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 넌 곱게 못 죽을 줄 알아
수술이 한참 진행 중인 수술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분위기에 새로 들어온 인턴 하나가 발밑에 있는 선에 걸려 넘어져 간호사와 몸을 부딪쳤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의사들의 시선이 인턴에게 닿았다. 인턴과 몸을 부딪친 간호사가 짜증이 난 모양인지 이내 소리를 질렀다.
“아, 쌤!! 미쳤어요?”
“죄, 죄송해요.”
침묵과 기계 소리만 맴도는 수술실에서, 평소라면 눈길 하나 주지 않을 인턴의 실수를 본 우민의 손이 멈췄다.
“나가.”
“……네?”
“씨발, 꺼지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으니까 나가.”
제 할 말을 마친 우민이 다시 고개를 숙여 수술에 집중했다. 요즘 들어 우민은 평소의 두 배 이상 예민했고, 수술실 사람들 또한 그런 우민에게 맞춰 잔뜩 날이 선 상태였다. 선임 레지던트가 인턴을 향해 나가라며 눈치를 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어린 인턴이 도망치듯 수술실을 나갔다.
다음 수술에 약간의 텀이 생긴 우민은 마취과 한쪽에 마련된 스테이션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우민은 짜증이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종종 마취과 스테이션 밑으로 기어들어 가고는 했다. 무슨 시츄에이션인지는 알 수는 없어도, 다른 레지던트의 호출을 받고 나타난 민영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바나나우유에 빨대를 꼽아 마시고 있는 우민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야! 니 여기서 뭐 하노?”
“이상한 사투리 쓰지 마. 짜증이 나니까.”
몸을 숙인 민영이 반쯤 마신 우민의 바나나우유를 빼앗아 마신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잘됐다는 식이었다. 민영은 의자에 앉아 손짓으로 다른 레지던트를 보낸 뒤 우민을 바라봤다. 책상 밑으로 숨어드는 우민은 민영이 보기에 잔뜩 혼이 난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너 오전 수술에서 인턴 쫓아냈다면서?”
“어.”
한두 번이 아니다.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워 죽겠는데 연달아 사고를 치는 인턴에 우민은 정말로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었다. 그나마 수술이 일찍 끝나고, 이제 막 1년이 좀 넘은 간호사 하나가 화 풀라며 주고 간 바나나우유 덕에 기분이 나아진 것뿐이었다.
“이야, 한 우민. 성격 많이 죽었구나 했는데 역시 살아 있었네.”
“죽을래? 여기서 참회하고 있잖아.”
“미친 새끼, 참회는 왜 남의 과 스테이션 밑에서 하냐고.”
“너 일하는 거 보니 나도 마취과나 할 걸 그랬다.”
“너랑 같이 일해야 했을 거 생각하면 끔찍하네요. 넌 천성이 외과의 체질이야. 세상에 요즘 병원에서 쌈박질하는 교수가 어딨냐?”
민영도 우민이 시헌을 때렸다는 소식은 들었다. 교수가 레지던트를 폭행하는 건 뭐, 전혀 없었던 일은 아니지만 타 과 교수가 타 과 레지던트를 때리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뭔가 잘못을 했을 거라는 등의 소문이 있었지만, 당사자들이 입을 다무니 소문은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같은 과, 하물며 우민이 때렸다는 레지던트의 형이자 병원장 집안의 의사 두 명을 연달아 폭행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병원 내로 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냥, 그런 게 있어.”
“의료사고?”
“의료사고였으면 차라리 나도 마음 편했겠다.”
박기욱에 박시헌, 그 인간들은 결코 초짜가 아니었다. 뭘 할 수 있냐는 서진의 말에 우민은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서진의 말이 맞았다. 3자인 우민이 서진에게, 그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은 해답을 찾기까지 그럴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아참, 니네 주말에 외과 통합 회식 있다면서? 너도 가냐?”
민영이 발끝으로 구석에 숨어 있는 우민을 툭툭 건드렸다. 우민이 그만하라며 몸을 일으키다가 이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아윽, 아파. 내가 그딴 데 가게 생겼냐!! 트라우마센터로 바빠!”
“너 진짜 좌천된 거 맞지?”
“보면 몰라?”
우민은 부딪친 머리를 긁적이며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다음 수술이 준비된 모양인지 간호사가 우민을 찾으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수술과 오후 외래, 병동 회진 등이 전부 끝난 우민은 외상센터에 내려가기 전 볼일이 있어 연구실로 향했다. 애써 스케줄을 적어 줬건만, 센터장인 임정혁에게 돌아오는 말은 정규 스케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내려와서 일을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재수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복도로 나온 우민이 기욱과 마주쳤다. 우민을 본 기욱이 같이 온 규건을 먼저 보냈다. 강서윤만큼은 아니라도 규건도 기욱을 때린 우민을 그리 좋게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규건뿐만이 아니었다.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폭력을 좋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규건은 기욱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면서도 불편한 모양인지 쉽게 몸을 돌리지 못했다. 규건이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사라지자 기욱이 자신의 연구실 문을 열어 손짓했다.
기욱의 연구실 같은 건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보는 눈을 생각한 우민은 기욱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기욱을 벽 쪽으로 몰아붙이며 멱살을 붙잡았다. 기욱은 우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강서진, 네가 한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 돌리지 말라고! 등이랑 가슴에 담배, 네 짓이지? 박기욱!!”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시헌의 짓이라고 말했던 자신을 비웃었을 기욱을 생각하면 우민은 아직도 열이 뻗쳐 왔다.
“너 강서진이랑…… 했냐?”
오피스텔에서 봤던 서진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 부인의 동생을, 아니 사귀기 전부터 이뤄졌다면 여자 친구의 남동생을 안고 싶을까? 우민은 기욱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진을 그렇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앞머리를 쓸어 넘긴 기욱이 우민의 손을 치워 내며 살짝 열린 연구실의 문을 완전히 닫은 뒤 등을 돌렸다.
“처음에는 얼마나 아프다며 울던지, 얼마나 성가셨는지 모릅니다. 펠라도 못하고, 몸은 뻣뻣하게 굳은 나무토막처럼. 그래도 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참으려 이를 악무는 모습이 꽤 볼만했거든요.”
“너 이 자식…!”
우민이 기욱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몸을 약간 옆으로 튼 기욱이 우민의 팔을 붙잡아 눌렀다.
“맞아 주는 연극은 피차 서로 한 대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상 절 때려 봤자 곤란한 건 선배님입니다.”
“강서진의 몸이 목적이라면 그렇게까지 만들 필요 없었잖아!”
“강서진, 제 겁니다. 제 걸 제 맘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줄 압니까? 박시헌이랑 사귀었을 때 더 철저하게 교육을 해야 했다고. 강서진은 남자 홀리는 재주가 뛰어난 모양인지 여기저기 벌래가 많이 꼬이더라고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교수님 같은 사람이 계속 말려드는 겁니다.”
기욱과 힘 싸움을 계속하던 우민이 끝내 기욱을 때리지 못하고 손을 내려놓았다. 거리를 벌린 우민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가는 기욱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내가 아는 박기욱은 쓰레기여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선배님, 혹시 본인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까지? 선배가, 저에 대해 뭘 아십니까? 아니, 그렇게 화를 내는 강서진에 대해서. 이렇게 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놀라는 척하시면 솔직히 좀 곤란하거든요.”
“이유가 그거냐? 강서진이! 네 말을 안 들어서?”
“달리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러는 선배도 나랑 다를 거 없지 않습니까? 강서진한테 잘해 준 이유가. 어떻게든 강서진 한번 꼬셔서 따먹어 볼 생각 아니었습니까? 궁금해요?”
기욱이 성큼성큼 우민의 앞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괴물이 탄생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우민에게 다가가 몸을 약간 숙인 기욱이 속삭였다.
“서진이가, 허리 놀림이 죽이거든. 재능이 있는 모양인지. 예전에는 몇 번 괴롭혀야 억지로 올라오는데 요즘은 꽤 말을 잘 들어. 예전같이 풋풋한 맛은 좀 없긴 해도. 사정 직전에 내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꼴리는지.”
“…야.”
“지난번에는 어디서 근본도 없는 남자를 끌고 오는 걸 보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래도 선배는 그런 잡것들이랑은 다르지 않습니까? 원한다면 하게 해 줄 수는 있습니다.”
태연하게 말을 하는 기욱에 기가 찼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에게 강서진은 도대체 어떻게 비치는지 한 번쯤은 알고 싶었다.
“강서진은 물건이 아니야!”
“그래서요?”
의자에 앉은 기욱이 상당히 거만한 태도로 우민을 올려다봤다. 우민이 그렇게 말을 해도 기욱의 서진에 대한 생각은 달라지는 게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민의 침묵을 눈치챈 기욱이 입고 있던 가운을 의자 뒤에 걸었다.
“이 씨발, 넌 곱게 못 죽을 줄 알아.”
“외상센터, 고생하시죠.”
“정신 나간 새끼!!”
더 이상 욕을 할 기분도 들지 않았던 우민이 신경질적으로 기욱의 연구실을 나왔다. 정신이 없는 센터에 내려가기 무섭게 정혁이 우민을 불렀다. 안쪽으로 의사들이 여럿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우민은 내려오자마자 박기욱이고 뭐고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날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무렵 우민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정혁이 써도 좋다고 하는 창고를 대충 정리해 환자용 간이침대에 담요를 덮고 자고 있던 우민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 교수님, 저 진호인데요. 뭔 택배를 이렇게 많이 시키셨어요?
― 나 졸려…… 일 없음 끊어라.
― 아니, 끊지 말구요!! 이거 다 어떻게 해요?
― 뭔데?
― 택배라니까요!!
― 씨발, 택배 뭐! 어떤 거!!
― 책이요.
잠에 취해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우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위쪽에 마련된 간이 선반에 머리를 부딪쳤다. 인상을 찌푸린 우민은 휴대폰을 바로 받았다.
― …려와.
― 네?
― 가지고 내려오라고!!
― 올라오는 게 아니라 내려가요?
― 그래, 트라우마센터로 가지고 내려와. 전부 다.
진호와 통화를 마친 우민은 연구실에서 챙겨 온 작은 디지털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세 시간은 족히 잔 것 같은 기분인데 시간은 고작해야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텀블러에 남아 있는 물을 마신 우민은 진호가 내려오기 전까지 창고 정리를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창고 정리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상자를 든 진호와 서진이 내려왔다.
“교수님, 어디에다 둘까요?”
“어. 그냥 거기다 내려 둬……. 아.”
진호가 들어오자 등을 돌린 우민이 서진을 보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필이면 데리고 와도 서진을 데리고 오는지 참 다른 의미로 눈치가 없는 짓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서진의 가슴 부근을 흘끗댄 우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꾸벅 인사를 하는 서진을 향해 손을 저었다.
“올라가도 돼.”
서진이 나가자 우민은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책이 있는 박스들을 뜯었다. 진호가 박스를 뜯고 있는 우민에게 치킨을 건넸다.
“이거, 치킨인데 좀 드세요. 식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당직을 선 의사들끼리 야식을 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날 밤에 시켜 준 치킨을 다음 날 동이 틀 새벽쯤에 먹고 있다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아무렴 먹을 시간이 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책을 뜯다 만 우민은 진호가 주는 치킨을 먹었다. 진호는 우민이 꺼내 놓은 책들을 둘러봤다.
“근데 뭔 책을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교수님 그 나이에 전과하시려고요?”
“처돌았냐! 열 받아서 공부한다! 그러는 넌 살 만한가 보다?”
“하하, 여기에 비교하면 천국이죠. 한 달짜리지만.”
“한 달 동안 많이 쉬어라. 대신 내가 고생 좀 할 테니까.”
“저보다 잘 맞는 거 같은데, 그냥 박 교수님이랑 한 번 더 싸우시면 안 될까요? 전 우리 교수님 편인데요.”
“이 자식 못 하는 말이 없어!”
탁, 우민은 진호가 가져온 캔 콜라를 뜯어 마신 뒤 비어 있는 공간에 내려놓았다. 진호는 정혁이 왜 박씨 집안과 싸웠는지를 애써 묻지 않았다. 자신한테도 말하지 못한다는 건 분명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해 주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진호에 우민은 괜히 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남은 콜라를 전부 비운 정혁이 슬슬 돌아가려는 진호를 향해 손가락 3개를 펼쳐 보였다.
“삼 개월.”
“엥?”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3개월 동안 쉬어.”
쓰레기들을 정리한 우민이 남은 책의 비닐들을 뜯고 있었다. 진호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런 우민을 바라봤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시끄러워. 나도 머리 좀 식히려고 그래.”
“제가 보기엔 학대인데요?”
“안 닥쳐? 그리고 한가하면, 자.”
금방 갈 줄 알았던 진호가 생각보다 오래 머물자 우민은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종이와 신분증을 진호에게 건넸다. 포스트잇에는 빼곡하게 책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할 일 없으면 내 이름으로 여기 있는 책 좀 싹 빌려 와. 나가!”
우민에게 쫓겨난 진호는 우민의 신분증과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사람이 좋은 건지 예민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민이 정혁에게 빌린 창고는 정혁의 연구실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진호는 마침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는 정혁과 마주쳤다. 우민이 징계 아닌 징계를 받게 된 이후 원래 센터에서 근무하던 진호는 큰 수술을 제외하고, 정혁을 대신해 일하게 되었다.
“살 만한가 보다?”
“어제 처음으로 와이프랑 애들이랑 외식했으면 말 다 했죠. 한 일 년 6개월 만인 거 같아요.”
“너도 잘해 주긴 했는데, 내가 후배 하나는 잘 뒀어. 그치?”
정혁이 슬쩍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분주하게 창고를 정리하는 우민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 교수님 성격도 성격인데,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라서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우민이 결국 문을 열고 창고를 나왔다. 언제까지 있을 거냐는 우민의 시선에 진호는 가 보겠다며 손을 흔든 뒤 연구실을 나갔다. 진호가 나가자 다른 의사가 할 말이 있는 듯 안으로 들어왔다. 별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한 정혁이 알아서 하라는 듯 신호를 준 뒤 의사를 쫓아냈다. 그도 그럴 게 정혁을 보는 우민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강서진, 신경외과 지원할 생각 없었다는 사실 알고 있었습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그쪽이 박기욱이랑 짜고, 병원 전산 조작해서 신경외과 2지망에 넣어 두고.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신규 면접에 들어가서 강서진 떨어트린 거 아닙니까?”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지원해서 전 규정대로 한 것뿐입니다.”
“지랄.”
벽에서 몸을 뗀 우민이 정혁에게 다가갔다. 정혁은 이제 막 자다 일어난 우민을 보며 혀를 찼다.
“우리 후배, 말이 너무 험하시네.”
“그쪽 소송 문제 묻히기 시작한 시기랑 강서진 NS 신규 레지로 들어왔을 때랑 겹치는 거 아십니까?”
“2월에 원래 신규들 들어오는 거 매년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개 같은 소리 하지 마시죠. 강서진, 이용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우민이 보기에 박기욱이나 임정혁이나 다 똑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욱보다는 정혁에 대한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환자를 살리느니 어쩌니 하면서 뒤에서 그런 식으로 가식을 떠는 정혁에게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우민의 시선을 느낀 정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씨발, 야. 누군 욕 못 해서 입 닥치고 있는 줄 알아? 나도 고민 많이 했어!!”
“고민한 게 그겁니까? 강서진이랑 자신의 안위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있는지? 그래서, 강서진이 당해야 할 일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한 번이라도…….”
시헌과 사귀기 전, 기욱이 말하는 첫 경험이 언제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과거부터 기욱에게 얽혀 지속해 온 삶은 서진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서진이 기욱에게 느껴야 했을 혐오와 불쾌의 감정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닌 이상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한 번이라도…! 그 뒤에 강서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관심이라도 가졌냐고!!”
“뭐가. 박기욱이랑 강서진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 상식적으로 생각해. 박기욱이랑 강서윤이랑 결혼했어!! 걔네 둘이 못해도 5년 이상 만난 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 근데 이제 와서 박기욱이 강서윤이 아니라 강서진이랑 그랬다고? 언제부터, 얼마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상상이나 했겠냐고!!!”
제 선택에 짜증이 나고 후회가 드는 건 정혁도 마찬가지였다.
강서진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비단 우민 혼자만은 아니었다. 각자의 선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진을 조금씩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다. 설마 떨어진 곳이 나락일 거라고는 우민도, 정혁도 알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이 느껴야 할 감정이라고는 뒤늦은 후회와 죄책감뿐이었다. 정혁이 우민의 수술복을 잡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진심이다. 그리고 안타깝게 생각도 해.”
“동정하지 마시죠. 강서진, 그쪽한테 동정받을 만한 사람 아닙니다.”
“그러는 넌 뭔데 강서진한테 그렇게까지 하는데? 등장하고 있는 건 너나 나나 똑같아. 아니면 뭐, 나는 안 되고 너는 되는 숭고한 이유라도 있냐?”
멋대로 말을 놓기 시작한 정혁은 갈 데까지 간 모양인지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늘어놓았다. 괜히 서로 체면 차리며 존댓말을 하는 그것보다야 나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혁의 성격이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었다.
“좋아하니까.”
“……뭐?”
“됐습니다. 더 할 말 없습니다. 일 있으면 부르시죠.”
얼굴을 약간 붉힌 우민이 등을 돌려 창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칠게 문을 닫는 우민을 본 정혁이 뺨을 긁적였다.
“알아서 해라 알아서.”
누가 물을 엎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물은 이미 엎어졌다는 것이고, 엎어진 물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 * *
병원 근처의 한 고깃집에서 1차 회식을 마친 서진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침 비어 있는 변기 칸으로 후다닥 들어간 서진은 술에 취한 채 문에 기대 휴대폰을 꺼냈다. 일을 하는 서윤에게 안부 문자가 와 있었다. 답장을 보낸 뒤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번에는 반대편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기욱의 2G 휴대전화였다.
CCTV라도 설치한 건 아닐까?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서진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둘러보며 휴대폰을 열었다.
「빼면 죽어」 오후 11:04
「알았어요.」 오후 11:05
서진은 한숨을 쉬며 답장을 보낸 뒤 화장실로 나왔다. 전체 회식이라고 해도 거의 신경외과 사람들과 앉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시 신경외과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가 싶던 기욱은 얼마 가지 못해 다른 과 교수들이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서진은 상대적으로 기욱의 눈치를 덜 보며 술을 마실 수 있었다.
1차는 병원 근처의 고깃집, 2차는 바로 건너편에 노래방이 있는 룸 술집이었다. 인원이 많은 터라 큰 방 3개를 잡았는데, 다행히 기욱은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기욱의 얼굴을 보지 않고 술을 마셔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던 건지 서진은 2차 룸 술집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연달아 술을 퍼마셨다.
“야, 너 적당히 마셔라.”
“괜찮아요.”
일찍 갈 사람들이 일어나고, 다른 룸에 있던 레지던트들 몇 명과 교수들이 넘어왔다. 일단 레지던트들이 사고를 치지 않게끔 책임자 겸으로 남아 있는 진호가 유독 심하게 달리는 서진을 주시했다. 화장실을 가려는 듯 일어난 서진이 비틀거리며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다.
“하아, 데려다줄게.”
그 모습을 본 진호가 서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밖으로 나왔다. 서진의 상태를 보아하니 집에 보내든지 아니면 병원으로 보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하며 병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서진을 보내도 괜찮냐는 톡을 보내고 있던 찰나 서진이 문을 열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위험…! 아, 교수님.”
건너편 방에서 교수 한 명과 따로 대화하다 거의 끝 무렵에 넘어온 기욱은 진호가 서진을 데리고 나간 것을 뒤늦게 알고 서진의 뒤를 따라 나왔다. 기욱 덕분에 사고를 면한 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 들어 올리며 혀를 찼다.
“많이도 마셨네.”
“지금 택시 태워서 보내려고요.”
“어디로?”
“병원이요. 규건이가 취해서 집에 못 갈 거 같은 애들 보내 주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한대요.”
“알았어.”
“네?”
“가라고, 강서진 내가 알아서 병원에 보내든지 우리 집에서 재울 테니까.”
기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비틀거리는 서진의 허리를 안았다.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기욱에 진호는 별일 없겠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기욱이 강서진을 해코지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른 애들을 신경 쓰느라 거의 술을 마시지 못한 진호가 휴대폰을 쥔 손을 흔들고 안쪽 룸으로 들어갔다.
쿵쿵거리는 소음과 정신없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복도에서 서진을 들쳐 맨 기욱은 자신이 나왔던 비어 있는 방 하나를 들어갔다. 사람이 다 나간 줄 알고 방을 치우고 있던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다 나간 줄 알았어요.”
안쪽 방 3개가 의사들이 회식차 잡은 방이라는 걸 모르는 직원은 없었다. 기욱이 서진을 소파 한쪽에 눕힌 뒤 손을 까닥였다. 20대 초반 남자 알바생이 머뭇거리며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기욱은 지갑 안쪽에서 10만 원짜리 수표 석 장을 꺼내 남자 알바의 품에 건넸다. 그가 기욱이 주는 수표를 손에 쥐며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회식 끝날 때까지 방 치우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아, 네!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좋은 시간 되세요!”
갑작스러운 팁에 알바가 후다닥 룸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 뒤 기욱은 입고 있던 코트를 옆으로 벗어 둔 뒤 소매를 걷었다. 기욱의 무릎 위로 술에 취한 서진이 머리를 기대며 쓰러지듯 자고 있었다. 그런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은 기욱은 노래를 마구잡이로 예약했다. 기욱은 예약이 끝나자마자 리모컨을 옆으로 내던졌다. 방 안에 있는 스피커에서 반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서진, 정신 차려.”
“흐… 으읏… 목말라.”
“쯧.”
귀찮게 하기는. 기욱은 비어 있는 컵에 담긴 정체 모를 음료를 바닥으로 버린 뒤 물통에서 새 물을 따라 서진에게 건넸다. 물 컵을 쥘 힘도 없는 서진은 기욱이 컵을 기울이는 것을 받아 마셨다. 서진의 입가로 차마 넘기지 못한 물이 흘러내렸다.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린 기욱이 부드럽게 서진의 입술에 묻은 물을 핥았다.
“누가 이렇게 마시래?”
빼지 말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으라는 말은 했지 술을 많이 마시라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도 적당히 마시라고 말할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강서진은 꼭 한 번씩 이런 말도 안 되는 걸로 기욱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해요. 죄송해요. 적당히, 마실게요….”
조금 정신을 차린 서진이 기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입을 채 벌리기도 전에 서진이 먼저 입을 안까지 벌려 왔다. 제가 없는 다른 곳에서 술에 취한 서진은 화가 났지만, 지금의 서진은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술에 취한 서진은 평소보다 훨씬 더 얌전했다. 서진을 무릎 위로 올린 기욱이 살짝 다리를 벌렸다.
“미안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지?”
기욱은 벨트를 잡지 못해 허우적대는 서진의 팔을 위로 올렸다. 벨트를 풀고, 입고 있던 바지가 아래로 내려가자 서진은 기욱의 페니스를 열심히 핥았다. 애써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구석구석 펠라를 하는 서진과 룸 안에서 흘러나오는 반주 소리에 기욱의 숨소리가 금방 거칠어졌다.
사정을 참지 못할 것 같은 기욱이 다급하게 서진의 머리채를 뒤로 당겼다.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던 서진이 갑작스럽게 당겨진 머리에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술에 취해 눈동자에 맛이 간 듯 제정신이 아닌 서진이었지만, 기욱은 그 시선이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기욱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입술을 덮었다.
“흐, 아응… 응….”
기욱의 혀가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서진 또한 기욱의 혀를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플라스틱 같았던 혀가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젤리 같았다. 우민에게 말했던, 아무것도 모르는 서진도 좋았지만 능숙한 서진도 나쁘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박기욱에게 강서진은 먹으면 먹을수록 질리기는커녕 중독이 되는 마약과도 같았다. 박기욱에게 강서진은 어떤 마약보다 더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진을 원하는 기욱의 마음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강서진 엎드려.”
“흐… 읏….”
“엎드리라고.”
두 번 말하기 싫어하는 기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서진이 다급하게 소파 안쪽으로 몸을 엎드렸다. 위로 올라탄 기욱의 손이 잠시 서진의 옷 안을 헤집는가 싶더니 이내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컵에 남아 있는 물로 손을 대충 닦은 기욱이 서진의 안을 조금씩 넓혀 갔다.
“하으, 아응, 응….”
닿을 곳 없이 허공을 맴돌던 서진의 손이 소파 위에 던져진 기욱의 코트를 쥐며 발버둥을 쳤다. 서진이 술을 마신 것처럼 기욱도 술을 꽤 마신 상태라 인내심이 바닥이 나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안을 차분히 넓힐 틈도 없이 제 페니스를 안쪽까지 밀어 넣었다.
“하으으윽! 으읍…!”
“소리 내지 마. 입 닫아.”
“으븝… 읍….”
기욱이 입을 막을 것도 없이 서진이 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신음을 참았다. 소파에 있던 마이크가 굴러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신경질이 난 듯 기욱은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반주를 전부 꺼 버렸다. 건너편 방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모양인지 벽 너머가 시끄러웠다.
“하, 으으… 읏… 어흑… 읍….”
“입 닫으라고 했을 텐데.”
퍽퍽, 하고 기욱의 페니스와 허벅지가 거침없이 서진의 엉덩이에 부딪혔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서진은 자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조차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지금의 서진은 그저 기욱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인형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안에 그대로 사정을 했다. 과거에는 가끔가다 한 번씩 콘돔이라도 썼지만, 최근의 기욱은 서진과 섹스를 할 때 절대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앞으로 쓰러졌지만, 기욱은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서진의 허리를 잡아 제 허벅지 위로 올린 기욱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려 서진의 다리를 강제로 벌렸다.
“…어. 싫어. 으읏… 싫어! 아읏…제발….”
처음에는 어딘가의 모텔인 줄 알았다. 기욱과 섹스를 하는 게 놀라운 건 아니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짧지만 조금씩 정신이 들이기 시작하고 장소를 짐작한 서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룸 안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벽 너머와 복도에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듯한 인기척과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런 거… 후윽….”
“가끔은 기분전환도 좋지?”
“그럴 리가… 흐읏….”
“넌 나한테 못 벗어나. 이런 곳에서, 남자한테 다리를 벌리고도 좋아 죽겠다는 듯 날 먹어 치우는 네가 감히 다른 사람에게 안길 수 있을 거 같아?”
그런 꼴을 볼 생각도 없지만, 최근 들어 기욱은 서진 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별로 서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아니, 언젠가부터인가 그랬다. 강서진이 아니면 좀처럼 만족할 만한 섹스를 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안을 찌르는 기욱에게 안 그래도 숨이 찬 서진이 숨을 헐떡이며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옆쪽에 있던 휴대폰에서 불빛이 들어왔다. 한 손으로 서진의 허리를 안은 기욱이 전화를 받았다.
“아으, 응….”
“닥쳐.”
뭐? 오빠 뭐라고? 휴대폰 너머에서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듯 서윤이 몇 번인가 되물었다. 서진을 눕힌 채 페니스를 움직이는 기욱이 숨을 참으며 서윤과 전화를 했다. 기욱이 갑작스러운 욕을 들은 서윤을 달랬다.
“미안, 술을 좀 많이 마셔서 그래. 서진이도 같이 있어. 그래, 알았어.”
서윤과 통화를 마친 기욱이 휴대폰을 위로 던진 뒤 서진의 허벅지를 잡고 허리를 움직였다. 필름이 완전히 끊긴 듯 서진의 몸은 기욱이 움직이는 대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 * *
“하응, 읏… 응….”
정체불명의 신음이 들렸다. 조금씩 희미해졌던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은 아직도 어두컴컴했지만, 실내에는 불빛이 가득했다. 가늘게 실눈을 뜨자 제 몸이 지나치게 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을 움직이고 싶어도 술기운 탓인지 꿈적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위로 뜨자 소파 쪽에서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오빠, 그래도 서진이 재워 놓고 침대에서 하자. 서진이 자는데…….”
소파에서 기욱의 팔에 목을 두르며 올라탄 서윤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서진을 흘끗댔다. 서윤의 시선을 느낀 기욱이 재빨리 눈을 감았다. 서진의 손과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기욱이 서윤의 눈을 돌렸다.
“술 취해서 괜찮아. 기억도 못 할걸.”
“그래도…….”
“한 번만 하자.”
“흣, 그럼 한 번만이야?”
애교를 부리는 서윤에 기욱은 서윤이 입고 있던 셔츠를 살짝 올려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눈을 감은 서진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서윤의 숨소리에 맞춰 올라갔다. 2차에 가고, 술을 많이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 그리고 바로 왜인지 건너편 방에서 기욱에게 강제로 안겼다. 문을 앞에 두고 다리를 벌리고 있는 자신이 싫어 고개를 저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하응, 응….”
“쉿, 서진이 깨잖아.”
서윤의 목덜미를 핥은 기욱은 서윤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부드럽게 서윤을 애무했다. 기욱의 품에 안겨 앞을 보지 못하는 서윤을 둔 기욱과 마침 눈을 뜬 서진의 시선이 맞았다. 마치 누군가 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바닥에서 몸을 뗄 수 없는 서진은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눈을 감았다.
기욱은 서윤과 함께 침실로 들어간 이후에도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서진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자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서윤을 재우고 문을 닫은 뒤 나온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욱이 내뱉은 담배 연기가 서진의 코를 자극했다. 담배를 다 피운 기욱은 발끝으로 엎드려 있는 서진을 툭툭 건드렸다.
“일어나 강서진. 안 자는 거 다 알아.”
마법처럼, 기욱이 서진의 몸을 잡아 일으키자 딱딱하게 굳은 서진의 몸이 움직였다.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안쪽 방 침대에 서진을 던졌다. 룸에서까지는 어떻게 넘어갔다 쳐도 서윤이 자는 집에서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기욱은 침대 헤드 쪽으로 물러나는 서진을 따라 침대 위로 올라왔다. 탁, 하고 기욱이 서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발… 으읍….”
서진의 팔을 누른 기욱이 입술을 덮었다. 금방이라도 덮쳐 올 것 같은 진한 키스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간신히 기욱의 손을 뿌리친 서진은 도망치듯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서진이 바닥에 몸을 박았다.
물을 마시러 나왔던 서윤은 방 쪽에서 들리는 소음에 문을 열었다.
“서진아 뭐 해?”
“누나 그…….”
“강서진, 술 취했으면 똑바로 자라고 그랬잖아.”
기욱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기욱을 옆으로 밀어낸 서진이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화장실 좀!”
서진은 비틀거리며 다급하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간신히 욕실로 들어간 서진은 변기를 붙잡으며 헛구역질했다.
“우윽… 윽….”
분명 속이 뒤집혀 미칠 것 같은데 정작 나오는 것은 없었다. 토할 것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헛구역질에 걱정이 된 서윤이 문을 열고 나왔다.
“서진아, 너 괜찮아?”
“어. 응. 괜찮아.”
뒤따라서 온 기욱이 서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세면대의 물을 튼 서진이 고인 물로 입을 헹구며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금방 나갈게.”
서윤과 기욱이 나가고 난 뒤에도 서진은 물을 틀어 놓고 한동안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서진이 정신을 차린 건 이른 오후 무렵이었다. 일요일 오전, 숙취 때문에 머리는 아팠지만, 푹 잤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거실에서 밥 냄새가 났다. 아침 준비를 하고 있던 서윤은 방에서 나오는 서진을 보며 몸을 돌렸다.
“서진아, 일어났어?”
“어, 응.”
아침에 서윤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서진은 저도 모르는 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기욱이 서진을 흘끗 보더니 리모컨을 쥔 채 욕실 쪽으로 손목을 흔들었다.
“씻고 올게.”
기욱을 보는 순간 모든 게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윤은 비틀거리는 서진이 단순히 술이 덜 깨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진은 벽을 짚으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할 말이 없는 아침이었다.
* * *
서진과 서윤을 병원에 데려다준 기욱은 볼일이 있다며 차를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대학로의 번화가, 술을 마시러 밤에 온 적은 있었지만, 그조차도 몇 년 전 일이었다. 학생들과 젊은 사람들이 유독 많은 낮의 대학로는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기욱에게 있어서 낯선 괴리감을 만들게 하는 불편한 장소였다.
그런데도 죽지 않은 모양인지 잘 빼입은 수트 차림의 기욱은 흘끔흘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기욱이 휴대폰을 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툭, 하고 누군가 기욱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건 또 무슨 차림인 거지?”
“몇 번 봤다고 말 놔.”
“내가 너만 한 동생이 두 명이거든.”
“제길.”
그렇게 말하는 기욱에 서울중앙지검 검사인 지희열이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리며 혀를 찼다. 무턱대고 반말을 했다고 똑같이 반말하는 희열도 그리 성격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할 말 있으니까 조용히 오라고 했잖습니까.”
“조용히 온 건데.”
“그 차림이 어딜 봐서……. 하, 됐으니까 따라오시죠.”
희열이 바로 건너편에 있는 건물 쪽으로 기욱을 이끌었다. 20대들이 좋아할 만한 룸카페였다. 미리 자리를 잡아 놓고, 일행을 데리러 간다는 이야기를 해 뒀던 터라 안으로 들어가는 기욱과 희열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트 차림의 기욱만큼이나 선글라스를 눌러쓰고 나타난 희열도 눈에 띄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앞서가는 희열은 한창일 때의 기욱 못지않게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연예인들 앞에서도 꿀린 적 없는 기욱이 저 얼굴로 검사를 하기는 아까울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 다 한 셈이었다.
기욱과 희열이 들어오자마자 직원이 문을 열고 음료수를 건넸다. 카페라떼 두 잔과 케이크, 그것도 희열이 사전에 먼저 시켜 놓은 것이었다. 기욱은 유리컵에 담긴 라떼의 거품을 스틱으로 살살 저었다.
“나 죄지은 거 없는데.”
“죄지으셨습니까? 한번 털어 봐야겠군요.”
“죄지은 거 없다니까.”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 하는 사람 중에 깨끗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됐고, 전에 나한테 빚진 거 기억하시죠? 빚지고 사는 거 싫어한다고 먼저 말한 사람이 그쪽이니까.”
희열이 커피를 홀짝이며 옆에 둔 가죽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기욱은 희열의 손을 보며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진한 치즈 맛이 나는 게 별로 기욱의 취향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직계 휴대폰으로 검사라며 연락을 해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희열. 그러니까 서진이 고3 무렵 학교폭력 문제로 소송을 하게 됐을 때 신세를 진 검사였다. 그 특이한 이름과 성질머리 덕분인지 기욱은 전화를 받고 오래되지 않아 희열을 기억할 수 있었다. 빚을 지면 갚는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벌써 7년도 더 된 옛날 일이었다. 풋내기 느낌이 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희열은 제법 끗발 있어 보이는 검사처럼 구는 그것으로 보이긴 했다.
“우리 검사님 일기장에라도 적어 놨나 보네.”
“일기 쓸 시간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몇 다리 건너 교수 됐다는 말은 듣긴 했는데. ……이거.”
희열이 좌식 테이블 위로 휴대폰을 던졌다. 잠금이 되어 있지 않은 오래된 휴대폰, 화면을 밀자 바로 갤러리 화면이 나타났다. 사진을 확대하자 기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자의 얼굴, 그리고 군데군데 보이는 복도는 기욱이 늘 다니고 지금도 걷고 있는 신경외과 병동 복도 사진이었다. 희열은 휴대폰을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더니 휴대폰 액정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 사람 누군지 아십니까?”
“뭐, 대충. 근데 번지수가 잘못된 거 같은데. 그 환자 주치의는 내가 아니거든. 하필이면 신혼여행 시기랑 겹쳐서.”
서정수, 병원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끝내 자살을 했던 그 남자의 얼굴을 기욱은 선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유족들과 병원 측의 원만한 합의와 경찰 조사 결과 단순 자살로 처리되어 그의 죽음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그 환자 담당했던 교수들 번호가 필요해?”
“그 정도는 제 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무시하지 마시죠.”
“그럼 뭔데.”
“교통사고, 나지 않았습니까? 병원 안 삼거리에서. 서정수 환자가 칼을 맞고 끌고 온 자동차에.”
“아아, 재수가 없었지. 그게 왜?”
“그 사람 직업이 뭔지 아십니까?”
“환자 직업에 관심 없……. 아니, 기자라고 했던 것 같군.”
커피와 함께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기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미 죽고, 경찰 조사에서도 자살로 끝이 난 남자에게 검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의 대답을 들은 희열이 어이가 없는 듯 중얼거렸다. 희열은 휴대폰 속 사진들을 하나씩 넘기며 말했다.
“기자는 무슨. 어쨌든, 이 사진들이 당시 서정수가 자살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옷입니다. 지금은 없고. 이 구두.”
빠르게 넘어가던 사진이 그가 신고 있던 구두에서 멈췄다. 구두 사진은 꽤 있었는데 마지막 사진에는 구두의 밑창 사이로 공간이 있는 것을 찍어 둔 것이었다.
“구두 굽 뒤에 뭔가를 숨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안은 텅 비어 있더군요. 이 정도 크기라면 그래…….”
희열이 기욱이 습관처럼 올려 둔 차키에 달린 USB를 흘끗댔다.
“USB 정도가 딱 맞거든요.”
“이건 내 거야.”
“누가 뭐라 그랬습니까? 제 말은 혹시 서정수 환자한테 수상한 점이 없었냐고 묻는 겁니다.”
“번지수 잘못 찾았다고 했지. 그 인간 주치의는 내가 아니라.”
“교통사고, 병원장을 노리고 낸 거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당신이 재수 없이 끼어든 거고요.”
“……진짜 재수가 없었군.”
포크를 내려놓은 기욱은 진심이었다. 설마 병원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될 줄도 몰랐거니와 그로 인해서 몰라도 될 걸 알아 버렸으니 말이다. 희열이 휴대폰을 한 번 더 옆으로 넘겼다. 서정수와는 다른, 이것도 기욱이 얼굴을 잘 아는 사람이 찍혀 있었다. 남태익 병원장의 얼굴이었다.
하긴, 서정수가 남 병원장을 노리고 교통사고를 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남 병원장의 사진이 한두 개 정도는 있어도 이상할 건 하나 없었다.
“그쪽 남 병원장님 지시로 사람 하나 만나러 갔다면서요.”
“7년 만에 만난 것치고는 스토킹의 정도가 심한데. 그래, 있었지.”
“뭐, 그 때문에 만나러 갔는지는 애써 묻지 않겠습니다. 듣자 하니 레지던트 하나가 말썽이었다고.”
“거기까지 알면서 무슨 말을 안 해? 그래서?”
“남 병원장과 불륜인 여자 얼굴입니다. 둘 사이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 사람이 있고요. 잘못 엮이시기 전에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병원장과 불륜이라는 여자는, 기욱에게 만나 보라고 했던 이연수의 어머니였다. 가지가지 하는군. 기욱은 다 마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차 키를 챙겨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몇 년 만에 갑자기 연락해서 얼굴 좀 보자길래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희열이 시간 낭비라며 일어서는 기욱에게 자신의 명함을 하나 건넸다.
USB, 기욱이 가지고 있는 USB는 아니지만, 기욱은 서정수가 자살 직전에 줬던 USB가 거슬렸다. 어딘가의 서랍 사이에 넣어 두고 까먹고 있었기에 희열이 말하지 않았다면 잊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USB였다. 기욱은 희열의 명함을 챙겨 지갑 한쪽에 넣었다.
“만약에 뭔가를 알고 있다면 이쪽 안위는?”
“그건 우리 박 교수님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무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정보의 판단은?”
“우리가 하지. 뭐 알고 있는 거 있습니까?”
“말했잖아. 만약에라고. 없어 지금은.”
기욱은 문을 닫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기욱은 건물 한쪽으로 돌아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건물 외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담배를 끈 기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USB를 찾아야 했다.
* * *
“하아….”
회식이 있고 난 뒤 연속으로 근무를 한 서진은 새벽 무렵에야 간신히 시간이 나 옥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서진은 아무 생각 없이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 대는 서진의 어깨를 누군가 툭, 하고 건드렸다. 우민이었다.
“담배 좀 작작 피워.”
“……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서진의 손은 이미 또 다른 담배에 손을 대고 있었다.
“작작 피우라니까.”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우민 또한 담배를 피우고 있어 설득력이 없었다. 담배를 문 서진은 제 옆에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민을 흘끗거렸다. 시헌 다음에는 기욱을 때린 우민이 형식적인 징계 절차를 걸쳐 외상센터에 갔다는 사실을 서진도 알고 있었다.
원래는 한 달 정도 했다가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뭐가 마음에 든 건지 우민은 아예 센터로 부서 이동을 해 버린 상황이었다. 어려운 수술이나 급한 경우 도와주긴 하지만, 이전 우민이 했던 병동과 수술 업무의 절반 이상은 전에 센터에 머물렀던 진호가 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우민의 밑에서 일했던 의사라 업무 스타일은 크게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우민과 진호는 달랐다. 일의 스타일 문제가 아니다. 어딘가 달랐다. 아무리 일의 스타일이 비슷해도 서진에게 한우민이라는 존재를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서진은 얼굴을 안 본 사이에 우민이 왠지 늙었다는 생각을 했다.
“많이 힘든가 보네요. 외상센터.”
“말도 마라. 전쟁터다. 손이 네 개 있어도 부족해.”
“그래도 즐거워 보이는데요.”
“즐겁기는 무슨! 오랜만에 공부하려니까 머리 터진다!”
우민이 지긋지긋하다 말하고 담배를 물었다. 서진은 자신이 피웠던 담배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분명 옥상으로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담배가 꽤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민의 말대로 줄담배가 맞긴 했나 보다. 서진은 담배 대신 주머니에 있는 사탕을 까 입에 넣었다.
“교수님은 왜 연인 같은 거 안 만드세요?”
“푸웁, 그런 걸 왜 갑자기 묻는 건데?”
“그냥요. 여자랑 결혼할 것도 아니면 연인 정도는 만들어도 되잖아요.”
“너랑 상관없잖아.”
“좋아해요.”
으득, 사탕을 이빨로 깬 서진이 몸을 돌렸다. 짧아진 담배에 우민이 다급하게 손을 털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담배꽁초를 발끝으로 으깬 우민이 감지 못한 머리를 긁적였다.
“좀! 사람이 맥락이라는 게 있어야지!”
담배를 더 피울 기분조차 들지 않았던 우민이 서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정작 잔소리를 듣는 서진은 제가 한 고백에 뭐가 잘못됐는지 모른다는 눈치였다. 서진의 고백은, 마치 시헌이 서진에게 고백했을 때와 닮아 있었다. 손으로 이마를 가린 우민이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갑자기 고백하면 어쩌라는 거야.”
이 나이 먹고 설마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한 방 먹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솔직히 조금, 아니 아주 완벽히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우민은 당장 서진의 말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우민의 침묵에 서진이 목덜미를 잡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언제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고 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꺼내고 나니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시헌의 기분을 어째서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하하, 역시 너무 뜬금없었죠? 아, 이거. 박기욱 없을 때 주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아서 지금 드릴게요.”
서진이 한동안 계속 가지고 있었다며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뭐 대단한 거라도 되나 하고 봤더니 반으로 접힌 종이었다. 그 종이가, 얼마나 만지작거렸으면 며칠 사이에 닳고 닳아 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지금 서진이 사는 집 주소는 아니었다.
“저 이사 가요.”
“갑자기 왜?”
“걸렸거든요. 교수님 옆집에 사는 거. 끝까지 숨기고…… 숨기고 싶었는데.”
서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끝을 맺었다. 집에 갈 여유도 없었지만, 덕분에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서윤의 집에 들어가는 빈도수가 잦아졌다. 서진이 가운의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요. 사실 뭔가를 표현하는 게 어려워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야 될까? 제 감정이 어떤 건지도 모를 때가 있어요.”
최근 들어 그런 후회를 한다. 만약 조금 더 일찍, 박기욱을 만나기 이전에 시헌에 대해 솔직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도 지난 일은 지난 일이었다. 시헌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은 돌이킬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안 울려고 했는데 끝내 눈물이 났다.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이었다. 시헌과 마찬가지로 서진은 우민을 좋아하고 있었다. 우민을 대신해서 온 진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우민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우민이 서진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진의 머리가 우민의 가슴에 닿았다.
“흐윽… 으윽… 흑, 좋아해요. 좋아했었어요….”
우민은 외상센터에 가고, 서진은 이사를 간다. 그렇게 되면 만날 시간은커녕 얼굴을 볼 시간조차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귀자는 말도 못 하는 스스로가 참 한심했다. 박기욱이라는 존재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서진의 몸에 난 화상 자국처럼 서진에게 기욱은 지울 수 없는 족쇄와도 같았다. 서진은 우민의 옷을 붙잡고 끝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사랑을 받고 있을 때는 몰랐다. 좋아하는데,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건지 시헌과 사귀었을 시절의 서진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시헌도 자신을 떠나보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런 상처를 받았을까?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하고 고민을 하면 그냥 눈물부터 나고, 숨이 막혀 왔다.
서진을 안은 우민이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서진의 짙은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 때문인지 서진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민은 제 가운의 소매로 서진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서진아….”
우민이 부드럽게 서진의 입술을 덮었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키스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우민의 키스는 기분이 좋았고, 서진은 오히려 금방 우민이 입술을 뗀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우민은 이러면 안 된다며 등을 돌리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내 연구실…… 비어.”
“걸리면 어떻게 해요.”
“오늘 박기욱 없잖아.”
서진은 그렇게 말하는 우민의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연구실로 들어가기 무섭게 가운을 벗은 두 사람이 서로 키스를 했다. 서진의 혀가 거침없이 우민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간신히 안쪽에 있는 침대에 누운 우민의 위로 서진이 올라탔다. 우민은 입고 있던 수술복을 상의를 벗는 서진의 팔을 잡아 잠시 말렸다.
“그렇게 급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그게… 윽, 좋아서요.”
옷을 벗은 서진이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섹스도 오랜만이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우민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서진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가슴 쪽으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손을 뻗은 우민이 서진의 흉터를 스쳤다.
“괜찮아?”
“그냥, 그래요.”
서진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며 꿋꿋하게 고개를 들었다. 서진의 허리를 안은 우민이 몸을 돌려 서진을 밑으로 깔았다. 본능적으로 일어서려는 서진의 몸을 침대 쪽으로 눌렀다. 일부러 자신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진의 가슴 아래로 내려간 손이 이내 하의 쪽을 천천히 주물렀다. 입을 벌리며 키스를 해 달라고 하는 모습이 마냥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런 서진을 보고 있자니 기욱이 왜 그렇게 서진을 탐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아… 읏….”
“서진아….”
참지 못하는 듯 우민도 입고 있던 옷들을 벗었다. 원래부터 안에 입고 있었던 옷이 없었던 터라 우민은 금방 속옷 차림이 되었다. 서진은 우민의 낯선 모습에 당황하며 움찔거렸다.
“왜 그래?”
“아니, 좀…… 낯설어서…… 읏….”
“괜찮아.”
우민이 부드럽게 서진을 달래며 입술을 덮었다. 우민의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차분하게 주물럭거렸다. 기욱과 섹스를 할 때와 달리 서진은 금방 흥분에 달아올랐다. 끝까지 옷을 벗은 우민이 다리와 허벅지 사이를 비볐다. 꼿꼿하게 선 페니스가 서진의 맨살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란 듯이 다리를 벌리는 서진에 우민은 씁쓸해하면서도 서진을 애무했다.
“으… 하으… 응….”
“아파?”
“아니요, 읏… 빨리… 으읍….”
애가 타 미칠 것 같았다. 애달프게 재촉을 할 때마다 기욱이 생각나는 우민은 일부러 더욱 천천히 서진의 안을 넓혀 갔다. 혹시나 하고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오늘 같은 날에 연락이 오면 최악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서진이 젖은 것을 확인한 우민이 제 페니스를 살짝 맞췄다.
“흐… 읏…….”
“닿기만 해도 간 거야?”
“교수님이…! 교수님이 그렇게 하니까… 흐윽….”
“알았어, 울지 마.”
눈물을 흘리는 서진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깨물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페니스를 살짝 밀어 넣던 중 우민이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끝을 살짝 간지럽히고 나온 우민의 페니스에 서진이 뭘 하는 건가 싶어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 순간 우민이 제 페니스를 입에 넣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깐…! 뭐, 뭐 하는…!”
“으읍… 가만히 있어.”
우민이 서진의 허벅지를 누르며 페니스를 천천히 입안으로 머금었다. 우민도 딱히 이런 짓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기욱이 서진에게 해 주지 않았을 것을 떠올린다면 이것 외에 달리 없었다. 서진도 펠라를 해 준 적은 많아도 막상 당해 본 적은 별로 없는 듯 다리를 오므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으… 으읏… 저, 저 진짜… 하읏….”
그만하라며 우민을 밀어냈지만 작정하고 덤비는 우민을 이기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진의 허리가 튀며 울컥, 하고 사정을 했다. 사정 직전에 우민이 입안에서 페니스를 빼냈지만, 얼굴에 튀는 신세는 면할 수 없었다.
“좋았어?”
“몰라, 윽…! 흐윽! 모른다구요!!”
“왜 네가 울고 그래.”
적당히 입가를 닦은 우민이 서진의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에는 잘 울지도 않는 녀석이 오늘따라 작정이라도 한 듯 눈물을 흘려 대니 우민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민은 서진의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천천히, 하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하는 듯 페니스를 살살 밀어 넣었다.
“윽, 그렇게 너무 조이지 마.”
“하으, 응….”
우민의 페니스가 들어오자 서진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지 우민의 목에 팔을 둘렀다. 거침없이 들어오는 페니스에 아플 법도 했지만, 서진은 인상을 조금 찌푸릴 뿐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우민의 위에 올라탄 서진이 허리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으… 하응….”
“너… 읏….”
서진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우민은 당황하면서도 이내 점점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복도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다급하게 입을 막는 서진의 모습을 본 우민이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이렇게 야한 걸까? 기욱의 말에 의하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는 서진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기욱 때문이었다. 씁쓸하면서도 착잡한 현실과 제 안을 꽉 조이는 서진에 우민은 현실을 잊고자 더욱 더 거칠게 서진을 탐했다. 사정 직전에 빼낸 페니스에서 나온 정액이 서진의 배 위로 튀었다. 서진은 빠져나간 페니스에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민이 벌어진 서진의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
“한 번 더 할까?”
“후, 읏… 좋아요.”
“체력도 좋다.”
“젊으니까요.”
우민의 페니스가 다시 서진의 안으로 들어오고, 서진은 그런 우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언제였더라.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말을 서진은 이제야 실감을 하고 있었다.
* * *
찰칵, 찰칵 라이터 소리가 났다. 지포라이터에 불이 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얇은 이불을 덮고 있던 서진이 바지 주머니에 있던 노란색 편의점 라이터를 우민에게 건넸다. 우민은 서진에게 받은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누군가와 섹스를 한 것만큼이나 섹스 후 담배를 피우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 나이 먹고 병원에서 사리 분별 못 하고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시계를 보니 아침 해가 뜰 시각이었다.
이대로 새 수술복과 옷을 챙겨 입고 나가면 분명 아침 햇살이 자신과 서진을 맞이할 것이 틀림없었다. 연기를 내뱉은 우민이 누워 있는 서진에게서 등을 돌린 채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다가오는 현실은 섹스 후 현자타임보다 더 허무했다.
이걸 바람이라고 해야 될지 불륜이라고 해야 될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할 때는 좋았지만 막상 끝이 나니 뒷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우민이 뒤쪽에 누워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려는 서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시간을 줘.”
“무슨 시간이요?”
“내가 널, 사랑할 수 있을 만한. 그리고 박기욱을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
“지금은 안 돼요?”
무척이나 아쉽다는 서진의 말투에 우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서는 우민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손을 뻗은 서진이 스친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우민의 가운 끝자락이 다였다. 손안에서 허무하게 흘러내려가는 가운 자락에 서진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강서진?”
“가요.”
“서진아.”
“됐으니까, 얼굴… 보기 싫으니까 얼른 가요!”
“미안하다.”
우민은 휴대폰을 챙긴 뒤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가 이렇게 찼었던가? 병원의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건지 오늘따라 유독 더 추운 아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민은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 * *
일요일 오후, 기욱과 시간을 맞춘 서진은 이사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기욱은 하라는 짐 정리는 안 하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처음 보는 노트북을 가져와 뭔가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강서진. 올라오지 마.”
2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기욱이 서진에게 내려가라는 듯 손짓했다. 어차피 2층에 있는 짐은 전부 옮긴 상태라 더 이상 2층에 올라갈 일은 없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왔는지 모르겠다며 궁시렁댄 서진은 남아 있는 짐을 정리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서진이 내려간 것을 확인한 기욱은 USB를 꼽은 뒤 서진의 집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어차피 곧 인터넷을 끊어버릴 집이고, 이사를 가게 되면 흔적이 남지 않으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USB를 꼽자 문서 파일 여러 개가 나왔다.
해외 인터넷 드라이브 사이트의 계정과 아이디였다. 다행히 바로가기가 있어서 어느 사이트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 문제는 엑셀 파일에 적혀 있는 계정과 비밀번호들이 너무 많았다. 몇 번 해 보니 계정과 동일 선상에 위치한 비밀번호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계정과 비밀번호 같아 보일 뿐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다. 보통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 아니게 될 거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오, 돌아 버리겠네.”
USB를 장지갑 안 동전지갑에 넣은 뒤 기욱은 노트북을 덮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서진은 오자마자 노트북을 붙잡고 이상한 짓을 하는 기욱을 별로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서진의 시선을 느낀 기욱이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숙였다.
“알았다고, 도와주면 되잖아.”
“거기 액자 좀 포장해 주세요.”
“그래.”
기욱이 몸을 숙이며 액자들을 뽁뽁이로 감쌌다. 기욱이 서윤과 결혼식을 할 때 서진의 집에 보냈던 액자들이었다. 액자를 다 치우고 나니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를 열자 박기욱&강서윤이라고 써 있는 이름태그가 붙어 있는 외장하드가 들어 있었다.
“너 이거 있었네?”
“어, 그런데요?”
외장하드는 기욱이 보낸 게 아니던가. 기욱에게도 있을 거라 생각한 서진은 별걸 가지고 다 놀라냐며 기욱이 정리한 액자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머쓱한 기욱은 외장하드를 다시 상자에 집어넣어 놓은 뒤 다른 상자와 함께 포장에 넣었다. 어느 정도 짐 정리가 다 되고, 기욱이 먼저 차에 탔다. 혹시 두고 온 게 없나 확인하고 온다는 핑계로 오피스텔로 올라간 서진은 우민의 집 문을 흘끗댔다.
당연한 말이지만 외상센터로 부서 이동을 한 우민은 집에 있는 날보다는 병원에 있는 날이 훨씬 많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서진은 오피스텔 주차장에 있는 기욱을 슬쩍 보더니 재빨리 우민의 집 우편함 안으로 뭔가를 넣었다.
그렇게, 길고 일었던 1년 차의 가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