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 치워, 치우라고!
J대 외상센터 입구 앞, 가운 차림의 시헌이 목에 있는 신분증을 찍으며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 곧장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던 터라 시헌이 끼어드는 데는 큰 문제는 없었다. 애당초 인원이 부족한 상태로 시작한 수술이나 다름이 없었다.
들어오기 전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이미 보고를 받았던 터라 중간에 끼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특별히 문제없이 수술 보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수술은 당초 시헌이 병원에 오기 전보다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날이 많지는 않았다. 정혁이 고개를 숙인 채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외과의 4년 차가 된 시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정혁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
“너 신규들 얼굴은 봤어?”
“아니요.”
“가서 보고 미팅 좀 하고 그래.”
“아, 싫은데.”
“이게 미쳤나. 치프 달더니 어딜 개겨. 야야, 살살 잡아.”
고개를 끄덕인 시헌은 조용히 정혁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수술에 집중했다. 시헌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말이 많은 정혁의 말에 짧게라도 말대답을 하는 재주만은 뛰어났다. 그 덕에 두 사람의 대화는 참으로 이상하면서도 말이 되는 식으로 흘러갔다.
시헌이 뒷정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온 시헌을 본 정혁이 마침 냉장고에서 꺼낸 캔 음료수를 건네줬다. 냉장고에서 나온 거라 아직 차가웠다.
“봉봉이네.”
마침 목이 말랐던 시헌은 그 자리에서 200ml 캔 음료수를 전부 비웠다. 어지간하면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하는 시헌이 몇 달 전 돌연히 못 해 먹겠다는 소리를 꺼냈다. 3년 차가 됐어도 1년 차 때와 비슷한 근무 강도를 유지하던 시헌이 그런 말을 한 것이 충격이었던 정혁은 오죽하면 그랬겠거니 하며 지방에 있는 H대 분원으로 시헌을 보냈다. J대보다, 그리고 H대 본원보다 규모가 작은 병원이었다.
“일은 할 만했냐?”
“천국이었어요.”
“거기 레지던트들 자괴감 들 만한 소리 하지는 말고.”
“J대 근무 강도 말해 주니까 질색을 하던데요. 선배님이라 그런지 다들 괜찮았어요. 괜히 J대 왔나 싶기도 하더라구요.”
“원래 집 나오면 서러운 거야. 넌 그래도 내가 있잖아.”
“그건 좀.”
“어제 연락했는데, 별 얘기를 안 해 줘서. 혹시 네가 사고 친 건 아닌가 걱정이다.”
“제가 에이스인데 사고를 칠 게 있나요.”
“이 자식 나이 먹고 뻔뻔해진 거 봐라.”
몸을 숙인 시헌이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를 더 꺼내 마셨다. 목이 마른 것인지 갈증이 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한 개만 먹으라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정혁은 이제 막 복귀한 시헌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버려 뒀다. 탁 하고 캔을 깐 시헌이 음료수를 반쯤 마시며 입을 열었다.
“김 교수님이 전문의 끝나면 자기 밑에서 일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시던데요.”
“뭐? 그 깐깐한 놈이? 대박.”
“좀 꼼꼼하시긴 했죠. 적응하는 데 약간 힘들긴 했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너 설마 김 교수랑 술 한잔했냐?”
“교수님이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은 안 했잖아요.”
“배신하면 죽인다.”
정혁이 주먹을 쥐며 시헌의 가슴 부근을 툭툭 건드렸다. 남은 음료수를 다 마시고 옆 쓰레기통에 버린 시헌이 뒤쪽에 있는 냉장고를 다시 흘끗댔다. 오늘따라 미친 듯이 목이 말랐다. 왜 이런지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3개는 좀 양심이 없겠지, 하고 생각한 시헌이 입맛을 다시며 냉장고에서 눈을 뗐다.
“배신은 무슨 배신, 덕분에 인턴 애들 얼굴도 못 보고 다 지나갔는데.”
“인턴 그거 봐서 뭐 할려고? 그리고 힘들다며 징징댄 건 너잖아.”
시헌은 정혁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듯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 맞다. 이번에 들어온 레지던트 하나가 네 친구라는데?”
“저 친구 없는데요.”
“친구라는데?”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고 다닌다는 정혁의 말에 시헌은 도무지 그 친구라는 사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시헌의 동기나 한 살 아래 후배들은 이미 다 의사이거나 어딘가 병원의 레지던트를 하고 있었다. H대도 아니고, J대에 들어올 만한 H대 출신이라면 사전에 시헌에게 연락이 닿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정혁이 1년 차 레지던트들의 스케줄표가 뽑혀 있는 A4용지를 시헌에게 건넸다. 새로 들어온 레지던트의 명단을 확인한 시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김도원, 김도원.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그 이름이 시헌은 낯설면서도 굉장히 익숙했다. 한편으로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임은 분명했다. 시헌은 제발 그 이름이 동명이인이기를 바랐다.
“진짜 몰라?”
“아마도.”
시헌은 스케줄표를 구겨 넣으며 다른 레지던트에게 연락해 단톡방에 들어갔다. 적당히 톡을 보내 놓은 뒤 시간을 맞췄다. 밤 10시가 넘었을 무렵 의국 안에는 오프인 레지던트 한 명을 제외하고 1년 차 레지던트들이 전부 모였다. 사실 모인다고 해도 다른 과에 비교해 그리 많은 인원수도 아니었다. 시헌은 모여 있는 레지던트들의 인원수를 셌다. 오프 레지던트를 제외하고도 머릿수 하나가 비었다. 누가 안 온 거지? 하고 체크하려 하자 문이 열리며 레지던트 한 명이 들어왔다.
“아, 죄송해요. 화장실 다녀오느라.”
“됐어요. 그래서 이름이…… 아. 이런.”
종이를 보며 고개를 든 시헌이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막상 앞에서 얼굴을 마주 보니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김도원.
중학교 무렵, 억지로 사립 중학교를 떨어져 인근 도내 중학교에 온 시헌, 현정과 달리 진짜 시험에 떨어져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그 김도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시헌은 아직도 호텔에서 했던 숨이 막히는 생일파티에 대해 잊지 않았다. 사정이 있어 재수한 시헌, 서진과 달리 삼수를 하고 어딘가의 의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설마 도원이 J대 외과에 지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마 시헌의 추측이건대 집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레지던트는 J대나 H대 아니면 안 된다고 박박 우겼을 가능성이 컸다. 그 성적으로 H대는 무리니, 선택지는 J대밖에 없는데 J대 역시 돈이 되는 과나 인기 과들은 J대생과 중간 정도 되는 H대생들이 꽉 잡고 있었다. 그러니 남은 건 외과 계열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얻어 걸린 게 일반외과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시헌의 추측이었다.
고개를 든 시헌은 여전히 이 새끼는 뭐지? 하는 표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암 덩어리가 하나 생긴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중학교 때와 달리 나이를 먹었으니 사람이 철이 들었기를 조금이라도 바랄 뿐이었다.
“시헌아, 오랜만이다! 외과 돌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나 인턴 돌 때는 네 얼굴을 못 봤네. 이번에 치프 됐다는 말 들었다. 하하, 잘 좀 부탁해. 알지?”
모르는데.
입을 꾹 다문 시헌은 도원이 달라진 게 없다고 확신했다. 시헌과의 친한 척에 새로 들어온 레지던트들이 도원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1년 차에게는 고작해야 11개월 정도 얼굴을 마주하고 떠날 사람이라고는 해도, 치프의 힘은 막강했고 그런 시헌과 친구라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도원은 1년 차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서열을 올릴 수가 있었다. 덤으로 시헌이 있으면 2, 3년 차 레지던트도 도원에게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
시헌은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친한 척 어깨에 손을 올리는 도원이 역겨웠다. 달라지기는커녕 더 재수가 없는 능구렁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짓을 할 거면 티 나게 하질 말든가. 시헌은 진심으로 도원이 어떻게 J대 외과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헌은 제 어깨 위에 올린 도원의 팔을 붙잡으며 인상을 구겼다.
“손 내려.”
“하하, 왜 그래. 오랜만인데.”
“씨발, 손 내리라고.”
“아, 알았어.”
J대 이사장 아들, 자식 중 2명은 J대 병원 교수에 나머지 2명은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다는 시헌의 집안을 병원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물며 시헌은 1년 차 시절부터 작정하고 외상센터에서 구른 사람이었다. 잘하다가 뜬금없이 몇 개월 정도 타 병원으로 지원을 나간 것을 제외하면 병원 생활 3년 내내 시헌의 근무 강도는 1년 차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H대 시절부터 A 킬러라고 불렀던 시헌의 소문은 외과 레지던트와 외과를 도는 인턴들 사이에선 소문이 자자했다. 다만,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는 키가 작은 시헌에 살짝 당황할 뿐이었다. 분명한 건 시헌은 도원보다 키가 작았지만 그런데도 그 특유의 포스만큼은 누구보다도 기가 셌다. 시헌이 한숨을 쉬며 1년 차 레지던트들의 사진과 인적 사항이 대충 적힌 종이를 살폈다.
“길게 말 안 한다. 너네 인턴이랑 차이 없으니까. 숨기지 마.”
“네?”
“사고 친 거 숨기지 말라고, 안 치면 좋은데 기대는 안 해.”
짧고 굵은 시헌의 한마디에 1년 차 레지던트들이 저들끼리 고개를 끄덕였다. 2월, 이 시기는 간호사를 포함해 레지던트, 인턴들이 새로 들어오거나 바뀌는 시기였다. 이래저래 병원이 어수선할 때라 그만큼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자주 나기도 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김 선생.”
“어, 왜?”
“내 이름 팔고 다니지 마. 경고했다.”
시헌이 일부러 뒤쪽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다른 레지던트들을 흘끗댔다. 시헌이 한 말은 정확히 도원을 향한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뒤쪽에 있는 레지던트들에게 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뭔진 몰라도 시헌이 김도원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안 레지던트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년차가 괜히 고년차나 치프를 등에 업고 나대면 중간에 있는 레지던트들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도원은 시헌에게 업어 갈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시헌은 도원의 편의를 봐줄 생각도 도원이 업히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시헌은 자신의 할 일만으로도 벅찬 사람이었다.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의 안위 따위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다시 센터로 내려간 시헌은 곧장 수술실로 들어오라는 다른 선생님들의 말에 옷을 갈아입고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수술방 두 개를 왔다 갔다 하는 다른 교수님을 보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헌은 정혁과 함께 마지막 환자의 상태를 안정시킨 뒤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인상 펴라.”
“티 나요?”
“너 얼굴에 티 잘 나. 왜 그러는데?”
“김도원인지 그 자식 왜 뽑은 거예요?”
“너 친구 아니었냐?”
“걔 면접 때 제 친구라고 말한 거 아니죠?”
“어, 아마도? 나도 잘 모르는데.”
정혁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시헌이 마스크를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했네. 도원의 막 나가는 행동을 말하며 시헌은 고개를 저었다. 시헌은 다른 레지던트들에게 자신의 눈치를 보지 말라고 일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술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뒤쪽에 있는 책상에서 진동이 울렸다. 시헌이 약간 까치발을 들어 휴대폰이 있는 책상을 흘끗댔다. 책상 위에는 시헌과 정혁의 휴대폰 두 개가 동시에 놓여 있었다. 키 때문인지 어느 휴대폰에서 전화가 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이 빈 신규 간호사 한 명이 장갑을 벗은 뒤 휴대폰을 가져왔다.
“이거 누구 휴대폰이에요?”
아직 잘 모르는 듯 그녀가 휴대폰을 정혁에게 가지고 가려 하자 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시헌은 눈을 살짝 치켜뜨며 간호사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내 거 같은데.”
“대 줘.”
“받아도 됩니까?”
“그냥 받아. 아깝잖아.”
시헌이 간호사의 도움으로 전화를 받았다. 누구인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냥 통화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시헌의 휴대폰 너머로 간간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알았어. 엄마. 나중에 전화할게.”
시헌이 끊어 버리라며 간호사에게 손짓했다. 간호사가 휴대폰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모습을 본 시헌이 정혁을 슬쩍 보며 한숨을 쉬었다.
“누구야?”
“엄마요.”
“박 교수님? 은퇴하시지 않았어?”
시헌의 어머님은 은퇴한 뒤 시간제 교수로 활동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의료 자문을 위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굳이 억지로 한다면 몇 년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자식 네 명을 다 의사로 만든 그녀는 손뼉 칠 때 떠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게요.”
시헌이 정혁을 슬쩍 보더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흘렸다. 어머님이 무사 은퇴를 하신 그것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은퇴하고 난 뒤부터 시작이었다. 손주라도 보고 싶은 건지 아니면 할 일이 없는 건지 기욱과 서윤에게는 자식 이야기를, 시헌에게는 여자를 데려오라고 성화였다. 이제 막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들어간 운오는 일이 힘들다는 걸 핑계로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운오는 이미 인턴 시절 엄마가 시키는 대로 어딘가의 여자와 선을 봐 만나고 있는 모양이기에 말이 없을 뿐이었다. 백 퍼센트 정략결혼이었지만, 시헌의 집안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의대 동기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게 결혼을 한 엄마가 그런 걸 신경을 쓸 리는 없었다.
정혁에게 숨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보는 눈이 많은 수술실에서 할 만한 말이 아닌 것은 분명했던 시헌이 말을 고르고 골라 꺼냈다.
“결혼 좀 하래요.”
“너 여자 있냐?”
“없죠. 그러니까 쉬는 날 선보라고 난리예요. 저번에 병원 찾아와서 저보고 4년 차가 된 놈이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하느냐고 뭐라 그러던데요.”
시헌이 정혁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시헌은 엄마가 자신과 이야기를 한 뒤에 정혁을 따로 불러 대화를 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시헌의 시선에 정혁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나도 한 소리 들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초등학교 학부모도 그 정도는 안 해.”
“극성인 거 인정해요.”
“한 번 정도는 나가는 게 좋을 거 같다.”
“자기한테 불똥 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잖아요.”
“어, 치프 제가 여자 소개해 줄까요?”
보조로 들어온 3년 차 레지던트가 끼어들자 시헌이 은근슬쩍 그의 발을 꾹 밟았다.
“닥쳐라. 좆같으니까.”
하여튼 끼어들 때 안 끼어들 때 구분을 못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3년 차 레지던트와 함께 뒷정리를 마친 시헌은 복도로 나와 타이밍 좋게 온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하아, 알았어. 임 교수님 옆에 있으니까. 뭘 바꿔, 시간 빼준다고 했어. 끊어.”
시헌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정혁이 손이 필요하다며 시헌에게 손짓을 했다. 시헌이 빠르게 정혁에게 붙었다. 가벼운 처치를 마친 정혁은 시헌의 통화에 관심이 있었다.
“뭐라셔?”
“시간 좀 내 달래요.”
“알았다. 알려 줘.”
“감사해요.”
정말이지 이게 뭔 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주 수요일, 시헌은 그 시간을 비우기 위해 저녁쯤에 잠시 집에 가기로 한 일정을 전부 미뤘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위해 일주일 동안 엉망으로 일을 한 걸 생각하면 마냥 식사 자리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강남에 있는 한 고급 양식당 집에 간 시헌은 도대체 왜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한가하게 클래식이나 들으며 고기를 썰고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여자는 시헌보다 한 살 정도가 더 어렸다.
“의사라 그런지 확실히 칼질에 능숙하시네요.”
“잘 모르겠는데요.”
“외과 의사라고 그랬죠? 사람한테 칼을 대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요.”
그녀의 질문에 시헌이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에 넣으며 잠시 고민했다. 무슨 느낌? 그런 거 생각이나 해 본 적이 있던가? 레드와인을 마시며 목을 축인 시헌이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시헌은 참 별것이 다 궁금하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덜 익은 돼지 껍데기를 자르는 기분.”
“사람 피부를 그렇게 비유하니까 당황스럽네요. H대 출신이라고 그랬죠? 제 제자 중에서도 H대 간 애들 많아요. 시헌 씨가 대선배겠네요.”
“선배니 후배니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시헌이 짧게 말을 잘랐다. 여자와 시헌의 대화는 거의 단답식이었다. 여자가 질문하고, 시헌이 짧게 대답을 하는 식인데 그조차도 추가로 질문을 할 여지가 거의 없는 대답이었다. 여자가 1+1이 뭔가요? 하고 물으면 2라고 대답해 버리는 식이었다. 참다못한 여자가 시헌의 말투를 걸고넘어졌다.
“원래 말투가, 그래요?”
“말투요?”
시헌이 추가로 와인을 따르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시헌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하물며 교수인 정혁도 시헌과 대화를 할 때도 이런 식이었다. 병원에서 시헌이 필요한 일 아닌 이상 입을 잘 안 열고, 그러면서도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짧게라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몇 년은 당황했던 간호사들도 시헌에게 익숙해지자 독특하다는 말을 많이 하기는 했다. 독특하다는 게 여자가 지적한 말투와 관련이 있는 걸까? 오랜만에 병원 밖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서 그런지 시헌은 여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짚기가 힘들었다.
여자는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 같은 시헌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계속 제가 질문만 하잖아요. 그쪽은 대답만 하시고. 저한테 할 말 있으면 하라구요. 서로 질문을 해야지 대화가 되죠!”
여자는 시헌이 자신에게 궁금한 것을 가져 주기를 바랐다. 여자가 말한 의도를 깨달은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시헌이 침묵을 깨고 자신에게 질문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샐러드를 먹고 느긋하게 와인까지 넘긴 시헌이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시헌은 속으로 여자가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궁금한 거. 여자에게 궁금한 거.
“없는데요.”
그런 거 있을 리가 없다. 시헌의 뻔뻔한 대답에 여자가 기가 막힌다며 혀를 내둘렀다. 정작 그런 말을 한 시헌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선을 보러 오는 게 싫으면 싫다고 노골적으로 표현을 하면 또 모를까 이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온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게 시헌도 왜 여기서 자신이 한가하게 밥을 먹고 앉아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아직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본인도 모르는 이유를 상대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단은 그러니까, 몇 달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와 돈이 아까워 앉아 있는 중이었다. 여자가 다시 시헌을 불렀다.
“저기요. 진짜 왜 나오셨어요?”
“엄마가 나오라고 해서.”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먹는 시헌은 그쪽도 비슷한 처지 아니냐며 중얼거렸다. 사실 맞기는 하지만, 여자는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시헌에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참다못한 여자가 와인 대신 옆에 있는 물을 시헌에게 뿌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악이네요! 당신!”
어쩔 줄을 모르는 여자와 난데없이 날아든 물에 지나가던 직원이 깜짝 놀라 시헌에게 다가왔다. 보이는 시선을 무시한 시헌은 옷에 튄 물을 가볍게 탈탈 털었다. 이거 비싼 건데.
“갈 거면 가. 그쪽 피해 보는 일 없이 처리할 테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가고 싶어서 나한테 물 뿌린 거잖아. 알아서 한다고.”
시헌이 직원에게 받은 냅킨으로 적당히 옷에 묻은 물을 닦았다. 머리에 흐르는 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써 의자에 앉는 여자를 본 시헌이 입가를 닦는 척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자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예전에는 그저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박기욱이 너무나 먼 것 같았던, 평생 오지 않을 것 같던 나이가 되어 보고 나니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그 시절 기욱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생각했을지가 이해가 되는 스스로가 참 어이가 없었다. 시헌에게 박기욱이라는 존재는 애증의 존재다. 시헌은 이런 식으로 기욱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태연하게 물을 닦는 시헌에 기가 찬 여자가 다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제길…!! 미안해요.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그럴 수…….”
쿵,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가게가 소란스러워졌다. 안쪽 자리인 것 같은데, 시헌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굳이 등을 돌리지 않았다. 반면 뒤쪽이 훤히 보이는 여자는 계속해서 시헌을 흘끗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사람이 쓰러진 거 같은데요. 그쪽 의사…….”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헌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등을 돌렸다. 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니만 딱 들어맞았다. 식사 중 남성 하나가 갑자기 쓰러졌다. 누군가 119에 통화를 하고 있었고, 다가온 시헌을 대신해 여자 하나가 CPR을 하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거 같아서 내버려 뒀는데 숨이 좀 차는 모양이었다. 시헌이 사람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다가갔다. 직원이 그런 시헌을 말리려 하고 있었다.
“손님, 이러시면 곤란…….”
“의사예요. 그 사람.”
긴 머리카락에 고개를 숙이느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여자가 시헌을 대신해 대답했다. 정신없이 CPR을 하는 여자, 김도원에 이어 장현정까지. 시헌은 조만간 중학교 동창회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도원과 동창회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계속해.”
“어, 응.”
“지병은?”
“없는 거로……. 알아. 같이 식사하다가 쓰러졌거든.”
“식사?”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쪽으로 어쩔 줄 모르고 남편을 보고 있는 부인이 있었다. 세 사람이서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점점 파랗게 질려 가며 청색증을 수반하는 남자를 본 시헌이 이마를 짚었다. 아아, 정말이지.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잠시 멎었던 남자의 심장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것은 여전했다.
“지금 몇 시지?”
“어, 일곱 시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현정이 대답했다. 한참, 그러니까 차가 막힐 타임이었다. 게다가 여긴 소방서에서 거리도 멀었다. 남편의 아내쯤 되는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현정을 재촉했다. 그러나 현정도 해 주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헌은 여자와 현정을 번갈아 바라봤다.
“현정아…! 어떻게든 해 봐! 뭐든 좋으니까… 흑흑… 우리 남편 어떻게….”
“사촌이야?”
“응.”
“나중에 고소만 하지 마. 펜 있으면 펜 좀 줘.”
뜬금없이 펜을 찾는 시헌에 현정은 뭐가 있을 거라며 시키는 대로 했다. 차가 막힐 거라는 시헌의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은 모양인지 지배인쯤 되는 사람이 결국 시헌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시헌은 휴대폰을 걸쳐 짧게 통화를 한 뒤 휴대폰을 건네줬다. 열심히 오고 있는 119 구급대원에게 더 할 말은 없었다. 자리로 돌아간 시헌이 가방을 뒤졌다. 그 사이 주방으로 뛰어간 직원 하나가 요리용으로 사용되는 술을 가지고 나왔다. 시헌의 가방 안쪽에서 맥가이버 칼이 나왔다.
“너 그런 거 가지고 다녀?”
“동영상 찍어. 혹시 모르니까.”
“아, 응. 아, 알았어.”
현정이 다급하게 휴대폰을 열어 동영상을 촬영했다. 숨을 고른 시헌이 눈을 질끔 감으며 숨을 골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외과가 아니라 흉부외과를 갈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빌어먹을.
* * *
퍽 하고 남자의 발길질에 시헌의 몸이 휘청거렸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은 시헌이 뒷짐을 지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술실이 있는 복도에서 지나가는 의료진들이 그런 시헌과 시헌을 때리는 흉부외과 교수―정석빈을 흘끗대고 있었다. 딱 봐도 험악해 보이는 복도는 두 사람의 목소리와 기계 소리를 제외하고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한 대, 두 대만으로는 성질이 차지 않는 듯 또다시 석빈이 시헌을 향해 발길질했다.
“너 뭐야? 너 외과 치프 달았다고 지금 해보자는 거야? 어?”
“죄송합니다.”
“너 흉부외과야? 어? 그냥 해도 말이 나올 판에…… 볼펜…… 아, 씨발. 열 받아서 말이 안 나오네. 야 박시헌!!”
“죄송합니다.”
“환자분 사모님이 소송 안 걸겠다고 하는데 장담 못 해. 가서 똑바로 이야기해. 무슨 말인지 알아?”
“알겠습니다.”
시헌이 눈을 살짝 위로 치켜떴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석빈이 또다시 열이 받은 듯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멀리서 한참 동안 시헌을 붙잡고 화를 내는 석빈을 본 우민이 보다 못해 끼어들어 석빈을 말렸다.
“야, 그만해라. 애 잡겠다.”
“선배, 아……. 진짜 이거 개또라이라니까요? 뭘 꼴아봐, 눈 안 깔아!!”
석빈의 눈치를 본 시헌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저년차 레지던트도 아니고, 치프씩이나 되는 의사가 교수한테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혼이 나는 모습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석빈도 차마 더 말을 못 하는 중이었다.
의료진들의 시선을 느낀 석빈은 처음부터 시헌을 어딘가의 구석으로 데리고 가 팰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멀리 팔짱을 끼며 지켜보고 있는 정혁과 눈이 마주친 뒤에야 석빈이 간신히 손을 내려놓았다. 흉부외과는 제 권한이 아니라 내버려 뒀지만, 그 이상 시헌을 때리면 가만 안 두겠다고 눈으로 말하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우민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환자는 괜찮아?”
“……아주, 좋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신기할 정도로!!”
석빈은 머리를 긁으며 시헌을 흘끗댔다. 고개를 든 시헌과 눈이 마주치자 석빈이 다시 주먹을 들어 고개를 숙이라며 눈치를 줬다. 고개를 숙인 시헌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이건 뭐 사고를 치고도 결과가 좋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너 잘했다는 소리 아니거든?”
“죄송합니다.”
“아오, 씨발!! 돌아 버리겠네! 꺼져!!”
석빈이 안쪽을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가라는 석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헌은 고개를 숙인 채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혁이 기다렸다는 듯 시헌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정혁과 시헌은 센터 입구 바로 앞으로 나왔다.
“뭐래?”
“혼났어요.”
“야, 여기까지 들리더라. 혼이 나야지 그럼. 뺨 안 맞는 게 용하다. 좀 우는 시늉이라도 내는 게 어때?”
“진작 울었어요.”
“언제?”
“환자 쓰러진 거 봤을 때요. 잘못됐다는 걸 알겠더라구요. 교수님은 화 안 내세요?”
“정 교수가 너 때리는 거 눈감아 줬잖아. 그 정도면 화 많이 낸 거다 나?”
“시헌아!”
뒤늦게 병원에 온 현정이 입구 근처에서 떠들고 있는 시헌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현정이 정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시헌이 한참 여자가 어쩌고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정혁은 시헌의 등을 툭툭 건드려 밀며 손을 흔들었다.
“한 시간 줄게. 머리 좀 식히고 와.”
“교수님, 그런 거 아닙니다.”
“어. 그래.”
정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센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지만, 덕분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번 시헌은 현정을 데리고 병원 로비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사고, 일부러 2층에 마련된 휴식용 테이블에 앉았다. 아무래도 로비에 있는 카페는 사람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니 너무 정신이 없었다. 시헌은 뚜껑을 열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오랜만에 보는 시헌은 가운을 입은 채로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이 완전히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현정은 원형 테이블에 팔을 괴며 커피 대신 시헌이 사 온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시헌과 현정은 테이블에 앉은 뒤에도 오 분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몇 년 전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연락은 종종 해도 서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만 알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오랜만이지만 세월의 흔적을 무시할 만큼 시헌과 현정은 서로에게 말이 없었다.
겉모습은 달라졌을지라도 달라지지 않은 부분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참 만에 커피를 마신 현정이 먼저 입을 뗐다.
“우리 시헌이, 이제 완전히 의사 다 됐네.”
“그런 소리 하지 마.”
“왜? 의사 되기 싫다면서 투정 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식당이랑 병원에서 완전 멋졌어.”
“나 혼나는 거 봤으면 그런 말 못 할걸.”
“혼났어?”
“한 달 치 욕은 다 먹은 거 같은데.”
시헌도 포크로 현정이 먹다 만 케이크를 먹기 위해 포크를 들었다. 현정의 포크와 시헌의 포크가 허공에서 잠시 부딪혔다. 시헌이 살짝 뒤로 물러나자 현정이 먼저 케이크를 떴다. 시헌은 현정의 뒤로 케이크를 뜨며 입에 넣었다. 생각 없이 주문한 케이크는 너무 달아서 곧장 커피를 마셔야 할 정도였다. 시헌은 커피를 거의 손도 안 대고 케이크를 먹는 현정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귀국했으면 말하지. 시간 냈을 텐데.”
그런 여자기 때문이 아니라. 현정을 볼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이삼 일 당직을 서는 고생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시헌의 생각이었다.
“나 저번 주에 귀국했어. 슬슬 연락할까 했는데……. 그렇게 된 거야.”
“사모님, 친척분?”
“응. 이모. 이모부랑 식사하러 온 건데 아까 이야기했는데 고소할 생각은 없다고 못박았어. 혹시 모르니까 내가 잘 말할게.”
“고맙다.”
“고맙긴 뭘.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면 또 여자와 선을 보러 나온 것이 마냥 헛된 일은 아니었구나 하고 안심이 들었다. 선을 보러 나오지 않았더라면 현정을 만날 일도, 오늘 같은 일도 없었을 테니까.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었다.
“미국에서 간호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연락은 해도 사실 서로 뭘 하고 지내는지는 거의 알지 못했다. 현정 또한 마지막으로 시헌에 대해 들은 것이 H대를 졸업해 J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지 시헌이 외과 의사가 됐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조차 미치지 않았다.
“얘는 언제 적 이야길 하는 거야. 나 경영학 전공하고, 아는 교수님 통해서 로스쿨 들어갔어.”
시헌의 커피가 비어 있는 것을 눈치챈 현정이 얼마 먹지 않은 자신의 커피를 시헌 쪽으로 내밀었다. 미안하다. 그렇게 중얼거린 시헌은 현정의 커피를 제 쪽으로 반 정도 따랐다. 남자를 그렇게 병원에 데려오고 난 뒤 시헌은 곧장 날밤을 꼬박 새워 일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간호사에 경영학과, 그다음은 로스쿨이라니 현정답지 않게 화려한 스펙이었다. 시헌은 현정이 의사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현정은 병원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뜬금없이 로스쿨?”
“의료 소송 전문변호사.”
“아, 그래.”
거기까지 들은 시헌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선을 보러 나오는 자신이나 현정이나 처지는 비슷했다. 부모의 고집은 아무래도 나이와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시헌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별로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안 받은 후가 더 성가셔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예상대로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 엄마. 미안. 그렇게 됐어. 깜박했다고 했잖아. 끊어.”
시헌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신속하게 전화를 끊었다. 엄마라는 말에 반응한 현정이 되물었다.
“어머님이셔? 뭐래?”
“같이 있던 여자 버리고 왔다고 엄마 화났어.”
이번엔 시헌이 팔을 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 그러고 보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과라도 하라는데 시헌은 잔뜩 기분이 상한 여자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만 살다 보니 연애 세포가 죽은 모양이다. 적어도 의대를 다닐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곤란해하는 시헌을 본 현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헌의 얼굴에 주름이 없는 것은 어쩌면 표정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하하, 너도 여전하구나.”
“결혼하래. 전부터 계속 말은 있었지만, 이번에 엄마 친구 막내아들이 결혼했거든. 그래서 아예 작정한 모양이야. 여자라도 안 만들면 그냥 못 넘어갈 거 같아.”
시헌이 진심으로 귀찮다며 다 마신 커피를 내려놓은 뒤 목에 걸치고 있던 마스크를 위로 썼다. 완전히 익숙해진 병원복 차림을 본 현정은 어린 시절 시헌을 생각하면 여전히 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왜 웃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어른인 척이 아니다. 어른이고, 진짜 어른스러워진 현정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현정이 어른인 척을 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었다면 지금의 현정은 그 누구보다 예뻤고, 또 잘 어울렸다. 역시 현정은 빨리 어른이 되는 편이 훨씬 좋았다. 시헌은 의자 뒤로 몸을 빼 기대며 병원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적당히 아무나 만들까 고민도 하고 있어.”
“너무 잔인하잖아.”
현정의 말에 시헌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기욱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박기욱처럼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헌과 기욱은 외모뿐만이 아니라 분명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시헌은 수술 모자에 눌린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키도 좀 컸으면 좋겠는데.”
“큭큭, 그건 좀 그래. 지금은 내가 훨씬 더 크잖아.”
“넌 힐 신잖아.”
“뭐래? 힐 안 신어도 내가 더 크거든?”
현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테이블 밑으로 잘빠진 현정의 긴 다리를 본 시헌은 괜히 자괴감이 들었다. 기왕 닮을 거면 다 닮지 말이다. 시헌의 집에서 유일하게 키가 작은 사람은 시헌뿐이었다. 듣자 하니 최초로 의사를 지낸 증조부가 키가 작았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설마 거기까지 그런 영향을 받았을까 싶었다. 현정은 커피의 뚜껑을 열어 스틱으로 얼마 남지 않은 컵 내부를 휘휘 저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시헌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현정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시헌아. 나는 어때?”
“뭐?”
“아, 아니. 그냥 한 소리야.”
의자를 다시 끌어당긴 시헌이 의심의 눈초리로 현정을 바라봤다. 그냥 한 소리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시헌도 알고 있었다.
“나도 슬슬 결혼, 이야기 나오고 있어.”
“…….”
“하긴 넌 안 되겠다. 서진이랑은 잘 지내?”
입을 꾹 다문 시헌을 지그시 바라본 현정이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적당히, 아무 여자나. 그런 말의 의미를 현정은 모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현정이 바라본 시헌은 무서울 정도로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헌은 결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박기욱과 같이 지내서 그런 것인지 선천적인 것인지는 현정도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시헌이 어렸을 때부터 서진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현정은 애써 밝은 척했을 뿐 사실은 무척이나 어두운 아이였다. 현정이 시헌과 같이 다녔던 것은 유일하게 시헌이 그 사실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시헌과 있으면, 가면을 쓰고 있어도 안심이 됐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 만난 지금도 다를 건 없었다.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된 시헌이 마른 입술을 뗐다.
“강서진이랑 헤어졌어.”
“……그랬구나.”
둘이 사귈 거라는 생각은 했다. 서진은 극도로 철벽을 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 말조차 붙이지 않았다. 싫증을 내면서도 시헌과 같이 다니는 것은 분명 시헌이 마냥 싫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슬슬 정혁에게 말했던 한 시간이 지나갔다. 막상 대화를 트기 시작하니 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현정이 시계와 갈 준비를 하는 서진을 흘끗댔다.
“있잖아, 혹시 언제 시간 돼? 이모부 그렇게 돼서 당분간 사촌 등하교 도와줘야 할 거 같거든.”
“어…… 다음 주 월요일. 몇 학년?”
“2학년. 한성초등학교 다녀.”
마지막 남은 케이크 조각을 먹는 현정에 시헌이 눈을 깜박였다. 한성초등학교라면 현정과 시헌이 다녔던 모교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별로 없지만, 오랜만에 듣는 이름임은 분명했다.
“거기 아직도 있어?”
“얘는 초등학교가 무슨 하루아침에 망해? 예전만 하진 않은데, 뒤쪽으로 재개발 들어간다고 해서 분위기가 좀 그런가 봐. 늦둥이거든.”
“아…….”
시헌이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 근처에는 일반 공립 초등학교와 사립 초등학교가 있었다. 과거에는 잘사는 집 애들이 다닌다고 했지만, 아직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시헌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현정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원룸이 많았나?”
“일반 주택이 좀 많아.”
“월요일 날, 오전에 차 끌고 갈게.”
“우리 시헌이 차도 있어?”
“그렇게 무시할래?”
슬슬 정말로 일어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시헌이 왼쪽 볼 근처를 툭툭 건드렸다. 시헌의 행동을 본 현정이 볼을 만지작거렸다. 시헌이 고개를 젓자 현정의 손이 조금 더 올라갔다. 뭐가 묻은 건가? 거울을 꺼내려는 현정에 시헌이 입을 열었다.
“목은 왜 그래?”
“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거울을 꺼내려던 현정이 다급하게 손으로 목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반동으로 현정의 소매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시헌이 목 이야기를 꺼냈지만 사실 현정의 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소매가 내려간 팔을 본 시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현정이 거울로 목을 확인했다.
“목에 아무것도 없는데?”
“미안, 잘못 봤나 보다.”
시헌은 내려가면서 자기가 치우겠다며 트레이를 챙긴 뒤 일어섰다. 손목에 난 멍은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수술을 마친 시헌이 당직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은 배터리가 없어 책상 위에 충전해 뒀던 휴대폰을 챙긴 뒤 의자에 앉았다. 옆에서 공부하고 있던 레지던트 하나가 시헌을 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다리를 꼰 시헌이 신경 쓰지 말라며 등을 돌렸다.
새벽 네 시. 시헌은 휴대폰으로 쌓여 있는 톡들을 확인했다. 단톡방에서 도원의 프로필을 본 시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원의 프로필에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현정의 사진이었다. 연락을 주고받을 시간대가 아님은 분명했지만, 시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정에게 연락했다.
「너 김도원이랑 만나?」 오전 4:23
답장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엎었으나, 의외로 현정에게서 답장이 왔다. 안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헌은 이 시간에 뭐 하고 있었냐는 등의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 응. 어떻게 알았어?」 오전 4:24
「걔 외과야. 몰랐어?」 오전 4:24
「아, 맞다. 생각도 못 했네, 미국에서 만났는데 만난 지 좀 됐어.」 오전 4:25
「그래 알았어.」 오전 4:26
시헌은 더 이상 카톡을 하지 않았다. 현정이 만나는 사람이 김도원이라고? 시헌의 머릿속에서 현정의 팔에 난 상처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기우겠거니 하고 생각한 시헌은 비어 있는 2층 침대에 올라가 잠시 눈을 붙였다.
전날 점심부터 24시간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물로 허기를 때운 시헌은 정혁에게 말해 밥을 먹고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굶으면 정말 아사를 할 것 같았다. 정혁은 그 정도로 아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밥을 먹고 오겠다는 시헌을 굳이 말리진 않았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 가는 식당에서 시헌은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최근 들어 사고를 친 탓인지 시헌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있어도 시헌의 앞에 앉으려 하는 의사들은 별로 없었다. 혼자 하는 식사가 별로 어색하지 않았던 시헌은 휴대폰을 보며 빠르게 밥을 먹었다. 탁, 누군가 시헌의 앞에 앉았다. 누군가 했더니 도원이었다. 재수도 없지. 도원은 알은척도 하지 않는 시헌에 기분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뭐냐 너.”
외과 치프와 신규 레지던트, 먼저 인사를 바라야 하는 건 도원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시헌은 굳이 다른 자리 내버려 두고 자신의 앞에서 깔짝대는 도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턱 끝으로 꺼지라는 듯 눈치를 줬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도원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 내 여자 친구랑 만났다며?”
“말은 바로 하자. 현정이가 나한테 찾아온 거야. 치프라고 부르라고.”
시헌이 국을 떠먹으며 도원을 노려봤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시헌의 눈빛에 도원이 움찔거렸다. 도원은 외과에 지원하기 전 기욱을 만났다. 신경외과에 지원하면 떨어트릴 거라는 기욱의 말을 듣고 차선책으로 외과를 선택한 것이었다. 도원이 밥을 먹고 있는 시헌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 어쨌든! 내 여자한테 손대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알아들었어?”
그사이 식사를 마친 시헌이 빈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리는가 싶던 시헌의 손바닥이 강하게 도원이 앉아 있는 책상을 쳤다. 도원의 식판에 있던 국이 흔들리며 식판 앞으로 튀었다. 건너편에 있던 의사들이 깜짝 놀라 시헌을 바라봤고, 시헌은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시헌의 행동에 도원이 당황하며 시헌을 올려다봤다.
“너 장현정 때렸냐?”
“싸운 거야. 너랑 상관없잖아?”
“한 번만 더, 현정이 건드려라.”
“뭐래, 너 장현정 좋아하냐? 선보러 다닌다더니. 남의 여자한테 관심 가지고 쓰레기네.”
화를 참지 못한 시헌이 도원의 멱살을 잡으며 의자에서 일으켰다. 도원이 괜히 주변으로 시선을 둘러봤다. 시헌을 알아본 간호사 한 명이 다급하게 시헌을 말렸다. 요즘 들어 시헌이 사고를 치는 빈도수가 너무 잦았다. 시헌도 이 이상 눈에 띄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에 도원과 눈을 맞췄다.
“경고했다. 장현정, 건드려라. 또.”
손을 턴 시헌이 식판을 들고 등을 돌렸다.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한 도원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시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야말로 현정이한테 얼씬대기만 해 봐!!”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었다. 병원에서 샤워하고 난 뒤 시헌은 사복을 꺼내 왔다. 저녁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사전에 정혁에게 외출을 허락받아 놓은 상태였다. 옷을 갈아입은 시헌은 차를 타고 현정이 잠시 신세를 지고 있다는 이모네로 갔다. 이모는 병원에 있는 모양인지 집 안에는 현정과 어린 자식밖에 없었다. 현정이 지난번에 말한 초등학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거실로 들어온 여자아이가 가방을 메고 나오며 시헌과 부딪혔다.
“누구?”
“윤영아,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지. 머리 묶어 줄게.”
“네.”
윤영이라는 이름인 모양이었다. 윤영이를 앉혀 놓은 현정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시헌도 이랬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세상이 너무나 크고 아름답게 보였는데, 요즘은 왜 이렇게 작게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를 타고 올 때부터 날씨가 우중충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두가 짐작할 만한 날씨였다. 습한 거로도 부족해서 칙칙하기만 한 회색 하늘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혀 왔다.
현정이 윤영이의 머리를 묶은 뒤 간신히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시헌의 앞에 윤영이라는 이름의 작은 여자아이가 과거의 현정을 생각나게 했다. 얼굴도 닮았고, 옷을 입혀 놓은 모습을 보니 현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윤영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누구예요?”
“윤영아! 아저씨라니, 크읍. 삼촌이라고 그래.”
“오빠야.”
“너 네 입으로 오빠라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않아?”
“오빠, 우리 이모랑 사겨?”
학습력이 좋은 꼬마였다. 그러고 보니 병원이 아닌 곳에서 어린아이를 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아과에서 일을 한 적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시헌은 소아과 체질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전부 제쳐 두고도 눈앞에 있는 윤영이는 참으로 묘했다.
그 나이 때는 그랬다. 평생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지 않을 줄 알았다. 이렇게 어른이 돼서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헌은 눈을 반짝이는 윤영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쪼르르 옆에 붙어 오는 게 꽤 귀여웠다.
“착하네.”
뒷정리하고 나가겠다는 현정에 시헌은 윤영을 데리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윤영이 시헌의 차 뒷좌석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오빠는 이름이 뭐야?”
“박시헌.”
“시원?”
“아니, 시헌.”
“시헌 오빠는 현정 이모랑 사귀어?”
“아니. 현정이 사귀는 사람 있어.”
“그 남자? 별로야. 못생기고 재수 없어서 싫어. 오빠가 더 착한 거 같은데.”
요즘 애들이 이랬나 싶을 정도로 돌직구에 시헌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니까. 시헌은 차에 있는 알사탕 하나를 윤영에게 건넸다. 윤영은 시헌이 준 알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거 먹으면 이 썩는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몰래 먹어, 몰래.”
뒷좌석으로 몸을 돌린 시헌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웃었다. 마침 현정이 조수석에 타자 윤영은 재빨리 입고 있던 잠바 주머니에 사탕을 집어 구겨 넣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묘한 것을 눈치챈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아무것도 안 했지요.”
“뭔데?”
윤영의 말에 현정은 벨트를 매고 운전대를 붙잡는 시헌을 흘끗댔다. 뒷좌석에 앉은 윤영이 말하지 말라는 듯 짧은 다리로 시헌의 운전석을 툭툭 건드렸다. 윤영의 행동에 놀란 현정은 영문도 모른 채 윤영을 말렸다. 학교 근처에 차를 댄 후 윤영이 시헌과 현정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따 마중 나와야 해!!”
“그래, 알았어.”
정문에는 아침 등교를 도와주는 담당 선생님이 시헌과 현정을 안심시켜 줬다. 인사를 한 뒤 쪼르르 운동장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윤영을 본 시헌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시간이 지나 외관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그 외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는 학교였다. 무조건 크기만 했던 교문도 세월이 지난 지금은 왜 이렇게 작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어지는 윤영을 보고 있자니 왠지.
“왠지 학부모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런 데서는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애가 있으면 왠지 딱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뭐, 실제로 주변에서 애를 키우는 의사들도 여럿 있으니 일찍 결혼을 한 사람의 경우 유치원 정도의 어린아이 정도는 충분히 있을 법했다.
조금은 풀릴 줄 알았던 날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우중충해졌다. 하늘에는 금방 비가 쏟아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먹구름이 져 있었다. 유독 습한 날이었다. 후둑, 조금씩이지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비, 많이 안 오면 좋겠는데. 우산 가져올 걸 그랬나?”
“차 안에 우산 있어. 가져가.”
장마도 아니고, 어차피 병원 생활을 하는 시헌에게 하루 이틀 내리고 마는 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시헌과 현정이 급한 대로 차에 탔다. 윤영을 데려다주느라 현정은 아침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갈까?”
“그래.”
시헌과 현정은 학교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호텔의 일식집에 방문했다. 일단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시헌은 음식이 나오기 무섭게 말없이 식사했다. 분명 예전의 시헌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독 빨리 음식을 먹는 시헌에 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밥은 먹고 일해?”
“그럴 리가 없잖아.”
이것저것 적당히 때우다가 그나마도 안 되겠다 싶으면 정혁에게 한 번씩 말을 하고 식사를 하러 갔다 오는 수준이었다. 4년 차가 됐다고는 하지만 시헌의 근무 강도는 다른 펠로우나 1년 차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시헌은 현정의 속도에 맞추려고 일부러 천천히 식사했다. 말이 천천히지 시헌은 중간부터 거의 음식에 손을 대고 있지 않았다.
“김도원이 찾아왔던데.”
“뭐? 왜?”
“너 병원에서 나 만났다고 말했어?”
“아, 그게……. 내가 아, 알아서 할게.”
현정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시헌은 그런 현정의 태도가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헌은 폭력에 시달린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정을 다시 만났을 때부터 느껴졌던 위화감은 폭력의 잔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차마 왜 맞으면서까지 사귀냐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식사를 한 두 사람은 시간이 비어 학교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다. 시간대가 시간대였던 터라 손님들은 주로 학부모들이 많았다.
“서진이랑 왜 헤어졌어?”
“여자한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어.”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은 이미 중학교 무렵부터 해 왔다. 게이, 라고 말하기도 뭐한 게 사실 시헌은 서진 외에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려 본 적이 없었다. 눈을 돌려 볼 자신이 없는 건지 아니면 강서진이라는 존재를 좋아했던 건지도 잘 모르겠다.
“엄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 중이야.”
“그런 말 했다가는 뒤집힐 것 같은데.”
“형도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좋아하는데.”
시헌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현정이 편했다. 연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서 편한 게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어떻냐는 현정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현정이 친구 이상의 감정이 있다면 자신은 현정을 가지고 노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령 현정이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해도 시헌은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게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짝사랑일 때가 좋았다고, 서진과 사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그날 이후로 쭉 해 왔다. 시헌은 현정이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정의 마음을 알아도 끝까지 현정을 좋아해 줄 수 없는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도 기욱 오빠는 결혼했잖아.”
박기욱은 이상하다. 현정은 그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박기욱만큼이나 시헌도 독특했지만, 시헌과 기욱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정의 말은 마치 형인 기욱이 그렇게 했으니 너도 문제가 없지 않냐는 투의 말이었다.
현정의 말에 일리는 있다. 여자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상이 현정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시헌은 기욱이 사실은 서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 나이를 먹고 그런 걸 숨기는 것도 웃긴다는 생각에 시헌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비가 안 오길 바랐는데, 창밖으로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유리창을 거칠게 두들겼다. 비뿐만이 아니라 바람도 거칠게 부는 모양이었다.
“우리 형이 좋아하는 남자, 강서진이야.”
동시에 창밖으로 천둥이 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갑작스러운 비에 밖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슬슬 윤영의 하교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걸 생각하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시헌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현정을 두고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욱의 사랑은 글쎄, 시헌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그건 사랑이 맞기는 한 걸까? 다른 사람들이 시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헌 또한 기욱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기욱을 이해한다고 해도 시헌은 결코 기욱이 될 수가 없었다.
“서윤 언니랑……. 서진이가 기욱 오빠를 좋아하는 거야?”
“그건 아닐걸.”
또다시 천둥이 쳤다. 참으로 짓궂은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천둥이 치자 현정이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현정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오늘은 뭔가 날이 아니다. 시헌도 그 사실에 공감했다. 아침부터 오후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축 처지고 습한 것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서진이랑 헤어졌는지 알겠지?”
시헌의 질문에 현정이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의 시헌은 기욱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현정이 느꼈던 위화감은 나이와 맞지 않은 시헌의 행동에 대한 위화감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이라 해도 시헌이 기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 일과 관련해서 연락이 왔다.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하는 사이 현정이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미안, 휴대폰 좀 하느라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어쨌든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봐.”
결혼에 대해서. 연애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말투였다. 시헌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의자 등에 몸을 끝까지 기댔다. 과거에는 저런 버릇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지난번에 카페에서도 이야기하면서 무의식중에 의자를 뒤로 빼는 걸 볼 때 의사 일 하면서 생긴 새로운 버릇인 듯싶었다.
“생각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될 거 같은데. 난 상관없어.”
“정말?”
“그 전에 너 나한테 할 말 있잖아.”
시헌이 추측하는 할 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폭력에 의한 상처, 김도원. 시헌이 알기로 현정은 도원을 싫어했다. 꼭 사람 관계가 어렸을 때와 똑같으리란 법은 없고,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만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도원의 폭력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현정은 끝내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빗소리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거세졌다. 천둥소리가 아니다. 빗방울이 창을 두드릴 때마다 현정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떨고 있는 현정의 몸을 본 시헌이 현정의 팔을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고 속이 불편한가 했더니, 그 이유를 드디어 알았다.
장현정, 초등학교 2학년 무렵 현정이 사고를 당할 뻔했던 일을 겪었던 그날도 이런 날씨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비가 거칠게 내리며 우중충한 하루가 계속되던 날이었다.
“너 아직도…….”
“괜찮아. 나, 나 진짜 괜찮아 시헌아.”
그렇게 말하는 현정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시헌은 억지로 울음을 참는 현정을 달래 차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여전히 거친 빗방울이 유리창을 시끄럽게 두들겼다. 시헌은 조금이라도 현정의 기분이 나아지라며 블루투스로 휴대폰을 연결해 아무 노래나 틀었다. 빗소리를 계속 듣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었다. 슬슬 윤영을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시헌은 현정에게 뒷좌석에 있는 담요를 건넸다. 괜찮다던 현정은 시헌이 주는 담요를 적당히 둘렀다.
“얼른 데리고 가자.”
시헌이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현정의 말에 시헌도 공감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불길한 징조는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짙게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하교할 때쯤이 되어 전화를 건 윤영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교 시간인 데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교문 앞은 학부모들로 정신이 없었다. 시헌은 교문을 나오는 어린 학생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현정이 젖지 않도록 들고 있는 검은 우산을 현정 쪽으로 내밀었다.
한참이 자나도 윤영은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렵게 윤영의 담임선생님과 만날 수 있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데리고 가신 줄 알았는데…….”
비가 오고, 유독 정신이 없는 와중에 윤영이 사라졌다. 아침에 봤던 현정과 시헌을 보고 윤영이 알아서 간 줄 알았던 것이었다. 잘못된 기분은 틀리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이 여럿 달려오고, 경찰에게 전화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현정을 대신해 시헌이 금방 오겠다는 현정의 이모와 통화를 했다.
“흐윽… 시헌아 나… 나 어떻게 해…….”
“별일 없을 거니까 울지 마.”
시헌은 윤영이 실종됐다는 말을 듣고 난 뒤부터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현정을 달랬다. 비가 많이 내려 모든 것이 다 평소 같지 않았다. 형사들이 오고, 학교 근처의 CCTV를 뒤졌지만, 워낙 학생들과 학부모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갔던 터라 그 속에서 작은 윤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정의 이모는 시헌을 대신해 우는 현정을 달래 주고 있었다.
지금은 그러니까 누구의 탓을 할 때가 아니었다. 장마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에 시헌의 차 안에는 장마철에 편하게 입으려고 샀던 방수용 재킷이 있었다. 시헌은 어지간히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면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흰색 재킷을 걸친 시헌은 모자를 눌러쓴 채 담배를 입에 물으며 전화를 받았다. 빗발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그렇게 됐어요. 저녁까지 들어갈 수는 있긴 한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됐다. 대충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자리 비워 놓을 테니까.
정혁과 전화를 끊은 시헌은 모자 안에서 담배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끔 담배를 피웠다. 수색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시헌이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는 시간도 길어졌다. 형사가 아닌 이상 당장 시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CCTV에서 낯선 차에서 내린 남자가 윤영을 데리고 가는 것이 포착됐다. 어머니인 현정의 이모가 윤영이 맞다고 했고, 아침에 윤영을 데려다준 현정과 시헌도 윤영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차량 수배를 내려놓고 한 시간 정도 지나 학교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남자의 차량이 발견됐다. 또다시 비가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
재개발이나 건물주의 재건축으로 주택가에는 빈집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군데군데 있는 CCTV들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더 많은 인력이 주변을 수색했다. 시헌은 그 소식을 들으며 정문 근처 전봇대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울다 지쳐 실신할 뻔했던 현정을 두고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택시 한 대가 근처로 다가오더니 우산조차 쓰지 않은 서진이 택시에서 내렸다. 서진을 본 시헌이 담배를 끄며 모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서진도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사람이 시헌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헌이 급하게 담배를 끄며 서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네가 여길 왜 와?”
“외상센터에 잠깐 들렀다가……. 얘기 드, 들어서.”
서진도 당황하긴 한 모양인지 말을 더듬었다. 시헌은 손에 들고 있을 뿐 사용하지 않고 있던 접이식 우산을 서진에게 건넸다. 젖을 대로 젖은 서진이 뒤늦게 시헌이 준 우산을 썼다.
“멋대로 도망 나와도 돼?”
“오프야. 현정이는?”
“좀 부탁할게.”
“뭐? 야, 박시헌 너 어디 가!”
시헌은 손을 흔들며 차량이 발견됐다던 장소로 향했다. 형사와 경찰들이 이상하게 주차된 차량을 중심으로 수색을 하고 있었다. 형사 한 명이 모자를 살짝 걷는 시헌의 얼굴을 알아봤다.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비는 한풀 꺾였지만, 날이 어두워지는 것은 무시를 못 했다. 아무리 주택가라 해도 날이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리면 수색이 곤란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유독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들은 골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학교 쪽에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의사입니다.”
남자가 모자 속 시헌의 얼굴을 훑었다. 현정이 한번 쓰러졌을 때 뒤늦게 달려온 응급구조사를 대신해 간단한 응급처치를 한 사람이 시헌이라는 사실을 형사들도 알고는 있었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얼굴에 형사들은 시헌이 어딘가의 인턴이나 이제 막 의대를 졸업한 학생 정도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읽은 시헌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와 있는 구급차 근처에서 대기하는 응급구조사를 흘끗댔다.
“외과 의사입니다. 4년 차예요. 만약의 사태에 저쪽보다는 도움이 될 거 같은데요.”
소방대원인 응급구조사를 무시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시헌은 그저 만약의 일이 일어났을 경우 자신이 가장 먼저 근처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와중에 시헌은 동원된 사람들과 함께 인근을 돌아다녔다.
언덕 쪽을 올라가자 하수구 사이로 뭔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알사탕, 아직 내용물이 남아 있었다. 어딘가 싸한 기분이 든 시헌은 알사탕을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왔다.
“이게 그러니까 선생님이 주신 거라구요?”
“차 안에서, 먹으라고 줬습니다.”
“이 사탕이 맞아요?”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지 안에 있는 사탕이니 흔하게 굴러다니는 사탕은 아니었다. 언덕 쪽으로 수색의 방향이 바뀌었다. 사람들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던 중 시헌의 눈에 녹색 문 너머 반지하방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의 외관을 훑어보니 사람이 사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건너편 골목을 둘러보는 사이 시헌이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문이 안쪽에서 잠가져 있었다.
다행히 담은 높지 않았다. 시헌은 근처에 있는 쓰레기더미들을 끌고 와 담을 넘었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가고 개발을 준비 중인 건물이 맞는 모양인지 바닥에는 유리 조각들이며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가구의 잔해들이 굴러다녔다. 탁, 하고 혹시 몰라 안쪽에서 문을 열어 놨다. 형사 한 명이 난데없이 안에서 나온 시헌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형사를 무시한 시헌은 유독 거슬렸던 반지하방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피 냄새가 났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자 인기척이 없다.
“돌아가죠. 괜히 사고 치지 마세요.”
중년의 경찰은 의사라고 밝힌 시헌이 잘못 얽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싶었다. 그러는 게 좋겠지? 하고 등을 돌리려던 찰나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했다. 시헌은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려는 형사를 뿌리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사람이 있다. 분명하다. 이번에는 형사들도 문 너머에 인기척을 느낀 듯 소리를 질렀다. 문을 딸 만한 시간이 없었다. 시헌의 눈에 창살이 거의 뜯어진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 혹은 키가 작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잠깐…!”
문을 따는 시간조차 아까웠던 시헌은 곧장 창문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어 방 안으로 떨어졌다. 바닥의 높이를 가늠하지 못해 구르면서 팔을 베인 모양이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줘… 살려 줘요….”
“윤영아?”
“오빠…?”
손등에 묻은 피를 대충 닦은 시헌이 휴대폰 라이트 불빛을 켤 틈도 없이 휴대폰의 불빛을 소리가 나는 안쪽 방으로 돌렸다. 확, 하고 비치는 불빛에 윤영이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이 뜯겼다. 시헌이 다급하게 윤영에게 다가갔다. 벽 구석 쪽에 쪼그리고 있는 윤영을 안은 시헌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다급하게 입고 있던 재킷을 서둘러 벗었다. 확, 하고 후발로 들어온 사람들이 라이터를 비추자 시헌이 윤영의 몸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씨발, 라이트 치우라고!!!”
피 냄새,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시헌의 재킷이 윤영의 몸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