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 한우민, 그리고 박시헌
“박시헌!”
새벽 응급수술을 마치고 수술방을 나온 정혁은 날밤을 꼬박 새운 시헌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정혁의 손짓에 시헌은 양해를 구한 뒤 정혁을 따라 교수실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커피? 녹차?”
“커피로 주세요.”
“그래.”
정혁이 새로 들인 캡슐 커피 박스에서 캡슐을 꺼내 커피를 타 시헌에게 건넸다.
“일은 할 만하냐?”
“그럭저럭요.”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정신도 없지?”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도 커피를 탄 뒤 시헌의 앞에 앉았다. 위쪽에 잇는 작은 창문 틈 사이로 새벽의 어스름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뭐냐, 너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다. 특별히 사고 친 것도 없고.”
“인턴이랑 별 차이 없는 거 같은데요.”
“1년 차가 다 그렇지 뭐. 다음에 시간 나면 수술방 올래?”
커피를 마시던 시헌의 눈이 반짝거렸다. 보통은 저기서 거절하는 거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봐 와서 알지만, 정혁도 기욱 못지않게 별난 녀석이었다.
“정말요?”
“너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대신에, 나 엄격하다?”
“어차피 옵져밖에 안 시켜 줄 거잖아요.”
“이게, 손도 없는데 1년 차면 옵져할 나이는 지났지!! 죽을래?”
“약속 지켜요.”
“알았다고. 큰 수술은 못 들어가도 작은 건 뭐, 너 정도면 괜찮겠지.”
정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시헌은 정혁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잘하고 있었다. 집안 내력이 있긴 있구나 싶을 정도로 시헌은 손댈 것 하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보통 어느 정도 지나면 크고 작은 사고 한 번쯤은 치기 마련이었다. 시헌에게 부족한 건 굳이 따지자면 실전, 경험 부족이었다. 정혁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시헌의 터진 입술과 뺨을 흘끗댔다.
“너, 도대체 NS에 한 교수한테는 왜 맞은 거야?”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말들이 다 오고 갔다. 시헌이 먼저 잘못했다더라, 한 교수가 죄도 없는 시헌을 일방적으로 때린 거라더라 등등의 이야기였다. 정혁은 본인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소문은 소문으로 치부할 생각이었다.
정혁이 아는 시헌은 적어도 그런 식으로 남들에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완전히 100%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진짜 한 교수한테 죄송하다고 한 거 맞아?”
“…맞아요.”
“무슨 잘못인데? 내가 커버해 줄 수 있는 거면 해 줄 테니까 말해 봐.”
“사,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 그렇게 얻어맞고 왜 맞았는지도 모른다고?”
정혁은 시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다 뿐인가? 어물쩍대는 시헌이, 정혁은 슬슬 답답했다. 정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헌과 우민이 특별한 인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요…….”
“박시헌, 사실대로 말해.”
시헌은 숨을 고르며 남은 커피를 전부 마셨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를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교수님이니까 할게요.”
“너 애같이 굴래?”
정혁이 시헌을 어르고 달랬다. 하긴, 정혁의 눈에 시헌은 여전히 중학교 시절에서 변한 것이 없었다. 몸은 자랐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애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아, 알았어요.”
시헌은 생각이 나는 대로 천천히 말했다. 서진과 사귀었을 때, 시헌이 알고 있는 서진의 집안 사정과 박기욱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서진이 강간을 당했던 일과 그 이후 기욱과 별장에서 있었던 일까지 전부 말했다. 다행히 가장 한가할 시간대라서 시헌은 흐름이 끊기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두 잔이 넘어 버린 커피를 전부 비운 정혁은 시헌의 말을 전부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잖아요.”
시헌의 담담함에 정혁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박시헌은 어렸을 때부터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했다. 정혁은 어린 시절의 시헌과 가운을 입은 눈앞의 시헌이 아주 잠깐 겹쳐 보였다.
“강서진은 왜 그, 강 간호사한테 그렇게 매달리는 거야?”
“어렸을 때 그……. 학대를 당했대요. 걔도 자기 얘길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서요. 학대당했을 때 누나가 많이 도와줬나 봐요.”
“강 간호사는 박기욱을 좋아하고, 박기욱은 강서진한테 집착하고. 그래서 의대 다닐 때 니네 둘이 몰래 사귀었다? 맙소사.”
정혁은 이마를 내짚었다. 네 사람의 지독한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한숨이었다. 기욱과 거래를 한 정혁은 아직도 서진을 외과에서 떨어트린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혹시 서진이 찾아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서진이 말없이 신경외과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서진이, 왜 떨어트린 거예요?”
사실은 서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암암리에 정혁이 서진을 떨어트린 주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헌 또한 그게 틀림없다고 확신을 했다.
“알았으면 그러지도 않았을 거야. ……몰랐지.”
정혁은 진심이었다. 그 상황이 돼 봐라, 막상 오랫동안 병원 내에서 쌓아 올린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욱의 서진에 대한 집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물론, 서진과 기욱의 관계를 모르고 사귄 시헌이나 그걸 숨긴 서진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 교수랑은 무슨 일인데?”
“……몰라요.”
“야, 박시헌!”
“진짜 모른다구요! 그냥, 서진이 이야기를 하길래……. 저도 모르게 사과한 것뿐이에요. 저는 그, 서진이를 지켜 주지 못했으니까요.”
시헌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날 이후 몇 번이나 꿈을 꿨다. 기욱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살려 달라고 비는 서진을 외면하는 꿈을 수도 없이 꿨다. 시헌은 그날, 그곳에서 도망친 것을 미친 듯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나 시헌은 그런 일을 다시 겪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서진을 두고 도망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의 시헌에게, 어린 시절 서진의 모든 것이 서윤이었던 것처럼, 시헌의 모든 것은 기욱이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을 보고 자랐고, 박기욱이 하는 행동이 다 맞는 줄 알았다. 형이니까. 가족이니까. 이상하다고는 생각해도 기욱이 잘못되거나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래 다 그런 줄 알았다.
박기욱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운오는 늘 기욱의 관심을 원했지만, 기욱은 한 번도 운오에게 제대로 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헌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모르는 척했다. 당시에는 불편했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그 자리에서 기욱의 그런 행동을 즐기고 있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시헌이었다. 시헌에게 박기욱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 기욱이 서진을 거칠게 탐하는 모습을 볼 때, 시헌은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박시헌은 박기욱의 거울과도 같았다. 기욱이 언젠가 서진을 원하게 될 거라는 걸, 어쩌면 시헌도 마음 한구석에서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애써 무시했던 내면이, 무의식이 저주스러웠다. 그저 현실을 회피하고 눈앞에 있는 것만을 보기에 급급했다. 그것이 얼마나 서진을 괴롭고, 힘든 곳에 몰아넣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좋아했던 스스로가 미웠다.
서진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과 사귀었을까를 생각하면 시헌에게 지난 시절은 지워 버리고 싶은 악몽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진과 즐거웠던 행동 하나하나가, 즐거웠던 일들이 독을 바른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저희 집은요, 참 이상해요.”
“나도 알아.”
“저희 형도 이상하고, 모든 게 이상해요. 근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요.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비정상인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모든 게 정상으로 보였어요. 이상했던 건 나 하나뿐이라고! 나만, 저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이라고…!! 근데 이제, 뭐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모르겠어요…!!”
정상도 없고 비정상도 없다. 시헌이 느낀 세상은 회색투성이였다. 누구 하나, 무엇 하나 올바른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서진과 헤어지고 난 뒤, 시헌의 삶 또한 회색으로 물들었다. 시헌은 망망대해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저 젓고 있는 노가 언젠가 저쪽으로 가면 육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필사적으로 저을 뿐이었다. 그게 언제이고, 도착한 곳이 정말 대륙인지 아니면 작은 무인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진도 모르고, 시헌도, 하물며 대화를 하는 정혁조차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살아 있다는 게 뭘까? 그런 복합적인 생각이 서진을 향해 울어 주는 우민에게 시헌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게 했다. 시헌은 그날 이후 서진을 위해 울어 준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진심으로 서진을 위해 운 적 따위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시헌이 운 것은 그저 스스로의 감정에 기인한 것일 뿐이었다. 서진을 원했던, 당시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지 서진이 어떤 기분으로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똑바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서진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단순한 사랑 놀음이 아니라. 강서진이라는 인물이 탄생하게 된 내면에 대해 알게 됐으면, 어쩌면 일이 커지기 전에 기욱과 서진의 관계를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다, 다 제 잘못이에요…….”
고개를 숙인 시헌의 눈물이 차마 다 마시지 못한 커피 위로 뚝뚝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시헌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너 한 교수랑 이야기해 본 적은 있냐?”
정혁의 물음에 시헌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래저래 뜬금없기는 시헌도 마찬가지였다. 우민과 인연이 있는 것은 서진이지 시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헌이 한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인턴 시절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형식적이고 가벼운 인사들이 전부였다. 어느새 날밤을 꼬박 새운 정혁이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시간 내줄 테니까 한 교수랑 이야기 좀 하고 와라.”
“할 얘기 없을 것 같은데요. 둘이 무슨 사이인지도 몰라요.”
“무슨 사이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건, 이미 둘 사이를 짐작하고 있다는 거 아냐?”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너무 가슴이 아픈데요.”
“됐고, 난 우리 애가 맞는 꼴 못 본다. 가서 왜 맞았는지 물어보고, 부당하게 맞은 거면 너도 한 대 때리고 와.”
“알았어요.”
시헌은 정혁의 말에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여튼 농담 수위 하나만큼은 어디 가서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 * *
일하고 있던 우민은 반사적으로 책상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 신경외과 한우민입니다. 말씀하세요.
― 아, 교수님! 저 진호인데요. 시헌이가 교수님 뵙고 싶다고 연락 좀 해 달라네요.
― 그 자식이랑 할 말 없다 끊어라.
― 그러지 마시고 제 얼굴 봐서라도 잠깐이라도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우민은 텀블러에 남아 있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의자 뒤에 몸을 기댔다.
― 너 요즘 GS 애들한테 뇌물 처먹었냐? 왜 이래?
― 하하, 그럴 리가요. 아, 시헌이가 교수님이 거절하면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요.
― 뭔데?
― 어, 뭐라 그랬지. 자기가 아니라고 했어요. 근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진호의 말에 우민은 텀블러의 철제 빨대 끝을 씹었다. 우민은 이미 진호가 전해 달라고 한 말의 뜻을 눈치챘다.
자기가 아니다. 그 말인즉슨, 서진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었다. 우민이 시헌을 때린 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 너 박시헌이 정말 그렇게 말한 거 맞아?
― 맞아요. 왜요?
― 박시헌, 올라오라고 해.
우민이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우민은 도어락이 걸린 문을 열어 줬다.
“안녕하세요.”
문틈으로 얼굴을 보인 시헌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들어와.”
막상 시헌을 만난 우민은 생각보다 깍듯한 시헌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야, 서진 때문에 눈이 돌아서 시헌을 때린 터라 시헌을 제대로 마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시헌은 우민의 안내를 받아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뭐 마실래?”
“물이면 돼요.”
“아, 그래.”
우민은 정수기에서 적당히 물을 따라 시헌에게 건넸다. 물을 마시는 시헌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민의 답답함이 섞여 불편한 침묵을 만들어 냈다. 시헌의 입가에는 아직도 우민이 때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뺨 또한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중이었다. 우민이 듣자 하니 자신이 간 뒤 시헌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자기 할 일을 계속했다고 했다.
보다 못한 간호사가 좀 쉬라고 하며 시헌을 따로 챙겨 줬다고 할 정도면 할 말 다 한 셈이었다. 생긴 건 인턴보다 못한 어린애처럼 생겨 놓고 독하기는 보통 독한 게 아니었다. 처음 뺨을 때린 우민은 설마 시헌이 그 체구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헌을 향해 발길질한 것도 내심은 쓰러지지 않는 시헌이 얄미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막상 시헌을 똑바로 마주한 우민은 차분하게 물을 마시는 시헌이 저런 작은 체구로 어떻게 서진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시헌 본인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잡아떼니, 우민의 머릿속은 역대 최고로 혼란스러웠다.
시헌은 반쯤 마신 물을 내려놓으며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뗐다.
“서진이랑, 한 교수님. 무슨 사이십니까?”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럼 서진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라도 알려 주세요.”
“야, 너 말하는 게 이상하다? 강서진! 네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저한테 말해도 몰라요.”
우민은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거짓말을 하는 시헌이 짜증이 났다. 하물며 반성의 기미조차 없다. 역시 박기욱의 동생이라 이건가? 다리를 꼰 우민의 언성이 올라갔다.
“강서진이 알고 내가 아는 시헌이 너밖에 더 있어? 너네 뭐야. 씨발 뭐냐고!! 어!”
“교수님, 서진이 좋아해요?”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럼 신경 꺼요.”
“하, 본심이 그거냐? 씨발, 내가 강서진 안 좋아하니까 니가 강서진 존나 패든 말든 상관없다 이거냐? 어?”
기가 막혔다. 우민은 그렇게 우는 서진을 앞에 두고도 시헌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이미 서진을 그렇게 만든 순간부터 인간 실격이었다.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면 그 지경이 될지 우민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언성이 올라간 우민에 시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뭐!! 씨발!”
“서진이 때렸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뭐긴 뭐야 말 그대로지! 너, 니가 강서진 안 때렸다고 변명하러 온 거 아니야?”
“…….”
우민의 말에 시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시헌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뭐가 엮였든 자신은 아니라고 말한 것뿐이지 때린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서진이 맞았다는 이야기에 우민을 보는 시헌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서, 서진이. 맞았어요?”
“야, 박기욱 동생. 너 나랑 말장난하는 거냐? 아니면 내 앞에서 연기하는 거냐?”
시헌과 이야기하면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우민의 예상과 달리 시헌을 앞에 둔 우민은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박기욱이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어도, 이 정도로 답답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민은 시헌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 뭔가를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강서진! 내가 손만 대도 잘못했다면서 정신 못 차리고 울었어. 일부러 안 보이는 데만 골라 팼고, 담뱃불까지 지졌잖아!! 그 자식, 집에서 울면서 뭐라 그랬는 줄 알아?”
“…….”
“시헌아….”
“아….”
시헌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우민은 시헌이 죄책감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것도 신경 끌까? 씨발, 너도 강서진이랑 똑같은데 지져 줄까?”
“…예요?”
“뭐가?”
“지, 진짜냐구요. 서진이…… 그, 모… 몸에 멍이라든지 담배…….”
시헌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민과 서진이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도, 차마 서진이 그런 꼴을 당해서 우민이 화가 나서 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우민은 난데없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기 시작하는 시헌에 당황했다.
“아놔, 씨발 처돌아 버리겠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야, 너 뭐야? 아니, 니네 뭐야?”
입을 다문 채 꾹꾹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는 시헌을 본 우민은 확신했다.
강서진과 박시헌 사이에는 필시 뭔가 있다.
강서진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박시헌이 아니다.
박시헌은 강서진을 때린 사람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라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썩어 곪았길래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걸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비단 시헌에게만 해당하는 사실은 아니었다. 서진의 그런 신호를 놓치고 있었던 우민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서로의 책임을 무작정 떠넘길 시기는 지났다.
“너네 둘이 사귄 건 맞지?”
“…….”
“씨발, 사귄 거 맞잖아!!”
박시헌, 우민은 시헌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얼굴 보고 일하는 이야기는 했지만, 일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우민이 박시헌이라는 존재를 박기욱보다 더 불편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서진이 힘들 때마다 서진의 입에서 시헌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박시헌에게 강서진은, 강서진에게 박시헌은 뭘까? 금방이라도 들고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질 것 같은 우민의 신경질에 시헌이 끝내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사귀었어요. 4년 정도, 사실은 제가 더 오래 짝사랑했는지도 몰라요.”
“들어나 보자.”
우민이 팔짱을 끼며 시헌을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서진과 과거의 연인 사이였다고 해서 서진의 몸에 난 자국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난 일,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과거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런데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시헌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우민은 처음과는 다른 의미로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너, 너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믿고 말고, 사실이에요.”
“씨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박기욱은 결혼……. 와이프가 강서진 동생……. 뭐야, 언제부터야? 너랑 강서진이랑 사귀기 전부터 그랬다며!”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민이 생각한 그림과 퍼즐 조각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퍼즐을 맞추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박기욱이 결혼을 한 것은 삼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강서진과 박시헌은 의대 시절에 사귈 때도 시헌에게 기욱과의 사실을 비밀로 하고 사귀었다.
여자 친구의 남동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 기욱이나, 자신을 집착하는 남자의 동생이자 동기와 사귄 서진도, 그 가운데 낀 시헌도 정상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씨발!!!”
우민이 주먹으로 소파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박기욱, 사람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면 그 와중에도 그렇게 태연하게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우민의 머릿속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시헌이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 올렸다. 시헌은 우민이 자신을 때린 이후, 서진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다.
“서진이는요?”
서진의 행방을 묻는 시헌의 질문에 우민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박기욱, 강서진. 우민이 끝내 얼굴을 가리던 양손을 치우며 연구실의 낮은 천장에 있는 조명을 올려다봤다. 조명의 불빛이 평소보다 더 눈이 부셨다. 오래갈 것도 없다. 시헌이 우민을 찾아오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이야기였다.
“강서진.”
“…….”
“내가 박기욱한테 보내 줬어.”
눈치가 보통이 아닌 박기욱이다. 자신의 말로 이미 어느 정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집안일이니까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조금이라도 믿었던 그 인간이 그런 식으로 서진을 괴롭힌 범인일 거라는 생각은 감히 해 본 적도 없었다.
“……내 잘못이야.”
* * *
이른 새벽, 서진은 입을 만한 옷가지를 따로 챙긴 뒤 편한 차림으로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멀리 라이트를 켜고 있는 기욱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세미나, 오늘부터 우민의 팀에서 일하기로 했던 기존의 스케줄대로라면 서진이 기욱과 함께 지방에 내려갈 일은 없었다.
기욱이 우민에게 어떻게 허락을 받아 자신을 빼돌렸는지는 몰라도 결국 레지던트 노예 신세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 가져온 정장들이 담긴 쇼핑백을 한 손에 쥔 서진이 굳게 닫혀 있는 기욱의 운전석 쪽 차창을 두드렸다. 차 문이 열리기 대신 유리창이 살짝 내려가더니 운전석에 앉은 기욱이 조수석 쪽으로 앉으라며 눈치를 줬다.
별일이래. 서진이 면허를 따고 하루가 멀다고 운전을 시키던 기욱이다. 하물며 일하고 온 기욱과 달리 서진은 본의 아니게 일찍 퇴근해 몇 시간이라도 자다 일어난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서진이 운전을 하는 게 기욱에게도 더 편한 일이었다.
아무렴 본인이 운전하겠다는데 서진은 굳이 자존심을 세워 가며 기욱의 자리를 빼앗을 이유 따위는 없었다. 만약 상대가 정말 모시고 있는 교수님이라면 모를까, 병원을 나온 지금 서진과 기욱의 관계는 단순 레지던트와 교수 사이의 애매한 관계였다. 애당초 서진과 기욱의 관계가 진짜 교수와 레지던트의 관계였다면 기욱이 이런 식으로 서진의 오피스텔 근처까지 마중 나올 일도 없었다.
서진이 운전석에 타 벨트를 매자 기욱이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원래부터 서로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침묵이 이어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집에 오기 전 근처 24시간 카페에서 산 아메리카노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피곤하면 바꿔요.”
“좀 있다.”
그렇게 말한 기욱은 그 자리에서 커피를 다시 한번 마시며 앞유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욱과 지방에 내려가는 차 안은 유례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안심을 했다. 서진은 커피를 마시며 운전에 집중하는 기욱을 흘끗거리며 옷 안쪽에 난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날 이후 서진의 몸에 난 흉터는 기욱에게 반항할 의지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족쇄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아무런 막힘없이 고속도로를 내려가는 와중에도 서진은 목적지의 호텔에 도착하면 기욱이 자신을 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욱에게 다리를 벌리는 일쯤이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기욱과의 섹스보다 싫은 것은 기욱의 폭력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서진은 기욱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날을 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서진이 해야 할 운전도 기욱이 직접 하고, 기욱의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푹 잤다. 호텔로 가서 일어날 일이 그 대가라고 한다면 뭐, 그럭저럭 수지가 맞지 않나? 스스로 그럴 생각을 할 정도로 서진은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었다.
대화 없이 계속되는 고속도로 운전에 서진은 담요를 덮고 금방 잠이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기욱도 피곤하긴 했던 모양인지 결국 휴게소에 도착해 서진과 운전대를 바꿨다. 조금 전까지 서진이 자고 있던 조수석에 누운 기욱이 의자를 더 뒤로 더 당겼다. 조수석에 눕기 전 서진이 덮고 있던 파란색 병원 담요를 무릎까지 덮은 기욱이 막 안전띠를 맨 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하아.”
거절하고, 싸울 기운조차 없다. 서진의 소원은 오늘 하루 기욱의 비위를 맞춰 주며 무탈하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서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기욱에게 건넸다. 서진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기욱이 하나 더 달라는 듯 서진을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차를 출발시킨 서진이 뒷좌석에 있는 정장이 담긴 쇼핑백으로 눈을 돌렸다.
“쇼핑백 안에 있어요.”
어차피 둘밖에 연락을 안 하는데,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기사 기욱을 알 수 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기욱이 서진의 쇼핑백 안에서 2G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내 기욱이 담요를 머리까지 눌러썼다. 담요 안에서 잠시 불빛이 나는가 싶더니 기욱도 피곤했던 모양인지 서진의 휴대폰을 구겨 넣고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 흘러내린 담요 위로 눈을 감으며 잠자리에 든 기욱의 얼굴이 보였다. 두툼한 입술에 빽빽하게 들어 속눈썹이며, 나이답지 않은 피부와 다부진 체격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만 보면 여전히 왜 그렇게 사람들이 목을 매는지 알 것만 같았다. 거기에 박기욱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까지 알고 있는 남자였다. 박기욱에게 사람이란 참으로 쉬운 존재였으나, 서진에게 박기욱은 너무나 어려운 사람이었다.
목적지의 호텔에 도착했다. 세미나는 초저녁에 시작해 저녁에 끝나고, 이후 기욱은 몇몇 관계자들과 호텔 내에서 식사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에 오겠다고 주최 측에 말을 해 놨던 상태였던 터라 금방 방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방 열쇠와 안내 팸플릿을 챙긴 서진은 로비 바깥에 있는 기욱을 불렀다. 기욱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서진의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서진이 방 열쇠와 팸플릿을 흔들었다.
“들어가요.”
“그래.”
마치 제 휴대폰인 것처럼, 기욱은 당당하게 서진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서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622호. 트윈룸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었다. 새로 지은 호텔인 듯 엘리베이터가 거의 무소음으로 올라갔다. 붕 뜬 머리를 긁적인 기욱이 거울 너머로 등을 돌리고 있는 서진을 바라봤다.
“한우민이랑 무슨 사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치미 떼지 마. 다 알아.”
몸을 돌린 기욱이 서진을 엘리베이터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기욱의 입에서 다 알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드물었다. 서진이 알고 있는 기욱은 신중하고, 또 신중한 사람이었다. 설령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게 박기욱이다. 서진이 기욱 몰래 시헌과 사귀었을 때도 그렇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기욱은 서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에 시헌과의 관계에 눈치를 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때는 자연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진실을 알고 기욱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에 대해 떠올려 보면 소름이 돋는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이 있었다.
그렇게 확실해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기욱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정말 뭔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갈 곳 없는 엘리베이터 벽에 허리까지 완전히 붙이자 띵, 하고 타이밍 좋게 6층에서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이 적막만 맴도는 복도에서 서진과 기욱은 동시에 복도를 바라봤다.
“일단 내려.”
서진의 팔을 붙잡은 기욱이 서진을 이끌고 622호를 찾았다. 문패를 확인하기 무섭게 서진의 팔을 놓으며 등을 철문 앞으로 떠밀었다. 문에 부딪힐 뻔했던 서진이 간신히 자세를 잡으며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기 무섭게 서진의 카드키를 빼앗아 불을 켠 기욱이 방을 둘러볼 것도 없이 거실과 침실 쪽에 있는 커튼이란 커튼은 전부 쳤다.
암막 커튼인지 덕분에 환했던 방은 순식간에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전등과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기는 했다. 뭔가 잘못됐다. 서진은 기욱이 우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설령 우민과 사귀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구해 준 오피스텔의 건너편에 우민이 산다는 것을 눈치채면 답이 없었다. 어쩌면 기욱은 그 사실까지 알고 말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시헌 때도 그랬잖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서진의 머릿속은 마치 진실을 말해서 혼이 나는 게 무서워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심리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마지막 안쪽 방의 커튼까지 다 친 기욱이 침실에 있는 소파에 걸터앉아 서진의 휴대폰을 침대 옆 선반 위에 대충 올려놓았다.
편한 사복 차림의 기욱이 다리를 살짝 벌리며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이리 와.”
한 발, 두 발. 거절할 것도 없이 서진의 몸은 자석처럼 기욱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머리가 거부해도, 정신을 차릴 때면 기욱에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스스로를 느낄 수가 있었다. 어느새 거실에서 기욱이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걸어왔다. 기욱은 거북이처럼 다가오는 서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한 걸음을 앞에 두고 서진의 허리를 확 잡아당겨 제 옆에 앉혔다. 갑작스럽게 기욱의 옆에 앉은 서진 때문인지 침대가 훅, 하고 아래로 꺼졌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어깨 위를 둘렀다.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두른 어깨에 서진의 몸이 움찔거리며 불편하게 떨렸다. 서진에게 어깨동무한 기욱의 손이 서진의 옷 안으로 들어가더니 흉터를 만지고 있었다.
한우민, 이상하게 강서진한테 친근할 때부터 알아는 봤다. 우민은 서진의 몸에 흉터를 만든 게 시헌이라고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렴 기욱의 알 바는 아니었다. 우민이 오해를 해 줘서 편한 건 우민이 아닌 기욱이었다.
“그만…… 해 주세요.”
서진은 노골적으로 흉터 부위를 문지르는 기욱의 손길에 눈물이 고이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섹스가 훨씬 나았다. 기욱의 손이 흉터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그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휴대폰 볼래?”
서진의 말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기욱은 한 손으로 서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다른 손을 뻗어 서진의 휴대폰을 가져왔다. 서진의 톡과 연락처, 대화창들을 무심하게 보여 주던 중 가장 최근에 우민과 한 톡을 보여 줬다. 일과 관련된 별거 아닌 톡이었다. 그러나 다른 톡과 달리 우민의 톡은 그게 다였다.
톡이 너무 짧다. 바로 그것이 기욱이 문제 삼는 것이었다. 레지던트와 교수, 사이가 나쁘거나 평범하면 개인 톡을 아예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욱이 알기로 우민과 서진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야 할 일이 한두 번은 있었고, 하물며 기욱이 마지막으로 서진의 휴대폰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봤을 때 있던 톡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말인즉슨 서진이 톡을 몇 번인가 나갔다 들어왔다는 증거였다. 강서진은 톡방을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내려 보면 이미 상대 쪽에서 나가고 대화 상대가 알 수 없으므로 표시된 톡방까지 나가지 않는 서진이 우민의 톡만 골라서 나갔다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강서진도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기욱은 그런 서진보다 훨씬 더 한 수 위였다.
“벼, 별 내용 아니잖아요.”
“별 내용 아니지. 근데 문자는 왜 지웠어?”
“문자 한 적 없는데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진짜… 윽….”
“했을 텐데.”
기욱의 손톱이 서진의 흉터를 깊게 눌렀다. 가슴 언저리가 아파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송곳으로 살을 뜯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서진을 침대 쪽으로 눕힌 뒤 한 손으로 어깨를 누르고, 허벅지로 몸을 누른 기욱이 멋대로 휴대폰의 통화 내역을 뒤졌다. 서진의 휴대폰에는 차마 지우지 못하고 있던 우민과의 문자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문자는 없었다.
“그게 그…….”
“변명하지 마.”
설령 강서진과 박시헌의 관계가 우민의 오해라고 해도, 그 사실을 우민이 알고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의심의 여지는 충분했다. 기욱이 침대에 누운 서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욱이 일부러 주최 측에 전화해서 일찍 올 거라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 침대에서 일으켰다.
“씻고 와.”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구요!!”
“너 박시헌이랑 다시 만나?”
박시헌, 그 이름이 나오자 서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필사적으로 제 허리를 안으며 그건 사실이 아님을 어필하는 서진에 기욱의 기다란 손가락이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
“흉터, 박시헌이 한 거로 알고 있던데.”
“무, 무슨 말이에요? 이걸 왜…….”
기욱과 약간 거리를 벌린 서진이 옷 위로 기욱이 만든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하면 그런 오해를 하는 걸까? 순간 서진은 머릿속으로 우민이 제집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나 우민의 일방적인 오해였다. 기욱이 강제로 서진을 침대에서 일으켜 등을 떠밀었다.
“씻고 와.”
“저는… 저는 모르는 일이예요!”
“강서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기욱은 등을 돌린 채 서진의 휴대전화를 멋대로 뒤적거렸다.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숙이는 기욱에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욕실로 향했다. 샤워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을 무렵 잠기지 않은 문틈으로 목욕 가운이 날아 들어왔다. 목욕 가운과 함께 5분을 더 주겠다는 기욱의 말이 떨어지고 난 뒤에서야 서진이 바쁘게 움직였다.
샤워라고 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옷을 벗고 물을 묻힌 것에 지나지 않은 서진은 가운을 여미며 기욱이 있는 침실로 다가갔다. 서진의 머리와 몸에서는 말리지 않은 물기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다른 일로 통화를 하고 있던 기욱이 서진을 보자마자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은 뒤 서진을 침대로 끌어당겼다.
서진의 위로 올라탄 기욱이 서진의 가운 끈을 푼 뒤 옅게 남은 흉터 부위를 핥았다. 등과 앞쪽에 남은 흉터는 그 흔적을 느낄 때마다 기욱이 떠올랐다.
“저, 저는 정말 아니에요! 모, 몰라요. 아악!”
기욱이 도망치려는 서진의 팔을 잡아 등 뒤로 올라탔다. 작정하고 온 기욱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를 때와 차이가 있다면 지금 서진은 기욱이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집을 부리는 것도 상대가 원하는 걸 알고 있어야 부릴 수 있었다.
기욱은 침대 위에서 떨고 있는 서진을 두고 호텔 방의 소파 위에 있는 서진의 옷이 담긴 쇼핑백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지난번 서진을 별장에 데리고 갔을 때 무턱대고 샀던 성인용품 중 한 개가 나왔다. 거의 다 버리긴 했지만,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은 차 안쪽에 숨겨 놨던 상태였다.
도대체 언제 챙겨 온 건지 알 수 없는 핑크색의 딜도에 서진이 깜짝 놀랐다. 기욱은 입고 있던 바지의 벨트를 풀어 한쪽에 던져 놓은 뒤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너 몇 번이나 가?”
“뭐, 뭘 하려고…… 그런 거…! 모르는 게. 다, 당연하잖아요!!”
기욱은 입고 있던 회색의 티셔츠를 벗어 적당히 꼬았다. 어차피 가져온 정장을 입고 갈 거니 옷 하나쯤은 버려도 상관없었다. 서진의 양쪽 팔을 잡아당긴 기욱은 서진이 반항할 틈도 없이 서진의 팔을 앞으로 묶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에 서진이 기욱의 몸을 발로 차며 침대 뒤쪽으로 물러났다. 갑작스럽게 차인 기욱이 약간 인상을 찌푸렸지만, 벽 안쪽으로 물러난 서진이 더 이상 뭘 할 수 있을 린 없었다. 서진의 검은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해요. 차라리 이러는 이유라도 말하라구요!!”
오늘의 기욱은 이상했다.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불만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이유를 명확히 하지 않은 기욱은 잔뜩 화가 난 기욱보다 더 무서웠다. 기욱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아래로 끌어당겼다.
“묻는 말에 대답은 나중에 해.”
“무슨…….”
“내가 말했지?”
“…….”
“내 말에 거부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농담 같아?”
정신이 없던 와중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기욱은 가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제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불길함에 본능적으로 서진은 침대 위를 기다시피 하며 기욱을 지나쳐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 서진을 두고 볼 리 없는 기욱이 재빨리 침실의 문을 닫은 뒤 서진을 막았다.
지방의 한 호텔, 이곳은 별장이 아니었다. 별장이 아니기에 침실 역시 안에서 문을 잠그고 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기욱이 애써 안에서 문을 잠그지 않은 이유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일부러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이었다.
도망을 쳐서 나온 곳에 천국은 없었다. 기욱의 옷에 의해 묶인 서진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침대로 끌고 들어왔다. 마침 선반 위에 두었던 서진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슬쩍 보니 우민에게서 온 전화였다.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을 엎은 뒤 서진의 다리를 강제로 벌렸다. 서진은 묶인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차라리 그냥 해요!! 하, 하라는 대로 다……. 뭐든 다 할 테니까 그냥 해요!”
진짜와 가짜의 감촉은 명확했다. 기욱에게 직접 당하는 섹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욱도 지치기 마련이었지만 도구는 말 그대로 정말 쾌락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기욱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다는 걸 서진은 지난번 별장에서 너무나 확실하게 경험을 했다. 기욱이 스위치를 올리자 여성용 딜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 진동이 서진의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서진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팔이 묶인 서진이 제 밑을 괴롭히는 기욱의 머리를 잡아 누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기욱은 그런 서진을 흘끗 본 채 다시 아래로 눈을 돌렸다. 젤을 묻힌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을 벌리며 순식간에 기욱의 두 손가락이 서진의 안에 자리를 잡았다.
“하으, 읏… 흑….”
“가만히 있어.”
“흐흑, 그냥. 해 주세요!”
“매달리지 마.”
손가락으로 서진이 느끼는 곳을 꾹꾹 누른 기욱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시간은 많았다. 서진의 허벅지를 더 벌린 기욱이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빨리하기 위해 젤을 발라 넣은 탓인지 질척거리는 소리가 더욱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평소라면 화가 나도 무조건 거침없는 섹스만 해 왔던 기욱이 이런 식으로 굴어 대니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서진의 안을 추삽질하던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귀두 끝을 살살 긁었다.
“잠깐… 아으읏… 허읏…!”
같은 남자이기도 함과 동시에 어렸을 때부터 서진을 봐 왔던 기욱은 서진이 어디를,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서진의 사소한 것까지 전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즈음에는 이런 몸으로 다른 사람에게 안긴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화부터 났다.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흔드는 강서진을 보는 건 자신 한 사람이면 족했다.
“흐, 으으으…….”
울컥, 결국 기욱의 손에서 서진이 사정을 했다. 서진의 허리가 들리며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풀썩 침대 위로 몸이 떨어졌다. 기욱은 손바닥에 흐르는 정액을 선반 옆에 있는 티슈를 꺼내 서진의 안에 넣었던 손가락과 함께 닦았다.
“좋았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 번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되지?”
기욱이 몸을 일으키려는 서진의 가슴을 누르며 서진의 한쪽 다리를 들어 딜도를 밀어 넣었다. 끝만 살짝 걸쳤던 것이 순식간에 안까지 들어오자 베개를 입에 문 서진은 소리를 지를 틈조차 없었다.
“아으윽…! 어윽! 빼, 빼 줘요!”
“아직 멀었잖아.”
“나는…!!”
반동으로 몸을 일으킨 서진이 기욱의 이마에 머리를 부딪쳤다. 서진의 안에는 여전히 딜도가 박혀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기욱을 노려봤다. 기욱은 서진에게 부딪힌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영문을 몰라 하며 다가오는 기욱에 서진은 묶인 손으로 기욱을 밀어내며 언성을 높였다.
“나, 나는…… 다, 당신 인형이 아니에요!”
섹스까지는 참을 수 있다. 팔을 묶는 것도 그래, 그게 기욱의 취향보다는 자신이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손을 묶거나 일방적으로 섹스를 하는 것과는 달랐다. 가짜를 쑤셔 넣고 사정을 하는 모습을 즐겁다는 듯이 보고 있는 기욱에게 서진은 그저 기욱의 즐거움을 위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푸, 풀어 줘요. 이런 건……. 아무리 누나를 위해 시작했던 일이라 해도 이,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 어윽!”
기욱의 주먹이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서진의 배를 강타했다. 강하게 때리지는 않았어도 몸이 앞으로 구겨질 만한 힘은 있었다. 서진이 팔로 맞은 부위를 막으며 기욱의 품에 안겼다. 기욱에게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지만 그럴수록 기욱은 서진을 더욱 꽉 껴안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자 기욱이 서진의 입술을 덮쳤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상대를 때리고도 그 상대와 태연하게 키스를 하고 싶은 걸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박기욱 같은 괴물이 생길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이 헐떡일 정도로 키스를 한 기욱이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넘겼다. 서진을 내려다보는 기욱의 시선에는 일말의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착각하지 마! 강서진.”
“뭐, 라구요?”
“네가 날 택한 게 아니야. 내가 널 택한 거야.”
그날,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인 서진은 분명 자신의 의지로 기욱에게 돈을 돌려줬다. 서진은 이 지독한 관계가, 단순히 서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그날 그 수표를 되돌려 주지 않아도, 강서진을 가질 방법은 많았다. 강서진이 박기욱을 고른 것이 아니라, 박기욱이 강서진을 선택한 것이었다. 기욱의 그 한마디에 서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그런 게 어디…….”
“그만둘 수 있을 거 같아? 반항도 오늘까지야.”
“살려 줘요….”
그동안의 서진은 그저 반항하는 재미가 있어서 내버려 뒀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으로 시작했던 서진의 반항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과해지고 있었다. 다음번에 서진이 반항을 한다면 자신의 손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위기의식이 들었다. 물론, 기욱은 그렇게 서진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손을 뻗은 기욱이 서랍 위에 올려 뒀던 담배와 라이터를 가지고 왔다.
“쇄골이랑 등 가지고는 감이 안 오나 보지.”
“아아아악!! 제발! 잘못했어요!”
“인형?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강서진.”
“제발, 하지 마세요!”
서진의 몸을 뒤로 눕힌 뒤 안쪽에 있는 바이브를 빼 옆으로 내던졌다. 발악하는 서진의 등 뒤로 탁탁, 라이터의 마찰음이 들렸다. 지포라이터에 기름이 별로 없는 모양인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간신히 불을 붙인 기욱이 담배 연기를 옆으로 내뱉었다.
“넌 내가 웃으라 그러면 웃고, 이렇게 다리 벌리라고 하면 그냥 말없이 벌리면 돼.”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잡아 침대에 눌렀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묻히는 가운데 금연실인 호텔 규정에 따라 기욱은 서둘러 담배를 껐다.
“아악, 아아으으…… 으읍!”
“입 다물어. 소리 내지 마.”
박기욱은 어떻게 하면 흉터가 적당히 남게 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짙은 담배 향 사이로 살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담뱃불을 완전히 끈 뒤 꽁초를 휴지에 감싸 침대 밑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하으… 으… 잘못했어요….”
뭐가 아픈 건지도 모르는 서진이 배게 시트 사이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우웅, 웅. 어딘가 끊기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기욱이 가져온 바이브의 진동 소리인 줄 알았으나 이내 기욱의 시선이 선반에 있는 휴대폰에 닿았다. 무음 상태인 서진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릴 이유가 없다. 당연하게 자신의 휴대폰을 집은 기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욱의 휴대폰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기욱이 준 서진의 2G폰에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 휴대폰은, 서진과 연락을 하기 위해서 기욱이 만들어 준 휴대폰이었다. 말인즉슨, 서진의 2G 휴대전화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기욱 외에 없었다. 그런 휴대폰에서 전화가 와? 기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2G폰을 가져와 저장되지 않은 전화를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 야! 강서진 너 지금 박기욱이랑…….
우민의 목소리에 기욱은 오래 들을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의 분리한 배터리를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서진은 기욱이 2G폰으로 우민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으으윽….”
빨갛게 부은 살이 침대 시트에 닿은 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서진 네가 아주 미쳤구나.”
“무슨…….”
“너 오늘 가만 안 둬.”
기욱은 배터리가 분리된 휴대폰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 * *
“허윽… 으읏… 아윽…! 흐… 아윽….”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작정하고 시작한 기욱은 서진의 안에 넣은 딜도를 거침없이 움직였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피스톤질에 서진은 금방이라도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기욱이 허공에 맴도는 서진의 팔을 잡고 안쪽 깊숙이 들어간 딜도를 꾹꾹 밀어 넣으며 움직였다.
“허으으윽… 아윽….”
기욱의 움직임에 서진의 허벅지와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뒤로 축 처졌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정한 후 조금 괜찮아지는 틈도 없이 기욱이 거침없이 서진의 안에서 움직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딜도가 미끄러지며 밖으로 빠졌다.
“제발….”
숨소리만 간신히 내뱉은 서진이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딜도를 만지는가 싶던 기욱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서진의 안으로 딜도를 밀어 넣었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서진의 안은 기욱이 밀어 넣는 딜도를 반항조차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어흐흑….”
“넣자마자 간 거야? 대단한데.”
“흐으윽… 했어요! 잘못했어요!”
“허벅지 똑바로 잡아.”
이미 자연스럽게 풀린 서진의 손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렇게 다시 벌어진 서진의 다리 사이로 기욱의 손에 있는 딜도가 들어왔다. 기욱에게 별장에서 이틀 밤을 내리 당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기욱이 본능적으로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잡으려는 서진의 손을 탁, 하고 쳐 냈다.
“허으, 으흐흑…….”
“앉아. 똑바로.”
기욱이 서진을 제 무릎 사이로 앉혔다. 서진은 안에 있는 딜도 때문에 계속해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허리를 거침없이 아래쪽으로 눌렀다.
“하아악! 그만, 그만…!”
허벅지 아래쪽으로 내려간 기욱이 안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밑으로 진동 소리가 나며 서진의 안을 조금씩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서진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많이 가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기욱이 딜도를 빼자 서진의 몸은 마치 물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았다. 장난감은 결국 장난감일 뿐이었다.
착각이었다. 처음부터 기욱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생각에 허무함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20살 무렵으로 돌아간다면 박기욱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중학교 시절, 가출했다며 찾아온 그 반지하방 시절이라면 어땠을까? 그 시절 자신의 선택이 미치도록 저주스러웠다.
과거는,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허공에 맴돌던 팔을 뻗어 기욱의 입술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 번도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던 서진의 행동에 기욱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기욱이 말없이 입술 근처로 들어온 서진의 손가락을 핥았다.
“말….”
“…….”
“잘 들을게요…….”
기욱이 딜도를 빼내고 몸에 힘을 풀었다. 평소라면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서진이 기욱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제 팔로 허벅지를 붙잡아 다리를 벌렸다. 기욱이 땀이 찬 앞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기며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서진이 기욱의 페니스를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쌓일 만큼 쌓였던 기욱은 거침없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 흔들었다.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서진은 그런 기욱의 행동에 일말의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기욱의 사정에 힘이 풀린 서진의 팔이 침대 아래쪽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 * *
아침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시간은 오후가 뉘엿뉘엿 지나가고 있었다. 쓰러지듯 누웠지만, 서진은 잠조차 오지 않았다. 호텔의 침실은 거친 정사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으며, 서진의 몸에는 기욱이 만든 화상 자국과 상처들이 있었으며, 입가에는 기욱이 싸 놓은 정액이 눌어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침대에 앉아 있는 서진의 얼굴에는 그 어떤 변화조차 없었다.
서진은 반쯤 죽은 눈을 하며 암막 커튼 사이로 나오는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샤워하고 나온 기욱이 침실을 대충 치울 때까지도 서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참 만에 물티슈를 가져온 기욱이 서진이 앉아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기욱이 강제로 서진의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서진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하아.”
한숨을 쉰 기욱이 물티슈로 서진의 입과 허벅지 안쪽을 적당히 닦아 줬다. 그러나 상태를 보아하니 샤워를 한 번 더 하는 쪽이 빠를 것 같았다.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린 기욱이 컵에 담긴 물과 약을 서진의 앞으로 가져왔다. 정체불명의 약을 본 서진이 흠짓, 놀랐다.
“입 벌려.”
기욱의 말에 서진이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도 기운이 없는 모양인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입안에 물을 머금은 기욱이 반강제로 서진에게 알약을 넘겼다.
“크윽… 캑캑… 무슨 약…… 이에요?”
간신히 목에 걸리는 신세를 면한 서진이 물이 부족한 모양인지 기욱이 들고 있는 컵을 빼앗아 서둘러 물을 마셨다. 사실 굳이 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서진은 목이 멨다. 서진의 등에 화상연고를 바른 기욱은 정장의 마이를 걸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서진이 그런 기욱의 옷자락을 살짝 스쳤다.
이런 일을 당했지만, 어쨌든 서진은 기욱의 보조로 온 것이었다. 허공에 애매하게 뜬 서진의 손을 붙잡아 이불 위로 올려 둔 기욱이 등을 돌렸다.
“발표 혼자 할 테니까 있어.”
“도망… 치면 어떻게 해요?”
입가에 묻은 물을 손등으로 닦은 서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긴 별장이 아니라 호텔이다. 기욱은 늘 서진이 도망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옆에 두는 편이 훨씬 안전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으라는 기욱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호텔은 펜션이 아니었고, 기욱이 가고 서진이 홀로 남아 있는 침실의 문은 안에서 쉽게 여닫을 수 있었다. 그런 서진의 질문에 기욱은 넥타이를 바로 맸다.
“너 못 나가.”
기욱은 서진이 보란 듯이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실을 나간 모양인지 카드키 도어락의 벨 소리가 들렸다. 기욱이 나가고 서진은 한동안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침대 밑에 접착제를 붙여 놓은 것만 같았다. 온몸 안 아픈 구석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고개를 돌려 기욱이 나간, 닫혀 있는 문을 바라봤다. 서진은 용기를 내서 침대에서 발을 내디뎠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한 걸음도 채 걷지 못하며 침대를 붙잡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니, 밀려드는 것은 그런 고통이 아니었다.
“우윽…!”
갑작스럽게 일어선 탓에 서진의 안에 있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헛구역질했지만,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 탓에 나오는 것이 없었다. 연신 구역질을 하며 기욱이 두고 간 컵에 남아 있는 물을 전부 비웠다. 바닥을 질질 기다시피 하며 문 앞으로 다가간 서진이 이내 문고리를 앞에 두고 주저앉았다.
“윽….”
머리가 어지러웠다. 문고리를 집으려 할 때마다 엉뚱한 곳을 헛손질하는 기분이었다. 서진의 머릿속 한구석에 기욱이 강제로 먹인 약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일어섰다 주저앉기를 반복한 서진이 침실 안 선반이란 선반은 전부 뒤졌지만, 약은 나오지 않았다.
바닥에 앉은 채 침대 매트에 얼굴을 묻은 서진이 숨을 골랐다. 박기욱이다. 이상한 것을 먹였을 리는 없지만, 점점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약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기욱이 벽에 걸어 둔 가운을 걸친 서진이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아…….”
만질 수가 없다. 분명 당장이라도 열고 나갈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두려움이 서진을 문에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문 앞에 주저앉은 서진이 멍하니 좁은 침실을 둘러봤다.
‘너 못 나가.’
기욱이 방을 나서기 전 했던 말이 서진은 절실히 실감이 됐다. 잠기지 않은 문이 있어도, 서진은 나갈 수가 없었다.
* * *
철컥, 한참 만에 방문이 열렸다. 저녁 식사를 거절한 기욱은 문을 열자마자 인형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서진의 팔을 붙잡아 올렸다. 기욱의 손에 서진의 몸이 힘없이 들렸다. 서진을 침대에 내던진 기욱이 넥타이를 풀고 정장 마이를 한쪽에 걸어 뒀다. 소매에 있는 단추를 풀어 소매를 가볍게 접었다.
“나가서 먹긴 그렇고, 룸서비스로 해야겠군. 강서진, 정신 차려.”
기욱이 멍하니 있는 서진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사람을 송장 취급이나 하고, 기욱이 들어오자 서진은 기다렸다는 듯 뺨을 치는 기욱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짓 했어요!”
“뭔 소리야?”
“나한테 무슨, 무슨 짓 했냐구요! 야, 약! 대체 뭘 먹인 거예요!!”
“네 탓을 나한테 돌리지 마.”
“당신이, 당신이 그런 걸 먹이니까 내가……!!”
서진의 손을 놓은 기욱이 거실 쪽으로 나가더니 이내 뭔가를 휙, 하고 내던졌다. 기욱이 서진에게 건넨 것은 약국에서 흔히 구매할 수 있는 진통제였다. 진통제 두 알이 빠져 있는 것을 본 서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았다.
거짓말이다. 진통제만으로는 그런,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기욱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서진이 느낀 기분은 낯설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인훈에게, 그리고 의대생 시절 남학생들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먹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20살 무렵에도 그런 경험을 한 번인가 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서진은 그 느낌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마약성 약물을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게 진통제였다고?
“거짓말. 나, 날 속이려는 거죠? 내가, 그럼 나는 어째서…….”
약이 담긴 상자를 든 서진이 혼란 속에 머리를 싸맸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진통제 상자를 선반으로 옮긴 뒤 서진의 입술을 덮쳤다. 만족할 만큼 서진의 입술을 탐한 기욱이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타액을 손등으로 닦았다.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 이미 이전에 마약에 대한 경험이 있는 서진은 평범한 진통제를 저도 모르는 사이 마약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진도 스스로도 그런 심리에 넘어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눈치였다. 기욱은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룸서비스, 뭐 먹을까?”
서진의 몸에 있는 힘이 또다시 풀렸다.
결국,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박기욱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 *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왔다. 침실로 들어오기 무섭게 말하지 않아도 입고 있던 옷을 벗은 서진이 기욱의 페니스를 물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정할 것 같은 기욱이 서진을 옆으로 밀어냈다. 기욱의 휴대폰 너머에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직도 출발 안 했어?
― 이제, 슬슬 갈 거야. 11시쯤 도착할 것 같은데.
― 그래? 서진이는? 아침부터 전화도 안 받더라. 자기랑 있어서 걱정은 안 드는데.
― 꺼진 거 깜박하고 있었나 봐. 이따 차 안에서 충전시켜 놓으라고 할게.
― 한 교수님이 서진이 한참 찾더라고, 잘 있지? 서진이?
― 자기가 보내 놓고 오지랖은.
― 큭큭, 내 말이. 아, 나 일해야 하니까 끊을게. 이따 병원에서 보자.
기욱이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기욱의 눈치를 본 서진이 다시 다가와 기욱의 페니스를 열심히 입안에 머금었다. 처음 펠라를 알려 줬을 때 헛구역질을 하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서진은 정말 많이 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진작 이렇게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걸. 서진의 그 자존심을 꺾기란 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린 기욱이 엄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페니스를 핥던 것에서 손가락으로 바뀌었을 뿐 서진은 혀를 이용해 기욱의 엄지를 부드럽게 감쌌다.
“한 교수가 2G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전화.”
기욱의 손을 붙잡던 서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전화했으니까.”
그렇게 우민이 연락할 줄은 몰랐다. 전화라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기욱이 샤워를 하고 나와 덜 마른 서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펜션에서…….”
혼이 날까 봐 무서워 눈치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기욱을 곁눈질한 서진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살려 달라고. 전화했어요. 잘못했어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던 줄은 알고 있나 보지.”
기욱이 서진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곧장 자신의 페니스를 안으로 넣었다. 시간이 좀 지났다고 해도, 서진은 인상을 좀 구길 뿐 기욱의 페니스를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기욱의 페니스를 넣은 서진은 애써 기욱이 말을 하지 않아도 멋대로 허리를 흔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흐으, 아응….”
“강서진 좋아?”
“윽, 아흑… 좋아요.”
“다 말해. 한우민이랑 어떻게 된 건지 다.”
허리를 움직이는 서진을 눕힌 뒤 위로 올라탄 기욱이 서진의 안에서 페니스를 잠시 빼냈다. 서진의 시선은 기욱의 다리 사이에 있는 두툼한 페니스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박기욱이 거칠게 안아 줄 때면 서진은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었다.
쾌락과 폭력, 그리고 반복적인 학습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 서진은 기욱밖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고 있었다. 다리를 벌린 서진이 애가 타 기욱에게 매달렸다.
“주세요… 넣어 주세요.”
“인형이 어쨌다고?”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흑… 아읏…….”
“너는 누구 거지?”
“저는… 하, 읏! 시키는 대로, 다… 다 하는…… 당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으흐….”
서진이 허벅지와 몸을 비틀며 기욱의 페니스에 자신의 페니스를 비볐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옆으로 벌렸다.
“한우민이랑 무슨 일 있었는지 다 말해.”
“네네, 하으, 으. 말할게요!”
“안 그러면 좆이고 뭐고 없는 거야.”
기욱의 손등이 서진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서진은 그런 기욱의 말을 반쯤 흘리며 필사적으로 기욱에게 안겼다.
* * *
기욱이 병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이 좀 넘을 무렵이었다. 최소한의 불만 켜진 병원 로비에서 먼저 마중 나온 서윤이 서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서진아, 잘 다녀왔어?”
“어, 응.”
“뭐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자다 일어나서 그래.”
서진은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기욱을 흘끗댔다. 서진과 인사가 끝난 서윤이 기욱에게 재빠르게 달라붙었다. 언제 사 온 건지 기욱이 지방에 내려갔다 온 기념이라며 빵 세트를 서윤에게 내밀었다.
“서진이도 하나 먹어.”
“난 아까 먹었어.”
서진은 빵을 먹는 서윤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입맛이 별로 없었다. 서진은 혹시 제가 빵을 거절한 것에 대해 기욱이 기분이 상하진 않을까 괜히 눈치를 살폈다. 박기욱과 있으면 눈치를 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서윤을 보낸 서진과 기욱은 짐 정리를 할 겸 신경외과 의국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당직을 서고 있던 의사 한두 명이 기욱과 서진을 보더니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진은 자신을 대신해 당직을 서고 있는 연태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뭐라도 사 줘야 할 것 같았다.
대충 볼일을 보고 나가려던 찰나 의국 안으로 수술복 차림의 우민이 들어왔다. 어쩐지 의국이 소란스러워 들어온 것이었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안녕하세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우민이 서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전화도 안 받고, 남들이 보기엔 조금 피곤할 정도지만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서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우민은 구석에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있었던 환자에 대한 차트를 보고 떠들고 있는 박기욱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슨 일…….”
“이런 씨발 새끼가!!”
기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민이 기욱의 얼굴을 있는 힘껏 주먹으로 내쳤다. 정말 있는 힘껏 쳤기에 기욱의 몸은 휘청거리며 옆쪽에 있는 선반에 부딪혔다. 구석에서 몰래 졸고 있던 규건과 기욱과 대화를 하고 있던 연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진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욱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우민을 노려봤다.
“아, 미치겠네. 교수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민이 외상센터에서 시헌을 때렸다는 소식은 규건도 진호를 통해 건너 들었다. 한우민이 박시헌을 때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었지만, 박시헌 다음에는 박기욱이라니 도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씨발, 네가 인간이야? 사람 새끼냐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도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너 이 자식…!!”
제 잘못이다. 서진과 이야기를 해 보라며 서진을 그런 곳으로 보낸 건 자신이다. 호텔에서 서진이 당했을 일을 상상하면 가슴이 메어 왔다. 미칠 것만 같았다. 우민이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서진이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허공에 반쯤 뜬 우민의 손이 멈췄다.
“너, 야. 비켜.”
“모, 못 비켜요.”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줄 알아? 야, 강서진!!”
영문을 몰라 하는 의사들에 뒤쪽에 있는 기욱이 규건에게 눈빛으로 적당히 눈치를 줬다. 규건이 다른 의사들을 전부 이끌고 서둘러 의국을 나왔다. 의국 안에는 순식간에 세 사람만 남았다.
“그, 그만. 그만해요! 때릴 것까지는 없잖아요!!”
“진심이야? 씨발, 강서진 나 똑바로 봐. 너 니가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지 보라고!!”
기욱을 때리려던 주먹이 아래로 내려가 서진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쇄골 안쪽으로 기욱에게 당한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흉터를 본 우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친 것 같다.
“잘못… 했어요. 제가 잘못해, 했으니까 그만해요!! 그만 때리라구요!”
우민이 손을 놓자 팔로 얼굴을 가린 서진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비켜.”
“모, 못 비켜요!!”
“씨발 미쳤나고 너!! 강서진 너, 너 이건 아니잖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미친 사람이 이 둘이 아니라 자신이었던 건 아닐까? 우민은 이런 와중에도 기욱을 옹호하는 서진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당해야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을 때리려는 우민을 막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안다. 알지만, 당장 우민에게 붙는다고 해서 방법이 생기는 것 또한 아니었다.
“뭘 할 수 있는데요.”
“…….”
아아, 또 이런 상황에서. 박시헌 같은 소리를 하는 스스로가 참 미웠다. 서진의 말에 우민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서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의 관계를 알았다고 해서 제삼자인 우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길!!”
결국, 우민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박차고 의국을 나갔다. 우민이 나가기 무섭게 우르르 들어온 의사들과 규건이 다급하게 기욱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한 교수님 왜 저러는 거예요. 요즘?”
시헌의 소문을 들은 모양인지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 * *
정규 스케줄을 마친 우민은 퇴근 대신 외상센터를 찾았다. 좁은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 더미에 파묻혀 차트를 보고 있는 정혁이 있었다. 정혁은 노크하지도 않고 들어온 우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무슨 일입니까?”
“커피 한 잔만 주시죠.”
아무리 그래도 같은 교수끼리,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주제에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정혁은 적당히 앉으라며 손짓을 한 뒤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정혁은 기욱이 알아봐 준 캡슐 커피를 꺼내 뜯었다. 커피가 내려가는 와중에 정혁은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우민을 흘끗댔다.
“한 교수님, 박기욱네 집안이랑 무슨 원수지셨습니까? 요즘 소문이 심상찮은데.”
“제가 박기욱 때린 거요?”
“숨김이 없으시네.”
“그 개자식은 맡아도 싸거든요.”
정혁이 서류를 치우며 우민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종이컵에 캡슐 커피라니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지만, 우민이 이렇게 내려온 건 고작 커피 한 잔 얻어먹기 위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정혁도 우민의 앞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박시헌 다음에는 박기욱, 병원 내에서 우민이 그쪽 집안과 원수를 졌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쫙 퍼졌다. 시헌과 서진이 있었던 일을 알게 된 정혁은 우민이 기욱을 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거기서 진짜 폭력을 휘두른 건 예상 밖의 일이지만 말이다.
우민이 정혁에게 찾아온 건 박기욱 때문에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좌천입니까?”
“하아, 뭐. 그런 셈이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리고 이사장 집안의 같은 형제들을 건드렸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 오후 징계위원회까지 다녀온 데다 기욱의 부인인 서윤은 우민을 아는 척조차 하지 않은 채 지나갔다. 들리는 말로는 큰누나인 박하연에게 강서윤이 말을 좀 했다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우민은 그런 정치 싸움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일단 첫 번째 피해자인 시헌의 선처와 기욱이 입을 다무는 거로 인해서 일이 커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우민은 반쯤 마신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종이컵에 담기에는 역시나 맛이 너무 좋았다.
“헬퍼치고는 고급 인력이지만요.”
“하, 우리 한 교수님 자신감이 넘치시네.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한 사람 중에 오래 버틴 사람이 없는데 어쩌지. 우리 그렇게 만만한 데 아닌데. 적당히 시간 때우시다가 올라갈 거면 유 선생으로 바꿀 겁니다.”
“지금 저 무시하시는 겁니까?”
“무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외상 환자는 또 다르거든요. 전 제가 본 것만 믿는 주의라서. 그리고 이거 한 교수 스케줄.”
정혁이 책상 밑에 깔렸던 A4용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진호를 보내 놓고,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우민은 정혁이 준 스케줄표에 인상을 구겼다.
“한진호 이 자식……. 어떤지 병원에서 안 보이는 날이 없더구먼.”
정혁은 남아 있는 커피를 홀짝였다.
“부담이시면 안 하셔도 뭐라 하는 사람 없습니다. 간호사 선생님도 그만두는 거 안 말려요. 여긴.”
“임 교수님은 사람 붙잡는 법 좀 배워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니 이직률이 그렇게 높지.”
우민은 가운 가슴에 끼워진 펜을 꺼내 뭔가를 쓱쓱 그렸다. 이번 주를 포함해 우민의 정규 스케줄이었다. 언제까지 외상센터에 머물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우민이라 해도 인수인계를 하고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우민은 검은 펜으로 빼곡하게 글씨가 적인 종이를 정혁에게 건넸다.
“제 스케줄입니다. 그 외에는 뭐……. 삶아 먹든 구워 먹든 알아서 하시죠. 선배님.”
우민이 졌다는 식으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같은 교수라고 해도 우민이 인턴 시절 정혁은 이미 펠로우 과정을 밟고 있었다. 하물며 같은 H대 출신이니, 우민에게 정혁은 J대에서는 보기 드문 H대 대선배급이었다. 커피를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 발밑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 뒤 자리에 앉은 정혁이 안쪽 창고를 손가락질했다.
“안쪽에 창고 하나 있는데 편하게 쓰세요.”
“나도 내 연구실 있는데 뭐 하러…….”
슬슬 할 일을 하러 가야 했던 우민이 일어나더니 정혁의 시선이 닿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창고에는 먼지와 짐들이 엉망으로 쌓여 있었다. 우민은 컴퓨터를 하는 정혁을 노려봤다.
“인간아 정리 좀 해라.”
창고의 불을 끈 우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