원은 갑작스러운 시헌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중간에 낀 현정만이 시헌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알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기 그…….”

“의사입니다.”

시헌이 입고 온 코트 사이의 수술복을 본 구급대원이 적당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은 현정을 데리고 병원으로 들어왔다. 뒤를 이어 구급차를 타고 도원도 병원에 도착했다. 다른 병원에 가도 될 걸 굳이 J대 병원으로 온 걸 보면 작정하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은 현정을 비어 있는 처치실에 앉혔다.

“괜찮아? 검사 좀 할까?”

시헌이 현정의 찢어진 이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꿰맨 뒤 검사를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취하고 현정의 이마 근처로 바늘이 들었다. 박시헌 나오라며 소리를 지르는 바깥과 달리 커튼 안쪽은 마치 다른 세계처럼 현정과 시헌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시헌이, 잘하네.”

“의사잖아.”

“의사 안 할 거라고 했었던 사람이 누구였지?”

현정이 눈을 살짝 치켜뜨며 시헌을 바라봤다. 이내 움직이지 말라는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는 싫다. 지금도 좋은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숙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인 채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현정은 시헌보다 더 시헌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밴드 붙여 줬을 때?”

“그거 기억해?”

“초등학교 2학년 때. 네가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은 나라면서 여자 친구랑 싸웠잖아. 강서진 처음 만날 때.”

여자들의 싸움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시헌이 끼어들어 말렸지만, 시헌은 끝내 현정의 편이었고 그 자리에서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때부터 시헌은 이미 여자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이 함께했던 시절만 생각하면 서진이 먹던 초콜릿은 왜 이렇게 맛이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초콜릿을 지금 먹으면 달고, 텁텁하기만 한데 말이다. 지금의 시헌은 그 시절의 시헌처럼 맛있게 초콜릿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시헌이 현정의 처치를 하는 사이 도원의 입을 간신히 막은 정혁은 입을 닥치게 한 뒤 커튼 안으로 들어왔다. 난데없이 옷을 입고 나가 피투성이가 된 여자를 데려오질 않나, 결혼을 앞둔 같은 과 레지던트를 똑같이 두들겨 패 버리질 않나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하물며 그 레지던트가 결혼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예비신랑이라면 할 말 다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고소를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도원의 입에서는 시헌을 고소하느니 어쩌니 하는 말이 오고 가고 있었다.

시헌이 생각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도 무엇이 시헌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윤영이 사건으로 정혁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현정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정혁이 상처투성이로 앉아 있는 현정의 인사를 받으며 시헌과 눈치를 주고받았다.

“들어도 돼요. 그 개자식 여자 친구니까.”

“……뭐? 그게 무슨……. 맙소사.”

딱 봐도 맞은 흔적이 가득한 현정이 도원과 결혼을 앞둔 여자라는 걸 들은 정혁이 이마를 짚었다. 외과 애들 사이에서도 사고 몇 번 치고 또라이라고 단단히 찍히긴 했는데, 자신의 예비신부를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때릴 만큼 정신이 나간 놈이라는 건 또 신박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문제에 정혁이 이마를 짚었다.

“하, 같은 의사끼리 쪽팔리게 뭐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시헌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긴 한 모양인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사장 아들의 짓인 데다 사실상 병원 내부 일이니 의료계 내에서만 살짝 퍼지고 말 확률이 높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정혁도 시헌이 게이라는 건 안다. 그런데도 시헌이 현정을 구하러 갔다면 딱 봐도 사연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아닌 척하면서 왜 이렇게 인생 복잡하게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알아서 해라 알아서.”

정혁은 한숨을 쉬며 커튼 밖으로 나갔다. 애들 연애 싸움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헌은 의자 쿠션을 붙잡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현정의 손을 붙잡았다.

“현정아.”

“어?”

“결혼, 하자.”

현정이 더 행복해지길 바랐지 불행해지길 바란 건 아니다. 현정에게 도원과의 결혼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한다면 자신과 결혼을 하면 중간 정도는 갈 것이었다. 현정도 현정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시헌은 손에 힘을 줬다.

시헌은 한 번도 현정의 손이 작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부터 현정은 늘 시헌보다 컸다. 현정의 키가 큰 것은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오래 버티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연을 말하지 않아도, 현정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현정과 시헌의 관계가 친구 이상 연인 이하라고는 해도 말이다. 시헌의 결정에 현정의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현정은 시헌의 손을 놓은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묻지 않고 받아들여 줘서.

현정은 커튼을 열고 밖으로 나가 도원이 앉아 있는 침대의 커튼을 걷었다. 마침 도원이 한참 난리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야, 장현정. 너 미쳤어? 내가 다쳤는데 감히 저런 새끼 편을 들어?”

“파혼하자.”

“너, 너 지금……. 우리 결혼식 한 달도 안 남았어. 청첩장까지 다 돌린 거 몰라?”

“상관없어.”

현정은 단 한 번도 체면 차리고 인생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체면을 차리기에 현정의 인생은 흙탕물투성이였다. 윤영이가 당한 일. 그리고 어린 시절 현정이 당했을 뻔한 일, 현정을 대신해 죽어 간 여학생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과 똑같은 나이가 되어 그녀 또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자가 되었을 거로 생각하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여자를 위해서 보란 듯이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지금 너 나랑 장난해? 장현정!!”

“너, 같은 거랑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나.”

등을 돌리자 벽 한쪽에 몸을 반쯤 기대고 있는 시헌이 보였다. 벽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 팔짱을 끼는 건 어릴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살짝 튀어나온 손이 다가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현정은 도원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려 시헌에에 다가갔다. 현정이 다가오자 시헌이 기다렸다는 듯 벽에서 몸을 뗐다.

“씨발, 박시헌!!!”

외상센터에는 한동안 시헌을 욕하는 도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시헌은 현정과 함께 새로 생긴 고급 식당을 방문했다. 아무 데나 상관없다는 시헌의 말에 현정이 멋대로 잡은 식당이었다. 병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시헌은 현정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시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일이 있고 이 주 만이었다. 오늘은, 원래대로라면 현정이 도원과 결혼식을 해야 했던 날이었다. 현정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나오는 애피타이저를 먹었다. 메인 코스가 나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각자 나온 식사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이유 중에 시헌이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후식이 나올 무렵에서야 배를 채운 시헌을 본 현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엎질러진 물이잖아. 그리고 그거 내가 할 소리잖아.”

시헌이 낮게 웃었다. 시헌과 있으면 안심이 됐다. 현정에게 세상은 들이쉬면 들이쉴수록 쌓이는 석면과도 같았다. 그렇게 쌓이고, 쌓이면서 점점 사람의 숨통을 조여 왔다. 숨을 막는 것 외에는 벗어날 방법이 없는 지독한 세상이었다. 현정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룸이 원형의 소파 형식으로 되어 있어 자리는 널렸다. 무릎 위로 올라온 시헌이 조용히 소파를 툭툭 건드렸다. 사람들이 지나가긴 했지만, 아무렴 곧 결혼할 건데 남들의 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현정이 몸을 약간 옮겨 시헌의 옆에 몸을 기댔다. 지나가는 직원과 눈이 마주친 시헌이 손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눈치 빠른 직원 하나가 현정을 보더니 후다닥 미닫이문을 닫아 줬다. 건너편 방에 앉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 직원들이 지나가는 소리만이 좁은 방 안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어깨에 살짝 몸을 기댄 현정이 고개를 들어 시헌을 바라봤다.

“나 미안해.”

“…….”

“널 이용했잖아.”

“장현정, 착각하지 마. 널 이용한 건 나야.”

여전히 앞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처럼 정면을 본 시헌이 디저트로 나온 떡을 입에 넣었다. 머리를 기댄 채로 옆에서 현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 오빠 같은 말 하지 마.”

“형제잖아.”

어쩔 수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헌에게 박기욱은 지독할 정도로 강한 애증을 지닌 존재였다. 현정과 결혼을 하면 왠지 모르게 자신도 박기욱과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설령 박기욱과 닮는 길이 되더라도 현정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현정의 덜 가라앉은 입술을 볼 때면 서진은 오피스텔에서 도원을 한 대라도 더 패지 않은 것이 후회가 들었다.

“처음이 아니야. 그렇게 맞은 거.”

“현정아.”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대학교 때도 그랬어.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어. 미국에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데. 술에 취한 남자의 힘이 그렇게 센 줄 처음 알았어. 처음이었거든. 남자랑 그렇게 몸을 섞는 게 역겨운 일이라는 걸 느꼈어.”

현정이 레즈가 아니냐는 우민의 말에 시헌이 아니라고 확신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현정에게 있어서 여자와 남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커피를 가져다주는 직원에 현정이 잠시 시헌에게서 몸을 뗐다. 시헌은 직원이 따라 주고 간 커피를 살짝 마셨다. 쓴맛이 거의 나지 않았다. 아니, 커피의 맛이 쓰다는 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도 꽤 반반하게 생긴 데다 다른 학생들보다 발육이 빨랐던 현정은 미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적응을 했다. 물론, 모든 게 다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 버티는 것만 생각했다.

“꼭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야. 진심으로 날 사랑해 준 사람도 있었어. 근데 할 수가 없더라고.”

몇 번이나 해 보려고 노력했고, 같이 잘하자고 했다. 끝끝내 지쳐 하는 남자를 본 현정이 그를 놓아줬다. 그쯤 되니 이제 남자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라고는 현정이 하나뿐인 부모님은 현정이 결혼을 하기를 바랐다.

혼자 살고 싶었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님을 생각하면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원과 교제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현정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공간도, 자신도 없었다.

시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자신과의 제안을 거절했는지도 알고 있다. 시헌은 다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입을 다물고 있어도 시헌과 눈을 마주치면 마치 알몸이 된 것처럼 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싫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시헌은 착한 사람이니까. 거절할 거라는 걸 알고 제안한 것도 맞았다. 시헌은 자신과 결혼을 하면 현정의 진짜 사랑을 빼앗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팔을 뻗자 시헌이 현정에게 커피를 가져다줬다. 조금 식은 커피에 설탕을 약간 넣어 마신 현정이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커피가 담인 잔을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널 이용하는 사람은 나야, 시헌아.”

“…….”

“결혼, 받아 줘서 고마워.”

현정이 진심이라며 시헌을 향해 웃었다. 이렇게 속 시원하게 남 앞에서 웃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이제야 좀 숨이 막혔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 * *

퇴근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라커룸으로 들어간 서진은 2G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나 하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기욱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아파트 가 있어.」 오후 2:45

서진은 기욱의 문자에 대답하지 않은 채 2G 휴대폰을 구겨 넣고 퇴근을 했다. 지긋지긋했다. 억지로 답장을 보내고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쓴 뒤 라커룸 안에 넣어 뒀던 배낭 가방에 책들을 구겨 넣어 병원을 나왔다. 슬슬 가을인 모양인지 날씨가 쌀쌀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기다리는 서진은 등 뒤로 높은 병원 건물을 올려다봤다.

병원 건물이 높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인턴 생활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주변에서 치프 소리를 들으며 전문의 시험을 공부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등 뒤에 있는 가방의 무게가 무거웠다. 고등학교 때는 이것보다 더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다녔던 것 같은데, 역시 어린 게 좋은 것이었다. 기욱도 어린 남자에게 눈을 돌리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하긴, 기욱의 나이에 서진보다 더 어린 남자를 만나면 그건 정말로 범죄였다.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아파트로 들어갔다. 많으면 일주일에 한 번, 적을 때는 이 주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는 아파트였지만 근 3년 동안의 흔적은 무시할 수가 없는 모양인지 텅 비어 있는 아파트는 제법 사람 사는 곳처럼 바뀌어 있었다.

기욱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서진은 곧장 방 안쪽에 텅 비어 있는 책상에 앉아 책을 꺼내 공부를 했다. 지금 해 두지 않으면 또 기욱에게 언제 시달려 공부하지 못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예전처럼 잘 굴러가지 않아서 기욱에게 시달리며 공부를 할 자신이 없었다.

“…진. 강서진.”

“아, 놀라라.”

“이어폰 좀 빼.”

서진이 이어폰을 빼 대충 감아 책상에 던진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커튼을 걷으니 밤이었다. 서진은 몇 달 전부터 노래를 들으며 공부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가 될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전문의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너무 피곤할 때는 이런 식으로라도 잠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욱을 본 서진은 목이 마르다며 거실에 있는 정수기로 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책상 위에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물을 반쯤 마신 서진이 기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요.”

어차피 볼 것도 없는데. 기욱의 의심병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 화면을 엄지로 살살 만졌다. 기본 배경의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린 기욱의 시선 끝으로 서진이 책상 위에 던진 이어폰이 닿았다.

“무슨 노래를 들었길래 들은 척도 안 해?”

“그냥. 아무거나요.”

“좋아하는 노래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기욱도 노래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가수는 잘 알지 못했다. 책상 위에 빈 컵을 올려놓은 서진이 눈을 깜박였다. 서진도 노래를 듣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아 노래를 잘 모르지만, 노래를 잘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관심 없었잖아요.”

“뭐?”

“나한테 관심 없었잖아요.”

“그냥 물어본 거야. 관심 가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게 그런 걸 왜 질문했지? 기욱도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에게 다가간 기욱이 턱을 들어 올리며 눈을 맞췄다. 지금은 키스 이전에 서진이 좋아하는 노래를 알고 싶어졌다. 갑자기 그런 호기심이 일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뭔데 그래서?”

“섹스하는 데 그거랑 상관있어요?”

“들으면서 할까?”

“짜증 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키스할 거면 하고 말던가, 서진은 연인처럼 간섭하는 기욱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을 치워 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서진은 기욱을 섹스파트너나 스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말하지 않아도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서진이 멍하니 서 있는 기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하지 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덤벼드는 주제에 오늘따라 왜 이런지 알 수가 없다. 서진은 한시라도 빨리 기욱과 하고 남은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제길, Coldplay(콜드플레이)요.”

그제야 기욱이 넥타이를 풀어 던지며 서진이 앉은 소파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리를 잡아당기는 기욱의 손은 몇 번을 당해도 익숙하지만은 않았다.

“좋아?”

“뭐가요?”

“그 가수, 노래 좋냐고.”

“가수 아니고 밴드, 영국 rock 밴드예요.”

“들어 볼게.”

평소라면 어, 그래.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을 기욱이 저런 반응을 보이자 서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뺨을 긁었다. 그사이 서진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기욱이 서진을 완전히 눕혔다. 아주 잠깐, 박기욱이라는 사람이 달라졌다는 기분 아닌 기분이 들었다.

섹스를 시작하고 난 뒤 그런 느낌은 기분 탓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실감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정신없는 섹스에 서진의 숨이 막혀 왔다. 기욱은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며 서진을 범했다.

“하…윽, 아응… 으… 하윽….”

“강서진 허리 더 움직여. 윽, 그래 그렇게.”

서진을 위로 올린 기욱이 서진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자세를 바꿔도 역시 마지막은 서진이 제 위에 올라타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떨리는 몸을 참으며 허리를 움직일 때의 그 조임이 좋았다.

“으윽, 아… 응… 아응… 아으윽!”

서진의 허리를 누른 기욱이 몸을 크게 움직였다.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거침없이 흔들었다. 서진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기욱의 페니스에 꽂힌 채로 몸을 떨었다. 기욱은 여전히 부풀어 있는 서진의 페니스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젠 안 싸고도 잘 가네.”

“하악, 으윽… 허으응…….”

기욱은 서진의 다리만큼이나 벌어진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욱의 양팔을 잡은 서진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기욱과 섹스를 할 때면 녹초가 됐지만, 우민과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이후 서진은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내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각오를 하고 우민에게 그런 목걸이를 보낸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한창 몸을 섞고 있을 무렵 기욱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어지간한 연락은 무시하려던 기욱은 전화를 건 상대가 서윤이라는 걸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의 몸을 돌려 위로 올라탄 기욱이 별안간 서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강서진 입 닥쳐.”

숨이 막힌 듯 헉헉대는 서진을 위해 손가락을 살짝 벌려 숨구멍을 만들어 준 기욱이 서윤에게서 온 전화 화면을 보여 줬다. 그제야 강서윤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서진은 기욱이 시키지 않아도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매번 그렇지만 서윤에게 전화가 오는 순간만큼은 몇 번을 경험해도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 자기야. 왜 그래?”

숨을 고르며 전화를 받는 기욱의 목소리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부드러운 말투였다. 한 손으로 휴대폰을 귀에 바싹 가져다 댄 기욱이 서진의 안에 페니스를 넣으며 살살 문질렀다. 몇 번인가 그만하라고 발로 기욱의 몸을 툭툭 건드렸지만, 기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올 때마다 서진을 강하게 노려봤다.

“으… 흐윽….”

“뭐? 시헌이가? 알았어. 집인데. 병원 갈게. 가서 이야기하자.”

서윤과 전화를 끊은 기욱이 휴대폰을 침대 밑으로 내던졌다. 서진의 다리를 활짝 벌린 기욱이 거칠게 자신의 페니스를 푹푹 찔러 넣었다. 통화 내용이 뭐냐고 묻기도 전에 덤벼드는 기욱에 서진은 기욱에게 안긴 채 몇 번이나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욱과 서진이 있는 방은 거친 숨소리와 질척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후… 하아….”

제멋대로 서진을 범하고, 만족했다는 듯 땀에 찬 앞머리를 쓸어 넘긴 기욱이 시계를 확인했다. 사실은 한 번 더 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서윤에게 말한 약속 시각에 늦을 것 같았다. 기욱이 다가가자 서진이 불안한지 손으로 몸을 가리며 물러섰다. 연속된 사정 탓인지 서진의 허벅지가 사정없이 떨려 왔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언제부터였지? 어느 정도 범하기 시작하면 서진은 섹스 중간부터 제정신을 못 차릴 때가 많았다. 마치 과거의 기억들이 트라우마가 되듯 서진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문 기욱이 말없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흠칫, 놀란 서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봤다. 멋대로 몸을 숙인 서진이 기욱의 귀두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우민이 외상센터로 내려가고, 서진은 단 한 번도 기욱이 시키는 짓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반항한 적이 없는 서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언제 또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욱은 제 페니스를 핥는 서진을 떼어 놓은 뒤 팔을 잡아 올렸다. 서진의 눈동자가 반쯤 풀려 있었다.

“…서진. 강서진.”

“…….”

“정신 차려.”

기욱이 손등으로 서진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흠칫, 깜짝 놀란 서진이 한발 늦게 정신을 차렸다. 기욱과 섹스를 할 때면 어느 순간부터 불현듯 의식이 끊길 때가 몇 번인가 있었다. 흐릿하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은 났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기욱은 대충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샤워할 시간은 없었다.

“강서진 정신 차리고 옷 입어.”

“왜요?”

“병원 갈 거야. 박시헌 와 있대.”

기욱이 장롱 안에서 옷과 속옷들을 꺼내 서진에게 던졌다. 몇 번 오가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쌓인 옷가지들이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서진은 책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책들을 쓸어 오듯 담아 왔다. 공부를 더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물 건너간 모양이었다. 가방끈을 꽉 쥔 서진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욱에게 물었다.

“시헌이 휴가 갔잖아요. 무슨 일인데요?”

“몰라.”

대충 짐작은 가지만. 시헌이 도원을 때린 사건의 내막을 들은 후부터 시헌은 노골적으로 현정과 어울리는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슬슬 적당한 상대를 고를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그 상대가 현정일 줄은 기욱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헌은 현정과 잘 맞았고, 양가 부모님도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니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예비등만 켜진 병원 로비로 들어갔다.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시헌의 옆에는 예상대로 현정이 있었다. 현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욱에게 인사를 했다.

사복 차림에 저녁에 온 모양인지 가운만 걸친 시헌이 나지막하니 의자에서 일어나 기욱을 올려다봤다. 한쪽 손을 가운에 집어넣고, 뻣뻣하게 올려다보는 시헌의 모습은 젊은 시절 기욱과 꼭 빼닮아 있었다. 흠이라고 한다면 역시 키가 조금 작은 것뿐이었다. 시헌은 기욱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 대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나 결혼할 거야.”

시헌은 일부러 기욱의 뒤에 있는 서진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기욱이 잠깐 얘기 좀 하자며 시헌과 현정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기욱을 기다리는 자리에는 서윤도 있었다. 덩그러니 버려진 서윤과 서진이 서로 눈을 맞췄다.

“기욱 오빠랑 같이 있었어?”

“어, 응. 저녁 먹자고 해서.”

“아까 집이라고 그러던데.”

“마, 막 저녁 다 먹고 집에 들어왔을 때 전화한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서윤의 말에 당황하며 서진이 말을 얼버무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두 사람이 내렸다. 일단 근무는 아니지만, 어차피 당직실에서 공부하다 잘 거면 사복 차림보다는 옷을 갈아입고 오는 편이 훨씬 나았다. 서진이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등을 돌리자 서윤이 서진을 붙잡았다. 서진은 뒤늦게 서윤이 자신의 목 근처에 있는 키스 마크 흔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목 근처를 손으로 가렸다. 도대체 언제 흔적을 남긴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기욱이 낸 흔적은 그리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서진아, 사귀는 사람 있어?”

“아…. 그런 건 아니야.”

가방끈을 손으로 꽉 쥔 서진은 엘리베이터 대신 도망치듯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서진이 다시 올라왔을 때 서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당직실에서 한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난 서진은 잠을 깰 겸 병원의 구름다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건너편 건물을 잊는 구름다리는 바람이 솔솔 통하는 데다 편의점식 자판기도 있어서 야식을 사 먹기 딱 좋은 장소였다. 당이 떨어져 초콜릿과 젤리 하나, 그리고 사이다를 뽑은 서진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등을 돌렸다.

“아, 놀랬잖아. 박시헌.”

“계속 뒤에 있었어.”

“어, 그래.”

서진이 옆으로 비키자 시헌도 자판기 앞에 섰다. 금방 뽑을 거로 생각했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시헌은 한참 동안 자판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구름다리에 편의점 자판기가 들어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바나나우유가 없네.”

“넌 뭔, 그런 데서 바나나우유를 찾고 그래?”

별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시헌은 참 이상했다. 바나나우유가 없으면 금방 주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헌은 돈만 넣은 채 쉽게 주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시헌은 커다란 편의점 자판기와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 교수님은 뭘 좋아할까?”

“내가 어떻게 알…… 어디 과 한 교수님?”

“알면서.”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시헌이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렸다. 저도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는 버릇은 있지만, 시헌은 아예 습관인 모양이었다. 젤리를 입에 구겨 넣은 서진이 자판기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커피로 해.”

“어떤 커피?”

“병으로 된 거.”

시헌이 그제야 한쪽 구석에 있는 병으로 된 커피를 뽑았다. 퉁, 퉁. 시헌이 뽑은 음료수와 서진이 말한 커피가 거의 동시에 떨어졌다. 게토레이 하나는 제 손에 쥐고, 뽑은 커피를 서진에게 건넸다.

“…왜?”

“한 교수님한테 줘.”

“내가 줘. 왜 나한테 시켜.”

“내가 주는 것보다는 그림이 좋을 거 아니야.”

“아니, 한 교수님한테 왜 주냐고 커피를.”

“못마땅한 거 그 부분?”

“죽고 싶어?”

“빚졌어. 갚으라고 하더라. 쪼잔하게.”

서진이 시헌이 내민 커피를 빼앗아 품으로 가져왔다. 사실 서진보다는 시헌이 우민을 만날 확률은 높았지만, 커피를 건네주고 빚을 갚는 게 중요한 거지 커피를 전해주는 기간이 중요한 건 아녔다. 커피를 가운 주머니에 구겨 넣은 서진은 몇 개 남지 않은 젤리를 먹으며 시헌을 슬쩍 올려다봤다. 시헌이 서진의 옆에 앉아 다리를 꼬며 게토레이 뚜껑을 땄다. 여기서 이렇게 시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서진은 시헌이 커피를 건네주고 곧장 가지 않은 이유도 자신이 질문하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너, 현정이랑 어떻게 된 거야?”

세 사람이 따로 자리를 옮겨서 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어도 시헌이 결혼을 할 거라는 말은 분명하게 들었다. 설마 현정을 옆에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 소리는 아닐 확률이 높았다.

“들었잖아. 결혼할 거야.”

“박시헌 미쳤어? 너, 현정일 이용할 생각이야?”

시헌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 말고 다른 남자와 사귀거나 호감을 보인 적도 없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시헌은 자신이 했던 고민과 똑같은 고민으로 화를 내는 서진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서진에게는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결혼, 내가 먼저 이야기한 거 아니야.”

“현정이가?”

어느새 젤리를 다 먹고 초콜릿을 입에 문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콜릿을 내려놓은 서진은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헌의 과이자 외과 1년 차 레지던트인 김도원은 서진도 대충 알고 있었다. 말은 섞어 본 적 없지만, 그 녀석이 현정과 결혼식을 한다며 청첩장을 돌리고 결혼 한 달도 남지 않은 현정을 때리면서 그걸 시헌이 구해 줬다고 들었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몰라도 서진은 기욱에게 사정을 들어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었다. 그나마도 사실이 아닌 무성한 소문들이 많았다.

“현정이 네가 여자 안 좋아한다는 사실 알아?”

“걘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어.”

“도대체 왜?”

시헌과 현정이 잘 맞는다는 건 서진도 알고 있었다. 자신과 현정도 학창 시절 친했지만, 시헌과 현정은 자신과 현정이 친한 것과는 다른 친함이 있었다. 한때는 그것이 마냥 질투가 난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자신이 시헌과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현정도 시헌과 그런 사이가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지긋지긋하대. 남자 같은 거.”

“아, 그래.”

왠지 현정이는 그럴 것 같았다. 예전부터 이상하게 여학생들과 겉돌던 아이였다. 어딘가 다르다. 그 말은 비단 시헌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 학교에서 네 사람이 겉돌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걸지도 몰랐다. 죽어 버린 은소도, 산 사람들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현정이는 행복하길 바랐는데.”

서진의 중얼거림에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그 생각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성폭행을 당한 아이가 현정의 사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서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현정에게 달려갔다.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던 건 자신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서진은 현정이 초등학교를 옮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현정이 납치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그 뒤 현정이 전학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반 여자애가 납치돼 죽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통유리 너머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나에 대한 잘못된 집착, 부모의 배신과 지병, 잘못된 집안 환경, 어린 시절의 공포. 아파트 옥상에서 촛불을 불며 사진을 찍은 네 사람은 각자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와서는 엉켜 버린 실타래처럼 꼬일 대로 꼬여 해답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현정도, 시헌과 서진처럼 그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주 가끔, 힘이 들 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죽은 은소가 가장 현명했다는 생각을,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너무 많이 봐 온 탓인지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으니 참으로 지독한 인생이었다. 게토레이를 다 마신 시헌이 먼저 일어났다.

“현정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 알아.”

“대체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중학생이라고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나도 그랬고.”

다 마신 게토레이를 쓰레기통에 던진 시헌이 먼저 간다며 손을 흔들었다. 서진이 멀어지는 시헌을 쫓으며 손을 뻗었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허공에 반쯤 뜬 서진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시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어슴푸레 떴다. 서진은 시헌이 준 캔커피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어떻게 우민에게 전해줘야 박기욱에게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벤치에서 삼십 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날밤을 새우고 뭐라도 마시러 나타난 레지던트가 벤치에서 자는 서진을 보고 깜짝 놀라 급하게 인사를 했다.

“뭘 그렇게 쫄아.”

“죄송합니다.”

“됐다.”

서진은 눈가를 비비며 아침 회의가 있는 신경외과 의국으로 올라갔다. 인턴을 보고 혀를 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뒤늦게 깨닫고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내뱉었다. 신경외과 치프로 있는 지금, 서진은 역시 사람은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을 못 하는 동물이 맞긴 맞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래 진료 대신 제법 큰 수술의 어시스트로 참여하게 됐다. 우민은 외상센터로 내려간 뒤 어지간하게 큰 수술이 아니면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기욱의 스케줄이 다 차고, 우민이 올라올 정도라면 큰 수술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서진이 참여할 정도까지도 아니었지만, 서진은 일부러 스케줄을 바꿔 수술에 참여했다. 덕분에 3년 차 레지던트는 몸이 편한 외래 진료를 보게 됐으니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치프에게는 그 정도의 월권 정도는 있었다.

“GS 치프가 GS 1년 차에 있는 레지던트 여자 친구랑 결혼한다면서?”

“바람피운 거라지? 대박.”

“트라우마센터에 있는 박 선생? 걔 순해 보여서 그렇게 안 생겼는데.”

오랜만에 들어온 수술실은 시헌과 현정의 결혼식 이야기로 어수선했다. 참다못한 서진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든 서진에 다른 의료진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고개를 들고 있는 와중에도 서진은 정확하게 우민이 수술해 줘야 할 부위를 잡아 주고 있었다. 한때 전산 실수로 신경외과를 지원해 왔다는 것치고 서진의 외과적 자질은 최고에 가까웠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 듯 평소 말하는 투보다 한 톤 올라간 서진의 말투에는 칼이 서려 있었다.

“모르면.”

“…….”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우민이 적당히 하라며 발끝으로 서진을 건드렸다. 서진은 진심으로 시헌에 대해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다. 길었던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마무리를 서진에게 맡긴 우민이 장갑을 벗었다. 우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서진이 이번에는 우민을 불렀다.

“왜?”

“커피 가져가세요.”

“웬 커피?”

“외과 치프가 교수님한테 준 거예요. 빚 갚았다고 전해 달래요.”

시헌이라고 해도 되지만, 서진은 사람들 들으라며 외과 치프라는 말을 썼다. 아아, 박시헌. 우민은 책상 한쪽에 놓여 있는 캔커피를 챙겼다. 마침 목이 마르고 피곤했는데 잘됐다.

“잘 마실게. 고생해라.”

우민이 한 모금 마신 커피를 흔들며 수술실 밖으로 나갔다. 어려운 수술을 완벽하게 한 것도 부족해서 예상 시간보다 훨씬 일찍, 끝낸 걸 본 서진은 뒷정리를 하면서도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욱도 충분히 우민 못지않았지만, 서진에게 좀 더 맞는 스타일은 역시 우민 쪽이었다. 다음 수술이야 다른 레지던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우민이 수술을 일찍 끝내 준 탓에 서진도 모처럼 시간이 비었다.

마침 한가하다는 동기 강연태와 연락이 닿아 로비로 내려갔다. 서진보다 조금 일찍 내려온 연태가 서진이 미리 주문한 커피를 손에 든 채 손을 흔들었다.

“고맙다.”

“뭘.”

서진은 연태에게 받은 카페라떼를 홀짝이며 신경외과 의국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얼굴을 마주 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같은 밥 먹은 지 3년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의국에서 급하게 나온 사람이 서진의 어깨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서진은 다급하게 들고 있던 카페라떼를 붙잡았다. 다행히 많이 마신 터라 크게 튀지는 않았다. 연태가 다급하게 몸이 기울어지는 서진을 붙잡았다.

“와 저 싹수없는 거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네.”

“누군데?”

서진이 뒤늦게 등을 돌렸지만, 서진과 몸을 부딪친 의사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서진은 연태와 함께 의국 가운데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J대 분원 신경외과 의사, 2년 차인가 그런데. 한 삼 개월 정도 지원 나온 거로 알고 있어. 너 회의만 끝나고 바로 수술 들어가서 못 봤을 수도 있겠네.”

아메리카노를 홀짝인 연태가 묘한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할 말이 있는 연태의 눈빛에 서진이 종이컵 끝을 살짝 깨물며 입술을 뗐다.

“왜?”

“아니, 너 진짜 아까 부딪힌 애 누군지 몰라? 박 교수님네 막내.”

“박운오?”

서진이 닫혀 있는 유리문을 흘끗댔다. 서윤과 기욱의 결혼식 때 잠깐 보고 거의 본 기억이 없었다. 이상하게 그 집 막내는 집안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의사 집안이라 운오 또한 의대를 졸업하고 J대 분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뭐, 어쨌든 J대 병원. 그것도 신경외과에 있다면 좋든 싫든 얼굴을 볼 것이었다. 그러나 서진은 왠지 모르게 박운오라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 운오에게는 시헌이나 기욱과 다른 불편한 이질감이 있었다. 연태가 가운 주머니에서 신용카드를 건넸다. 서진이 연태에게 연락할 때 서랍에 있는 지갑에서 꺼내라고 했던 기욱의 신용카드였다.

“너 신용카드. 정지됐다더라.”

“어?”

“야, 아무리 일이 바빠도 그렇지 새로 발급 좀 받아.”

“그럼 커피는?”

“내 카드로 샀어. 다음에 사.”

연태가 원형 테이블 밑에 있는 쓰레기통에 다 마신 커피를 버린 뒤 먼저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태가 나간 뒤 서진은 기욱의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신용카드의 기한이 저번 달이었다. 벌써 4년 차가 된 건 서진뿐만이 아니라 신용카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가운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2G 휴대폰이 잡혔다. 문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만한 호출에 서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의국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가자 타이밍 좋게 의국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운오가 보였다. 누가 봐도 수술방에서 나온 듯한 서진의 차림과 운오의 차림은 대비가 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문 앞을 막고 있는 서진을 무시할 수는 없던 모양인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집안 가계상으로만 본다면 운오가 더 높았으나, 병원에서는 아니었다.

운오가 비켜 달라며 눈치를 줬다. 서진이 몸을 틀기 무섭게 의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 역시 많이 불편했다. 아무리 몇 개월 지원 나온 의사라고 해도 치프한테 너무 싹수없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서진은 뺨을 긁적였다. 나중에 만나면 한마디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몇 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 서진은 연구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휴대폰을 열었다. 역시나 기욱에게서 온 문자였다. 모든 레지던트와 인턴들의 스케줄을 총괄하는 치프 역이지만, 그 치프와 펠로우와 하급 교수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사람은 정교수인 박기욱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시간에 짬이 난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좁은 연구실 안으로 입술을 깨무는 신음만이 울려 퍼졌다. 의자 위 벌어진 다리 사이로 찌걱대는 소리가 났다.

“흐읏…….”

뒤로 넘어가는 머리채를 붙잡아 돌린 기욱이 서진의 입술을 덮쳤다. 금방이라도 닫혀 있는 연구실 문이 열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눈을 질끔 감았다. 언제부터인지 기욱은 연구실에서 서진을 안았다. 걸릴 것 같은 두려움도 처음 두세 번이 전부였다. 그게 일 년이 지나고, 삼 개월이 지나면 걸린다는 걱정보다 한시라도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낮에 기욱과 섹스를 하면 저녁 일이 피곤했다. 기욱은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고 자는 서진의 몸을 흔들었다. 확, 하고 깨어난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끝났어요?”

“……너. 누가 멋대로 자래.”

“기절할 때까지 한 거겠죠.”

차라리 자 버릴까 하고 잔 것도 있지만, 서진은 애써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인지 기욱은 기절한 서진의 안에 싸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욱이 바닥과 책상 위로 튄 정액을 휴지로 대충 닦았다. 뒷정리가 끝나 갈 무렵 기욱이 서랍을 열어 신용카드 한 장을 서진에게 건넸다. 이미 연태로부터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들은 서진이 한숨을 쉬며 기욱이 준 신용카드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일찍 좀 주지 그랬어요.”

“커피 좀 그만 사 먹어.”

서진이 사용하는 기욱의 신용카드 내역이 기욱의 휴대폰에 따로 연락이 가진 않지만, 어쩌다 한번 폰뱅킹으로 들어갈 때면 보이는 엄청난 카페 결제 내역에 기욱이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5페이지가 넘어갈 때까지 커피 결제 내역만 주르륵 나왔으면 말 다 한 것이었다.

“당신한테 몸 대 주는 거에 비하면 커피값 정도는 싼 거죠.”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이마를 맞췄다. 갑작스럽게 굳는 기욱의 표정에 서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제가 생각해도 말을 너무 생각 없이 한 감은 있었다.

“돈 받고 하는 년들이랑 너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건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했다. 그 점이 서진의 매력이지만, 기욱은 기분이 나쁜 듯 서진의 손을 거칠게 놓았다. 이 뒤에 있을 병원 일만 아니었으면 방금 한 말들은 진심으로 화를 낼 만한 수준의 발언이었다. 기욱은 의자 뒤에 걸려 있는 가운과 책상 서랍에 넣어 뒀던 신분증을 목에 대충 걸쳤다.

“한 번만 더 그따위 좆같은 소리 하면.”

“…….”

“가만 안 둬.”

“이번 건 제가 잘못했어요.”

다가온 기욱의 손이 서진의 뺨을 건드리자 서진도 소름이 돋았는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등을 돌리는 기욱의 가운 주머니에서 또 다른 카드 하나가 툭 떨어졌다. 신용카드는 아니었다. 기욱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한 분위기에 서진이 바닥에 떨어진 얇은 카드를 주웠다.

어디서 많이 본 거다 했더니 장기기증 카드였다. 카드를 뒤집자 온갖 체크란에 체크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장기기증 카드는 서진도 있다. 아니, 일하는 대부분의 레지던트와 의사들이 한 번씩은 신청했다가 신청을 취소했던 기억이 있는 카드였다.

현실을 알고 나면 장기기증을 할 생각 따위는 우주 저 건너편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의대 시절 교수들에게 보여 주기식으로 신청했다가 취소한 학생들과 달리 서진은 신청해 놓고 취소하는 걸 까먹고 있었던 쪽에 맞았다. 애당초 사망 시 신장 기증 외에 다른 건 무서워서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것치고는 시체 기증까지 신청한 기욱의 기록은 독특하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피가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일지도 모를 정도로 냉혹한 그가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별로 믿어지지 않았다. 이 나이까지 들고 다닐 정도면 본인 의지로 했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기욱에게 카드를 돌려준 서진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뭘 이렇게 많이 했어요?”

“남의 몸에 칼 대는 사람은 자기 몸에 칼 닿는 각오 정도는 해야 된다고 배웠다.”

“대학교수 같은 발언 하지 마세요.”

“나 수업도 나가.”

아무것도 모른 채 들었던 예과 수업 교수님이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는 기욱에 서진은 기가 찼다. 서진은 그 교수님을 제외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의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런 생각 하는 의사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진이 가장 생각하지도 못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서진은 기욱이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서진이 아는 기욱은 시헌만큼이나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신념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 신념이 남들과 다를 뿐이었다. 기욱은 수술할 때 혹은 이 환자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도 누군가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왔다. 외과 의사란 살인자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이기도 했다. 손끝에서 죽어 나간 사람을 생각하면 기욱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의외네요.”

“왜?”

“그런 도덕적인 거. 당신이랑 안 어울려요.”

“배운 만큼 해. 그리고 도덕적인 적 없어.”

기욱이 착각하지 말라며 미니 냉장고 안에 있는 음료수를 꺼내 마셨다. 기욱은 한 번도 살면서 도덕을 따져 보고 살아온 적이 없었다. 도덕? 법? 사람의 이치? 그건 누가 만든 거지?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신이 만든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이 만든 논리를 지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동생 봤어요?”

“시헌이? 아아…… 걔? 신경 꺼.”

뒤늦게 시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기욱이 손을 저었다. 기욱은 운오를 귀찮은 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헌도, 운오도 같은 동생일 텐데 왜 이렇게 대우가 다른지 그걸 지켜보는 서진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아니, 기욱과 몸을 섞고 시간을 보낸 지금 아주 정말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박기욱이 원한 건 동생이지 박운오가 아니었다. 남동생이라고 해도 첫째와 둘째는 다르다. 어쩌면 박운오는 기욱의 예정에 없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서진의 추측일 뿐이었다. 운오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서진은 남의 집 일이라며 신경을 끄려 하고 있었다.

“잔인하네요.”

서진의 중얼거림은 기욱에게, 동시에 그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 하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 마신 음료수 캔을 버린 기욱이 먼저 나가겠다며 문을 열었다.

“십 분 뒤에 나와.”

기욱이 나간 후, 정확히 십 분 뒤에 나온 서진은 곧장 신경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있었다. 저녁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밀린 일을 처리한 서진은 새벽 두 시가 좀 넘어서야 간신히 여유가 날 수 있었다. 밀린 차트 기록을 마친 서진이 별안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피우고 올게.”

서진은 기다렸다는 듯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할당된 일을 마치고 혼자 옥상에서 피우는 담배만큼 맛있는 것도 없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진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운오였다. 서진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옆에 선 운오를 흘끗거렸다.

옥상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의사가 춥다며 안으로 들어가자 둘만 남기 무섭게 운오가 담뱃불에 불을 붙인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왜 형 연구실에서 나와요?”

“그 전에 너, 나한테 인사하는 게 먼저 아니냐?”

서진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운오를 가리켰다. 담배 연기가 올라오자 운오가 서진의 손을 옆으로 밀어냈다. 말을 많이 나눠 본 건 아니지만, 확실히 서진과 성격이 안 맞는 것은 분명했다.

“피차 누군지 알잖아요.”

운오의 말을 무시한 서진이 반쯤 남은 담배를 껐다. 마지막으로 피우고 가려고 했는데 운오의 얼굴을 보니 담배 맛이 싹 가셨다. 담배를 발끝으로 지진 서진이 헝클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너랑 상관없잖아.”

서진은 듣기 싫다는 듯 거칠게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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